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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년밖에 안됐다. 노란 꽃을 아직 꺾지 말아 달라”, 바람의 세월 문종택, 김환태 감독

웃는 학생들의 등굣길로 시작해서 국화가 떠다니는 바다로 끝나는 영화를 보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바람의 세월>은 그런 영화다. 딸 문지성양을 참사로 잃고 카메라를 든 아버지 문종택 감독과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망각과 기억2: 돌아 봄>에서 <세월 오적>을 만든 김환태 감독이 공동 연출했으며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지난 4월3일 개봉했다. 두 감독을 포함한 미디어 활동가들이 끈질기게 모은 3654일간의 기록을 시간순으로 펼쳐놓는 이 작품은 영상 아카이브 자체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간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하 특별법) 등 제도 마련을 촉구해온 세월호 유가족들을 활동가로서도 주목하며 피해자들을 피해자 프레임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인터뷰 당일, 스튜디오 분위기가 무거울 거란 예상은 초반부터 빗나갔다.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선 문종택, 김환태 감독은 007 포즈까지 취하며 사진기자의 “좋다”는 환호를 그 어떤 배우보다 많이 받았다. - 촬영 때 보여준 감독님들의 환상 호흡에 깜짝 놀랐다. 두분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김환태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로 기억한다. 나와 15년 된 절친한 형이자 세월호 가족들과 작업해온 고 박종필 감독이 촬영을 나간 촛불집회에서 아버님을 처음 뵀다. (문종택 감독을 바라보며) 근데 우리가 가까이 얘기하는 사이가 된 지는 얼마 안되지 않았나요? 문종택 사실 지금도 말을 많이 하는 사이는 아니야. (웃음) 눈으로 잘 얘기하면 됐지. 환태 감독의 첫인상은 지금과 같다. 물고 늘어질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내가 육체노동이라고 할 만큼 고된 이 작업의 파트너로 환태 감독을 선택했다. - 영화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그동안 문종택 감독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 세월호 유가족 방송 <416TV>에 올린 5천여개의 영상은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진 건가. 문종택 세월호 참사 8주기가 지나면서부터 주변 미디어 활동가들에게 이런 얘기를 꽤 들었다. 그동안 찍어놓은 걸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데 모아서 남겨놓으라고. 당시 내 고민은 하나였다. 이젠 하다 하다 영화까지 만드는 거냐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김일란 감독(<바람의 세월> 총괄 프로듀서)이 용기를 줬다. “아버님, 이런 기록 자체가 있다는 걸 모르니 알리셔야 해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슬슬 시동을 걸었다. 김환태 작업 관련해서 아버님에게 연락받은 게 2022년 10월이었다. 그러고 나서 7테라바이트 넘는 분량의 기록물을 건네받았다. 광화문, 목포, 팽목항, 동거차도 등 공간별로 한번 추려서 주신 거였는데도 그 정도였다. 아버님의 영상을 기본으로 1인미디어 ‘미디어몽구’님의 참사 초기 자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아카이빙한 자료, 그리고 내가 찍어둔 것까지 모였다. 정리보다는 흐름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10주기를 맞은 가족들의 마음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기조 아래 2014~15년까지의 초기 부실 대응, 이후 특별법 제정과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투쟁, 문재인 정부 들어 유가족이 점차 외면받는 과정을 골자로 잡았다. 1년 반 동안 내용을 넣고 빼고 하는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가결된 순간으로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아버님의 의견이었다. 아버님이 그날 국회 앞 환희의 풍경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아주셨다. 문종택 언론에서 항상 우는 장면만 비추니까 그렇지 우리 엄마, 아빠들 원래 그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 법률가, 활동가, 문화생산자로 활동하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피해자 아닌 유가족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김환태 시스템 개선을 바라는 과정에서 부모님들이 실제로 법을 공부하고 촬영법을 익히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되신 만큼 그 모습들도 집중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가족들이 끊임없는 좌절과 배신 속에서 그 어려운 길을 다들 가시려고 한다. 아버님이 극 중 내레이션으로 강조하셨듯 당신들이 겪으신 일이 우리 사회에서 다시 일어나질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 분노와 그리움이 섞인 문종택 감독의 내레이션을 잊기 힘들다. 지금과 같이 절제된 버전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재녹음 과정이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문종택 한번에 끝냈다. (김환태 감독이 “워낙 장난기가 많으셔서”라고 말을 받자) 하라는 대로 했는데도 환태 감독이 계속 다시 하라고 하니까. 속으로 그럼 어디 네가 해봐라, 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했다. 김환태 말씀만 저렇게 하시는 거지 10년의 세월을 마주보기가 정말 힘드셨을 거다. 아버님께서 당신 채널에서 방송한 경력이 꽤 되다 보니 목소리 톤이 좋으시고 이 영화는 곧 아버님의 기록이니 아버님의 좋은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 초반 녹음 땐 격앙된 느낌이 강했으나 담담하게 회고하듯 해주시는 것이 관객들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더 될 것 같다는 피드백을 드리니 최종에 이르러선 잘 소화해주셨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다. (문종택 감독을 바라보며) 잘하셨어요. 정말 잘하셨어요. - 후반부에 5·18민주화운동 유족들이 세월호 참사 유족을 위로하고, 세월호 참사 유족이 이태원 참사 유족을 위로하는 장면이 있다. 뭉클한 동시에 위로의 순간에 국가는 빠져 있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김환태 국가 시스템의 부재가 피해자들끼리 서로 위로할 수 없다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비극적 연결을 명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 연대의 순간을 뒤에 배치했다. 이와 관련해선 아버님이 할 말이 많으실 거다. 문종택 (침묵 끝에) 새벽마다 잘 안 보이는 별을 찾으면서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에 대해 생각한다. 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마음먹고 말로 하는 데서 끝나니까 그런 거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씀, 여전히 감사하다. 그러나 이제는 ‘행동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행동하면 잊지 않는 것은 저절로 따라온다.

[인터뷰]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더 많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화 프로젝트 ‘봄이 온다’ 김일란 총괄 PD

세월호 참사 이후, 관련한 주요 현장에는 언제나 연분홍치마가 있었다. 성적소수문화 환경을 위한 모임으로 발족한 인권단체이자 창작집단으로서 김일란 감독, 그리고 연분홍치마가 활동한 지난 10년은 곧 세월호 참사 이후의 10년이기도 하다. 용산 참사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읽어낸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공동정범>, 그리고 <3xFTM>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 <종로의 기적> 등의 커밍아웃 시리즈를 만든 김일란 감독은 세월호 유가족들 곁에 머물면서 기록과 재현의 힘을 믿어온 동시에 언제나 역부족도 체감해야 했다고 말한다. 김일란 감독에게 왜 직접 세월호 영화를 연출하지는 않았는지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용산 참사에 대한 두편의 영화를 작업한 창작자에게 더이상 또 다른 참사를 소화할 온당한 여력은 없으리라고 되뇌었다. 그러므로 장편다큐멘터리 <바람의 세월>, 세편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세 가지 안부>, 그리고 장편 극영화 <목화솜 피는 날>로 구성된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화 프로젝트 ‘봄이 온다’의 총괄 PD를 맡은 것은 그에게 세월호와 진실로 동행하려는 최선의 노력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기억에의 독려이다. 형식과 시선의 주인이 다른 세개의 프로젝트를 조화롭게 묶어낸 김일란 총괄 프로듀서를 오랜만에 지면에 초대했다. - 총괄 PD로서 ‘봄이 온다’ 프로젝트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경로와 플랫폼에 대한 고민도 컸겠다. = 매체 환경이 다변화된 만큼 영화제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게 모두의 바람이었다. 기쁜 소식을 전하자면 10주기인 4월16일에 MBC에서 옴니버스 <세 가지 안부> 중 <흔적>과 <드라이브 97>이 방영될 예정이다. 제작 초기부터 방송국의 문을 두드린 <흔적>과 <그레이존>의 한경수 PD 덕분이다. 현 정권에서, KBS가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에 MBC에서 방영된다는 것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OTT를 비롯한 여러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 참사 이후 10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야 공개하거나 재현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었을까. = 아니,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잠수사 분들이 아이들을 차가운 바닷속에서 건져올리는 모습, 진상규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찍어놓은 어떤 영상들은 지금도 우리가 볼 수 있는 무엇이 아닌 것 같다. 