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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대박 행진 <웰컴 투 동막골> 박광현 감독

“그저 내가 재미있어 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많은 분들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좋아해주실 줄은…. 기분은 물론 좋지만, 살짝 당황스럽기도 해요.” 개봉 3주차를 맞이한 지난 주말 관객 400만명선을 돌파하고 500만명을 향해 쾌속순항하고 있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연출한 신예 박광현(36) 감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흥행성적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참 소박한 소감이다. 그는 지금 이런 결과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몇만명이 들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광고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한껏 달아오른 내 자신을 차분히 정리하며 부담을 털어버려야만 다음 영화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란다. 그래서 1~2년간은 텔레비전 광고 연출과 영화 공부에만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웰컴 투 동막골>의 흥행 사실을 잊어버릴 때쯤이 바로 다시 시작할 때가 아닐까 해요.” 박 감독의 이런 조심스러운 태도는 그토록 바라던 꿈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실화됐을 때 오는 기쁨 뒤의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홍익대 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그는 광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영화 공부를 하고 시나리오도 썼다. 2001년 장진 감독을 무작정 찾아가 “팬이에요!”라고 외쳤을 때만 해도 진짜 감독이 될 줄은 몰랐다. 어느날 그의 시나리오를 읽은 장 감독이 직접 영화로 만들어보라고 해서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2002) 속의 단편 ‘내 나이키’를 만들게 되기 전까지는. 단편을 만든 그해 겨울 장 감독이 대뜸 에이포 용지 뭉치를 던져주며 “해볼 생각 없냐?”고 물은 게 바로 <웰컴 투 동막골>이었다.(장 감독은 얼마 뒤 이 초고를 가지고 같은 제목의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장 감독의 초고에는 그의 장기인 화려한 언어의 향연이 넘쳐났다. 평소 장 감독의 언어적 유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를 그대로 영화화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잠시 망설였다. 그러면서도 얘기의 밑바닥에 깔린 묵직한 힘에 끌렸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꿔 연출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곧 1년6개월 동안의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원작을 시나리오로 바꾸면서 가장 중점을 둔 건 바로 판타지성이었어요. 어차피 있을 법한 얘기가 아닌 이상 차라리 동막골을 신비한 가상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거였죠. 신과 인간의 중간자적 존재쯤 되는 동막골 사람들의 순수성을 통해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이 치유를 받는다는 얘기로 만들었는데, 여기엔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이 이 영화를 통해 치유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도 녹아있어요.” 박 감독은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향도 적잖게 받았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미래소년 코난>을 비롯한 그의 애니메이션을 무척이나 즐겨 봤어요. 그의 작품은 굉장히 신나고 재미있고 따뜻하면서도 그 안에는 환경 문제, 인류애적 가치, 문명의 폐해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살아있죠. 하야오 감독의 대다수 작품에서 들을 수 있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도 무척이나 좋아하고요. 그래서 <웰컴 투 동막골> 음악을 히사이시 조에게 부탁했는데,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그는 요즘 광고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틈틈이 구상하고 있는 다음 영화에 대해 “힘없고 순수한 사람들이 거대 권력에 대항해 승리함으로써 세상의 소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얘기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서민들에게 힘을 주는 얘기를 끊임없이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웰컴 투 동막골>뿐 아니라 그가 이전에 최민식이 실의에 빠진 친구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위로하는 보험회사 광고를 만든 것도 같은 선상이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영상작업을 하고 싶어요. 심오하고 센 영화를 하는 감독도 많지만, 저 같은 감독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DMB vs 아이맥스 [2] - DMB

“내 손안의 TV”라는 광고 카피가 있다. DMB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을 간단하게 정의한다. 지금껏 내 손안엔 휴대폰이 있었는데, 이젠 TV도 있다. 물론 좀 비싼 DMB단말기나 DMB폰을 가지고 있을 때의 상황이다. 내 손안에 있는 건 TV뿐만 아니다. 내 손안엔 게임기도, 인터넷도, 카메라도, 사전도 있다. PMP(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나 PSP(휴대용 게임기)까지 장만했다면, 내 손은 참 무겁다. 덧붙여 MP3 플레이어도 걸고 있다면, 나는/그대는 ‘움직이는’ 극장이자 오디오이자, 게임센터다. DMB는 궁극적으로 ‘개인용 엔터테인먼트 센터’로 진화하는 모바일의 현주소이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등장하고, 진화하는 이 모바일의 세계에서 ‘영화 보기’는 더이상 스크린 앞에(극장이든, TV든, 컴퓨터든지 간에) 앉아 있는 두어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영화, ‘모바일영화’라는 말이 등장한 지 3년째. 2002년, SK텔레콤이 3세대 모바일 멀티미디어 콘텐츠 서비스 ‘JUNE’을 런칭하고, 이를 위해 <건달과 달걀> <프로젝트 X> 등의 휴대폰 전용 영화를 제작하고 붙인 이름이다. 이후 SK텔레콤의 주도로 <이공시리즈> <다섯 개의 별> <익스트림 X> 등 다수의 모바일영화, 애니메이션 등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KTF의 ‘Fimm’도 가세한 IMT2000 서비스가 상용화된 2005년, 모바일영화는 단지 휴대폰을 위해 제작된 영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든 모바일영화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인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듯, 모바일영화의 미학을 정의하기에는 조금 이른 듯하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모바일영화의 사례들에 주목해서, ‘모바일을 통해 보여지는 영화 혹은 영상물’ 정도의 광의의 해석을 내려보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재, 한반도 밖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이 ‘작은 스크린’을 통해 ‘작은 영화, 마이크로무비(micromovie)’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관은 움직이는 거야 휴대폰의 3X5cm 액정으로 등장한 ‘작은 스크린 위의 작은 영화’는, 지난 5월 TU미디어가 본방송을 시작한 위성파 DMB와 7월에 시험방송을 한 지상파 DMB의 상용화를 앞두고 콘텐츠 논의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휴대폰에서 시작한 모바일영화와 DMB의 관계는? DMB란 디지털 멀티미디어 브로드캐스팅(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의 준말이다. 문화관광부의 공식적인 정의에 따르면, “이동 중 수신을 목적으로 다채널을 이용하여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방송 및 데이터 방송을 복합적으로 송신하는 방송”이다. 복잡해 보여도 DMB의 모든 것은 사실 이 정의 속에 다 들어 있다. 왜 DMB를 미디어 융합의 결정판이라고도 이야기하는지는, DMB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기존의 미디어들을 하나씩 되짚어볼 때 분명해진다. 먼저 ‘방송’. 우리가 흔히 아는 공중파TV가 대표적이다. 물론 케이블과 위성도 있다. DMB 역시 지상파와 위성, 두 가지의 서비스로 나누어진다. 지상파DMB란 문자 그대로 주류 방송사들이 주축이 되어 지상 송전탑과 기지국을 이용한 방송이며, 위성DMB는 위성방송처럼 위성을 활용한다. DMB 서비스를 위해 SK텔레콤과 일본의 NTT 도코모가 2004년 초에 공동으로 통신위성을 발사했다. 그런데 DMB는 방송은 방송이되 동영상 위주의 텔레비전 방송과는 달리 데이터, 라디오 방송까지 결합한 복합적 방송이다. 즉 기존에는 매체의 특성에 따라 구분되던 인터넷의 데이터, 라디오(음성) 방송, 영상 방송이 동시에 하나의 단말기로 수신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DMB가 첨예의 화제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이동하는’ TV, ‘내 손안의 TV’이기 때문이다. 거실에 놓인 TV를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형편이 허락하는 한) 언젠가부터 방방마다 (대개 약간은 작은 사이즈의) TV를 놓기 시작하더니, 젊은 세대는 컴퓨터 스크린으로 TV를 대체했다. 결국, 모 통신사의 광고 문구처럼 이제 ‘TV가 거리로 나왔다’, 물론, 손바닥만한 크기로. ‘언제 어디서나’ (통화를) 가능하게 했던 이동통신의 파워가 ‘언제 어디서나’ (시청이) 가능한 DMB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DMB는 이동통신과 방송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차세대 미디어다. 