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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호퍼의 여인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는 신원 미상의 여성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호퍼의 1927년작 <자동판매기 식당>(Automat) 속 홀로 앉은 여인을 들 수 있다. 유리막 안에 전시된 음식을 동전을 넣어 주문하는 자동판매기 식당은 1920년대 미국 도시 문화의 고유한 풍경이다. 커피잔을 들어올리는 여인은 정작 커피 자체에는 무관심한 듯하다. 상념에 빠진 듯한 인물의 자태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후경의 유리벽에 반사된 실내등의 긴 행렬은 깊은 상념의 시각적 등가물이다. 이 여인이 심중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같은 해 개봉한 할리우드영화 <잇>(It)의 여주인공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클래라 보가 연기하는 베티는 백화점 점원으로 일하지만 거침없는 언행과 타고난 성적 매력으로 뭇 남성들을 매료시킨다. 동시에 노동계급의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워 누구에게든 문제의 해결사 역할을 자임한다. 베티는 범인은 갖지 못한 ‘그것’(It)을 갖춘 셈인데, 그것인즉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익명의 도시 문화 안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능력일 것이다. 클래라 보의 ‘잇걸’(It Girl)은 수동적 성역할에 반기를 든 신여성이자 포효하는 1920년대의 아이콘이다. 미술사학자 에리카 도스는 <자동판매기 식당>의 인물에 대해 “비서일 수도, 사무실 직원일 수도, 백화점의 판매 사원일 수도 있을 이 여성은 20세기 초반 직업과 새로운 경험이라는 자유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여자 중 한 사람이다”라고 추측한다. <잇>의 ‘잇걸’과 다르지 않은 묘사다. 그러나 호퍼의 화면을 메운 정서는 포효가 아닌 적막이다. 클래라 보의 ‘잇걸’이 물고기처럼 편안하게 도시 생활을 유영한다면, 호퍼의 여인은 낯선 표류지를 배회하는 듯하다. 여인의 침묵이 도드라질수록 배경 또한 낯선 시공간으로 거듭난다. 이같은 형상화 방식은 2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표현주의 회화와 호퍼의 그림이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표현주의는 공간과 형상을 심대하게 왜곡하여 불안과 공포를 시각화했다. 인물 또한 배경과 마찬가지로 뒤틀려 공황 심리를 표현한다. 반면 호퍼의 그림은 표상의 사실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물의 눈길은 배경과의 상호작용을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그만큼 주변 공간은 독자적이고 생경한 장소성을 품는다. 지금까지 영화가 재해석한 호퍼의 공간은… 영화는 주로 낯섦의 공간 미학을 서사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호퍼의 그림을 인용해왔다. 앨프리드 히치콕이 <싸이코>(1960)에서 호퍼의 1925년작 <철길 옆의 집>(House by the Railroad)을 재현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호퍼의 그림은 빅토리아풍 저택을 화면 중앙에 배치하지만 전경의 철로가 저택의 하단을 가리게 함으로써 전통과 현대의 미묘한 긴장을 포착한다. <싸이코>에서 호퍼의 저택은 살인마 노먼 베이츠가 죽은 어머니의 유골과 함께 기거하는 장소로 각색된다. 베이츠의 집 전면에 있는 모텔은 그의 사업체이자 희생양을 낚는 함정이다. 호퍼의 철로가 현대성을 상징한다면 히치콕의 모텔은 일상과 정상성을 표방한다. 반면 이들 뒤편에 놓인 저택은 각각 몰락한 구시대와 분열된 인격을 암시한다. 히치콕은 호퍼의 낯선 공간을 억눌린 본능의 거처로 재해석한다. 히치콕의 추종자 브라이언 드 팔마는 호퍼 회화의 스타일 또한 빈번히 차용했다. 드 팔마의 1981년작 <필사의 추적>의 도입부 장면에서 카메라는 여자기숙사의 내부를 염탐하듯 살핀다. 누군가의 시선을 반영하는 듯한 롱테이크는 반라의 여성 인물들을 좇으며 관음적 시선에 부응한다. 호퍼의 <자동판매기 식당>을 연상시키는 기숙사 공간은 위험이 도사린 폐쇄병동에 가깝다. 해당 시퀀스는 호퍼식의 공간 안에서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로 끝을 맺는다. 샤워하는 여성이 난도질당하는 상황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는 뉴욕의 광장, 카페, 극장, 홍등가와 같이 에드워드 호퍼에게 영감을 주었을 도시 공간들을 나열한다. 호퍼의 영향을 자인하는 스코세이지는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호퍼의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 1942)을 인용하여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과 동료 택시 운전사들간의 회합 장면을 연출했다. 실상 영화 전반을 뒤덮은 붉은 색조와 어두운 조명은 호퍼 회화의 분위기를 답습한다. 그러나 <택시 드라이버>에서 소외의 공간 미학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트래비스와 여주인공 베티가 첫 데이트에서 찾는 포르노 극장이다. 베티는 민주당 상원의원 후보의 선거운동원이며 그만큼 정치적 이상주의에 고무된 인물이다. 포르노 극장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자체 검열제도였던 프로덕션 코드(1930~68) 시대를 마감하고 등급제를 도입함으로써 파생한 1970년대 미국 영화문화의 새로운 풍경이다. 등급외 극장을 표현의 자유가 확장된 결과로 해석한다면 베티의 진보적 정견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티는 자신의 의사에 반해 포르노 관람을 권하는 트래비스의 무례함이 경악스럽다. 정치 구호를 외치며 뉴욕의 거리를 활보했을 베티에게 음습한 관음의 소굴은 도시 전체를 생경한 정글로 다시 보게 했을 것이다. 호퍼의 공간 미학을 영화에 도입한 사례들을 봤을 때, 낯선 도시의 희생양이 주로 여성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더불어 호퍼 회화의 애초 의도가 그랬을지도 자문하게 된다. 이에 대해 호퍼의 에칭 그림 <저녁 바람>(Evening Wind, 1921)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여성 누드화인 이 작품에서 모델은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 순간 외풍이 개방된 창문을 관통하고 커튼이 펄럭인다. 여인이 바람에 놀라는지, 반색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열린 창문과 바람이 폐쇄된 침실에 모종의 자유로움을 몰고 온 느낌은 분명하다. 호퍼의 전기작가인 게일 레빈은 이 작품이 “자유와 자기 인식”에 대한 상상력을 담았다고 분석한다. 바람이 상징하는 변화와 자유는 여인에게 새로운 자의식을 일깨운다. 여인은 순풍에 편승할 것인지 역풍을 거스를 것인지 자신의 길을 결정해야 한다. 이 인물이 호퍼식 여성 표상의 원형이다. 고독 너머의 고뇌, 20세기 여성의 징후적 목소리 호퍼의 그림은 통상 소외와 고독의 정서를 담아낸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공간이 아닌 인물로 초점을 바꾸면 그 인물은 자신이 내던져진 공간 안에서 암중모색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독과 고뇌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고독이 수동적 반응이라면 고뇌는 능동적 선택이다. 양자는 의식의 스펙트럼 안에서 서로를 견인하며 고유한 개인성의 경지를 만들어간다. <자동판매기 식당> 속 인물은 모든 젊은 여성을 ‘잇걸’로 평준화시키는 도시 문화의 전횡에 맞서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셜리에 관한 모든 것>(2013)은 호퍼 그림의 여성 표상을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현실 속 여성으로 그려낸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가 1931년부터 1965년 사이에 발표한 13편의 회화 작품을 활인화(活人畫, tableau vivant) 방식으로 각색했다. 호퍼 원작의 스타일을 유지하되 회화 속 인물들은 실제 배우가 연기하여 나열된 그림들에 극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주인공 셜리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탐독하는 지식인이자 사실주의 극단 그룹 시어터(Group Theater)의 일원으로서 대공황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사회의식을 고취하는 데 헌신한다. 매카시즘의 광기에 굴복한 엘리아 카잔의 변절에 좌절하던 셜리는 다시 리빙 시어터(Living Theater)에 합류하여 예술을 통한 사회 변혁의 도정을 이어간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가령 호퍼의 1931년작 <호텔 방>(Hotel Room)을 극화하는데, 짧은 슬립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엿보기 심리를 자극하는 듯한 원작 그림의 모델은 <셜리에 관한 모든 것>에서 상투적 공연예술에 불만을 토로하는 연기자 셜리로 변모한다. 호퍼의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1932)에서는 신문을 읽는 남자와 피아노 앞의 여자가 서로 시선을 회피한 채 한방에 앉아 있다. 이 그림을 각색한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장면에서 여주인공은 공연 일정을 위해 긴 합숙을 떠나야 하지만 연극인의 임무를 저버릴 수 없어 애인과의 결별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고 되뇐다.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은 호퍼 회화의 여인을 대공황, 매카시즘, 베트남전쟁, 민권운동과 같은 격변기에 직면하여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고민하는 능동적 여성 예술가로 재해석한다. 소외의 이미지를 고뇌의 이미지로 뒤바꾼 셈이다.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가이 로지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을 “얄팍한 자기현시”라고 깎아내린 바 있다. 고립감을 저항 의식으로 치환한 작업이 마치 이어폰을 낀 반 고흐의 <자화상>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정작 호퍼 개인은 동시대의 여성들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호퍼는 자신의 그림에 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에 따르면 “예술가는 새로운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것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외로운 탐험가가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목소리다”. 우리는 한국 화가 나혜석(1896~1948)의 자화상에서, 일본 화가 다케히사 유메지(1884~1934)의 여인화에서 호퍼의 여인들과 비슷한 모습을 본다. 호퍼, 나혜석, 다케히사의 여성 초상은 모두 20세기라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다 간 뭇 여성들의 징후적 목소리들을 품고 있다. 이들 목소리의 내용이 고립인지 저항인지 굳이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미래의 관객이 자신의 처지를 투사하여 그 의미를 완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권을 관통하여 내면에 침잠한 여인들의 초상화만 따로 모은 전시회를 상상해본다.