지성 아버지(문종택)도 <바람의 세월>을 작업할 때 아직은 그런 그림을 포함시킬 수 없겠다고 말했다. ‘봄이 온다’ 프로젝트에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쓰인 영화는 단 하나도 없다. - 연분홍치마는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미디어 활동을 계속해왔다. 활동가이자 창작자로서 참사 이후 김일란의 10년은 어떤 시간이었나. = 어떤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고 아직 처리되지 못한 감정들도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는데, 이를테면 용산 참사 이후 세월호 참사,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면서 마치 참사가 또 다른 참사로 덮이는 것 같은, 그래서 그사이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을 배제하기 힘들었다.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이후 내가 주로 해온 작업이란 것이 결국 유가족 곁에 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관심이 줄어드는 시점 이후로 소외와 무관심 속에 놓인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같이 일상을 만들어나가야 할 시점에 그것에 관여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인 창작자 개인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돌아갈 일상이 없어진 분들을 볼 때의 어려움, 그 가운데 나 또한 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의 곤란한 감정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영화, 합창, 연극, 백서, 전시 등 유가족과 함께 예술 작업을 해본 이들은 모두 비슷한 감정이지 않았을까. - <세 가지 안부> 중 <드라이브 97>에는 세월호 참사 생존자에서 이제는 응급구조사가 된 장애진씨가 나온다. 그가 처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를 찾아가 활동하게 된 이유를 회상할 때 “도저히 그러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아울러 참사 이후 기록 현장에 함께한 사람들에게 내재된 이 거부할 수 없는 인력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 내게는 가장 어려운 종류의 질문이다. 먹고사느라 이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는 게 솔직한 대답이다. 매일 쉬지 않고 어떤 촬영을 했을 뿐이다. 2017년 5월까지는 그냥 달렸다. 돌이켜보았을 때 절대 잊히지 않는 풍경이 있기는 하다. 2014년 5월8일의 일인데, 그날 그냥 우연히 집에 가다가 동료에게 연락을 받고 KBS 앞으로 갔다. KBS 보도국장에 대한 항의로 자식들의 영정사진을 든 유가족 부모들이 시위 중이었다. 그때 내가 받은 충격은 ‘너무 많다, 정말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사람이. 그날 밤에 청운동 동사무소로 행진하면서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밤새 따라갔고, 며칠 전에 자식을 잃은 부모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새벽에 한 아버님이 가수가 꿈이었던 아이가 불렀던 <거위의 꿈>을 들려줬다. 그것까지 듣고 나니까 내가 뭐든 누구든 일단 뭐라도 하지 않고는 안될 것 같은 상태가 됐다. 그렇게 국민대책회의 미디어팀의 팀장을 하게 되고, 이후 1년간 수없이 집회에 나가 영상을 만드는 일이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위원장 직책까지 이어졌다. 이 작업을 하면서 <공동정범>(2017)도 만들게 됐다. - 돌이켜보건대 <공동정범>을 작업하는 동안 더욱 직접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의 영향력 속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 그러니 <공동정범>은 내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세월호를 전혀 언급하지는 않지만 참사 이후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갖고서 만든 영화다. 두 참사가 같이 있는 거다. 그러고 나서 2016년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했고 2017년에 촛불을 들었다. 2017년 5월에 세월호 인양까지 보고 나서는 내 능력은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는 세월호 참사 관련 시위 및 행사 현장을 직접 촬영하고 만지는 일은 멈췄다. 이 무렵에 또 한 가지 혼자서 작게 다짐한 것이 있는데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연출은 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참사를 파고드는 작업을 다시 하게 된다면 용산 참사에 대해 더 제대로 하는 것이 맞겠다는 입장이다.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훨씬 많다. - 2022년 EBS국제다큐영화제의 국제다큐멘터리 제작 플랫폼(K-DOCS)에서 신작을 피칭해 대상을 받았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 = <에디와 앨리스>는 편집 마무리 단계다. 올해 안에 선보일 수 있다면 가장 좋겠다. 2017년을 기점으로 인생에서 작은 단절을 경험했는데, 그것에 대한 나의 응답이 곧 이 영화인 것 같다. 몸의 변화, 노화, 질병, 회복, 임신과 출산을 아우르는 인간의 모든 트랜지션 사이의 유사성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에디와 앨리스>는 장면전환기법으로서의 트랜지션과 MTF 트랜스 여성들의 트랜지션이라는 개념을 교차해서 트랜스젠더들의 경험을 영화적 감각으로 전달하려는 시도다. 감히 인용하기가 부끄럽지만 아녜스 바르다는 자신의 모든 영화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말했었는데 그러한 표명에 다가가고자 했던 작업이기도 하다.

[특집] 망각과 싸우며, 기억을 추동하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세월호 참사 10주기 온라인 추념전 작품 소개

시대와 상호작용하는 카메라는 2014년 4월16일 이후의 한국 사회를 담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세월호 10주기인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세월호 참사를 기록해온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작품들을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추념전 ‘10년, 연대의 세월’은 4월 한달간 온라인과 오프라인(안산, 고양 등)에서 진행 중이며 ‘다큐보다’(docu.VoDA)에서 열리고 있는 온라인 추념전의 작품들은 선착순(단 작품별 200~400회로 제한)으로 무료 관람이 가능하다. 온라인 추념전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은 매섭고 뜨겁다. 참사 직후 1년간 보여준 정부의 부실 대응을 고발하는 <나쁜나라>(김진열 감독),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제작한 옴니버스 시리즈 <망각과 기억>(김재영 감독 외)과 <망각과 기억2>(박종필 감독 외), 특정 유가족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초현실>(김응수 감독), 세월호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 <로그북>(복진옥 감독), 진도인들의 애도 의식을 채집한 <진도>(유동종 감독), 일반 시민의 트라우마를 말하는 <당신의 사월>(주현숙 감독), 세월호 엄마들의 연극 도전기 <장기자랑>(이소현 감독), 단원고 희생자 학생들과 같은 나이의 청소년들이 만든 <기억해, 봄>(최호영(Re;cord))까지 총 9편이다. 이중 <망각과 기억> 1, 2편과 <기억해, 봄>을 자세히 소개한다. 그리고 4월이 가기 전, 추념전 방문은 “우리나라가 안전 사회의 어디쯤 와 있는지를 점검하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게 하는”(<바람의 세월> 문종택 감독)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정일건, 태준식, 김재영, 박종필, 손경화, 박정미, 최종호/2016년/180분/전체관람가 7편의 중·단편다큐멘터리를 모은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은 독립다큐멘터리 감독 모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가 기획, 제작한 작품이다. 참사 초기부터 팽목항, 안산, 서울 등지에서 현장을 기록해온 7명의 감독은 세월호 참사 2주기에 맞춰 공동의 결실을 세상에 내놓았다. 작품이 처음 공개된 제16회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고 박종필 감독 겸 위원장은 “4·16 참사 관련 쟁점들을 직접 공유할 필요를 느꼈다”며 작품 취지를 설명한 바 있다. 침몰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인양>(고 박종필 감독)을 감시하는 유가족과 자원활동가의 충혈된 눈은 눈앞의 배를 넘어 보이지 않는 정부를 향해 있다. 2015년 1차 청문회에서 증인들이 늘어놓는 허황한 대답은 유족들이 왜 진실을 <도둑>(김재영 감독) 맞았다고 느끼는지를 통감하게 한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 연이어 깔리는 가족들의 간절한 음성 편지는 스크린에 사라지지 않는 눈물 <자국>(정일건 감독)을 남긴다. 유가족, 졸업생, 자원봉사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단원고등학교 내 4·16 <교실>(태준식 감독) 존폐 논쟁은 보존 대신 제거라는 손쉬운 대처를 택해왔던 한국 사회의 일면을 드러낸다. 전기원 노동자, 삼성반도체 노동자, 가습기 살균기 피해자의 피해 사례로까지 넓히는 <살인>(박정미 감독)은 안전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당장의 구체적인 노력이 절실함을 알린다. 세월호와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푸른색의 이미지들에서 노란 리본으로 대표되는 노란색의 이미지로 옮겨가는 <블루-옐로우>(손경화 감독)의 물결에는 치유와 회복의 염원이 담겼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 <선언>(최종호 감독)을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망각에 저항하겠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서려 있다.