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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영화음악 - <왓 위민 원트>

<왓 위민 원트> O.S.T / 소니뮤직 발매 이 영화에서 멜 깁슨은 전깃불에 두방 감전되고 나서 여성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초능력을 부여받는다. 더러운 속물에 여성 폄하자이자 바람둥이였던 그는 그 과정을 겪고 여성 옹호자가 된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악몽에서 깨어나듯 멜 깁슨을 보통사람으로 복귀시킨다. 이미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리라고는 아마 영화를 만든 사람들조차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렇고 그런 드라마로 멜 깁슨 팬들의 돈을 좀 긁어보려는 수작으로밖에는 안 보인다. 두 주인공의 캐릭터도 진부하다. 여전히 마초/열혈 직업여성의 이분법이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 비해 음악의 사용은 비교적 흥미롭다. 우선 멜 깁슨을 대표하는 음악은 프랭크 시나트라다. 그의 미국식 스탠다드 가요는 미국 남성의 전세계적인 전성기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한국전쟁을 전후로하는 팍스아메리카나. 그 시기는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전성기와도 겹친다. 그 전성기에 만들어진 스타일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은 비를 타고> 같은 뮤지컬영화. 지금 봐도 당시의 스튜디오 규모와 물량이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방대하게 느껴지는 신들이 많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I Won’t Dance]를 틀어 놓고 멜 깁슨은 그 뮤지컬의 주인공 흉내를 낸다. 그 당시의 미국 플레이보이가 여자 꼬실 때 틀어놓으면 딱 좋았을 만한 노래다. 그 구닥다리 ‘스탠다드’에 대한 미국 남자들의 처절한 향수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리라. 이미 그건 시대착오적이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멜 깁슨은 스타킹을 신고 매니큐어를 발랐으며 다리털 제거용 왁스를 바른 뒤 다리에 패드를 대고 있다. 그가 하는 광고일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는 갑자기 프랭크 시나트라를 끄더니 “이 음악으론 안 돼” 하면서 메레디스 브룩스의 <비치>를 틀어놓는다. 딸의 음반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LP로 틀더니 메레디스 브룩스 것은 CD로 트는 장면도 잊지 않고 넣었다. 이 노래는 직역을 하자면 ‘그래 나는 쌍년이다 어쩔래’ 하는 가사를 가진 노래다. 전투적이긴 하지만 상투적이기도 하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이 노래에 의해 완전히 조롱받는다. 그때 딸이 들어온다. 딸은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와 살고 있다. 딸은 아버지를 사람취급하지 않는다. 왜 남의 음반을 몰래 꺼내 틀었느냐고 아버지를 혼내는 딸과 ‘저, 저…’ 하며 머뭇거리는 아빠. 이 영화는 아주 쉽게, 그런 방식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위기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심각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실용적’으로 대처한다. 여성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를 땅에 묻어라.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서는 감전되는 길밖에 없다. 후후. 한심한 할리우드의 상상력….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영화 음악에 관심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한 장면이 눈에 띈다. 두 주인공이 조용한 장소에서 춤을 추려할 때, 창 밖 어디선가 템프테이션스의 고전인 [Night and Day]가 흘러나온다. 둘은 창가로 다가간다. 남자주인공이 “볼륨을 높입시다” 하면서 창문을 조금 더 연다. 노래소리는 커진다. 이윽고 둘은 사랑의 춤을 춘다. 그러자 어느새 음악은 마치 실내에서 틀어놓은 음악처럼 화면 전체를 꽉 채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사운드가 얼마나 속임수인지 잘 알려준다. 사운드트랙을 만지는 기사는 처음에는 필터링을 했다가, 필터를 빼고, 다음으로는 볼륨을 높이면 그만이다. 그런데 주인공들은 창가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게 영화의 본질이다. 그때 여자주인공은 내가 들어본 가장 영화다운 거짓말에 속하는 다음과 같은 대사를 친다. “어디서 저 노래가 나오는 거죠?” 성기완 /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

