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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뭉크와 나

대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아빠가 급하게 날 깨웠다. 얼른 나와보라며 재촉을 했다. 비몽사몽 거실에 나갔더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생명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너무 작아서 인지하기까지 몇초가 걸렸다. 뭉크. 나의 반려견. 다리가 짧아, 힘겹게 한발 한발 내디디며 나에게 다가왔던 뭉크는, 얼른 온기가 필요한 듯 내 품에 자리를 잡고 쉽게 떠나질 않았다. 그렇게 뭉크는 2014년 우리 집에 선물처럼 나타났다. 꼬물이 시절과 사뭇 다르게 현재 약 30kg 나가는 뭉크는,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어디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존재감이 상당하다. 어디에선가 에너지가 느껴져서 돌아보면 뭉크가 있다. 보통의 강아지 같은 경우, 간식을 꺼내면 바람같이 달려오지만 뭉크는 본인이 있던 자리에서 침을 흘리며 간식을 한번 쳐다보고, 날 한번 쳐다본다. 굳은 인내심으로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면 결국 나는 이기지 못해 뭉크에게 간식을 대령해준다. 뭉크는,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본인에게 오게끔 하는 마성의 매력이 있다. 다소 무뚝뚝한 뭉크의 애정 표현 방식은 간단하다. 옆에 있어주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극내향견이지만 가끔 내 옆에 와서 엉덩이를 들이밀거나, 이마로 나를 툭툭 친다. 뭉크가 먼저 다가와주는 일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그녀가 꼭 다가올 때는, 내가 울고 있거나 아플 때다. 무엇이 그리 속상한지 이유도 잊은 채 정신없이 울분과 울음을 꺽꺽거리며 토해내던 날이었다. 나조차도 나를 돌주지 못하는 순간, 뭉크는 거실에서부터 느릿느릿 걸어와서 내 방문을 두드렸다. 믿기지 않겠지만, 혹은 내가 너무 정신없이 울부짖느라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뭉크가 노크를 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주었고, 뭉크는 그저 조용히 내 옆에 앉았다. 그래도 내 울음이 멈추지 않자, 깊은 한숨을 쉬며 그 자리에 엎드려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남김없이, 후회 없이 다 쏟아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서러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내가 옆에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눈치 보지 말라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고, 잔뜩 찌푸려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샌가 나는 뭉크를 쓰다듬고 있었고, 그녀의 두텁고 부드러운 털은 나를 안정시켜주고 있었다. 뭉크는 그날 하루 내 옆을 떠나질 않았다. 앞서 말한 뭉크의 무게(30kg)는 아마 귀여움의 무게일 것 이다. 막내로 자란 터라 동생이 있는 친구들을 동경해왔다. 그런 와중에 뭉크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생으로 찾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귀여운, 그리고 예상 불가능한 그녀의 행동들. 뭉크와 10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화가 나는 포인트를 잘 모르겠다. 대부분 질투가 나는 상황인 것 같은데, 가령 내가 엄마, 아빠에게 안겨 있거나(뭉크가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은 우리 엄마다), 다른 강아지들을 예뻐할 때, 갑자기 짖거나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이마로 날 밀친다. 그러나 그것도 날마다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싸우기도 참 많이 싸우는데, 결국 뭉크의 귀여움에 패배하는 것은 나다. 사랑스러움은 타고난 것이라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어마어마한 기운. 힘을 내서 웃을 수 있는 기원. 이는 어떠한 말로도 형용을 못한다. 낭만에 대해서 생각하는 요즘이다. 낭만이라는 이 두 음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힘이 넓기도 하고 강렬하기 때문에, 이 단어는 굉장히 ‘크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의 낭만은 뭘까. ‘위로’ 인 것 같다. 쉼 없이 뛰고, 곤두박질도 치고, 박자에 맞지 않는 춤도 추며 마지막에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봤을 때, 손끝에 스쳤던 풀들, 발에 걸렸던 멋진 돌들, 귓가를 스쳤던 악보 같던 바람들이 기억에 남아, 지금껏 내가 지나왔던 길들이 형편없지만은 않았다고 위로해주는 것. 그래서 결국엔 사랑할 줄 아는 것이 나에겐 낭만인 것 같다고 오랜 고민 끝에 내린 희미한 결론이다. 그래서 뭉크는 나에게 낭만이다. 강렬하지만 부동의 위로. 뭉크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에게서는 느끼지 못하는 육감적인 사랑과 계속 추리하게 되는 언어가 없기에 가능한 물음표들. 뭉크에게 받은 위로를 나의 방식대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연기를 하는 것도 그 방식 중 하나다. 어느 순간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나를 보는 그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꾹꾹 눌러담은 나의 진심을 어떠한 장치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전하고 싶었다. 여기 항상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혼자가 아니라고. 언제든 다시 나의 연기를 봤을 때, 어떠한 형태이던 위로를 받았으면 했다. 몇년 전, 울부짖었던 내 옆을 지켜주었던 뭉크처럼, 교감만이 가득했던 그때 나의 방처럼, 나 자체도, 그리고 나의 연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희망한다. 뭉크야, 지금 당장 널 사랑한다고 달려가서 말할래. 내일 너가 없으면 어떻게 하니, 내일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니. 내일이 아니더라도, 10분 후, 16분 후에도. 그런 가정을 한다는 것이 피곤한 일이겠지만, 워낙 기괴한 것이 세상 아니겠니. 2020년 6월3일 일기다. 사랑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고통으로 변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실제로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외치고 나서는 또다시 온전한 사랑의 마음으로 평화를 되찾았다. 그렇게 뭉크는 참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다. 3일 후 뭉크의 10번째 생일을 맞이한다. 새삼 그녀가 축복으로 찾아온 그날이 벅차게 와닿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뭉크에게 언제나처럼 달려가서 안아줄 것이다. 변함없는 사랑에 관하여 또 느끼며.

[인터뷰] 안녕을 바라며 진력하는 마음, <샤인> 박석영 감독

<샤인>은 영화 안과 밖에서 우연과 인연으로 빚어져 인물이 말하고 살아가는 장면으로 완성된 영화다. 제주 북촌리에 사는 16살 예선(장해금)은 할머니를 잃고 혼자가 된다. 스텔라 수녀(정은경)와 라파엘라 수녀(장선)는 그런 예선에게 마음이 쓰인다. 세 친구 다희(채요원), 서우(정주은), 동석(노강민)도 그런 예선을 홀로 내버려둘 수 없지만 예선은 홀로서기에 완강하다. <샤인>의 인물들이 서로 모두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영화를 통해 사람을 위무하려는 박석영 감독의 마음과 얼핏 닮아 보인다. - 10년간 장편 독립영화를 연출했다. 다섯 번째 장편 <샤인>을 구상하고 만들게 된 계기는 뭔가. 이전 작업에서 함께한 배우를 작품으로 다시 만난 소회도 궁금하다. = 예전에는 집집마다 이해인 수녀의 시집이 있었다. ‘한 자루의 연필이 되어 나를 깎는다’라는 내용의 서정시를 읽던 시절이 있어서인지 수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영화 안팎에서 오래 함께한 정은경, 장선 배우에게 같이해보자고 말했고 전작 <바람의 언덕>을 마치고 천천히 시작하게 되었다. 장해금 배우는 어린아이였을 때 <재꽃>에서 처음 만났는데 내 영화로 처음 배우 일을 시작한 때문인지 그가 뭘 해도 그것이 예뻐 보이고 마음이 쓰인다.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는 그의 고등학생 시절을 영화에 담아보고 싶기도 했다. - 배우와 캐릭터가 작품 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페르소나라기보다 작품과 인연을 맺은 배우와 그 캐릭터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감독의 의지에 가까워 보인다. =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들꽃> 이후에 <스틸 플라워>를 찍을 생각은 없었다. 정하담 배우와 함께한 시간을 그것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고, 둘이 작은 영화 하나 해보자는 약속이 <스틸 플라워>로 이어진 거다. <바람의 언덕>과 <샤인>을 함께한 정은경, 장선 배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을 찍고 빨리 다음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고생한 배우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 그 배우의 시간을 영화로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 <샤인>에서 마을 주민과 두 수녀가 맺는 공동체적 관계에 시선이 가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게 함께 작업하는 배우와의 공동체적 관계가 영화에 드러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오래 함께해왔던 이들밖에 없다. 영화를 만들다 자신이 없어지면 정은경, 장선 배우에게 고민을 터놓는다. 그럼 나와 같이 고민하고 조언을 해준다. 어떻게 보면 서로를 안전하게 해주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영화를 찍고 편집하면서 얼굴을 계속 보다 보니 내가 이들을 더욱 친밀하게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말하자면 우리는 친구이자 가족이고 영화는 우리가 함께 상상한 이야기를 이루는 것에 가깝다. - 예선과 세 친구, 새별(송지온)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 자연스러운 대화가 돋보인다. 어떤 디렉팅이 있었나. = 아이들끼리 놀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디렉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대본에 정확한 대사를 썼던 부분은 성인 배우들이 연기한 역할뿐이다. 아이들에게 대사를 외워 연기하게 시켜보았는데 연기 경험이 없다 보니 타이밍을 재면서 연기를 하더라. 이런 것은 극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나는 영화의 인물과 닮은 구석을 가진 배우에게 끌린다. 그래서 캐릭터의 기본 설정만 남기고 정해진 대사 없이 그냥 놀고, 대화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 자연스러움은 나에게도 이 아이들이 정말 즉흥연기를 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 - <샤인>은 갈등이 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신 여러 인물이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보여준다. 핸드헬드로 찍은 두편의 초기작보다 단순한 구도에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세편의 근작이 삶에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 돌이켜 생각하니 영화 기법이나 촬영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장 단순한 방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저 카메라로 배우의 연기가 온전히 담기는 시간을 보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그 순간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영화 기법을 일부러 더 모르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읽은 벨러 터르 감독의 말처럼 ‘오래 지켜보다 드러나는 본질적인 부분’ 같은 깊은 뜻은 전혀 없다. (웃음) 내 영화의 장면이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포함하게 될까봐 두려웠고 이제야 두렵지 않게 되었다. 세편의 영화를 통해 그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보며 고정된 카메라를, 그리고 영화를 이해하고 싶었다. - 많은 일들이 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실제 삶과 그를 둘러싼 인연에서 시작되어 촬영장에서의 우연으로 흘러간다. = 그게 참 이상하다. 어떤 영화적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샤인> 촬영으로 제주도에 내려가서 모두와 처음 이야기를 할 때 날씨도, 사람도 오는 대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것이 우리 영화의 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말자고. 영화 촬영 내내 그대로의 날씨를 받아들였고, 하늘과 태양빛을 받아들였다. 밤 장면을 제외하고 조명 없이 촬영했으니 바닷가의 석양이나 언덕길, 기도하는 예선의 얼굴에 들이치는 햇살 모두 우연이다. 