무선인터넷을 이용하는 ‘JUNE’이나 ‘Fimm’과 같은 3세대 휴대폰 멀티미디어 서비스가 지녔던 ‘다운로딩’이라는 기술적 제약을, 위성과 별도의 방송망을 사용하는 DMB는 가볍게 뛰어넘는다. 휴대폰으로 영화 한편 보기 위해서는, 통신료와 정보료를 제공하고 배터리 용량의 급격한 소모를 감수하면서 다운로드를 받게 마련이었다. 물론 스트리밍도 가능하나 연결이 끊기는 경우도 종종 있을 뿐더러 일회용이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DMB방송은 일정액의 수신료만 납부하면(지상파DMB는 무료다) 24시간 생방송이다. 하지만, 이렇게 언제나 시청 가능하며, 어디나 휴대할 수 있다는 점은 ‘작은 스크린’의 강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이동 중에 작은 스크린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다. 휴대폰과 DMB 단말기 스크린의 화질이 HD급으로 상당히 뛰어난 편이지만, 이동성이라는 특성은 콘텐츠의 형식과 내용에도 영향을 끼친다. <반지의 제왕>을 지하철에서 끝까지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은 스크린’에서 살아남기 위한 ‘작은 영화들’의 전략은 무엇일까. 짧은 호흡, 집중도 높은 영상의 작은 영화들 ‘작은 영화’, 마이크로무비는 극장을 기준으로 한 종래의 영화(필름이든 비디오든) 제작, 배급, 상영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컴퓨터 등의 좀더 작은 스크린에 기반해서 제작, 배급되는 영화를 가리킨다. 인터넷영화, 퀵타임 무비, 플래시애니메이션 등이 이 범주에 해당되는데,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이들 작은 영화의 등장에 결정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모바일 기기는 현재 컴퓨터의 뒤를 이은 가장 작은 스크린이다. 모바일용 작은 영화 중에는 원래는 작지 않았으나 작은 스크린으로 이동해온 영화들이 있다. 오프라인에서(모바일이 아닌) 상영되었거나, 상영될 보통의 영화들이다. SK&C의 박효정 대리는 ‘JUNE’ 서비스가 시작되던 초창기에 영화사들은 모바일을 그저 새로운, 그러나 효용성이 검증되지 않은 홍보채널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모바일 콘텐츠의 저작권료, 미미한 수익·배분 등에 관한 제도가 정립되지 않은 까닭도 있다. 장편영화가 극장에 개봉된 뒤에 모바일에 그대로 재상영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10∼20분 정도로 편집된 본영화의 예고편, 혹은 편집된 다이제스트판, 메이킹 필름 등이 톡톡히 인기를 끌었다. ‘일단 짧아야 한다’는 모바일 콘텐츠의 특성 때문이다. 단편영화가 이동통신사의 모바일영화 라이브러리를 채우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매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극장을 잡지 못한 소규모 영화나 외화가 모바일을 대안 채널로 삼아 개봉을 시도하기도 했다. 일본영화 <메모리>나 애니메이션 <천년 여우> 등이 실험적인 사례들. 지난 4월 SK텔레콤은 국내 미개봉작 다섯편을 라는 이름으로 ‘JUNE’을 통해 서비스함으로써, 대안적인 영화 배급 채널로서의 모바일의 가능성을 재실험하기도 했다. DMB가 상용화됨에 따라 이 오프라인영화들의 재가공은 더욱 활발해질 예상인데, SK텔레콤의 기정국 과장은 실제로 “초창기와는 달리 DMB의 등장과 더불어, 영화업계에서도 모바일을 적극적으로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다양한 콘텐츠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를 중심으로 한 모바일 부가서비스 개발도 관심을 끌고 있는 부분. 모바일 콘텐츠가 무시할 수 없는 트렌드가 된 것이다. 하지만, 모바일영화의 미학이라고 할 만한 것을 실험해온 것은 아무래도 모바일로 이주한 이들 영화 콘텐츠보다는 모바일에서 태어난 작은 영화들이다. <건달과 달걀> 이후, <이공 시리즈>나 <다섯 개의 별> 등 각각의 작품이 모바일에 적합한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고민하는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클로즈업이나 빠른 편집 등 감각적이고 시각적 집중도가 높은 영상을 찾아내는 카메라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5∼8분씩 끊어지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된 내러티브, <건달과 달걀> <다섯 개의 별>처럼 텍스트 메시지와 인터넷을 활용해 스토리 전개에 관객의 쌍방향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액티브 장치 등이 대표적으로 눈에 띈다. 모바일영화의 미래는 열려 있다 결국, 한국에서 모바일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항상 ‘최초’이거나 ‘미래’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는 상업적인 모바일영화를 서비스하고 있는 나라가 없는 까닭이다. 휴대폰 기술과 문화가 발달했다는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경우, 3세대 휴대폰을 이용한 노키아 ‘모바일TV’ 등이 실험 단계에 있고, 영국에서도 ‘오렌지’에서 시범적인 모바일영화 상영 등을 시도하는 정도다. 휴대폰 문화에 있어서는 앞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미국은 지난해 스프린트에서 겨우 스포츠 경기 클립과 뉴스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현재, DMB 단말기의 보급률이 10만대 수준에 머물고, 휴대폰 서비스 수익 중 모바일영화가 차지하는 부분은 10% 내외이다보니 아직까지 모바일영화의 파워를 이야기하기에는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정국 과장의 말대로 “지금까지는 모바일 콘텐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온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SK텔레콤은 <다섯 개의 별> 이후 직접적인 모바일영화 제작은 중단했지만, 대신 언론에 소개된대로 적극적으로 영화계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다. 싸이더스 HQ의 2대 주주 승격이나 영화 펀드 등의 조성은 이제 영화계에 콘텐츠 발굴의 임무를 맡기겠다는 속셈일 수도 있다. 상업성 있는 모바일 콘텐츠야말로 작은 스크린의 존폐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하지만 작은 스크린의 위력이 상업성에만 있지는 않을까라는 의문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영화도 주류영화와 독립영화, 실험영화 등 다양한 유형이 있듯이, 모바일영화도 상업성과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창의성을 다양한 비례로 갖춘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네프가 최초로 개최하고 있는 ‘모바일 & DMB 영화제’의 출품작들은 비교적 기존의 상업적인 모바일영화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인터넷영화, 웹아트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형식적 시도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이 모바일영화의 미래가 될지는 또한 모르는 일이다. 세네프의 안철호 사무국장의 말처럼 “모바일영화는 오직 미래만 있을 뿐”일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지고 있다면) 지하철 안에서건, 카페에서건, 휴대폰(DMB 단말기)을 열어 모바일영화 아이콘를 한번 찾아보라. 오늘, 새로운 극장이, TV가 내 손안에 들어오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주목할 만한 모바일영화 <건달과 달걀>(2002) SK텔레콤이 2002년 서비스한 한국 최초의 모바일영화. 이희철 감독이 ‘건달’ 이성진과 ‘달걀’ 파는 청각장애인 오승은 사이의 엽기적인 러브 스토리를 12개의 에피소드로 그려냈다. 휴대폰의 특성을 살린 클로즈업과 빠른 편집 위주의 CF 같은 영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텍스트 메시지를 이용한 인터액티브의 실험이 돋보인다. ‘현실적’, ‘이성적’, ‘감성적’, 세개의 버전으로 나뉜 결말을 관람객(모바일 유저)이 직접 선택할 수 있다. 상영 중 텍스트 메시지로 유저의 의견을 묻고, 그에 맞게 측정된 달걀 지수로 각자의 성향에 알맞은 결말이 제시되는 방식이다. <이공 시리즈>(2003) 영화 아카데미 출신 감독 20명이 아카데미 개교 2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20개의 단편영화. 봉준호, 허진호 등 유명 감독과 배우도 다수 참여해 주목을 끌었다. SK텔레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고, ‘June’ 서비스를 통해 첫선을 보였다. 애초에 모바일영화로 기획되지 않았던 까닭에 공통된 모바일 영상미학을 찾기는 힘들지만, 스무명의 감독이 각양각색으로 모바일 스크린을 ‘의식한’ 흔적이 흥미롭다. 극장 스크린으로 볼 때와 모바일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주는 사례. <다섯 개의 별>(2004) SK텔레콤이 싸이더스 HQ와 함께 제작한 한국 최초의 모바일 인터액티브 드라마. 방송 환경과 엔터테인터트 사업의 융합, ‘원소스 멀티 유스’의 추세를 감안하여 본격적으로 모바일 콘텐츠의 형식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기획작품이다. 보이 댄스 그룹으로도 활동하게 될 다섯명의 주인공 캐스팅 단계부터(그중 한명만) 싸이월드와 모바일 유저가 투표로 신청, 참여하는 인터액티브 장치를 마련해서 화제를 모았다. 엔딩에서 여주인공 공효진의 마음을 사로잡을 남자친구도 유저의 투표로 결정되었는데, 당시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출연했던 정경호가 압도적으로 선정되기도. 서비스 시작 15일 만에 40만명이 접속해, 역대 3위의 인기 모바일 드라마라는 기록도 남겼다. 모바일 드라마뿐 아니라 화보집, 뮤직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가 동시에 제작되어 10대 청소년들의 미디어 문화 전방위를 겨냥한 모바일 콘텐츠 개발의 사례로 꼽힌다. 촌철살인의 영상이 핵심이다 모바일 & DMB 영화제 진행하는 세네프영화제 마침 세네프(SeNef: Seoul Net festival)가 주관하는 ‘모바일 & DMB 영화제’(7월1일∼9월8일)가 진행 중이다. 경쟁부문 ‘모바일 익스프레스’와 비경쟁 부문 ‘퍼스펙티브엠’(perspective >m)을 통틀어 총 76편의 최종 작품이 KTF의 Fimm과 TU미디어의 ‘채널 블루’를 통해 상영 중이다. 