장승업을 보면, 내가 보여

임권택 감독은 <춘향뎐>을 찍으면서, 내색은 안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이거 괜한 짓을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판소리와 영화가 한몸이 된 <춘향뎐>은 다시 생각해도 식은땀 나는 프로젝트였다. 패기 넘쳐야 할 젊은 감독들이 세공술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영화와 평생을 살아온 노감독은 영화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임 감독은 편안하게 영화 만들고도 좋은 평판 들을 수 있는 길을 잘 알고 있다. 그 길에 유혹을 느끼면서도, 정작 일을 벌일 땐 몸은 정반대로 간다. 자책하면서도 그 길을 또 간다. 임 감독의 새 영화는 조선말기의 화가 오원 장승업에 관한 영화다. 오원은 전설적인 풍운아로 알려져 있으니 인물이야기만 재미있게 푸는 쪽이면 좀 편하겠지만, 임 감독은 그렇게 가진 않으려 한다. 회화를 이야기의 소품으로 삼는 게 아니라 회화의 이미지가 이야기와 만나 만들어내는 새로운 리듬과 합주가 임 감독의 관심사다. 세계적인 갈채를 받은 <춘향뎐>의 성가를 뒤로 하고, 임 감독은 새로 그림공부를 시작하며 다시 줄담배를 피워물고 있다. ■ 오랫동안 금연하다가 최근 들어 다시 담배를 피운다는데. 10년 전에는 한 서너갑씩 피웠는데 계속 기침이 나왔다.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곤 담배를 끊었는데 바로 기침이 없어지더라. <춘향뎐> 때 촬영현장에서 하도 끓어 2∼3대 피우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다시 피우기 시작한 건 5개월쯤 전부터다. 후쿠오카영화제에 참가했는데, 정일성 촬영감독이 옆에서 꼬셔대더라. 보기와는 달리 아주 나쁜 사람이다. (웃음) 그때부터 다시 담배를 잡았는데 요즘은 다음 작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끓탕하고 있어 하루에 두갑씩 피운다. 속으로 ‘이제 다 살았는데 오래 살겠다고 앙탈부릴 이유도 없다’는 식으로 변명하고 있다. ■ 어떻게 장승업 이야기에 이르게 됐나. 조선말기 화가인 장승업에 관한 얘기는 전에 이상현씨가 나오는 연극에서도 했고 방송에서도 했다고 들었다. 흥미는 갖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또 누가 그 이야기를 했다. 판소리나 팔아먹으면 좋은데, 두번이나 했으니 이제 또 그건 못 팔아먹잖나. (웃음) 걱정이긴 하다. 내가 그림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나. 그런데 또 일을 벌이게 됐다. 장승업은 지난해 12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돼 서울대에서 세미나도 갖고 작품 전시회도 했었다. 나도 전시도 보고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그에 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수집할 수 있는 건 거의 다 수집해놓았다. 또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2학년생이 우리의 선생이 돼서 그림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다. 아주 어린 사람인데 틀에 매이지 않는 사고를 가졌다. 장승업에 대한 기성 화단의 평가에 묶이지 않았고 비판적인 눈도 가졌다. 기왕에 알려진 장승업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떠도는 소리를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명예고 부귀고 다 떨치고 왕이 병풍을 그리라고 명령해도 담을 넘어 도망가는 자유인 이미지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과연 진짜 자유인이냐 하면, 나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림은 아니지만 평생을 영화에 매달려 사는 사람인데 그렇게 훨훨 털고 날아다닐 수는 없다. 그렇게 보여도, 속엔 무지 고통스러운 게 있는 거다. 오히려 그래서 바깥으로 튄 것이지. 이 사람이 어떤 정신의 작가인가를 밝혀내는 것은 누구도 해낸 일이 없기 때문에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작업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인물 성격이나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왔을지 거의 윤곽을 잡아내는 그런 단계에 있다. ■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나올 거라는 예감이 든다. 나도 그런 기대가 있다. 장승업은 행적이 좀 기인다운 데도 있고 살았던 시대도 아주 파란만장한 때라서 내 영화 중에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또 그가 무학이라는 점이나, 영화감독과 화가가 지향하는 점이 비슷할 수 있기 때문에 좀 공통점을 느낀다. 내가 부대낀 고통 같은 것이나 내가 느꼈던 즐거움을 쏟아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유리한 점이 있다. ■ 사료가 충분치 않다면, 아무래도 허구를 많이 가미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삶에 관한 기록은 빈 데가 많다. 게다가 장승업이 기행을 벌이게 된 필연성을 보여주려면 도리없이 허구가 필요해진다. 사실 그의 행적 자체도 뻥튀기된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채울 허구라는 것은 그의 기인다운 모습을 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런 기행을 기행처럼 보이게 하는 삶이 왜, 어디로부터 비롯됐는가를 받침하는 얘기를 착실하게 채우기 위한 것이다. ■ 장승업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핏 <서편제>가 떠올랐다. 떠돌이 예술가의 여정을 담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듣고보니 아닌 것 같다. 이번엔 여정이 아니라 한 예술가의 내면이 중심이 될 것 같다. 그렇다. 사실 나는 한 사람의 내면을 쫓아가는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객관적인 역사나 사건을 주로 담았지. 이것은 작가 내면의 세계를 다루면서 그런 내면이 표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을 그리려고 한다. 사실 그가 화가로 성공했는가, 아닌가는 관심이 아니다. 자기 의지를 태우고 간 화가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 <태백산맥> <축제> <서편제> 등을 보면, 근대와 전통이 교차하는 지점에 주인공들이 서 있다. 이번 작품도 이와 유사한 구도다. 뿌리를 잃고 떠돌며 살 수밖에 없는 시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맥이 같다고 생각한다. 오원 장승업도 고통스런 삶을 산수화로 표현했다. 산수화 같은 삶, 도달할 없는 경지에 그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다. 아마 현세로부터 일탈하고픈 욕망 때문에 산수화로 빠졌던 것 같다. 그는 한 화가로 족적을 남기자는 각오 아래 살았지만 잘 평가받진 못하고 있다. 조선 4대 화가라곤 하지만 장승업의 그림은 평가절하돼왔다. 중국 그림을 모방했다는 비판도 듣는다. 하지만 내가 찍고자 하는 것은 이런 점이 아니다. 치열하게 자기 완성의 길을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냐에 포커스를 맞출 생각이다. ■ 그런 면에선 이 영화는 가장 개인적인 영화, 감독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런 방면으로는 유일한 영화가 될 것 같다. 그동안은 남의 삶을 구현해냈다면 내 삶의 역할이 그 영화를 통해 깊이 투영될 수 있는 그런 영화일 것 같다. ■ <춘향뎐>은 전세계 어디선가 상영되고 있고 여전히 갖가지 영화제에 초청되고 있다. 서둘러 차기작에 착수했다는 느낌도 있다. 사실은 내가 <춘향뎐>에만 더 머물러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젊은 사람들 영화를 찍는다 해도 되지도 않을 것이고 내 나이만한 영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극동에 사는 사람들의 삶, 역사, 전통, 가치있는 예술을 담아서 세계라는 꽃밭에 작은 꽃으로서 역할하는 것이 내 일이라고 말하며 돌아다녀왔다. <춘향뎐>이란 영화는 처음으로 그런 형식을 취한 특별한 영화였고, 또 지금은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춘향뎐>을 하면서 그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이젠 그것을 또 넘어선 작품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답답하다. ■ <춘향뎐> 이전까지 대체로 전통적인 기법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춘향뎐>에서는 판소리를 끌어들여와 전혀 새로운 영화문법을 창조했다. 이번에는 그림이다. 다른 예술과 영화의 만남을 통해 형식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때로는 새로운 형식에 도전한다는 것에 대해 ‘이 무슨 부질없는 짓이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형식에 힘을 쏟아부으며 멈칫거릴 게 아니고 있는 형식 안에서 편하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유혹도 받는다. 결과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보단 내가 예술적 감성으로 느끼는 것을 충분히, 편안하게 담는 게 안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기존의 형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늘 쫓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을 놓고서도 지금 마음이 무겁다. ■ 어쨌든 그림이 영화의 소품처럼 배치되진 않을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림의 비중은. 동양화는 폭과 넓이가 서양화와 달라 잡아내기가 어렵다. 또 그림을 감상하려면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런 깊이를 영화로 찍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적으로 빠르게 진행하려면 클로즈업을 많이 구사해야 할 것 같다. 멀찍이 찍어놓고 감상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나. <춘향뎐>에서 소리가 따라오기 때문에 이해를 빨리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림을 이용해서 빠른 이해를 도울 방법을 생각중이다. 또 나도 초심자니까 기왕이면 한국화, 동양화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교양강좌처럼 담을 계획도 있다. <서편제> 때 초심자 입장에서 판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만든 것처럼. 한국화의 초심자를 위해 영화 한편 보고나면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 이야기의 리듬을 잡기 어려울 것 같다. 리듬도 그렇고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은데, 신문물이 들어오고 하는 외적 상황을 따로 설명하지 않고 한 화가의 생애를 통해 경제적으로 쉽게 보여주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게 굉장히 어렵다. 그게 밀도있게 된다면 상당히 큰 성과가 있을 것 같다. ■ 2시간 동안 한 예술가의 내면과 격동의 시대를 함께 담는 것은 보통 어렵지 않겠다. 그래도 시대 부분은 짊어지고 가야 할 것 같다. 오원은 신선이 쉴 만한 곳을 많이 그렸는데, 그 자신이 튀어가고 싶어하던 은일한 휴식처에 그렇게 그림을 통해 도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를 설명하려면 이 시대적 배경이 같이 물리는 게 효과적이다. ■ 시나리오 작업은 어떻게 하고 있나. 아직 시작도 못했다. 연출 플랜을 확실히 짜놓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미리 축을 세워놓은 다음에야 작가를 참여시킬 생각이다. 굉장히…, 아마 여러 번 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혹시 그림에 관해서도 잘 알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도 박식한 시나리오 작가 없나. 내가 왜 그렇게 어려운 자리를 만들었는지…. 다음에는 꼭 단조롭고 쉬운 얘기를 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꼭 그런 데 걸려든다. ■ 그외에 이번 영화와 관련, 정해진 사항이 있나. 정일성 촬영감독이 참여한다는 정도뿐이다. 될 수 있으면 <춘향뎐> 스탭을 중심으로 꾸려갈 생각이다. <춘향뎐>은 내가 했다기보다 자기 작품으로 여기고 열심히 일해준 모든 스탭이 만들었다. 조감독부터 말단 조수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맡은 부분에서 뭔가 잘못되면 다시 가자고 할 정도로 모두 이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 ■ 제작 일정은. 5월부터 시작한다. 지금 추세로 볼 때 한달쯤 연기될 수도 있다. 이번엔 정말 연기력이 탄탄한 배우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장군의 아들> <춘향뎐>처럼 신인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물론 연기력이 뛰어난 신인이 있다면 모르지만…. ■ <춘향뎐>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 평론가들에게 좀 섭섭하진 않았나. 감독 입장으로선 자신이 무언가 해놓은 것을 읽어줬을 때 보람을 느끼는데 사실 국내에선 그런 게 좀 드물었다. 관객도 안 들어 아주 곤혹스러웠다. 이에 비해 해외에 나가서 인터뷰하면서 위안이 됐다. 외국에는 깜짝 놀랄 질문을 받은 경우도 있다. 미국 LA던가 어디선가 영화주간지의 젊은 친구가 와서는, “춘향이 매질당하는 장면은 춘향의 목소리가 판소리로 대체되면서 카메라가 뒤로 쭉 빠지는데, 또 그것 덕분에 그 장면의 격조가 올라가는데, 춘향의 고통을 직접 담고 싶은 유혹에서 어떻게 벗어났느냐”는 질문을 하더라. 나는 그 질문에 놀랐다. 실제로 난 처음에 춘향의 아픔을 담고팠는데, 그리고 찍으면서도 그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 앙다물고 버텼는데 그렇게 물어보는 것 아닌가. 그래서 “당신 기자 맞소? 감독했던 사람 아니오?”라고 물었다. ■ 해외에서 보람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텔룰라이드영화제라고 있다. 인구라 해봐야 3천명 남짓한 마을에서 열리는 영화제인데 피에르 뤼시앵이 그러더라, 미국시장에 진출하려면 그 영화제에 가서 꼭 알려야 한다고. 작지만 미국영화계에서 올 만한 사람 다 오니까 굉장히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ID 카드 한장에 2500달러, 2천달러씩 하는데도 전국에서 마니아들이 찾아오더라. 거기서 <춘향뎐>의 흥행이 가장 잘됐다. 집행부에서도 무척 고맙게 여겼다. 실험영화의 대부인 스탠 브래키지 같은 사람을 만났는데 셰익스피어 원작영화 중에는 명작이 많은데, <춘향뎐>도 그런 작품인 것 같다며 문화적 이질감은 있지만 영화로 보편성을 획득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뉴욕이나 LA에서 온 사람들도 굉장히 호의적인 평가를 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져서 그랬는지 뉴욕영화제에 갔을 때 무척 편해졌다. ■ 최근 들어 아시아영화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얻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흥행도 잘되는 상황까지 맞았다. 할리우드가 자신의 영화제작 능력이 한계에 온 탓에 자꾸 눈을 돌리는데 마침 아시아영화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발견한 것 같다. 사실 서구인들은 아시아인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데, 하도 매체가 발달하면서 상식도 쌓이고 해서 영화를 읽어내는 게 쉬워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춘향뎐>에서 조감독을 했던 김대승 감독의 <번지점프를 하다>가 최근에 개봉했다. 후배들의 영화도 좀 봤는지. 김대승은 하도 순해빠져 자기 얘기를 잘하지 않고 해서 그런지, 연출자로서의 장점을 읽어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상당히 궁금했는데 막상 그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전혀 읽어내지 못했던 좋은 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외에 요즘 본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임상수 감독의 <눈물> 정도다. <눈물>은 소재 자체가 우리처럼 나이 먹은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거북한데, 감독의 패기나 그 세대를 표현하는 능력은 뛰어난 것 같더라. ■ 최근 충무로에선 화려한 액션을 담은 큰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굉장히 부럽기도 하다. 60년대가 한국영화의 황금기라고 하지만 한국영화 사상 가장 활기롭고 풍요로운 조건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점에서 지금이 오히려 전성기라는 느낌이다. 나는 보릿고개를 살아온 감독이다보니 한국 내 시장의 규모만을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 제작비에 50억원이 들어간다고 하면 입이 쫙쫙 벌어진다. 그렇게 들여 만든 작품 몇편 때문에 이번 호황이 타격을 받는다면 바람직하진 않겠지만, 그렇게 돈을 써보는 연습을 해서 소기의 성과를 내면 좋은 것 아닌가. ■ <장군의 아들> 같은 본격 상업영화를 다시 찍어볼 생각은 없나. 내가 놀던 곳이 바로 상업영화다. (웃음) 왜 그리움이 없겠나. <장군의 아들> 해놓고 욕을 먹었는데…. 그래도 기회가 닿으면 찍으려 한다. 하긴 상업영화를 찍는다 해도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세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선 크게 못 벗어날 것 같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문석 기자 ssoony@hani.co.kr

