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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홀로코스트 영화 제3 국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

거대한 참사가 일어난다. 인간은 반응하고 대응한다. 여기엔 단계가 있다. 우선 논리적 사고 이전 단계에 우리에겐 충격과 공포, 불안, 분노, 공격성 발현, 또는 회피, 남 탓 등의 반응이 나타난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해당 사회 구성원은 유사한 작용 과정을 겪는다. 편도체를 중심으로 한 교감신경계의 리액션이다. 그다음 우리는 사태 파악, 원인 진단, 진상규명 등을 시도한다. 이 단계는 앞 단계와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받는다. 선후가 뒤섞일 때도 잦다. 이때 누군가는 피해자를 염려하고 누군가는 책임자를 단죄하려 한다. 이후 사태 파악 다음 단계에서 소수의 어떤 이들은 참사에서 출발해 인간·사회·세계의 본질에 다가서려 애쓴다. 예컨대 조현철 감독은 <너와 나>(2023)를 통해 애도의 방식을 구현하는 동시에 직선으로만 인식하기 쉬운 이 세계의 시간을 재구성했다. 이를 통해 영화가 해낸 일이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무력하기만 한 우리의 현재를 마주 보게 함으로써 희생자를 우리 앞에 세워준 것이다. 이 단계는 이전 단계가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다른 질문과 사유 과정에 놓인다. 도식적 구분이나마 이 과정은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 또한 변화시킨다. 그렇게 끝내는 사태의 또 다른 본질을 유통하게 해준다. 반면 첫째, 둘째 단계가 온당한 과정을 밟지 못하는 경우 대개의 우리는 구속된다. 최근 국내에서 크게 흥행하거나 화제가 된 몇몇 한국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떠올려보자. 그들이 그린 우리의 과거는 어떤 단계에서 나아가지 못하거나, 심지어 나아가길 원치 않는 듯 보인다. 2020년대 한국영화를 말할 때 새겨볼 대목이다. 보는 자리와 들리는 자리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에도 단계가 보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1994)를 제1 국면으로 잡아보자. 가해자의 잔혹함과 사태의 참혹함에 집중하면서 인류애를 말하는 단계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1997)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어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2003)는 유대인 주인공에게 경계인의 위치를 처음 부여했다. 은신처 안쪽 인물의 관찰자시점을 사용해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다른 시선 위치를 선정했다. 패퇴하는 독일군 장교가 주인공을 돕기도 한다. 이렇게 인물들을 경계선상에 놓았다. 이후 <카운터페이터>(2007), <사울의 아들>(2015)이 나치에 사역하는 유대인을 전면에 세웠다. 특히 <사울의 아들>의 시선이 택한 심도와 화각은 지옥을 사는 경계인의 생물학적 감각을 화면에 구현해 걸작으로 남았다. 이들이 응시 주체의 자리를 경계인에게 마련해준, 홀로코스트 영화의 제2 국면이다. <랜드 오브 마인>(2017) 역시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경계인을 통해 인식 지평을 넓힌 사례다. 그렇게 영화는 죄 지은 자와 죄 없는 자, 의도를 가진 자와 불가피하게 잘못한 자를 정교하게 나눌 수 있도록 도왔다. 보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는 걸 알아차리게 했다. 이로써 우리는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결심도 할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나치의 충격과 공포를 전하며 선악을 식별하는 이야기는 철지난 것이 되기 쉽다(<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도 경계인이라 할 수 있지만, ‘힘 있고 선량한 예외적 개인’을 역사의 구조적 실체에 접근하는 캐릭터로 보기는 어렵다). 2000년대 중반 들어 <타인의 삶>(2006)뿐 아니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색, 계>(2007) 등 압제 속에 표류하는 경계인을 통해 그간의 정언명령에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 잇따른 점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크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9)에서 한나(케이트 윈슬럿)는 아우슈비츠 감시원이었다.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때 그 가스실 철문을 닫은 장본인이다. 영화가 ‘악의 평범성’을 본격 제기한 순간이었다. 이 작품 시기만 해도 논의는 ‘경계인 서사’ 담론에 머문 측면이 컸다. 지난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칸영화제 수상 소식과 함께 대략의 시놉시스만을 접한 나는, 경계인이 등장하는 또 한편의 걸작을 기대했다. 낡은 생각이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거의 모든 장면은 악으로 채워져 있다. 실존 인물 루돌프(크리스티안 프리델)-헤트비히(잔드라 휠러) 부부에겐 재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악이다. 평범해서 더 악하다. 10대인 큰아들이 장난치는 방식은 동생을 온실에 가둔 다음 가스 나오는 소리를 흉내내는 것이다. 가족 전체가 평범한 악에 물든다. 가해와 피해는 그렇게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선명하게 나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1990년대의 국면으로 물러난 것인가. 중요한 건 관객의 자리다. 그곳에선 가해자의 낙원이 보이고 피해자의 지옥이 들린다. 가족과 직장이 보이고 통과 죽음이 들린다. ‘보고 듣는다’라기보다 ‘보이고 들린다’는 쪽이 정확하다. 영화가 객석을 그런 자리에 마련해놨기 때문이다. 10대 이상의 카메라를 세트 곳곳에 고정해놓고 인공조명을 쓰지 않는 등의 제작 방식이 여기에 복무한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내는 정원을 가꾸는 상류층 가족의 풍경 너머에 명백한 사태의 실체가 숨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 30년, 영화는 논의의 출발선을 저만큼이나 진보시킨 것이다. 사태 파악과 진상규명 이후 본질에 다가서는 단계 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내 영화 이후 최고의 홀로코스트 영화”라고 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홀로코스트 영화는 제3 국면을 맞았다. 현재성의 감각 이 영화를 볼 때 흥미로운 참고작은 <추락의 해부>(2023)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지난해 칸영화제 수상과 잔드라 휠러 주연작이라는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추락의 해부>의 법정 장면에서 음성 녹취 파일을 듣는 동시에 방청객의 각기 다른 표정을 본다. 플래시백으로 사태의 진상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결정적인 장면에서 영화는 관객의 시각과 청각을 분리한다. 법원 판결 이후조차 끝내 사건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이 영화는 정보와 증거, 심지어 사실들이 넘치도록 유통되는 시대에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커다란 편차를 보일 수 있는지를 화면 안과 밖의 병렬을 통해 증명한다. <추락의 해부>의 온-오프 스크린이 논리를 위해 사용됐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깨워 일으키는 데 활용된다. 3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오프닝 암전은 우리가 어둠에 휩싸일 때 시각 외 감각기관을 활성화하듯 무뎌진 자극반응을 회복하자는 선언이다. 이후 오프스크린(외화면)이 온스크린(내화면)을 가차 없이 압도해버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전통적 쓰임과 달리 이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에 뒤따르는 리액션이 아니다. 마치 다중우주처럼 병렬 연결된 시퀀스로, 화면 밖이 끊임없이 화면 안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스크린을 장악한다. 그렇게 이 영화의 외화면은 악의 평범성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의 감각 회복을 촉구하는 데까지로 치닫는다. 예컨대 헤트비히가 모피코트를 걸쳐볼 때 창밖 소각로의 소음과 총격은 바로 저 옷의 주인이 희생당하는 소리일 수 있음을 감각하며 우리의 세포는 예민해지는 것이다. 소리만이 아니다. 유대인 수천명을 실은 기관차 연기, 시신들의 재가 섞인 강물이 수용소 담장을 넘어 내화면에 스민다. 이에 대해 무신경하거나 혹은 외면하는 인물들의 감각은, 2024년 지금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숱한 비극을 무력하게 보아넘기는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무감각해졌는가. 영화가 저토록 소름 끼치면서도 사실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감각세포를 깨우려는 뜻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이 영화의 현재성이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궁금해지는 건 미국 평자들의 반응이다. 전세계 어느 사회보다 평범한 악에 무감각해진 현실에 고민이 깊을 터이기 때문이다. 여러 잡지 표지와 카툰에서 얼굴에 짤막한 콧수염을 붙여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고 풍자되는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해 이런 말까지 했다. “이민자들이 미국의 피를 더럽히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이런 말도 했다. “노숙인들을 모두 수용소에 넣어야 한다.” 경쟁 상대와 그 지지자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말버릇은 너무 흔히 튀어나와서 일일이 예시하기도 어렵다. 이쯤 되면 히틀러를 오마주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지면에서 몇 차례 언급했지만 트럼프가 문제라는 얘기가 아니다. 수천만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는 감각은 어디서 비롯됐는지가 문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고 이런 현실을 떠올린 사람이 한둘은 아닌 것 같다. <할리우드 리포터>의 수석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루니는 이 영화 리뷰를 통해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정치 환경에서 이같은 윤리적 무감각의 메아리가 퍼지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면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 일들의 특성이, 이 영화가 보여준 역겨운 직설의 충격을 확대한다”고 썼다. <복스>의 수석 에디터이자 전미 비평가협회 회원인 스와티 샤르마는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우리가 언제든 직면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며 이 영화의 현재성을 외면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샌디에이고 타임스>의 편집장 크리스 젠와인은 아예 대놓고 한마디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대선을 앞둔 미국에 알람을 울린다.” 이 영화가 미국인의 무뎌진 감각을 깨우는 경보라는 것이다. 연루된 이들의 소환장 영화평론가 저스틴 창이 에 쓴 질문은 한층 성찰적이다. “열심히 일하는 주인공 부부에 우리를 비춰봐야 할까. 지척에서 벌어지는 야만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고의적 회피를 연루시켜야 할까”라고 물은 다음 “역사, 특히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의 목적은 과거가 현재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더불어 숱하게 소환되고 있을 해나 아렌트를 이 글에서까지 언급하지는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보다는 성실한 직장인 같은 히틀러의 하수인들, 1933년 히틀러 집권 당시 압도적 표를 몰아준 수많은 독일 시민들, 그리고 현재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극우 포퓰리스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을 용기 있게 불러낼 차례가 이제는 됐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력 정치인이나 그를 지지하는 개인들이 문제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 세계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감각하게 하길래 그와 같은 열광적 오판을 부르는지를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래된 문제다. 에티엔 드 라 보에티는 <자발적 복종>에서 이렇게 썼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 그토록 많은 부자들, 도시들, 그리고 나라들이 단 한 사람의 독재자를 견디는 일이 벌어지는가 … 독재자의 권력이란 그 권력에 종속된 다른 모든 이들이 그에게 건네준 힘일 뿐이다 … 수백만의 사람들이 대단한 힘을 가진 척하는 한 인간의 명성에 홀리거나 마법에 사로잡힌 듯 목이 눌린 채 비천하게 복종한다는 사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 분명하나 흔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마음 아프고 놀라울 뿐이다.” 라 보에티가 ‘자발적’인 순응과 복종을 안타까워하며 이 글을 발표한 게 1548년이다. 500년 전에도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했다는 건 인류 보편의 문제나 다름없다는 뜻이지만, 영화의 숙고는 동시대 정치·경제·문화의 총체적 표현임을 홀로코스트 영화들의 단계를 보면 알게 된다. 2000년대 중반은 미국의 중동 전쟁이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을 되풀이하며 전세계를 근심시킨 시기다. 당시 세계가 ‘경계인 서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때 주목받은 여러 영화들은 극과 극의 한쪽 편에서 악순환을 부르는 맹렬한 투쟁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했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에게 2020년대에 필요한 서사는, 악의 평범성과 이를 가능케 하는 구성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래서 이 세계의 퇴행이 낳은 영화의 진보다. 또한 우리의 감각기관을 자극하며 제기하는 민감한 질문이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은 악에 복무하도록 설계되는가. 어떻게 우리는 정의로워지는 듯한 기분에 중독돼 뜨겁게 오판하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이에 대해 현재까지 찾은 가장 적절해 보이는 답은 이렇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성과 합리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립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개인을 불안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고립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개인이 고립에서 벗어나려면, 자유라는 무거운 부담을 피해 다시 의존과 복종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인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이 나치의 이상함을 걱정하며 1941년 내놓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나오는 말이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로운 리액션

