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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알쏭달쏭 외계인백과 - 영화를 통한 세 가지 사례 분석

<인디펜던스 데이>의 한 장면. 외계인이 세계 주요 도시 상공에 출몰한다. 뉴욕의 어느 고층 빌딩 옥상 위에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이상한 옷을 입고… 한마디로 시집, 장가 가는 사람들마냥 설렌 모습으로 모여 있다. 임박한 외계인의 등장에 전세계가 긴장하는 시국에 무슨 난리냐고? 이들은 외계인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늘을 향해 외친다. “우리를 데려가줘요!” “환영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외계인의 영접을 받아 낯선 별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았느냐고? 글쎄, 인간의 몸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게 새로 개발된 외계인의 텔레포트 방법이 아니라면 저승에 다들 가 있는 것 같다만. 요점은 이것이다. 세상에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적지 않다는 것.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들에서 그들의 존재는 대개 희화화되지만,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종교까지 있는 것을 보면(사이언톨로지는 톰 크루즈, 존 트래볼타 같은 스타들을 거느리고 있다) 외계인이란 아이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두편의 외계인 영화 사이의 간극이다. 가 그려 보인 눈물나는 우정의 대상이었던 외계인과 <우주전쟁>에서 지구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외계인은 어떻게 다를까? 혹시 당신도 은밀하게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있지 않은가? 으응? 10여년간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TV시리즈 의 주인공 멀더를 생각해보라. 그는 외계인을 믿었지만 미치광이라고 기억되는 대신 외계인에 의해 피해를 입은 상처를 지닌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우리의 호기심은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외계인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래서 우리를 찾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은 외계인과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외계인과 우정을 나누고 싶은가? 외계인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가? 아니면, 다 필요없으니 외계인을 죽이고 싶은가? 자, 원하는 항목을 골라 읽어보자. 나중에 외계인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써먹을 수 있게. 내 친구는 외계인 외계인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은밀한 소망을 가진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 일명 “외계인을 친구로 만드는 비법!” 그동안 친구에게 무시당할까봐, 애인에게 차일까봐, 부모님께 의절당할까봐 외계인을 친구 삼고 싶다는 말을 고백하지 못하신 분들은 열심히 들어주시라(도움이 될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기자도 외계인을 대면한 적은 없는 터라). 를 벤치마킹할 생각이라면 무엇보다 집 위치가 중요하다. 홀로 남은 외계인이 우연히 당신 헛간으로 피신오게 하기 위해 추천하는 장소는 한적한 시골이나 교외 지역. 에서는 어느 한적한 마을의 숲속에 우주선이 나타난다. 우주선에서 내린 외계인들은 지구의 각종 표본들을 채취하던 중 인간들이 나타나자 서둘러 지구를 떠나는데, 그 와중에 뒤처진 한 외계인만 홀로 남게 된다. 방황하던 외계인은 한 가정 집에 숨어들고, 그 집 꼬마 엘리어트와 조우하게 된다. 정부 기관에 외계인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게 각별히 조심할 것. 운이 좋다면 당신은 외계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다. 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호적인 외계인과 친구가 되는 방법은 일반 지구인과 친구가 되는 법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마음을 열 것. 마음만 연다면 세상 그 어떤 존재인들 친구가 될 수 없겠는가. <맨 인 블랙> 다른 이의 병을 낫게 하고 싶은 사람은 의사가 되고, 속세에 찌들지 않고 종교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은 종교인이 되면 된다. 그런 맥락에서 외계인을 자주 접하고 심지어 친구가 되어보고 싶은 사람은 외계인을 자주 접하는 직업을 택해보면 어떨까. MIB(맨 인 블랙) 임무는 지구상의 외계인 거주자를 지도편달(?)하며 평화를 지키는 것이다. 어떻게 MIB가 될 수 있느냐고? <맨 인 블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세상에 진실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저질이라며 무시하는 타블로이드지밖에 없다(한국에는 이마저도 제대로 선정적이지 못한 게 유감이지만). 요원 모집은 비밀리에 이루어지지만 MIB들의 정보지인 타블로이드지를 유심히 살피며 업계 동정을 주시하면 언젠가 검은 슈트의 사나이들이 당신에게 접근할 것이다. MIB가 된 뒤 당신의 부모나 옆집 꽃미남이 실은 날개 달린 거대한 벌레 같이 생긴 외계인임을 깨닫고 절망한다면, MIB 동료에게 기억을 지우는 빔을 쐬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나는 외계인과 결혼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외계인과 결혼을 하고 싶어한다면 당신은 정말 사회적으로 외톨이일 가능성이 높다. 혹시 당신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괴로움에 외계인을 사귀어보고자 한다면 일단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스승님에게 진지하게 상담을 먼저 받아볼 일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원하는 게 “색다른 존재”와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면 다음의 필살기를 적용해보자. <애스트로넛> 조니 뎁과 샤를리즈 테론이 출연한 <애스트로넛>은 극한의 심리극이자 공포영화다. <애스트로넛>에서 질리안은 외계인과 결혼하는 게 아니라 남편이 외계인에 씌인 상태. 다시 말해 자발적이지 않은 이유로 외계인과 살게 되는 것이다. 우주비행사 스펜서는 우주에서 동료와 함께 인공위성을 수리하던 중 지구와 송신이 두절되고 2분간 완벽하게 암흑의 순간을 보낸 뒤 지구로 귀환한다. 스펜서의 아내 질리안은 남편의 귀환 직후 쌍둥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질리안은 임신한 쌍둥이가 인간과 외계인의 혼혈이라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질리안이 생명을 건 사투를 벌이거나 말거나 “그래도 얼굴과 몸은 조니 뎁인데…”라며 아쉬운 마음이 든다면 부디 우주조종사와 결혼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그(혹은 그녀)에게 위험한 지역으로 탐사를 나갈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하지만 당신의 소원이 벽에 x칠할 때까지 사는 거라면, 그들이 소기의 목적(외계인과 지구인의 혼혈을 낳는다는)을 달성한 뒤 당신을 버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피임에 신경쓰는 게 좋을 것이다. <새 엄마는 외계인> 킴 베이싱어 같은 외계인이라면(여자 입장으로 상상하자면 브래드 피트 같은 외계인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어서 옵쇼, 감사합니다”하며 살림을 차리고 볼 일이다. 특히 <새 엄마는 외계인>에 나오는 외로운 홀아비 스티브에게 킴 베이싱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 별볼일없는 홀아비가 쭉쭉빵빵 금발 미녀 아내를 두게 된 사연은 이렇다. 어린 딸과 사는 과학자 스티브는 호기심으로 우주에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데 지구에서 90억 광년 떨어진 행성에서 이 광선을 수신한 외계인 셀레스트는 조사차 지구를 찾는다. 셀레스트는 지구의 관습을 몰라 실수 연발이지만, 스티브는 이 아름다운 외계인에게 한눈에 반한다. 셀레스트는 결혼, 사랑 등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체험하기 위해 스티브와 결혼한다. 잊지 말아야 할 중대한 사실 하나. 셀레스트의 경우, 식사는 배터리로 한다. 밥보다 배터리가 더 비싸다는 점을 감안, 절전 대책을 세워보자. 외로움에 밤잠 설치며 하늘에서 미남, 미녀가 뚝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 간절함을 담아 우주로 레이저를 발사해보자. 혹시 아는가. 안젤리나 졸리를 똑 닮은 외계인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체험해보고 싶어”라며 당신에게 진한 시선을 던질지. 외계인을 죽이는 두세 가지 방법 외계인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는 사실 공포다. 외계인은 그야말로 미확인 비행물체를 타고 나타난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게다가 인종문제에서 보아 익히 알고 있듯, 인간은 생긴 게 조금만 달라도 요란을 떨며 학대하고 죽이지 않던가? 우왕좌왕하다가 외계인에게 잡아먹히거나 몸을 점령당하거나 외계 종족 번식의 도구로 이용되기 전에 외계인을 그냥 죽여 없애고 싶으신 분들을 위한 솔루션이 여기 있다. <화성침공> 어느 날 화성인이 지구에 출현한다. 세계 평화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미국 대통령은 이들을 맞을 채비를 하지만, 평화를 원한다던 화성인들은 환영 인파를 무참히 살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요 인사의 살육. 미군 장성부터 지구 수비대원들, 화성인이 우호적이라고 주장했던 대통령 과학 자문위원, 심지어 대통령까지. 이제 지구는 멸망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지구를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설치던 화성인이 맥없이 죽는 것이다. 원인은 바로 주인공 리치의 할머니가 즐겨 듣던 올드팝의 특이한 선율과 파장 때문. 화성인들의 머리가 터지면서 죽는 모습을 본 리치는 전세계 방송사에 같은 노래를 틀도록 한다. 한물간 노래를 들은 외계인이 자폭하는 대목은 팀 버튼식 유머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다. 자, 그런데 어떤 곡을 듣고 외계인이 죽게 될지 무슨 수로 알 수가 있느냐고? <화성침공>을 벤치마킹해서 <가요무대>를 들어놓는 것은 어떨까? 