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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나를 향한 믿음에 누적된 노력의 시간, 배우의 시선, 예술가의 깊이, 세 가지 챕터로 보는 배우 남궁민

“기다렸지 그대를. 여기서 아주 오래….” <연인>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장현의 대사는 남궁민을 만나길 고대한 <씨네21>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씨네21>은 지난해 <연인>의 남궁민을 ‘올해의 시리즈 남자배우’로 호명했고, <김과장> <닥터 프리즈너> <스토브리그> <검은태양> 등 지난 7년간 배우의 이름을 곧 장르명으로 동치해온 남궁민의 드라마 필모그래피를 독자들과 함께 전업 시청자로서 뒤쫓아왔다. 그리고 2024년 7월, 마침내 남궁민과 <씨네21>과의 만남이 성사됐다. 남궁민은 긴 대화 내내 자신의 연기 비급을 감정과 감성이라 반복했다. 머릿속으로 다이얼을 끊임없이 돌리며 캐릭터가 마주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건 그의 성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남궁민은 누구보다 이성적인 배우기도 하다. 남궁민이 선택한 재미있는 이야기의 일군을 보면, 촬영 현장에서 그가 보이는 초인적 열정의 후일담을 들으면, 직관과 로고스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내릴 수 없는 결정으로 가득하다. 감성의 총량을 침범하지 않는 이성으로 매 작품 전성기를 다시 쓰는 남궁민을, <씨네21>이 세 단계로 집중 탐구해보았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배우 남궁민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인터뷰] 부채와 칼, 사랑, 배우 남궁민

이장현이 끝내 연인 유길채(안은진)의 손을 잡기 전까지, 그는 언제나 손에 부채와 칼을 쥐었다. 두 도구는 장현이 스스로의 매력을 과시하는 장신구처럼 보이지만 실상 위태로운 자신을 감추기 위한 위장 도구다. 하지만 이내 부채와 검은, 장현이 사랑하는 상대를 살리고자 자신의 전부를 내걸 수 있음을 확인하는 증표가 된다. 부채를 살랑이며 사람들을 애태웠던 장현처럼 <연인>은 2023년 하반기 흥행 바람을 일으켰고, 검을 들고 온 마음으로 민초와 연인 길채를 수호했던 이장현처럼 <연인>은 잔인한 이별과 애달픈 사랑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베어냈다. <연인>이 돌파한 기록적 흥행과 수많은 상찬에도 한동안 사람들은 남궁민으로부터 <연인>에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종영 이후 반년, 이젠 <연인>을 떠나보내고 다른 작품과 열렬한 사랑에 빠질 채비 중인 남궁민에게 <연인>에 남겨둔 마지막 미련을 뒤늦게 물었다. - <검은태양>을 함께한 김성용 감독으로부터 <연인>의 대본을 건네받은 후 사흘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언젠가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작품 출연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밝혔다. 출연 제의가 오면 최대한 빨리 회신하는 편이다. 답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는데 결정을 미루면 문제가 생길 걸 알기 때문이다. 한 배우와 두 작품을 연속으로 함께하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제안을 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기자가 이야기 속 캐릭터로서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는 게 좋을 뿐이지 캐릭터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좋은 작품을 만나지 못할 터다. 냉정히 보자면 <연인>은 길채의 성장 서사다. 역사적 아픔과 고초를 통과하며 성장해가는 길채 곁에 장현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장현은 길채의 곁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다할 수 있는 진심의 최고치를 달성할 뿐이다. - <연인>은 모처럼 보는 남궁민의 멜로드라마라 반가웠다. 그리고 장현 또한 전쟁 중 길채를 만나며 변화를 겪고 성장한다. 그러게. 나 멜로 할 줄 아는데! 멜로를 의도적으로 피하진 않았다. <연인> 전까지 내게 들어온 작품 중 좋은 이야기를 고르다 보니 우연치 않게 멜로 플롯이 빠져 있었다. 황진영 작가 역시 내게 장현은 사랑을 알아가는 남자라는 점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점을 주지했다. - 이장현은 소위 말하는 ‘설정 과다’의 캐릭터다. 능글맞은 한량이지만 갈채 앞에선 순정과 후회를 내비치고, 외교와 무예와 상행위에 소질을 보인다. 또 유교 사회의 대의명분을 거부한 채 ‘썸’, ‘비혼’ 등 2010년대에 등장한 개념을 신조로 삼고 자본주의의 맹점을 꿰뚫는 등 조선 후기 사대부의 사상과 배치되는 신념을 내비친다. 이처럼 다양한 설정을 이장현 개인의 오롯한 일관성으로 구체화하는 일이 쉽진 않았을 듯하다. 나 역시 장현의 설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제작진과도 “장현이 못하는 게 뭐야? 이러다 작품에 서양인이 등장하면 장현은 영어도 하겠는데?”라며 농담도 나눌 정도였다. (웃음) 하지만 그만큼 시청자들이 장현에게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 다양해서 좋았다. 사실 연기를 할 때 이 속성들이 모두 하나의 줄기로부터 파생해야 한다는 구체적 계획을 따로 세우진 않았다. 연기의 주체는 감정이다. 특정 캐릭터가 어떤 사람이라 어떻게 행동할지 따로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감정과 본능을 따르길 선호한다. - 장현의 수많은 순간 중 13화에서 청나라 포로 시장에 오른 길채를 발견하고 “도대체 왜!”를 외치며 절규하는 클로즈업이 특히 인상적이다. 첫 테이크를 갔을 땐 내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다 안은진 배우의 서글픈 눈물 연기를 보니 새로운 감정이 올라왔다. 눈물 연기는 안은진 배우를 따라갈 자가 없다. 눈물의 강수량 자체가 압도적으로 많은 눈물의 여왕이다. 카메라 앞에서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계산하는 순간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차오르는 감정을 연기로 외현하는 기술을 연마하려 노력한다. <천원짜리 변호사>를 촬영할 때도 현장에서 새로 발견한 감정으로 대본에 없던 장면을 탄생시켰다. 내가 분한 천지훈이 세상을 떠난 연인 주영(이청아)의 사무실에서 수임료 천원이라 쓰인 벽보를 본 후 눈물을 흘리다 유리병에 천원짜리 지폐를 넣는 신 기억하나. 그 장면이 대본에는 없었다. 그런데 세트 책상 위에 유리병이 있는 걸 보고 즉석으로 그 병에 천원짜리 지폐를 넣는 장면을 제안했다. -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장현이 피폐해지는 순간이 거듭 등장한다. 장현은 두번이나 기억을 잃고, 자신이 등진 아버지 장철(문성근)을 찾아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를 토해낸다. 애청자들 사이에서도 장현이 두번 기억을 잃는 서사에 관해 의견이 갈린 것으로 안다. 내겐 황진영 작가를 향한 신뢰와 존중이 컸다. 작가님이 쓰신 서사의 흐름 속에서 작품의 이야기를 시청자들이 잘 받아들이도록 연기해내는 게 결국 배우의 의무다. <연인>은 21부작에 달하는 대서사라 장현이 기억을 잃는 극 후반 즈음엔 작품의 분위기를 더이상 무겁게 만들지 않는 일이 중요했다. 장현의 다양한 면모를 통해 시청자가 지루할 틈을 줄이는 일이 나의 열연보다 먼저였다. 장현이 장철을 한번만 만날 수밖에 없어 단 한 장면에 장현의 고독한 세월을 눈빛과 대사에 담아 토해내야 했다. 야외 로케이션에서 실내 촬영으로 바뀐 장면이기도 하다. 바뀐 게 더 좋았다. 그 추운 날 그렇게 긴 대사를 야외에서 하면 눈물보다 콧물이 더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웃음) - <연인>에서 유독 좋아하는 대사가 있나.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를 처음 읽었을 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충격을 받았다. 이 한마디로 길채의 마음을 눈 녹듯 풀어주며 위안을 선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조건 잘해내고 싶었다.