반응에 오르기 시미즈 히로시의 1948년작 <벌집의 아이들>에서 주요 인물은 떼지어 거리를 떠도는 전쟁고아들이다. 헐벗은 나날에도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유독 한 소년의 연약함이 눈에 밟힌다. 바다에서 엄마를 잃은 후, 바다만 보면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요시보, 그는 다른 아이들의 활기와 속도에 언제나 뒤처져 결핍감과 슬픔을 호소하는 울보다. 움막에서 시름시름 앓던 요시보는 무리에서도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던 아이가 찾아오자, 애걸한다. 산에 가면 바다가 보일 거야, 바다를 보면 병이 나을 거야, 나를 산에 데려가 줘, 부탁이야, 나를 업고 가줘. 둘의 눈이 프레임 바깥을 향한 지 얼마지 않아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업고 정말로 산을 오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가여운 두 소년의 무리한 여정에 바다는 금세 화답하리라. 이 숏만 지나면 소년의 눈에 바다가 담기리라. 그러나 기대는 이내 부서진다. 무려 5분에 걸쳐 숏 수가 점점 불어나는 중에도 바다는 나타나지 않는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능선과 어느새 절벽에 가까워진 비탈을 한 아이가 온몸으로 기어오르는 동안, 다른 아이는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매달린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한다는 말인가. 영화가 그 고된 육체의 시간을 지연하기 위해 단순한 동선을 부러 여러 개의 숏으로 가혹하게 조각낸다는 인상마저 든다. 카메라는 산등성이에서 움직이는 아이들의 포개진 몸을 아주 멀리서 응시하거나 가파른 경사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소년의 헐벗은 발을 가까이서 쳐다본다. 이미 시작했으므로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운동, 아픈 아이의 ‘보고자 하는’ 소망과 그 소망을 두 다리에 짊어진 한 소년의 책임만이 이 장면을 지탱한다. 이보다 절실한 ‘영화적인’ 움직임을 떠올릴 수 없다. 마침내 두 아이는 산꼭대기에 이른다. 산 아래로 바다가 보인다! 아니,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상에 이르자마자 요시보는 땅에 널브러진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이 사실을 인지한 소년은 도움을 구하러 그 거친 산길을 다급히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한자리에서 소년의 허망하기 짝이 없는 동선을 물끄러미 지켜볼 따름이다. 더없이 가혹한 이 순간의 진실은 단 하나다. 그토록 열망하던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정작 요시보는 바다를 볼 수 없다. 소년의 희생 덕분에 세계는 움막에서 바다 앞으로 가까스로 이행했으나, 그 움직임은 보상받지 못한다. 두 아이의 바람에 바다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바다는 너무 늦게 반응하고 만다. 적확한 시간을 놓친, 어쩌면 거부한 바다의 반응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한다. 요시보는 두 눈을 감은 후에야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묻힌다. 인과 대신 관계 리액션, 자기 안에 액션의 잔상과 기억을 품고 또 다른 반응을 예비하는 운동. 영화는 그 운동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관성의 작용 혹은 논리적이거나 자연적인 질서이기 전에, 필사적인 마음과 실천의 산물임을 공들여 생각하지 않는다. 리액션을 기다리는 순간이 이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또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는 건 다시 말하지만, 그저 당연한 일일 수 없다. ‘바다를 보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요시보의 고백이 들려주듯, 그건 변화를 향한 의지이기도 하다. 물론 <벌집의 아이들>처럼 그 의지가 늘 보답받는 건 아니다. 어떤 영화는 그 의지를 실패시켜 그것의 간곡한 가치를 쓰라리게 보존하는 길을 택한다. 무덤 뒤로 보이는 바다 앞에 더이상 요시보는 없어도 이 장면은 앞선 고행길을 망각하지 않으려 아이의 부재를 껴안고 뒤늦게 진동한다. 화면 한 귀퉁이에서 미약하게든, 스크린 전체에서 강렬하게든, 그러한 떨림을 발견하고 주시하고 느낌으로써 한편의 영화는 조금씩 달라지는 길을 찾아간다. 리액션이 세계에 일으킨 변화에 관해서라면, 가장 감동적인 언급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강연록(<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에 적은 짧은 후기에 등장한다. 그는 30여년 전 로베르 브레송의 <몽상가의 나흘 밤>(1971) 상영에 앞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관객에게 내준 과제를 떠올린다. “주인공이 어떻게 자살을 단념하는지 ‘잘’ 보십시오.” 영화가 시작되자 구로사와는 인물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전혀 나오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졌다”라고 당시의 기분을 묘사한다. 누군가 죽으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시도를 멈추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구로사와는 이어 자신이 본 장면을 이렇게 정리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행한다. 주위가 그에 반응한다. 그걸 촬영하기만 하면 ‘왜’라는 묘사는 아예 필요가 없다. 모두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다음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아무래도 그런 표현인 듯하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다섯개의 평범한 문장은 단순한 배열만으로 세계의 굳건하고 아름다운 내적 규칙에 도달한다. A가 세상에서 사라지려 한다-B가 A를 본다-A는 동작을 중지하고 세계의 시간은 지속된다. 대사도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응시의 반응만으로 벼랑 끝 존재가 구해진다. 아니, 세계가 누군가를 잃지 않는다. 이 얼마나 고요하게 이루어진 강력한 변화인가. 브레송은 말했다. “한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접촉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변형이 없이는 예술도 없다.” 구로사와가 쓴 반응의 마법에 사로잡혀 가물가물한 기억을 안고 <몽상가의 나흘 밤> 도입부를 다시 보는 동안, 그의 언술이 누락한 세부에 눈길이 갔다(돌이켜보면 구로사와가 말한 ‘반응’을 낯선 이가 던진 무언의 응시로 신비화해서 그 영향력을 과장한 쪽은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다리 난간에 서자, 그를 지나쳐 길을 가던 남자가 뒤돌아 여자에게 향하고 근처를 지나던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려 다리로 다가온다. 경찰차도 주변에 멈춰 상황을 주시한다. 남자가 여자 곁으로 와서 팔을 붙잡는다. 직접적인 대사와 동선과 행동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자살을 막는다. 여자를 죽음에서 삶으로 당기는 힘, 심오한 서사 내적 이유는 아니라 해도 여기 물리적인 동력이 명백하게 작용하므로 ‘왜’라는 묘사가 전무하다는 구로사와의 감상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왜’라는 묘사는 아예 필요가 없다”는 그의 확신에는 여전히 매혹적인 구석이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한 장면과 다른 장면을 잇는 ‘왜’가 고정된 의미로 주어진 게 아니라(행여 감독이 부여했더라도), 무형의 에너지로 장면 사이에 꿈틀대며 우리의 발견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 말에서 자유를 느낀다. <몽상가의 나흘 밤> 도입부에서 서로 모르는 채 흩어져 있었을 사람들의 숏은 마치 쇠붙이들이 어느새 자석에 이끌리듯, 한 장소에서 일시적일지언정 단단히 엮여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 순간은 증명한다. 인과는 미약해도 관계는 강력할 수 있다. 인과를 내세우지 않아도 관계는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관계에서 비로소 인과가 시작될 수 있다. 영화의 조각들은 그렇게도 꿰어진다. 영화의 장면은 서사의 세세한 인과율보다 같은 시공간을 지나는 존재의 운동 양식만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영화가 우연의 얼굴을 한 파편적 운동을 서로에게 반응하는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 그 움직임들이 바로 그 시간,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영화의 고유함이란 반응의 방식을 탐구하는 모험심과 반응의 시간을 조율하는 골똘함에서 빚어질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러한 비평적 단언은 얼마나 손쉬운가. 다행히도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만난 몇편의 작품들이 이 단언에 여러 개의 구체적인 길로 인도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켄 로치가 은퇴작이라고 선언한 <나의 올드 오크>(2023), 자파르 파나히가 출국금지 상태에서 찍은 <노 베어스>(2022)가 그들이다. 보이지 않는 바깥 보이지 않는 세계에 반응하는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현실의 압력을 견디면서도 그 현실을 자기 몸에 새기는 허구는 어떤 형상일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자문한다. 가난한 노동자 안사의 집에서 유일한 사치품은 식탁에 놓인 라디오, 지친 심신을 달래줄 음악의 거처다. 그러나 라디오를 켜자마자 바로 들려오는 소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을 전하는 뉴스다. 전쟁의 참상과 무고한 죽음을 알리는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비좁은 실내에 흐르는 장면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인물들은 마치 무엇도 듣지 못한 것처럼 동요하지 않고, 화면에도 별다른 균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음성은 이들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과 인상은 반복된다. 스펙터클도 극성도 제거된 바깥의 리얼한 목소리는 허구의 막을 찢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인물의 세계로 밀고 들어오면서도 정작 그들의 반응을 기대하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그 자세에는 무서운 무감함, 이상한 꼿꼿함이 있다. 이 음성의 정체를 체감하게 된 순간은 안사와 홀라파가 가라오케 바에서 우연히 만나 호감을 표현하는 대목에서다. 영화는 이들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지 않고 다소 고집스럽게 두개의 숏으로 나눠 나열한다. 안사를 주시하는 홀라파의 숏, 홀라파를 응시하는 안사의 숏이 교차할 때, 편집상 이는 둘의 시선 교환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화면 바깥 어딘가를 바라보는 안사와 홀라파 각각의 초상을 대면한다. 영화가 둘을 거듭 엄격하게 분리한 다음 이어 붙인다는 인상(이러한 방식은 이후 무대 위 가수와 객석의 관중을 담을 때도 고수된다), 그로 인해 느껴지는 두숏의 물리적, 심리적 간격과 시차에 의해 엉뚱한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두숏 사이에 오직 기운으로만 잠재된 지대를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감히 정착할 수 없는 곳, 이미지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 섣불리 허구의 서사로 만지기 어려운 곳, 라디오 음성이 불러오던 비가시적 바깥. 말하자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이 생략된 지대를 환기하고 의식해야만 다음 숏에 이를 수 있다. 안사와 홀라파의 눈은 보이지 않는 그 지평을 통과한 후에야만 비로소 상대의 얼굴에 닿을 수 있다. 그렇게 서로에게 도달한 둘의 사랑을 그저 달콤한 낭만과 기적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카우리스마키의 단출하고 평면적인 프레이밍은 동시대 피 흘리는 세상과 접속하기 위해 은밀하게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이 영화의 충만한 결말이 나는 불안하다. 마침내 한 화면에 모인 안사, 홀라파, 강아지 채플린이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바라볼 때, 앞서 영화를 지탱하던 간격, 거리, 시차의 흔적은 지워진다. 홀라파의 절뚝이는 걸음마저도 다른 요소들과 쾌활하게 조응한다. 이 장면의 리듬은 매끄럽다. 이들이 향한 곳에서도 라디오 음성은 들릴까. 이들의 여정은 보이지 않는 그 소리를 여전히 감지할 수 있을까. 나는 모두가 기쁘게 맞이한 결말을 헤집으며 어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림자를 찾아 자꾸 두리번거린다. 리액션의 결기 액션보다 큰 리액션이란 무엇일까. 단지 강도의 차원이 아니라, 관점과 태도의 측면에서 액션보다 ‘큰’ 리액션은 어떻게 일어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는 상상하고 실현한다. 흑백의 스틸 이미지 속, 백인 몇몇이 어딘가를 향해 사진 찍지 말라며 고함친다. 얼마 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멈추고 컬러영상으로 이 소란의 현장이 베일을 벗는다.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던 야라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제 막 폐광촌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이다. 버스 밖, 백인들은 이들을 반기지 않는 주민이다. 그중 한 남자가 카메라를 빼앗아 부순 후에야 사태는 끝난다. 분노하는 백인들의 초상은 난민과 관객의 눈에만 잠시 비친 뒤, ‘사진’이 되지 못한 채 증발한다. 그들이 적대와 혐오에 사로잡힌 자기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사라진다. 이제 영화는 생채기만 잔뜩 새겨진 도입부의 흑백 이미지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두 힘이 불화한다. 야라의 카메라 앞에서 마을 주민들이 꾸밈없는 얼굴로 화답할 때, 난민과 주민의 사진이 어둠 속에서 따스한 빛으로 영사되어 마을 역사의 일부가 될 때, 영화는 타인의 삶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카메라의 선한 역량을 되새긴다. 그러나 도입부의 성난 무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아니, 오해, 불신, 미움으로 요란한 첫 시퀀스의 상태는 변화의 계기를 밀쳐내며 점차 악화한다. 혐오를 합리화하는 자들은 처벌될 것인가, 개조될 것인가. 예상과 달리, 켄 로치는 이들의 장면에 더이상 접근하지 않고 서사의 방향을 틀어 다른 목적지로 향한다. 야라 아버지의 부음에 조문객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는 그다지 특별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아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끊임없이 나타나 조문 행렬을 이룰 때, 이 장면은 범상하지 않다. 가족조차 정확한 행방을 모르던 야라의 아버지, 영화에 제대로 나온 적도 없는 한 남자의 죽음은 어떻게 모두의 간절한 애도 대상이 된 것일까. 난민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을 마을 주민들이 그의 부음을 듣고 한순간 각성했다고, 공감과 연민의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들은 마치 이 대목을 위해 서사 바깥에서 모여들거나 동원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여기서 영화가 자아내거나 의도한 파토스는 개연성을 개의치 않는다. 다분히 인위적이고 웅변적인 비약은 그러나 서사적 타협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첫 시퀀스에 대한 켄 로치의 대답이다. 그는 도입부의 분노가 해결될 분기점을 마련하지 않는다. 이들의 상투적이고 맹목적인 논리, 호소, 감정에 서사적 해법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들을 영화 어딘가에 고립시킨다. 대신, 영화 안에서 구체적으로 서사화된 적 없으나 각자의 사연이 새겨진 육체성으로 타인의 죽음에 이제 막 동요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깨운다. 추모 장면에서 켄 로치가 믿는 건 익명의 존재들이 아직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의 가능성이다. 이들의 표정, 눈물, 걸음, 제스처, 시선은 도입부 스틸 이미지의 경직성에 대항하는 구체적이고 유연한 운동이다. 편협하고 공격적인 액션에 반응을 지연하다 마침내 주먹을 불끈 쥐고 함께 일어서는, 액션보다 확장된 리액션이다. 이 리액션의 결코 과시적이지 않은 결기를 나는 노장이 준비한 최후의 선언으로 깊게 받아들인다. 속박된 반응 부자유한 몸으로도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 반응이 구속된 몸을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노 베어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버티는 땅은 내내 흔들린다. 장면들은 구심점과 정박지를 찾지 못한 채 혼란하게 얽혀 있다. 내부와 외부, 다큐 형식과 극양식은 맞물리고, 입구와 출구는 헷갈린다. 그러나 여러 겹이 각축한다고 해도 이 영화는 어찌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 영화를 교통하는 모든 요소의 중심축에는 자파르 파나히가 있다. 오랜 시간, 이란 정부의 체포, 가택연금, 출국금지 명령에 항의하며 어떻게든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감독. <노 베어스>를 만든 감독이자, <노 베어스> 속 영화를 국경 근처의 시골 마을 자반에서 노트북으로 원격 연출하는 감독. 튀르키예에서 유럽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두 연인이 있다. 둘은 파나히가 화상으로 지휘하는 영화 속 인물이다. 동시에 이들은 촬영 중, 갑자기 가발을 벗어던지며 이 모든 게 가짜일 뿐이라고 체념하는, 아마도 실제 자신의 현실을 연기하던 사람들일 테다. 그 와중에 파나히는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마을 주민들이 다짜고짜 그가 찍은 사진을 달라며 집요하게 요구한다. 사진 속 여인이 결혼 약정을 어기고 함께 찍힌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남자도 파나히를 몰래 찾아와 사진을 넘기지 말고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 안 파나히는 촬영 현장에서도 시골 마을에서도 진퇴양난에 빠진다. 튀르키예와 자반에 흩어진 예측 불가능한 힘들이 그를 점차 옭아맨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건 자파르 파나히가 자처한 운동의 결과다. 이 힘들의 동선은 영화 밖, 창작자이자 시민인 파나히가 강제된 환경에서 여기저기로 던져본 공의 궤적, 뻗어본 가지의 방향이다. <노 베어스>는 한정된 영토에 묶인 그 자신을 일관될 리 없고 통합될 수 없는 궤적과 방향으로 무모하게 당겨보고 팽창해보고 해체해보려는 시도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노 베어스> 속 파나히의 얼굴과 달리, 이 영화는 자기 몸을 찢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그 시도에 ‘나’의 육신, 영혼, 상상력, 창작 의지는 얼마나 반응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의 위축된 현실은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까. 자파르 파나히라는 다큐멘터리, 자파르 파나히라는 리얼리티보다 더 중대하게 이 허구를 추동하는 사실은 없다. 세 인물이 죽는다. 사진 속 연인은 마을을 탈출하려다 국경 수비대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튀르키예 촬영장을 이탈한 여자배우는 해안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죽고 말았으니, 망명의 옅은 가능성마저 모두 소멸한다. 무엇도 남지 않은 실패다. 파나히는 영화 안에서라도 끝내 환상을 허락하지 못한다. 영화 초반, 그가 튀르키예로 넘어가려 언덕을 올라 국경선을 밟은 순간, 흠칫 당황하며 마을 숙소로 다시 걸음을 옮긴 것처럼. 결말에서 그는 피투성이가 된 남녀의 시신을 지나쳐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영화가 끝나기 직전, 불현듯 차를 세운다. <노 베어스>는 자파르 파나히를 어디로 데려다준 것일까. 자파르 파나히가 도착한 이곳, 혹은 돌아갈 그곳이 어디인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의 세상은 <노 베어스> 이전에서 몇뼘이나 더 움직였을까.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그의 내면에는 답이 있을까. 유희의 일격 윤가은의 2016년작 <우리들>에는 초등학생 소녀 선과 말썽꾸러기 남동생 윤이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매 모두 친구와 다퉈 선의 이마에는 밴드가 윤의 눈두덩이에는 붉은 멍이 보인다. 싸움의 상처를 안고 집에 돌아온 남매의 우울한 풍경이 단숨에 진귀한 차원으로 도약하는 건 전적으로 윤 덕분이다. 선이 동생을 맨날 다치게 하는 친구 연우를 탓하며 속상해하자, 윤이 이번에는 맞서 때렸다고, 그래서 연우가 다시 자기 눈을 친 거라고 의기양양해한다. 다음 상황을 궁금해하는 누나에게 동생이 태연하게 말한다. “그래서 같이 놀았어.” 이 어이없는 대답에 선은 분을 참지 못한다. “다시 때렸어야지!” 그러자 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는 놀고 싶은데. 이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어린 남매의 대화에 대단한 철학이나 의미가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정당하고 적합한 반응이 때로 얼마나 습관적이고 반동적인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지루한가. 저 귀여운 소년의 본능적인 반문이 심장에 날카롭게 꽂힌다. 때린다. 다시 때린다. 다시 때린다. 다시 때린다…. 세계는 ‘때린다’라는 행위만으로 둔탁하게 불어나는 무색무취의 자기동일적 덩어리가 될 것이다. 반응의 연쇄는 작동하겠지만, 반응의 성질에는 아무런 차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너덜너덜하게 제 몸을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소년의 기상천외한 반응의 태도야말로 우리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혁명이라고, 가끔은 천진하게 상상하고 열심히 골몰해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유희의 욕망이 판을 갈아엎으리라. 구태의연한 인과의 사슬을 끊으리라. 두려움 없이 단절하고 용감히 뒤흔들고 즐겁게 끌어안는 ‘다른’ 반응으로 영화는 다시 살리라. 이 마음에 닿으려 긴 글을 돌아왔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영화의 육체와 마음을 비평의 기억과 선율로 연주합니다

