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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닭강정’ 류승룡, 농축된 웃음을 위해 필요한 것

빨간 니트를 입고 어깨 위에는 작은 닭 피규어를 얹은 류승룡이 걸어들어왔다. 그가 “불닭을 표현해봤어요”라고 말하면서 인터뷰는 시작됐다. 닭강정으로 변해버린 딸을 구해낸다는 어이없는 설정으로 웃음을 안기는 컬트 코미디 <닭강정>은 분명 ‘지금까지 이런 코미디는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시리즈다. 그러나 전설적 공연 <난타>(1997~2001)로 몸짓의 도를 익혔고 <7번방의 선물>(2013)로 부성의 계보를 시작했으며 <극한직업>(2019)으로 치킨 유니버스를 선포한 류승룡은 일찌감치 <닭강정>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끝낸 배우처럼 보였다. - 연초에 <극한직업> 팀원들이 5주년 기념 모임을 했다고 들었다. 이병헌 감독의 신작인 만큼 함께 <닭강정>의 미래를 점쳐보지는 않았나. = 배우들에게서는 염원과 응원의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사실 그 팀은 항상 기다리고 있다. <극한직업2>의 탄생을. 아무래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어쨌든 바람은 그렇다. - 원작 웹툰은 한때 열풍을 일으켰던 ‘병맛’(어설픈 그림체, 뜬금없고 황당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만화 등을 수식하기 위해 생긴 인터넷 조어) 만화다. 배우로서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풀이될지 감을 잡기 힘든 면도 있었을 텐데. = 이병헌 감독과 나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아봤고 또 이런저런 작품이 한참 잘 풀리지 않는 부침도 겪었다. 그런 시행착오 덕분인지 이제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서로 찌릿하고 통하는 게 있다. <닭강정>은 ‘이거 한번 일 좀 내보자’ 하고 뛰어든 작품이다. 처음에 읽을 땐 ‘이게 말이 돼?’ 싶지만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쓱 빠져드는 이야기라는 점. 기상천외한 소재에만 그치지 않는 점이 특히 좋았다.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그 안에 각자의 공감 가는 사연이 들어 있다. - 시리즈화되면서 캐릭터가 훨씬 풍요로워졌다. 첫인상에서 도드라지는 건 사극 톤의 말투다. = 2D가 4D로 구현될 수 있게 하자, 감독님과 그런 얘길 했던 기억이 난다. 일상적인 톤으로 연기하면 오히려 그 맛이 살지 않는 시나리오 속 대사들이 많았다. 남다른 패션 센스를 고집하는 백중(안재홍)에게 “너는 왜 옷으로 외모를 조져?” 하는 것보다는 “자네는 왜 그 외모를 옷으로 조지나~” 하는 게 더 승산이 있는 접근이지 않은가. (웃음) 딸이 닭강정으로 변했다는 설정의 작품인 만큼 우리가 쓰는 언어 혹은 기호도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작중의 어법은 관객에게 <닭강정>의 톤 앤드 매너를 알려주는 일종의 지속적인 환기인 셈이다. - 최선만은 평생 살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을 바랐고 결국 그 꿈을 이룬 정말이지 소박한 가치관의 소유자다. 백중의 노란 바지가 그에겐 인생의 사건일 정도인데 이런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 평범함의 위대함? 그런 것을 품고 있는 사람 아닐까. 욕심 부리지 않고 겨우 직원 2명 데리고 일하는, 기계를 만들지만 어떤 특별한 연구도 하지 않는(웃음) 지족하는 인간이다. 그것이 곧 게으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만의 작은 성실함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이 잘 맞닿았으면 했다. - <염력> <7번방의 선물> 이후 각인된 류승룡의 딸 바보 캐릭터들이 있다. <무빙>에 이어 <닭강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접근하고 있나. 부성애 코드가 곧 신파로 이어질까 염려하는 관객도 있다. = 모든 부모, 자식간의 감정은 그것을 표현하게 되는 순간 일정 정도 흔히 신파라고 부르는 감정선을 피하기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노력한다고 모성애를 표현할 수 없듯이 내가 가진 부성애를 잘 표현할 수만 있다면 배우로서는 어디까지나 좋은 쓰임이라고 본다. <닭강정>을 찍으면서도 우리 두 아들을 생각했거든. 내가 나의 일상에 만족하거나 어떤 하루에 감사하는 감정들은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아이들로부터 나오더라. 실제로 이런 삶을 살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 역할을 잘 표현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자기가 가진 재료가 연기에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그저 놓아두는 것도 배우의 일이다. - 한편 류승룡의 치킨 유니버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염력>을 시작으로 <극한직업> <무빙>, 전사까지 포함시키면 <나쁜 엄마>에서 모두 치킨집과 인연이 있는 캐릭터였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 셈이다. = 닭 요리의 세계는 넓고 깊다. 아직 해보지 못한 여러 가지 분야가 있다. 닭볶음탕, 닭찜, 내가 좋아하는 삼계탕, 닭백숙, 계란탕, 계란찜, 계란프라이… 아, 어른들을 위한 작품에 닭죽이 쓰여도 좋겠다. 하여간 무궁무진한 나머지 닭의 세계를 나는 또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인류에 닭이 없었다면, 혹은 닭의 지능이 너무 뛰어나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김유정 배우도 우리 <닭강정>에 적역이다. 유정란!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웃음) 이번엔 장르의 이면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코미디는 그 표면과 다르게 매우 예리함이 요구되는 분야다. <닭강정> 현장의 뒤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코미디를 소화할 줄 아는 배우들은 실제로도 항상 즐겁고 웃기고 유쾌할 거라고들 상상하시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같이 연기한 안재홍 배우만 해도 평소엔 조용하고 내성적이다. 나도 그렇고. 어쩌면 에너지를 아껴야만 농축된 웃음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표현해야 할 웃음이 다른 곳에서 새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진달까. 그래서 테이크가 돌아가는 순간에만 에너지를 뿜고 끝나면 다시 잠잠해지기를 반복한다. 현장 분위기는 그러니 외려 조용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농축된 웃음의 질량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무언의 합의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반대로 무겁고 진지한 작품을 할 때는 너무 깊이 매몰되지 않으려 자신을 좀더 풀어주기도 한다. 카메라 안팎은 항상 묘한 균형을 이룬다. - 배우들과 일정한 톤을 맞춰가는 과정도 궁금한 작품이다. 한 사람만 미묘하게 어긋나도 추구하는 재미가 성립되지 않는 컨셉 아닌가. = 이번 작품은 독특하게도 나, 안재홍 배우, 그리고 김남희 배우(모든기계 직원) 이렇게 많아야 세 사람이서 호흡을 맞추는 신이 대부분이었다. 툭툭툭, 서로의 감을 믿고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홍차 역의 정호연 배우가 처음 등장할 땐 서로 맞춰보는 시간을 꽤 가졌는데 그건 다름이 아니라 정호연 배우가 나와 안재홍 배우 때문에 너무 웃을까봐… 미리 웃게 해주려고 그랬던 거였다. 아마 정호연 배우에겐 극한 직업이었을 테다. 웃음 참느라고 콧구멍이 아주 사~알짝 커지지 않았을까? 특별 출연이지만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했다. <오징어 게임> 이후 쏟아진 수많은 작품들을 고사하고 <닭강정>에 나온 것이라 우리로서는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 류승룡을 타고난 코미디 배우라고 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최종병기 활>(2011),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명량>(2014)이 말해주듯 첫인상은 거친 장르물에 더 어울려 보이고,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에서도 코믹 캐릭터이기 이전에 카사노바의 매력을 뽐냈다. 묵직한 표피 안에 숨겨둔 웃기는 재능의 근원이 궁금해진다. = 고향이 충청도, 아버지가 9남매인데 고모들이나 사촌 형들하고 명절 때 모여 있으면 쉴 새 없이 서로를 웃긴다. 다들 시침 뚝 떼고 툭툭툭 웃기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인데 잘 보면 얼굴은 하나같이 무섭게 생겼다. (웃음) 그런 가정환경에서 얻은 내 기질이 있지 않은가 싶다. 어쩌면 매우 다행스럽다. 코미디에 안 어울릴 것 같은 외모로 웃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기쁨이니까. - 장진의 영화에서 이병헌의 영화까지, 부지런히 웃음의 미묘함을 연구해왔다. 무엇이 이 일을 계속 잘하고 싶게 만드나. = 장진 감독이 글쎄, 고등학생 때만 연극을 500편 봤다고 했다. 그게 장진 영화의 자양분이었다. 나 또한 지금 내가 하는 연기의 많은 부분들이 대학을 다닐 때 경험한 몰리에르의 희극, <굿닥터>(안톤 체호프의 단편들을 각색한 닐 사이먼의 희극) 같은 작품에 빚지고 있음을 안다. <난타> 역시 마찬가지인데, 5년간 매일매일 똑같은 작품에서 똑같은 연기를 하면서 체득한 것이 있다. 타고나길 특출난 배우는 아니지만 그런 경험들이 나름의 작은 득도로 이끌어준 것이다. 코미디는 말로 하기는 힘든 타이밍을 잡아채는 일이다. 몸으로 구현되는 표정, 엇박자, 거기서 나오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활력, 공백이 만드는 언어 같은 것? 이병헌 감독 작품을 이야기할 때 흔히 말맛을 이야기하지만 말맛도 결국은 말 아닌 것들이 도와주어야 하고 나는 그런 걸 잘해내고 싶다. - 지금 당신에게 코미디란. = 희로애락을 꾹꾹 눌러 담은 장르. 애환, 슬픔, 고통이 어쩌면 정수일 수도 있는. <닭강정>도 마찬가지인데 코미디로 정의되는 작품을 할 때마다 ‘아, 이게 인생이지’ 싶다. 그런 생각이 들면 너무 어려워지고, 어려우면 겸손해지고 그렇다. 하여간 코미디는 너무 까탈스러운 장르라 긴장하게 된다. 관객으로서도 블랙코미디를 정말 사랑한다. 시트콤도 좋아하는데 요즘엔 시트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어마어마한 배우들의 기량을 볼 수 있는 좋은 시트콤이 많지 않았나.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신구, 노주현 선생님 얼마나 멋졌는지! <순풍 산부인과> <거침없이 하이킥!>은 또 어떻고. 이런 시트콤들이 부활해서 내게 출현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하고 싶다.

