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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해외 타이틀] <지 채널: 거대한 강박>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보고 싶은 영화가 딱딱 나와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케이블TV의 영화전문 채널이 이런 컨셉이겠지만, 이른바 ‘아트영화’를 즐기는 시네필들에겐 그저 그런 상업영화나 들이대는 의미 없는 공간일 뿐이다. 세상에 아트영화만 24시간 틀어대는 공간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 나중에 성공하면 시네마테크나 아트영화 케이블TV를 꼭 세운다.” 지금까지 만나 본 많은 시네필들이 항상 취중에 펼치는 공상의 나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는 그들의 면면을 볼 때 요원할 듯하다. 대신 오늘도 한국 씨네필들은 저작권의 감시를 피해가며 파일공유 사이트를 뒤지거나 아니면 아마존 같은 외국 사이트의 휘황찬란한 DVD 섹션에서 통한의 구입버튼을 클릭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20여년 전 미국 LA에서는 공상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았던 ‘아트영화’ 전문 케이블TV가 실제로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돈도 벌었단다. 이름하여 ‘Z 채널’. 잔 카사베츠의 다큐멘터리 은 초창기 케이블TV 시장에서 LA 일부 지역에서만 서비스되던 Z 채널이 경험한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일대기이다. 이 영광과 좌절의 역사를 지휘했던 프로그래머 제리 하비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어떻게 한낱 프리미엄 영화채널이었던 Z 채널을 강력한 아트하우스이자 할리우드 문화 트렌드로 변모시켰는지를 기술함과 동시에 자살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비극적인 강박관념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Z 채널을 통해 할리우드의 이단아로 꼽히던 로버트 알트먼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이 재평가받은 것이나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됐다는 등의 에피소드는 당시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특히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이 극장 흥행 참패 뒤 Z 채널을 통해 복원 상영됨으로써 복권되는 과정에 대한 증언은 오늘날 유행하는 감독판 내지 확장판의 의미와 기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번에 발매된 DVD에는 감독 및 스탭의 육성해설이 담긴 영화 본편뿐 아니라 추가 인터뷰 장면들이 보너스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으며, Z 채널 방송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는 Z 매거진의 복각 카피가 북클릿으로 들어 있다. Z 채널에 대한 회고는 지나간 케이블TV에 대한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할리우드 시스템이 영화시장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그 시스템 내에서 필름메이커들이 어떻게 영화를 기획하고 만들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으로서도 의미있다. 감독 잔 카사베츠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기린아 존 카사베츠와 지나 롤랜즈의 딸이다.

2005년 올해의 영화·영화인 [4] - 올해의 영화인 ②

올해의 제작자 영화적인 제작자의 승리, 장진 <씨네21> 필진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이 올해의 제작자로 지목한 인물은 장진이다. 올 여름 박스오피스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 결과가 별로 당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올 여름 한국의 박스오피스는 말 그대로 ‘장진 천하’였다. 장진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고 제작한 <웰컴 투 동막골>과 직접 메가폰을 잡고 95%의 세트촬영으로 만들어낸 실내악 <박수칠 때 떠나라>가 경쟁하던 모습은 상당히 이채로웠다. 결과적으로도 두 영화가 거둔 스코어는 1100만에 육박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웰컴 투 동막골>과 매우 대조적이다. 거의 대부분 실내 촬영으로 이루어진 제작환경, 자신의 연극을 스크린으로 옮긴 점, 오랜 동료였고 친구인 정재영이 최고 배우의 반열에 오르는 동안 코미디의 대표선수 차승원을 기용한 점이 그러하다. 장진 감독은 “넓게 보면 내가 한해 동안 임했던 영화적 활동이 잘됐다는 평가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무엇보다 제작자라는 역할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받는다는 점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작사 필름있수다의 흥행성공 외에도 장진 감독은 지난 9월 말 강우석 감독과 K&J엔터테인먼트라는 제작사를 설립하여 산업적으로도 주목받았다. 두 사람은 각각 필름있수다와 시네마서비스라는 원래 역할은 유지하면서 이 회사를 독립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장진 감독은 “흔히 통념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작사의 몸집 불리기가 아닌 두 감독의 영화적 견해와 희망을 표출할 수 있는 새로운 창구”라고 앞으로의 움직임을 예고했다. 강우석 감독이 연출하는 <한반도>가 이 회사의 창립작이 될 전망이다. 장진 감독의 차기작 <거룩한 계보>도 K&J엔터테인먼트의 이름으로 개봉될 예정이다. <거룩한 계보>는 감옥으로 간 건달이 조직에서 버려지는 내용이다. 장 감독은 “이것은 갱스터영화에서 가장 흔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양산된 조폭영화를 장진이 변주하고 재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줄 것”이라고 귀띔했다. 올해의 촬영감독 냉정하지만 내면 깊이 들어가는 카메라, <그때 그사람들>의 김우형 광화문 이순신 동상에서 청와대까지 한달음에 훑어내는 마스터샷과 궁정동 부감샷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그때 그사람들>의 김우형 촬영감독이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촬영감독으로 낙점됐다.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소감은 평소처럼 “모두 임상수 감독님의 공이다”로 시작됐다. 오랜 장기인 핸드헬드와 <얼굴없는 미녀>를 통해 단련된 픽스샷이 절묘한 조화를 이뤘다는 세평에 대해서도 “<바람난 가족 때>와는 다른 가능성을 임 감독님이 제 안에서 발견했고 저는 열심히 반응했을 따름이다. 