새별 역할에는 연기 경험이 없는 동네 아이를 캐스팅했는데 그 아이를 만나게 된 것도 운명이라 여긴다. - 필모그래피에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특히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이들은 여자가 아닌 사람이고 영화는 그들의 삶을 비춘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과 청년, 남성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삶을 다루는 이야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 <샤인> 다음 영화는 <레이의 겨울방학>(가제)이다. 거기에 남성 인물이 두명 등장한다. 이 영화도 미국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던 친구와의 약속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의 재미를 위해 아직 편집은 하지 않았다. 다음 영화를 이미 찍어놓았기 때문에 그 이후 작품에서는 남성 캐릭터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 지역 독립영화공간 순회 상영 프로젝트인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 쇼’의 연장으로 <샤인> 역시 개봉에 앞서 인디스토리와 함께 ‘씨네마니또’ 상영회를 가졌다. 지역 순회 상영 기획 이전에 바라던 이상과 현재 실천하는 단계에 아쉬움이 있다면. = 아쉬움 같은 것은 없다. <바람의 언덕> 순회 상영 당시는 팬데믹으로 지역 상영관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극장이 어렵던 시기였다. 그때 지역 영화 상영 공동체나 독립 예술 상영관이 홀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인>도 벌써 13개 지역을 돌며 상영회를 가졌다. 개봉 전에 우리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 만날 수 있던 것은 극장의 연대 덕이다. 우리가 먼저 지역 상영관을 찾아가는 게 독립영화 배급의 표준이 되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인터뷰] 허우샤오시엔의 마술적 리얼리즘, 대만영화주간 <밀레니엄 맘보> 4K 황원잉 미술감독, 윤단비 감독 대담 현장을 가다

지난 7월13일 토요일 저녁 4K로 리마스터링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의 국내 최초 상영을 기념하는 스페셜 토크가 CGV홍대에서 열렸다. 작품의 프로덕션 디자인을 책임진 황원잉 미술감독이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한 후 관객과의 대화에 나섰고, 그의 대화 파트너로 <남매의 여름밤>의 감독이자 대만 뉴웨이브 영화에 애정을 수차례 표한 윤단비 감독이 함께했다. 90분 가까이 이어진 행사 내내 관객들이 영화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한 질문을 던지던 그날의 현장을 전한다. “<비정성시>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에드워드 양 감독과 비교하자면 현대 대만의 모습보다는 근대사를 조망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대만 뉴웨이브 영화의 두 거장 감에 관한 윤단비 감독의 고백으로 긴 대화의 문이 열렸다. 윤단비 감독은 “근대사를 주로 다루던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남국재견>(1996) 이후 동시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고 허우샤오시엔 필모그래피의 흐름을 정리한 후 “<밀레니엄 맘보>는 <카페 뤼미에르> <빨간풍선>과 함께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현대사 3부작’으로 묶을 수 있다”며 영화의 위치를 설정해주었다. 이어 “이전까지 섹스 심벌로 소비됐던 배우 서기가 자유로운 연기를 하며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매력이 빛을 발하는 영화”, “청춘의 낭만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 <중경삼림>과는 또 다른, 청춘의 원색적 색감이 두드러지는 영화”라는 본인의 감상을 나누며 관객들의 공감을 샀다. 황원잉 감독은 <밀레니엄 맘보>는 “시나리오 없이 영화 속 모든 캐릭터의 관계가 500자도 안되는 분량에 적힌 두장짜리 시놉시스에 기반해” 촬영됐으며, 허우샤오시엔 감독으로부터 “캐릭터가 진짜 생활할 법한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는 “현실적 공간과 그에 따른 상황과 스토리를 마련하면 배우가 캐릭터에 온전히 이입해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포착할 수 있다”는 허우샤오시엔 감독만의 연출 철학이다. 이 지침에 따라 직업이 없고 질투심에 눈먼 남자가 “항상 의심이 가득 찬 시선을 보낼 수 있”으면서도 “배우의 동선이 동물처럼 쫓고 쫓길 수 있”는 대만의 작은 아파트가 섭외됐다. 황원잉 감독에 따르면 작은 아파트의 제한된 공간감은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청년들과 소통하면서 느낀 “인생의 방향성을 모색하려 방황하지만 마음 둘 곳 없는 청춘의 고독감”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여기에 “주홍빛의 어슴푸레한 조명과 마약과 일렉트로닉 음악” 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한 대만의 밀레니엄 문화를 상징하는 여러 오브제가 더해”져 <밀레니엄 맘보>만의 몽환적 미술이 탄생했다. 황원잉 감독은 이를 “마술적인 리얼함”이라고 요약했다. 황원잉 감독은 같이하지 못한 감독을 향한 그리움을 표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황원잉 감독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를 선언한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복귀하길 바란다”는 바람을 비치며 <내 곁에 있어줘> 촬영 당시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내 곁에 있어줘>의 프로덕션 진행 과정 중에 허우샤오시엔 감독님에게 살짝 반항해보려고 일부러 다른 제작진을 섭외했지만 결국 오랫동안 함께 호흡한 동료들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황원잉 감독도, 윤단비 감독도, 객석의 관객들도 <밀레니엄 맘보> 상영과 이어진 대담 내내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자신들에게 남긴 흔적을 떠올렸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자율성 확보가 시급하다”, 영화발전기금 2025년 예산안 긴급점검 토론회 열려

8월1일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에서 ‘영화발전기금(이하 영발기금) 2025년 예산안 긴급점검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의 주요 내용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법률에 따른 영발기금 관리·운용 주체로서 제대로 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은 정부가 작성한 ‘2023년 기금존치평가보고서’를 언급했다. 보고서엔 “영발기금의 목적이 유효하고 독립된 기금 형태의 운용이 바람직”하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기금 관리 주체(영진위)와 기획재정부간의 협의·조정 절차가 무시되고 있다”(원승환)고 주장했다. 영진위 예산 수립 및 운용이 영진위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의견보다 정부 기조에만 좌우되는 상황을 꼬집은 것이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2025년 영진위 예산도 올해와 같이 지역 영화 관련 예산은 0원이고, 영화제 예산도 영화인들의 반발 목소리와 달리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후문을 전하며 “영진위의 영발기금 운용 자율성 확보, 영진위 위원회 방식의 강화가 더 필요함을 느끼는 자리”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토론회 제목과 달리 2025년 예산안에 대한 실질적 논의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토론회에 자리한 문체부 관계자에 따르면 “2025년 영발기금 운용 계획은 정부안 조율 막바지에 있으므로 아직 외부에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신 지난해 말부터 논란이 된 올해 영진위의 지역 영화, 영화제, 독립·예술 영화 관련 전방위적 예산 삭감과 정부의 영화관입장권부과금 폐지 공표에 대한 영화인들의 발제 및 토론이 진행됐다. 영발기금은 영화관입장권부과금으로 조성되며 영진위 예산의 주요 재원이다. 한편 토론회는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이하 영화인연대)와 김재원 조국혁신당 의원, 임오경·강유정·조계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 주최했다. 영발기금 사안을 담당하는 문체부 영상콘텐츠산업과 관계자와 영진위 본부장급 인사 등이 참석했다. 김재원 의원은 “17년 동안 성장해온 한국영화를 지켜내자는 정부에 대한 절실한 요구”라며 토론회 개회 소감을 밝혔다.

[인터뷰] 매력 팔레트 총집합, <파일럿> 조정석 인터뷰

<파일럿>은 어느 배우가 갈고닦은 매력 팔레트의 총집합체로서 추진력을 얻어 비상하는 영화다. 전작 <엑시트>에서 수년째 취업 실패로 고통받던 백수 청년은, 5년 만에 돌아온 <파일럿>에서 어엿한 가장이자 승승장구하는 사회인으로 추앙받다가 졸지에 몰락한다. 파일럿 한정우(조정석)가 표류하는 한국 사회의 현재란 분초를 다투며 갱신되는 SNS 피드만큼 어지럽다. 성차별과 젠더 갈등, 온라인 여론전, 그리고 캔슬 컬처의 돌풍 속에서 그저 ‘열심히만 살아온 남자’의 삶은 일시적으로는 하드웨어, 본질적으로는 소프트웨어의 개조에 처한다. 이를테면 역지사지의 체험을 통한 젠더 감수성의 업데이트다. 조정석은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에서 보여준 특유의 말끔한 다정함과 <질투의 화신>이 품은 안하무인의 매력을 골고루 장착한 채로, 여장 남자 코미디의 태생적 약점은 최소화하고 <헤드윅>에서 단련한 그만의 장점은 최대치로 키워냈다. 여기, 우리 시대 스크린이 보유한 최고의 쇼맨십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와의 대화를 전한다. 카메라 앞 배우라는 중대한 복장을 벗고 나타난 그의 목소리는 종전까지 펼쳐낸 능수능란한 재간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중하고 나긋한 톤으로 흘러갔다. - 현실과의 시차가 크지 않은 주제라 이를 받아들인 배우의 감수성에 대해서도 이목이 집중될 작품이다. 어떤 점을 보고 선택했나.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코미디적인 부분들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코미디를 좋아한다. 이 영화가 가진 코미디의 힘이 대중을 유쾌하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내 마음속에서는 가장 크다. 관객들에게 웃음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볼 때 나라는 인물이 유독 잘 대입이 되는 그런 작품들이 있다. <파일럿>이 그랬다. 나를 투영하고 대입해보는 과정에서 이 작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확 들면 빨리 결정하는 편이다. <파일럿>도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단번에 결정했다. - 신작을 제안 받으면 오래 고민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결정하는 편인가. 작품 안목이 좋은 배우라는 점에서 시나리오를 살피는 주관적인 기준이 있는지 궁금하다. =일단 내 느낌을 믿고 그걸 따라간다. 장르가 무서운 스릴러라고 해도 ‘재밌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간다. 그런 것들이 확실한 작품과 만날 때 나 역시 온전히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장르를 불문하고 좋은 작품, 재밌는 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어려운 이야기가 되는데… (웃음) 말로 정의하거나 설명하긴 영영 어려울 것 같다. - <파일럿>은 복장 전환의 컨셉이 인물의 정체성과 장르를 지배하는 영화다. <헤드윅>의 경험으로 꽤나 능숙하게 접근했을 것 같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헤드윅의 복장은 트랜스젠더로서 본인의 진정한 정체성 실현을 위한 도구이지만, 한정미의 복장은 정체성을 가장하는 경우다. 배우 입장에선 어떤 점이 달랐나. =기본적으로는 <헤드윅>의 경험이 <파일럿>을 더 수월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 게 맞다.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파일럿>에선 어디까지나 정우가 정미를 연기하는 거라서 그 부분에 방점을 둬야 했다. 포커싱을 ‘변신’에 뒀다. 치마를 입고 있는데도 앉을 때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쩍 벌리고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옷과 어울리지 않게 튀어나오는 사소한 습관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집 앞에서 슬기(이주명)와 통화하다가 갑자기 동생(한선화)에게 들키는 모습에서의 극적인 차이 같은 것도 생각난다. 동생 앞에서 힐을 신고 우악스럽게 계단을 오르지 않나. 중요한 건 이 사람이 지금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 가정에 소홀하고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던 파일럿 한정우는 상사의 성희롱 발언을 무마하려다 말고 자신도 술자리에서 실언을 하게 된다. 여러모로 더 풍자화될 수 있는 캐릭터지만 <파일럿>은 한 인간의 성장 서사로 이정표를 설정했다. 인생 처음으로 전락을 경험한 남자가 여장을 결심하기까지, 인물의 내면에서 배우가 주목한 점은 무엇인가. = 그가 본의 아니게 인생의 공백을 겪고 반추하게 된다는 점이 좋았다. 