할머니들이 듣는 음악이 특히 효과가 좋은 것 같으니 말이다. 주의할 점,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외계인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감독은 안티 디카프리오 사이트가 퍼뜨린, 디카프리오가 사실은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지구를 지켜라!>의 영감을 줬다고 말한 바 있다. 엉뚱한 시작이었으나 2003년 최고의 데뷔작으로 손꼽힌 이 영화는 홀로 외계인의 지구 점령을 걱정하는 청년 병구의 이야기를 그린다. 강원도 한 탄광촌에서 마네킹 만드는 일을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는 병구는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이 지구를 침공하려는 외계인의 음모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병구는 지구인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는 화학공장 사장 강만식을 납치한다. 사각팬티만 걸친 백윤식의 열연과 장준환 감독의 재치가 돋보이는 이 영화에서 병구는 결국 사랑하는 녹색별 지구를 지키지 못하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설명에 따르면 외계인을 분석한 병구의 노트는 정확하다. 외계인을 고문해서 재벌 집 비밀금고 번호라든가, 좋아하는 배우의 휴대폰 전화번호 같은 걸 알아내고 싶다면 다음의 방법을 이용해보자. 병구의 치밀한 연구에 따르면 물파스는 외계인의 신경계를 파괴한다. 하지만 물파스를 바르는 것만으로 효과가 없을까 우려된다면, 때수건, 일명 ‘이태리 타올’로 외계인의 발등을 피가 날 때까지 문지른 뒤 물파스를 듬뿍 발라준다. 주의할 점,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도 이런 방법을 쓰면 뭐든 불게 되어 있다. 차카게 살자! 영화화된 SF소설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우주전쟁>은 올 여름 최고의 블록버스터. SF소설의 거장 H. G. 웰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웰스의 <우주전쟁>은 최고의 SF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공격적 성향의 화성인들이 지구를 먼저 공격하면서 사람들이 겪는 일을 그린다. 시대 배경이 19세기 말엽이기 때문에 책에서는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도망다니는데, 그래서 요즘 SF영화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지루하거나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1898년에 이런 상상력을 발휘한 웰스에게 경의를. 스필버그-크루즈 콤비가 영화화를 결정한 SF소설은 웰스의 것뿐은 아니다. 2002년 개봉된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필립 K. 딕의 단편을 각색한 것. 필립 K. 딕은 많은 성공적인 SF영화들의 젖줄을 댄 작품들을 쓴 작가다. <블레이드 러너>는 그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낳았고, 같은 문제제기가 <공각기동대>에서 확장된다. <토탈 리콜>과 <페이첵> 역시 필립 K. 딕의 작품들에서 탄생했다. 그의 작품들의 특징은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는 압축미 있는 이야기 진행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SF소설이지만, 때로 여러 번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그 뜻을 따라가기 힘든 작품도 있을 정도.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의해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도서관에서 가장 훔치고 싶은 책’이라는 도발적인 설명과 함께 전 5권이 재출간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국내 개봉을 앞둔 작품으로, 코믹 SF의 진수를 보여준다. 참고로, 책의 서문이 가장 웃기니 놓치지 말 것.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에 대한 풍경화, <극장전>

이 글은 영화 <극장전>에 관한 평이자, 그 영화에 관해 묶여 있는 두 고서에 대한 보론이다. 나는 <씨네21>에 실린 <극장전>에 관한 허문영(505호 전영객잔)과 정성일의 글(507호 전영객잔) 두편을 정성일의 제안처럼 느슨하게 묶인 두개의 고서로 보기로 했다. 그래서 마치 선배감독 이형수의 영화를 보고 나와 영향을 받은 동수가 행위를 반복하고 흉내내면서 혹은 차이를 만들면서 완성되는 영화 <극장전>의 그것처럼 이 글을 끌고 가려고 한다. 나로서 그들의 글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먼저 제시한 몇몇 견해가 매우 흥미로운 탁견이며, 내가 미처 진전시키지 못한 몇 가지 질문들을 훨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장전>의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의 행위들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듯이, 반복과 흉내 속에 차이화의 시도가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영화보기 “<극장전>은 두개의 독립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독립된 이야기들이면서 앞의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남자가 관람한 영화가 됩니다. 우린 어떤 영화를 ‘잘 보고 나왔을’ 경우, 그 영화가 주는 어떤 영향 속에서 짧게는 몇분, 길게는 며칠을 지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그런 우리의 경험을 다시 쳐다보는 과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홍상수는 보도자료에 실린 감독의 의도를 이렇게 시작하며 썼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 말이 의례적인 언급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극장전>에 대한 평들은 홍상수가 말한 그 ‘영향’을 놓고 보는 방식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그의 공식적인 말에 잡혀 바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바보가 되기를 자청하면서, 즉 <극장전>의 인물들이 그 영향관계에 어떻게 잡혀 있는지 보면서 시작하려고 한다. 같은 지점을 다른 방식으로 통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상투적 언어를 새로운 이미지의 층으로 뚫고나가는 것, 지극히 평범한 내용(가령 텔레비전 드라마와 한치도 다를 바 없는 불륜에 대해 그동안 말해온 것처럼)을 다루되 형식이 다를 때 어떻게 전체가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 홍상수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이 그 영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 말은 너무 뻔해서 지나치기 쉽지만, 너무 뻔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홍상수의 영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도 그것에 대해 뻔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따라하고, 따라하고, 따라한다 ‘영향의 연쇄’는 홍상수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관통하고자 허문영이 통찰한 ‘지속의 실패’의 작은 변형쯤으로 이 영화에 있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혹은 최초의 영향에 대한 잔영을 비틀어 이어가거나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지속시키는 것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맞거나 초래한다. 그러면서 인물들은 실패하지만, 영화는 도리어 앞으로만 나아간다. <극장전>은 크게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이라는 이중의 틀로 붙어 있지만, 영향의 연쇄는 그에 상관없이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며, 최초의 경험은 반복적으로 변형된 일부가 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상원은 자살 시도의 이유를 19년 동안 의사소통 부재를 겪어온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온전히 그 이유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가 영실과 만나기까지 비어 있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본 연극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작품이 아닌 <어머니>라는 연극을 보러들어가는 것이 상원의 말을 뒷받침하지만, 영화 속 영화의 연극에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어머니”라는 외침은 대구가 되어 급기야 옥상 위에 올라가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 상원의 흉내로 이어진다. 또는 그 영화 속의 상원의 모습을 보고 나온 동수는 동창의 아내가 딸을 걱정하는 모정을 보고서는 선뜻 목도리를 벗어준다. 하지만, 차 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자 “어머니가 준 것”이라는 이유로 목도리를 다시 뺏어간다. 아마도 모정의 그림자가 상원과 동수에게 끼치는 영향은 여기까지 일 것이다. 이후에 최영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상원과 영실, 동수와 영실 사이에서의 가장 중요한 영향의 연쇄는 말할 것도 없이 섹스이다. 상원의 섹스 실패는 자연스럽게 <생활의 발견>의 경수를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를 홍상수의 전작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김상경이 연기하는 동수는 그가 본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상원의 말을 비틀어 반년쯤만 살다가 죽으면 진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헤프게 말한다. 어쨌거나 상원은 영실과의 섹스에 실패하고, 동수는 영실과의 재회 신청에 실패한다. 가령 영실은 남산(타워)과 같은 존재다. 동창회 자리까지 이어지는 남산(타워)의 영향 아래 그들이 잡혀 있듯이, 영실의 존재도 그들을 영향 아래 둔다. 한편, 동수의 행동과 말에 따르면 이 영향의 연쇄는 이미 선배감독 이형수와의 관계 속에 있던 것이다. 중국집에서 점잖은 동창은 말한다. “그러고보니 너하고 형수 형하고 친하긴 친했다. 서로 닮은 게 많잖아. 