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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섬세한 피부결의 연출 자신 있다, 디오에스앤유니크 최순철 대표 인터뷰

- 태닝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미용기기 회사의 에이에스 기사로 일하면서 수입 태닝기를 몇번 수리해봤다. 기계를 다루는 일에 능숙했던 터라 태닝기를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혼성그룹 룰라의 채리나씨 덕에 국내에 첫 태닝 열풍이 일던 때이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태닝기의 메커니즘을 공부하고, 무작정 유럽의 태닝 회사에 연락하는 등 사업을 펼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태닝기와 태닝 로션·패치 제조, 화이트 태닝기 개발과 태닝숍 창업 컨설팅까지 이어오고 있다. - 직접 개발한 태닝기 ‘램제트’ 시리즈엔 어떤 특징이 있나. = 백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의 피부 체질에 맞춘 태닝기다. 태닝의 결과물은 거짓말을 못한다. 고객들이 몸으로 바로 느끼니까. 램제트를 사용한 고객들의 만족도가 높다 보니 국내 유명 매니지먼트사엔 소속 아티스트들을 위한 램제트 룸이 따로 있다. 일본 태너들도 램제트의 다이어트 EMS 기능을 특히 좋아한다. 아시아에서 태닝 산업이 구성된 건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정도다. 일본이 태닝 산업의 역사도 길고 먼저 발전했지만 우리의 램제트처럼 자국민에 맞춘 태닝기를 직접 개발한 경우는 없다. -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에 맞는 태닝 컨설팅에 집중하려 한다고. = 계획은 대략 5년 전쯤부터 시작했다. 태닝에 관심 있는 배우들이 하나둘 유니크 태닝을 찾았고, 배역에 맞춰 피부색을 조절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배우 소속사나 작품 제작사에서 태닝에 관한 기획을 전문적으로 세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다만 우리에겐 이미 적절한 매뉴얼이 있었고 그쪽 분야에 진출하기 위해 드라마 협찬이나 논의를 자주 진행하고 있었다. 최근엔 K콘텐츠의 태닝 관련 의뢰가 대부분 우리쪽으로 들어오는 상황이다. 태닝기 설치, 철수, 일정 관리와 같은 전방위적 컨설팅을 진행하기 위해선 우리처럼 제조부터 유통, 영업까지 모두 운영하는 업체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 구체적으로 영화, 드라마 속의 태닝 컨설팅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 세트, 소품, 의상, 분장 수준이 매우 높은 작품임에도 피부색 측면에선 아쉬울 때가 많다. 군인이나 해녀, 테니스 선수 등 구릿빛 피부여야 하는 경우에도 흰 피부색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유하자면 드라마 속의 서민 캐릭터가 명품 가방을 수시로 바꿔 드는 것처럼 현실감이 떨어지고 어색한 느낌이다. 직업이나 역할에 따라 얼굴과 몸을 다르게 태우거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섬세한 피부결의 연출이 필요하다. 장기간 촬영이 이뤄진다면 배우 개인의 피부 톤과 체질에 맞는 기계의 선택과 시간 조절도 필수다. 급하게 하다 보면 피부가 벗겨지거나 색소가 얼룩덜룩하게 올라올 수도 있다. - 영상 콘텐츠 시장에 진입하려는 사업적 이유는. = 한국의 인구도 그렇고 내수시장만으론 태닝 산업을 더 발전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니 해외까지 눈을 돌리고 싶은 이유도 있고, 이미 세계에서 최정상급인 K콘텐츠의 품질이 더 높아지고 단단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내가 보는 한국의 넷플릭스 시리즈가 보기에 더 재밌으면 좋겠단 바람이 최우선이다.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K팝 업계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다. 영상 콘텐츠와 마찬가지로 무대 위 K팝 아티스트들을 보면 피부색 측면에서 다들 조금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럴 때 한 단계 더 세계의 눈높이에 맞게 도약하려면 태닝을 통한 피부색의 다양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있는 분들에게도 설명하는 중이고, 앞으로도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 앞으로 또 다른 사업 계획은. = UV 스펙트럼을 이용한 기술로 비타민D 합성, 아토피 등 피부질환 치료와 스트레스 완화까지 미용 목적을 넘어 더 넓은 이점을 줄 수 있는 태닝 사업을 펼치려고 한다. 메가썬 P9S 태닝 업계의 대표적 명품 브랜드인 독일 메가썬의 하이엔드급 태닝기다. 가장 뚜렷하고 깊은 피부색을 연출하고 싶을 때 사용하면 좋다. 국내에 유통되는 태닝기 중엔 최고 출력을 자랑하며, 국내에선 유니크 태닝 한남본점, 서면점 포함 3개 매장만이 보유 중이다. 램제트 루비노 디오에스앤유니크가 개발한 램제트 시리즈다. 자외선과 근적외선의 에너지가 완벽하게 균형 잡혀 있고, UV 태닝과 화이트 태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화이트 태닝이란 디오에스앤유니크가 국내 태너들을 위해 처음 만든 용어로 스킨케어와 안티에이징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램제트 루비노는 총 3단계로 강도를 조절할 수 있어 고객별 맞춤 태닝도 가능하다. 세계 최초로 슬라이드 자동문을 탑재하여 고객의 폐소공포증과 위험성을 방지했다. “유니크 태닝은 태닝에 관한 모든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장소”(최순철 대표)다. 고급 태닝기인 메가썬, 하프로 럭슈라, 에르고 라인을 비롯해 램제트, 유니크43 등 총 8대의 태닝기가 마련돼 있다. 부산 서면에도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7대의 태닝기가 준비돼 있다. 유니크 태닝에서는 고객의 피부 톤과 타입, 태닝 경험, 원하는 컬러 수준에 따른 전문가의 구체적인 상담 및 1:1 태닝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특집] 한 시대의 시작, 젠데이아

<챌린저스>의 타시가 진정 사랑한 것은 전남친 패트릭 즈바이크(조시 오코너)도 현남편 아트 도날드슨(마이크 파이스트)도 아닌 테니스, 즉 육체를 중심으로 한 상호의존적 역학관계였다.(“테니스는 관계야.”) 때문에 운동성의 쾌락과 성취감, 섹슈얼리티가 감각적으로 엮이는 <챌린저스>에서 타시는 남성들이 쟁취해야 할 트로피가 아닌 경기 전체를 지배하는 여성으로 자리한다. (심지어 부상으로 선수 커리어가 끊기고 남편의 코치직을 맡는다는 설정임에도 그렇다.) 그리고 타시를 연기한 젠데이아는 <챌린저스> 프로젝트를 출발시킨 핵심 제작자이자 이 발칙한 서사를 성립시키는 중추다. 젠데이아는 시나리오를 쓴 저스틴 커리츠키와 함께 테니스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로 표현되지 않는 부분까지 시각언어화하는 루카 구아다니노가 적임자임을 논의했다. 테니스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관련된 모든 비디오와 경기, 인터뷰를 섭렵하는 열정으로 테니스의 세계를 탐구했고, 무용수로도 이름을 떨친 스타답게 안무를 따라하듯 선수의 움직임을 완벽히 흉내내는 방식으로 타시가 되어갔다. 직접 이야기를 발굴해 판을 짜는 기획자이자 모호한 추상을 구체화하는 배우. 이는 젠데이아가 할리우드에 처음 데뷔했던 13살 때부터 새겨진 디즈니 스타의 이미지를 전복하며 개척해온 궤적이기도 하다.<디즈니 채널>의 <우리는 댄스소녀>, 의 <댄싱 위드 더 스타>에서 활약한 178cm 장신의 댄서는 곧장 Z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고, 인스타그램 피드가 곧 패션지 커버와 같은 기능을 하는 시대의 워너비로 부상했다. 패션과 뷰티 산업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모델로서, 레드카펫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패셔니스타로서, 테일러 스위프트와 비욘세가 선택한 뮤즈로서, 때때로 자신의 앨범을 내는 아티스트로서 젠데이아는 할리우드의 가장 뜨거운 무대를 종횡했다. 이 기세를 몰아 그는 커스틴 던스트, 에마 스톤 등 당대 최고의 라이징 스타들이 거쳐간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새로운 얼굴로 낙점됐다. 여기까지의 젠데이아는 린지 로언, 설리나 고메즈, 힐러리 더프가 거쳐갔던 할리우드 하이틴 스타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기 시작한 기점은 의 <유포리아>였다. “한 시대의 끝. 다음으로. 나와 함께 계속 성장해줘서 고마웠다.”(젠데이아의 인스타그램) 젠데이아는 <유포리아> 출연을 위해 를 마지막으로 <디즈니 채널>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마약, 섹스 중독의 세계를 선정적으로 소비한 것은 아니냐는 논란 속에서도 젠데이아가 분한 마약중독자 루 베넷은 <유포리아>에서 표현 수위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숏들을 남겼고, 2020년 에미상 드라마 부문 역대 최연소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된다. 이는 에미상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여성배우의 수상이기도 했다. 그렇게 화려한 셀러브리티의 이미지를 역이용한 배우의 얼굴이 줄 수 있는 충격을 증명한 그는 <유포리아> 시즌2부터 책임 프로듀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덕분에 역대 최연소로 에미상에 노미네이트된 프로듀서가 됐다). 