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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게임 원작 영화<둠> 미국 박스오피스 1위

동명의 비디오게임 원작 영화<둠>(Doom)이 미국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유니버설 픽처스가 제작하고 <크레이들 투 그레이브>의 안제이 바르코비악이 연출한 <둠>은 10월21일 전미 3044개관에서 개봉하는 물량공세에 힘입어 3일간 1540만달러를 거뒀다. 일단 1위로 순조롭게 출발하긴 했지만 그리 높은 성적은 아니어서 속편이 제작될지는 미지수다. 역시 인기 게임을 영화화한 <레지던트 이블>1,2편과 <툼 레이더>1,2편의 오프닝 성적에도 미치지 못했다. 1993년에 출시된 <둠>은 최초의 1인칭시점 게임으로, 게임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미래에 인류가 화성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만든 텔레포트를 조작하던 도중 잘못 연결을 해서 다른 차원의 몬스터들을 불러내게 되고 그 몬스터들을 피해 지구로 귀환하는 내용이다. 영화에서도 1인칭 시점의 느낌을 살렸고 근육질의 배우 드웨인 '더 락' 존슨이 주인공으로 출연해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둠>이 완벽한 남성영화라면, 다른 두 편의 개봉작<드리머>(Dreamer: Inspired by a True Story)와 <노스 컨트리>(North Country)는 여성 취향의 영화들이다. 드림웍스가 제작한 <드리머>에서는 커트 러셀이 경마 조련사로 나오며 ‘최연소 흥행 보증수표’ 다코타 패닝이 다친 명마를 돌보는 딸을 연기했다. 930만달러 수입을 올려 2위. 5위를 차지한 <노스 컨트리>는 아카데미상에 안성맞춤인 영화다. 미국 최초로 여성 피고가 승소한 성희롱 소송을 다룬 작품으로, <몬스터>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샤를리즈 테론이 또다시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열연을 펼쳤다. <웨일 라이더>로 주목받은 뉴질랜드 출신 여성감독 니키 카로가 연출했다. 개봉 3주차를 맞은 <월래스와 그로밋: 거대토끼의 저주>가 상영규모(3472개관)를 유지한 덕분에 870만달러를 거둬 3위에 올랐다. 지난주 1위였던 <안개>는 4위로 3계단 하락했다. <엘리자베스타운>은 6위, <플라이트 플랜>은 7위로 여전히 10위권에 머물렀다.

<오즈의 마법사> 특별판 출시 기념 파티 열려

영화사상 가장 인기 있는 고전 영화로 꼽히는 <오즈의 마법사>의 특별판 DVD 출시(10월 25일)를 맞아 미국에서 대규모의 출시 기념 행사가 열렸다. 미국 시간으로 지난 19일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에서 주최하여 열린 이번 행사에서는 <오즈의 마법사> 본편의 특별 상영과 함께 극중 오즈의 시민인 ‘먼치킨’을 연기했던 배우 5명이 초청되어 팬들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영화 속의 먼치킨 배역은 모두 124명에게 주어졌는데, 현재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이날 초청된 5명뿐이다. <오즈의 마법사>에 관한한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대중문화 역사가 존 프리케는 AP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이 분들은 1939년 시사회 당시 초청을 받지 못했다. 오늘 밤은 이 분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라며 이번 행사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먼치킨 배우들 중 한 사람인 칼 슬로버는 “제작 당시에는 이 영화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완성 후 3년이 지나서야 보게 되었는데, 그 때야 굉장한 작품을 했다는 것을 느꼈다.” 라고 말했다. 행사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도로시 역 주디 갈란드의 아들 조 러프트도 참석했으며, 이들이 입었던 의상은 어린이 복지를 위한 경매에 붙여졌다. <오즈의 마법사> 특별판 DVD는 워너 브라더스를 통해 다음 달 11일 국내에서도 출시될 예정이다.

듀나의 DVD 낙서판 <앨프리드 히치콕 극장>

앨프리드 히치콕은 세계에서 가장 이미지가 잘 알려진 영화감독이다. 물론 찰리 채플린처럼 배우로서 활동한 사람들은 빼고 말이다. 이 뚱보 영국인 아저씨의 외모가 어쩌다가 이렇게 우리에게 익숙해졌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는지? 물론 그는 찍는 영화마다 ‘숨은 앨프리드 히치콕 찾기’ 게임을 벌였었다. 하지만 히치콕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슬쩍 지나가는 카메오가 만들어낸 것보다 더 유명하다. 그 정답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전설적인 50년대 텔레비전 스타였다는 것이다. 1955년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 극장(Alfred Hitchcock Presents)>라는 30분짜리 앤솔로지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 라는 제목의 1시간짜리 프로그램으로 바뀐 이 시리즈는 거의 10년 동안 미국 텔레비전을 장악했다. 그리고 히치콕은 이 모든 시리즈의 도입부와 결말에 출연해 지금은 전설적이 된 농담 따먹기를 했다. 덕택에 히치콕의 영화를 극장에서 단 한 편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기억했고 그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한 편도 보지 못한 사람들도 간접적인 통로로 그의 괴팍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박았다. 그렇다면 시리즈 자체는 어떤가? 이 앤솔로지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미권 단편 추리소설들을 각색하거나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오리지널 각본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부분 반전을 노리는 짧은 이야기들인데, 모두 조금씩 히치콕의 못되어먹은 취향에 조금씩 어필하는 경향이 있다. 부록에 따르면 부제작자인 조운 해리슨과 동료들이 히치콕의 취향을 고려해 뽑은 소설들이나 각본을 히치콕이 직접 선정하는 식의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앤솔로지 시리즈들이 대부분 그렇듯, 작품의 질은 아주 고른 편은 아니다. 그러나 우린 이 시리즈를 통해, 도로시 세이어즈, 스탠리 엘린, 레이 브래드베리, 코넬 울리치와 같은 흥미진진한 영미권 단편 작가들의 작품들의 각색물들을 접할 수 있다. 배우진도 상당하다. 조셉 코튼, 베라 마일즈, 존 카사베티스, 찰스 브론슨, 조운 우드워드... 히치콕 자신도 이 시리즈에 17편의 에피소드들을 감독했는데, DVD로 출시된 1시즌엔 그 중 네 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 3편은 놓치기 아까운 미니 히치콕 영화들이고 마지막 한 편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1시즌 DVD의 화질과 음질은 만들어진지 반세기의 세월이 흐르고 디지털 복원이 되지 않은 걸 고려해보면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가끔 히치콕 모놀로그 부분에 비가 내리고 <베이비시터> 에피소드엔 도입부의 히치콕 모놀로그가 빠져있다. 부록은 짤막한 제작 다큐멘터리 하나뿐이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정보들은 충분히 담겨 있다. DVD Talk의 리뷰에 따르면 몇몇 플레이어에서는 디스크가 작동되지 않는다니 유의하시길.

복고풍 코미디 중장년층 웃음보 터뜨릴까?

김보화·황기순 등 노장들 귀환…젊은층 위주 형식에서 탈피 비보연기 등 정통 코미디 도전 ‘식상하다’ 는 평도 맣아 지상파 방송3사의 코미디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전망이다. 지난해말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와 에스비에스 <웃찾사>의 뜨거운 접전으로 코미디의 새 부흥기를 맞았으나, 힘겹게 핀 꽃이 지는 모양새였다. 겉으로 드러난 바, 올 상반기 노예계약 파문과 폭력 사건이 주된 영향을 끼쳤다. 안으로는, 주로 젊은 세대를 끌어당겼던 휘발성 짙고 속도 빠른 ‘스탠딩 개그’의 한계 탓이기도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시도가 펼쳐진다. 타깃을 젊은 세대 위주에서 텔레비전 주 시청층인 중장년층으로 넓히고, 이를 위해 과거 코미디 주역들을 끌어들였다. 장르도 스탠딩 개그 일색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복고로 중장년층 잡기=문화방송이 복고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난 봄 시도한 공개 스탠딩 개그 <코미디쇼 웃으면 복이 와요>가 편성 시간의 불리함과 후발주자로서의 악조건을 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새 코미디 프로그램은 <웃는 데이(day)>. ‘퀴즈탐험 동물의 세계’ ‘라이브 요리쇼 간단합니다’ 등 주요 꼭지들은 공개홀이 아닌 비공개 녹화장에서 만들어진다. 프로그램의 숨통으로 신인 개그맨들이 꾸미는 공개 코미디 형식의 ‘11통 5반’도 마련했다. 방송시간도 본격 경쟁을 위해 수요일 밤 11시대로 바꿨다. 스탠딩 개그 붐을 일으킨 한국방송 <폭소클럽>도 본격 7080 프로그램으로 거듭났다. <개그콘서트>와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중장년층 중심으로 일고 있는 복고 코미디에 대한 시청자들의 욕구를 반영하기 위해서다. 에스비에스 <웃찾사>도 이번 가을 개편에서 다시 재기를 위한 터를 잡은 뒤 이르면 올해 안으로 젊은 세대 위주의 획일화를 탈피해 다양한 꼭지 개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코미디 주역들의 귀환=복고로의 회귀는 과거 코미디언들의 귀환으로 이어졌다. <웃는 데이>는 이경규·김국진 등을 코미디 무대에 올렸다. 조혜련·이윤석·정형돈도 여기에 가세했다. 개그맨으로 시작해 주로 엠시로 활동하던 이들이 다시 개그로 돌아온 셈이다. 이들은 주로 80~90년대식 바보 연기에 도전해 정통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겠다는 각오다. <폭소클럽>도 김보화·황기순·이경래·배영만 등 과거 내로라하는 인기 코미디언들이 나온 데 이어, 고영수·김정렬·김상호·오재미 등도 출연을 앞두고 있다. 