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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슬픔의 케이팝파티] 괜찮아 조금도 난 겁나지 않아,

괜찮아 조금도 난 겁나지 않아 - (트와이스, 2019) 종종 인천의 ‘인천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대개 입을 떼기 전부터 실실 웃음을 흘리다가 상대가 반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인천이라는 도시의 저속함에 대해 쏟아낸다. 그들의 묘사 속에서 인천은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장소이며, 거칠고 더럽고 나쁘기만 한 동네다. 그러나 경계라 부를 만한 것도 마땅히 없는 작은 나라에서 어떤 지역이 특별히 거칠고 더럽고 나쁠 수 있는 확률은 몇이나 될까? 아랫동네 사람인 나는 별다른 계산 없이 떠올린다. 오직 멸시를 위해 거칠고, 더럽고, 나쁜 땅이 되는 수많은 고향들을. 그 생각 다음으로는 말이 지겨워진다.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전부 싫다. 송도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동안엔 남동공단에 집을 얻어 생활했다. 집값이 싸고 거리가 가까워 출퇴근은 편했지만, 동네가 너무 빨리 조용해져서 해가 저물면 괜히 겁이 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퇴직금을 주기 싫은 회사는 내 자리를 11개월마다 갈아치웠다. 어쩌면 정식 계약을 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긴 했지만, 출근 10개월차였던 어느 겨울날, 나는 내 자리에 들어올 후임 인턴에게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매니저와 나, 그리고 후임인 S는 구내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매니저는 나를 S에게 ‘남동공단에 혼자 자취하는 애’라 소개했다. 외국인노동자들 많은 동네에서 겁도 없이 용케 잘 버텼다고 격려도 해주었다. 매니저에게 10개월간 들은 말이었다. 누린내 나는 밥을 대충 헤집다가 젓가락을 놓는데 S가 갑자기 말했다. “외국인노동자 많이 산다고 무서운 동네는 아니죠.” 나는 눈이 커지고 매니저는 콧구멍이 커졌다. 높은 턱에 부딪힌 차처럼 덜컹하고 흔들린 매니저는 S의 느긋한 표정을 한참 동안 살피며 그의 말에 어떤 의도도 없음을 확인하는 듯했다. “S씨는 어디 살아?” 매니저는 갑자기 시험을 보듯이 질문을 했다. 누군가를 경계할 때 내는 불쾌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S는 볼을 가리키며 밥을 다 먹고 말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음식을 다 씹어 넘긴 S가 “부평이요. 전 부평에서만 평생 살았어요” 하자 매니저는 ‘파’ 하고 웃었다. 그런데 S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에? 왜 비웃으시지? 부평이 동네가 좀 후져서 그런가?”라고 바로 받아치는 바람에 매니저의 콧구멍은 또다시 커졌다. S는 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를 마시면서 다음 질문을 미리 들은 듯 묻지 않은 대답도 했다. “저는 ‘지잡’ 나왔고 원래 ‘좆소’ 다녔어요. 여기가 거기보단 좀 커요.” 어떻게 하면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좀더 번듯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매번 대기업과 회사의 ‘친구의 팔촌 동생의 매제의 사돈의 친구’ 같은 네트워크까지 생각해내던 나는, ‘지잡’이나 ‘좆소’가 자아내는 자괴감 따위와 일찌감치 싸워 이긴 듯한 S의 태연한 말들에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의 고칠 점을 일기에 빽빽하게 기록하던 때였다. 고작 11개월마다 어린애들을 내쫓는 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업무 인계를 하는 2주간 나는 S와 붙어 지내며 그에게서 꽤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부평과 구월동의 ‘노는 물’ 차이, 남동공단 떡볶이의 유명세, 중고 컨테이너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직원 두명을 밤새 착취하던 첫 직장, 근무 중에 술을 마시고 매일 직원들을 향해 폭언하는 사장을 때려서 고소당한 사연, 공장 뒤편에 붙어 있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입니다’라는 현수막이 한 중년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죽은 일 때문이라는 것까지. S는 자기 자신을 자주 ‘개돼지’라 불렀고 집에서 스스로 요리를 해먹지 않는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인수인계 마지막 날. 매니저가 송별 인사 대신 보내준 스타벅스 쿠폰을 커피와 바꾸면서 나는 S에게 물었다. “어쩜 그렇게 매사에 무덤덤할 수 있어?” S는 살면서 그런 말을 처음 듣는다며 말했다. “무덤덤하다뇨? 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인천에서 보낸 11개월의 시간은 그 말과 함께 막을 내렸다. 발매한 노래 대부분이 히트곡인 가수가 과연 슬픔을 알까? 내게 트와이스의 이미지는 ‘스폰지밥’이었다. 고백을 주저하는 너를 응원하고, 네가 내 맘을 두드려주길 바라고, 내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눌러달라 신호를 보내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해하지만, 내 질문엔 무조건 ‘YES’라 답하기를 원하는. 그래서 근심은 가볍고, 인생은 즐거운 ‘비키니 시티’의 명랑한 해면. 제목이 ‘TT’인 노래를 두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가짜라며 분개했던 나는, 2019년 발매된 미니 7집 앨범 타이틀곡 를 들은 후 그들에게 내렸던 모든 평가를 철회했다. 나는 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노래가 훌륭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이 곡을 기점으로 트와이스의 디스코그래피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에 딱히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 곡의 메시지가 이전의 것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다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내게 는 노래가 아니다. 나에게 는… 눈물이다. 로 트와이스가 꾀한 것은 ‘성숙’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전에 입던 ‘소녀 같은 옷’을 벗으며 잘 표현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에 빠진 상태로 부르는 노랫말은 그들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젠가 하늘빛이 아주 오묘했던 저녁. 나는 를 듣다가 통곡했다. 