최근의 젠데이아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적극 추진하는 신진 제작자다. <맬컴과 마리>는 코로나19로 <유포리아> 시즌2 촬영이 취소됐을 당시 젠데이아의 즉흥적인 발상에서 시작됐다. 그의 제안으로 <유포리아>를 연출한 샘 레빈슨 감독이 6일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젠데이아의 집에서 촬영하려던 원래 계획이 무산됐지만 캘리포니아의 한 오지에서 합숙 가능한 로케이션 장소를 발견해 2주 만에 촬영을 마쳤다. 팬데믹 시대 촬영 여건의 제한을 오히려 창의성의 원천으로 삼은 이 프로젝트는 치열한 배급권 전쟁 끝에 넷플릭스의 선택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젠데이아의 최근 개척자적인 행보는 <디즈니 채널>의 스타 시절에도 이미 내재된 기질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디즈니 채널>의 다양성을 위해서, “다른 민족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으로서 TV를 보고 (흑인 소녀들이) 자신과 닮은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고 싶다”(<코스모폴리탄>)는 입장을 꾸준히 밝히며 치어리딩을 하는 백인 금발 여성이 곧 이상향이었던 관습에 균열을 내던 소녀였다. 그가 2016년 출시한 유니섹스 패션 라인 ‘데이아 바이 젠데이아’ (Daya by Zendaya)는 22사이즈(XXL 이상)까지 포괄한다. 지금 시대 그가 가장 핫한 스타로 떠오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나아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이해했던 젠데이아는 언젠가 감독 데뷔를 꿈꾸고 “주인공은 반드시 흑인 여성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스타지만 비주류이기도 한 그의 위치는 감독과 작가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을 성찰을 가져오며 예술을 보다 풍부하게 만든다. “<챌린저스>의 타시는 부유하지 않은 흑인이기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동료를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타시가 체감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기에 아트와 패트릭과의 관계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동시에 두 남자는 그 감정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버라이어티>) 시장에서의 주도권과 바람직한 의도, 여기에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에 오르는 스타성이 만나면 어떤 일이 가능해질까.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자 젠데이아의 영감은 산업의 미래가 될 것이다. “언제까지 무엇을 달성하겠다는 식의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언젠가 내 커리어가 완전히 바뀌는계기가 생긴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유연해지려고 한다.” 2021년 <인터뷰 매거진>과의 인터뷰. 사진 작업부터 영화 현장까지 다양한 예술에 호기심을 갖고 배움의 기쁨을 즐기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나를 행복하게 하고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 그리고 “예술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충만해지는 것”이다. 제작자로서 감독으로서 적극적인 포부를 드러내지만 모든 창작은 스스로 즐겁기 위해 하는 것임을 확고히 하며 자칫 성과에 매몰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스타로 살고 운동가적 면모를 내세우며 가능한 모든 활동에서 뜨거운 에너지를 분출하는 젠데이아가 여전히 ‘옆집 소녀’ 같은 자연스러움으로 대중적 호감을 취할 수 있는 이유다.

[특집] 옆집 소년처럼, 도련님처럼, 조시 오코너

2024년 봄, 두 이탈리아 출신 감독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연이어 극장가를 점령한 마성의 영국 배우가 있다. 바로 조시 오코너다. 조시 오코너는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키메라>에서 단벌의 도굴꾼 아르투가 되어 떠난 연인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를 찾아 온 땅을 파헤쳤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루카 구아다니노의 <챌린저스>에서 헐벗고 굶주린 테니스 선수 패트릭이 되어 치정으로 얽힌 삼각관계에 잊을 수 없는 강속구를 꽂았다. 조시 오코너에 따르면 그는 학부 재학 시절 ‘귀찮게 구는 연극학도’였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끓어넘쳐 “밝은 뮤지컬 실습에서조차 진지한 연극적 접근을 해 교수들을 진절머리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코너는 대학 졸업 후 런던에서 연극을 하며 <닥터 후> <피키 블라인더스> 등의 TV시리즈와 케네스 브래나가 연출한 영화 <신데렐라> 등에 출연했지만, 늘 ‘무도회 궁정 경비병13’ 등의 조·단역을 전전했다. 2016년 오코너는 프랜시스 리의 퀴어영화 <신의 나라>를 만난다. <신의 나라>는 초목의 풍광으로 유명한 글로스터셔주의 챌트넘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그가 감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가 분한 조니 색스비는 불우한 환경에서 알코올중독을 겪는 젊은 농부다. 어느 날 조니는 아버지가 고용한 루마니아 이민자 게오르게(알레크 세커레아누)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 작품으로 2017년 영국독립영화상(BIFA)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오코너의 배우 인생도 전과 다르게 펼쳐진다. 조시 오코너를 네 차례나 하이엔드 패션 하우스 로에베의 모델로 기용한 디자이너 조너선 앤더슨은 오코너의 매력을 “옆집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라 꼽는다. 한데 옆집 남자로 오코너의 캐릭터를 일축하기엔, 그의 필모그래피에 로열 패밀리 ‘도련님’이 빼곡하다. 오코너에게 전세계적 유명세를 가져다준 작품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다룬 <더 크라운> 시즌3, 4의 젊은 찰스 왕세자였고, 그의 무대 필모그래피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은 내셔널 시어터의 <로미오와 줄리엣> 속 로미오였다. 영국 윈저 왕실의 왕위 계승 서열 1위 왕세자와 이탈리아의 존엄한 귀족 가문 몬테규의 적자를 연기한 남성배우에게 발견하는 ‘옆집 남자’적 친근함은 무엇일까. 아마 앤더슨은 오코너가 엘리트 배역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이같은 매력을 발견했을 것이다. 영국 노동당을 지지하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며 그 자신도 노동당원이 된 오코너는 <더 크라운>의 오디션 기간 내내 찰스를 납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가 끝내 발견한 실마리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이 결정된 남자의 허무함이다. 오코너에 따르면 찰스는 “죽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남자다. 그가 결정적으로 찰스에 동화된 지점 또한 어머니가 사망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의미 있어진다는 걸 찰스가 깨닫는 순간이다. 끝내 오코너는 찰스를 인간적으로 연민했다. 오코너는 찰스가 자신의 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올리비아 콜먼)에게 억압당하지 않고 온전히 발화하는 장면이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하길 연출자에게 간청했다고 한다(물론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세계 시청자들은 실제 역사 속 찰스 3세 국왕의 이모저모와 오코너의 찰스를 끝없이 비교했고 “조시 오코너가 찰스를 미화한다”, “불쌍한 찰스의 삶이 그를 통해 이해가 간다”라며 오코너의 찰스에게 항복했다. 자신이 이해한 캐릭터의 성격을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납득시킬 줄 아는 배우는 이 연기로 2021년 에미상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조시 오코너는 어린 시절부터 “산이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산으로 간다” 주의의 비범한 소년이었다. 오코너는 학창 시절 모두가 반장 등의 요직을 맡고 싶어 할 때 이미 스스로가 타의 모범이 되는 데 자질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개교 이래 한번도 없었던 직책인 ‘분실물 보관소 지킴이’를 발명해 자기만의 길을 자처했다고 한다. 이같은 면모는 좋은 연기와 작품을 알아보는 배우로서의 태도와도 닿아 있다. 연기자를 꿈꾸던 시절 오코너는 헬레나 본햄 카터의 열성 팬이었다. 그래서 오코너는 본햄 카터가 연기했으면 하는 배역의 목록을 스크랩북으로 만들어 보냈다. 또 오코너는 배우 데뷔 이후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행복한 라짜로>에 깊이 매료된다. 그는 로르바케르의 주소도 몰랐지만 수취인 불명 편지를 주소 미상의 이탈리아로 대뜸 보냈다. 