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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흐릿함에 관하여, <여행자의 필요>

<여행자의 필요>에선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포착한 풍경 장면이 삽입된다. 한국에 거주하는 프랑스 여자 이리스(이자벨 위페르)가 하루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짧은 연대기를 따라가면서 영화는 인물들이 헤어지는 구간마다 자연을 담아낸 무인의 숏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 삽입된 풍경은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아 미묘하게 윤곽이 뭉개진 형태로 나타난다. 이 영화의 풍경은 흐릿하고, 흐릿한 풍경의 삽입은 세 차례에 걸쳐 반복된다. 특정한 순간에 초점이 맞지 않는 장면을 활용하는 선택은 거의 모든 장면을 초점이 나간 화면으로 구성한 <물안에서>의 일관된 구성보다 세밀한 의구심을 건넨다. 영화를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되묻자면, 왜 하필 풍경을 담은 장면만 흐릿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걸까? 흐릿한 풍경의 숏은 영화의 전체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친다거나 독립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간직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특정 인물의 시점을 대리하는 것도 아니고 앞뒤 장면과 접속하며 일정한 의미론적 체계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건네는 시청각적 체험에 속한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사소한 장면이다. 풍경을 담은 흐릿한 화면은 문자 그대로 <여행자의 필요>라는 전체에 끼어 있는 이질적이고 불투명한 얼룩이다. 이 영화를 ‘봤다’는 경험을 전제로 하는 자리에서 세 차례 반복되는 흐릿한 장면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시각적인 오류와 불확실함의 질감을 품은 이 장면은 영화를 보는 시각을 스치듯 훼손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작은 흔들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명시적인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숏의 물질성(‘흐릿함’)이 영화에 속해 있고, 관객의 감각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흐릿함은 영화의 한 부분이자 부서진 파편으로 스크린에 출현했다. 의미의 압력과 구성적 화면의 바깥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이미지의 능력, 대상을 오직 외양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시각화의 능력이 바로 홍상수 영화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말한 자크 오몽의 지적처럼, <여행자의 필요>는 우리 눈에 흐릿함이라는 이미지의 외양을 직시하게 한다. 전면과 배경 세 번의 흐릿한 풍경은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얼굴과 접속하는 전제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 성국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이리스를 찾아 나선다. 그의 발걸음 앞에 현실인지 꿈인지, 과거인지 상상인지 분간되지 않는 모호한 산책이 펼쳐진다. 그리고 마침내, 초점이 흐려진 클로즈업 숏 위로 숲속에서 잠든 이리스의 얼굴이 가득 담긴다. 홍상수는 범용하고 보편적인 사물의 세부를 관측해 특수한 시적 감각을 세공한다(홍상수 영화의 이런 성질을 예리하게 간파한 관측자는 클레어 드니일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오리배를 두고 드니는 “호수에서 배를 탄다는 것은 하늘색 사과나무처럼 생긴 커다란 패들 보트에 갇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홍상수의 시각을 통과한 화면 위에서 아무 데서나 보이는 오리배는 호수를 가득 채우는 닫힌 사과나무로 변형된다). 드니의 용법을 빌리면 이리스의 클로즈업은 술에 취해 바위 위에서 잠든 여성의 얼굴이지만, 또한 풍경 장면의 흐릿한 빈칸에 채워져 비로소 영화가 직면하게 된 스크린의 얼굴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여행자의 필요>는 이 얼굴에 도착하는 영화다. 초점이 나간 흐릿한 풍경과 흐릿한 얼굴. 풍경은 카메라에서 멀리 떨어진 배경에 있고 이리스의 얼굴은 카메라와 가장 가까운 전면에 있다. 이리스가 한국에 머문 지 오래된 정착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여행자’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이 영화가 카메라의 초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풍경에서부터 가장 가까이 근접한 얼굴에 이르는 과정을 주시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여행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통과하면서 발생한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홍상수는 화면의 전면과 후면을 잘라낸다. 이 시각적 구분을 제일 아름다운 구도로 담아낸 장면은 이리스와 그녀의 수강생인 원주(이혜영)와 해순(권해효)이 나란히 서서 윤동주의 <서시>가 적힌 비석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눈앞에 보이는 전경에 인물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배경에는 시가 적힌 커다란 돌이 놓여 있다. 화면 중앙에 세 사람보다 큰 비석이 보인다. 한쪽에서 해순이 한국어로 시를 읽으면 다른 한쪽에서 이리스는 영어로 번역된 시를 낭독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사물과 시선과 목소리와 시간이 하나의 구도를 감싸며 화면을 지속한다. 소리와 몸짓의 점묘법을 형성하는 이 장면은 놀라운 감각적 기쁨으로 채워져 있다. 뒷모습의, 사물의, 시선의, 목소리의 아름다움은 같은 구도에 담겨 있지만, 각각이 분리되어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여행자의 필요>에서 평면적 화면은 서로 다른 높낮이와 각도로 분할된다. 홍상수는 분리된 두 눈의 시각으로 화면을 관측된다. 두 눈의 시각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상투적으로 보이던 사물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품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내가 모르는 현상으로 뒤바뀐다. 윤곽이 흐트러진 불투명한 풍경은 하나의 명확한 얼굴과 맞물린다. 이리스는 일관된 평면처럼 보이는 세계(‘숏’)에 새겨진 분리를 직시하도록 이끈다. “나는 이리스가 마녀나 요정같이 느껴진다. 인국은 물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실험을 하도록 이끄는 존재니까”라는 이자벨 위페르의 인상적인 해석은 <여행자의 필요>가 형성하는 화면의 윤곽에도 새겨진다. 이리스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비석과 기념비에 적힌 문장은 어떤 내용인가요? 그녀는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표면적인 감정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기분을 끄집어낸다. 이리스는 불투명한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전환하고, 이 과정에서 영화는 분리된 구역을 인지한다. 분리란 이런 것이다. 인물이 머무는 전경은 무지와 불확실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배경에는 언어의 진실과 시의 아름다움이 기록되어 있다. 전경은 의심하고, 배경은 견고하다. 현재는 모호하고, 과거의 표지는 선명하다. 하지만 홍상수의 관찰은 분리된 영역의 위계를 세우고 더 우월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여행자의 필요>는 그 사이를 탐색하는 지각의 형태를 가늠할 뿐이다. 너무 빠른, 너무 느린 <씨네21> 1455호에서 김예솔비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는 너무 빨리 사라진다. 수강생들의 악기 연주가 시작하면 자리를 피하고, 과외비를 받자마자 시야에서 사라지며, 성국의 엄마가 집에 찾아왔을 때도 순식간에 문밖으로 나간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사람들은 황당한 말투로 말한다. “벌써 간 거야?” 이리스는 터무니없을 만큼 빠르다. 과외비로 하루 만에 월세 절반을 벌고 해가 지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녀의 속도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기록한 <여행자의 필요>의 여정에 현기증이 일어날 듯한 리듬을 부여한다. 김예솔비 평론가의 분석을 빌리면, “이리스의 동선은 ‘하루’라는 연속성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갑작스러운 사라짐과 너무 이른 출현은 시간을 이상한 방식으로 압축시키거나 벌려놓으면서 시공간을 불균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리스는 너무 늦게 나타난다. 성국은 아무리 기다려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이리스를 찾아 나선다. 그녀를 찾아 나서면서 성국이 이리스를 처음 봤다고 설명한 상황(“공원 의자에 앉아서 피리를 부는데 너무 못 부는 거예요.”)은 성국의 말보다 뒤늦게 화면에 도착한다. 옆모습과 뒷모습의 연쇄로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이리스의 클로즈업된 얼굴이 화면 정중앙에 주어지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다. 그녀는 너무 빠르게 사라지고, 너무 느리게 도착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리스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외면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영화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는 첫 번째 수강생의 상처 난 손에 새로 돋아나는 살을 바라보지 않으려 하지만, 닫힌 성국의 문 너머로 끓고 있는 찌개를 상상한다. 이리스의 감각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고, 보이는 것을 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게다가 이리스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가 하루 동안 걸어 다니며 만날 만큼 가까이 있지만, 잠시 집을 나간 그녀를 찾는 데 한참 걸릴 만큼 멀리 있다. 너무 빠르면서 느리다.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가까우면서 멀다. 다시 말해, 이리스는 <여행자의 필요>의 화면이 설정하는 전경과 배경의 충돌을 몸의 감각적 신호로 증언하는 자다. 영화는 눈앞에 있는 대상을 관찰하면서 멀리 떨어진 배경을 포착할 수 있다. 무심한 기계장치로서의 카메라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풍경을 끌어들이는 이중의 역량을 갖춘다. <여행자의 필요>가 제공한 영화의 마지막 장소에서 이리스의 얼굴은 화면 중앙을 차지한다. 그녀의 얼굴을 둘러싸는 프레임 가장자리에 비어 있는 풍경이 자리 잡고 있다. 텅 빈 하늘 위에 거대한 돌처럼 솟아오른 하나의 얼굴, 무엇도 지시하지 않으면서 프레임 전체를 채우는 얼굴. 여기서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시각 아래서 전경과 배경이 일으킨 하나의 픽션이 서로의 윤곽을 흐트러트리며 끌어안는다. ‘0’의 얼굴 이리스는 성국과 접지 매트를 밟으며 수치가 ‘0’에 근접하지만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과 그 물건이 지시하는 상태가 영화에 깃드는 의미심장한 은유다. <여행자의 필요>는 90분의 상영시간 동안 이리스가 말하는 상태의 긴장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기 때문이다. 0에 근접하지만 도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리스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습득하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떤 명확한 진실도 알 수 없다. 카메라는 화면 안에 전경과 배경을 배치하지만, 초점이 나간 흐릿한 시각은 명확한 구분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과 저 너머로 관측되는 것 사이의 긴장으로 채워진 이리스의 얼굴이 카메라 앞의 전경에 도착한다. 이 자리에 홍상수가 구축한 영화적 이미지의 영도가 마련되어 있다. 이리스는 마음속 내밀한 감정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첩에 프랑스어 문장을 적는다. 돌과 벽에는 오래된 시들이 적혀 있다. 빈 종이나 돌 위에 글씨가 채워지는 것처럼, 이리스의 얼굴은 불투명한 얼룩으로 남겨져 있던 흐릿한 풍경 숏의 표면에 도착한다. 하나의 풍경이 하나의 얼굴에 도착하는 데 하루의 시간이 걸린다. 이것이 홍상수 영화의 물리적 규칙이다. 그러니 이제는 <여행자의 필요>가 세 차례 반복적으로 삽입한 풍경 숏을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화면으로 보여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시각적 기호라기보다는 빈칸의 상태를 지시하는 화면이기 때문이다. 아직 글씨가 적히지 않은 수첩의 종이나 돌처럼 비워진 숏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의 풍경 장면은 엄밀히 말하면 ‘풍경’을 찍었다고 말할 수 없는 화면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특정한 대상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화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경에 마련된 자리를 비워둔 화면이기 때문이다. 비워짐은 그러나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이 불투명한 화면은 숏을 점유하게 될 임시적인 체류자를 기다린다. 보이지 않는 장면의 상태는 눈에 비치는 존재의 시간을 암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행자의 필요>의 흐릿한 화면은 하나의 스크린이 된다. 세 차례 반복된 빈칸의 숏과 비로소 도착한 얼굴의 리버스숏. <여행자의 필요>는 바로 이 느슨한 몽타주를 실행하는 영화다. 카메라가 관측한 배경의 숏과 이리스의 얼굴로 채워진 흐릿한 전경의 숏은 가장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보는 영화의 원소다. 이 장면들의 몽타주가 성립하는 순간에 세계는 분리되지 않고 픽션은 종결된다. 하지만 그것은 투명한 끝이 아니다. <여행자의 필요>가 비어 있는 불투명한 풍경을 지나쳐 도착한 곳은 이리스의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얼굴이다. 숏에 깃든 물질성이 수행하는 역할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의미를 명확하게 정립하는 것만이 아니다. 화면의 물질성은 그 반대로 영화의 외형을 한없이 불투명하고 추상적으로 뒤틀기도 한다. 프레임 전경에 마련된 빈칸에 비로소 도착한 얼굴은 여전히 흐릿한 외형으로 주어진다. 영화는 프레임을 덫으로 삼아 카메라에 비친 피사체의 형체를 겉면에 새긴다. 그러나 <여행자의 필요>는 카메라 앞에 피사체의 형체가 분명히 각인되는 것을 끝까지 지연한다. 영화는 무한히 잠재한 형상의 흐릿한 외형을 간직한다. 이미지라는 시각적 틀이 불가피한 영화의 조건이자 구속이라면, 이미지로 각인되지 않는 불투명한 외형으로 촉발되고 끝나는 영화적 픽션은 가능할까? <여행자의 필요>는 이 질문에 응답한다. 홍상수는 더욱 급진적으로 ‘영화’라는 물질적 덩어리와 접촉하는 중이다.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조각과 함께 찍기 - 비스콘티, 로셀리니, 고다르의 경우