쿨한 척하는 것도 그렇고, 여자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하려던 영화도 비슷하지 않아?”(그러고보니 동수는 이형수와 같은 영화감독이 직업인데도 우리는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동수는 그 순간의 화제를 갈비찜 이야기로 피해버린다. 그러나 횟집에서는 영실에게 고백한다. “제가 그 형한테 영향 진짜 많이 받았거든요. 근데 자꾸 눈치를 주는 거예요. 자기한테 영향받은 걸 인정하라고. 그게 뭐야.” 영향을 받은 걸 인정하면서도 화를 낸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한다. “여관 간 거, 죽기 전에 눈내린 거, 말보루 사려다 못 피운 거, 약 한알씩 나눈 거, 그거 다 내 얘기예요”라고. 자신도 이형수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말보루 레드는 참 좋았는데, 그게 다 자기 얘기구나”라고 영실이 물으니, 대강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버무린다. 영향을 주었더라도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영실이 다시 묻는다. “근데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영실은 사람이 죽어가는 앞에서 너의 경험으로 그 영화에 일부 영향을 주고받은 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질책한다. 끝내 사지에 처한 이형수를 보고 나온 동수는 말보루 레드의 빈갑을 던지면서 생각을 많이 하면 담배도 끊을 수 있다고 다짐한다. 이미 정성일이 ‘인연의 매듭’이라고 지적했듯, <극장전>에서의 ‘담배’는 영향의 연속체 중 가장 끈질긴 것이다. 이형수 영화 속의 대사 “괜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 담배 한갑을 샀다”에서 시작된 담배의 잔영은 인물들에게 반복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는데, 동수는 지금 거기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건 기대할 만한 결심의 순간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실행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동수가 그 결심을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선영의 집 앞에서 뒤돌아나가는 것과 비슷한 마지막 장면의 앵글 안에서 <극장전>의 동수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담배를 끊겠다는 그 결심이 자기가 받은 모든 영향 관계에서 벗어나보겠다는 내용이라면, 그가 취한 형식은 잘못된 선택이다. 동수는 온전히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의 형식으로만 쓰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결심의 자세로 취함으로써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본 영화, 그리고 선배 이형수의 인물 상원에 다시 겹치고 만다. 홍상수의 말처럼 “한면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두 남자(혹은 그 이미지들이)가 하나의 이미지로 영화 마지막에 위태롭게 겹쳐지는 걸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극장전>은 사람 사이의 관계가 됐건 영화라는 환영과의 관계가 됐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영향 관계를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은 남자가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동수는 생각을 많이 해서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고 다짐하는데, <극장전>은 죽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결심하게 된 남자가 결국 그걸 못하게 될 거라는 예시 결말의 이야기다. 혹여 생각을 많이 해서 담배를 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수는 죽음의 영향에 대고 결심했기 때문에 달라지지 못하며,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한 게 없는 것이 된다. 죽음을 둘러싼 괴이한 혹은 우스운 만남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과 연관된 자들은 많았다. 그냥 많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많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과 민재 그리고 민수처럼 살해당하거나 살인하는 자들이 있었고, <강원도의 힘>의 상권처럼 스쳐지나간 살인과 연계된 자들이 있었고, <강원도의 힘>의 경찰과 <생활의 발견>의 경수처럼 자살하고 싶다는 제스처를 취한 자들이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헌준처럼 잘못했으니 죽여달라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심정이 모두 죽음을 미루고 싶은 동수와 이형수의 마음과 같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결심하거나 애원하는 홍상수의 인물들은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미 횟집에서 동수의 말을 들은 우리는 상원을 사이에 둔 동수와 이형수간의 복잡한 영향 관계를 알고 있다. 예컨대 홍상수는 이형수의 회고전에 붙은 포스터에서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상원의 얼굴을 크게 먼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형수가 그 영화에 직접 출연했었다는 영실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둘이 애인 사이였냐고 물어보는 동수의 질문에 의해 틀림없이 이형수라는 영화감독은 이기우가 연기한 상원일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병원에 갔을 때 그곳에 누워 있는 이형수는 이미 영화 속 영화에서 등장한 ‘소년의 아는 아저씨’(엔딩 크레딧에는 김명수 역에 ‘소년의 아는 아저씨’로 쓰여 있다)다.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홍상수로서는 관객의 예상을 미루게 하고 싶었던 인물을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동수와 상원과 이형수의 서로 비추는 거울에 대한 관계는 정성일의 통찰이 이미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극장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과연 이형수라는 인물이 등장하기는 할 것인가에 대해 의심을 가졌었다. 병원에 있다는 이형수는 혹시 <생활의 발견>에서 부산에 있다는 아버지의 역할 정도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명숙에 이어 선영을 만나게 되는 경수의 여행길에서 아버지가 구실이 되는 것처럼 선배 영화감독이라는 이형수도 동수와 영실을 만나게는 하지만 등장은 하지 않는 매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여기서 나는 정성일이 말하는 대타자로서의 아버지를 심화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이 꼭 있어야 한다면 그건 이미 병실에서 동수가 대체 아버지 이형수를 만나면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에 아버지의 자리가 중요하게 배정된다는 정성일의 생각에는 아직까지 느낌이 잘 통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이상한 점 하나를 본다. 다름 아니라 엔딩 크레딧에 이형수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소년의 아는 아저씨/김명수’라는 영화 속 영화의 배역과 그 배우의 연결은 있는데 김명수가 연기한 또 하나의 배역 이형수의 이름이 빠져 있다. 배우 김명수가 소년의 아는 아저씨이자 이형수로 일인이역했음은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형수의 이름은 여기서 빠져야 했던 것일까? 엔딩 크레딧의 기입 상태로만 보면 이형수의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거나 영화가 끝나자 사라진 것이다. 혹은 등장은 하지만 이름과 존재는 기입하고 싶지 않은 인물인 것이다. 왜 이형수는 누락됐을까? 이 질문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여기서 엔딩 크레딧상의 이형수의 누락이라는 근거로 복잡한 역할 구성의 질문을 다시 이을 생각이 없다. 정말 실수(?)면 어쩌겠는가? 그보다는 이형수의 등장을 둘러싼 또 다른 점을 주시한다. 그러니까 재차 돌아가 생각해보면 병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의 예상에는 동수와 상원만 있었다. 때문에 소년의 아는 아저씨 역의 김명수가 별안간 등장하는 병실장면은 <극장전>을 난해한 기운으로 휩싸이게 하는 정점이 된다.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홍상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결말부 형식, 즉 잘 나가던 대구를 깨고 한쪽으로 새어버린, 그래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던 그 방식을 <극장전>의 결말부에 뒤틀어 사용하고 있다. 병실에 있어야 할 이형수의 존재에 예상치로 가까웠던 상원, 즉 이기우가 아니라 소년의 아는 아저씨 김명수가 누워 있는 것은 헌준의 숏으로 시작한 영화가 갑자기 그의 실종과 함께 문호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선화를 사이에 둔 헌준과 문호의 대구를 일순간에 무너뜨렸던 것과도 같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헌준을 영화의 중도에서 ‘실종’시킴으로써 기이한 느낌을 심어줬다면, <극장전>은 가까운 예상에 있지 못했던 인물인 소년의 아는 아저씨를 돌연 ‘재등장’시킴으로써(동시에 예고된 상원의 등장을 실종시킴으로써),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대구의 구조를 깨고 단선의 구조로 나아갔듯, 대구의 구조를 깨고 복수의 구조로 들어가는 효과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헌준의 실종과 소년의 아는 아저씨의 예상치 않은 재등장(또는 예상을 벗어난 상원의 실종)은 같은 것이다. <극장전>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중요한 형식 일부를 취하면서 인물들의 주체를 죽음 앞에서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극장전>의 인물들은 이렇게 복수의 구조를 통해 소름 끼칠 영원불변의 실체인 죽음 가까이까지 근접한다. 