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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창작과 비평, 애증과 공생관계 [2]

프랑스에선 지금 99년을 마감하는 현재 프랑스영화계의 최대 화제는 <리디큘>(Ridicule)의 감독 파트리스 르콩트에 의해 시작된 감독들과 비평가들의 일대 격전이다. 모든 것은 지난 10월13일 르콩트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 감독, 제작자 연합인 ARP 회원들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서 시작됐다. “얼마 전부터 프랑스영화를 대하는 비평가들의 태도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몇몇 평론가들이 마치 대중적, 상업적인 프랑스영화를 죽이기 위해 비평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며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함께 토의하자고 촉구하며 끝난다. 원래는 사적인 성격을 띤 이 편지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영화계와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대처한 언론은 암묵적으로 공격의 표적이 된 일간지 <리베라시옹>. 지난 10월25일 문제의 편지와 함께 르콩트 감독 인터뷰를 실어 논쟁을 확산시켰다. 이 인터뷰에서 르콩트 감독은 프랑스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점점 떨어지는 상황에서 프랑스영화를 매도하는 데 혈안이 된 비평가들의 태도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이제 곧 미국영화가 시장을 휩쓸 것이라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르콩트 감독은 특히 대중적인 프랑스영화에 적대적인 매체로 <리베라시옹> <르몽드> <텔레라마> 삼총사를 지목하면서 <제5원소> 개봉 때 뤽 베송이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했다. “영화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길 원치 않는 착한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극우파 정치가에게도 하지 않은 증오에 찬 인신공격까지 하며 영화를 매장시키려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성토대상이 된 매체들이 바로 반박을 하기보다는 그간 잠복해있던 문제들을 공론화하는 건설적인 계기로 삼으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그런데 르콩트 감독의 토론제의에 화답한 감독들이 지난 11월4일 모여 작성한 공동선언문이 미처 수정되기도 전인 초안상태에서 지난 11월25일 <르몽드>에 공개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베르나르 타베르니에 감독이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문은 이제까지 프랑스영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매도해 나간 비평문들을 조목조목 제시하며 그 필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시했다. 영화 못지 않게 항상 옳은 말만 하는 것으로 유명해 곧잘 이곳저곳에서 인용되곤 하는 고다르의 말이 이 선언문에도 인용됐다. “평론가들은 영화를 위해 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 덕에 산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이 선언문의 공식적인 요구사항인데, 이는 비평가가 한 영화를 보고 비호의적인 평을 내릴 경우에 관객에게 끼칠 나쁜 영향을 고려해 영화가 개봉하는 주에 이 비평문을 싣지 말고 한주가 지난 다음에 실으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문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또다른 감독들이다. 아네스 미르나 자크 로지에, 로베르 게디귀앙 등 63명의 감독들이 지난 12월5일치 <리베라시옹>을 통해 문제의 선언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음을 선언했다. 프랑스 전국에서 900만명의 관객을 모은 <아스테릭스>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희망차게 시작된 99년은 공공연히 대중적인 영화를 표방하면서 여름 바캉스 이후 개봉한 바르니에의 <동서>, 다이안 큐리의 <세기의 아이들> 등이 전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낳으면서 ‘대중적, 상업적인 영화의 위기 및 프랑스영화 시장점유율 추락’에 대한 우려로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감독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 논쟁을 둘러싸고 제기된 문제들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과연 대중영화와 작가영화를 평가할 때 다른 비평기준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곧 <르몽드>나 <리베라시옹> 같은 일반대중을 상대로 하는 일간지가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영화전문지와 동일한 비평기준을 가지고 영화를 평가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둘째, 미국영화라는 거대한 기구와 경쟁해야 하는 프랑스영화, 특히 이들과 직접 경쟁상대가 되는 대중적, 상업적인 영화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들 영화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마지막은 비평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절대적인 비평의 자유를 옹호하고 작품 외적인 요소의 고려없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영화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반면, ‘도대체 무슨 권리로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지, 과연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회의’를 토로한 소수 평론가들의 자아비판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문제의 선언문에서 “셀린이 사르트르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셀린 뒤에 <밤으로의 여행>이라는 걸작이 있기 때문인데, 과연 현재 비평가들은 그들이 속한 매체에서의 위치말고 자신의 비평을 정당화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쨌든 논쟁은 시작됐다.

창작과 비평, 애증과 공생관계 [4]

비평없으면 셰익스피어도 없다 아주 오래 전에, 비평적으로 막 재평가받기 시작하던 60년대 초에 앨프리드 히치콕은 <무비>의 빅터 퍼킨스와 나눈 대담에서 비평가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영화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수십번 고민한 끝에 장면을 만든다. 그러나 평론가는 정확하지 않은 기억에 기초해 영화의 좋고 나쁨을 일필휘지로 판단한다. 시사회를 보고 집으로 돌아간 그날밤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평을 휘갈기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바로 평론가라는 것이다. 보신 분은 다 아시겠지만 최근 개봉한 송능한 감독의 <세기말>에도 잘난 체하는 평론가를 야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중 시나리오 작가의 입을 빌려 평론가들의 경솔하고 천박한 20자평에 독설을 퍼붓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아예 영화감독들에게도 평론가들에 대해 20자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어떨까, 라는 심정이 드는 것이다. 다른 언론인과 마찬가지로 평론가도 독자에게 정보와 해설을 제공하고 가치 평가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평론은, 특히 저널리즘 평론은 특정영화를 볼 것인지 말 것인지, 그 영화가 볼 만하다면 무슨 이유로 볼 만한지 정곡을 찔러야 한다. 그것이 로저 코먼이 말한 평론의 역할, “비평가들은 영화에 대해 지적인 논평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이미 평론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80년대 말에 소장 평론가들이 이론적 수사를 구사하며 공식 언론에 나타났을 때 보여준 대중의 호의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비평의 계몽주의 시대가 지나간 것이다. 비평은 표적을 잃어버렸고 대중은 즐길 만한 영화를 찾아내 스스로 여론을 형성하는 중이며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한국영화는 대중의 취향을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다. 유행에 개입하고 때로는 유행을 만들어내며 역겨운 유행을 공격할 만한 힘을 한국 영화평단은 이미 상실했다. 지금까지 한국의 영화비평 문화가 체계적인 지식과 가치평가 토대를 축적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국에 50여개의 영화과가 있고 영화 마니아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나라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회고전이 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때까지 한국 영화비평은 그 추억의 계몽주의 시대에 홍콩 누아르(이것은 전세계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개발한 용어다), 예술영화, 컬트영화, 할리우드영화로 재빠르게 옮겨가며 속물적 유행을 퍼트렸지만 표면만을 떠다니는 가운데 한국영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평문을 제출하지 못했다. 우리의 불행은 너무 늦게 대중문화 적자로서 영화가 부상하는 시기를 목격했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숙성시키기에는 너무 빨리 활기없는 시청각 문화의 노예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초저녁부터 심야까지 스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 농담이 대중의 시야를 휘어잡고 있으며 개그맨들이 서로 면박을 주며 웃음을 유발하는, 이런 빈정대는 문화에서는 누구나 잘난 체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한국 영화평단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하는 투의 냉소주의를 돌파하기에는 공력이 달리는 것 같다. 평론가 개개인의 재능과 영화문화의 형세, 그리고 제도면에서 모두 큰 시련을 맞아 영화판의 미운 오리새끼 취급당하고 있는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장차 인류 역사에서 사라질 공룡 같은 존재가 평론가들이라고 예언했는데, 그것이 한국 땅에서 실현될지 두고 볼 일이다. 저널리즘 비평과 전문 비평, 그리고 학계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비평 공동체를 이뤄내지 못하면 우리 평단도 정말 그런 운명을 맞을지도 모른다. 저널리즘 평론은 그때그때 영화에 대한 해석과 가치평가를 제출하고 잡지를 축으로 한 전문비평은 저널리즘의 해석을 심화시키거나 수정하며 학계는 그것에 대한 이론적 담론을 생산하는 유기적인 관계, 그것이 곧 비평 ‘제도’이며 또한 비평을 제도로 인정받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노드럽 프라이가 말한 대로 비평이 없었으면 셰익스피어도 없었다. 오늘날 히치콕이 거장으로 칭송받는 것도 또한 평론가들의 공이다. 그런데 다소 시비를 걸자면 비평의 공력은 상당 부분 영화가 키워주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계는 걸작과 수작을 고루 내놓고 있는데 평단은 삼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그런 기현상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과연 한국영화가 고도의 지적 담론을, 진정한 전문비평을 요구할 만큼 질적 비약을 이룬 것이 대세이기는 한 것일까.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슬픈 눈빛…감미로운 몸짓…장귀룽