[기획] ‘슬픔의 삼각형’, 신랄한 무질서의 해학, 뒤집으면 보이는 것들

202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은 문제적 영화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스스로 함정에 빠진 백인 남성의 초상을 통해 시스템의 부조리와 위선을 파헤쳐왔다. 이른바 부조리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슬픔의 삼각형>은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 평하기에 손색이 없다. 물론 영화제 수상이 반드시 걸작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공개 당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명백히 갈릴 게 사실이며, 우리가 <슬픔의 삼각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히려 논쟁적인 영화일수록 텍스트의 깊이도 풍성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한계와 아쉬움을 짚어보는 건 작품을 제대로 보는 방식이 되어줄 것이다. 빼어난 점과 아쉬운 점을 두루 살펴본 뒤에야 찍을 수 있는, 영화를 완성시킬 마지막 평가의 한점은 당신의 몫이다. 웃음은 세개의 꼭짓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다. 일단 행위의 발화자가 필요하고 그것을 받아줄 수용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바로 관찰자, 정확히는 관객의 위치다. 누가, 어떤 자리에서 이를 보고 있느냐에 따라서 웃음은 풍자와 해학이 될 수도, 조롱과 불쾌함의 찌꺼기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웃음의 발화자는 이것이 어디에 가닿을지 상상하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불씨를 당기는 일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후의 결과는 통제 바깥에 있는, 화학반응과도 같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그만큼 예민하고 섬세하여 위험한 작업이다. 문화권마다 수용 방식과 코드가 미묘하게 달라 이쪽에서는 세련되게 웃음을 던지는 것이 다른 쪽에서는 모욕적이고 불편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보편성으로 특수성을 덮어버릴 때 우리는 종종 관찰자의 존재를 망각하곤 한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와 계급의 모순, 시스템과 그 아래 깔린 인간의 본성을 풍자한 순도 높은 블랙코미디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부조리에 관한 테마를 꾸준히 탐구해온 창작자 중 한 사람인데, 이번 영화까지 묶어 ‘남성 부조리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첫 번째 영화인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5)이 인간의 본성의 밑바닥에 포커스를 맞췄다면 <더 스퀘어>(2018)에서는 시스템과 사회에 좀더 방점을 찍었다. 부조리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슬픔의 삼각형>은 굳이 말하자면 그 사이의 화학‘반응’을 기대하는 영화다. 요컨대 일정 부분 통제를 포기한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은 그만큼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웠고, <더 스퀘어>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스웨덴(나아가 유럽) 사회의 모순과 위선을 들춰냈다. 그에 반해 <슬픔의 삼각형>은 정교한 장치와 노골적인 무대를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린다. 이 순도 높은 화학 실험의 끝이 통렬한 반성과 성찰일지, 속내를 다 까발린 토사물에 대한 불쾌감일지는 어쩌면 당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갈릴 것이다. 풍자의 삼각형 잘나가는 인플루언서 모델 야야(샬비 딘)와 그의 연인인 남성 모델 칼(해리스 디킨슨)에게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는 <슬픔의 삼각형>은 총 3부 구성을 취한다. 1부는 모델계를 중심으로 주인공 칼과 야야를 소개하는 동시에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되짚는다. 2부에서는 부자들이 탑승하는 호화 크루즈를 무대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스템의 모순과 허상을 폭로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크루즈가 전복된 후 살아남은 8명이 무인도에 표류하는 이야기를 통해 시스템을 역전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관통하는 건 관계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사람과 사람 혹은 사람과 시스템의 충돌을 통해 시스템의 모순을 드러낸다. 1부에서는 사랑 싸움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2부에서는 거대하고 과장된 부조리극의 무대를 만들며, 3부에서는 원시사회로 돌아간다. 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서로 섞이지 않는 것들이 서로 충돌하여 불꽃이 튀기는 순간, 부조리의 실험은 시작된다. 1부의 모델계는 마이크로 단위에서 역전된 계급사회다. 남자 모델들은 3분의 1도 안되는 수입을 받으며 수시로 부당한 상황에 노출되는데, 백인 남성 모델인 칼은 성적인 조롱까지 감내해야 하는 최약자다. 패션쇼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칼은 패션계의 거물 여성들이 등장하자 도미노처럼 자리를 이동한 끝에 결국 뒤쪽 자리로 쫓겨난다. 그리고 화려하게 시작되는 패션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하는 주인공은 젊은 여성 모델 야야다. 압축된 이미지로 계급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를 시도하는 이러한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마치 우화를 그린 연극 무대처럼 특정 상황을 비틀어낸 무대와 이를 극단적으로 드러낸 이미지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자 목적이다. 서사가 다소 난잡하고 느슨해질 때도 이러한 밀도 높은 이미지와 상황들은 확실히 각인된다. 칼과 야야는 데이트 비용 문제로 다투는데, 칼은 돈은 훨씬 많이 벌면서 데이트 비용은 공평하게 내자는 야야가 불만이다. 야야는 야야대로 자신에게 기생하는 듯한 칼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업계에선 강자지만 전체적으로 볼 땐 언제 은퇴할지 모를 불안함에 시달리는 야야는 누군가의 트로피 와이프가 되어 안전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이에 칼은 자신이 성공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가 야야의 트로피 와이프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슬픔의 삼각형>을 관통하는 또 다른 주제는 마르크시즘이다. 철저한 자본주의 한 가운데에서 영화는 평등에 대한 화두를 꺼낸다. 사실 이 또한 모순의 장치로 각각 다른 관점에서 논해야 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한 무대로 끌어들여 그 안의 사람들이 충돌하도록 꾸미는 것이다. 여기서 이 영화의 두 번째 행동 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슬픔의 삼각형>은 좀처럼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있어선 안되는 것들을 무리해서라도 끌고와 물리적으로 뒤섞는다. 마치 바텐더의 셰이킹처럼. 그리하여 발생하는 구토와 같은 잔해들을 전시하며 이것이 본성이라고 강변한다. 개별 장치와 세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흥미로운데, 이 문화인류학적 실험이 늘 효과적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코미디라는 풍자의 무대를 경유하지만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코미디야말로 그 어떤 장르보다 예민하고 다루기 어려운 도구라는 점이다. 계급 피라미드를 역전시킨 트로이의 목마 이러한 난장판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2부 호화 요트 편이다. 인플루언서로 요트에 초대된 야야와 칼은 다양한 인간 군상과 대면한다. 요트는 폐쇄된 사회의 축소판이자 충돌을 위한 모순덩어리 화약고나 다름없다. 칼과 야야는 일종의 관찰자로서 이들 사이를 누비며 계속 ‘웃픈’ 상황이 연출된다. 기본적으론 자신의 지위에 따라 일종의 상징이 된 각 인물이 서로 충돌하며 끊임없이 마찰음을 내는 구성이다. 그렇게 아내와 애인을 동시에 데리고 배에 탄 비료사업 CEO 드미트리(즐라트고 부리치)의 등장을 기점으로 계급의 피라미드는 조금씩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부자 아내의 바람에 따라 직원들이 수영복을 갈아입고 바다에 줄줄이 뛰어드는 장면은 <슬픔의 삼각형>이 계급 피라미드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심심해진 부유층 여성은 문득 종업원에게 역할 바꾸기 놀이를 제안한다. “우리는 다 동등한 존재”라는 말이 계급의 꼭대기를 점한 자의 입에서 나올 때 그 발언은 위선과 조롱으로 채색되고, 관찰자인 관객은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즐겼으면 좋겠다는 말은 한창 노동을 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일말의 이해도 없는 폭력에 불과하다. 서서히 닥쳐오는 폭풍우와 함께 계급의 전복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배가 흔들릴 때 직원들은 승객들에게 음식을 먹는 것이 낫다며 과식을 권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속성에 대한 은유다. 이윽고 파티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먹은 음식을 게워내면서 구토로 범벅되는 이들의 모습은 자본에 의한 계급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절정의 장면이다. 존엄을 잃고 욕망에 휘둘린 끝에 개돼지의 형상으로 바닥을 기는 인간들의 모습은 가장 화려한 파티 한가운데에서 불편하고 역겨운 이미지를 불쑥 들이민다. 이처럼 호화롭고 과잉된 이미지를 삽화처럼 나열하던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이 난장판에 이르는 길 사이사이에 자신의 메시지를 성실하게 덧칠한다. 칸영화제에서 영화를 공개한 직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 영화는 마르크시즘을 영화 안에 잘 숨겨 미국에 그걸 전파할 계획으로 만든 ‘트로이의 목마’”라고 밝힌 바 있다. 농담과 진심 사이를 맹렬히 오가는 이 발언처럼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와 마르크시즘을 대립시키는 연극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호화 요트에서 기능적으로 최상위 계급인 선장 토마스(우디 해럴슨)는 파인다이닝이 싫다며 햄버거를 먹는 사회주의자다. 만찬 자리 마지막에 러시아계 CEO와 선장이 벌이는 토론은 마르크스와 레닌, 레이건과 마크 트웨인, 마거릿 대처와 케네디의 명언들을 가로지르며 가장 의미심장한 동시에 의미 없는 격론을 벌인다. 폭풍이 지나간 후 선장은 미국의 노동운동가 유진 데브스의 명연설을 떠들어대고 마치 신호인 양 해적선이 습격하여 배가 침몰한다. 3부는 배가 전복된 뒤 섬에 표류한 8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아이러니한 인류학 실험의 절정을 선보인다. 마치 원시로 돌아간 듯한 섬에서 생존자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계급을 벗고 또 다른 위계질서를 만든다. 섬에서 필요한 건 음식이고 생존자 중 유일하게 낚시를 해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사람은 청소부 아비게일(돌리 드 레온)이다. 자연스레 무리의 중심에 선 아비게일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역할을 나눠준다. 가장 하위계급이었던 청소부가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선 것이다. 이렇듯 <슬픔의 삼각형>은 과장된 상황을 통해 은폐된 계급성을 선명히 드러낸 후 그것을 역전시킨다. 자본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우열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차라리 계급에 종속된 인간의 본성을 해방하는 쪽에 가깝다. 그 꼴이 때론 섬뜩하고 때론 슬프다가도 대체로 역겹고 과장되며 우스꽝스럽다. 슬픔의 형태는 (아마도) 삼각형이다 영화의 제목인 ‘슬픔의 삼각형’은 적어도 세 가지 뜻을 내포한다. 1부에 오디션 캐스팅 디렉터들의 대사로 스치듯 언급되는 이 제목은 표면적으로는 뷰티업계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미간을 찌푸릴 때 나오는 눈 사이 주름을 뜻한다. 다음으로 계급 피라미드의 꼭짓점부터 하위계층으로 이어지는 삼각형을 반복해서 그린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칼과 야야, 그리고 필리핀 출신 청소부 아비게일의 관계를 상징한다. 칼과 야야는 연인 관계지만 경제적인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2부에서 칼과 야야가 방에서 사랑을 나눌 때 청소부 아비게일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이를 지켜보는 장면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후 3부에서 권력을 쥐게 된 아비게일은 칼에게 성적인 서비스를 요구하고 뒤집힌 계급 피라미드하에서 셋의 관계는 꼭짓점이 날카로운 삼각구도를 그린다. 똑바로 볼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뒤집으면 선명하게 보이는 마법.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여성과 남성, 부자와 빈자 등의 상황을 역전시켜 욕망의 단순한 민낯을 들이민다. 사실 탐색이랄 것도 없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노골적으로 토해낸다는 게 이 영화의 정체성이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계급에 대한 풍자를 일차원적인 상징으로 투영하여 관객의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려 애쓴다. 다만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인지는 미지수다. 감독은 마치 인간 사회를 해부할 기세로 달려들어 여러 상징과 풍자의 요소를 섞어놓는데 이 과정에서 전작과 비교하자면 몇 가지 단점마저 증폭된다. 우선 이 영화가 제시한 상황의 상상력은 제법 낯이 익다. 계급성에 대한 화두는 가깝게는 <기생충>(2019)이 떠오르고 3부의 고립된 섬이라는 상황은 리나 베르트뮐러 감독의 <귀부인과 승무원>(1974)부터 드라마 <로스트>, 희곡 <훌륭한 크라이턴> 등 여러 장르에서 이미 익숙하게 봤던 전개다. 자본주의 풍자극이라는 면에선 마르코 페레리 감독의 <그랑 부프>(1973)의 그림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위험을 상징하는 당나귀 울음 소리를 비롯해 전체적인 구성을 놓고 보면 <오즈의 마법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3부 구성으로 리듬감을 키우려 했지만 서사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점도 아쉽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강렬한 상황을 세팅해 이미지의 밀도를 높인 방식이 가진 한계였을까. 무엇보다 우화와 필요에 의한 상징으로 점철되다 보니 정작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계급성을 대표하는 상징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에 내적인 고뇌와 감정의 흐름이 외려 비인간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욕망의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영화가 살아 움직이는 욕망에 무관심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부조리 3부작의 첫 번째인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다시 환기하자면 웃음의 결을 최종 결정하는 건 관찰자의 위치다. <슬픔의 삼각형>은 스스로 밝히듯 백인 남성의 시점에서 아이러니를 증폭한다. 덕분에 허무주의와 계급 해체를 넘나드는 농담이 날카롭게 다듬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소외와 대상화가 이뤄진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영화가 또 다른 (지적)계급의 삼각형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좋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것 자체도 풍자와 자기반성의 일부일 수 있겠다. 크고 작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삼각형>이 폭로하는 시스템의 부조리와 욕망의 민낯은 놀라운 구석이 있다. 기쁨, 분노, 행복, 혐오, 공포, 체념, 허무 등 인간사를 수놓는 여러 감정의 무지개가 스크린에서 각자의 형태를 드러낸다. 그중 슬픔에 모양이 있다면 아마도 삼각형이리라. 서로 원하고 원망하며 팽팽하게 잡아당겨 대치하는 욕망의 삼각형. 안정과 불안,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따라 당신이 선 꼭짓점의 자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리뷰] ‘사슴의 왕’, 낯익은 볼거리에 정확한 메시지, 사랑 앞에서는 운명도 거스를 뿐

츠오르 제국과 아카파 왕국은 합병한 뒤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 적어도 아카파를 침략한 츠오르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반면 아카파의 수뇌부는 오래전 츠오르 군대에 치명타를 입힌 질병을 불러와 츠오르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다. 이른바 ‘아카파의 저주’로 칭해진 전염병 미차르(흑랑열)를 의도적으로 퍼뜨려 아카파의 위상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한편 성스러운 의사 홋사르(다케우치 료마)는 역병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분투하다 미차르의 습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츠오르 소금 광산에서 노역하던 반(쓰쓰미 신이치)이 그 주인공. 홋사르는 미차르의 치료법을 품은 반을 찾아나서고, 부모를 잃은 소녀 유나와 함께 광산에서 도망친 후 작은 마을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반과 조우한다. <사슴의 왕>은 우에하시 나오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쿠로코의 농구> <하이큐!!>의 제작사인 프로덕션 I.G가 제작을 맡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터가 참여한 만큼 작화의 높은 완성도가 눈길을 끈다. 광활한 자연 풍광과 동물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는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겹쳐 보인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기 위해 저항하는 이들의 모습도 감동적이다.