[기획] 이토록 매혹적인 단단함, <졸업>의 정려원을 만나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사랑에 쪼그려 앉아 울던 여인(<내 이름은 김삼순>)이기 한참 전에 배우 정려원은 동네 떡집의 막내딸(<색소폰과 찹쌀떡>)이었다. 막내딸 자남은 기록적인 트렌디 드라마의 서브 여주와는 전혀 다른 아침드라마의 작은 역할이었다.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에서 내려온 걸 그룹 샤크라의 서브 보컬 ‘려원’은 ‘정려원’이란 본명을 되찾은 뒤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인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에피소드가 매번 바뀌는 시트콤에 출연해 별의별 얼굴을 보여줬다. <똑바로 살아라>의 새침데기 정 간호사와 <안녕, 프란체스카>의 유아독존 뱀파이어 엘리자베스는 바람 잘 날 없는 일상에서 울고불고하다가도 까르르댔다. 기본기와 개인기를 고루 쌓는 현장을 데뷔 초에 경험한 정려원은 다중인격을 가진 여자(<두 얼굴의 여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히키코모리(<김씨표류기>), 안하무인의 대기업 손녀(<샐러리맨 초한지>)까지 캐릭터성이 강한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하는 주연배우로 성장한다. 또한 정려원은 풍부한 표현력의 소유자다. 기쁠 땐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짝팔짝 뛰어오르고 화날 땐 이마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보디랭귀지의 귀재로서 시선을 끌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결국엔 사랑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통증>의 씩씩한 희귀병 환자 동현은 그의 타고난 사랑스러움이 캐릭터를 비집고 나와 어두컴컴한 영화를 밝힌 경우다. 가녀린 체구를 가진 정려원은 자신을 유약한 이미지에 가두려는 업계와 대중에게 청순가련형이 아닌 캐릭터로 반기를 들어왔다. 그에게 <메디컬 탑팀>을 시작으로 ‘법조인 3부작’이라 불리는 <마녀의 법정> <검사내전>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를 선택한 지난 10년은 강단 있는 여성으로 이미지를 확실히 재정립하는 시간이었고 뒤틀린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회피적인 자신에게까지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마이듬과 차명주 검사, 노착희 변호사는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주었다. <졸업>의 대치동 스타 강사 서혜진은 명성과 의욕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정려원의 법조인 캐릭터들과 궤를 같이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서혜진은 사랑에 깊이 빠진 여자다. 옛 제자 준호(위하준)와의 관계가 사제에서 연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그에겐 알을 깨고 나오는 성장통과 같았다. 혜진이 마구 부서지고 흔들리는 동안 정려원도 그 진동을 함께 느꼈고 성장했다. 종영 인터뷰에서 만난 그는 <졸업>을 운명과 분기점이란 단어로 자주 설명하곤 했다. <졸업>에 대해 더 많이 더 열성적으로 얘기하는 것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려는 듯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배우 정려원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인터뷰] 혼란 앞에 정직해지기 위해 쓴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소설가 김기태

김기태는 확실히 ‘보편 교양’의 작가다. 동시대의 세태를 정확하고도 풍부하게 조망하는 김기태의 소설은 지금 우리의 생활 반경을 거침없이 휘젓는다. 연애 예능 출연자의 욕망(<롤링 선더 러브>)과 K팝 팬의 딜레마(<세상 모든 바다>), 고등학교 교사의 곤경(<보편 교양>)과 성실한 직장인의 불안(<전조등>)을 가로지르는 동안 일상의 표면은 유행가 가사와 밈을 달고 한껏 경쾌해지거나 덜컥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자기 생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에 대해 배우는 역도 소녀(<무겁고 높은>)와 다리가 세개뿐인 식탁을 펼친 채 기뻐하는 곤궁한 변두리의 연인(<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도 이 세계에 함께 산다.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뒤죽박죽, 와글와글, 결국은 한데 존재한다”는 것이 9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안기는 ‘인터내셔널한’ 감각이다. 그들 각자가 생의 어느 국면에 서 있든 간에 “좋거나 싫거나 삶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가능성”을 믿는 작가는 언제나 시간의 지속을 담보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문단에 등장한 늦깎이 작가의 생활은 “퇴근하고 저녁 먹고 살림 좀 하고 나면 저녁 8시. 그때부터 자정 정도까지 작업하면서” 굴러왔다. 습작 생활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무겁고 높은>)되어, “안 써도 죽지는 않을 테니 대신 자유롭게 쓰자”고 “삶의 보너스 게임”을 받아들인 그다. 2024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고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로 문단의 주목받는 신인으로 떠오른 김기태를 만났다. - 작가 소개가 유독 단출하고 작가의 말을 넣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까. = 작가에 대해 모를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내 소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있다. 책 뒤편의 작가를 끄집어내서 자꾸만 말을 시키는 풍조에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래놓고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게 모순이긴 하지만. (웃음) 매체에 나서는 일에 대한 주의, 주장이 서기 전에 어떤 흐름에 올라타버려서 괴로운 요즘이다. 작가의 말을 넣지 않은 이유는 소설집에는 소설만 있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는 생각에서였다. - 표제작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로 정한 것은 작가의 뜻인가. = 진작 그렇게 생각했고 편집부에서도 같은 의견을 주셨다. 등단 후 단편을 6편 정도 썼을 때부터 이 소설들을 한데 묶었을 때 어떤 모양이 될 것인지 느슨히 구상해보기 시작했는데,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운이 다른 소설에도 구석구석 미치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뒤죽박죽, 바글바글하고 있는 풍경이 연상됐으면 한다. 국제공항의 출입국장처럼. - <무겁고 높은>은 작가 자신의 역도 경험으로부터 촉발했고, <롤링 선더 러브>에 관해서는 실제로 연애 예능 <나는 솔로>를 즐겨 보았다고 밝힌 바 있는데. = <무겁고 높은>은 본격 역도 홍보 소설, 역도에 바치는 소설을 써야겠다 마음먹고 그 행위에 대해 오랫동안 쌓아왔던 감정을 담았다. 지금도 간혹 역도를 한다. <나는 SOLO>를 즐겁게 본 것도 맞다. 프로그램 출연자들을 지켜보다가 가끔씩 “저 사람 방금 뭔가 진짜를 보여준 것 같은데”라는 느낌을 받을 때 애청자로서 응답하고 싶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통속적인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표정들을 잡아내는 제작 환경이 흥미로웠고 내가 잘 모르는 인간형에 대한 탐구심을 충족시켜주기도 했다. 나한테 <나는 SOLO>는 여타 예능 방송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읽을 때의 마음과 겹치는 프로그램이었다. -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 보편의 세태를 생생하게 반영한 점에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현실과의 시차가 짧은 소설을 쓸 때 작가로서 문학적 수명을 고민하게 되지는 않나. = 소설을 발표하고서 많이 듣는 질문이 “아이돌 좋아하시나봐요”다. 갸우뚱하다. 그저 내가 처한 세계에서 매일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소설에 일정 부분을 허락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돌 프로듀서의 기자회견을 메인 언론이 생중계하는 그런 세상에 산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우리의 자연이다. 오늘 하루도 거리를 걸으면서 수많은 광고판을 지나쳤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문학의 소재가 되길 바란다. 나무에 떨어지는 햇살은 문학적이고 광고판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소재의 침입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초대하는 입장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물론 더 문학적으로 보일 법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도 있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스스로 정직하지 않다고 느낀다. 나를 감각적으로나 현혹시키는 것들은 그런 게 아닌데 하고 자꾸만 나의 정직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 통속적인 소재를 쓰는 것과 그 표현법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밈이 문장이 되고, <롤링 선더 러브>엔 무려 11개의 대중가요가 인용, 변형되어 쓰였다. = 고다르를 인용하는 건 자연스럽고 대중가요를 인용하는 건 문학적이지 않은 걸까?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로부터 탈주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는 여기 있는 것을 직면한 상태로 새로운 감각을 얻고 싶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걸 없다고 하면 안되지 않을까, 그걸로도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문장이 유머러스하다는 반응에 대해서도 내가 웃긴 게 아니라 세상이 이미 웃긴 쪽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싶다. 나는 그 웃긴 세상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 세태를 묘사하는 직관적인 문장을 보면 저널리스트의 성질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겠다. =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20대 초반에 내가 경험한 풍토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 건 아닐지 생각해본다. - 세계를 인식하는 자신의 감각에 정직해진다는 것. 소설가로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 = 그러니까 이상하게, 자꾸만 정직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특히 소설에 관해서는. 일상생활 중에는 충분한 숙고 끝에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최선은 대다수의 경우 어떻게 보면 맥락의 자연스러운 주거니 받거니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대화 국면에서는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정직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내가 고려하고 싶은 이것과 저것, 빼먹고 싶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데 드는 충분한 시간, 백지라는 거의 무한정한 세계 안에서 원하는 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니 소설을 쓰면서 나는 조금 더 정직해지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같다. - 소설집의 첫 순서인 <세상 모든 바다>는 공연장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에 연루된 재일 한국인 하쿠의 이야기다. 소수자 정체성, K팝, 불안정한 국제 정세와 테러, 지역 원전 문제 등 당대의 민감한 사회적 표피들을 담고 있는데, 특히 지금 읽게 되면 10·29 이태원 참사의 풍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 개별 사안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회문제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뒤죽박죽의 상태를 그려보고 싶었다. 