으스스한 영화가 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렇게 죽음의 실체 가까이 갔는데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극장전>을 무지무지 웃기는 희극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미스터리한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가 웃기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도 곳곳에서 웃었고, 영화를 만든 홍상수도 죽음을 둘러싼 이 괴이한 만남을 희극이라고 인정한다. 말하자면, <극장전>의 기괴한 웃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 나의 궁금증 중 하나이다. 생각해보면 <극장전>이라는 영화가 죽음이라는 실체를 상대로 농을 거는 장면은 없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조차 죽음에 대해 언제나 진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단지 영향의 연쇄를 따라 죽음까지 다가가도록 이어주는데, 그것이 희극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죽음의 영향 아래 진지하게 사로잡힌 이들의 이야기가 희극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일상의 디테일이 아닌 영화적 표현단위의 반복 <극장전>이 웃기다는 인정(또는 반응)과 <극장전>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허문영의) 지적은 일면 같은 말이다. 두 말의 관계는 이 영화의 ‘희극성’을 들여다보게 한다. 가령, 두 번째 영화인 <강원도의 힘>까지 관객과 평자들은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일상의 정서를 보았다. 그의 영화를 일상의 저열함이라는 주제론적 시각으로 따라잡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그때 홍상수의 영화는 차라리 비루한 비극의 전통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오! 수정> 전까지 홍상수의 영화를 그런 일상의 정서와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화적 형식의 ‘표현 단위’들을 현실에 대한 디테일의 채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디테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반복 회귀하는 단위들임이 드러났고, 그렇게 보는 편이 나은 듯하다. 가령 내가 자주 마주치는 홍상수의 표현 단위들 중 <극장전>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보는 것과 메모하는 것’이다. 보는 것은 영향을 받는 것의 한 방식이고, 메모하는 것(또는 그 메모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한 방식이다. 연극을 보는, 영화를 보는, 남산타워를 보는, 그리고 길거리에서 문득 영실을 보는 상원과 동수는 멀뚱히 서서 백두산의 천지가 담긴 액자를 보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 설악산 안내 표지판을 보고 서 있는 <강원도의 힘>의 상권, 춘천과 경주에서 오리배를 보는 <생활의 발견>의 경수, 중국집 창 너머로 같은 여자를 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문호와 헌준과도 같다. 이를테면 영실은 가보지 못한 백두산의 천지이고, 올라가도 잘 모르겠는 설악산이고, 춘천과 경주 아무 데서나 보이는 오리배이고, 저 멀리 서서 번갈아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낯선 여자이고, 오다가다 마주치는 남산타워이다. 이때 영실은 잡히지 않는 자연의 일부로서 초상이기보다는 (이차적) 풍경이다. 반면 메모하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이 엇갈리고 실패했음을 가리키는 징조의 행위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보경이 효섭에게 남긴 메모는 끝내 효섭이 아닌 옆집 여자가 읽는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쓴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는 메모는 정확하지 않지만 지숙에 의해 지워진다. 더러는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선영의 남편을 벌하려고 쓴 메모는 제대로 전달자에게 가지 않고 길가에 버려진다. 명숙이 경수에게 남긴 메모는 남의 손에 넘어가거나 실패를 예고하는 선영의 메모로 회귀한다. 그중에 명숙이 남겨놓은 메시지(억지로 대입하자면 음성 메모쯤 되겠다)도 끝내 들을 수 없다. <극장전>에서 상원이 “죽기 전에 모든 걸 다 쓰려고”한 메모의 내용도 알 수가 없다. 일례로 보는 것과 메모하는 것을 들었지만, 홍상수가 말하는 조각들이란 감정을 조직하는 디테일보다는 영화의 형식을 완성하는 표현 단위들에 더 가까운 듯하다. 때문에 <극장전>에서 홍상수가 우리의 경험을 다시 한번 쳐다보자고 말할 때, 그것은 일상의 디테일을 통한 세밀화를 그려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구성하는 영화적 단위들의 불규칙한 반복 출현이 가져오는 느낌을 경험해보자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반복 출현하는 것들이 일상의 감정적 디테일이 아니라 바로 순수한 영화적 표현 단위이기 때문에(혹은 그 면이 강화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인물의 어떤 감정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의 주제를 잡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과연 <극장전>의 주제를 말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극장전>의 진정한 희극성 주제론을 펼치기 어려운 이유는 우선 이 인물들이 어떤 자들인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실과 자살을 시도한 뒤 상원이 간호사에게 구는 태도는 참 어이가 없다. 동수와 영실의 관계도, 동수와 이형수의 관계도 뭔가 석연치 않다. 특히 홍상수가 말하듯 “이상적인 인간의 행위”에 못 미치는 띄엄띄엄한 인물 동수는 더욱 미스터리다. 나는 촬영장을 며칠 구경한 뒤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당시 현장에서는 분명 인물들의 감정이 팽팽하게 살아 있다고 느꼈었다(<씨네21> 491호 기획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스케치’). 지금은 일부러 좀 과잉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영실이 갈빗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그때는 정말 침울하기만 했다. 아마 나는 그때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인물들의 캐릭터를 인물들의 정서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그들이 어떤 감정상태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는 말을 그들의 캐릭터가 부재하다는 말과 동의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김상경이 연기한 동수의 캐릭터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괴이한 캐릭터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수정> 이후 홍상수의 인물들은 캐릭터는 명확하지만, 그 정서를 알아맞히기는 힘든 인물들이 되어가고 있다. 줌렌즈의 무차별한 활용 역시 이점에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나는 같은 기사에서 감정과 심리를 너무 확연히 대변하여 촌스러운 퇴물이 되어버린 줌의 저 남용이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들이 다칠 만한 감정을 보여준 바 없으므로 줌의 사용 역시 시종일관 쓰여도 큰 탈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잡히지 않고 미끌거리는 인물들의 감정상태가 줌의 사용을 자유롭게 한 것일 수 있다. 요약하자면, 그 웃음은 어떤 과정에 의해 생기는 것인가? 인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웃을 수 있도록 어떠한 정서적 유도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출몰하는 영화적 표현 단위들만을 따라가다보면 거기에서 ‘희극성’이 출현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극장전>에서의 웃음은 홍상수의 말처럼 자신이 영화 속 인물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 생긴다. 그 인물들의 심리로 들어가 가치평가하거나 의미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감각만으로 그들의 외양적 존재를 포착할 때 생긴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관객은) 영화의 인물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들과의 정서적 회로가 끊기는 경험, 즉 결락의 상태를 경험한다. 인물들이 엉뚱하고 이상하다는 표현은 그런 경험을 묘사하는 우리의 일상어이다. 그리고 잠깐잠깐 동안의 짧고 반복적인 그 결락에 대한 반응이 <극장전>의 희극성이다. 그 순간 그들의 정서를 읽어내지 못해 생기는 결락, 그것에 기인한 웃음이다. 이것이 정말 <극장전>의 희극성일 것이다. <극장전>, 인물들의 초상화 혹은 죽음에 대한 풍경화 오로지 순수한 ‘지각과 감각’만이 사고 체계 논리의 자명성을 벗어난다. 반대로, 지각과 감각을 앞세워 표현했을 때 논리적인 사고 체계로 그 대상을 잡는 것은 불투명하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결락의 경험과 유사한 것이다. ‘동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웃기는 놈이다’, 라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흔히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활자 홍상수는 빤히 쳐다보면서 생기는 그 결락도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솔직한 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영화로 죽음까지도 그렇게 한번 물끄러미 쳐다본다. 죽음의 영향은 모두에게 공정하다.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지각되고 감각되는 끝은 자연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죽음의 영향 아래 놓인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자연현상의 법칙 아래 맴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홍상수가 감각과 지각을 선택하는 것은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그것은 마치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기 위해서다. 동수가 세상에 오래 남아 있기 위한 것처럼. 그래서 나는 세잔과 홍상수 사이에 공유된다고 말해지는 그것이 지각과 감각의 믿음에 대한 추앙일 것이라고 느낀다. <극장전>에서 섹스의 허무와 사랑의 허구는 이 죽음 전에 흐르는 현상적인 조각들이다. 홍상수는 <극장전>을 통해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처럼 했지만, 그 초상화는 죽음이라는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풍경과 정물처럼 그려진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500회 맞는 순풍 산부인과 [1] - <순풍…> 마니아들

