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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슈렉>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전략 [3]

원더키드, 마침내 마법을 훔치다 <슈렉>의 영주 파콰드는 악당이다. 게다가 키가 아주 작고 얼굴은 큰데 매우 못생겼다. <슈렉> 시사회가 열린 직후부터 파콰드의 모델이 디즈니 회장 마이클 아이스너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미국의 점잖은 언론들도 이를 앞다퉈 보도했다. 아이스너를 골려먹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미국 언론의 단정적인 태도가 좀 의아스럽다. 물론 <슈렉>이 흉한 외모를 찬미하는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면서도, 유독 파콰드의 작은 키만은 계속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게 수상쩍긴 하지만. 어쨌거나 미국 언론의 호들갑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슈렉>의 제작자이며 드림웍스의 실질적인 리더 제프리 카첸버그와 마이클 아이스너의 30년 묵은 애증관계를 목격해왔다. 1999년 5월에는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상대로 낸 2억5천만달러(추정액)짜리 소송에서 승소한 일도 있다. 무엇보다 눈부신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추앙되다가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디즈니를 뛰쳐나온 카첸버그로선 디즈니와 아이스너를 제압하려는 욕망을 떨치기 힘들 만했다. 카첸버그는 갖가지 인터뷰에서 파콰드와 아이스너의 닮은꼴에 대해선 “난센스”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드림웍스)에게 없는 것은 디즈니가 종종 이뤄온 흥행기록 경신”이라며 날선 경쟁심을 감추지 않았다. <슈렉>은 카첸버그에게 드림웍스 7년의 어떤 성과보다 큰 기쁨을 준 선물이 될 만하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도 영광이지만, 경쟁작인 디즈니의 <아틀란티스>가 1986년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기록하는 동안 <슈렉>은 흥행수익 2억달러를 넘기면서 올 여름 박스오피스 챔피언 자리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카첸버그는 자신의 주전공인 애니메이션으로, 도저히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애니메이션 왕국을 함락시킨 셈이다. 물론 승부는 단판이 아니며 디즈니는 재역전을 이룰 만한 내공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1998년 <개미>가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의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의심을 샀고 지난해 <엘도라도>가 실패하면서 체면을 구겼던 카첸버그로선 이번의 역전승은 그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간지 <인더스터리 스탠더드>는 ‘미키 마우스의 최악의 악몽’이라는 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카첸버그는 디즈니와 갈라선 뒤부터 이 마법의 왕국에서 마법을 훔치려고 애써왔다. <슈렉>으로 마침내 그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카첸버그&아이스너, 세기의 복식조가 되기까지 1950년 뉴욕생인 제프리 카첸버그는 영악한 소년이었다. 뉴욕 시장 후보로 나선 공화당 정객 존 린제이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게 14살 때였으니 세속적 성공에 놀랄 만큼 일찍 눈뜬 셈이다. 카첸버그는 지속적으로 린제이 진영에 참여했고 선거자금을 관리할 정도로 린제이의 신임을 얻었지만, 린제이가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닉슨에게 패하자 그는 현명하게도 쇼비즈니스로 눈을 돌렸다. 카첸버그는 처음엔 에이전트가 될 생각으로 인터내셔널 페이머스 에이전시에 잠시 들어갔다가 1년 만에 관두고 24살 때 파라마운트의 젊은 사장 배리 딜러의 조수로 들어갔다. 2년 뒤 배리 딜러는 또다른 젊은 인재 마이클 아이스너를 ABC에서 스카우트했다. 할리우드를 떠들썩하게 만들 두 수재의 파트너십은 이렇게 시작됐다. 배리 딜러의 지휘 아래 76년 파라마운트는 1년 만에 흥행실적 1위의 스튜디오가 됐고, 카첸버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하며 마케팅 담당, 텔레비전 담당을 거쳤다. 마침내 <스타트렉> 시리즈의 영화화 임무가 그에게 떨어졌다. <클로스 인카운터> <스타워즈> 등 다른 스튜디오들의 성공적인 SF에 파라마운트가 자극받은 것이다. 카첸버그는 최초 예산 1800만달러를 들고 고집세고 늙은 배우들, 특수효과 경험이 전혀 없는 감독 로버트 와이즈와 악전고투를 벌여가며 스케줄대로 제작을 마쳤다. 그러나 제작비는 4500만달러로 치솟았다. 당시 평균제작비가 1천만달러 정도였으니 경영 재난이 우려됐지만, <스타트렉>은 8천만달러를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둬 원더키드 카첸버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스2>의 실패 이후 제작담당 이사 돈 심슨이 밀려나자 82년 카첸버그가 어린 나이에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일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아이스너의 마스터플랜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둘의 파트너십은 <레이더스> <사관과 신사> 등을 잇따라 성공시켜 파라마운트의 기세를 80년대 초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84년 배리 딜러가 갑자기 20세기폭스로 자리를 옮기자, 아이스너는 디즈니 회장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였고 망설임 없이 34살에 불과한 카첸버그를 디즈니의 스튜디오 책임자로 기용했다. 당시 디즈니는 쇠락해가는 왕국이었다. 실적에서 메이저 중 말석을 못 면했고, 테마파크의 수입도 뚝 떨어져 기업사냥꾼들의 인수합병 메뉴 앞머리에 오르는 신세가 됐다. 당시 디즈니엔 디즈니 순수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전통파들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디즈니 테마파크에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의 테마를 들여오자 “월트라면 그런 꼭두각시를 빌리는 짓은 하지 않으며 오히려 캐릭터를 창조해낼 것”이라며 반발할 정도로 66년에 사망한 창업주 월트 디즈니에의 향수에만 빠져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이란 책에서 한 직원은 “외부인이 들어와 우리의 뺨이라도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들의 뺨을 때려 정신들게 한 외부인이 다름 아닌 아이스너와 카첸버그였다. 디즈니 재건작전, 200% 성공 카첸버그 같은 사람을 상사로 모시고 사는 일은 누구라도 선뜻 반기기 힘들 것이다. 아침 6시에 출근하기, 일요일에도 일하기, 툭하면 회의하기, 없던 일 만들어내기가 그의 습관이요 일과였다. 디즈니영화가 개봉하면 직원들은 전국의 상영관을 돌아다니며 로비 장식까지 점검해야 했다. 디즈니의 신화와 자존심을 복원한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그는 존경만 하기엔 너무 ‘위협적인’인물이었다. <…디즈니의 비밀>에 따르면 94년 그의 사임이 알려지자 “사내의 많은 이들은 카첸버그와의 이별을 마치 자전거에서 연습용 바퀴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임을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다른 사람들에겐 그는 “없으면 불편한 자연의 힘”이 됐다. 그를 따르는 수십명의 직원들은 그와 함께 드림웍스로 옮겨갔고, 남은 직원들도 몸값이 뛰어오르는 망외의 기쁨을 누렸다. 이 덕에 카첸버그는 잠시나마 디즈니 애니메이터들 사이에서 ‘성자 제프리’로 불렸다. 카첸버그의 최대 업적은 무엇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소생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인어공주>를 비롯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으로 이어지는 히트 행진은 추억의 레퍼토리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당대의 팝 아이콘이란 명예를 돌려주었으며, 디즈니는 아이스너-카첸버그 체제가 들어선 지 10년 만에 최고의 메이저 자리에 올랐다. 디즈니의 전통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변화한 대중의 감각을 민감하게 반영한 까닭이다. 좀더 자연스럽고 빨라진 동작의 캐릭터들엔 X세대의 발칙함이 가미됐고, 흥겹고 모던한 음악과 굽이치는 이야기의 재미는 어른들까지 매혹시켰다. <가디언>의 앤드루 풀버는 <제시카와 로저 래빗>(1988)이 카첸버그 이력의 분기점이라고 말했다. 음모가 판치는 이야기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결합하면서도 결국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판타지를 찬미하는 이 획기적인 영화는 애초 예산을 두배나 초과하는 고투 끝에 완성됐다. 이 일을 통해 카첸버그는 자신의 일, 특히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의 구상을 처음부터 싫어했던 아이스너는 카첸버그와 “미친 듯한 언쟁”을 수차례 벌였고, 이 세기의 복식조에 심각한 이견이 있음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외적으로 두 사람의 디즈니 재건작전은 완벽한 성공 가도를 달려갔다. 특히 <라이온 킹>(1994)은 미국 박스오피스에서만 3억12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려 카첸버그 이력의 정점을 이뤘다. 카첸버그는 실사영화에서도 거의 실패를 몰랐다. <귀여운 여인> <시스터 액트>는 저렴한 제작비에다 발랄한 컨셉으로 모두 극장수익 1억달러를 훌쩍 넘겼으며, 반디즈니적인 영화 <펄프 픽션>에까지 손대 칸 황금종려상과 흥행 대박이라는 믿기 힘든 성과를 낚아올렸다(미라맥스와 디즈니 자회사 터치스톤이 공동제작한 <펄프픽션>은 카첸버그로서도 선뜻 응하기 힘든 프로젝트였다. 미라맥스의 와인스타인 형제가 이 프로젝트를 설명했을 때, 카첸버그는 “20분 동안 웃었다”고 한다). ‘디즈니’를 벗어나, ‘디즈니’에 맞서다 1994년 10월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나와 최고의 흥행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음반업계의 거두 데이비드 게펜과 자타공인의 ‘드림팀’을 구성 드림웍스를 창립했다. 카첸버그가 디즈니를 떠난 이유는 아이스너 회장의 암묵적 불신임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담당 사장이던 넘버2 프랭크 웰스가 헬기 사고로 사망했는데도, 아이스너는 넘버3 카첸버그를 승진시키지 않고 자신이 웰스의 자리를 접수한 것이다. 19년의 파트너십이었지만 카첸버그가 아이스너가 더이상 다루기 힘든 거물로 성장한 까닭으로 관측됐다. 결국 넘버2와 3을 한꺼번에 잃은 아이스너가 충격으로 심장질환을 앓다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후일담도 있다. 카첸버그는 제작수입의 2%를 보너스로 준다는 약정 불이행을 근거로 디즈니를 고소해 아이스너의 상처를 깊게 했다. <엘도라도>를 빼면 드림웍스에서 카첸버그가 제작한 <개미> <이집트 왕자> <치킨 런>은 일정한 성공을 거뒀지만 디즈니 시절의 위업에 비하면 아무래도 왜소했다. 드림웍스의 <딥 임팩트>가 디즈니의 <아마겟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먼저 개봉했다는 의심을 받았는데, 이 패턴은 <개미>와 <벅스 라이프>에서도 반복됐다. 디즈니가 의구심을 제기하고 카첸버그는 “허위사실 유포”라고 맞섰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드림웍스의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긴 힘들었다. 소송까지 겹쳐 아이스너와 카첸버그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이 된 것으로 비쳐졌다. 둘 중에서도 내로라 할 만한 독창적 작품을 못내놓고 있던 카첸버그의 심기가 더 불편했을 것이란 짐작을 하기란 어렵지 않다. 스필버그가 관여한 실사영화 <아메리칸 뷰티> <글래디에이터>가 작품성과 흥행에서 성가를 드높였다는 것도 초조해할 만한 일이었다. 총제작기간 5년이 걸린 <슈렉>이 칸에 초청되자 카첸버그는 “나는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를 휩쓰는 것보다 칸 경쟁에 진출한 게 훨씬 영광스럽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아이스너의 디즈니는 피터 슈나이더 사장을 해임하고 애니메이션 예산을 25% 삭감하는 등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7년 전 드림웍스가 창립될 때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는 “1920년대의 디즈니 이후론 어떤 메이저도 새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만일 이 규칙을 깬다면 그건 카첸버그 팀일 것이다”라고 썼는데, 콜리스의 예측은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휘봉은 카첸버그가 쥐고 있다. 디즈니에서 일하던 91년 초 카첸버그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멘털리티가 위험수위다. 예전처럼 온건하고 스토리 중심의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내부용 메모를 돌렸다가 외부로 유출돼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스튜디오 책임자에 의한 최초의 블록버스터 마인드 반성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지만, 그 메모가 대작화 경향을 되돌리진 못했다. 메이저로 군림한다 해도 드림웍스라면 80년대 이후의 스튜디오들이 피하지 못한 대물숭배의 위험에 쉽게 빠질 것 같진 않다. 카첸버그는 그의 파트너 스필버그와 마찬가지로 아주 단단하고 알뜰하게 그리고 다양한 메뉴로 승부하고 있다. 관객으로서도 이 편이 훨씬 재미있다. 그러고보면 카첸버그는 이제야 아이스너의 진정한 라이벌로 우뚝 선 셈이다.