[masters’ talk] 우리가 극장 영화를 추앙하는 이유, <밤낚시> 제작·주연 손석구에게 이제훈이 묻다

낚기 전까지는 모른다. 무엇이 낚일지. <밤낚시>가 관객에게 영화 안팎으로 제공하는 체험도 비슷하다. 한산한 도로를 통과해 인적 없는 전기차 충전소에 도착한 남자는 공중에서 무얼 잡아채려는 걸까? 1천원으로 10여분의 단편영화 티켓을 판매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6월14일 CGV에서 단독 개봉하는 <밤낚시>는 이 탁 트인 질문들에 따를 어떠한 대답도 들을 준비가 된 현대자동차와 손석구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탄생했다. “아이오닉5에 탑재된 카메라의 시점에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이로써 올 초 콘텐츠 제작사 스태넘을 설립한 후 프로듀서로서 첫 극장 출항을 앞둔 손석구는 말했다. “왓챠의 숏필름 프로젝트 <언프레임드> 제작자로서 제게 단편 연출 기회를 줬던, 먼저 이 길에 도전한 ‘동생이지만 선배인’ 배우 이제훈의 감상이 무엇보다 궁금하다”고. 그렇게 <씨네21> 지면 위에서 성사된 두 친구의 대화는 그들이 줄곧 카페에서 혹은 통화로 해왔다는 수다의 연장선상에서 한결 깊어졌다. 이제훈이 모더레이터로 나선 <밤낚시> 코멘터리를 듣고, 손석구가 인터뷰어가 되어 끌어낸 ‘제작자’ 이제훈의 초심까지 살피고 나니 단편영화 서너편은 너끈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이제훈 <밤낚시>를 두번 봤습니다. 너무 재밌어서 깜짝 놀랐어요. 보통 이런 기획으로 영화를 만들다보면 작품이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어 연출과 연기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을 법한데, <밤낚시>는 기획, 연출, 연기의 합이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 보고 나서 너무 재밌어서 한번 더 봤어요. 손석구 두번 봐도 20분 좀 넘게 걸리죠. 이제훈 제약이 있는 공간에서 숏이 5개 정도로 나뉜 것 같아요. 자동차의 정면과 뒤, 양 사이드…. 손석구 총 6개예요. 자동차 앞에 두개, 옆에 두개, 뒤에 하나, 그리고 안에 하나. 이제훈 그 안에서의 창의적인 표현이 영화로 잘 구현돼서 짧게 느껴졌어요. 뒤에 스토리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속편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이라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더 쓰신다면 반가울 것 같아요. 석구 형은 어떻게 해서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손석구 자동차에 달린 카메라의 시점으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것이 현대자동차의 첫 기획안이었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잡힌 기획안은 어떤 긍정적인 한계선을 긋는 것과 같잖아요. 예를 들어 ‘이 영화는 한 남자가 탈출하는 이야기야. 시대, 공간, 배경은 이렇고, 이 남자에겐 어떤 한계점이 있고…’ 하는 식으로 이야기적으로 긍정적인 한계들을 지어놓을 수 있죠. 반면 카메라 같은 장비에 제한을 두면 영화적으로 뭔가 할 수 있는 폭이 굉장히 좁아져요. 그만큼 큰 도전이고요. 그래서 호기심이 자극됐어요. 이거 한번 해보면 좋겠다 싶었죠. 여담이지만 곧 개봉할 <탈주>의 각색을 도운 문병곤씨가 <밤낚시>를 연출했어요. 병곤이는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장편을 같이 준비하는 사이라 단편도 함께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연출을 제안했어요. 그 친구가 창의력이 뛰어나거든요. 한계가 주어졌을 때도 아주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밤낚시>의 컨셉을 잡았어요. 이제훈 제목만 들었을 때는 밤에 호숫가에 가서 물고기 잡는 영화인가 했는데 SF, 스릴러, 미스터리가 다 될 수 있는 영화였어요. 참신한 아이디어로 쓰인 시나리오, 그걸 살린 연출에 빨려 들어가면서 영화를 봤어요. 손석구 병곤씨가 처음에 <노인과 바다>에서 <밤낚시>의 컨셉을 따왔어요. 남자가 바다에 나가서 벌이는 사투의 절반은 곧 기다림이잖아요. 그 기다림 끝에 무언가를 낚는 거고요. 시나리오작가로서 글쓰는 것도 너무 고독한 일이잖아요. 영감을 기다리는 사투 끝에 하나의 창작물이 나오는 과정에 빗대서 이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다더라고요. 이제훈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의 창작욕과 상상력이 전해져서 영화가 더 짧게 느껴지고, 끝나는 게 아쉬웠어요. 이야기가 더 있을 것만 같아! 손석구 시나리오와 함께 주인공의 전사, 후사도 다 준비했어요. 그런 게 있어야 우리가 보여줄 파편이 단단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그런 기대도 해요. 어떻게 보면 숏폼 형태의 스낵무비를 만든 것도 도전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 관객에게 익숙한 장편으로도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이야기 자체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으니까요. 제훈씨랑 같이할 수 있으면 좋고. 이제훈 끼워주시면 얼마든지! (웃음) 영화는 모두가 함께 만드는 것 이제훈 문병곤 감독님과 인연은 오래됐지만 함께 작업한 건 처음이었죠? 손석구 그렇죠. 문병곤 감독은 제가 연기를 하고 싶어 했던 시절에 지인을 통해 우연히 만난 사이예요. 그 친구도 연출을 하고 싶어 했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몇년 후 이 친구가 뉴스에 나오는 거예요. <세이프>라는 단편영화로 칸에서 단편경쟁부문 황금종려상을 받고 인터뷰를 하고 있더라고요. ‘쟤는 됐구나! 부럽다’ 이러면서 나도 열심히 해야지 했는데, 훗날 저도 데뷔를 했고, <뺑반>이라는 영화를 찍게 됐어요. <뺑반>의 한준희 감독님과 병곤씨가 친해서 현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그때부터 ‘우리도 언제 한번 같이해보자’라고 한 게 벌써 7, 8년 전이네요. 영화 한편이 투자를 받아서 만들어진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잖아요? 이제훈 요즘엔 더 기적 같은 일이죠. 손석구 우리도 그 기적을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에요. <밤낚시>는 현대자동차의 비전을 보여주는 광고라 할 수 있겠죠. 현대자동차는 유엔개발계획(UNDP)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긍정적인 작업을 많이 해온 걸로 아는데, 우리에게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왔을 때 서로의 니즈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우린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 현대자동차는 그런 아티스트와 컬래버를 해서 단순히 제품을 광고하는 것을 넘어 브랜드가 가진 예술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싶어 했으니 너무 잘 맞았죠. 이제훈 훌륭한 조합인 거죠. 기업에서 창작자들에게 자유를 주면서 작업할 수 있고. 손석구 100%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긍정적인 한계만 주어졌어요. 그런데 그건 어떤 시나리오를 쓰든 마찬가지잖아요. 우리는 이 프로젝트의 순수성을 어디서 봤냐면, 사실 작품을 만들고 나서 어떻게 활용할지 어디서 어떻게 틀지 정해놓지 않았어요. 그러다 감독과 제가 극장으로 한번 가보자고 결심한 거죠. 영화를 찍을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극장에 어떤 활력소가 필요한 때라고 생각해요. 이제훈 무척이나요. 손석구 어떤 극장은 우리의 도전에 동참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역시나 좋게 봐준 곳이 있었고, 이렇게 제훈씨와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까지 생겼네요. 이제훈 CGV에서 개봉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관객이 천원을 지불하면 단편 한편을 볼 수 있도록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파격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시도로 느껴졌어요. 손석구 저희끼리 회의하면서 그런 얘길 했어요. 다이소에서 천원짜리 물건을 사는 경험은 늘 재밌잖아요? ‘천원에 이런 것도 팔아?’ 하면서 가게를 둘러보죠. 극장에서의 경험도 그렇게 재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시작이었어요. 저녁에 밥 한끼 먹고 남는 시간에 잠깐 볼 수 있는 영화, 친구한테 ‘천원 내고 극장에서 영화 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인 것만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또 모르잖아요 이렇게 예산이 적은 스낵무비가 잘되면 새로운 감독, 배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의 허들도 낮아질 테니까요. 이제훈 음악부터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폴리 사운드 하나까지 너무 디테일하게 작업해서 무조건 극장에서 봐야 하는 작품이에요. 관객들이 큰 스크린으로 즐겨주셨으면 좋겠어요. 형도 배우로서 고생을 많이 했겠더라고요? 차에서 벌어지는 액션이! 손석구 저는 문 감독님한테 그랬어요. <밤낚시>를 찍는 3일이 <범죄도시2> 촬영보다 힘들었다고. 이 작품을 찍으면서 온몸에 멍이 들었거든요. 감독님도 저한테 되게 미안해했죠. 이게 또 영화 만드는 묘미인데, 제가 알기로 처음에는 감독님이 <밤낚시>를 어느 정도의 서정성을 가진 영화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와 <댓글부대>도 같이 찍은 조형래 촬영감독이 대본을 보더니 ‘액션이 좀 들어가야 되겠다’라며 의견을 내고, 그렇게 무술감독을 찾아가니 ‘이런 컨셉의 액션이면 좋겠다’라고 하면서 각자의 아이디어가 영화에 조금씩 첨가되기 시작했어요. 영화는 역시 다 같이 만드는 거구나를 느꼈죠. 저도 이렇게 날아다니는 정도의 액션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웃음) 현대자동차 분들도 고민이 컸을 거예요. 자동차에 달린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거라 영화에는 자동차가 안 나온다고 했을 때도 그걸 허락해주셨어요. 차를 박살내가면서 찍었는데, 아이오닉5도 고생을 많이 했죠. 이제훈 그래서인지 참여하는 모든 스태프의 영혼이 작품에 진하게 들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아요. 손석구 다들 무언가 시도해보는 재미를 느끼며 작업한 것 같아요. 미술, 무술, 촬영, 음향팀 전부요. 단편은 장편으로 데뷔하기 위한 포트폴리오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는 단편이지만 장편 상업영화가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를 끌어오고 싶었어요. 이 영화에 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게 <밤낚시>는 제가 스태넘이라는 제작사를 차리고 처음 제작한 영화예요. 기획부터 배급까지 온전히 다 책임져보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영화 만드는 단계를 하나씩 다 경험했는데, 그중에서 제가 가장 즐긴 부분이 사운드였어요. 믹싱을 한국팀과 영국팀이 번갈아가면서 했는데, 그러면서 사운드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처음엔 극장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2 채널 스테레오로만 믹싱을 했어요. 뒤늦게 리마스터링을 했는데, 극장에서 서라운드 시스템 채널로 잘 나올지 아직도 너무 궁금해요. 사운드가 영화의 절반이라는 말이 정말 맞구나 싶어요. 같은 새소리, 자동차 소리라도 해외 믹싱팀이 하면 뉘앙스가 다르니 영화가 좀더 이국적으로 느껴질 법한 부분도 있다는 걸 경험했고요. 이제훈 그런 점에서도 <밤낚시>는 관객이 극장을 찾아 돈을 내고 볼 때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영화예요. 기획부터 제작 과정, 연출, 홍보, 마케팅, 이제는 배급까지 칭찬해주고 싶은 프로젝트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도 이런 프로젝트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손석구 갑자기 궁금한 게 이제 제훈씨도 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제작도 겸하고 있잖아요? 