4월 1일엔 거짓말을 한다. 악의 없는 거짓말에 속은 사람도 껄껄껄 속인 사람도 헤헤 웃으면 그만이다. 분명 우리의 전래 풍습은 아닌데 4월 1일은 만우절이라 불리며 우리에게 잠깐의 활력과 웃음을 주는 그런 날이 돼온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내게 4월 1일은 더 이상 만우절로 기억되지 못하고 활력과 웃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날은 이제 장궈룽(장국영)을 추모하는 날이 된 것이다. 만우절 장난 같은 소식처럼 장궈룽의 죽음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어제도 보았던 <아비정전;>에서 장궈룽은 여전히 런닝, 팬티 바람으로 춤추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장궈룽을 처음 만났을 때(물론 스크린 속에서) 그의 이름은 ‘아걸’(<영웅본색2;>, 1987)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죽어가던 그의 슬픈 눈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신파조의 음악과 그의 슬픈 눈이 만나 이룬 장면은 내겐 ‘최고의 장면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우리 말과 달리 높낮이의 차이가 심한 중국어를 좋아하게 된 것이 그쯤이었다. 그 후 그는 ‘영채신’(<천녀유혼>, 1987)으로 감미롭게 다가왔다가 곧 ‘원영정’(<인지구>, 1987)으로 나를 눈물짓게 하더니 ‘아비’(<아비정전>, 1990)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눈빛, 그의 몸짓, 그의 음성, 그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런닝 하나만 달랑 걸쳐도 그건 패션이 되었으니까. 깡통을 발로 차며 주리를 틀던 관객들이 급기야 환불 소동을 벌였지만 그건 ‘아비’를 모르는 자들이 벌이는 바보짓이라 코웃음 치며 난 ‘아비’에게 빠져 들었다. 나를 사로잡은 그는 ‘탁일항’<백발마녀전>, 1993), ‘데이’(<패왕별희>, 1993), ‘구양봉’(<동사서독>, 1994)이 되어 나를 흔들어 댔고 급기야 ‘보영’(<해피투게더>, 1997)으로 나타나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렸다. 허걱. 이런 것이 사랑이로군. 심장이 멎느니, 눈앞이 하얘지느니,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느니 하는 말들이 다 진실이었다. 그건 그에게 빠진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바보 같지만 뒤늦은 나의 고백이다. 사실 장궈룽은 스크린 속에서 언제나 멋지지만은 않았다. 그의 초기작들에서 그는 별 매력없는 홍콩 배우 이상이 아니었고(그래도 잘생기긴 했었다) <해피투게더> 이후의 작품에서는 빛을 잃어 가며 쇠락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깊이도 얕아지고 레이저를 쏘아댈 것 같던 광채도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자기 자리를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보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닌 원영정을, 그가 아닌 아비를, 그가 아닌 데이를, 그가 아닌 보영을 난 상상 할 수 없다. 그는 그저 한 시대를 스치는 연예인이 아니라 존재감이 드러나는 배우였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 불꽃같은 사랑을 하는 상태가 아닌 지금도 난 그가 최고의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2주기에 씨네21 기자 몇과 함께 그를 만났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걸은 무척 반가웠고 자주 만나는 아비는 언제나처럼 눈부셨다. 그는 더 이상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는 아니었지만 우린 행복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그는 여전히 스크린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를 꼭 캐스팅하겠다던 꿈을 이룰 수는 없지만 그는 오늘도 내 작은 옥탑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살아 있고 컴퓨터 엠피쓰리 파일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그걸로 됐다. 그걸로 난 행복하다. 별이 된 그도 행복하길 바란다.

시의 죽음을 슬퍼하며, <일 포스티노>

과문의 탓인지 모르겠으나 오늘의 프랑스에서는 시(詩)도 시인도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과거에 읽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지금에는 텔레비전, 영화, 컴퓨터 등이 토해내는 화면의 홍수 속에서 보고 즐기는 사람들로 바뀐 것인지 모른다. 이른바 ‘흥행 사회’에서 시인들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의 땅에 있지만 아내와 나는 ‘창작과 비평사’가 고맙게도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 시집들을 읽고 있다. 한국사회에 아직 시인들과 시들이 꿈틀대며 살아 있음은 실로 놀라우면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그 시들이 가벼운 언어의 조합이나 유희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수들이라면 말이다. 인간의 소박한 꿈과 이상은 현대에 올수록 더욱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그래서 시인을 일컬어 ‘현실로부터 스스로 추방된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현실로부터 추방되고 물질이 가난한 시인들만이 이 팍팍한 시기에 인간성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보여줄 것이다. 또 하나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부르주아적 인습주의에 의해 시의 세계가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일 포스티노>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시인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니, 이데올로기에 의하지 않더라도 시인의 죽음은 이미 예고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인간성은 이미 현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중해 위의 외딴 마을. 푸른 바다보다 더 파란 하늘과 파란 하늘보다 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어느 이름없는 우편배달부는 먼 데서 온 이방인과 벗이 되고 시를 쓴다. 그의 행복은 다만 단순함에서 오고 자연과 벗함에서 온다. 다시 먼 데로 떠난 벗에게 보내기 위해 정성스럽게 구닥다리 녹음기에 자연의 소리를 담는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소리와 뱃속 아기의 숨소리까지…. 시인보다 더 시인인 그의 모습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을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의 본원적인 인간 관계, 외딴 마을 사람의 순진무구한 인간성, 그리고 대자연과의 조화가 없다면 말이다. 결국 우리는 장래에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일 포스티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일 포스티노> 자신도 소박하게 꿈꾸었던 사회주의 이상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다.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 그리고 디지털 정보화의 시대에 인간들의 꿈과 이상은 그야말로 덧없고 하릴없는 것이 돼버린 게 아닐까? 정보시스템의 발달로 멀리 있는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지만 실제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하고도 멀어지면서 점점 더 외로운 모래알이 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물질은 풍요로워지더라도 인간의 정신은 더욱더 가난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일 포스티노>가 살던 그 마을에도 지금은 온갖 화면들과 상품들과 그리고 관광객들이 덮치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성에도, 인간 관계에도 그리고 자연에도 ‘풍요’와 ‘복잡’이라는 이름의 기름때가 묻고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일 포스티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우리에게 잠깐 손짓하고 사라진 과거의 인물. 영화 속이 아니더라도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과연 지금 누가 있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할까?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일 포스티노>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파리에 <일 포스티노>는 비디오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007 시리즈나 할리우드산 영화의 비디오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상혼마저 시인의 혼을 버린 것일까, 아니면 시인의 혼이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일까? 한편, 과거로 사라진 ‘인간’ <일 포스티노>는 그리워하면서도 ‘영화’ <일 포스티노>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성격 때문이다. 예부터 인간을 가리켜 소우주라고 일컬었다. 또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길섶에 핀 꽃도 아니며,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아니고, 그것은 인간 내면의 광휘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 내면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기 위한 영상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흔히 명작일수록 영화화한 것을 보지 말라고 충고해준다. 그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화면이라는 마력에 이끌려 나 역시 영화를 보고말지만 보고나면 여지없이 후회하고 만다. 단 한번의 예외가 없었다. 그렇다면 ‘영화’ <일 포스티노>가 보여준 아름다움조차 인간 내면의 깊이에 비하면 가볍기만 한 게 아닐까? 문외한에 지나지 않는 나의 어줍잖은 의문일 수도 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어떤 대답을 갖고 있을까?