기후 위기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트럼프와 바이든의 대선전이 몇초도 안되는 사이에 뉴스에서 연달아 브리핑되고, 이어 비건 대체식 광고가 나오는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각자 윤리적인 선택을 내려야 한다. 나는 그 혼란을 쓰고 싶었다. 한 가지 바로잡고 싶은 것은 이 소설이 이태원 참사 이전에 쓰였고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정말 많은 독자들이 <세상 모든 바다>를 읽고 이태원 참사를 떠올린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소설 밖에서 어떤 맥락이 사후적으로 부여된 셈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작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번 소설집에서 이 소설만 유일한 1인칭 시점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래서 첫 순서로 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취업과 결혼이란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어느 평범한 남자의 불안을 따라가는 <전조등>, 밤새 강박적으로 문단속을 하다가 미쳐가는 남자의 심리소설 <팍스 아토미카>는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원형이자 뿌리 같기도 하다. 정상성과 무난함을 간신히 획득한 주체들이 일상에서 덜컥 마주하는 기묘한 이격의 순간들을 바라본다. = 한국문학의 많은 인물들이 살면서 무난히 수행해야 할 과제들을 수행하지 못해서 문제가 된다. 취업을 제때 못한다든지 가족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고 결혼이 늦어진다든지. 나는 잠시 반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어쩌다 그런 것들을 성공적으로 다 수행해버린 사람은 어떤 꼴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기만의 감각 같은 것에 시달린다면…. 한편으로는 그렇게 생애 과제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들을 향한 변호이기도 하다. ‘저 사람은 진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 거야,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너무 잘 따라온 삶일 뿐이야’ 하는 식의 의심의 눈초리가 있지 않나. 나는 이런 사람도 그저 자기 앞의 삶을 잘 살고 있을 뿐이라는 마음을 보탰다. 그러니까 분열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나로서는 내 인물을 최대치로 의심해가면서, 그러니까 가능한 한 샅샅이 들여다본 다음에 응원해주고 싶다. - 마지막 소설 <팍스 아토미카>는 열린 활주로에서 끝난다. 소설집의 전체적인 배열에 의도한 바가 있나. = 내가 편집부에 제시한 의견은 두 가지였다. 소설집의 시작은 <세상 모든 바다>이고 끝은 <팍스 아토미카>일 것. 그리고 세 작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보편 교양> <로나, 우리의 별>이 순서대로 붙어 있을 것. 특히 <팍스 아토미카>는 꼭 마지막 순서가 되었으면 했다. 작품들이 쌓여 소설집을 준비하게 된 어느 시점에 내가 그동안 쓴 이야기들의 마지막이될 작품을 구상하고 쓴 것이 <팍스 아토미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소설은 무조건 활주로에서 끝나야 한다는 생각만은 쓰기 전부터 갖고 있었다. 크고 작은 온갖 문제들, 통속의 일들로부터 인물들이 제 갈 길을 가도록, 그리고 독자들도 책을 덮은 뒤 자기 인생으로 나아가고 싶도록 개방적인 느낌으로 놓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팍스 아토미카>는 빠르게 많은 작품을 토해내고 지친 상태에서 나 자신을 위해 소설을 하나 쓰고 싶었다. 조직하지 말고 직관적으로 따라가자는 마음이었다. - 김기태의 소설은 한자리에 머물러 집요하게 서술하기보다는 흘러가는 생애를, 이어지는 지속의 상황을, 열린 국면을 스케치한다. 서사의 방법론에 있어 선호하는 방향이 있나. = 그게 지금까지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방법론이기 이전에 체질적으로 선택된 것이라 느낀다. 어떤 종류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접근할 때 내게는 아주 가까이 들어가는 방법보다 떨어져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한 장면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 묘사를 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시간을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쓰는 사람으로서 더 즐겁기도 하다. 짧은 이야기를 쓸 때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적 스케일을 확보해 3인칭으로 바라보는 것. 언제까지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계속 가져가보고 싶은 방법이다. 시간만큼은 우리 중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이 체감하는 분명한 것 중 하나이니까. “속을 보이면 어째서 가난함과 평안함이 함께 올까”(<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74쪽, <롤링 선더 러브> 중) 글쓰기에 몰입하기 직전에 내가 하는 일 “집중이 필요한 일을 하기 전에 샤워를 한다.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물로 씻어내고 좀더 깨끗하고 편한 옷을 입고 나면 기력이 좀 돌아온다고 해야 할까. 물을 적셔줘야 정신이 깨어나곤 한다. 아무래도 수용성 인간인가보다.” 나의 첫 번째 소설, 마지막(최근의) 소설 “어릴 때 집에 있는 60권짜리 양장본 문학전집 중 유독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좋아했다. 처음 읽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하이디가 도시에서 밤이 되면 알프스를 그리워할 때마다 이상하게 슬펐다. 왜 도시로 와야 했을까, 왜 여기에 있어야 할까, 그런 감정을 더듬었던 것이 강렬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준비하고 있는 장편소설을 위한 일종의 자료 조사 차원에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소설이었다.”

[인터뷰] 당신의 ‘좋음’을 생각하다가, <동경> 소설가 김화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김화진은 소설로부터 타인의 가능성을 배운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쓴다. 202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 <나주에 대하여>로 등단한 김화진은 뜻밖의 관계에까지 각별한 탐구심을 발휘하는 내면의 서술자다. ‘일하고 우정하는’ 젊은 여성들의 마음속 웅덩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그는 남자 친구의 전 애인을 회사 동료로 마주하는 <나주에 대하여>, 네명의 20대 여성들이 서로의 마음을 횡단하는 궤적을 그린 연작소설 <공룡의 이동경로>를 지나 첫 장편소설 <동경>에 이르렀다. 인형 리페인팅이라는 독특한 직업 세계에서 만난 세명의 30대 여성이 서로의 깊이와 이면의 두고 신중한 접합 지점을 모색해나가는 이야기다. 편집자에서 유튜버, 체온을 머금은 듯한 감정 묘사로 주목받는 소설가로 역할을 확장하는 사이 그의 작중 인물들도 함께 30대를 통과하며 성숙해졌다. 지난 6월, <동경>과 함께 칙릿 장르에 도전한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를 연달아 발표한 김화진을 만나 미세하지만 끊임없는 진폭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소설가의 마음을 물었다. - 작가 김화진 이전에 민음사 유튜브 채널로 유명세를 탄 편집자 김화진이 알려졌다. 스스로를 소설가로 정체화한 순간은 언제쯤이었나. = 등단한 것, 소설가가 된 것.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걸 납득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누가 나를 소설가로 불러줄 때 스스로 머쓱해하지 않았으면 싶어서 나는 소설가가 맞다고, 그것을 객관적인 현상으로서 받아들이자고 한동안 노력했다. (웃음) 첫책 <나주에 대하여>가 나올 때까지도 내 책이 아닌 것만 같아서 정영수 편집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언제나 모든 반응이 조금 늦되다. 빨리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이게 맞나, 괜찮은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망설이는 동안 쌓이는 찌꺼기들로 글을 쓰는 것 같다. - 국문학을 전공하고 편집자가 됐다. 회사를 다니면서 꾸준히 소설을 썼는데 체력을 아껴가며 글 쓰는 과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 신입 땐 너무 긴장해서 회사 다니는 일만으로도 녹초가 됐다. 습작을 쉰 적은 없지만 입사 후 한동안은 진도를 못 내다가 2년쯤 지나서야 정기적으로 쓰게 됐다. 퇴근 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많은 것들의 증거다. 메모해둔 것이 제법 있고, 거기서부터 이어서 쓸 수 있을 것 같고, 결정적으로 집에 가서 눕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그러니 소설을 쓴다는 게 좋을 수밖에 없다. 오늘 쓸지 말지는 주로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결정한다. 집 근처 카페 아무 데나 들어가서 쓰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가서 저녁을 먹는다. 소설을 쓴 날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확실하다. - 첫 장편소설 <동경>은 인형 리페인팅이라는 일을 중심으로 관계 맺은 세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다. 1부에서는 세 인물(아름, 해든, 민아) 각자의 1인칭 시점으로 마음의 세밀한 결을 서술했다. = 인물들 각자의 뿌리와 깊이를 세워두어야 관계의 삼각형이 제대로 설 것 같았다. 관계 속의 한 사람이기 이전에 각 개인의 모습은 이러하다고, 그러니까 어쩌면 전혀 친해지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2부에서 3인칭으로 세 사람을 바라봤다. 이들이 하나의 시간 속에서 흘러가면서 때로 겹치고 또 겹치지 않는 모습을. - 서로에게 낱낱이 밝히지 않는 은밀한 사정들을 1부에서 먼저 서술한 다음, 2부에서 관계의 구도를 떨어뜨려놓고 바라본다. 어떤 효과를 기대했나. 각 챕터가 계절의 흐름을 담고 있기도 해서 소설집 전체가 미시적인 감정과 거시적인 시간의 흐름을 넘나든다는 느낌을 준다. = 소설 속에서 인물과 인물이 대화할 때는 사실 말하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인물의 내면 서술을 다 읽고 대화를 접하기 때문에 두 대화 상대가 훨씬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단편에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가 분량상 벅찬데, 장편소설에선 좀더 접근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아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지, 해든이 아빠로부터 받은 영향은 얼마만큼인지 1부의 1인칭 서술에서 충분히 적어둔 뒤에, 2부에서는 그들 각자가 자신의 깊이를 다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차이를 하나의 흐름 속에서 확실히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서로 동경하는 친구들이라면 다 얘기하지 않아도 그것대로 좋은 관계일 수 있다고, 혹은 어쩐지 다 알 것 같아도 모른 척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 나이대 우정의 좋은 면이다. - 소설집의 제목이 된 ‘동경’의 뜻을 질문하고 싶다. 이번 소설을 쓰면서 동경한다는 감정을 어떻게 해석했나. =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산다. 그 생각을 세 인물에게 나눈 것이 아름, 해든, 민아다. 세명 모두 이쪽저쪽의 상대를 보면서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혹은 ‘저 사람처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며 썼다. 누군가에게 어떤 점이 있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찬찬히 생각한 소설이었다.