트로피컬 색 하늘에 많은 것을 묻어두는 듯한 나연의 첫 소절만으로 ‘성숙’이라는 컨셉은 초과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뾰족한 것에 매일 찔리고 베이는 듯한 미나의 위태로운 불안과 따끔한 가시 같은 것은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는 정연의 씩씩한 위로가 합을 맞추고, 모모, 사나, 쯔위로 이어지는 ‘웃으며 흘리는 눈물’ 구간은 단순한 가사 덕분에 더욱 슬픔이 깊어진다. 나연과 지효가 머리에 힘을 가득 주고 눈물을 참듯이 부르는 후렴 부분은 이게 맞는 것인지 몰라서 SOS를 치는 채영과, 꿈처럼 행복해서 상태 메시지를 ‘랄랄라’로 바꾸는 다현의 ‘너무 슬퍼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은 파트’와 만나며 그 슬픔이 배로 차오른다. 쥐어짜며 풀어썼지만 사실 가 주는 슬픔은 정확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노래의 슬픔은 결코 기쁨으로 승화되지 못한, 커다란 슬픔들 사이에 물때처럼 묵은 일상의 슬픔이며 또한 계속 삶을 사랑할 거라고 외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처절하게 짓는 미소이기 때문이다. 매일 슬픔을 마주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음을 깨닫고, 더 나아가 그 처절함 자체를 용기로 삼는 목소리. 그래서 엉엉 우는 것만으로도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노래, 아니 눈물. 노을이 지는 늦은 오후에 경인고속도로를 지날 일이 있다면 혹은 인천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을 탈 일이 있다면, 한 번쯤 트와이스의 를 들어보라. 원망을 삼킨 채 너절한 힘으로 굴러가는 매캐한 도시가 우리의 삶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그것은 또한 얼마나 훌륭한 장면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구역질의 만용, 가장된 악몽'

개봉 두달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수 19만명을 넘어서며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고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주제의 무게와 영화의 비상업적 화법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평단만이 아니라 대중 또한 이 작품이 전위적인 형식으로 압도적인 체험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그 과정이 ‘윤리적’이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망설임 없는 호평의 물결 속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려고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형식적 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재현하는 두 가지 선택에서 빚어진다. 우선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수용소 바로 옆에 긴 담장을 치고 사는 나치 가족에 초점을 두는데, 한자리에서 움직임을 자제하는 카메라가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반면, 담장 건너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만 나치 가정의 장면을 부유한다. 요약하자면,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와 외부의 사운드가 접촉하며 일으킨 불쾌한 긴장이 이 영화의 도전적인 시도로, 관객들이 받은 충격적인 감응의 근거로 회자된다. 그러나 관람자 대다수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감상 후기에 동원하는 ‘악의 평범성’이나 ‘재현 불가능성’처럼, 상투적으로 남용되기 쉬운 개념의 모호하고 과장된 기운을 걷어내면 이러한 형식이 의도하는 바는 다소 도식적으로 읽힌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시선의 방향을 옮겼다고 해도, 이 작품이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들보다 급진적인 층위에서 질문의 틀을 전복한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평이한 문제의식을 과도한 형식으로 치장한 영화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간단하게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로 들어가는 문을 달리 찾아야 할 것이다. 형식이 꾀한 윤리를 성급하게 단정하기 전에, 형식에 잠재된 욕망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어떤 묘사나 장면도 그들의 진면모, 끊임없이 밀려드는 그 공포를 담아낼 수는 없다.”(<밤과 안개>, 1955) 강제수용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알랭 레네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이래,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절멸의 역사를 영화 안으로 불러내 되살리는 과업과 대면해 왔다. 상업적인 문법으로 단순하게 극화하는 사례를 제외한다면, 이들은 어떤 형식으로도 그 역사에 제대로 닿을 수 없다는 자각과, 재현된 이미지가 선정적으로 대상화될 위험에 처한다는 각성 사이에서 분투한다. 앞서 말했듯,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나치 사령관 루돌프 회스의 집 너머, 수용소의 사건들을 오직 소리로 영화에 입히는 방식도 그런 고민의 극단적인 결론일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계는 명백하다. 육체성을 삭제하고 고통과 폭력과 죽음을 집단화함으로써 관람자의 즉물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사운드의 효과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운드로 한 세계의 존재를 각인하는 방식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사울의 아들>(슬로 네메시, 2015)에서 이미 수행되었고, 청각의 물질성이 시각의 외설성에 대한 온전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점 또한 일깨웠다. 다만, 두 영화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울의 아들>이 수용소 내 시체처리반에 소속된 사울의 행로에 시야를 한정하며 그를 둘러싼 죽음을 흐릿한 이미지나 프레임 밖 아우성으로 지시할 때, 화면 안과 바깥은 죽음의 장소 내부에서 서사적 연속성을 지닌다. 여기에는 카메라가 고개만 살짝 움직여도 죽음의 이미지가 금세 화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거라는 가정, 달리 말해, 사울이 보는 것을 영화가 우리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이 영화가 재차 강조하는 재현의 태도는 그러나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수용소 한가운데서 죽음에 뒤엉킨 이야기를 추동하면서도 죽음의 이미지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설정의 맹목성이 오히려 어느새 장르적 서스펜스를 불러들이고 마는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다르다. 