[기획] 연속 기획① - 2024년 한국영화계 구조 진단, ‘홀드백 법제화’ 이슈의 이면

<파묘>가 극장 비수기에도 8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웡카> 등이 선전하며 2~3월 극장가는 어느 정도 순항 중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2023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서 ‘우리는 어두운 터널의 끝을 향하고 있을까’라며 조심스러운 기대를 내비쳤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영진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2023년에 투자가 결정된 한국 상업영화는 12~13개로 추정돼 2017~19년 평균 제작 편수의 1/4 수준이었고, 투자금은 2017~19년 평균 대비 38%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 영화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단 의미다. 한 영화계 관계자의 말처럼 “멀티플렉스 3사가 언제 철수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위기감”이 업계 전반에 팽배해 있으며, 한국영화의 질을 높였던 영화제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해 영진위 및 영화계 인사들은 해법을 찾고 있다. 그중 하나가 지난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화두에 오른 ‘홀드백 법제화 이슈’다. 극장산업을 부흥시키고자 한 이 대책은 3월이 지난 지금에도 별다른 경과를 보이지 않고 있다. <씨네21>은 홀드백 법제화의 더딤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살펴봤다. 이어서 4월엔 홀드백 및 객단가 이슈의 경과, 영화제 지원금 삭감 등에 대한 ‘2024년 한국영화 구조 진단’ 연속 기획을 펼칠 예정이다. “이런 기사도 이제 효용이 없지 않을까요?” 홀드백 이슈에 대한 취재 중 제작자 A씨가 꺼낸 말이다. 마땅한 지적이다. 지난해부터 홀드백에 관한 수많은 기사와 정부 발표가 있었다. 지난해 12월8일 국회에서는 여야 의원과 영화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 영화산업 선순환 질서 복원을 위한 홀드백 법제화 도입 방안 토론회’가 열렸다. 일부 참석자들은 홀드백 법제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홀드백이란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된 후 IPTV, OTT 등 다른 창구에 공개되는 데 걸리는 유예기간을 뜻한다. 이 기간을 지금의 업계 관행보다 길게 규제하여 영화의 극장 상영일수를 늘리면 침체한 영화산업을 살릴 수 있다는 주장이 도입 찬성측의 요지다. 2월에는 영진위가 주요 출자자로 이름을 올린 650억원 규모의 ‘모태펀드 2024 1차 정시 출자사업’이 공고됐다. “영화 분야 투자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정한 홀드백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는 2월 내로 홀드백 규제 대상 영화의 제작비 규모, 홀드백 기간 등의 구체적인 조건을 공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껏 관련 공지는 없다. 당장 사태를 해결할 순 없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정리한 후 왜 홀드백 규제가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는지 따져볼 시점으로 보인다. 홀드백 이슈의 난점은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어려움과 복합적으로 연관돼 있다.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 정책 협의회’의 난항 문체부와 영진위는 지난해 9월부터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 정책 협의회(이하 협의회)를 운영하며 홀드백 이슈를 포함한 티켓 객단가, 스크린쿼터제 안건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논쟁만 이어지고 원활하게 해결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라는 것이 협의회 관계자 B씨의 후문이다. 협의회 참가자는 크게 네 진영으로 분류됐다. 영화 제작자·프로듀서, 영화 투자배급사, 극장 업계, IPTV 협회였다. 협의회의 목표는 홀드백을 포함한 영화 정책 전반에 대해 참석자들이 자율적인 개선안 협약을 맺는 것이었다. 다만 “어떤 쪽은 고정 참가자가 없어 참석하는 분이 종종 달랐고, 분야마다 가장 원하는 정책이 다르다 보니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B씨). 한자리에 모인 참가자들의 자율 협약 타결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올해 1월부턴 각 이해관계자를 문체부·영진위 차원에서 따로 만나기 시작”(B씨)했다. 협의회의 구성 방식에도 허점이 있었다. 영화산업 정책 논의에 방점을 두다 보니 OTT 업계와 독립·예술영화계 구성원이 없었다. 홀드백 규제의 당사자라 할 OTT 업계의 구성원이 없기에 논의가 지연되는 일은 당연했다. 지난해 9월 공개된 영진위의 ‘2023년 제15차 위원회 정기회의 회의록’(이하 제15차 회의록)엔 이에 대한 영진위 내부의 우려가 담겨 있다. “(협의회에 OTT 인사가 빠진 상황에서 홀드백) 자율 이행 협약을 중요 플레이어들이 모두 동의하는 전제하에 12월로 계획”한다면 “너무 무리한 계획을 보고하는 것 아닌지”(김선아 영진위 부위원장)란 걱정이 현실이 된 셈이다. 이에 문체부는 홀드백 법제화 이슈에 관한 기사가 터져나왔던 2월경부터 국내·글로벌 OTT 업계 인사를 차례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전영문 영진위 공정환경조성센터장은 “3월 말~4월 초에는 홀드백을 포함한 객단가, 스크린 상한제, 최소 상영 보장, 변칙 개봉 방지를 위한 방책 등에 대한 자율 협약의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2014년에 마련된 ‘영화상영기본계약서’의 개정 논의도 함께 추진될 예정이다. 이해당사자들의 이견들 “영화관, 배급사, 제작사 등을 중심으로 한 영화업계는 대체로 홀드백 의무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는 논지가 여러 기사에서 중론처럼 다뤄지고 있으나 그렇지만도 않다. 홀드백 조정을 통해 극장산업이 부활해야 한다는 큰 방향성엔 대개 공감하는 것이 맞다. 제작자 A씨는 “영화 생태계가 건강하게 회복되기 위해선 홀드백 관련 협약이 잘되고 6개월로 홀드백 기간이 잡히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다만 “그런데 이것도 바람일 뿐이다. 워낙 상황이 복잡하니 의견을 더 낸다고 해도 무의미해 보인다”라고 덧붙이며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정책으로 홀드백을 규제하는 것은 단순하게만 볼 일이 아니다.”(천만 영화 제작자 C씨)라며 신중론을 펼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중소 규모의 영화는 상영관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고, <서울의 봄>처럼 흥행한 대작 영화는 극장과 IPTV에서 동시 공개돼야 되레 더 비싼 값으로 팔 수도 있다”라는 게 제작사 C씨의 설명이다. 영화로 수익을 내는 방식은 상황마다 천차만별인데 홀드백 기간을 4~6개월 등 일괄적으로 규제하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논지다. 배급 업계의 논리도 비슷하다. 지난해 12월 국회 토론회에서 이현정 쇼박스 영화사업본부장은 “배급사 수익의 70~80%가 극장 수입이니 홀드백 조정으로 극장이 잘돼야 한다는 점엔 당연히 동의”했다. 동시에 홀드백 법제화로 극장이 유일한 수익 창구가 되는 점은 우려했다. 중소 규모 영화를 만들고 극장 외 창구로 유연하게 수입을 내기 어려워진다면 “투자배급사가 <서울의 봄> 같은 대작만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익 창출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라도 극장을 지켜야 한다면 정부가 펀드 조성 등의 투자 혜택을 주면 좋겠다”(이현정 본부장)라는 게 배급 업계의 절충안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문체부와 영진위는 올해 2월 ‘모태펀드 2024 1차 정시 출자사업’을 공시했다. “펀드가 조성된 후엔 개별 지원 여부를 영진위가 일일이 개입할 수 없을 것”(‘제15차 회의록’ 중 김선아 부위원장)이므로 배급사는 홀드백 규제에 타협할 여지가 적어진 셈이다. 홀드백 규제의 수혜자로 여겨지는 제작·배급·투자사 일부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니 협의회의 자율 협약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홀드백 법제화는 어렵다 문체부는 “협의회는 애초부터 홀드백의 법제화가 아닌 자율 협약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라고 꾸준히 밝히고 있다. ‘홀드백 법제화’란 단어는 지난해 12월 한국영화관산업협회가 국회 토론회를 주최하며 퍼진 새 의제였다. 그렇다면 영진위는 업계 관계자들의 극심한 이견을 감수하면서도 왜 법제화가 아닌 자율 협약 체제를 고수하고 있을까. 홀드백 법제화의 부작용에 관해 기존 기사들은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 등을 빗대고 있다. 하지만 홀드백 법제화가 어려운 이유를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한국의 독특한 영화산업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홀드백 법제화의 찬성측은 프랑스의 홀드백 법제화 예시를 들며 한국에서의 입법을 주장하고 있으나 프랑스와 한국의 영화산업 및 미디어산업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국회 토론회에 참석했던 황승흠 국민대학교 법학과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는 애초부터 민간 방송사 위주의 시장이 형성된 관계로 방송·영화 산업계의 논의와 미디어 홀드백이 수월하게 진행”됐지만 “국영방송 위주의 시장으로 출발해 통신사 기반의 IPTV와 OTT가 강세인 한국에선 미디어업계 전반의 이권 경쟁”이 훨씬 거셀 수밖에 없다. OTT를 규제할 법안마저도 없다. 이에 홀드백 법제화를 추진하기 위해선 영진위뿐 아니라 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이 개입해야 하며 이로써 “걷잡을 수 없는 미디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범위를 좁혀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만 보더라도 홀드백 법제화엔 난점이 많다. 프랑스와 달리 영화산업의 수직계열화가 공고화된 한국에서는 대작 영화의 스크린독과점 행태가 고질적인 문제로 꼽히고 있다. “스크린상한제가 없는 이상 다양한 영화를 길게 틀어 수익을 내고자 하는 홀드백 전략이 한국의 영화 배급·상영 형태와 원론적으로 맞지 않을 수”(황승흠 교수)도 있다. 홀드백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스크린독과점과 스크린상한제 등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 전반을 건드려야 하는 셈이다. 홀드백 법제화가 급하게 이뤄진다면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OTT로 직행하는 경우가 생기는 등 궁극적으론 극장마저 손해를 볼 수” 있기에 “느슨한 자율 협약을 통해 4~5년의 안정 기간을 거쳐야 한다”라는 것이 황승흠 교수의 분석이다. 누구만의 잘못도, 누구만의 몫도 아니다 홀드백의 자율 협약과 법제화 모두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영화계가 바라보는 곳은 영진위다. 한국은 프랑스처럼 민간 산업 기구가 제대로 구성돼 있지도 않고, 일본처럼 제작위원회가 개별 작품마다 홀드백 기간을 유연하게 설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영화의 투자, 제작, 배급 단계를 총괄할 민간 논의체가 없으니 독립·예술영화에 개별적으로 예외를 적용하는 등의 핀포인트 전략을 펼치기도 어렵다. 이에 지난해 국회 토론회에서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는 “대신 한국엔 영진위라는 독특한 기구가 있다”라며 영진위의 중재자 역할을 강조했다. 황승흠 교수 역시 “전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자국의 흥행 데이터를 가진 영진위가 홀드백 기간에 대한 정확한 지침과 규제 모델을 더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전영문 센터장도 “업계간 이해관계가 첨예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영진위의 구심점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영진위에 모든 짐을 떠맡기기엔 무리란 목소리도 있다. 지난해 국회 토론회에서 최정화 당시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는 “지금의 개봉·배급 방식에 영화인들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함을 부정하진 않는다”라고 밝힌 바 있다. 홀드백 규제가 시급해질 정도로 한국의 영화산업이 어려워진 것은 한국영화계의 자충수란 뜻이다. 이전부터 홀드백 기간을 60~90일로 제한하는 업계 관행은 있었으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모두 깨져버렸다. 2022년 여름에 <한산: 용의 출현>과 <비상선언>이 개봉 한달 만에 쿠팡플레이 독점 공개를 선택하면서 홀드백 기간의 암묵적 관행은 점차 유명무실해졌다. 전영문 센터장은 “한국의 영화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무너졌고 회복은 가장 더디다”라며 “영화산업 재구조화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정책이 없다면 구조적 위기는 심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리하자면 영화계 관계자들은 홀드백 등 영화산업의 어려움에 대해서 영진위의 주도적인 문제 해결을 바라고 있다. 한편 영진위와 문체부는 영화인들의 의견부터 수렴하기 위해 협의회를 구성했지만 자율 협약이 지연되며 난감함을 표하고 있다. 게다가 영진위는 기획재정부와 문체부 등 정부의 개입에 의해 완전히 자율적인 예산 편성이나 사업 진행을 추진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씨네21> 1424호, 예산은 줄고 말할 곳은 없다. 2024년도 영화진흥위원회 예산 논란). 한마디로 모두가 마땅한 타개책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올해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분기점”(전영문 센터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4월경은 특히 중요한 변곡점이 될 예정이다. 앞서 말했듯 홀드백 이슈를 포함해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문제 전반을 다룬 협의회 자율 협약 내용이 발표된다. 올해 영진위의 영화제 지원사업 결과가 공고되며 정부 정책에 대한 영화인들의 아쉬움이 증폭될 시기이기도 하다. 차후 문화산업 정책의 판도를 바꾸게 될 총선 역시 한발 앞으로 다가와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한달 뒤의 미래, 동시에 한국 영화산업의 먼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다.