뉴미디어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영화 보기의 가능성을 꾸준히 타진해온 세네프가 현재 ‘최신의’ 동영상 미디어로 등장한 휴대폰과 DMB단말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과연 인터넷영화와 또 다른 모바일, DMB영화가 존재할까. 세네프영화제 이강옥 프로그래머와 안철호 사무국장이 전하는 모바일영화 혹은 모바일 작품론. -모바일 & DMB 영화제라는 새로운 영화제가 어떻게 탄생했나. =처음 넷필름영화제를 기획하게 된 계기도 극장에서 개봉하고 소리없이 사라지는 영화를 위한 새로운 상영 채널로서 ‘인터넷’에 주목한 것이었다. 결국 디지털화라는 변화된 제작환경과 상영방식으로 인해 가능해진 새로운 영상환경에 대한 관심이었는데, 올해 DMB방송이 시작하면서, 휴대폰과 DMB도 결국은 영상물의 새로운 배급 채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와 더불어 이 뉴미디어 채널에 알맞은 새로운 영상미학의 가능성도 타진해보고자 했다. -모바일 & DMB 영화의 결정적인 특징이 있는가. 모바일영화를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직은 말하기 이르다’인데, 영화제 출품작 선정 기준을 말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가 원한 모바일영화들의 특징은 일단 ‘촌철살인의 영상미학’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작은 스크린과 짧은 상영시간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고려해서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시한 비주얼이나 짧은 시간 안에 긴장감 있게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영화들을 골랐다. 둘째는 ‘모바일폰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있다. 휴대폰카메라나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일상성을 살린 작품들이 해당하는데, 도시적인 감성, 유희적인 미학이 돋보인다. 셋째는 뮤직비디오나 광고의 형식을 지녔지만 좀더 창의적으로 시선을 붙드는 작품들. -출품작의 상당수를 차지한 플래시애니매이션을 보더라도 인터넷영화와 크게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서 아직 새로운 모바일 미학은 없다고 본다. 인터넷영화의 경우에는 인터액티브한 컴퓨터의 속성을 활용한 넷아트, 웹아트 등이 영향을 많이 끼쳤다. 관객이 직접 스토리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장치라든지, 마우스로 타이포그래프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게 한다든지 하는 실험이 많다. 모바일의 경우에도 태생이 모바일인 작품들이 모바일의 속성을 잘 보여주지 않을까 생각해서 모바일폰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찾았는데,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획전에 소개된 멜린다 베컴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영화제 출품작 이외 기존의 상업 모바일영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앞으로 어떤 모바일영화를 보고 싶은가. =대개의 작품이 모바일만 겨냥해서 만들어진다기보다는, 넷, 케이블방송, 모바일 등 다양한 윈도를 고려해서 콘텐츠로 만들어진다. 기본적으로 모바일이나 DMB는 상업적인 매체니까, 상업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매체에 적합한 콘텐츠를 미학적으로 실험하고자 하는 작가들을 어떻게 지원해줄 것인가의 방안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다큐멘터리 <펭귄: 위대한 모험>, 미국서 흥행 돌풍

<펭귄: 위대한 모험>이 미국 박스오피스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황제 펭귄들의 기나긴 생태 여정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자연다큐멘터리 <펭귄: 위대한 모험>은 지난 6월24일 미국 내 4개관으로 개봉했다. 그러나 7월 말에 접어들어 778개 극장으로 확대 상영하며 1633만달러를 거둬들여 2주 연속 흥행 10위를 차지하더니, 개봉 8주차에 접어들어서는 2063개 극장으로 늘어나 주간 박스오피스 6위까지 올라섰다. 지금까지의 총수익도 3772만달러에 달한다. 미국에서 개봉한 역대 다큐멘터리 중에서도 <화씨 9/11>에 이어 흥행 2위에 올라섰다. 이 정도 추세라면 곧 <아멜리에>를 제치고 역대 미국에서 개봉한 프랑스영화 중 최고의 흥행 성적을 올리는 영화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애초 해외 세일즈 시장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수입과 배급에 관심을 가진 곳은 거의 없었다. 워너 인디펜던트와 내셔널지오그래픽 정도가 전부였다. 제작비로 350만달러가 들어간 자연다큐멘터리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워너 인디펜던트와 내셔널지오그래픽사는 미국과 영국의 극장, DVD, 텔레비전 판권까지 다 합쳐서 100만달러에 샀다. 큰 수익차를 낸 셈이다. 동시기에 기대를 모으며 개봉한 파라마운트사의 <허슬 앤 플로> 등 다른 인디영화들이 흥행 부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유독 <펭귄: 위대한 모험>만 흥행세를 몰아가고 있는 셈이다. 감독 뤽 자케 역시 “나는 황제 펭귄의 이야기가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가 될 모든 요건을 갖고 있다고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잘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감격을 털어놨다. 미국판으로 재편집을 거치고, 모건 프리먼 등의 유명 배우를 성우로 기용한 것이 흥행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이 많이 찾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미 프랑스에서 개봉 당시 200만명을 동원한 바 있는 <펭귄: 위대한 모험>은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도 예상을 뛰어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독일에서도 거의 메이저영화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10월13일 300개의 스크린에서 개봉예정이다.

듀나의 DVD 낙서판 <퍼스트 퍼슨>

에롤 모리스가 브라보 채널을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시리즈 의 설정은 간단하다. 모리스는 그가 선택한 흥미로운 인물들을 인터뷰한다. 24분 동안 (2시즌 마지막 몇 에피소드들은 두 배 정도 길다) 시청자들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된다. 가끔 모리스는 질문을 던지거나 맞장구를 치고 중간 중간에 화자의 이야기를 시각화할 수 있게 돕는 영화나 텔레비전 장면들이 삽입한다. 듣기만 해도 지겹다고? 정반대다. 의 재미는 웬만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능가한다. 일단 모리스가 선택한 사람들은 모두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연쇄살인범과 사랑에 빠진 작가, 변신의 귀재인 CIA 요원, 소들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주는 도살장을 디자인하는 건축가, 대왕오징어를 추적하는 생물학자, 미래의 부활을 믿고 자기 어머니의 목을 잘라 냉동한 냉동 보존 전문가, 의붓아들의 자살 이후 범죄현장 청소 전문가가 된 여성, 심지어 살인사건을 목격한 앵무새까지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섬뜩한 공포물이기도 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물이기도 하며 부조리한 코미디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이들은 시청자들을 지루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가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건 에롤 모리스의 인테러트론Interrotron이라는 발명품 덕택이다. 이건 텔레비전 뉴스 때 쓰는 프롬프터와 같은 기계인데, 원고 대신 그들을 인터뷰하는 에롤 모리스의 얼굴이 뜬다. (위 사진을 확인하시길.) 사람들은 화면에 뜨는 모리스의 얼굴을 직접 보고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그 결과 카메라는 이 사람들의 정면 응시를 그대로 잡아낼 수 있다. 그 결과 모리스는 이 사람들이 시청자들의 눈을 직접 응시하면서 이야기하는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 MGM에서 나온 3장짜리 DVD세트는 풀 스크린이다. 레터박스 화면 비율은 대부분 1.78:1이지만 1시즌엔 가끔 1.66:1도 있다. 화질은 그냥 봐줄만한 정도. 인터뷰 내용이 모두 깨끗하게 들리는 정도이니 음질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이다. 자막은 없지만 클로즈드 캡션은 제공된다. 부록은 실망스러운 편. 간단한 에피소드 요약을 담은 부클렛이 전부이다. 심지어 여기엔 방영일자와 같은 기본 정보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어차피 몇 년 전에 나온 다큐멘터리이니 사건 배경이나 후일담에 대한 정보를 수록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물론 인터넷을 뒤져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일 수 있겠지만.

<모두들, 괜찮아요?>로 18년 만에 영화 복귀한 이순재