[인터뷰]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김수정 작가, 어릴 때 봤던 둘리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기를

인터뷰가 예정된 스튜디오로 김수정 작가가 들어선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의 목소리가 크게 터졌다. 일면식 없는 사이건만 우리는 모두 그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는 듯 가깝고 친근하게 굴었다. 일면 맞는 말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그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자랐다. 비눗방울로 찐빵을 빚고, 무지개로 줄넘기를 하고, 선풍기를 타고 밀림으로 떠나는 여정엔 언제나 둘리가 함께였다. 마흔번의 해가 지나는 동안, 김수정 작가의 시그니처 헤어스타일은 바짝 짧아졌고 둘리는 진한 초록색에서 연두색으로 변했다. 빠른 변화가 역동적으로 이어진 세상에서 ‘길동씨’라는 존칭을 잃지 않는 김수정 작가를 보면서 어떤 세계는 유리병에 담겨 그대로 보존되고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 1996년 개봉한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이 한국영상자료원 영화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리마스터링되었어요. 이 소식을 처음 전달받았을 때의 소회가 궁금합니다. = 사실 작업 초반까지는 이 프로젝트에 관해 전혀 몰랐어요. 리마스터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연락을 받아서 처음엔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고요.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스터 필름으로 영화를 제작한 뒤에 필름이 손상되지 않도록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을 요청했어요. 시간이 흘러 필름을 재발견하면서 프로젝트 작품으로 선정한 게 아닐까 싶어요. 어쨌든 둘리나라 입장에선 디지털화된 작품을 볼 기회여서 좋았어요. 감사해요. (웃음) - 리마스터링 작업 과정 중 어떤 점을 함께 논의하셨나요. = 색감 구현을 특히 신경 썼어요. 노란 계열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 것 같아 작은 아쉬움이 남긴 해요.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를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세세한 부분을 더 신경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물론 전체적으로는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 리마스터링 버전 중 어떤 장면에서 그 변화가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시나요? 얼음별에 막 도착한 둘리 친구들의 보트가 빙하 사이를 날아다닐 때 입체적인 변화가 느껴지기도 했어요. = 정확해요! 바요킹과 둘리 친구들이 격전을 치를 때 바요킹 일당이 행진하며 소동을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1996년 당시 그 작업 과정이 굉장히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요소 하나하나를 밝게 하니까 입체감이 훨씬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우주 신은 원래 상당히 어두웠어요. 리마스터링 과정을 통해 색감이 더 화사해지면서 그림도 더 선명하게 보이더라고요. 이런 변화를 발견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어요. -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아기공룡 둘리> 40주년 기념해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이 말 안에 담긴 작가님의 속마음이 궁금합니다. = 40년이라는 세월은 정말 살처럼 지나가는 시간이에요. 7살 때 둘리를 처음 본 아이는 이제 47살의 중년이 되었겠죠. 1983년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아기공룡 둘리>가 첫 연재되고 1987년 KBS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됐다가 1996년에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극장판이 나오고 2009년 SBS에서 가 나왔어요. 그다음에 바로 이어 두 번째 극장판을 준비하려 했는데 중간에 프로젝트가 무산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죠. 둘리의 시간은 나름의 흐름을 만들며 잘 흘러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게 멈춰버린 거예요. 올해 들어서며 주변에서도 많이들 물어보셨어요. “<아기공룡 둘리> 40주년 때 뭐 안 하나요?” 그러면 저는 “하긴 뭘 해요~ 50주년이면 생각해보죠” 하고 답했고요. (웃음) 리마스터링프로젝트도 만 2년 전에 시작했거든요. 몇몇 영화제에서 미리 선보였는데 반응이 꽤 괜찮았어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재개봉 이야기가 나왔고, 공교롭게 40주년에 딱 맞춰진 거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는 둘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관객에게 죄송하더라고요. - <아기공룡 둘리> 인물들에 대해 더 이야기해볼게요. 둘리 시리즈에는 어린이들의 저항심이 중요한 역할을 해요. 극장판에서도 조용히 있으라는 길동의 말에 둘리와 친구들은 나름의 작전을 모색하고, “나를 따르라”는 바요킹의 말에도 쉽게 굴하지 않아요. 이처럼 ‘어른이 만든 규제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어린이’를 주요하게 다룬 이유가 궁금해요. = <아기공룡 둘리>에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연령대의 인물이 나와요. 다양한 층위의 관점과 생각을 이야기로 흡수시킬 때 가장 중요한 건 편향된 시각으로 캐릭터를 그리지 않는 거예요. 예를 들어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을 때 둘리와 길동씨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아이는 아이답게 행동하고 길동씨는 어른의 입장으로 생각할 테니까요. 그런데 아동물이라고 해서 어른도 아동스럽게 그리는 경우가 있어요. 냉정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캐릭터가 할 수 있는 대처법을 그려줘야 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둘리는 너무나 아이답죠. 자신을 제어하려는 어른의 말을 무작정 따르거나 순응하지 않으니까요. 아이들은 자신이 무언가로부터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고 있어요. 자기 나름의 생각과 판단도 있고요. 그래서 둘리가 또래 어린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 같아요. 다만 이 어린이들이 점점 어른 세대로 진입하면서 길동씨에게 서서히 이입하고 있죠. 처음에는 자신도 둘리처럼 놀고 싶고 둘리처럼 행동하고 싶었는데 어느덧 그게 어려워 보이는 거예요. 아이들의 끊임없는 요구와 말썽이 힘겹잖아요. 그래서 길동씨를 더 응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상황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변한 거죠. - 극장판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기념해서 쓴 손편지를 보았어요. ‘오랜 시간 울고 웃으며 둘리와 함께했던 순수한 유년의 시간을 밀어내고, 우리 가슴속에는 어느새 길동씨가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략) 길동씨를 이해하면 어른이 된 거라고요? 정말 그럴까?’라는 질문을 남겼어요. = 길동씨를 이해한다고 내가 어른이 된 건 아닐 거예요. 오직 관점이 변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길동씨의 피로를 이해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동심을 계속 가져갔으면 좋겠다고요. 어릴 때 봤던 둘리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면 좋겠어요. 천진하고 낙천적이고 때에 따라 정의를 위해 저항도 하는 그런 순수한 모습을 잊지 않길 바라요. - 작가로서 이런 독자의 변화가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나요. = 변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니까요. 현실은 현실이죠. 하지만 각자 마음에 저장된 아이다움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 바람이에요. - 사실 유아동 애니메이션에서 둘리만큼 삐딱한 캐릭터는 흔치 않거든요. (웃음) 어떤 면에서 둘리는 어린이 시청자에게 과감하게 ‘아니요, 싫어요’라고 말하는 레퍼런스가 될 것 같아요. = 본래 둘리를 그리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하도 어른들이 ‘아니요’,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제어하고 통제하잖아요. 그래서 그것이 틀리다는 것을 보여줄 인물을 찾아서 역할을 맡긴 거죠. 80년대는 만화를 향한 심의와 검열이 정말 심했어요. 그 심의와 검열도 대부분 어른의 입장과 관점에서 이뤄졌고요. 그런데 제가 본 어린이들의 세상은 너무 달랐어요. 꿈도 꾸고, 실수도 저지르고, 싫다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서 성장하죠. 말 잘 듣고 예의 바른 아이를 만들기 위해 그 성장 자체를 제어해버리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이미 어른이 돼버린 이들의 시선이잖아요. 그래서 심의와 검열을 피하려고 사람이 아닌 동물로 그렸고, 아이들의 감성을 그대로 삽입했어요. - 심지어 반려동물이 아닌 공룡을 선택하셨죠. = 맞아요. 게다가 공룡은 인류가 무서워하는 동물이에요. 인간이 쉽게 통제할 수 없죠. 그런데 이 안에는 변치 않는 전제가 있어요. 어떤 종이든 아기들은 다 예쁘다는 거예요. 둘리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 대부분이 공룡을 무서운 동물로만 인식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육식동물인 케라토사우루스가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반전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 극장판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 인상적인 대사가 있어요. 바요킹 부하들과 싸우던 도우너와 공실이가 “해적 독재 타도!” 하고 외쳐요. 어른이 아닌 어린이들에게 이 대사를 주었어요. = 당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려 했어요. 그런데 둘리를 통해 너무 진지하게 연출하면 만화의 맥락과 안 맞아서 아이들이 생각해볼 만한 힌트 정도로 그려냈죠. 어린이들이 독재가 무엇인지, 바요킹의 행동 중 무엇이 독재적인지 돌이켜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극 안에서 영혼들은 모두가 평등한데 바요킹이 계급사회를 만들어요. 모든 것을 무력을 통해서만 얻어내는 군주 독재죠. 아이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아니라 나름의 사회적 욕구가 있다는 속내를 비추고 싶었어요. - ‘둘리 시리즈’에는 사회상을 반영한 블랙코미디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사회를 비판하는 자세를 만화가의 미덕이라고 여기기 때문인가요. = 작가마다 다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어려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어요. 시쳇말로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죠. 그러다 보니 사회적 불평등이나 불공정한 것들을 저도 모르게 표현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실질적인 아픔을 알아차리며 지냈으니까요. 만약 제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그런 생각이 부족했을 수 있겠죠? (웃음) - 둘리의 어린이성을 수호하기 위해 최소한 지키려 한 작가님만의 약속이 있다면요. = 둘리 만화가 연재되고 나서 처음으로 굿즈가 나왔어요. 카드나 엽서 같은 팬시 제품과 아이스바 같은 것들이요. 캐릭터 상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교육적인 면이었어요. 둘리를 친구처럼 여기는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것은 절대 만들지 않겠다는 걸 철칙으로 여겼거든요. 한번은 한국담배인삼공사(KT&G)의 전신인 전매청에서 연락이 왔는데, 청소년을 위한 순한 담배를 만들어서 마이콜을 모델로 세우자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니까 차라리 폐해가 덜 가는 모델을 만들자는 내용이었어요. 그때 너무 놀랐죠. 발상 자체가 놀라웠고, 마이콜을 그 제품의 모델로 쓰고 싶다는 말에도 굉장히 당황했어요. 사실 그 당시 저도 담배를 많이 피웠거든요. (웃음) 그래도 절대 안된다고 했죠. 또 얼마 전에는 둘리를 마약 금지 홍보대사로 쓰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물론 금지 홍보대사지만 그냥 둘리가 그런 것들과 함께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둘리를 순수한 친구 그 자체로 보호하고 싶어요. - 캐릭터를 지켜내는 게 작가의 중요한 의무이기도 하겠네요. = 막연한 애정으로만 보호할 수 없어요. 이 캐릭터가 가진 이미지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죠. 지금까지 둘리와 40여년을 함께하면서 알게 모르게 제 안에서 룰이 만들어진 거예요. - 영화 <기생충>을 인용한 둘리 패러디 포스터가 등장하기도 했어요. 누군가는 길동의 집에 얹혀 사는 둘리와 친구들을 기생충으로 생각했던 듯해요. 실제로 ‘민폐 여부’를 세세하게 점검하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면 ‘호구’라 부르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둘리의 이야기를 다시 보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둘리가 처음 만들어진 40년 전에는 집집마다 형제가 많았어요. 누군가가 상경해 성공하면 육촌까지도 더부살이하는 경우가 꽤 많았고요.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어요. 그러니 둘리가 길동씨 집에 함께 살게 된 것도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일상적인 풍경이죠. 심지어 둘리는 아기잖아요.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길동씨가 혼내면 집 밖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하고 엄마를 그리워하기도 하고요. 그런 모습을 길동씨가 보고서 내치는 게 더 이상하죠. 길동씨의 개별적인 성격과 별개로 당시의 타인을 포용하던 사회적 분위기라 가능했어요. 그런데 또 현대사회라고 무조건 냉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에 비해 요즘엔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분위기잖아요. 애완동물이라 하지 않고 반려동물이라고 하고요. 그래서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에서 길동씨도 같은 식탁에서 둘리가 밥 먹는 걸 못 견뎌하거든요. (웃음) 요즘엔 그렇지 않죠. 그래서 어쩌면 지금 길동씨와 둘리가 만났으면 더 다정했을지 몰라요. 40년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이 오직 쌀쌀맞게만 변하진 않았거든요. - 다른 캐릭터를 더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마이콜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마이콜은 사실 성인 아닌가요? 왜 자기 또래가 아닌 어린이들과 놀고 있는 걸까요. = 성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웃음) 그 시대에 전자 기타를 치고 다닐 정도면 있는 집 자식이거든요. 통기타도 구하기 힘든 시대였으니까요. 사실 마이콜이란 캐릭터를 설정할 때 마음속으로 스무살이라고 생각하긴 했어요. 순수할 때죠. 완전한 성인도 청소년도 아닌, 어중간한 시기잖아요. 그래서 둘리에게나 길동씨에게나 이래저래 휘둘려요. 제가 생각한 스무살이 그랬던 것 같아요. 아직 사회에 나가기 전이지만 아이는 아니어서 설익은 부분이 있는 존재들이요. 그래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시종일관 해맑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모든 캐릭터 통틀어 마이콜이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해요. - 그 ‘순수할 수 있음’의 근원 중 부유한 가정환경도 있겠죠. = 그렇죠.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막연히 유명 스타가 되고 싶어 하잖아요. - 그런데 또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눈치 보고 상황마다 민감해 보여요. = 서커스단에서 자랐잖아요. 사회 경험이 있는 어린이다 보니 상황 판단이 빠르고 눈치를 많이 보죠. 그에 반해 도우너는 완전 막무가내예요. 한번 입력된 걸 잊지 못해요. 길동씨를 주야장천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면에서 비롯한 거죠. 둘리는 이 두 인물의 성격을 각각 갖고 있어요. 그래서 둘리가 보편적인 아이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도우너나 또치의 인물 설정에 비하면 특별할 게 없거든요. 그래서 둘리에게 초능력을 주었죠. 너무 평범하니까. 여기에 희동이까지 합류하면서 이 꼬맹이 악당들의 조화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어요. - 극장판의 엔딩은 KBS TV판과 다른 슬픔을 지녔어요. TV판에서는 희동이 때문에 엄마와 억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당시 희동이에게 질타의 화살이 돌아가기도 했는데요, 극장판에서는 지금은 엄마와 헤어지지만 언젠간 다시 만날 기약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면서 어느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아요. 두 모자가 이별할 충분한 시간을 주기도 하고요. = TV판이 방영된 당시에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스토리 진행에 있어 둘리 모자의 이별은 필연적이에요. 희동이가 둘리를 데려오지 않으면 둘리는 영영 그곳에 있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희동이 잘못이 아니에요. 오히려 작가가 못된 거죠. (웃음) 또 희동이가 따르는 건 둘리가 유일하기 때문에 이 둘이 떨어져 살 수 없기도 하고요. 극장판에서도 엄마와 공실이가 머무는 곳이 죽은 자만이 살아가는 영혼의 별이거든요. 엄마와 둘리가 함께 살려면 더 큰 전제가 필요하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만 해요. - 불혹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라고 해요. 둘리의 불혹을 기점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면 지천명은 어떻게 맞이하고 싶으신가요. = 둘리가 지천명을 맞이할 때까지 여러분 가슴속에 둘리가 여전히 살아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둘리에 대한 기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겠죠. 아마 둘리 나이 47살 즈음부터 실행을 해야 50살에 짠 하고 기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영상 작업은 저 혼자만 마음먹는다고 쉽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자본과 조직, 시스템이 필요하거든요. 조금 더 구현 가능성이 높은 출판으로 먼저 시작하고 애니메이션이든 시리즈든 그다음에 판단할 수 있을 듯해요. 한국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영상물을 만든다는 게 정말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게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해요.