한정우가 뒤늦게 자신의 모순을 깨달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자기 딴에는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의 무게를 느끼며 그 역할과 책임감에 의해 움직인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사실은 그냥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던 거라고.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얼마만큼 나를 위해서,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하는 건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일과 본연의 조정석, 일반인 조정석과 배우 조정석은 얼마나 어떻게 분리될까 하는 고민. <파일럿>의 한정우도 한정미로 살아가면서 오히려 본연의 자기 자신을 찾아간다고 느꼈다. - 처음엔 성별 할당제를 노리고 재취업을 위해 여장 남자가 된다는 목적성이 두드러지지만 또 다른 여성 파일럿 슬기와의 동료애 서사도 차근차근 전개된다. 여성의 입장에 놓이게 된 한정우에게 그제야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있는 셈이다. =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다. 나는 한정우가 처음부터 용기가 가상한 사람이라곤 생각 안 했다. 엄밀하게 보면 용감하기보다는 절박하고 갈급한 사람이지 않을까? 지켜내고 되찾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친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우선은 그저 자기 앞에 당면한 상황을 온전히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면서 엄마에게 전화하는 장면이 스스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인물의 실체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스스로도 깨닫고, 그동안 스스로 짊어졌던 역할들로부터 진짜 자기를 분리시켜내기 위한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 연기하면서 조정석과 한정우를 겹쳐본 순간도 있나. =나도 정우가 술집에서 엄마와 통화하는 장면을 찍을 때 깊이 공감했다. 어릴 때부터 환경적으로 가장이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한번도 쉬지 않고 살아왔다. 그게 한정우란 인물에게 나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2004년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으로 시작해서 2009년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할 때까지 약 5년간 온전히 쉬었던 날을 다 세어보니 보름 정도더라. 그 보름 동안 딱 한번 친구들하고 여행 다녀온 게 전부였다. 그걸 제외하고는 한번도 쉰 적이 없을 정도로 절박한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를 떠올려보니 정우가 지금껏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한국 남성의 어떤 모습이라기보다는 그저 나, 조정석 개인의 경험과 겹쳐져서 공감했던 장면이다. - <엑시트>와의 즐거운 공통점도 찾아보고 싶다. 고두심, 김지영 배우에 이어 <파일럿>에선 오민애, 한선화 배우와 현실적이고 거침없는 가족 코미디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는데. =내가 정말 대가족 사이에서 자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4남매 중 막내다.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시니 부모님의 원가족도 모두 대가족이다. 할머니 집에 가면 이쪽저쪽 사촌, 조카만 다 모여도 십수명은 족히 된다. 실제로 복작거리는 집 안에서 부대끼며 지내온 감각이 <엑시트> <파일럿>을 할 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할머니 집 가면 어떤 향기가 나는지, 어떤 분위기에 놓이게 되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기본적으로는 작품이 품은 상상력에 충실하려 하지만 나의 경험들이 은근히 묻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어머니도 오래전에 칠순 잔치를 해서 한국 고희연 특유의 느낌도 잘 안다. 맥락을 지켜내기, 주저 없이 표출하기 - 여장 남자가 수행하는 성역할의 고충,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차별 문제로부터 웃음과 의미가 모두 발생하는 코미디다. 얼마나 양식화한 연기를 할 건지 완급 조절이 관건이었을 듯싶다. 이를테면 과장의 정도와 슬랩스틱의 수위에 어떻게 접근했나. = 작품을 처음 읽을 때 파악하는 큰 맥락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처음 이해된 그 맥락을 지켜나가는 것이 세세한 완급조절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다. <파일럿>은 내게 너무 과장되지 않게, 관객을 소진시키지 않는 산뜻한 코미디로 읽혔다. 과하게 하지 말고 딱 ‘이 정도’라는 게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부터 무의식적인 감으로 입력됐다. 그래서 내게는 항상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이 무척 중요하다. 촬영하면서는 머릿속에 그렸던 느낌과 감독님의 디렉션을 맞춰나가는 방식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며 찍어나갔던 것 같다. - 김한결 감독은 <가장 보통의 연애>로 완성도 높은 로맨틱코미디물을 보여준, 상업영화 신에서 돋보이는 여성감독이다. 호흡은 어땠나. = 너무너무 좋았다. 감독님이 웃음이 많다. 한번은 웃으시다 컷을 못한 적도 있다. 배우로선 기분 좋다. ‘내가 그렇게 웃겼나? 훗’ 하면서. (웃음) 전환이 필요할 때에도 김한결 감독님은 항상 “지금 이것도 너무 좋은데 다른 시도도 한번 해보죠”라는 식으로 편안하게 독려하고 에너지를 주셨다. - 처음 주목받은 <건축학개론>의 납뜩이 캐릭터가 워낙 선풍적인 인기를 끈 까닭에 조정석의 코미디 연기는 화려한 애드리브에 기반하리란 시선도 받았겠다. 실제로는 어떤가.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한 조정석은 오히려 텍스트의 정전을 더 엄밀히 지키는 배우 아닐까 싶은데. =정말 그렇다. 행여 뭔가 현장에서 즉석에서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해도 우선 약속대로 충실히 하고 다음번에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애드리브를 자유롭게 시도하는 경우라면 감독님이 컷을 안 하고 있을 때다. 무언가 뒤에 좀더 보고 싶은 것일 테니까. 내가 텍스트 사이사이에 돌발 행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애드리브가 아니라 배우의 자유도나 아이디어가 준비한 신에는 그 나름대로 충실히 한다. <파일럿>에선 정미가 면접을 볼 때 하와이안 댄스를 추는 장면이 그랬다. 혼자 춤추다 말고 막 넘어지는 디테일은 그냥 내가 미친 것처럼 온갖 시도해보는 중에 나왔다. 대본에는 약간의 가사 외에는 안무에 대한 특정한 지시가 없었다. (갑자기 노래를 시연하면서) 어떻게 해야 원주민다운 스테레오타입을 잘못 해석한 사람의 웃긴 춤이 나올까, 고민했다. 혼자서 면접장 안을 돌면서 춤출 때 유독 감독님이 컷을 안 하고 오래 웃으셨다. - 희극 연기를 위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나. 누군가를 웃기기 위해서 배우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 내 경우는 일단 주저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무언가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순간 정말 재미있는 걸 찾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코미디뿐만 아니라 장르성이 강한 영화일수록 배우가 스스로 고민한 수많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자기검열 없이 필요한 순간에 최대치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을 때 쉽게 말하면 가끔씩 ‘얻어 걸린다’ 싶은 것도 하나 나온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만큼의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 같다. 배우인 내가 혼자 규정하기 시작하고 자기 생각에 갇힐수록 더 많이 보여주지 못하게 된다. 상상력을 최대치로 표현하는 게 배우의 몫이기에 현장에서 주저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 스포일러를 피하는 선에서 후반부 장면을 하나 이야기해보자. 결정적인 순간에 무대 위에 선 한정미를 보고 있으면 <파일럿>이 한국에서 <헤드윅>을 가장 여러 번 소화한 배우(총 5시즌) 조정석을 오마주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 행여 내 공연을 봐주신, 그리고 <헤드윅>을 좋아하는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해주신다면 너무 기쁠 것 같다. 가발이 타이트한 컷으로 보일 때 나도 특별한 감흥을 느꼈다. 이 장면에서도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톤 앤드 매너로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특히 작품 내적인 논리로 볼 때 정우의 감정 표현에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냥 허심탄회하게만 고백해서는 안되고, 한정우의 선택이 결국은 누군가를 속였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에 대한 미안함, 조심스러움, 속죄하고 싶은 마음도 담고 싶었다. 흘러가는 내 모습이 좋다 - 오늘 화보 촬영 현장에서 온갖 포즈에 유려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타고난, 탁월한 재능이란 무엇인지 실감했다. (웃음) 어릴 때부터 언젠가 배우를 하거나 무대에 올라갈 아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나. = 어릴 때는 훨씬 더 끼쟁이였다. 미취학 아동일 때 가장 심했으려나? 부모님 앞에서 열심히 마이클 잭슨 춤을 추고, 반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해서 다 같이 혼나고 있을 때도 장난을 쳐서 심하게 혼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유명한 동네 개구쟁이였는데 사춘기가 조금 빨리 왔다. 아무래도 가정 형편의 영향도 있었겠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갑자기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 됐다. -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시절을 지나 몇번의 연극영화과 대학 입시를 거쳤고, 갑자기 뮤지컬 무대에 섰으며, 스크린과 TV로 차츰차츰 행보를 넓혀왔다. 성공적인 커리어지만 늘 예상 가능한 순간에 경로를 살짝 이탈했다고 해야 할까. 동심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배우 같다. =정말! 인생은 예측 불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파일럿>이 좋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을 거다. 정우의 삶만 봐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지점에서 경로를 이탈하니까. 무언가를 열심히 쫓다 보니 옆으로 옆으로 넓혀온 것 같다. 매 순간 내 앞에 놓인 상황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은 내게 주어진 것들이 너무 신기하다. -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을 데뷔로 본다면 올해 20주년이다. =아이를 낳고 나니까 정말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 ‘내가 아빠가 됐네? 그래, 열심히 살아왔다.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아빠다.’ 스스로 이 정도는 생각할 수 있었다는 점에 정말 감사한다. 차기작인 <좀비딸>도 내게는 참 신기한 인연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인생의 타이밍과 딱 맞아떨어진 캐릭터다. 하필이면 진짜로 아빠가 된 상황에서 받은 작품이니까 몰입이 안될 수가 없다. <파일럿>에 대입할 수 있었던 내 모습과 <좀비딸>에서의 내 모습이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고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도 좋다. - 6월 말에 <헤드윅> 공연을 마쳤다. TV와 스크린, 무대를 현재진행형으로 교차해 활보하는 톱스타 중 하나다. 다양한 매체를 오가는 경험이 지금의 조정석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나이를 좀 먹어서 그런지 최근 들어 주변이 보이는 느낌이 든다. 약간의 여유라고 해도 좋을까? 순간순간이 보이고 들리고,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실시간으로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됐다. 그 감각이 너무 신기해서 그것이 내겐 새로운 재미다.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체력이 옛날 같지 않아서 이러다 죽겠구나 할 때도 있다. (웃음) - <파일럿> 외 역사적 격동 속 변호사를 연기한 <행복의 나라>가 있고 넷플릭스 예능 <신인가수 조정석>까지 앞두고 있다. 바쁜 일정을 모두 마무리하면 어떻게 지내고 싶나. =요즘 내 머릿속은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득하다. 모든 일정이 끝나면 잠깐 동안이라도 집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다. 가족들하고 집에서 오롯이 보내고 싶은 생각뿐이다!