열쇳말은 신구의 조화. ‘최양락의 올드 보이’에서 후배 개그맨들과 함께 공개 코미디로 대결을 펼친다. 기존 <개그콘서트>의 인기 꼭지를 재연하는 방식이다. 근래에 휴식기에 들어갔던 컬투 정찬우·김태균도 ‘그때 그때 달라요 2’ 등을 들고 <웃찾사>로 돌아온다. 노예계약 파문 등에 이어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던 윤택·김형인 등도 새로 손질한 꼭지로 <웃찾사> 출연을 재개하고, 폭력 사건으로 쉬었던 김진철은 <폭소클럽> ‘피아노맨’으로 전격 복귀한다. 르네상스 다시 오려나=복고와 복귀에 대한 평가가 아직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웃는 데이>의 경우, “유치하고 식상하다”는 악평이 대세다. <폭소클럽>의 과거 코미디언 출연 꼭지도 “어색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최근의 스탠딩 개그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기호가 고정된 탓도 있겠지만, 단순한 과거의 재연에 그쳐 호응이 낮다는 평가가 더 적절해 보인다. 코미디의 복고가 큰 흐름이라 하더라도, 재창조의 과정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코미디 르네상스를 제대로 맞으려면 새로운 시대 변화에 발맞춰 코미디계의 전근대적 관행이 청산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다양한 장르가 선보여야 한다. 이와 함께 새로운 인재를 받아들여 아이디어를 재충전할 기회를 부여하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여기에 코미디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의 성숙함이 보태진다면 르네상스의 윤활유 구실을 할 것이다. 눈길가는 꼭지들 세대간 조화 노린 ‘최양락의 올드 보이’ 한글파괴 빗댄 ‘그때 그때 달라요 2’ 손범수도 출연하는 ‘퀴즈 탐험 동물의 세계’ 요즘 코미디 프로그램은 꼭지들이 수시로 들고 나는 특징이 있다. 이는 내부 경쟁으로 이어져 콘텐츠 질의 향상이라는 긍정적 구실을 한다. 가을개편을 맞아 지상파 3사 코미디 프로그램의 꼭지들도 새로 선보이고 있다. 볼만한 꼭지들은 주로 세대간의 조화가 특징이다. 한국방송 <폭소클럽>은 ‘최양락의 올드 보이’를 새로 마련했다. 옛 코미디언들의 통로 구실을 하는 중요한 꼭지다. 이들은 요즘 개그맨들과 팀을 꾸려 요즘 유행하는 인기 개그를 재연해 대결을 벌인다. 재연에 머물지 않고 과거 자신들의 유행어를 변형해 구사하기도 한다. 지난 방송에선 “노개그맨은 죽지 않는다. 다만 캐스팅 되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로 요즘 개그계를 패러디하기도 했다. 에스비에스 <웃찾사>의 전성기를 일군 주역 컬투는 6개월여만에 ‘그때 그때 달라요 2’를 들고 나왔다. ‘그때 그때 달라요 1’에서 지나친 영어 열풍을 가볍게 꼬집었다면, 이번엔 한글 파괴 현상에 대한 패러디로 발전했다. 읽는 대로 써서 보내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엉뚱하게 해석해 배꼽을 잡게 한다. 이른바 ‘인터넷 언어’ 등을 고쳐서 바르게 쓰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적 표현도 지난 번보다 더욱 과감해진 느낌이다. 문화방송 <웃는 데이(day)>는 ‘퀴즈 탐험 동물의 세계’를 내놓았다. 20여년 간 큰 인기를 끌었던 한국방송의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를 비튼 형태다. 손범수 아나운서가 진행자로 나와 의도를 명확히 했다. 이경규·김국진·이윤석 등이 패널로 나와 퀴즈를 푼다. 김경식·조혜련 등은 직접 동물 연기에 나섰다. 퀴즈쇼의 형식을 빌어온 독특한 구성에 아직은 시청자들이 낯설어 하고 있다. 다양한 아이템 개발을 통해 시청자들과 친숙해질 수 있느냐가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루카스, 디지털의 ‘광선검’ 을 휘두르다

‘디지털 영화’하면 <스타워즈>의 조지 루카스다. 1997년 “디지털 기술은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고, 컬러가 입혀진 것과 같은 혁명이다”고 말한 이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이 영화계에서 예고된 지는 오래. “‘전자 영화’라는 개념은 텔레비전이 실험적 단계에 있던 1920년대부터 계속 등장했다”고 케이 호프만(독일 영화저널리스트)은 설명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디지털 영화가 있기까지의 길이 고를 리 없다. 때 이른 코폴라=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1979년 “영화와 디지털 공학, 위성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혁명을 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컴퓨터를 통한 영화 제작으로 거대 자본 스튜디오가 아닌, 감독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을 했던 것. 하지만 그 방식을 구현한 <원 프럼 더 하트>(1982년)의 3천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에 비해 수입은 고작 100만 달러. 이념만 앞선 탓일까. 하지만 이런 선견은 기술 부재 시대, ‘디지털’의 개념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자, 반성 기제이기도 했다. 코폴라 때 이른 시도 ‘쓴맛’ 때 만난 루카스=조지 루카스 감독은 디지털 영화에 대한 불신이 많던 1999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을 처음 디지털 영사시스템 프로젝터로 상영했다. 그리고 6년 만인 2002년, 아예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해 디지털 영사시설로 2000개의 스크린에 내건 최초의 디지털 시네마를 선보인다. 바로 <스타워즈 에피소드 2>다. 코폴라 때완 달리 필름으로 인한 환경 오염을 막겠다는 정부 정책, 연간 20억 달러의 필름 영화 배급비용을 줄이겠다는 영화사들의 의지가 순풍처럼 불던 때였다. 같은 해 7대 메이저 스튜디오가 결집해 디지털 시네마 표준화를 논의하는 협의체인 디씨아이(DCI:Digital Cinema Initiative)를 만들었으며 2005년 7월 디씨아이 최종 표준안(권고안)을 발표했다. 루커스 ‘스타워즈’ 로 대박 때 앞선 루카스=그럼에도 루카스의 선견은 뛰어나다. 21세기 디지털 영화가 있기까지 특히 그가 30년 전 세워 투자해온 프로덕션 아이엘엠(ILM)의 공은 절대적이다. 1970년대 ‘할리우드의 신동’으로 불렸던 그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3편으로 디지털 미학의 새 전기를 마련했다. 또 디지털 기술로 기존 작품조차 새 영화로 만들어 버렸다. 애플의 ‘파워북’ 덕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1977~1983년에 만들었던 <스타워즈> 1~3편을 1997년 새 디지털 효과로 재가공, <스타워즈 에피소드> 4~6편으로 제목을 바꿔 개봉해서 쉽게 4억 달러를 거머쥐기도 했다. 1962년, 한 대학원생에 의해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 ‘스케치패드’가 개발돼 컴퓨터 스크린과 인간이 소통하는 새 패러다임의 단초가 제공된 지 불과 얼마만인가. 너 뭐냐, <씬 시티>=오스카 시상식 집행위 노릇, 해먹기 갈수록 힘들다. 빼어난 디지털 영화가 늘어나면서, 촬영, 시각 효과 또는 디자인 따위의 현재 시상 부문 경계가 낡아버린 탓이다. 지난 7월 버라이어티지는 “올해 오스카 집행위가 가장 골머리를 앓은 영화는 대부분 화면을 디지털 기술로 만든 <씬 시티>”라고 전했다. <씬 시티>로 끝날까? 지난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인간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디지털 배우의 탄생이 5~7년이면 가능하다”며 “노트북을 켜고 혼자서 영화를 완성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예견했는데, 디지털 배우들이 남녀 주연상을 다툴 날도 멀지 않은 셈.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10억원 짜리 디지털 영상카메라 HDW-F 900(소니사, 약 200만 화소)의 성능은 하루가 다르게 갱신된다. 카메라는 이미 천만 화소, 영상카메라도 700만 화소(필립스)까지 넘나든다. 라디오, 티브이 등장에도 건재했던 100년 영화가, 영화의 정의를 다시 추궁받는 때가 온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 씨제이, HD영화 프로젝트 추진 상업적 성공여부 실험대될듯, 중·일·유럽은 정부주도 가속화 필름의 대안으로 새롭게 등장한 고감도 화질인 에이치디 디지털 영화 작업은 아직 기지개 단계다. 2002년 <아 유 레디>와 <욕망>이 <스타워즈> 촬영에 사용됐던 것과 같은 기종인 소니 F-900 카메라로 촬영돼 필름으로 전환, 상영됐고 지난해 <시실리 2km>가 필름과 파나소닉 바리캠 카메라로 촬영돼 일부 극장에서 디지털 상영을 하면서 의미있는 성공을 거뒀다. 또한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방송이 공동으로 저예산 에이치디 영화 제작에 나서 지난해 선정된 4편의 프로젝트 가운데 <종려나무 숲>이 올해 개봉했으며 올해도 김진성 감독의 <즐거운 우리집> 등 5작품이 촬영을 준비하거나 기획 단계에 있다. 특히 박찬욱, 허진호, 유하, 최동훈 감독 등 실력있는 감독들을 영입해 350억원 예산 규모로 8편의 에이치디 영화 제작을 추진중인 씨제이엔터테인먼트의 프로젝트는 에이치디 영화의 상업적 성공 여부에 중요한 실험대가 될 전망이다. 그 첫 작품인 <짝패>가 기획상의 혼선으로 필름 촬영을 하고 있지만 나머지 영화들은 모두 에이치디 작업을 하기로 감독들과 약속된 상태다.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이태헌 프로듀서는 “제작 여건의 미비와 기술 부족으로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에이치디 영화 제작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시행착오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장기적으로 전체적인 영화제작 환경에서 에이치디 영화의 영향력을 넓혀나갈 것”이라고 이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했다. 