영화는 운동의 예술이다. 영화는 운동을 재현하는 권능과 운동의 중단을 경험하게 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영화 속 시간은 생략되고, 늘어나며, 분기와 도약 속에 되돌아온다. 말하자면 영화는 시간 경험의 촉매를 제공한다. 어떤 작품들은 역사적 시간이나 시간의 지각을 탐구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정지상태의 달인인 조각을 향해 렌즈를 겨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대작 <레오파드>(1963)의 조각도 그중 하나다. <레오파드>는 가문의 내부, 개인의 내면 안에서부터 쇠락하는 세계 혹은 시대를 묘사한다. 비스콘티의 카메라는 우선 대저택의 영지 안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가족 미사가 열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원작 소설에서 영지는 무성하게 자라, 뒤엉키고 썩어가는 식물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비스콘티가 찍은 오프닝에서 영지 입구에는 대저택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여러 개의 토르소 조각상이 부산한 혁명의 기운과 건조한 바람 아래 요동 없이 도열해 있다. 단단한 돌과 거대한 조각은 인간사에 관한 무심함 또는 영원한 영광을 손쉽게 장담한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무너진 돌무더기는 인간의 무력과 시간의 무참함을 어렵지 않게 표현한다. 비스콘티가 <레오파드>에 이어 만든 <희미한 곰별자리>(1965)에서도 조각은 시간이 야기하는 상실을 환기하는 매개체다. 어쩌면 고향 대저택을 찾아가는 한 커플의 이야기인 <희미한 곰별자리>는 비스콘티가 다시 만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1954)이라고 할 만하다. <이탈리아 여행>은 심리적 위기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조이스 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고고학 박물관의 조각상이나 폼페이 유적지의 네거티브 석고 캐스팅을 통해 영화적 운동과 정지, 삶과 죽음을 언급하는 가장 빼어난 작품이 아닌가. 로라 멀비의 표현을 빌리면, 조이스 부인이 이 조각 속에서 소스라치며 목격한 것은 ‘지금’을 강렬하게 연장하는 생생한 운동감이 아니라 운동이 사라진 시간의 각인, 정지상태 속에서 반향하고 있는 지나간 시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폼페이 석고 캐스팅은 더 한층 본질적인 방식으로 영화 미디어 혹은 예술의 본성을 환기한다. 화산 폭발로 죽은 자의 시신이 만든 구멍에 석고를 부어 만든 조각은 죽은 자와의 접촉의 산물이자 접촉의 상실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없는 것과의 접촉을 증언하고, 접촉했던 것이 이제 여기 없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예술- 영화 또는 영화와 여타 예술의 만남- 은 하나로 가지런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시대착오(anachronism)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비스콘티의 대작 <레오파드>가 로마에서 개봉되어 상영되었던 바로 그해에 고다르는 로마와 카프리에 있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일정 부분 참조하고 있는 <경멸>(1963)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경멸>은 프리츠 랑이 만든 러시 필름 <오디세이아>의 상영과 함께 시작된다. 제작자, 비서, 영화감독, 극작가 부부가 모인 치네치타의 영사실 스크린 위로 파란 하늘과 율리시스, 미네르바, 넵튠 조각의 백색 두상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주지하듯 미네르바는 율리시스를 보호하는 신이고, 넵튠은 율리시스의 적대자다. 화면 속 넵튠과 같은 자세로 필름을 집어던지는 제작자는 넵튠을 구체화하는 인간이며, 프리츠 랑이 본인을 연기하는 감독은 현대의 호메로스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미네르바를 구체화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수잔 리안드라-귀그(Suzanne Liandrat-Guigues)가 지적하듯 미네르바의 현대적 상관물은 영화다. 영사실 영사 장치와 영사 기사를 담은 역숏이 미네르바와 율리시스를 보여주는 스크린숏 사이에 배치된 점, 미네르바 조각의 90도 회전이 영화 오프닝 속 라울 쿠타르의 카메라 90도 패닝을 반복한다는 점, 고다르가 시나리오에서 <오디세이아>를 제작하는 극 중 영화사 이름을 미네르바로 적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로마시대 조각상을 보여주었던 로베르토 로셀리니나 조각을 통해 귀족적 권위의 세계를 지시했던 비스콘티와 달리 장뤼크 고다르는 싸구려 석고 조각상을 사용하여 신화적 인물을 표현한다. 고다르는 초기작 <네 멋대로 해라>(1960), <미치광이 피에로>(1965) 등에서 예술작품을 인용할 때 대체로 박물관의 진품이 아닌 복제 이미지를 사용해왔다. 고다르는 예술을 소비사회의 일부를 구성하는 상품으로 재현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지위를 비판적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고다르는 영화라는 상품을 이중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싸구려 미네르바 조각을 사용했던 것일까? 아니면 영화는 가짜이고 거짓말이지만 <경멸>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로, 우리의 욕망대로 세계를 볼 수 있게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대항해시기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주민들이 희생제의의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스크를 신성한 사물로 숭배하는 것을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신들이 만든 이것이 왜 신성하다는 것이지요?” 포르투갈인들은 신성한 이미지는 인간이 제작하지 않은 이미지(acheiropoiete)여야 한다는 가톨릭문화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우상에 경멸조로 오늘날 페티시즘(fetish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이름을 붙였다. 포루투갈어로 페티시는 ‘만들다’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동사(feito)의 과거분사형(feitiço)으로 형태, 인공물, 제작물, 마법에 걸린 것을 뜻한다. 18세기에 이 낱말에는 환상의 사물이라는 뜻이 더해지고, 19세기가 되면 부분 욕망이라는 정신분석학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브뤼노 라투르는 포르투갈인들이 근대적 사실주의의 맹아에 사로잡혀 이 사물에 신성을 부여하는 아프리카인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사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고 설명한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인간이 사물의 성격을 의도적으로 바꿀 때, 인간 행위와 노동의 성격 역시 바뀐다는 점이다. 의미를 만들고 사랑할 대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행위는 단순하게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던 물리적인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 기계적 제작 행위와 같지 않다. <경멸> 속 미네르바 조각상은 아프리카인들이 숭배했던 페티시, 우상(idolum, 신을 형상화한 돌조각)과 같은 논리에 속하는 사물이다. 인간이 만든 신의 형상이자, 고대 조각을 흉내낸 조각이며, 이미지 속 이미지다. 그러나 영화 제작자는 바로 그 우상 제작을 통해 제작 행위의 ‘의미’를 생산할 가능성을 갖는다. 로셀리니와 비스콘티처럼 고다르 역시 여러 예술과 대화하고 참조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조각 또는 조각의 논리다. <경멸> 속 미네르바 조각상은 영화산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자 열렬한 영화 ‘이미지 숭배’ 작업인 고다르의 <영화사> 제작을 예견하게 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는 오래전부터 기꺼이 다른 미디어와 예술과 대화하고 다투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오직 영화만이!”라고 말하는 대신 영화가 모방하는 예술과 경쟁하고, 전염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인터미디어성의 사례에 관하여 그리고 몰래, 보란 듯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오래전부터, 새롭게 뒤섞고 뒤섞이는 영화와 예술, 형식과 매체, 장소 사이에서 영화의 계보를 발견하기.