[기획] 올해의 칸영화제 키워드,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올드보이 총집결 올드보이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76회 칸영화제 경쟁작은 칸의 가족, 단골 손님들이 한번에 집결한 모양새다. 일단 21편의 경쟁 후보 중 <몬스터>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 브라이터 투모로>의 난니 모레티, <디 올드 오크>의 켄 로치,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의 누리 빌게 제일란, <퍼펙트 데이>의 빔 벤더스까지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의 신작만 5편이다. 특히 86살의 켄 로치는 역대 최다인 15번의 진출 기록을 세웠다(난니 모레티는 8번, 빔 벤더스는 10번째 칸 경쟁부문 초청이다). 무엇보다 2006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17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황금종려상을 두번 수상한 만큼 최초의 3관왕 감독이 될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그 밖에도 84살의 이탈리아 노장 마르코 벨로치오의 <키드냅>,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라스트 서머>, 핀란드영화의 대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폴른 리브스> 등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이 없다. 올드보이들은 경쟁부문에서만 활약하는 게 아니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을 들고 칸을 찾는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1976년 <택시 드라이버>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1998년 심사위원장도 역임했다. 아마도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중 가장 긴 상영시간(3시간46분)으로, 1920년대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과정을 다룬다. 15년 만에 돌아온 <인디아나 존스>의 속편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도 칸에서 최초 공개된다. 비록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임스 맨골드에게 연출을 넘겼지만 80살의 해리슨 포드는 여전히 건재하다. 반갑거나 새롭거나 오랜만에 돌아온 반가운 얼굴과 새로운 면면도 만만치 않다. 경쟁부문에선 <언더 더 스킨> 이후 무려 9년 만에 조너선 글레이저가 신작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돌아왔다. 마틴 에이미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근을 배경으로 나치 장교와 유대인 여성 사이의 위험한 로맨스와 복잡한 삼각관계를 그린 파격적인 작품이다. 경쟁 후보 선정 당시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더욱 기대를 모은다. 데뷔작 <그린파파야 향기>(1994)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베트남계 프랑스 감독 트란 안 홍도 <포토푀>로 오랜만에 칸을 찾았다. 1885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미식가와 요리사간의 사랑을 그린 영화로 쥘리에트 비노슈와 브누아 마지멜이 <세기의 아이들> 이후 24년 만에 호흡을 맞춘다. 한편 프랑스의 신예 라마타 툴라예 사이는 경쟁부문에서 유일한 장편 데뷔작 <바넬과 아다마>를 선보인다. 세네갈 북부 외딴 마을에서 살고 있는 젊은 부부가 마을의 관습과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저스트 필리포 감독의 <애시드>도 주목할 만하다. 2020년 첫 장편 <라 누에>로 칸 비평가 주간에 선정된 바 있는 젊은 감독은 성공적인 데뷔의 에너지를 이어받아 완성한 두 번째 작품을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세션에 공개한다. 기후 문제와 관련한 공포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2018년 자신의 단편을 장편화했다. 재능 있고 젊은 영화인을 발굴하기 위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는 취지에 걸맞게 첫 장편영화가 8편이 초청됐다. 몰리 매닝 워커의 <하우 투 해브 섹스>, 델핀 델로겟의 <잃을 게 없다> 등이 화제작으로 거론되는 가운데 홍사빈, 송중기 배우가 주연을 맡은 김창훈 감독의 <화란>도 소개된다. 여성과 다양성 vs 백래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여성감독들의 작품이 부족하다는 건 꾸준히 지적되어왔다. 올해는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경쟁부문 후보 21편 중 여성감독의 영화가 7편이 선정되어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알리체 로르와커의 <라 키메라>, 예시카 하우스너의 <클럽 제로>,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포 도터스>, 카트린 브레야의 <라스트 서머>, 카트린 코르지니의 <홈커밍>, 쥐스틴 트리에의 <아나토미 오브 어 폴>, 라마타 툴라예 사이의 <바넬과 아다마>가 그 주인공이다. 칸 공식 포스터의 주인공이 카트린 드뇌브였고 그의 딸 키아라 마스트로이안니가 개폐막식 사회를 맡는 등 크고 작은 부분에서 공을 들인 것이 감지된다. 심지어 칸의 첫 여성집행위원장으로 프랑스 워너브러더스의 전 대표인 이리스 크노블로흐가 취임했다. 하지만 일련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선택으로 논란을 자초하기도 했다. 우선 개막작인 마이웬 감독의 <잔 뒤 바리>는 배우 조니 뎁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가정 폭력 혐의로 오랜 법정공방을 치른 조니 뎁은 지난해 앰버 허드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재판에서는 승소했지만 ‘아내 폭행범’이라는 지칭을 둘러싼 영국 매체 <더 선>과의 공방에서는 패소했다. “영화계가 성 범죄자들을 전반적으로 감싸려 한다”는 프랑스 배우 아델 에넬의 비판을 비롯하여 칸이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일각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개막식 전날 15일 기자회견에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리모는 “난 배우로서 조니 뎁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며 법적 테두리 안에서 문제가 없는 한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명확한 입장을 고수했다. 고다르, 클래식, 시네마 vs <더 아이돌> 칸영화제는 (당연하게도) 극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을 우선시해왔다. 드레스 코드를 비롯한 온갖 거추장스러운 격식은 영화를 향한 존중과 예의의 고지식한 표현이기도 하다. 2018년 넷플릭스 등 OTT와 갈등을 빚으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를 베니스국제영화제에 내주기도 했다. 이러한 칸의 고집은 칸 클래식 부문에서 빛을 발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무네카타 자매들>(1950), 만 레이 감독의 <리턴 오브 리즌>(1923) 복원판,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스펠바운드>(1945) 등 고전 걸작을 다시 만날 수 있는 클래식 부문의 정점은 장뤽 고다르의 유작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영화의 영화 발표: 퍼니 워즈>다. 과거의 영화 촬영 장소로 다시 돌아가 진실한 언어의 변형과 은유를 추적하는 20분가량의 짧은 이 단편은 지난해 작고한 장뤽 고다르 최후의 영화 제스처라 할 만한다. 2018년 칸영화제 특별황금종려상을 수상하기도 한 장뤽 고다르에 대한 존경과 헌사를 담은 프로그램은 칸영화제의 본질을 증명한다. 동시에 2018년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는 칸영화제가 있다. 비경쟁부문 상영이 확정된 샘 레빈슨 연출의 미국 드라마 <더 아이돌>이다. 2022년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이 마 베프>를 비롯해 지난 몇년간 칸영화제는 TV시리즈에 문을 열어왔다. 올해도 이런 흐름이 한층 강화되는 가운데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한 이리스 크노블로흐의 행보에 이목이 쏠린다. 오랜 기간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프랑스 지사에서 근무한 그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사업, 특히 대형 할리우드 스튜디오들과 강력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한 우 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기획] 개막작, 마이웬 감독의 ‘잔 뒤 바리’

마이웬과 잔 뒤 바리. 올해 칸영화제 개막작을 지탱하는 두 인물은 꽤 닮아 있다. 한국 관객에게 친숙한 이름들은 아니지만 그 세부를 들여다보면 대단히 프랑스적인 두 존재의 절묘한 만남이다. 2011년 영화 <경찰들>로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마이웬 감독은 여성배우로 살아간다는 것의 리얼리티를 다룬 <여배우에 관한 모든 것>, 자신의 알제리계 유산을 찾아떠난 등을 만든 재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하다. <잔 뒤 바리>는 그의 첫 시대극이자 과감한 시각적 스펙터클에의 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감독이자 주연배우를 겸한 마이웬이 파트너로 선택한 인물이 전 부인의 폭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배우 조니 뎁이라는 사실도 올해 개막작의 주효한 첫인상임을 부정할 수 없다. 개막작 상영 전, 레드 카펫 현장에서 개막작 스타로서의 영예를 온몸으로 누리는 중계화면 속 조니 뎁을 바라보는 상영관의 공기는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작진이 현장에 참석하는 뤼미에르 극장을 제외한 나머지 상영관들에서는- 개막작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이례적으로- 상영 시작 전후로 박수가 나오지 않았다. 제3의 화자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는 <잔 뒤 바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존재감 뒤로 가려졌던 잔 베쿠(뒤 바리 부인)의 신화를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시 쓴다. 마이웬은 바람에 나부끼는 잔의 치마폭을 부여잡고 당대의 정치적 맥락을 사뿐히 건너뛴다. 대신 그 자리에는, 태초부터 순수와 정열의 피를 갖고 태어난 어느 죄 없는 여성의 존재에 대한 찬미가 깃든다. 요컨대 <잔 뒤 바리>는 10대 시절부터 오직 사랑을 위해 존재하면서 시대와 무심히 불화했던 한 여자의 일대기로서 로맨티시즘에 충실한 영화다. 문란함을 이유로 수도원에서 쫓겨난 요리사의 딸 잔은 파리에서 기욤 뒤 바리 백작의 파트너가 되고, 이후 고위급 정계 인사들 다수의 연인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베르사유에 입성하게 된다. 퐁파두르 부인이 죽은 이후 실의에 빠져 있던 루이 15세는 곧 잔을 사랑하게 된다. 루이 15세의 마지막 공식적 정부로 알려질 운명인 잔은 뒤 바리 백작과 결혼한다. 국왕과 사랑하려면 귀족이 되어야 하기에 우선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시작에 불과하다. 왕에게 절대 등을 보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쳐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경악한 잔이 궁정 비서에게 묻는다. “이건 너무 그로테스크한 거 아니에요?” “아니요. 여긴 베르사유입니다.” 베르사유에 예외와 일탈을 더하기 시작하는 잔 뒤 바리의 시간이 펼쳐지고, 영화는 시간의 더께가 쌓임에 따라 그 전성기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과정도 내밀하게 들여다본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왕과 정부의 사랑은, 어떤 관계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떤 화려함도 가려주지 못하는 인간 각자의 외로움에 관한 문제로 번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스펙터클은 일련의 베르사유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사치와 부조리의 향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야 했던 어느 연인의 애틋한 애착 관계로부터 나온다. 프랑스 언론들은 대체로 호의적이고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마이웬의 대담한 나르시시즘이 성공했음을 인정하는 반응이 대다수다. 매 숏의 중심에서 살아 숨 쉬는 마이웬은 장면을 시종 장악하면서 객석에 유머, 생동감, 애절함을 전염시킨다. 그 자기 중심성으로 인해 주변부 캐릭터들은 종종 프레스코화의 배경 인물로 전락하고 말지만 주인공이 움켜쥔 정열과 서정의 힘이 단점을 상쇄한다. 18세기 시대극에 적용된 현대적인 미술과 의상을 보는 재미에 더불어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역동적이고 대담한 화면의 구도, 그리고 움직임이다. 프랑스 역사의 상징적인 인물들을 정치적 격동으로부터 분리한 이 영화가 풍광을 활용하는 방식은 잔 뒤 바리, 루이 15세, 나아가 마리 앙투아네트까지도 덧없는 시간의 평범한 희생자로 만들면서 기묘한 감흥을 남긴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는 “이 영화의 중요한 미덕은 먼지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삶은 순환하고, 우리는 그 속에 있다”라는 평을 남겼다. 한편 <잔 뒤 바리>는 강한 정념의 보호 아래 미소지니적인 여성 묘사를 피하지 않으며, 이제는 시네마의 유행에서 한 걸음 물러난 프랑스영화의 고전적 낭만과 권위에 대한 복권의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숭배하는 뤼미에르 극장에 더없이 적합한 영화적 환영일 수도, 혹은 그보다 거대하고 복잡한 백래시의 흔적일 수도 있다.