[송경원 편집장] 좋아하는 마음

어쩌면 <최애의 아이>가 <씨네21> 표지를 장식할 수도 있었다. 극장판이 개봉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이슈도 없었지만 우연히 기회가 맞아떨어져, 사고 한번 쳐볼까 상상한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전임 편집장이 휴가 간 사이 대리로 잠깐 데스크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예정됐던 표지가 펑크나 대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예전부터 즐겨보던 <최애의 아이>가 떠올랐다. 마침 <최애의 아이>가 세간의 화제라고 하니 잡지 판매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게 공식적인 명분이었지만 실은 그냥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곳에서 크게 한번 다뤄보고 싶었다. 그뿐이다. ‘그냥’은 힘이 세다. 영화 <황산벌>의 키워드 ‘거시기’와 비슷한 포지션이랄까. 비어 있는 그릇 같은 단어 안에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마음이 담긴다. 대체로 낯간지럽거나 부끄러울 때 남용하는 이 게으른 말에서 문득 상대를 향한 믿음과 배려를 느낀다. 스스로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말의 중간 어딘가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상대가 찰떡같이 알아들어주길 기다릴 수 있다. 애초에 언어는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릇이니 정교하게 세공할 자신이 없을 땐 아예 그냥 넉살 좋게 상대에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는 편이 차라리 오해의 소지를 줄이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냥’은 아직 해석되지 못한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원인보다 먼저 도착한 결과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론적으론 원인이 있어 결과가 나온다고 배우지만 ‘리얼 월드’는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황이 먼저 벌어지고 이를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로 좋아한다는 감정은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치고, 용량을 초과한 감정을 소화하기까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 앞서가는 바람에 표현이 서툴러지는 ‘그냥’의 시간. 지난주 에픽하이에 이어 이번주 이승윤까지, 실황 공연 영화를 들고 찾아온 가수들의 표지를 연달아 선보인다. 솔직히 잘 몰랐던 세계다. 누군가는 영화 전문지가 이래도 되냐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럴 만하다. 나도 (아무도 눈치 준 적 없건만) 괜히 혼자 주눅 들어 자기검열 끝에 <최애의 아이>를 밀어붙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커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언젠가의 용기 없던 내가 묻어두었던 마음들을 뒤늦게 마주한다. 애니메이션과 게임과 만화를 좋아하는 나와 고전영화, 작가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공존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이 잡스러움 역시 ‘나’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대상이 달라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이렇게 닮았나 보다. 좋아하니까 더 알고 싶고 알고 나면 잘 설명하고 싶어진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광경을 보며 이들의 ‘그냥’을 좀더 구체적으로 풀어낼 필요를 느낀다. 이번호는 뮤지션 이승윤의 이야기로 시작해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한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까지 팬덤의 세계를 탐구해보았다. 여기에 (BTS, 2018)를 풀어헤친 복길의 에세이 ‘슬픔의 케이팝 파티’를 더하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K팝 잡지냐고? 그럼 또 어떤가. 이 잡스러운 관심사, 넓은 오지랖 또한 <씨네21>의 모습이다. 리얼 월드건 버추얼 월드건 상관없다.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하는 이들은 이미 ‘진짜’를 품고 있으니.

[씨네스코프] 일본영화의 선전 제17회 아시아필름어워즈를 가다

매해 아시아영화의 성취를 결산하는 아시아필름어워즈가 지난 3월10일 홍콩 시취센터에서 열렸다. 17회째 홍콩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도쿄국제영화제가 합심해 꾸려온 이 행사는 단순히 상패를 나눠주는 이벤트가 아니다. 지난 1년간 아시아 각지에서 주목받은 수작들을 재발견하는 축제다. 트로피가 주인을 찾아가기 전 주요 후보작들이 홍콩 도심 극장에서 상영 기회를 갖고, 일부 작품은 따로 기자회견을 열기도 한다. 올해도 <서울의 봄> <괴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비롯해 스리랑카·인도영화 <파라다이스>, 몽골영화 <바람의 도시>팀 등이 직접 무대인사에 나섰고, 앞선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각각 남녀 주연상을 받은 <아방아딕> 오강인, <트러블 걸> 오드리 린이 현지 언론과 만남을 가졌다. 심사위원장 구로사와 기요시는 오랜만에 대표작 <도쿄 소나타>로 관객과의 대화를 나눈 후 동년배 홍콩 거장 프루트 챈 감독과의 대담 형식으로 마스터클래스를 마련했다. 이렇게 나흘간 펼쳐지는 퍼레이드의 화룡점정이 바로 시상식이다. 24개 국가 및 지역의 총 35개 영화가 16개 부문에서 경쟁을 벌인 결과, 작품상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돌아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2회 연속 음악상의 주인공인 이시바시 에이코를 필두로 한 제작진이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감독상에 <괴물> 고레에다 히로카즈, 남우주연상에 <퍼펙트 데이즈> 야쿠쇼 고지가 호명되는 등 전반적으로 일본영화의 선전이 눈에 띄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포함해 2관왕을 차지한 영화는 총 5편이다. <고질라 마이너스 원>이 음향상과 시각효과상을 받으며 초반 기세를 잡았고, 양조위와 유덕화의 재회로 역사를 쓴 <골드핑거>가 미술상과 의상상을 얻었다.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티베트 감독 페마 체덴의 유작 <설표>는 각본상과 촬영상으로 그의 마지막을 기릴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여우주연상은 <초목인간> 장친친, 신인배우상은 <바람의 도시> 테르겔 볼드 에르덴, 신인감독상은 <연소일기> 닉 축에게 돌아갔다. 한편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더 문> <1947 보스톤> <잠> 등의 수상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6개 부문(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촬영상·편집상)에 노미네이트된 <서울의 봄>이 두개의 트로피(남우조연상 박훈, 편집상 김상범)를 거머쥐면서 한국영화로서는 가장 큰 환호를 이끌어냈다. 박훈은 전두광(황정민)의 비서실장 문일평 역으로 서늘하게 화면을 장악했던 배우. “이 상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홍콩에 왔다”고 운을 뗀 그는 “미친 것 같아요! 크레이지!”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스즈키 료헤이와 아시아영화액설런스상을 동반 수상한 배우 이영애, 시상자로서 축하를 건넨 배우 권유리 등 홍콩에서 만난 한국 영화인들과의 순간은 뒷장에 마저 기록해둔다. “하마구치 감독님, 어떤 작품이 완성될지 모르는 채로 당신과 이 길을 걸어왔다니 기적 같습니다!” 에 이어 로 음악상을 건네받고, 작품상 수상까지 함께한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이 멀리서 소식을 확인할 동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설표> 마티아스 들보 촬영감독은 벨기에 출신으로, 이주영 배우가 주연한 한슈아이 감독의 영화 <녹야> 등 다양한 아시아권 작품에 참여해왔다. “티베트에서 페마 체덴 감독과 작업하며 친구가 될 수 있었음을 영광이자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작품은 ‘하는’ 것이 아닌 ‘만나는’ 것이라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몸소 깨달았다는 박훈 배우가 객석에 있는 <서울의 봄>팀을 향해 눈짓했다. “<서울의 봄>을 만나지 못했다면 트로피의 무게감을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김성수 감독님이 영화와 함께해온 시간에 이 상의 모든 영광을 바칩니다.” 축하무대는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인 아윈가가 꾸몄다. 중국판 <팬텀싱어>로 알려진 <성입인심>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진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바다 끝은 초원>(海的尽头是草原)의 테마곡을 불렀다. 이날 두번 마이크를 잡은 또 한명의 인물은 장이머우 감독이다. 그는 평생공로상에 이어 <만강홍: 사라진 밀서>로 아시아최고흥행상을 품에 안았다. “이 상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길 바란다”고 희망한 그는 외쳤다. “우리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서 아시아의 이야기를 전세계에 전합시다!”