그게 잘 반영됐다면 기분 좋은 일”이라고 답했다. “궁정동 부감샷은 올해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김은형)“과감하고도 역동적이며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남다은)라는 답변은 현장에서 누구보다 과감히 움직이는 그의 카메라를 연상하도록 만든다. <그때 그사람들>이 겪은 고통과 사회적 논쟁에 대해서도 “여기저기 인터뷰하고 방송토론의 전화에도 응하는 감독님을 보며 저나 다른 사람이라면 중간에 도망쳤으리라 싶었고, 논란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많은 걸 배웠다”고 답했다. “연출자의 소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지론은 변함없지만 “<그때 그사람들>의 카메라가 차지하고 있는 시점과 거리 감각은 작가(감독)의 시선이나 화법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것은 전지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냉정함을 잃지 않지만, 어느 순간 대상(인물)의 가장 깊은 곳을 드러낸다”(변성찬)고 평해질 만큼 높은 밀도를 보였다. 다른 감독들로부터 제안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대해 “한 작품은 감독님이 바뀌고 제작방식도 변화되면서 지연됐고, 또 다른 작품은 크랭크인 직전에 무산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1년을 논 줄 안다”고 웃었다. 1년간 겪은 우여곡절은 필연이었을까. 김우형 촬영감독은 “나는 양아치고 김우형이야말로 예술가”라고 단언했던 임상수 감독과 세 번째 작업 <오래된 정원>에 돌입한다. 최초로 세편을 함께하는 연출자에게 보폭을 맞출 그의 카메라워크가 궁금하다. 올해의 시나리오 치밀하고 뚝심있는 이야기꾼, <혈의 누>의 이원재 <혈의 누>의 힘은 무엇보다 치밀하고 힘있는 이야기에 있다. 사극에 장르적인 색깔을 불어넣은 이 영화는 “창의적인 역사스릴러로서 고도의 문학성과 역사인식, 나아가 현실적 정치감각을 보여줬다”(황진미)는 평가를 얻어냈다. <혈의 누>는 범인과 수사관이 머리싸움을 벌이는 ‘게임’으로서의 스릴러를 지향하지 않는다. 연쇄살인사건과 이를 수사하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참혹한 사건 이면에 자리한 시대와 사람을 치밀하게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잔혹한 역사의 한장을 동시대적 해석으로 펼쳐냈다”(김소영)는 점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마을 사람들의 비겁한 태도에서 드러나는 “대중 파시즘의 공포”(황진미)나 끝내 아버지의 원죄를 씻어내지 못하는 원규의 한계 등은 현재적 의미 속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지점이다. 또한 “<장미의 이름>의 조선 판본인 이 영화는 근자에 사라져가고 있는 이야기의 매혹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는다”는 영화평론가 심영섭의 말처럼 대중과의 접점 또한 놓치지 않는다. <혈의 누>는 이원재 작가의 데뷔작이다. 두 번째로 쓴 <여선생 vs 여제자>가 먼저 제작되긴 했지만, <혈의 누>는 첫 작품답게 호러와 스릴러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이 반영된 작품이다. 대학 시절 단편영화와 시나리오 습작을 쓰던 그는 졸업 뒤 좋은영화(현재 싸이더스FNH로 통합)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두편의 각색작이 엎어진 뒤 그는 김미희 대표에게 “스릴러영화를 쓰고 싶다”고 말했고, 김미희 대표는 “과거가 배경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방향을 잡아줬다. 세심한 자료 검증과 연구를 통해 시대상과 캐릭터를 만들어냈던 그는 “김대승 감독과 김성제 프로듀서의 도움도 꽤 받았다”고 겸허히 이야기한다. “특정한 장르를 추구하는 것보다 떠올린 이야기에 걸맞은 구조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그는 “서부극 느낌을 담아 쓴 액션영화” <짝패>(류승완)를 썼고, “30대 남자들의 코미디” <일요일 아침엔 초능력>(김성제)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올해의 신인배우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는 배우,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하정우 우직하면서도 코믹한 보디가드로 눈길을 끌었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만이었다면 하정우는 그저 눈길이 가는 신예 스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첫 장편 주연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가능성 있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연기한 태정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군대 안에서는 한없이 멋진 남자지만 사회에서는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인생이다. “착함과 잔인함, 순진함과 영악함, 여성미와 남성미, 모든 것이 잠재되어 있다”(남다은)는 평가는, 다층적인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던 윤종빈 감독이 하정우를 캐스팅한 첫 번째 이유와도 일치한다. 친근하고 대중적인 분위기는 스타의 그것이지만, 평범하기에 애매하고, 민감하기에 까다로운 인물을 자신의 페이스로 느긋하게 연기한 능력은 배우의 것이다. “꿈속에서만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화된 한해”였다고 2005년을 회고하는 그의 새로운 모습은, 2006년 선보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우아하고 가녀린 카리스마, <여자, 정혜>의 김지수 새벽마다 악몽에 버둥거리며 깨어나던 시간을 선사했던 <소름>의 캐릭터가 장진영에게 준 선물들처럼, <여자, 정혜>의 정혜가 안았던 상처에 신음했던 김지수에게도 뒤늦은 선물들이 찾아들었다. “문근영이 대학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충무로는 그 대안을 찾고 있었지만, 새로운 가능성은 뒤늦게 영화에 데뷔한 김지수의 섬세하고, 성숙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통해서 발견되었다. 다행한 일이다.”(정성일) 그의 가녀린 카리스마가 좁은 브라운관을 벗어난 건 충무로에게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더불어 “텔레비전 세계에는 아직도 찾아내야 할 좋은 배우들이 남아 있다는 증거”(김도훈)라고 ‘웅변’해준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김지수의 얼굴에는, 누군가의 평처럼, 할리우드 고전 여배우에게서 본 듯한 우아한 비련미가 묻어난다. 문승욱 감독의 <로망스>에 이어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로 이어지는 숨가쁜 손짓도 비련미의 매혹과 무관하지 않다. 새봄의 기운과 함께 올 <로망스>가 그의 눈부신 슬픔을 예비하고 있다.