바람의 비밀

한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기까지에는 어떤 힘들이 작용하는 것일까? 현대 생물학은 유전자가 개체 성장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말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의 성장이 유전정보만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장은 드라마가 아니라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의 따분한 운명적 전개에 불과하다.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예술의 천재들, 탁월한 인생을 전개한 개인들의 삶은 인생이 생물학적 운명의 단순 전개가 아니라 그 운명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유전적 결함과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베토벤,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헬렌 켈러는 없었을 것이고 인간 창조성의 보물창고는 한없이 초라해졌을 것이다. 미래사회는 개체의 유전적 결함을 제거하는 데 막대한 정성을 쏟게 되겠지만, 그러나 잊지 말지어다, 인간적 위대성은 어떤 완전성의 결과이기보다는 오히려 결함의 결과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 모든 성장의 서사(Bildungsroman)가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그들을 키운 비생물학적 비밀의 단서들이 거기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라고 우리의 어떤 시인은 노래했지만, 이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니라 우리네 유소년기의 모호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들이 묻힌 깊은 지층, 풍요로운 의미들의 잉여영역이다. 거기에는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논두렁 개구리 울음소리, 흐드러진 복사꽃, 동네 바보의 언어, 불타는 노을, 골목의 달빛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미친 여자, 귀신 나오는 집, 밤길의 공동묘지,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한 최초의 성취, 최초의 거짓말, 최초의 상실과 이별과 상처, 영광과 수치의 순간들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키운 그 비밀스런 ‘바람’의 목록을 이룬다. 이 바람은 유전자 장부에는 들어 있지 않고 그것의 비밀은 유전자 독법으로 해독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쓴 <해뜨기 전의 한 시간>(An Hour Before Daylight)이라는 제목의 소년 시절 회고록에 대한 서평들을 열심히 싣고 있다. 남부 조지아의 한 시골 소년을 대통령이 되게 한 바람은 무엇일까? 소년 카터는 근세 미국사의 가장 어둡고 힘들었던 시기에 가난한 시골 농장에서 온갖 농장일을 하며 자란다. 그러나 소년기를 되돌아보는 그의 눈길은 따스하다. 땅에 대한 그의 사랑과 신뢰는 감동적이다. 흙이 좋아 노상 맨발로 뛰어다니고 맨발로 진흙 속을 걷기 좋아하던 소년, 농가 소출을 줄이라는 정부 지시 때문에 다 자란 땅콩밭을 갈아엎으며 울던 아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어머니의 영향) 아버지에게, 그리고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일을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소년- 그가 어린 시절의 카터이다. 한번은 새로 이사할 집을 구경하러 갔다가 아버지가 열쇠를 갖고 오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아버지는 간신히 반쪽만 열리는 창문 틈으로 카터를 들여보내 안에서 문을 따게 한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쓸모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으로 소년의 가슴은 뛴다. 그가 네살 때의 일이다. 근년의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흑인에 대해 가장 동정적이었고 흑백 인종문제에 관한 한 가장 훌륭한 정책들을 편 것은 린든 비 존슨, 지미 카터, 빌 클린턴이라는 것이 미국 언론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이 때문에, 흑백 분리의 역사적 뿌리가 깊은 남부 조지아에서 어떻게 흑인에 동정적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는가도 많은 사람들을 궁금하게 하는 카터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우연찮게도, 존슨과 클린턴도 남부 출신이다). 그 비밀을 풀어줄 열쇠 역시 카터를 키운 소년 시절의 바람 속에 있다. 흑인 소작농들의 집에 무시로 드나들며 같이 먹고 자고 흑인 아이들과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소년시대이다. 그 무구했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흑백분리의 사회질서와 위계서열을 알게 되고 그를 대하는 흑인 아이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그것은 아이들 사이의 “평등이 사라지고” 흑인은 흑인, 백인은 백인으로 나눠지는 인간분할의 순간이다. 그 분할은 소년 카터를 슬프게 한다(이 대목은 포크너의 어떤 소설에서 한 백인 소년이 흑백분리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면서 경험하는 ‘슬픔과 수치’를 생각나게 한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 흑인은 없지만 인간분할은 우리 사회의 슬픔과 수치이다. “이방인을 너희들 중의 하나처럼 대접하라. 너희는 그의 가슴을 알고 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였으므로”라고 히브리 경전 <레위기>의 한 대목은 말한다. 타자를 향해 열릴 줄 아는 가슴은 어린 시절에 만들어진다. 성장의 비밀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jidoh@khu.ac.kr