[기획] 합정동 마이페이보릿을 가다 - 당신도 이곳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2023년 4월 서울 합정동에 오픈한 국내 최대 영화 굿즈숍 ‘마이페이보릿’이 다음 달이면 1주년을 맞는다. 사실 이 시네마 스토어의 역사는 더 길다. 마이페이보릿은 이제는 없어진 군산 매장 시절부터 지금까지 6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브랜드로 신현이 대표가 변함없이 주인장을 맡고 있다. 지하 1층에 자리한 합정 매장은 각종 영화 포스터와 책, LP와 작은 소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환상 동굴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곳의 방문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의 물건들 앞에 서서 어떤 상상을 할까. 문뜩 궁금해졌다. 신현이 마이페이보릿 대표 인터뷰 - 취향의 공간을 만든다 마이페이보릿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 신현이 대표는 직장인이었다. 매일같이 IT 회사로 출근하면서도 스스로를 “영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영화 감상문을 끄적이는 게 일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영화 글을 기고하며 이중생활을 해온 시간도 두둑이 쌓인 터였다. 2017년 무렵 전면적으로 영화 글을 써보겠단 의지로 회사를 관뒀고 실행도 했다. 배우론에 관한 잡지를 준비해서 크라우드펀딩 단계까지 갔는데 막판에 어그러졌다. 그래도 영화 일을 하고 싶었다. “언젠가 영화 관련된 물건들을 한데 모으는 오프라인 거점을 갖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그때부터 구체화했다. 현실적인 직장인 마인드가 여전히 강할 때였고 나이도 30대 중반이었던 터라 “낭만 없이 계산적으로” 창업에 나섰다. 장소만 과감히 선택했다. “서울만 아니면 된다”는 집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장소를 물색하다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촬영지인 군산의 초원사진관 근처 일본식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연고 없는 군산에 정착했다. 그리고 2018년에 마이페이보릿을 열면서 그는 국내 최초 상시 운영하는 영화 굿즈숍의 대표가 되었다. 서울 합정동으로 가게를 옮긴 건 군산점이 망해서가 아니다. 관광지에 있던 군산점의 수완은 꽤 괜찮았다. 다만 “마그넷이 주로 팔리는 평범한 기념품숍이 돼버렸다는 사실”이 그를 맥 빠지게 했다. 그래서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공간”을 목표로 합정에 2호점을 냈다. 병행하려 했으나 관리 문제 때문에 결국 군산점을 접고 다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오픈 1주년을 앞둔 지금의 합정 마이페이보릿은 신현이 대표의 바람대로 좀더 마니악한 공간이 됐다. “군산에서 몇년째 안 팔리던 <트윈 픽스> 배지가 여기서는 바로 팔렸다. <어바웃 타임>이나 웨스 앤더슨의 포스터 대신 <퍼펙트 블루>나 <에반게리온> 포스터를 찾는 고객들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놓였다.” 타깃층을 변경해도 된다는 확신이 생긴 그는 “덜 대중적이고 더 희귀한 아이템을 확보”하는 동시에 “내 취향이 드러나는 작품”을 고르는 비율도 늘려나갈 계획이다. 구체적인 올해 목표는 마이페이보릿을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영화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애초에 공간 활용을 목적으로 무리해서 넓은 면적을 택한 만큼 “상영회, 토론회, 음악 감상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해볼 생각이다. 모임을 통해 공간과 고객을 연결하고 단골을 늘려나가다 보면 “온라인 스토어보다 매출은 적지만 애정은 훨씬 큰 오프라인 스토어”를 계속 운영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믿고 있다. “티모테 샬라메 같은 스타가 이곳을 방문해 인증숏을 올려주는 기적을 바라면서 오늘도 내일도 버틸 거다. (웃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겐 희망이 있다.” 마이페이보릿에 들어서면 처음 마주하는 광경이다. 매장은 크게 LP존, 포스터존, 서적존으로 나뉜다. 지브리존이 특별히 따로 마련돼 있고 마블, <스타워즈>, <해리 포터>관련 아이템도 작은 규모로 모아놨다. 단순하고 확실한 공간 구성으로 이동의 번거로움을 줄였다. 고객은 자신이 관심 있는 구역에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 LP존은 마이페이보릿의 최고 인기 구역이다. 2천여종이 넘는 LP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이 80%를, 신현이 대표가 취향대로 고른 앨범이 20%를 차지한다. 각양각색 디자인의 앨범들을 벽에 걸어 인테리어로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객에게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관람자의 경험을 안긴다. 여기에 앨범을 직접 만져보는 촉감적 경험이 공간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긴다. 포스터존에서는 사진 촬영이 많이 이뤄진다. 극장에서 실제로 거는 오리지널 사이즈의 대형 포스터를 나란히 붙여 고객의 이목을 끈다. 구하기 힘든 수입 포스터부터 B컷 버전의 포스터까지 만날 수 있어 좀처럼 발을 떼기 어려운 구역이다. 매장 곳곳에서는 신현이 대표가 직접 쓴 추천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손글씨 추천사’는 그가 군산 시절부터 해왔던 소소한 재밋거리로 큐레이터(사장)와 고객 사이의 거리를 좁혀 공간의 친밀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내용을 읽어보면 상당히 공들여 쓴 것 같지만 신 대표에 따르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바로 적은 것뿐”이라고.

[인터뷰] 균형의 조정,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드라이브 마이 카>로 프로덕션의 규모와 만듦새, 기획력에 있어 점차 완연한 경지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음악가의 요청에 부응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것, 동시에 계획에 없던 소품을 만들어나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번 영화를 작업하면서 음악의 성질을 우선시했음을 밝히는 데 주저가 없다. 만약 음악이 가진, 우리 안에 내재된 기능을 즉각적으로 끌어올리는 힘에 동의한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 감독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자질과 직관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확고한 연기 연출법에 근거해 대화의 작가로 자주 명명되었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장소와 풍경의 시적인 역량을 몽타주화할 수 있는 연출자임도 알맞은 시점에 귀띔해준다. 동일본대지진 이후의 일본 동북부 지역을 살핀 그의 다큐멘터리(<파도의 소리> <파도의 목소리–게센누마편> <파도의 목소리-신치마치편>)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영화는 배우들과의 긴밀한 호흡으로 잘 알려진 그가 영화 제작진과 창조적으로 교류하는 방식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쇼케이스다.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 스탭 출신의 배우 오미카 히토시, 미성년 배우 니시카와 료와의 조화만큼 중요하게 기록해두고 싶은 것은 동일한 촬영본으로 전혀 다른 무성영화를 만들어낸 편집감독 야마자키 아즈사(<심도> <아사코> <드라이브 마이 카>)와의 이중 작업이다. 한쪽에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한쪽에선 라이프 퍼포먼스와 함께 상영될 가 만들어졌을 과정을 상상하다보면 영화의 안팎에서 자신의 균형을 재조정해나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가능성에 대해 실로 더 많은 호기심을 걸게 된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줌 인터뷰로 나눈 대화를 전한다. - 공연용 비디오아트를 의뢰받은 후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최초의 제안을 보다 확장하게 된 과정상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공연장에서 송출되는 비디오라면 보통은 추상성이 강한 영상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과 오랫동안 의견 교환을 하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연장선에서 이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뜻을 모았다. 늘 그래왔듯 일단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와 함께 촬영하는 방식으로 소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후에 그 소재를 라이브 퍼포먼스용 영상에 맞게 다듬어보려고 했다. 때문에 이미 영화처럼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작업 초기까지만 해도 영화화한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다. 당연히 상업영화로서 개봉을 한다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여기서 공연용 영상과 영화의 큰 차이를 짚자면 음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업 과정에서 배우들의 목소리가 너무나 훌륭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음색이 실리면 이 캐릭터들이 더욱 깊어질 것이 분명해 보였고, 그렇다면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로 완성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출품해 어쩌다 상을 받고 뜻밖에 이렇게 개봉까지 하게 됐다. - 음악감독의 스튜디오가 위치한 나가노현 인근의 산골 마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글램핑장 건설 설명회를 보게 됐다고 들었다. 생태주의 영화들이 점차 대두되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감독님에게도 이러한 내적 관심사가 형성된 것인지 궁금하다. 한 가지 정정을 하자면 글램핑장 건설 설명회를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고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의 스튜디오 주변에서 무엇을 찍을 수 있을까 리서치하다가 그러한 설명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 참가했던 주민들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 영화의 경우는 이렇게 실제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좀더 상세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지점이 명확하다.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남들이 갖는 만큼 정도의 관심이 있었다, 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특히 생태문제라고 하면 아직도 우리의 일상과 좀 동떨어진 이야기로 느낄 수가 있을 텐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만들면서 더욱더 이 모든 문제가 이미 우리 삶 자체임을 느꼈다. 영화에 나오는 배수 처리 문제가 이미 지역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을 뿐 아니라, 10년 전에는 이상기후로 불렸던 것들이 지금은 해마다 한두번씩 큰 자연재해로 번지고 산속의 동물들이 인간이 사는 곳까지 내려올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문제가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사이클’이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삶에서 가장 실감하는 것들 가운데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생태주의 영화를 의도했다기보다는 환경의 변화가 아주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는 나의 자각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 숲의 심부름꾼으로 살아가는 타쿠미라는 남자에게는 매우 특정한 생활양식이 있다. 한편 딸을 제시간에 데리러 가는 일에 둔감하다든지 돈 계산을 잘못하고, 특히 경어를 쓰지 않는 점이 눈에 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인물상을 배우와는 어떤 방식으로 공유하며 구체화했나. 타쿠미는 지금 말씀해준 인물상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 중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무언가 결여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오미카 배우에게 아마도 타쿠미는 이런 사람일 것이다, 라는 설명은 일절 하지 않았다. 평소 배우들에게 해왔듯이 A4 용지 7~8페이지 분량의 서브텍스트를 준비해서 전달했다. 그 안에는 타쿠미라는 인물이 내가 설정한 어떤 질문들에 답해 나가는 내용들이 적혀 있다. 