[기획] 윤성호, 박동훈, 김소형, 한인미, 최하나, 송현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여섯 감독과의 인터뷰

-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윤성호 감독에게 먼저 질문하고 싶다. 원래 서독제에서 윤성호 감독에게 먼저 제안을 한 것으로 아는데, 결과적으로 다섯명의 감독들과 같이 작업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윤성호 서독제가 개막식마다 옴니버스영화를 만드는데 그 전통을 잇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다. 예산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차라리 이걸 핸디캡으로 활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6팀을 섭외해 팀당 10분 안팎의 에피소드를 반나절 안에 찍는다고 하면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장편 완성이 가능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장편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들만 모시려 했다. 아닐 경우 야심을 품고 이 작품에 모든 걸 갈아넣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제한된 상황에서 작품을 완성할 만큼의 노련함과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길 바랐다. 그런데 김소형 감독은 독립영화계의 아이돌이라 할 만큼 그가 연출한 단편 <우리의 낮과 밤>을 인상 깊게 봤고,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의 각본을 쓴 송현주 감독은 서독제에서 먼저 함께 작업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주셔서 함께하게 됐다. - 윤성호 감독이 제시한 핸디캡(하나의 신, 하나의 장소, 두 사람의 대화, 반나절의 촬영)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 참여를 결심하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한인미 핸디캡 때문에 고민했지만 결국 그것 때문에 하게 됐다. 장판을 찍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였는데 작품의 사이즈가 작아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어서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생각만큼 작업이 녹록진 않았다. (웃음) 김소형 순발력이 부족해서 이런 프로젝트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됐는데, 처음 제안받았을 때 곧바로 떠오른 에피소드가 있어서 잘 발전시켜보면 재밌게 할 수 있겠더라. 마침 졸업하고 뭔가를 찍고 싶기도 했고, 참여하신 다른 감독님들의 작업도 궁금했다. 송현주 못할 것 같다고 여러 번 고사했다. 윤성호 감독이 말한 ‘모든 걸 갈아넣는 사람’이 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촬영 시간, 스탭 등의 조건에 전부 제한을 둘 예정이라 하셨고 그럼 잘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싶어 도전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최하나 나 역시 처음엔 이게 가능한 조건일까 궁금했다. ‘돈 없으면 영화 찍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오히려 ‘돈이 없으면 이렇게 찍을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며 핸디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보자는 윤성호 감독의 얘기에 수긍이 갔고, 정말 시간 내에 깔끔하게 마무리돼서 만족스러웠다. 박동훈 개인적으론 이 핸디캡이 오히려 이 프로젝트만의 매력이라 여겨졌고, 한번 정면으로 돌파해보고 싶었다. 반나절 만에 촬영하는 게 걱정이 들지 않았던 게 요즘 근무시간에 맞추려면 빠르게 진행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 현장 상황이 크게 달라질 거라 보진 않았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6개의 주제들 - 노조 문제, 지역 차별, 남성 혐오, 환경문제, 직장 성추행, 동물권 등 각각 다른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는 게 흥미롭다. 어떻게 주제를 골랐고 관객에게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나. 한인미 원래 자전적인 스토리로 많이 작업해온 터라 고민이 됐는데, 그때 주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육아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기 버거운 워킹맘과 워킹맘의 이른 퇴근으로 인해 종종 일을 도맡는 싱글 직원. 두 친구의 상반된 상황에 공감이 갔고, 이들을 모델 삼아 회사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상했다. 그런데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성추행 이야기를 빼놓고 직장 생활을 논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성추행 문제까지 포함해서 극 중 인물들의 관계를 꾸렸다. 김소형 현재 반려고양이 국수, 춘장이와 살고 있다. 둘째 춘장이를 데려왔을 때 예상보다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아 당황했었다. 국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온전히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을이 병을 밀어낸다’는 프로젝트의 전체 주제를 들었을 때, 인간의 이해관계와 상황에 맞춰 고양이의 의도를 짐작하는 상황을 그려보면 괜찮겠다 싶었다. 국수가 직접 작품에 등장했는데, 낯선 이들이 촬영을 위해 집에 방문했고 결국 국수가 괴로워하는 상황을 만든 것에 미안함을 갖고 있다. 그래도 국수가 연기를 잘한 만큼 관객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윤성호 <프롤로그>는 5년 전 민주노총의 의뢰로 제작한 단편으로, 대기업 직원과 하청업체 사장의 대화를 그린다. 원래 작품에 포함할 생각은 없었고 가이드 영상으로 제공했었는데, 다섯 감독의 작품이 아슬아슬하게 1시간을 넘지 못했다. 새로 누군가를 섭외하기엔 여러 제약이 있어서 결국 <프롤로그>란 제목으로 맨 앞에 추가했다. 지난해만 해도 <프롤로그>를 촬영할 때와 노동환경이 많이 달라서 극의 내용과 맞지 않다고 여겼는데, 갑자기 올해 ‘근로 시간 69시간’, ‘노조 탄압’ 같은 문제들이 대두되는 걸 보면서 오히려 더 시의적절한 논제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송현주 종교로 인해 결혼을 망설이는 커플의 대화 때문에 종교가 주제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내가 하려는 건 환경 이야기였다. 작품 주제를 정할 즈음 결혼했는데 물욕이 강해 청첩장도 초대 인원보다 많이 찍고 쓰던 가전제품들도 다 바꾸려 했었다. 남편이 ‘아직 멀쩡한데 굳이 새 거 살 필요 있냐’고 할 때 ‘나 좋자고 사는데 왜 자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했고, 그때 깨달았다. 그린피스 같은 환경단체를 지지하면서도 일상에선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자기비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연출했다. 최하나 2021년 제안을 받았을 당시에 내게 가장 깊이 남은 사건이 남성 혐오 논란이었다. 그 상황 자체가 코미디라 느꼈고, 이에 관해 빠르게 대본을 쓸 수 있겠더라. 그런데 영화제를 돌고 개봉 준비를 하면서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2030 여성들에겐 자기 검열이 심해질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윗세대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모른다. 이 단편을 보고서라도 사태에 관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동훈 영화 대사로도 나오는데, ‘영화 공부하러 유학 가서 헛짓거리한 애’가 나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당시 내가 ‘다행이네요’라고 말하자, ‘전라도세요?’라고 묻는 이들이 꽤 많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80년대부터 이미 지역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건 상식과 같았는데도 해외라는 장소적 특성의 영향이었는지 지역차별 발언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언젠가는 광주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이번 작품에 그 바람이 반영됐다. 긴장하지 않으면 흉한 차별에 동조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스산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 준비할 때 해당 주제에 관한 자료와 대중의 반응 등 어떤 조사 과정을 거쳤나. 최하나 아마 내가 가장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지인들한테 시나리오 피드백을 받으며 ‘혹시 이걸로 공격을 받게 될까’ 하고 물었다. 다들 당연하다며 각오한 거 아니었냐고 반문했다. ‘허버버법’이란 의성어 대신 ‘쭈왑쭈왑’ 등으로 바꾸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도 받았다. 그날 밤에 우울한 마음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하면서 ‘이런 영화도 못 만들 거면 그냥 어디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윤성호 감독님에게 이게 다른 감독님이나 서독제에 폐가 될 것 같냐고 물으니 ‘그런 일이 발생해도 같이 싸워줄 사람들이니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걸 만들라’고 하셨다. 큰 힘을 받았고,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든 쫄지 말아야겠다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한인미 캐릭터의 모델이 된 친구들을 다시 만나 직장에 관해 세부적으로 물었고 결혼과 출산, 출산 이후 달라진 업무 환경과 상황 등에 대한 의견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직장인의 애환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성추행을 경험한 비율이 생각보다 높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얼마나 평범한 사람들이 이같은 일을 저지르는지 얼굴을 공개한 채 진행한 인터뷰를 많이 찾아봤고, 그런 정황을 팀장과 팀장이 벌인 사건에 투영시켰다. 박동훈 광주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정했을 때 운좋게도 <전라디언의 굴레>라는 책이 발간됐다. 이 책을 보면 어떤 국가적인 차별이 자행됐는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를 포함해 강준만씨의 90년대 저서들을 참고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일부 자료를 얻었다. 광주에 관해 확인할 게 있어서 젊은 동료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명이 영화에 출연한 조윤서 배우다. 그에게서 요즘엔 임대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엘사’라 지칭하며 조롱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전해 들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로 영화를 마무리하면 ‘을이 병을 밀어낸다’는 프로젝트의 주제와도 맞을 것 같아서 그렇게 설계를 했다. 송현주 그 당시 마침 내가 구독하던 채널의 유튜버가 롯데타워에서 눈물의 프러포즈를 치렀고, 그 영상을 비롯해 프러포즈하는 영상을 엄청 많이 찾아봤다. 원래 그런 데 냉소적인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걸 보며 울고 있더라. (웃음) 시나리오를 쓸 때 주변에 비트코인을 하는 지인들이 좀 있어서, 그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넣었다. 어떻게 하면 관객을 즐겁게 할까? - <말이야 바른 말이지>라는 제목이 주지하듯 단편들 모두 대사가 굉장히 중요하다. 본인의 작품에서 회심의 대사를 하나씩 뽑아준다면. 한인미 성폭력 피해자의 “제 영혼은 죽었어요”라는 대사를 고르겠다. 누군가에겐 과장된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의 진심이 담긴 중요한 말이었고, 다행히 배우가 정말 진실되게 잘 연기해주었다. 김소형 너무 가벼운 말인가 싶지만, “살찐 게 아니라 털 찐 거야”를 언급하고 싶다. 영화 포스터 뒤편에 하리보(국수)가 나오는데, 실물보다 너무 통통하게 나와서 마음이 아프다. 실제 하리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한다. (웃음) 윤성호 <프롤로그>에 “그게 아이러니거든요”라는 대사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체를 관통하는 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송현주 “우리나라가 물에 다 잠겨도 나만을 사랑하고 지켜줄 거야?”라고 한 사람이 물어봤을 때, “그럼 우리 돈 벌어서 미국 가자”는 답이 온다. 그게 이 친구들의 근시안적인 시야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이야기하고 싶다. 최하나 나는 “수컷이야?”라는 대사를 고르겠다. (웃음) 어떻게든 남성 혐오 논란을 타개하려고 개의 성별을 묻는 장면인데, 그 신에서의 배우 표정이 정말 좋고, 내가 쓴 것 중 제일 잘 쓴 대사라고 생각한다. 박동훈 “맛동산이 얼마나 맛있는데!”라면서 아빠가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반응이 없어 상처를 받았는데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를 다 알아야 웃을 수 있는 대사여서 그런 것 같다. 최근 VIP 시사회에 시니어들이 많이 오셨는데, 그땐 웃음이 터졌다더라. 만족한다. (웃음) - 작품 외적인 질문도 하나 드리고 싶다. 한국영화 위기론이 꾸준히 대두되고 있는데, 이 자리의 감독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나가고 있나. 박동훈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관객의 요구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공급자의 애매한 분석으로 인해 기획된 작품들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야기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면 관객이 많이 들 거야’보다 어떻게 하면 관객이 즐거울지 계속 탐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하나 최근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순심중학교를 찾아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공동체 상영을 했다. 그 동네에 영화관이 없는데도 다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더라. 생각해보면 그 학생들도, 나도 <슬램덩크> 만화책이 나온 뒤에 태어났는데 영화까지 다 챙겨 볼 정도로 여전히 인기가 많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그만큼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지, 이런 결론은 너무 순진한 것 같고. 다만 당시 같이 언급된 <쥬라기 공원> <매트릭스>처럼 좋은 작품은 세대를 막론하고 관객의 선택을 받는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이긴 했다. 윤성호 <말이야 바른 말이지>와 엮어 답을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당장에 많은 관객이 들기보다 일정 정도 관객이 꾸준히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이 긴 작품이 되길 바라고 있다. 최근 쇼츠가 유행이고 나 역시 즐기고 있지만, 그것과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성향은 다르다고 본다. 영화 관객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 기다려서라도 좋은 작품을 볼 준비가 된 이들이 다수다. 그래서 나는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그런 관객을 만족시키고 5년 뒤, 10년 뒤에도 회자되기를 바란다. 나 역시 관객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가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보탬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인터뷰] ‘권위 없는 권위자 연기’의 1인자, ‘닥터 차정숙’ 배우 김병철

- <닥터 차정숙>이 최고 시청률 18.5%를 기록했다. 시청자 반응을 검색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글이 있나. =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반응을 찾아볼 때가 있다. 이를테면 정숙이 인호와 승희의 뒤를 쫓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자괴감을 느끼고는 “그냥 세워달라”고 하는데, 택시 기사가 “끝을 봐야 시작도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기존 드라마 클리셰를 깼다고들 하시더라. 실제로 택시 기사 분들은 앞차를 쫓아가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심지어 일행이니까 따라가 달라고만 해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다. (웃음) 내가 대본에서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시청자들도 똑같이 느낀다는 것을 확인했다. 작업의 방향성도 함께 생각하게 되고. 작가님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를 비트는데, 그런 의도가 잘 어필되고 있다는 인을 받았다. - 인호는 정숙과 10년째 각방을 쓰고 혼외 자식까지 둔 승희와 오랫동안 외도하면서도 정작 이혼은 하지 않는다. 애초에 승희와 사귀고 있던 중 덜컥 임신을 한 정숙과 결혼을 하게 된 이유도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흔한 유형의 인물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다. 인호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정숙에게 낙태를 권했을 수도 있지만 억지로 강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90년대 후반 낙태와 혼외 자식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다 보니 정숙과 결혼까지 하게 된 게 아닐까. 좋아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돼버린 사람인 거다. 승희와 미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좋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는 게 스릴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진짜 불륜을 원해서라기보다 상황을 따라가다 보니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다가도 멈추지 못한다. 이혼을 하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 인호가 승희나 정숙에게 진심이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나. = 당연히 있다. 그런 사람들도 어떤 행동을 할 땐 무척 진심을 담아서 한다. 이를테면 출국 직전 아픈 정숙에게 가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자 마음이 불편해진 승희에게 팔찌를 채워주는 장면. 그 순간에는 충실했을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정숙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진심이었을 것이고, 결혼 직후에도 진심을 담은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인간 김병철로서는 과연 그런 행동이 책임을 지는 것이라 볼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한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 다양한 배경과 개성을 가진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다. 