한국의 윌리엄 와일러가 되다

역시 신비주의와 샤머니즘 계열의 1978년작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최인훈의 희곡작품이었는데 어느 극단의 공연을 보고 나는 영상화하는 꿈을 키웠다. 마침 나의 전작인 <문>(1977)이 우수영화상을 수상하자 제작자 강대진(현 전국극장연합회 회장)이 그 공로를 인정했음인지 나의 간절한 청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흥행물은 아니니까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연극은 무대라는 좁은 공간에 그 일루전을 집약적으로, 구심점을 갖고 표현했으나 영화는 넓은 공간과 다양한 영상표현이 가능하기에 나는 시네포엠으로 그 몽환적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관객의 반응은 화면은 아름답고 서정적이나 너무 상징적이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흥행은 참패하고 말았다. 1979년 <장마>는 <불꽃>(1975)으로 대종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남아진흥의 고 서종호 사장이 제안한 영화다. 어느 날 윤흥길의 소설 <장마>를 들고 온 서 사장이 “유 감독은 한국의 윌리엄 와일러니까…”라고 추어올리면서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테마는 남북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아픔을 거치면서 결국 민족의 동질성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당시 남쪽에 시집간 딸(선우용녀)네 집으로 피난내려온 외할머니(황정순, 소설은 어린 외손주 동만의 시각으로 전쟁과 사람들을 묘사한다)와 대학생인 외삼촌(강우석) 그리고 처녀인 이모가 사돈댁인 할머니(김신재)의 환영으로 다정한 생활을 해나가는데 어느 날 인민군이 이 마을을 점령한다. 이 와중에 친삼촌(이대근)은 인민군에 협조하다 국군의 진격으로 가까운 산속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고, 외삼촌은 숨어 있다가 국군으로 입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의 전사통지서가 온다. 외할머니는 격분한 나머지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치는 날 그 번갯불로 앞산에 숨어 있는 빨치산들을 모두 지져버려달라고 악을 쓰며 저주한다. 그 소리를 듣고 친할머니가 안방을 박차고 나와 소리소리 지르며 말싸움이 시작된다. 이윽고 격앙된 친할머니는 며느리까지 내쫓겠다고 악을 쓴다. 동만어머니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사이에서 고초를 당해야 하고 철없는 동만이는 어른들이 왜 싸우는지 알 리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삼촌이 몰래 집을 찾아왔었는데, 그뒤 동만은 낯선 남자에게 삼촌이 야밤에 집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멋모르고 발설하는 바람에 아버지(김석훈)가 형사에 잡혀가 고초를 겪는 사건이 벌어진다. 동만은 더욱 친할머니의 미움을 사면서 일체 밖에 나가지 못하게 엄명을 받는다. 이 무렵 빨치산들이 가까운 읍내를 습격하여 전원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동만이 아버지는 삼촌이 죽었을 것이라 단정하지만 친할머니는 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점쟁이를 찾아간 친할머니는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확언과 아들이 언제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까지 들은 것이다. 할머니는 점쟁이가 일러준 날에 푸짐한 음식과 불을 밝혀 기다렸으나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다음날 새벽이 다 되어서야 구렁이 한 마리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인 죽은 자의 영혼이 구렁이 속으로 옮겨와 마지막 집을 들러본다는 속설에 따라 외할머니는 구렁이를 삼촌의 혼령으로 믿고 여러 의식으로 기도하며 좋은 곳으로 승천하라고 정중히 빌며 내보낸다. 이 작품의 무대는 경북 안동 근방의 큰 기와집들이 많은 보존마을로 잡았다. 장마철에 맞추어 촬영했기 때문에 21일 만에 끝낼 수가 있었다. 느린 감독이란 오명을 벗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원작소설은 장마철의 농촌 분위기를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이 많은 것이 특색이었는데 그런 분위기를 살리려 애쓰다보니 영화는 2시간10분이 되었다. 제작자가 1시간50분 이내로 줄여달라고 해서 약 20분을 잘라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장마철 촬영이라 해도 빗줄기의 일관성을 위해 어려운 소방차를 한두대 빌려야 했다. 구렁이 촬영은 20분 분량을 촬영해 편집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뉴욕, 파리, 스위스 등에서 상영돼 우리 고유의 무속과 분단의 아픔에 대한 큰 관심을 끌어냈다. 79년 대종상에서 우수작품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유현목|영화감독·1925년생·<오발탄> <막차로 온 손님들> 등 연출