[기획] 솔로 앨범 《관능소설》 발매한 김윤아 ① 미치도록 아름다운 자극

‘미치도록 아름다운 자극.’ 이는 싱어송라이터 김윤아가 인터뷰 중 본인을 감화하는 예술의 공통점을 요약한 문장이지만, 그의 신보 《관능소설》에 대한 20자평으로도 손색없는 정리다. 김윤아가 자우림의 보컬이 아닌 솔로 뮤지션으로서 8년 만에 컴백했다. 김윤아의 5집 《관능소설》은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사랑 노래로 충만한 앨범이다. 김윤아는 창작을 위해 수많은 멜로영화를 스스로에게 끝없이 쏟아부으며 대상 없는 연애에 젖어갔고, 덕분에 작정한 사랑 노래 모음집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김윤아는 ‘관능’의 사전 뜻풀이 중 첫 번째 정의를 꼭 짚고 넘어간다. “생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기‘관’의 기‘능’.” 그러므로 《관능소설》은 김윤아가 여성이자 예술가이며 시민으로서 생의 한가운데를 부단히 살며 날갯짓하는 여행기이기도 하다. 김윤아를 만나 《관능소설》과 앨범에 함께 담긴 에세이집 <관념산문>의 작업기를 물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를 존재하게 한 음악과 영화에 관한 담소도 나누었다. 인터뷰 곳곳엔 《관능소설》에 영향을 준 영화에 대한 김윤아의 코멘터리가 피처링돼 있다. - 2001년 발매한 솔로 1집 'Shadow of Your Smile'의 부클릿에 160페이지의 에세이를 실은 적 있다. 당시 소속사였던 난장뮤직에서 ‘김윤아가 솔로 앨범을 내고 자우림을 떠날 것이다’라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원동력으로 에세이를 함께 제안했다고. 근래 자우림의 크리스마스 앨범 'MERRY SPOOKY X-MAS'엔 직접 잔혹동화를 써 첨부했다. 이번 '관능소설'에도 <관념산문>이란 제목의 에세이가 수록돼 있다. = 음악에 관한 부가 설명을 하고 싶었다. 곡을 만들었을 때 나의 심상을 적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했다. 곡별 코멘터리는 어찌 보면 촌스러운 방법이다. 창작자가 창작물을 던져놓고 거기에 토를 달거나 밑줄을 쳐가며 ‘A는 B의 은유다’라고 설명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리고 앨범 제목인 《관능소설》이 함유한 뜨겁고 에로틱한 느낌이 있지 않나. 이에 대비되는 차가운 느낌의 글이 들어가면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지 디자인을 보면 <관념산문>과 《관능소설》을 나타내는 무늬가 다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느낌이랄까. (웃음) - 산문의 제목을 <관념산문>으로 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관능소설》과 음운, 시각적 유사성을 맞춘 제목으로 보이긴 하다. = 생각을 따라간 글이니까. <관념산문> 속 <검고 깊은 바닷속의 마법사>에 노인이 노래를 하는 단락이 있지 않나. 그 단락은 다음 솔로 6집의 테마로 사용할 예정이다. 다음 앨범에서는 인생을 테마로 이야기하고 싶다. - 《관능소설》의 재킷을 포함해 가사에 꽃을 활용한 은유가 많은데. = 꽃은 결국 식물의 생식기 아닌가. 관능의 사전적 정의와 통하는, 기능이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꽃이 어김없이 필요했다. 또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정념을 시사할 수 있는 소재다. 덧없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표현하기에 꽃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 - 꽃만큼 바람도 가사에 자주 등장한다. 바람과 꽃이 동시에 등장하는 노래 몇 있고. = 사실 바람 말고 공기에 관해 표현할 수 있는 게 잘 없다. 평생 나의 숙제다. 바람 대신 다른 말을 쓰면 너무… 이(異)세계 전투 신에 나올 법한 단어들이 나온다. 오타쿠 같아진다. (웃음) <헤어질 결심> “이 작품의 수학적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헤어질 결심>엔 퍼즐이 완벽한 각본과 말러의 음악을 포함해 계산된 아름다움이 있다. 무엇보다 컬트가 있고, 피와 사랑이 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수영장에서 호신(박용우)의 시신을 발견하는 신이다. 피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웃음) 탕웨이 배우가 중국어로 말하는 모든 대사도 아름답다.”