장난이 아니다, 인간이 들어 있는 게다 영화가 생활공간에서 잠시 벗어나 들이쉬는 심호흡이라면, 텔레비전의 맥박은 일상과 같은 박자로 고동친다. 시간을 가둬두고 몇몇 주역의 운명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영화와 달리 TV는 매일 다양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흐르듯 비춘다. 드라마와 시트콤은 그래서 대중과 격의없는 ‘친구’가 되기 유리한 처지에 있는 반면 홀대당하거나 잊혀지기도 쉽다. 오는 3월8일 500회를 맞는 SBS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연출 김병욱)는 그런 의미에서, 살붙이의 친밀함과 명품의 ‘귀태’를 한 그릇에 담은 진귀한 일품요리다. 경쟁사 9시 뉴스를 종종 거꾸러뜨릴 만큼 치솟은 시청률(2000년 2월1∼23일 해당 시간대 평균 가구 시청률 25.1%, 개인 시청률 10.8%로 4개 채널 중 1위)도 경이롭지만 마니아들의 충정도 이나 에 꿀리지 않는다. 각종 동아리에 사이버 스페이스를 분양하는 Daum 카페 사이트에는 ‘순사대’(순풍을 사랑하는 대딩들)를 위시해 3개의 순풍 팬클럽이 공존하며, 4대 통신망에는 <순풍…> 열혈 시청자 모임이 개설돼 있다. 하이텔의 ‘순풍 대본 미리 보기’ 메뉴의 조회수는 350회 이후부터 많게는 2천명을 넘본다. 이들은 직장에서 몰래 <순풍…> 보는 법을 논하는가 하면, “오늘 순풍 놓친 분들, 내일은 꼭 챙겨봅시다”라고 따뜻이(?) 서로를 격려하며 <순풍…>을 정점으로 구획된 하루를 산다. 이 많은 사람들은 왜 “순풍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외치는 걸까. 어차피 매일 보는 <순풍…>이지만 한번 더 뜯어보자. 등신대로 빚어 세공한 캐릭터들 간지럼을 태워 짜내는 억지웃음은 근육만 피로하게 한다. <순풍…>은 절대 유도분만이나 제왕절개로 유머를 끄집어내지 않는다(그래서인지 ‘오버’하지 말라는 대사가 심심찮게 나온다). <순풍>의 웃음은 직장 동료나 친구의 독특한 말투와 습관적 실수가 우리에게 일으키는 웃음과 성분이 동일하다. 이는 <순풍…>에 대한 진단들이 입모아 지적한 대로 성격 희극으로서 <순풍…>이 이룬 성과에 기인한다. 우리는 오 박사가 칭찬이라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태란은 죽어도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며, 창훈이 웬만한 천재지변에는 미동도 않는 남자라는 점을 숙지하고 있기에 연출자가 보내는 아주 작은 큐사인에도 데굴데굴 구를 수 있다. <순풍…> 이전의 시트콤들이 ‘엘리베이터에 나비넥타이 낀 사연’으로 웃겼다면, <순풍…>은 ‘엘리베이터에 아무개가 탔다’라는 설정만으로도 알아서 키들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이 열개의 상황이 주어진다면 <순풍…>은 상황에 인물 수를 곱한 가짓수의 에피소드를 가동할 수 있는 셈이다. <순풍…>의 인물 묘사는 말 그대로 등신대(等身大)의 초상화다. 때로 우리는 직업이나 종교보다 어떤 반찬에 먼저 젓가락이 가느냐를 통해 한 인간에 관해 더 많은 진실을 간파한다. 이 점을 잘 아는 영특한 코미디 <순풍…>은 굵직한 사건과 무관한 ‘잉여분’의 조크를 통해 치밀하게 인물을 빚고, 거듭 정교하게 매만진다. 지난해 말 첫 등장한 창훈의 성격이 자리잡는 과정을 보자. 그는 순하지만 짓궂고 뭐든 대충 해도 남보다 월등하며 주변 돌아가는 데에 도통 무심한가 하면 사소한 일에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순풍…>은 대사로 새 인물을 브리핑하는 대신 매회 줄거리와 별 연관없는 창훈에 대한 정보의 파편을 슬쩍슬쩍 흘려넣었다. 면도하다 졸아 생긴 생채기나 병원 조회중에 딴짓하는 모습, 아수라장을 응시하는 그의 무표정을 하나씩 접하며 시청자들은 종잡을 수 없는 이 인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히트작 <남자 셋 여자 셋>만 해도 캐릭터는 모범생/날라리의 거친 구분이나 외모, 극히 특수한 행태- 번개머리, 식탐 등 -에 기댔지 <순풍…>처럼 세밀화를 그린 적은 없었다. "몽몽교? 우리는 순풍교!" PC통신에 모인 <순풍…>마니아들 지난 2월20일. 재방송으로도 <순풍 산부인과>를 만날 수 없는 일요일 저녁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천리안 순풍 마니아 클럽(go spsp) 대화방에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웃긴가게(이영철) 새벽별(홍윤주) 샤샤(박윤진) 순풍사랑(이은지) 飮食男子(김대겸) 밍기뉴(이일수) 액션태란(우재성) 붕어다방(이명옥) 열정(이소희) 그리고… 휴와 샤랄라님이 함께 한 대화는 날을 넘겨 21일 새벽이 돼서야 끝이 났다. 99년 5월에 처음 뭉친 이들은 거의 첫회부터 빠지지 않고 본 광신도들. <순풍…>을 왜 보냐는 질문에 ‘전도하는 재미에’라는 대답을 서슴없이 하는 중증 환자들이었다. 제작진 자체적으로도 100회가 넘어갈 때마다 베스트를 선보이고 있지만 마니아들이 기억하는 베스트가 궁금했다. 붕어다방: 나는… 일주일 동안 일하러 왔던 임시의사의 관점에서 본 순풍 사람들 묘사. 샤샤: 그리고 몽몽교 교주로 윤기원이 나왔던 거. 새벽별: 김찬우랑 오중이가 조폭들 앞에서 <인디안 인형처럼> 부른 거, 순풍 광고 찍은 것두요. ‘순풍 산부인과’로 6행시, 부. 부은 게 아니다. 인. 인간이 들어 있는 게다. 과. 과연 그런 게다 웃긴가게: 당시에… 6행시 꽤 화제였죠…. 또 오징어맨, 오중이 슈퍼맨 옷 입고…. 샤샤: 오지명 스토킹사건. 밤마다 전화기를 들면 헉헉 소리…. 새벽별: <청춘의 덫> 패러디두 좋았어요. 김 간호사 방바닥을 길 때…. <쉬리> 패러디 때도 웃겼어요. 가리발디였죠, 암호명이. 샤샤: 윤기원… 맞다. 사람 죽여본 적 있냐고. 차라리 내게 밥을 먹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줘…. 밤을 세워도 모자랄 듯 끝없이 에피소드들을 기억해내는 이들 중에 샤샤 와 새벽별은 ‘기억력 자매’로 통할 만큼 ‘순풍통’이다. TV 못 볼 사정이 생기면 주변 아무 텔레비전이라도 붙잡고 보고 그것도 힘들면 라디오(FM 87.75)로라도 듣고, 어느 순간부터 생각할 때는 혜교 내레이션 톤으로 생각한다는 이들은 그 연령대도 다양하다. 10대 부터 둘째아기가 뱃속에 있는 임산부까지…. 하지만 <순풍…> 앞에서만은 나이를 넘어 그저 열혈 시청자일 뿐이다. 새벽별: 근데 저는 요즘 <순풍…> 불만 중 하나가 내레이션의 남발이에요. 웃긴가게: 내레이션은 애전부터 많이 나오지 않았었나? 새벽별: 왕년에 영규님이나 김간의 내레이션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느낌이었는데 요즘의 오중이나 창훈을 통한 내레이션은 불필요하게 장면을 설명하기도 하고 혜교 내레이션도 극에 탄력을 주는 게 아니구 지루한 느낌이더라구요. 웃긴가게: 그러나 그런 대박을 계속 정형화해서 사용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가면서 좀 식상해지는 게 사실이지만. 새벽별: 이 또한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정답인 건 아니죠. 정형화해서 사용하는 건 순풍다움 같아서 좋은데 잘 사용되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아쉽다는 거죠. 마냥 치켜세우며 칭찬만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 아님을 아는 그들은(그냥 보는 사람들에겐 어떤 날은 재미있고 아닌 날도 있겠지만) 행여나 <순풍…>의 빛이 퇴색될까 걱정도 많았다. 샤샤: 진부한 것들을 새롭게 만드는 게 순풍의 장기죠. 붕어다방: 인간감정이나 욕망의 노골적인 표현이… 무엇보다 강점이지 싶은데. 샤샤: 맞아, 한편의 철학서를 보는 듯해요. 그러나 이들의 대화도 참으로 순풍스러워서 이어지는 말의 엉뚱함이 가관이다 붕어다방: 진짜 아주 노골적이지 않아? 새벽별: 에로비디오 사건. 샤샤: 영규의 방구총 사건. 붕어다방: 영란의 빵 사건. <순풍…>을 즐겨보는 마니아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이 언어의 벽은 참으로 높아서 보지 않는 이들 귀에는 목성어나 화성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루 30분이 아니라 24시간 순풍어(語)를 쓰는 사람들, 무거운 듯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진행된 이들과의 대화는 순풍에게 바라는 마지막 말을 뒤로 하고 끝이 났다. 샤샤: 저의 한 가지 바람은 <전원일기>처럼 금동이 복길이가 훌쩍 커버리듯 그래도 좋으니 미달이랑 의찬이의 큰 모습도 그렇게 보고 싶다는 거예요. 밍기뉴: <왕룽의 대지>처럼 10년 뒤에 다시 뭉쳐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은데요(말이 되나?). 웃긴가게: 전 처음처럼만 했으면 합니다. 처음 오중의 그 토끼모양 종기로 사람을 죽이듯 웃겼듯이… 너무 착해지지 말구… 너무 반듯해지지 말구… 지금처럼… 조금 비딱하게… 조금 치졸하게… 그랬으면 좋겠네여.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올리비아 핫세

연인이라니 대뜸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화양연화>의 장만위(장만옥). 그렇다. 어떤 남자도 이소룡을 능가할 수 없듯이, 어떤 여자도 <화양연화>의 장만위를 능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냇킹콜의 촉촉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던 몸과 목과 얼굴의 선, 몽롱하고 습습한 상해의 골목길을 오가던 장만위의 방심한 표정들, <화양연화>의 장만위는 단연 박주영 급이다. 하지만 장만위는 내게 스크린 속의 연인일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나는 스크린 밖의 그를 만나버렸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시사회가 열렸던 중앙극장에서였다. 여신은 량차오웨이(양조위)와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뒤 내가 앉은 자리 옆의 통로로 지나쳐 퇴장했고, 그때 여신의 옷깃이 내 팔을 스쳤다. 들어라 사람들아, 장만위와 나는 그런 사이다. 이런 가문의 영광이 어딨냐며 길길이 날뛰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배우는 역시 왕자웨이(왕가위) 같이 눈 밝은 감독의 카메라 속에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자, 이젠 본론을 이야기하자. 1978년 겨울, 나는 ‘허리우드’ 극장과 1.2.3카바레 사이의 콘크리트 마당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기 위해 줄 서 있었다. 