엄정화, 명세빈, 민우혁 등 동료들과는 어떻게 연기를 맞춰나갔나. = 정화 누나가 편하게 서로 반말하면서 대화했으면 좋겠다고 처음부터 의견을 줬다. 그래서 “누나, 밥 먹었어?”라고 편하게 말하면서 시간을 보낸 덕분에 필요 없는 긴장을 없앨 수 있었다. 워낙 사람에 대한 공감의 폭이 넓은 연기자이기 때문에 정화 누나의 연기를 보면서 나 역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승희라고 생각한다. 승희와 인호의 장면은 웃음 외에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준비했다. 로이킴 역의 민우혁 배우는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다.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 그냥 그를 보다 보면 상대적으로 인호는 매력이 ‘1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웃음) 그런데 로이킴은 정말 훌륭하지만 동시에 닫혀 있는 사람이다. 여자와의 관계도 피상적으로 맺는다. 그러다 정숙을 만나면서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좀더 가까워진다. 가끔 인호와 투닥대다가 동화되는 순간이 있을 만큼 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캐릭터다. -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의사처럼 보이는 동시에 권위가 무너질 때 생기는 코미디도 살려야 한다. “서인호는 매력이 없다”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만 극 중 두 여자와 엮일 만큼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 주변에서 계속 그런 얘기를 했다. 도대체 승희와 정숙이 왜 인호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웃음) 인호는 시청자들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아예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인호가 너무 비호감이 될 때쯤, 이를테면 오십견으로 힘들어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초반에 승희와 인호의 불륜을 보여주는 선정적인 장면이 배제된 것도 작가님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호가 어깨춤을 추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코믹한 장면이 덜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인호 때문에 자칫 채널이 돌아가지 않도록 이미 대본에 완급 조절이 적절히 되어 있었고, 배우는 그 대본을 잘 구현하면 된다. - ‘권위 없는 권위자 연기’의 1인자라는 평가가 있다. (웃음)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 인상적으로 봐준 분들이 계신 것 같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권력이 없어지는 모습은 코미디 장르에서 필수적으로 나오는 양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미디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웃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드라마 <시지프스 : the myth>에서 권위가 계속 유지되는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인물도 인상적으로 연기해내고 싶다. - <재밌는 티비 롤러코스터>에 출연했던 이유를 “코미디 연기에 욕심이 있어서”라고 밝힌 적이 있다.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서 보여준 연기도 화제가 됐다. 코미디 장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 옛날부터 코미디영화나 시트콤을 좋아했다. <핑크 팬더> 시리즈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 김병욱 PD의 시트콤들을 재밌게 봤다. <오피스>에서 레인 윌슨이 연기한 드와이트, ‘<거침없이 하이킥!> 시리즈’의 이순재 선생님, <서울의 달>에서 백윤식 선생님이 연기했던 미술 선생님 캐릭터를 좋아했고, 나도 저런 작품에 참여해 저런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개척한 나의 세계 - 처음에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 어릴 때 TV에서 해주던 토요명화나 주말의 영화, <맥가이버> <엑스파일>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저런 세계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TV로 영화를 보는 것을 부모님이 그냥 두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갈망이 생겼던 것 같다. 얼핏 얼핏 봤던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의 어떤 장면과 음악이 뇌리에 박혔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도 좋아했다. <레이더스>와 <인디아나 존스: 마궁의 사원>은 시리즈인 줄도 모르고 봤다. 굉장히 비슷한데 둘 다 재밌다고 생각했다. (웃음) 고3 때까지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문제집 구석에 “자기의 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격언이 씌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연기를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실기 준비를 위해 연기 학원을 알아봤고,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결국 허락을 받았다. -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 보통 연기과는 끼 있는 학생들이 지원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 고3 때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연기과를 지망한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내 뒤통수를 치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했다. 친구들도 내가 예체능쪽을 지망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연기과를 비하는 줄은 몰랐다. 그냥 장난으로 골프를 전공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반 아이들은 오히려 그 말을 믿었다. (웃음) 나중에 내가 배우가 될 줄 몰랐다고들 할 정도로 그다지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졸업 후 연극보다는 영상 매체 위주로 작업했다. = 영화 학교에도 연기 전공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정원이 훨씬 적었다. 그리고 연기를 하려면 연극을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웃음) 대학에서 연극 작업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도 극단에서 운영하는 연기 학교에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대학로 연극배우들을 보면 영상 작업과 병행하는 경우도 많았고 송강호 선배님 같은 케이스도 많아지던 시기였는데, 왠지 나는 연극과 영상을 같이하기 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원래 관심 있던 영상 매체를 좀더 적극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단편영화 중심으로 작업했다. - 초기작 중 <알 포인트>에서 귀신에 빙의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현장은 어땠나. = 단편영화 작업을 같이했던 감독이 <알 포인트> 연출부로 들어가면서 오디션을 권유했다. 촬영이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우리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시사회날까지도 “이게 무서울까?” 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웃음) 캄보디아 로케이션 촬영을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무척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에도 한국영화아카데미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작품들을 몇편 찍으면서 영화 연기를 경험했다. 연상호 감독의 초기 단편 <지옥: 두개의 삶>도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내레이션을 하게 됐는데, 나보다 연상호 감독이 원래 했던 내레이션이 훨씬 잘 어울리고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웃음) - 그런 경험들이 배우로서 역량을 쌓고 태도를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준 것 같나. = 현장에서 쓸데없이 화내지 말자는 것을 배웠다. (웃음) 중요한 것은 소통이지 내 분풀이가 아니다. 그래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영화는 함께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배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면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다. - 대중에게 배우의 얼굴이 각인되기 시작한 분기점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다. 그 이전에 무명 생활이 꽤 긴 편이었는데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텼는지. = 특별히 버티지 않았다. 그 사이사이에 연극이나 영화 작업에 집중했고, 작품이 없을 때는 그냥 다른 작품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딱히 걱정을 하지도 않았고, 걱정은 주변 사람들의 몫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오랜 기간을 사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하다. (웃음) 만약 앞으로 10년을 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계속 연기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배우라는 직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느냐고 했을 때, 그러기는 어려운 삶이다. 내가 너무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다면 금방 지쳤을 수도 있다. 나는 굉장히 평범하고 짜증도 잘 내는 성격인데,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려도 ‘어떡해~. 그냥 해야지 뭐’ 하고 지나갈 수 있던 게 아닐까 싶다. - <도깨비>의 “파국이다”, 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 같은 대사는 지금까지 회자된다. 대중에게 각인되는 키워드를 남긴다는 건 그만큼 해당 신에서 연기를 인상적으로 했다는 의미다. = 오랫동안 이야기되는 신을 만들어내겠다고 예상하며 작업하진 않는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난 후 인상적인 장면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대사의 임팩트는 대본과 연출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나도 그냥 대본에 충실하게 연기한다. <도깨비>에서 그 신을 찍을 때 한번은 “파멸이다”라고 잘못 말해서 다시 테이크를 갔던 기억이 난다. 이게 얼마나 한방이 있는 대사인지 특별히 의식하기보다는 다른 장면을 찍을 때처럼 임했고, 그래서 대사를 잠깐 헷갈리기도 한 것이다. 배우의 몫은 재미있게 조직된 대본이 잘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다. -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서 레드 제플린, 엔리코 마샤스, 비틀스, 퀸 등의 LP를 가져왔던 모습이 기억난다. 올드 팝을 좋아하나. = 우연히 선물받은 LP가 몇장 있었다. 턴테이블이 있으니 소장하고 있는 LP를 가져오면 음악을 틀 수 있다는 말에 가져간 것이다. 내가 중학생일 때 나온 80년대 팝음악을 좋아한다. 그 당시에 찾아 듣진 않았고 나중에 성인이 된 후 좋아하게 된 경우다. - 기본적으로 80년대 영화나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특별한 취향을 갖고 굉장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남들처럼 뉴진스나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는다. (웃음) <탑건>도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을 때 봤고, <스타워즈> 시리즈도 성인이 된 후에 감상했다. 다만 그런 기억은 난다. 10대 시절 같은 반 친구가 <스타워즈> 관련 피규어를 갖고 있었다. 나는 제목만 들었던 영화라 그 피규어가 무척 신비로운 물건처럼 보였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과 욕구가 나중에 내가 연기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 이미 <닥터 차정숙> 촬영이 끝난 것으로 안다. 실제 결말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서인호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라나. = 잘못했기 때문에 더이상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론은 아닌 것 같다. 승희와 정숙에게는 각각 자식이 있다. 그들과 인연을 아예 끊기보다는 잘못한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닥터 차정숙>은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이 꽤 있는 드라마다. 이 작가라면 어떻게 이야기를 끝맺을지 상상해보고 실제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기획] '문재인입니다', “누구 편이라고 날 세우지 않아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정치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퇴임 1년하고 하루 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문재인입니다>가 개봉했다. 영화는 전직 대통령의 소박한 일상을 콜라주하는 브이로그처럼 시작하지만, 재임 당시 이슈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그의 정치관을 복기하게 돕는다. 물론 주인공은 말수가 적다. 쟁점과 그 쟁점을 술회하는 인터뷰이의 면면이 <문재인입니다>라는 제목을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느냐는 지적도 잇따랐다. 이에 이창재 감독은 대답했다. 논쟁보다도 이를 대하는 인물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그 의도는 관객에게 잘 전달되었을까? 이 영화가 채택한 소재와 배경이 그 목적을 구현하기에 적당했을까? 평소 정치를 다룬 영화를 즐겨본다는 영화평론가 강유정, 본지에 ‘디스토피아로부터’ 칼럼을 쓰는 정치평론가 김수민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이 작품에 대한 견해에 더해 앞으로 보고 싶은 정치물의 성격까지 화두에 올리며 한국 정치(인) 서사의 제자리걸음을 꼬집었다. - 문재인 전 대통령 퇴임 1년 여 만에 그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세상에 나왔다. 극장에 가기 전 어떤 기대를 했나. 김수민 지금까지 나온 정치인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굉장히 상투적이라는 느낌을 받아왔다. 특히 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그들의 불운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창재 감독의 전작 <노무현입니다>는 다소 예외였다.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승리하는 과정에 집중한 소재의 차이도 있었을 텐데, <문재인입니다>는 어떤 식으로 공식에서 벗어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강유정 <문재인입니다>는 제목에서부터 한 사람에 대한 소개를 암시한다. 이창재 감독이 어떤 식으로 그 소개를 펼칠지 궁금했다. 자연인으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스스로에 대한 발언을 아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퇴임 이후 어떤 말을 할까, 이게 영화적으로 어떻게 담길까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1년이라는 시간이 한 사람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쌓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도 있었다. - 이창재 감독은 <노무현입니다>처럼 연출자의 스타일을 드러내기보다 주인공의 성정을 닮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재인입니다>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먼저 듣고 싶다. 강유정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길고 드라마틱한 이력, 그 기간에 더해 사후 8년 간 쌓인 아카이브, 관객 개개인이 지닌 페이소스까지 <노무현입니다>에는 다양한 해석의 맥락이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입니다>를 보면서는 아직 이야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인 관객이 기대했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정도가 영화에 담겼다. 물론 영화가 우리가 잘 몰랐던 비사 또한 다루지만, 이게 관객의 감정과 결합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수준으로까지는 이뤄지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1년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입니다>는 완성된 작업이 아니라 한 작업의 시작처럼 보였다. 이창재 감독에게 이 기록을 매년 쌓아갔으면 좋겠다고 제안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김수민 영화에서 큰 장점과 단점 한 가지씩을 발견했는데, 그 두 가지 모두 문재인이라는 출연자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장점은 팬(fan)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절제되어있다는 점이다. 이창재 감독 나름의 관점을 갖고 그리 만들었을 테지만 문재인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영화를 그렇게 흐를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본다. 단점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차이와도 맞닿아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항상 논란의 핵심에 있었다. 본인이 전면에 나서서 욕을 먹었고, 임기 중 지지율도 낮았다. 그러나 그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자 대중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감정적인 재평가가 일어났다. 반면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기자회견 횟수부터 노 전 대통령과 크게 대조된다. 다만 그가 선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익히 있었는데, 그런 인물의 일상을 보여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재임 시절 이야기를 깊이 있게 끌어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으나 이는 추상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이 또한 감독이 어쩔 수 없는, 정치인 문재인의 캐릭터로 인한 한계가 아니었나 싶다. 전직 대통령의 일상을 본다는 것 - 이창재 감독은 지난 해 7월에야 문재인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다큐멘터리 촬영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촉박한 제작 기한이 예상되는 한편 전작처럼 과거 자료를 엮어내기 보다 퇴임 직후의 일상에 집중했다. 