할리우드 여전사 나가신다!

‘저리가, 이년아!’(Get Away, Bitch!) 우리 모두는 이 대사를 알고 있다. 시고니 위버가 <에이리언2>에서 번득이는 안광으로 에일리언에게 주문을 퍼부었을 때, 그것은 곧바로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전사의 동굴로 가는 ‘열려라 참깨!’의 마법이 되었다. 지나 데이비스나 데미 무어 같은 당대의 스타들은 기꺼이 긴 머리채를 자르고 포화 자욱한 연병장으로 달려나갔고, 이윽고 그녀들의 경력은 현재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성차와 그 재현에 관한 한, 2001년 할리우드는 더욱더 요지경 속이 되어간다.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가 맨발에 피에 젖은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키드>나 <스토리 오브 어스>에서 다감한 윌리로 변모하는 사이, 천하의 멜 깁슨은 스타킹을 신고 여자들의 심리를 연구하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한편 <와호장룡>의 멋진 언니들- 양자경과 장쯔이는 주윤발을 사이에 둔 한판 승부를 이미 끝냈으며, 안젤리나 졸리는 자신의 집 천장에 매달아놓은 번지점프 줄로 이소룡 버금가는 이단 옆차기를 선보인 상태이다. 여성전사의 이미지는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시선의 권력, 관객의 동일시라는 고전적인 영화이론이 아직도 유용하다는 하나의 증명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50년대 최초의 페미니스트 서부극 <쟈니 기타>에서 조앤 크로퍼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메르세데스 매캠브리지와 희대의 여성 대 여성의 결투를 벌였지만, 당시 이 대결에 환호하는 여성관객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올 여름, 전세계 관객은 팝콘을 먹으며 남자들의 어눌하고 단순한 동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화려한 발레 액션을 펼쳐보이는 미녀들의 대결에 숨죽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개봉된 영화 <미이라2>에서 레이첼 와이즈와 패트리샤 벨라스케즈는 숨이 멎을 정도의 우아한 금빛 대결을 펼치는데, 이러한 여전사간 혈투는 첨단의 CG나 또다시 떼로 몰려드는 딱정벌레들에 비할 바 되지 않는 <미이라2>의 백미이다. 물론 2000년대 여전사들이 외우는 새 주문은 80년대 초반의 시고니 위버의 ‘저리가, 이년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세대 감각이 반짝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사 새계명 하나. 괴물 대신 남자와 싸운다 2001년 여름, <툼레이더>에는 순수한 의미에서 <배트맨>의 캣 우먼 같은 사악한 여성 타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안젤리나 졸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는 상대는 남자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여성전사들이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하지 않고 ‘인간’ 혹은 ‘남자’들과 싸운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여성전사가 등장하는 1980년대 초반, <에이리언1>이나 <터미네이터1>에서, 시고니 위버와 린다 해밀턴은 모두 남자도 여성도 아닌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남성성기와 여성성기를 모두 지닌 에일리언은 어쩌면 에이즈시대의 타락한 우주 자궁에 대한 증후이자 변장한 모습으로 기어나온 또다른 백설공주의 마녀, 또다른 여성 타자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이러한 여성타자와의 간극은 좁혀지기 시작한다. 90년대는 여성전사들에게 순수한 혼돈과 악몽의 시기였다. 폭탄을 둘둘 감은 샌드라 불럭은 키아누 리브스 앞에서 어린애처럼 줄줄 짜고, <컷스로트 아일랜드>에서 남장을 한 지나 데이비스는 악당의 목 대신 자신의 성대를 자르는 부적절한 자의식을 보여준다. <롱키스 굿나잇>에서 그 지나 데이비스는 기억상실증과 사만다/찰리 즉 어머니/첩보원이라는 분열된 이중의 여성정체성에 시달리기도 한다. 90년대 여전사의 혼돈의 악몽은 뭐니뭐니해도 데이비드 핀처의 <에이리언3>일 것이다. 에일리언이 임신한 리플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저 유명한 에일리언/리플리의 투숏은 여성전사의 거울상으로의 에일리언을 형상화한다. 에일리언은 내부에서 나온 것이다. 세 제곱된 <에이리언> 속편에서 시고니 위버가 싸워야 했던 것은 자신의 육체였고, 몇년 동안 여자 구경 한번 못해 본 28명의 남성들이었다. 둘. 모성 이데올로기는 거부한다 또한 80년대 여전사들은 아무리 알통 굵기를 자랑해도 여전히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강한 여성이라는 가치는 일종의 여성의 강인함을 모성 이데올로기의 그물을 통해서 저울질하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초창기 여성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는다. <에이리언>의 여전사 리플리에게는 유사 자녀인 뉴트가 있으며, <터미네이터1>에서 린다 해밀턴은 지구를 구할 자신의 아들이 있었다. 아니, 90년대 후반에도 <롱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에겐 악당한테 납치된 딸이 있다. 또한 초창기 여성전사의 대모들은 흥미롭게도 남성동료들의 죽음으로 실질적인 보호막과 처녀막 모두가 없어져야 본격적인 여성전사의 행보를 내딛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에이리언>과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거쳐 확대되는 여성전사들의 남성성은 신성한 어머니라는 면죄부에 의해 설득력을 얻고, <터미네이터2>의 사라 코너는 망해 가는 지구를 위해서 정신병원에 갇히면서도 지구 종말을 대비해 싸우는 단 한명 남은 근육질의 성모로 격상된다. 80년대 뮤직비디오 속 마돈나의 어떤 면과 정확히 겹치는 이러한 이미지는, 그러나 90년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어갔다. 당분간, <미녀 삼총사>의 카메론 디아즈나 안젤리나 졸리가 ‘애들이 커졌어요!’라며 소리지를 일은 없지 않을까? 셋. 내 갈 길은 내가 결정한다 94년 나온 <스피드>에서 폭약에 둘둘 말린 샌드라 불럭에게 악당 역의 데니스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 “안심해. 니가 여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야.” 섹슈얼리티와 희생자라는 전통적인 맥락에서 할리우드 여전사들에게 일격의 한방을 가한 영화는 저 멀리 홍콩에서 날아들었다. 스스로 액션 히어로가 되기를 원한 <와호장룡>의 양자경과 장쯔이는 기술적인 면에서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할리우의 여전사의 이미지에 화룡점정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와호장룡>의 장쯔이는 더이상 니키타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하는 가련한 여자가 아니라 스스로 무협 고수가 되고 싶어하는 자기 결정적인 액션 히어로이다. 장쯔이는 기존의 <스피드>나 <트위스터> 같은 영화에 나오는 샌드라 불럭과 헬렌 헌트의 톰 보이 이미지- 다 자라지 못한 여성, 그래서 필연적으로 남성 파트너의 조력을 얻어야 하는 위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주막터의 싸움에서 혼자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시험해 본다. <와호장룡>의 순수 여전사들의 등장은 이전의 호러영화 장르나 이후의 액션영화에서 벌어지는 희생양(victim)의 가능성에서 여성전사들을 완전히 거두는 어떤 계기가 되었다. 2000년 들자 여성전사들에게도 이윽고 액션영웅으로의 완벽한 독자성과 영웅으로서의 판타지가 찾아든 것이다. 2000년대 여전사들은 말 그대로의 여신이다. 넷.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90년대 중반의 데미 무어나 지나 데이비스가 여성전사로 실패한 까닭은 바로 지나친 여성성의 거세에서 출발되었다고 진단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90년대는 시너드 오코너를 비롯해 데미 무어, 시고니 위버 등 여전사들의 삭발시대였다. 이제 와서는 얼굴에 멍이 들고 피 흘리는 카메론 디아즈나 안젤리나 졸리를 상상할 수는 없지만 당시 <커리지 언더 화이어>의 멕 라이언이나 <지 아이 제인>의 데미 무어는 뽀얀 운동장의 먼지와 땀 속에서 온갖 고생 끝에 자신의 기존 스타 이미지를 혹은 섹슈얼리티를 거세시켜나갔다. 이들은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걸류의 ‘걸어다니는 거대한 알통’을 따라하려다 자멸해간 것이다. 관객 특히 여성관객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냉담했다. 지나 데이비스가 피를 철철 흘리며 총을 들었을 때, 데미 무어가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 지 아이 제인이 돼갈 때, 그녀들은 남성들과 피 흘리게 경쟁하고 상처입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여성성은 ‘약한 것, 지는 것, 열등한 것’을 의미했는데, 끝끝내 혹독한 해병대 훈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데미 무어에게 같이 훈련을 받는 흑인 병사는 이렇게 대꾸한다. “넌 뒤늦게 도착한 또다른 흑인과 같아. 너무 늦게 이사를 왔지.” 그런데 여성성을 도려내면서, 그들의 스타 이미지도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2000년이 되자, 여성전사들은 진흙탕에서 뒤엉켜 싸우는 대신 이제 ‘여신’이라는 여성 판타지의 위치에서 액션 영웅을 거두어들인다. 2000년 겨울 개봉한 <미녀 삼총사>의 흥행전략은 세명의 여전사 카메론 디아즈, 드루 배리모어, 루시 리우의 늘씬한 몸매에 여성 007의 이미지를 이식시키는 것이었다. 본드걸들이 본드맨들의 그림자 주변을 맴도는 사이, 이들은 <매트릭스>의 최첨단 CG방식으로 남자들을 일격에 쓰러뜨린다. 2000대의 여성전사들은 그만큼 화려하다. 최첨단 무기, 쭉쭉 빵빵한 몸매에, 배트맨이 지녔던 남성 집사까지 부리고 막대한 부와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기도 한다. 막강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는 이전의 어떤 여성 영웅도 도달할 수 없는 흠집없는 여성전사 그 자체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교정된 폭력 변화하는 여성전사들에 대해 여성관객은 늘어가는 박스오피스상의 지각 변동으로 화답하고 있다. 산업적인 측면에서 쭉쭉 빵빵한 2000년대의 여전사들은 지금까지 남성관객 전유물로만 여기던 액션영화에 여성이라는 새로운 관객을 줄서게 만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2000년대 여성전사들이 여성관객에게 어떤 심리적 만족감이나 보상심리뿐 아니라 실질적인 여성 정체성에 변화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SF와 액션영화를 적당히 비빔밥하여 남성들의 눈요기를 충족시켰던 <바바렐라>의 제인 폰다나 라켈 웰치류의 백치미인형 여성전사도, 물신화된 근육이 그대로 남성성을 보장하는 여자 장 클로드 반담도 아니다. 새로워진 여성전사들의 대공포화 속에서 90년대를 풍미했던 화장도 거의 안 한 비쩍 마르고 유약한 기네스 팰트로 타입의 여성들이 할리우드를 점령하던 시절은 끝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학적인 면에서 보면 적어도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도, 공격성이라는 행동이 남성하고만 연합되어 있다는 성적인 편견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조지타운대 사회학 교수 수잔 월터즈는 <보스턴 헤럴드>에 확신에 찬 여전사의 당당한 행동을 ‘정치적으로 교정된 폭력’이라고 명명했다. 90년대 텔레비전 시트콤에서 로잔 바가 오천평 같은 몸매로 착한 여성 혹은 예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동을 파괴하면서 정형화한 이상적 여성성에 파격을 가하던 것과도 달리, 이들은 로잔의 자해적인 방식을 피하면서도 여성관객에게 빈약하고 비쩍 곯은 보이시한 양성성 대신 건강하고 싱싱한 육체를 소유한 양성성도 꽤 세상을 헤쳐나갈 만하다는 확신과 환상을 동시에 심어주고 있다. 과연 여전사들은 페미니스트의 원군인가 그러나 이러한 여전사의 뇌쇄적인 매력에 대해 모든 여성 평론가들이 두손 들어 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새로워진 여성전사들의 화려한 액션과 몸매가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진정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여성전사의 변화에 더 커다란 심리적인 혜택을 얻는 것은 바로 남성들임을 지적하면서 여성전사의 이미지가 여성의 몸과 마음을 이중구속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일례로 남성관객은 라라 크로프트에게서 강한 여성에게 보호받고 싶은 본능과 싱싱한 여성 육체에 대한 관음증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오히려 2000년의 또다른 안젤리나 졸리들은 과거 신데렐라가 착한 여성 콤플렉스를 만들어냈듯, 여성들로 하여금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양산시키고, 액션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과 사회적 성취를 혼동시킬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 여성전사들은 ‘섹시하되 섹스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략은 성적 관심을 끌되 성 행동은 억압한다는 1900년대 초반 히스테리 환자들의 전략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평론가 바버라 크리드는 90년대 여성전사들의 무성적 전략과 관련, 그들의 양성성이 레즈비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바버라 크리드는 여성전사의 몸을 lesbian body라 명명했다) 동성애 공포에 사로잡힌 주류사회에서 이러한 여성전사의 몸은 공포와 매혹의 근원이라고 분석한다.(<에이리언3>에서 리플리의 몸은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남성 판타지 안에서 재구성된 또다른 괴물일지도 모른다.) 2000년대 여성전사의 강화된 섹슈얼리티는 궁극적으로 여성전사의 계보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퇴행의 기미라고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 할리우드 여전사 나가신다! ▶ 여전사 캐릭터 열전 심영섭/ 영화평론가