이 만화를 보여 줘

<가끔씩 만화 도매상에서 신간들을 둘러보다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아니, 이게 언제 적 작품인데 지금 번역되어 나왔지? 그중에는 <터치>나 <은하철도 999> 같은 고전적이면서도, 국내에 꽤나 명성을 얻고 있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유한 클럽>이나 <에로이카의 사랑을 담아서>처럼 만화사적으로는 중요하지만 국내에서는 별달리 알려져 있지 않고, 그다지 인기를 얻을 가능성도 없어보이는 작품들을 접하면 솔직히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만화사(漫畵史)의 빈곳을 채우려는 출판사의 의미있는 작업이라 여기면서 흐믓한 마음을 가져보려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인기에 편승해, 그 작가의 어설픈 초기 단편선에 불과한 작품들을 OOO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펴내는 것을 보면 돌연 실망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원작의 인기에 편승해 후배작가가 그린 리메이크작을 마치 문제의 원작처럼 내놓는 경우도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진짜 번역되어야 할, 독자들의 넓고 깊은 입맛을 맞춰줄 작품들은 아직도 한국어판의 자태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강력한 뿌리에 어쩔 수 없이 얽혀 있는 우리 만화사의 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더욱 생생한 잎들을 펼쳐내기 위해서라도 이 작품들은 꼭 번역해주기 바란다. 너희가 호러를 아느냐? 우리 만화문화의 가장 빈곳 중 하나가 호러만화다. 워낙 소개된 만화가 없다보니 이토 준지의 작품이 일본 호러의 전부인 양 과대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호러의 참맛을 보려면 70년대 우메즈 가즈오의 작품들을 펼쳐야만 한다. 사실 이토 준지의 호러는 우메즈의 70년대에 대한 끊임없는 향수 속에 존재한다. 우메즈의 영향력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마코토짱>은 괴팍한 악동들이 펼치는 개그 대소동의 선구적인 작품이고, <표류교실>은 세기말 신드롬의 중심에 존재하는 문제적 걸작이다. 다른 작품들이 시대적인 여건 때문에 번역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표류교실>만큼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를 계속 발산할 만큼 압도적인 작품으로, 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완전히 파멸에 처한 미래의 땅으로 통째로 날아가버린 초등학교, 그 안에서 이기적인 선생들은 자멸해가고, 소년 소녀들이 약육강식의 전쟁을 벌이고, 그들만의 사회와 종교를 만들어간다. 동시대의 <데빌맨>(나가이 고)과 더불어 세기말에 대한 극한적인 상상력을 펼쳐낸 작품. <아키라>(오오토모 가쓰히로)와 <드래곤 헤드>(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전율적인 상상력도 결국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국내에 꽤나 여러 작품이 소개되고 있지만, 정서의 차이로 큰 반응을 얻지 못한 모치즈키 미네타로. 그래도 그의 비어 있는 한 작품, <좌부녀>(座敷女, 1993)만큼은 꼭 번역되었으면 한다. <물장구치는 금붕어>의 청춘 개그와 과감히 절연하고 호러의 깊은 계곡으로 침잠해 들어간 걸작 스토커 드라마. 평범한 대학생의 집에 찾아 들어온 한 여자의 서늘한 공격은 서서히 그를 파멸로 몰고 들어간다. 압도적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몬스터>(우라사와 나오키)의 초반부를 능가하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눈동자. 마쓰모토의 리얼리즘, 이노우에의 스타일 <핑퐁>으로 이미 국내의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희망과 절망을 한꺼번에 안겨준 사나이, 마쓰모토 다이요. 오오토모 가쓰히로의 영화적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탁월한 그래피티 아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 소장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사실 무엇보다 그의 탁월함을 느끼게 해줄 작품은 <철근 콘크리트>이지만, 화려한 타이포그래피를 해치게 될지도 모를 섣부른 번역이 두렵기도 하고, 좀더 소박하게 그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화남>(花男)이 먼저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이언츠 야구 신화의 70년대를 잊지 못하는 시대 착오의 아버지와 시건방진 꼬마 아들의 풋풋한 만남. 마쓰모토의 최신작인 <고고 몬스터>도 그 단단한 자태를 한국어로 드러내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그 화려한 장정 그대로. 마쓰모토와는 또다른 면모로 동시대의 일본 젊은이들을 흥분시키고 있는 주인공, 이노우에 산타. 그의 문제작들이 한번도 정식으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보인다. 하나는 그의 작품들이 스트리트 매거진 <분>(Boon)과 같은 비메이저 출판 계통에서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시의 폭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과격한 표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강도의 범죄물들이 국내에서도 꽤나 출판되고 있는 가운데, 이 화려한 폭력의 스타일리스트를 우리 독자들이 못 만날 이유도 없다. <인인13> <도쿄 트라입(오리지널)> <본 투 다이>도 볼 만하지만, <도쿄 트라입2>가 오늘날 도쿄의 젊은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가장 리얼하게 보여줄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데생과 화력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 스타일 감각만큼은 높이 쳐줄 만하다. 서점에서보다 시부야의 음반매장 HMV에서 더 잘 팔리는 만화. 진짜, 어른 여자들의 만화 90년대 일본 여성만화의 최대 성과라 불리는 <해피 마니아> <젤리 인 더 메리 고 라운드>의 안노 모요코조차 아직 국내에서 확실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레이디스 코믹스의 걸작들을 소개해달라고 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사실 80년대 레이디스 코믹스의 한축을 형성한 사쿠라자와 에리카조차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리 우리 여성 독자들의 연령층이 높아졌다고 해도, ‘성인 여성만화’가 자기 자리를 잡기엔 역부족이라고 지레 포기하는 것이 맞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레이디스 코믹스계의 <짱구는 못 말려>에 불과한 <미녀는 괴로워>가 판을 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지니, 정말이지 오카자키의 교코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후반 미소년 동성애의 꽃놀이판에 경쾌하면서도 솔직한 사랑과 섹스이야기를 던져버린, 진짜 어른 여자들의 만화 <입술부터 산탄총> <제오라마 보이 파노라마 걸>도 좋다. 그러나 발랄한 연애의 밑바닥에 있는 청춘의 그림자를 묘사해낸 문제작, 죽음에 대한 가벼운 듯 서늘한 사색의 어조로 인해, 문학평론가들로부터도 질투를 받아온 <리버스 에지>라면 더욱 좋다. 사실 그녀를 보지 않는다면, 진짜 안노 모요코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도 많다. 왜 이 작품은 말하지 않았냐고, 항의의 메일을 보낼 일본 만화광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나 스스로도 정말 보여주고픈, 쓰게 요시하루와 일본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 정도라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으면서 일본만화의 진정한 힘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작품부터 이야기했다. 당대의 작품을 더욱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도, 그보다 뛰어난 우리 만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고리들부터 채워나갔으면 좋겠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

흐르는 강물처럼

루시드 폴 / 라디오 뮤직 발매 루시드 폴은 <송시> <파노라마> <시간> 등으로 알려진 미선이의 메인송라이터 조윤석이 1년여에 걸쳐 준비한 솔로 프로젝트이다. 98년 데뷔앨범 [Drifting]을 발표한 미선이는 기존 밴드의 일반적인 방식에서 조금 어긋나 있는 존재였다. ‘록’보다는 ‘팝’을, 그것도 주류 팝이 아닌 보사노바나 뉴에이지를 즐겨 듣던 미선이의 연주는 ‘저항’이 아닌 ‘서정’에 중심이 실려 있었고, 이들은 어떻게 연주하느냐보다는 무엇을 노래하고 싶은지에 충실했다. ‘개 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꽃이 피네’(<진달래 타이머>)라고 여린 발성으로 자신의 눈에 비치는 세상을 노래하던 미선이는 요란스런 프로모션 없이도 천천히 팬들의 반응을 얻었고, [Drifting]은 몇년이 지난 지금도 팬들이 꾸준히 찾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Drifting]은 최근 4곡의 보너스 트랙이 추가되어 [Drifting Again]이란 이름으로 재발매되었다). 현재 미선이는 멤버의 군입대로 활동이 중지된 상태이다. 허물어져가는 주변과의 관계, 일그러진 연인의 초상, 무기력한 그리움. 나일론 기타 아르페지오의 느릿한 흐름을 타고 흐릿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루시드 폴의 셀프타이틀 앨범에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감정의 굴곡이 발꿈치의 생채기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다가오는 통증처럼 세심하게 새겨져 있다. 이러한 면모는 미선이가 여타 밴드뿐만 아니라 ‘모던록’ 밴드로 통칭되는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은희의 노을 등과도 차별되는 감성을 전하는 이유였고, 루시드 폴은 이러한 미선이 시절의 감성이 좀더 세밀하게 확대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조윤석이 [Drifting]을 발표하며 밝혔던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음악을 통해 하나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일상에서 놓치곤 하던 감정이나 경험들을 자각하게 되는 것, 그래서 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제 이상적인 바람이에요. 눈을 감든, 누워서 듣든 아무 상관없는 거죠. 느낌이 있는, 생각이 담겨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앨범의 시작을 여는 <새>(밴드 버전)에서 다시 <새>(조윤석의 친우 이규호가 부른 어쿠스틱 버전)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한 호흡으로 일곱 트랙이 지나간다. 이는 근래 국내의 어떤 싱어송라이터에게서도 보지 못한 면모다. 주류 가요에 익숙한 이들에겐 이러한 점이 지루함으로 다가올 수 있겠지만 앨범 내에서 하나의 흐름을 갖는다는 것은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에 대한 마인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소중한 점이다. 그래서 좀 뜬금없다 싶은 힙합 트랙 [Take 1[의 선택이 아쉽게 느껴진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두곡의 인스트루멘틀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Outro]까지 모두 열곡이 실려 있는 <루시드 폴>은 나일론과 스틸 어쿠스틱 기타, 오보에, 아코디언 등 어쿠스틱 악기가 중용되었고,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와도 어색하지 않을 법한 친밀한 사운드를 내고 있다. 현란한 비트나 멜로디의 심한 굴곡없이 이야기하듯 노래하는 루시드 폴의 곡들은 마치 70년대 모던 포크와 뉴에이지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처럼 들린다. (무리한 비교임을 감수하자면) 감성적으로 영미의 80년대 인디팝 밴드와 90년대 후반 포크팝 싱어송라이터들의 자기고백적인 작업물과도 연결고리가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루시드 폴>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나의 하류를 지나> <풍경은 언제나> <은행나무 숲> 등에서 들리는 우리말로 풀어낸 사려깊은 가사들과(‘나는 이미 찾는 이 없고/ 겨울 오면 태공들도 떠나/ 해의 고향은 서쪽 바다/ 너는 나의 하류를 지나네’(<나의 하류를 지나>)) 그것을 온전하게 들리도록 하는 사운드의 어울림이다. 그래서 루시드 폴의 곡들은 무리하게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곡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렇게 가식적이지도 넘치지도 않는 감정의 여정을 얼마 만에 만나는 것인지, 미친 듯이 눈이 쏟아지는, 그래서 세상도 덩달아 미쳐가는 지금 루시드 폴은 함께 부대껴도 좋은,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로 다가온다. 김민규/ 대중음악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 인터뷰