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서 동경이란 단어를 한번도 제대로 의식한 적 없었는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도 발견해나갔다. - 김화진의 소설에서 친구 되기, 혹은 우정은 왜 이다지도 중요할까. = 우정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해서? 물론 나는 살면서 모든 인간관계가 어려웠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할 수 없는 말이 많은 관계가 친구였다. 당신의 어떤 점이 싫다고, 부모에게나 애인에게는 말해버리게 되지 않나. 친구에겐 그게 안됐다. 친구에겐 어디까지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는지 그 어려움을 탐구하는 게 항상 흥미로운 주제였다. 일로 만난 관계, 동료로 시작한 관계가 친구로 접어드는 통로가 신비롭기도 하다. 원래 친구였던 무리가 쪼개지는 과정 같은 것들도. 친구는 내게 그 기한과 깊이가 너무나 다채로워서 계속해서 쓸 게 많은 주제다. - 작가 김화진은 현실보다 인간관계의 더 나은 가능성을 소설로서 모색한다고 할 수 있을까. = 적어도 나의 현실에 비교하자면 그렇지 않을까. 소설의 기저에는 결국 내가 있다. 이런 식으로 굴어도 나랑 친구해줄까, 저렇게 행동해도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의심을 실험해본다. 똑같이 행동해도 그게 누구냐에 따라 미움의 정도와 너그러움이 달라지는 것같이 희한한 마음들을 소설 안에서 적용해보는 것이 재밌다. - 자신의 내면만큼 타인의 성향과 심정에 대해 골똘히 탐구하는 문장들을 따라가는 것이 김화진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다. 바꿔 말하면 자의식에만 침잠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식적인 환기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 자기가 자기를 몰라서 괴로워하고 타인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과정조차 결국은 다 자기가 좋아서 그러고 있는 거 아닐까. ‘내가 나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조차 그 안에 너무나 소중한 자기가 들어 있는 거라서. 그래도 다른 사람을 거울 삼고 싶다는 마음, 반사된 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확실히 자폐적이지 않다고는 생각한다. 나 자신의 기원에서 찾자면… 내가 눈치를 많이 보고 살아와서 그럴까? 어릴 때 학교에서 줄을 서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맞더라도 쟤한테 줄을 맞춰야 하나 생각하는 어린이였다. 그런 걸 고민하는 애와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애는 분명 다르겠지. 나는 말하자면 전자인 어린이로 태어나 안 그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혼종일 테고. - 소설의 소재와 장면들, 문장들을 수집하는 평소의 방식이 궁금하다. = 평소엔 그저 이 시간에 단편소설 하나라도 완성하면 참 좋겠지, 하면서 누워 있다. 생각만 품은 채로 그저 돌아다니거나 뭘 읽기도 하고. 소설 시작 부분이 나열되어 있는 파일들이 잔뜩 모인 폴더가 있다. 여러 덩어리들을 직관적으로 그때그때 모아두고 서로 이어지는 것들끼리 분류해둔다. 서로 합쳐질 수 있겠다 싶은 것들끼리 하루 날 잡아 길게 들여다보게 날 무언가 쓰게 되는 셈이다. 여행을 거의 하지 않다가 최근 들어 조금씩 다른 장소, 풍경에 가 있어보려고 하는데 그때 본 인상적인 것들을 메모로 남기기도 한다. 최근엔 무주산골영화제에 갔다가 들른 테마랜드에 수달이 있다고 썼다. (웃음) 무언가 처음 알게 된 신기함, 인생을 살면서 내가 모르는 게 아직 이토록 많다는 놀라움, 그 밖의 솟구치는 감정들을 적는다. - 영화기자의 사족을 붙이자면, 소설가 김화진을 제천, 전주, 무주 등 영화제에서 마주친 것만 여럿이다. = 영화제 탐방도 역시 늦된 편이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 멀리 가보자고, 환기를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여행을 다닌다. 얼마 전의 무주는 체육관에서 영화 보는 일이, 그 흰 플라스틱 의자를 보는 것이 참 좋았다. 영화제 여정은 단편소설이 되기에 훌륭한 조건들을 갖췄다. 권여선 작가님의 <삼인행> 같은 소설처럼. 그래서 늘 영화제로 떠날 때 이번엔 소설이 되기를 희망하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결국 ‘아, 이번에도 잘 놀았다!’ 하고 만다. - 앞으로 새롭게 쓰고 싶은 화두가 있을까. = 누구를 미워해보는 소설도 써보고 싶다. 다각의 관계 사이에서 특별히 밉고 싫은 애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동경>을 출간하고 도서전을 지나면서 유독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최근 들어 지독한 미움이나 싫음에 대해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동경>, 200쪽) 지금의 작가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은. “대체로 최신 발표작의 인물이 지금의 나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동경>의 아름은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꼭 나 같다. 무언가 좋다고 했다가, 안 좋다고 했다가 이래도 될까 하다가 안될 것 같다고 하면서 자꾸만 스스로 뒤집는 사람. 매번 갸우뚱거리면서 사고의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이 가장 나답다고 느낀다. 글이라는 게 결국 쓰는 사람의 사고의 흐름대로 비슷하게 구조되기 마련인 것 같다. 그래서 바람이 있다면 정반합을 추구하지 않고, 나중에 쾅 하고 무언가 틀렸음을 깨닫게 되더라도 일단 의심 없이 치고 나가는 사유와 문장의 소설을 써보고 싶다.” 요즘 소설 쓰기에 영감을 주는 존재는. “탁구를 치고 있다. 그동안 취미란 게 없는 삶을 살았는데 친구이자 동료인 정기현 편집자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둘이 가니까 잘 안 빠지게 된다. 가장 좋은 건 운동을 하면 잠시 정신을 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끼고 있다는 것. 아직 초보지만 소설에 한 장면쯤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인터뷰] 자유롭게, 엉뚱하게, 쉽게 굴하지 않게, <수능 해킹: 사교육의 기술자들> 단요 작가

<다이브>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로 단요 작가의 세계를 접한 이들에게 <수능 해킹>은 이례적인 선택처럼 여겨질 것이다. <수능 해킹: 사교육의 기술자들>(이하 <수능 해킹)>을 통해 단요 작가는 문호진 공저자와 수학능력시험을 중심으로 한국 교육계의 현실과 문제점을 다각도로 고발한다. ‘단요’라는 필명이 보드게임 용어에서 따왔다는 것 외에 작가 개인에 관해 밝혀진 정보는 전무하다시피하다. 그러나 <수능 해킹>을 계기로 그가 SF 장르 외연으로 집필 범위를 넓혀갈 것임을 기대하게 된다. - 주말마다 영화감상회를 운영한다고.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 주로 어떤 영화를 보는지 궁금하다. = 영화감상회는 비정기적으로 운영된다. 내가 줌으로 영화를 보자고 제안하면 시간 맞는 사람들이 와서 화면 공유로 같이 영화를 관람한다. 최근작보다는 2000년대 이전의 명작 대중영화나 B급 컬트영화 위주로 본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존 카펜터 감독의 <뉴욕 탈출>(1981)이고, 그 밖에 <마>(The Boxer’s Omen, 1983), <네트워크>(1976), <아귀레, 신의 분노>(1972), <에쿠스>(1977),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 등을 봤다. 예술영화도 누가 틀면 보긴 하지만 그때마다 종종 자는 사람들이 나온다. (웃음) - 지난 6월 <수능 해킹>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전에 발표한 소설들과 완전히 결이 다른 르포인데,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 2022년에 대중 앞에 선 뒤로 내가 이상한 커리어를 밟아오고 있긴 하다. (웃음) 기본적으로 집안에 교육자들이 있고, 때문에 사교육 및 교육 출판과도 친숙했다. 부업으로 국어 사설모의고사 비문학 영역을 출제한 경험도 있다. 그러다 공저자와 공통 지인인 손명환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교육 업계에 문제가 많다는 걸 느끼고 취재 중인 문호진 선생님이 계시는데, 그분이 국어 파트 관련해서도 이야기해줄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 그렇게 만나뵀는데 “지금 수능 문제 유형의 고착이 너무 극심하니 대안적인 문제 유형 개발을 해보자”고 하시더라. 그 얘기를 듣고 이걸 사회 이슈로 끌어올리자고 다시 제안을 드렸다. 그래야 교육계 사람들을 포함한 사회 각 분야의 사람들이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힘을 보텔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는 르포 기사로도 많이 다뤄지지만 기사는 휘발성이 짙어 책으로 출판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 타깃 독자층도 정해져 있었나. = 우선 수능을 앞둔 학생들이나 자식들의 입시를 신경 쓰는 4050은 관심을 가질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수능을 친 2030에게는 수능이 더이상 신경 쓰이는 주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외연을 얼마나 확장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중요했다. 해서 진보 교육에 진절머리내는 사람들부터 교육에서 경쟁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모두를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독자를 후킹할 수 있도록 5~10년 사이에 수능이 얼마나 변화했는가에 관한 내용을 책의 1부에 넣었고, 반드시 다뤄야 하는 사회 고발성 르포는 2~5부에서 이어지도록 했다. - 문호진 공저자와는 어떻게 분업이 이루어졌나. = 문호진 선생님이 주요한 문제의식을 정립하면 내가 거기에 디테일을 채워넣고 책이라는 물성을 가진 구조로 변환하는 작업을 했다. 인터뷰 발췌에서 ‘단요’가 표기된 부분은 내가 취재했지만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취재는 문호진 선생님이 진행했다. 선생님이 1~2시간 분량의 긴 인터뷰를 보내오면 그걸 읽고 정리해 어느 부분에 넣을지 의논하는 식으로 작업이 이어졌다. - <수능 해킹>의 5장에서 후속 보도에 관해 언급하며 끝난다. 후속권이 나올 여지가 있을까. =하(下)권은 반드시 나올 예정이다. 공교육 문제에 관한 소스가 이미 꽤 준비되어 있는 상태다. <수능 해킹>의 5부에서 다 다룰 수가 없어 우선 엑기스만 담고, 나머지는 추가 취재를 통해 하권에서 다루기로 했다. - <수능 해킹>을 출간한 뒤 작가로서 변화했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나. = 글을 쓰는 혈이 뚫렸다고 할까. 이미 완성된 글 중간에 문장을 추가해야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그럴 경우 글의 밸런스가 깨지지 않도록 앞뒤 문단을 뜯어고쳐야 한다. 그에 관한 고민을 여러 차원에서 극한까지 끌어올려 진행했다. 그리고 오해 혹은 반박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글 안에 다양한 장치를 넣었다. 몇달간 이 작업을 거치고 나니 앞으로 훨씬 다양하고 더 구조화된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싶어졌다. - <개의 설계사>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와 같은 소설에서도 글을 세심하게 구조화하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필자라고 느꼈다. = 그렇다. 그래서 <수능 해킹> 이전엔 르포를 써본 적이 없지만 내가 잘 쓸 수 있다고 판단해 제안한 거였다. 기본적으로 소설도 뼈대를 확실히 마련해두고 쓰는 편이다. 다만 이번엔 디테일을 더 세심하게 가하는 수련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소설을 쓸 때는 어디까지 설정을 정리해두는 편인가. 혹은 글을 쓰는 와중이나 퇴고할 때 수정을 많이 가하는 편인가. = 그렇게 작은 부분까지 정해두진 않는다. 그 이유는 어느 정도 틀을 짜놓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중간부터 인물들이 자기 목소리를 얻어 달려나가기 때문이다. 글에는 언제나 작가의 의식 이상이 깃든다. 140%의 글을 쓰려면 그렇게 인물들이 스스로 달려나가게 해야 한다. 만약 작가가 모든 걸 통제한 글이라면 그건 100%의 글이 아니다. 그래서 중층적으로 설정을 넣고 가되 이 중층적인 설정이 맞부딪치면서 갑자기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개의 설계사>는 그런 상황이 굉장히 많이 발생한 작품이었다. 주인공인 도화가 사실 무척 이상한 인물이지 않나. 처음엔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출발했지만 어쩌다보니 설정에 변화가 생겨 지금의 도화가 됐다. 