놀랍게도 10대의 오코너는 본햄 카터에게 답신을 받았고, 당연히 20대의 오코너는 로르바케르에게 답신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오코너는 본햄 카터와 <더 크라운>에서, 로르바케르와 <키메라>에서 동료로 만나게 된다. 전세계적 주목을 받으며 차기작에서 레아 세두, 크리스틴 스튜어트, 폴 메스컬 등의 상대역을 꿰찬 지금, 오코너가 꾸는 꿈은 두 가지다. 그는 고향인 글로스터셔주로 돌아가 정원 텃밭에 체리 나무와 채소를 심고 자신만의 도자기 공방을 만들길 바란다. 또 비수도권에 사는 지역민들의 문화 접근성 확대를 위한 연극 유랑극단을 만들고자 한다. 오코너는 수도권에 쏠린 문화 편중을 한탄하며 “부자가 되면 바보가 되니까 부자가 되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그가 왜 <행복한 라짜로>를 사랑하는지 알 것만 같다. “나는 한때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축구를 충분히 잘하지 못한다는 걸 곧 깨달았다. 그런데 연기는 괜찮은 것 같다!” <신의 나라>로 BIFA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직후 이뤄진 조시 오코너의 인터뷰 일부다. 왕족과 농부를 천연덕스럽게 오가는 그의 현재를 보고 있으면 확실히 그의 재능은 축구보다 연기에 있다. 오코너의 팬이라면 당시 남우주연상 수상 영상을 꼭 보길 권한다. 상을 받는 스스로가 겸연쩍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모든 진심을 고백하는 그의 모습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로 오스카 연단에 올라 만천하에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전파한 올리비아 콜먼의 수상 소감을 떠오르게 한다. 마침 오코너와 콜먼은 <더 크라운> <마더링 선데이> <레미제라블>에서 긴밀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인터뷰] ‘털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크기까지 디테일하게’,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에릭 윈퀴스트 VFX 슈퍼바이저

<킹콩> <아바타>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까지 기술적 성과를 이룬 작품들의 엔딩크레딧에서 에릭 윈퀴스트 VFX 슈퍼바이저의 이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2002년 독보적인 VFX 스튜디오 Wētā FX에 입사해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에릭 윈퀴스트는 현재 팀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으로 아카데미 시상식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시각효과상에서 후보 지명을 받았으며 실제 촬영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개발 연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혹성탈출> 리부트 삼부작(<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이어 7년 만의 속편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도 VFX 총괄을 맡은 에릭 윈퀴스트가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았다. 본편 프롤로그를 볼 수 있었던 푸티지 시사회 당일 윈퀴스트를 만나 작품 속 놀라운 시각적 향연에 관해 물었다. - 웨스 볼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VFX가 필요하지 않은 숏은 3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전한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의 시각효과의 영향력이 궁금해지는 답변이다. = 정확히는 38개다. 이번 작품에서 VFX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우리 입장에서 단순하게 작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들만 나오는 신은 극히 일부였고 장면 대부분에 VFX 효과로 완성해내야 하는 유인원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작업량이 많았음에도 그나마 덜 힘들었던 건 웨스 볼 감독 덕분이다. 감독은 SF영화 <메이즈 러너> 삼부작을 맡아 성공한 경험이 있어 디지털 툴을 비롯한 관련 지식에 훤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확한 가이드를 주었고 후반에 가서 얼마나 많은 부분이 바뀔지 미리 주의도 줬기 때문에 각오하고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웃음) - 새로운 캐릭터 노아(오언 티그)를 포함한 유인원들의 생활 터전은 무성한 풀숲이다. 프롤로그에서 이파리 하나하나가 다르게 흔들리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 풀, 물, 불, 흙, 바람까지 온갖 자연적 요소들이 다 있어 쉽지 않았다. 언급한 부분에 관해 말을 잇자면 바람이 부는 경우 그 바람에 영향을 받은 나무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시뮬레이션 작업은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영화의 주된 배경이 항상 바람이 부는 야외라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메인 캐릭터가 유인원이지 않나. 털이 계속 미세하게 날리는 상태가 기본값이다 보니 이래저래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난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Wētā FX만의 독자적인 기술인 ‘피스라이트’(Physlight)가 한 단계 발전했다. 실제 촬영장의 밝기와 색상을 디지털 환경에서도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한 끝에 애초 생각했던 정확한 이미지가 나와 만족스럽다. - 불과 물의 요소도 많이 쓰인 것 같더라. 물에 젖은 털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특히 까다롭다고 알고 있는데 어땠는지 궁금하다. = 프롤로그에서 노아가 사는 마을이 프록시무스(케빈 듀랜드)의 습격으로 큰불이 나는 장면에 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시드니와 그 주변이 주요 로케이션이었는데 실제 불을 군데군데 갖다놓은 야외 현장에서 배우들이 안전장치를 한 상태로 촬영한 뒤 나중에 디지털로 불을 입혔다. 그 과정에서 불이 가진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캐릭터들이 횃불을 들고 다니는 신이 꽤 많았는데 이 작업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횃불은 시뮬레이션 세팅 단계 때부터 정교하게 계산을 맞춰야만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물이었다. 물은 급류, 해안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홍수 등 종류가 워낙 다양해 데이터가 방대하고 상당한 연산력이 필요해서 결과물 하나를 보는 데도 수일이 걸렸다. 물에 젖은 유인원 작업이란 가뜩이나 어려운 물 작업과 그 못지않게 까다로운 털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젖은 털들의 뭉친 정도, 털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크기까지 디테일하게 잡아내야만 했다. - 새털 작업은 어땠나. 이번 작품에선 유인원 부족이 독수리를 길러 새의 비중이 꽤 높았을 것 같다. = 몇년 전, DC 코믹스의 <피스메이커>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애완 독수리가 나와 경험이 있긴 했다. 그러나 당시는 깃털 툴세트에 관한 개발이 만족스러운 단계가 아니였다.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건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촬영 전에 만난 호주 독수리였다. 팀원들이 독수리를 팔에 올려놓고 무게가 어떤지를 직접 느껴보고 고공비행에서부터 착지까지의 과정을 하이스피드로 촬영한 뒤 새의 움직임과 깃털의 형태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런 시간을 한번 거쳤기 때문에 사실적인 독수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 오언 티그의 노아는 <혹성탈출> 리부트 삼부작에서 활약한 앤디 서키스의 시저와 어떻게 다른가. = 일단 노아는 어리다. 고립된 마을에서 태어나 바깥세상을 궁금해하지 않는 장로들 손에 길러진 탓에 아는 게 많지 않다. 순수한 10대라는 점이 태생적으로 진지하고 충분한 진화를 거쳐 나이 든 시저와는 다른 인상을 풍길 것이다. 노아를 담당한 아티스트들은 피부의 톤이나 털의 질감에서 젊은 기운이 느껴지도록 신경 썼다. 휘둥그레한 눈과 어리숙한 움직임을 통해 노아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에 대해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자 했다. 오언 티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노아가 성장에 중점을 둔 캐릭터라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고 현장에서 몰입감이 남달랐다. 그 덕분에 노아가 시저 2.0 버전이 아닌 고유한 노아가 될 수 있었다. 노아는 시저와는 다른 여정을 겪지만 결국 시저만큼 훌륭한 리더로 성할 것으로 보인다.