아버지 명연기 3인 3색 [3] - 주현

허한 어깨 위에 희비극이 내려앉다 주현씨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시청각을 총동원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있자면, 우린 금새 참새떼처럼 모여 침이 흐르는지도 모른채 이야기에 빠져드는 벌거숭이 아이가 되어 버린다. “최신식 월남장비는 우리한테만 지급되었거덩…” 하는 장교 시절 ‘JSA’이야기부터 “사실은 찰턴 헤스턴이 말이야…”로 이어지는 <벤허>의 캐스팅 비화까지, 짐짓 비장한 듯 적당히 씰룩거리는 입선에, 묘한 서울사투리에, “뚜뚜뚜뚜…” “쏴∼아” “캬∼아” ”하∼아” 같은 추임새를 적절히 섞어쓰면서 그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상한 것은 얼핏 방대하고 정신없는 듯 한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하나의 ‘극’을 본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정확한 ‘야마’(포인트)를 결코 놓치지 않는 화술은 살며시 줌인으로 들어갔다가 어느새 줌아웃이 되어 빠지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 속도감과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교묘한 긴장과 반전 속에 마지막 한방, 물기어린 감동적인 한 마디를 향한 호흡을 남겨둔다. 이런 주현의 이야기 방식은 그의 연기방식과 참 많이도 닮아 있다. 탁구 코미디론과 원초적 팔자 연기론 한바탕 질펀한 섹스신으로 시작되는 <해피엔드>의 오프닝 시퀀스가 끝날 무렵, 침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잔뜩 긴장했던 관객에겐 무심하게 등장하는 헌책방 주인 주현의 존재는 고마울 정도다. 구석에 앉아 연애소설만 탐닉하는 최민식을 향해 “여그가 구멍가게여 뭐여, 만화가게여? 양복은 멀쩡하니 입고 다니면서…”라고 질책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헌책방 주인 주현은 그렇게 겨우 3신이지만 매번 아슬아슬한 불륜과 치정 사이에 숨가쁜 영화의 호흡을 달래준다. “딸애가 안 해주면 안 된다고 해서 그러마 했는데, 워낙 작은 역할이라 헐 게 있어야지. 하지만 작은 역이라도 연기란 게 그 사람의 지금만 생각하고 하는 거랑 그 사람의 전 시간, 그 사람의 어제를 생각하는 거랑 큰 차이가 있거든.” <친구>의 준석 아버지 역시 신의 수가 그 존재감과 비례할 수 없음을 증명시켜준 경우였다. 지방 조직 보스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서서히 기세가 꺾여가는 ‘아버지’. 살가운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던 무뚝뚝한 그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연민어린 시선으로 한참을 응시한다. 보스라 해도 변변한 양복 한번 입을 일 없이 줄곧 러닝셔츠와 ‘추리닝’ 차림으로 주현은 채 두줄이 넘지 않은 각 대사 속에 영화 내내 친절하게 설명되지 못했던 그 아버지의 역사를 가늠케 만든다. “그림이 오래 그렸다고 잘 그리는 건 아니잖아. 배우도 그래. 똑같이 가르치고 똑같이 배워도 달라. 타고나는 거야. 거울을 보면 어떻게 이 얼굴 가지고 배우를 해먹었나, 하는 생각을 해. 만날 술처먹어서 얼굴 퉁퉁 붓고 머리통도 크지. 배때기는 나왔지. 그런데 뭐 연극 출신도 아니고 연기를 학교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런데 삼십몇년간 연기하면서 밥먹고 살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연기는 팔자야, 원초적인.” 정말 배우가 되라는 ‘팔자’였는지 그의 배우 데뷔도 우연찮게 다가왔다. GP장교 출신인 그는 제대 뒤 임학송 감독의 ‘월남드라마’의 자문관으로 베트남길에 올랐다. “배우들에게 시범 보여주는 모습에서 끼가 보였었나봐.” 자문비에서 200달러 더 준다기에 덜컥 맡아버린 중대장 역할. 특유의 걸출한 입담으로 교신을 하고 “총 쏘고 뛰고 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던” 그의 연기는 시사회장에 온 KBS국장의 눈에 띄었고 주현은 당시 연수중이던 공채 9기 탤런트들과 함께 ‘특채’ 탤런트로 방송사 문을 열었다. “텔레비전이란 게 집집마다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마누라는 못 산다고 집나가기도 했다니까.” 2개월간 큰 몸짓 덕에 엑스트라 장군은 도맡아하던 시절을 거쳐 70년 <사랑의 훈장>이란 드라마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군인역할을 하라면 잘하겠는데, 씨팔, 연기고 뭐고 기본이 있냐 뭐가 있냐. 고은아가 상대역이었는데 ‘사랑합니다’ 이런 게 될 리 있나. 내깐에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는데 감독은 ‘누구 잡아먹을 거냐’고 호통을 치고… 결국 즈이들끼리 작당을 해가지고 날 10회에 죽였어. 도봉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고은아 애를 살리고 내가 죽었지.” 드라마에서는 죽었지만 본인은 ‘살았다’ 싶었다. 주인공 한번 해봤으니 더이상 배우에 미련도 없었고 정치외교학 전공을 살리기 위해 외교관시험이니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게 나를 죽이고 나니까 방송사에 전화가 많이 오는 거야. ‘그 사람 연기는 못해도 순박한 데는 있었다’ 뭐 이러구, 그래서 결국 회상신을 만들더라구. 뭐 그런 거 있잖아, 뿌연 연기 속에서 아무 말 안 하고 서 있는….” “짜안… 2탄, 또 전화가 왔어. 출연하래. 제목은 <먹구름 흰구름>, 배역은 벙어리. 근데 해보니 벙어리역할이 더 힘들어, 방송사도 시켜보니 또 안 돼, 안 되겠다 또 죽여. 이번엔 장마에 어깨로 둑을 막고 죽는 거야.” 극의 1/3을 채 못 채우고 ‘죽어버린’ 배역이었지만 그의 말없는 연기는 당시 최고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실화극장> 작가 김동현씨의 눈에 띄었다. 신구 등과 출연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야간비행>편에서는 김동현은 주현을 모델로 대본을 쓰기도 했고 그 역시 잇단 출연과 함께 서서히 배우로 단련되어가고 있었다. “곽경택 감독이 초등학교 다닐 때 <야간비행> 보고 그게 잊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를 <친구>에 캐스팅했다고….” 이후 <등신불> <열녀문> <갯마을> 등의 TV문학관을 통해 배우 주현의 존재는 서서히 어떤 대체물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코미디, 재미있지. 근데 코미디란 것은 서로가 경지에 오른 사람끼리 해야 해. 코미디는 탁구 같거든. 내가 스매싱 매길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고, 컷트 짜를 때도 있고, 열번 받고 한번 튀길 때도 있는 거야. 근데 배우들이 연기를 가지고 싸움을 해. 이기려구 한다구. 누구랑 연기하면서 누굴 잡아먹었다, 이겼다, 이런 게 어딨어. 그 사람 캐릭터, 생긴 거, 분위기, 다 다른 거지. 자연스러운 순발력과 내밀한 연기로 승부해야 해. 누가 먼저 나오느냐에 신경쓰고 대사를 높이고 이럴 필요가 어디 있냐고.” 이광수 원작의 TV문학관 <무명>은 그 속에 잠재된 코믹연기를 외부로 내오는 역할을 한 작품이었다. 감방의 사기꾼으로 등장해 질퍽한 사투리와 다양한 장기를 선보인 이후 ‘주현표’ 코믹은 <서울뚝배기>의 “아자씨∼ 껄랑요” 하는 능청스런 서울사투리나 <옥이이모>에서 “야, 니 몇개 묵었냐”며 이빠진 아랫잇몸을 드러내는 풀빵장수, 전과 12범의 ‘간큰’ 도둑 <도둑의 딸>로 이어졌다. “너무 정신차리고 사는 인간을 보면 저게 배운가 싶어? 너무 약고, 너무 완벽하게, 너무 계산하고 가는 건 모사지 배우가 아니야. 풀어질 때는 정신없이 풀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계획하고 짠 것 같은 연기는 순발력있는 연기를 대면 못 당하지.” 그러나 그의 코미디는 결코 가볍고 얕은 유행어나 ‘개인기’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것은 예의 코믹한 표정이 숨쉬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배반하는 뒷모습 때문이다. 100kg이 넘는 큰 몸짓에 드리우는 응당 크고 먼 그림자. 그 어깨가 드리우는 ‘허’한 중년의 풍경은 주현에겐 묘한 상실의 이미지를 만든다. 엉뚱하고 코믹한 역할 속에서도 상처한 남자, 자식 잃은 아버지, 버림받은 외사랑의 아픔이 종종 묻어나는 연유도 다 그 뒷모습 때문이다. 배우혼이 실린 뒷모습 “구라와 허풍 빼면 시체”라며 혼을 쏙 빼놓는 이야기솜씨와 유머를 늘어놓다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와 나누던 대사를 풀어놓으며 금세 두눈 가득 눈물이 고이는 배우. 세 아들의 아버지이자 양어장 주인인 ‘강태걸’로 분할 새 주말드라마 <아버지와 아들>과 젊은 형사 김민종, 임원희를 조율하는 묵묵한 형사반장으로 나오는 영화 <이것이 법이다> 등을 통해 올해 예순의 배우 주현은 아직도 할말이 너무나도 많은 듯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조감도와 세밀도, 희극과 비극을 앞뒤로 품고 있는 이 배우의 이야기를 거부할 힘이, 전혀 없다. 내가 본 선배 주현 “절대 대본을 들고 다니시지 않는다” <해피앤드>에서 헌책방은, 허구와 현실이 부딪히는, 즉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기획단계부터 꼭 주현 선생님이 하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부담스러워 하셨는데 따님이 나와 대학동기라는 ‘학연’(?)을 이용하여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다. “정 감독, 이사람, 그냥 폐지수집하다 늙은 사람이 아니야. 인텔리야, 몰락한 인텔리….” 대사 중에 책방 주인이 소설가가 내놓은 헌책 꾸러미를 들고 오면서 “글쓰는 놈이 책이나 팔아먹고…”하며 욕하는 부분이 있는데, 캐릭터가 응축된 대사라고 생각하고 쓴 부분이었다. 사실 그냥 장사꾼이라면 좋은 책이 나온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 얼마 되지도 않는 대사 속에서 주현 선생님은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계셨다. TV 연기에 익숙해져 있는 경우엔 좋은 연기자들에게조차 종종 이상한 습관 같은 걸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주현 선생님은 매체와 상관없이 안정된 연기를 할 수 있는 천상배우이다. 아, 그리고 그를 만나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일 테지만 선생님은 정말 ‘내추럴 본 이빨’이다. <해피엔드>/ 정지우 감독 주현 선생님은 절대 대본을 들고 다니시지 않는다. 녹화 전날 대사를 달달 외워오시지도 않는다. 일단 처음 시놉시스 단계에서 캐릭터를 파악하시고 나면, 현장에서 그날의 분위기를 잡아나가시는 ‘현장제일주의자’시다. “혼자 공부하듯이 대본을 보는 습관도, 훈련도 안 돼 있어. 이 신에서 ‘운다’라고 되어 있어도 현장에서 눈물이 안 나오면 안 울거야. 하지만 정 울어야 된다면 미리 이야기를 해줘.” 어떤 이에게는 충분한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런 습관이 신기하게도 선생님에겐 장점으로 작용한다. ‘주현표’ 자연스러움은 그렇게 탄생되는 것이다. <거짓말> <푸른 안개>/ 표민수 PD

<소름> 주연 장진영 “새벽4시면 악몽에 악!”