[기획] 솔로 앨범 《관능소설》 발매한 김윤아 ② 갈망이 낳은 글과 노래

- 2019년 세상의 모든 사랑을 테마로 한 <사랑의 형태>라는 콘서트를 연 적 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비롯해 사랑에 관한 여러 텍스트를 노래와 엮은 공연이었다. 이 공연이 사랑 노래를 엮은 《관능소설》의 탄생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을까. = 사랑 노래를 채우기로 한 건 2010년 발매한 솔로 3집 《315360》부터다. 돌고 돌아 지금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기 좋은 때가 됐다. 거꾸로 《관능소설》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갈망이 <사랑의 형태> 공연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2010년대 후반은 자우림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터라 자우림에 집중하는 시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자우림이 3인 체제가 된 후 나온 첫 앨범 10집 《자우림》(2018)은 굉장히 중요한 앨범이었다. 그리고 자우림의 11집 《영원한 사랑》(2021)이 나왔다. 요컨대 견고한 우리의 자우림을 보이기 위한 몇번의 쐐기가 필요했다. 또 자우림 결성 25주년을 맞아 여러 활동이 이어졌다. 계속 자우림과 일하는 동안 솔로 프로젝트는 진행하기 어려웠다. <사랑의 형태> 콘서트를 계기로 김윤아 스타일의 콘서트를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의 콘서트는 어떤 형식으로 해나갈지 고민이다.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데 다음 김윤아 콘서트는 술을 한잔 곁들이는 공연을 계획 중이다. 김윤아의 앨범과 공연인데 술이 빠질 수 없지 않나. 객석에서 고주망태가 되면 곤란하니 제한된 양의 음주가 가능한 공연장과 공연을 열고자 한다. 그땐 내 음악은 물론 스탠더드한 팝을 세트리스트에 포함하지 않을까. - <관념산문>의 첫 챕터에서 여행하는 스스로를 ‘시간 여행자’라 칭한 게 인상적이었다. 왜 공간 여행자가 아닌 시간 여행자인가. = 나라별로 시차가 다르고 경도가 바뀌니까. “우리는 중도에 있다. (중략) 우리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화살표이며 (후략)”라는 프롤로그가 있지 않나. 2년 전 즈음 어떤 거리를 걷다 내가 지금 중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쓴 문장이다. 그래서 어디를 향하지 않아도 좋고, 무언가에 집착할 필요도 없으니 나는 참 자유롭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관찰이 《관능소설》의 시작이었다. 이탈리아서 여행하며 앨범 사진을 찍고 산문의 영감을 얻어오는 기획도 그날이 아니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은 당시 깨달음에 바치는 여행이었다. 새 깨달음으로 새로 태어난 내게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 《Shadow of Your Smile》에 이어 <관념산문>에도 죽음을 소재로 한 글이 다수 포함했다. = 글에 쓴 대로 전쟁이 벌어진 장소에 가거나 숙소 지하에 죽음의 유물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꽃 이야기로 돌아가면,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다. 같은 꽃이 1년 내내 피어 있으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죽음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상념이다. 우리가 중도에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화살표라면 가장 큰 방향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죽은 사람이 많았다. 단순히 죽음의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인식이 별스럽지 않다. - <펜과 음표, 너의 작업실>엔 신원 미상의 음악가의 새벽 작업기가 묘사돼 있다. 새벽녘 작업실에서 일에 몰두하는 김윤아의 모습은 어떤가. = 잘 준비를 다 마치고 작업에 들어간다. 정말 잠들지 않으면 안될 한계까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보통 잠옷을 입고 안경을 쓰고 멋대로 머리를 동여맨다. 다행히 방에서 야경이 잘 보여 통창을 앞에 두고 마감을 시작한다. 마감 노동자의 풍경이 다 비슷하지 않나. 다만 마감이 닥쳤을 땐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웃음) - 언제나 타이틀곡을 고르는 센스가 0에 수렴한다고 밝혔다. 이번 앨범은 <종언>과 <장밋빛 인생>을 더블 타이틀곡으로 정했는데. = 여전히 모르겠더라. 그래서 차트에 오르는 음악을 주로 듣는 회사 분들에게 모니터링을 받았다. 그런데 <종언>과 <장밋빛 인생>의 지지도가 조정의 여지 없이 반반으로 나왔다. 두곡의 분위기도 다르고 이젠 후속곡이라는 활동 개념도 사라졌으니 두곡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사실 <장밋빛 인생>을 만들 땐 혹시 이 곡이 타이틀곡이 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들어보니 또 아닌 것 같고…. (웃음) - <종언>은 오래전 만들어진 멜로디에 가사가 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장밋빛 인생>은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 = 차를 몰고 발레 수업을 가던 중 만든 노래다. 사람이 잘 아는 길을 운전할 때나 대형 쇼핑몰에서 카트를 몰 때 뇌의 알파파가 감응한다고 하지 않나. 그럴 때 편안하고 명상하는 듯한 상태가 된다. 악상이 떠오르면 바로 휴대폰에 녹음을 한다. 그날도 지금의 가사와는 조금 다른 ‘너의 입술이 나의 낮과 밤을 붉게 물들이고’가 알파파에 의해 저절로 나왔다. 얼른 녹음해둔 뒤 집에 와 잠옷으로 갈아입고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처음 데모까지만 해도 “장밋빛 인생 그대와 밟는 모든 스텝이”로 시작하는 사비(후렴구)만 탱고 리듬이었다. 그런데 1주일 걸려 곡을 만들고 나니, 내가 편곡할 수 없는, 스케일이 큰 곡이 탄생했다. 하여 여러 탱고 전문가를 떠올렸다. 2집 《유리가면》에서 협업한 호르헤 칼란드렐리 선생이 떠올랐지만, 곡 자체가 앨범 작업 후반에 나와서 그가 거주 중인 미국에 다녀오기엔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2집 때는 내가 편곡 현장에 갈 수 없어 아쉬웠거든. 이번만은 내가 직접 가 레코딩 현장을 컨트롤하고 싶어 여러 국내외 탱고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지난해 라이브 앨범에 프랑스 곡 <행복한 사랑은 없네>를 넣은 기억을 바탕으로 프랑스쪽 편곡가를 후보에 놓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경험에 비추어 보면 프랑스는 작업을 의뢰했을 때 회신이 오질 않는다. 늦는 게 아니고 안 온다! 에이전시를 통해 독촉하면 그제야 담당자가 바캉스에 가 있다는 통보를 받는다. (일동 웃음) 전세계적 농담인 프랑스 공무원 이야기도 있어서 프랑스도 포기했다. 그러다 지금 편곡자인 사이토 네코와 연이 닿았다. 작업을 위해 일본에 갔다. 일본 내 톱 세션들이 사이토 선생의 호출로 모였다. 처음 본 세션들과 오래 호흡을 맞춘 밴드처럼 합을 맞추어야 하는 작업이었고, 심지어 <장밋빛 인생>과 <체취> 두곡의 녹음을 하루 안에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총보(합주 시 악기별로 된 여러 악보를 한데 모아 한눈에 전체의 곡을 볼 수 있게 적은 악보. 편집자)만 본 상태에서 어떻게 곡이 완성될지 궁금해하며 녹음실에 들어갔다. 정말 소름 돋는 합주를 들을 수 있었다. - 가사에 사용하는 외국어가 늘 곡에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인생>의 프랑스어 가사는 왜 필요하다고 판단했나. 동명의 제목을 가진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이나 이번 앨범에 영향을 준 다수의 프랑스영화와 관련이 있을까 추측해봤다. = 장밋빛 인생(La vie rosée), 키스해줘(Embrasse-moi), 사랑해(Je t'aime), 꼭 끌어안아줘(Serre moi fort). 국어로 하면 소절이 길어지고, 영어보단 프랑스어가 음과 잘 붙는 가사였다. 무엇보다 ‘La vie rosée’는 자연스럽게 딸려나온 가사라 아무리 궁리해도 대체할 언어가 없었다. 실제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화자들이 다행히 이 표현을 오글거려하지 않았다. - <행복을 바라는 게 잘못인가요>를 만들 땐 수많은 멜로영화를 끝없이 주입해 뇌를 일시적인 가상 연애의 상태로 만든 후 작업했다고. 이전에도 이런 방식의 양적 공세를 통해 곡을 만든 적 있나. = 없다. 가끔 배우들이 연기를 마치면 배역에서 빠져나올 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이 곡을 만들 때 그랬다. 곡 작업을 마친 뒤 정신적으로 괴로워 스스로 정상이 아닌 것 같다고 토로할 정도로 힘들게 만들었다. 작업량도 감정의 강도도 쉽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 가짜 호르몬을 만들어 사랑을 느끼는 뇌를 만들었다. 더이상 가짜 사랑의 주입이 필요 없는, 곡을 만든 이후 수행하는 기술적인 과정 중 짙은 연애의 농도가 뇌 속에서 유지되다 뚝 떨어져 금단증세와 같은 괴로움이 있었다. 지금은 《관능소설》과 거리를 두는 상황이다. 어떤 앨범이든 다 만들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한동안 내 피, 땀, 눈물이 서린 작업물과 거리를 두고 시간이 더 흘러야 과거의 작업물에 놀라는 순간이 비로소 온다. - 관찰 예능프로그램이 김윤아를 소비하는 방식에 불만을 가질 때가 있다. 꼭 집안일과 살림을 하는 김윤아의 이미지를 보이려 한다. 물론 아티스트 김윤아의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겠지만 동일 경력, 연령의 유자녀 기혼 남성 아티스트라면 사생활과 관련한 질문을 덜 받을 것이고, 다른 숏에 담길 것이며 다른 에피소드를 요구받을 것이다. 결혼 이후 김윤아의 삶을 담은 <해피엔딩>은 김윤아를 보는 여러 양태에 대한 화답처럼 들리는데. = 이제는 화도 나지 않는다. (웃음) <해피엔딩>은 여성으로서 나의 경험이 온전히 담긴, 솔로 앨범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노래다. 실제로 노래의 가사처럼 설거지하며 분해서 운 적이 많았기 때문에 수많은 여성 동료들에게 바치는 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노래 중 같다는 생각도 했다. 최근 다른 인터뷰에서 아이를 키우면서도 계속 활동하는 여성으로서 여성 동지들에게 “쟤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에서 “‘쟤’가 되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그때 꼭 ‘쟤’라고 써달라고 했다. 이 노래도 마찬가지다. 자매들이 노래를 듣고 “‘쟤’도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데 나 또한 ‘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면 좋겠다. 《유리가면》 발매 당시 한 유력지에서 심지어 큰 지면을 할애해 ‘김윤아는 탱고의 유래를 알고 이 음악을 만들었나’라며 탱고의 근원에 관해 왜곡된 관점의 근거 없는 지식을 써낸 적이 있다. 탱고가 성 노동자의 음악에서 유래했는데 여자인 김윤아가 감히 그런 음악을 만들었다는 요지의 글이었다. 질문과 닿은 맥락에서 만약 내가 밴드의 남성 보컬이었다면, 밴드의 프런트맨으로 11장의 정규앨범을 내고 개인 작업물로 5장의 정규앨범을 냈다면 지금 듣는 평가보다 훨씬 우호적인 평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 하려 한다. 어떻게 되나 보려 한다. 다시 한번 “‘쟤’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의 ‘쟤’가 되고자 한다. 나는 나를 위해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내 생각은 내 음악에 들어 있다고 말하며 공고하게 끝까지 살아 있으려 한다. <데미지> “이유 없이 아름다운 영화. 또 피가 나온다. 김필씨와 듀엣한 <카멜리아>를 만들기 위해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어쩐지 지루할 것 같아 손이 가질 않았거든. 처음엔 스티븐(제러미 아이언스)과 안나(쥘리에트 비노슈)처럼 나보다 훨씬 연상의 남성과 함께 부를 곡을 만들 것을 염두에 두고 시청했다. 이 영화가 정답이었다. 가상 연애에 빠진 내 뇌가 잔잔한 바람에서 큰 태풍으로 변한 게 <데미지>를 본 순간이었다.”