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2: 돌아 봄> 박종필, 김환태, 문성준, 안창규, 김태일/2017년/175분/전체관람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가 3주기를 맞이해 <망각과 기억>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했다. 5편의 중편다큐멘터리를 모은 <망각과 기억2: 돌아 봄>은 “3년상 치렀으면 이제 된 거 아니냐며 힐난하는”(고 박종필 감독) 망각의 조짐에 저항하며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참사의 진실과 남겨진 이들의 아픔을 들여다본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추모공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유가족은 지역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지만 곳곳에서 보내는 <기억의 손길>(문성준 감독)에 힘을 얻는다. <걸음을 멈추고>(김태일, 주로미 감독) 보게 하는 마임 배우 류성국씨의 야외 추모 공연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 청와대, 정부, 국정원, 국회, 언론 등 이른바 <세월 오적>(김환태 감독)이 일삼는 얕은 거짓은 복잡한 감정을 유발하는 반면 희생자의 시신 수습을 했던 고 김관홍 민간 <잠수사>(고 박종필 감독)의 더 구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과 적극적인 진상규명 활동은 커다란 슬픔을 안긴다. 참사 현장이 있는 동고차도로 향하는 배에 <승선>(안창규 감독)하는 생존자 김성묵씨의 뒷모습은 그의 참사 이후의 삶을 응원하게 한다. 기억해, 봄 최호영(Re;cord)/2023년/23분/전체관람가 “이 사람들의 슬픔이 아직 멈추지 않았는데 우리가 끝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이정겸 학생) 2021년 여름, 단원고 희생자들과 같은 나이가 된 우고등학교 2학년 친구 12명은 세월호 참사가 단순히 궁금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보니 세월호에 관한 기억이 어렴풋했다. 2014년 4월16일 대한민국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렇게 커다랗고 슬픈 일이 왜 아직도 해결이 안된 걸까. 그래서 친구들은 안산, 진도, 목포 등을 돌아다니며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졸업한 뒤 다시 카메라 앞에 앉은 친구들은 참사를 마주하며 했던 생각들을 나눈다. <기억해, 봄>에서 “기억하자”는 말은 사회적 재난을 직시하려는 이들의 의지에 의해 점차 또렷해진다. 한번의 여행으로 끝내지 않고 안전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결연한 젊은 얼굴들은 말로만 기억을 강조하던 얼굴을 부끄럽게 한다. 최호영 감독은 “어쩌면 친구들과 영화를 만든다는 설렘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라며 18살 당시를 회상했다.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단원고 희생자가 타고 있었던 배를 직접 보고 유가족이 쐰 팽목항의 바람을 맞으면서 그가 결심한 게 하나 있다. “실망하더라도 냉소 없이, 같이 살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리뷰] ‘정순’, 중년 여성 재현의 사각지대를 밝히는 불꽃같은 이름

중년 여성 정순(김금순)은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지방의 한 식품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허구한 날 아들뻘의 작업반장 도윤(김최용준)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정순은 늘 겪는 일이라며 넉살 좋게 웃어넘긴다. 정순은 공장에 새로 들어온 중년 남성 영수(조현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영수가 묵고 있는 모텔 달방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차를 빌려 출근 전 훌쩍 바람을 쐬고 오는 등 소소한 연애를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수가 찍은 정순의 영상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수많은 이들이 그 영상을 주고받는다. 정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충격에 빠지고, 정순의 딸 유진(윤금선아)은 분노하여 경찰서를 찾아간다.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정순>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온 디지털성범죄와 중년 여성 노동자의 삶을 겹쳐 보인다. ‘정순’이라는 이름보다는 ‘엄마’, ‘이모’, ‘아줌마’로 불리는 어느 중년 여성의 평범한 일상은 디지털성범죄로 송두리째 흔들린다. 세상이 흔히 피해자로 떠올릴 법한 젊은 세대가 아닌, 결혼을 앞둔 성인 딸을 두고 있는 중년 여성을 피해자로 디지털성범죄를 조명하는 영화는 우리 사회의 에이지즘(노인 차별)과 관련한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이에 가장 고통받는 건 당연하게도 정순이다. 범죄 사실을 알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간 유진 곁에서 정순은 점점 몸을 움츠린다. <정순>은 서울독립영화제 2022,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고, 특히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신예 정지혜 감독은 세심하고도 사려 깊은 연출을 통해 중년 여성 노동자의 삶의 단면과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분투를 그려낸다. 우리 사회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소재로 하는 여타 영화들이 의도치 않게 저지르는 무심한 실수나 의도적으로 꾀하는 자극적 묘사 등을 <정순>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정순의 성범죄 피해를 반복 묘사해야 할 때 ‘노래’라는 간접적 방법을 활용한 점이 그 예다. 그 노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후반부 장면에서 다면적 감정을 환기하는 요소가 된다. 엄마도, 이모도, 아줌마도 아닌 ‘정순’이 피해자다움의 신화를 난타하는 해당 장면은 가해자가 만들고, 세상이 뒤집어씌우고, 공권력이 묵인한 올가미를 벗어나고자 하는 애처롭고도 강인한 몸부림이다. 정지혜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배우 김금순의 활약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초반부의 생활감 넘치는 장면들부터 앞서 언급한 후반부 장면까지 영화를 빈틈없이 채워넣는다. 정순의 딸 유진 역의 윤금선아 또한 김금순과의 뛰어난 호흡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조현우, 김최용준 등 남성 배우들 또한 각자 주어진 역할을 능숙하게 소화한다. “돈 주면 다 된 거지.” 사건 이후 공장에 오랜만에 출근한 정순은 작업반장 도윤을 포함해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불편해하는 이들을 맞닥뜨린다. 영상을 유포함으로써 범죄 행위에 가담한 이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책망하는 이들을 향해 던지는 정순의 나직한 한마디는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폐부를 꿰뚫는다. CHECK POINT <69세> 감독 임선애, 2019 중·노년 여성으로서 성범죄와 에이지즘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69세>의 효정은 정순과 닮았다. 두 여성감독의 섬세한 연출을 바탕으로 배우 예수정과 김금순의 뛰어난 연기가 극을 이끈다는 점 또한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각 영화의 후반부, 효정과 정순이 보여주는 용기와 결단을 나란히 놓아볼 수도 있다.

[리뷰] ‘돌들이 말할 때까지’, 음성과 상상이 만드는 아카이브, 역사는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1947~48년 무렵 제주도에선 4·3 사건이라 불리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념 투쟁이란 명목 아래 수만명의 무고한 제주 도민들이 공권력에 학살당한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정부의 민간인 학살이었음에도 여전히 그 진상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에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 사건 당시 전국 각지의 수형소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겪었던 다섯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76년 전 어릴 적의 일을 회고하는 것인데도 그들은 당시의 아픔과 치욕들을 생생하게 내뱉는다. 영화는 그들의 음성을 별다른 기교 없이 똑바로 보고 듣더니 종종 제주의 자연에 눈을 돌린다. 해저 동굴, 눈 내린 설원, 푸르른 녹음이 장면에 스친다. 그러나 이 자연을 눈여겨본다면 이것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만들어진 인공 동굴이라거나 4·3 사건 피해자들이 몇주를 굶으며 버틴 산 중턱임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아픈 역사가 새겨진 제주의 시공간이 천천히 스크린을 뒤덮는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진영의 한축을 맡아온 다큐멘터리스트 김경만 감독의 신작이다. 장편 <미국의 바람과 불>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바보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각하의 만수무강> 등의 단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한국의 역사에 천착하고 있던 그가 제주 4·3 사건에 눈을 돌려 9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그의 작업 궤적에서도 눈에 띄는 결과물이다. 그간의 장편에선 아카이브 푸티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편찬다큐멘터리의 형식미를 강조했고, 단편에선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찍는 직관적인 방식도 구사했다. 이번엔 실존 인물들의 음성과 현재의 풍경을 교차하며 과거를 상상하게 만든다. 실제 4·3 당시의 영상이 펼쳐지지 않을지라도 관객은 적극적인 상상력을 통해 역사의 한복판에 참여하게 된다. 표면적으론 전작들보다 한층 차분해 보이지만, 관객의 내면은 여전히 바삐 돌아가야 하는 뜨거운 다큐멘터리다.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제18회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됐다.