세상의 배우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물론 이것은 가능한 백만스물한 가지 이분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직접 눈을 맞추고 악수를 나누는 순간 내심 그려온 모습보다 체구가 커서 놀라는 배우와 상상보다 작아서 당황하는 배우. 여의도 증권가의 마천루 앞에 선 배우 이순재(70)는 너무 작아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막연히 가늠하는 배우의 체구는 ‘품’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내가 품에 안을 수 있을 듯한 배우는 작게, 내 품에 넘칠 듯한 배우는 크게 느끼는 게 아닐까? TV 속 이순재는 항상 커 보였다. 밥상 앞에 웅크려 앉아 있을 때조차. 그리고 약간 두려웠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그가 김혜자에게 고함치기 시작하면 나는 TV를 보다가도 내 방으로 숨어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싶었더랬다. 휘황한 도시 밤거리에서 그의 사진을 찍는 안을 지지한 데에는, 사적인 기억 한 조각이 관련돼 있다. 고교 시절 어느 저녁, 퇴근한 아빠는 “약속이 있다”면서 조용히 나가셨다. 잠시 뒤 엄마와 나는 모처럼 둘이서 저녁을 사먹기로 하고, 집 근처 번화가로 나섰다. 그리고 그 거리 중간에서 아빠의 옆모습과 마주쳤다. 아빠는 어디로 갈지 막막한 표정으로 네온사인 사이에 가만히 서 계셨다. 나는 아빠를 생전 처음 보는 남자처럼 바라봤다. 그리고 내가 그런 거리와 각도에서 아빠를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묻고 답하지 않고 셋이서 백숙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발칙하게도 나는 아마 이순재 선생을 그 기억 속의 프레임 안에 간절히 넣어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작다고 느낀 것은 나뿐이었고 그것도 찰나였다. 길가의 시민들이 친근히 건네는 인사에 화답하고 자리를 옮겨 말문을 연 이순재 선생은 금세 다시 태산만해졌다. 묘한 연둣빛이 감도는 다갈색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버릴 듯 광채를 냈지만, 겁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50년의 연기생활을 포함한 거대한 과거와 더 큰 미래였으므로. -언제 들어도 내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저음이 인상적입니다. 남자들은 물론 누구나 변성기를 겪지만 그런 음성은 언제부터 갖게 되셨나요? =젊었을 때부터 이랬어. 멜로드라마 할 때는 일종의 핸디캡이라고 했지. 미성이라면 최무룡씨가 대표적인데. 옛날에는 다 더빙을 했지만 우리 같은 목소리는 특색이 있으니 성우들이 기피했어. TV로 동시녹음 훈련도 돼 있는 터니, 일이 겹치거나 시한부 작품(수입 쿼터를 위한 편수채우기 영화)이 아니면 80%는 내가 직접 했어. -<모두들, 괜찮아요?>(제작 마술피리)로 <물망초>(1987)에 특별출연 이후 18년 만에 영화로 돌아오셨습니다. 제작자는 원조 역(영화감독 지망 백수인 사위와 생계를 도맡은 딸네 집에 함께 사는 치매 노인)을 수락하실지 걱정했다는데 세부 조건을 의논하기도 전에 흔쾌히 승낙하셨다고요. 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했나요? 아니면 원조 캐릭터에 대한 욕심도 작용했나요? =영화하고 싶다는 게 컸죠. 허준 역을 한 1976년작 <집념>이, 심혈 기울인 주연급 영화로서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이후 영화계는 열악해지고 상대적으로 TV가 바빠져서 영화와 멀어졌어요. 우리 영화가 침체기를 지나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임권택을 필두로 의지있는 작가들이 부흥을 이끌었지만, 한국영화가 아무래도 젊은이들 위주로 하니 나이먹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기여가 미미했어요. 물론 카메오로 출연하라는 조건이면 다시 생각했겠지만, 제대로 된 기회가 오면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프로포즈를 받은 거지. -TV에서는 아들, 손자 세대를 거느리고 사는 가부장으로 많이 나오셨는데, 원조는 딸 내외와 사는 노인입니다. 치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왕년의 바람둥이이기도 하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흥행하려면 보완할 게 많은데 어떤 목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가 걱정이 되더라고. 그런데 가만 보니까 회사도 감독도 작품성에 치중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것 같아. 원조는 본가에서 쫓겨나 딸 집에 기식하는 상황인데, 치매라는 조건이 있어서 멀쩡하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딸이 딸인 줄도 모르는 지경이니까 현실에 구체적으로 민감할 입장의 인물은 아닌 것 같아요. 60, 70년대엔 하루에 영화 4편, 전쟁이었지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오랜만에 영화현장에 나오시니 변한 게 많죠? =제작환경이 많이 달라졌습디다. 우리가 한창 할 때는 다작이었거든. 지금도 조연은 겹치기를 하겠지만. 나도 이제 겹치기 상태로 넘어가고. (살짝 흐뭇한 눈웃음이 돈다. 그는 영화 <파랑주의보> 출연도 결정해둔 터다.) 60, 70년대 바쁠 때에는 열편을 동시에 계약했어요. 심하면 아침에 눈떠서 점심 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까지, 저녁 먹고 통금 때까지, 그리고 통금 이후는 세트에서 하루 네편을 찍었어요. 그러고 돌아다니니 일년에 70∼80편 찍기도 했지. 전쟁이었어. -그렇다면, 영상자료원에서 선생님의 출연작으로 검색되는 140편도 미비한 목록이겠군요. =정확히는 몰라요. 어쨌든 당시는 가장 큰 비용이 필름값이니 무조건 많이 찍어서 경상비를 줄이려고 했지. 그런데 지금은 열컷을 종일 찍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 정도 작품은 TV 같으면 이틀이면 다 찍어!” 했지. (웃음) 그런데 이번에 보니 영화를 대단히 정밀하게 찍더구먼. 조명이며 카메라며. 이것이야말로 원래 영화가 추구해야 하는 제 길이 아닌가 싶어. -동시에 영화 10편에다가 방송, 연극까지 하셨다면 연기 외의 생활이 상상이 안 되네요. =거의 없죠. 신혼 초에도 한달에 길면 일주일 집에서 잤어요. 아이볼 틈도 없었지. 그래서 지금도 애들한테 영향력이 없어. (웃음) 당시 가장 고생한 배우가 문희, 남정임, 윤정희야. 앞서 활동한 도금봉만 해도 다작 시대가 아니었고, 개런티도 현찰 선불이었거든. 그런데 60년대로 넘어가면서 작품 수는 늘었는데 자본은 영세하고 보따리장수가 많아지니까 받을 돈의 1/4은 떼이고 약속어음이 횡행한 거야. -그렇게 바쁘셨다면 출연작이 개봉해도 못 보기 일쑤였겠네요. 뵙기 전에 자료원에 가서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 남기남 감독의 <무협검풍> 등을 보았습니다. <모정에 우는 아들>에서는 선생님이 아버지가 아닌 아들을 연기하는 모습 자체가 제겐 무척 생경하더군요. =영화 연기는 아버지 역 맡기 전에 끝낸 셈이죠. 아버지 역은 TBC 말기와 언론 통폐합으로 여의도로 옮겨오게 된 컬러 TV시대부터 했지. <풍운>의 대원군도 고종의 아버지잖아. 통폐합 이후 노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거야. TV는 우리 세대가 다 오픈했어 -본격적인 탤런트 생활은 KBS에서 시작하신 거죠? =TV는 우리 세대가 다 오픈했어요. 1957년에 종로 네거리에서 전파를 쏜 HLKA라고 한국 최초의 TV방송에도 출연했지. RCA 빅터라는 미국 회사와 합작한 건데 한국일보 장기영 선생이 이어받았지. 그러다 1961년 KBS가 문을 열 때 연극 연출가와 연기자가 그리로 다들 옮겨간 거야. 김혜자, 정혜선, 태현실이 KBS 1기생인데 이미 그전에 우리는 일을 하고 있었지. 그러니까 우리가 전부 ‘뚜껑’을 열고 다닌 거야. -그때는 전속 개념이 없었군요. =그건 1964년에 TBC에서 생긴 것인데, 여자 셋 남자 여섯이었지. 남자는 나, 오현경, 이낙훈, 김성옥, 김순철, 김동훈이었고 여자 셋은 지금은 모두 현업에 없어. MBC가 생겼을 때 스카우트될 뻔했는데, 약속한 것을 뭘 뒤집나 싶어서 그대로 있었지. -그런데 1980년 통폐합으로 의리를 지킨 방송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군요. =점령이라도 당한 느낌이었어요. TBC에 우리가 가진 애정의 심도는 어느 간부 못지않았어. 이병철 회장이 방송을 무척 좋아했는데 나중에 그 양반이 우리와 헤어지면서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물이 맺혀선 악수를 하며 “나 알간? 나 알간?” 하더군. 자기 모를 사람이 어디 있다고…. 연기란 항상 상대와 조화를 이뤄야지 -<막차로 온 손님들>을 보니 젊은 시절 모습은 최무룡 선생님과 비슷한 분위기가 있던데요. =어쩌면 연기 형식이 비슷할지도 몰라요. 내 판단에 최무룡 선생은 제일 정확한 배우예요. 연기를 대단히 계산적으로 하는 거지. 좋은 선배 중에는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연기를 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것이 작품성과 조화를 이룰 때는 정말 기막힌 효과가 나지만 연기의 또 다른 측면은 절제예요. 연기란 항상 상대와 조화를 이뤄야지 상대를 무조건 이유없이 압도하려고 해서는 안 돼요.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연기의 패턴이기도 해요. 그게 곧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의 사실주의적 연기거든. 신극운동 선구자인 유치진, 이해랑 선생이 모두 스타니슬라프스키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연극은 거의 그랬지요. -선생님의 연기론도 그런 흐름 안에서 형성된 산물이겠군요. =물론 영화연기 중에는 장 콕토의 <올훼>처럼 난해하고 대사가 상징적인 것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 시절의 영화란 근본적으로 사람의 이야기였어. 네오리얼리즘 계열 영화에 많이 감화받았죠. 우리 세대는 영화 볼 때 제일 먼저 감독을 봤어요. 예컨대 가장 쉬운 윌리엄 와일러를 보면 웨스턴 <빅 컨추리>부터 미스터리 <광란의 시간>까지 장르는 달라도 그 작가가 가진 작품세계가 틀림없어. 영국 감독으로는 캐롤 리드에 심취했는데 나를 배우로 만든 게 리드의 <심야의 탈출>이에요. <햄릿>은 스카라에서 <심야의 탈출>은 국도극장에서 동시에 했지. 연기는 일절 생각도 않던 때인데도 저런 예술성이라면 인생 걸어볼 만하다고 느꼈어요. 당시에는 기가 막힌 영화가 많았지. -옛날 영화가 요즘 영화보다 더 마음에 드시나요? =그건 다 사람의 이야기예요. 지금은 공상, 과학, 도깨비 같은 이야기라 액션만 있을 뿐이지 연기가 없단 말이야. 옛날 영화는 좋은 교본이었어요. 진짜 명작을 봤다는 자부심에 떨렸지. 뒤비비에, 카르네, 클레르, 데 시카, 비스콘티… (점점 빨라지고 격앙된다) 마르셀 카르네의 <인생유전>을 봐요. 대사가 바로 시지. 그런 영화는 한번 봐서는 몰라. 빠지는 수밖에 없어. 그 의미와 영상의 상징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대학 4학년 방학에 돈암동 동도극장이라고 재개봉관이 있었어. 내겐 당시 살던 청파동에서 돈암동 가는 왕복 버스값과 극장값뿐 점심값도 커피값도 없었어요. 아침 9시 반에 표 사서 객석 한가운데 파묻혀 네번을 보고 나오니 깜깜하더라고. 그리고 국도극장에서 다시 보고, 논산 신병훈련소 가서도 그곳 영화관에서 봐서 <심야의 탈출>을 도합 일곱번을 봤어요. 근데 신고 안 하고 보러가는 바람에 탈영했다고 난리가 났었지. (좌중 웃음) -요즘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 등을 거친 대배우들이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영화에 많이 출연합니다. 이야기가 원형적인 단순한 판타지일수록 배우의 깊이와 중량감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데에 중대한 역을 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한국의 ‘간달프’ 같은 역을 선생님이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나도 신구나 주현처럼 정말 몇 안 되는 개성있고 좋은 배우가 영화에 참여해서 조력하는 모습이 참 바람직하게 보여요. 