[인터뷰] 우리가 여기 다 모였다!, <극장판 프리큐어 올스타즈 F> 와시오 다카시, 무라세 아키 프로듀서

압도적이다. 7월31일에 개봉하는 <극장판 프리큐어 올스타즈 F>(이하 <프리큐어 올스타즈>)의 첫인상은 놀라움 그 자체다. 총 78명에 달하는 프리큐어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 순간은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각자의 색으로 반짝이는 프리큐어가 보석함을 연 듯 황홀한 비주얼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도, <프리큐어> 시리즈의 오랜 역사를 총결산하는 순간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지난 7월27일 <프리큐어 올스타즈> 국내 개봉을 기념해서 <프리큐어> 시리즈를 만들고 총괄해온 와시오 다카시 프로듀서와 <프리큐어 올스타즈>를 제작한 무라세 아키 프로듀서가 내한했다. 두 사람은 인터뷰 내내 프리큐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아서 <프리큐어> 시리즈의 역사와 함께 <프리큐어> 시리즈의 매력, 이번 영화의 탄생 비화를 들려주었다. - 한국 관객은 <프리큐어> 시리즈를 TV로만 보아왔기에 <프리큐어 올스타즈>와 같은 극장판의 컨셉이 낯설 수 있다. 한국 관객에게 <프리큐어 올스타즈>의 컨셉을 자세히 설명해달라. 와시오 다카시 <프리큐어>를 제작할 때 어떻게 어린이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이 컸다. 기존 애니메이션처럼 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계속되면 맥락도 복잡해지고 캐릭터도 늘어나 시즌이 거듭할수록 새 어린이 시청자가 유입되기 어렵다. 해결책으로 시즌마다 새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 그러다 시즌마다 다른 스토리와 다른 세계관이 생기는 만큼 한날한시에 모든 프리큐어를 한데 모아서 극장판으로 만들면 재밌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프리큐어 올스타즈>다. - <프리큐어 올스타즈> 시리즈 중에는 뮤지컬 장르도 있다. 프리큐어 IP가 이토록 수많은 장르로 변주된 원동력이 무엇인가. 와시오 다카시 팀워크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시리즈마다 프로듀서와 감독, 작가와 방송국 직원, 에이전트와 스폰서까지 함께 아이디어를 내서 만든다. 특히 무라세 아키 프로듀서는 <트로피컬 루즈! 프리큐어>에서 인어 프리큐어를 제작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독창적인 발상이다. - 에서 등장한 큐어 플로라부터 <펼쳐지는 스카이>에서 등장한 소라까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프리큐어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무라세 아키 5년 동안 <프리큐어 올스타즈> 시리즈가 제작되지 않았다. 그간 제작된 <프리큐어> 시리즈의 캐릭터가 <프리큐어 올스타즈>에 참가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 프리큐어를 연기한 성우를 모두 캐스팅하고 디렉팅하는 데 어려움이 컸을 듯하다. 또 각 캐릭터의 작화를 조율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무라세 아키 등장 캐릭터가 정해지자마자 성우들 녹음 일정을 확보하려고 두발로 뛰어다녔다. (웃음) 스타가 된 성우도 여럿 있어서 꽤 고생했다. 성우가 대부분 프리큐어에 애정이 깊어서 당시 연기한 감각을 금방 되살렸기에 녹음 과정이 수월했다. 작화는 옛날 프리큐어와 새 프리큐어의 작화를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와시오 다카시 녹음 당시에 오랜 시간을 함께한 스태프가 많아서 다행이었다. 역대 TV시리즈를 맡은 스태프들과 함께 녹음할 때마다 그때의 느낌이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했다. 스태프도 ‘올스타즈’인 셈이다. - 이번 작품의 오리지널 캐릭터로는 프림과 그와 하나로 이어진 분신 푸카가 있다. 두 캐릭터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무라세 아키 프림은 프리큐어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캐릭터여야 해서 육탄전 중심의 프리큐어와 달리 마법으로 싸우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푸카 인형을 들고) 보다시피 푸카는 작품 전반에 사랑스러움을 더하는 귀여운 마스코트다. 2023년에 토끼의 해를 맞아 토끼 이미지를 빌려왔다. 다나카 유타 감독이 작은 동물의 움직임을 그려내는 데에 재능이 있어서 푸카는 움직일수록 더욱 귀여워진다. (웃음) 앞으로 쭉 푸카가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요리하고 여행하고 우정을 나누는 등 일상적 순간과 액션이 적당히 균형을 이룬다. 제작 단계에서 둘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조율했나. 무라세 아키 프리큐어는 일상을 지키려 싸우는 영웅이다. 그만큼 영화 속 일상 장면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감독은 일상 신을 두배 정도 더 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린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70분이다. 거기서 일상과 액션의 조화를 지키려 울며 겨자 먹기로 포기한 것이 많다. (웃음) - 이후에도 <프리큐어 올스타즈>가 계속 제작될 것인지 궁금하다. 와시오 다카시 78명은 일본 초등학교 3개 반의 인원이다. 한 교실에도 못 들어가는 인원을 스크린에 모두 그리는 일은 스태프에게 고된 일이다. 일단 스태프들이 화를 안 내는 선까지는 만들고 싶다. (웃음) - 전작인 <극장판 허긋토! 프리큐어♡두 사람은 프리큐어 올스타즈 메모리즈>가 마법전사가 가장 많이 등장한 영화(55명)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도 흥미롭다. 와시오 다카시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다. 기네스북측에서 프리큐어가 변신할 때 외치는 캐치프레이즈만으로는 등장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인물당 한마디씩 대사가 있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주었다. 심지어 기네스북 담당자가 녹음실에 머무르며 모든 캐릭터의 대사가 녹음되는지를 옆에서 체크까지 했다. 담당자와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웃음) - 한국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와시오 다카시 <프리큐어> 작품을 처음 본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프리큐어> TV시리즈는 편수가 1000화 정도다. 극장판은 이번 영화를 포함해서 32편이다. 여러분이 본 것은 아직 한편뿐이다. 향후 여러분의 선택에 맡기고 싶다.

[우수상 당선자 문주화 이론비평] 비극의 시대에 불시착한 초상들에 대한 우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중심으로

1967년 기 드보르는 “산업국가의 프롤레타리아는 독립적인 미래에 대한 확신과 종국에는 자신의 환상을 완전히 상실하지만, 자신의 존재는 망각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제거되지 않았다”며 스펙터클의 사회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2023년,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피로 얼룩진 지금의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사랑 이야기인 것 같았다”는 낭만적 고백이자 매니페스토적 발언과 함께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왔다. 빛을 다한 고엽(fallen leaves)을 가지고 온 노장의 복귀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선명하게 남겼던 두개의 영화적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3부작으로 엮이는 <천국의 그림자> <아리엘> <성냥공장 소녀> 안에서 공명하고 있는 소외된 계급층의 시간이다. 이것을 기 드보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환상은 탈각되었으나 절멸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유령들에 대한 시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은퇴작으로 명명했던 <희망의 건너편> 이후 6년 동안 멈춰 있었던 영화적 시간이 있다. <희망의 건너편>의 마지막 시퀀스를 상기해보자. 영화는 칼에 찔렸지만 목숨은 부지한 주인공 칼레드를 미디엄숏으로 보여준다. 의식을 찾고 눈을 뜬 그의 얼굴 위로 밝고 따뜻한 빛이 조금씩, 그리고 재빠르게 차오른다. 뒤따르는 클로즈업숏에서 무뚝뚝한 타블로의 이미지였던 칼레드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칼레드가 강 너머 저편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떨림이 미소로 바뀌기 시작할 때 그가 일했던 식당의 직원의 개가 화면 안으로 들어와 칼레드의 얼굴을 핥고 영화는 끝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희망의 떨림이 막 도착한 불법체류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디제시스를 종결시켰다. 언제 또다시 곤란함이 닥칠지 모르는, 여전히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을 부인하지 않은 채로 영화는 끝났다. 칼에 찔린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분명히 강 건너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영화가 줄곧 말해온 것은 삶이 우리를 어디로 흘려보낼지라도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는 위로와 낙관의 감각이었다. 그렇게 그의 영화 속 신체들은 결말에 이르러 배에 몸을 싣거나 어디론가 흘러갔으며, 혹은 희망의 저편 어딘가를 응시하곤 했다. 영화 속 인물들을 현실과 막연한 꿈 사이 어딘가로 탈주시키고 영화와의 작별을 선언했던 그가 프롤레타리아 3부작을 잇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쟁을 언급했다. 이제는 박제된 줄로만 알았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세계는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시대에 불시착해 다시 운동하기 시작한다. 불시착과 이야기의 시작: 전쟁이라는 상상적 실재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불시착은 이야기를 촉발하는 요소인 동시에 이야기가 태어나는 장소나 공간의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오로지 불시착을 위해 불시착한 것 같은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의 여정을 추적한다. 이들의 연주란 실력과는 상관없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장르적으로, 시대적으로, 그들을 원하는 곳은 현실적으로 없다. 그러나 이들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무관하게 언제나 당당하다. 차의 엔진을 도둑맞아도, 공연에 대한 비난을 들어도 멈추지 않는다. 모두가 아메리칸드림을 꿈꿀 때, 그들은 마치 비웃듯이 미국을 엉성한 유희의 장소로 만들며 횡단한 후, 멕시코로 향한다. 검은 화면 위로 ‘But the hand hit the Top 10 of Mexico’라는 자막을 내보내며 영화는 끝난다. 무성영화 시대를 회상하게 하는 이러한 영화적 작법은 우리가 줄곧 시네마를 향해 기대해온 것에 대해 자문하게 한다. 그것은 불시착과 어긋남이 계속되어도, 가령 우리가 있는 세계에서 더이상 환상을 가질 수 없더라도 멈추지 않고 운동한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할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이 아닐까. 그렇기에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안에서 불시착은 가장 실재적인 출발점과 환상적인 종착지를 위해 필요한 사건이 된다. 이런 불시착의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 그의 작품은 <르 아브르>일 것이다. 무수한 출발과 도착이 이뤄지는 항구도시 르 아브르. 마르셀은 이곳에 정박한 채 입항과 출항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쫓겨나고 만다. 환영받지 못한 채로 부둣가를 서성이는 그는 어쩌면 이곳에 불시착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음날, 런던에 도착했어야 하는 컨테이너가 전산 오류로 르 아브르에 불시착한다. 불시착이라는 하나의 사건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로 변태될 것이다. 컨테이너 안의 무표정한 난민들을 카메라가 찍어대는 동안 소년 이드리사가 무언의 얼굴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도망친다. 그리고 우연인 듯 필연적으로 마르셀과 이드리사는 만나며, 서로를 돕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탈하거나 표류한 채로 타인들과 원활하게 접속하지 못하는 두 존재가 하필이면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려 만난다는 영화적 설정은 서로를 오롯하게 채워주거나 구원하기 어려운 관계라는 점에서 비극적이면서도 희망적인 것이자, 동시에 상상적이면서 사실적인 것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 불시착한 것은 러시아발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헌신해온 영화적 세계는 현실과 일정 부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의 자장 안에서 작동해왔다. 앞서 언급한 프롤레타리아 3부작에서는 자본주의가 촉발한 계급적 문제를 다루었고, <어둠은 걷히고>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을 아우르는 핀란드 3부작(혹은 빈민 3부작)에서는 자국의 빈궁한 현실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불법 이민자와 난민 문제와 같은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 역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영화 안으로 불러들여 재현해왔다. 그리고 이런 리얼리즘적 주제 의식을 수행하는 것은 각 영화의 시공간 안에 만연했을 사회의 공기를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며 육화한 신체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으로, 빈자로, 때로는 이민자로 분하여 황량한 거리와 낡은 술집, 좁은 집을 반복적으로 배회하며 드나들었다.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사랑은 낙엽을 타고> 안으로 스며드는 방식은 조금은 새로운 것이다. 인물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명의 목소리를 통해 전쟁을 감각한다. 이는 신체들이 사회적 현상 혹은 계급을 표상하던 이전의 작법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즉, 전쟁의 참상을 직접 이미지로 재구성하거나 혹은 유혈 사태를 몸소 겪은 인물을 어디론가 불시착시키는 방법이 아닌, 인물들의 집 안에 놓인 라디오를 통해 전쟁을 송출한다. 영화는 스마트폰이나 TV, 컴퓨터와 같은 오늘의 매체가 아닌 오로지 소리만을 내뱉는 옛 시대의 매체인 라디오를 통해 전쟁을 이식시킨다. 집으로 돌아온 안사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라디오를 켠다. 