[인터뷰] “신인 창작자들의 창작 기반을 마련해주며 저변 넓혀가겠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지난 2월29일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의 신임 이사장으로 백재호 이사장이 선임됐다. 백재호 이사장은 <그들이 죽었다>(2014), <시민 노무현>(2019), <붉은 장미의 추억>(2022) 등을 연출한 감독이자 배우와 프로듀서 활동을 겸해온 전방위적 영화인이다. 2022년엔 <최선의 삶>의 프로듀서로서 부산국제영화제 이춘연 영화인상을 받았고, 1996년 이래 독립영화계의 주축이었던 인디포럼영화제에 몸담기도 했다. 독립영화계 곳곳에서 펼쳐온 그의 다양한 경력은 최근 독립영화계가 겪는 여러 부침에 유연하게 대응할 역량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립영화에 대한 정책적 외면, 세대교체의 난점, 영화계의 연대 등 그의 앞에 놓인 숙제는 꽤 두텁다. 이사장 부임 후 한두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영화산업위기극복영화인연대(이하 영화인연대)에 참여하는 등 끊이지 않는 일복에 파묻혀있다. 그럼에도 신인 영화인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집중하며 “독립영화인들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안겨주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뚜렷하고 똑바르다. - 그간 한독협 운영위원, 이사 등으로 활동해왔다. 이사장 역임까지의 과정은. = 처음 한독협과 연을 맺었던 건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였다. 장편 데뷔작인 <그들이 죽었다>가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되면서 방문했는데 한창 <다이빙벨> 사태로 영화인들이 목소리를 내던 때였다. 영화인연대에 주도적으로 뛰어드는 한독협 선배들이 대단해 보여서 따라다녔다. 그러다 보니 한독협에서 운영위원으로 일하게 됐고 영화단체연대회의에도 참여하게 됐다. 임기가 끝나고선 영화 작업에 집중하느라 활동이 뜸했는데 지난해쯤 이사진 교체가 이뤄지면서 이사로 합류했다. 그러더니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이사장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시더라. 처음엔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제가 어떻게 해요~’라면서 넘기곤 했는데… 지난해 말부터 진지하게 논의하게 됐다. - 한독협의 주축이었던 세대와 전대 이사장들과 비교하면 무척 젊은 편이다. 부담감은 없었나. = 있었다. 그래서 인망이 두텁고 경력도 오래된 감독님들에게 공동 이사장을 부탁드리려 한 적도 있다. 나이도 나이지만 내 경력도 마음에 쓰였다. 다른 독립영화감독들처럼 영화과를 나왔다거나 단편부터 차근차근 밟아온 사람이 아니라 어디선가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난 사람이었으니까. 독립영화 선배들과의 인연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혹시 내가 이사장이 된다면 선배 세대와의 연결이 느슨해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 - 그럼에도 단독 이사장에 오른 이유는 젊은 영화인들을 한독협에 더 응집시키려는 목적이었을까. = 한독협뿐 아니라 많은 영화단체에 조직의 허리를 맡아줄 20~30대 영화인이 적은 상황이다. 선배들도 나처럼 비교적 젊은 친구가 자리를 맡아서 분위기를 바꿔주길 바라신 것 같다. 다만 젊은 영화인들에게 협회에 들어오라고만 말하면 그들이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그보단 신인 창작자들이 겪는 부당한 일들을 협회 차원에서 지원해주고, 협회가 그들의 창작 기반을 마련해주는 플랫폼 역할을 해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도 함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특히 젊은 창작자들을 돕는 일에 방점을 둔 이유는. = 좋은 영화학교나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나온 이들은 그나마 영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있는 환경에 있다. 하지만 예전의 나처럼 그 주변부에서 혼자 영화를 시작하려면 막막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최근엔 그들을 지원해줄 작은 영화제들도 점차 사라지는 실정이다. 또 얼마 전엔 영화진흥위원회 사업의 지원 조건이 제작사 단위 신청이나 자부담금 편성 등으로 갑자기 바뀌지 않았나. 개인 단위의 창작자들이 외면당하는 거다. 한독협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정책에 항의하고, 영화 제작에 도움을 줘야 한다. - 독립영화를 다루는 작은 영화제들이 사라지면서 한독협이 주최하는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의 부담감도 커지고 있는 것 같다. = 맞다. 서독제 내부에서도 이런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양새다. 영화제에서 지지하고 싶은 영화들이 있는 한편, 영화제의 부피와 책임감이 커진 만큼 관객수 등 실질적인 성과도 내야 하니까. 영화제뿐 아니라 독립영화 제작지원 같은 사업에 참여하는 심사위원들의 딜레마도 비슷한 것 같다. 사업 주최측의 성과를 무시할 수도 없는 와중에 정량적인 평가를 하다보면 정말 번뜩이는 작품을 놓칠 때도 있으니까. 나도 가끔은 나보다 대단한 창작자가 나오는 길을 막아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한해에 2천~3천편씩 만들어지는 작품들을 어떻게 발굴할지의 문제도 협회에서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 한독협에선 독립·예술영화 유통배급지원센터 ‘인디그라운드’를 운영하며 온라인 상영 등을 이어오고도 있다. 차후 운영 계획은. = 1년 단위로 따내야 하는 사업이라서 올해도 한독협에서 운영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난해 말에 공고가 났으니 올해 초엔 결정됐어야 할 부분인데 사업 연장과 재공고가 이어지면서 지연되고 있다. 최소한 2~3년의 운영 기간은 보장돼 있어야 중장기적인 계획도 세울 텐데… 다소 답답할 때가 있다. 제작지원, 배급지원이나 공동체 상영지원 같은 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해보려 해도 어렵다. 영진위나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비슷한 사업이 있다면 정부 차원에서 반려당하기 일쑤다. 유사해 보일지라도 각 단체의 역할과 집중도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일괄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엔 늘 의문이 든다. - 다른 영화 직능 단체나 지역 독립영화협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꾸려나갈지도 궁금하다. = 얼마 전 부과금 폐지 논란에 대응하며 만들어진 영화인연대(<씨네21> 1451호 참고)를 포함해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쌓아가는 중이다. 오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영화산업, 영화제, 독립영화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려고도 한다. 부과금 폐지 건도 마찬가지인데 영화 관련 정책을 두고 영화인들의 의견을 생략하는 사례들이 무척 아쉽게 느껴진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다른 단체들과 최대한 논의하겠다. - 이사장직에 임하는 개인적 목표가 있다면. = 한독협 이사장을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 (웃음) 여기가 창작자의 무덤 같은 곳이 아니고, 고영재 전 한독협 이사장님처럼 개인 작업까지 병행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자리라는 걸 다시 증명하고 싶다. 또 한독협이 없었다면 영화인들이 손해를 보거나 포기했을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한독협이 꼭 있어야 하나?’라는 의문에도 대응하겠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신진 영화인들에게 ‘나 같은 사람들이 또 있구나’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좋은 이별

무언가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사고 싶은 물건에 마침 할인 가격이 매겨진다거나, 이직하고 싶을 때 알맞은 제안을 받는다거나, 복잡한 이사 일정이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때 같은 것 말이다. 그런 행운을 맞이하면 그 물건이나 직장, 집이 왠지 더 좋아진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때’는 초등학교 5학년 때다. 평생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책 두권을 연달아 만났다. <어린 왕자>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이다. 사막에서 길을 헤매는 전투기 조종사가 이상한 어린이를 만나 꿈같은 이야기를 듣는 <어린 왕자>에는 상상과 은유가 가득하다.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제제가 뽀르뚜까 아저씨를 만나 조심스럽게 희망을 품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는 현실의 참혹함과 아름다움이 자극적일 만큼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어린 나는 줄거리만 따라갔을 뿐, 더 깊은 의미나 주제를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두 작품을 읽고 몸을 떨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슬픔에도 스펙트럼이 있다면 나는 양 끝을 경험한 셈이다. 갑자기 내가 알던 세상이 폭발하듯 커지는 바람에, 그것도 슬픔으로 커지는 바람에 정신이 얼얼했다. 그 뒤로 책에 푹 빠졌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스스로 ‘책을 아는 사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독서교실 어린이들한테 “어렸을 때 제일 좋아했던 책”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이 두권을 말했더니 어린이들은 “그중에 딱 한권만 고른다면요?” “그래도 억지로 고른다면요?” 하고 집요하게 물어댔다. 