미스터리 스릴러 <소름>(감독 윤종찬, 개봉 8월4일)의 공포는 아주 새롭다. 피와 살을 흩뿌리지 않고 이야기는 느릿느릿 흘러가는 데도 신경이 쭈뼛쭈뼛 일어선다. 엄청난 공포감을 일으키는 건 주검이나 악령이 아니라, 사람들이 빚어내는 슬프고도 비비꼬인 인연과 사랑이다. 멜로로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아주 지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주연배우 장진영(27)씨가 `페스티벌 레이디'로 선정된 것은 아주 적절해보인다. 장씨는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본 뒤 스태프들과 식사하러 가서 혼자 멍하니 밥도 못먹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촬영 후반에 들어섰을 때, 한동안 새벽 4시만 되면 깨어나서는 무서워서 눈도 못감고 고통스러워했어요. 똑같은 악몽을 되풀이해서 꾸는 거예요. 그만큼 몸과 맘이 많이 황폐했는데 그런 기억이 되살아나는 바람에….” 그를 이 지경에 몰아넣었던 건 `선영'이란 캐릭터 때문이었다.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버리고, 남편의 주먹질에 시달리는 선영의 눈빛은 시퍼렇게 멍든 자국만큼 절망적이다. 단지 본능적으로 살아갈 뿐인데, 악마적 심성을 갖고 있는 용현(김명민)을 만나 작은 위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과거에 도사리고 있던 지옥같은 악연이 문제였다. 선영으로부터 벗어나려 색깔있는 렌즈를 끼어가며 스스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중이고 다음 영화에선 반드시 행복한 배역을 하겠다지만, 장씨는 선영 덕분에 `진짜 배우'가 됐다. <자귀모> <반칙왕> <사이렌> 등에 출연했지만 거기서 그의 매력을 온전히 보기는 어려웠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라서가 아니라 <소름>에선 고운 외모와 달리 `터프'한 속내를, 시에프(CF) 모델의 가공된 미소가 아닌 살냄새나는 얼굴을 화면에 폴폴 풍긴다. “목소리도 그렇고 남성적이란 얘기를 많이 들어요. 실제로 터프해서 여자 같은 내숭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제가 불편해요. 하지만 여자로서의 삶이 고달플 때, <파니 핑크>(사랑도, 인생도 잘 안풀리는 여자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기분을 풀어요.” 혹시 기존 배우들을 분류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스타와 배우', `실제 생활과 연기가 같거나 혹은 딴판인 배우' 등으로 나눠본다. 자신은 어느 자리에서나 한결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 “97년 데뷔했으니까 늦게 시작했죠. 갓 스물 넘은 이들이 스타덤에 오르는 걸 보면서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일찍 시작했으면 천방지축이었을 거예요. 일을 제대로 해나갈 생각이 부족했을 거란 말이죠.” 그의 몸 안팎은 텔레비전이나 스크린 속보다 훨씬 단단하고 풍성해 보였다. “운동을 즐겨하고, 집에서 조용히 차 마시기를 좋아해요. 술요? 물론 좋아하죠.”

공포의 집 House on Terror Tract

공포의 집 House on Terror Tract 2000년 미국 97분 감독 랜스 W.드레슨, 클린트 허치슨 출연 존 리터, 데이빗 들루이즈 <어메이징 스토리> 류의 옴니버스 구성과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식을 취한 교외 괴담. 얼핏 평화로와 보이는 중산층 주거지로 신혼부부를 안내하는 부동산 중개인 봅은 얼핏 쾌활해 보이지만 성과급제의 압력에 시달리는 절박한 처지.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근사한 세 채의 집은 저마다 도저히 팔리기 힘든 기괴한 내력을 갖고 있다. 순진한 ‘아메리칸 드림’을 조롱하는 이야기지만, 그보다 “뭔가 좋은 것을 가지려면 그것의 역사를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많은 행복이 있어도 사람들이 신경쓰는 건 한 번의 불행 뿐”이라는 주인공의 푸념이 기억에 남는다. An omnibus of three stories, this suburban horror story is of an , dramatic television program manner. Bob, a real estate agent who shows a young couple around a middle class neighborhood looks like a jolly fellow on the outside, but is always under the pressure to succeed. All the three houses he shows them have dark secrets of the past, forbidding them to sell. This is a story deriding the naive ㄳmerican Dreamㄳ but two underlying assertions the main character gives : " One who is in pursuit of something ㄳoodㄳmust accept its history as well." and " Despite all the happiness and comforts of life,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a once-in-a lifetime misery.", linger on in my memory.

로드리게즈가 말하는 <스파이 키드>

+ 아이디어 : <포룸>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할 때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두 아이를 출연시켰는데 아이디어는 그때 얻었다. 그러니까 1994년에 시작된 프로젝트다. 사실 <엘 마리아치>를 액션영화로 만든 건 순전히 남미권 비디오 시장에 팔아보자는 계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걸 본 영화사들이 내게 액션영화만 주문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컬럼비아가 리메이크를 제안해서 <데스페라도>를 찍게 됐다. 사실 영화사들도 내가 가족영화를 찍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대학시절 내가 그린 만화를 보여줬고 내 가족이 담긴 가족 코미디인 단편영화들도 보여줬다. 그결과 <스파이 키드>를 만들게 됐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는데 내겐 특수효과에 관한 경험이 필요했다. <스파이 키드>에는 특수효과가 들어간 장면이 500개가 넘는다. 특수효과 수퍼바이저를 따로 구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직접 특수효과를 다루고 싶었다. 만약 창작에 재능이 있다면 직접 특수효과를 다루고 그걸 돈많이 들이지 않고 해결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감독들은 "특수효과가 들어간 영화는 언제나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특수효과에 조금 더 잘 알면 저예산영화에서도 가능한 일이 많다. + 은퇴한 스파이 그렉(그레고리오) : 어린 시절 삼촌 그레고리오는 신비한 존재였다. 나와 아홉 형제자매들은 삼촌 주변에 둘러앉아 그의 모험에 관해 질문공세를 하곤 했다. 그레고리오는 FBI와 협력하는 비밀요원이었는데 8살 짜리 꼬마에게 그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환상적인 직업이었다. 우리는 삼촌이 갖고다니는 두꺼운 가죽지갑 속 뱃지를 이모조모 뜯어봤다. 무거운 금색 쇳덩어리로 만든 뱃지와 젊고 상냥한 얼굴의 삼촌 사진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삼촌은 한번도 애들한테 자기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얘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삼촌의 환상적인 모험담을 지어냈다. 그는 우리들에게 국제적인 미스터리의 사나이, '라틴계 제임스 본드'였다. + 플룹의 푸글리쇼 : 아이들과 함께 <텔레토비>를 보면서 생각했다. "엄청 이상한 쇼인걸. 저런 복장을 한 사람들이 첩보원들이라면 어떨까. 어떤 미친 녀석이 첩보원들을 조롱하려고 그들을 텔레토비로 만들어서 TV에 출연시키고 그게 히트를 치면 어떻게 될까"라고. 텔레토비들은 언제나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데 그걸 보며 이런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정말로 하고싶은 말이 '도와줘! 여기서 날 꺼내줘'라면 어떨까. 그들은 뭔가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데 가면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이라면 어떨까?"라는. 난 그게 아주 재미있다고 느꼈다. + 악당 플룹 : 명령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라 창조에 대한 집착이 강한 자가 악당이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창작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아이디어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나쁜 악당이 뭔가 지시를 할 때 그건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그는 그래서 혼란에 빠진다. 난 영화 속 TV쇼를 직접 만들고 싶었다. 악당은 첩보원들을 골려주려고 TV쇼에 출연시키는데 그런 다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직접 TV쇼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 엄지 로봇 : 내가 처음 출판해 수상한 만화는 <엄지로봇>(머리, 팔, 다리가 모두 엄지손가락처럼 생긴 로봇)이었다. 엄지로봇들이 나와서 눈알을 축구공처럼 차는 만화였다. 물론 엄지로봇에게 전부 축구유니폼을 입혔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좋아했고 난 아직도 그걸 간직하고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엄지로봇들이 스크린을 뛰어다니며 관객들을 웃기는 걸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내 어린 시절의 엄지로봇들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상은 <사이파이> <미국감독협회 회지> <타블렛 뉴스페이퍼> 등과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임) ▶ 할리우드의 영원한 악동, 로버트 로드리게즈 ▶ 로버트 로드리게즈 필모그래피 ▶ 로드리게즈가 말하는 <스파이 키드>

MTV 20주년

MTV엔 뮤직비디오가 없다. 미국의 MTV에서 뮤직비디오를 보려는 것은 붕어빵을 먹으며 담백한 생설살의 감촉을 느끼려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사실 `Music Television`이라는 MTV에서 뮤직비디오를 만날 수 없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자매채널인 VH1, M2, MTV 베이스 등으로 터전을 옮긴 뮤직비디오의 자리를 메우는 프로그램들은 일반인들이 참여해 환상과 사랑의 모험을 펼치는 <리얼 월드><로드 룰스>, 또는 엽기적인 일만 골라서 행하는 <앤디 딕 쇼><잭 애스>, 대학생들의 봄방학 철인 3월이면 어김없이 방송되는 비치 댄스 파티 <스프링 브레이크>, 우리의 <주부가요열창>의 10대 버전쯤 될 등이다. “우리 오빠가 내 친구와 `거시기`하는 것을 봤어요”등등의 `고민`을 낄낄거리며 토론하는 토크쇼, `치정극`을 스포츠로 표현한 프로레슬링 게임, 스타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을 과격하게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역시 이 채널에서 선보이는 주요 메뉴들이다. 이같은 변화에서 읽을 수 있는 점은 MTV가 이제 다이상 음악 전문 방송사가 아니라 일종의 종합엔터테인먼트 채널로 탈바꿈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타깃층인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변신하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과 같은 변화는 1992년 <리얼 월드>가 시작할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젊은 남녀들의 일상생활과 고민,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 프로그램의 성공은 공중파 방송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의 `실제상황 소프 오페라`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추동했고, 결국 이는 <서바이버>로 발전했다. <리얼 월드>의 뒤를 이은 <언드레스드><로드 룰스><스파이더 게임스>등 최근 MTV 프로그램은 젊은이들을 자극하는 다양한 소재, 실제상황과 가상을 오가는 극 구성, 기존 소프 오페라 뒤틀기 등을 통해 실험적 `다큐-드라마`프로그램 제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55년 히트 싱글들을 틀어 주는 AM라디오의 , 1967년 `프로그레시브 록`을 방송했던 FM라디오의 <앨범 록 스테이션>이후 “음악방송에서 세번째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MTV가 이처럼 `5반세기`만에 음악과는 별 관계가 없는 방송으로 변신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MTV의 역사를 살펴보면 엉뚱하게 모태가 흔히 `아이멕스`라 불리는 신용카드업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79년 아멕스는 워너 케이블 코퍼레이션의 주식 50%를 매입했고, 이 기업은 워너-아멕스 케이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뒤에 워너-아멕스 위성 엔터테인먼트사(WASEC)로 독립했다. MTV는 이 WASEC가 소유하고 있던 네개의 채널 중 하나로 편성되었고, 1981년 8월 1일 `24시간 논스톱 채널`로서 세상에 태어났다. “(텔레비전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잇는 일군의 청년들이 존재한다”는 MTV 초대 CEO 존 슈나이더의 일성과 더불어. 그런데 1981년의 청년들이 누구한테 무엇을 무시당한 것일까? 록문화를 다림질하고 미국의 `별`을 찾아서 그 이전까지 청년문화의 꽃은 `록음악`이었다. 지겨운 이야기라고? 어쨌든 록문화는 거리와 클럽의 문화였고, 1970년대에는 대형 스타디움으로 `재영토화`되는 양상이 없지는 않았지만 `거실에 놓인 TV`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다. 어쩌다가 록스타가 TV에 등장하는 일이 있다고는 해도 라이브연주 비슷한 세팅 위에서 어색하게 립싱크를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소파나 침대에 앉아 TV를 보는 일은 `계집애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 록문화의 `편견`이었다. 하지만 록음악도 1970년대 말 음악산업의 대불황앞에서는 용빼는 재주가 없었다. 더구나 대불황은 음악산업에 떼돈을 안겨주던 바로 그 시스템이 삐걱거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MTV는 가정의 거실 분위기에 맞게 록문화에 남아 있는 거친 요소들을 말끔하게 다림질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MTV가 처음으로 송출한 작품이 버글스의