여기에는 수용소와 나치 가족의 집을 가르는 공고한 담장이 있다. 조너선 글레이저는 회스 가족의 집과 수용소를 “보는 영화”와 “듣는 영화”로 나누길 주저하지 않고(<씨네21>, 1460호), 이미지 대 사운드, 평온한 일상 대 학살 현장으로 성질을 명확히 구분한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의 고유한 밀도를 둘의 어긋남에서 찾으며, 그 감각에서 반성적 성찰이 시작된다고 여기지만, 이는 오인에 근거한다. 이러한 설계의 핵심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충돌이기보다는 둘의 일시성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집과 강제수용소의 물리적 거리, 두 세계의 속성적 간격, 이미지와 사운드의 형식적 간극을 매개 없이 접합한 영화의 시도가 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나치 가정의 풍경과 수용소의 참상을 서사 내적 계기 없이 단번에 겹쳐둔다. 둘을 영화 안에서 뒤섞지 않고도 동시에 작동하는 한몸으로 만드는 일은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이 작품이 내세우는 당위다. 그 당위를 행여 초과할지도 모를 서사의 활동은 제한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수용소를 환기하는 사운드는 영화 안에서 딱히 서사의 기틀을 요청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영역이다. 회스의 집 안팎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는 10대의 카메라가 피사체와의 거리를 고수한 채 추출한 동선의 나열이자 서로에게 무감한 숏의 연쇄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울의 아들>처럼 자신의 자리를 찾아 위태롭게 혹은 논쟁적으로 요동할 필요가 없다. 이곳은 애초 카메라의 위치를 고심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과 시선이 제거된 지평(수용소)이자,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단 하나의 임무, 움직임이 금지된 눈에만 복무하는 장소(나치의 집)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서사의 층위를 봉쇄하는 전략을 취한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이는 이야기가 자칫 가해자의 내면에 닿아 동요할 사태, 일말의 면죄부로 기능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시도이자, 홀로코스트가 섣부른 내러티브 안에서 감상적으로 소비되고 시각의 포르노그피가 될 위험을 방어하는 선택일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는 비극과 재난을 서사화하는 예술의 오랜 자문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요컨대, 우리는 <히로시마 내 사랑>(알랭 레네, 1959)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끌어안고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축으로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랑, 현실과 허구의 숏을 서로에게 날 세워 반응하는 이미지로 배열할 때, 이 영화가 내러티브를 해체하며 망각에 저항한다고 받아들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내러티브의 관습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서사에서 깊이와 입체성을 지워버린다. 서사의 평면성은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화두로 끌어오는 ‘악의 평범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 잠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해나 아렌트가 거론한 ‘악의 평범성’은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전무한 나치 부역자의 악행이 병리학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특별한 근원을 갖지 않음에 주목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의 욕망이 평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감독과 관람자들은 회스 가족의 장면들을 이 개념과 뭉뚱그려 결부시키며 ‘평범성’을 미화하거나 오용하고 손쉽게 보편화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각자의 평범한 욕망을 추구할 때, 그것이 타인의 고통과 연동될 수 있음을 깨우치려는 의도가 이들의 견해에 담긴다고 해도 여전히 의아함은 남는다. 아렌트의 맥락을 거두고 솔직하게 물어보자. 코앞에 죽음의 담장을 두고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자처하는 자, 수용소에서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할 방법을 고심하는 자가 영위하려는 일상을 그저 인간의 평범한 욕망으로 수평화해서 말해도 될 것인가. 회스 가족의 나날을 떠받치며 생존하는 노동자들과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가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의 물품을 나눠 가질 때, 이들의 욕망은 똑같이 평범한가. 더욱이 영화는 더없이 성의 없는 묘사와 설정이긴 해도, 이 가족의 평범함이 아닌 사악함을 부각하는 인위적인 에피소드와 순간을 곳곳에 심어두고 이들을 도덕적으로 논평하려는 욕심도 부린다. ‘악의 평범성’은 적어도 이 영화에 적용될 수사는 아닌 것 같다. 서사의 입체성을 억누르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구현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악의 평면성’이다. 영화는 나치 가족을 이미지로 전면화하면서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서 있는 곳은 이 가족의 구체적인 세부가 보이지 않는(실은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 담장 건너의 무수한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위에 몰두하는 이들의 풍경만 피상적으로 스케치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동요 없는 중립지대, 객관적 목격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허락한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 중심을 맞춘 이유로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라고 말하지만, 정작 영화는 가해자의 서사와 분리된 곳에서 피를 묻히지도, 벌벌 떨지도 않는 기계적인 눈으로 그 세계를 그저 쳐다본다. 이 영화는 비인간성을 현시한다는 미명으로, 자신이 빚은 인간의 개별성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한다. 