특정한 설정이 묘사되어 있거나 정답이 분명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배우가 스스로 캐릭터를 이해하고 답을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으로 진행했다. 물론 함께 대본을 읽는 리허설, 장작패는 도끼질을 익히는 시간 등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것들을 익히는 연습 과정도 있었다. - 연예 기획사에서 파견된 두 직원과 마을 주민들이 글램핑장 개발 문제로 대치하는 설명회 장면이 놀랍다. 캐릭터마다 적나라한 긴장감, 진정성, 유머 등을 장착하고 있고 그런 제각각의 기운들이 하나의 문제의식 속에서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촬영 과정은 어떻게 꾸렸나. 일단 설명회 장면은 이틀 동안 찍었다. 테이크마다 짧으면 17분, 길면 20분 정도 나왔는데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갔고 그렇게 해서 하루에 총 5번을 찍을 수 있었다. 작은 연극을 하루 5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총 2대를 썼다. 설명회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카메라가 어느 순간에 누구를 바라보고 있어야 할 지 미리 촬영감독과 정해두었다. 카메라의 앵글은 관객이 이 상황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신경 써서 결과으로는 약간 클래식한 구도가 나온 것 같다. 이틀간 나온 총 10개 테이크 중 오케이는 기본적으로 없다고 보면 된다. 연기의 퀄리티를 계속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촬영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항상 모든 테이크를 ‘통과’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최종 편집본에는 테이크1에서 사용한 것도 있고 테이크10에서 사용한 것도 있다. 어느 테이크든 딱 그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것이 있어서 무척 좋았다. 배우들은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웃음) - 타쿠미 부녀가 집과 마을 중심가를 오가는 동안 큰 숲을 반복적으로 지나게 된다. 음악적 리듬감, 그리고 로케이션의 지형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인상이 함께 드는데, 숲을 가로지르는 트래킹숏의 쓰임을 유독 강조한 이유가 있나. 이번 영화는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과 조화를 이루고 싶다는 특수한 전제 조건에 충실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작업할 때도 부분적으로 음악에 맞는 시각적인 이야기-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질문했던 적이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나무 사이를 지나는 숲에서의 이동성이 두드러지는 숏들도 그와 비슷한 연상 과정에서 나왔다. 특정한 음악을 우선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시바시 에이코 감독이 보내준 곡들이 아주 섬세한 음들이 켜켜이 쌓여 조화를 이루는 화음의 음악이라는 점,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영상으로 번역하고자 했다. 나무가 빼곡한 숲속의 이동숏이 마냥 추상적인 이미지라면 관객 입장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기 때문에 영화의 이야기와 시각적인 부분을 만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음악에서 생겨난 비주얼에 이야기가 봉사해서는 안되고 상호간에 조화로운 형태로 만들자는 바람이었다. - 스타일상 대조적인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며 공존한다. 숲을 가로지르는 앙각의 유려한 트래킹숏과 차 뒤편에 매달려 덜그럭거리며 이동하는 카메라처럼.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시바시 에이코의 이번 음악은 멜로디와 정서가 꽤 강하게 쓰였는데, 영화에서는 음악이 고조되는 지점에서 편집으로 툭 끊어냈다. 마침 이 영화는 ‘균형’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오즈 야스지로나 로베르 브레송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통일된 형식을 갖고 찍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많은 거장들이 추구해온 방식이다. 그런데 내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어떤 방식을 채택해야 하려는 이야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무엇이 가장 적합한 장면인지를 생각한다. 관객과의 관계 역시 어느 정도 고려한다. 그렇게 찍다보면 형식의 통일성이라는 주문은 사라진다. 바로 그 지점, 통일성을 잃어버린 요소들을 어떤 리듬으로 조합해나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관된 형식으로 만들어내볼 것인가 하는 조정 과정이 내가 중시하는 영화 만들기의 단계이다. 그 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생리적인 부분에서 정해지는 것 같다. 형식적인 교합과 조화에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느끼기에 이것이 참 편안하다, 조화롭다고 하는 생리적인 느낌이 유일한 기준이 된다. 대조적인 것이 공존하는 가운데 생기는 균형에 정말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고, 그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영화를 만들어나간다. - <아사코>에는 연인이 비를 맞으며 찾게 되는 사라진 고양이가,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아내의 증발이 비가시적인 변화를 표면화하는 촉매제가 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시 딸 하나의 실종이 극을 결정적인 장면으로 이끈다. 실종과 발견의 모티프를 채택하는 이유가 있을까. 의식적으로 다룬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런 실종의 모티프를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편이, 장면에 움직임이 있는 쪽이 언제나 더욱 흥미로우리란 입장은 맞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너무 감각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내뱉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조금 민망한데. (웃음) 사라진 것을 찾기 위해 새롭게 발생한 움직임은 곧 원래의 균형이 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깨진 균형은 어떻게 해서 회복될 것인지 질문해볼 수도 있다. 이 말이 자칫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 무작위로 상실을 이용한다는 말로 들릴까 염려된다. 그보다는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상황에서 무언가 잃어버리게 되고 그때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 간단히 말해 인생이란 가끔 그런 것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리뷰] ‘바람의 세월’, 그리움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지난 10년

2014년 4월16일,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라남도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다. 이로 인해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을 포함해 총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단원고 학생을 자녀로 두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제각기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부모들의 일상은 그날 이후 송두리째 뒤바뀐다. 집에서 광화문광장으로, 회사에서 국회의사당 앞으로 그들의 거처가 바뀌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말들 또한 시시각각 변한다. 분노, 슬픔, 두려움, 답답함, 죄책감, 배신감, 억울함, 소외감 등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그들의 세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이지만, 부모들에겐 바람과도 같이 빠르고 혹독하게 지나간 세월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 2학년생이던 문지성양을 잃은 아버지이기도 한 문종택 감독이 2014년 여름부터 담아온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활동 기록 영상을 포함한 5천여개의 영상을 바탕으로 하는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바람의 세월>을 김환태 감독과 함께 세상에 선보인다. 영화는 광화문 집회, 특별법 제정, 4·16 기억교실 문제, 대통령 탄핵, 선체 인양 등 참사 이후 주요 사건들을 중심으로 현장 영상들을 시간 순서대로 이어 붙이며 매 순간 고군분투하던 부모들의 모습을 최대한 담담한 태도로 포착한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개개인에서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고통스러운 투쟁의 시간을 함께해온 부모들은 그 투쟁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바람의 세월>에서 각자의 회고를 전한다. 그들의 회고엔 그리움과 외로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노력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해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재난 대응 시스템 미비 등 근본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이는 이태원 참사 등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저희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10년 했으면 됐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희는 10주기를 기점으로 다시 방향을 찾을 거예요.” 한 어머니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리뷰] ‘키메라’, 이탈리아 영화의 유산 속에서 잃어버린 영성을 찾다

<행복한 라짜로> 이후 5년 만에 완성된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신작인 <키메라>는 외견상 디지털영화의 연대기에서 비켜서 있다는 점만으로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에르만노 올미, 페데리코 펠리니 등 이탈리아영화의 유산을 흡수한 목가적 풍경, 다양한 포맷으로 변주되는 필름 촬영의 생동감은 <키메라>가 가진 희귀한 기쁨이다. 영화는 막 감옥에서 풀려난 남자 아르투(조시 오코너)가 연인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의 집이 있는 토스카나로 향하는 기차 위에서 시작된다. 과거에 붙들린 아르투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연인은 <키메라>에서 쉬이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도굴꾼들과 생활하며 땅속 무덤에 묻힌 고대 에트루리아 유물을 훔쳐 파는 이들의 모험을 바라볼 뿐이다. <키메라>에서 지상과 지하는 신화 속 이종동물 키메라처럼 연결되어 있다. 종종 아르투에게 찾아와 죽은 자들의 세계를 감각하게 만드는 영적 능력도 ‘키메라 현상’이라 일컬어진다. 로르바케르 감독은 스타일과 형식의 차원에서도 그 초월적 권능을 자유자재로 누리며 비탄과 익살을 아우른다. 16mm에서 35mm 필름을 넘나들며 흙과 바람, 태양과 바다의 호흡을 살아 있는 질감으로 새긴 엘렌 루바르의 촬영 역시 훌륭하다.

[인터뷰] 책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쓴 뮤지션, 배우, 화가, DJ 김창완, ‘수많은 아침 곁에서’