현재 중국과 일본, 유럽 등이 정부 주도로 디지털화 작업을 가속화하는 가운데 문화관광부도 지난 8월 ‘차세대 디지털시네마 비전 수립위원회’(이충직 위원장)를 출범시켰다. <시실리 2km>를 제작하고 비전 수립위원회로 통합된 영진위 산하의 디지털시네마포럼을 이끌고 있는 한맥영화의 김형준 대표는 해상도, 압축방식 등 디지털 상영 조건을 정하는 디지털시네마 표준화 작업이 매우 시급하다고 말한다. “아이티(IT) 강국에 자국 영화 점유율이 60%인 한국은 디지털시네마 표준화를 만들고 아시아로 확대시키기 유리한 조건임에도 그 논의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지나치게 늦게 시작됐다”고 지적한 그는 “업계와 정부가 손을 잡고 하루 빨리 표준화 작업을 추진해야 중복 투자 등의 비용 손실을 막고, 할리우드의 표준화 기준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디지털영화 더이상 변방이 아니다 주류로 ‘모드전환’ 실험영화로서의 의미 잃어 2005년 6회째 맞는 ‘레스페스트’ ‘디지털영화제’ 수식 빼 국내 디지털 영화 축제의 머리 격인 전주국제영화제와 세네프(SeNef). 다들 2000년께 시작해 올해 6회 행사를 마쳤지만, 지금 한창 애를 먹고 있다. 1999년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이 처음 ‘디지털’로 상영된 이래, 디지털 영화가 주류 영화에 빠른 속도로 침투해 간 탓이다. 올 봄 치렀던 전주국제영화제의 정수완 프로그래머는 “접근성과 개별성을 큰 매력으로 삼았던 디지털 영화가, 결국 완성도나 영화 미학을 높이기 위해 필름 영화에 버금 가는 물량과 자본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제 운영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며 “새 방향을 찾아야 할 때”라고 설명한다. 기대와 달리, ‘디지털 영화만의 미학’이 애매모호한 것도 사실. ‘첨단 영상’일 뿐 굳이 필름 영화와 구분해야하는지 따져묻는 이도 많다. 무엇보다 할리우드가 꾀하는 ‘디지털 영화의 자본주의화’ 아래, 한편으론 대안·실험 영화로서의 의미도 퇴색하고 있다. 또 다른 디지털 영화 축제로 ‘레스페스트’가 있다. 마찬가지, 올해 6회를 맞는데 ‘디지털 영화제’라는 수식을 이번에 뺐다. 레스페스트 쪽은 “디지털이 이젠 ‘혁신’대신 ‘보편’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요한 건 실험·혁신성이지 디지털 자체는 아니란 얘기인 셈. 새로운 활로도 그렇게 구해지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영화 제작의 혁신적 수단이 될 수 있다며 199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시작된 레스페스트는 매해 9월께 미국 도시를 시작으로, 런던, 로마 등 40여개 도시를 돌며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디지털 영상물을 소개하는 지구촌 축제다. 서울에선 오는 10~19일 남산드라마센터와 애니시네마에서 열리는데, 장·단편 영화는 물론 광고, 뮤직 비디오 등을 가리지 않고 기발한 착상, 삐딱한 시선들만을 한데 모아 선보인다. 모두 28개국 455편. 개막작은 뮤지션 벡의 특별전. 스타감독 미셀 공드리, 스파이크 존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로 데뷔한 가스 제닝스 감독 등이 만든 그의 선도적 뮤직비디오를 선보일 참이다. 도시 탐험이란 소재의 환상성을 독특한 기법으로 살려낸 <시티 파라다이스>, 불법 이민자로 격리된 3명의 어린이를 인터뷰한다는 애니메이션 <잇츠 라이크 댓> 등 참신한 이야기, 형식 등이 빛나는 작품들로 짜인 ‘글로벌 단편’은 레스페스트의 좌표다. ‘삼인 공습전’에선 최첨단 영상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신예, 프랑소와 보겔, 조니 로스, 나기 노다의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resfest.co.kr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카덴차의 고수 <올드 미스 다이어리>, <서동요>의 임현식

배우 임현식은 경기도 송추에 산다. 한때 젖소도 길렀던 터에서 지금은 개 여남은 마리와 훤칠한 나무들을 키우며 산다. 아니, 주인의 표현에 따르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니 어찌할 수 없이 자라는 것이다. “어젯밤에 말이지, 서리가 내렸어요.” 생면부지의 기자를 대문 밖에 마중 나온 임현식은 자신이나 객의 안부 대신 첫 서리 소식을 인사말로 건넸다. 서리 내린 것이 대견한 듯 서글픈 듯 말투가 오묘하다. 가느다란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길가의 고춧잎들이 찬 기운에 풀이 죽어 수긋하다. 연기생활 35년째인 임현식은 아버지보다 아저씨나 양아버지에 가까운 이미지를 지닌 배우다. 요즘 출연 중인 <서동요>에서도 임현식이 분하는 기와장인 맥도수는 주인공 장이(조현재)가 사랑하는 장남의 죽음을 초래했음에도, 이 고독한 고아로부터 정을 거두지 못한다. 하긴 <올인>과 <대장금>에서도 임현식은 일종의 의붓아버지였다. 장이에게 친부 위덕왕이 유명무실한 허깨비고 목라수 박사가 이상적 자아라면, 긴 여정에 오른 장이의 일상을 참견하는 어미닭 같은 양부/아저씨 역이 맥도수의 몫이 될 법하다. 아버지는 독한 애증의 대상이지만, 아저씨는 시시콜콜한 잔정의 대상이다. 때로는 친구도 될 수 있는.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도 임현식은 늘상 움직이며 낙을 찾아 두리번대는 역동적인 사람이었다. 살기 위해 늘 노동하지만 성취욕보다 인생을 즐길 궁리를 하는 남자였고, 위엄을 세우는 대신 젊은이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하는 어른이었다. 오후가 돼 가을볕이 마당에 괴자, 그가 기르는 골든 리트리버 ‘장금이’가 얼마 전 낳은 아홉 마리의 강아지들이 일제히 깨어 칭얼거린다. 그 보드라운 꿈틀거림은 이 뜰에서 30년간 연주된 생(生)의 음악에 대면 짤막한 소절에 불과하다. 스물아홉의 초년병 탤런트 시절 임현식은 어머니와 이 집의 울타리를 세웠고 아내를 맞았으며 맏딸을 얻고 이듬해 쌍둥이 딸을 낳았다. 그리고 4년 전 이 집에서 어머니와 사별했고 지난해 아내를 앞세웠다. 슬픔이 가슴속에 쑥 들어올까봐 임현식은 일부러 쿵쾅대며 바쁘게 일해왔다. 이따금 먼산을 내다보면서. “씨,네,리”라고 명함을 읽어, 긴장한 기자의 웃음보부터 터뜨린 임현식은 인터뷰 중에도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연신 서성이고 책장을 뒤지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타닥타닥 땔나무가 보채는 뜨거운 난로 곁에서 마시는 커피는 적당히 달고 미지근했다. -(인터뷰가 이루어진 서재 한켠은 클래식 LP와 CD, 오래된 각종 오디오 기기들로 빽빽했다.) 방금 선생님 전화벨 소리가 무슨 서곡이었죠?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직접 악기도 다루시죠? =벨소리?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지. 우리 어머니가 음악교사였는데, 성악을 하고 싶어 애를 많이 쓴 분이라 같이 살면서 내가 좀 배웠어. 바이올린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사람 되게 만들려고 가르치셨지. -“사람 되게 만들려고”라니요? =음 뭐, 놀러만 다니고 그랬으니까, 정서적으로 안정을 갖는 소년이 되도록 그러셨는지… (불쑥 일어서서 난로에 나무를 넣는다.) 아이구, 이제 뜨끈하네. 당시에는 바이올린 선생님도 없어서 광주에 현악연주회하는 의사 모임의 회원이던 소아과 의사한테 레슨을 받았어요. 나는 열심히 안 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열심히 하는 바람에. (웃음) 예전에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있는 곡을 연주해 써먹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손을 안 대게 되었지. 최근에 좀 가다듬어보려고 악기도 손봐두었는데 또 가만히 있네. 올 겨울엔 좀 해야지. -그처럼 음악을 먼저 접하셨는데 왜 연극영화과를 지망하셨어요? =인간이란 누구나 유희본능이 있어서 춤도 추고 싶고 노래도 하고 싶은데 누가 탁월하게 끼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쪽으로 가는 사람이 나오겠지? 나도 그런 축이어서 극장 영화는 빼놓지 않고 보고, 음악과 더불어 살고, 뭐든 소년답지 않게 해내니까 친구들이 칭찬을 많이 해줬어요. 당시 마리오 란자 같은 훌륭한 성악가들이 만든 뮤지컬 영화에도 심취하면서 음악하면 저렇게 화려한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나중에 고3쯤 되니 아무래도 마리오 란자처럼 되긴 힘들 것 같았고 우리나라 현실도 무시할 수 없었어. -그래서 연극영화과를 택하셨군요. 뮤지컬 같은 장르를 염두에 두셨나봐요? =그렇지. 종합예술 쪽으로 생각을 한 거지. 장래성이 있는지 검토해보고 뜻대로 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나서는 그렇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구. -이 집에서 1974년부터 사신 걸로 압니다. 선생님께서 ‘평생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겠습니다. =추억? 글쎄, 추억인지 뭔지. 우리 어머니가 나 하나 잘 키워보려 했는데 내가 이런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고생 많이 하셨지. (갑자기 일어나 책장을 뒤진다. 한참 만에 찾은 낡고 정갈한 스크랩북에는, 맏딸과 부인을 옆에 세우고 쌍둥이 딸을 양팔에 안은 농부 차림의 젊은 그가 실린 기사가 있었다.) 예전에는 우리 어머니가 이런 것들 다 모아두고 그랬는데. -그보다 5년 전인 1969년에 MBC 공채1기 탤런트로 TV연기를 시작하셨지요? =방송국 들어간 지 8년 만인 1978년도에 내가 조연상을 탔어요. 요즘으로 치면 연말 연기대상 같은 거지. 그때까지 상은 김무생 선생 같은 선배들만 줬는데, 1기생 중에 내가 처음 상을 탔지.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셨어. 그때부터 출연료랍시고 어머니께 얼마라도 드릴 수 있었어. 악역을 꼭 한번 하고 싶다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이병훈 감독님의 세 작품에 나오는 선생님의 캐릭터, 그러니까 <허준>의 약방종사 오근과 <대장금>의 대령숙수 덕구 그리고 한창 방영 중인 <서동요>의 장인 맥도수가 극적인 기능이나 성격면에서 유사한 인물로 비치는데요, 연기하시는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내가 <서동요>에서 역할을 잘못 맡은 거 같아. 원래는 주인공을 죽이려고 괴롭히는 악역을 꼭 한번 하고 싶다고 했어. 악하다고 눈 부라리는 악역 말고 악역다운 악역을 무척 하고 싶었는데 또 엇비슷해졌지. -그와 관련해 <대장금>, <서동요>의 김영현 작가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빠 보이지 않고 휴머니즘이 저절로 바닥에 깔리니까 작가가 마음 푹 놓고 쓸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연기자인 반면, 진짜 인간의 사악한 속성을 내포한 캐릭터를 의도한다면 선택을 주저할 수 있는 배우라구요. =그래서 작가들이 소홀해질 가능성도 있죠. 