그 태도는 비겁하다. 시종일관 운동을 경계하며 나치 가족에 다가서지도, 수용소 담을 넘지도 않던 카메라가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선보일 때, 그건 영화의 자의식이 담긴 발언일 것이다. 초반, 마당에서 회스 가족의 화목한 광경이 펼쳐진 뒤, 수레를 끄는 인부가 등장하는 대목이 그렇다. 담장을 중심으로 후경에는 강제수용소 지붕이, 전경에는 마당에 널린 하얀 빨래가 보인다. 두 세계를 나눈 담장을 따라 인부가 집쪽으로 향하는 동안, 카메라도 그에 맞춰 이동한다. 그의 수레에 담긴 천들이 유대인에게 몰수한 옷가지라는 사실은 다음 장면에서 드러난다. 카메라의 이러한 운동은 유사한 배경과 상황에서 몇 차례 더 출현한다. 이를테면, 헤트비히가 모친에게 자신이 일군 텃밭을 뿌듯하게 소개하며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의 시선은 담장 옆을 걷는 모녀를 따라간다. 역시나 담 뒤로는 수용소가, 앞으로는 푸르른 정원이 놓인다. 헤트비히가 루돌프의 전출 통보를 접하고 분노하며 집 밖으로 나가 수용소 담장을 지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의 다급한 발걸음에 동행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이처럼 도드라진 카메라의 활동은 ‘아우슈비츠 담벼락 트래킹’으로 부를 만한 것이다. 담장이 자극한 카메라의 수평적 운동은 세계를 두 부분으로 대비한다. 나치와 유대인, 가해자와 피해자, 일상과 죽음, 무엇보다도 원인과 결과. 둘은 마치 숏과 이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리버스숏, 액션과 그것이 관습적으로 낳은 리액션처럼 담장을 사이에 둔 채, 한 화면에 압축적으로 공존한다. 영화는 정확하게 이분화된 이미지의 관계로 홀로코스트라는 총체를 구축한다. 이 장면을 이루는 구도와 요소들은 너무도 선명하게 그 함의를 확신한다(트래킹숏과 떨어져 있지만 밤마다 노역장에 사과를 묻어두는 소녀의 이미지는 그 총체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감독은 그 장면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과 반대되는 에너지, 인간의 선함”이라고 규정한다. 영화 안에서 열화상카메라로 찍힌 ‘선’의 지대는 악의 장면과 완전히 구분되는 질감을 지닌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담장의 경계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동안, 역사의 불가해한 심연, 명멸하는 기억의 파편이 들어설 틈은 닫힌다. 갈등과 혼돈의 지대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에서 전쟁영화의 리듬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후반부와 내내 우왕좌왕하던 핸드헬드 숏들은 형식의 실패만이 아니라, 영화가 놓인 불안정한 토대 또한 노출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의 유대인과 시체처리반 ‘존더코만도’ 사이, 볼 것과 보지 않을 것 사이, 죽음의 서사와 재현의 형식 사이에서 덜컹대던 영화가 마주한 곤경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트래킹숏에는 흔들림이 없다. 영화가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시각적 묘사에 반대한다고 강변하면서, 매끄럽게 조율되고 통제된 트래킹숏으로 훑는 저 담장의 이미지는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 트래킹숏에는 담장 뒤편의 죽음을 스펙터클로 그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배어나지만, 시각적으로 물신화된 담장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보다 교만하게 외설적이다. 강제수용소와 나치의 장소를 인과의 이미지로 의미화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트래킹숏은 과거와 현재를 종결되지 않는 역사로 교차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밤과 안개>의 트래킹숏을 욕되게 왜곡한다. 시각성에 대한 이 영화의 태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검은 화면으로 지속되는 도입부만이 아니라, 연기에 뒤덮인 루돌프의 얼굴 클로즈업이 수용소에 이른 유대인들의 울부짖음에 휩싸이다 불현듯 하얀 화면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그 예다. 이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이미지 세부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시각화에 저항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화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검고 하얀 화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성에 대한 거부로 읽히기 전에, 몽타주가 배제된 이미지의 자기동일성을 향한 미학적 욕망으로 먼저 체감된다. 이 모순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영화는 이미지를 어둠으로 잠식하고 하얗게 날릴 때조차 여전히, 이미지로 남는다. 무지(無地)의 화면은 시각성의 부정이 아니라, 절대화에 더 가깝다. 회스 가족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않던 영화가 예외적으로 허용한 익스트림 클로즈업도 그런 맥락에 놓인다. 수용소 바로 옆, 정원에 핀 빨간 꽃이 화면 가득 담길 때 수치심을 모르는 아름다움, 만개한 생명력은 추하고 징그럽다. 꽃의 형상이 번져 화면 전체를 피의 색으로 완전히 적실 때, 영화는 시각성에 대한 불신과 미학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앞세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영화가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무지의 화면을 기괴하고 위악적인 음향과 접속시켜 생성하는 건 혐오와 공포의 이미지에 대한 매혹이자 그것의 신비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시각의 위력에 도취된 상태로 시각의 활기를 강제하려 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것은 가해자의 악몽일까. 한가롭게 몸을 담그고 낚시하던 강에 흘러온 망자의 뼈, 몸에 들러붙은 검은 재, 이런 것이 나치 부역자의 나쁜 꿈일까. 경직된 이미지의 프레임에 형체 없는 비명으로 끈질기게 돌아오는 유령은 홀로코스트 영화의 트라우마일까. 그것이 결국 가장된 악몽이라는 의심을 영화 후반부는 가중한다. 루돌프는 중령으로 진급하고 아내의 바람처럼 아우슈비츠에 머물 수 있게 된다. 나치의 연회 장면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이로 늘어진 다음, 사령부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느닷없이 구역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는 그 행위를 한번 더 반복한다. 인물의 내면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던 영화가 이 순간 목표한 것은 무엇일까. 