욕심 많은 돈 주앙의 안타까운 몸부림, <브로큰 플라워>

뭐랄까, <데드 맨>이 조니 뎁의 영화인 것처럼, <고스트 독>이 포레스트 휘태커의 영화인 것처럼, <브로큰 플라워>는 빌 머레이의 영화이다. 그들 없이 그 영화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화들이다. 그의 할머니의 아버지로부터 인디언의 피를 물려받은 조니 뎁만이 인디언의 영혼을 따라서 저 머나먼 19세기 서부의 끝에 자리잡은 바다에 이를 수 있을 것이며, 뉴에이지에 심취한 포레스트 휘태커만이 뉴욕 한복판에서 사무라이의 정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흑인 닌자 살인청부업자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요일 밤의 라이브’의 아웃사이더 빌 머레이만이 이제는 지쳐버린 돈 주앙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은 빌 머레이만이 할 수 있는 여행이다. 짐 자무시가 (그의 영화적 아버지인) 빔 벤더스와 다른 것은 그 자신의 여행을 떠나는 대신 그 누군가의 여행의 동반자를 자처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여행 떠나는 자를 진심으로 믿는다. 말하자면 짐 자무시의 <브로큰 플라워>는 빌 머레이의 영화이다. 빌 머레이는 돈 존스턴이라는 가면을 쓴 다음 그의 이름으로 그 자신의 심경을 바라본다. 그냥 바라본다.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서 수없이 그냥 바라보는 장면 중에서 이상하게도 인상적인 장면은 동거하던 여자 쉐리(줄리 델피)가 떠나간 다음, 혹은 그에게 19살 아들이 있는데 그가 지금 당신을 찾아가고 있다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고 난 다음 텔레비전에서 돈 주앙의 영화를 볼 때이다. 이 영화는 알렉산더 코르다가 1934년에 만든 <돈 주앙의 사생활>이다. 그리고 화면에 나온 돈 주앙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이다. 물론 무성영화 시대의 저 위대한 페어뱅크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올 때 페어뱅크스는 이미 52살이다. ‘토키’ 이후 그의 인기는 몰락한 다음이고, 그는 메리 픽포드와 이혼한 다음 영국에 가서 초라하게 이 영화를 찍었다. 그 자신에 관한 거울처럼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이 영화가 안겨주는 초라한 장면 앞에서 빌 머레이는, 혹은 돈 존스턴은 거의 숨을 멈춘 것처럼, 그냥 태연자약하게, 아무런 감정없이 ‘늙은‘ 페어뱅크스가 연기하는 돈 주앙을 쳐다보고 있다. 거기엔 쓸쓸함도, 초라함도, 슬픔도 없다. 그냥 쳐다본다. 오이디푸스의 도착을 막아라 지금 그의 곁을 쉐리가 막 떠나갔고 그는 집에 혼자 남았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갈 때 발신자 없는 편지가 도착한다. 말하자면 왜 그때 그 분홍색 편지가 이 지쳐버린 돈 ‘주앙’ 존스턴에게 비로소 도착했을까? 그 편지는 무려 19년을 기다린 다음에야 도착한 편지이다. (상징적인) 그 자신을 그냥 쳐다보는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지나가버린 실재의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이는 이 편지는 돈 존스턴의 평화로운 세상을 깨트리기에 충분하다.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 돈 존스턴은 사랑의 포기로부터 얻어낸 평화를 포기해야 하는 포기의 포기라는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놓였음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는 순간 거의 죽음을 맞이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텅 빈 거실에 혼자 앉아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는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을 듣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하자면 그가 이 편지를 들고 편지의 주인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에 앉을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들은 일종의 죽음이다.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들의 도착을 지연시킬 작정이다. 오이디푸스는 이미 출발했고, 아버지는 이 상징적 사건을 막기 위해 그 반대의 방향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두개의 여행이다. 하나는 우리가 따라가는 아버지의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목표를 향해서 날아오는 아들의 여행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아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짐 자무시는 그 반대를 따라간다. 말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상징적 사건의 무효를 겨냥하고 있다. 그때 돈 존스턴은 아버지가 아니라 돈 주앙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거실에서 일어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의 순간, 이 영화에서 제일 이상한 순간은 돈 존스턴이 옛 여인들을 찾아다니기 직전 검은 페이드 화면이 있은 다음 그의 거실에서 앞으로 매번 들고 다니게 될 장미꽃을 보여줄 때 벌어진다. 이 숏이 이상한 것은 돈 존스턴이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꽃이 돈 존스턴을 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꽃은 돈 존스턴의 마음에 대한 은유가 아니다. 그 순간 돈 존스턴의 시선은 무효가 된다. 그때 그 장미꽃이 돈 존스턴을 그냥 쳐다본다. 하지만 돈 존스턴은 마치 장미꽃처럼 그냥 앉아 있다. 여기서 돈 존스턴이 장미꽃을 보는 (반대의) 숏은 없다. 그건 자유간접화법도 아니며, 사물의 정취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여기서 짐 자무시가 입버릇처럼 존경한다고 말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우 숏을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미꽃에 마음이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거기서 슬픔을 본다고 말하거나 혹은 아직 만나지도 않은 옛 여인들의 시선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쳐다보던 돈 존스턴을 장미꽃이 쳐다보게 될 때 여기에는 이상한 질문이 있다. 