[커버] '삼식이 삼촌' 배우 송강호, 위장에서 심장까지

밥과 삼촌. 전후 한국에서 두 낱말은 상징적이다. 배고픔, 울분, 연대, 가족애, 생존 본능과 뗄수 없는 이 정신적 표어들을 이름으로 얻은 남자가 있다. 주변인들의 하루 세끼를 챙겨주는 수완 좋은 사업가라 해서 ‘삼식이 삼촌’이라 불리는 박두칠(송강호)로, 그는 드라마 <삼식이 삼촌>의 걸어다니는 은유이자 오래전부터 “밥은 먹고 다니냐?”(<살인의 추억>)를 물었던 우리의 송강호 그자체다. 지난해 내내 창작의 고통이 급습한 촬영 세트장에 갇혀 있던 영화의 우두머리(<거미집> 김열)는, 특유의 인상적인 줄행랑 실력으로 1970년대를 빠져나와 1960년대 저잣거리의 왕으로 등극했다. 위로는 정치판, 아래로는 뒷골목까지 배짱 좋게 접수한 박두칠의 신화는 막 경제개발의 깃발을 꽂은 근현대사의 등락 앞에서 요동친다. 두둑한 배포와 소탈한 인간미, 순수함과 비밀스러움을 동시에 갖춘 이 남자. 박두칠을 그려가 다보면 문득 그 종잡을 수 없음이 지극히 배우 송강호다운 것이라 납득하게 된다. - <삼식이 삼촌>은 ‘송강호의 첫 드라마’라는 점만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 약간 수식어처럼 쓰이는 것 같기도 해서 민망하다. 뭐, 어쨌든 첫 드라마인 게 사실이지만. 왜 갑자기 드라마냐고 이유를 많이들 물으시는데 답은 간단하다. 콘텐츠가 다양한 형태, 플랫 폼에서 소비되는 시대인 만큼 내 관점도 자유로워질 필요를 느꼈다. 관객과 소통하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던 차에 <삼식이 삼촌>을 만났다. 드라마라고 해서 딱히 낯설거나 힘들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심적 부담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 첫 드라마 출연작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이었을까. = 영화야 쭉 해오던 작업이니 흥행이 잘될 때도, 또 마음만큼 따라오지 않을 때에도 단련되어 있다. 그런데 드라마는 어떤 느낌일지 아직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물론 작품의 진정한 성공이란 숫자로 대변되지 않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라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디즈니+의 경우 구체적인 흥행 집계를 내부적으로만 한다고 해서 좋다, 하하하! 영화는 개봉 직후부터 매일 관객수, 예매량이 집계되고 공중파 드라마는 방영 다음날 아침마다 시청률이 나오니까 아무래도 애가 타거든. - 송강호의 시대극 드라마가 디즈니+에 안착한 그림이 미디어 시장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것 같아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웃음) <거미집> <1승>에 이은 신연식 감독과의 세 번째 협업이 만든 결과다. = 나는 일에도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서로 스케줄이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인연’이 닿아야 한다는 거다. 한 시절에 배우 송강호의 감성이 어떤 것을 원하고 있는데 정반대의 작품이 들어오면 아무리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해도 선뜻 다가가게 되질 않는다. 산업적인 성공이 예측되는 요소가 빤히 보여도 그보다는 나 자신의 목마름을 축여줄 작품을 찾게 되는 것이 배우의 본능이니까. 신연식 감독과 연달아 작품을 함께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그가 각본을 쓴 <동주> 를 본 뒤부터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다. 윤동주 시인의 문학적 면모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동안 중점적으로 보지 못했던 인간적 면모를 바라보는 시선에 놀랐다. 젊은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도 하니까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지. <기생충>의 아카데미 레이스까지 마무리짓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가 먼저 내게 연락을 해왔고, 그러잖아도 호기심이 있던 상태라 그랬는지 그날 당장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제안했다. 그렇게 <거미집>(각본 신연식)과 자그마한 독립영화 <1승>을 찍었고 <삼식이 삼촌> 대본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전까진 드라마 작업을 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다. - <씨네21> 신작 프로젝트 인터뷰에서 감독이 밝히 길, 그렇게 성사된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삼식이 삼촌>의 한 장면에 영감을 줬다고. 배우 송강호가 단번에 신연식 감독에게 만남을 청한 것처럼, 킹메이커 박두칠도 정치인 김산(변요한)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빵집으로 불러낸다. = 그래도 굳이 따지면 현실에선 신연식 감독이 박두칠쪽이지! 자신의 야망과 꿈을 실현시켜줄 인재를 캐스팅하려는 거니까. 신연식 감독도 내게 그날이 인상 깊었다는 얘기를 하긴 했다. 일반적인 절차라는 게 보통은 이메일로 대본을 보내주면 ‘읽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하는 거잖나.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에 놀랐을 것 같다. 살다보면 이런 인연도 있는 것 아닐까. -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법서 중에는 캐릭터가 위장, 심장, 머리 중 무엇에 가장 크게 지배되느냐에 따라 인물형을 분류하는 관점도 있다. 박두칠은 소화기관의 본능과 맞닿은 캐릭터인가 싶다가도 전략가적인 면모를 보여줄 땐 머리로 움직이는 캐릭터이고, 불쑥 뜨거운 마음을 드러낼 땐 심장의 인간이다. = 죽 한 그릇 먹기 힘든 시대에 밀가루로 만든 빵, 피자를 이야기하는 게 박두칠 아닌가. 빵도 그냥 빵이 아니라 단팥빵을 먹는다. 그가 지닌 경제적, 사회적 풍요를 향한 높은 이상을 말해주는 메타포들이다. <삼식이 삼촌>은 분명히 위장에서 시작해, 중후반부에 뇌로 갔다가 마지막에 가슴으로 간다. 지금으로선 딱 이 정도까지 말할 수 있다. 화살표를 그리자면 위->뇌->심장 순서로 흐르는 드라마다. (먼저 퇴근하게 된 배우 변요한이 인사하러 다가온다) 다 끝났구나? 얼른 들어가~. 수고 많았어. 우린 한창 내장 이야기 중이었어. (일동 웃음) - 마침 김산과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려 했다. 박두칠은 젊은 엘리트 김산과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나. = 박두칠에게 김산과의 만남은 자기 인생의 로망이 실현된 것에 가깝다. 그러니 자신을 걸 수밖 에. 둘의 관계는 역동적이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관계 구도 안에 우리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로 경계하다가 가치관을 공유하는 끈끈한 사이가 되고, 그러다 갈등이 생기고, 질투하고, 각자가 이기심을 부릴 때도 있다. 관심이 떨어졌다가 다시 불붙거나 무감해졌다가 서로의 진심을 새삼 깨닫는 식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깊이 엮인다는 게 그런 과정 아니겠나. - 신연식의 시대극 속 송강호는 원대한 이상에 몰두한 나머지 집념과 집착을 오가는 캐릭터다. 전쟁 이후에 배불리 먹는 나라를 만들고 싶은 <삼식이 삼촌>의 박두칠, 검열의 시대에 일생일대의 영화를 만들려는 <거미집>의 김열 모두 그렇다. = 나도 바로 그 점, 완벽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좋다. 박두칠과 김열, 두 사람 모두 어떻게 보면 비뚤어진 욕망과 야망의 소유자들이다. 어딘가 약간 왜곡된 면이 있는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가진 지나친 열정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시대에 작가가 이 두 캐릭터를 불러낸 건 두 캐릭터를 불러낸 건 그들의 거친 순수성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순수성이란 게 너무나 빛나는 것인 동시에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탈색되기 쉬운 것이기도 하다. 박두칠과 김열은 내 삶의 순수성을 지금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질문하게 만드는 유형의 인간들이다. - 특히 박두칠은 시대상과 결부된 캐릭터고 해석에 따라 명암이 갈릴 법하다. 그때그때의 주어진 상황과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작업과 보다 분석적인 캐릭터 연구를 요하는 작업으로 나눠본다면, <삼식이 삼촌>은 어느 쪽인가. = 순간적인 감정이 중요할 때와 관조적인 포지션에서 분석적인 시선을 갖고 접근해야 할 때가 각각 있는 건 맞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면 이두 가지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섞여 있다. 복잡한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현장성 50, 해석력 50 이런 식의 산출은 불가능하다. 준비 단계가 끝난뒤 카메라 앞에 선 순간부터는 본능적으로 톱니바퀴를 굴려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거엔 배우가 자기 결과물에 대해 말할 때 ‘본능’을 언급하면 약간 건방지게 보는 시선도 있더라고. 조심스럽지만, 내 말은 계산적인 연기법이란 건애초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제목에서부터 캐릭터를 지칭하는 이 작품의 컨셉을 배우 송강호의 존재감, 상징성, 흡인력과 별개로 보긴 힘들 것 같다. 이 지점이 의식되진 않았나. = 배우 송강호의 모습이 작품 속 캐릭터에 어떤 식으로든 투영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런 바람을 갖고 시도한다고 해서 되지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부질없는 욕심은 놓아야 한다. 그 대신 바라는 경지가 있다면, 캐릭터를 충실히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순간, 마치 매직아이(스테레오그램)를 볼 때처럼 스윽 인간 송강호가 나타나는 것이다. - 16부작 정극 드라마라 많은 대사를 소화해야 했다. 목소리 표현, 음절과 운율 처리 같은 디테일에 어떻게 접근했나. = 하!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대사가 많더라고. 궁극적으로는 시대극 연기를 할 때 흔히 빠질 수있는 유혹을 경계했다. 1960년대 초반은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시대다. 그러다보니 캐릭터가 쓰는 언어와 그 안의 뉘앙스가 대체로 거칠고 마초적이며 직설적으로 표현되어온 편이다. 나는 그동안 공중파 드라마에서 많이 쓰인 인물의 질감은 지양했다. 센 표현은 배우에게도 쉽고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에도 편하다. 나로서는 그것을 피하는 도전을 해본 셈이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박두칠이 어떤 사람인지를 시청자가 점점 더몰랐으면 좋겠다. 근데 결국은 알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이걸 실질적으로 어떻게 만들어내냐고? 베테랑인 배우들이 각자 알아서.