우크라이나 마우리폴의 산부인과가 공습을 당해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자 소리)이 들려온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되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집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자리에 앉은 안사는 라디오의 주파수를 이동시킴으로써 전쟁의 소리를 의식적으로 삭제한다. 안사의 행동은 단지 전쟁을 회피하고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구슬픈 노래를 듣기 위함인 것일까? 사회적 문제를 내러티브의 한축으로 꾸준히 다뤄왔다는 점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일정 부분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내는 영화적 작법은 여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 이를테면 켄 로치나 장피에르 다르덴 & 장뤼크 다르덴 형제가 영화를 통해 일궈내고자 하는 사회적인 실천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는 사회구조의 변혁을 요구하거나, 인물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고통스러운 삶을 즉자적으로 담아냄으로써 파토스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줄곧 배제했다. 대신 무뚝뚝한 표정의 얼굴과 절제된 대사를 구사하는 신체들을 등장시켜, 상황으로부터 한 걸음씩 빠져나와 새로운 시공간의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이렇듯 리얼리즘과 낭만적인 우화가 공존하는 통약 불가능한 시공간이 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구축해온 세계이다. 그렇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영화에서 어떻게 실재할 것인가? 안사가 주파수를 바꿔 전쟁의 소식(이자 소리)을 끌 때, 전쟁은 적어도 영화에서는 언제든 소거하여 프레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삭제 가능한 것이 된다. 안사는 분명 전쟁의 소리로부터 도망치거나, 숨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집 안으로 침투한 전쟁을 직접 중단시켰다. 그렇게 실재적 사건인 전쟁은 영화 안에서 언제든 직접 멈출 수 있는 가상의 잡음으로 다뤄진다. 안사가 전쟁의 소식을 멈춘 뒤 선택한 노래의 가사는 이제 새롭게 들리기 시작한다. “차려입을 옷도 없고/ 허리띠도 없네/ 아기는 툭하면 울어서/ 보모를 괴롭히는구나/ 온종일 아기를 달래다/ 야위어버렸네” 이 노래는 마치 안사의 쓸쓸한 처지와 겹치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쟁의 참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인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를 듣던 안사는 조명을 켜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공간 연출이 연극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은 자명한 것일 테다. 불 켜진 작은 연극무대와 같은 안사의 방을 쓸쓸한 노래만이 채우고 있을 때,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텅 빈 자리에 머물고 있는 전쟁의 잔상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하나의 노래가 포용하는 두 부류의 대상. 영화는 그렇게 핀란드의 노동자가 겪는 쓸쓸한 어느 날 밤과 우크라이나의 잠들지 못하는 비극의 나날들을 함께 어루만진다. 그러나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낭만적 노래로 위로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종전을 상상적으로 실현한다. 주파수를 바꿈으로써 전쟁의 소리를 소거한 안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안사와 홀라파의 사적 공간으로 계속해서 침투한다. 홀라파 역시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잡지를 읽는 와중에 전쟁의 소리를 듣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쇼핑센터를 폭격하여 18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사망자가 늘어날 것 같다는 뉴스의 소리를 끊고 홀라파의 동료 하네스가 가라오케를 가자고 제안한다. 전쟁의 소리는 그렇게 가라오케의 시끌벅적한 음악 아래로 잠시 자취를 감춘다. 소리-이미지의 형태로 영화 안으로 불시착한 전쟁은 홀라파가 안사의 집에서 저녁을 먹던 날 마침내 영화 밖으로 사라진다. 식사를 마치고 튼 라디오에서 또다시 전쟁의 참상이 사운드로 재현된다. 이번에는 대피 중 공습당한 주민을 계속 구조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상자 수는 파악되지 않았다는 소식이다. 최대 1200명이 극장으로 대피했을 것이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 안사는 결심한 듯 라디오를 끄고 카메라를 정확하게 응시하며 “빌어먹을 전쟁”이라고 말한다. 전쟁이 다른 곳이 아닌 극장마저 대피소로 전락시키며 파괴하기 시작할 때, 영화는 이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화로서만 머무르지 않고 외화면을 향해 종전을 촉구한다. 이렇게 전쟁을 끝낸 영화가 나아갈 곳은 어디일까? 전술하였듯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성냥공장 소녀>로 봉합했었던 프롤레타리아의 시간을 다시 해제시켰다. 불시착한 전쟁을 끝낸 영화는 이제 대부분의 전작에서 그러하였듯이 안사와 홀라파 두 사람을 주목하며 그들이 함께할 시공간을 만드는 데 복무할 것이다. 다시 기 드보르의 선언을 빌려와, 환상이 탈각된 프롤레타리아인 두 존재는 현실의 초라함에 굴하지 않고 어디론가 함께 떠나거나 새로운 시간의 문을 열고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 비극적 세계 어딘가에서 꿋꿋하게 존재할 것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다시 써내려가고 있는 우화적 영화에 대한 작은 헌사이자 탐사로써, 나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발견되는 요소들 중 3가지, ‘공간의 위상학’, ‘사운드의 역량’, ‘서사시와 서정시의 이중 재현’을 채택하여 들여다보고자 한다. 공간의 위상학 영화에서 ‘공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공간은 닫혔다가 열리기를 반복함으로써 이미지를 포획하는가 하면, 비워졌다가 채워지며 디제시스가 구현되는 장으로 역할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벨러 터르의 <토리노의 말>에서 빛을 잃어가던 집처럼 수축되기도 하고,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터스텔라>와 <테넷>에서 보았듯 무한히 팽창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 안에서의 공간은 감독의 의도에 따라 섬세하게 설계되어 고유하면서도 독특한 위상학을 구현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공간은 어떤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을 더이상 견딜 수 없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어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하는 해프닝을 그린 감독의 전작 <나는 살인 청부업자를 고용했다>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계획된 청부 살인을 취소하려다 엉겁결에 강도 혐의까지 받게 된 헨리에게 마가렛은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조국을 떠날 생각이냐고 묻는 프랑스인이자 이방인인 헨리에게 마가렛은 ‘노동자계급은 조국이 없다’고 말한다. 이 발언은 유의미하다. 마가렛의 대답은 적어도 영화 안에서 노동자계급이 바라보는 고국 혹은 국가란, 머무르는 곳이 아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행지와 같은 장소가 되며, 여행자가 된 이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관광객이자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다는 잠재성을 획득한다. 국경과 같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새로운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베네딕트 앤더슨이 제안했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의 일원이 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가 취하고 있는 공간의 위상학은 닫힘-환상-탈주의 도식으로 전개된다. 인물들은 마치 여행자처럼 공간을 옮겨 다닌다. 먼저, 닫힌 공간은 안사의 집에서 발견되는 형태이다. 얼핏 연극무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전쟁이 소리로 출현하는 장소로 설계되어 있다. 기묘하게도 카메라는 안사가 집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은 여러 차례 보여주지만 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은 포착하지 않는다. 오로지 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허락하는 문. 안사는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갇힌다.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전쟁의 참상을 듣거나, 오지 않는 홀라파의 전화를 기다리거나, 그와 저녁을 먹다가 말다툼을 벌여 맞게 되는 이별의 순간을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어야 한다. 이곳은 현실의 어두운 면을 감각하는 공간이자 안사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연극적 공간이 된다. 안사가 ‘빌어먹을 전쟁’이라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하는 지극히 연극적인 장면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홀라파가 사고를 당한 밤에도, 안사는 그의 등장을 기다리며 비가 흘러내리는 창문의 안쪽에 서서 그저 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의도치 않게 기차에 치여 나타나지 않은 그날 밤의 연극은 그렇게 완성되지 못한 채 미완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내면을 내비치거나 무대의 불을 끄듯 소등하고 잠에 든 안사는 다음 시퀀스에선 집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다. 닫혀 있지만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안사의 연극적 공간은 찰리 코프먼이 <시네도키, 뉴욕>에서 건설하고자 했던 삶 자체를 제유하는 거대한 연극무대와는 대비되는 것이다. 케이든은 자신의 욕망이자 삶, 그리고 내면이기도 했던 연극무대를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 케이든은 자신이 만든 연극 속 배우로서, 그리고 케이든 그 자신으로서 두번 죽는다. 이에 비해 안사는 마치 심리적 공간과 사회적 공간을 구분한 듯, 자유롭게 연극적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 집 밖으로 나온 안사와 홀라파에게 영화관은 환상성을 이식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영화관을 가곤 했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영화관은 갈 곳 없는 이들을 환대로 끌어안는 공간이자, 사랑이라는 환상이 가능하도록 기능한다. 감독의 오랜 예술적 동료이기도 한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를 보고 나와서 안사가 한 말은 “이렇게 많이 웃은 적은 처음이에요”이다. 타블로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안사를 웃게 한 것이 피 튀기는 좀비영화라는 역설과 무관하게, 영화는 건조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을 영화관으로 초대하여 낭만의 시간을 부여한다. 그러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영화관이 환상의 공간으로 역할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비단 그들 사이에 낭만적 관계의 가능성을 싹틔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안사와 홀라파가 극장을 빠져나가기 전 두명의 중년 남성이 대화를 나눈다. <데드 돈 다이>가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장뤼크 고다르의 <국외자들>을 떠오르게 한다는 짧은 소감을 나눈 후 두 남성은 화면의 양옆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여닫히는 문 뒤로 화면의 정면에 스치듯 보이는 것은 브레송의 또 다른 작품, <돈>의 포스터다. 시네마에 대한 감독의 헌사에서 비롯된 이 짧은 퍼포먼스는 영화 안에 흐르는 시간을 팽창시키면서 정확한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모호한 시간성을 부여한다. 이제 이 시간은 전쟁이 발발한 동시대도 아닌, <데드 돈 다이>가 최초로 극장에 상영된 시간도 아닌, 고다르와 브레송을 이야기할 수 있는 두터운 시간으로 작동한다. 안사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잃어버린 홀라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영화관 앞에 가서 기다리는 것이다. 안사 역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영화관을 찾아간다. 엇갈린 두 연인의 뒤로 보이는 것은 장뤼크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장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 존 휴스턴의 <팻 시티>의 포스터다. 시네마에 대한 감독의 애정이 느껴지는 이러한 영화적 인용이 결국 두 사람을 영화관 앞에서 다시 만나도록 마술적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낭만적인 해석인 것일까.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시네마토그래프가 세상에 공개한 첫 이미지는 공장을 나서던 노동자들의 역동하는 걸음걸이가 아니었던가.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는 것에 주저함 없이 너그러웠던 영화의 시발점처럼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노동자들은 영화관을 찾고, 서로를 향해 미소 지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차이밍량이 <안녕, 용문객잔>에서 제 역할을 다한 영화관의 앙상한 뼈대를 롱테이크로 드러내며 숭고의 방식으로 작별을 고하고자 했다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의 영화관이란, 영화사를 지탱하고 있는 옛 거장들의 작품이 여전히 상영되고 있다는 상상이 실현되는 곳이자, 오갈 곳 없는 영혼들을 생동하게 하는 장소가 된다. 이쯤에서 <룸 666>에서 고다르가 빔 벤더스에게 응답하며 영화의 미래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려보는 것은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관객이라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영화와 이미지는 만들어진다. 