케이블TV 시대를 사는 MTV의 전략

케이블 TV의 시대는 TV를 '보는'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는 '채널을 돌리는 시대'이다. 나는 오늘도 TV를 본다. 아니, 정확히는 채널을 돌린다. 채널을 돌리는 걸 TV 보는 것과 착각하는 시대가 케이블 TV의 시대이다. 채널을 돌린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손에 쥐어진 리모콘이라는 총을 쏨으로써 한 채널의 한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지속성, 문법적인 맥락을 죽이는 행위이다. 채널을 돌리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탈 맥락적인 행위이다. 나는 무슨 신경증 걸린 사람처럼, 그 총을 마구 쏘아댄다. 드라마가 나왔다가 뉴스가 나왔다가 39쇼핑의 광고가 나왔다가 2차대전의 어느 전선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가 불교 방송이 나오기도 하고 그 다음엔 만화가 나오기도 한다. 그 모든 걸 나는 거의 동시에 관람하고 있다. 너 미쳤니? 이렇게 리모콘을 쏘아대는 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알고 보면 정신병에 걸린 살인범일지도 모른다... 광고와 뮤직비디오, 구분할 수 있니? 그러다가, 어쩌다가 MTV가 걸린다. 어느 뮤직 비디오가 진행 중이다. 아,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건 뮤직 비디오가 아니다. 'MTV 스테이션 아이디(Station ID)'라는 거다. 그 시퀀스의 맨 끝에 MTV 로고가 뜨기 전까지, 나는 그걸 뮤직 비디오로 착각했다. `쳇, 엠티비 광고로군.` 그 다음에, 어느 시퀀스가 이어진다. 흑인이 나와서, 테크노 풍의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건 다시 뮤직 비디오인가? 그러나 그 끝에는 어느 술 이름이 등장한다. 그 술이름이 등장하기 전까지, 나는 그 시퀀스를 또다시 뮤직 비디오와 혼동했다. `쳇, 이건 술 광고로군.` 술 광고 다음에, 이번엔 광고와 비슷한 어느 뮤직 비디오가 나온다. 가령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어느 뮤직 비디오가 나온다고 치자. 그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목 캔디 비슷한 사탕을 파로디하여 '푸토스(Footos)'라는 가짜 상표를 지어냈고 그 광고의 화면과 거의 흡사한 장면들을 차용하여 뮤직 비디오를 만들었다. 맨 끝에, 혹은 맨 처음에, 'Foo Fitghers'라는 자막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화면을 정말 사탕 광고로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MTV는 하루 종일 이런 식이다. 만일 내가 하루 종일 MTV를 켜놓고 있다면, 사실 어떤 것이 프로그램이고 어떤 것이 광고인지, 또 어떤 것이 자사 공지 사항인지 모른 채 MTV를 시청하는 것이 된다. 그 각각의 프로그램들 사이의 상업적인, 혹은 미학적인 경계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비슷한 맥락이거나 맥락이 없이 자기 자신을 지우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MTV 자신을 광고하는 화면과 MTV를 먹여 살리는 광고주의 광고 화면과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뮤직 비디오'의 화면이 연속된다. 그건 마치, 케이블 텔레비젼의 각 채널들을 오가며 맥락없이 시청하는 시청자의 머릿속을 재현하는 것 같아 보인다. MTV의 편성 자체가 '탈 맥락적'인 것이다. 미학적 혁명의 절정, 탈맥락적 편성 MTV 편성의 미학적 혁명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한 프로그램이 탈맥락적이라기 보다는, 편성 자체가 탈맥락적이다. 나는 논리가 결여된, 혹은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며 동시에 서로의 온전한 몸뚱아리를 숨김으로써 결국에는 전체가 다 어떤 '돈벌이'의 수단으로서 동일하게 참여하는 아주 큰 차원의 '광고'를 보고 있는 것이거나, 혹은 광고가 광고가 아니고 프로그램이 프로그램이 아닌, 그래서 결국에는 각각의 욕망들이 가지고 있는 이면을 보여주는 어느 포스트 모던한 정치 프로그램을 목격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MTV 편성의 미학은 그대로 뮤직 비디오의 미학과 연결된다. 뮤직 비디오는 확실히 기존의 영상물들과는 구별되는 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가령 우리의 뇌리 속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하'의 히트 넘버 의 뮤직 비디오를 보자. 주인공들은 일차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이다. 그들의 연주 장면이 명백히 뮤직 비디오에 드러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뮤직 비디오에 등장하는 어느 패스트푸드점 여종업원이 즐겨 보는 만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들은 내러티브의 주인공이다. 그 내러티브는 뮤직 비디오의 내러티브이기도 하고 여종업원이 보는 만화의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주인공들은 뮤직 비디오라는 영상물의 내러티브를 직접적으로 구성하는 등장인물들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내러티브의 안에 존재하는 2차적 내러티브의 격자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기도 하다. 여기서 '출발 비디오 여행'의 MC처럼 질문을 하자. 그들은 누구인가? 가수인가? 아니면 아하 그들 자체인가? 그것도 아니면 뮤직 비디오라는 하나의 짧은 '극영화'의 등장인물들인가? 뮤직 비디오에 관한 이러한 의문은 보통의 피쳐 필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기할 수도 있는 동일한 의문에 비해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다. 대답을 하자. 그들은 그 모두이다. 최소한 그 등장 인물들은 세 겹이다. 그 '세 겹'의 그들이 동시에 맥락화되어 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 하자. 그 세 겹을 구분하는 맥락이 탈각되어 있다. 그들은 가수이기 때문에 마치 '라이브' 공연장을 시뮬레이션 하듯 노래를 하고, 동시에 그들은 음반을 팔아먹는 스타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으로 광고되는 광고 대상이고, 또한 뮤직 비디오라는 특별한 영상 구성물의 내러티브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등장인물들이다. 그 세 겹의 상업적, 미학적 맥락들이 '아하'라는 밴드의 멤버들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동시에 그 세 겹의 맥락을 배타적으로 특징짓던 경계선들이 뮤직 비디오를 통해 무너진다. MTV의 스테이션 아이디, 광고, 뮤직 비디오의 경계가 탈맥락화되어 있는 것과 이러한 뮤직 비디오의 정황은 일직선으로 소통한다. 그래서 오히려, 뮤직 비디오는 MTV의 편성 내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등장인물에 관한 이러한 미학적 문제제기는 그대로 공간적인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 있다. 공간에 관한 논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실제로 이들이 노는 공간이 공연장인가, 아니면 세트인가에 관한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영국 밴드 스웨이드의 어느 뮤직 비디오를 보자. 그들은 한 순간은 지하철이었다가, 다음 순간은 공연장이 되는 어느 공간에 위치한다. 공간은 탈맥락화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도상학적 차용에 관한 문제이다. REM의 뮤직 비디오들이 그런 걸 잘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그 공간은 명백히 영국의 화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의 도상학적 공간이다. 살들은 정육점에 걸린 고기들처럼 흩어져 있고, 대신 그 살들은 서커스장처럼 구분되고 배치된 기하학적 라인에 의해 재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특유의 운동성을 보여주는 베이컨의 공간을 REM의 뮤직 비디오는 거의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럴 때 그 공간은 고전에서 차용된, 그리하여 탈맥락화된 새로운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 마이클 스타이프가 마치 베이컨 그림의 등장인물처럼 이상한 자세로 존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간단한 예를 통해 보더라도 뮤직 비디오가 제기하는 영상적 의미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것이 처음에는 어느 가수의 어느 음반이 팔리는 양을 늘리기 위해 제작된 일종의 광고였겠지만 나중에는 점차 그 모든 것을 혼합하고 뒤섞으면서 새롭게 존재하게 되는 탈근대적 텍스트의 대표적 사례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있는 것은, 뮤직 비디오의 이러한 특성이 MTV의 독특한 편성 속에서 탈맥락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성기완/대중음악 평론가 creol@hitel.net ▶ MTV 20주년 ▶ MTV의 프로그램들 ▶ 대단했던 순간 베스트 20 ▶ MTV 네트웍스 인터내셔널 부사장 리사 해킷 인터뷰 ▶ MTV 코리아 김순철 대표 ▶ MTV가 영화에 끼친 영향 - 속도와 편집, 그리고 소리의 조화 ▶ 뮤직비디오에서 출발한 영화감독들 대표작 ▶ 케이블TV 시대를 사는 MTV의 전략 ▶ 인상적인 뮤직 비디오 네편