[기획] <늑대의 유혹> 이후 배우 이청아의 20년 ① - 깊은 목소리, 선명한 눈동자

배우라는 직업의 피할 수 없는 숙명 중에는 필모그래피가 쌓이는 만큼 바이오그래피의 궤적도 노출된다는 고충이 있다. 그마저도 감사하다고 표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감수해야 할 대가라고도 말한다.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면서 대중은 해가 갈수록 작품 바깥에서 드러나는 배우의 사적 매력을 접하는 데 익숙하고 나아가 요구한다. 여기엔 스타의 진짜 삶을 궁금해하는 팬심만큼, 배우의 역능과 인간으로서의 깊이가 무관하지 않으리란 무의식적 바람도 깃들어 있다. 얼마큼 사실이거나 환상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배우 이청아의 사례로 말하자면,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라고 잠정적으로 적어두고 싶어진다. 2002년 명동 한복판에서 길거리 캐스팅 당해 부지영 감독의 단편영화 <눈물>(2002)로 데뷔한 이청아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을 거쳐 <늑대의 유혹>(2004)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뉴 밀레니엄과 함께 선풍적 인기를 끈 인터넷소설을 영화화한 <늑대의 유혹> 이후 20년. 청춘 대 청춘으로 만난 관객과 함께 세월을 차분히 아로새긴 이 배우는 한층 낮고 부드러워진 목소리, 소녀다울 필요 없는 우아한 패션, 노련미가 돋보이는 전문직 캐릭터로 시청자들을 TV 앞에 유인한다. 곧잘 캔디형 여주인공이곤 했던 이청아의 과거를 기억하는 관객은 지금의 그를 보며 깊어졌다고 말하고 이청아의 현재가 가장 자연스러운 1020 시청자들은 그를 ‘멋있는 언니’로 따른다. 어느 쪽이든, 그를 향한 세간의 호감은 자기 앞의 여정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선명하고 단단해져온 어느 배우의 다음 행로를 기대하게 만든다. 17년 만에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은 이청아는 변함없는 공간을 침착하게 둘러보며 말했다.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라고. “내게 주어진 인물들이 아니었다면 살면서 영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지도 모른다. 배우 수업은 타인의 존재는 물론 삶에서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천원짜리 변호사>(2022), <셀러브리티>(2023), <연인>(2023), <하이드>(2024)로 분주히 활동했고, 유튜브 채널로 인간적 매력도 다분히 내뿜고 있는 최신의 이청아를 만났다. 앞으로 우리에게 더 새로운 인식과 놀라움, 그리고 존중을 자아낼 배우 이청아, 인간 이청아의 페르소나를 모두 엿보길 희망하면서. - 최근 드라마 <하이드>가 종영했다. 당분간 계획은 어떤가. = 한동안 바쁘게 일했으니 조금 쉬어가는 일정을 잡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촬영 이후 15년 만에 중국에 가는 건데 베이징은 처음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 <삼체>를 봐서 그런지 중국행이 더 기대된다. 요즘 하고 싶은 건 하루에 딱 한번만, 꼭 필요한 연락을 위해 저녁에 몰아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나머지 시간은 충분히 책 읽고 콘텐츠 보는 데 쓰는 것이다. - 문영(이보영)의 이웃집 빌런인 <하이드>의 하연주 캐릭터는 이청아 커리어에서 드문 악역이었다. = 나는 나로만 사니까 역할의 의미를 분류해서 느끼진 못하는 편이다. 드라마 <뱀파이어 탐정>에서도 비릿한 느낌의 캐릭터였고 실질적인 첫악역은 <연인>이 아닐까 싶은데 막상 주변 반응을 보면 다르게 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 <연인>의 각화는 악역이 아닌데! = 맞다. (웃음) 그렇게 봐주시면 더 좋고. 안 그래도 얼마 전 친한 감독님이 <하이드> 방영 중에 연락 와서 “나 청아씨 이런 얼굴, 이렇게 소리 지르는 모습 처음 봐”라고 하더라. 로코물의 이청아로 기억하는 분들에겐 확실히 <하이드> 의 모습이 낯설었을 테다. 하지만 내 기준에 지금껏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상대하기 힘든 캐릭터는 웹드라마 <회사를 관두는 최고의 순간>의 직장 상사였다. 사회 초년생들이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상사였거든. 그러고 보니 확실히 최근 몇 년 들어 빌런 캐릭터에도 나를 떠올려주는 작가, 연출자들이 늘긴 한 것 같다. - 상무(<하이드>), 대위(<연평해전>), 변호사(<천 원짜리 변호사>), 백화점 VIP 전담팀 과장() 등 전문직 커리어 우먼에 특화돼 있기도 하다. = 전문직 캐릭터가 확실히 많이 들어오긴 한다. 일단 대체로 직위가 높아서 재미있다. 최근에 느낀 게 기본적으로 이사급 이상이더라고, CEO도 있고! 직업적인 면이 부각되거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늘어난 것은 무척 반갑다. - 우정출연한 <이번 생은 처음이라>, 특별출연한 <천원짜리 변호사>의 사례도 유독 흥미로웠다. 적은 분량임에도 반응이 좋았는데, 시청자들이 캐릭터 너머로 배우 본연의 매력을 읽는 듯했다. = <천원짜리 변호사>의 이주영 변호사는 내가 품은 나의 이상형과 닮은 여자라 그랬을 것이다. 내가 가진 제일 좋은 모습만을 넣어둔 인물이랄까? 그리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극본을 쓴 윤난중 작가를 드라마 <꽃미남 라면가게>(2011)로 처음 만났고 이후 사적으로도 친해졌다. 어느날 “네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야”라고 부탁하길래 대본을 읽지도 않고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너무 멋있는 사람인 거다. 고민이 많았다. 마침 그 무렵이 데뷔하고 처음으로 작품을 길게 쉴 때였다. 염색을 안 해서 뿌리가 훌쩍 자란 머리, 다듬지 않아서 숱 많고 까만 눈썹 그대로 자연인 이청아의 모습으로 나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스타일 이니 주변에서 말린 것도 사실이지만, 단단한 내면을 가진 인물의 고집스러움을 내 모습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나를 드러낸 작품은 처음이었다. - 배우 이청아의 분위기가 깊어진 것을 대중도 알아차리기 시작한 시점과 맞물린다. = 20대의 나는 자주 88만원 세대의 전형을 연기했다. 늘 직업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야 하는 소녀가장형 캐릭터의 입장이었다. 극 중에서 부모님이 다 계시는 경우가 없었다. 32살쯤인가 처음으로 직업이 있는 역할을 연기했으니. 한번은 엄마와 투닥거리며 싸우고 난 직후에 반농담으로 이런 말도 들었다. “사람들이 이청아를 정말 모른다. 넌 언제 진짜 너처럼 잘난 척하고 재수 없는 역할을 해볼래?” 엄마는 항상 내가 좀더 나다운 역할을 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했는데, 결국 못 보고 돌아가셨다. 요새 가끔씩 하늘 보고 찡긋 말을 건다. “엄마 잘 보고 있지?” * 이청아의 인터뷰 ② ③이 이어집니다.