영화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놀라운 것을 보여준다.” 환상성을 이식받은 이들은 이제 어디로 향할 것인가. 기차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홀라파와 안사는 재회한다. 홀라파가 가진 것이란 병원 간호사가 건넨 그녀의 전남편이 입던 옷과 목발에 기대야 하는 성치 않은 신체뿐이다. 그러나 둘은 개와 함께 어디론가 향한다. 목적지가 묘연하다는 점은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혹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두개의 교집합 없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양극단의 가능성 중 우리가 그들의 뒷모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일까. 감독은 어째서 <르 아브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막 꽃을 틔우기 시작한 벚꽃이 아닌 낙엽이 쌓인 길을 두 사람 앞에 펼쳐놓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신중한 답을 위해 나는 닫힌 안사의 집과 환상성의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위상학에 대해 전술했다. 그들이 병원에서 나와 바라보는 것은 연극처럼 설계된 닫힌 공간도, 스크린의 환상성도 아니다. 그들이 응시하는 것은 구름 틈 사이로 내비치는 석양과 바람에 흔들리며 미세한 떨림을 만들어내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나뭇잎들이 아닐까. 전쟁이라는 사태와 노동의 곤란함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탈주한 안사와 홀라파, 그리고 한 마리의 개가 우리에게 남긴 뒷모습은 떨림이 존재하는 순수한 현재의 풍경일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전작에서도 영화의 주인공들은 빛나는 윤슬과 넘실대는 파도가 있는 곳처럼 생동하는 풍경의 일부가 되어 세상 저편으로 나아가곤 했다. 비록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더라도, 여전히 이곳에 존재할 수 있음을 역설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우화는 그렇게 다시 한번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사운드가 이미지가 될 때 서사와 함께 뒤섞여 부단히 재생됨으로써 서사의 일부가 되곤 했던 음악들을 떠올려보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사운드는 종종 이미지보다 선행하는 것이었다. <과거가 없는 남자>의 야코 루야넨은 야간 기차를 타고 헬싱키에 도착한다. 공원 벤치에서 잠시 눈을 붙인 그에게 괴한들이 들이닥친다. 야코를 때려눕힌 후, 지갑 안의 돈을 훔친 괴한은 캐리어 가방을 뒤지다가 라디오를 발견한다. 괴한은 주인공의 돈과 소지품, 그의 기억과 목숨까지 훔칠 각오를 했지만 라디오, 즉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사물만은 마치 그들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혹은 음악을 삽입하기 위해 라디오를 찾아 재생시키는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태프처럼) 구태여 라디오를 똑바로 세워 전원을 켠 후, 그의 곁에 남겨둔다. 괴한의 손에 의해 재생된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은 이제 작은 라디오에서 출발하여, 야코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 안으로 틈입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피를 흘리며 역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주인공의 시점숏에서 음악은 더 크게 울리며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야코와 함께 뚜벅뚜벅 걸으며 꿋꿋하게 흐르는 이 음악은 라디오에서 발생한 후, 공원으로, 그리고 드넓은 기차역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하나의 시퀀스를 유려하게 직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이미지가 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와 귀에 들리는 사운드가 조응하며 프레임 안에서 공명할 때, 이제 이미지는 새로운 역량을 가지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청각적 기호인 사운드에 시각적 이미지와 심상을 이식해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이러한 사운드의 역량을 수미상관의 구조로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암전된 검은 화면 위로 주인공과 감독의 이름, 그리고 영화의 제목을 차례로 보여준다. 그리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화면 안에 울리고 있다. 이 사운드의 근원은 슈퍼마켓의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을 때 생성되는 소리다. 계산대 위로 생명이 제거된 사체이자 식재료인 고기가 덩어리째 쌓여가고 있다. 바코드를 반복적으로 찍는 계산원과 고기를 계산대 위로 올리는 한 남자의 얼굴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료함과 건조함을 넘어선 텅 빈 얼굴이다. 경직되고 기계화된 이미지들의 풍경 안에 주인공 안사가 있었다. 이 규칙적인 기계음은 영화의 종반부에서 다시, 그러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기차에 치여 의식을 잃은 홀라파의 병실에 비치된 심전도 기계에서 나는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눈은 감고 있지만 분명히 살아 있음을 알리는 생의 소리. 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였지만 이제는 죽은 채로 등가교환의 대상이 됐음을 공표하는 소리였던 계산대의 기계음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상품에 부여된 바코드를 식별하는 소리였던 기계음은 이제 사람의 생명을 알리는 소리로서 새로운 역량을 부여받는다. 그 소리 속에서 혼수상태였던 홀라파가 눈을 뜬다. 다시 태어난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안사다. “나 죽었나요?”라고 물어보는 홀라파에게 안사는 “살았어요”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다시 시작되는 생명과 시간에 대한 선언. 안사와 홀라파, 그리고 개에게 이제 살아 있는 시간이 시작될 것 같다. 다시 영화의 시작을 떠올려보면, 바코드 소리를 이어받았던 것은 유통기한이 지나 제 역할을 다한 제품을 골라내는 안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가져와 들여다보며 애써 쓸모를 찾아보려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마트에서 일하던 그녀를 시종일관 감시하던 직원의 시선은, 이제 막 눈을 뜬 홀라파와 안사를 바라보는 개의 온기 어린 시선으로 대체된다. 소리는 다시 한번 이미지보다 우선한 것으로서 화면에 등장한 후 이미지가 도약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죽음처럼 멈춰진 시간이 다시 생동할 수 있도록 잠재성을 발휘한다. 서사시와 서정시의 이중 재현 <르 아브르>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위중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아를레티에게 그녀의 친구들이 책을 낭독해주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보이는 덤불 뒤에서 기차 한대가 달려나왔는데, 모든 찻간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유리 창문은 아래로 내려져 있었다. 우리 중 하나가 속된 유행가 한곡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우리 역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1910년대에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국도 위의 아이들>의 일부다. 카프카의 소설을 벗의 목소리를 통해 들은 아를레티는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진다. 자크 랑시에르가 주장했듯, 영화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연쇄의 시간성과 절단의 시간성 사이의 긴장을 먹고 산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각색한 동명의 데뷔작 <죄와 벌>을 시작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이어오고 있는 연쇄의 시간은 무엇으로 점철되는 것일까.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40여년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영화들을 하나로 이어보면 그것은 현재에도 여전히 행과 연을 더해가고 있는 하나의 서사시가 될 수 있다. 이 가설에 근거하여 그의 영화들을 다시 떠올려보면, 프롤레타리아 3부작과 핀란드 3부작은 그의 서사시를 지탱하는 주춧돌로 각각 하나의 연이 될 것이며, 영화와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멈춤 혹은 쉼의 시간들 역시 단어와 단어 사이, 혹은 연과 연 사이의 휴지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균열들을 영화로 가져와 다시 보여줄 때, 요원해 보이던 행간은 촘촘하게 엮이기 시작하고 미완의 서사시는 새로운 행과 연을 획득한다. 이렇듯 그의 영화들은 차이와 반복의 형태를 띠며 연쇄되어왔다.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는 시를 씀으로써 그가 목격한 시대의 참상을 문학으로 기록하여 남겼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 역시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40여년의 시간 안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존재들을 영화 안으로 망설임 없이 초대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써오고 있는 서사시 안에 새롭게 생성된 연이자, 개별적인 서정시로 작동한다. 블랙팬 코미디의 장르 아래에서 안사와 홀라파를 비롯한 인물들은 모두 굳은 얼굴의 타블로로 등장한다. 감정이 배제된 이들의 정지된 얼굴은 에드문트 후설이 이야기했듯 판단중지의 효과를 불러온다. 그러나 이들을 그저 기계처럼 굳어버린 이미지로 간주하는 것은 곤란하다. 판단중지는 정지된 이미지를 대면하는 우리를 더 깊은 심연으로 이끈다. 우리가 목격했다시피 안사와 홀라파는 분명컨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영화는 망설임에 머뭇거리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서정적인 가사의 노래, 시대를 풍미했던 영화, 그리고 따뜻한 시선을 가진 개를 등장시킨다. 안사가 홀라파의 연락을 기다리며 들었던 노랫말, “날 사랑할 용기가 없나요? 왜 아무런 대답이 없나요?”는 안사의 내적 독백인 동시에, 홀라파가 등장하는 숏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며 그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고백이 된다. 독백이자 고백의 노래가 홀라파의 어깨너머로 흐를 때, 그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멈춘 얼굴 위로 노랫말이 계속 이어질 때, 생각에 잠긴 이들의 얼굴에 심상과 정념이 자리하기 시작한다. 노동의 곤란함과 녹록지 않은 현실로 인해 환상성이 사라진 이들의 얼굴은 텅 빈 캔버스처럼 무색의 것이었지만, 그 여백 위로 노래와 영화가 채워지며 이들은 다시 역동하기 시작한다. 국경이 맞닿은 나라에서 시작한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나의 삶도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그러니까 지금은 도무지 꿈이란 것을 꿀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중간중간 침묵과 휴지가 있더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를 더해보는 것. 그럼으로 나와 같이 외로운 누군가를 내 옆으로 데려오는 일. 비록 쉽게 써지지는 않더라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는 삶에 대한 의지와 사랑에 대한 언어. 6년이라는 시간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 한편의 서정시가 된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이야기라고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역설했다.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는 노장의 발언은, 우리로 하여금 해묵었지만 늘 자문해야 하는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일까? 시대를 경유하며 축적되어온 리얼리즘의 서사시와 환상성을 토대로 하는 서정시의 이중 재현을 통해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세상을 향해 대화를 시도한다. 그의 영화를 추동해온 것은 아마도 그가 직접 목격한 사회의 민낯일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의 바깥에 있던 빈궁한 현실은 영화 안으로 들어와, 영화의 인물들에게 이식되었다가 결말에 이르러 묽게 용해된다. 이는 안사와 홀라파가 지나친 낙관주의자이거나, 혹은 애초에 꿈꾸기를 포기한 염세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일터로 나가 일을 하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관을 갔다. 그러다 이들은 우연히 상대를 발견하고 용기내 고백했고,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제 현실은 ‘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저항은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저항이 아닌 대화하기를 선택할 때, 즉 승패로 나뉘는 세계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응답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 머무르기를 선택할 때, 나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던 불협화음은 자연스레 소멸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홀라파는 목발을 짚고 걸어가며 안사에게 개의 이름을 묻는다. 안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채플린’이라고 대답한다. ‘채플린’이 여기에 응답하듯 짧고 경쾌하게 짖는다. 영화는 다시금 찰리 채플린의 시간, 이를테면 <모던 타임즈>의 시간을 소환한다. 개의 이름이 ‘채플린’인 것은 무성영화 시대를 향한 노스탤지어에서 비롯된 반가운 영화적 인용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모던 타임즈>가 투영했던 노동자의 애환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슬픈 인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과 함께 흐르는 의 가사, “가을이 오면 공원의 나뭇잎도/ 빛나고 빛난다”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라는 서정시의 마지막 연으로 남을 것이다. 비록 찬란했던 계절을 뒤로하고 바닥에 떨어진 존재일지언정 낙엽도 빛날 수 있다는 희망. 비극의 시대에 불시착한 존재들에 대한 우화는 그렇게 완성된다.