[이명석의 씨네콜라주] 다크 시티

“자네 다크 시티라고 들어봤나?” 오늘 아침, 편성국장이 기상 리포터 빌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처음 들어보는데요.” “아마 그럴 거야.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도시니까. 이 도시에서는 자정만 되면 빌딩들이 모두 사라지고 주민들이 잠에 빠져든다네. 그리고 밤 사이 전혀 다른 건물이 세워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기억을 주입받은 뒤 다음 하루를 살아가게 된다는군.” 빌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노망이 들었나’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밥줄을 위해 참았다. “아무튼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이 도시에서 방송을 진행하게. 매일매일 뒤바뀌는 도시에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오는가, 어때 낭만적이지 않아?” 빌은 지지리도 재수가 없다고 여겨졌다. ‘남들 다 노는 크리스마스에 출장이라니. 게다가 PD는 앤디라고, 왜 밥맛없게 여자야? 출장길에 재미보기도 글렀잖아.’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크 시티로 가는 도로 노선은 알려진 바가 없어, 터키인들이 운영하는 장거리버스를 타야만 했다. 빌, 앤디, 카메라맨은 자정 무렵에야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매표소에는 오잘린이라는 이름표를 단 터키인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앤디가 주문했다. “다크 시티, 세장.” “다르크 시티?” 오잘린이 퉁명스럽게 되묻자, 앤디가 빌에게 물었다. “다르크 시티라는 데도 있나요?” 빌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터키식으로 읽은 거야. 다르으으크 시티.”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세 사람은 다음날 아침 하얀 눈송이가 뿌려지는 다크 시티에 도착했다. 앤디와 카메라맨은 신이 나서 소리질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하지만 빌은 시큰둥했다. “강아지처럼 좋아하는군. 빨리 찍고 가자고. 다크 시티라고 해서 뭔가 그로테스크할 줄 알았더니, 그냥 시골 마을 아냐?” 일행은 빌의 성화로 30분 만에 촬영을 마쳤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예요. 사람들은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고.” 앤디는 아쉽다는 듯 거리를 돌아보았지만, 빌은 카메라맨에게 빨리 버스표를 사오라고 보챘다. 얼마 후 카메라맨이 즐거운 얼굴로 돌아왔다. “헤헤, 버스는 내일 아침에나 있대요.” 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히 탐스러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빌은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가, 개찰구에서 차표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이건 내일 차표인데요? 오늘은 버스가 없어요.” “뭐라구요? 분명히 26일 차표를 샀는데.” “그러니까요. 오늘은 25일이잖아요.” 대관절 무슨 일인가 싶어 신문을 샀더니, 25일. 텔레비전 뉴스도, 25일. 모든 게 어제 그대로였다. 빌은 몸서리치며 소리질렀다. “맙소사, 정말 다크 시티로 왔구나.” 그때 어떤 노인이 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여긴 다크 시티가 아니라, 닭 시티라고. 여기 사람들은 전부 닭처럼 기억력이 나빠서 하룻밤 자고 나면 뭐든지 다 잊어먹지…. 엥,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다음날도,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날이 계속되었다. “이 바보 같은 닭대가리들! 하루가 지났단 말이야, 하루가!” 빌은 버스 정류장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분에 겨워 술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그래, 외상이야. 내일 갚으면 되잖아. 어차피 다 까먹을 텐데, 뭐.” 며칠째 횡패를 부리던 빌은 급기야 술집 사람들에게 두들겨맞고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돌아갈 곳도 없이 또 똑같은 하루를 마감해야 하는 빌. 그렇게 측은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빌에게 누군가 따스한 손을 내밀어주었다. 앤디였다. “미안해요. 앤디. 나 같은 것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주다니.” “아니에요. 저는 당신 마음을 알아요.” “그렇지만, 흑흑. 아 미안해요. 콧물이 당신 손에 묻었네요.” “괜찮아요. 당신은 사실은 따뜻한 사람. 그래서 콧물도 이렇게 따뜻하네요.” “그것은 당신의 보석 같은 손에 닿아서지요.” 얼어붙은 빌의 마음이 열리고, 둘 사이에 닭살 돋는 대사가 오고갈 때. 아 하늘도 이들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둘의 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뇌도 닭대가리로 바뀌어, 그들은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닭 시티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등장인물 빌 머레이: 자기 중심적이고 냉소적인 기상 리포터. 다크 시티에서 운명의 시험에 빠진다. 앤디 맥도웰: 상냥하지만 내성적인 프로듀서. 내심 빌을 동정 반, 사랑 반으로 지켜보고 있다.