[기획] <늑대의 유혹> 이후 배우 이청아의 20년 ③ - 건강하게 살아가기, 연기하기

- 자기다움을 고민하고 지켜온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이청아를 만든 것 같다. 유튜브 채널 를 보면서 배우 이청아 뿐 아니라 생활인 이청아를 향한 호감과 동경을 표현하는 구독자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정말 그런가! 감사한 한편 왜 좋아해주시는지 나도 궁금하다. (웃음) 유튜브나 SNS 속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일까 생각해보면 결코 아니다.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닐 때에도 언제나 일종의 공인으로서 소화해야 할 역할이 있다. 물론 팬들에 대한 고마움이나 사적인 이야기를 편안하게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행복하다. 특히 책 읽어드리는 코너는 꼭 하고 싶었다. 즐겁지만 유익함도 있는, 에듀테인먼트적인 채널을 바랐거든. 어떤 식으로든 나를 지켜보고 소비하는 분들에게 유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 일상 브이로그나 데일리 루틴을 담은 콘텐츠에 ‘갓생’, ‘워너비’ 같은 수식도 주어진다. = 한동안은 유튜브 속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를 관찰하면서 살짝 자책한 적도 있다. 나도 하루를 완전히 망쳐버릴 때가 있고 자기 관리에 신경 쓰지 않는 시간도 있는데, 나의 1부터 10까지를 모두 이야기해도 가장 잘 소비되는 것만 쇼츠로 뽑혀서 나가니까. 고등학생 이후로는 몸무게가 40kg대였던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청아가 48kg을 유지하는 법’ 같은 것만 전면에 드러날 때는 근심과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지금은 그 파도가 한차례 지나갔다. 아무리 좋은 수식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 갇히기 마련이다. 아, 체중 이야기를 좀더 보태자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체중보다는 눈보디에, 근육랑에 신경 쓰게 된다. 그 편이 건강하고 보기도 좋다. - 사실 가장 돋보이는 건 내향형의 인간, 예민한 취향의 소유자로서 이청아의 면모가 잘 담긴 순간들이다. = 학교 다닐 때 시나리오를 써가면 교수님이 “청아야, 왜 네 시나리오엔 사람이 4명 이상 나오지 않는 거냐”라고 했다. 너무 놀랐다. 왜냐하면 실제로 4명 이상이 모인 자리를 잘 안 가기 때문에. (웃음) 4명이 넘어가면 그때부터 집에 가고 싶다. ‘이쯤이면 내가 없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나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이었다가 배우 일을 하면서 비로소 사회화가 된 경우다. <늑대의 유혹> 이후 배우 일에 한동안 부담을 크게 느끼던 시절을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의 대인기피증 증상도 있었던 것 같다. 10대와 20대까지, 나를 상상하게 하고 버티게 만든 많은 힘의 출처는 대부분 책으로부터 나왔다. - 지금은 자신다움이 타인의 기대와 맞아떨어지는 나이대와 자연스럽게 만난 것 같기도 하다. = 정말 그렇다. 그리고 30대를 지나면서 배우라는 직업 세계에서 내가 쓰이는 방식을 이해하면서 좀더 큰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됐다. 20대엔 연기에 대한 열의만으로 불태웠다면 지금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내가 계속 열심히 하더라도 어쩌면 죽기 전까지 스스로 원하는 배우의 모습에 가닿지 못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비관적인 예측이 아니라 그런 삶에 갈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찬찬히 검토해보게 된다. 많은 배우들이 가진 걱정이 내게도 물론 있다. ‘어느 순간 선택받지 못하는 순간이 됐을 때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같은. 삶에 발붙이고 싶은 것, 연기만큼 일상에도 충실하고 싶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무래도 인간 이청아를 보여드릴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난 영향도 크다. 얼마 전에 예능에 출연했는데, 과거의 이청아는 본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으려던 느낌이란 얘기를 해주셨다. 내가 안보여주려고 했다기보단 그저 그런 상황이었을 뿐이다. 작품과 캐릭터로만 대중과 만난 시기가 있고, 지금은 소셜미디어가 발달한만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보여드릴 수 있게 됐다. - 얼마 전 유튜브 채널에서 베스트셀러인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를 소개했다. 두 가지에 놀랐다. 북튜버에 최적화된 발성과 목소리,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투병 생활을 상세히 회고한 점이다. = 꼭 진행하고 싶었던 책이다. 출판사에 먼저 허가를 구하기도 했다. 책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사적인 경험도 함께 더하고 싶은데 괜찮겠냐고.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갔고 봄이 왔다. 상실을 겪은 분들에게 회복의 시간이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 소개는 꼭 4월에 올리고 싶었다. - 일찍 데뷔해 가족과 보낼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텐데, 이른 이별이 더 아팠을 듯싶다. =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엄마의 병은 플랜이 있는 병이었다. 1년 뒤, 5년 뒤의 단계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그래서 대비책을 세웠고 어떤 때는 일부러 더 많이 일했다. 1년에 세 작품씩 쉬지 않고 일했던 건 그래서였다. 커리어적인 전략을 짜는 게 필요한 시기였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일일드라마를 연달아 두번씩 하고… 트레이닝한다는 생각으로 임했고 쉬는 날에는 가족과 보내는 한순간 한순간을 절박하게 만끽했다. 엄마가 떠나기 전까진 극 중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만나는 순간에 놓여도 사실 그 감정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엄마라는 단어가 내 안에서 갖는 의미가 달라진 나중에서야 어떤 아픔을 깊이 깨닫게 됐다. <나는 메트로폴리탄의 경비원입니다>를 소개할 때도 한 얘기지만, 나는 슬픔이란 아주 맑은 것이라고 믿는다. 어릴 땐 슬픔이 무서워서 일부러 열어보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제대로 직면하고 난 이후 스스로가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 그 자각이 연기에도 반영되었을까. = 연기를 하면서 더더욱 세밀하게 느낀다. 물론 세상에는 분노로 휘감겨 뼈가 저리는 슬픔도 있다. 하지만 그건 화에 가깝다. 그런데 맑은 슬픔은 오히려 회복을 돕는 감정이다. 슬픔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졸음이 온다. 몸이 회복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영화 <다시, 봄>(2018)에서 사고로 딸을 잃은 인물을 연기할 때 온몸으로 느꼈다. 캐릭터가 아이를 잃은 상황에 처해 있는 동안엔 몇달간 위장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내내 신경성 위경련을 달고 살았다. 내 몸이 배우 이청아가 느끼는 감정을 진짜라고 착각한 거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서 아이와의 시간을 다시 살게 된 이후에 깊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는 오히려 기운이 좋아졌다. 배우로서 쓰는 감정들을 일종의 카테고리화해두기도 하는데, 그 경험 이후로 슬픔이란 단어를 위로 올렸다. 슬픔은 나를 좀먹는 게 아니라 재생시키는 거라고. - 드라마 커리어를 바쁘게 쌓아왔는데, 관객 입장에선 이청아의 영화도 더 많이 보고 싶다. 스크린에서 더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는지. = 내 바람도 같다.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장르는 멜로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그렇게 써주시질 않는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들도 다 멜로드라마가 기반인 작품들이다. <결혼 이야기> <레볼루셔너리 로드> <언페이스풀> <클로저>, 드라마는 <밀회> <인간실격>… - 모두 감정의 파고와 농도가 짙은 사랑 이야기들이다. (웃음) = 그리고 <캐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도 ! 로맨틱코미디의 엔딩은 언제나 첫 키스여서 과거의 나는 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에 퇴장해야 했다. 이제는 사랑의 중간 과정에 놓여 있는 얼굴을 보여드리고 싶다. - 이청아의 행보는, 한 사람의 개인적 궤적과 직업적 행보가 상호 영향을 끼치며 양쪽 모두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나이 들어가고 싶나. =음, 그 기대를 배반하면서? (웃음)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한 다 함께 나이 들 테니 지켜봐주는 분들에게는 그저 언제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 중의 인간으로 비치길 바란다. 혹여나 중간에 갑자기 삐끗할 수도 있고 부족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있지만 계속 진행형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 같다.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되려는 강박 없이 스스로를 너무 대단한 역할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걸어가고 싶다. -잠시 숨고르기를 할 이청아의 요즘 일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스스로 채찍을 몇번 때리고 당근을 몇번 줘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인지, 이를테면 자기를 다루는 방법 같은 것을 나이 먹으며 조금씩 터득하게 된다. 사소하게는, 어떻게든 집 밖으로 나 자신을 끌고 나가려 한다. 카페에 머무는 것에 한계를 느껴서 최근 들어 공유 오피스에 나가기 시작했다. 열중해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으면 자극을 받는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정기권을 한번 끊어보면 어떨까?