[인터뷰] 매번 다르게, 신혜선답게, <그녀가 죽었다> 신혜선

세 갈래의 다른 길에서 배우 신혜선을 만난다. 한국 드라마를 애정하는 시청자에겐 <비밀의 숲>이라는 장르 사상 최고의 작품을 출세작으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코로나19라는 어려움을 겪어온 업계 종사자에겐 근 3~4년간 한국의 허리급 상업영화들을 주연으로 견인해온 배우로. 무엇보다도 20대 여성에겐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올라와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30대를 열어젖힌 여자 선배로. 2020년에 영화 <결백>과 <도굴>을, 지난해엔 <타겟>과 <용감한 시민>을 선보였던 신혜선이 또 한편의 영화를 내놓은 지금, 당신이 어떤 경로로 신혜선을 만났든 결국 길은 하나로 이어진다. <씨네21>은 <그녀가 죽었다> 개봉을 계기로 배우 신혜선이 그간 걸어온 길에 뒤늦은 동행을 요청했다. “팬들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하얀색 휴대용 선풍기를 목에 걸고 스튜디오에 들어오는 그를 본 순간부터 영화, 드라마, TV와 웹 예능프로그램에서 구축해온 명랑한 분위기와 경쾌한 발언들을 연결해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영상 필모그래피로 ‘해석된’ 신혜선이 아닌 그의 삶 자체에서 나오는 진짜 목소리는 무엇일까 더욱 궁금해졌다. <학교 2013>의 단역으로 연기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신혜선은 2017년 <비밀의 숲>과 <황금빛 내 인생>을 만나면서 커리어의 대확장을 경험했다. 이후 원톱 주연급으로 활약한 드라마 <철인왕후>를 너끈하게 성공시키면서도 본인 앞에 도착한 영화 시나리오 읽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글을 발굴하면 할수록 찍어야 할 영화들도 많아지는, 기분 좋은 함수 그래프를 그려보는 과정은 배우 신혜선을 더욱 단단하게 담금질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에 연달아 찍은 세편의 영화 중 하나로, 특유의 질주하는 서사를 따라 관객 누구나 끝까지 가보기를 바랄 작품이다. 좋은 영화를 통해 극장에서 가능한 한 많은 관객을 만나는 것을 꿈꾸며 성실하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 중인 ‘영화’배우 신혜선의 현재를 전한다. - 2020년 <결백>부터 5월15일 개봉한 <그녀가 죽었다>까지 포스터에 전면 등장하는 영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신혜선이 나오는 영화로 인식되는 작품들이 있다면 감사하지만 나는 영화 경험이 아직 많지 않은 배우다. 1~2년 동안 연달아 영화를 찍었고 지난해부터 차례차례 개봉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촬영했던 작품들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그녀가 죽었다> 촬영장 스틸을 보고 오는 길인데 사진에서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더라. - <그녀가 죽었다>를 언제 처음 만났나. = 드라마 <철인왕후>를 촬영하던 2020년 초에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당시에 하고 있던 역할과 이미지가 180도 달랐고, 이전 작품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얼굴을 지닌 캐릭터라는 점에서 선택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더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시점에서 ‘한소라’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유일무이한 역할이었다. -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갈망이 다음 작품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인가. = 필모그래피를 구성하는 데 있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는 의지가 항상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작품 공개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없다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배우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자기복제라는 점이다. 어떤 캐릭터를 만나든 껍데기는 여전히 나니까. 그런 한계들을 알면서도 지금 이 시점을 지배하고 있는 태도와 감정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하는 편이다. 지금 순한 연기를 하고 있다면 다음에는 좀 센 연기를 해보고 싶고, 드라마에서 로맨스를 하고 있다면 영화에서는 액션과 스릴러에 좀더 손이 간다. - 원했던 것처럼 <그녀가 죽었다>에는 액션도 있고 스릴러도 있다. 개봉까지 오래 기다렸는데 완성된 영화를 본 소감은. = 네번 봤다. 집에서 세번, 극장에서 한번. 솔직히 고백하면 한번에 볼 수 없어서 여러 번 봤다.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게 어색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보기가 어려워서. (웃음) 나의 연기하는 모습, 목소리, 얼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맡은 한소라라는 인물은 끝내 가까워지지 못했다. 이 가증스러운 인물을 표현하면서 내가 나에게서 싫어하는 목소리와 표정을 가능한 한 많이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면 이상한 것 같은 ‘징그러운’ 느낌을 받았다. “글, 캐릭터, 새로운 경험” - 정태(변요한)의 이야기가 소라의 이야기로 전환되는 순간에 틈입하는 내레이션이 인상적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내 인생은 조졌다”가 나올 때 내용뿐 아니라 분위기 전체가 전환된다. 의외의 목소리가 영화를 크게 한번 할퀴고 간달까. = 극 중 소라의 목소리는 내가 평상시에 쓰는 목소리 톤이 아니다. 내레이션은 촬영을 다 마친 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녹음했다. 약간의 휴식이 있었을 뿐이지만 연기할 때 썼던 소라의 톤을 다시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기억이 있다. 신혜선이 아닌 한소라로, 낯설지만 새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디테일에 신경 썼다. - 그 말처럼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한소라는 설득과 감정이입이 어렵다. 장르 세계관 안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비일상적이고 특이한 순간이 많다. 동시에 한편으론 소셜미디어를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의 일부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소라는 동정받거나 이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만든 캐릭터다. 그것이 감독의 의도였고 나 역시 캐릭터와 거리를 두고 연기했다. 가족과 의절하고 성 산업에 연루된다는 전사,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일삼는 내레이션 모두 소라를 이해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다. ‘이 친구’가 지금 우리 사회의 여성을 대변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렇기에 거짓을 섞어낸 자신을 보여주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뒤틀린 인간 본성을 극대화해서, 어쩌면 그것만 응축해서 만들어낸 장르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 그런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 베테랑 배우의 능력이다. 신혜선의 세밀하고 설득력 있는 연기는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나 장르적인 캐릭터에 안정감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 100%까지는 아닐지라도 창작자의 의도와 가장 가깝게 캐릭터를 표현하려 노력한다. 대본을 받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가 맡은 캐릭터의 성격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거다. 최대한 세밀하게 장면 하나 하나의 대사 톤과 감정을 분석해서 인물에 어울리는 표현법을 찾으려 한다. 물론 연기라는 게 반복, 숙련으로 쌓이는 여타 전문 기술처럼 특정 방식의 훈련을 많이 한다고 해서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아니 도리어 그래서 뭘 열심히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땐 무조건 열심히 하려고 한다. 고민하며 머뭇거릴 시간에 일단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들어갈 때 오로지 그 작품만 생각하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의 첫 단계다. - 서른넷 동갑내기 김세휘 감독의 데뷔작이다. 영화 <결백>과 <도굴>도 신인감독의 입봉작이었고 드라마 <비밀의 숲> 역시 이수연 작가의 첫 작이었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이들과 함께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 있는지. = 시나리오와 이야기를 믿는다. 글이 재미있다고 판단할 때 신인급 감독, 작가들의 경력 여부 때문에 주저한 적은 없다. 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좋을 때, 그리고 작품에 참여하는 것 자체로 인생에서 새로운 경험이라 느낄 때 작품을 선택한다.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사실 그건 부차적이다. 글, 캐릭터, 새로운 경험이라는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준 작품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하다. - <씨네21> 홈페이지에 ‘신혜선’을 검색해봤다. 이름이 처음 언급된 것이 2016년 10월, 영화 <하루>가 크랭크업한다는 기사더라. ‘김명민, 변요한, 신혜선 출연.’ = 거기 등장인물이 워낙 적어서… 같이 적어준 게 아닐까 싶다. (웃음) 그때는 누구도 나를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 그다음으로는 드라마 <비밀의 숲>의 작품성을 둘러싼 호의적인 기사들이 이어지고 신혜선의 ‘영은수 검사’도 종종 언급된다. = <비밀의 숲>의 ‘영 검사’가 워낙 사랑을 많이 받은 캐릭터다 보니. (웃음) 사실 주변에서 배우 신혜선으로 알아봐주기 시작한 건 첫 주연작이었던 <황금빛 내 인생>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KBS2 주말드라마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으니까. 돌이켜보니 두편의 소중한 드라마 이후로 8년이, 단역으로 출연한 데뷔작 <학교 2013> 이후로 벌써 11년이 흘렀다. - 언제부터 배우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나. =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가 꿈이었다. 사실 그 시절의 바람을 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다. TV에 나오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좋아하는 활발한 어린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할까. 이후 사춘기를 지나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남들 앞에 서는 것, 하다못해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는 것도 불편하고 무서웠다. 그렇게 10대가 되어서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녹음기를 켠 채 동화책을 연기하듯이 읽었다. 어느 순간 혼자 하는 걸로는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고, 진짜 연기를 배워보고 싶어 예술고등학교와 대학교 연기과에 진학한 것은 나로선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표현해보는 과정이 정말 재밌었고 지금도 그렇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다 - <대지> <거짓말은 진실이다> <리턴매치> <인생은 새옹지마> 등 여러 단편에 출연했고, TV 데뷔까지 오디션도 많이 봤을 것 같은데. = 오디션을 진짜 많이 보고 진짜 많이 떨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지도 못했다. 애초에 서류에서 다 떨어져 오디션 현장에 가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웃음) <학교 2013>이 첫 오디션 현장이었는데 감사하게도 합격했다. 이후 한참 일이 없어 놀다가 <고교처세왕> 오디션을 볼 수 있었고, 또 붙었다. (웃음) - 실전에 강한 스타일인가보다. = 그런가? (웃음) 오디션을 봐야 했던 그때도, 오디션을 보지 않는 지금도 필승법이랄 것은 없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지름길은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익숙해지는 건 있다. 낯선 캐릭터가 몸에 익숙해지기까지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이 있는데, 점점 그 시간이 단축되고 있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촬영 중후반까지 불편하게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그보다는 몇회차 빨리 캐릭터를 익히고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 평소 어떤 콘텐츠를 즐기나. = 시장에 나온 모든 OTT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다. 그것도 가장 높은 등급으로. (웃음) 범죄 시사 프로그램을 특히 좋아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 <실화탐사대> <궁금한 이야기 Y> <용감한 형사들> 전부! - 앞으로 연기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 걸걸한 욕설로 가득한 마피아 두목. 코믹스러운 것 전혀 없이 무조건 멋지게 가보고 싶다. (“<차이나타운>의 김혜수 같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말 안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도 그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긴 하다. (웃음) - 배우 신혜선은 차근차근 한 계단씩 인지도를 쌓아올려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 점이 보통 사람들에게 더 큰 호감의 요인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한 일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본 것도 아니고 아직 인생을 논하기엔 경험도 적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느끼는 게 있다. 모든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기 분야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연기자는 ‘운’의 영역이 강하게 작용하는 직업군이다. 그래서인지 배우들은 ‘열심히 했다’고 말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할 것이다. 노력이 투명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걸 많이 보아왔으니까. 그래서 차근차근이라는 말을 들으면 더 쑥스럽다. 매 작품 노력 이상의 운들이 따라주었기에 사랑받았다. 배우로서 걸어온 길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가지고 태어난 것에 비해 운이 좋았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인터뷰] 지속 가능한 활력,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에코프렌즈 배우 유준상