왜 짐 자무시는 돈 존스턴의 여행이 그가 주체이기를 포기할 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게임 ‘늙은 돈 주앙의 사생활’을 클리어하라 그때 이 여행이 떠밀려 떠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첫째는 편지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웃에 사는 윈스턴 때문이다(존스턴과 윈스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성씨). 처음에 이 편지는 정확하게 자기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이 편지는 이 편지의 주인을 찾으러 가는 여행 속에서 돈 존스턴 그 자신이 주소 없는 편지가 된다. 혹은 수신자 없는 편지가 된다. 물론 그 편지의 메시지는 돈 존스턴 그 자신이자 돈 주앙이다. 같은 말이지만 편지는 돈 존스턴을 불렀고, 그 편지에 대답하는 사람은 돈 주앙이다. 그때 돈 존스턴이라는 편지를 부치는 사람은 윈스턴이다. 윈스턴은 존스턴의 여행 계획을 상세히 짜고 난 다음, 그에게 그 여행길에 들어야 할 물라투 아스탓케와 에티오피아 재즈 5중주의 CD를 ‘구워준다’. 나는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 이렇게 이상한 음악을 들은 적이 없다. 그의 영화에서 음악은 로컬한 지역성의 복화술이었다. 그러나 돈 존스턴은 지금 에티오피아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작고한 미셸 페페의 묘지를 방문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 다섯번의 여행 내내 돈 존스턴이 어느 지역을 방문하는지 우리는 그의 카라디오에서 지방방송 DJ가 선곡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곳을 끝내 알 수 없다. 말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 보는 도시, 장소, 지역의 정서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페이드가 끝나면 우리는 이미 그곳에 와 있는 돈 존스턴을 보아야 한다. 두 가지 질문. 첫 번째, 어떻게 돈 존스턴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왜 그의 여행길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진행되고 예기치 않은 만남이나 혹은 다른 방향으로 그 여행이 옆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우리는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 돈 존스턴은 네명을 방문하고, 그녀들과 네번의 만남을 차례로 갖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야기는 진전되지 않고 매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돈 존스턴은 마치 같은 장소를 몇번이고 되돌아오는 것 같다. 일종의 미로, 그 안에서 반복하기. 그것은 짐 자무시가 이제까지 만들어온 로드무비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이 가고자 하는 그 구체적인 천국의 지명, 플로리다. 짐 자무시는 여기서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 어쩌면 짐 자무시의 로드무비는 그가 <고스트 독>을 만들었을 때 이미 끝났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돈 존스턴의 여행은 윈스턴의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되는 게임 ‘(늙은) 돈 주앙의 사생활’이다. 돈 존스턴은 옛 여자들의 홈피, 혹은 스테이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첫 번째 스테이지를 끝내면 두 번째 스테이지가 기다린다. 그리고 세 번째…. 이 비디오 게임형 내러티브는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처럼 이야기의 선형성을 무시하고 일종의 사이클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른 행동으로 반응하면서 진행된다. 혹은 홍상수가 <극장전>에서 같은 이야기를 두번 반복시키는 것처럼 여기서는 네번을 반복한다. 매번 우리는 두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 그곳에 분홍색이 어디에 있는지를 마치 프레임 안의 미장-센에서 숨은 그림을 찾듯이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여기서 미장-센은 그 비밀의 대답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야기이다. 좀더 정확하게 이것은 미장-게임이다. 그때 돈 존스턴은 매번 그 스테이지를 떠돌며 그 장소의 이곳 저곳을 쳐다보는 일종의 아바타이며, 빌 머레이의 무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그 역할을 잘해낸다. 아버지 자리의 부정 아닌 연인 자리의 긍정을 위한 여정 우리가 네번의 스테이지에서 돈 존스턴과 함께 네명의 여자를 만나지만, 그 네 여자가 이상할 정도로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돈 존스턴은 그녀들의 어떤 (공통된) 매력에 끌린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돈 존스턴의 그 무엇에 끌린 것이다. 그녀들은 돈 존스턴과 헤어졌다. 그런 다음 다시 만난 그녀들은 ‘어머니’ 로라(샤론 스톤), ‘아내’ 도라(프랜시스 콘로이), (클로에 세비뉴의) 레즈비언 ‘애인’ 카르멘(제시카 랭), 그리고 ‘아내’ 페니(틸다 스윈튼)가 되어 있다. 돈 존스턴은 그녀들을 연인으로 만났지만 지금 그녀들은 그 누군가의 그 무엇이다. 돈 존스턴은 그 누군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돈 존스턴은 그녀들에게 그 무엇을 이제는 더이상 갖고 있지 못하다. 그 무엇을 갖지 못한 가엾은 돈 주앙.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 돈 존스턴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을 보장받기 위해서 이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는 아들을 본 적이 없다. 그는 그 아들의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른다. 아니, 아들 그 자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돈 존스턴은 여행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 여행을 계속하는 것일까? 