지금 내 나이쯤의 아저씨가 혼자 줄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만 17세였고, 줄리엣 역을 맡았던 올리비아 핫세의 나이는 만 15세였다. <썸머타임 킬러>에 등장한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올리비아도, <나일 살인사건>의 조연 올리비아도 나는 모른다. <마더 데레사>로 나온 50대 올리비아의 원숙함은 더더욱 모른다. 내게 올리비아 핫세는 1978년 겨울의 줄리엣으로만 살아 있다. 그러고 보니, 스크린 속의 연인은 올리비아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철부지 줄리엣이라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캐퓰릿가의 무도회에서 두 철부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눈이 맞았다. 유머레스크가 끝나고 니노 로타의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총각이 뭐냐. 앞뒤 모르는 불같은 것들이다. 처녀는 뭐냐. 얼음 같은 욕망덩어리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사위고 시들어 버린다. 그런데도 사랑에 빠지는 철부지들이 있다. 그래, 다 안다. 그래도 도리 없는 게 사랑 아니냐. 대충 그런 내용의 노래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또 그 선율이 이끄는 대로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 철없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해 겨울 나는 그 영화를 네 번 넘게 보았던 듯싶다. 물론 비디오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친 김에 하나 더 고백해두자. 줄리엣보다 2년 전에 만난 사랑이 있었다. <진짜 진짜 잊지 마>에서 이덕화와 함께 나온 임예진이 그 주인공이다. 중년의 푼수 역할을 넙죽넙죽 해대는 옛사랑의 모습을 가끔씩 텔레비전 화면에서 마주치곤 한다. 보려고 해서 본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보니 또 그냥 볼만하다. <마더 데레사>에 나온 늙은 올리비아는 어떤 모습일까. 꽃도 사랑도 젊음도 덧없이 사위어가는 것임을 이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서히 내 안에서 역사가 되어가는 사랑이 있다. 조용히 그냥 두어야 할지, 아니면 찾아가서라도 한번쯤 확인해볼지, 어떤 게 나은지 잘 모르겠다. 누구, 알면 좀 가르쳐 주시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공산품의 길

종일 아이를 보는 토요일. 내 몸을 짓밟으며 공룡 놀이를 하던 김단과 김건이 잠시 다른 놀잇감을 찾아 물러간 틈을 타 텔레비전을 켠다. 연속극, 스포츠, 쇼, 미국방송, 일본방송, 중국방송…. 버릇대로 이리저리 리모컨 서핑을 하다 눈에 밟히는 얻어맞는 고딩의 클로즈업. 숏이 바뀌고 H.O.T가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와 팔을 휘젖는다. H.O.T가 왕따를 노래하고 있다. 언젠가 씨랜드 아이들을 노래하는 걸 본(‘들은’이 아니다. 이수만은 H.O.T의 장르가 립싱크라 확인한 바 있다) 기억이 살아나면서 슬며시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영혼까지 팔고사는 자본주의라지만 해도 너무 하는군. 한때 통기타를 치며 여린 목소리로 <모든 것 끝난 뒤> 같은 감상적인 노래를 부르던 ‘트로트 포크’ 가수 이수만은 미국 유학에선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단단히 배워왔던 모양이다. 대중음악 상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여느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분명히 한 최초의 한국인일 그는 (현진영 정도를 제외하곤) 지나치게 앞선 시도가 불발에 그치곤 하다 결국 H.O.T라는 히트상품을 만들어냈다. 나는 H.O.T 공연실황 클립 속에서 천사 날개를 달고 무대에 선 H.O.T에 환호하는 10대들을 잊을 수 없다. 그 장면을 보며 내 머리통 속에선 H.O.T에 천사 날개를 달아준 이수만의 욕망과 고작 그런 우스운 천사에게서나 안식을 얻는 한국 10대들의 가련한 처지가 대립했다. 알다시피 H.O.T라는 상품이 순항하는 근거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남긴 공백이다. (박노해가 신영복 모델을 선택하듯) 이수만은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고 그런 선택은 이미 오래 전부터 대중음악 시장을 면밀히 분석해온 이수만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서태지 모델을 선택했다는 것은 단지 서태지의 은퇴로 생긴 남성 댄스그룹의 빈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외에 몇 가지 세부를 갖는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이른바 사회비판이다. 추측건대 서태지 모델을 선택한 이수만이 서태지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 공인된 사회비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만은 사회비판이라는 요소를 기꺼이 H.O.T라는 공산품의 외장재로 채택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음악이 상품이 아닐 도리는 없겠지만 그 상품들이 가진 사회비판의 권한은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천지인이나 메이데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상품 시스템을 사용할 뿐인 그룹이나 스스로 음악을 창작하고 집행하는 능력을 갖춘 서태지와, 순수한 공산품인 H.O.T에 똑같은 사회비판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떤 판단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가. “돈 속에 썩어버린 양심 너의 그런 한심한 모습은 더이상 꼴도 보기싫다. (….) 이젠 제발 돈 때문에 사람 팔지 말고 주위를 둘러봐 너 혼자만 잘살잖아 한편의 허상을 향해 초라한 몸부림에 흐느끼는 영혼들의 울음이 들린다.”(Korean pride) 두어달 전 어느 시사월간지에서 이수만과 대담을 하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 우습게도, 갑자기 불어난 유사 지식인 활동에 치어 사는 나로선 선뜻 응할 형편도 못 됐지만, 허탈함에 쓴웃음이 나왔다. 대담 제목이 ‘문화는 돈이다’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인생의 적이자 신앙의 적으로 여기는 내가 자본주의의 전사 이수만과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자본주의는 현실의 법이며 내가 아무리 이수만을 마땅치 않아 한들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그를 공식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나는 꿈에라도 이수만이 욕망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의 전사에서 계몽주의를 신봉하는 대중음악 활동가로 탈바꿈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이수만에게 바라는 건 단지 그의 공산품에 사회비판이라는 외장재는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것, 공산품의 길을 걸어달라는 것이다.

SBS 새 수목드라마 ‘루루공주’

김정은 “자유로운 삶과 사랑에 눈떠” 정준호 “만나는 여자마다 최선 다해” “파리의 연인이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이번 드라마의 부담이 커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대본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돼요.” 지난 12일 오후 열린 에스비에스 새 수목드라마 <루루공주>(극본 권소연 이혜선·연출 손정현)의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여자주인공 김정은은 “<루루공주>는 <파리의 연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파리의 연인>에서는 내가 남자를 변화시켰다면 <루루공주>에서는 남자 때문에 내가 바뀌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루루공주>는 재벌의 딸이라는 이유로 틀 안에 갇혀 지내던 ‘희수’(김정은 분)가 바람둥이 남자 ‘우진’(정준호 분)을 만나면서 자유로운 삶과 진정한 사랑에 눈뜬다는 것이 주요 줄거리이다. <파리의 연인>에서는 가난하지만 밝고 명랑한 여성 역을 맡았던 김정은이 이 드라마에서는 조신하고 소극적인 재벌가의 딸로 변신을 시도한다. “루루공주 희수는 ‘노’라는 말을 못하는 ‘예스걸’이에요. 살다 보면 거절해야 하는 순간도 필요한데, 항상 ‘네’ ‘네’ 하고 수긍하기만 하죠. 그런 면에서 동질감을 많이 느껴요. 저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김정은은 재벌의 딸 역할이다 보니 귀금속이나 명품 협찬이 물밀 듯이 쏟아져서 걱정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너무 사치스럽게 비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할거라고 했다. 평소에 재벌이라고 하면 까만 선글라스에 외제차를 타는 장면부터 나오는 것이 불만이었다는 김정은은 희수의 교통수단으로 외제 차 대신 자전거를 제안했지만 결국 스쿠터로 낙찰됐다. “희수는 비싼 외제 차 대신 스쿠터를 타는 쾌활한 여성이거든요. 재벌의 딸이라는 캐릭터가 보시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시청자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6년 만에 안방극장에 복귀한 정준호는 “텔레비전에서 아들 얼굴 좀 보자는 시골에 계신 어머니의 성화에 드라마 출연을 결심했다”고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밝혔다. 오랜 만의 드라마 출연인 만큼 맡은 역할 준비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는 그는 “이번 바람둥이 역을 좀 더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바람둥이인 친형을 집중 탐구했다”고 말했다. “휴 그랜트처럼 재치있고 리처드 기어처럼 젠틀하면서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털털한, 매력적인 바람둥이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요. 정준호처럼만 하면 여자들이 다 넘어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요.” 그는 영화에 비해 정신없이 돌아가는 드라마 제작 분위기에 빨리 적응하려고 애쓰면서도 드라마 제작 방식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드라마는 영화와 달리 시청률 부담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죠.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런 불안한 여건부터 개선해가야 합니다. 앞으로 시청률에만 급급한 제작 방식들을 서서히 고쳐나가야겠죠.”