고마 해라, 충분히 지루했다

<시사매거진 2580>의 보도로 촉발된 문화방송(MBC)과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연제협)의 갈등에 대해 여기저기서 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보도 취지가 옳은 것이긴 해도, <…2580>이 좀 오버했다”, “그래도 집단으로 출연거부하겠다는 건 잘못이다”, “한바탕 소동 피우고 시간 지나면 어차피 해결될 문제 아니냐”…. 연제협의 주장을 매일 그대로 실어나르다시피 하는 일부 신문들을 본 뒤 인터넷을 뒤져보면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대다수 네티즌들은 정반대의 편에서 연제협을 비판하고 있었다. 참 요란했다. 연제협의 출연거부선언(7월3일)에 이어 김건모, 박진영, 신승훈 등 연제협 소속 인기가수들이 모여 “우리는 노예라 불리기를 거부한다”고 선언(10일)했고, <…2580>은 ‘연예인 대 매니저’ 2편을 내보냈다(15일). 사태 초반의 관심사는 <…2580>에서 언급된 ‘노예 계약’의 진위 여부였지만, 그동안 매니저들이 문화방송에 대해 가졌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힘겨루기’ 양상으로 전개됐다. 그 과정에서 PD 비리, 가수들의 출연료문제 등이 우회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긴박하게’ 돌아가던 사태는 연제협이 <…2580>의 후속보도에 대해 ‘무대응’을 선언하면서 김이 팍 빠졌다. 연제협은 문화방송과 어떤 대화도 하지 않는 대신, 언론중재위와 민·형사상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했지만, 더 내놓을 카드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모양이 됐다. 시끌벅적했던 사태는 그뒤 ‘지지부진’이다. 문화방송은 시종 “보도에 문제가 있다면 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하면 되고, 시청자들을 위해 방송 파행은 끝내자”는 의견이고, 연제협은 “매니저들을 사기꾼으로 매도한 것은 왜곡·편파보도니 <뉴스데스크>를 통해 사과하라”는 원칙을 버리지 않고 있다. 제기되는 새로운 현상이 없으니 시청자와 네티즌들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난감해진 것은 당사자들이다. 법적 대응을 천명한 연제협은 곧바로 태도를 누그러뜨리기도 힘들고, 문화방송이 사과방송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적다. 사태를 죽 지켜봐온 시청자들의 눈이 있으니, 타협을 한다 해도 적정선을 정하기 힘들다. 이번 일이, 연예매니지먼트산업이 거대 방송사를 난처하게 만들 정도로 급성장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또 연제협과 방송사 모두에 ‘교훈’을 주는 계기도 됐다. 먼저 연제협. 연제협 구성원들은 그동안 주로 방송사 예능국 PD들과 개별적인 접촉을 하며 공생관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이다. 방송사에는 필수적이라 할 연예인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막강한 협상력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이를 너무 과신했다. 연제협은 문제가 된 <…2580>쪽에는 한마디 이의제기도 없이 곧장 문화방송 텔레비전 출연거부라는 강수를 뒀고, 이 때문에 처음부터 ‘집단행동’이라는 비판을 떠안은 채 싸움을 진행했다. 연제협 고위관계자마저 “초반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를 하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연제협은 또 “일부에서 불공정 계약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개선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노력없이 <…2580> 보도를 부인하는 데 급급했다. 집단적인 출연거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효과는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처사였다. 문화방송에는 “이번 일은 다 방송사의 업보다”라는 비판이 따라붙는다. 방송사는 탤런트들에게는 회당 수백만원씩 주면서, 가수들에게는 10∼20만원이라는 턱없이 적은 출연료를 지급하며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다. 비판에 아랑곳없이 연예인들을 떼거리로 출연시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을 경쟁적으로 제작·방송한 것이 방송사들이다. PD 비리 시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기에 “이번 기회에 방송 프로그램들을 확 바꾸자”는 시청자들의 의견에 귀가 기울여진다. 문화방송의 가요순위 프로그램인 <생방송 음악 캠프>가 뮤직비디오로 대체됐을 때, 많은 네티즌들은 “립싱크를 안 보니까 훨씬 좋다”에서 “이참에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없애버리자”며 반겼다. 가수들을 방송사에 공급하는 연제협과 그들을 화면에 담는 방송사 모두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문화방송 내부에서도 이런 의견들을 반영할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방송 예능국의 장태연 책임프로듀서는 “사태가 마무리되면 가요순위 프로그램을 포함해, 그동안 문화방송이 타성에 젖어 제작·방송했던 프로그램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사와 연제협의 최종적인 소비자인 시청자들은 방송 파행을 동반한 둘 사이의 지루한 다툼을 지켜봐왔다. 이제, ‘달라진 프로그램’으로 보상받지 못한다면 이번엔 시청자들이 방송사를 향해 ‘보이콧’을 선언하지 않을까. 황준범 기자/ 한겨레 문화부 jaybee@hani.co.kr