어느 일본 여배우의 초상, 미야자와 리에 [1]

1992년 바다 건너온 한 일본 소녀배우의 누드집은 ‘누드냐, 예술이냐’라는 논쟁을 일으키며 근엄한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결국 재판정까지 갔다. 한국 서점가에 비닐로 포장된 누드집이 당당하게 진열되었던 건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긴 아직 배꼽티도 등장하지 않았던 때였다. 92년은 한국 여가수 유아무개씨의 누드 사진집이 나왔고, <즐거운 사라> 사건이 일어났던 해였다. 미야자와 리에의 <산타페>는 꽁꽁 숨겨서 더 음란했던 90년대 한국사회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잊었던 사이, 그녀는 아이돌에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배우가 되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고혹적인 한순간을 빚어내는 건, 꿈결처럼 흘러가는 영상이나 고독한 시간을 똑똑 두드리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뿐이 아니다. 고스란히 스크린에 재현된 ‘하루키 월드’의 가운데엔,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함께 다 길어낼 수 없는 고독함을 메마른 몸에 가득 안고 있는 미야자와 리에가 있다. 한국 관객에겐 사진집, 유명 스모선수와의 약혼발표와 파혼, 자살 미수 사건 등 십수년 전의 시끌벅적한 스캔들로만 기억됐던 그녀를 ‘배우’로 다시 불러내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녀를 만나는 약속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도 안 되고, 질문은 미리 제출한 내용의 범위를 넘지 말라…. 한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기기가 예사인 도쿄의 9월, 시부야의 한 스튜디오에서 앞뒤로 일정이 꽉 차 있는 그녀를 겨우 만날 때쯤엔 조금 심통스런 마음까지 되어버렸다. 어쩌랴, 원래 연예인들 관리가 쫀쫀할 정도로 엄격한 일본인데다 그녀는 가장 잘 나가는 이른바 ‘메이저’다. “자, 시작할까요?” 보통 사람들보다 1도 정도는 키가 높은 예의 그 가는 목소리로, 상냥하고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다. 작품에 대해서는 신중하지만 정열적인,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선 예의바르지만 냉정한 대답이 돌아온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유명해졌고, 너무 이른 나이에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도 경험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데뷔한 이래 20년 넘게 톱으로 살아오며 그녀는 자신을 적절히 지키는 방법을 터득한 프로일 터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래가지곤 안 되겠다. 결국 내 멋대로 그녀를 뜯어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이건 도쿄에서 만난 미야자와의 이야기에 덧붙인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문이다. “새파란 하늘보다는 구름과 구름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파란 하늘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보다 쓸쓸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바닷가가 더 좋듯이, 50%는 표현해도 나머지 50%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영화가 좋아요.” 일본에서 대배우로 성장한 아이돌 스타의 예가 없는 건 아니지만, 미야자와 리에에겐 뭔가 극적인 느낌이 있다.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던 기억을 저편으로 밀어내고 최근 몇년간 그녀는 일본 영화계에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1995년 텔레비전 드라마 <북의 나라에서>로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숲속의 요정 같던 18살 싱싱한 아이돌이 아니었다. 얼굴에 각이 드러나 퀭할 정도로 커보이는 눈, 바싹 말라버린 가슴의 그녀는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부유하는 공기처럼 보였다. 그뒤 연극 몇편에만 출연하던 미야자와는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찾게 된다. 1988년 10대 시절 <우리들의 7일간 전쟁>으로 신인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그녀가 화려하게 돌아온 건 2000년대다. 2002년 홍콩영화 <유원몽경>으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2002년 <황혼의 사무라이>, 2004년 <아버지와 산다면>으로 그녀는 각각 다음해 대부분의 영화상을 휩쓸었다. 지난해 연극 <투명인간의 증기>로 연극상과 문화청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예능인’으로 표창까지 받았다. 야마다 요지, 구로키 가즈오라는 노장들과의 작업에 이어 현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대극 <꽃보다도 더욱>을 막바지 촬영 중이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그녀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건, 가수활동이나 오락 프로그램 등을 쉴새없이 겸업하는 게 보통인 여느 연예인과 다른 그녀의 행보 때문이다. 텔레비전은 띄엄띄엄 특집드라마에 출연하는 정도이고, 그나마 방송 중인 몇편의 CF도 그녀의 ‘고급스런 이미지’를 해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른 느낌이다. 서양계 아버지의 혈통을 느끼게 하는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졌음에도 일본인들은 그녀에게서 고전적인 일본 미녀 여배우를 연상한다. 특히 2년 전 시작한 한 녹차음료 광고는 ‘기모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예인’, ‘투명하고 깨끗한 이미지’라는 그녀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를 굳혔다. 결코 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는, 구름 사이 보이는 새파란 하늘처럼.

어느 일본 여배우의 초상, 미야자와 리에 [2]

“인간에겐 희로애락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잖아요. <토니 타키타니>는 물건으로도 말로도 다 채워질 수 없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작품이에요.” 이치카와 준 감독은 언제나 미야자와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은 감독이었다. “자기 신념이 강하고, 테마가 뚜렷하지만 영상이나 대사는 굉장히 절제하는 그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다만, 그때마다 “리에씨는 너무 메이저라 내 영화와 안 어울려”라는 반농담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치카와 감독도 “먼 세계로 긴 여행을 떠나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두르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옷을 걸치고 있”는 에이코의 모습을 미야자와 이외의 배우에게서 찾기는 힘들었다. 감독의 말에서 이치카와는 “막상 영상으로 옮기려 했을 때 하루키의 원작이 인물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것, 극단적으로 말하면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소설에 흐르고 있는 투명감과 낮은 온도를 영상으로 옮기는 데 있어 미야자와 리에는 최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스크린 속 그녀의 핏기없는 얼굴과 휘어버릴 듯한 몸에선 고독의 유전자가 느껴진다. 그건 노력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는 타고난 도구다. 미야자와 또한 영화를 촬영하며 자기가 예상할 수 없었던 감정을 겪었다. 에이코와 같은 치수, 체격이라는 이유로 토니에게 채용된 히사코가 에이코의 옷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 우는 장면. 리허설 없이 단 한번에 촬영된 신이다. “촬영 직전까지 내가 어떤 감정에 휩싸일지 몰랐다. 안개 속에 쌓여 있는 기분이었다. 감독에게 일단 한번 카메라를 돌려봐달라고 부탁했다. 슛이 들어가자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슬프다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어요. 이런 얼굴도 있었구나, 하는. <아수라성의 눈동자> 같은 큰 규모의 상업영화에 출연했던 것도, <토니 타키타니>나 <아버지와 산다면>처럼 작은 영화를 한 끝이라 선택했던 거고요.” 화려한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최근 그녀의 작품들 가운데 상업적이거나 트렌디한 영화들은 드물다. 예상 밖 흥행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는 작가영화에 가까운 시대극이며, <토니 타키타니>와 <아버지와 산다면>은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테마가 확실한 작품이면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반 정도는 결심해버리고 만다. 큰 작품에서 대규모 스탭들과 일하는 긴장감도 좋지만 작은 영화에서 팀워크가 딱 맞아 일하는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다른 얼굴을 끄집어내보인다. ‘투명함’이 그녀 이미지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실제 그녀들의 작품을 보면 단 하나도 똑같은 이미지는 없다. <아버지와 산다면>에서 첫 장면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딸 미즈에가 환생한 아버지와 장 속에 꼭꼭 숨어 나누는 긴 대화로 시작한다. 방재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버지와 얘기하는 미야자와는 순수한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다. <토니 타키타니>의 에이코는 어떤 의미에선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상대를 고독으로 밀어넣는 팜므파탈이다. <아수라성의 눈동자>에선 아예 삼면의 얼굴을 가진 아수라가 된다. 커다란 스크린에 삼면의 얼굴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여배우는 그리 흔치 않다. “촬영 뒤 오케이 사인이 내려질 때의 해방감, 두려울 정도의 기쁨 같은 마음은 88년 영화에 데뷔할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다만 내 안의 허들이 자꾸 높아져감을 느껴요.” 