그래도 개인적으론 애정이 많이 가는 인물이다. - <수능 해킹>과 같은 달에 의 수록작으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를 발표했다. SF 장르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나. = 일단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내가 SF의 오랜 독자로서 SF의 주요 방법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지고 답해나가는 방식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그럼으로써 그 자체로 다층적인 질문을 내포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접근은 소설적 가능성을 여러 방면으로 열어준다. 핀천이나 버로스, 이탈로 칼비노, J. G. 밸러드 등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다 보니 리얼리즘 중심적 사고를 거의 하지 않기도 하고. 달리 말하면 SF는 내게 다양한 문학적 속성 중 하나고, SF와 관계 맺는 속성들을 잘 활용할 경우 흥미로운 작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주 쓴다. 두 번째로 현대의 기술문명과 금융-산업-정치 시스템간의 운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데, 여기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어간 결과물은 대개 SF의 뉘앙스를 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쓴 글 중에서는 <개의 설계사>와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그리고 <마녀가 되는 주문>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반드시 SF만 쓰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당분간은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 공대에 입학한 뒤 어떤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됐나. = 청소년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는 다소 오만한 태도로 살았다. 예전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일을 외주받아 해왔는데 결과물이 나쁘지 않았고 나에 대한 신뢰도 두터웠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지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자유분방해 일반 기업에서 일하기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고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다만 나는 따로 글쓰기에 관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과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그래서 단편보다는 장편으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았고 그렇게 쓴 첫 소설이 <다이브>다. <다이브>를 발표한 뒤 내가 느낀 건 사람들이 권위, 명예와 같은 상징 자본을 굉장히 신경 쓴다는 점이었다. 당시 기점으로 아직 문학상을 받지 못한 내가 무엇으로 데뷔했는지 이런 정보를 일반 독자들도 궁금해하는 걸 보고 생각보다 크레딧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당시 편집자님께 “내가 약력이 너무 없으니 문학상을 조만간 받아오겠다”고 말씀드리고 2023년에 상을 받아왔다(단요 작가는 2023년에 문윤성SF문학상,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했다.-편집자). -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청소년 소설을 집필하거나 <수능 해킹>에 참여한 것을 보고 10대, 혹은 그들의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필자라고 느꼈다. = 개별 인격에는 관심이 없지만 이들이 미래 세대고 같이 살아가야 할 사회 일원이라는 점에선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다. 현 상황처럼 미래 세대들에게 이 사회를 스스로 좋은 방향으로 바꿔나갈 수 있고, 사회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지금의 한국은 불신론, 회의감, 무력감 같은 것들이 강하게 포진해 있지만 사람들이 힘을 합친다면 바꾸지 못할 부분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과 괴리된 이상주의적인 것들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가교를 놓는 역할을 좀더 하고 싶고, 그래서 <수능 해킹> 공저자인 문호진 선생님이 앞으로도 자신의 뜻을 잘 펼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능 해킹> 작업이 계속 잘된다면 사회의 여러 면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절대 믿지 않은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내가 쓴 글로 인해 일부 독자들이 위안을 얻고, 그분들이 서로 동질감을 느끼는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글이 사람을 끌어당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글이 정말 힘이 있는 포맷임을 느꼈다. - 그때 이후로 소설을 계속 써나가야겠다는 동력을 얻었나. = 그렇다. 정확히는 내 글을 읽고 좋아해주고 또 믿어주는 독자들이 큰 에너지가 된다. 아주 예전에 내가 소설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기 이전부터 나를 응원해준 친구들이 있었다. 글과 관련 없는 의대, 공대, 물리학과 출신들임에도 내 글이 좋다고 계속 써보라고 확신을 줬다. 그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크다. - 윤리학, 정치, 경제, 철학 등 관심사가 굉장히 다양하다. 현재까지는 SF 소설가로 익숙했지만 을 계기로 더 다양한 주제와 장르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예상해본다. =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 쓰고 싶은 책은 정말 많다. 우선 올해는 장편 두 작품과 단편 한 작품이 출간될 예정이고 내년에는 아마 5권쯤 나오지 않을까 싶다. 하권 작업도 진행할 것이고. 그 밖에 SF 장르와 현대 스릴러, 또 관념 소설도 쓰고 싶은 것들이 있다. 비평에도 관심이 많은데 현재로선 웹소설을 다뤄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웹소설 작가들이 있는데 그들은 수백만 자 분량의 글을 쓰고 그만큼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인물을 구성하는 능력, 문장력이 굉장히 좋다. 하지만 웹소설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한번 제대로 공부할 필요성을 느낀다. “모든 개혁은 내적 모순과 불가피한 임시성을 지니는 만큼 성실한 관리 감독과 엄밀한 후속 조치를 요하게 됩니다.”(<수능 해킹>, 277쪽) 글 외에 내게 영감을 주는 존재. “갈등하는 인간 자체인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이 겪은 곤란한 일에 내가 휘말리거나 그 갈등을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각자의 입장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또 이 갈등에 어떤 요소가 깔려 있는지에 관해 깊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생각은 갈등을 추동하는 요인들(정동, 기술, 제도 등의 결합물)이 상호작용하는 방식, 복잡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소설이 시작된다.” 나의 첫 번째 소설, 마지막(최근의) 소설 “최근 재밌게 읽은 소설은 아이 작가의 <도망자>다. 치기 어린 느낌도 강하지만 그만큼 원초적인 에너지가 도사린 글이다. 어릴 때 좋아했던 소설을 꼽자면 루쉰의 단편집 <방황>에 수록된 <고독자>를 특히 좋아했다. 웨이롄수가 고독한 투사였다가 떠받들어지는 선생이 되어감에 따라, 그리고 다시 죽음을 맞이함에 따라 발생하는 환멸과 애상이 잘 드러난 단편이다. 장편으로는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좋아하는데 서술 기법과 시간에 대한 사유, 그리고 문장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 마치 수수께끼 퍼즐을 푸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준다. 둘 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계속 읽어오고 있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추리, 아니 물리 탐정 코난과의 재회

전설에 이르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첫 번째 길은 흉내낼 수 없는 개성을 발산한 뒤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초신성처럼 막대한 에너지를 폭발시켜 세상을 환하게 빛낸 뒤 거짓말처럼 사라진 작품들. 예를 들면 1980년대 과잉의 낭만이 녹아든 <파이브 스타 스토리>는 명목상으론 아직 완결나지 않았지만 사실 이미 쓸모를 다했다.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함에 그리움이 깃드는 법. 그 시절에만 허락된 어떤 반짝임은 아스라이 사라짐으로써 전설로 거듭난다. 두 번째는 세월의 모래바람을 꿋꿋이 버텨 시간을 이겨내는, 기적 같은 지속의 길이다. 무려 41년째 연재 중인 <유리가면>을 비롯해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미완성으로 남은 <베르세르크>, 권을 거듭할수록 챔피언에서 멀어져가는 <더 파이팅> 등 일본 만화계에서 장기 연재는 드물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본의 만화 연재 시스템은 인기작의 경우 애니메이션, 게임 등 다양하게 확장되는 구조라 작가가 끝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생명 연장을 이어가는 작품 중에도 유난히 빛나는 결과물들이 있다. 그 와중에 올해로 연재 30년을 맞이한 <명탐정 코난>도 그중 하나다. <명탐정 코난>은 단지 연재를 오래 이어온 것을 넘어 매해 자신의 인기를 갱신 중이다. 시간에 따라 인기가 축적되는 건 이해할 법하지만 팬덤이 확장되는 건 다른 문제다. 시대와 호흡하며 내적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추리물로 시작한 명탐정 코난은 연재 7, 8년이 넘어가면서부터 꾸준히 다른 가능성의 문을 두드려왔다. 정체불명의 약 때문에 아이가 된 고등학생이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컨셉은 맥거핀이 된 지 오래다. 솔직히 이젠 추리 빼고 다 잘하는 <명탐정 코난>은 탐정물이라기보다는 액션 캐릭터 장르물에 가깝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요즘 코난을 보면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그토록 꿈꾸던 안정된 프랜차이즈의 완성형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1년에 한번, 일본의 골든위크 기간 연례행사처럼 개봉하는 <명탐정 코난> 극장판은 6기를 지나면서 본편의 스토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비현실적인 액션이 지겨워질 때 즈음 캐릭터들(혹은 캐릭터간 관계성)을 영리하게 추가하며 팬덤을 늘려왔다. 그렇게 아오야마 고쇼 작가가 쏘아 올린 공은 팬들의 기대와 바람, 수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진의 욕망과 능력이 뒤엉켜 ‘명탐정 코난’이라는 독자적 장르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세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명탐정 코난>보다 <미래 소년 코난>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한때 <소년탐정 김전일>과 함께 즐겨 보던 코난이 극장판에서 축구공으로 미사일까지 때려 맞추던 즈음에 견디지 못하고 하차했다. (<원피스>의 위대한 항로의 수많은 중도 탈락자들처럼) 어쩌면 장기 연재물에서 중도 하차는 숙명이다. 하지만 모험이 끝나지 않는 한 팬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나 역시 한번 발길을 끊고 나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번 특별판을 통해 비로소 복귀할 수 있었다. 추리력 대신 물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코난도 이제 보니 꽤 흥미롭다. 현재진행형의 전설에 동참하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자, 나처럼 중도 탈락한 이들에게, <씨네21> 최초로 시도한 애니메이션 스페셜 에디션 <명탐정 코난> 특별판을 부친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 다시 전설의 일부가 되고 싶은 자, 지금부터라도 동승하라.