이러한 선택에 어떤 함의가 있다고 보나. 강유정 시네마베리테, 사료에 집중하는 방식도 존재하나 다큐멘터리가 발언을 위한 매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는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주요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활동 중인 인물, 의견이 분분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 다큐멘터리로서 의사 표명을 하는 게 최근의 흐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제 전직 대통령조차 그 대상이 된 것이다. 아까 영화의 맥락을 봐야한다고 했는데, 문재인 전 대통령은 매우 높은 지지율 속에서 대통령 직을 끝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계속 지난 정권 탓을 듣고 있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 맥락이 없었으면 <문재인입니다>가 1년 만에 나올 수 있었을까? 사회적 이슈에 더 집중하는 외신과 달리 우리나라 언론은 거의 1년 내내 정치 뉴스를 전면에 배치한다. 전직 대통령들이 법정으로 갔던 역사에 국민들이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휴식을 취할 때조차도 정치 과잉의 상태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일종의 정치적 향수를 느끼는 관객 취향에 맞는 다큐멘터리가 제공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입니다>가 <노무현입니다>만큼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주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도 일종의 영화적 시도들이 잔잔하게 들어있다고 본다. 김수민 감독이 문 전 대통령이 재임 중일 때부터 영화 제작을 위한 접촉을 시도했다고는 한다. 재임 중에 촬영이 이뤄졌으면 단순 일상생활을 다루더라도 더 재밌었겠다는 예상을 해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직전에 그가 청와대에서 보내는 일상을 다룬 MBC 스페셜 2부작 다큐멘터리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대통령의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탈정치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문재인입니다>는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다룬 데다 한 편에 여러 가지를 녹여내야 하는 딜레마가 있었을 테다. 대통령으로 재직하느라 가까이서 보지 못한 인간 문재인의 모습과 재직 시절의 비화를 모두 담으려다보니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내레이션 없이 인터뷰만으로 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창재 감독의 장기인데, 이 점이 그러한 여건상의 제약을 보완해줬다고 본다. - 영화의 시점과 배경으로 인해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대가 부각되었다. 영화가 시위대를 묘사하는 방식은 어떻게 봤나. 김수민 사실 항의를 하고 싶다면 사람이 많은 공간 또는 조직을 찾아가는 게 맞을 텐데, 그 앞에서 비인도적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은 유튜브에서 관심을 끌고 싶어서 하는 행위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점을 영화가 적나라하게 펼쳐서 보여주는데. 정작 화면 속 문재인 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무심해 보인다. 이 점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묘한 느낌까지 받았다. 그러나 건널 수 없는 강 또한 보였다. 극우 유튜버들이 시위를 하는 장면 위로 신문 기사들이 뜨는데, 탈북 어부 강제 북송 사건,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블랙리스트 사건 등과 관련해 전 정부에 대한 수사를 진행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평이하게 보면 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겪는 현실을 응축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한 화면에 다뤄질 수 있는 사안인지 의문스럽다. 지지자를 포함한 일부 시민들을 실망시켰던 인권 문제, 불명예스러운 논란 등이 극우 유튜버들의 모습과 묶인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이 영화가 팬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는 한계가 보였다. 강유정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를 통해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영화로 인해 처음으로 집 내부에서 그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게 됐다. 집 안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가 마치 히치콕의 <새>처럼 화면을 찢는 것 같았다. 뉴스는 폭력에 대한 반응을 둔감하게 만드는 데에 반해 이 영화는 한 사람의 평범한 일상에서도 폭력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권력의 개입 이후 소란이 잦아들었다는 것 또한 영화가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앞선 폭력은 충분히 방지될 수 있었던 형태의 폭력이었고, 그런 면에서 방임된 폭력의 일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또 하나 재밌었던 것은, 주인공이 말을 아끼는 게 답답했는지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하더라. 그럴 때 미묘하게 눈빛이 떨리는 문 전 대통령을 볼 수 있었다. 특히 강아지들을 보낼 때. 이런 식의 클로즈업에서 감독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듣고 싶은데, 대답을 잘 들을 수 없으니 미세한 감정 변화라도 전달하고자 다가가는 마음이 전해졌다. 정치적 안배, 현재적 맥락 - 인터뷰이들의 면면에 대해서도 짚었으면 한다. 인터뷰 대상으로 포함된 인사와 포함되지 않은 인사에 대한 관객 각자의 반응이 부딪히는 중이다. 김수민 이낙연 전 총리가 인터뷰이로 빠졌다고 해서 친 이재명 인사들이 인터뷰이로 대거 포진된 것도 아니지 않나. 인터뷰이의 선정에 있어서 감독의 정치적 안배가 있었던 것 같고, 그 외 국무총리들 중에도 출연하지 않은 분들이 있다. 크레딧을 보니 김부겸 전 총리도 촬영을 했으나 내보내지 않은 것 같더라. 그런 의미에서 이낙연 전 총리가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정치인) 팬덤이라는 게 그렇다. 다른 편을 상대로 싸울 때보다 내부에서 누가 더 진정성이 있는지, 누가 가짜인지 공격할 때 더 활력이 넘친다. 당파를 막론한 특징이다. 오히려 아쉬웠던 건 홍남기 전 경제부총리가 인터뷰를 했음에도 편집된 사실이다. 그의 운명이 기묘한 게, 재임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나 이재명 대표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홍남기 부총리가 곳간을 걸어 잠근다’라는 식으로 민주당 지지층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는 권력이 없었나? 이런 식으로 덤터기를 쓴 캐릭터에 가까운,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딜레마를 직시할 수 있는 인물이 영화에 출연했다면 더 가치 있지 않았을까. 출연시키지 않는 게 맞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로는 송인배 씨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물론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워낙 가까운 사이니 출연한 것 같은데, 이 분은 문재인 정부 시기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지금 민주당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도 명예롭게 사면시켜주려 하는 행위다. 이런 측면에서 이창재 감독조차 아직 정확한 관점 없이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한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강유정 현재의 맥락 속에서 많은 분이 문재인 전 대통령의 워커홀릭 이미지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열심히 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 하나라도 건져내야겠다는 영화의 목표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여러 혼선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럼에도 메신저가 아닌 메시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은 있다. 지금 (문재인 전 대통령) 팬덤 내부의 논란은 메시지 보다 메신저에게 가있다. 누가 인터뷰를 했고 하지 않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그 논리로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영화를 마치 총선에서의 공천 배치 도구로 보는 것밖에 안 된다. 이조차 지금 언론이 자행하는 공격 패턴과 똑같아 오히려 영화 속 메시지를 파묻는 것 같다는 의구심도 든다. 감독이 인터뷰이로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들어냈느냐의 문제는 편집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너무 단순한 논리로 이 결과물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영화는 문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일상을 다루는 와중 재임 중 있었던 각종 사건사고도 언급한다. 이창재 감독은 “논란 자체보다 각 사안에 대한 인물의 태도”를 다루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영화가 이슈를 취사선택하는 기준과 그 목적이 잘 부합했다고 보나. 강유정 이창재 감독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또 멀리서 보면서 최종적으로 얻어 낸 두 가지는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서건 원칙주의자였다는 것 그리고 대단히 성실한,워커홀릭형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감독은 문재인이 어떤 정책을 펼쳤고, 어떤 인사를 기용했는지를 떠나 그 두 가지가 돋보이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문재인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어떠하든 이 두 가지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지도위원과의 갈등을 길게 묘사했다고 본다. 인간 문재인과 대통령 문재인 사이의 딜레마를 묘사하기 위함이다. 현재 대통령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기용 이슈와 뒤따른 추(미애)・윤(석열) 갈등마저 문 전 대통령이 원칙주의자였음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된 주석처럼 느껴졌다. 나머지 해석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살아있는 존재고 역사적 평가가 남아있으므로 이 두 가지만을 건져 올린 것으로도 의미가 있다. 다만 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성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김정은과 판문점’인데, 반드시 언급이 됐어야 하는 대북 정책 문제가 다뤄지지 않아 아쉽다. 김수민 이거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 감독이 반윤(석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영화가 그렇게 읽히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관련 주제들이 대폭 생략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인간 문재인’을 보여주려는 취지로 다뤄진 사건이 미국과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 미사일 협정 관련 이슈인데, 이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는 사안이다. 논란이 덜한 소재로써 문 전 대통령의 단호함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영화가 자꾸 재확인해주다시피 하는 내용이 ‘원래 문재인에게는 권력의지가 없었는데, 의지를 갖게 됐고, 이후 권력을 잡았으나, 선의가 배신당했다’라는 서사다. 그런데 내게는 대통령까지 지낼 만한 정치인을 그 정도 수준으로 바라보는 게 맞을까라는 상식적인 의문이 있다. 때로는 그의 통치술이 교활하게 보이기도 했다. 참모 혹은 장관끼리 싸움 붙이는 식의 대처가 여러 번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앞에 나서면 큰일 난다는 것을 배운 탓인지 그와는 다르게 하겠다는 의지가 너무 느껴졌었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 대중이 원래 가졌던 문 전 대통령의 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런 점에 있어 감독 탓을 하기도 쉽지 않은 게, <문재인입니다>의 인터뷰이들 대부분이 비슷한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적어도 그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비춰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문재인이라는 소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 녹록치 않았겠구나 싶다. 고정관념을 깨는 영화가 나오기 어려웠을 테다. 그럼에도 지적할 수밖에 없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민주당류 서사’가 있다. 개혁을 향한 선의와 기득권 세력의 반격을 대치하는 화법이 그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는 이게 먹혔다. 그러나 촛불로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고 정권을 내주는 과정에서, 이제 2030세대는 양쪽을 같은 기득권으로 인식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어느 쪽이 더 도덕적이라고 보느냐’라는 문항이 있었는데, 민주당이 국민의 힘에게 졌다. 역사는 바뀌고 있는데 이런 서사가 유지되는 것은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강유정 서사가 평면적인 건 맞다. 그런데 그 평면성은 시간에서 비롯된 게 크다. 과거로 더 가든 현재를 더 길게 보여주든 했어야 하는데, 이 정도의 시간을 들여서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좀 더 시간이 쌓여야 이 사람에 대한 판단과 역사적 분석이 나올 수 있을 텐데 고작 일년, 순수 제작 기간은 그 보다 적기 때문에, 뿌연 이미지밖에 보여줄 수 없다고 본다. ‘판’을 보여주는 작품 나와야 -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 주를 이룬 대담이었다. 두 평론가는 앞으로 어떤 정치・정치인 영화를 보고 싶나. 강유정 정치, 그리고 정치와 결부된 언론을 다룬 영화를 즐겨 본다. 이를테면 <더 포스트> 같은 작품을 무척 좋아한다. 실제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역사적 진전이 이뤄질 때, 옳고 그름이라는 개념에 건조하게 접근하면서 이를 원칙에 의거해 다룰 때, 보다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영화가 나올 때 한국의 정치 영화, 언론 영화가 성장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최근에는 넷플릭스에서 <외교관>이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봤다. 그 안에 판타지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에 지나치게 위배되지 않는 묘사들이 돋보였다. 그 점이 같은 넷플릭스 시리즈인 <퀸메이커>와 비교됐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캐릭터들이) 상대편을 헐뜯는 수준의 마타도어식 정치 서사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걸까? 다큐멘터리로만 정의 구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허구로나마 작전이 아닌 전략을 보여주는 정치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김수민 정치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 많이 느끼는 건데, 네티즌이든 언론이든 방송이든 소재를 선정함에 있어 플레이어 관점에 매몰돼 있다. 즉 ‘판’을 보여주는 콘텐츠가 별로 없다. 판과 구도, 그리고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정치의 속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든 드라마든 그렇게 넓은 시야를 가졌으면 한다. 예를 들어,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지난 대선을 겪고서야 20년 전 노무현 대 이회창의 대결이 엄청났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양 세력에서 낼 수 있는 최선의 후보들이 ‘바보’와 ‘대쪽’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지금보다 훨씬 진일보한 싸움을 했다. 그들의 대결은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만 보는 게 아닌, 정치라는 게임의 관점에서 혹은 정치 철학에 대한 고찰로서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정치사에서 이런 사례는 흔치 않고, 특히나 픽션으로서 다뤄볼 법한 구도가 아닐까 싶다. 누구 편이라고 날 세우지 않아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끝난 후 일행과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그럼에도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게 하는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한국에서 정치 소재의 픽션을 만드는 게 상당히 힘들 것 같긴 하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너무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영화 만드시는 분들도 힘들 것 같다. - <문재인입니다>라는 영화와 관련해 못 다한 이야기가 있다면. 강유정 한국의 다큐멘터리 시장이 워낙 척박하다. 그 중 시장에서 잘 되는 장르가 정치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일 텐데, 이 또한 정치 다큐멘터리 가운데 하나의 장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무어식의 다큐멘터리, 풍자적이고 코믹한 다큐멘터리도 있어야하고, 다른 식의 다큐멘터리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동종 교배처럼, 정치인 팬덤에 의존하는 영화가 많아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는 영화계에도 정치계에도 그리 좋은 현상을 아닐 거라고 본다. 이미 정치 과잉인 우리 사회에서, 영화들이 이런 소재로 좁아지기보다는 허구적 정치 서사로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김수민 제일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적으로는 조악하다고도 볼 수 있는 <애국 청년 변희재>가 굉장히 유의미한 도전이었다고 본다. 정치적 성향이 서로 맞지 않는 감독과 출연자가 만나는 경우,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각도가 전혀 다른 사례들이 다양하게 나와 준다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비전문가지만, 시사평론가가 쓰는 칼럼이나 방송에서 하는 말이 정치를 다룬 작품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 않겠나. 한국의 정치 영화 저변이 넓지 않은 데에는 정치 담론의 문제도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도 생각한다.