<한국영화 걸작선>을 만드는 사람들

60, 70년대 한국영화 방송하는 EBS 프로그램 <한국영화 걸작선>이 궁금하다 ● 일요일 밤 10시10분. 채널13으로 가보자. ‘한국영화 걸작선’ 두툼하고 육중한 고딕체 타이틀이 떴다가 사라지면, 중년 남자가 극장 객석 사이 통로를 걸어내려오며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그가 영화, 혹은 영화라는 이름의 추억 여행 가이드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 남자, 김홍준 감독은 객석에서, 영사기 옆에서, 그날의 영화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한국영화 걸작선’이라는 요리를 선택한 시청자들을 위한 전채인 셈이다. 그리고 메인 디시인 영화가 시작되고, 끝난다. 여기서 바로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끈다면, 그는 ‘초짜’ <한국영화 걸작선> 시청자다. ‘진득한’ 마니아들은 2, 3초 동안의 검은 자막을 지켜보며 한숨 돌린다. 달콤한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주 방영작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듣는 영화이야기나 김홍준 감독이 들려주는 남은 이야기들이 그것.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23일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을 방영했을 때는 신성일, 엄앵란 커플이 등장했다. 지난 7월15일 석래명 감독의 <고교 우량아>를 방영했을 때는 주연배우 김정훈씨가 인터뷰에 응했다. 조각 같은 미모의 청년 모습에서 곧이어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현재의 신성일씨, 그리고 소년 시절의 앳된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장년의 나이로 카메라 앞에 나타난 김정훈씨의 얼굴은 직전에 보았던 영화 속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아련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시청률을 뚫고 KBS <태조 왕건>과 ‘맞장뜨는’ 프로그램인 <한국영화 걸작선>의 조용한 혁명은 그렇게 7개월 넘게 계속되고 있다. 6월부터는 본방송을 일요일 밤 10시10분에 하고, 원래 본방 시간이었던 토요일 낮 12시에는 재방송을 하고 있다. “<한국영화 걸작선>이 방송타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다”라는 김홍준 감독의 평가를 빌리지 않더라도 그동안 공중파에서 한국영화가 찬밥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시청률이 원인이었으리라. 그러나 한국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무장한 몇몇 동지들의 ‘봉기’로, 지난해 12월9일 토요일 한낮에 작은 혁명이 발발했다. 시작은, 사랑이었다. 한국영화에 대한. <한국영화 걸작선> 이승훈 PD는 96년에서 97년 사이 <시네마 천국>에서 한국영화 작가 시리즈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김상옥, 임권택, 김기영, 김수용, 이장호, 정지영 등의 작품을 방송했는데, 한국영화 필름을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결국 비디오 출시된 것만 틀었다. 절름발이 방영을 한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그뒤로도 오랫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어떻게 <한국영화 걸작선>을 기획했나. = 어떻게든 한국영화를 틀고 싶었다. 상시적 프로그램으로 안 되면 <세계의 명화>에 한달에 한번씩이라도 한국영화를 끼워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에 언젠가는 1회성 특집으로도 검토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도 연이 닿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12월에 소규모 편성 개편이 있었다. 그때 기획팀장이 개편에 맞추어 한번 추진해보라고 했다. 수급과 가격을 알아보니 다행히 예상 제작비와 맞았다. 일단 50, 60년대 영화 중 작품성과 흥행성, 감독 등을 안배하여 20∼30편을 추려냈다. 그리고 영화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11월쯤 영상자료원쪽과 만나 목록에 있는 작품들의 판권과 네거필름 상태 등을 확인했다. 판권계약과 텔레시네 작업까지는 배급업자에게 맡겼다. 첫 작품은 <마부>로 정했다. 첫 방송을 시작할 때까지도 확정된 리스트는커녕 당장 그 다음주에는 무엇을 할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매주 작품을 찾아 뛰어야 했다. 사정은 지금도 비슷하다. <카인의 후예> <명동 나그네>까지 7월 리스트는 정해져 있지만 8월엔 어떤 작품들을 할지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왜 <마부>였나. = 일단, 많이 알려진 작품이었다. 사실 처음엔 <김약국집 딸들>을 먼저 하려 했다. 그런데 <김약국집 딸들>은 텔레시네를 해야 해서 방송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다. <마부>는 스탠더드 사이즈였다는 점에서 합격점이었다. 그리고 첫 방송이었기 때문에 좀더 대중적인 작품, 속된 말로 흥행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마부> 시청률이 2.4% 나왔다. 교육방송 평균 시청률 1%에 비하면 경이로운 수치였다. 격려성 전화, 사례성 전화세례도 빗발쳤다. 공군 예비역 장교 출신이라고 신분을 밝힌 어느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대한독립만세’라도 부르는 것 같았다. “이형(?), 잘했다! 정말 좋다!” 이후로도 시청률 2%대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옛날 영화니 나이든 사람들만 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진 않다고.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발견하곤 그 다음부턴 매주 챙겨본다는 젊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60년대 우리 영화, 이렇게 훌륭할 수가 있나요”란다. 전화로 다음주에 뭐하느냐고 물어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고 심지어 보도자료라도 보내줄 수 없느냐는 요청도 받는다. 제작은 외주업체인 브이투원에서 맡고 있다. 브이투원 윤팔남 PD가 연출을, 이승훈 PD는 기획을 담당한다. 한국영화를 트는 프로그램을 한다는 컨셉을 잡고 외주업체들에 세팅을 맡겼다. 경쟁률 10 대 1. 브이투원이 제출한 기획안은 인터뷰를 뒤에 배치한 포맷이 눈에 확 들어왔다. 대개 외주업체들이 영화 프로그램은 쉽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노하우가 없으면 안 된다. 자료가 잘못된 것도 너무 많은데 그걸 그대로 쓰기 쉽다. 그런 것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등 쉽지 않은 작업이다. 워낙 자료도 없고. 자료가 그렇게 없었나. =변변히 믿을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한국영화 걸작선> 만들면서 딱 3번 놀랐다. “이렇게 영화를 잘 만들었을 수가!” “이렇게 자료가 없을 수가!” “시청자가 이렇게 많이 볼 수가!” 디비디비딥닷컴에 많이 의존했고, 정종화 선생님의 증언도 참조했다. 스크린 뒤의 두 남자 외에 시청자와 직접 마주치는 진행자도 중요했다. 처음에 물망에 올랐던 사람들은 이른바 당시 스타성 있는 사람들. 하지만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은 듯했다. 이승훈 PD는 김홍준 감독을 떠올렸다. 느낌이 통했을까. 어느날 교육방송 부사장이 복도를 스쳐지나가다 툭 던진 말, “진행자 생각했어? 김홍준 감독 어때?” 60, 70년대 한국영화에 조예가 깊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신뢰가 갔다. 