여기서 다 공개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 어떤 계획이 있나요? 이제훈 계획은 여러 가지로 많이 하고 있는데요, 지금 제가 운영하는 제작사는 OTT 시리즈로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될 것 같아요. 출연진은 아직 확정짓지 않았는데 열심히 구상하고 있어요. 그 작품에 제가 배우로 참여할지에 대해선 열려 있어요. 제가 타이틀롤을 맡을 수도 있지만, 다른 역할도 충분히 할 수 있고요.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제작사를 시작했는데, 창작에 대한 욕심이 생기다 보니 드라마까지도 생각하게 됐네요. 형과 함께했던 <언프레임드> 프로젝트가 도움이 많이 됐어요. 색다른 경험의 영화이길 손석구 우리 둘 다 배우잖아요? 작품을 만든다는 관점 자체는 똑같지만 제작자로서 그 롤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죠. 제작사를 차려서 영화 만드는 일에 조금 더 깊게 관여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어요? 개인적으로도 좀 들어보고 싶었어요. 이제훈 한편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첫 시작은 ‘글’이잖아요. 배우로서 그 글을 보면서 작가의 의도나 감독의 연출을 상상하고,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그 상상이 일치할 때 너무 좋죠. 내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아이디어가 더해지면 더 기쁘고요. 그런데 글에서 받은 인상과 다른 의견이 나오면 그걸 따라야 할지 말지를 두고 고민이 생기잖아요? 그걸 따르기로 했을 때 과정을 돌아보면, 배우로서 당연히 연기에 집중하는 게 맞지만 내가 표현한 것이 편집될 수도 있고, 의도한 대로 나오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렇게 시나리오를 보며 상상한 것과 다른 결과물을 인식하고 아쉬웠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손석구 되게 솔직한 이야기네요. 이제훈 그랬을 때, 내가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었죠. 좀더 원활하고 긴밀하게 소통해서 서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작품 하나하나를 찍으면서 깨달았어요. ‘나는 연기만 잘하면 되지’가 아니라 배우로서 감독이나 다른 파트에 있는 사람들하고도 얼마든지 내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 좋은 부분은 응원하고, 아쉬운 부분은 지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소통에 있어 제가 많이 열리면서, 감독님과 작가님, 또 많은 스태프들에게 제 의견을 들려주면서 함께 작품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어요. 그게 작품을 만들어가는 올바른 방향이 아닌가 싶어요. 손석구 제작을 병행하겠다고 했을 때 대부분은 응원해줬지만 간혹 ‘네 그런 행보가 안 좋게 비칠 수도 있다’라는 얘길 들었어요. 제훈씨도 분명 이런 얘길 들어봤을 텐데, 그럴 땐 어땠어요? 저는 ‘진짜 그런가?’ 하면서 걱정도 되고 그랬거든요. 이제훈 저도 그런 이야길 많이 들었는데, 궁극적으로 내가 왜 제작을 하려는지를 생각했어요. 좋은 작품을 보고 싶으니까. 내가 참여한 작품에 스스로 만족하고 싶으니까. 이게 제 대답이에요. 연기에 대해 부족함을 항상 느끼니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는데, 연기 말고도 수많은 요소가 모여서 작품을 완성하잖아요. 그런 부분의 아쉬움을 왜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어요. 관객, 시청자들에게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경험을 선사하고 싶고요. 손석구 ‘하나만 잘해야지, 제작하다가 연기도 잃고 다 잃는다!’ 주위에서 이런 얘기들도 하잖아요. 이제훈 연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 맞죠. 그런데 콘텐츠 시장, 특히 영화의 역사가 100년 이상 지속되는 걸 지켜보면서 제가 품은 의문이 있어요. 1990년대, 2000년대, 그리고 더 오래된 고전영화를 보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는데, 지금 나오는 작품이 예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더 좋은 이야기인가? 내 기억으로는 옛날에 더 재밌는 작품이 많았던 것 같은 거죠. 지금 우리는 배우로서 현재 작품에 빠져서 작업하고 결과물을 보여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 부분이 어떨 땐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부끄럽더라도 결과물로 보여줘야 하는 입장이라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제작에 참여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부담일 수도 있지만 기회가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이젠 이 작품이 안됐으니 다음에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하기보단 한 작품 한 작품을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임해요. 손석구 우리 저번에 만났을 때도 제훈씨가 그렇게 얘기했잖아요. ‘나는 영화 만드는 일에 그냥 올인했다!’ 그 말이 되게 인상 깊어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얘기했어요. 친구가 ‘너, 제작에도 참여하면 더 바빠질 텐데 괜찮겠어?’ 하고 물으면 ‘제훈이는 개인 시간이나 여행도 포기하고 이것만 한대. 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했죠. (웃음) 제훈씨가 그런 말도 했잖아요. 지금 나이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라고. 그것도 맞는 얘기인 것 같아요. 더 늙으면 못할 것 같아! 이제훈 그러니까요. 이렇게 열정을 불태우면서 하기엔…. 그런데 형은 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손석구 마음은 가득한데 몸이 힘드니까…. 이제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함께하는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손석구 이번에 개봉하는 <탈주>에서도 (구)교환이 형을 직접 캐스팅한 거예요? 이제훈 제가 직접 캐스팅을 했다기보다는 교환이 형이 출연해주는 게 제 바람이었죠. 손석구 제훈씨의 입김이 캐스팅에 작용한 건가? 이제훈 제가 시상자로 청룡영화상에 갔었는데, 당시 제게 주어진 질문이 ‘감독으로서 누구를 캐스팅하고 싶나’였어요. 그런데 대답하기가 좀 부끄러운 거예요. (웃음) 오히려 그냥 ‘내가 배우로서 같이 작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게 구교환 배우다’라고 한 거죠. 손석구 그것도 제작자다운 능력인 거지. 그때 한창 모두가 교환이 형을 데려가고 싶어 했는데 선점한 거잖아요. 이제훈 시상식 다음날 바로 나무엑터스 김종도 대표님을 통해 교환이 형한테 시나리오를 보냈어요. 교환이 형이 시나리오 잘 봤다면서, 제가 공식 석상에서 프러포즈를 한 게 <탈주>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죠. 손석구 우린 알지만, 캐스팅은 전쟁이잖아요. 듣기로는 촬영 들어가기 1년 전, 1년 반 전에는 시동을 걸어야 캐스팅도 된다면서요. 저도 캐스팅을 당하는 입장이지만 캐스팅하는 분들을 보면 캐스팅이 그 자체로 타이밍의 예술 같거든요. 캐스팅이 정말 쉽지 않잖아요. 제훈씨가 어떻게 보면 그걸 해낸 거네요. 이제훈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요. 같이 작품을 하면서 더 구교환이라는 배우의 매력에 빠져들었어요. 형은 뭐랄까…. 손석구 상대를 긴장하게 만들죠. 어디로 갈지 모르겠는 배우잖아요. <탈주>는 아직 개봉은 안 했지만 친구가 참여한 작품이기도 하고, 제훈씨도 나오니까 예고편을 여러 번 봤거든요. 교환이 형도 이미지 변신을 한 것 같던데, 그런 역할로 섭외를 시도한 제훈씨의 선택도 탁월해 보였어요. 이제훈 오랜만에 극장 스크린을 통해 보여드릴 영화라 너무 궁금하고 떨리네요. 손석구 그래도 이제 나름 한국영화가 개봉을 꽤 하는 것 같더라고요. <탈주>와 비슷한 시기에 여러 편이 나오는데, 난 좋은 것 같아요. 이제훈 예전에는 이렇게 많이 나왔잖아요? 요즘에는 극장 개봉에 소극적이다 보니 내년에 극장에 걸릴 한국영화가 얼마나 있나 생각해보면, 진짜 수적으로 많지 않아요. 그래서 이런 개봉 기회가 더 소중하죠. 손석구 맞아요. 그리고 무섭죠. 사실 나는 다시 영광의 시대가 올 거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면서도 무섭기도 해요. 언젠가 영화가 더이상 핫한 문화상품이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이제훈 창작자의 의도를 살려서 좋은 시나리오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같이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손석구 개인적으로 극장 영화를 좀더 하려고 노력해요. 요즘에는 들어오는 작품의 70%가 OTT 작품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영화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는 것 같아요. 이제훈 저도 무엇보다 극장이 주는 재미와 감동이 좋아서 계속 극장에서 상영하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밤낚시>를 보면서 더더욱 관객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느꼈어요. 이런 시도가 계속될 수 있는 기회가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손석구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때의 카타르시스가 확실히 있잖아요. 이제훈 <밤낚시>가 특히 그럴 거예요. 요즘 더워졌잖아요? 관객이 짧은 시간 동안 극장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몰입하고 짜릿하게 나올 수 있는 영화예요. 손석구 관객들로부터 색다른 경험을 했다는 평을 가장 듣고 싶어요. 어찌됐든 저는 <밤낚시>라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온전히 함께하면서 추억도 많이 생겼고, 어려운 순간들도 있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주어진 시간이 짧게만 느껴지네요. 하고 싶은 말이 뭉쳐 있다 보니 기억은 또 안 나고. (웃음) 그래도 제훈씨와 이야기할 수 있어 뿌듯했고, <밤낚시>도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자랑스러운 작품으로 남을 거예요. 색다른 경험일 거고요. 그러니까 6월14일 CGV에서 개봉하는 스낵무비 <밤낚시>,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이제훈 <밤낚시>를 연출한 문병곤 감독님도 앞으로가 정말 기대됩니다. 석구 형과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계시다니 더 기대가 되고요. 이 시너지에 저도 동참하고 싶네요. 오늘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어요. 손석구 제 친구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문병곤 감독은 독특한 감성의 시네필이에요. 정말 무언가가 될 것만 같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그날이 오기를 바라요. 병곤이와 제훈씨와 제가 현장에서 만날 날을! <밤낚시> 문병곤 감독은 문병곤 감독이 칸을 매료한 시간은 단 20분. 그는 혼자 사는 노인의 절망과 희망을 7분 안에 포착한 <불멸의 사나이>(2011)로 제64회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았고, 불법 환전소를 배경으로 한 13분간의 사투 <세이프>(2013)로 제66회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트로피를 품에 안은 후 만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흥미 있는 문제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차근차근 공부한다”고 말했던 그는 “자동차에 달린 카메라들로만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밤낚시>를 찍었다고 한다. 그렇게 소설 <노인과 바다>, 언젠가 본 참치 낚시 영상에서 모티프를 얻어 <밤낚시>에 임한 그는 오랜 친구인 손석구와 함께 첫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인터뷰] 당신의 기억을 기다립니다, 1만 관객 돌파한 <목화솜 피는 날>과 4·16재단 문화콘텐츠공모전