[씨네스코프] 제주 복합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의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 전시 체험기, 순환하는 세계

에릭 오의 세계는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2010년대 무렵 국내 애니메이션계의 신성으로 주목받던 그는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 경력을 거쳐 <오페라>(2021)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오페라>는 커다란 피라미드 속의 무수한 인간들이 서로 다투며 공멸하고, 이내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역사를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작품이지만 에릭 오 감독은 “<오페라>를 전시 형식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열망을 7~8년 전부터” 갖고 있었다. 이 목표는 제주 애월읍에 있는 복합 문화공간 ‘하우스 오브 레퓨즈’의 첫 상설 전시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를 통해 현실이 됐다. <오페라>를 포함한 에릭 오 감독의 <오리진> <오르빗> 등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압도적인 규모와 완성도를 자랑한다. <씨네21>이 방문한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의 체험기를 에릭 오 감독과의 인터뷰와 곁들여 전한다. 하우스 오브 레퓨즈에 가기 위해선 제주 애월의 깊은 산 중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가 주변에는 제주의 푸르른 숲이 펼쳐지고 저 멀리엔 바다가 머무르고 있는데, 이 제주의 자연 풍광은 에릭 오 감독의 전시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는 콘크리트 건물 내부에 피어난 각종 조경이다. 이끼, 고사리와 같은 고생대의 식물들이 공간 곳곳을 지배하며 풍기는 습기의 촉각과 으스스함은 “이제는 폐허가 된 어떤 문명의 유적지나 일종의 던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오페라>를 비롯한 전시 작품들이 인류, 사회의 기원과 흥망성쇠를 들추어내는 작품”이기에 전시 공간의 분위기로도 유사한 뉘앙스를 전하려 한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강하게 귀를 때리는 전시장의 앰비언스와 작품들의 효과음 역시 압도적이었다. BANA의 음악 프로듀서이자 앨범 <뽕>으로 한국대중음악상을 휩쓸었던 250이 음악 감독을 맡았다. ‘O: 에릭 오 레트로스펙티브’의 모든 작품은 “5분 안에 낮과 밤의 기승전결이 끝난 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이클”로 동시에 재생된다. 이 5분의 시간에 맞춰 “온 공간의 음악이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연주”된다. 각 방 사이의 벽엔 커다란 구멍이 의도적으로 뚫려 있어 각 작품의 음악이 자연스레 섞이게 되며, 관람객 각자가 자기만의 소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우물 위의 천장에서 재생되는 첫 작품 <오리진>은 시각적 스펙터클의 위용을 드러낸다. <오리진>은 <오페라>보단 덜 서사적이고 더 추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에릭 오 감독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것인지”라는 커다란 3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리진>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감독의 풀이다.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미지의 태고, 생명의 근원을 “무언가가 태동하는 듯한 이미지”로 흩뿌린 것이다. <오리진>을 지나고 나면 <오페라>에 가는 경유지가 이어진다. <오페라>에서 발췌한 듯한 애니메이션 일부가 벽 곳곳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엔 역시 무성한 식물들이 자라 있다. 자연의 흙 내음과 콘크리트 건물의 세한 냄새가 섞이는 와중에 커다랗게 나 있는 창틀에는 제주의 햇빛이 내리고 있다. 이쯤 와서 느껴지는 것은 이 전시장엔 미술관에 으레 설치돼 있는 작품 설명이 없단 사실이다. 이는 “전시의 마지막엔 간단한 설명을 넣은 설명서를 제공할 테지만, 기본적으론 관람객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걷고 공간을 느끼길 바란” 에릭 오 감독의 의도다. 메인 룸에 들어가면 두 개의 커다란 <오페라>가 지하 성당의 프레스코화처럼 관람객을 맞이한다. 하나는 극장 상영용과 비슷하게 프레스코화의 전체 모습을 원경에서 담아낸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며 특정 부분을 확대해 보여주는 영상이다. 동시에 흐르는 두 개의 <오페라>를 관람객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살피고 따라갈 수 있다. <오페라>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에릭 오 감독의 답변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 매일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사회적 문제와 현대의 단면들을 묘사”한 작품이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엔 종교, 왕정, 정치에 몸담은 캐릭터들이 보이고 그 아래론 학교, 공장, 감옥 등 각종 사회 시설이 마련돼 있다. 수많은 캐릭터는 타인을 부리고, 노동하고, 착취하고 착취당하다가 서로를 해치기에 이른다. 그렇게 5분이 지나면 인류는 사회를 재건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역사를 반복한다. 애니메이션 영상이 재생되는 바닥 아래는 마치 연못처럼 곡선을 이루고 있고, 관람객이 걷고 앉을 수 있는 계단의 모양 역시 유려한 곡선형이다. 딱딱하고 각진 콘크리트 천장 아래의 곡선들과 식물, 시시때때로 바뀌는 오묘한 빛깔의 조명들은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복합적인 공간성을 자아낸다. 전시장의 마지막엔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 공개되는 신작 <오르빗>이 기다리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완전히 겹쳐 있는 5개의 스크린에서 5개의 애니메이션이 재생된다. <오르빗>은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상념을 담은 작품으로 “질서가 있는 것처럼 지속되던 <오페라>의 문명이 결국 무질서로 회귀한다는 순환의 의미”를 담았다. 우주의 여러 행성, 기하학적 구조물, 각종 오브제의 이미지, 빛과 어둠의 대조 등으로 만들어진 5개의 영상이 무한히 돌고 있다. ‘순환’은 에릭 오 감독이 작업 초창기부터 꾸준히 천착해 온 주제다. 첫 단편 애니메이션 <더 백>(2005)은 한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가방을 쫓고 죽어가지만, 소년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이 다시금 가방을 쫓는 이야기였다. 그 이후 <심포니>(2008) <소통>(2009) 등으로 이어진 에릭 오 감독의 초~중기 작품과 후기의 작업물들 역시 늘 존재, 시간, 문명, 생명의 굴레를 역동적인 애니메이팅으로 구현하곤 했다. 그리고 <오르빗>엔 에릭 오 감독의 작품에 등장했던 가방, 사과, 열쇠, 쇠똥구리 등의 각종 이미지가 총집합 해있다. 이번 전시는 시공간이나 인류 문명의 순환에 대한 거대한 사유인 동시에 에릭 오라는 창작자가 만들고 있는 작품 세계의 흥미로운 순환이기도 한 셈이다. 에릭 오 감독의 초~중기 작품과 전체 필모그래피는 에릭 오 감독의 개인 홈페이지(https://erickoh.com/)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릭 오 감독이 밝힌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목적은 “거두절미하고, 기술적인 요소를 다 떠나서 오로지 메시지 그 자체”다. 여기서 메시지란 “전시가 표현하고 있는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인 순환들, 그리고 그 안에 잡힐 듯 안 잡힐 듯 언어로는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로 해석된다. 이러한 메시지를 “애니메이션이란 예술의 확장성”을 토대로 만든 결과물이 이번 전시다. “솔직한 느낌에 따라 전시 관람의 경험을 각자의 이야기로 만들면 좋겠단 욕심”이 에릭 오 감독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전시를 모두 관람하고 건물 지하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면 제주의 울창한 숲이 눈앞에 펼쳐지고 맑은 새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하 유적지를 벗어나 맞이한 현실의 이미지는 왠지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며, 전시의 감흥을 더욱더 크게 돋구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여운을 느끼다 보면 새소리가 어딘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아주 일정하게 들려온다는 것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전시를 건물 내부뿐 아니라 제주의 자연 바깥까지 연결하려는 에릭 오 감독의 속셈이었다. 한편 '하우스 오브 레퓨즈(House of Refuse)'는 지난 4월25일 제주 애월에 개관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현재 미디어 전시장을 비롯한 카페 및 빈티지 장난감 숍이 운영되고 있다. 이후 의류 편집숍, 예술영화관 등 다양한 문화공간과 함께 전시, 음악 페스티벌, 영화제 등의 이벤트도 진행할 예정이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혼란으로 걸어 들어가기, 넷플릭스 시리즈 <베이비 레인디어>