코난을 만나고 내 인생이 달라졌다, <명탐정 코난> 애호가 9인에게 듣는 ‘<명탐정 코난>은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연재 30주년. 강산이 족히 세번은 변했을 시간이고 신생아는 자라 사회인이 되었을 시간이다. 영화의 연표를 기준 삼으면 <명탐정 코난>은 <쇼생크 탈출> <포레스트 검프> <펄프 픽션>과 동갑인 셈이다. 위 영화를 보고 꿈을 키운 영화인이 다수이듯 <명탐정 코난>을 읽으며 예술의 길에 첫발을 디딘 창작자들도 분명 다수일 것이다. 영화감독, 만화가, 의료인 등 <명탐정 코난>을 사랑한 9인에게 그들이 <명탐정 코난>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관해 들었다. 오세연 감독(<성덕>) 초등학생 때,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가 무엇인지 하나도 몰랐다. 우리 집 TV엔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채널이 다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언니와 내가 애니메이션을 볼 시간에 책을 더 읽었으면 하는, 엄마가 내린 나름의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개편으로 인해 TV 채널번호가 바뀌는 바람에 그토록 궁금해하던 <투니버스> 채널을 볼 수 있게 됐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3등신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코난’이었다. 안경 뒤로 숨은 매서운 눈빛과 나비넥타이를 꼭 붙잡고 읊어대는 추리 내용에 집중하다보면 그 애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엄마의 반응이었다. 몰래 <명탐정 코난>을 보는 우리를 혼내기는 커녕 오히려 반가워했다! 알고 보니 엄마는 만화책으로 코난을 즐겨봐온 선배였다. 덕분에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설정 같은 것을 옆에서 알려주곤 했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게다가 코난을 볼 때면 왠지 조금 똑똑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명탐정 코난: 천국으로의 카운트다운>을 좋아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장미가 시계 없이 정확하게 카운트다운을 하던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말수가 적고 표정이 어두운, 늘 침착하고 성숙한 장미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언니와 함께 마음속으로 30초를 세고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체크하는 놀이를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성인이 된 이후, 떠도는 이야기로 코난의 주변 인물들의 실체와 결말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잊어버렸다. 코난이 계속 어린아이의 모습이어야만 나도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영원히 결말을 모르고 싶은, 내가 좋아했던 유일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명탐정 코난>. 이종범 만화가(<닥터 프로스트>) 아오야마 고쇼 작가의 오랜 팬이었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 이전부터 작가의 작품들을 꾸준히 따라 읽으며 좋아했다. <명탐정 코난>은 드문 느낌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그랬듯, 한 세대 전체가 기억하는 ‘풍경으로서의 만화’가 되는 작품은 흔치 않다. 긴 세월 동안 사랑받아왔다는 점에서 여러 세대를, 독자와 작가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좋은 윤활제 역할을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성희 감독(<승리호>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대학교 1학년 때, <명탐정 코난> 첫 한국 단행본이 발간됐다. 단골 만화책 대여점 아저씨가 새로 나왔다며 권했던 기억도 난다. <명탐정 코난>은 내가 막 성인이 되었을 때 만난 작품인데, 놀랍게도 아직 그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다. 수십년째 새 작품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세대의 팬들이 생겨난다. 그 시절 대여점에 꽂혀 있던 수많은 만화책 중, 내가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은 오직 단 하나, <명탐정 코난>뿐이다. 부디 은퇴는 내가 코난보다 늦기를…. 한이 <계간 미스터리> 편집장 <명탐정 코난>은 은밀히 추리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 도서 대여점 사장님과 안면을 터서 신간이 들어오면 뒤로 은밀히 빼돌린 책을 제일 먼저 받곤 했다. 물론 두세 시간 안에 얼른 읽고 반납해야 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어, 집에 가지도 못하고 뙤약볕에 앉아 꿀을 빠는 벌처럼 핥듯이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작가가 되고 미스터리 전문 잡지의 편집장이 된 지금까지도 <명탐정 코난>에 대한 선망은 여전하다. 만화는 물론 여러 종의 스핀오프, 노벨라이즈, 애니메이션, 극장판, 게임 등으로 작품의 파급력은 연재 30년 동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졌으며, 하나의 빼어난 콘텐츠가 얼마나 다종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모범 사례가 됐다. 10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부침을 반복하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 <명탐정 코난>처럼 핵폭탄 같은 파괴력을 가진 작품이 간절하다. 천선란 소설가(<천 개의 파랑> <어떤 물질의 사랑> <나인>) 부모님이 사는 본가에는 <명탐정 코난>이 74권까지 있다. 어렸을 적 만화방 대여점 딸이 꿈이었던 내 소원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뤄주기 위해 엄마가 어느 날 즐겨 읽던 <명탐정 코난> 30권을 사왔고, 그 이후로 책이 나올 때마다 사는 게 취미가 되었다. 물론 74권에서 멈췄지만. 책과 달리 만화책은 구석에 그려진 카메오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는 특이한 습관이 있는 나는 만화책 1권을 다 읽는 데 보통 2시간을 소요한다. 그런데 코난은 지문과 대사량이 꽤 많은 편이어서 한권을 펼치면 꼼짝없이 3시간을 망부석이 되어 소파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배운 게,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손가락에 미리 본드를 발라놓으면 좋고, 청산가리에서 나는 맛은…. 독립을 시작한 지금, 슬슬 만화책 자리를 마련해둬야 하지 않을까, 집에 있는 코난도 데려오고, 나머지 권도 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보니 <명탐정 코난>이 104권까지 나왔구나. (104권의 출간 동시 해외 번역과 베스트셀러라니, 정말 부럽다.) 김형규 문화예술창작의료인·만화애호가 VJ 활동과 치과대학 생활을 병행하던 1996년에 만화 <명탐정 코난>을 처음 접했다. 만화를 사랑하고 글자 그대로 만화를 ‘섭취’하는 내게, <명탐정 코난>은 맹렬한 애정과 진지한 비판 모두를 보내게 되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어떤 만화 주인공들은 현실에서 만난다 해도 먼발치에서 구경만 하고 싶고 또 어떤 주인공들은 버선발로 달려가 손잡고 사진도 함께 찍고 싶다. 그런데 <소년탐정 김전일>의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의 코난만큼은 멀리하고 싶다. 이 두 친구는 살면서 한번도 접하기 힘든 살인사건과 범죄를 끼니 챙기듯 심드렁하게 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난 곁에 죽음의 그림자가 그늘진 이유는 이 친구가 자신의 명탐정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몸소 범죄를 유발하는 악의 사신이 아닐까 하는 못된 상상도 하게 된다. <명탐정 코난>을 사랑한다. 호호할아버지가 돼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명탐정 코난>을 만나길 바란다. 추리엔 승패도, 상하도 없으니까. 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이니까. 백재호 감독·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그들이 죽었다> <시민 노무현> <붉은 장미의 추억> 1999년 오랜만의 세기말, 곧 다가올 새 시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이 섞여 시끌벅적한 서울의 밤거리, 그 흔한 네온사인 간판도 없는 불 꺼진 낡은 건물, 같은 차림을 한 남성 수십명이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칸막이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톡- 톡- 조심스럽게 책상 칸막이를 두드리는 한 남자. 잠시 적막이 흘렀다가, 사각사각- 이내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 옆자리 남자가 살짝 기지개를 켜며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책상 밑으로 뭔가를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 역시 옆자리 남자가 준 물건과 동일한 형체의 물건을 건넨다. 심호흡하고 옆자리 남자가 건넨 물건을 확인하는 남자. 그것은 바로 <명탐정 코난> 신간이다. 잔뜩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고2의 나! 당시 신이치와 동갑이었던 나는 이제 코고로 탐정의 나이도 훌쩍 넘어버렸고, 독서실 친구 얼굴도 검은 조직처럼 희미해졌지만, 코난과 친구들은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30년이나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다니! 저주인가 축복인가!? 이태동 감독(<좋좋소>) <명탐정 코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투니버스>라는 만화 채널이다. 내가 <투니버스>를 보는 이유의 대부분은 코난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동네 형들은 코난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만화책으로 먼저 봐야 진정한 매력을 알 수 있다느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도 코난을 떠올리면 코난을 더빙한 성우의 연기와 목소리를 통해 좀더 입체감 있게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매번 범임을 색출해나가는 작업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함께했다. 내 추리력으로는 대부분의 범인을 찾는 데 실패했던 것 같다.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말려>는 다른 애니메이션과 달리 처음부터 시청해서 주인공의 서사를 쌓지 않고도 어느 편을 봐도 쉽게 몰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지금 내가 작업하고 있는 숏폼 웹드라마, 뉴미디어 콘텐츠가 서사의 연속성이 있는 시리즈물이 아니라 한편 한편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 수 있도록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추리물이라는 장르가 마니아층이 두텁고 성인들이 즐기던 장르를 어린 코난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며 애니메이션을 보는 어린이들에게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작품인 것 같다. 조예은 소설가(<적산가옥의 유령> <입속 지느러미>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명탐정 코난> 2기 36화, <사라진 흉기 사건>에서 범인은 피해자가 옷걸이를 던져 욱하는 마음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어이없는 살해 동기로 유명한 에피소드이죠. 현실적이지 않다거나 작가가 스토리를 짜기 귀찮았던 것 아니냐는 등의 반응도 있었다. 나는 사실 <명탐정 코난>보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즐겨보았지만 모든 추리 만화의 살해 동기를 통틀어 이 에피소드만큼 현실적인 동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실제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나요? 사연 있는 범인의 치밀한 계획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이기심과 악의, 타이밍이 비극을 일으키죠. 소설을 쓰는 요즘 자주 36화를 떠올린다. 20년 전 12살이었던 내가 작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코난의 내용이 이상하다고 구시렁대며 터덜터덜 학원에 갔네….