언젠가 좋아한다고 밝힌 알랭 코르노의 영화 제목처럼, 김창완은 23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맞는 ‘세상의 모든 아침’을 지키는 남자였다. 그는 매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2000년 10월2일에 시작해 2024년 3월17일까지 SBS 파워FM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이하 <아침창>)의 <아침창> 아저씨였다. 김창완은 <아침창>을 진행하는 동안 늘 오프닝 멘트를 직접 썼고 가끔 고민 사연에 편지를 써 답했다. 김창완의 신간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는 <아침창>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2주가 지난 뒤 세상에 나왔다. <아침창>의 오프닝 멘트와 여러 곳에 연재한 수필 그리고 고민 해결 편지를 묶은 책이다. <씨네21>은 잠시 혼자만의 아침을 만끽 중인 김창완과 만나 긴 대화를 나누었다. 공교롭게도 김창완에게 만남을 청한 시각도 그가 몇주 전이었다면 라디오 부스에 있었을 아침이었다. - 2016년 한차례 <아침창>의 오프닝 멘트를 모은 책 <안녕, 나의 모든 하루>를 출간한 바 있다. 8년이 지난 지금 또 한번 동일한 컨셉의 책을 출판한 이유가 있다면. = 지난해 독집 《나는 지구인이다》를 발매하며 “음악이란 부르면 사라지는 것이라 좋다”는 말을 전한 적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허공에 뿌려진 오프닝 멘트와 엽서들을 다시 모은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책 제안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래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아 출판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꾸며질지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위로’를 키워드로 잡아 출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불편했다. 현실이 팍팍하고 절박하다지만 ‘위로가 활자로 가능한가?’ 하는 생각에 주저했다. 내 위로가 실질의 위로가 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도 컸다. 그런데 그런 두려움은 내가 극복할 일은 아니었다. <아침창> 가족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이걸 가지고 내가 말을 얹을 바는 아니지 않나 싶더라. 책을 많이 팔면 저자로서 인세가 생길 터다. 한데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여태 방송을 들어준 <아침창> 가족들에게 내 말들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에 전부 일임한 후 인세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홀가분했다. 위로는 결국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현재를 인정할 때 발생한다. 나의 인사말을 통해 독자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길 바란다. 누구도 결과는 알 수 없다 - 책의 제목과 연관된 동그라미 엽서는 SNS를 통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저마다 처한 환경도, 상처받는 부분도 다르지 않나. 개인이 겪는 불안과 우울이 너무 일반화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물론 세대 공동의 고민이 있겠고 해결책을 함께 모색하는 게 의미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고민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듯 오해하게 만들까 우려된다. 동그라미는 한 직장인의 고민으로 인해 그려본 것이다. 매일 아침 생방송을 했던 나야 그와 처지가 흡사했지만, 지금 당장 호구가 절박한 사람이나 병간호해야 하는 이에겐 이 사연이 고민으로 안느껴질 수도 있다. - 평소에도 동그라미를 습관처럼 그린다고 들었다. 한 인터뷰에선 매년 새 글씨를 만들 때마다 동그란 글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전한 바 있던데. = 별거 아니다. 그냥 그림 연습이다. 그림 수업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타 연습하듯 동그라미를 그린다. 방송 대본이 쓰인 이면지를 버리기에 아까우니 한동안 동그라미를 엄청 그렸다. (허공에 손가락을 휘휘 돌리며) 내가 지금 그린 동그라미를 보라. 멈추었다 다시 동그라미를 그리면 동그라미가 잘 안 그려진다. 계속 손이 돌아가야 완전한 동그라미가 나온다. - 여러 인터뷰에서 ‘목적 글’은 잘 쓰지 못한다고 밝힌 적 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의 오프닝 멘트야 말로 써야 하는 목적이 분명한 글인데. = 내가 말한 목적은 의도로 해석하는 편이 낫다. 오프닝 멘트를 쓴다 한들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긴 어렵다. 청취자를 설득하는 글이었다면 힘겹게 썼을 것이다. - 글을 끝맺는 방식이 독특하다. 결론을 내며 끝나는 글도 있지만 새 의제를 던지며 끝나는 경우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내 시간은 아닐까>와 같은 글이 그렇다. = 글까지 도달하는 행로를 적은 경우가 많다. 읽어봐야 독자들에게 전달이 될 테다. 나 자신도 그리고 글을 쓰는 순간에도 글 자체에 사로잡히지 않고자 했다. 인터뷰를 할 때도 이게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한번도 상정하지 않았다. <아침창> 마지막 생방송에도 “나는 이별을 준비하는것 같아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멘트를 건넸다. 내가 글쓰기와 일상을 대하는 태도다. 누구도 결과는 알 수 없다. 내겐 통념이나 편견이 늘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해왔다. - 기타를 메고 자전거를 타는 삽화가 책에 그려져 있다. <아침창>을 진행한 23년간 자전거로 방송국에 출퇴근한 일화도 유명했는데. = 미치지 않고서야 기타를 메고 자전거를 탔을 리가. (웃음) 언젠가 기타를 한번 잃어버린 적 있어 기타를 스튜디오에 가져다 놓은 뒤 ‘훔친 기타’라 크게 써놓았다. 훔친 기타라고 써놓으면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았다. 신청곡이 나가는 동안 기타를 많이 연주했다. 기타 연습은 정말 많이 해야 한다. - 아직도 연습이 필요한가. = 아직도가 무언가. 기타는 계속 연습해도 안되는 악기다. - 책 속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이하 <월광>)을 끝없이 기타로 연습했지만, 단 한번도 흡족한 연주를 한 적 없다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지구인이다》에 <월광>의 1악장을 기타로 연주해 수록했다. = <월광>이 그렇게 연주하기 어려웠다. 내게도 안되는 무언가가 하나 있다는 게 좋았다. 마음이 즐거울 때도 연주했지만 달빛이 교교한 밤에 깼을 때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월광>을 기타로 연주했다. 순식간에 몰입이 되니 두려운 마음을 금세 떨칠 수 있었다. 내게 <월광>은 매일 오르지만 매일 달리 보이는 산길 같았다. 그러니 때만 되면 오른다. <월광>의 조성은 C#마이 너지만 기타의 음역을 고려해 A마이너로 연주했다. 오밤중에 <월광>을 연주하고 있으면 그렇게 스스로가 측은할 수가 없다. (웃음) 언젠가 공연 연습을 하다 산울림의 <둘이서>(1978)가 A마이너 코드임을 알아차렸다. <둘이서>를 《나는 지구인이다》에 넣기로 했던 터라 덩달아 <월광>을 수록했다. (기타를 가져와 <월광>과 <둘이서>를 연이어 연주한다.) 노랠 들으며 김창완이 마음이 불편할 때 한밤중 일어나 이런 걸 하고 있다는 걸 연상하면 된다. -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월광> 중 유독 좋아하는 버전이 있는지.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이 할아버지의 인자한 웃음이 좋다. 누군가 호로비츠에게 “이걸 어떻게 외냐”고 물었을 때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손이 기억하고 있다”고 답한 게 마음에 와닿았다. <월광>을 연습하면서도 나는 머리가 아닌 손가락으로 외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도 기억력이 떨어지더라. - 글렌 굴드에 관한 상찬도 책 속에 등장한다. = 여전히 굴드를 좋아한다. 지금도 나만의 <월광>을 찾기 위해 거듭 연습 중이다. 악보대로 <월광>을 연주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면 글렌 굴드를 염두에 둔다. 일체의 사념을 없애고 정직하게, 해골 같은 음정으로 음악에 돌아가야 할 때 찾는다. 다시 <월광>을 연습하는 중이다. 이전 버전은 어쩐지 감정의 기복과 분출이 많아 반성하는 마음으로 굴드를 찾는다. - 출근길에 마주한 계절의 변화가 글에 자주 등장한다. 종종 가는 계절이 ‘밉다’고 쓴 표현도 인상적이다. = 마음 가는 대로 쓴 거지. 단풍놀이 철에 다들 가을 산을 보며 좋아하는데 친구에게 “가을 산 아무리 봐도 똥색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아침 방송을 하기 때문에 수많은 아침을 만나 글로 썼지만, 분명 내가 놓친 수많은 아침들이 있을 테고 저마다의 아침도 다를 터다. 오늘의 인터뷰는 소중하지만 그 이외에 내가 흘려보낸, 미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반면교사로 깨달으면 된다. 책에 적힌 글은 먼지다. 틀린 말 아니다. 그러니까 소중한 거다. 그 시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 - <아침창>에서 많은 청취자로부터 ‘아저씨’로 불렸다. 찾아보니 산울림 데뷔 때부터 팬들에게 아저씨로 불렸더라. = 아저씨라는 호칭을 좋아한다. 24살부터 아저씨라고 불려 거부감이 없다. 계속 아저씨이고 싶은데 요샌 어딜 가면 할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기분 나빠. (일동 폭소) - <씨네21>의 표지를 찍은 1998년 149호 기사를 읽으면 ‘10대와 20대는 김창완을 DJ로 알고 30대와 40대는 김창완을 탤런트로 인식한다’는 문장이 있다. = 오히려 지금 10대와 20대는 나를 가수로 인지한다. 지난해 2023 인천펜타포트락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 이후로 젊은 친구들이 “저 아저씨가 가수였다니!” 하며 의아함과 자부심을 가진 채 내 공연을 찾는다. SNS를 하지 않고 반응도 살피지 않으니 보니 젊은이들이 그렇게 댓글을 달며 무대를 회자해주었다는 소문을 나중에 들었다. 관객층이 달라진 게 보인다. 팬이라고 하기도 너무 어린 친구들이 오는 중이다. - 일각에선 <펜타포트>는 만 65살 이상 무료입장이 가능한데 65살이 넘은 김창완이 헤드라이너로 섰다며 놀라는 반응도 많았다. = 또 가야겠네. 좋은 일이다.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외국의 록페스티벌이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상대와 어우러져 즐기는 페스티벌이 우리나라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이 있었는데 현실이 됐다. 우리나라 밴드가 무대에 설때 외국 밴드 못지않은 환영을 받는 모습도 자랑스럽다. - 고양이 밥 주는 에피소드가 많이 등장한다. = 길고양이들이 워낙 수명이 짧다. 책에 실린 고양이들은 최근 우리 집을 방문하는 고양이들이다. 왔다 스치는 친구들이 몇 있지만 요샌 두 마리가 온다. 아빠 고양이 그리고 아들 아니면 딸 고양이인데 나는 그냥 아들이라 우기고 싶다. - 책을 읽다보면 짝을 이루며 살기, 타인과 온기를 나누며 공존하는 삶을 향한 바람이 담긴 글이 몇차례 등장한다. 팬데믹 이후 개인화에 익숙해진 독자에게 여러 생각 거리를 던진다. = 굴곡진 시간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건 무언지 팬데믹이 지나면 해결책을 얻을 수 있을 것같았다. 많은 이들이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있을 거라, 모두가 다 모일 수 없는 현실이 가져다 주는 절망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오히려 모두가 외로움에 익숙해졌다. 그전엔 사람들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는데 그런 갈증도 이젠 사라졌다고 보인다. 서로 나누어야 할 마음이 각자의 몫으로 돌아가버렸다. 유대가 강화되기보다 느슨해졌다. 팬데믹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요즘엔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이 휴머니티로 다시 뭉치는게 아니라 AI가 조합해 만들어낸 사회에 일원으로 뭉치게 될까 두렵다. - <아침창> 마지막 생방송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를 라이브로 연주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많이 기사화됐다. 이 노래를 선곡한 이유는. = 그 곡은 드라마 한편을 끝내고 그간 고생한 스탭들과 배우들을 위해 만든 노래다. 그게 내 심정이니까 불렀다. 그런데 방송이 끝나면 그만해야 하는데 눈물 장사를 하는 바람에…. 방송은 생방송으로 나갔지만 그걸 전부 녹화해 끝까지 회자되도록 만드는 건 좋지 않다. 괜히 리포스트하게 만들고 말이다. 아무리 슬프대도 방송이 끝나면 끝난 것이다. 생방송만으로 여운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남아 계속 이야기를 만드는 건 안된다. 사람들이 내가 노래하다 우는 ‘짤’이 돌아다닌다고 하여 뒤늦게 알았다. 악마적으로 편집됐을까 싶어 안 봤다. 그런 식으로 영상이 돌아다니면 다들 큰일난 줄 알고 볼 것 아닌가. -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시대다. 또 하고 싶은 말을 발화할 수 있는 플랫폼도 다양하다. 하지만 라디오는 이 노래가 꼭 들리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신청곡을 써내고 사연을 담아 DJ에게 전한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사연과 노래를 매일 마주하는 시간은 어떤 삶인가. = 라디오가 갖는 현장감이 특별하다. 라디오는 청각 매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라디오만이 청각에 호소할 수 있는 지점도 있다. 내가 늘 강조 하는 덕목이 있다. 라디오 DJ는 그 시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만 지켜내면 된다. 가상현실 시대다 보니 그 시간에 거기에 없다고 선언하는 녹음방송도 있다. 하지만 생방송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이 내 옆에 있다, 내 곁에서 속삭여준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대일 매체다. 마지막 생방송 오프닝 멘트에도 썼지만, 어느 식탁에 불쑥 나타난다거나 어느 잠자리에 불쑥 나타나는 게 라디오의 매력이 아닐까. 삶에서 맡는 예술의 향기 -9년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언제쯤 영화에 서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여전히 영화 출연작이 없다. 동일한 질문을 다시 건네고 싶다. = 그 뒤로도 영화를 한 적이 없네. 