드라마는 영화가 아니니까 조연공은 조연공 나름대로 (그는 ‘조연공’이라는 단어를 썼다.) 뭔가 돼야 해요. (난로에 나무를 넣으며) 54회를 하는 동안 조연은 조연대로 뭐가 보여야 되거든. 뭐가 보여야 하냐면, (계속 땔감을 넣으며) 잘돼야 된다는 거지. 아니 잘돼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에구… 일단 나무 넣고 얘기합시다. 헷갈려서 원. 그러니까 요즘 드라마가 사극 빼면 홈드라마들인데, 소위 실버들의 삶에 대한 희망이나 재미, 확실한 내용을 주는 연속극이 없어요. 주인공 부모나 비슷한 역을 맡으면 “어, 너 이제 들어오냐? 힘들지? 그래, 올라가서 자라.” 이거 하나로 한 회가 끝날 때도 있어. 그렇다고 아예 안 쓰면 출연료가 안 나오니, 무조건 쓰긴 하는데 내용은 그렇게 졸속해지는 거지. 그나마 시도하는 경우도 시도에 그치고 채널 돌아가게 만드는 재미없는 내용이기가 쉬워요. -뭔가 보여야 한다고 하시니 말씀입니다만, 영화 <튜브>에서 선생님의 연기에는 일선에서 발로 뛰며 살아온 형사의 체념과 긍지가 동시에 보였고, 드라마 <사랑찬가>,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는 떠나가는 자식들을 보며 스스로 인생의 다른 단계로 접어드는 아버지의 페이소스가 보였습니다. 홀아버지 최부록 부장이 애인이 생긴 딸 미자에게 비오는 날 우산을 갖다줄까 말까 망설이며 비내리는 창 밖을 보는 얼굴은 대사 없이도 많이 슬펐습니다. 요컨대 웬만하면 웃으시니까 그저 웃음만 거두셔도 보는 사람 마음이 쓰라려오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저 사람이 웃음으로 못 삭일 정도의 슬픔은 얼마나 클까 싶은 거죠. =허허허. 딸과의 그런 연기는 누구나 자식 키우는 어른이라면 충분히 맛을 느끼며 할 수 있지. 진솔해질수록 까닭없이 슬퍼지더라구. 애비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구나 싶고, 우리 어머니한테 소홀히 지낸 젊은 시절이 후회스럽고. 우리 딸들도 분명 제 아빠를 사랑하고 “아빠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을 다 못 전하지. 때가 돼야 아는 거야. 우리 어머니가 너도 자식 낳고 살아보라고 얘기했는데, 그때 난 “자식 낳고 살아도 어머니처럼 안 그래” 했다고. 인생은 끝까지 느끼면서 사는 거야. 절대 달관이란 게 있을 수 없어. 인간이 인간을 충고할 수가 없는 것이, 아무리 말해봐야 전달은 200분의 1도 안 돼. 영화에 공감해 관객이 울 수는 있지만 다음날은 또 씻은 듯 그 감정이 없어져 버리지 않아? 다시 말하면 예술가가 지닌 감정의 200분의 1만 전해져도 우리는 눈물 흘리고 감동할 수 있다는 얘기지. -임현식 선생님을 흔히 웃음을 많이 주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오히려 쉽게 우리를 울릴 수 있는 배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셔도 금방 슬퍼지니까요. =작가들도 내게 그런 페이소스가 엿보인대. 그런데 나 역시 한 장면에다가도 뭔가를 집어넣으려고 해. 옛날에는 뭘 해볼까 얘기를 꺼내면 “자식아, 써 있는 거나 잘해” 하고 구박 들었지만, 요즘에는 한 장면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 -소위 애드리브, 그러니까 선생님이 ‘카덴차’(독주자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즉흥연주)라고 즐겨 부르시는 즉흥연기에서도 그런 의지를 느껴요. 지나가는 장면 하나에서도 나름대로 기승전결을 갖고 뭔가 따먹고 넘어가려는 긴장이랄까. =작품에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 허투루 넘어가면 조연이니 가뜩이나 별 볼일 없는 장면이 정말 보잘것없이 흘러가 버려요. 그래서 결말도 없는 장면에서 괜히 나 혼자만의 엔딩을 가져보기도 하지. 그러면 혹시 보는 사람들이 뭔가 긴장하지 않을까 해서. 백만원짜리 연기자가 이백만원짜리 연기를 해야지, 대본에 “껄껄 웃으며 대사한다”고 적혀 있다고 그냥 웃으며 대사하고 20만, 30만원짜리 연기처럼 해버리면 왜 그 배우를 쓰겠어? 나를 캐스팅한 제 값을 하려는 의도가 40%, 연기를 하면서 의식과 내용을 갖겠다는 의지가 60%쯤 돼지. 실은 조연이 멋져야 하거든 -모든 배우들에게는 둥지 같은 장르가 있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TV겠지요. 제가 만난 어떤 영화배우는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연기를 하는 것이 생경해 연극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어떤 연극배우는 흐름이 끊어지고 연기를 하며 개선되는 재미가 없어서 영화나 TV가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TV는 일정에 쫓기고 영화보다 입체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약점으로 꼽히는데요. TV 연기의 매력과 편안함이 어디 있다고 보시나요? =뭐니뭐니해도 텔레비전의 맛은 한 장면을 그냥 샤프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 카메라 세 대, 어떨 때는 네 대까지 써서 한 장면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스탭과 연기자들의 내용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 그야말로 우리가 어떤 희열을 느끼지.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TV 메커니즘에 적응하는 것이 쉽진 않으셨을 것 같아요. 그맘때는 녹화 시스템도 지금보다 훨씬 실수를 용납지 않았을 것이구요. =그랬지. 그래서 우리 세대는 대사를 못 왼다거나 하는 법이 없어요. 요즘엔 기술이 발달해서 NG를 밥 먹듯이 하니, 연기가 갈수록 쉬워지는 거지. 대신 물량이 많아졌어요. 옛날에는 찍을 만큼 찍고 못하면 이튿날도 찍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여유가 없거든. 그리고 또 신이 많아졌어요. 템포가 빨라진 거지. 과거에 한 시간짜리 드라마가 약 120페이지였다면 지금은 150페이지쯤 돼요. 대사도 “에에, 저어, 그런데 으음” 이런 게 없어. 동작도 빨라 보이는 스타일이고 절대 늘어지면 안 돼. 자꾸 NG 내면 서로 맛이 떨어져. 내가 하는 연기는 세번 이상 다시 찍자 그러면 못 하겠더라고. -그런 면에서는 영화가 가장 힘들겠습니다. =영화는 불러 앉혀놓고 마냥 시간을 보내. 뭐, 원래 그런 줄 알고 사실 놀러가는 거야. (좌중 웃음) 기다리다가 한컷 찍겠다고 부르고 불러서는 또 한 20분 앉혀놔. 우리는 그저 카메라 서너대씩 두고 쫙쫙 찍어줬음 좋겠어. 영화만의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맛이 있지만 그건 역시 감독이나 주인공만의 희열이고, 우리나라에서 조연이라는 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지, 확실한 멋과 맛을 잘 못 싣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실은 조연이 멋져야 하거든. 서부 활극을 봐도 물론 주인공 총잡이가 다 잘하지만 주변에 넘나드는 조연의 이유 있는 등장, 멋진 죽음 혹은 퇴장, 그리고 그들의 확실한 내용이 중요하지. -<당신>으로 이름을 알린 1978년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선생님을 뚜렷이 기억하는 첫 작품은 1984년의 <암행어사>거든요. 두 작품 사이의 6년은 어떤 시기였나요? =그전에는 남들 하는 말 듣기만 하고 “예 잘해보겠습니다”가 전부였는데 70년대 후반부터는 내 이야기도 하고 들어주는 이도 생겼어. 일 끝나면 감독들과 포장집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뒷얘기도 하고 다음주 일도 상의하고. 웬만한 배우들은 끝나자마자 보따리 싸서 언제 없어졌나 모르게 사라져버리는데 말이지. 그맘때는 그러다 작가도 곧잘 불러내곤 했어요. 김운경 작가도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냥 정리해가서 촬영해요. 굳이 이래저래 얘기해봤자 젊은 작가들 머리에는 전부 청춘남녀만 있어가지고. (웃음) -그리고 1986년부터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해서 6년이 넘게 순돌이 아빠로 사셨습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순돌이네 집이 이사를 나간 것으로 처리돼 빠졌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한 지붕 세 가족>을 6년7개월 했어요. 그만둘 때 내가 MBC 월간지에다 글도 썼지. ‘내키지 않은 보따리를 싸고’라는 제목으로. 허허. 그때가 SBS가 생기면서 좀 격동기였어. 탤런트들도 이동이 많았는데 MBC, 특히 <한 지붕 세 가족>은 연기자를 안 놓아주는 거라. 예를 들어 저쪽에서 출연료의 배를 주겠다고 섭외를 하는데 여기는 그저 30%만 올려주는 식이었던 거야. 박원숙이 고통을 많이 받았지. 출연료는 배우 값어치와 연결되니 동서를 막론하고 돈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고 나이 먹으면 더구나 배우가 의리 따져 연기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난 지금껏 평생 동안 “봐달라”, “도와주시오” 하는 소리만 들었어요. 예전에는 돈 얘기가 힘들었는데 이젠 빨리 끝내버리지. 내가 그리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우리가 무슨 얘기하다 이렇게 됐나? -<한 지붕 세 가족>을 떠나던 소감을 말씀하시다가 그만…. =음, 연기자 입장에서는 <한지붕 세 가족>을 끝까지 하고 싶었고 방송국에서 강력히 잡을 줄 알았는데, 알아서 하라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정말 보따리를 쌌어. 그랬더니 나중에 잡으려고 난리가 난 거야. 당장 스페인인가 어딘가로 도망갔지. 여행이 아니라 도망. 그렇게 미울 수가 없더라구. ‘빵꾸’를 내니까 그제야 찾은 걸 보니, 그동안은 다 회유였고 떠본 것이잖아? 연락 끊고 박원숙과 내가 단단히 약속하고 떠버렸어. (애석하게 조용히) 중간에서 순돌이만 안됐지. 배우는 독서를 제일 많이 해야 해 -배우 임현식하면 즉흥연기부터 떠올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같은 방식을 오래 유지하신 것은 역으로 즉흥연기를 할 때 넘어서지 않는 미묘한 선에 대해서 본인의 마음속에 확실한 기준도 있다는 뜻 같습니다. 또한 같은 즉흥연기 안에도 몇 가지 유형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장금이로세” 하는 식으로 어미를 살짝 바꾸기도 하고, 되받아치는 리듬이나 리액션의 박자를 살짝 뒤틀어주기도 하고 아예 대사 자체를 만들어넣으실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내겐 대체로 재미있는 연기를 기대해서 캐스팅을 해요. 