사실 이건 내가 어린이들에게 ‘이 책이 저 책보다 왜 좋은지’ 설명하게 하느라 자주 하는 질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내가 그 질문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고심 끝에 <어린 왕자>라고 답했다. 그림도 예쁘고 등장인물도 개성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두 작품 모두 절정에서 누군가 죽는다. 어린 왕자는 꽃이 있는 별로 돌아가기 위해 스스로 육신을 버리기로 했고, 뽀르뚜까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한쪽은 어린이가 죽고, 한쪽은 어른이 죽는다. 내가 어린이가 죽는 이야기를 더 좋아해왔다는 건 좀 충격적이었다. 물론 <어린 왕자>가 우화적인 이야기다 보니 죽음이 미화된 것도 있다. 그래도 주인공이 죽었는데!내가 <어린 왕자>를 더 좋아하는 이유로 찾아낸 한 가지는 이렇다. 이별의 슬픔을 누가 감당하느냐의 문제라는 것.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제는 어린이인데 아무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서는 언제나 어른이 훨씬 더 많은 짐을 들어야 한다. 이야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두 작품을 모두 ‘내 인생을 바꿔놓은 책’으로 꼽으면서도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는 <어린 왕자>만큼 여러 번 읽지 않았던 게 내게도 설명이 되었다. 딱 맞게 만난 주인공들도 이별을 맞이한다. 그때의 슬픔은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책을 덮은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반복한다. 슬픔은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굳센 사람이, 조금이라도 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한줌 더 가져가야 한다. 그것이 좋은 이별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수사반장 1958>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는 것, 최불암 x 이제훈 인터뷰

- 두분의 첫 만남은 <수사반장 1958> 대본 리딩 현장인 거죠. 이제훈 네, 그렇긴 하지만 제게 선생님은 TV에서 수없이 봐온 분이라 그때가 처음인 것 같지가 않네요. 최불암 제훈이를 작품 속에서 처음 본 건 드라마 <시그널>이었지요. 그때 아주 인상적이었거든. 형사물이라 관심이 가서 챙겨봤는데 제훈이가 눈에 확 띄더군요. - <수사반장>의 경력이 형사물에 대한 애정을 만든 걸까요. 최불암 아무래도 그렇지요. 특히 <시그널> 때는 더 궁금했어요. 요즘의 젊은 형사들은 어떤 직업의식을 갖고서 맡은 바를 해내고 있나 하는 것들 말입니다. <모범택시>는 재미로 봤고요. 그래도 역시 제훈이가 자신을 전부를 털어낸 건 이번 작품일 겁니다. (웃음) 이제훈 하하, 감사합니다 선생님. - 이야기 나온 것처럼 이제훈 배우는 앞서 <시그널>과 <모범택시>로 수사극 신드롬 속에 있었고, 범죄를 타도하는 캐릭터로서의 이미지가 겹치지는 않을까 고민했을 법도 한데요. <수사반장 1958>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제훈 만 18년간 8 80회차를 이어간 <수사반장>에 대한 경외감이 컸어요. 이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그리고 박 반장 하면 형사의 표본으로서 굉장히 카리스마 있고 노련한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가 완성형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보고 싶다는 시청자로서의 바람도 있었어요. 연륜이 생기기 이전의 박영한. 그러니까 오직 패기로 충만한 젊은 박영한을 보면서 최불암 선생님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도 좋을 것 같았고요. MBC에서 프리퀄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고민 없이 덤벼들었습니다. 최불암 나는 20세기의 반장이고 <수사반장 1958>은 21세기의 해석이니까 추억은 묻어둡시다. 제훈이가 자기 몸이라는 도구로 새 인간형을 창출해야 하는데 선배인 나의 존재가 걸리적거리지 않았기만 바라요. - 아직도 회자되는 <수사반장>의 굳건한 전통에 부합하면서도 이제훈만의 해석을 더하는 일. 참 쉽지 않았겠습니다. 이제훈 처음에는 저도 모르게 자꾸만 최불암이라는 대배우의 모습을 따라하고 있더라고요. 한다고 잘되지도 않았고요. 확고한 존재감을 지녔던 캐릭터를 시간이 흘러 다시 표현하는 작업이 저에겐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비슷해질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그것은 결국 되지 않는 일이구나’를 깨달았어요.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나만의 길을 찾는 것에 추진력이 생겼고요. 이후로 오히려 <수사반장> 속 선생님의 모습을 더 열심히 연구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박 반장의 마음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바꿨거든요. 피해자는 물론이고 범죄자의 숨은 사연까지도 헤아리는 휴머니스트의 면모를 닮고 싶었습니다. - 사실 최불암 배우의 젊은 시절 역할로 배우 이제훈을 낙점했다는 것 자체로 타입캐스팅은 아닌 거지요. 최불암 그래요, 난 젊은 시절에도 이 친구처럼 잘생기지 않았었다고. (웃음) 학교 다닐 때는 연출 공부를 했어요. 연극에서 노역을 맡은 친구가 잘하질 못해서 내가 옆에서 이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대신 보여줬더니, 지켜보던 선생이 ‘그냥 네가 하는 게 낫겠다’ 해서 갑자기 무대에 서게 된 거요. 그렇게 배우가 된 거거든. 그러니까 일찍부터 노역쪽으로 전력을 다했지요. <수사반장> 시작에서부터 머리에 흰 칠도 얹고 메이크업으로 주름도 아주 굵게 넣었어요. - 31살의 최불암 배우가 50대의 수사반장을 맡아 함께 나이 들어갔다면, 1984년생인 이제훈 배우는 <수사반장 1958>에서 박영한의 팔팔한 청춘 시절을 맡은 것도 재밌습니다. 경기도 소도둑 검거율 1위로 황천지사에서 활약하던 박영한이 종남경찰서 수사1반에 전근 오면서 시작되는 드라마죠. 청년 박영한은 어떤 모습으로 담겼을까요. 이제훈 프리퀄의 매력은 우리가 아는, 이미 완성된 사람이 성숙해지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성장이라고 봤어요. 표면적으로는 이 친구가 왜 경찰이 되었고 어떤 사건을 거쳐 종남경찰서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세명의 동료를 만나 어떻게 단단히 뭉치게 되었는지도 보여주죠. 박영한도 언젠가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을 텐데 그런 개인적인 서사도 드러나고요. 시골에서 올라온 박영한이 그 시절 반장님을 통해 양복을 처음 입어보는 모습도 나옵니다. 넥타이에 핀도 꽂고, 그러다 트렌치코트까지 가게 되죠. 최불암 내가 처음 수사반장을 연기할 때 박영한은 반장이니까 무조건 넥타이를 매고 젠틀맨답게, 형사의 권위를 지키는 복장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좀 편하게 잠바 같은 걸 입어본 적도 없지요. 사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경찰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거든요. 그런데 <수사반장>의 효과인지 이후로는 형사들이 누구 집을 찾으면 ‘수사관님,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하고 반겨준다는 겁니다 글쎄. 옛날에는 대문 밖에 세워두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는데. 이미지를 쇄신해보려고 열심히 양복을 입은 것이 통했고, 여러 이유로 연애나 결혼하기가 참 어렵다던 형사들이 결혼하는 속도도 빨라졌다고 하더라고. - 박 반장만큼이나 김 형사(김상순), 조 형사(조경환), 서 형사(김호정), 그리고 남 형사(남성훈)의 개성과 팀워크도 큰 호감을 샀던 드라마지요. 배우들의 실제 본명과 특징이 모두 캐릭터에 선명하게 반영된 경우였습니다. <수사반장 1958>에선 어떻습니까. 이제훈 <수사반장>의 네 형사야말로 앙상블의 효과를 보여준 거죠. 티키타카 의견을 주고받고 반장이 지시를 내리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요. 이번 드라마에선 젊은 경환(최우성)과 호정(윤현수)이 형사라는 직업에 입문하는 과정이 나와요. 영한과 상순(이동휘)이 초보인 이들을 잘 이끌어가는 모습이 대본에도 써 있죠. 동시에 저는 오리지널 <수사반장>처럼 각 캐릭터가 분명한 자기 의견을 내는 모습이 잘 비쳤으면 해서 작가님께 부탁을 한 적도 있습니다. 박영한의 상징성이 있으니 아무래도 제게 대사를 많이 할애해주셨는데, 형사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선 모든 캐릭터가 좀더 풍성하게 주고받기식으로 이야기했으면 한다고요. 더 똘똘 뭉쳐서 활달한 그림이 나온 것 같아서 좋습니다. - <수사반장 1958> 1화에 최불암 배우가 직접 등장합니다. 이제훈 배우는 1958년의 박영한에 더해 현대의 박영한(최불암)의 손자 역할도 맡은 거지요? 이제훈 네, <수사반장> 이후 은퇴한 박영한 반장의 모습으로 선생님이 등장하세요.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는데 그의 손자도 경찰이 된 거죠. <수사반장 1958>의 첫화와 마지막화에 최불암 선생님이 나와요. 특히 마지막쯤에는 박영한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정말 뭉클해져요. 한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와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배우의 얼굴 하나로 모두 설명이 되는데, 캐릭터의 역사뿐 아니라 최불암 선생님의 존재가 그 자체로 감격스럽게 다가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 자랑하게 될 것 같아요. 최불암 나로서는 박 반장이 어떻게 늙었나 그게 제일 중요했지요. 사회를 위해서 가족들 다 희생시켜서, 내가 보기엔 전부 잃어버리고 홀로 사는 사람이에요. 왜 옛날에 신문도 팔고 버스표도 파는 구멍가게들 있잖아요? 은퇴하고 조용히 거기 들어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수사반장 1958>에선 약간 규모를 더 키워서 슈퍼마켓 정도로 이름을 붙여주더라고. 그래봤자 아주 낡고 작은 가게고 손자가 거길 찾아오는 내용이죠. 내가 한 애드리브가 ‘밥 먹었냐’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요즘 밥 못 먹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우리 시절 걱정이 나한테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야. -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드라마 <기분 좋은 날>(2014) 이후 10년 만입니다. 어떠셨어요? 