장르를 구분하자는 건 아니지만 영화가 유독 특별한 장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흑백영화를 좋아한다. 버스터 키턴이 나온 <제너럴>(1926) 같은 작품도 좋아하지만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 >(2011) 같은 작품도 잊을 수 없다. 로버트 J. 플래허티가 만든 <북극의 나누크>(1922) 같은 다큐멘터리는 내가 평생 가지고 갈 영화다. 요즘 나오는 영화에선 맡을 수 없는 향기들이 있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내러티브의 감동도 옛 영화에서 많이 느낀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현실 감각이 넘치는 영화들, 현실감을 주려 노력해 만드는 영화들이 훨씬 더 비현실적이라 느낀다. 만화영화만 해도 나는 3D애니메이션은 거의 혐오한다. 2D가 좋다. 최근 일본인 감독이 연출한 한 드라마에 카메오로 나갈 일이 있었다. 그때도 감독에게 “내 연기가 2D로 보였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나의 연기가 핵심 언어만 전달하는 정도면 좋겠다. - 허우샤오시엔의 <동년왕사>(1985)를 좋아한다고도 했던데. = <동년왕사>에 구슬치기하고 또 구슬을 숨기는 장면이 있다. 어린 날 추억과 연결이 돼 좋아했다. - 최근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치매로 은퇴를 공식화했다. 기억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매체에서 명작을 남긴 감독이 기억이 쇠잔해지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다. = 그런 어른이 은퇴 결정을 한다는 자체가 어른스러운 면모고, 세상에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본다. 그런데 영화가 기억 보존에 유리한 매체인가. 나는 가장 불편한 매체일 수도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화는 상영을 전제하지 않나. 기계적인 프로세스가 있어야 틀 수 있는 매체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시청각으로 대표되는 영화적 요소인가. 아니다. 촉감일 수도 있고 단 한장의 스틸일 수도 있다. 영화만이 포괄적으로 모든 걸 담지 않는다. 기억을 추동할 수 있는 요소는 많다. 보존만 할 거라면 차라리 벽화가 나을 수도 있다. - <하얀거탑>을 시작으로 <세계의 끝> <밀회> <밥 잘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까지 안판석 연출의 드라마에 줄곧 출연했다. = 안판석 감독의 우물의 물 같은 목소리가 좋다. 그리고 그 목소리로 사람을 설득할 때가 좋다. 나는 설득당하길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다. 누가 무얼 말하면 한번 비틀어 다시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인데도 그이를 만나면 기꺼이 설득당하고 싶다. 안판석 감독의 설득이 안판석 작품의 모든 것이다. 솔직히 어떻게 찍힐지는 내 관심 밖이다. 하지만 그의 설득이 백마디 위로보다 좋다. 안판석 감독이 “형” 하고 부르면 ‘내가 뭘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부터 바로 드는데 그때부터 기쁘다. 무언가 잘못됐지만 하여간 이젠 잘되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다. - 많은 예술가들이 김창완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이야기한다. = <아침창>의 마지막 생방송날, 이상윤 배우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가끔 메신저나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깜짝 놀랐다. 왜 죽을 때 삶이 주마등처럼 스친다고 하지 않나. 그때 죽기도 바쁜데 나쁜 놈 떠오르면 되겠나. (일동 폭소) 좋은 사람이 떠올라야 한다. 싫은 사람 욕하면 나중에 그 사람 닮은 사람 꼭 만나게 되어 있다. 일 에 도움이 안된다. 천국으로 가려다가도 우회 전하는 셈이다. - 뮤지션, 배우, 화가, 작가 등 예술의 각종 분야를 모두 거치며 살아왔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겪은 불운 혹은 불행을 질료 삼아 예술을 수행한다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건강한 일상을 사는 중에도 예술이 나올 수 있다고 믿나. = 아유, 한가한 소리다. 예술이 나올 정도로 삶을 살면 좋겠다는 말은 악담이겠지. 다만 삶에서 예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후각, 그런 감각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게 어디 있나. 그러니까 오죽하면 예술을 하며 사는 거다. 나 역시 언젠가 한 스님에게 “도를 많이 닦으셨으니 극락 왕생하시겠다”고 말하니 "여보시오, 내가 오죽하면 스님을 하겠습니까”라는 답을 들었다. 그냥 살아도 음악과 미술이 절로 나오면 무엇하러 예술가로 살겠나. 내 평생 소원이 벽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 심리적 벽을 시각화해 그리는 게 내 목표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벽을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 벽을 뛰어넘는 심리의 벽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힘든 거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종소리>라는 그림을 그린적 있다. 깊은 산속에서 울리는 범종의 소리를 그리고 싶었다. 100호짜리 캔버스에 정신없이 그림을 그린 후 벽에 걸어놓으면 종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웬걸,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스스로 실패했다 생각해서 창고에 <종소리>를 처박아두었다. 그런데 9개월 뒤 생각해보니 소리는 사라지기 마련이더라. 계속 울리면 그건 소리가 아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내가 범성(梵 聲)을 잡았다 싶었다. 그림을 그릴 당시 종소리가 만드는 맥놀이를 정신없이 그리다 그만 물감이 튀어 캔버스에 깨알만 한 점이 찍혔다. 그래서 흰 물감으로 지우려다, 말았다. 그 점이 곧 나 같아서. 큰 소리가 존재하다 사라지고, 맥놀이가 생기고, 그 사이에 있는 점. 그 점은 멀리서는 안 보이지만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지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울 필요가 없었다.

[인터뷰]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화의 필름적 현실’과 맨몸으로 마주하길 바란다, 하스미 시게히코 인터뷰 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야 할 때에 결국 만나게 된다. <씨네21> 창간기념호에 하스미 시게히코를 만난 걸 인연이라 포장하고 싶지만 결국 세상 모든 인연은 의지의 결과이기도 하다. <씨네21>에서는 <존 포드론>의 한국 출판을 기념하여 (국내 평자 김병규, 김보년, 김소미, 김예솔비, 오진우 평론가의 질문을 포함) 서면 인터뷰를 먼저 진행했는데, 소개할 적절한 타이밍을 찾기 어려웠다. 마침 일본에서 신간 <숏이란 무엇인가-실천편>의 발매를 기념하는 상영회가 열렸고 이우빈 기자가 한달음에 달려갔다. 우리를 흔쾌히 맞아준 하스미 시게히코 선생 덕분에 도쿄 시부야에 있는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얻었다. <존 포드론>엔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적 정수가 담겨 있다. <역마차> <수색자>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기며 20세기 할리우드 서부극의 또 다른 이름이 된 존 포드다. 그 명성만큼이나 존 포드의 영화를 다룬 글은 이미 세상에 수없이 많지만, <존 포드론>은 존 포드의 세계를 철저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저자의 상상대로 그 세계를 재창조한 유일무이의 결과물이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온화한 엄밀함’이라 자처하는 비평적 태도에 따라서 지독할 정도로 상세한 존 포드의 화면들이 가득히 기록되어 있다. 이 결과물을 간략한 수사로 옮기기는 무리다. 저자의 말처럼 존 포드의 영화를 마주하기 위해서 존 포드를 직접 보는 방법밖에 없듯이, <존 포드론>을 직시하기 위해선 <존 포드론>을 읽어야만 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와의 인터뷰는 그 마주하기를 준비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한 자그마한 이정표가 되어주리라 기대한다. 평생을 영화의 매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영화광 하스미 시게히코의 견고한 영화적 태도와 최근 모습, 영화산업의 황혼 앞에 그가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던지는 명료한 전언을 소개한다. - <영화의 맨살>은 한국의 젊은 평자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았다. 올해 초 출간된 <존 포드론>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니 반갑다. 영화란 나이를 잊게 하는 아득한 체험이다. 나야 오래 살아서 영화도 꽤 많이 본 편이겠으나 영화를 아직 많이 안 본 이들도 존 포드를 보며 나와 같은 영화적 체험을 평등하게 할 수 있다. - <숏이란 무엇인가-실천편>의 발간 이후에 일본에서도 젊은 독자가 많이 늘었다고 들었다. 한국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은데. =연령, 성별, 국적을 넘어서 작품의 생생한 화면과 솔직하게 마주칠 수 있는 자들 모두가 내 책의 진정한 독자다. 80살을 훌쩍 넘었지만 일본인, 노령, 남성이라고 규정하는 자기의식을 가능한 한 멀리하며 <존 포드론>을 썼다. 이 책을 손에 넣는 분들도 부디 자신의 연령, 성별, 국적을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책에 쓰여 있는 것과 맨몸으로 마주하고, 지금도 생생한 포드의 화면에 시선을 돌려주었으면 한다.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무시간적 혹은 비역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체험으로 여러분을 이끌 것이다. 잘 알려진 듯하면서도 사실 잘 알려지지 않은 포드의 작품에 신선한 시선을 보내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할 기회를 마련해 주신 <씨네21>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명하고 싶다. - 간단하게 근황을 묻고 싶다. 최근엔 얼마나 자주, 어떻게 영화를 보고 있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외출이 드물어졌다. 최근 아오야마 신지 감독과 요시다 기주 감독,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 등 친했던 동료들의 거듭된 이별에 몸 상태(심장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편집자)가 심하게 나빠졌기에 극장에 가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시사회만 종종 가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해 DVD로 영화를 자주 보긴 하지만 이게 영화를 보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DVD 감상을 포함해서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편은 꼭 보고 있고 1년에 500편 정도는 감상하고 있다. 기억해 본다면 젊은 시절 파리에서 유학했을 때와 일본에서 학교 다녔을 땐 하루에 2~3편씩 1년에 700~800편을 봤던 것 같다. 여하간 최근엔 미야케 쇼, 하마구치 류스케, 그리고 다큐멘터리쪽에선 고모리 하루카 감독의 신작을 재밌게 봤다. -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한국에서 곧 개봉한다. =사람의 시점숏이 없다는 면이 무척 재밌었다. 시선의 주체인 카메라가 이동하는 몇개의 장면에 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예전엔 90분짜리 영화가 많았는데 지금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처럼 쓸데없이 긴 영화가 많음을 지적한 적도 있다. =영화의 적절한 상영시간을 완전히 결정짓는 기준은 없겠으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집중력이 2시간50분이나 되진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내 집중력의 한계는 90분이다. 물론 극장에서 본다는 가정하에서. 예전에 B급 영화라 불리던 것들은 70~80분 정도이기도 했으니 젊은 시절에 2~3편씩 볼 수 있던 것 같다. 짧은 상영시간 덕에 더 많은, 더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 DVD를 포함한 극장 외 창구는 진짜 ‘영화감상’이 아니란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 =물론이다. 아무래도 영화는 개인적인 체험인 동시에 집단적인 체험이고 그런 체험은 영화관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 어제 시부야의 시네마베라에서 돈 시겔의 <플레이밍 스타>(1960)를 상영하고 내가 강연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 행사를 위해 예전 영화들을 DVD로 보긴 했다. 덕분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5번째 출연작인 <플레이밍 스타>, 그의 첫 출연작인 로버트 D. 웹의 <러브 미 텐더>(1956)를 다시 봤고, 엘비스가 부른 <러브 미 텐더>의 원곡 (미국 남북전쟁 당시 유행한 발라드 곡.