예전에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을 할 때 SBS에서 제의받은 뜻도 그런 것이었지. 지금도 그 테이프를 보면 내가 참 잘했다는 느낌이 들어. 허허. 아주 활발하게 했더라구. 일반적으로 교수들은 애드리브를 “짧고 간결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뭔가 하나 던져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더라구. 그런데 옛날 우리 때 애드리브란 간을 때우기 위한 것이었어. 간이란 뭐냐면 포즈(pause)지. 예를 들면 등장인물이 딱 맞게 나와줘야 되는데 몇 초 늦게 등장해서 “그런데 자네 괜찮은가?” 하고 돌아볼 때 없는 거라. 그런 간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호흡일 수 있었지. -나올 연기자가 제때 등장을 안 하는 경우가 그렇게 잦았나요? =그럼,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 기계도 아니고 말이지. 그 사이를 메꾸기 위해 말을 늘이기도 하고 방금 한 대사를 간추려 던지기도 하고 몇 가지 기법이 있어. 옛날엔 솔직히 엉망이었지. 예를 들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면 왕도 있고 옆에 신하 폴로니어스, 누구누구 있단 말야. 정말 그 이름자 외기도 힘들거든. 그럼 누가 폴로니어스한테 대사를 해야 하는데 딴 사람한테 가서 대사를 하는 거야. 그러면 어떡하겠어? 진짜 폴로니어스가 “여보게, 나 여기 있소.” 이러는 거지. 그러면 그제야 슬그머니 그쪽으로 가서 다시 “그렇지 않은가?” 애드리브를 하는 거야. (폭소) -하지만 선생님은 즉흥연기를 임기응변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식으로 구사하지 않습니까? =재미를 기대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바람 같은 인간을 만들어놓는 것이 내겐 힘들어요. 그렇다고 나까지 쉽게 가면 안 되니까 계산도 많이 하고 내 개성에 맞는 말도 고심을 하지. 그래서 배우는 독서를 제일 많이 해야 해. 그래서 뒷골에 잠재된 내용을 끌어내야 해. 저기 두꺼운 명언집 보이죠? (양주동 박사 편 <세계명언대사전>) 저게 내 평생의 필독서야. 소설 경우는 <쿼바디스>라든가 <레 미제라블>같은 스펙터클한 것을 잘 읽어요. 그런 작품의 완역판을 읽으면 정말 많은 것이 저장돼. 자베르, 코제트 아버지, 장발장, 모든 인물의 입장이 돼서 연기하는 스타일로 읽지. 내가 4년째 호남대학교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거기서도 독서를 강조해요. 연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너희들 눈 안에 들어오는 현실만으로는 이거 어느 세월에 배우될지 모른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강의하는 거야. 시골길 꽃을 보는 감흥 하나도 본인의 감성적 체험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으흠, 이젠 코스모스도 빛을 잃었겠네. -그런 많은 느낌에 비해서 연기하면서 표현하실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끼시겠어요. =그렇지! 나름대로 해보고 싶은 내용들이 참 많은데. <서동요>에서 우리가 1400년 전 백제를 연기하잖아요? 나는 말을 좀 달리 해보고 싶었어. 세종대왕이 만든 언문이 500년 전 것이라면 그 이전 사람들은 뜻글자 한문만 갖고 어떻게 언어를 구사했을까? 전라도, 충청도 사투리를 좀 넣어 백제말을 상상해본다거나, 신라 출신 인물은 억양이 좀 달라서 첩자인 사택기루가 신라인 만날 때와 백제 사람 대할 때 말투가 다르면 그게 또 재밌잖아. -선생님도 시대극과 현대극에서 연기가 미세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극이 연극적인 면이 강한데 “어, 내가 왜 힘을 주지?” 싶으면 빼야지. 매알매알하게 연기하고 싶어. -“매알매알”이 무슨 뜻인가요? =응? 사부작사부작이라는 뜻이지. 악역을 맡아도 눈 부라리고 이 드러내고 그러지 않고 그야말로 사부작거리면서 못된 놈, 명작에서 보는 인간상을 그려보려고 하는데 악역은 절대 안 줘. -생각보다 시트콤 출연작은 많지 않으십니다. 시트콤 제안에는 더 신중히 응하시나요? 게다가 최근작 시트콤인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서는 오히려 선생님 개인으로 보면 어떤 작품보다 정극에 가까운, 정적이고 잔잔한 연기를 보여주셔서 흥미로웠습니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처음에는 시트콤에 맞는 연기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고독이 담기는 바람에 내 부분은 시트콤이 아니게 됐어요. 그런 역할은 거의 처음 해보았지. 그만한 드라마도 없다고 생각해요. 김석윤 감독이 참 잘 배운 감독이예요. -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이 아빠로 7년, <암행어사>의 갑봉으로 4년 반을 사셨습니다. <전원일기>에도 2년간 출연하셨지요. 요즘들어 시청자와 함께 늙는 아주 긴 호흡의 드라마가 희귀해지고 미니시리즈가 많아지는 추세에 대해 아쉬움은 없으십니까? =난 특별 기획드라마에는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일일연속극이나 주말연속극은 어쨌든 홈드라마로 가야 하거든. 그런데 내가 겪은 드라마들을 보면, 사람만 바뀌는 식이지 별반 다르지 않아. 사위 들어온다고 한번 떠들썩하고 어쨌다고 야단하고 맨 그거지. 그리고 드라마는 1년 전에 제작을 하는 것이 맞아요. 올여름 에서 제의를 받았는데 내년 9월 방영될 드라마를 벌써 준비를 하는 거야. 아침 일일연속극인데 그 감독이 내가 나온 <슬픈 연가>를 보고 신부 역을 제안하더군. 그리움과 고독도 아름다워요 -중년을 넘은 연기자들이 사업을 시작하는 모습도 흔히 봅니다. 선생님은 나무를 키우는 일 외에 다른 계획은 세워본 적이 없으신가요? =나무야 그냥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자라는 거지. 난 항시 연기생활을 바쁘게 해온 사람이에요. 나만큼 또 캐스팅이 잘 되는 사람이 없잖아요? (눈웃음) 그러다보니 35년째 이러고 살았는데-물론 연기도 내 생활이지만-이제 와선 참 지루하기도 해. 내 연기가 좋다 나쁘다 정리해주던 어머니가 4년 전 돌아가시고는 더욱 충격이 컸고. 또 작년에는 마누라가 아파서 죽었지. 그러다보니 내가 가정에 소홀했던 것 같아 후회가 많이 남아요. 그저 출연하고 연기하고, 그러면서 출연료도 제일 많이 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만 신경 쓰고 살았단 말야.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빨리 사라져버리니까…. 그런 후회와 우울함에서 벗어나려고 올해 굉장히 많이 일했어요. 그냥 막 하자는 대로 하고 밖에 자꾸 나가서 생활하고. 하지만 그런 마음을 떨치고 남은 세월을 인간적으로 살고픈 느낌이 꽉 차 있지. 올 겨울에는 정말 몇 십년 만에 3, 4개월이라도 손을 놓고 싶었어요. 친구도 만나고 적조했던 사촌형제도 만나고 고향도 가보고 싶었어. <서동요>도 작년부터 약속하지 않았다면 안 했을 거야. -선생님은 카메라 앞에서 무방비해 보이십니다. 어떻게 보일지 자신을 전혀 방어하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얼굴뿐 아니라 의상도 그렇습니다. 현대극 경우는 의상은 어떻게 고르시는지요? =난 의상을 버리지 않아요. 지금 입고 있는 이런 옷도 입는 사람 드물 거야. 대신 내가 70년대, 80년대 배경 드라마를 한다면, 이 옷을 입고 연기할 수 있지. 이리 와봐.(<수사반장>에 나올 법한 해묵은 옷가지가 가득한 방으로 안내한다.) <한 지붕 세 가족>에서 입었던 점퍼도 여기 있잖아. -선생님한테서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낙천성이 바닥으로부터 배어나옵니다. 그러나 나이 들고 가족과 사별하는 일도 겪으면서, 별안간 인생을 습격해서 흔들어놓는 재난이나 질병 같은 위협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셨을 것 같은데요. =나처럼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이 세상에 없었어요. 어머니가 좋은 분위기에서 키우고 만들어주신 거지. 그런데 일하러 가는 나를 아침에 손 흔들며 배웅까지 해주셨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정말 아주, 미치겠더구만. 그래도 우울에지면 안 된다 싶어 <맹가네 전성시대> 같은 드라마에서 막 코믹 연기를 하고 그랬어. “야, 이런 상황에서 연기가 되네.” 스스로 놀랐지. 그런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살았는데 또 2년 만에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니 내가 완전히 뒤집어지더라구. 아내로 인해 그런 충격을 받을지는 짐작도 못했어. 하지만 약속한 일은 해야지 어떡해. 그렇게 투병하다가 마누라가 10개월 만에 죽어버렸어. 도대체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더라구. 그래서 또 드라마들을 닥치는 대로 했지. 바쁘게 일주일을 뛰어다니니까 역시 좀… 낫더만. -바쁜 생활로 슬픔을 잊으신 것 외에 선생님이 살아가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는지요? =성격이나 생활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물론 마누라 생각나서 술도 먹었지만 그걸로 해결하면 안 되지. 담배도 4개월 안 피다가 지금 다시 피우는데, 또 날잡아 끊으려 해요. 내 연기는 스트레스가 있으면 큰 손실이 와. -그렇다면 현재 선생님께 제일 큰 두려움은 무엇이고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입니까? =(인생의) 좋은 멤버들과 헤어진 일이 우울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요. 언제 내가 정말 고독해봤는가. 진정으로 슬픈 적이 있었나. 때리면 아파서 울고, 돈 빌려주고 못 받아서 애석한 적은 있어도 진정한 아픔과 그리움을 겪어봤던가. 그러니 이것을 슬퍼 말자. 이것도 삶의 과정이고 자연적인 섭리다. 우리 아내는 한참 좋을 때 나랑 헤어졌지만, 결혼식 때 말한 “죽음이 갈라놓은 때”가 빨랐을 뿐이다. 뭐, 그 정도로 다독이지. 그리움과 고독에서 오는 감정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움에 겨워 먼산을 본다거나 비오는데 집 앞 철길을 혼자 걷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가장 큰 즐거움과 큰 괴로움이 한데 있는 것인가요? =아냐. 난 괴로움이라고는 표현 안 했어요. 그리움이라 그랬지.