핵심은 다른 데 있다. 돈 존스턴은 그의 옛 여인 중 그 누구도 아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그들이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전히 자기의 자리가 연인의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침대이건, 식탁이건, 사무실이건, 문 앞이건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돈 존스턴은 그 자신이 돈 주앙이라는 것을 오직 그녀들을 통해서만 보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 많은 돈 주앙의 안타까운 몸부림. 그는 과거의 그 어느 질서에도 포함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들의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아버지라는 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만나고 또 만나서 확인한다(네명의 여인들이 돈 존스턴을 19년 만에 만나는데도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기억해낸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편지는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아들의 역할을 이미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로큰 플라워>는 마지막 순간 아들을 정말 만났는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두번 만나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한번은 (편지를 통하여) 제 장소에 도착하여 상징적으로 만나고, 다음 한번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세번의 운명적 오류를 통해서 만난다. 나는 네 아버지지만, 너는 내 아들이 아닐지도 그 오류를 셈하기. 돈 존스턴은 그의 여행에서 세명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소년)을 만난다. 그 하나는 막 여행을 떠났을 때 소녀들의 수다의 대상이 된 검은 선글라스를 낀 소년이다. 그때 돈 존스턴은 똑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쳐 지나가고, 두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모든 여행이 끝난 다음 돌아오는 공항에서 한 소년을 만났을 때이다. 돈 존스턴은 그를 집 근처의 식당에서 다시 한번 만난다. 소년에게 샌드위치를 사주고 난 다음, 소년이 그에게 철학적 배움을 줄 만한 대사를 원할 때 말한다.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직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현재뿐이다.” 이 말은 정말 철학적 배움에 관한 말일까? 혹은 이 단 한마디가 정말 <브로큰 플라워> 전체를 요약하는 말일까? 짐 자무시는 그 자신의 영화가 그런 식으로 유치하게 요약되기를 바란 것일까? 내 생각은 다르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혹은 이 이야기가 돈 주앙의 이야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이디푸스를 쫓아버려야 한다. 그래서 그 자신의 원래의 돈 주앙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바로 그 돈 존스턴으로 하여금 그를 돈 주앙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바니>에서 돈 주앙은 은총을 약속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신 앞에서 차라리 불 속에 들어가 죽는 쪽을 택한다. 돈 주앙은 단지 플레이보이가 아니다. 돈 주앙의 미덕은 그 모든 잘못에 대한 세속적인 반성의 요구에 대한 거절에 있다. 돈 존스턴이 (아들일지도 모르는) 소년에게 베푸는 자비는 그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때 이 자비는 배고픈 오이디푸스에게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유혹의 제스처이다. 그때 오이디푸스는 아들의 요구를 하는 대신, 아버지의 잘못을 셈하는 대신, 갑자기 철학적 배움을 바란다. 하지만 이 순간 돈 존스턴이 돈 주앙이기를 포기할 만한 그 어떤 이유가 있는가? 그러므로 그때 돈 존스턴의 말은 “이제 과거는 충분히 즐겼고, 미래의 즐거움은 알 수 없으니, 현재의 나를 제발 돈 주앙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하소연으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이 말은 이상할 정도로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한 바로 그 질문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돈 존스턴이 오이디푸스에게 한 유일한 그 존재의 인정이다. 그러나 그는 오이디푸스가 아니었다. 그는 배움을 얻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혹은 그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때 돈 존스턴이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말하는 그 고백은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하는 다스 베이더의 고백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이 말은 사실상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로 들어야 한다. 같은 말의 반복. 나는 네 아버지라고 말했으나, 너는 내 아들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짐 자무시의 유머. 그런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돈 존스턴을 슬쩍 보고 지나가는 차 안에서 어쩌면 아들일지도 모를 듯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세 번째 소년은 빌 머레이의 진짜 아들 호머 머레이이다. 당신이 어쩌면 그가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단지 짐 자무시의 연출 덕분만은 아니다. 이보다 간결하고 확실한 친자 확인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의 유머. 하지만 그는 23살이기 때문에 빌 머레이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돈 존스턴의 19살 난 아들은 아닐 것이다.