4·16재단 문화콘텐츠공모전은 안전한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공모전을 통해 이소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장기자랑>과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화 프로젝트의 일환이기도 한 장편 극영화 <목화솜 피는 날>이 개봉해 관객과 만났다. <목화솜 피는 날>이 1만 관객을 막 돌파한 주말을 지나, 올해 4·16재단 비상임 이사 임기를 마친 심재명 명필름 대표와 박래군 4·16 재단 운영위원장, 그리고 <목화솜 피는 날>의 구두리 작가를 한자리에 초대했다. 세월호 영화로는 최초로 선체 내부에서 촬영한 <목화솜 피는 날>의 의의, 개봉 상영회에서 4·16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이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위로하는 연대의 풍경 등을 나누는 사이에도 ‘세월호 영화’는 조금씩 앞으로의 10년을 향해 나아갔다. 6월24일부터 7월12일까지 접수를 받는 올해 공모전 역시 생명·안전·약속의 가치를 전하는 장편 극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에 폭넓게 열려 있다. - 얼마 전 구두리 작가의 백상 연극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연극계에 오래 몸담고 있다가 <목화솜 피는 날>로 시나리오를 처음 썼다. 며칠 전 1만 관객을 돌파했는데, 소회는 어떤가. 구두리 희곡에서는 무대장치에 의존해야 하니까 장소가 바뀌면 가령 “여기가 바다야!”라는 말을 넣어줘야 한다. 시나리오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배운 셈이다. 참사 당일, 나는 지하 연습실에서 한참 머무르다가 중국집에 가서 배우들과 짜장면을 먹으면서 전원 구조 소식을 보고 안도하며 다시 연습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연습실에서 나왔을 때 배가 가라앉았고 아이들이 구조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때의 충격과 부끄러움이 이 작업으로 나를 이끌었다. 지금까지 10년간 조금씩 취재하면서 만났던 유가족, 활동가 분들을 영화 개봉 후 만났을 때 개인적으로도 나 자신이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게도 어떤 살풀이 같은 작업이었다. - 연분홍치마가 제작하고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가 참여한 <목화솜 피는 날>은 지난해 4·16재단 문화콘텐츠공모전 입상작이기도 했다. 심재명 4·16재단 비상임 이사를 맡게 되었을 때 영화 일을 하는 내가 재단에 무슨 보탬이 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면서 영상 콘텐츠 공모전을 통해서 작품이 배출될 수 있게 돕는 창구를 마련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일반적인 시나리오 공모전과 달리 4·16 참사, 그리고 사회적 재난에 관한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는 소재 및 주제의 제약 때문인지 운영 초기에는 지원자들이 없거나 공모전에 뽑혀도 만들어지기 어려운 경우가 더러 있었다. 지난해 <장기자랑>, 그리고 이번 <목화솜 피는 날>처럼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을 만나는 작품이 늘고 있는 것이 정말 기쁘다. 특히 <목화솜 피는 날>은 영화적으로 너무나 신뢰하는 김일란 감독님과 연분홍치마의 작업이라는 점, 드라마계 스타 감독인 신경수 PD의 영화 데뷔작이라는 점도 놀랍다. 박래군 <목화솜 피는 날>은 유가족들의 지지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점, 특히 앞으로 한동안 세월호 내부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생각한다. 지난해 정부가 안전 문제를 이유로 선체 내부 진입을 갑자기 금지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2026년에 세월호 선체를 목포 고하도로 옮겨 추모 공간을 조성할 예정이라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 <목화솜 피는 날>을 준비하며 세월호 10주기 영화라는 점에서 작가로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 구두리 작업 초기의 가장 큰 중압감은 유가족 분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었다. 글이 풀리지 않아 한자도 못 쓰는 상황에서 크랭크업을 4개월 앞둔 무렵 목포에 내려가게 됐다. 그때 선체 내부를 동수 아버님이 가이드해주셨다. 3시간 정도를 돌면서 꼼꼼히 봤다. 동수 아버님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맑고 담담한 에너지로 선체 내부를 설명해주셨다. 그에게서 받은 인상을 작품에도 녹여냈다. - 그 순간을 영화 에필로그에서 박원상 배우가 재현했다. 딸을 잃은 병호(박원상)는 참사 트라우마로 기억상실증을 겪는 동안 다른 유가족들과도 갈등하다가 천천히 일상을 회복하게 된다. 박래군 구두리 작가가 실제로 만난 동수 아버님은 세월호에 가장 많이 드나든 사람이다. 어느 유가족도 처음 세월호 안에 들어가면 오래 있지를 못한다. 동수 아버님이라고 처음엔 왜 안 그랬겠나.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 담담히 설명해주지만 그도 엄청나게 어려운 시간을 거쳤다. 그사이에 병도 나고 망가지기도 하면서 지금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구두리 처음 시나리오를 탈고하고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 피드백을 받으러 간 적 있다. 그때 엄청나게 긴장했었다. 이런 유가족을 묘사해도 될까? 그런데 유가족 분들은, 우리는 이것보다 더 심하게 망가지고 치열하게 싸웠다면서 내가 쓴 시나리오는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다고 하시더라. 그때 한시름 놓았다. 개봉 후 참사 유가족들을 모셨던 상영회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특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 그동안 공모전을 통해 나온 또 다른 훌륭한 작품들을 소개해준다면. 심재명 <말아톤>을 만든 정윤철 감독이 김탁환 작가의 소설 <거짓말이다>를 원작으로 김관홍 잠수사의 이야기를 썼고 2021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정윤철 감독의 시나리오는 재난을 스펙터클화하지 않고, 김관홍 잠수사 개인을 지나친 연민의 시선으로 그리지도 않았기에 매우 기대되는 작품이지만 물속 구조작업을 표현해야 하는 등 제작이 만만찮은 프로젝트인 건 사실이다. 드라마 단막극으로 응모한 작품 중에도 우회적으로 은유하거나 상징을 통해 훌륭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 꽤 있다. 이런 작품들이 꼭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10주기를 지나 앞으로의 10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다. 영화가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박래군 4·16 세대 이후의 미래세대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활동을 하면서 매번 자각하는 건, 지금쯤이면 모두가 알겠지 싶은 때에 여전히 미래세대는 모른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10년이 지났으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잘 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현장에 나가고 직접 다크 투어에 관한 책도 쓰고 했지만,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전하는 방법에 대해선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심재명 죽은 자들, 희생자들과 같이 사는 사회임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와주길 바란다. 죽음을 터부시하고 정부의 무능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문화 속에 우리는 너무 오래 있었다. 가령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서 이것이 자본주의의 폐해이기도 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영화가 나왔으면 한다. - 명필름은 꾸준히 사회적 메시지가 녹아든 작품을 제작해왔다. 올해 4·16재단 비상임 이사 임기를 마쳤는데, 그동안을 돌아보면 어떤가. 심재명 2014년에 광화문에서 영화인들이 동조 단식을 했다. 당시 문소리 배우가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안되지 않냐고 해서,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와 함께 뜻을 세워서 단식 운동을 시작했고 광화문에서 기자회견도 했다. 박찬욱 감독, 배우 송강호 등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인들이 흔쾌히 나섰다. 무엇보다 단식하던 날 밤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밤새 아이들 모습이 담긴 핸드폰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몸 깊은 곳에 새겨졌다. 영화인으로서 사회적 참사에 힘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그날 이후로 계속하게 된 것 같다. 관객은 언제나 영화를 통해 새롭게 경험하고 배우게 된다.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면서 여성 핸드볼팀의 상황을,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면서 분단의 현실을, <카트>를 만들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세계를 비로소 제대로 직면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앎으로 다가갈 수 있는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 - 박래군 운영위원장은 지금껏 40년 가까이 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현장에서 활동하면서도 영화, 그리고 문화예술 콘텐츠의 힘이 참사의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박래군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투쟁 때 분향소에서도 콘서트를 열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오고 이야기가 전달된다는 걸 내 몸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아픈 기억일수록 문화적인 방식으로 기억해야만 오래간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합창, 연극, 공방 수업 등을 열어서 버텼다. 과거에 피해자들은 아파하다가 흩어졌다. 지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국가는 재난 참사를 우연히 벌어진 불행한 사고로 취급했다. 그래서 대충 보상해주고 빨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외딴 풀숲에 위령탑이 숨겨져 있는 식이다. 안산 도심 한복판, 시민들이 많이 애용하는 곳에 생명안전공원을 만들자고 애쓴 데엔 이런 배경이 있다. 세월호는 2026년에 목포 고하도로 옮겨 2029년 추모 교육 공간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하도에 생길 추모 공간은 인양한 여객선을 보존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정말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다. 말하자면 세월호는 우리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재난 참사를 대하는 프레임 자체를 바꿨다고 해야 할까. 사고 프레임에서 사건 프레임으로 위치를 바꿨다고도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이전의 참사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 보상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해지고 사회적 치유를 논하게 된다. 이 프레임 전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 가족들에게 세월호 유가족을 따르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변화의 과정에 있다. - 앞으로 4.16 재단 문화콘텐츠 공모전에 참여할 창작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심재명 지금까지는 소재와 주제의 제약 탓인지 출품작간의 완성도에 격차가 꽤 있었다. 세월호 10주기를 지나고 <목화솜 피는 날>처럼 개봉작도 나왔으니 이번 6회 공모전엔 우선 더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길 바란다. 꼭 세월호 참사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이야기, 사회의 아픔을 은유하는 이야기로 넓게 접근해도 좋겠다. 용기를 내서 지원해달라. 구두리 창작자로서는 재현의 어려움, 윤리적인 고민에 너무 짓눌리지 말라고 독려하고 싶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기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다양한 방식을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다.