언제까지고 즐기는 엔터테인먼트, <명탐정 코난>으로 본 프랜차이즈 애니메이션의 세대적 의미

미스터리 장르의 특징과 소년만화적 대중성의 공존 일찍이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등이 형성한 일본 추리 문학은 서구권의 미스터리소설을 계승하고 자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급기야 요코미조 세이시의 탐정 캐릭터인 긴다이치 고스케의 손자를 자처하는 또 다른 만화 캐릭터 긴다이치 하지메(<소년탐정 김전일>의 그 ‘김전일’)가 등장할 만큼 일본인들은 미스터리 장르를 오래 그리고 깊이 사랑해왔다. 이러한 문화적 저변은 <명탐정 코난>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지만 작중에서 약을 먹고 어린아이가 된 주인공 구도 신이치가 둘러대는 이름이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다름 아닌 ‘에도가와 란포’의 에도가와에 대문호 ‘코난 도일’의 코난 아닌가? 에도가와 란포라는 대작가의 이름 또한 또 다른 미스터리 장르의 대가인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온 것이고 보면 참 재밌다. 하지만 이러한 장르적 저변만이 <명탐정 코난>의 압도적인 인기를 설명해주진 않는다. 이 작품이 여타의 미스터리 장르 만화들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까닭은- 작중 살인사건이나 죽는 사람의 수가 남부럽지 않게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이 장르 작품임을 감안해도 몹시 대중적이고, 또 다양한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그림과 내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부터 약물로 어린애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이 작품에는 본격 미스터리 하면 생각할 수 있는 심각함과 귀여움이 놀라울 만큼 즐겁게 공존한다. 그런데 이 공존은 거의 대부분의 인물 배치에서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어린이 몸이 된 주인공에 맞춰 소년, 소녀들이 이입할 구석을 두는가 하면(어린이 탐정단), 너무나 틀에 박힌 듯하게 뭐든 만들어내는 박사님 역(브라운 박사)도 뻔뻔하리만치 대놓고 등장하고, 그걸 또 그럴싸하게 써대며 액션을 펼치는 주인공하며, 주인공인 코난에 비해 일견 무능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균치를 상회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어른들(유명한 탐정 및 경찰들)과 뭔가를 꾸미고 있는 매력적인 흑막(검은 조직)의 배치가 그렇다. 여기에 러브 코미디의 한축으로 진짜 여주인공이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지만 막상 어느 쪽도 약한 꽃다발의 역할과는 거리가 먼 모리 란과 하이바라 아이, 라이벌 역인 괴도 키드나 핫토리 헤이지 같은 인물들의 대비까지 놓고 보자면 주인공부터가 1인2역이라 할 복합성을 띤 이 작품에서 읽는 이들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조 사라진다. 이렇게 <명탐정 코난>에는 본격 추리물의 틀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각 인물들의 역할이 지극히 전형적인 듯 복합적으로 균형감 있게 배치되어 있어 소년 만화의 주 독자는 물론 미스터리 장르 문법에 익숙해진 이들,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폭넓게 즐길 수 있다. 덕분에 이 작품은 자칫 지식 대결과 사건의 잔인함이 부각되기 십상인 미스터리 장르에 소년 만화스러운 과장과 인물의 다층적 매력을 부여한 텍스트로서 새로운 독자 및 관객의 유입은 물론 나이 들어 다시 볼 때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30년이란 세월은 한 세대다. 어려서 본 코난을 어른이 돼 자식과 함께 볼 수 있게 된 시간인 셈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의 의미 <명탐정 코난>은 비단 독자와 관객만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업계인들의 세대도 아우르는 작품이다. 벌써 26~27년째 제작되다 보니 애니메이터와 성우에 이르기까지 초기부터 참여하고 있는 중견과 베테랑이 신인들과 섞이고 있다.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으로 코난 극장판을 세 번째 맡고 있는 나가오카 지카 감독은 2024년 4월20일자 <앙·앙>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코난이란 작품에만 있는 두께”라 언급한 후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면서 코난 애니메이션은 더 커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명탐정 코난>은 보는 이들도, 만드는 이들도 세대를 거듭하며 함께할 하나의 연결고리로서 마주하는 대상이다. 스포츠에 빗대어 표현하면 그야말로 존재만으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환희와 감동을 일으키는 ‘프랜차이즈 스타’라 할 만하다. 어린이 때 본 작품을 자식과 함께 보는 것은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즐길 만한 대중(즉 비오타쿠층 대상)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명탐정 코난>이라는 IP 비즈니스의 성과가 가능한 까닭은 애니메이션과의 강한 연결성을 지닌 일본 출판만화의 특성이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TV와 극장이라는 대중을 대상으로 노출 창구를 카탈로그 삼고 이를 다시 만화 판매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일본의 출판만화 비즈니스 전략이다. 만화책이 물경 2억6천만부, 최신 극장판 관객수 1천만명 등 애니메이션 노출도가 노출도를, 흥행도가 흥행도를 만들어내는 국민적 프랜차이즈의 정점에 오른 이 작품을 오로지 기계적인 전략의 성공이라고만 볼 순 없다. 일본에서 많은 작품들이 애니메이션 노출을 통해 책 판매고를 높이려는 전략을 시도하지만, 모두가 <명탐정 코난>같이 되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탐정 코난>의 성과는 다매체 전략만이 아닌 작품이 지닌 매력과 대중성이 장르적 저변까지 더해 빚어진 결과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압도적인 수요와 이를 연결 지어 소비하는 일본 특유의 시장성과 규모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전주만 나오면 대학 축제가 뒤집어지는 뽀로로 같은 캐릭터가 있지만 이들은 초통령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어린이들과 그 어린이를 TV 앞과 극장으로 데려오는 역할로서의 부모까지가 시장의 실제 한계선이다. 여러 면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강세인 일본과는 결이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한국에서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바탕을 둔 프랜차이즈 IP가 나올 수 있을까? 특히 실사화쪽에서 강세를 보이는 한국에서 가능한 일일까? 한국 만화의 헤게모니를 장악 중인 네이버 웹툰은 최근 웹툰 IP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화를 시즌을 거듭해 추진하며 일회성 영상화에서 그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욕망은 읽힌다. 다만 전 세대를 아우를 만한 대중성과 시간을 차분히 쌓아나갈 수 있는가는 아직 미지수다. 작가와 업체가 사고를 치지도 말아야 할 것이며 변화하는 사회상 등에도 끊임없이 조응해야 한다. <명탐정 코난>의 인기에서 네이버 웹툰을 비롯한 한국의 콘텐츠 플랫폼 업체들이 배워야 할 것은 비단 다매체 전략만은 아닐 터다.