테헤란 파지르국제영화제, 이슬람 금기에 도전하는 영화들 봇물

이란영화는 말 그대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로 대변되는 20세기 말의 이란영화가 올해를 기점으로 또 한번의 엄청난 변신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현장을 테헤란에서 지난 2월2일부터 11일까지 열린 파지르국제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파지르영화제는 지난 1979년의 이슬람혁명을 기념해 만들어진 영화제로, 국제경쟁 부문과 국내경쟁 부문이 있지만 해외 게스트들에게는 단연 국내경쟁 부문이 관심의 대상이다. 조직위쪽도 이러한 관심을 반영, 해외의 게스트들만 따로 모아 이란영화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새 천년 이란영화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는 징후는 자파르 파나히가 도발적으로 제기한 사회·정치적 영화의 문제, 놀라운 신인감독들의 등장, 그리고 단편 영화의 눈부신 성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기에의 도전: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 이번 영화제 국내경쟁 부문에서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은 애초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막판에 빠졌으며 게다가 상영금지까지 당했다. 이란영화마켓(Iranian Film Market)의 리셉션이 한창이던 2월9일 저녁, 자파르 파나히의 집에서 그 문제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베라, 밴쿠버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랜 프레니 등 극소수의 게스트만이 초대됐다. 자파르 파나히는 세편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신을 도모해왔고, 이번 작품은 그런 면에서 가장 파격적이다. 카메라가 테헤란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담아나가는 평범한 작품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여태껏 이란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외손녀를 출산한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느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낙태, 거리의 매춘, 아이의 유기 등 현재 이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제작자 모하마드 아테바이는 사태의 추이를 좀더 지켜봐야겠다고 했다. 어쩌면 해외영화제 참가조차 불가능할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곧 있을 총선의 결과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병원의 밝은 색깔 문에서 시작하여 갖가지 이유로 이런저런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인 교도소의 어두운 문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분명 2000년대 이란영화사의 첫머리에 놓일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이슬람혁명 뒤 금기에 도전한 최초의 감독이며, 이후의 문제는 여타 감독들이 그의 뒤를 이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파르 파나히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하며 올해도 꼭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번 영화제에서 중견감독들의 작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한명의 거장인 다리우스 메흐르지 감독의 <믹스>는 영화제작의 뒷배경을 다뤘으나,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구성으로 예전의 정갈함을 잃고 있었다. 또 20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은 바흐만 파르나마라의 <장뇌의 향기, 재스민의 향기> 역시 이번 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지극히 전통적인 양식의 평범한 영화였다. 특히 후자는 파르나마라의 오랜 친구인 키아로스타미의 도움이 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키아로스타미 그늘 벗어나는 신인들 기대작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즉, 지금 제작되고 있는 작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국의 아이들>과 <신의 색깔>로 미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마지드 마지디가 캐나다 자본으로 <비>를 준비중이며, 미래의 거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볼파즐 잘릴리는 일본 자본으로 <달바란>을 제작중이다. 그리고, 주목받는 또다른 두편의 영화가 있다. 먼저 파르나마라처럼 오랫동안 작품을 만들지 못하다가 지난해에 다시 컴백한 바흐람 베이자이의 <개 죽이기>가 있다. 지난 2월12일 늦은 밤시간에 제작자 베흐루즈 하셰미안(그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터키영화 <태양으로의 여행>의 제작자이기도 하다)의 초청으로 촬영현장을 방문했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오랜만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베이자이의 모습은 열정에 넘쳐 있었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수년간 프랑스로부터 제작의뢰가 쇄도할 정도로 국제적인 지명도를 지닌 그였지만 조국에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열정이 이제야 그를 현장에 불러 세운 것이다. 하셰미안은 이 작품이 베니스영화제를 노리고 있다고 밝혔다. 당연히 올 부산국제영화제의 유력한 초청 후보작이기도 하다. 2월13일 귀국 당일 오전에 파르하드 메흐란파르의 신작 <사랑의 전설>의 가편집본을 볼 수 있었다. 지난해 PPP의 초청 프로젝트였던 이 작품이 이제 드디어 완성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란의 북부 전쟁지역에서 실종된 연인을 찾아나선 한 여인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작품에는 쿠르드족의 아름다운 문화와 풍습이 담겨져 있다. 메흐란파르는 쿠르드족의 전설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또한 일반인들에게 호전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쿠르드족의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생활양식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산의 감독’ 메흐란파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좀더 심화된 통찰력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이란은 신인감독의 등장이 가장 잦으면서도 가장 쉽게 사라지는 이상한 전통이 있다. 지난 몇년간 내가 주목했던 감독 가운데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감독도 상당수에 달한다. 올해도 이러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올해의 신인감독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제 그들이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란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류의 어린이 영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키아로스타미는 이제 더이상 어린이 영화를 만들지 않지만 후배 감독들에게 시나리오를 계속 써주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모하마드 알리 텔레비의 <버드나무와 바람>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유사한 재미와 정서를 지닌 작품이다. 올해의 신인감독 중 바박 파야니는 단연 발군이다. 그의 데뷔작 <하루 더>는 로베르 브레송과 홍상수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영화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늘 만나는 중년의 두남녀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소외와 고독이 절절히 배어나오는 작품이다. 이 밖에 어린이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선배의 작품들과는 달리 거리의 아이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속삭임>의 파브리즈 샤흐바지도 주목의 대상이다. 주목! 단편 영화, 상업 영화의 젖줄 그러나, 21세기 이란영화의 진정한 혁명은 단편영화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최근 단편영화들의 수준이 세계최고급인데다, 장편 극영화의 든든한 젖줄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에서 단편영화는 연간 400여편이 만들어진다. 그것도 거의 16mm이거나 35mm 영화이다. 영화제 기간중 이란영화마켓에 참가한 이란 영시네마 소사이어티(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 영화 제작 배급하는 회사)의 부스를 찾아 지난 한해 동안 만들어진 단편영화 50여편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는 특히 근래에 보기 드문 우수작을 두편이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란에서는 이미 스타급 단편영화 감독이지만 국내에는 전혀 소개가 되지 않았던 알리 모하마드 카세미의 신작 <너무 먼>은 매우 충격적인 작품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낙타의 시선을 통해 사막과 오아시스에서의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인간세계의 잔혹함이 교차되는 이 작품은 그 간결한 형식과 뛰어난 촬영으로 눈이 번쩍 띄는 작품이다. 그리고, 또 한편.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단편이 있다. 여성감독 마흐바시 셰이콜 에스라미의 <차르쇼>가 그것으로, 결혼을 앞둔 소녀가 어머니의 허락으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차르쇼(전통의상)를 입고 신랑을 따라 길을 떠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고도 구성진 민요와 함께 전개되는데,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붉디 붉은 차르쇼를 입은 소녀가 말을 타고 신랑과 함께 만개한 해바라기밭을 지나 길을 떠나는 장면은 나의 뇌리가 아닌 가슴에 박혀버렸다. 올해 이란 단편영화의 약진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데, 세계 곳곳의 단편영화제에서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러한 이란 단편영화의 힘은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영화를 사랑하는 이란인들의 열정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마흐말바프, 영화 만드는 일가족 이제 이 글을 마흐말바프와의 만남으로 마무리지어야겠다. 나는 마흐말바프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늘 새로운 경이를 느끼곤 했다. 한 인간으로서, 한 감독으로서 그는 늘 나의 가장 이상적인, 아니 때로는 이상을 넘어서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번 만남도 그러했다. 영화제의 마지막 날인 2월11일, 마흐말바프와 점심을 한 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또 전화와 팩스번호가 바뀌었다며 새 번호를 알려줬다. 그가 번호를 자주 바꾸는 이유는 물론 이사를 자주 다니기 때문이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 이유는 제작비 문제 때문이다. 그는 지금 맏딸 사미라의 두 번째 작품 <칠판>과 아내 마르지에의 데뷔작을 제작중이다. 두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자동차(그의 차는 한국산 차다)와 편집기를 팔기로 했다. 사미라의 데뷔작 <사과>를 제작할 때는 집과 차를 팔았었다. 다행히 <사과>가 세계적으로 호평 받고 제작비도 환수가 돼 집과 차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제작비는 해외에서 얼마든지 조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그 어떤 제작비도 받지 않겠다는 게 그 나름의 고집이다. 그리고, 마흐말바프는 온 가족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통해 자녀들의 교육을 시킨다. 11살 된 막내딸 한나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영화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엄마인 마르지에의 작품에서 스크립을 하고 있다. 이 아이는 이미 독학으로 초등학교 졸업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다. 아들 메이삼은 누나 사미라의 두 번째 작품의 제작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마흐말바프는 자신의 사무실이 곧 학교이며 가정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영화보다는 삶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마흐말바프에게 있어 삶과 영화는 완전한 동일체, 바로 그것이다. 마르지에는 지금 이란 여성에 관한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이미 그 첫편인 <내가 여자가 되는 날>은 완성됐다. 마흐말바프의 사무실에서 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2월11일, 9살이 되는 소녀 하바는 이제 헤잡을 쓰고 다녀야 한다. 그것은 곧 여성으로서 사회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바에게는 남자친구인 하산과 아이스크림 사러갈 생각뿐이다. 어머니는 하바에게 한 시간 안으로 돌아와서 헤잡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하바에게는 이제 자유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의 구상은 마르지에가, 그리고 시나리오는 마흐말바프가 썼다. 그리고, 나와 만난 그날 오후 마흐말바프는 촬영이 한창인 키시섬으로 내려갔다. 아내에게 부족한 제작비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마흐말바프는 이란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한 구절을 이야기했다. “꽃을 팔아 돈을 벌었다면, 그 돈으로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당신은 아마 다시 꽃을 사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수긍의 미소를 지었다. 그와 헤어지기 전, 마흐말바프는 차를 잠시 세우고 나에게 줄 선물을 하나 사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꽃이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보석이라면, 마흐말바프의 영화는 꽃이라는 나의 생각은 그래서 더욱 확고해졌다.