<러브토크> 이윤기 감독 인터뷰

29일 저녁 시작된 인터뷰가 30일 새벽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러브토크>(11일 개봉)의 이윤기 감독은 말했다. “아픔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절망도 쉽게 하지 않는다”라고. 보일듯말듯한 희망을 암시하는 것처럼 알듯말듯한 정혜의 미소로 첫 영화 <여자, 정혜>를 끝마쳤던 이 감독이 또다시 아프고 고독한 세 사람의 더 쓸쓸한 <러브토크>로 관객들을 찾은 것은 그래서인 것 같았다. 감독이 “사람들 속에 있으면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말 외로운 게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 느껴보고, 쉽게 절망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서. <러브토크>에는 상처를 간직한 채 서울을 떠나온 세 사람 써니(배종옥), 영신(박진희), 지석(박희순)이 등장한다. “마사지숍을 운영하는 써니는 성공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미국으로 가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미국에서 심리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러브토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유학생 영신은 가정환경이나 본인이나 멀쩡하지만 과거에 집착하면서 자기 스스로 그림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리고 애정은 있지만 그냥 싫어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석은 그런 사람”이라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세 사람이 과거를 잊기 위해 떠나온 도시는 로스앤젤레스다. 영신이 지석에게 “세상에 그 많은 나라와 도시가 있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나니”라고 말했던 것처럼, 왜 하필 엘에이일까. 감독은 “서울은 불행하든 어쨌든 너절한 인간관계라도 있는 도시인 반면, 엘에이는 노력하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도시”라고 말했다. 마음을 드러내고 타인과 소통하는 데 서툴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 세 사람이 인간관계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는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엘에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마음을 내보이지 않던 써니가 라디오 디제이에게 조심스럽게 상처를 드러내기에,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단호한 어투로 상담해주는 써니가 유부남 애인과 사랑을 나눈 뒤 모텔방에서 멍하게 텔레비전을 보며 어둠 속에 갇히기에,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붙잡지도 못하는 지석이 겨울 강물 위를 부유하듯 굳은 채로 떠돌다 만난 옛사랑에게 “내 생각해 본 적 있어?”라고 쪼다같이 묻기에 가장 적합한 낯설고 쓸쓸한 공간으로 비친다. 감독은 이 아리고 스산한 영화에 대해 “여백을 많이 두었던 전작에 비해 수다스러운 영화가 됐지만, 아프지만 아프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 또다시 아프게 살게 될 소심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라는 점에서 <여자, 정혜>와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내 주변의 누군가가 경험했을 법한 이야기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감정이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러브토크>는 ‘대중적인 영화’”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느낀대로 솔직하게’ 여러 번 볼수록 더 잘 보이고, 더 좋아지는 영화라는 점도 써달라”고 소심한듯 장난스레 덧붙였다.

김정대의 레퍼런스 DVD - 2005년 10월 (2)

아키라 SE Akira SE 재패니메이션 팬들의 애간장을 부단히 태웠던 문제의 타이틀 <아키라>도 드디어 10월에 정식 출시됐다. 그것도 두 장의 부록 디스크에 DTS 5.1, DD 5.1 음향 트랙을 모두 포함한 ‘세계 최강의 스펙’으로 말이다. <아키라>는 LD 시절부터 시작해 매체를 바꿔가며 지금껏 상당히 많은 버전으로 발매된 바 있는데, 이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진짜로 감독이 의도한 색감이냐’라는 논쟁까지 벌어진 바 있다. 예컨대, LD 시절에 크라이테리언에서 발매한 버전과 파이오니아에서 발매한 버전의 영상은 각각 상충되는 장단점을 보유하고 있어서 어느 것도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본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한 버전이라고는 평가하기 힘들었다. 이번에 대원에서 발매한 DVD는 (현재로서는) 이 모든 논쟁의 외부에 위치한 ‘궁극의 버전’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본 타이틀의 화질은 (현재의 기준으로) 기계적으로만 평가한다면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 특유의 필름 잡티에서 시작해 입자 표현의 불균질성, 다소 떨어지는 밝기와 투박한 질감, 종종 출몰하는 윤곽선 노이즈까지 말이다. 하지만 만일 복원을 한답시고 이 모든 약점을 일거에 제거해버렸다면, 어쩌면 셀 애니메이션 고유의 질감마저 걷어 낸 ‘비인간적이고 밋밋한’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영상 면에서 <아키라>의 뛰어난 작화 수준은 세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12년 전에 파이오니아의 LD가 출시될 때부터, 오토모 가츠히로는 (감상 시) 이 작품의 ‘음향’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당부해 온바 있다. 가츠히로가 작화 못지않게 많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음향설계였기에, 2001년의 5.1채널 리마스터링 작업 및 2002년의 DTS 트랙 작업이 별도로 이루어진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본 타이틀에 수록된 DTS트랙은 느낌상으로는 ‘화려함의 극치’인 영상을 완전히 압도하는 듯하다. 감상자를 완전히 감싸는 듯한 입체감이 훌륭하게 구현되고 있으며, 음향의 이동성과 임팩트감도 기대 이상의 수준이다. 대사, 주변 음향, 스코어 간의 밸런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또한 외국에서 DD 5.1 버전과 DTS 버전에 각기 따로 제공됐던 부가영상을 본 타이틀에서 한꺼번에, 그것도 한글 자막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대단한 메리트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꼽은 ‘베스트 신’은 영화 초반부의 오토바이 폭주 장면이다. 야마시로 쇼지의 기막힌 스코어와 함께 다양한 음향 요소들이 전 채널을 통해 쏟아지는데, 그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드니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2005년 10월 24일 대원 DVD 출시) 킹덤 오브 헤븐 DE Kingdom of Heaven DE 작년 하반기, <스타워즈> 삼부작을 필두로 <투로모우>, <아이, 로봇> 등 최상급 퀄리티의 타이틀을 연달아 출시했던 폭스가 이번 년에도 <킹덤 오브 헤븐>을 앞세워 ‘하반기 대공습’을 감행하고 있다. <킹덤 오브 헤븐>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타이타닉> SE 등 향후 폭스가 출시할 대작 타이틀의 퀄리티를 가늠케 하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할 것으로도 예상됐었는데, 그 결과물은 한 마디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것이었다. 본 타이틀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출시 이전 시점 기준) 현재까지 출시된 극영화 타이틀 중 가장 뛰어난 AV 퀄리티를 보여준다. 특히 D2D 방식으로 제작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타이틀에 버금가는 안정도와 정교한 표현력을 자랑하는 화질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디지털 색보정 과정에서 짙은 색감이 지나치게 강조된 탓에 전체적인 영상 톤이 어둡다는 점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의도한 영상 컨셉을 충실히 구현하려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일 뿐, 퀄리티 자체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다소 짙기는 하지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색상에서 시작해 떨림 없는 안정된 영상, 디테일의 표현력까지 모든 면에서 본 타이틀의 영상은 ‘필름 영화’로서는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DTS 사운드트랙도 모든 면에서 최상급이다. 막강 우퍼 채널의 지원을 등에 입은 음향의 임팩트는 최근 출시작 중에서도 대적할 만한 상대를 찾기가 힘들 정도며, 음향의 이동감과 분리도, 각종 음향 요소들 간의 밸런스도 만점 수준에 가깝다. 필자가 꼽은 ‘베스트 신’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공성전 장면. 비싼 돈을 들여 서라운드 시스템을 구비하신 분들은 무시무시한 사운드가 전 채널에서 쏟아지는 이 장면(마치 감상자 자신이 20만 대군에 의해 포위된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에서 투자한 보람을 확실히 느낄 것이다. (2005년 10월 11일 20세기 폭스 출시) 서편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드디어 출시됐다. 