[인터뷰] 내 안에 영원히 살아 있는 소년,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신용우 성우

사람들의 이목을 이끌 줄 아는 본투비 스타, 능청스럽고 천연덕스러운 연기력과 분장력, 정의구현을 최선의 가치로 두지 않으나 불의를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타고난 선의, 자신을 겨냥하는 꼬마 탐정과의 공조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까지 괴도 키드는 <명탐정 코난> 세계관의 외연을 넓히는 기폭제이자 촉매제로 기능한다. 사건 발생-코난 일행의 연루-탐색-추리-결말. <명탐정 코난>은 일종의 느슨한 규칙을 반복하며 예측 가능한 재미를 선사했지만, 변덕스럽고 독립적인 괴도 키드를 더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하고 초현실적인 미스터리의 힘을 키웠다. 오랫동안 그의 목소리가 돼온 신용우 성우는 이제 괴도 키드를 자신의 삶의 일부라고 말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원피스> <신비아파트>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폭넓은 목소리 연기를 펼쳐온 그가 <씨네21>에 마음속 서랍을 열어주었다. 그 안에는 신용우와 괴도 키드, 두 인물이 나란히 주고받은 사랑의 서신이 가득했다. -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하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 시나리오를 처음 보았을 때 괴도 키드의 어떤 점을 부각하는 게 중요할 거라 판단했나. = 괴도 키드는 사라진 아버지의 단서를 좇기 위해 괴도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을 마주하는 모든 지점이 괴도 키드 존재의 의미이자 시작이자 목적을 나타낸다. 특이 이번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은 그런 조각을 맞춰나가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해서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잘 녹여내고 싶었다. 또 나카모리 경감과 아오코를 향한 애틋함을 드러내는 장면도 괴도 키드에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 신용우 성우의 목소리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걸 알면서도 10대 청소년인 괴도 키드의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감탄한다. 괴도 키드와의 물아일체를 오직 타고남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텐데 소년 연기의 중요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소년 연기의 포인트는 소년의 목소리가 아닌 소년의 마음을 장착하는 것이다. 성우에게 목소리란 일반 배우의 외형이나 표정, 행동과 제스처 같은 외적 요소에 해당한다. 일반 배우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아이 같은 웃음과 애늙은이 같은 눈빛을 장착할 수 있는 건 결국 그 인물에게 잘 어울리는 마음가짐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건 나이와 외모를 넘어서는 일이다. 물론 이 지점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분장이나 특수효과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상상만으로 작품 속 세계관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인물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한다면 한계 없이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 그래서 괴도 키드 또한 음성적인 특징을 고민하기보다 그의 마음에 먼저 공감하려 했다. 이게 내가 성우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제다. 많은 분들이 내 목소리를 좋아해주는 것도 키드의 태도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명탐정 코난: 화염의 해바라기> <명탐정 코난: 감청의 권> 등에서 괴도 키드의 설정, 성격 등이 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능청스러운 기존 성격에 진지한 모습을 더하거나 급박한 위기에 처한 장면들이 그렇다. 이번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에서도 홀로 비 맞는 모습에서 고독한 면모가 잘 드러난다. =괴도 키드는 화려한 쇼를 꾸려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그 이면에는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구슬픈 서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과정이 마치 어른으로 성장하는 소년의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이다. 코난이 아이의 모습을 띤 성숙한 어른에 가깝다면 괴도 키드는 한창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장난스럽고 변덕스러운 괴짜다. 그런 그가 자라나면서 직면하는 고독과 외로움을 최근 작품들이 잘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괴도 키드를 연기하는 성우로서 무척 귀하고 소중한 지점이다. 괴도 키드를 연기할 때면 최대한 그를 미완으로 남겨두려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녀석이길 바랐다. 그래서 괴도 키드가 아닌 쿠로바 카이토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내가 그의 변화를 감지하는 순간 목소리도 함께 변하기 때문이다. - 문득 궁금하다. 오인성 성우에 이어 괴도 키드 2기를 맡아 캐릭터에 자연스레 안착했다. 처음 괴도 키드와 함께하게 된 경로가 어떻게 되나. =<투니버스> 전속 성우로 활동하던 시절, 당시 <명탐정 코난>을 담당한 PD님이 괴도 키드 역을 내게 덜컥 맡기셨다. 워낙 베일에 싸인 친구라 나의 어설픈 연기가 그와 동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무엇보다 당시 내 출연작이 많지 않아 맡겨주신 게 아닐지 추측해본다. (웃음) - 가면 쓴 사내로부터 위기에 빠진 키드가 핫토리와 쿠도의 도움을 받고 나서 “그런 건 탐정이 알아서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내막을 알려주는 장면은 관객에게 진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도 장난스러운 키드의 성격을 유지해야 하는 복합적인 미션을 안고 있다. =괴도 키드는 위험에 몰린 상황에서도 워낙 장난이나 변장, 함정, 탈출에 능해서 자기 정보를 교묘하게 흘려가면서 원하는 걸 얻어낸다. 키드가 키드한 장면 그 자체여서 목소리 연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이런 순간마다 가끔 코난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모양이 빠지기도 하지만. (웃음) - 행글라이더로 이동하는 점이나 경찰, 탐정, 적군의 과녁이 되는 등 괴도 키드는 도망치고 싸우는 장면이 많은 캐릭터다. 보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캐릭터에 반영하기 위해 어떤 점을 주로 신경 쓰나. =괴도 키드는 몸놀림이 무척 경쾌한 캐릭터여서 탄력 있는 몸을 잘 쓰는 상상이 필요하다. 너무 완력이 없어도 현실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적당히 균형을 잡아줘야 한다. 간혹 괴도 키드가 엄살부리는 호흡들은 과장해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일종의 슬랩스틱 코미디라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요소를 즐길 줄 아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덩달아 즐겁게 연기하고 있다. - 이번 작업 과정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사는 무엇인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장면일 테지만 나카모리 경감이 총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딸 아오코가 근심하는 신이 있다. 소꿉친구 아오코의 모습을 보고 ‘휴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뱉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괴도 키드는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도 중요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쿠로바 카이토로서 소꿉친구와의 관계도 무척 의미가 있다. 그래서 괴도 키드의 애틋한 마음이 피부에 그대로 느껴지는 장면이라 그 호흡 연기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 2003년 데뷔 이후 21년의 시간이 흘렀다. 프랜차이즈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주인공으로 거듭난 지금, 이제 막 성우가 되었던 어린 신용우를 떠올려보면 어떤 소감이 드나. =21년 전의 내가 늘 하던 고민은 ‘과연 성우가 될 수 있을까?’였다. 근본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성우라는 길을 과연 얼마나 걸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21년을 시간이 아니라 거리로 따져본다면 매일매일 딱 한 걸음만 내디딘 듯해서 크게 실감나지 않는다. 물론 상황마다 그 한 걸음의 보폭이 달라진 순간도 있었겠지만 출발점은 매일 같았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린 신용우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결국 그 한 걸음을 가볍게 멀리 갈 수 있도록 무거운 생각과 부담을 내려놔.” - <더 퍼스트 슬램덩크> <원피스> <명탐정 코난> <신비아파트> 등 세대를 관통하는 역사적인 작품들에 임해왔다.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목소리만 듣고 알아본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나. =카페에서 주문하거나 물건을 사러 간 상점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성우로서 엄청 독특하고 튀는 편은 아니어서 이름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냥 목소리가 좋은 사람 정도로만 인지하는 듯하다. 너무 다행이다. (웃음) - 2011년 9월1일부터 동료 홍범기 성우와 함께 시작한 팟캐스트 <오버 더 라디오>(이하 오더라)는 팬덤과 소통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우에 대한 직업적 이해도도 넓혔다. 벌써 13번째 하고 있는데 <오더라>의 롱런 비결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오더라>는 맨 처음 기획 단계에서부터 성우 콘텐츠로서 오래 이어가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선 함께 만드는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게 중요했다.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지만…. (웃음) 어쨌든 시간이 지나다 보니 학생 때 처음 들었던 분이 성인, 직장인, 부모가 되어 사연을 보내는 분들이 계시다. 그런 사연을 받을 때마다 <오더라>를 오랫동안 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더라>를 들으며 성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키워온 이들도 있다. 우리도 오디오 콘텐츠를 메인으로 유튜브에서 이렇게 오래 활동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 성우 일을 하기 전에 잠시 학원에서 국어 강사를 했던 흥미로운 이력이 있다. 문장을 읽고 다듬고, 타인 앞에서 설득력 있게 내용을 전달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연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신용우가 큰 도움이 됐을 것 같다. 그땐 너무 당연하게 지나왔는데 돌이켜보면 성우 신용우를 만들었던 순간은 또 무엇이 있을까. =국어 학원 강사는 물론이고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활동을 하면서 여러 콘텐츠를 제작하고 행사를 진행했던 것들이 내 안에 쌓여왔다. 또 어릴 적 어린이 합창단으로 여러 무대를 경험했고 수능 끝난 뒤에 대학 생활 내내 일주일에 평균 3편 이상 영화를 본 것도 감정 표현에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씨네21>을 창간호부터 봤던 것도 그때였다. (웃음) - 마지막으로 <명탐정 코난> 시리즈의 DNA가 되어 괴도 키드와 오랜 시간 함께했다. 신용우에게 괴도 키드와 <명탐정 코난>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괴도 키드는 <명탐정 코난>이라는 세계관에 두고 온 또 다른 신용우라 생각한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작품의 시간은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나도 그 안에 영영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특히 <명탐정 코난>에서 괴도 키드는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더 보여줄 게 많이 남은 것 같아서 애착이 크다. 1. <명탐정 코난> 나의 최애 에피소드 “괴도 키드 이야기에 집중한 스피오프 시리즈 <괴도 키드 1412>에서 스키장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카이토와 아오코의 모습이 너무나 애틋하고 예쁘다.” 2. 나는 가끔 내 목소리 이렇게 이용하곤 한다. “일상에서 두드러지는 목소리는 아니라 딱히 활용도가 크진 않지만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책을 읽어줄 때 유용하게 활용한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많이 들어서 신기해하지 않지만. (웃음)” 3. 성우로서의 직업병 “다른 사람의 발음이나 말 실수에 예민해서 자꾸 지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