<우주전쟁>과 스필버그 [3] - 외계인침공영화 계보

참을 수 없는 외계의 매혹 장르 세계에서 외계인들이 본격적으로 지구를 침공하기 시작한 건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전쟁> 때부터다. 20세기 초가 되자 영미권에서 본격적으로 SF 장르가 성립했고 외계인 침공은 그중 가장 인기있는 소재가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외계인 침공이 본격화된 건 UFO 열풍과 냉전시대의 히스테리가 공존하던 50년대. 외계에서 온 채소 외계인이 남극 기지를 공격하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 물체>(The Thing From Another World)가 이 장르의 본격적인 시작이다(30년대 인기 스페이스 오페라 시리즈인 <플래시 고든>이나 <버크 로저스> 같은 작품들의 영향력을 무시한다면). 아마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우주 콩깍지가 사람들로 변신하는 <신체 강탈자의 침입>(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일 것이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나 조지 팔 버전인 <우주전쟁> 역시 빼먹을 수 없다. 50년대 말부터 시작된 SF/호러 시리즈인 <트왈라이트 존>이나 <아우터 리미츠>도 흥미로운 외계인 침략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제목의 잔인한 말장난으로 유명한 <투 서브 맨>(To Serve Man)일 것이다. 50년대의 외계인 침공 영화들을 모두 냉전시대의 산물로 몰아붙이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다. 레드 콤플렉스가 당시 장르물의 부흥을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그런 분위기는 차별화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것은 외계에서 왔다>(It Came from Outer Space)나 <나는 외계에서 온 괴물과 결혼했다>(I Married a Monster from Outer Space)와 같은 영화들은 복제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고전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외계인과 지구인의 대결을 분명한 선악구별 없이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가 정지된 날>처럼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이 평화의 사절인 경우도 있다. 60, 70년대 접어들면 전형적인 외계인 침공 영화들은 줄어든다. 장 뤽 고다르나, 스탠릭 큐브릭,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같은 주류 거장들이 장르를 실험했고 뉴웨이브 운동의 영향으로 장르 자체도 큰 변화를 겪던 때였다. 고전적인 외계인 침공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쿼터매스 앤 더 피트>(Quatermass and the Pit)과 같은 영화도 외부의 외계인보다는 발굴된 화성 우주선의 영향 아래 변해가는 지구인의 내면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과 같은 사악한 외계 생물을 다룬 영화들도 나오긴 했지만, 70, 80년대 SF영화들은 외계인과 지구인의 조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이었다. 여긴 <미지와의 조우>와 라는 두편의 낙관적인 영화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이 크다. 당시엔 존 카펜터의 <스타맨>처럼 스필버그의 감성에 영향을 받은 아류영화들 역시 만들어졌다. 90년대 이후 사악한 외계인의 지구 침략이라는 주제는 히트 텔레비전 시리즈 을 통해 부활했다. 꾸준히 물밑에서 이어지던 회색 외계인의 인간 납치 전설은 이 시리즈를 통해 다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복고적이고 호전적인 외계인 침공물이 성공한 것도 이 분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당시 분위기가 일방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50년대의 단순한 공식이 이전의 모습 그대로 부활할 수 있을 만큼 당시 관객들이 순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50년대 SF의 관습을 놀려대던 팀 버튼의 <화성침공>이 더 그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작품이었다. 역시 분명한 외계인 침공 의사가 드러나기 전이 전성기였다. 50년대 이후 ‘외계인 침공’이라는 아이디어는 장르 세계에서 가볍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영화는 <스피시즈>처럼 공식에 충실한 복고풍 SF가 될 수도 있고 <에볼루션>처럼 장르 공식을 가볍게 가지고 노는 액션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와 <미지와의 조우>를 감독한 스필버그가 무자비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는 <우주전쟁>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특별한 심경 변화나 배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고정된 장르 소재를 선택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외계인의 정체가 아니라 그들의 공격을 받는 9·11 사태 이후의 미국인들이다.

<웰컴 투 동막골> 영화음악 맡은 히사이시 조

“영상과 음악의 완벽한 일치를 이뤄내는 게 영화음악의 목표입니다. 음악이 아무리 훌륭해도 영상과 맞지 않으면 좋은 영화음악이라 할 수 없어요. 영화가 좋지 않으면 좋은 영화음악이 나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죠.” 오는 8월4일 개봉하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감독 박광현)의 음악을 맡은 일본 영화음악계의 거장 히사이시 조(55)는 영화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은 19일 영화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4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음악작업을 시작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지난해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모두 8편의 작품을 하야오 감독과 함께 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왈츠풍 메인테마는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에 삽입되고 휴대전화 벨소리로도 애용되는 등 국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과 함께 <소나티네> <키즈 리턴> <하나비> <기쿠지로의 여름> 등을 작업하기도 한 그는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을 5차례나 받았다. 유럽 쪽과도 여러 차례 작업한 그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나라의 영화음악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전부터 히사이시 조의 열렬한 팬이었던 박광현 감독이 일본어로 번역한 시나리오를 보냈고, 이를 읽어본 그가 흔쾌히 승락을 한 것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전쟁 속에서도 남북한 군인이 힘을 합쳐 마을을 지켜내고자 하는 희생정신과 휴머니즘에 반해서”라고 한다. “<웰컴 투 동막골> 영화음악을 굳이 분류하자면 하야오 감독 애니메이션의 음악 스타일보다는 기타노 다케시 감독 영화의 음악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밝고 환상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좀 무겁고 진중하게 접근했어요. 영화 속 동막골 마을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판타지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현실감이 좀 떨어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음악을 통해 무겁게 눌러줌으로써 현실감을 부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시종일관 장엄한 음악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멧돼지 습격 장면과 같은 곳에선 발랄하고 통통 튀는 음악으로 희극적인 재미를 더한다. 그가 애니메이션 작업에서 많이 선보여온 음악 스타일이다. 그는 “희극적으로 보여져야 할 부분과 현실감이 중시돼야 할 부분 사이에 음악을 달리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려 했다”고 설명했다. “작업을 하다가 영화 가편집본을 봤는데, 감독의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한 장면 한 장면에서 감독이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나더군요. 최선을 다하는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어깨가 무거웠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기회가 된다면 또 한국영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그는 오는 11월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지난 2001년에 이어 두번째 내한공연을 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