김홍준 감독에게는 지난해 10월 부산영화제 때 만나서 운을 뗐더니, “한국영화에 관계되면 무보수라도 돕겠다”고 흔쾌히 승낙했다. 희·로·애·락, 그리고 에피소드들들들 프로그램을 만들다보면 희로애락의 순간들이 쉴새없이 교차한다. <한국영화 걸작선>도 슬프기도 하고, 아찔하기도 했던 순간이 있다. 2월3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을 방영할 때였다. <춘향전>은 홍성기 감독의 내리막길이 시작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1961년작인데, 개봉 당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가 흥행에서 실패한 영화다. 2월3일 토요일 12시에 방송되기 직전 감독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김홍준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30분 전에 돌아가셨다고. 어떻게 대처했나. = 사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꼭 인터뷰를 하고 싶었는데 병원에 계셔서 못했다. 그래서 그냥 “쾌유를 빕니다”라는 자막을 집어넣은 상태였다. 급히 그 부분을 자르고 “홍성기 감독이 30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로 대치했다. 사실 조금만 늦게 돌아가셨으면 쾌유를 빕니다로 나갔을 것 아닌가. 돌아가신 분에게. 아찔했다. 오리지널 사이즈를 복원한 것은 정말 뿌듯하다. <맨발의 청춘> <김약국집 딸들> <갯마을> <춘향전> 등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를 그대로 방영했다. 왜 위 아래에 검은 띠를 두르느냐 하고 항의하는 시청자들도 있지만, 원작의 분위기, 감독과 촬영감독의 의도를 존중하고자 되도록이면 그대로 방영한다. 필름이 잘린 것도 그대로 내보낸다. 예를 들어 <남과 북>은 원래부터 중간에 1분 넘게 필름이 없다. 검열에서 잘려나간 것이다. 이 부분도 내보냈다. 대신 블랙 부분을 자막 처리했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블랙으로 나갑니다, 하고. 방영할 때 2대 원칙이 무편집, 무삭제다. 하지만 방송이다보니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을 경우가 있다. 원칙을 어긴 경우가 2번 있었는데 <팔도 며느리>와 <공처가 삼대>가 그것이다. 물론 감독이 생존한 경우엔 감독에게 미리 알려 허락을 구한다. 그리고 등급 고지 뒤에 삭제한다는 말을 내보내 시청자들에게도 알린다. 시청자들이 어디가 잘렸는지 알 수 있을까. = <공처가 삼대> 때 홈페이지 게시판에 지난 4월 여성영화제에서 봤다며 어떤 분이 글을 올렸다. “두 장면이 삭제되었는데, 잠을 자다 깬 신성일씨가 꼬마 삼촌을 발견하고 아내를 깨워 꼬마 삼촌을 바닥으로 옮겨놓고 아내와 침대에 드는 장면에서 삼촌의 잠꼬대에 놀라고 나서도 정사장면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부분이 약간 잘린 듯하고요…, 남자들이 여관방에 모여 있을 때 혼자 빠져나온 신성일씨가 아내를 공원으로 끌고가 싸우다가 화해하고 여관에 간 장면에서도 둘의 정사를 의미하는 부분이 약간 삭제된 듯해 보입니다”라고. 정확했다. 가슴이 서늘했다. 시청자들 중에는 녹화하는 사람도 많다.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러닝타임이 정확하지 않아 녹화하다가 테이프가 끊겼다고 항의하는 글들도 눈에 띄며, 자신이 녹화한 영화들의 목록을 줄줄이 적고 미처 녹화하지 못한 것과 교환하자고 제의한 열혈 시청자도 있다. 그중 청운양로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한다는 네티즌 김승희씨는 자료를 검색하다 우연히 <한국영화 걸작선>을 발견하고 보게 되었다면서, “… 물론 영화를 사랑하시고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도 반가운 일이지만 저희 양로원 어르신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잘 아는 옛 배우들이 화면에 나오자 너무너무 좋아하셨어요”라는 가슴 한구석이 짜해지는 글을 올렸다. 어떤 영화를 방영해달라는 요청 방식도 가지가지다. ‘극장장(이승훈 PD의 아이디)님 멋쟁이’ 운운하는 애교파, ‘안 해주면 굶어죽겠다’는 협박파도 있다. 제작과정 A to Z 대본 작가는 따로 없다. 이승훈 PD는 예전에 <시네마 천국> 시절에도 영화 마니아 중에서 작가를 선별해 썼고, 따로 작가를 두지 않았다. <한국영화 걸작선> 대본은 윤팔남 PD가 전담한다. 수급상황 등을 고려해 다음주에 상영할 영화를 정하면 먼저 테이프를 보고 이승훈 PD와 회의를 한다. 예를 들어 <고교 우량아>의 경우 누구를 인터뷰할까, 주연배우인 이승현, 김정훈씨는 어떨까. 각본을 쓴 윤삼육 작가는 어떨까, 둘 다 하자. 그렇게 해서 7월15일 밤, 시청자들은 70년대 상황과 <고교 얄개> 시리즈 등 당시 유행하던 하이틴영화는 70년대 억압된 현실에 해방되는 판타지였음을 김홍준 감독의 입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고교 얄개>의 엄청난 흥행에 고무된 제작사에서 <고교 얄개2>를 준비하고 있던 중에, 다른 영화사(삼양)에서 원작자 조흔파 선생, 석래명 감독, 윤삼육 작가를 스카우트해 가버린 거야. 이에 놀란 연방은 작가를 다시 스카우트해 와 <고교 우량아>를 만들었지. 감독과 원작자는 포기하고 대신 캐스팅을 그대로 가는 선에서 아쉬운대로. 그래서 이승현, 김정훈이 그대로 캐스팅되어 갔지.” <고교 우량아>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윤삼육 작가가 들려줬다. 7월 마지막주에는 <명동 나그네>를 방영할 예정인데, 조영남씨가 신성일씨 흉내내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니, 조영남씨를 섭외하면 어떨까 이야기하고 있다고. 이 PD와 김홍준 감독에게도 VHS 테이프를 복사해서 미리 준다. 그리고 대본을 작성하고, 촬영장에서 슛 들어가기 전에 다시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이승훈 PD는 <한국영화 걸작선> 잘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저 불씨를 댕긴 것뿐이다. 좋은 점이 있다면 한국영화사에 DVD나 책 등 자료출시 기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말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작품들은 60년대 모더니스트인 이성구 감독, 60년대 코미디영화의 대가 이봉래 감독, 그리고 <서울의 지붕 밑>을 만든 이형표 감독 등이다. 김기영 감독 작품은 방영 요청도 많고, 가장 하고 싶은 감독인데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 못 하고 있다. 방영시간과 심의등급이란 걸림돌도, 작품 화질과 음질이 안 좋은 것도 모두 안타깝다고. 불씨를 댕겼다, 불꽃이 타올랐다 몇 사람이 댕긴 한알의 불씨가 어떤 불꽃으로 타오를지 <한국영화 걸작선>을 시작할 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육방송 내부의 평가대로 ‘50대 후반 이후 장년층의 20, 30대 때의 잃어버렸던 문화를 되찾아줬다’는 데에는 누구도 의의를 달지 않을 듯하다. 물론 더러 ‘걸작선’이라는 이름이 무거운 듯한 영화도 있고, 지금 감각으로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영화도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한국영화 걸작선>은 그동안 잊혀졌던 지난 시대의 한국영화들이 오늘의 관객과 수인사를 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충무로가 향유하고 있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아버지 어머니가 거기 있었고, <한국영화 걸작선>이 잃어버렸던 그때를 복원했다면, 한국영화 미학의 젖줄을 다시 발견했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글 위정훈 기자 oscarl@hani.co.kr·사진 손홍주 기자 lightson@hani.co.kr디자인 한정연 han7329@hani.co.kr ▶ <한국영화 걸작선>을 만드는 사람들 ▶ <한국영화 걸작선>이 발굴한 영화, 영화인 ▶ 판권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