[인터뷰] “더 재미있는 거 없을까?” 다같이 골몰했다, '범죄도시3' 이상용 감독

- 5월22일 언론배급 시사를 마치고 영화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있다. 소회가 어떤가. = 주변으로부터 고생 많았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1년 만에 후속작을 완성했다는 것에 놀라는 분들도 있고. 사실 <범죄도시2> 개봉 당시 한창 3편을 제작 중이어서 많은 감정을 누릴 새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난 1년을 새롭게 정리하는 느낌이다. - <범죄도시2>의 순항이 속편을 제작 중이던 촬영장에 영향을 주었을 것 같은데. 전반적으로 흥이 나지 않았나. =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배우들이 많이 부담스러워했다. 이미 <범죄도시2> 때와 배우 구성이 달라진 상태여서 모두가 심정적으로 부담감이 컸다. 그래서 현장에서 기쁜 내색도 하기 어려웠다. (웃음) 살짝 눈치를 봐야 했다. - <범죄도시3> 기획 단계에서 주요 포인트로 삼은 부분은 무엇인가. = 2편을 제작하던 당시 코로나19로 1여년의 공백을 가진 때가 있었다. 2020년에 촬영하고 잠시 휴지기를 갖다가 2021년 여름에 이어 찍었는데, 그 공백기 동안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중 새로운 속편 아이템과 시나리오가 완성되었고 마동석 배우의 의견으로 일본 야쿠자와 한국의 두 빌런을 주축으로 사건이 벌어진다는 기본 기획이 세워졌다. 해외로 활동 범위를 넓힌 2편과 달리 한국에 일어나는 일에 국제적 범죄집단이 연루돼 있다는 설정을 세웠다. 무엇보다 두 빌런 또한 대립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빌런의 다각화를 느낄 수 있다. - 전편보다 잔혹함이나 폭력성의 수위를 조절한 느낌이 든다. 대중성을 겨냥한 것인가. = 그런 면도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같은 15세이상 관람가 심의를 받은 <범죄도시2>가 더 잔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거기에도 피해 장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누군가가 칼을 들고 있다면 나는 그 칼을 휘두르는 사람의 얼굴을 보여줄 뿐, 칼에 맞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의 눈빛, 에너지, 표정을 부각하는 게 관객에게 더 효과적으로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 취향이기도 하고. 내가 잔인한 걸 못 본다. (웃음) - 실제로 영화는 마약범을 쫓지만 마약으로 인한 폭행 문제나 여성 범죄같이 피해 사실을 적나라하게 짚고 가지 않는다. 같은 이유에서 이러한 생략을 결정한 걸까. = 사실 시나리오상에선 그런 과정이 있었다. 프롤로그도 지금과 달랐다. 클럽에서 마약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으로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촬영까지 마쳤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피해자가 여자여야 할까? 남성 피해자면 괜찮을까? 그렇다면 남성 피해자는 현실적인가? 그런데 자료 조사를 해보니 현실의 마약 범죄가 우리의 일상 턱밑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험성이 인지되면서 사건 묘사를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정보와 배경은 마석도(마동석)가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동기로서 필요할 뿐이었다. 그 적정선을 지키기 위해 편집 과정에서 많은 것을 덜어내고 걷어냈다. - 3편에서는 대화 형태의 코믹 요소를 더 전면에 내세웠다. 많은 아이디어 회의가 이어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 14시간을 내리 회의하기도 했다. (웃음) 시나리오 각색 과정에서 마동석 배우를 포함한 제작진이 모여 더 웃긴 것 없냐고 서로 성화였다. 회의 분위기는 늘 재미있다. 사실 각색, 촬영, 편집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거치기 때문에 그에 대비하여 같은 장면도 여러 버전으로 촬영한다. 특히 촬영 당시 코로나19 상황이었기에 장소 섭외 등이 원활하지 않아서 여러 컷을 확보해두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만 예산 누수나 회차 누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기자간담회에서 마동석 배우는 “자가 복제를 하지 않기 위한 자기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마석도에게 어떤 변화를 주려 했나. = 단연 액션의 변별점이 중요했다. 전작에 비해 액션 분량이 두배 이상 늘었다. 1편과 2편에서 마석도가 유도와 복싱을 섞은 형태의 무술을 선보였다면 이번에는 복싱을 강조하되 리듬감을 만들어보려 했다. 사실 많은 관객이 마석도의 원펀치 액션을 주로 기억하지만 마석도는 다양한 디테일 액션을 쌓아 마지막에 한방을 날린다. 그런데 이게 촬영이 정말 어렵다. 카메라 위치에 따라 복싱 기술을 화려하게 담기가 어렵고 배우가 다치면 안되기 때문에 합을 우선해야 한다. 또 이 합을 놓치는 순간 안 맞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재촬영을 해야 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에도 다시 돌아간다. 다양한 문제 상황을 주의하면서 복싱이 유려해 보이도록 조명했다. 반면 주성철(이준혁)의 경우, 주변에 뭐가 있든 그냥 집어서 때린다. 거침없는 면모를 드러내려 설정했다. - 사운드에 많은 공을 들인 듯하다. 주먹이 지나갈 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격투 신의 타격감이 크게 느껴진다. = 공을 아주 많이 들였다. <범죄도시3>의 90%는 후시녹음(ADR)으로 진행했다. 액션 신에서 주먹 소리부터 대사까지 깨끗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주먹 소리만 혹은 대사만 후시 녹음으로 작업하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한 것인데 감사하게도 모든 배우가 흔쾌히 참여해줬다. 워낙 대사가 많은 김민재 배우가 고생을 많이 했다. - 마석도의 주 무대도 금천경찰서 강력반에서 광역수사대로 옮겼다. 조직 구성원의 변화를 낯설어하는 관객도 있을 텐데. 전 팀원들과는 영영 이별인 걸까. = 전혀 아니다. 시리즈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객에게 늘 똑같은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신선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마석도의 거처와 환경에 변화를 주었다. 그게 2편에서 베트남이었다면 3편에서는 광역수사대다. 많은 분들이 전일만 반장(최귀화), 오동균 형사(허동원), 강홍석 형사(하준) 등을 많이 그리워할 테지만 나는 그 그리움도 너무 좋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재회할 가능성이 무한하게 열려 있다. - 새로운 광역수사대는 배우 이범수, 김민재, 이지훈 등으로 이뤄졌다. 조합을 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무엇인가. = 처음 등장하는 인물들이라 어떻게 관객에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그래서 1편을 떠올렸다. 등장인물과 관객이 초면인 건 그때도 같으니까. 광역수사대 구성원이 수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자리를 드러내길 바랐고, 빌런을 쫓아갈 때 형사들을 하나로 뭉쳐 덩어리감을 만들려 했다. 그래서 마석도와 형사들을 나누어 보여주려 했다. - 세 배우의 호흡이 잘 맞아 너무 웃겨서 그만 하자고 말리기도 했다고. 이들이 어떤 코미디에 특화돼 있다고 보나. = 특히 자연스러움과 일상성에 강점이 크다. 모두 속편에 대한 부담이 컸을 텐데 리허설을 거치며 호흡을 잘 맞춰갔다. 리허설 단계에서 다양한 시도를 연습하다가 웃느라 촬영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실제로 웃음이 터져서 엔지도 많이 났다. 디테일한 리허설 과정을 거친 뒤 애드리브를 적용하기도 한다. 마석도가 야쿠자가 모여 있는 클럽 앞에서 도움을 받은 뒤 “아가리토 고자이마스~”하고 말한 건 마동석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또 후시녹음 단계에서 애드리브를 적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마약을 찾기 위해 바를 찾은 마석도가 옆으로 쓰러진 건달에게 “야, 슬퍼? 똑바로 앉아” 하는 것도 후시녹음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아이디어였다. “더 재미있는 거 없을까?” 하고 물으면 바로 모든 배우들이 다 함께 골몰한다. - 새로운 빌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준혁 배우가 <범죄도시3>에서 첫 악역에 도전한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성철은 어떤 설정으로 시작되었나. = 주성철은 흔들리는 빌런이다. 자신의 영역을 좁혀오는 마석도와 또 다른 대결을 펼치는 리키(아오키 무네타카)까지 외부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1편의 장첸(윤계상)과 2편의 강해상(손석구)은 마석도를 보고 도망가는 기회가 있지만 주성철에겐 그런 여지를 차단해보고 싶었다. 애초에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면 이 빌런은 어떻게 대처할까? 깡과 자신감 그리고 뻔뻔함이 어디서 나올까? 그런 부분을 드러내고 싶었다. 자칫하면 약해 보일 수 있지만 주성철의 흔들림은 악행에 박차를 가할 발판일 뿐 유약함의 증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준혁 배우도 20kg 이상 벌크업을 해내며 악역을 체화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처음엔 너무 미남에다 날씬해서 어울릴지 걱정도 됐는데 자신의 외연을 깨보려는 의지가 강했다. 비주얼부터 눈빛까지 주성철 그 자체였다. - 야쿠자 조직의 두목 이치조는 배우 구니무라 준이 맡았다. 짧은 분량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 정말 무서웠다. 아우라가 어마어마한 배우다. 동시에 너무 좋았다. 구니무라 준은 하룻동안 모든 장면을 촬영해야 했는데 특유의 집중력으로 알차게 마칠 수 있었다. 당시 해외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면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한국을 찾아 촬영에 임해주었다. - 일본 정서나 야쿠자 조직에 관하여 리키 역의 배우 아오키 무네타카와 다양한 의견을 나누었다고. = 이치조로부터 명령을 받아 한국에 들어온 리키는 판을 흔들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더 독단적으로 움직이길 바랐다. 이치조의 지시를 받고 입국하긴 했지만 마약을 보고 이 사람도 욕심이 생기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오키 무네타카가 의견을 내길, 리키는 온전히 이치조의 의지와 뜻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배신을 생각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게 아마도 일본에 내재된 충성, 정절의 정신인 듯했다. 아오키 무네타카의 의견 덕분에 미묘한 부분까지도 세세하게 살필 수 있었다. - 빌런을 둘로 나눈 게 공포심을 낮출 수 있다는 우려는 하지 않았나. = 걱정이 많이 되었던 게 사실이다. 일종의 도전이었다. 또 그동안 승승장구해온 주성철의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직업적 설움이나 답답함이 트리거처럼 그를 누르려면 마도석과 리키, 양측에서 옥죄어오는 구조가 중요했다. 어긋난 욕망을 채우고 싶은 간절함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터지는 임팩트를 보여주고 싶었다. - 법과 도덕, 규율의 선을 무자비하게 넘는 악역들에게 “너 좀 맞자” 라고 말하는 주인공으로부터 관객은 대리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폭력이 궁극적 해결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두고 쾌감을 얻는다는 반응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 주먹으로 해결하는 게 진정한 정의냐고 묻는 반응도 많았다. 하지만 영화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것이다. 1편에서 마석도라는 인물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시민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소탕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기만의 도덕적 우선순위를 갖고 있는 인물로서 의미가 있다. 영화적 허용으로 봐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