-편집자)가 하워드 혹스의 <컴 앤 겟 잇>(1936)에 흐르고 존 포드의 <롱 그레이 라인>(1955)의 사관학교 생도들이 부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어제 <플레이밍 스타> 강연은 어땠나. =오랜만의 대외적인 행사여서 꽤 긴장했다. 2장 정도의 노트를 대본으로 준비했는데 시간 분배를 못해서 제대로 다 말하질 못했다. 교수 일을 할 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제는 조금 난감했다. 젊은이들이 많아서 꽤 놀랐는데 아마 상영 후 이뤄진 강연이었고 <플레이밍 스타>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왔기에 젊은이들이 조금 더 본 것이 아닌가 싶다. - 아마 모두 선생님의 팬이 아니었을까. 영화에 관해 말하는 것과 쓰는 것 중 최근엔 무엇이 더 좋은가. =글쎄. 하나를 딱 잘라 말하긴 어렵겠으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영화 화면을 직접 보여주며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화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숏이 어떻게 연속되는지를 말하는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흥미롭다. 존 포드의 서정, 반복, 배우 - 2003년 광주국제영화제 포럼에서 ‘존 포드와 던지는 것’을 말한 것이 <존 포드론> 집필의 주요 과정이기도 했다. 2001년 <씨네21>과 인터뷰에서 <존 포드론> 집필 계획을 밝힌 후 2023년에야 한국 독자들이 <존 포드론>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행운이다. <존 포드론>이 포드를 모르던 젊은 세대에게 닿고, 그들이 이 중요한 영화 작가를 새로운 시점에서 발견해줬으면 한다. <존 포드론>은 20년이 넘는 오랜 우정을 안고 있는 임재철 평론가의 헌신적인 노력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2005년 임재철 평론가가 주재하는 서울의 시네클럽에서 포드의 <웨건 마스터>(1950)를 상영했고, 그 전후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어쨌든 20년 이상 전의 일이기 때문에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강연을 위한 노트를 찾아보니 이미 <존 포드론>에서 다룬 내용에 가까운 말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은 한국과 깊은 인연이 있고 첫 외국 번역이 한국어였다는 것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미야케 쇼와의 공동 감독 작품인 <존 포드에서의 던지는 것>(Throwing in John Ford’s Movie, 2023) 상영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나라도 한국이었다. 존 포드 개인과 한국과의 유대감 또한 적지 않다. 한국전쟁 중 찍은 <이것이 한국이다>This is Korea!, 1951)는 뛰어난 다큐멘터리 작품이지만 픽션 작품만을 다룬다는 <존 포드론>의 원칙에 따라 이 작품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또한 1959년 한국의 여배우 문혜란을 알게 된 것도 포드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러한 개인적인 교우 관계는 책의 의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매우 간단하게 ‘각주’로 언급하는 데 그쳤다. - <수색자>(1956)의 후반부에에서 내털리 우드를 ‘두팔’로 안아 올리는 존 웨인의 모습을 두고 조금도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적었다. 영화에서 감정의 원천과 가치란 무엇인가. =영화의 감상적인 기능이나 그 설화론적 배치에 대해 별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이 될지 모르겠다. 다만 ‘감상적’이든 ‘감정의 근원’의 농후함이든 그것이 과도한 표현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다. ‘서정성’이라는 것을 주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마 포드 또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감상을 (하나의) 영화의 이론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사실 영화든 소설이든 감상적인 것, 혹은 서정성은 ‘축축한 것(젖은 것)’이어서는 안된다. 가능하면 ‘건조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개인적인 취미의 영역을 넘어서진 못한다. - 포드에 있어서 그 ‘메마른 서정’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무엇일까. =〈수색자〉의 첫머리, 남군 병사 모습의 존 웨인을 멀리서 알아본 도로시 조던의 말없는 행동과 그 허리를 덮고 있는 흰 앞치마가 바람에 나부끼는 광경이 있다. 관객 중 누구도 두 사람이 예전에 사랑했던 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숏의 적확한 연쇄와 억제된 음악의 선율에 따라 마치 러브신 같은 순간이 화면을 뒤덮는다. 이것이야말로 메마른 서정의 전형이 아닐까. 그에 비해 존 웨인이 내털리 우드를 두팔로 안아 올리는 종막의 광경은 유감스럽게도 그 영역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내털리 우드라는 여배우가 도로시 조던에 비해 충분히 포드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포드의 또 다른 순간이 떠오른다. <리오 그란데>에서 존 웨인이 막사에 들어온 아들에게 엄격하게 대하더니 아들이 나간 후 장성한 아들의 키를 가늠하는 장면이다. =아, 그 장면은 훌륭한 장면이지. 나도 뭉클했다. (웃음) 그저 순식간에 지나갈 수도 있는, 별 의미 없는 장면인데도 포드가 너무나도 잘 연출한 화면이다. 아버지가 일어나 텐트 천막에 다가가서 자신과 아들 중 누구의 키가 더 큰지 재보는 장면을 말하는 게 맞나. - 맞다. <아파치요새>에서 헨리 폰다의 딸이 술집의 여주인에게 자기의 모자를 씌워주는 장면에서도 반복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포드의 그런 장면들을 모아서 꼭 글을 써 보길 바란다. (웃음) - <존 포드론>에서 언급되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가령 <청년 링컨>은 아무래도 재판 영화라 공간도 좁고 인물의 움직임도 비교적 제한돼 있다. 그러나 후반부의 재판 시퀀스는 감정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장면이다. 헨리 폰다의 ‘뒤로 기대는 자세’로 잘 알려진 재판 장면 연출에서 주목한 요소가 무엇인가. =확실히 포드의 작품에는 많은 재판 장면이 나온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프리스트 판사>(1934)의 그 딕시의 대합창으로 끝나는 더할 나위 없는 낙천적인 재판이다. 포드가 가장 존재감 있는 배우라고 인정했던 헨리 월솔― 말할 것도 없이 사일런트기 포드의 걸작 <켄터키 프라이드>(1925)에도 나왔고 그리피스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영화사가 가장 자랑해야 할 배우 중 한명― 이 얼굴을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그 법정 장면은 <태양은 밝게 빛난다>(1953)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다만 여기서는 재판 자체보다 창녀를 매장하는 긴 장례식의 아름다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고 부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청년 링컨>을 재판 영화라는 범주로 분류하는 것에는 동조할 수 없다. 영화 초반 가지가 무성한 높은 나무의 줄기에 긴 다리를 대고 독서에 빠져드는 열린 자연의 광경은 정말로 훌륭하다. 그 후 비밀스럽게 연정을 품고 있던 젊은 여성과 함께 강둑을 산책하고, 헤어지고 나서 강가를 향해 돌을 던질 때까지의 옥외 장면의 연출의 호흡은 존 포드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하면 후반의 재판 장면은 뛰어난 것이라도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아니었다. - 어떤 행동의 반복되는 이미지가 영화 작가의 조건이라면 어느 정도까지의 예외가 작가의 기질을 뒤집지 않는 한에서 허용되는 것일까. =주제론적인 체계의 분석에 있어서 그 예외성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질문을 받아들이겠다. 규칙을 확정하는 것은 예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포드의 여성들 대부분이 거울 앞에서 화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네 남자와 기도>(1938)에서 로레타 영의 꼼꼼한 화장 솜씨를 본 이후다. ‘아, 포드의 작품에는 거울이 거의 부재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여성들이 보란 듯이 거울 앞에 몸을 두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됐다. 내가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존 포드론>의 제3장 「그리고 인간」의 Ⅱ 「비와 거울」의 두 번째 「반영」이라고 하는 항목이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앞서 제3장의 Ⅲ 「노래가 불리고 춤이 춤을 춘다」의 「주느비에브와 캐슬린, 그리고…」 항목에서 다시 한번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여성에 대해 아주 짧게 언급하고 있다. 바로 <코레히도르 전기>(1945)에서 여성 장교 도나 리드가 대장 로버트 몽고메리의 초대로 전쟁터에 흔한 판잣집 같은 레스토랑에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다. 그곳에서의 그녀는 마중 나온 존 웨인의 눈앞에서 입구 옆 그림자가 된 부분에 놓여 있는 듯한 거울에 얼굴을 비춰 솜씨 있게 화장을 해 보인다. 이 뜻밖의 숏의 훌륭함은 어떤가. 이미 여러 번 보고 있었을 <코레히도르 전기>에서 얼마 전까지 이 거울 같은 것의 존재는 깨닫지 못했다. 여기서 도나 리드 옆모습의 거울 속 반영은 <네 남자와 기도>의 로레타 영보다 훨씬 훌륭하다. 자신도 모르게 이게 영화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 포드의 여성은 거울을 보며 화장하지 않지만 <네 남자와 기도>(1938)의 로레타 영은 예외라고 언급했다. =로레타 영은 도나 리드가 그렇듯 존 포드의 영화에는 한번밖에 출연하지 않았다. 다섯편이나 되는 작품에 주연한 모린 오하라나 중기에 두편, 후기에 두편 정도 주연하고 있는 조앤 드류나 베라 마일스와 비교해 포드의 작품에 한편밖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여배우들이 있다. 그중 역설적으로 출연이 극히 드물다는 예외성이 오히려 그 작품을 빛내는 배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로레타 영이다. <스코틀랜드의 메리>(1936)의 캐서린 헵번, <역마차>(1939)의 클레어 트레버, <토바코 로드>(1941)의 진 티어니, <모감보>(1953)의 에바 가드너, 〈일곱 여인들〉(1966)의 앤 밴크로프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세계는 움직인다>(1934)의 매들린 캐럴이나 <모호크의 북소리>(1939)의 클로데트 콜베르도 특히 포드적인 여성상에 담겨진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 나름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 〈황색 리본>(1949)에서 빅터 맥라글렌이 몸집이 작은 병사를 안아 올려 (마치 사람이) 오브제인 것처럼 벽에 던지며 장면을 마무리 짓는다고 말했다. 포드가 배우(인간)를 하나의 오브제로 보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감독인 포드가 이른바 스턴트맨들과 극히 친한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고 싶다. 실제로 포드는 덩치 큰 남자에게 ‘던져지고’ 총격을 받은 말에서 ‘전락’하는 것에 능숙한 스턴트맨들을 많이 기용했다. 〈역마차〉의 스턴트맨이었던 야키마 카누트와 그 후도 깊은 관계를 유지해서, <모감보>에서는 제2반 감독으로서 야수들의 생태의 촬영을 맡기기도 했다. 그런 스턴트맨들 중 중기 포드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 프레드 케네디다. 화면을 보면 맥라글렌에게 던져지는 것은 바로 이 스턴트맨 겸 조연자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포드 영화의 폭력 장면에 있어 스턴트맨이라는 특수한 역할을 연기하는 인물들의 존재가 매우 중요했다. - 포드에게 배우란 무엇일까. 로베르 브레송의 모델론처럼 포드에도 명확한 배우론이 있었나. =존 포드가 로베르 브레송처럼 각각 작품에 걸맞은 명확한 배우론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더구나 감독으로서의 그가 배우들의 선택에 무언가 집착하고 있었다고 해도 몇년에 한편밖에 찍지 않았던 브레송과 어느 시기까지만 해도 20세기 폭스사의 계약 감독으로서 한해에 평균 세편이나 되는 작품을 찍어야 했던 포드와는 배우에 대한 입장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포드는 “존 포드 스톡 컴퍼니”(The John Ford Stock Company)라고 불리는 한 무리의 마음에 드는 배우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탭의 일원에 불과했던 존 웨인처럼 사일런트 말기의 여러 작품에 살짝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를 〈역마차〉의 주연자로 맞이하는 데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존 웨인의 성숙을 기다릴 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