최불암 김성훈 감독님이 아주 성실한 사람이에요. 내가 걸어들어와서 가게 안에 걸린 작은 거울을 보는 짧은 신인데 조명부터 카메라를 아주 세세하게 보면서 7번인가를 찍더라고. 믿음이 갔지요. 배우로 촬영장에 있어본 지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내가 스스로 느낀 것보다도 아주 기력을 쓴 모양이에요. 대전에서 첫 촬영을 마치고 여의도 집까지 가는데 2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미동도 없이 자다가 깬 거야. <한국인의 밥상> 촬영하러 왕복 7~8시간 거리를 당일치기로 다녀도 그런 적은 잘 없는데 말이에요. 수사반장의 시대 - 처음에 이제훈 배우에게 했던 질문을 최불암 선생님께도 드리고 싶어요. 1967년에 KBS 드라마 <수양대군>으로 매체 데뷔한 지 4년 만에 <수사반장>의 전설을 열었습니다. 30대 초반의 배우에게 당시로서의 고민은 무엇이었습니까. 최불암 그 나이에 50대의 베테랑 형사를 연기한다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감히 내가 수사반장을 할 수 있나 하는 책임감이 무겁긴 했지요. 그러나 내게는 확실한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수사반장 박영한에게서 한국적인 인간상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어요. 연극계 선배인 연극연출가 허규 선생과 우리 두 사람의 당대 과제로서 늘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미국에 카우보이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가 있는데 한국의 정신은 어떤 인물들을 통해 표현할 수 있냐는 거죠. 물론 1971년부터 박영한의 상(像)이 완전히 섰던 것은 아니고 세월을 거쳐가면서 나로서도 점차 깨달아간 거지만. 연극 공부를 할 때 일본에 건너간 적이 있는데, 일제의 탄압만 생각하다가 그들이 고도의 미래를 향해가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니 엄청나게 충격적이더군요. 그게 힘들어서 그때 내가 잠시 죽으려고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첫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제훈 <수사반장 1958>에도 비상식이 통용되는 야만적인 시대의 면모가 드러납니다, 선생님. 그 시절에 못 살고 못 먹는 사람들도 많은데 영한은 시장에서 물건을 훔치는 범인을 단순히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더라고요. 그들이 죗값을 치르고 나와서 다시 형사를 찾아와 고마움을 표현하는 모습은 요즘 드라마에선 정말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최불암 그것이 비극이고 또 인간애지. <수사반장>의 눈물나는 구석도 전부 그런 장면이었어. - 지금 돌아보기에 <수사반장>의 저력이 무엇이었다고 보세요. 최불암 중요한 게 ‘수사실화극’이라는 거거든. 재판 끝나고 처벌도 다 내려진 다음에 우리한테 대본이 온 거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작품을 할 때 즈음엔 조금 떨어져서 현상을 봐야만 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러니 자연히 사회문제로 연결됩니다. 돈 때문에 생긴 범죄라면 왜 그렇게 돈이 필요했느냐 또 물어야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돈 때문에 자기 멸시를 하게 된 것은 아닌지 건드릴 수 있을 때까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혼자 생각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다 같이 둘러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했다고. 기본 전제는 출연자들이 가족 같았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MBC 연기자라고 하면 탤런트실의 100명이 다 식구예요. 화합이 되니까 작품의 테마를 같이 독해하고 서로의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서 요점을 찾아내지요. <수사반장>이 사랑받았던 것은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그걸 자기 얘기로 여겼기 때문이에요. - 시대적 아이콘인 인물을 완성하기까지 시행착오는 없었는지요. 최불암 어머니가 주점을 했는데(최불암 배우의 어머니가 운영한 은성주점은 김동리, 박목월, 서정주, 전혜린, 천상병 등 1960년대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었던 명동의 아지트였다.-편집자), 손님들이 <수사반장>을 보고 요즘 말로는 모니터링이란 걸 해준 셈이죠. 지금은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잘 보면 박 반장이 초반에는 계속 바뀌어간다고. 처음에는 와이셔츠 위에 권총도 차고 뒤에 수갑도 달고, 선글라스도 멋있게 끼고 나옵니다. 첫째는 내 호기심 때문이고 둘째는 약간 오버 액션으로 힘이 들어간 겁니다. 내 모습 그대로 나오려니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아서 도구를 쓴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누구를 쏘려고 총을 차고 다니며, 그 수갑은 은팔찌냐?’ 하시더라고. 배우가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눈을 가리고 나오지 말라고도 하셨고. 나중에 자문받으려고 최종락 총경을 만났더니 진짜로 가벼운 몸으로 다니시더라고. 과장을 덜어내는 법을 그때 배웠습니다. - 햇수로 19년을 <수사반장>에 출연하는 동안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는 영화 작업도 열심히 하셨고요, <전원일기>도 198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스케줄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최불암 그러니 힘들어서 1980년 정도부터는 영화계를 떠났지요.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를 같이하면서 내 모든 것을 두 드라마에 쏟은 거죠. 그전까지는 기자님 말마따나 영화도 많이 찍었습니다. <수사반장>은 초창기 방영본은 보존되지 않아서 이젠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게 참 안타깝지요. 그런데 영화는 오래 남아요. 매력적인 분야죠.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엔 영화배우들 사정이 훨씬 어려웠는데 나로서는 나 한 사람이 빠짐으로 인해 누구 하나라도 더 배역을 얻을 테니 그게 기뻤어요. <전원일기> 시작할 때의 내 기쁨은 그거였지요. - <수사반장 1958>을 앞두고 <다큐플렉스: 돌아온 레전드 수사반장>에서도 두분이 함께 이야기하셨죠. 옛날에 최불암 선생님이 하루의 촬영을 마치면 동료들과 ‘이제 불 끄러 가자’ 하고 막걸리 한잔 걸치러 나갔다는 이야기가 기억나는데요. 최불암 진짜로 잔술 하나에 달궈졌던 가슴에서 치치치칙, 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나요. 숯불에다가 물 붓는 것 같지요. 결국 자신을 조금 쉬게 만드는 방편이었던 거죠. 많이 마시게 되면 조금 속상했던 거고 경쾌하게 마시면 가뿐히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고. 그때는 내가 맡은 역할, 공무원의 심정에 크게 이입해서 속 타는 일도 잦았던 게 사실입니다. 어찌됐든 정신적 갈증을 달래주는 거니까 이러나 저러나 끝나고 술맛이 없다면 그건 실패한 작품이야. (웃음) - 세월이 흘러서 가족 같은 <수사반장>의 동료들이 대부분 고인이 되셨습니다. 최불암 우리 수사관 동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것은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을 테니 이쯤 이야기하고, 나는 우리 여성 순경들 이야기를 좀 덧붙일까 해요. (바지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며) 여기 내가 늘 차고 다니는 노트에 우리 여순경들 이름을 적어가지고 다닌다고. 이름을 안 잊어버리려고. <수사반장>으로 데뷔한 고 김영애를 시작으로 염복순, 고 안옥희, 고 이금복, 고 김화란, 오미희, 이휘향, 윤경숙, 노경주. 이 9명의 이름들을 꼭 적어주시오. 여기도 반은 떠났지. 나한테 무슨 원죄가 있는 게 아닌가, 참 이상합니다. 왜 나만 남겨두고…. <수사반장 1958>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는데, 무덤에서 우리 옛 동료들한테 이야기하는 꿈을 내가 실제로도 꿉니다. 이 모든 게 다 꿈 같기도 하고요. 인간, 그리고 배우의 조건 - 김기영 감독의 <파계> 속 고승, <달려라 만석아>의 시골 아버지, <영자의 전성시대>의 목욕탕 김씨, 무엇보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 속 황바우로 보건대 최불암 배우가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도 인간애를 전하는 캐릭터가 많았습니다. 장르물이 많은 요즘에는 찾기 힘들지만, 공교롭게도 이제훈 배우에게도 그런 면모가 보여요. <박열> <아이 캔 스피크>, 그리고 시리즈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가 있죠. 이제훈 제가 연기하면서 궁금한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행로이거든요. 시대나 환경에 따라 어떤 특질을 갖게 되는지, 그 속에서도 동일한 인간의 조건 같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에 끌립니다. 그냥 성향이고 본능인데요.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들 있잖아요. 그 속에 내가 담겨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무려 최불암 선생님과 연결될 수 있어 기쁘네요. 최불암 휴머니즘이란 단어가 20세기의 것이 된 것 같아, 이젠 아무도 안 쓰는 것 같고. 낡은 소리 같지만 매체가 발달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인간성에 대해 더 잘 다뤄줬으면 해요. 그런 의미에서 <수사반장>만큼이나 <최후의 증인>은 내게 뜻깊은 작품입니다. <수사반장 1958>의 시대를 <최후의 증인>도 다루고 있지요. 황바우는 무식한 농사꾼이지만 홀로 남겨진 한 가정의 여식을 끝까지 지키려다 죽고, 시대의 비리를 모두 목격한 형사(하명중)는 자살해버립니다. 따뜻함만이 아니라 그런 괴로움도 인간의 것이지요. 배우라는 직업이 자랑스러우려면 어느 분야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 가장 필요한 존재들이 되어야 해요. - 두분의 경력이 도합 80년이 훌쩍 넘어갑니다. 배우 되기의 고민이 개인의 삶에 끼친 영향이 있습니까. 최불암 아, 생각나는 일화가 하나 있지. 한창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를 함께 찍을 때요. 