하지만 이렇게 이미지로만 그녀를 바라려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사실 지독한 노력으로 답한다. <유원몽경> 출연 당시 중국 경극을 통째로 암기했다는 그녀는, <황혼의 사무라이>에선 “옷 매무새 하나, 바느질하는 모습 하나가 머리가 아니라 세포에서 나오도록 준비”했다. <아버지와 산다면>을 보노라면 그녀는 또 하나의 허들을 넘은 듯하다. “이렇게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연기가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히로시마의 원폭자료관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사진집을 보고 “전쟁과 핵문제를 내 인생의 테마로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녀는 올 가을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특집드라마 <여자의 일대기>에서 실제 인물인 작가 세토우치 자쿠초를 연기한다. 학생 때 결혼, 불륜, 작가 활동, 51살 때 출가 등으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여성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들의 감정 폭은 자꾸 넓어져 간다. 미야자와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는 <바바파파>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 몸을 의자로도, 물병으로도 만드는 그 프랑스 그림책 속 바바파파 말이다. “어렸을 땐 몸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게 재미있었지만 왜 이 나이가 되도록 좋을까 어느 날 생각해보니, 유연성이랄까, 몸을 변해가며 얻는 풍성한 감정이 좋더라.” 아직까진 무엇을 해도 ‘아름답다’라는 말을 듣는 그녀지만, 언젠가는 그 틀마저 스스로 부수는 연기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살의 배우 미야자와 리에는 바바파파를 꿈꾸고 있었다. 미야자와 리에의 한국 미공개 최근작 3편 <황혼의 사무라이> 2002/ 감독 야마다 요지/ 출연 사나다 히로유키 일본의 시대소설 작가 후지사와 슈헤이 원작. <남자는 괴로워>의 노장 야마다 요지 감독의 건재를 알렸으며,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막부 말기, 녹봉 50석으로 살아가는 야마가타현의 하급무사 이구치 세이베이는 늙고 병든 어머니와 두딸을 돌보느라 일만 끝나면 집으로 직행해 동료들로부터 ‘황혼의 세이베이’라 놀림받는다. 어느 날 그는 친구의 여동생이자 첫사랑이었던 도모에에게 행패를 부리는 난폭한 그녀의 남편을 말리다가 결투를 벌이게 된다. 이 결투를 통해 그의 귀신과 같은 칼솜씨가 소문나고, 절대 사람을 베지 않으려던 그는 번주로부터 자객의 임무를 명받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의 폼나는 사무라이가 아니라, 사랑에 가슴 저려하고 힘겨운 삶에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급변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정중하게 그려진다. <아버지와 산다면> 2004/ 감독 구로키 가즈오/ 출연 하라다 요시오, 아사노 타다노부 동명의 연극이 원작. 구로키 가즈오 감독의 ‘전쟁 레퀴엠 삼부작’의 마지막 편인 이 묵직한 반전영화는, 핵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그려내는 데까지 이른다. 1948년 히로시마, 도서관에 근무하는 미즈에는 3년 전 원폭으로 사랑하는 친구와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은 상처 때문에 새로 다가온 사랑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딸의 사랑을 맺어주기 위해 나타난 아버지가 딸의 곁에 머문 나흘간을, 마치 2인 무대극처럼 그려나간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거의 우정출연 수준의 비중. 보는 이가 숨찰 정도로 많은 양의 대사를 히로시마 방언으로 아름답게 소화해내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압도적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부녀의 모습을 멀리서 나직이 비춰주는 장면, 마지막 인물 위로 서서히 올라간 카메라에 나타나는 히로시마의 원폭 돔은 잊혀지지 않는다. <아수라성의 눈동자> 2005/ 감독 다키타 요지로/ 출연 이치가와 소메고로 동명의 무대극이 원작. <바람의 검 신선조> <음양사>의 다키타 요지로 감독, 일본 가부키의 인기 스타 이치가와 소메고로의 첫 영화 출연, 스팅의 노래 <마이 퍼니 밸런타인> 삽입 등 개봉 전 화제가 많았다. 초닌문화가 번성했던 19세기 초 에도, 인간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오니(귀신)들이 공공연히 활개치며 자신들의 왕 아수라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처치하는 결사대의 일원이었던 이즈모는 5년 전 무고한 소녀를 베었다는 상처에 결사대를 떠나 가부키 극단의 배우가 되어 있다.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도적 츠바키라는 여성과 사랑하게 되지만, 5년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츠바키는 몸에 이상한 문신이 점점 커져가며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빠른 이야기 전개와 가부키 무대의 매력, 데카당스한 배우들의 분위기가 돋보이는 오락영화. <음양사>보다 짜임새는 한수 위지만 흥행은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허진호의 <외출>

이미 허진호의 세 번째 영화 <외출>에 관한 아름다운 글은 김혜리가 썼다(“허진호의 멈추어선 느린 발걸음”, <씨네21> 제518호). 그 문장 가운데 “인수와 서영은 같은 흙탕물을 뒤집어쓴다. (중략) 둘은 극히 서먹하고 불편한 거리에 있는 동시에, 졸지에 서로에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정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인수와 서영은 단순하고 천진하게 성실한, 말하자면 같은 당파에 속하는 인간들이다. 자, 이제 남은 일은 등식의 한쪽 변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라는 선언에 가까운 구절은 이 영화의 울림을 서늘하게 전한다. 특히 마지막 문장. 그런 다음 김소영은 이 영화의 장점에 대해서 충분히 따뜻하게 껴안았다(“그들이 외출해야 했던 이유”, <씨네21> 제520호). 그러므로 다행히도 나는 이 영화 전체를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만일 허진호의 영화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 글들을 읽으면 된다. 나는 그 대신 그 글들에 기대어 두 장면에 관한 다소 긴 주석을 쓰려고 한다. 그 두 장면은 내용상으로는 그렇게 결정적인 대목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장면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이상할 뿐만 아니라 무언가 영화 전체를 위협한다는 느낌이 있다. 나는 “이상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이 영화에서 그 이상한 사랑의 잉여, 그 사랑의 이상함을 만들어내는 얼룩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한 짧은 설명을 더 할 것이다. <외출>은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때 영화는 머뭇거린다. 나는 머뭇거리는 그 순간을 말하려는 것이다. 김혜리의 표현을 빌리면 ‘희미한’ 그 순간. 그가 혹은 우리가 그녀에게 듣고 싶은 말 (좀 장황하게 설명을 하자면) 두 장면 중 첫 번째 장면은 인수(배용준)가 아내의 자동차 사고 소식을 듣고 삼척에 있는 병원에 가서 병상에 일종의 코마 상태로 누워 있는 아내를 본 다음이다. 그런 다음 그 사고의 곁에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남자도 중태에 빠져 있는데, 그 남자의 아내 서영(손예진)도 만난 다음이다. 둘은 같은 모텔에 머물게 되고, 하필이면 같은 층이다. 아마도 사고가 난 그 이튿날 혹은 그 다음날 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밤, 서영은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산다. 그 약국에 인수도 약을 사러 온다. 약을 먼저 사고 앞서 가던 서영이 모텔에 들어가려다가 그 문 앞에 서 있다. 인수는 모르는 척하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때 서영이 말한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러자 인수가 멈칫 선다. 서영은 “돌려드릴 것도 있고요,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인수가 대답한다. “문자 메시지를 봤습니다. 그쪽은요?” 서영이 대답한다. “저도 메시지를 봤어요, 그 사진기, 남편 게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우선 이 장면은 나눠 찍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서영이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말한 다음 숏을 나눈다. 물론 그걸 나눌 것인가, 말 것인가는 허진호의 마음이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다음 왜 사운드를 그렇게 넣었을까, 라는 것이다. 서영이 말을 하는 장면은 모텔 문 바깥에서이다. 물론 카메라도 바깥에 있다. 그런 다음 숏을 바꿀 때 카메라는 모텔 문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인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서영이 “드릴 말씀이 있어요”라고 하자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멈춘다. 멈추자 문이 닫힌다. 문이 닫힌 다음 두 사람은 문 바깥에 머물면서 대사가 이어진다(투숏). 그때 카메라는 모텔 문 안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앞의 숏과 아무런 톤의 변화없이 진행된다. 더 이상한 것은 문이 닫혀 있는 저편의 빗줄기 소리까지 천연덕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이다. 왜 이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 모텔의 문을 사이에 둔 대화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이 듣고 싶은 대사만 듣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다음날 같은 문 앞에 후배 광일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인수가 “밥 먹으러 가자, 자고 갈 거야?”