[특집] 불안은 사춘기를 잠식한다, <인사이드 아웃2>가 보여주는 사춘기의 감정적 성장의 의미에 대해

전세계로부터 사랑받은 <인사이드 아웃>이 속편을 공개했다. 전편 개봉 이후 9년 만이니 당시의 어린이 관객은 청소년이 되고 청소년 관객은 어른이 됐을 시간이다. 1318세대에 접어든 라일리는 관객의 달라진 생애주기, 경험, 가치관을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사 와 낯선 환경, 새로운 친구,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선생님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던 라일리는 이제 일상생활에 안정적으로 적응을 마쳤다. 그레이스와 브리,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부 활동 정도로 좋아하던 하키는 어느새 꿈이자 목표가 되었다. 신체적 변화도 생겨났다. 볼과 턱 사이에 오돌토돌 여드름이 올라오고 몸도 커져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는 더이상 맞지 않는다. 어느새 라일리도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이전보다 더 바깥으로, 더 멀리 바라보며 여느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처럼 라일리도 감정 기복이 심하다. 하루에도 스무번씩 마음이 바뀌고 표정도 울었다 웃었다 극과 극을 달린다. 라일리의 다섯 가지 중심 감정이 반응을 조절하려 제어판 앞에 서보지만 어제와 같은 강도로 버튼을 눌러도 이상하게 과잉 반응이 나간다. 사춘기의 또 다른 이름인 질풍노도의 시기는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를 뜻한다. 속된 말로 미친 시기. 그럼에도 이 널뛰는 변덕이 답답함이 아닌 코믹함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라일리에게 관객이 공감할 보편성을 구체적으로 부여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나왔고, 지나고 있는 시기라는 공통점을 통해 라일리의 예측 불가한 반응은 모순적이게도 가장 쉽게 예측된다. <인사이드 아웃2>는 라일리가 자극받는 출처의 범위를 전편보다 넓고 선명하게 확장했다. 1편에서 이사로 인해 친구들과 멀어지는 게 두려웠던 라일리가 혼자 조용히 속앓이를 한다면 <인사이드 아웃2>는 전반적으로 라일리 밖에서 명확한 자극의 신호를 짚어낸다. 자신과 같은 고등학교를 꿈꿀 줄 알았지만 동상이몽이었던 친구들, 친해지고 싶은 선망의 대상, 타인의 평가가 곧 자신의 성적표인 것만 같은 확대해석, 또래집단에서 우쭐해 보이고 싶은 허세까지 청소년이 된 라일리는 자신의 관계망을 구축해 타인과 더 자주, 적극적으로 교류한다. 어두운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개인 차원의 갈등을 넘어 지금의 라일리에겐 제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존재를 더 크게 여긴다. 샌프란시스코의 그리운 나날을 이야기하다 저도 모르게 울어버렸던 라일리는 이제 남들 앞에서 눈물을 참는 법을 안다. 친구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하여 그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사실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자신의 갑작스러운 환대를 당황해하는 상대방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 라일리의 감정 계기판을 점령한 불안이가 나날이 쑥쑥 자랄 수 있던 이유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모든 감정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 자기 확신 없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쉽게 일희일비하면서 라일리는 주체성이라는 안정된 토양을 저당잡힌다. 그래서 불안이가 제안하는 모든 사고의 가능성도 그 주도권이 타인에게 있다. 게임에서 져서 친구가 없으면 어떡하지?(내가 친구를 직접 사귀면 되는데), 캠프에서 발탁되지 못해 하키팀 팀원이 되지 못하면 어떡하지?(더 보완해서 다음 기회를 잡으면 되는데), 이렇게 살다 쓸쓸하게 죽으면 어떡하지?(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무엇이든 할 텐데) 무리에 소속되고 싶고 주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이 시기의 욕망은 불안을 만나 금세 몸집을 부풀린다. 따라서 <인사이드 아웃2>가 관객에게 제시한 청소년이란 뚜렷한 목표 의지가 있지만 갈대 같고,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을 이해하지만 몸으로 체득되진 않은 상태다. 라일리의 성장담은 이 구간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감정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이유 <인사이드 아웃2>는 기쁨이와 불안이의 대립이자 경쟁이기도 하다. 누가 라일리의 대표 감정이 될 것인가. 누가 라일리의 행복을 위한 컨트롤타워가 될 것인가. 영화는 잠시 자리를 빼앗긴 정의의 수호자가 독재 통치를 펼치기 시작한 빌런에 저항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쁨이가 선역이고 불안이가 악역이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인사이드 아웃2>는 선악 구도엔 관심이 없다. 어떤 감정도 긍정과 부정의 꼬리표로 단순화될 수 없다. 불안의 존재 이유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정을 대비”한다는 언급이 영화 초반에 등장한 것은 그래서다. 라일리의 불안이 최고조에 다다라 자신을 불신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놀란 감정이 불안이라는 점에도 눈길이 간다. 기쁨이와 불안이에겐 뚜렷한 공통분모가 있다. ‘나는 라일리가 행복하면 좋겠어.’ <인사이드 아웃2>가 다양한 감정들을 대하는 중립적인 태도는 라일리의 주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갈등의 대상인 그레이스와 브리, 발렌타인은 라일리에게 직접적으로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라일리의 오해와 혼란이 갈등을 키울 뿐이다. 캐릭터들이 선역이나 악역으로 이분되어버렸다면 관객은 라일리의 성장기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시시비비 문제로 헛발질했을지도 모른다. 하키 경기에서 실수를 연발한 라일리가 몰아치는 불안에 홀로 맞설 때, 관객은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넘어서는 청소년에게 자신을 서서히 이입해 간다. 새벽녘 걱정에 물든 라일리를 감정들이 일단 재우려고 노력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때론 안쓰러운 시간이었고 필사적인 노력이었던 불면의 밤이 있었으니까. 하키 캠프에서 선발되고 싶은 마음과 오랜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 또래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내적 충돌 속에서 라일리가 온전히 자기만의 싸움을 마칠 수 있도록 <인사이드 아웃2>는 덜어내기를 선택한다. 라일리의 불안과 부러움, 당혹스러움과 따분함이 스크린 너머로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는 건 감정에 편견을 더하지 않고, 샛길에 빠질 가능성을 명료하게 차단한 <인사이드 아웃2>의 선택 때문일 것이다.

[인터뷰] ‘관객과 플랫폼의 변화로 수입·개봉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이지혜 찬란 대표