“평론가의 역할은 좋은 영화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다. 평론에 따라 움직이는 관객은 얼마되지 않는다. 도쿄라면 한 3천명 될까. 이건 평론이 자국 내만으로 한정할 때 역시 별다른 힘이 없다는 걸 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평론이라면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는 일이 중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하스미와의 인터뷰는 2월8일 오전 도쿄대 총장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지난 1월 그의 대표적인 저서 가운데 하나인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 펴냄) 번역 출간과 서울시네마테크의 오즈 야스지로 회고전을 계기로 인터뷰를 요청했고, 그는 흔쾌히 응했다. 도쿄대 총장 노릇을 하느라 영화에 소홀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쉬리> <거짓말>에 대한 논평을 잊지 않았으며, 퇴임 이후엔 존 포드론을 쓰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당신은 1960년대 프랑스에서 불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지식인이다. 당시의 일본 지식인사회는 영화를 진지한 예술로 받아들이기 전일 텐데, 어떤 계기로 영화평론에 뛰어들었나. 내가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1962년부터 1965년까지는 프랑스 누벨바그가 만개한 시기였다. 고다르, 트뤼포, 로메르 같은 사람이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파리의 극장과 시네마테크를 오가며 새로운 물결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위대한 작가라고 해서 본 건 물론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작품의 질을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었다. 미국영화, 특히 액션영화도 좋아한다. 바로 이런 점이 보통의 지식인들이 영화에 접근하는 것과 다른 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지식을 쌓은 연후에 뒤늦게 영화에 입문하는 사람들의 경우 일종의 ‘명작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의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았고 이것이 나중에 영화글 쓰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도 그때 발견했다. 나는 그때 오즈를 대가라고 생각하면서 본 것이 아니라 일본의 촬영소의 감독 중 하나로 생각하면서 보았다. 아무튼 프랑스 유학 시절은 영화가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이며 문화라는 점을 알게 해주었고, 그러다보니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됐다. ■동료 학자들의 눈총이 따가왔을 것 같다. 내가 1973년 도쿄대에서 영화학 강좌를 만들었을 때,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고 들었다. 본래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니까, 저런 짓을 한다고들 생각했던 것 같다. (웃음) ■영화평론뿐만 아니라, 영화상영활동 이를테면 시네마테크 운동도 활발하게 벌였는데, 그 역시 이례적이다. 1970년대엔 그게 절실했다. 당시엔 비디오가 없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극장에서 필름으로 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아테네 프랑세 문화센터에서 대니얼 슈미트, 빔 벤더스 같은 감독을 소개했다. 80년대 이후엔 현대 작가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렌 스튜디오 영화 같은 일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영화도 소개했다. 상영회를 열면, 도쿄 시네클럽의 청년들이 몰려왔는데, 그들을 보면 의욕이 솟았다. 이들은 영화에 대한 해석 이전에 새로운 영화 자체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했다. 상영회에 몰려오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게 내가 상영활동을 벌이게 된 원동력이었다. ■일본의 기성 평단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 평단의 큰 문제는 새로 등장한 사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전의 미조구치 겐지만 해도 그렇다. 동시대 평론가들보다는 외국에서 더 높이 평가됐다. 오즈 야스지로도 그렇고. 현재 일본의 영화평론가들은 그 부정적 유산을 반복하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도 그렇지 않은가.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진지한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경향이 못마땅하다. 상을 받기 이전부터 나는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가치를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1996년 도쿄에서 그의 영화에 대한 국제심포지엄을 열기도 했다. 이런 활동에서 평론가 친구 하나가 큰힘이 됐다. 야마네 사다오라는 사람이다. 그 친구하고 같이 상영활동할 땐 혼자할 때보다 내겐 두배, 세배 힘이 난다. ■현재 영화계에서 맹활약을 벌이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가 학생 시절에 당신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다. 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구로사와나 수오, 아오야마가 감성이 제일 예민할 때 나는 그들을 만났다. 강의할 때 그 친구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내 강의를 듣고 당신이 선택할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화에 대해 쓰는 것, 둘은 영화를 만드는 것. 내가 보기에 이들은 평론가로서도 굉장히 뛰어난 인물들이었고, 평론가의 길을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만들라고 권했다. 그 길이 더 가치있는 길이니까. 운이 좋았다는 게 여기도 적용된다. 당시엔 쇼치쿠, 닛카쓰 등 일본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거의 괴멸하는 수준이라 할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더이상 도제 시스템도 지켜지지 않았고. 젊은 감독 지망생들에게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프랑스 누벨바그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당신의 영향이 깊게 밴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초기의 영화광적인 영화, 영화사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갖가지 인용으로 가득한 영화 말이다. 90년대엔 거기서 벗어나 각자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처음엔 그랬다고 해도 고다르나 트뤼포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의 길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선생으로서 내가 한 일은 최초의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당신의 저서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됐다. 이 책에서 당신은 오즈의 영화를 일본적, 동양적 영화미학의 전범으로 규정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즈를 아방가르드적 에너지로 충만한 작가로 파악하고 있다. 동양적 미의식이란 손쉬운 전제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에게도 오즈적인 요소가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중요한 아시아 감독에게도 오즈적인 것이 발견된다. 그런데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를 만들 때까지도 오즈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동양적 미의식이란 게 없다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미묘하고 섬세한 문제다. 오즈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커팅의 영화, 편집의 영화다.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는 롱테이크의 영화, 이를테면 바라보는 영화다. 컷 수를 비교하면 오즈가 허우샤오시엔의 3배는 될 것이다. 그 점에선 닮지 않았다. 그러나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그건 세계에 대한 시선의 문제다. 결론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대고 있는 동안 결론이 서서히 도출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방식이 아시아에만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시아감독들에 확실히 많다는 건 인정한다. 나는 이게 구체성의 길이고, 현재 많은 아시아영화는 구체성의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건 포스터모더니즘에서 모더니즘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두 한국영화를 예로 들고 싶다. <쉬리>는 굉장히 추상적인 영화다. 내용은 분명 한국사회의 현실적 상황에서 전개되지만 시선은 거의 게임적이라 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 <거짓말>은 구체적이다. 동시대적인 생생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격렬한 사도-마조히즘에도 불구하고 내게 이 영화는 매우 아시아적인 텍스트로 보인다. ■당신은 오랫동안 젊은이의 열정에 고무받고 젊은이들에게서 새로운 재능을 발견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저서를 보면 젊은이들에게 좀더 진지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나이든 선생의 훈계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 같다. 난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사회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를테면 옛날엔 도쿄대를 졸업하면 모든 게 보장됐다. 이제 더이상 그렇지 않다. ‘구질서’가 붕괴되고 ‘신질서’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변화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총장이 되어 잘난 척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웃음) ■미국에서는 물론 프랑스에서도 평론가의 역할에 대한 신뢰가 의심받고 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선 영화 개봉 전에는 리뷰를 발표하지 말라는 감독들의 성명서까지 발표됐다. 평론이 여전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평론가의 역할은 좋은 영화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역할은 여전히 절실하다. 평론에 따라 움직이는 관객은 얼마되지 않는다. 도쿄라면 한 3천명 될까. 뉴욕도 비슷하다. 파리는 한 7천명 정도인 것 같다. 이건 평론이 자국 내만으로 한정할 때 역시 별다른 힘이 없다는 걸 뜻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평론이라면 그것을 외국어로 옮기는 일이 중요한 때가 됐다고 본다. ■90년대 이후에는 평론가로서의 활동이 좀 뜸한 느낌이다. 93년부터 학교에서 행정적인 자리를 맡다보니(하스미는 총장이 되기 전에는 교양학부장 겸 부총장으로 일했음--편집자주) 그 전만큼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영활동과 관련하여 외국어로 상당히 많은 글을 발표했다. 가령 산 세바스찬 영화제에서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을 할 때 영어로 글을 쓰기도 했으며 도쿄에서 장 르누아르 회고전을 할 때는 불어로 글을 쓰기도 했다. ■96년에 로카르노영화제에서 고다르의 <영화사>를 주제로 한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적이 있는 걸로 안다. 고다르의 인상은 어땠는가. 고다르는 세번 정도 만난 적이 있는데 뭐라고 할까 상당히 응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96년에는 로카르노에 가기 전에 스위스 고다르의 자택에 가서 <영화사>를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엉뚱하게 도요타 차를 마구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도요타와 아무 관계도 없는 나로서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웃음) 황당해했던 적이 있다. ■에드워드 양과 허우샤오시엔과의 교분도 깊다고 들었다. 에드워드 양은 <하나 그리고 둘> 찍을 때, 나더러 일본인 오타 역을 맡으라고 해서 거절한 적 있다. 최근엔 허우샤오시엔이 신작을 일본에서 일부 찍었는데, 온천에서 목욕하는 남자로 나오라고 그래서 그것도 거절했다. (웃음) ■최근에 주목하는 감독이 있다면. 글쎄…. 기억나는 대로 말한다면, 중국의 지아장커가 떠오른다. 이 사람은 중국의 5세대를 능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로우예도 뛰어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데뷔작 <주말연인>이 아주 훌륭했다. 제임스 그레이는 데뷔작 <리틀 오데사>를 보고 굉장히 기대했는데, 두 번째 작품이 실망스러웠다. 조금 옛날 감독을 들자면 소마이 신지와 이장호는 내게는 지금도 안타까운 감독들이다. 둘 다 80년대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지만 90년대 들어 주춤했고 그 사이에 젊은 세대가 등장하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알려질 기회를 잃은 감이 있다. 특히 이장호는 여건만 받쳐준다면 세계적인 작가가 될 수도 있었다고 믿었는데, 아깝다. 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대단한 작품이다. 확실히 아시아에 많은 재능이 몰려 있다. 유럽에선 뛰어난 감독이 잘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의 아르노 데플레생은 어떻게 보는가. 물론 좋은 감독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감독은 70년대 프랑스에 많았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유럽영화는 긴장감이 상실된 탓인지 예전만큼 흥미로운 영화가 나오질 않는다. ■4월이면 총장 임기가 끝나는 걸로 알고 있다. 퇴임 뒤엔 다시 영화일에 나설 것인가. 총장하는 동안 쓰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는 것이 많아 답답했다. 그동안 못 본 작품들부터 봐야겠고, 우선은 미뤄두었던 존 포드론을 쓸 계획이다. 오랜 전부터 완결하려했던 <보바리 부인론>도 마무리지어야겠고. 도쿄 = 임재철/ 영화평론가 marienbad@hanmail.net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 하스미 시게히코 / 비평의 주술사, 열도를 포박하다