그런 배우가 있으면 싸구려 연기 쓰는 것과는 영화의 상징성이랄지 품격이 달라지는 거지. -1960년 실험극장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극회 중심으로 이낙훈, 여운계, 오현경 선생님 등과 함께 만든 곡절을 들려주세요. =일단 서울대 연극회는 나랑 친구들이 재건한 거예요. 원래 있던 극회가 적자를 너무 내서 해산당했어. 장부를 보니 하루에 계란을 150개씩 처먹은 걸로 돼 있는 거야. (폭소) 어떤 놈이 떼먹었는지. 그래서 단과대 극회들을 지금 현대극장 대표인 김의경과 의기투합해 통합해서 예산을 넘기면 우리가 부담하겠다고 시작한 것이지. -예술인들이 모이던 명동의 동방싸롱도 자주 오가셨다면서요. =한국 현대연극의 중심이었던 극단 신협 멤버들, 영화인들, 문인들의 집합처였지. 대학을 갓 졸업한 우리는 그 근처를 맴돌며 자꾸 선을 뵌 거라.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어 바로 신협 정규 멤버로 스카우트되길 바랐거든. 그런데 이 어른들이 이상하게 젊은 친구들을 수용하질 않으시는 거야. 그래서, 결국 우리끼리 만든 게 실험극장, 민중극장이에요. 오히려 그것이 우리나라 연극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사건이 됐죠. 만약 그분들이 우릴 받아들였으면 그분들 방식을 추종했겠지. -선생님의 영화, 연극을 접하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은 김수현 드라마의 가부장일 것입니다. 선생님 경력에도 큰 영향이 있었는데, 그분 작품의 힘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대발이 아버지라는 특출한 캐릭터는 내게 하나의 전기를 줬다고 해도 될 거예요. 물론 이후 <목욕탕집 남자들> 등 다른 작품도 많은데 그 역할들이 일견 비슷한 것 같지만 다 달라요. 나도 대발이 아버지는 대발이 아버지로 끝냈지 그대로 재연한 적은 한번도 없어요. 김수현 작가가 논의되는 것은 그만큼 내포된 어휘, 문학적 수련, 작품의 구도와 구성이 다른 작가와 차이가 나서야. 웬만한 작품은 우리가 대사를 많이 고치거든. 말이 안 되니까. 영화도 연극도 드라마란 언어, 말의 예술이란 말이지. 그 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바로 김수현씨예요. 어려운 듯해도 읽어보면 딱딱 들어맞고 단어 하나를 뺄 수가 없어요. 왜? 구문이 무너지니까. 그러니 본인은 자신있게 그걸 연출자나 배우에게 강요한다고. 반면 어떤 작가 대본은 절반을 고쳐도 돼. 김수현 드라마는 토씨 하나 뺄 수 없어 -그렇다면 김수현씨 작품과 같은 드라마를 할 때와 말씀하신 대로 구문이 무너진 작품을 할 때와 임하는 기분이 무척 다르시겠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텔레비전 초창기에는 문인들이 전부 극본을 썼어요. 이를테면 한운사 선생 작품은 고전적이지만 멋이 있고 풍부한 식견이 있어서 대사 하나를 감히 배우가 고칠 수가 없었지. 70년대 후반 절필해버린 김희창 선생도 문학성 높은 작품을 많이 썼어요. 토씨까지 지적하면서 자기 작품 잘못될까봐 녹화현장에 붙어 있었거든. -그건 대본을 빨리 넘겼다는 뜻이네요. <허준> <상도>를 쓴 최완규 작가가 대본이 늦는다고 선생님께 꾸중들었다고 하시던데요. =아무리 대가도 늦게 쓰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야. <허준> 하면서 “이렇게 좋은 작품을 왜 이리 늦게 주냐? 이 좋은 작품을 잘하려면 임마, 배우가 연구할 여유를 줘야 할 게 아니냐? 이게 아무것도 아닌 작품이냐, 어떻게 이렇게 갖다 맡겨버리냐!”고 야단쳤죠. 최완규는 사극 장르를 지켜나갈 작가예요. 근데 그 정도 훌륭한 작품을 밤 2시, 3시에 쪽지대본 받아 읽기는 너무 아깝다고. 옛날에는 TV드라마를 연극하듯 했어요. 우리말 발음부터 놓고 연출가랑 배우가 한 시간을 토론했죠. 이것이 망가진 게, 다작이 되고 CF가 붙으면서예요. 구태여 정제할 필요없다는 타성이 생긴 거예요. 하지만 우리 방송사들과 자매관계인 나 <후지TV> 가보면 제작 방법론이 완전히 달라요. 무조건 1년 전에 사전제작해서 시청률이 100이든 10이든 그대로 나가는 거야. -최완규 작가 말씀을 좀더 드릴게요. 보통 TV드라마는 인물을 주인공의 스승, 원수 이런 식으로 최대한 단순히 정해놓고,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캐릭터를 완성해가는데 선생님만큼 영감을 준 배우가 없었답니다. 선생님의 유의태를 보면서 어떻게 이 인물이 허준의 인성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고요. =(쑥스럽게)아냐, 워낙 잘 썼어요. <집념>과 <동의보감>을 해본 나의 해석은 허준과 유의태는 거의 동일한 인물이라는 거예요. <허준>은 최완규의 창작성이 강한 역작이에요. 기막힌 작가다 싶어서 얼굴 좀 보자고 했더니 산적이 하나 나오더구먼. (폭소)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과 <한> <코리아 판타지>를 쓴 이상현 작가도 글이 훌륭해서 얼굴 좀 보자고 했더니 대추씨만한 사람이 나오고. (폭소) -<세일즈맨의 죽음>을 1979년에 공연하고 2000년에 다시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특별한 애착이 있나요? 듣기로는 더스틴 호프먼이 60대 주인공 윌리 로먼을 40대에 연기할 수 있겠냐고 걱정하자, 아서 밀러였든가, 역할은 60대지만 40대의 에너지가 없으면 감당 못할 역이라고 했다는데…. =맞아. 밀러가 그랬어. 1979년 실험극장에서 할 때는 당시 막내였던 김갑수가 웨이터 역도 하고 심부름도 겸하며 왔다갔다했지. (웃음) 갑수, 아 참 좋은 배우가 됐어요. 그뒤 방송 때문에 죽 연극을 못하다 <허준> 끝나고 석달 틈이 나기에 연극을 그것도 이왕이면 <세일즈맨…>을 하고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기회가 맞아떨어졌어. 밀러가 49년에 쓴 작품을 2000년에야 그 정서를 알겠더구먼. 공해니 환경문제니. 그래서 자르지 않고 두 시간 반 넘게 풀타임으로 했어요. 중간에 치매 증세로 대사가 딱 막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어요. -기꺼이 대답하실 질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민정당 창당 발기인이었고 1992년 민자당 중랑갑 지역구 의원으로 14대 국회에 등원하셨습니다. 그리고 15대 선거 때는 불출마하셨죠.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와 떠날 때의 심경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1980년 탤런트 협회장을 이낙훈씨가 했는데 비례대표를 배정받았어요. 전두환 정권이었지만 대중예술가들에게 집권여당에서 비례대표를 줬다는 것은 굉장한 사실이었어요. 우리로선 정권의 정체성은 차치하고 고마웠어요.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법률적으로 보완하고 사회인식상 재고해야 할 우리 문제가 너무 많았거든. 이 나라는 늘 문화정책을 말단에 두고 문화를 생활의 액세서리로나 생각하지 문화의 부가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었으니까. 특히 딴따라라 불리는 탤런트들은 방송이라는 절대적 조건 때문에 코가 꿰어 “너희가 국민 정서를 무시하는 거냐?”식의 대답만 듣고 고생이 컸지. 1년에 몇 만원 보수를 올리기 위해 투쟁했다고. 전두환 정권을 접촉해서 허락받고 1980년에 스트라이크를 했어. -파업을 전두환 정권에 비공식적인 절차로 허락받았다는 말씀인가요? =그것이 그쪽에 참여하며 끌어낸 조건이야. 일주일 파업해서 그때 한 20% 올린 것이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우리의 대표가 국정에 참여할 수 있다면 달라질 것 같았고 친한 이낙훈에게, 가서 열심히 하면 도와주겠다 했더니, 돕는 조건의 하나가 입당이래. 정치 생각은 없었지만 핵심에 들어가면 뭔가 바꿀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일단 들어가면 탤런트 나부랭이인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그랬더니 자꾸 자리가 올라가더라고. -지나치게 제대로 하셨군요. (웃음) 13대 선거에 750표 차이로 낙선하고 14대에 당선됐을 때 당시 방영 중이던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이미지가 보수표를 결집했다는 비난도 있었는데요. =난 이렇게 대꾸했어요. 그 드라마는 내가 입후보할지 정하기 전인 전년도 10월부터 시작했고 뜰 줄도 몰랐고 연기는 내 생업이다. 아내를 패는 짓 따위 하지 않는 <가족>이라는 더 좋은 드라마도 동시에 했는데 그 드라마 얘기는 왜 안 하냐. -15대 불출마 선언은 대중예술인을 대변한다는 동기가 충분히 충족됐다고 보셨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환멸도 있었습니까? =4년 동안 상임위 바꾸지 않고 문공위에만 있었어요. 방송국에 일임하는 것으로 돼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에 “동의가 있을 시에는”이라는 문구를 넣었고 사전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환멸도 있었지. 난 정치는 신의와 신조라고 생각해요. 선진국의 정당은 이념과 신념의 집합체야. 그런데 여기는 평생동지라더니 4년 지나니까 다 변하는 거야. JP는 안 된다던 사람이 JP가 당을 나가니 “현실이 그렁께” 하면서 따라나가기에 막 욕해줬지. 내가 울분을 느끼고 엎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이게 보통 헷갈리는 상황이 아닌 거지. (좌중 폭소) 또 내가 이미 60대인데 동료나 후배에게 폐를 안 끼치고 일할 수 있는 저력이 남아 있을 때 본업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이 알기 전에 <조선일보> 기자에게 미리 공언해버리고 그만뒀지. 연기 말고 하고 싶은 건 없어 -후배가 잘 못하거나 더 잘할 수 있는데도 안 하면 봐넘기는 선배가 있고 바로잡는 선배가 있는데 선생님은 후자 스타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평생을 해온 입장에서 묵과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거든. 능력있는 젊은 친구들이 표현을 다 못할 때는 지적을 해요. 특히 관심있는 것은 우리나라 언어예요. 문자메시지니 뭐니 우리말이 훼손되고 원형이 다 없어졌어. 대본도 입에 붙지 않은 영어가 왜 그리 많은지. 작가들은 시대 흐름에 맞추어 쓰는 거라는데, 나는 모르겠어. 그렇게 해서 나오는 명작이 있는지. TV드라마로 예술 운운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예술적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어. 같은 장사를 하더라도 예술성과 본질을 갖고 장사하는 것과 철저하게 장삿속으로 가는 것과는 달라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죠? =<파랑주의보>에서는 차태현의 할아버지로 관 짜는 노인 역인데 원조와는 전혀 다른 재미있는 캐릭터예요. 가을에는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라고 연극을 한편 더 해요. 이호성과 더블캐스트로. -연기 외에는 해보고 싶으신 일이 없고요? =다른 건 없어.