일주일에 3일은 <전원일기>, 또 3일은 <수사반장>을 찍습니다. 그때는 의상이나 준비물은 다 방송국에 맡겨두고 몸만 출퇴근한다고. 아침에 경비 선생이 먼저 나한테 이렇게 인사를 해요. “수고 많으십니다. 오늘은 박 반장이시군요.” 내가 놀라서 어떻게 아냐고 그러면 오늘은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모습이 누가 봐도 수사반장 걸음이라는 거야. 밤늦도록 <수사반장> 대본 보고 잠깐 자다 나오는 거니까 출근길에 걷는 모양새가 이미 박 반장인 거지. 또 어떤 때는 “아유, 김 회장님 들어오시네” 이래요. 말하자면 박 반장하고 김 회장한테 내 몸의 반반씩 준 거지요. 두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해줘야 했던 겁니다. 이제훈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네요! 최불암 분장실에 거울이 많잖니? 분장 다 마치고 마지막에 스튜디오로 걸어가기 전에 거울을 한번 봐. 그다음에 혼자 주문을 거는 거야. 최불암, 오늘 열심히 잘 해라. 그러면 <수사반장>을 할 때는 박 반장의 목소리로, <전원일기>를 할 때는 김 회장 목소리로 대답이 들리는 것 같아. 그 목소리를 그대로 가지고서 스튜디오로 향하는 통로를 혼자 걸어가는 거야. 이제훈 너무 좋은 이야기인데요, 선생님. 말씀 듣다가 생각이 난 건데, 저는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 경험도 없고 미숙한 상태에서 모든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었어요. 그래서 막연히 선생님처럼 베테랑이 되면 그래도 편안해질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거든요. 몸에 밴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올거라고요. 시간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하다보니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어려워지는구나, 싶어요. 해온 것만큼 유지하는 것, 과거보다 더 나은 저의 모습을 발견해내는 것 모두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럴수록 더 몰입하고 준비를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의 진정성을 더 깊이 팔 수밖에 없다고 느껴요. - <전원일기>가 햇수로 23년, <수사반장>이 19년간 방영되었고 <한국인의 밥상>도 벌써 14년차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를 오래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인데요, 배우 최불암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최불암 장수 프로그램의 비결이 뭐냐고 가끔 물어들 오는데 그건 참 내가 대답하기 힘든 영역이에요. 팔자 속에 그럴 운명이 들어 있는 모양이야. 하여간 시작을 하면 오래 끌고 가게 됩니다. 그만두자 싶어도 스스로 그게 안됩니다. CF도 하고 있는 두 가지가 15년이 넘었어요. 다 드러난 밑천이 수치스러워서 매일 하루빨리 그만두자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 꾸준히 하려면 화려하게 가지 말고 덤덤하고 수더분하게 하자고 <한국인의 밥상> 제작진에 일찌감치 부탁하셨다고요. 최불암 <수사반장>도 마찬가지로 한회가 재밌으면 그다음 몇회는 힘 빼고 슴슴하게 가야 해요. 전력을 다하면 금방 지치고 내려오는 일밖에는 없다고. 이래저래 오랜 호흡으로 작품을 해보니 생긴 내 나름의 꾀인 거지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운명의 손짓 속에서 터득한 겁니다. - 마지막으로 <수사반장>의 박영한이 <수사반장 1958>의 박영한에게 한마디를 남긴다면요. 최불암 안중근 의사가 묵서로 남긴 말을 대신 전하겠습니다. 인무원려난성대업(人無遠慮難成大業). 내가 젊은 시절에 배우 일도 잘 풀리지 않고 실연마저 당해서 절망하고 있을 때 훌륭한 기자 선생 한분이 전해준 말이지요.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 멀리 보고 큰일을 이루시기를. - 최불암 선생님, 극장에서 영화도 종종 보시나요? 최불암 그럼요. 신작은 거의 빼놓지 않고 보죠. 우리 와이프가 영화를 좋아해서 아침 일찍 극장을 찾습니다. 둘이 조조할인 받지요. 이제훈 제가 7월에 개봉하는 <탈주> 시사회에 모셔도 될까요? 북한 병사가 남한으로 탈출하는 이야기예요. 최불암 거 재밌겠는데! 그런데 나는 언제든 집 앞 극장으로 뛰어가는 게 제일 편하거든.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몰래 보러 갈게. 이제훈 하하하, 네 좋아요 선생님. 그럼 꼭 봐주세요! 멀리 보고 오래 가기 <수사반장 1958>로 성사된 두 세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다큐플렉스: 돌아온 레전드 수사반장>에서 최불암은 네명의 후배 이제훈, 이동휘, 최우성, 윤현수에게 ‘배우·연기자·광대’ 세 글자를 한자로 써 보인다. 사람이 아닌 우수한 것을 가리키는 배우, 넓고 크게 번져나가는 힘을 품은 광대, 그리고 기예를 실연하는 사람을 뜻하는 연기자의 의미를 그는 역설하고자 한 것이다. 1959년 연극 <햄릿>으로 데뷔해 1980년대에 <수사반장> <전원일기>로 브라운관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짧게는 14년 길게는 23년인 장수 프로그램만 4개(<전원일기> <수사반장> <한국인의 밥상> <좋은나라 운동본부>)인 데뷔 66년차의 배우에게 물색없는 줄 알면서도 제언을 부탁한 것은 그래서였다. 최불암은 “AI의 시대에 배우에게는 더욱더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처럼 평생 일하기를 바라는 젊은 배우들, 그리고 한국 콘텐츠가 추구할 경지를 우륵의 말로 대신했다. <삼국사기>에서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이 제자들의 음악을 듣고 남긴 말 ‘낙이불류 애비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다. “중용을 지키면서 변함없이 가자는 게 내가 아는 전부예요. 우륵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낙이불류 애이불비. 즐거우나 너무 넘쳐흐르지 않고 슬퍼도 그 슬픔이 비통에 이르지 않는다. K콘텐츠가 한창이라고 하는데 강하고 날것의 표현만이 넘치는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여러 세대가 조화로운 풍경, 절제의 미학을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면의 가치를 충분히 탐구해야 멀리 보고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인터뷰] 철저한 베트남어의 구현 <동조자> 수전 다우니, 니브 피치먼 제작총괄(EP)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함께 제작사 팀 다우니를 운영하는 수전 다우니와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에너미>(2013) 등을 제작한 니브 피치먼은 <동조자>의 제작총괄(EP)로 함께했다. 두 제작자는 작품에 꼭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전세계에 “그물을 펼쳤”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샌드라 오 같은 훌륭한 배우가 이미 합류한 상태지만 주인공 캡틴에 걸맞은 배우를 찾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호아 쉬인더는 연극무대에 선 경험이 있지만 캡틴 역으로 발탁되기 전까진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했다.”(수전 다우니) 다우니가 “<동조자>만큼 배우를 만나기 위해 전세계를 탐색한 적은 없었다”며 “<동조자>를 통해 비관습적인 캐스팅 루트를 새로 발명했다는 걸 알아주길 바란다”는 바람을 밝히자 니브 피치먼이 캐스팅 과정 중 경험한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를 공유했다. “캡틴을 심문하는 사령관은 혹독한 얼굴을 가져야 했고 매우 강한 베트남 북부 방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다. 배역에 부합하는 비주얼을 지닌 배우를 찾았는데 정작 그의 방언에 확신이 없었다. 나에게 <동조자>를 소개해준 베트남계 친구에게 오디션 영상을 보냈는데 그 또한 스웨덴인이라 확신이 없다고 했다. 결국 베트남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친구의 아내에게까지 그 영상을 보냈고 답신이 왔다. ‘공산주의자의 억양은 아니네요.’” 위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듯 <동조자>의 제작진이 작품을 만들며 특히 유념한 부분은 철저한 베트남어의 구현이다. 이들은 “프리프로덕션부터 포스트프로덕션까지 전문가의 의견을 통해 작중 베트남어의 방언이 정확한지, 언어의 용례가 올바른지 끊임없이 검토했”(수전 다우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긴요한 역할을 했던 이는 <동조자>의 원작 소설을 쓴 비엣 타인 응우옌이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베트남어에 능통한 원작자 응우옌이 늘 컨설턴트 역할을 겸했다. 그에게 언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정치 상황과 등장인물의 전사에 관해서도 질문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지식의 보고였다.”(니브 피치먼) 니브 피치먼은 <동조자>를 처음 읽자마자 “이 책은 이미 영화인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이건 시리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물은 후 시리즈로의 전환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동조자>는 시리즈여야 한다”고 못을 박자마자 <동조자>는 시리즈의 포맷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전세계 시청자들이 OTT 플랫폼을 통해 시리즈 <동조자>를 동시 시청할 수 있는 지금, 수전 다우니는 “이 전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캡틴의 대사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바람을 전한다. “전쟁과 이로 인한 난민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그래서 <동조자>를 시청하는 일은 지난 역사를 다시 살피는 작업이다. 다만 <동조자>를 통해 진영간 대립이 유발하는 차이가 아닌 유사성을 찾길 바란다. 이념은 세상에 두 가지로 존재한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흑백논리로만 간주될 수 없다. 인간이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엔 복합적인 요소가 작동한다는 걸 <동조자>가 세상에 일깨우길 희망한다.”