짚신 한짝, 그 속깊은 조연

김홍도의 그림 중에 <씨름>이 있다. 우리 옛 풍속을 담았다 하여, 다만 그것으로 걸작인가 헤아려보니 미술사학자들은 특히 그 미학적 구도를 거론한다. 그중 하나가 서구의 원근법과 상관없이 아래위의 구경꾼과 가운데 씨름꾼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이며 그 둘이 오른쪽 여백의 짚신 두 켤레다. 짚신이 무심한 듯 놓여 있음으로 해서 이 그림은 구도적 완성, 그러니까 중앙과 위아래의 긴장이 오른쪽으로 트임과 동시에 그 여백을 조그맣게 채움으로써 또한 긴장 속의 균형을 갖는다는 설명, 오늘 그런 얘기다. 케이블TV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빌려놓은 비디오도 없을 때, 마침 지나간 명화를 우연찮게 방영해서 필요 이상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OCN은 정도가 심해서 재탕에 삼탕, 아예 수십탕까지 반복하는 바람에, 나는 <저수지의 개들>의 농담을 외울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저께는 NTV에서 잭 니콜슨과 대니 드 비토의 <호파>를 재재재재방했는데, 그 바람에 나는 뜻밖의 재미를 얻었다. 대니 드 비토였다. 그는 트럭노조위원장 잭 니콜슨의 한발짝 뒤에서 주연 이상의 호연을 펼쳤다. 비디오와 케이블로 대여섯번이나 본 터였지만 그의 열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그야말로 조연의 진경산수를 곱씹게 해준다. 오직 그만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재방 요청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음모와 배신의 굴곡을 헤쳐나가는 호파의 동료이자 공모자로서 언제나 한발짝 뒤에 서 있는다. 잭 니콜슨의 대리인으로 변호사, 장관, 갱단 두목 등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의 작달막한 체구는 영화의 옥타브를 두세칸이나 낮춰버리는 지독한 연기로 변화하여 거구의 음모자들을 완전히 압도한다. 더불어 영화 <대부2>의 알 파치노의 경호원도 기억난다. 대사의 양으로만 볼 때 그는 엑스트라다. 세 시간 가까운 이 영화에서 알 파치노는(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대부 콜리오네의 회상 장면만 빼고는) 거의 모든 장면에 출연하는데 그 바람에 그 경호원 역시 영화의 대부분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영화 내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알 파치노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 알 파치노와 운명을 함께한다. 그는 언제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연기한다. 문을 열어주고 브랜디를 따라주고 사람들을 제지하고 또는 그저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구석에 서 있는데 만약 그가 없었다면 알 파치노의 카리스마, 그 광휘는 상당부분 덜어내야 할 것이다. 중세 초상화 풍으로 명암을 대비시키는 조명과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촬영만으로도 온전한 알 파치노이겠지만 말없이(내 기억에 그는 정말 아무 말도 안 한다) 알 파치노의 뒤에 서서, 실체적 존재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러나 대부가 가볍게 손이라도 들면 문을 열거나 스카치잔을 들고 오는, 그야말로 그림자 충복, 근접 경호, 주연보다 뛰어난 조연보다도 뛰어난 엑스트라 연기의 위대한 면면을 그 사내는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까짓 짚신 한짝 없어도 그만이지만 그것이 있음으로써 긴장과 균형의 이중주가 완성되듯이 마치 조그만 점처럼 그 경호원이 항상 어두운 배경 저 구석에 충직한 자세로 서 있음으로 해서 알 파치노는, 그리고 <대부2>는 그 장엄미의 아우라를 더욱 짙게 채색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조연과 엑스트라의 리얼리티를 말하는 셈인데 이렇게 말하자면 금세 떠오르는 생각이 그것에 관한 우리 영화의 빈약한 처지이다. 색시집 포주에서 노회한 양반으로, 산막의 화전민에서 종로통 주먹으로 온갖 배역을 담당해온 저 기주봉, 진봉진, 이기주 등의 전통에서 최종원, 명계남, 권용운에 이르는 조연의 세계를 따로 기억할 수 있으나 문제는 배우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들을 정확하게 그 자리에 있게 하는 미학의 완성도이다. 서랍 속에 양주를 넣어두고 홀짝홀짝 마시거나 범죄 현장에서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는 형사만으로는, 리얼리티는 고사하고 기초적인 캐릭터 형상화조차 구현될 수 없지 않은가. ‘맛깔스런 조연’이란 표현이 언제나 주연을 빛내는 코믹연기를 뜻하는 것은 그만 사절해도 좋지 않은가. 해당 화면의 중심 인물만 빼고나면 다들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른 체 서 있을 뿐이고 심지어는 기본적인 삼각형 구도조차 심하게 교란되거나 시선과 동선, 감정선이 불일치하는 혼란 상태를 보이기 일쑤 아닌가. 과연 김홍도의 짚신 두 켤레와도 같은 구도의 완성, 대니 드 비토나 과묵한 경호원의 압도적인 조연의 리얼리티를 실감할 수는 없을까. 내 아는 사람 중에 기관원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검은 양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도대체 기자회견 같은 기자회견, 은테 안경을 끼지 않은 의사, 수술실 같은 수술실, 각혈을 하지 않는 시인을 만날 수는 없는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불멸과 덧없음, 하나 되다