[외신기자클럽] 척추장애인 배우들의 비극적 운명 (+불어원문)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조니 뎁 옆에서 100번 복제된 딥 로이가 눈길을 끈다. 이 척추장애인 배우는 혼자서 모든 움파 룸파족의 역을 해내는데, 초콜릿 공장의 종업원인 이 작은 종족은 영화 틈틈이 열광적인 뮤지컬 장기로 자리매김한다. 여러분은 아마도 이 배우를 이미 <빅 피쉬> <혹성탈출> 혹은 <다크 크리스탈>이나 <네버 엔딩 스토리> 등에서 보았을 것이다. 본인에겐 한 열정적인 영화광이 자비로 파리에서 출간한 <영화 속 난쟁이들>이란 책을 다시 들춰볼 계기가 되었다. 영화 속 척추장애인 배우들의 역사에서 1939년은 중요한 해로 남을 것이다. 역마차 습격, 싸움질 등으로 볼 때 <작은 마을의 공포>는 모든 출연 배우가 척추장애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전통적인 서부극이었다. 배우들은 무척 심각하게 연기를 하지만, 촬영 세트와 소품들은 실물 크기여서 결과적으로 난쟁이 여배우가 엄청나게 큰 콜트 자동소총을 휘두르거나 카우보이들이 주점의 여닫이문 아래로 지나가는 등… 만약 모든 배우들이 몇주 뒤 빅터 플레밍 감독의 <오즈의 마법사> 촬영장에 다시 합류하지 않았더라면, 이 작품은 하나의 일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스튜디오의 대작 영화를 위해 40명의 척추장애인 배우가 모였다. 컬버 호텔에 묵은 그들은 필연적으로 매스컴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술잔치, 난교파티 등의 온갖 종류의 기만적인 풍문이 촬영 기간 내내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사람은 할리우드에 머물며 배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역사적 재구성에서 봤을 때 척추장애인들은 그들이 회화에서 맡았던 왕의 어릿광대, 신비로운 조언자와 같은 역할을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루이스 브뉘엘 감독도 이 전통에 맞닿아 있다. 그는 <나자린>과 <사막의 시몽>에서 척추장애인 헤수스 페르난데즈를 캐스팅했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는 피에랄에게 한 역을 맡겼다. 프랑스 출신의 이 뛰어난 척추장애인 배우는 특히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저녁의 방문객들>과 장 들라노이 감독의 <영원한 귀환>에서 연기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체로 척추장애인 배우들은 질이 떨어지는 작품에서 사디스트적인 역을 맡았다. 조세희의 걸작을 각색해 이원세 감독이 1981년 영화화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아주 예외적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척추장애인은 한 개인으로서의 위상을 뛰어넘어 비천한 상태로 머물러 있게끔 강요당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게 된다. 필리핀에는 척추장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가적으로 유명한 왱왱이 있다. 그 나라의 대스타로서 ‘007 ½’ 요원 역을 맡은 그는 가라테를 하고,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릴 땐 이불보를 낙하산으로 이용하기도 하며…. 이 간략한 개관에 포르노영화도 빠지지 않는다. 나폴레옹이란 척추장애인은 콧수염을 기른 포르노 배우로 <결코 저항할 수 없는>(1991) 등으로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누렸고, 미젯은 <마이크로슬럿>(1996) 등으로 1990년대 후반 포르노계의 여주인공이었다. 척추장애인 배우들은 종종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다. 텔레비전 시리즈인 <마법사>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라파포트는 산 페르난도의 한 공원에서 심장에 총을 쏴 자살했다. 마이클 던은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넌 이젠 어른이야>(You are a big boy now, 1966)에도 출연하고, 돈 시겔 감독의 <마디간>(헨리 폰다 주연, 1967), 조셉 로지 감독의 <붐!>(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 1968), 조지 쿠커 감독의 <져스틴>(1968)에도 출연했고, 텔레비전 컬트 시리즈인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나 <스타트랙> 같은 작품에도 출연했다. 그는 1973년 런던에서 자살했다. 브로드웨이에서 한동안 활동한 뒤, 프랑스인 에르베 빌쉐즈는 1973년 올리버 스톤 감독의 첫 작품인 <강탈>에 출연했고,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선 악한을 연기했다. 그는 1993년에 자살했는데, 자신의 시신을 전문의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의학용으로 기부했다. 묘하게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촬영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자신의 마지막 역을 통해 빌쉐즈는 영화의 실패를 기록한 것일까? 영화예술은 그가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자신의 다른 점을 표현의 방법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스크린은 한 사회의 비천한 시선을 비춰줄 뿐이었다. 카메라는 단지 차가운 도구로서 감독의 시선에 종속될 뿐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에게 맞는 역을 찾기 위해 남은 것이라곤 홀로 죽어가는 자신을 찍는 것 외엔 없었던 것이다. Breves et tragiques histoires de nains Dans Charlie et la Chocolaterie, on remarque a cote de Johnny Depp la presence de Deep Roy, multiplie par cent. Cet acteur nain interprete a lui seul tous les Woompa Loompas, ces petits employes de la chocolaterie qui ponctuent le film de delirants numeros musicaux. Vous l’aviez peut-etre deja vu dans Big Fish, La planete des singes ou encore Dark Cristal, L’histoire sans fin... L’occasion de relire un livre de chevet : Les nains au cinema publie a Paris et a compte d’auteur par un cinephile passionne. Dans l’histoire des nains au cinema, 1939 restera une annee clef. Attaque de diligence, bagarres… The terror of Tiny Town est un western conventionnel sauf qu’il est entierement interprete par des nains. Les acteurs jouent tres serieusement mais les decors et accessoires sont a taille reelle : une naine brandit donc un colt demesure, les cow-boys passent sous les portes battantes du saloon… The terror of Tiny Town serait une anecdote si toute la distribution ne s’etait retrouvee quelques semaines plus tard sur le tournage du Magicien d’Oz de Victor Flemming. Pour la premiere fois, un grand film de studio reunissait 40 nains. Loges au Culver Hotel, ils attirerent inevitablement l’attention des medias. Beuveries, orgies… toutes sortes de rumeurs fallacieuses ont circules pendant le tournage. Certains nains resterent neanmoins a Hollywood et y firent carriere. Dans les reconstitutions historiques, les nains ont repris le role qu’ils ont dans la peinture : fous du roi, mysterieux conseillers… Luis Bunuel se rattache a cette tradition. Il employa le nain Jesus Fernandez dans Nazarin et Simon du desert. Pour Cet Obscur Objet du desir, il fit tourner Pieral. Ce superbe acteur nain francais joua notamment dans Les Visiteurs du soir de Marcel Carne et L’eternel Retour de Jean Delannoy. De telles occasions sont rares. Globalement, les nains ont plutot droit aux roles de sadiques dans des films bas de gamme. La petite balle lancee par un nain, adaptation du chef-d’œuvre de Cho Sehui tourne par Yi Wonse en 1981, est bien une exception, mais le nain depasse alors son statut de personnage pour devenir un symbole : celui du peuple opprime, condamne a rester petit. Aux Philippines emergea le seul heros national nain : Weng Weng. Immense vedette en son pays, l’agent 007½ pratique le karate, utilise un drap comme parachute pour sauter du toit d’un immeuble… Ce bref panorama ne saurait oublier le X : Napoleon, hardeur moustachu, connut son heure de gloire au debut des annees 90 (A little irresistible 1991…) puis Midget fut l’heroine de pornos a la fin des annees 90 (Microslut 1996…). Les acteurs nains eurent souvent de tristes destins : David Rappaport, heros de la serie The Wizard, se tira une balle en plein cœur dans un parc de San Fernando. Michael Dunn tourna avec Francis Coppola (You are a big boy now - 1966), Don Siegel (Madigan - 1967 avec Henry Fonda), Joseph Losey (Boom ! - 1968 avec Elizabeth Taylor), George Cukor (Justine - 1968) et dans des series tele cultes comme Wild Wild West ou Star Trek. Il se suicida a Londres en 1973. Apres une carriere a Broadway, le francais Herve Villechaize avait joue dans Seizure (premier film d’Oliver Stone tourne en 1973) et interprete le mechant dans le James Bond L’homme au pistolet d’or. Il se suicida en 1993, leguant son corps a la medecine pour qu’un specialiste puisse l’etudier. Etrangement, il avait pris soin de filmer sa propre mort. Dans son dernier role, Villechaize pointait-il l’echec du cinema ? Cet art ne lui avait pas permis de transcender son handicap, de porter sa difference au rang de moyen d’expression. L’ecran n’avait fait que renvoyer le regard lamentable de la societe. La camera n’etait qu’un outil froid, qui dependait de l’oeil du realisateur. Alors il ne lui restait plus qu’a se filmer tout seul et mourir, pour enfin trouver un role a sa hauteur.