[인터뷰] “코미디의 핵심은 시대정신이다”, <피식대학> <빵송국> <숏박스4> 정영준 메타코미디 대표

2021년 문을 연 메타코미디는 베이비붐 세대부터 Z세대까지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며 국내 코미디계의 흐름을 이끄는 코미디 레이블이다. 장삐쭈, 피식대학, 빵송국, 숏박스, 과나, 김해준, 박세미 등 대세 크리에이터들 모두 이곳에서 한솥밥 먹는 사이이며 카페 사장 최준,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 서준맘과 길은지, 한사랑산악회와 같은 유명 캐릭터들 역시 이곳에서 탄생했다. 2010년대 들어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한 덩어리가 돼버린 한국 코미디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다시금 우리에게 코미디를 다채롭게 즐기는 기쁨을 안기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CJ ENM, YG 엔터테인먼트 코미디팀, 샌드박스네트워크 엔터테인먼트를 거쳐 마침내 코미디왕국의 수장이 된 정영준 메타코미디 대표는 “코미디가 우리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한국 사회”를 꿈꾼다. - 메타코미디의 창업 계기가 한국 코미디의 쇠락과 관련이 있나. = 그렇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당시 코미디가 한국 방송계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코미디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방송에서 코미디가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만나면 농담을 했다. 그게 코미디가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한국 코미디가 공백기일 때 나는 운 좋게 영어를 할 줄 알고 일본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코미디 빅 팬으로서 양국의 왕성한 코미디 콘텐츠를 섭렵했다. 보면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많은 것들을 흡수하는데 왜 코미디만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 국내 최초 코미디 레이블을 설립했을 당시,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걸로 알고 있다. 초반 기틀을 어떻게 잡아나갔나. = 대부분 이해를 잘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너는 개그맨 소속사를 차리고 싶은 거냐’는 말들을 들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워낙 반골 성향이라 타격을 받진 않았다. 코미디업에 대한 확신은 없어도 내 커리어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그간 몸담았던 회사들에서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전부 수익을 냈었기 때문에 나와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그렇다고 나 혼자 뭘 할 수 없는 분야이니 처음 1~2년은 거대한 함선을 함께 타고 나갈 동료들을 영입하는 데 주력했다. 장삐쭈, 피식대학, 빵송국, 김혜준, 숏박스, 엄지윤, 과나, 스낵타운까지 나와 방향이 같고 세상에 다양한 코미디가 존재한다는 걸 보여줄 만한 아티스트들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그들이 응해준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순항할 수 있었다. - 유튜브 플랫폼엔 친숙한 편이었는지. = 거의 처음 생겼을 때부터 이용했었던 것 같다. 당시 20대였고 사진 올리는 문화가 막 생겨나던 시절이었는데, 유튜브가 나온 걸 보고 사람들이 동영상으로 소통하는 시기도 곧 오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머지않아 정말 그런 시대가 왔고 유튜브 큐레이션이 궁금해 MCN쪽으로 가서 유튜브 코리아 카테고리를 분석하기 시작했는데 뷰티, 먹방, 게임은 다 있어도 코미디는 없었다. 그나마 키즈쪽에서 ‘급식왕’, ‘흔한남매’ 같은 코미디 콘텐츠가 태동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일하면서 교류가 있었던 코미디언들에게 2030세대가 볼만한 코미디가 비었으니 그걸 너희들이 맡아줬으면 좋겠고, 채널 이름은 ‘○○ 대학’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들이 ‘피식’이란 이름을 가져왔고… 그게 <피식대학>의 시작이었다. 나도 그때쯤 나올 때가 됐다 싶어 마지막 직장을 나왔고. - 그간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유튜브 문법이 있나. = 솔직히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무슨 무슨 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만드는 사람들이 재밌다고, 멋있다고 여기는 걸 하면 되는 거고, 대중이 운 좋게 공감해주면 그 자체가 엔터테인먼트가 되는 거다. 예전에 유튜브는 10분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 진리처럼 떠돌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얘긴 잘 알다시피 너무나 쉽게 깨졌다. 침착맨이 <삼국지>에 대해 1시간 동안 설명한 콘텐츠가 몇백만 조회수를 기록한 적도 있다. 다시 말해 유튜브는 타이밍이 잘 맞는 게 핵심이지 이래야 한다는 법칙들은 다 부차적인 문제다. 그래서 메타코미디도 구체적인 레퍼런스가 있지 않았다. - 메타코미디의 회의실 풍경과 현재 정영준 대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궁금하다. =우선 CM이라고 부르는 대표 직속 크리에이티브 매니저들이 아티스트들을 총체적으로 담당한다. 이들이 아티스트들과 창의적인 얘기들을 중점적으로 나눈다. 하루에 회의만 10시간씩 하다가 집에 갈 때가 비일비재해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사무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아티스트들과 논의도 하고 일이 잘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고. 앞장서서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위치다 보니 아쉽게도 A부터 Z부터 디테일을 챙기던 시절과는 멀어졌다. 기본적으로 모든 콘텐츠는 해당 콘텐츠를 만드는 아티스트들의 소관이고 내가 컨펌하는 절차 같은 건 밟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구독자가 아이디어마다 그걸 처음 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들하시는데 우리도 모른다. 이거 웃기다, 저거 웃기다 하면서 막 던지다가 한 덩어리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웃음) - 자잘하게 궁금한 것들이 있다. 는 왜 영어로 진행하고, <05학번이즈히어>에서의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줌 사용법은 어떻게 결정했나. = 단순하다. 소위 영어 잘하는 척하는 외국병에 우리가 걸렸다고 설정하면 웃길 것 같았다. <05학번이즈히어>의 촬영법은 출연진인 (김)민수가 현장에서 낸 아이디어였다. 아마 못난 얼굴과 볼록 튀어나온 배를 가까이서 보여주는 게 웃겨서였을 거다. - 캔슬 컬쳐 이슈 이후 <나락퀴즈쇼>가 나온 걸 보면서 코미디는 시대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탄생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 코미디의 핵심은 시대정신이고 코미디라는 건 결국 우리가 대체로 공감하는 굉장히 우스운 지점을 놀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만약 ‘대체로 공감’할 수 없는 소재라면 그건 코미디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락퀴즈쇼>는 슬기롭게 잘 만들어진 기획이라고 자부한다. - 콘텐츠 제작에 있어 수위 조절은 늘 고민거리일 것 같다. = 아티스트들이 매일 진지하게 하는 고민이다. 대중은 수위가 너무 낮으면 찾지를 않고 너무 세면 크게 분노한다. 그러나 그런 지점은 어쩔 수 없이 코미디가 필연적으로 가져가야 할 부분이다. 어떤 친구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아예 안 만날 수 없듯이 대중과 계속 싸우고 화해하면서, 무엇보다 현명하게 대응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 지난 3월30일에 코미디 전용 공연장 ‘메타코미디클럽 홍대’가 개관 100일을 맞았다. 오프라인 공간이 왜 필요하다고 봤나. = 메타코미디클럽 홍대는 메타코미디의 IP를 만들어내는 R&D 센터 정도로 생각해주면 될 것 같다. 관객과 직접 만나는 자리는 우리의 농담을 검증해보고 가다듬어서 더 좋은 농담으로 발전시킬 절호의 기회다. 이호창 본부장 같은 캐릭터가 공연에서 나왔는데, 그와 같은 실탄을 많이 쟁여놓고 싶었다. 앞으로는 신인 개발의 장 역할도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다. 언젠가 우리가 메타코미디 제작 코미디영화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웃음) = 구체적인 계획까진 없지만 만들 생각은 분명히 가지고 있다. 메타코미디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선 결국 글로벌라이제이션을 해야 할 텐데 코미디가 해외로 나갈 기회는 영화나 드라마 형태일 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코미디 역량이 내부에 어느 정도 쌓이고 국내 코미디의 범위를 범대중적으로 넓혀 어느 정도 승률이 높아졌을 때,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행오버> 같은 코미디 무비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다. - 2024년의 메타코미디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나. = 굶어 죽지 않는 미래. (웃음) 애초에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어 메타코미디를 차렸다. 그러니 그것들을 다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 망할 수 없다. 공통질문 1. 메타코미디를 대중에게 인식시킨 핵심 콘텐츠는? “당연하게도 ‘메타코미디클럽’. 흔히 축구선수가 하는 족구 경기 같은 콘텐츠라고 소개한다. 누구나 낄낄거리면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진지해지는 바람에 지금은 휴업 상태다. 조만간 새 콘텐츠가 업로드돼 올라가니 기대해 달라.” 2. 내 예상만큼 조회수가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아끼는 회차는? “<빵송국> 채널의 ‘두루마리 밴드’. 시대를 잘못 타고난 괴작 중의 괴작이다. 미국의 하드 록 밴드 ‘키스’처럼 얼굴에 분칠을 한 메탈 밴드가 나오는데 언제 봐도 정말 웃기다. 밴드의 시대가 오고 있으니 언젠가 반드시 빛을 볼 거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