‘지천명의 소년.’ 모순 같은 수식이지만 유준상의 이름에 붙는다면 크게 이상하지 않다. 에코프렌즈란 칭호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지속 가능한 활력’이 항상 그의 주변을 맴돌기 때문이다.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의 ‘특별상영: 에코프렌즈 유준상’에서는 그의 두 연출작 <평온은 고요에 있지 않다> <스프링 송>을 만날 수 있다. 유준상은 자연을 주제로 한 동화책의 출간을 앞둔 작가로서 자연과 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고도 있다. 이번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창작자 유준상의 삶을 지탱하는 예술혼과 여행기를 살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최근 자신을 ‘트래블아티스트 테니스맨 유준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들일까. = 가족여행 중에 나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편한 여행보단 힘든 여행, 무한정 계속 걷는 여행을 더 좋아한다. 가족들이 안 따라올 땐 혼자 미술관이나 가고 싶은 곳으로 무작정 돌아다닌다. 어느 날 그렇게 쭉 걷다가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를 켜고 말을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트래블 아티스트 테니스맨 유준상입니다!”라는 멘트가 나오더라. (웃음) 그게 너무 재밌어서 계속 쓰고 있다. 여행하면서 새롭게 마주한 것들을 토대로 글을 쓰는 게 일상이다. 이 과정을 계속하면서 끝없이 나를 되돌아보고 나아가게 된다. - 최근 가장 몰두하는 분야는 테니스라고 들었다. 얼마 전엔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했다. = 테니스는 연기와 비슷하다. 상대와 공을 주고받는 과정이 연기 방식과 똑같아서 너무 재밌다. 이번에 우승한 대회는 2~3년 전에 출전했다가 한번 크게 실패를 겪어서 좌절했던 곳이다. 힘들었던 순간을 결국 극복한 거다. - 지천명의 나이를 훌쩍 넘었다. 그간 만든 연출작을 보면 나이 듦에 대한 사유가 많이 녹아 있다. 첫 장편 <내가 너에게 배우는 것들>(2016)에선 “누구든 나이를 먹는다. 나도 50대를 향해 가고 있다”라는 내레이션도 등장한다. = 나이 먹는 건 어찌 보면 되게 두려울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왕 모두가 겪는 일이라면 조금 더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나이 드는 것을 이겨내거나 거스르거나 역행하자는 욕심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보는 풍경, 자연과 자연스럽게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젊은 친구들도, 나와 동년배인 분들도 내 영화를 보며 나이 듦에 대해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 ‘유준상은 항상 긍정적일 것’이란 시선이 종종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 그렇다. 사람들이 나를 볼 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긍정을 긍정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가장 어렵다. 걱정과 근심이 찾아올 때마다 자신을 한없이 채찍질해야 하고 끊임없는 번민과 맞서야 한다. 그럼에도 버티고 버틴다면 자신이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 그렇게 버티며 영화를 만들고 창작하면서 긍정이 무엇인지 다시 공부한다. 거창한 무언가를 만들려는 마음은 없다. 그저 창작하는 생활과 스스로 발전하는 과정이 이어진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다. - 영화제 상영작인 <평온은 고요에 있지 않다>엔 고뇌하는 인간 유준상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초반부 셀프캠에서부터 날것의 투박한 일상이 자주 등장한다. = 힘든 촬영을 마치고 잠시 몽골 고비사막에 갔을 때다. 매니저와 음악하는 친구와 함께 간 여행이었고 한 장소를 이동하려면 10시간은 차를 타야 하는 고행길이었다. 그러다가 혼자 사막을 오를 때 “트래블아티스트 테니스맨 유준상입니다!”를 외치며 일상처럼 영상을 찍었다. 그렇게 차차 쌓아둔 영상들을 살펴보니 사막에 오르는 과정과 사막의 정상에서 본 풍경, 몽골의 자연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면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매니저를 찾기 시작했다. (웃음) 스테디캠 같은 장비도 없던 터라 매니저가 직접 카메라를 붙잡고 촬영을 해야 했다. 체격이 좋은 친구라 그런지 흔들림 없이 잘 찍혔더라. - 사막에서 거세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말하는 후반부 장면이 인상적이다. 자막이 없어서 어떤 말인진 잘 알아들을 수 없다. = 처음엔 반복해서 듣고 자막을 달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가 삶을 살면서 서로의 마음을 다 알고 소통할 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면이 다르게 느껴졌고 너무 좋아졌다. 정성껏 썼던 자막을 다 지웠고, 상황의 의미와 감정을 관객 스스로가 느끼길 바랐다. - <스프링 송>과 <평온은 고요에 있지 않다>를 환경영화제 상영작으로 고른 이유는. = 어떤 작품이 환경영화제에 어울릴지 고민했다. <평온은 고요에 있지 않다>엔 몽골 유목민들의 생활상이 자주 등장한다. 다만 그들의 자연 친화적인 삶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걱정이 되더라. 몽골의 아름다운 풍경도 점차 사라지는 상황이니까. <스프링 송>은 후지산 일대를 배경으로 한다. 공교롭게 얼마 전에 후지산 명소라고 알려진 편의점에서 쓰레기 문제로 관광객을 통제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귀중한 자연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에 대한 걱정과 함께 여러 생각이 들었다. - 자연을 주제로 한 동화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 구상한 지는 거의 20년쯤 됐다. 30대 중반인가, 40대 초반에 캐나다에서 쿠바까지 일주여행을 떠났다. 정말 끝도 없이 버스를 타고 창밖의 자연을 봐야 했다. 어느새 내가 자연과 대화하고 있더라. 몬트리올 까치에게 “혹시 우리 동네 분당 까치를 아니?”라고 물으면 몬트리올 까치가 “당연히 알지”라고 답해주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 폭포 근처에 말 두 마리가 보이면 ‘저 폭포가 얼어붙을 때 함께 미끄럼틀을 타면 얼마나 재밌을까?’라는 상상도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써나간 자연과의 이야기를 아껴두었고 언젠간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는 10월에서야 총 7부작 중 2편의 단행본을 내게 됐다. - 7부작이면 꽤 거대한 서사시가 될 것 같다. = 처음엔 캐나다~쿠바에서 쓴 단편들만 엮으려 했는데 이왕이면 긴 모험 이야기로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는 수백억원을 들여도 만들기 힘들 듯한 상상을 맘껏 펼치고 그림을 채우니까 너무 재밌더라. 주인공이 여행하면서 이 세계를 만드는 거의 모든 자연을 만난다. 닥터 스카이, 선 시스터, 스노 브러더 등이 각지의 주인이고, 그들의 세계를 파괴하려는 엄청난 악당이 등장한다. 작품을 <해리 포터>처럼 아주 큰 판타지영화 시리즈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최종 목표다. - 연출 계획 중인 차기작 역시 규모가 크다고 들었다. = 지구에 사는 소녀와 105억 광년 떨어진 별에 사는 소녀가 만나는 이야기다. 장편이고 후반작업 중이다.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획을 시작했다. 촬영을 끝낸 뒤엔 이 기획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3편짜리 소설 중 한편을 먼저 쓴 상황이다. 한달 반 동안 매달려서 간신히 끝냈다. 구상한 이야기가 너무 크다 보니 우선 소설집을 낸 뒤에 애니메이션 등으로 전체 이야기를 완성하려 한다. - 뮤지컬, 연기, 음악, 여행, 테니스에다가 큰 기획들까지 펼치고 있다. 하루가 부족하진 않나. 수면은 충분히 취하는지. = 남들 자는 만큼 잔다. (웃음) 5~6시간쯤. 시간은 내기 나름이지 부족하진 않다. 이런 질문을 평소에도 많이 받는데 항상 “전 시간이 많이 남아요”라고 답한다. 하루에 꼭 마쳐야 할 일을 제외하면 다 개인 작업 시간이다. 최근엔 운동과 소량의 식사, 6월에 시작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대본을 매일 숙지하는 정도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다 가버린다.

[인터뷰] 실감과 실천 사이에서,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에코프렌즈 배우 박하선

박하선에겐 지난밤의 성공적인 중고 거래가 남긴 만족감이 아직 생생한 듯했다. “바로 어젯밤 10시30분에 정가의 30%도 안되는 가격으로 모자 하나를 넘겼다. 직접 뵙고 1만원을 깎아드리려 했는데 구매자 분은 쿨하게 거래 후 유유히 사라졌다!” 육아용품 무료 나눔을 하다보니 입지 않는 옷을 중고 거래에 내놓는 일에도 금세 익숙해진 그다. 텀블러, 샴푸바, 옥수수 칫솔 등 쓰레기를 줄이는 일상적 실천을 말하기 시작한 배우의 목소리는 흥미진진한 풍경을 전하는 내레이터처럼 공명했다. 드라마 <동이>(2010)의 인현왕후에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2011~12)의 푼수 선생님으로 돌연 건너간 대담함. 인생의 대소사를 치르며 생긴 공백기를 일련의 복귀작(드라마 <며느라기> <산후조리원> <검은 태양>, 영화 <고백> <첫번째 아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들로 깨부수는 기세. 이 천생 배우 같은 자질의 출처는 자연인 박하선의 말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다 해본다”는 그는 “때때로 찾아오는 좋은 기회를 받아들이고, 고마운 경험은 되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자 연기, 라디오, 예능프로그램, 공익활동에 이르는 다방면의 궤적이 “정말로 좋아서 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박하선이 영화제 에코프렌즈로서 전하는 메시지도 같다. “어려워 말고 그저 한번 와보세요. 생각보다 더 재밌고, 생각보다 훨씬 가까울걸요?” - 지난해 7월,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로 <씨네21>과 인터뷰할 때 연극 출연 소식을 알렸었다. 이후 예술의전당에서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13년 만에 무대에 섰는데. = 내년에 재공연을 할 예정이다. 어마어마한 배우들이 새롭게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나도 마음을 다잡는 중이다. 올해 데뷔 19년차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카메라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무서웠다. 바스트숏부터는 스태프들이 보이면서 긴장이 된다. 그런데 큰 무대에서 관객을 마주하는 경험이 곧 훈련이었는지, <바닷마을 다이어리> 중간에 짧게 KBS 단막극(<드라마 스페셜 2023 - 마님은 왜 마당쇠에게 고기를 주었나>) 촬영에 나갔을 때 스스로 훨씬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 MC로 출연한 예능 <이혼숙려캠프: 새로고침>이 5월23일 종영했다. 최근 박하선의 일상은 어떤가. = 배우이자 엄마의 삶은 일을 쉴 때가 오히려 정신없다. 일하느라 아이의 단 한번뿐인 순간들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에 부채감이 생겨서 일이 없을 때는 더더욱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됐는데 3월 개학과 동시에 초등학생의 ‘초’자가 초주검의 초자라는 걸 깨닫는 중이랄까. - 그런 와중에 매일 방송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SBS 파워FM <박하선의 씨네타운>을 순항 중이다. 며칠 전(커버 촬영은 5월9일에 진행했다.-편집자)부터 감기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인데도 오늘 현장에서 밝은 기운을 나눠주어 감사하다. = 사연이 길다. (웃음) 항생제를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 동네 병원이 있어서 주로 그곳에 다닌다. 그동안은 거기서도 감기가 잘 나았는데 이번엔 경과가 좋지 않아 다른 병원에 갔더니 부비동염 진단을 받았다. 앞으로 약을 3주나 먹어야 한단다. 그사이 라디오 진행을 계속하면서 새 작품 촬영에도 들어가야 해서 솔직히 처음엔 좀 우울했다. 내 선택 때문에 동료들에게 민폐가 된 것 같아서. 지금은 장원영씨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필요할 때는 항생제를 제때 처방받는 게 좋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했으니 나 완전 ‘럭키비키’잖아? - 벌써 3년을 채운 라디오를 필두로 연기 외적인 커리어에도 거리낌 없이 도전 중인데, 이유가 있을까. = 예전부터 신애라 선배님을 동경해왔다. 대중과 따뜻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을 계속 해보고 싶다. 라디오에 도전할 때 처음 목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딱 2년만 버텨보자. 두 번째는, 혹시 그러다보면 10년이 금방 가지 않을까? 그렇게 양가감정을 갖고 시작했다. 확실히 2년차부터 출퇴근이 익숙해지고 직장인처럼 좋은 날이 있다가 힘든 날도 있는 것이 당연해지더라. 당대에 활발히 활동하는 분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는 것은 배우로서 큰 자양분이 된다. 아이가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는 날엔 “엄마도 오늘 일 가기 싫은데 가야 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도 의외의 장점이고! - 아이와 함께하는 삶으로 변화하면서 그만큼 환경에 대한 관심도 남달라졌을 듯싶다. = 미래세대가 살아갈 환경에 대한 경각심의 필요성이 요즘은 너무나 크게 와닿는다. 금방 동나는 육아용품을 쓰다보면 자꾸 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들이 신경 쓰인다. 한번 자각한 뒤로는 가능한 한 리필 상품을 구입한다. 아이 칫솔은 특히 자주 바꾸게 되니까 옥수수전분으로 만든 것을 쓴다. 플라스틱병 생수를 끊고 고체비누 형태로 나온 샴푸바도 써보고 있다. 라디오 부스에 들어갈 때 텀블러를 챙기고 바빠도 배달음식을 줄이는 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꾸준히 즐겁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옷에 대한 입장이 바뀌고 있다. 패션에 무척 관심이 많은데 옷 쓰레기가 특히 심각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된 뒤로 새옷 대신 빈티지로 시선을 돌려보기도 하고 입지 않는 옷은 중고 거래에 내놓는다. - 영화가 환경문제에 대한 각성과 행동을 촉구할 수 있을까. 박하선의 관점은 어떤가. = 2022년에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은 적 있는데 캐나다영화 <고독의 지리학>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외딴섬에 사는 환경보호 활동가 여성이 세계 각국에서 섬까지 떠밀려온 플라스틱 쓰레기를 마주한다. 지구를 돌고 돌아 어느 섬까지 와서 쌓이는 쓰레기의 존재를 영화에서 보고서야 피부로 느꼈다. 영화에는 그만큼 실감을 주는 힘이 있다. -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에코프렌즈 이전엔 대한적십자사, 월드비전 등 NGO의 홍보대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 솔직히 처음에는 망설였다. 내가 그리 훌륭한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나서나 싶은 마음에. 그런데 좋은 영화들을 보면서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쌓이는 게 중요하다고 믿게 됐다. 홍보대사 활동은 내 몸만 좀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되는 일이니까 힘닿는 경우라면 잘해보고 싶다.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 학교에서 한달에 한번 5천원짜리 농산물 상품권을 주면 우리 집은 그걸로 한동안 살 수 있었다. 어떻게 아시고 담임선생님이 여성용품과 속옷 같은 것을 챙겨준 순간도 잊지 못한다. 그 고마움을 지금의 나로서 갚아나가고 싶다. -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경제력을 이뤘다. 소회가 뜻깊을 텐데, 돌이켜보기에 가장 고마운 작품이 있나. =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덕분에 처음으로 집을 샀다. 내 집이란 걸 그때 처음 가져봤다. 2년에 한번 이사 가는 게 어릴 때 내 삶이었거든. 돈 쓰는 법을 몰랐던 그 시절의 내가 했던 사치는 노래방 가서 2시간 원없이 노래를 부르는 거였다. 그것만으로도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네!’ 하면서 기뻤다. 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한 어린이가 날 보면서 반갑게 “맞죠! 개그맨!” 하길래 그렇다고 했다. 아마도 유튜브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본 거겠지. (웃음) 내겐 정말로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 흥행한 희극 필모그래피가 어떤 배우에게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박하선은 성큼성큼 나아갔다. 결혼, 출산을 거치며 작품 제안이 줄어든 사실을 토로한 적도 있지만, 결국 빛난 건 여성 서사를 알아보는 안목과 더 다채로워진 감정의 팔레트였다. = 아직도 한창 보폭을 넓히고 행로를 개척하는 과정에 있다. 올해 공개될 스릴러물 <타로>(U+모바일tv 7부작 시리즈)가 그래서 기대된다. 예전에 김병욱 감독님이 내게 호러 장르에 어울리는 서늘함이 있다고 말해주셨는데, 나 역시 그런 분위기로 쓰이고 싶은 바람이 늘 있었다. 신작을 통해 ‘박하선에게 저런 얼굴이 있었어?’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