<유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 <에덴: 로스트 인 뮤직> <다가오는 것들> 등의 미아 한센 러브…. 수입배급사 찬란은 동시대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에서 주목해야 할 다수의 시네아스트들을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그린 나이트> <당나귀 EO> <환상의 마로나> 등 (<씨네21> ‘올해의 해외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영화기자, 평론가들의 지지를 받은 작품도 크레딧을 살피면 찬란의 수입작인 경우가 많다. 찬란은 지난해 연말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소폭 흥행을 시작으로 2024년 상반기 <악마와의 토크쇼> 그리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연타 흥행까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의 중흥에 유의미한 방점을 연속해 찍고 있다. 영화 월간지 <스크린>의 편집장, 스폰지이엔티의 영화 수입기획 및 마케팅 총괄을 거치며, 20년 넘게 영화와 함께해온 찬란의 이지혜 대표를 만나 한국 아트하우스 시장을 이야기했다. - 5월8일 개봉한 <악마와의 토크쇼>와 6월5일 개봉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에서 쌍끌이 흥행 중이다. = 처음 <악마와의 토크쇼> 개봉을 준비할 땐 예술영화보다는 장르영화에 초점을 맞춰 홍보 전략을 세웠다. 회사 내부에선 작품의 확장을 기대하려면 장르영화 팬들을 공략하는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봉 후 의외로 예술영화 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이제 와 말하지만 내부 흥행 기대치는 <악마와의 토크쇼>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보다 높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보자마자 수입이 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세일즈사가 절대 낮은 가격에 작품을 판매하지 않을 것도 알고 있어 한동안은 일절 수입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해 <괴물>이 개봉하기 전까지 아트하우스 시장이 내내 위축돼 있었다. 이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일정 수치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작품을 향한 호평이 1년 내내 이어지는 중에도 그게 흥행과 직결되진 않을 걸 알아 선뜻 개봉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악마와의 토크쇼>만 해도 흥행 목표치가 있었다. 한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목표치조차 예단할 수 없었다. - 그렇지만 <악마와의 토크쇼>는 장르영화 애호가들의 지지도 받았는데. = 예술영화 수입만으로는 회사 운영에 한계가 있어 처음 눈을 돌린 게 호러 장르였다. <잇 컴스 앳 나잇>이나 아리 애스터의 <유전>과 <미드소마>, 혹은 <반교: 디텐션>을 가져와 아트하우스 시장에서 호러영화를 상업적으로 풀고 싶었지만 기대한 결과는 내지 못했다. 지금 아트하우스 시장은 오히려 극장에서 승부를 보지 않으면 확장성을 기하기 쉽지 않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일정 관객의 유입이 보장된 영화를 찾다 정착한 장르가 호러와 수입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던 중 <악마와의 토크쇼>를 만났다. - 앞서 언급한 <잇 컴스 앳 나잇> <유전> <미드소마>를 포함해 <그린 나이트><컴온, 컴온> <클로즈> <존 오브 인터레스트>까지. 찬란의 수입작을 통해 A24 영화를 다수 만날 수 있었다. = 소피아 코폴라의 <블링 링>을 수입하며 A24를 알게 됐다. 규모가 크지 않은 영화를 감각적인 개성으로 홍보할 줄 아는 회사란 생각이 들어 신선했다. 그러다 A24가 본격적으로 제작과 세일즈에 뛰어든 2016년 칸영화제에서 <스위스 아미 맨>을 보고 반했다. <잇 컴스 앳 나잇>을 시작으로 A24 배급 영화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이들의 영화를 수입하는 과정이 늘 쉽진 않다. 하지만 분명 영화시장의 트렌드를 선점 중인 회사이고, 일정 정도의 프로덕션 퀄리티가 보장이 되는 회사여서 계속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있다. - 칸영화제 프리미어를 시작으로 오스카 레이스까지.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향한 다양한 상찬이 1년 넘게 쏟아졌지만 한국의 관객들은 개봉 전까지 영화제나 아카데미 프리미어 상영회 등에서 작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의도한 전략인가. = 놀랍게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연락이 안 왔다. 그래서 영화를 틀지 못했다. 이후 다른 영화제들이 문의해올 땐 정작 우리가 영화를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개봉 시기는 언제나 고민이다. <추락의 해부>와 <가여운 것들> 개봉 사이에 영화를 공개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지난해 하반기에 이미 <빅슬립> <사랑은 낙엽을 타고> 등 공개해야 할 국내외 영화가 있어 많아 그 계획도 무산됐다. 무엇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비용 및 규모가 큰 영화라 배급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적으론 2024년 2분기, 그러나 7월을 넘기지 않는 시기에 작품을 공개하기로 했고 결국 6월5일 개봉을 결정했다. -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개봉 전 <씨네21>에 올라온 박평식 평론가의 별점도 화제였다. = 사실 <씨네21> 별점이 업로드되는 개봉 전 주 금요일까진 사전 예매량 수치가 지금 같지 않았다. 인구에 회자되기 위해선 20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던 차에 박평식 평론가의 별점이 큰 힘이 됐다. - 당연한 말이지만 수입사가 영화를 해외 마켓에서 구매하는 일은 복지가 아닌 엄연한 사업이다. 작품을 살 때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 나조차도 영화제의 분위기에 취해 작품을 살 때가 많다. 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에서 봤을 때의 인상과 한국에 돌아와 재관람할 때의 인상이 항상 다르다. (웃음) 아마 수입사들의 공통 고민일 것이다. 좋은 영화라 판단해 사와도, 구매 당시의 극장 상황과 개봉 준비할 때의 상황, 개봉 후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시장 예측이 쉽지 않다. - 팬데믹 이후 유독 다른 영화제들에 비해 칸영화제 출품작들이 대거 수입된다는 인상도 받는다. 흔히 3대 마켓이라 불리던 유러피언 필름 마켓, 아메리칸 필름 마켓과 비교했을 때 칸영화제의 마르셰 뒤 필름의 회복세가 가장 큰가. = 칸영화제 작품들이 아무래도 한국 관객들에게 가장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것 같다.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점점 마이너해지고,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오스카 전초전으로 자리한 상황에 작품의 종류도 다양하며 시장을 선도하는 영화는 칸에 몰리는 경향이 있다. 또 예술영화의 경우 칸의 결과나 비평가들의 하이프가 관객 입장에선 점점 영화 선택의 주요 지표가 된다는 걸 느낀다. - 한동안 완성된 영화를 보지 않고 선구매하는 프리바잉이 과열됐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 아트하우스 시장의 마켓 동향은 어떤가. = 이제는 완성작을 보고 구매를 하려고 한다. 세일즈사들도 프리바잉은 지양하는 분위기다. 지난해 아메리칸필름마켓(AFM)의 경우 작가조합과 배우조합의 파업으로 인해 편수가 급감했다. 대신 괜찮은 작품에 수요가 몰려 입찰 경쟁이 치열해졌다. 세일즈사들도 점점 보수적인 판촉을 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 팬데믹 직전까지 한국의 수입사들이 정말 활발하게 예술영화를 구매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팬데믹 중 한국이 구매량을 줄이니 해외 세일즈사 입장에선 상품을 팔 수 있는 큰 시장 하나가 사라져버렸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가 배급 경쟁에 뛰어든 것도 시장 위축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형 스튜디오나 직배사가 가져가는 영화에 중소 수입사가 손을 어떻게 대겠나. 여기에 글로벌 OTT까지 들어오니 기회 자체가 줄었다. - OTT의 범람으로 예술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이 과거에 비해 늘었다. = 상대적으로 예술영화를 상영할 플랫폼의 개수는 늘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예술영화를 접할 기회는 줄었다. OTT만 해도 이제는 소규모 예술영화를 거의 구매하지 않는다. TVOD로 예술영화를 개별 구매하는 2차 시장의 규모가 줄어든 상황에서, 국내 OTT들이 영화 단건 구매 대신 플랫폼 구독을 통해 작품을 관람하려는 관객의 수요에 공급을 대지 못하고 있다. 결국 빠르고 간편하게 예술영화를 보기 위해선 극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수입 전략도 변화를 맞았다. 과거엔 영화를 여러 편 구매하면, 극장 상영에 끝까지 집중할 영화와 2차 시장에서의 흥행을 염두에 둔 영화를 전략적으로 구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구분이 무의미하다. 또 이전까진 영화의 구매 가격에 따라 P&A 비용을 추산한 후 배급 규모를 결정해왔는데 이젠 대략의 시뮬레이션이 유명무실하다. - 빵원티켓 등 티켓 프로모션 사업이 아트하우스 시장에선 어떤 실효성을 가지나. 장기적인 관점에선 필요악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 정말 어려운 문제다. 관객 입장에선 비용을 하나도 지불하지 않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시스템 아닌가. 수입·배급업자 입장에선 우리의 콘텐츠가 지닌 가치를 격하시키는 건 아닌지 늘 근심한다. 만약 관객이 프로모션으로 관람하는 영화를 ‘비용을 전부 지불하지 않고 봐도 되는 영화’라 생각한다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문화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비용을 가장 잘 태운 채 관객을 극장으로 모객할 수 있는 방법은 또 티켓 프로모션밖에 없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경우 티켓 프로모션을 하지 않아 무척 불안했다.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았을 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불안함이다. 그래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티켓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섰다. 다행히 프로모션 없이 순항 중이지만 이 케이스는 극히 예외다. 요샌 극장 현매 관객이 줄고 이미 티켓 프로모션으로 빠진 좌석 수가 있다보니 아침 관객수에 비해 저녁 관객수가 적게 집계되는 초유의 사태도 꽤 많이 보인다. - 수입사별 영화 취향을 특정 감독을 통해 예측하기도 한다. 찬란의 경우 <르 아브르>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에덴: 로스트 인 뮤직> <다가오는 것들> <베르히만 아일랜드> <어느 멋진 아침>의 미아 한센 러브 감독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대표님이 스폰지하우스에서 <황혼의 빛>을 수입하던 시절부터 인연이 깊은데. = 2006년에 처음 칸영화제를 갔다. 당시 대표님과 서로 바빠 영화제 마지막 일정이 되어서야 밥 한끼를 마지막 만찬처럼 함께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대표님이 칸에서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을 물어보셔서 <황혼의 빛>이라 답했다. 그랬더니 대표님이 너를 위해 사겠노라며 <황혼의 빛>을 구매해가셨다. 한 감독의 영화를 계속 사는 게 브랜딩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우리도 한동안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을 계속 샀듯 말이다. 미아 한센 러브 감독도 마찬가지다. - 소속사 51k와 함께 꾸준히 찬란에 투자 중인 소지섭 배우의 에피소드가 근래 다시 화제를 모은다. 찬란의 대표가 소지섭이라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 심지어 칸영화제에서 우리가 <더 서브스턴스>를 수입했다는 기사가 났을 때 ‘소지섭 수입’으로 보도되더라. 그가 찬란 대표로 소개되는 것은 괜찮다. (웃음) 소지섭 배우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길 원하는 타입이라 제공으로 크레딧에 오르는 정도로만 나서고 있다. <악마와의 토크쇼>가 개봉한 이후 소지섭 배우의 투자 사실이 예상외의 주목을 받았다. 지섭씨로 인해 많은 관객이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 꾸준히 찾아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폭풍의 언덕>을 수입할 당시 배우 본인의 1인 기업에서 투자를 도운 일이 시작이었다. 이어 <필로미나의 기적>부터 한결같은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 항상 고맙다. 이 감독, 놓치지 않을 거예요 놓치고 싶지 않은 감독엔 영화도 좋아야 하지만 좋은 흥행 결과도 포함돼야 하지 않나. 그래서 한명만 꼽기 정말 어렵다. 우리와 연을 이어오는 감독님들이 대부분 즐거움과 아픔을 동시에 선사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고르자니 모든 전작을 가져온 건 아니고, 2015년부터 전작을 함께한 미아 한센 러브를 좋아하지만 이분이 입힌 타격도 만만치 않다. (웃음) 비간은 아직 좀 더 지켜봐야 하고, 조너선 글레이저는 또 10년 뒤에 차기작이 나올 것 같고!

체계적인 영화 제작 교육은 고급 영화 제작 강좌 ‘명필름 영화 스쿨’에서

한겨레교육 영화아카데미와 명필름랩이 손을 잡았다. 긴 시간 수많은 신진 영화 창작자들을 배출해온 두 영화 제작 교육 단체가 업무 협약을 맺고 영화 제작 강좌 ‘명필름 영화 스쿨’을 연다. 이은 명필름랩 대표는 “명필름의 영화제작 활동을 통하여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영화 교육으로 연장하고 싶었는데 마침 한겨레교육도 기존의 영화제작 교육을 진일보시키려는 의지가 있어서 두 단체가 협업을 통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다“고 전했다. 명필름 영화 스쿨은 고급 영화 제작 강좌를 지향한다. 단편영화 참여 이력이 있는 연출, 촬영, 제작 경험이 있는 사람, 각종 영화제에 출품하거나 수상을 목표로 하는 사람, 프로덕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강좌는 연출, 촬영, 제작 세 전공으로 나눠 통합수업, 분반수업, 멘토링 수업으로 진행한다. 이론과 실습 교육을 병행해 작품마다 3인 1조로 공동 작업을 한다. 연출자는 한 작품에 집중하고, 제작과 촬영은 두 작품을 경험하게 해 모든 전공 학생들이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설계됐다. 강사진도 명필름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현역 영화인들로 구성됐다.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를 연출했던 이동은 감독, <아워바디> <장례난민> 를 연출한 한가람 감독, <싱글 인 서울> <나의 특별한 형제>등을 촬영한 성승택 촬영감독, <하이재킹> <파울볼> 등을 제작한 정원찬 프로듀서, <공동정범> <저수지 게임>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에서 사운드 후반작업을 맡았던 최지영 사운드 디자이너가 강의를 맡는다. 특강 라인업도 탄탄하다. <파묘> <서울의 봄> <킹덤2> <신과 함께> <헌트> 등 많은 영화, 시리즈를 작업했던 김태형 콘티작가, <박화영> <해야 할 일> <어른들은 몰라요> 등을 편집한 조현주 편집감독, <종이꽃> <항거 : 유관순 이야기> <어른들은 몰라요> <해운대> 등 많은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은 황인준 미술감독, <1987> <기적> <바람 바람 바람> <굿바이싱글>의 음악을 작업한 임미현 음악감독이 특강에 참여한다. 현직 영화인으로 구성된 강사뿐만 아니라 수강생들을 위한 혜택은 많다. 수강생들은 작품당 최소 100만원부터 최대 20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 받을 수 있다. 회의, 오디션, 촬영용 장소 대관 등 명필름과 한겨레교육 시설을 사전 협의를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 강좌를 통해 제작한 작품은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극장 상영을 진행하고, 제작 부문 우수 수료생은 인턴 채용기회를 제공한다. 이은 대표는 “최소 1편 이상의 단편영화 참여 경험자를 대상으로 상위 교육기관으로의 진학이나 영화업계에 진출 하려는 분들을 돕기 위한 과정인 만큼 영화의 이론(개념)과 실제(현장) 모두를 이해하며 결과를 만들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 이번 프로그램의 차별점“이라고 설명했다. 7월15일 개강하는 명필름 영화 스쿨은 월, 수, 금 주 3회 수업이 진행되고, 각 전공별 12명을 모집한다. 6월30일까지 포트폴리오와 작업 예정인 트리트먼트(A4 1~2장)을 담당자 메일(soon@myungfilm.org)를 통해 지원하면 된다.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강의 소개 링크(https://lrl.kr/xpwB)를 참조하고, 추가로 궁금한 점은 담당자 메일(melongsoda@hanien.co.kr)로 문의하면 된다.