루돌프는 무엇을 토해낸 것일까. 그의 갑작스러운 구역질이 영화의 시공간적 비약을 예비하는 제스처임은 이내 밝혀진다. 루돌프가 인적 없는 복도를 두리번거리자, 신묘한 빛이 새어나오는 검은 화면이 열리며 영화는 놀랍게도 당당히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이른다. 현실의 노동자들이 쓸고 닦는 적막한 박물관 내부에 희생자들의 흔적이 있다. 시간을 건너뛰어, 허구 바깥으로 나온 영화 화면에 그간 소리로만 휘몰아치던 죽음의 잔해가 맺힌다. 영화가 기어이 루돌프 장면으로 다시 돌아오면, 이제 그는 어둠 속에 얼어붙은 자세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가해자의 무의식이 뱉어낸 육체적, 정신적 반응이 그의 시선을 멈춰 세우고 비로소 학살을 증언하는 미래의 장소와 마주하게 한다는 말인가. 미래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을 이렇듯 예기치 않게 차가운 얼굴로 덮친다는 것인가. 영화는 가해자의 증상과 시선에 과거와 현재, 영화 안과 바깥을 오가는 힘을 부여하고 역사의 통로로 삼는다. 여기 어떤 균열도 보이지 않는다. 시공간적 이행과 전환을 거리낌 없이 용인한 이 대목은 얄팍한 역사 인식과 형식의 만용을 과시적으로 전시할 뿐, 아무런 의의도 생성하지 못한다. 도덕을 시늉하는 구역질이 박물관 유리 벽 안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해어진 신발 무덤에, 말문을 막는 존재의 무더기에, 끝나지 않은 파멸의 시간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 영화. 정녕, 그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동의할 수 없다.

[비평]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더 원더스>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의 계보 속에 있으면서도 고유한,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기에 로르바케르의 첫 ‘마술’이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시점에서 무언가의 처음을 목격한다는 건 늘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무언가가 마술이라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도 있다. <더 원더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술이 그렇다. 이 쇼의 마술사는 가족의 대표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룬구)이고, 관객은 젤소미나 가정에 위탁된 외부인 마르틴(루이스 휠카)이다. 젤소미나는 마르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입에서 벌을 꺼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럼으로써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되는 이 마술이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더 원더스>는 로르바케르가 왜 마술을 할 수밖에 없는지, 어떻게 마술을 할 줄 아는 존재가 됐는지에 관한 설화로 읽히기도 한다. 젤소미나의 특별한 능력 <더 원더스>는 그 줄거리만 따지자면 젤소미나의 성장 서사를 담고 있는 영화다. 젤소미나는 낡은 시대관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볼프강(샘 루윅)이 만들어놓은 양봉 가정의 비이성적인 규칙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니,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상태다. 그저 지금 그대로의 삶을 최대한 연장시키려는 아버지의 욕망을 본인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며, 때로는 동생들에게 아버지에게 배운 권위적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위태롭다. 여기서 이런 젤소미나를 (선배 ‘마술사’이기도 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의 곡예사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와 비교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차이점이다. 첫째는 둘이 선보이는 쇼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고, 둘째는 <더 원더스>의 젤소미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다. 먼저 젤소미나의 슈퍼파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젤소미나는 처음엔 그 능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가, 영화 속 사건들을 거치면서 점차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영화 초반부엔 젤소미나가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의 왕국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모습이 나온다. 젤소미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동생이 취침 시간에 어둠 속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 때 이를 가장 먼저 캐치하기도 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동생이 작업 시간을 어기려는 행동을 보이자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동생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가 부족한 벌의 개체수를 지적할 때도, 새로운 벌집의 위치를 앞장서서 찾아나서는 것은 젤소미나다. 이처럼 젤소미나는 (곡예사 젤소미나처럼) 자신의 특별한 재능으로 인해 보호자의 애제자로 간택받고, 그의 길이 곧 자신의 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상태다. 그런 젤소미나의 참재능이 발휘되는 순간은 가족의 미래를 볼 때다. 작업이 끝나고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이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길 때 젤소미나는 홀로 뭔가를 느끼고 마치 망을 보는 사람처럼 주변을 살핀다. 이대로 현재의 삶을 즐기다 맞이하게 될 불행한 미래가 눈에 보인 것일까. 그때 그들에게 TV프로그램 ‘전원의 기적’의 촬영 스태프가 다가옴에 따라, 젤소미나가 감지한 무언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건 바로 기회다. 가족을 이 어둠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할 수 있는 기회. 모두를 날려버릴 것 같은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그래서 벌집이 든 상자의 뚜껑이 전부 날아가버릴 것 같은 어느 날, 온몸으로 뚜껑을 누르고 있던 젤소미나는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말한다. “아빠, 우리 거기 참가해요.” 