[2005년 방송결산] 삼순이,맹순이 따라 웃고 울었더니 한해 다 갔네

올 한 해도 지상파 3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시청자들의 사랑과 호평을 받은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전반적으로 젊은층 취향의 트렌디 드라마는 주춤한 반면, 복고나 정(情)을 내세운 ‘감동 코드’의 작품이 그 어느 때보다 시청자들에게서 인기를 얻었다. 또 객체나 대상화된 인물이 아니라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시청자 사로잡은 감동 코드=세상살이가 팍팍할수록 가족이나 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하다. 지속적인 경기침체로 세상살이에 지친 시청자들 역시 따뜻한 가족의 정을 내세운 드라마에 폭넓은 지지를 보냈다. 이런 흐름은 한국방송 드라마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가족 드라마를 표방한 한국방송의 주말극 <부모님 전상서>와 <슬픔이여 안녕>은 시청률 1위 바통을 주고받았다. 하반기 수목 드라마 <장밋빛 인생>도 신파적이고 진부한 설정이었지만 최진실의 눈물 연기로 40%대의 높은 시청률을 올렸다. 감동 드라마들이 인기를 얻은 데는 세상살이의 고단함 이외에, 다매체 시대에도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는 중년들의 취향에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정을 그리워하는 시청자들의 정서는 지나간 시대를 그린 복고풍 드라마의 인기로 이어졌다. 1970년대 패션계를 배경으로 한 에스비에스의 <패션70’s>와 1960~80년대 경상도 지역 네 남매의 삶을 다룬 한국방송의 <황금사과>는 옛 정서를 자극하는 다양한 볼거리들로 시청자의 눈과 가슴을 사로잡았다. 주체적·강인한 여성상 부각=드라마 여자 주인공 캐릭터에서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당당하게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삼순이(문화방송 <내 이름은 김삼순>), 미용사 일을 하며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 나가는 젊은 과부 금순이(문화방송 <굳세어라 금순아>) 캐릭터가 30~40%를 넘나드는 높은 시청률 속에서 사랑을 받았다. 현재 방송 중인 에스비에스 <마이 걸>의 주유린도 거짓말을 일삼긴 하지만 꿋꿋한 캐릭터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사극에서도 강인한 여성상이 두드러졌다. 한국방송 <해신>의 자미부인이나 정화, 에스비에스 <서동요>의 선화공주, 문화방송 <신돈>의 노국공주는 나름의 리더십을 가지고 남성을 리드하는 적극성을 보여 주었다. 사극을 현대극화한 한국방송 <쾌걸춘향>의 성춘향도 춘향이 지닌 전통의 순종적 여성상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여성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캔디 캐릭터와는 반대로 공주 캐릭터들은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에스비에스 <루루공주>의 대기업 집안 딸 김정은, 한국방송 <웨딩>의 장나라 등 현대판 공주라 불릴 만한 인물이 주인공이었던 드라마들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역시 삼순! 2005년 최고 시청률 드라마로 꼽혀 2005년 한 해 시청자들에게서 가장 사랑을 받은 드라마는 문화방송의 <내 이름은 김삼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률 조사회사 티엔에스 미디어코리아가 최근 발표한 2005년 시청률 통계자료를 보면, 드라마 부문 평균 가구시청률 순위에서 1위는 <내 이름은 김삼순>(37.7%), 2위는 한국방송 <장밋빛 인생>(34.2%)이 차지했다. 이어 한국방송의 <부모님 전 상서>(30.1%)와 <해신>(29.6%)이 나란히 3, 4위에 랭크됐으며 에스비에스 <봄날>(28.5%)이 5위에 올랐다. 10위권 안을 살펴보면 문화방송은 <내 이름은 김삼순>, <굳세어라 금순아>(6위·27.5%) 두 작품이 순위권 안에 들었고, 에스비에스는 <봄날>, <프라하의 연인>(7위·26.4%), <패션70’s>(10위·24.5%) 세 작품, 나머지 <금쪽 같은 내 새끼>(8위·25.7%), <별난여자 별난남자>(9위·24.8%) 등 5작품은 한국방송 드라마들이다.

아쉬움 여전한 지상파 3사 ‘2005 연기대상 시상식’

연기보다 인기 위주 ‘그들만의 잔치’ 비슷한 내용·형식에 시청자 채널 선택권 무색 지상파 3사의 2005년 연기대상 시상식이 지난달 30, 31일 일제히 열렸다. 방송사별로 최고의 영예인 연기대상은 문화방송에선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선아가, 한국방송은 <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이, 에스비에스는 <프라하의 연인>의 전도연이 각각 수상했다. 하지만 2005년 역시 해마다 되풀이돼 온 연기대상 시상식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아 상에 대한 권위를 떨어뜨리고 시청자들을 식상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점으로는 인기 위주 및 논공행상식 수상자 선정, 공동 수상 등으로 인한 수상자 양산, 과도한 자사 프로그램과 스타 띄우기 등이 꼽혔다. 문화방송의 경우 수상 후보를 연기력보다는 인기 위주로 선정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상 후보에 김선아와 <굳세어라 금순아>의 한혜진, <신입사원>의 문정혁 세 명이 올랐으며, 남자 최우수상에 문정혁과 <내 이름은 김삼순>의 현빈이, 여자 최우수상 역시 김선아와 한혜진이 공동 수상해 시청률이 높았던 몇몇 드라마 주연들이 독식했다. 이에 대해 한 시청자는 “후보자나 수상자 가운데는 정말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인지 의문이 드는 배우도 있었다”며, “대상이나 최우수상이라면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의 주연보다는 연기를 잘 하는 배우에게 상을 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나친 논공행상으로 상의 권위를 떨어뜨렸다는 비판도 거셌다. 한국방송은 연기대상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두 명 이상의 공동 수상자를 냈고, 신인연기상 남자 부문에서는 세 명의 공동 수상자를 선정했다. 그 결과 본상 수상자만 20명이 넘었다. 문화방송도 남녀 최우수상을 비롯해 두 명 이상의 공동 수상자를 냈다. 에스비에스도 10대 스타상, 특별기획 부문상 등 다양한 상을 만들어 많은 연기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한 대중문화 평론가는 “연기력보다는 시청률과 인기를 고려한 수상자 선정, 신세대 스타들의 자사 방송 출연을 시키기 위한 수단, 특정 연예기획사에 대한 눈치보기 등을 고려한 공동 수상자 남발과 선심성 시상이라는 연기대상 시상식의 해묵은 문제점이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났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신세대 스타들의 팬층을 제외한 상당수 중장년층 시청자 가운데는 지난달 30일과 31일 밤 비슷비슷한 내용의 시상식 방송 때문에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느라 텔레비전 채널을 계속 이리저리 돌린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청자는 “지상파 3사가 일제히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내용의 시상식을 중계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마나 한 시상식, 보나 안보나 뻔한 결과의 남발을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며, “채널 선택권이란 말이 무색하게 ‘그들(방송국)만의 집안잔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수상자 가운데는 김선아, 김명민, 한국방송 <장밋빛 인생>의 최진실, 손현주 등 정말 상을 받아야 할 배우가 선정돼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연기력 있는 수상자들의 상이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이 상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선정방식을 마련해야 할 과제가 이번 2005년 연기대상 시상식에서도 남겨졌다.