[비평] 근본적인 불안의 정체에 관하여, <인사이드 아웃2>

<인사이드 아웃2>는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전편의 맥을 잇는 준수한 여운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나도 이 평가에 동의하지만 지면의 한계상 아쉬움을 상쇄했다고 거론되는 종막에 관해서는 논하지 않을 계획이다. 여기서는 속편의 상상력이 전편보다 부족하게 느껴진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그 아쉬움은 제작진의 역량 부족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이 연작이 근간을 두는 원칙의 한계 자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1편과 2편의 차이에 주목하며 그 한계를 둘러싼 논점을 숙고해보도록 하자. <인사이드 아웃2>는 전편에서 라일리의 성격 섬 중 가장 큰 크기를 차지했던 가족 섬이 가장 왜소해진 정경을 비추며 시작한다. 속편이 전편과 달리 안정적인 가족 공동체 바깥을 다룰 것임을 암시하는 이 변화는 주제의식의 측면을 넘어 미장센의 전반적 변화와 직결된다. 1편은 식탁과 같은 전통적 가족의 공간에 주목했으며, 주로 화면 중앙에 놓인 라일리를 양쪽의 부모가 둘러싸는 구심적 미장센이 작동하곤 했다. 현실뿐 아니라 내면세계에서도 라일리의 콘솔이 화면 정면을 향하는 것과 달리 부모의 콘솔은 측면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중심부의 라일리를 감싸는 배치를 구조화한다. 가족과 작별한 라일리가 여러 친구 집단 중 한쪽을 선택하는 2편에서는 이 구심력이 시종 붕괴된다. 라일리는 연습 시합에서 경기장 양쪽으로 갈라진 중학교 친구들과 ‘밸’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며, 수많은 군상이 모인 로커 룸의 원심적 구도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난다. 일견 선택과 책임이 중시되는 성인의 우주로의 이행을 반영하며 세계관 다변화를 모색할 바람직한 계기로 보인다. 하지만 가상 세계를 건축한다는 애니메이션의 원칙이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변화다. 부연을 위해 잠시 우회해 픽사 애니메이션이 현실과 환상을 매개하는 전략의 몇 가지 유형을 세분화해보자. 첫 번째 유형은 현실과 환상이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합돼 공상적 디제시스를 빚는 경우다(<월·Ⓔ>와 <업>). 두 번째 유형은 현실과 환상이 시공간적 차원을 공유하되, 양자 사이에 은밀한 분리의 원칙이 작동하는 경우다(<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에서 장난감과 물고기는 인간과 같은 차원에 속하지만 인간의 시선 앞에서 종종 말과 행동을 결빙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현실과 환상이 물리적으로 격리된 채 관념적 연결고리만 공유하는 경우다.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현실이 분리된 채 간접적으로만 연결되는 <코코>, 여러 감정과 라일리가 분리된 공간을 점유하는 <인사이드 아웃>이 이 유형이다. 감정들은 본부에서 콘솔을 조작할 뿐 <토이 스토리4>의 우디가 보니의 유치원에 잠입했던 것 같은 직접적 행동을 취할 순 없다. 1편에서는 이런 분리의 원칙 덕분에 가상 세계를 구현하는 애니메이션의 역량이 현실과 분리된 내면에 오롯이 집중될 수 있었다. ‘추상적 사고’ 구역에서 기쁨이 일행이 1차원으로 이동하는 장면, 빙봉이 사탕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현실의 제약을 벗은 상상력이 무엇보다 찬란한 마술성을 개화했던 사례다. 속편에서 새로 등장한 ‘불안이’는 감정의 근거를 자아에서 현실 속 타자의 방향으로 변경하며 이 원칙을 교란한다. 불안이가 다른 성격과 구별되는 점은 부산스러운 언행보다는 그가 상상이라는 매개를 건너뛴 채 외부 현실과 지나치게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데 있다. 그는 라일리의 주변인에 즉각 반응하고 행동하며 불안을 잠재우려 한다. 게다가 기쁨이가 뮤지컬적 안무를 추고, 버럭이가 불을 뿜으며 고유한 애니메이션적 개성을 내보일 때, 불안이는 스크린을 통해 현실에서 일어날 일을 시뮬레이션적으로 구현하며 현실에 지표적인 이미지를 출력한다. 이런 식으로 현실과 타인이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면 분리의 원칙에 따른 내면세계의 상상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근본적으로 상상의 차원에 속하는 것과 달리 타인이란 근본적으로 현실의 차원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1편에서는 이 점과 관련해 대조해봄 직한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기쁨이 일행은 내면세계의 기계에서 출력되는 라일리의 상상 남자 친구를 발견하고 묻는다. “너 같은 애는 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상상 남자 친구가 답한다. “난 캐나다에 살거든.” 사소한 유머지만 내면세계의 애니메이션 조형이 현실의 지리학적 사실성과 무관하며, 오히려 그렇기에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음을 암시하는 근사한 메타적 진술이다. 이와 달리 <인사이드 아웃2>는 분리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상상의 준거점은 내면이 아니라 현실에 둔다는 근본적 딜레마를 끌어안는다. 그 딜레마가 단적으로 부각되는 장면은 라일리가 코치의 사무실에 침투해 노트에 적힌 선수 평가를 보는 장면이다. 검은 글씨로 적힌 단어 몇자일 뿐이지만 어떤 애니메이션 기교와 은유적 상상도 불허하는 타인의 구체적 흔적이다. 불안이는 기존의 감정들에게 라일리에게는 더 섬세한 감정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 장면은 그 말을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관계에 관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심화해 불안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네가 아무리 섬세하다고 해봤자, 어차피 너도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불과하다면 실제 타인의 반응보다 얼마나 더 구체적일 수 있는데?” 그런 이유에서일까. <인사이드 아웃2>가 새롭게 선보인 요소는 시종 자율적 상상과 지표적 현실 중 어디에 근거를 둘지 몰라 허둥댄다는 인상을 준다. 가령 1편처럼 3D가 아닌 질감을 수록해야 한다는 강박이 빚어낸 블루피와 랜스는 라일리의 고유한 상상에서 비롯된 빙봉과 달리 외부의 매체에서 외주화된 형상이다. 그들의 몸짓도 지극히 평면적인 설정에 종속된다. 그런가 하면 무전기, 보안 금고, 다이너마이트 등 현실적인 사물이 정말 그 현실적인 기능을 수행하며 상상력의 자리를 편의적으로 대체하곤 한다. 후반부에서 기쁨이 일행은 산더미 같은 구슬 위에 놓인 신념 조각을 보고 외친다. “어떻게 저기로 올라가지?” 나는 생각한다. ‘오, 1편에서는 빙봉의 로켓을 타고 절벽을 올랐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저 산을 오를까?’ 다음 장면을 보면 그들은 그냥 손으로 등반해 정상에 도착한다. (…?)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단숨에 본부로 복귀한다. (…??)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개그 신에 활용되는 캐릭터간 궁합이다. 1편에서 듀오를 이룬 기쁨이와 슬픔이의 만담이 탄력적이었던 이유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그들의 성격이 리드미컬한 대화의 굴곡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가령 기쁨이가 슬픔이에게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라고 하면 슬픔이는 “오, 너 예전에 개가 죽었던 영화 기억나?”라고 한다. 기쁨이는 방방 뛰며 다시 발랄한 기억을 연상한다. 그들의 만담은 급격한 감정의 낙차를 에너지로 삼는 동력 발전 시스템이다. 속편에서 콘솔을 만지는 불안이와 부럽이에게는 이런 리드미컬한 합이 없다. 애초에 안이 아니라 밖에 존재론적 근거를 두는 그들은 고유한 내면적 개성이 추상화돼 있으며, 시종 밖을 관찰하느라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당황이와 따분이는 참여도가 저조한 예능프로그램 MC처럼 구석에 박혀 있다). 은유의 지평을 축소하는 어른의 세계에 던져진 라일리의 상상은 이제 알록달록한 색채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이 점이야말로 시리즈의 존립 근거와 연관된 <인사이드 아웃2>의 가장 근본적인 ‘불안’일지 모른다.

[홍기빈의 클로징] 대한민국은 우생학의 실험실인가

우생학은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열등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있다고 믿으며, 전자를 증식시키고 후자를 도태시킴으로써 종 전체 혹은 집단 전체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과학의 한 분과로 여겨지며 크게 유행하지만, 나치즘의 ‘인종 위생학’과 일부 국가들의 장애인 및 특정 집단 불임 시술 등의 끔찍한 결과를 낳은 뒤 엄청난 도덕적 비난과 함께 쇠락한 바 있다. 하지만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이 따로 있다는 사회 이론의 맥은 경제학으로 이어졌다. 1960년대 초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개발된 ‘인간 자본’ 이론은 인간은 ‘생산성’ 혹은 수익 창출 능력에 있어서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자본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은 그러한 능력의 근원을 유전자에서 찾지 않는다. 타고난 능력의 차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 자본’은 오히려 교육, 훈련, 인격의 도야 등을 통해 후천적으로 ‘조성’되는 것임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을 구별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리고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 등 전자에 해당하는 이들이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소득과 자산을 가져가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보다 더 많은 삶을 누릴 권리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그 두 종류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더 많은 삶’의 불평등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정지훈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저서 <0.6의 공포, 사라지는 한국>에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아이 중 저소득층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10명 중 1명 정도이며, 나머지 9명은 중산층 이상이라고 한다. 가난한 집일수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이러다가는 ‘유전자녀 무전무자녀’라는 말이 생길 판이라는 것이다. 앞의 우생학 이론과 ‘인간 자본’ 이론의 공통성과 연결해보면 섬뜩한 명제가 머리를 스쳐간다. 지금 대한민국은 우생학 프로젝트의 거대한 실험실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대한민국에는 히틀러의 나치즘과 같은 국가 폭력이 폭주하는 것도 아니며, 옛 스웨덴처럼 대규모 불임 시술이 강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사력을 다해 벌이는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우월한’ 이들과 ‘열등한’ 이들이 선별되며, 이것이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으로 이어진 뒤, 급기야 생물학적 재생산에 대한 접근으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금 대한민국은 시장경제에서의 불평등을 무한히 정당화하는 ‘인간 자본’ 이론을 매개로 하여 사실상 ‘잘난 사람들만 남고 못난 사람들은 도태되는’ 우생학의 실험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러한 추세의 귀결로 미래의 대한민국은 ‘더욱 생산성이 뛰어난 집단이 될 것’이라는 기괴한 낙관론을 펴기도 한다. 그렇게 될 리도 없지만, 설령 그러한 바람이 실현된다고 해도 이는 기껏해야 ‘생산적인’ 디스토피아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