마지막 진실이 연극에 있는 까닭, <박수칠 때 떠나라>

어쩔 수 없이 사담으로 시작하는 것을 독자 여러분께서 부디 용서하시기를. 여기에는 좀 복잡한 사정이 있다. 나는 장진을 지난해 가을, 부산영화제에 가기 위해서 김해공항에서 차를 기다리면서 처음으로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길다고 해봐야 김해공항에서 해운대 메가박스에 자리한 영화제 사무실까지 가는 40분 정도의 동행길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장진의 영화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기막힌 사내들>은 새롭기는 했지만 그만큼 나를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영화는 뒤죽박죽이었고, 내 생각에 장진은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런 다음 <간첩 리철진>은 좀 나았다. 하지만 그 재미있는 아이디어로 다른 사람이라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와 재치있는 상황을 만들 줄 알지만 영화는 어디선가 꼬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갑자기 혼란에 빠져들었다. <킬러들의 수다>는 그냥 보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그의 네 번째 영화 <아는 여자>를 본 다음 처음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뭐랄까, 갑자기 영화가 다른 수준으로 올라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재영의 힘이 컸고, 거기에 ‘마치 외계에서 온 소녀’ 같은 이나영은 드물게 자기에게 맞는 인물을 만나서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는 여자>를 본 다음 그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때 장진의 다음 영화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연극의 장점을 영화에서 살리려는 시도 장진은 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차라리 수줍게 말한다고 하는 편이 맞다. 그런데 지금 준비하는 다음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흥분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평담론들, 그중에서도 비평가들이 아니라 충무로의 영화감독들, 혹은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서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사람들은 내 영화를 연극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차라리 그 사람들이 연극을 아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나한테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혹시 보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무대 연출한 <박수칠 때 떠나라>라는 연극이 있는데 그걸 영화로 옮겨볼 생각입니다. 그것도 연극 무대처럼 만들어서 그 위에서 영화로 만들면 그게 연극적인 영화인지 영화적인 연극인지 질문할 생각입니다. 사실 그 연극은 무대에서 연출할 때 영화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미안하게도 나는 그 연극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제목은 알고 있었다. 장진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박수칠 때 떠나라>를 보러갔다. 이 영화는 장진의 가장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가장 야심적인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정말 자기 말 그대로 연극을 영화로 옮겼다. 이 말은 희곡을 영화로 각색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옮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연극의 틀은 그대로 남긴 채 그걸 영화로 옮긴 다음 다시 그 안에서 연극적인 시도를 한다. 그냥 더 간단하게. 장진은 연극과 영화 사이에서 오고간다. 장르 사이의 왕복, 이 제스처에서 저 액션으로, 저 동선에서 이 프레임으로, 연극이 요구하는 전체성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입체성으로, 그 안에서 시각적으로 혼합된 조건들. 그리고 오인받을 수밖에 없는 그 안에서의 왕복의 구별 불가능한 방법의 오류들. 장진이 여기서 그의 한계를 놓고 벌이는 게임은 흥미있지만, 그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영화에 오면 연극을 그리워한다. 그가 연극 무대를 연출할 때도 그럴까? 이야기는 간단하다. 5월20일 밤 11시40분, 호텔 1207호에서 미모의 카피라이터 정유정이 아홉 군데 칼에 찔린 채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그런 다음 검사 최연기(차승원)가 등장한다. 현장에서 용의자 김영훈(신하균)이 잡히고, 그에 대한 취조에 들어간다. 그걸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48시간 생방송 중계를 시작한다. 취지는 범죄예방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라이브 쇼일 뿐이다. 문제는 너무 쉽게 끝날 줄 알았던 이 사건이 의외로 꼬이기 시작한다. 사건보다 인물에 집중하는 하드보일드 추리물 취조실에서 이미 잡은 범인과 검사 사이에서 심리적인 대결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 영화보다 연극이 잘할 수 있는 게임이다. 영화가 더 잘할 수 있는 게임은 그 범인을 잡으러 돌아다니는 일이다. 아마 장진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진은 자기가 세운 한계를 먼저 받아들인다. 아니, 차라리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다. 영화는 실내로 들어오고, 일단 들어오면 거기서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설정 자체가 장진의 게임이다. 두개의 게임. 검사와 범죄자의 심리적 게임, 그리고 장진의 영화와 연극의 게임. 물론 그 안에서 끝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 검사 최연기도, 용의자 김영훈도, 검찰청 직원들도, 방송국 프로그램 스탭들도, 물론 영화감독 장진도, 그리고 그가 이끌고 세트 안으로 들어온 그의 주력부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기자들도 아무도 끝나기 전에 나갈 수 없다. (잠시! 여기서부터 스포일러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읽지 말거나, 보지 않을 분들만 읽으실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은 다음에는 나를 원망하지 말 것.) 그러나 아쉽게도 이 영화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원작이 아니다. 혹은 반 다인과 같은 추리라는 논리의 게임을 벌이지도 않는다(이를테면 마지막에 갑자기 무속신앙의 원귀와도 같은 덧없는 해결의 결말). 엘러리 퀸처럼 무시무시하지도 않다. 레이 브래드베리와 같은 반전의 유머도 없다. 최연기는 페리 메이슨이 아니며, 더더구나 브라운 신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금방 이 영화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었다. 그 대신 그걸 나는 장진의 메시지로 읽었다. 그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추리가 아니라 인물을 보아주길 기대한다. 그것도 연극적인 인물들의 제스처를 바라보는 영화적인 프레임과 카메라의 이동과 쉴새없는 편집을 보아달라고 요구한다. 같은 말이지만 연극과 영화를 보아달라고 간청한다. 이 희곡은 (내 생각에) 앤서니 세이퍼나 데이비드 마멧의 희곡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다. 하드보일드와 추리물에 적당히 걸쳐 선 이 영화는 사건 해결을 위해 촘촘하게 구성된 드라마를 따라가지 않는다. 그 대신 최연기 검사를 중심으로 인물들 사이의 거미줄을 따라간다. 그들이 던져진 취조실(이자 방마다 중계방송되고 있는 공개 무대)인 방과 방의 연속은 일종의 거미줄처럼 질서정연하게 만들어진 (카메라들이 감시하는) 투명한 아케이드이고, 그 안에서 영화는 마치 무대처럼 방과 방을 옮겨가면서 진행된다. 투명함, 하지만 탈출 불가능. 거미줄처럼 칭칭 동여맨 줄거리. 그런데 어리둥절한 것은 그 커다란 세트에, 그 안에 불려온 그 많은 인물과 그 인물들을 따라다닌 분주한 카메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이 모든 노력을 그냥 허사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만일 사건을 추궁하는 영화라면 추리로 풀어내든지 아니면 (검사가) 머리가 나쁘다면 완력으로 풀어내든지 해야만 했을 것이다(그것도 아니라면 주인공을 위해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관객 자신에게만 알려주는 비밀의 누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은 그냥 허위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 사건이 왜 풀리지 않는가, 라는 해결의 불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의 가장 이상한 점은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 시작된다. 이 영화는 왜 48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이 시간은 영화에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추리의 시간이 아니라 죽은 시체 정유정을 시체 부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영화는 물론 시체 부검하는 정유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종일관 진행된 추리의 논리를 모순으로 만드는 것은 마지막에 도착한 단 한장의 팩스, 그러니까 이 사건이 결국에는 정유정의 자살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내내 본 것은 누가 죽였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시체를 누가 훼손시켰는가, 라는 다소 역겨운 시체와의 숨바꼭질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알게 된다. 이것은 왜상효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두개의 위치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서로 다른 이중의 잉여지식의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한쪽을 알면 다른 한쪽은 무의미해지는 진위 판단의 진술이다. 물론 장진이 속임수를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중간에 죽은 정유정의 유령이 찾아와 그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쓰는 최연기 검사에게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잔 선물한 다음 떠나가는 장면을 포함시켰다. 영화는 죽은 정유정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저 커피 한잔 주고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 죽은 정유정 역의 김지수의 ‘사소한’ 등장은 지나치게 인상적이어서 누구라도 의심을 품을 만하다. 장진은 마지막 순간 연극에로 고개를 돌린다 나는 이것이 장진의 이중의 게임으로 읽힌다. 지나칠 정도로 무대와도 같은 세트 안에서 영화적인 프레임과 카메라의 이동과 쉴새없는 편집을 동원한 이 영화에서 정유정의 유령이 최연기 검사 곁에 등장하는 장면은 신기하게도 연극적으로 찍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김지수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다른 장면과 다르게 찍혔기 때문에 인상에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여전히 연극이 영화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던 표현주의 영화 시대, 혹은 알프 쉐베르그 이후의 스웨덴영화의 전통, 그리고 물론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이후 보여진 영화의 연극적인 무대화,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필름 다르의 유산, 그 이후 반복되어온 영화 안의 연극의 자리를 재빨리 복원시키려는 방법의 반복이다. 영화가 죽은 자를, 유령을, 귀신을, 망령을, 특수효과 없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아 있는 자 곁에 앉힐 때 그것을 성립시키는 영화적 전제는 연극적 유산의 인정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근본적으로 현실의 기계적 복제의 이미지에 물리적 운동을 부여하면서 시작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의심은 이 영화의 마지막, 그러니까 최연기 검사가 모두 다 떠난 거대한 세트와도 같은 취조실 스튜디오에서 저 한쪽 방문을 열자 마치 다시 한번 연극처럼 재현되는 정유정의 자살장면의 광경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확신이 되었다. 장진이 사건의 진실, 죽은 자의 진심, 비밀의 재현을 시도할 때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연극이다. 그는 영화가 일종의 기만, 소란스러운 속임수, 재미있는 버라이어티 쇼, 스펙터클한 액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을, 혹은 진심을 보지 못한다. 그걸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극뿐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 연극에로 고개를 돌린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장진의 첫사랑을 존중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더 좋아졌으면 고맙겠다.