과장과 소란을 앞세운 매력적인 스페인 영화, <죽여주는 여자>

제빵사 노인 네스토(에밀리오 구티에레즈 카바)는 아내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산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그를 위해 딸과 사위는 밤새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위성채널을 달아준다. 그런데 밤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온통 야한 영화뿐이다. 점잖던 노인은 어느새 매일 밤 텔레비전 앞에 앉아 수음하는 것이 일이 되고 만다. 때마침 마리벨(잉그리도 루비오)이라는 아가씨가 점원으로 일하게 되고, 네스토는 그녀에게 마음을 뺏긴다. 마리벨은 푼돈이나 벌기 위해 몸을 팔며 청춘을 보내지만, 늘 발칙하고 도발적인 것을 사랑하고 꿈꾸는 여자다. 그녀는 어느 날 마놀로(알베르토 산 후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마놀로는 토끼 옷을 입고 채무자를 쫓아다니며 망신을 줘서 돈을 받아내는 소극적인 수금원이다. 그러나 마리벨을 만난 그날만은 과격하고 충동적인 면모를 보여주어 마리벨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침내 마리벨은 연애는 마놀로와 결혼은 네스토와 한다. 이때부터 네스토, 마리벨, 마놀로 세 사람의 삶은 얽히고 또 변한다. 네스토로 시작한 영화는, 마리벨로 옮겨가고, 마놀로로 옮겨간다. 혹은 마리벨이라는 존재와 그녀의 욕망이 네스토와 마놀로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다. 네스토는 평생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녀를 통해 욕망의 화신이 된다. 마놀로는 그녀와의 사랑이 안정적인 가정으로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끝내 그것은 그녀와의 홍역 같은 사랑 다음에야 찾아온다. 이를테면, 네스토와 마놀로에게 마리벨은 삶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반면에 마리벨 자신도 욕망의 결을 따라 끊임없이 충동적으로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범죄도 거짓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자기의 욕망을 따라 또 어디론가 흘러간다. 누구도 정해진 삶은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다. 그런 점에서, <죽여주는 여자>는 분위기에서도 유쾌함과 황량함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불균질한 윤무의 영화다. 전체적으로 틈이 많고 비약이 심하지만, 한편으론 그 때문에 과장과 소란을 앞세우는 스페인영화 특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삶의 모호함에 대해 치기의 힘으로 질문하는 스페인식 소품이다.

드라마 ‘그 나물에 그 밥’ 신인작가 좀 키워라

텔레비전에 드라마가 넘쳐난다. 그런데 정작 그 많은 드라마 중에서 볼 만한 드라마는 찾기 어렵다. 불륜에 출생의 비밀, 삼각 관계, 난치병, 신데렐라 등 뻔한 소재에 줄거리도 비슷비슷한 드라마 일색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그마나 탄탄한 극본의 단막극들이 체면치레를 해 주고 있다. 지난 7일 밤 방송된 문화방송 <베스트극장>의 ‘사랑해, 아줌마’(극본 설경은, 연출 김도훈)와, 같은 날 밤 방영된 한국방송 2텔레비전 <드라마시티>의 ‘집으로 가는 길’(극본 김찬주, 연출 고영탁) 두 작품은 잘 쓰인 극본이 드라마에 얼마나 힘을 주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 사례였다. ‘사랑해, 아줌마’는 2005년 문화방송 극본공모 우수작으로 만들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졸지에 혼자 남게 된 까탈스런 17살 여고생 세리와 세리의 살림을 맡은 가정부 ‘끝순이’의 ‘좌충우돌 동거기’를 따뜻하게 그렸다. 또 ‘집으로 가는 길’은 가족을 위해 보험금을 타내려고 자살을 기도하려는 영수의 차에 자해공갈범 용철이 뛰어들면서 친구가 된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생과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으면서도, 상황 설정의 기발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저렇게 극본을 쓸 수도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 냈다. 여기에 재미와 감동까지 함께 선사했다. 그동안 <베스트극장>은 지난해 10월29일 부활한 이후 ‘태릉선수촌’ ‘문신’ ‘가리봉 오션스 일레븐’ 등의 참신한 작품을 방영해 시청자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드라마시티> 역시 신선한 소재와 줄거리로 마니아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단막극들이 시청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보다 극본의 참신함 때문이다. 단막극은 본격적인 드라마 집필 경험이 적은 신인 작가들이 주로 극본을 맡는다. 반면 단막극을 제외한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이미 여러 편의 드라마를 쓴 기성 작가들이 극본을 집필한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시청률을 의식해, 재능있는 신인 작가와 함께 작업하는 모험을 시도하길 꺼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흥행이 보장되는 인기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드라마화하다 보니 늘 줄거리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매주 지상파에서만 20편이 넘는 드라마가 만들어지는데, 숫적으로 적은 드라마 작가 인력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공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피디들 사이에도 “매주 수많은 드라마가 쏟아지지만 대개 뻔한 이야기이며 방송사마다 이렇게 많은 드라마를 양산하는 것은 낭비”라는 목소리가 높다. 제대로 된 극본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제 지상파 방송사들은 외국 방송사에 비해 편성비율이 높은 드라마 방영을 줄이는 문제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아니면 더욱 적극적인 극본 공모나 신인 작가 발굴·육성 등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장기적인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05년 우리가 놓친 외화 10 [10] - <크래쉬>