<씨네21>이 꼽은 21편의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추천작 ③

토비의 보물 찾기 그리고 하늘을 나는 강 Curious Tobi and Treasure Hunt to the Flying Rivers 요하네스 혼셀 / 독일 / 2023년 / 92분 / 에코패밀리 토비는 송버드 부인에게서 굳게 잠긴 상자를 소포로 받는다. 토비는 상자를 열기 위해 어린 시절 친구 마리나를 찾아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난다. 하롱베이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상자를 열기 위해 송버드 부인이 남긴 단서를 따라 몽골과 아마존 등을 누빈다. <토비의 보물 찾기 그리고 하늘을 나는 강>은 얼핏 이색적인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굳게 닫힌 상자처럼 숨겨진 의미를 품고 있다. 제목인 ‘하늘을 나는 강’(flying river)은 엄청난 양의 물을 뿜어내는 아마존을 의미하는데, 항손둥 동굴, 울란바토르, 브라질 열대우림까지 두 사람이 여행하는 지역은 모두 자연 파괴라는 심각한 이슈를 안고 있다. 재미난 관광지로 인식되던 곳의 아름다운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보물임을 일깨우는, 재미와 메시지를 다 잡은 가족 환경영화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커먼 그라운드 Common Ground 조슈아 티켈, 레베카 티켈 / 미국 / 2023년 / 105분 / 슬기로운 음식 생활 토양은 동식물을 양육하고 기후를 조절하는 삶의 터전이다. 영화는 무자비한 산업형 농업으로 대지모의 심기를 건드린 인류를 되돌아본다. 자연 착취의 역사는 유럽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노예무역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경유한다. 대량 살상을 위한 화학 제초제는 농지의 표층 토양을 황폐화하고 척박해진 땅은 그대로 인간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인간은 이미 공룡의 멸종 때보다 많은 생명을 해치는 ‘도덕적 파산’에 놓여 있다. <커먼 그라운드>는 전세계 10억명 이상의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한 화제의 다큐멘터리 <대지에 입맞춤을>의 속편이다. 거듭해서 재생 농업이 높은 수익으로 이어짐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다분히 ‘미국적인’ 심리를 읽을 수 있다. 로라 던, 제이슨 모모아, 우디 해럴슨 등 셀러브리티를 앞세운 것 또한 마찬가지다. /김현승 객원기자 코요테는 네 개의 영혼을 가졌다 Four Souls of Coyote 아론 가우더 / 헝가리 / 2023년 / 100분 / 에코패밀리 북미 원주민들의 터전이 대기업의 송유관 설치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공사 전날 밤, 원주민 중 가장 어르신은 아이들을 모아 옛날이야기를 시작한다. 익숙한 창조 신화인 줄만 알았던 이야기가 갑자기 흥미로워지는 건, 인간을 만든 것이 그 창조주가 아닌 코요테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다. 그렇게 <코요테는 네 개의 영혼을 가졌다>는 주류 서구 백인들의 서사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이야기의 길로 자유로이 뻗어나간다. 영화의 애니메이션 연출 또한 그 자유도에 발맞춰 환상적인 결과물을 선보인다. 북미 원주민들의 세계관과 그들이 지키려는 전통/문화의 근원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영화이며, 인간 본성에 자리 잡은 선악 구도에 대해 질문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보기에도 좋을 듯하다. 바로 그 질문들이, 무분별한 송유관을 막아낼 것이다. /김철홍 영화평론가 쓰레기와 인형 Junks & Dolls 마니제 헤크맛 / 이란 / 2023년 / 76분 / 쓰레기통(通) 이란의 대규모 쓰레기 폐기장에 관리인으로 부임한 부부가 있다. 손재주가 좋은 남편 엘리아스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매일 쓰레기 산을 오르내리며 고물을 수집한다. 성실한 아내 샬리는 척박하고 악취가 나는 땅에서도 농작물을 재배한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두 부부의 보금자리로 사진을 찍는 페가와 다정한 조카 나골 그리고 병든 강아지가 다가온다. 죽음이 만연한 대지 위로 생명은 잉태될 수 있을까? 넝마주이처럼 사는 다정한 부부의 삶을 지켜본 영화는 얼핏 자급자족의 무해한 일상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 하지만 뺄셈의 속도로는 도저히 제곱의 쇄도를 막아낼 수 없다. 무한히 증식하는 쓰레기의 파도 앞에서 부부가 틔워낸 작은 기적은 무참히 짓밟히고 만다. <쓰레기와 인형>은 양적 논리 앞에서 무력하게 꺾인 개인과 사회 사이의 아득한 격차를 발견한다. /최현수 객원기자 평온은 고요에 있지 않다 유준상 / 한국 / 2022년 / 27분 / 특별상영: 에코프렌즈 유준상 한국에서 고된 영화 촬영을 마친 배우 유준상은 곧장 몽골로 떠난다. 지친 몸을 안고 떠난 여행의 목적지는 고비사막이다. 덜컹거리는 차에 앉아 10시간 동안 광활한 사막을 달리는 여정은 순탄치가 않다. 사방이 탁 트인 모래언덕을 지나오며 그는 쉽게 행로를 정하지 못한다. 몽골에 가기 전날 만났던 지인의 부고를 듣고 심란해진 마음을 뒤로하고 준상은 바람이 거세게 부는 정상을 오른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 음악까지 다양한 예술 작업을 이어온 배우 유준상이 카메라를 들었다. 몽골로 떠난 자전적 여행기인 <평온은 고요에 있지 않다>는 인간 유준상만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평범한 브이로그에서 시작한 영화는 내밀한 고백이 담긴 내레이션을 거치면서 독특한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한편의 뮤직비디오로 변모한다. 제21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에코프렌즈로 활동하는 유준상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최현수 객원기자 꿀꿀 Oink 마샤 할버스타드 / 네덜란드 / 2022년 / 70분 / 에코패밀리 채식주의 건강 식단을 즐기는 9살 소녀 밥스의 집에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찾아온다. 가족은 물론 이웃 중 누구도 그를 반기지 않고 오히려 불편해하는 이상한 상황. 할아버지는 자신과 유일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손녀에게 아기 돼지 ‘꿀꿀이’를 선물한다. 밥스는 부모를 설득해 꿈에 그리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을 허락 받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소름 끼치는 비밀이 밝혀지면서 소녀는 꿀꿀이를 해치려는 할아버지와 사투를 준비한다. 어린아이와 동물의 애틋한 관계를 그린 <꿀꿀>은 동물권을 다룬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닮았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으로 분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돈육을 기괴하게 묘사한 장면은 우리가 여태껏 당연시하던 육식 문화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 사이 종을 넘나드는 공존의 메시지가 깊숙이 파고든다. /김현승 객원기자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서울국제환경영화제가 소개하는 30편의 영화들 ①