라고 묻자 광일이 “아뇨, 내일 공연이 있어서요”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인수는 문을 열고 광일과 함께 나서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대답한다. 그때 카메라는 문 안에 있다. 그 둘은 문이 닫힌 다음 걸어가면서 무언가 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닫힌 문 때문에 더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서영이 한 그 말은 반드시 듣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모텔 안으로 들어와서 방문 앞에서 서영이 인수에게 카메라를 건네는 것이 보이고, 서영의 방 안에 들어가서 서로의 배우자의 휴대폰 문자를 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음 신은 인수가 자신의 방 안에 들어와서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아내 수진과 서영의 남편 경호가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 이어진다.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숏이 뒤이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 불가능한 목소리의 성립. 그 신의 대사 자체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문 앞에서 나눈 숏의 사운드는 문에 의해서 ‘구태여’ 그 대사의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그 숏은 한신 안에서 객관적, 현실적, 실제적 장면을 보여준 다음, 갑자기 숏을 나누어서 뒤이어지는 대사에 의혹, 기대, 착각, 환청, 무엇보다도 모호함을 통해서 무언가 그 자연스러운 장면을 기괴하게 만든다. 이 숏은 갑자기 사실상 객관성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너무나도 자명해 보이는 이 광경이 불현듯 서영이 이 말을 한다, 로부터 서영에게 이 말을 듣고 싶다, 로 바뀐다. 닫힌 문 저 너머에서 들리는 말, 문을 닫은 다음 귀기울이는 인수의 자리에서 들리는 서영의 대사. 그러니까 이 장면은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영은 틀림없이 인수를 불러 세웠다. 그런 다음 서영은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주관적 착각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니 차라리 그런 대사가 나오기를 기대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그렇게 들리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대하는 것, 그 기대 안에서 상상하는 것, 그것이 기대의 지평 안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문 바깥에 인수와 서영을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은 다음 서영의 말에 귀기울이는 인수의 그 청각의 자리에 우리를 가져다놓을 때, 우리가 그것을 듣는 데 성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밀의 공유, 고통의 공유 나는 이 장면과 마주하는 순간 즉시 그 바로 앞의 장면, 그러니까 모텔 복도에서 인수가 서영을 불러 세웠던 대목이 떠올랐다. 마치 반복 같은 두 장면. 그때는 인수가 서영을 불러 세웠다. 인수가 서영을 “잠깐만요”라고 불렀고 (그런 다음 똑같이 숏을 나누었다. 게다가 두 사람을 똑같이 180도 수평으로 마주보게 세워놓았다. 이 영화에 투숏은 많지만 두 사람을 수평으로 세워놓은 경우는 거의 없다) 서영이 “무슨 일이시죠?”라고 묻자 “남편 분이 출장 중이었던 것 맞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서영이 “네, 맞습니다”라고 하자 “제 아낸 휴가 중이었습니다. 저는 부업 때문에 같이 내려왔다고 말했습니다. 그쪽도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부탁한다. 이 말은 거짓말의 제안이다. 인수는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요구가 아니라 제안이 맞다. 그 제안에 대해서 서영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 복도에서 인수는 거짓말을 제안하고, 그런 다음 모텔 문 앞에서 서영은 인수에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인 사진기를 돌려주어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든다. 만일 진실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었던 실재의 지식을 (그 둘 사이에서만) 결국 보게 만든다. 그런데 이 두 장면은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행동이다. 복도에서 인수가 거짓말을 제안했을 때 서영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거짓말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약속을 통해서 비밀을 함께 감추는 것이다. 여기서 방점은 함께, 에 있다. 그런 다음 모텔 문 앞에서 사진기를 건네주겠다고 제안할 때, (마찬가지로 서영이 인수에게 그것을 건네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감정적 고통의 대상과 함께 마주하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방점은 함께, 에 있다. 그런데 복도에서 그들이 사진기를 건네주고 건네받을 때 그들은 배신을 당한, 그동안 속은, 알지 못했던 배우자의 불륜에 관한 실재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알았다는 데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에 있다. 혹은 너무 많이 알게 되는 것이다. 알지 못했다는 것은 자신의 배우자의 불륜 상대가 그들의 부부 생활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침입했다는 뜻이며,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부부 생활이 세 사람이 함께 살아왔다는 그 잉여의 부분이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인수와 서영은 서로의 상대방에게 고통에 직면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위로이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고통을 공유한 다음 고통을 전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 안에서 그 문제의 각자의 답을 찾는 대신 (왜 내 아내는, 내 남편은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은 저 남자, 저 여자에게서 나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찾았는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 그들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불륜의 선택, 그 음란함과 부끄러움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수와 서영의 불륜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수진과 경호의 불륜은 인수와 서영의 알리바이이다. 인수와 서영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덜 자유롭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그들이 각자 서로의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다음 인수와 서영이 만들어내는 불륜이 자신의 배우자인 수진과 경호의 불륜보다 더 음란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인수와 서영은 사실상 수진과 경호의 불륜의 형식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내용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그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한 것일까? 그러하면 나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두 사람은 수진과 경호를 매개로 하여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장면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처음 이 장면을 볼 때는 그냥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갑자기 이 숏이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무언가 고통 속에 숨어 있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음란함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 것은 그 목소리의 잉여,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의 이면에 지금부터 시작될 불륜의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그렇다. 드러난 것으로부터 숨겨진 것으로의 후퇴, 객관적 현실로부터 주관적 상황으로의 이행에 끼어든 그 어떤 중재, 무언가 숨기고 싶은 베일의 (외설스러운) 요구. 이미 닫혀버렸지만 투명한 유리문. 아무리 달리 말해도 이 영화는 불륜에 관한 영화이다. 불륜에 대한 불륜이란 없다. 그 실재의 지식을 마주하기 위해서 사진기를 돌려주어야 할 때, 그것을 건네주기 위해 서영이 인수를 불러 세운 다음, 그 대사를 할 때, 그 숏은 불가능한 장면이 된다. 그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설명하기 위해서 숏은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숏은 어딘가 비밀스럽고, 그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남이 들어서는 안 되는, 모호한 주관성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실재의 지식은 그들만의 것이 된다. 그러고 나면 이 영화는 갑자기 그 자신의 은밀한 구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노골적인 순간. 인수와 서영이 술을 마시다가 서영이 인수에게 물어본다. “언제가 제일 행복하세요?” 인수가 대답한다. “음, 잠잘 때.” 그러자 서영도 자문자답한다. “저두요.” 두 사람은 지금 병원에 불륜에 빠졌다가 사고를 당한 자신의 아내, 혹은 남편을 곁에 두고 온 그 남편과 아내로 만나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대답은 외설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잠을 잘 때 가장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 대답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어느 쪽이건 사실상 그것은 같은 내용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 약간의 우회. 