폴 해기스 감독의 <크래쉬>는 이른바 ‘날이 선’ 영화다. 등장인물만도 계층과 피부색이 다른 미국인이 한 다스. 이들이 로스앤젤레스 곳곳에서 본의 아니게 얽히고 설키면서 마음속에 숨은 증오와 두려움을 한바탕 드러내고야 마는 소동극이니 오죽하랴. 이들의 감정적 충돌이 얼마나 날이 섰는가 하면, 비평가들은 <크래쉬>를 미국영화 역사상 가장 터프한 대사들로 가득한 영화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상당히 미국적인 이 터프함의 실체는 현대 미국사회의 금기 중 하나라 할 만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인종 비하 발언들이다. ‘인종’ 문제야말로 숨기고 싶으나 숨길 수 없는 미국사회의 비수 아닌가. 지난해 5월, <크래쉬>가 개봉했을 때는 <그랜드 캐년> <숏컷> <매그놀리아>의 맥을 잇는 복합 인종 도시 로스앤젤레스에 대한 또 한편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브랜트우드, 사우스캠튼(사우스햄프턴??), 다운타운, 샌타모니카, 차이나타운 등 지명만 들어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계급과 피부색이 감이 잡히는 섬들로 연결된 로스앤젤레스의 삶의 한 단면을 하룻밤의 소동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시선에 눈이 갔다. 그런데 ‘크래쉬’는 로스앤젤레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오랫동안 텔레비전 극작가로 활동했던 캐나다 출신의 폴 해기스 감독은 이 영화가 인종 문제라기보다는 9·11 사태 이후 ‘타자와의 접촉’에 대해 신경증과 불신의 골이 깊어진 미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종’이야말로 미국인의 정체성을 그 시작부터 정의해온 핵심적인 척도였음을 고려할 때, <크래쉬>의 파열음은 9·11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어디 미국뿐이랴. 카트리나 홍수나 프랑스의 인종 소요 사태, 호주의 인종 충돌 사태를 거치면서, 나와는 다른 ‘타자의 존재’와 ‘더불어 살기’가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신경증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크래쉬>는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이 증오와 두려움, 신경증의 실체를 직시할 것을 시의적절하게 요청한다. <뉴욕타임스>가 지적하듯, <크래쉬>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몬스터 볼> <모래와 안개의 집> <21그램> 등에서 나타난 최근 미국영화의 어떤 경향, ‘(인종·계급적으로) 서로 다른 미국인 사이의 관계’라는 주제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지만 강요하는 생생한 대사들이 전달하는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크래쉬>는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사실주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크래쉬>는 인종별로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된 등장인물과 <매그놀리아>식의 얽힌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인물들이 충돌하는 매 순간의 예측불허의 반응을 관찰하는 일종의 실험보고서의 형식을 띤다. 입으로는 진보주의자든 인종차별주의자든 막상 상황에 부딪혀서 어김없이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밑에 숨겨진 두려움과 현실과 타협하고 마는, 그래서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우리 같은 인간들의 캐리커처.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지적하듯, 로스앤젤레스의 하루라는 시공간 속에,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전형적인 인종 갈등의, 예측불가능한 양태를 극적으로 집약한 이 우화의 구조가 영화의 매력이라고 하겠다. 골든 글로브(최우수 남우조연상과 시나리오상 후보), 전미 비평가협회(테렌스 호워드 조연상, 최고 캐스팅상) 등은 맷 딜런, 샌드라 불럭, 라이언 필립, 돈 치들, 로렌스 호워드 등 독립영화에는 좀 넘친다 싶은 배우들의 호연과 탄탄한 시나리오의 힘에 점수를 줬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스앤젤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다인종 도시 뉴욕의 비평가들과 로스앤젤레스의 비평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상반된다는 것. <뉴욕타임스>와 <빌리지 보이스> 등의 비평가들은 <크래쉬>의 전형적인 인물 묘사, 도식적인 이야기 구조를 비판하는 반면, 인종별 안전지대에 모여사는 로스앤젤레스의 비평가들은 전형성이 가진 현실성에 좀더 공감한다. <크래쉬>는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종들의 스테레오 타입 전시장처럼 보인다. 그 스테레오 타입이 어떻게 까발려지고 뒤틀리고, 스크린 너머로 그 상처를 전달하는지 주목하라. 주위를 둘러보면, 오늘도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아래 비수를 숨긴 스테레오 타입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