아시아 영화 기행: 이란 [3] - 검열·제작현장

검열의 벽과 제작 현황 파흐란 메흐란파르와 바흐람 베이자이를 만난다는 것은 이란 내 소수민족의 문제와 검열의 문제를 만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쿠르드족 출신의 감독 메흐란파르는 <종이 비행기> <생명의 나무> <사랑의 전설>로 유명하다. 만난 감독들 중 가장 선한 인상을 보여준 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쿠르드족, 혹은 이웃하고 있는 탈레쉬족에 이르기까지 소수 민족의 언어와 풍습과 전통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시학과 다큐멘터리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스스로는 “드라마적인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다. 서로를 키워주는 것이다. 키워주는 것은 사랑의 징표이다. 키워주지 않는 것은 증오의 증표이다.” 외우는 시 한편을 들려달라고 하니, 서슴없이 즉석에서 몰러너(외국에는 ‘루미’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고 한다)의 시를 한수 들려줄 만큼 낭만파다. 그러나 상당한 유명세를 갖고 있는 해외의 상황과 달리 메흐란파르 영화의 국내 상영은 힘들기만 하다. 그의 영화들은 쿠르드족 지역에 짧게 상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식으로 상영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메흐란파르는 같이 일하던 제작자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졌다고 긴 한숨을 쉰다. 바흐람 베이자이의 집에는 책들이 가득하다. <바슈> <여행자> 등 영화 대표작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문학 및 연극에 대한 저술서를 냈고, 연극연출도 여러 편 한 그는 혁명 전 영화세대로서 연극적인 영화 또는 실험적인 영화들을 만든다. <여행자>는 그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가 시작하면 언니는 동생의 결혼식에 간다. 그러나 차를 타기 직전 뒤돌아 카메라를 향해 쳐다보며 “우리는 지금 동생 결혼식에 갑니다. 하지만 곧 죽게 될 겁니다”라고 말해 관객을 따돌린다. 결국 죽은 언니는 끝내 동생의 결혼식에 거울을 들고 유령이 되어 찾아온다. 그는 이 영화의 주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실패에 겁을 내지 않는 자들은 죽음 앞에도 절망하지 않는다. 난 암울한 현실에 혼자 대항하여 현실을 바꾸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행자>의 이 주제는 영화 검열을 대하는 베이자이의 강철 같은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작품들이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던 베이자이, 그가 들려주는 검열과의 싸움 하나. “<여행자> 상영 당시 처음에는 37장면을 삭제하라고 통보받았고, 나는 하지 못하겠다고 알렸다. 그뒤 그 영화는 상영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다시 9장면을 줄이면 된다는 말에도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작자들이 자신들의 비용을 거두기 위해 상영 직전 삭제했고, 결국 이 영화는 아무런 선전도 없이 아주 나쁜 조건으로 상영되고 말았다.” 베이자이는 “이번주 토요일에도 왜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 승인을 아직까지 안 해주는지 협회에 따지러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에게 검열과의 싸움은 진행 중이다. 이란영화의 문제점이 바로 이 열악한 상영과 삼엄한 검열의 조건이다. 그만큼 표현의 제약이 많다는 얘기다. 가령, 대략 4∼5단계 정도의 사전 검열이 있는데, 그걸 모두 통과한다고 해도, 3등급으로 분류받아 개봉 허가를 받는다. 꽉 죄는 여성의 옷, 여성 신체의 일부 노출, 여성과 남성의 육체적인 접촉이나 애정행각, 군인이나, 경찰, 가족에 대한 조롱, 수염 기른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캐릭터, 외국 음악사용 등이 금지 사항들이다. 베이자이의 한탄.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남녀를 서로 떨어뜨리기 위해 뭔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불필요한 시간을 소요해야만 한다. <여행자>에서 나는 같은 장소에 있는 커플을 따로 떨어뜨리기 위해 남편은 쇼핑을 하고, 아내는 다른 곳에 머물거나, 여자는 창가에, 남자는 창 밑에 있도록 만들어야만 했다”고 한탄한다. 사전 검열의 조항들을 지키지 않을 경우 상영을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켰다고 해도 겨우 통과한 영화는 질과 상관없이 나쁜 조건을 부여받는다. 가령 3등급 중 1등급을 받아야만 텔레비전에서 광고도 하고 좋은 시기에 좋은 극장에서 상영을 할 수 있다. 만약 3등급을 받으면 텔레비전 광고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좋은 시기에 극장에 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제약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형식이 발전했다는 일부 내부의 논리가 있지만 그건 위험한 발상이다. 이란영화의 미래를 진지하게 말하는 자리는 여기여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는 현실을 먹고 자란다 이제 여행의 끝에 왔다. 이란의 공휴일인 금요일에 본 예배장면이 눈에 선하다. 전 국민의 90%가 넘는 무슬림들은 개인예배 외에도 금요일이면 집단예배를 위해 사원을 찾는다. 테헤란 시내 가장 많은 무슬림이 모여 기도를 올린다는 테헤란대학. 엄청나게 많은 인파 중에도 차도르의 물결과 녹색 군인의 물결이 가장 눈부시다. 정문 앞에서 서로 교차하더니 각자 정해진 남녀 입구로 따로 휩쓸려 들어간다. 대학 내부로 들어가면 연이어져 걸려 있는 천조각이 남자와 여자의 기도 장소를 표식으로 가른다. 남자들의 경우 꼭 정해진 장소에서만 기도를 올릴 필요는 없다. 몇몇 사람들은 돔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작은 카펫을 깔고 기도를 올린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화장실에 줄을 서서 예배 전 손발과 얼굴을 닦는 의식 ‘우두’를 행하는 장면은 기도를 올리는 장면만큼이나 성스럽다. 의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군인 한 무리에게 웃음을 보낸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도 웃는다. 그들에게서 둔덕에 앉아 꽃을 따던 <체리 향기>의 그 군인들을 본다. 끝끝내 이곳의 현실은 영화와 구분되지 않으려나보다. 그러나 이제 놀라지는 않는다. 구분되지 않는 영화와 현실의 관계가 그들의 생활과 의식과 사고 어딘가에서 풀려나온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시네마>에서 이란영화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 천일야화의 방법을 사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살롬! 시네마>에서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밀려드는 현실의 사람들을 포착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비록 영화작업을 위해 타지키스탄으로 건너가 있는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또 한명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포함하여 다른 이란의 감독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정의 귀중한 결과였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소년이 끝내 공책을 전해줬다면, 나는 적어도 이란영화의 한 페이지를 건네받았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테헤란을 떠나오는 날 일행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서 나는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연락할 길이 없었다. 공중전화기 앞에 한참을 망연자실 서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무섭고 무뚝뚝하게 생긴 어떤 남자에게 전화카드를 빌려 전화를 한다. 아니, 사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걸어준다. 손짓 발짓과 미소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니, 이 무뚝뚝하면서도 정 많은 남자를 언젠가 어느 이란영화 한편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란영화의 역사 1969년 <암소>로 해외에서 인정 이란영화의 태동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주장이 있다. 1900년 왕궁에서 일하던 미르자 에브라힘 칸 아카스 바시가 촬영한 것이 그 시작이라는 설과 1930년에 촬영된 최초의 극영화 오바네스 오가니안스의 <아비와 라비>를 그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다. 이미 1920년경부터 이란에서는 검열의 형태가 존재했다. 혁명 전까지 대체로 대중의 입맛을 맞추던 영화들은 이른바 ‘필름 파르시’(Film Farsi)라 불리던 장르들로서, 인도와 이집트 등지의 상업영화를 모방한 형태의 영화들이었다. 전문적인 상업영화로서의 스타일이 결정된 것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다. 동시에 1963년에는 시인 포루흐 파로허저드가 생전의 단 한편의 영화, 그러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검은 집>을 남기면서 한획을 그었다. 이란영화가 국내를 벗어나 외부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다. 무엇보다도 이란영화의 예술성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된 건 다리우스 메흐르쥐의 1969년작 <암소>였다. 이때가 혁명 전 이란영화 뉴웨이브가 태어난 시기다. 자신의 암소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소라고 행세하는 어느 농부의 이야기인 <암소>는 정부로부터 상영금지당했지만, 1972년 베를린영화제에 몰래 출품되었고, 자막이 없는 상태로 상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면서 이란영화의 건재함을 과시했다(다리우스 메흐르쥐는 이번 23회 파지르영화제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이란영화는 혁명을 지난 80년대 이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등을 중심으로 다시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