그렇게 젤소미나는 자신이 본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순간부터 가족들을 TV프로그램에 노출시키려는 노력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 TV프로그램에서 젤소미나는 대망의 두 번째 마술을 선보이게 된다. 가족의 대표로 출연한 아버지는 자신에게 카메라가 왔을 때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이상한 말들을 내뱉는다. 그는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다. 이를 알아차린 진행자가 다음 순서로 넘어가려 하자 젤소미나가 그를 붙잡는다. 그러곤 다시 한번 입에서 살아 있는 벌들을 꺼내는 마술을 행한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리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젤소미나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세상이 비추는 빛에 자기 자신을 던지는 이 순간, 젤소미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진짜 능력과 그것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게 된다. 이것의 다른 말은 곧 ‘성장’이다.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그 쓰임을 정확히 인지하는 걸 두고 성장했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미래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마술적일 수밖에 없다. 성장 전의 나와 성장 후의 나 사이의 간극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판타지 세계에 등장하는 ‘마법’이 아니라 ‘마술’인 것은, 이것이 분명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렇다. 바로 이 현실에 기반한 성장 서사가 로르바케르가 스크린에 구현하고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실체다. 우린 모두 로르바케르다 비록 프로그램에서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지만, 이제 젤소미나는 확실히 무언가를 볼 줄 아는 존재가 되었다. <더 원더스>의 엔딩은 젤소미나가 그 능력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해 성장한 젤소미나의 시선을 영화가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누군가가 묻는다. “젤소미나,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젤소미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집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를 따라 카메라가 제자리에서 패닝을 시작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고, 그들이 살던 빈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그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젤소미나뿐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이제 능력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젤소미나가 가족이 집을 떠난 미래를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곧 미래에서 과거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므로, <더 원더스>가 <키메라>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바로 이 엔딩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더 원더스>는 (국내 개봉 순서인) <행복한 라짜로> <키메라>라는 여정을 통해 경이를 목격한 관객들에게 첫 기적이 발현된 성지로서 순례할 만하다. 그러나 물론 로르바케르는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이 오로지 순례자 역할로만 남아 있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 같다. 다시 한번 로르바케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므로, 언젠가 성장할 우리, 인생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마술’을 터득할 우리는 모두 젤소미나이자 로르바케르(가 될 것)이다. 그의 영화는 그래서 매혹적이다. 

[이연숙의 장르의 감정] 일의 고통과 고통, <더 베어>와 자기 파괴적 열정으로서의 일

우리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단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일이 우리를 만성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하고 공황장애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일을 그만두느니 삶을 그만두는 게 빠를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할지라도, 우리는 일을 도무지 그만둘 수가 없다. 왜일까? 우리가 일을 너무 ‘사랑’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일이 삶을 완전히 망치고 부숴주기를, 천천히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고 있는 마조히스트이기 때문일까? 2022년 6월 훌루(한국에서는 디즈니+)를 통해 첫 시즌, 그리고 마찬가지로 올해 6월 세 번째 시즌이 공개된 드라마 <더 베어>는 주인공 카르멘(‘카미’) 베어제토를 통해 우리가 일과 맺고 있는 애증 병존의 교착 관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안 출신인 카미는 마약중독자였던 형의 자살 이후 이탈리안 비프 샌드위치를 주 종목으로 하는 형의 가게 ‘더 비프’를 운영하기 위해 고향 시카고로 돌아온 실력 있는 요리사다. 카미는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지만, 그건 그에게 ‘건강한’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전 직장의 가학적 사수가 행한 ‘교육적’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마찬가지로 요리사였던 형의 자살로 인한 죄책감과 분노가 요리라는 일을 매개로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은 카미에게 고통을, 혹은 고통이 그 자리에 여전히 있다는 기쁨을 준다. 그는 세 시즌에 걸쳐 잠결에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헌신적인 ‘더 베어’의 셰프들에게 미친 폭군처럼 군다. 사태는 잠시 나아졌다 곧 이전보다 더 나빠진다. 하지만 어쩐지 그는 일로부터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일을 그만두는 결단을 고려하는 대신에 마치 결정적 자멸의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 속으로 더 깊이 잠수하기를 택한다. 