스펙트럼은 지난 6월에 발표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필두로, 우수한 한국 영화를 디지털 리마스터링하여 연달아 내놓고 있는데 10월에는 <서편제> 외에 <춘향뎐>과 <장군의 아들>도 함께 출시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그랬듯, <서편제>의 화질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HD 텔레시네를 거친 영상답게 표현력이 기대 이상이며 시종일관 부드럽고 안정된 입자 표현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필름 특유의 잡티가 존재하긴 하나, 감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며 세세한 부분의 디테일 묘사 상태도 대체로 만족스러운 편이다. 다만 엠버 톤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등 색상의 화려함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음질 쪽은 다소 실망스럽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사나 주변 음향에서 잡음이 섞이거나 갈라져서 나오는 부분이 적지 않으며, 음향 자체가 뚝뚝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다. 영상 못지않게 음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인 점을 감안한다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은 사실 리마스터링 과정에서 생긴 문제가 아닌,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의 태생적 한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국 타이틀의 ‘기적 같은’ 복원 상태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DVD 유저들의 입장에서 이는 묵과하기 힘든 약점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꼽은 ‘베스트 신’은 유봉 일가가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 유명한 롱 테이크 장면이다. 워낙 설명이 필요 없는 명장면이기에, 여기에서도 ‘설명’ 따위는 생략하도록 한다. (2005년 10월 25일 스펙트럼 출시) 시선집중: 이 장면! <죠스 30주년 기념판 Jaws : 30th Anniversary Edition> 중 “인디애나폴리스 호가 어쨌다고?” 유니버설이 드디어 DVD 판매를 재개했다! DVD 유저에게는 대단한 희소식이 아닐 수 없는데, 당장 10월의 출시목록 중에도 놓치기 아까운 작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번 출시목록 중 <레이>와 더불어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타이틀은 바로 <죠스> SE (30주년 기념판)이다. 특히 이번 30주년 기념판에는 기존의 국내 출시판 <죠스>에서 빠졌던 DTS 트랙이 포함돼 눈길을 끈다(기존판의 경우, 코드 1번 타이틀은 DTS 버전과 DD 5.1버전이 따로 출시됐는데 국내에서는 후자의 버전만이 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번 30주년 기념판의 백미는 바로 부록 디스크에 수록된 두 시간짜리 메이킹 다큐다. 지난 1995년에 발매된 LD에 수록되어 호평을 받았던 이 메이킹 다큐는 현역 최고의 메이킹 다큐 전문 감독 중 하나로 알려진 로렌트 부제로가 감독한 것으로, 이미 <죠스>의 팬들 사이에서는 전설이 된 유명한 작품이다. 지난 출시판에서는 이 메이킹 다큐가 절반가량이 잘려나간 상태로 수록돼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는데, 이번 30주년 기념판에서 드디어 ‘완전한 버전’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메이킹 다큐인데 저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직접 그 진면목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159일간의 사투 끝에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는데, (약간 과장해서) 영화 본편보다 더 재미있으며 배꼽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웃긴 에피소드도 상당수 소개된다. 특히 리처드 드레이퍼스의 유머 감각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이번에 <시선집중! 이 장면>으로 고른 장면은 퀸트(로버트 쇼)가 맷 후퍼(리차드 드레이퍼스)와 마틴 브로디(로이 샤이더)에게 ‘인디애나폴리스 호’ 침몰 당시에 체험담을 들려주는 부분(DVD 챕터 15)이다. 퀸트의 체험담을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1945년 6월 29일, 내가 타고 있던 인디애나폴리스 호가 일본 잠수함에서 발사한 어뢰 두 방을 맞고 격침됐지. 티니언 섬에서 레이테로 돌아오던 중이었어. 히로시마 원자 폭탄을 수송한 후에 말이야. 천 백 명의 선원이 물에 빠졌고, 배는 12분 만에 침몰했지. 수송 작전 자체가 극비임무였기 때문에 구조 신호는 발신되지도 않았지. 동이 틈과 동시에 뱀상어들의 공격이 시작됐어. 상어들은 가까운 사람부터 차례로 공격했고 물린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댔지. 동료들은 하나 둘 상어의 밥이 됐고, 바다는 피로 물들어갔지. 5일째 되는 날 정오에 우리는 상공을 지나던 벤투라 폭격기에 의해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조됐는데, 물 속에 빠졌던 천 백 명 중 생존자는 316명에 불과했어.” 로버트 쇼의 기막힌 연기 덕에 이 장면은 지금은 <죠스>에서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로버트 쇼가 내뱉는 ‘걸작’ 대사는 영화의 각색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하워드 새클러가 처음 고안했으며, 이후 존 밀리어스에 의해 확장됐고 로버트 쇼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맞도록 최종 각색을 한 것이다. 퀸트가 언급하는 ‘인디애나폴리스 호 침몰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 일화는 세계 해전사에서는 꽤나 유명한 것이다) 천 백 명의 선원이 물에 빠진 것, 그리고 그 중 수 백 명이 ‘상어 밥’이 된 것도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나 퀸트의 언급과는 달리 인디애나폴리스 호의 침몰 당시 구조신호는 수차례 발신된 바 있다. 물론 이는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창조적’ 각색의 결과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퀸트가 인디애나폴리스의 침몰일을 잘못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디애나폴리스 호의 침몰 사건은 실제로는 1945년 7월 30일, 그러니까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7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에서 이 사건은 꽤나 유명한 것이어서, 전쟁사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 중에도 이 사건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실제로 <죠스>를 보는 관객 중에는 퀸트의 대사를 듣고 ‘공포감을 느끼는’ 대신 고개를 갸웃갸웃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치명적인(?) 오류가 세 차례의 각색 과정 중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감독의 스튜디오, 쇼치쿠 110년 [2]

쇼치쿠 누벨바그와 <남자는 괴로워> 1953년 텔레비전이 첫 등장할 때만 해도 영화계의 우려는 크지 않았다. 1958년 당시 관객은 현재의 10배인 연간 11억2745만명에 달했다. 민간방송 출범 당시 영화계도 미국에 시찰단까지 보냈지만 흐지부지되었고 방송국은 신문사들이 맡게 된다. “여기에서 영화계의 운명은 갈렸다”고 하마노 교수는 말한다. 1965년 관객이 3억6천만명으로 격감했고, 1975년엔 처음으로 일본영화 관객이 외국영화 아래로 떨어졌다. 장기가 TV의 홈드라마, 가정극과 가장 비슷했던 쇼치쿠가 가장 타격이 컸다. 이전까지 확고한 업계 1위였던 쇼치쿠는 1958년 이미 3위로 떨어졌다. 하마노 교수는 역설적이지만 “일본에 홈드라마라는 장르를 확립한 것”이 쇼치쿠의 기여라고 했다. 기노시타 감독은 1970년대 실제 가 지원해준 기노시타 프로덕션을 통해 수많은 홈드라마들을 만들어냈다. 일본의 2대 드라마 작가 중 한명인 야마다 다이치는 기노시타의 조감독 출신이며, 또 한명 구라모토 소오는 오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쇼치쿠에게도 변화의 기회가 있었다. 1950년대 말 젊은 감독들을 데뷔시키면서 선전부는 ‘쇼치쿠 누벨바그’라며 이들을 내세웠다. 오시마 나기사, 시노다 마사히로, 요시다 기주(한국에선 요시다 요시시게로 잘못 이름이 알려져 있는) 등이 내건 강렬한 청춘·애정영화는 당시 절정에 달했던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거친 에너지와 비판의식을 고스란히 담았고 흥행도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정치적이고 파격적이었던 오시마의 <일본의 밤과 안개>를 회사쪽이 개봉 4일 만에 극장에서 떼어내고 이에 오시마 등이 쇼치쿠를 나가면서 반짝했던 변화의 시도는 끝나고 말았다. 닛카쓰가 이시하라 유지로를 앞세운 새로운 청춘영화나 무국적풍 액션, 도에이가 야쿠자영화 등 그나마 방송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쇼치쿠는 과거에 안주한 셈이다. 도호나 도에이가 부동산 회사들을 각각 모태로 해 개발 거점에 극장을 세우며 출발한 영화사인 데 비해, 처음부터 ‘순수 연극, 영화사’라는 쇼치쿠의 높은 자존심도 작용했다. 오시마와 함께 1954년 입사했던 야마다 요지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입사 당시엔 전형적인 오후나 멜로드라마에 질려 있었다. 조명을 해도 오로지 밝게. 구로사와처럼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쇼치쿠는 싫어했다. 소프트하고 부드럽고 구석구석 밝은 화면. 그런 것의 가치를 젊은 때는 알 수 없었다. 금방 망원렌즈를 사용해버리고 싶고. 