올해 서울국제환경영화제는 극장 상영과 더불어 온라인, B tv에서도 6월30일까지 환경영화 관람이 가능하다. 극장에서는 볼 수 없고 온라인상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들도 있고 오로지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도 있다. 6월 한달간 부지런히 액션! 기후재판 3.0 Duty of Care-The Climate Trials 닉 발타자르 / 벨기에 / 2022년 / 57분 / ESG: 자본주의 대전환 정부와 거대 석유 기업을 상대로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을 물었던 역사적인 기후 재판을 이끈 유일무이한 변호사 로저 콕스의 비화를 독점적으로 다룬다. 네덜란드 정부와 석유 대기업 셸을 법정에 세워 권력자들이 기후변화의 재앙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법조계는 물론 각국 정부와 기업들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린워싱: 기후 살인자 Greenwashing: The Climate Killer 클레어 테송 / 프랑스 / 2023년 / 54분 / ESG: 자본주의 대전환 ESG를 표방하면서도 기업 체질 개선을 통해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대신 탄소배출권 거래로 ‘탄소 상쇄’에 의존하는 기업들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나무를 심는 조림 사업이다. 토털, 에어프랑스 등 대기업 고객사를 조림 사업에 연결해주는 중개 기업들은 자금을 전달하고 수수료를 챙겨간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가장 수익성이 높은 사업, 즉 비용 부담이 적고 단순한 사업에만 집중한다. 이러한 탄소 상쇄 사업은 효과적이지 않거나 심지어 환경과 지역 인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파인딩 머니 Finding the Money 매런 포이트러스 / 미국 / 2023년 / 95분 / ESG: 자본주의 대전환 패기 넘치는 경제학자 그룹이 국가부채와 돈의 본질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집어 패러다임을 바꾸는 임무를 수행한다. 우리 모두 돈을 쓰지만 돈이란 무엇인지,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영화는 미 상원 예산위원회 수석 경제학자였던 스테파니 켈튼의 여정을 담는다. 그녀의 현대화폐이론(MMT)은 기후변화에서 불평등에 이르는 중요한 도전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다. 무법의 정원사 Outlaw Gardeners 안젤로 캄바 / 이탈리아 / 2022년 / 83분 / 지구를 구하는 거인들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전쟁은 단 하나, 바로 환경을 위한 전쟁이다. 영화는 이탈리아에혁명을 심는 무허가 운동가들의 전쟁을 담아낸다. 개인 운동가인 판테 디 피오리, 피안테볼란티와 단체인 프리아리엘리 리벨리, 지아르디니에르 소베르시베 로마네, 테라 디 네투노, 아마차 체 피아차는 식물과 꽃만을 유일한 무기로 사용하며 이미 많은 전쟁을 치렀다.전국적 규모로 떠오르고 있는 이 도시의 영웅들은 오늘날 씨앗을 뿌리는 것이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화염 속의 파라다이스 Paradise 알렉산데르 아바투로프 / 프랑스, 스위스 / 2022년 / 89분/ 기후행동 2021년 여름, 극심한 폭염과 가뭄으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시베리아 북동부 1900만 헥타르에 달하는 땅이 황폐화된다. 타이가 중심부 쇼로곤 마을은 잿빛 연기로 뒤덮인다. 주민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재를 보고 산불 위치를 가늠한다. 정부의 지원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힘을 모아 화마에 맞선다. 이산화탄소 배출로 기후변화가 더 빨리 진행되고, 이는 산불을 증가시켜 탄소배출량을 높이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2021년 시베리아 산불은 역사상 최초로 그 연기가 북극에 도달했다. 플래닛 킬러: 탄소의 왕자 Planet Killers: The Prince of Carbon 마르탱 부도 / 프랑스 / 2023년 / 48분 / 기후행동 “탄소 왕자” 시릴 아스트뤽을 추적하는 과정의 내막을 담아냈다. 10여년간 프랑스 당국과 인터폴의 추적을 피해 도주 중인 그에게 사기 및 돈세탁 혐의로 국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그는 유럽 국고에서 50억유로를 빼돌린 대규모 탄소 할당량 사기의 주범이다. 본래 기후변화와 탄소 배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던 탄소배출권 거래제는 더이상 생태적 측면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큐메리카, 벼랑 끝의 자화상 Documerica, Self-Portrait of a Nation on the Brink 피에르 프랑수아 디데크 / 프랑스 / 2023년 / 68분 / 국제경쟁, 지구를 구하는 거인들 1970년대 초 환경에 대한 인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행됐으나 지금은 잊힌 미국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사진 연구 ‘도큐메리카 프로젝트’를 사진작가들이 되돌아본다. 아메리칸드림의 한계에 도달한 미국의 진실의 순간을 담은 도큐메리카의 이미지는 놓쳐버린 역사와의 만남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리고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서울국제환경영화제가 소개하는 30편의 영화들 ②

법정에 선 에스더 Esther and the Law 타티아나 스헬테마 / 네덜란드 / 2023년 / 72분 / 지구 비상 에스더 키오벨의 남편은 1995년 에너지 회사 셸의 나이지리아 오고니랜드 기름유출 사건에 항거하다 사형당한 9명, 이른바 ‘오고니 나인’(Ogoni Nine) 중 한명이다. 25년이 지난 후 키오벨은 셸을 네덜란드 법정에 세운다. 오?! 미쉐린 스타 2: 북유럽의 자연에서 Michelin Stars II-Nordic by Nature 라스무스 디네센 / 덴마크, 스페인 / 2021년 / 65분 / 슬기로운 음식 생활 세상의 끝에서 어떻게 최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 있을까? 페로 제도는 흥미로운 토산품, 북유럽의 역사, 설화, 안개와 발효를 뜻하는 37개의 단어, 번성하는 해산물 산업, 아름다운 폭포, 독특한 개성, 원주민 언어 그리고 진주 같은 미식 공간인 ‘콕스’ (KOKS)가 있는 고대 소우주 같은 곳이다. 이곳의 요리는 바람이 많이 불고 습하며 흐리고 서늘하며 연중 평균기온이 영하를 넘는 아한대기후의 험준한 지형에서 500평방마일에 불과한 제철, 현지 농축산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성스러운 똥 Holy Shit 루벤 아브루냐 / 독일, 스위스 / 2023년 / 85분 / 쓰레기통(通) 우리가 소화한 음식이 우리 몸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될까? 버려야 할 쓰레기인가, 재사용해야 할 자원인가? 감독은 배설물을 안전한 비료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치는 우간다의 똥 해적단을 만나고, 소변으로 비료를 만드는 건식 변기를 만든 스웨덴 시골의 한 기술자도 만난다. 파리의 긴 하수구에서 시카고의 거대한 폐수처리장까지 4개 대륙, 16개 도시를 탐험하는 그의 똥의 궤적은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화이트 플라스틱 스카이 White Plastic Sky 티보르 바노츠키, 서롤터 서보 / 헝가리 / 2023년 / 111분 / 에코패밀리 2123년 부다페스트. 인간은 거대한 플라스틱 돔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자원 부족으로 수명이 50년으로 제한되어 있다. 50살이 되면 다음 세대 인간에게 영양을 공급할 나무가 되어야 한다. 스테판은 사랑하는 아내 노라가 아이를 잃은 슬픔에 못 이겨 32살에 나무가 되기로 자원한 것을 알게 되고, 아내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도토리나무 속 동물 왕국 Heart of Oak 로랑 샤르보니에, 미셸 세이두 / 프랑스 / 2022년 / 80분 / 야생의 세계 201년 된 프랑스, 솔로뉴의 높이 17m 참나무의 사계를 담은 다큐멘터리. 거대한 참나무는 주변 동물들의 쉼터이자 보호자가 된다. 다람쥐, 바구미, 어치, 개미, 들쥐 등 범상치 않은 출연진이 모여 인간의 언어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지만 스펙터클하고 장엄한 모험영화를 완성한다. 계절마다 참나무를 찾는 동물 거주자들의 분주한 일년을 따라간다. 무경계 진재운 / 한국 / 2023년 / 89분 / 야생의 세계 물을 매체로 한반도의 국립공원을 돌아보는 시적인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지정된 지 55년째가 된 국립공원은 경이로움 자체다. 다시 복원된 자연환경과 재발견되는 역사적인 유물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물의 흐름을 통해 이어간다. 경계는 인간이 만든 것일 뿐, 물이 흐르는 이 세상에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래와 나 이큰별 / 한국 / 2024년 / 110분 / 야생의 세계 당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고래의 세계. 그리고 고래의 삶과 죽음으로 드러나는 지구의 위기. 지구를 절반으로 나누면 땅 위엔 인간이 있고, 광대한 바다를 지배하는 것은 고래임에도 인류는 고래에 대해 아는 것보다 우주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더 많은지도 모른다. 인간과 너무도 닮은 지적 생명체인 고래를 만나기 위해 전세계 20개 나라, 30개 지역을 탐험하며 깨닫게 된 충격적 진실. 위태로운 지구 속 벼랑 끝에 서 있는 고래들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최후의 경고는 과연 무엇일까? 땅에 쓰는 시 정다운 / 한국 / 2024년 / 113분 / 지구를 구하는 거인들 도심 속 선물과도 같은 선유도공원부터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경춘선 숲길까지…. 우리 곁을 지키는 아름다운 정원을 탄생시키며 한국적 경관의 미래를 그리는 조경가 정영선 공간과 사람 그리고 자연을 연결하는 그의 사계절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