만약 그걸 주체적인 의미에서 ‘택했다’고 간주할 수 있다면 말이다. <더 베어>는 이처럼 유달리 높은 야심(‘미슐랭 별 세개 따기’) 때문에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혹사시키는 젊고 재능 있는 일중독자 카미가 어떻게 계속해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나쁜’ 선택만 하는지를 보여주는 프롤레타리아트적 정신병리의 드라마다. 나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적’이라는 단어를 일종의 노예적인 상태, 주어진 선택지를 억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비유로 사용했다. 한편으로 이런 상태는 <미안해요, 리키>(켄 로치, 2019)와 같은 비판적인 리얼리즘 영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 영화에서 택배 노동자인 주인공은 동네 좀도둑들에게 진탕 맞아 여기저기 붓고 부러진 피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분실 택배를 변상할 돈을 벌기 위해 눈물 바람으로 그를 말리는 가족들을 물리치고 새벽 노동을 나선다. 그는 어쩌면 그를 막아서는 아들의 말처럼 이번에야말로 일하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남은 다른 선택(‘대안’)이 없다고 믿는다. <풀타임>(에리크 그라벨, 2021) 역시 파리 교외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경력 단절 여성인 호텔 노동자를 주인공 삼아 말 그대로 숨이 턱턱 막히는 일주일을 다루는, 한 블로거에 따르면 이른바 일상 스릴러 영화다. 매일 넋을 쏙 빼놓는 미친 아수라장 같은 길고 긴 출퇴근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그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직에 도전하고 결국 성공하지만, 이는 어쩌면 그의 출퇴근 시간을 더 연장시킬 결정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현실 고발(!) 영화들이 현재를 ‘더 나은 삶’이라는 미래를 위한 ‘담보’로 그린다면,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부터 창업 실패 장르라고 명명할 일군의 드라마들 역시 현재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개방될 미래를 위한 ‘투자’로 다룬다. 양자 모두는 그들이 꿈꿔온 미래 시나리오를 위해 현재의 가능한 ‘다른’ 선택지들을 희생해왔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은 막다른 길(Impasse)이라는 졸아든 삶의 유일한 선택지와 맞닥뜨리게 된다. <더 베어>와 비슷한 시기 공개된 <드롭아웃>은 희대의 실리콘 밸리 사기꾼으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홈스 사건을 재구성한 드라마로, 어떻게 그가 일련의 말도 안되는 허황된 거짓말을 화폐 삼아 그토록 거대한 사업체로 키울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문화예술계와 연관된 셀러브리티들에게 신분을 속이고 금전을 갈취한 이민자 출신의 애나 소로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애나 만들기>(2016), 대규모 음악 축제에서 최악의 사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2019),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과거 유니콘 스타트업의 상징 위워크의 두 대표가 품었던 공동체에 대한 순진한 꿈과 희망이 추락하는 과정을 그린 <우린폭망했다>(2022)처럼, <드롭아웃> 역시 창업 실패 장르에 속한다. 다만 <드롭아웃>은 앞선 드라마들과 달리 자신만만한 야심가 엘리자베스 홈스가 어떻게 자신의 거짓말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지를 사이코 드라마적으로 묘사한다. 여성 차별과 폭력의 누적된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유달리 ‘예민한’ 성격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눈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는 걸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치한다. 공황과 불안 속에서도 그는 마치 자멸을 가속하려는 듯한 확신에 찬 거짓말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의 일로부터 ‘탈출’하기 어려운 건 <더 베어>의 카미(와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속 주체 양식에 내포된 부정성을 자원 삼는, 이른바 ‘가속주의’라고 알려진 좌파적 입장을 따르는 몇몇 급진적인(혹은 이단적인) 평자들은 노동하는 주체의 일견 이해하기 어려운 과잉 노동, 즉 자기 학대에는 향락(enjoyment)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현실 원칙 너머의 향락은 (마크 피셔에 따르면) 펑크 밴드 섹스피스톨즈의 메시지인 ‘미래 없음’(“No Future”)이 보여주는 증오와 분노, 좌절과 실패의 자리를 표시하기도 한다. <더 베어>의 카미는 분명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 하지만 그를 망가뜨리는 바로 그 열정의 총량 자체는 ‘다른’ 방향으로 몸통 전체를 틀 가능성을 품고 있기도 하다. 최근 공개된 시즌3의 최종화에 근접해, 드라마는 지옥 같은 주방에서 “어서요!”(Push!)를 연발하며 못난 ‘남자’처럼 주변 셰프들에게 강압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카미의 얼굴 위로 그의 잃어버린 ‘좋은’ 시절과 관계, 상상할 수 있는 ‘나쁜’ 미래의 장면들이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교차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사수의 강도 높은 ‘훈육’을 온몸으로 소화하며 “인생이 없어졌고” 동시에 “뛰어난 셰프”, 즉 자기 착취적일 중독자이자 끔찍한 보스가 되었다. <더 베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부디 카미가 일을 통해 반복해서 마주하는 고통의 끝에 ‘막다른 길’이라는 선택지만을 남겨두지 않기를, 이런 이상한 세기에 일과 분열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 전체를 대표해 기원한다.

부끄러운 아버지의 초상, 숭고하기보단 아득한 회한으로서의 <희생>