부부는 잠을 잘 때만 그 혼자가 된다. 어디서? 꿈속에서, 혹은 밤의 무의식 안에서. 잠자리에서 그 두 사람은 배우자를 곁에 두고 거기서 도망쳐나올 때 행복해진다. 그것도 ‘제일’ 행복해진다. 진실이라면 그 두 사람은 밤마다 아내에게서, 혹은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중이며, 거짓이라면 서로가 서로의 배우자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고백하는 중이다. 나는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슬픔이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 짧은 사랑, 혹은 (이루어진 불륜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불륜이 아니라 매우 음란한 상상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출>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상하게도 누가 누구를 유혹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인수의 주관적인 태도에 의지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 주관적 사운드와 프레임의 은밀한 메시지. 인수가 서영을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대신 그 자신은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면서 그 마음 안에서 자기를 유혹해달라고 은밀하게 욕망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면서 유혹하는 행위, 혹은 요구하지 않는 욕망. 이를테면 두 사람이 처음으로 그들 사이의 대화를 시작하는 장면의 첫숏. 인수는 눈 내린 주차장에서 눈을 뭉쳐 던지고 있다. 서영은 텔레비전을 끄고 난 다음 바깥에서 나는 소리에 창문을 내다본다. 그걸 내려다보면서 서영은 처음 웃는다. 그때 이 장면은 투숏으로 찍혔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한 까닭은 서영의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우리가 보는 것은 유리창에 비친 서영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화면에서 인수가 창문 아래 ‘함께’ 보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되는 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찍혔다. 누가 누구를 보는가? 다시 한번 김혜리의 문장을 빌리면 이 사랑은 ‘희미하게’ 시작된다. 지적할 만한 점. 내려다보기 전 서영이 방 안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이러저리 돌리다가 끌 때 우리는 (성인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두 남녀의 음란한 신음소리를 듣는다. 그들의 배우자를 매개하지 않고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는 첫 번째 신에서 서영의 방에 놓인 텔레비전으로부터 섹스소리를 듣는 것은 내게 사실상 그들이 아무리 스스로에게는 그들 자신의 만남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도 그래봐야 결국에는 고스란히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그 배우자들의 역겨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예고편처럼 절망적으로 들렸다(그 수많은 채널 중에서 허진호는 그 순간 그 채널을 선택했다). 그때 인수는 차 안에서 “슬픔은 모두 버려, 인생은 아름다워, 슬픔은 모두 버려”라고 있는 힘을 다해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른다. 인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큰소리로 말한 적이 없다. 이 장면을 정확하게 복기하면 인수가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 다음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을 끄는 서영이 보인다. 주차장에서 눈을 던지고, 그걸 서영이 내려다본다. 그러니까 이 신은 인수가 모두 버리라고 호소한 다음, 마치 거기에 호응하듯이 서영이 반응한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 그 호소와 대답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앞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모호한 나눠찍기의 진실 그 다음 (첫 번째 장면에 연관지어서) 두 번째 장면. <외출>에서 내 생각에 인수와 서영이 횟집에 앉아 함께 술 마시는 장면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에서 허진호는 필요 이상으로 장면을 나눈다. 허진호가 그의 두편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180숏 내외로 찍었고, <외출>이 321숏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신의 숏 나누기는 더 눈길을 끈다. 이 술집 대목은 단 하나의 신을 29숏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영화는 말 그대로 그들의 표정, 얼굴,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대사를 따라가면서 (처음에는 팬을 한 다음) 숏을 나눈다. 나는 허진호의 바람대로 대사에 집중했다. 그때 서영이 인수에게 묻는다. “깨어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러자 인수가 대답한다. “복수하려구요.” 그러자 서영이 말한다. “우리 사귈래요?” 그 말을 듣고 인수가 서영을 본다. 그때 서영이 대답한다. “둘이 기절하게.” 만일 이 대화가 두 사람의 진심을 말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두 사람의 비극, 혹은 <외출>이 지닌 비극성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이 두개의 대사를 두 사람이 상대방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래서 여기서 그들은 자기의 주관적 선택의 자리에 상대방을 가져다놓고 서로 다른 내용의 동일한 형식으로서의 불륜을 행동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인수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 서영과 사귄 것이고, 서영은 인수와 사귀고 싶었던 것으로도 그 대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같은 것이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의 의도는 정반대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인수가 복수를 할 때 그의 목표는 서영이 아니라 지금 병석에 누운 아내 수진이다. 그러나 사귀려는 서영의 의도는 사랑의 대상을 남편 경호에서 (남편 경호를 사랑한 수진의 남편) 인수로 옮겨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호한 나눠찍기의 순간이 두번 있다. 한번은 서영이 “일단 깨어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할 때이고, 다음 한번은 서영이 “우리 사귈래요?”라고 말한 다음 “둘이 기절하게”라는 덧붙일 때이다. 그때 대사를 따라가면서 나누던 숏이 갑자기 카메라는 인수쪽을 바라보고 있고 서영은 프레임 바깥에서 말한다. 그때 인수가 그 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그 말을 하는 서영의 표정을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표정이? 왜 그것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그 대답은 한참 뒤에야 알 수 있다. 이 나눠찍기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정확하게 인수의 태도와 그의 아내 수진의 운명으로 반복된다. 인수의 아내 수진이 깨어난 다음 병실에 누워서 곁에 앉아 참외를 깎고 있는 인수에게 묻는다. “인수씨, 나에게 궁금한 거 없어? 언제까지 안 물어볼 거야?” 인수는 그냥 담담하게 대답한다. “처음엔 궁금한 게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수진아, 그 사람 죽었어.” 그런 다음 인수는 병실에서 나온다. 좀더 정확하게 거기서 숏을 나누었다. 그 말에 대한 수진의 상대 숏은 없고, 카메라는 병실 문 바깥으로 나온 인수를 보여준다. 그때 인수는 수진의 표정을 보지 않는다. 혹은 인수는 수진의 표정에 관심이 없다. 그냥 병실 바깥에서 수진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 울음은 인수가 서영에게 말한 복수에 대한 수진의 응답이다. 그것을 복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숏 이후 수진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아예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수진에게 인수가 한 마지막 대사는 “그 사람 죽었어”라는 말이다. 인수는 그 말을 하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잔인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숏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인수와 서영의 셈치르기 그런 다음 나는 문득 인수와 서영의 마지막 대사가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서영의 마지막 대사는 서영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참을 더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서영은 남편 경호가 죽은 다음에도 한참을 더 나온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입을 봉한 것처럼, 말을 잊은 것처럼, 아니 차라리 말하는 것이 금지된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혹은 못한다. 만일 좀더 기억을 환기한다면 서영이 영화에서 한 첫 번째 대사는 인수에게 했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서영의 마지막 대사는 인수와 나눈 한마디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대화장면은 좀 이상하지만 의미심장하다(게다가 카메라는 그때 멀리 떨어져 있다). 서영이 인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침대에서 고스톱을 치다가) “진짜요? 