‘미쳤다’는 말이 좋거나 훌륭한 느낌을 대리하는 속어처럼 쓰이기 시작한 시대에 <베이비 레인디어>는 적확한 수식어를 빼앗겨 억울할 법한 시리즈다. 4만1천여통의 이메일과 350시간 분량의 음성 메일을 보내고 라이브 공연의 훼방을 놓는 걸로도 모자라 부모까지 협박한 여자가 경찰의 제지로 마침내 인생에서 사라진 순간. 코미디언 도니(리처드 개드)는 삶에 “이상하고 섬뜩한 침묵”이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스토커 마사(제시카 거닝)의 부재에 “극심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그는 산더미 같은 음성 메시지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폴더로 정리(특히 ‘칭찬 폴더’가 유용하다)하는가 하면, 그녀의 사진을 들고 자위하기에 이른다. <베이비 레인디어>를 보는 사람은 번번이 포식자의 먹잇감을 자처하는 주인공을 답답해하는 사람과 도니를 부정할 수만은 없는 심정으로 모종의 거울치료에 동참하는 이들로 나뉜다. 어리석은 주인공이 필요 이상으로 수난받는 서사의 대부분이 작가의 악취미이기 이전에 게으름이라고 믿는 나는 전자로 남길 바랐으나 4화 무렵 참패했다. 경찰서 신고 접수대에 선 도니가 마사 스콧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떠올려서다. 왜 이제야 신고했느냐는 시답잖은 질문 하나가 그를 수년 전에 당한 성폭행의 기억으로 침수시킨다. 4화에서 다시 첫 에피소드의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온 시점에 인간 도니 던도 자신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자신의 코미디 영웅 중 하나인 50대의 남성 작가 대리언에게 직업적 희망을 거래물로 두고 당한 성폭행, 전 여자 친구와의 무력한 이별, 트랜스젠더와 공개 연애를 꺼리는 마음, 가톨릭교회 출신의 양성애자 아버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기, 더 큰 무대와 더 나은 관중을 향한 환상, 기타 등등등….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도니의 목소리를 빌려 재구성한 1989년생 코미디언 리처드 개드의 실제 경험담이다. 별다른 홍보도 없이 공개 한달 만에 6천만 시청 조회수를 기록, 곧 <기묘한 이야기> <웬즈데이> 등이 오른 넷플릭스 전세계 톱10 시리즈 대열에 합류할 전망인 <베이비 레인디어>에 관해 유수 일간지뿐 아니라 각종 심리학 단체가 신나게 칼럼을 발표하고 있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형편없는 코미디언으로 묘사되는 시절의 도니가 청중을 웃길 수 있었던 몇 안되는 한마디가 “전 여자 친구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미워하는 일”인 것처럼, 자기혐오는 동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테마다. 삶에 불행의 반복적 패턴을 그려내는 자질에 대해서라면 누구나 자신의 전문가이고, 리처드 개드의 경우 인생을 서사화하려는 극작가적 본능까지 결합해 한층 괴로운 울림을 자아낸다(그는 훌륭한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핵심 역량은 글쓰기라고 첨언한다). 스스로가 미쳤다는 걸 너무 잘 알고 그것을 기막히게 서술하는 화자의 목소리라니. 그런 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스토커 마사)는 내가 잃은 모든 것들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해줬다.” “그(강간범 대리언)가 내게 준 자신감, 가치를 인정받은 느낌, 언젠간 내 삶이 어딘가로 이어질지 모른단 희망이 그리웠다.” 말하자면 비극 <베이비 레인디어>의 중핵은 화자의 하나뿐인 목소리다. 리처드 개드는 자신의 분신인 도니가 폭력의 징후로 수렴되는 인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자아의 소유자이기를 원한다. 혼돈의 내러티브에 응집력을 불어넣는 리처드 개드의 보이스오버는 얼핏 무분별해 보이지만 자전적 경험을 엄격하게 통제해 추출한 결과물로, 비비언 고닉을 위시한 20세기 후반의 훌륭한 회고록 작가들이 내세운 서사적 페르소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상처투성이 인간을 만든 두개의 기원- 성폭력과 스토킹- 이 현실에서는 결코 피해 당사자의 성향이나 특질 문제와 결부되어선 안된다는 점도 이 드라마의 위험한 희소성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베이비 레인디어>가 일으킨 감정적 반향이라면, 공개일(4월11일) 이후 한달이 지나 격화된 사회적 후폭풍은 따로 있다. 지난 5월8일,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이 운영하는 유튜브 토크쇼 <피어스 모건 언센서드>(Piers Morgan Uncensored)에 마사 스콧의 모델이 된 58살의 스코틀랜드 여성 피오나 하비가 출연한 것이다. 그는 한때 “최대 6개의 이메일 주소와 4개의 전화기를 가지고 각기 다른 사람에게 사용했다”는 점을 시인함으로써 <베이비 레인디어>를 사로잡은 뜻밖의 타이포그래피 “iPhone에서 보냄”에 힘을 실었다. 한편 하비는 리처드 개드의 스토킹 혐의로 법정에 서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며 “리처드 개드는 나의 불행으로 돈을 버는 최고의 여성혐오자”라고 맹비난했다. 개드가 실존 인물이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하도록 위장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해도, 첫 번째 에피소드 오프닝에서 나오는 문구, “이것은 실화입니다”가 결정적인 분쟁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스토킹의 스토킹’ 문제도 있다. 작품에 과몰입한 인터넷 탐정단이 개드의 SNS를 뒤져 일찌감치 하비를 아우팅하고 협박 메일을 보냈으며, 모 방송국 프로듀서를 실제 성폭행 가해자로 무분별하게 지목하는 바람에 개드는 부리나케 사실을 바로잡는 성명서를 내야 했다. <베이비 레인디어>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리처드 개드는 자기 서사를 말하는 데 용기를 낸 피해자였는데 <베이비 레인디어>가 이토록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지금은 강자로도 불린다. 그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까지이고 예술가로서의 윤리강령은 어느 선에서 정리될 수 있을까? 아니, 정리될 수 있기는 한 걸까? 개드는 LA에서 열린 GV에서 스스로 마사 캐릭터에 “독하게 이입”했으며 자신의 페르소나가 스토커를 거의 사랑하도록 만든 것을 강조했지만, 무기력한 주인공을 동원해 자연스럽게 우회한 재현의 몇몇 맹점도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다. 뉴미디어 법안 개정을 앞둔 영국에선 지난주 넷플릭스 정책 책임자 벤자민 킴이 ‘프라이버시 및 스토리텔링 윤리에 관한 의회 청문회’에 참석해 일반인 당사자의 신원 보호를 위한 조치를 충분히 취하지 않은 점을 해명하기도 했다. 극 중 모든 세부사항이 윤리적 결백과는 이보다 더 거리가 멀 수 없는, 그러니까 ‘미쳐버린’ 창작물이 스토리텔링의 윤리에 관한 이보다 더 거셀 수 없는 후폭풍을 낳는 풍경은 역사적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스토킹을 지켜보는 것처럼 정말이지 혼란스럽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쏟아지는 영화·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유독 치우치게 사랑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분석합니다. 편애와 애착, 새벽까지 이어진 과몰입으로 생겨난 마음의 기울기가 때로 정확한 모서리에 가닿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