하지만 쇼치쿠의 촬영감독들은 망원을 바보처럼 여겼다. 첫 촬영날 망원을 쓰겠다고 하다가 혼나기도 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 야마다 감독이 ‘가장 쇼치쿠적’이라는 <남자는 괴로워>를 48편 만들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1969년 시작된 이 시리즈는 27년간 8천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총매출 480억엔을 기록했고 일본인들의 영원한 친구 ‘도라상’(아쓰미 기요시)를 낳았다. 다나카 고기는 “이 시리즈의 성공에 안주했던 게 쇼치쿠의 변화를 더디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쇼치쿠풍 드라마는 지금도 무시할 수 없다. 88년 시작된 <낚시바보일지> 시리즈는 올해 16번째 작품을 내놓았다. 낚시광인 만년 평사원 ‘하마짱’은 오늘날 샐러리맨들의 스트레스를 웃음으로 날려주는 존재다. 하마짱의 배짱 앞에서 꼼짝 못하는 사장 ‘스상’은 이상적인 기업주라 할 정도로 속이 깊다. 시리즈의 최근작 3편을 내리 감독한 아사하라 유조는 쇼치쿠풍의 영화를 시대에 맞게 새롭게 일궈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이 무조건 부정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110년을 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쇼치쿠의 변화의 시작은 더뎠지만,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쇼치쿠는 촬영소를 매각하던 99년 블록부킹 시스템(일정기간의 상영을 보장하고 자사영화를 자기 극장에 걸던 방식)을 프리부킹 시스템으로 바꿨다. 갑작스레 영화수급이 끊기며 그해 경영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지만 오히려 이것이 경영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반지의 제왕>의 대히트 같은 운도 따라줬다. 최근 1∼2년 사이엔 애니메이션 본부 신설, 개인투자펀드(<시노비>), 지적재산권신탁을 이용한 펀드(<아수라성의 눈동자>) 등 새로운 시도를 공격적으로 펴나가고 있다. 물론 일본 영화계가 메이저 스튜디오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가능성은 없다. 이미 80년대부터 메이저의 지배는 깨져나갔다. 도호가 막강 1인자라지만, 배급의 얘기일 뿐 더이상 제작사로 보기 어렵다. 1970년대 중반 일찌감치 방계 회사들에 제작을 넘기기 시작했고 지난해 <고질라>를 끝으로 아예 자체제작은 중단한 상태다. 멀티플렉스의 증대, TV 방송국의 영화계 장악, 단관계 개봉의 유행 등으로 영화계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치야마 프로그래머는 “단적으로 메이저 스튜디오가 쇠퇴했지만 일본영화의 전체 제작편수는 다시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는 300편이 넘을 거라 추산된다. 경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1997년 <하나비>가 2개관에서 개봉해 장기상영하는 단관계 개봉 방식을 선택해 대성공을 거둔 이래, 일본에선 이제 영화계의 상식이 되어버렸다. 아예 비디오로 촬영해 단관의 레이트 쇼으로 개봉하는 사례도 크게 늘었다. 이전의 V시네마가 액션야쿠자영화 중심이었다면 요즘은 장르도 다양하다. 방송국의 영화제작은 바꾸기 힘든 흐름이다. 마케팅비가 총제작비의 절반을 훨씬 넘기 일쑤인 일본에서 채널에서 광고를 쏘아대는 TV의 힘은 막강할 수밖에 없다. 110살의 쇼치쿠는 이런 변화 속에서 새 출발점에 서 있다. “전통 속의 혁신이 우리의 힘이다” 쇼치쿠 영화부문의 실책임자 히사마쓰 다케오 상무 인터뷰 히사마쓰 다케오 상무는 영상본부 부본부장과 영상기획부를 맡아 쇼치쿠의 영화 관련 부문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쇼치쿠 110년의 원동력은. =가부키가 400년 된 전통문화지만 혁신적인 면이 있다. 건담의 모빌슈트도 가부키의 연기에서 얻어온 것 아닌가. 토키영화와 컬러영화를 처음 만든 것도 우리다. 아마 쇼치쿠가 전통만을 고집해왔다면 이미 망했을 거다. 전통 속에서도 혁신을 이뤄왔던 게 힘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부터 서서히, 그리고 90년대에는 심각한 위기가 왔다. 침체의 원인은 뭔가. =쇼치쿠를 빛낸 게 강력한 디렉터 시스템이었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시장’에 대한 생각을 덜 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밖에선 텔레비전이다, 외화 수입이다, 애니메이션이다 하는데 쇼치쿠는 자존심만 세우고 시장을 보지 않았다. 대중의 취향이 바뀐 데 대한 인식과 대응 프로세스가 없었다. -오후나 촬영소 매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당시 신키바 촬영소 건설을 노조에 약속했는데. =90년대 말 수십억엔 적자에서 지난해에는 43억엔 흑자로 돌아서고, 부채도 절반으로 줄었다. 그 계기가 촬영소 매각이었다. 쇼치쿠가 살기 위해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신키바는 계속 검토 중이다. 하지만 무조건 촬영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 만한 기획과 인력의 정비가 먼저다. -제작, 배급, 흥행의 이후 계획은. =시네콘을 착실히 늘려 현재 목표로는 2007년 쇼치쿠의 전국 300여개 스크린 중 90% 가까이가 시네콘이 될 예정이다. 하지만 극장은 안정적인 대신 큰 비약도 없는 부문이다. 배급은 5∼6년 전엔 고생하다가 이제 겨우 외화, 애니메이션까지 포함한 라인업을 갖추게 됐다. 제작은 돈버는 건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영상부문의 원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걸로만은 안 되기 때문에 지금은 1년에 5∼6편 정도만 생각하고 있다. 대신 비디오는 좀더 늘릴 예정이다. 비디오 시장을 2배까지 늘릴 생각이다. -어쨌든 지난해부터 다시 자체제작이 늘어났다. 대중의 취향에 대한 분석을 어느 정도 했다는 얘기인데. =멀티플렉스가 지역에 확실히 자리잡고 도심까지 진출하면서, 쇼핑센터에 구경나온 가족 단위 관람객이 요구하는 가족 취향, 젊은이 취향의 영화 수요가 크게 늘었다. 예전엔 도시 대 지역의 흥행비율이 7:3이었으면 요즘은 그 반대다. 쇼치쿠가 지난해부터 내놓은 <퀼> <캐산> <시노비> 같은 게 그런 분석을 반영한 결과다. 아마 이전이라면 절대 쇼치쿠 영화라 믿지 않을 거다. 물론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도 있고 <낚시바보일지> 시리즈도 만들지만, 액션영화나 젊은 감각의 영화들을 추가해 좀더 다양한 균형감을 갖추고 싶다. <세카추> 같은 순애영화도 만들고 싶다. 오즈 야스지로부터 야마다 요지까지 쇼치쿠의 산증인 다나카 고기가 말하는 쇼치쿠의 감독들 다나카 고기는 10년 전 <쇼치쿠 100년사>에 이어 올해 <쇼치쿠 110년사>의 발행 책임을 맡고 있다. 1955년 입사해 <조춘> 등 오즈 야스지로의 세 작품의 조감독을 거쳐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제작, 영업에 두루 관여했던 그는 쇼치쿠의 산증인이다. 오즈 탄생 90주년인 93년엔 허우샤우시엔, 빔 벤더스, 스탠리 콴 등이 오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즈와 이야기하다>를 감독했고, 99년 오후나 촬영소의 폐쇄 당시에는 촬영소 역사를 담은 마지막 영상물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전하는 쇼치쿠의 몇몇 감독들에 대한 사적인 기억과 평가. 혁신적인 오즈, 영상의 천재 기노시타 오즈 야스지로와 기노시타 게이스케_ “쇼치쿠에 입사 뒤 두달 만에 오즈조에 속하게 됐는데 이름 정도 들어봤지 영화는 본 적이 있어야지. 마침 집 주위에서 <도쿄이야기>를 재상영하더라고. 디테일은 잊었어도 밖에도 비가 오고 화면도 주룩주룩 비가 내렸던 일, 그리고 정말 해머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건 기억해. 당시 젊은 입사자들 중엔 대학 영화연구그룹 출신이 많아 오즈에 대해 ‘낡았다’ ‘지루하다’ 했지만 난 처음부터 달랐어. 기노시타는 후배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멋쟁이 감독이었지. 젊은 조감독들과도 적극적으로 얘기하려 했고. 별로 후배와 교류가 없는 오즈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어. 폴 슈레이더가 오즈에 대해 ‘자신의 형식’을 가진 이라 말했지만, 그건 누가 얘기해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 기노시타는 영상의 천재라는 면에선 구로사와 아키라와 맞먹는다고 생각해.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지. 구로사와처럼 에너지는 없었지만, 오히려 관객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영화였고. 쇼치쿠 전성기의 3대 감독이라면 오즈, 기노시타 그리고 시부야 미노루였는데 오즈는 워낙 각별한 존재였고 나머지 둘 사이의 경쟁심은 대단했어. 오후나 촬영소 근처에 둘 다 단골식당이 똑같았는데 그 조의 조감독들은 둘이서 마주치지 않도록 점심시간 잡느라 고생했지.” 군계일학의 재능 오시마, 학자 같은 감독 요시다 오시마 나기사와 요시다 기주_“누벨바그라 해도 오시마나 요시다 같은 이들 사이엔 강한 연대 같은 건 별로 없었어. 영화 경향도 다르고. 오시마가 쇼치쿠를 나간 건 이미 그전에 이마이 다다시 같은 사람들이 독립 프로덕션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어. 하지만 쇼치쿠로선 아쉽지. 재능면에선 단연 오시마였거든. 난 오시마가 쇼치쿠에서 멜로를 찍었으면 굉장했을 거라 생각해. 쇼치쿠에서 맘대로 한편 찍으면 그 다음엔 회사 위해 하나 하고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요시다는 내 동기인데 반은 학자였어. 관념적인 영화들이 많았지. 오시마는 요시다처럼 관념적이지 않았어.” 쇼치쿠 시행착오의 상징 노무라, 아쉬운 재능 야마다 노무라 요시타로와 야마다 요지_“ 노무라는 <모래의 그릇> 같은 걸작이 있는가 하면 태작도 있고 기복이 심해. 뭐랄까 쇼치쿠 시행착오의 상징 같아. 재주로 치면 야마다보다 한수 위지만 재주가 많아 회사가 원하는 대로 너무 다양하게 만든 게 문제였지. 야마다는 훌륭한 작품들도 많은데 <남자는 괴로워> <학교> <가족> 같은 시리즈로만 알려진 게 안타까워. 물론 이 작품들이 쇼치쿠의 효자들이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