[인터뷰] 코미디는 웃음이라는 공동관람의 시너지효과가 가장 큰 장르다, <파일럿> 김한결 감독 with 김명진 쇼트케이크 대표, 김재중 무비락 대표

- 한준희 감독이 스웨덴영화제에서 발견한 <콕피트>(2012)가 원작이다. 이후 쇼트케이크와 무비락이 함께 제작하게 된 배경은 뭔가. 김한결 감독이 이 프로젝트의 적임자라고 판단한 이유는. 김명진 당시엔 본인이 영화제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준희 감독의 기억 속에 있던 영화다. 직접 연출하는 것보다 옆에서 누군가가 도와주면 제작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재미있는 기획 중 하나였다. 원작자에게 접촉한 것은 2019년이다. 스웨덴쪽 제작사와 연결이 되면서 구매 의사를 밝히고 스크리너를 받았다. 사실 한준희 감독의 피칭만 봤지 영화는 이때 처음 봤는데 다행히도 재미있었다. (웃음) 한편으로는 “감독님이 이런 이야기를 재미 있어 한다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직전에 논의를 시작했던 터라 실제 판권 구매 시기가 1년 넘게 지연됐는데도 원작 제작사에서 기다려줬다. 내가 원래 김재중 무비락 대표를 쫓아다녔다. 대표님이 만드는 작품 들의 색깔과 완성도,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또 미쟝센단편영화제 때부터 김한결 감독님의 팬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 감독님의 인터뷰 영상도 봤다. <술술> 같은 단편은 위트 있지만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대중적인 작품을 추구하는 분이었다. <가장 보통의 연애> 도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으면서 웃음을 만드는 방식이 세련됐더라. 나나 한준희 감독이 코미디 감각이 있지는 않은데(웃음) 김한결 감독 님과 재중 대표님은 대중적인 코미디를 잘할수 있는 분들이었다. 초고가 나오자마자 부산 국제영화제 때 한준희 감독이 조정석 배우에게 시나리오를 줬다. 다른 배우를 상상할 수 없는, 그가 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영화였다. 다행히 캐스팅이 되면서 김한결 감독님, 재중 대표님에게 거의 동시에 제안을 드릴 수 있었다. 김한결 시나리오가 정말 재밌었다. 이런 말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요즘 말하기 힘든 얘기를 담은 기획이라고, 나도 이런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순간에 가장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정우(조정석) 캐릭터에게 공감이 많이 됐다. 코미디 장르지만 이 부분을 재미있게 잘 풀어내면 영화에 이입할 수 있는 관객도 많을 것 같았다. 조정석 배우가 이미 캐스팅돼 있었다. 한준희 감독님의 를 너무 재밌게 봤다는 점도 선택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재중 대표님은 사석에서 두번 뵀는데 무척 나이스한 분이라 나중에 꼭 한번 뵙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원작을 각색하면서 어떤 점들이 달라졌나. 김명진 주인공이 어떤 위기에 처하면서 실업자가 된다, 여장을 하고 취업한다, 엄마와 떨어져 살고 여동생 집에서 살며 아들이 있다는 설정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의 엄마가 여성과 재혼하는데 <파일럿>에서는 칠순 잔치로 바뀌었다. 비행기 사고가 났을 때 주인공의 행동이나 회사에서 잘리는 이유와 이혼 사유도 다르다. 회식 자리 발언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설정은 김한결 감독님이 각색하며 영화의 주제와 일치되는 사연을 새로 만든 것이다. - 한정우가 어떤 언행으로 구설에 오르는지 그 수위를 정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비판 받아야 마땅하지만 영화의 몰입을 해칠 만큼 주인공 캐릭터가 미워지는 수준에 이르러서는 안된다. 정우가 회식 자리에서 상무의 비위를 맞추는 과정에서 여성 직원들을 ‘꽃다발’이라 칭하거나 상무에게 술을 따르라고 시키는 모습은 사실 한국 사회의 평균이라고 느껴졌다. (웃음) 김한결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현장에서 대사를 고치기도 했던 부분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정우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어지간한 건 개인차라고 생각하 지만 전반적으로는 세대차가 있다고 봤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도 정우가 회사에서 잘릴 정도로 잘못했는가를 놓고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일터에서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존재한다. 이런 문제를 한번 인지해 보자고 영화가 던지는 데서도 작은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정우 역시 그렇게 달라지는 캐릭터이지 않나. 김명진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파일럿> 은 그건 잘못됐다고 부드럽게 알려주는 영화다. 그렇게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어느 단톡방에서 정우의 발언이 왜문제가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머지 사람 모두가 “당연히 문제다”라고 반응했다고.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김한결 정우의 아들 시후(박다온)가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나 보잉777 같은 비행기 장난 감을 갖기보다는 발레를 하고 싶어 한다는 설정은 작가님이 쓴 초고부터 있던 내용이다. 영화의 소재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이야깃거리 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떠한 결이 생길 수밖에 없다. 고정된 성역할을 따르지 않는 시후의 모습을 통해 화두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 무비락이 제작한 <청년경찰>은 당시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는데 <파일럿>을 만들면서 어땠나. 김재중 촬영 당시에는 한밤중에 두 성인 남자가 여자 뒤를 따라가는 것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그 부분을 지적하는 비판들이 나왔다. 그 밖에 다른 논란도 불거졌다. 반성을 많이 했다. 너무 무지했던 거다. 김명진 대표님에게 <청년경찰>을 만든 제작사가 반성하면서 <파일럿> 을 만들었다고 할까 말한 적도 있다. (웃음) - 원래 사람은 과거에 잘못한 부분을 반성하고 달라지는 거니까. 나도 과거 SNS에서 했던 발언이 발굴된다면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파일럿>을 보고 동료 직원에게 업무와 관련 없는 외모 평가를 하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 관객이 있을 수 있지 않나. 김명진 과거 한국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있지 않나. 그땐 몰랐던 사람들이 많았던 거다. 성인지감수성은 시대에 따라, 개인이 새롭게 깨닫게 되면서 달라질 수 있다. 김한결 그리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지적할때 말하는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세게 말하면 아예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변화가 목적이라면 부드럽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 지난해 초 조정석 배우가 출연했던 <유 퀴즈 온더 블럭> 촬영 당시 <파일럿> 속 <유 퀴즈 온 더블럭> 신도 같이 찍은 걸로 안다. 언제부터 그린 빅픽처였나. (웃음) <유 퀴즈 온 더 블럭> 특유의 연출은 어떻게 흉내냈나. 김한결 내가 아예 시나리오에 유재석과 조세호가 나온다고 썼는데 제작자들이 수습해주셨다. 근데 그게 됐다. (웃음) 김명진 설마 진짜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정우가 출연하는 신을 찍겠다는 건가? 그런데 감독님이 해맑게 “안돼요? 나는 너무 재밌을것 같은데?”라고 했다. 안 하면 안될 것 같았다. (웃음) 조정석 배우는 물론 예능쪽에 연이 있던 분들이 사방에서 많이 도와주셨다. 김한결 예전에 봤던 <유 퀴즈 온 더 블럭>이 떠올라서 시나리오에 썼던 신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묘사하면서 영화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싶었다. <유 퀴즈 온 더블럭>은 정말 많은 사람이 보는 방송이기 때문에 이질감이 느껴져서는 안된다. 콘티를 짤 때부터 아예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틀어놓고 작업했다. 예전과 요즘의 자막 스타일이 다르다. 로고도 바뀌었다. 이런 부분까지 체크하면서 만들었다. - 한정우와 한정미 남매의 어머니 안자(오민애)가 가수 이찬원의 팬이라는 설정 역시 동시대를 보여준다. 남자 연예인의 여성 팬덤 문화를 비하하거나 웃음거리로 삼지 않고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는 긍정적인 면을 부각 했다. 김명진 원래 시나리오 속 안자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전국 일주를 한다는 설정이었다. 김한결 감독님이 요즘 엄마들이라면 트로트 팬덤의 모습이 더 어울리지 않느냐며 의견을 냈다. 당시에 오토바이 설정을 민 분들이 있었는데 감독님이 진짜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엄마들 모습 같았으면 좋겠다며 굉장히 고집했다. (웃음) 문상훈씨의 유튜브 채널 <빠더너스>가 등장하는 것도 감독님이 재밌지 않겠느냐고 해서 극 중에 들어오게 된 거다. 김한결 리얼 버라이어티쇼 시대라 실제 트로트 팬덤의 모습이 미디어에서 많이 등장했다. 역시 재력이 있는 분들이라 정말 대단한 팬덤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웃음) 그 자료들을 많이 참고했다. - 한정우가 여장을 한 직후 한정미와 윤슬기(이주명)의 스타일링이 대비된다. 정미는 굽 있는 구두에 웨이브진 긴 머리,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슬기는 머리를 하나로 묶고 바지 정장을 입는다. 그러다 정미도 단발머리에 편한 바지를 입는 등 외적으로 변화한다. 김한결 심리적으로 접근했다. 여장한 모습이 발각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우 본인이 아는 선에 있는 것들을 모두 갖다붙인 결과물이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외모 변신을 강조한 것이다. 여장이 익숙해지면서 점점 편한 옷을 입는다. 실루엣을 굳이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 정우가 처음 여장을 하고 거리에 나간 날 헬스트레이너가 승모근을 지적한다. ‘제니 어깨’를 만들수 있다며 필라테스를 권한다. 잠깐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신체 부위별로 평가받으며 멀쩡한 근육도 없애라고 압박받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대사다. 김명진 그냥 보면 웃기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일상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충을 알수 있는 디테일이다.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어느덧 그게 불편한 일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하게 된다. 제모도 마찬가지다. 한정우가 한정미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밟아가는 스텝이 의미하는 바를 여성 관객들은 바로 알아차릴수 있을테고 남자들도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람들이 한정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설정을 뻔뻔하게 밀어붙인다. 심지어 엄마도 자기 아들을 못 알아본다. (웃음) 자칫 개연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는데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김한결 관객들은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한정우와 한정미를 오가며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촬영장에서 보조 출연자들이 조정석 선배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여장을 알아차리지 못한 실례가 있었다. 또 한정우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의 성격상 여장을 강행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심리적으로 허용 되는 상황이라고 봤다. 김명진 <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도 로빈 윌리엄스의 자식들이 여장한 아버지를 못 알아 본다. (웃음) <파일럿>은 그냥 그렇다 치고 봐야 하는 영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작업하지 않으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 여장 남자의 해프닝을 코미디의 재료로 삼은 <파일럿>이 롤모델로 삼은 영화는 <미세스 다웃파이 어> 같은 옛날 할리우드영화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과거 코미디영화에서 소재로 삼았던 설정을 지금 다시 보여줄 때 요즘 관객에겐 자칫 올드하게 보일 수 있다는 우려는 없었나. 김재중 그래서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나 안자가 이찬원의 팬덤 ‘찬스’의 일원이라는 설정을 넣은 것이다. 유튜브와 SNS에서 벌어지는 일도 공 들여 재현했다. 김명진 김한결 감독은 아무리 주변에서 아이디어를 내도 스스로 재밌는 것에만 웃는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웃는 소재라고 해도 본인이 재밌는 쪽을 더 고집한다. 