다시 계산해보세요”이다(마지막 장면, 눈 내리는 자동차 안에서 들리는 건 서영의 목소리의 보이스 오버뿐라는 것을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게 서로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 그때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서영과 인수의 만남의 장부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질문이다. 매우 치사한 셈이긴 하지만 계산을 해야 한다면 인수는 이 외출의 대차대조표에서 유일하게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 그는 아내 수진에게 복수를 했고, 그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는 죽었고, 그는 그 남자의 아내 서영과 섹스를 했다. 그런데 그는 행복하지 않다. 서영은 반문한다. “진짜요? 다시 계산해보세요.” 인수의 계산은 어디서 틀린 것일까? 서영이 인수의 계산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말은 무시무시하게 집행된다. 영화는 갑자기 이 대사가 나온 다음,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정확하게 셈을 치르기 시작한다. 서영이 인수와 호텔 방에 있는 동안 그의 남편은 15시23분에 죽는다. 서영은 호텔에서 인수와 함께 있으면서 간병인 아줌마에게 “내일 아침 일찍 들어갈게요, 부탁 좀 드릴게요”라고 말했지만 아침에 가지 않았다. 서영은 전화를 받고서 오후 늦게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병원에 도착한다. 인수가 서영을 다시 만나는 것은 장례식장에서이다. 인수는 분향을 한 다음 서영에게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한다. 이때 다시 한번 서영과 인수를 수평 투숏으로 찍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서영과 인수 사이에 서영의 죽은 남편 경호의 영정 사진을 세워놓았다. 그래서 인수가 고개를 숙여 서영에게 인사할 때 인수는 정확하게 그녀의 남편 경호의 사진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인수는 그걸 알지 못한다. 물론 서영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 인수는 서영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지만, 서영은 인수와 그의 남편 경호에게 인사하는 것이다. 서영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서영은 자기의 외출이 소망을 이루기는 했지만 반대의 방식으로 집행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귈래요?”라는 말이 남편의 자리에 (남편과 사귄 여자의 남편) 인수를 가져다놓는 것이라면, 역설적으로 남편이 죽었을 때 그 자리는 폐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인수는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이 거기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장소를 찾은 것이다. 불길한 엔딩의 예감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에필로그가 더해져 있다. (‘아마도’ 아내와 헤어지고) 이사 간 인수의 아파트 방이 보이고, 인수는 짐더미 속에서 자장면을 먹는다. 그런 다음 야외무대 공연장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인수와 그 곁에 앉은 후배 광일이 보인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 다음 봄날의 늦은 밤에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누구라도 여기서 인수와 서영이 삼척의 해변을 걸으면서 한 대사가 떠오를 것이다. 인수의 질문, “어떤 계절 좋아해요?” “봄이요, 인수씨는요?” “전 겨울을 좋아해요” “저두 눈은 좋아해요”. 그러자 인수가 대답한다. “봄에 눈이 내려야겠네요.” 봄에 눈이 내리는 것은 서영의 소망이 아니라 인수의 욕망이다. 그리고 정말 봄에 눈이 내린다. 그 다음 장면에서 눈 내리는 차창 바깥이 보이고 달려가는 차 안에서 “춘분을 훨씬 넘긴 절기가 무색하게 함박눈이 쉴새없이 쏟아집니다”라는 뉴스 소리에 뒤이어 두 사람, 서영이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라고 묻자 인수가 “어디로 갈까요?”라는 대답을 두 사람이 다시 만난 해피엔딩으로 보는 것은 가장 진부한 설명일 것이다. 나는 반대로 이것이 불길한 엔딩으로 보인다.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공연이 끝난 무대 위로 눈이 내리자 인수는 그 눈을 본다. 그런 다음 숏은 창문 바깥에 눈을 바라보는 서영의 숏이다. 그런데 그 숏은 서영을 찍은 것이 아니라 서영의 얼굴이 비치는 유리 창문을 찍었다. 그 장면은 눈 그친 그날 밤, 삼척에서 눈을 뭉쳐 던지고 있던 인수를 바라보던 그 유리 창문에 비친 서영의 반복이다. 그때 나에게 서영은 이상할 정도로 인수의 환상처럼 보였다. 아니, 차라리 욕망의 대상처럼 보였다. 인수는 봄날에 눈이 내리자 즉각적으로 서영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계절에 관한 그 대화를 나눈 그 해변가 장면, 바로 직전의 신은 두 사람의 섹스장면이었다. 그러므로 이 눈이 인수에게 불러일으킨 것은 서영과의 섹스이다. 그러나 섹스가 떠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회하여) 계절이 떠오른 것은 인수의 부끄러움이다. 비 오는 날 밤, 모텔 앞에서의 문으로 전이된 부끄러움의 알레고리. 그런 다음 숏은 조명기 앞에 떨어지는 눈이고,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인수가 서영에게 한 전화라고? 그렇게 생각하기엔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 하나는 창문 앞에서 눈을 바라보는 서영의 숏 다음 다시 눈을 보는 인수의 숏이 있다. 여기서 전화를 꺼내들고 번호를 누르면 된다. 혹은 전화를 꺼내들면 된다. 그런데 그냥 눈을 보는 인수를 찍었다. 그런 다음 조명기의 숏. 전화벨 소리는 조명기에 덧붙여졌다. 말하자면 여기서도 구태여 숏을 나누었고, 전화벨 소리는 인수가 아니라 조명기를 따라간다. 그 다음. 나는 그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서 이 영화가 검은 페이드 화면 위에 들리는 전화벨 소리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그것은 불길함의 기호이다. 혹은 욕망의 소리이다. 모든 전화벨 소리는 사실 욕망의 호소이다. 누구의 전화일까? 누구이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그 전화를 받으면서 무슨 말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것이 누구의 전화인지, 무슨 말일지 알기 전의 나를 부르는 호명에 대한 대답 직전. 이미 예정된 결과에 대한 질문, 혹은 나를 부르는 당신 안의 나. 그런데 핵심적인 질문은 그 전화를 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것은 인수인가, 서영인가? 허진호는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기 전에, 여기에 목소리가 개입하기 전에 눈 내리는 화단에 피어난 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대답의 무한정한 지연이다. 그런 다음 달리는 차 안에서 눈 내리는 차창을 보여주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핵심은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때 서영이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인수가 대답한다. “어디로 갈까요?” 물론 이것은 대답이 아니다. 차라리 반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을 이미 들은 적이 있다. 저 뜬금없는 장면, 삼척 교외버스 터미널에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서영에게 낯선 군인이 다가와 “어디까지 가세요?”라고 물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황량한 질문이다. 지금 이 두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가 있다. 그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막차는 떠났고, 그런 다음 그 한 사람은 (카페에 앉아 몰래) 쳐다보고 다른 사람은 그 순간 자기 곁에 없는 상대를 위해서 서럽게 (이 영화에서 단 한번) 운다. 그런 다음 다시 반복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무엇보다도 불길하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무표정한 목소리만이 거기 남아 있을 때, 내가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할 때, 나는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 없다. 정말 그들이 함께 떠나는 것이라면 그들은 가장 나쁜 선택을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추억에 의지하지 않고 그래서 결혼을 한다면, 그들이 이제까지의 과정을 배우자의 자리에서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 어떤 보장이 있는가? 그래서 인수와 서영이 또다시 그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그 어떤 믿음이 가능한가? 그것은 추억을 배신하는 것이며, 비로소 그들이 실재와 마주하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윤리적 선택을 포기했고, 그래서 그들은 도덕적 주체로 행동하는 대신 정념적 주체의 자리에서 그 자신들을 정당화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두 번째 섹스가 끝난 다음 바다를 보면서 서영이 “우리 미쳤나봐요”라고 한 말에 인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수는 “우리가 나중에, 아니면 아주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요?”라고 묻는다. 서영은 대답 대신 반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므로 더 나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덜 나쁜 선택은 하나뿐이다. 미루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그들의 자유이다.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는 정확하게 그 지점에 있다.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그 자유를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대신 나는 인수와 서영에게 질문한다. 당신들의 진정한 선택은 무엇입니까? 혹시 당신들에게 그 선택이라는 내기의 기회 자체가 기만은 아닙니까? 당신들이 사랑 뒤에 숨으려는 그 눈물은 누구를 위해서 흘리는 것입니까? 욕망을 위해서, 아니면 환상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