왕가위는 아마도 요즘 감독들 중 페티시즘을 가장 잘 활용하는 감독이면서 그 자신이 페티시즘의 대상이 되는 감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화양연화>에서 이런 형태의 숭배를 주제로 택한다. <화양연화>는 ‘시간’이라는 것의 마지막 순간을 드러낼 뿐 아니라 표현불가능한 어떤 주제를 둘러싸고 있는 꼬이고 꼬인 영화, 과감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영화다. 여기서 “무드”(Mood)야말로 열쇠가 되는 주요단어다(<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다).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바가 훨씬 큰 러브스토리로서, <화양연화>는 자신의 열정을 영화만들기에 대부분 사용한다. 뭔가를 더해가면서가 아니라 주로 뭔가를 빼내가는 감산을 통해서 말이다. 일종의 고착된 망상 속에서 애매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과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란 볼 수는 있으되 만질 수는 없는 것” 임을 메인캐릭터들은 끊임없이 설명한다. <화양연화>는 선별된 기억상실증이라는 원칙하에 세워진 작품인 것이다. 왕가위의 이야기는 주로 이주해온 상하이인들 사이에서, 60년대 초반 홍콩을 배경으로 일어나는데 이것은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무대이기도 하다. 챈(장만옥)과 차우(양조위)는 같은 붐비는 건물 안에, 서로 붙어 있는 아파트 방을 동시에 빌린다. 그러고는 그 좁은 복도 안에서 끝없이 서로 마주친다. 병치되는 일련의 대화를 통해 그들은 그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이들의 목소리는 여러 번 들을 수 있지만 얼굴은 절대 안 보인다)이 잦은 외국출장을 이용해 바람을 피우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 결과 챈과 차우는 종종 외로워지며 또 서로에게 끌린다. 이 과장된 대칭관계는 1928년의 무성영화 과 같은 도시 러브스토리를 왕가위식으로 바꾼 것이다. 외로운 젊은 연인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다가 서로를 대도시 대중사회 속에서 잃어버리지만 알고보니 이름없는 여인숙 바로 옆방에 살고 있었더라는 식 말이다. 왕가위는 그런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그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가고 뒤로 되돌리기도 하며 다루고 있다(때때로 챈과 차우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배신자 배우자들인 양 행동해보기도 한다. 마주칠 일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 맞닥뜨릴지 모르는 상황을 위해). 노골적으로 고안된 수도 없는 우연으로 빚어진 <화양연화>는 매우 실험적인 캐릭터 드라마임과 동시에 시간이라는 신화에 관한 의식이기도 하다. 두 스타들 사이에 오가는 불완전한 감정들로 나뉘는 짧은 신들이 매끄럽게 연속되는 <화양연화>는 드라마틱한 생략을 구사하는 한편, 특별한 순간들은 길게 지연시킴으로써 뛰어난 리듬을 만들어낸다. 왕가위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내러티브를 끌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이 이야기꾼은 화가가 화폭에 직접 모든 대상을 드리내지 않은 채 공간을 구성하듯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데) 모더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우아하게 불행하고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그의 두 패배자들의 관계에 섹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관객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장면(Primal scene)이 없는, 가족로맨스다. 두 주인공의 몸은 단 한번도 서도 닿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 사이의 공기는 전기자기장 같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화양연화>에는 다양한 시계들이 나오지만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관객은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주연여배우의 신마다 갈아입는 의상을 통해 깨닫는 법을 배우게 된다(그 많은 옷들을 보관하는 챈의 옷장은 얼마나 클까. 영화 외적인 미스터리다). 영화 속 교묘한 장치들은 모두 다 불길의 연료가 되어, 바람결에 흩어지는 시간의 재로 화한다. 그리고 남는 마지막 정조는 “그 시절은 지났다”는 것. “그 시절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왕가위이즘이란 것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이 43살의 필름메이커는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팝 필름메이커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가장 팝 필름메이커적인 아방가르드거나. 접근과 회피,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화양연화>는 관객에게 아낌없이 주면서 동시에 몸을 사리며 물러난다. 옛날 할리우드프로덕션 코드만큼이나 엄격한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화양연화>는 랩소디처럼 승화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숭고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언젠가 누군가에겐 영원이었겠지만 이제는 텅빈 폐허가 된 앙코르와트를 카메라가 조용히 훑어갈 때, 불멸은 덧없음과 하나가 된다.(2001년 2월6일치)

올빼미의 성

이상하다. <올빼미의 성>의 결말은 얼핏 이해되질 않는다. 어느 시골농가에서 젊은 남녀가 땀흘려 일한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이 한쌍의 부부는 한폭의 그림처럼 불변의 사랑을 나눌 것만 같다. 언젠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은 인터뷰중에 “난 해피엔딩으로 마감되는 영화가 싫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인물들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건대 <올빼미의 성>의 평온한 결말은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답지 않다. 1960년대 일본의 누벨바그 세대로서, 줄곧 처절한 운명론과 자기파괴의 미학을 스크린에 펼쳐보였던 노감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올빼미의 성>은 시바 료타로의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가로지르는 정치사가 작품 배경이 되고 있다. 가족을 몰살당한 닌자는 복수를 계획하고, 통치자에게 칼날을 들이대지만 그의 목을 베지는 못한다. 그저 “복수로 세월을 보내게 해줘서 고맙다”라고 할 따름이다. 교토와 오사카에서 촬영한 <올빼미의 성>은 CG의 능란한 도입이 눈에 띄는 시대극이다. 드높은 성채와 고풍스런 중세 풍경을 재현해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올빼미의 성>은 평소 심미안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난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의 영화다. 특히 살의에 불타는 주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성채에 잠입하는 시퀀스는 현란하기 그지없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고,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한 실내 세트는 그 휘황한 분위기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을 발휘한다. “난 미래, 그리고 뜬구름 같은 유토피아적 이상엔 도무지 관심없다. 카메라를 과거로만 향하고 싶을 뿐이다”라는 감독의 바람처럼, <올빼미의 성>은 일본의 전형적인 시대극 양식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다분히 기계적인 배우 연기에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과다한 해설에 이르기까지. 전통 시대극에 대한 강한 집착이 다소 고루하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그런데 한번 라이벌은 영원한 법일까. 누벨바그 시절부터 서로를 견제해온 바 있는 오시마 나기사와 시노다 마사히로가 같은 원작자 소설을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옛 속담에 똑똑한 적은 멍청한 친구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지만.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