그리고 현실적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시대의 생활성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사실 1990년대 할리우드 가족드라마처럼 <파일럿> 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그때 영화들이 정말 웰메이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때 한국에서 그에 가장 가까운 영화를 만드는 곳이 <지금 만나러 갑니다> <증인> 등을 제작한 무비락이다. - 한정미가 아닌 한정우는 윤슬기에게 이성적 호감을 혼자 갖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관객도 있을 듯하다. 번호를 물어볼 때 빠르게 반응한다거나 신체 반응이 오는 코믹한 장면에서 말이다. 김한결 원래 사람의 감정과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일차원적으로 가기보다는 우리 스타일대로 정리했을 때 오는 미묘한 재미가 훨씬 좋았다. 인간은 커뮤니티를 이루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정미는 슬기가 먼저 다가와줬을때 기뻐한다. 만약 그 신에서 정미가 슬기를 여자로 봤다면 정미의 표정을 좀더 보여주는 식으로 컷을 할애했지 지금처럼 찍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체 접촉 후 반응이 오는 장면은 남자들에게 의견을 많이 물어봤다. 인간적인 호감이 있다면 예상지 못한 사고가 있을 때 영화와 같은 현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 한에어를 이끄는 노문영 이사(서재희)는 한국항공을 책임지는 남동생 노상욱(현봉식)에게 집안내 서열이 밀리고 있지만 미투 폭로 이후 상황은 반전된다. 하지만 극 후반부 노 이사는 성희롱 제보를 한 여성을 오히려 매장시키려 하고 가해자였던 한정우를 복직시키겠다는 제안까지 한다. 같은 여성도 젠더 기반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김한결 <파일럿>은 지금 시대에 자연스럽게 있을 법한 일을 보여주는 영화다. 젠더 폭력의 한 가지 모습만 묘사한다면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 정우가 직접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고 과거 성희롱 발언을 사과하는 신 바로 뒤에 비행기 사고 당시 콕피트의 상황을 전하는 녹음 파일이 등장 한다. 그가 215명의 승객을 구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임했다는 것을 <파일럿> 속 대중과 <파일럿>을 보는 관객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혹시 이런 흐름이 정우의 사과에 방점이 찍히기보다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걱정은 없었는지. 김한결 정우가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신이었다. 또 한정미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함으로써 인물의 변화를 보여준 다. 이후 그는 벌금형을 받는 등 죗값을 치른다. 해피엔딩이라고 보기 어렵다. 김명진 사실 그 라인을 정리할 때 우리의 의도를 오해하는 관객이 있을까봐 논의를 많이 했다. 지금 버전은 정우의 진심을 최대한 전하 면서 영화를 마무리하는 배치를 고민한 결과다. 정우는 면죄부를 받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공개 사과를 한 것이 아니다. 슬기가 성희롱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누명을 쓰고 쫓겨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그를 용서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여론이 팽팽한 가운데 정우는 죗값을 충실하게 치르고 파일럿으로 복직하지 못한다. 김재중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가장 큰 자기반성이라고 생각했다. 정우의 마지막 비행은 그의 꿈을 찾아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 쿠키영상에 등장하는 강하늘 배우는 어떤 인연인가. 김명진 조정석 배우와 함께 뮤지컬을 했고 재중 대표님과 <청년경찰>을 했던 인연이 있다. 사실 촬영 당시에는 그가 쇼트케이크 차기작에 출연하게 될 줄 전혀 몰랐다. (웃음) 김재중 개인적인 바람은 한준희 감독이 <파일럿> 속편 <폴리스>를 강하늘 주연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웃음) - 티켓값 상승 이후 코미디영화는 OTT에서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파일럿>이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을 수 있는 경쟁력이 있다면. 김한결 최근에 코미디영화야말로 극장에서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절절하게 생각했다. 웃음이라는 강력한 리액션으로 공동 관람의 시너지 효과가 가장 큰 장르다. <파일럿>은 한땀 한땀 장인 정신으로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쓴 작품 인데 이들은 큰 화면으로 봐야 알 수 있다. 김재중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는 기억은 극장에서 만들어진다. 넷플릭스 영화를 가족끼리 본 기억은 별로 없지 않나. 멀리 피서를 가는 것보다 극장은 훨씬 가까운 공간이다. 특히 요즘 친구들에게는 부모와 함께 극장에 가는 이벤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파일럿>은 세대를 불문하고 누구나 재미있게 볼 수 있다. 김명진 처음부터 연인, 친구, 직장 동료, 가족, 사제간 등 누구와도 볼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며 기획서를 만들었다. 극장에서 웃음 파도가 만들어질 때 정말 기분이 좋다. 극장에서 함께 웃었던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파일럿>이 그 경험을 다시 소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설득에 실패하는 법이 없는, <리볼버> 전도연 배우론

우리 모두가 배우 전도연을 안다. 헌신적이고 섬세한 캐릭터에 어울리는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어느새 강렬한 카리스마와 동격이 된 그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누구도 그녀가 스크린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았다. 처음 배우가 된 계기가 그러했듯, 전도연은 브라운관에 제법 어울리는 스타였다. 하지만 장윤현의 영화 <접속>(1997)을 기점으로 그녀의 활동 반경은 변한다. 생각해보면 <접속>에서 보았던 수현이란 캐릭터는 단순한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따르지 않는다. 누구나 될 수 있을 법하지만 아무도 만난 적이 없는 미지의 인물, 세상을 지배하는 유령과도 같은 투명한 도시의 여자를 그녀는 연기했다. 신작 <리볼버>(2024)를 보러 가는 길에 전도연의 전작들을 떠올렸다. 총기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이번 영화에서도 그녀는 현실에 속한 캐릭터로 분한다. 폭력적인 남성들에게 쫓기면서도 약속한 돈과 아파트를 향해 다가가는 인물, 보이지 않는 명예의 성취나 누군가의 복수 따위는 언급하지 않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이 점은 특별하다. 분명 어떤 타입의 전형적인 외형을 따르는 영화이지만 그 속에는 지나친 현실의 반영이 녹아 있다. 이 격차에 주목한다. 연기로 마법을 부리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익숙한 무언가를 그녀는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관객 대다수가 배우 전도연을 통해 비슷한 상황과 감정을 경험한 적 있을 것 같다. 전도연의 얼굴에는 일상의 장소가, 그리고 평범한 감상이 스며들어 있었다. 1990년대 한국영화의 현대성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전도연이 연기하는 소박한 인물들의 심정에는 세상을 바꾸려는 목적이 없었다. 영웅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에 훨씬 더 가깝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의 풍금>(1998), <너는 내 운명>(2005)이 그랬다. 과거로 회귀하더라도 완전한 환상은 작동하지 않았으며, 로맨스 장르에 속하더라도 사랑은 기적을 낳지 않았다. 신파와 장르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더니티는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생각해보면 <해피엔드>(1999)의 일탈적 파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혹 잔혹한 결과를 받아든다 해도 시작만큼은 온건했으며, 약간의 과장이 더해진 결과는 현실의 모습 중 단지 하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전도연의 필모그래피는 시대를 대변한다. 누군가의 뮤즈라거나, 무언가를 대변하는 갈망이 그곳에는 나열되니 않는다. 대신 투명하게 관객들과 호흡한다. 우리는 그 일상성에 매혹되었다. 그런 면에서 <밀양>(2007)의 업적은 과도기적으로 보인다. <밀양>에서 그녀는 33살의 피아노 학원 원장 신애를 연기한다. 그녀는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아들을 잃는다. 그리고 살해범의 입을 통해 ‘신의 속죄’라는 말을 듣는다. 비속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자신만의 위안 방식을 갖고 있음을 그녀는 마침내 깨닫는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 수치를 준다. 그리고 임상수의 영화 <하녀>(2010)가 등장한다. 이번 영화에서 전도연이 맡은 인물은 재벌집의 하녀 은이 역이다. 상황은 전작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죄의 과오를 발견하는 거대한 상황의 소용돌이에서, 은이는 운명에 굴복한다. 그리고 파괴적으로 결말에 다가간다. 땀 흘리고 비틀거리면서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의미 있는 상징을 그녀는 행사한다. 이 영화들은 차례로 칸영화제에 소개되었다. 그렇게 <밀양>은 여우주연상을, 그리고 <하녀>는 지울 수 없는 업적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이즈음의 출연작들은 <리볼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어쩌면 오승욱과 전도연의 만남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부분도 여기에서 겹칠 것이다. 영화의 시작부, 수영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상태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하게 2년 전의 일을 회상한다. 어느 고급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에서 그녀는 자신이 되찾아야 할 것을 확인한다. 과거에 수영은 연인과의 결혼을 꿈꾸었지만, 이제 그 희망은 사라졌다. 예정대로라면 감옥의 출구가 아니라 아파트의 현관문에 그녀는 서 있어야 했다. 이 사실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면서 방문을 열듯 단호하게 수영은 보이지 않는 심연을 향해 나아간다. 그 모습은 용감하다. 누군가가 오승욱의 <무뢰한>(2014)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이유가 영화 속의 감정 때문이라고 느낄 것이다. 마치 드레스를 입고 흙발로 서 있는 히로인처럼 그 영화에서 전도연은 아이러니한 카리스마를 드러낸다. 운명에 속박된 어느 여성은 그렇게 또 다른 끔찍한 운명의 남성과 마주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둘 다 결말은 나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망설임은 작은 기대를 갖게 만든다. 관습적이고 의례적인 관계의 모순들, 전도연이 연기하는 혜경은 지나치게 우리들의 모습과 가깝다. 짙은 장르적 색채가 뒤엉켜 있지만, 누구나 이해할 법한 감정을 영화 <무뢰한>은 호소한다. 오승욱이기에 가능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묘하게 환상적이고 실제적인 결과가 그의 영화에는 존재한다. 이번 영화 <리볼버>처럼 매우 극적인 상황이 현실과 맞닿는 순간들이다. <리볼버>에는 주인공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세번 등장한다. 각 장면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반복이 인식의 부족한 곳을 메운다. 가장 먼저 술이 등장하는 것은 출소한 첫날이다. 감옥에서의 바람처럼 그녀는 서울의 어느 호텔에서 위스키를 손에 든다. 이 상황은 지나치게 도식적이지만 이후의 변주를 통해 의미심장해진다. 복수의 과정에서 그녀는 이내 다시 양주를 얻는다. 이번의 술잔에는 피가 고여 있다. 더럽고 추악한 유혹의 물질을 그녀는 각오한 듯 받아넘긴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 해변의 노상 횟집을 그녀는 제 발로 찾아간다. 그곳에는 어느 여성이 생선을 다루고 있다. 무디어진 칼날, 하지만 왠지 신성하다. 누군가를 먹여 살리던 이 도구를 지금껏 수영은 다른 곳에 낭비했다. 한낮 소주잔은 그런 의미에서 속죄의 상징이 된다. 과거 <밀양>에서 보았던 한 줄기의 햇살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리볼버>의 수많은 상대들이 이미 전도연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었다. <하녀>에서 미묘한 파트너였던 이정재가 그랬고, 절대반지를 제공하는 정재영 역시 <카운트다운>(2011)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그들과 함께 뒤섞여 희석되는 일상성을 이 영화의 오마주라고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리볼버>의 수많은 인물들은 분명히 전도연을 중심으로 직조된다. 그러니 배우를 중심으로 작품을 본다면 결코 아쉽지 않을 것이다. 겁이 없는 여성 캐릭터, 대체할 수 없는 카리스마, 만일 총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에 대해 상상한다. 단언컨대 누가 고양이인지 쥐인지 더이상 확신할 수 없는 세상의 밤에서도 수영은 기필코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녀의 바람은 세속적이기에 항상 대체될 수 있는 어떤 목표다. 그 유연함이 마음에 든다. 배우 전도연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곁에서, 수영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