“예술은 인간의 다른 활동과 달리 이기적이지 않아.”(<잠입자>) 정말 그럴까. 적어도 <희생>의 바로 전작인 <노스텔지아>까지의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꽤 그렇게 생각한 듯하다. 15세기 몽골제국의 침략 등 러시아의 온갖 수난을 거치며 <삼위일체>를 그려 인간들의 구원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수도사도, <노스텔지아>의 고르차코프도 촛불 하나를 세상의 온 믿음인 양 소중히 감싸며 무한히 이타적인 예술가의 숭고를 지켜냈다. 타르콥스키가 꾸준히 도스토옙스키류의 ‘약한 인간’을 그려왔다고는 하나, 사실 그 면면을 자세히 살피면 그 인간들은 약한 만큼 동시에 드센 자기만의 숭고를 지켜낸 위인들에 가까웠다. 전세계 관객들이 타르콥스키의 인물에 절절히 감동한 이유도 그들의 약한 듯하면서 위대한 숭고에 있었다. 여기서 숭고란 인간이 도저히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세계의 압도감을 언어화한, 형용할 수 없는 것을 그나마 인간의 말로 옮겨낸 작은 그릇이다. 그런데 솔직히 <희생>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타르콥스키가 그간 그려왔던 인물들에 비해 유독 유약하고 혼란스러워하며 그 끝 역시 그다지 숭고해 보이지 않는다. 세계를 위해, 예술을 위해, 혹은 평화를 위해 아니면 러시아를 위해 한몸 바쳐왔던 지난 작품의 주인공들과 그 결은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알렉산더가 포기한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집뿐이며, 그는 순교자도 희생자도 성인도 아닌 그저 병자로서 구급차에 실려 갔을 뿐인 이상한 노인에 가까워 보인다.알렉산더의 비숭고함 혹은 다분히 인간다움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대목은 그가 어머니의 정원을 기억하며 지난날을 후회할 때다. 그는 어머니의 집을 둘러싼 정원을 괜스레 청소하고 손질하여 “전체를 내 식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결국 그 결과는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자연미라곤 전혀 없는 너무도 추한 풍경”으로 도래했다. 그렇게 알렉산더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조작, 그러니까 자연에 대비되는 예술의 결과를 무척이나 후회하고 불신한다는 부정의 사유를 펼친다. 이것은 <거울>에서 보여줬던 과거의 그리움을 통한 안타까움을 넘어 그때 그 과거를 완전히 회피하고 부정하려는 뒷걸음질로 느껴진다. 언제나 영화예술의 수호자로 불렸던 그가 자신의 예술론에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약함의 연유는 무엇일까. <희생>이란 마지막 성전 그의 마지막인 <희생>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처음인 <이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본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타르콥스키는 전쟁이란 현상을 스크린 위로 대놓고 후경화했다. 영화 속에 폭음이 들려올 때면 화면 저 먼 곳에 실제 반짝이는 낙하물을 보여주면서 사운드와 이미지의 서사적 일치, 그리고 전쟁의 폭격이 영화의 디제시스 안에 존재함을 증명했다. 반면에 <희생>은 외부 세계의 전쟁을 겨우 라디오를 통한 뉴스로만 구성하며 타르콥스키는 사실 바깥의 일에 어느 정도는 손을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솔라리스>의 캘빈이 TV 속의 버튼 보고서를 보며 행성 ‘솔라리스’의 정체를 제대로 믿지 못했듯이 타르콥스키는 미디어너머의 진실을 제대로 신뢰하지 않아왔다. 즉 알렉산더가 외계의 비극과 진실을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자신의 영역에서 배제하려 한다는 인상이 인다. 왜 타르콥스키는 조금은 덜 전투적이고, 약해졌을까. 그의 다른 영화를 빗대어 이러한 상상을 해보면 어떠한가. 마치 세계 바깥 어딘가에 동떨어진 듯한 <희생>의 무대가 <솔라리스>의 마지막에 캘빈이 발견한 재현의 섬이라고 가정한다면, <희생>은 타르콥스키가 재현의 바다에서 구축하고자 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 끝에 그려낸 어떠한 영화적 이상향의 세계인 것이다. 아니면 또 이러한 상상은 어떠한가. <희생>의 좁은 무대가 사실은 <잠입자>에서 이미 세계 멸망의 징후를 겪은 ‘구역’의 과거나 미래라면 <희생>은 타르콥스키가 만든 제3의 SF이자 가상의 영화적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은 <안드레이 루블료프>나 <노스텔지아>, 혹은 <이반의 어린 시절>처럼 리얼리즘의 대지 위에 펼친 숭고의 서사시가 아니라 애초부터 가상의 세계 위에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얹어놓은 자그마한 상상의 사상누각에 불과해진다. 겨우 이 자그마한 오두막, 이곳이 러시아인지 어머니의 대지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타르콥스키만의 내면을 응축한, 그렇기에 이 시공간이 좁고 특정되지 않을수록 이곳은 너무도 개인적이고 사적인 곳으로 구성되며 동시에 타르콥스키의 모든 것이 된다. 통상적인 내러티브가 불가능한 내면적 혼돈의 역장이 필요했다면 <희생>이 보여준 지루함과 불친절한 이야기는 필시 타르콥스키가 가닿아야 했던 내면의 종착역이자 최후의 성전을 남기기 위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처음에서 끝으로, 점차 느리게 찍는 나무 김이석 동의대 교수는 앞선 글의 ‘두 그루의 나무와 두명의 소년’이라는 대목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의 시작과 <희생>의 끝이 절묘하게 감응한다고 크리스 마커의 말을 빌려 말한다. 정성일 평론가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각인> 서문에서 그는 “하늘에서 대지로 내려오는 첫 장면(<이반의 어린 시절>)으로 시작해서 대지에서 다시 살아난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희생>)으로 끝나는 일곱편의 영화”라며 타르콥스키의 수미쌍관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가지 보태고자 하는 흥미로운 사실은 <이반의 어린 시절> 각본에서 발견된다. 각본엔 이반이 “나무에 손을 대려 한다”(He holds out his hand to touch the tree)라는 문장이 명시돼 있지만, 실제 영화를 보면 이반의 손이 나무에 닿는지 혹은 이반의 눈이나 몸, 카메라가 나무를 향해 고꾸라지는지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짤막한 교감만이 일어난다. 반면에 <희생>은 어떠한가. 고센과 나무의 교감은 그 느릿느릿한 카메라의 속도감에 기반한 상승의 지속으로 무척이나 길게 닿아간다. 타르콥스키는 후대의 인간이 진정 나무와 교감하기를, 확대하면 세계의 믿음에 대한 본인의 유지를 이어가기를 <희생>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길게 찍게 된 것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역시 종 만드는 아이를 끌어안는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미지로 끝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어른(타르콥스키)이 아이(아들)와 함께한다는 합일의 이미지로 끝나고 말았다. 타르콥스키의 장대한 필모그래피는 점차 자신이란 예술가의 의미를 내려놓고 결국 고센에게 언어(예술)와 나무(대지 혹은 믿음)를 제대로 물려주기 위한 내려놓음의 과정이자 그 과정을 어떻게라도 천천히 바라보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의 장이다. 그 끝에서 종말의 무대가 된 <희생>은 자연스레 미련과 회한 같은,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미약한 감정들로 가득 차게 됐다. 요컨대 <희생>의 숭고미란 한 예술가의 거대한 희생에서 나오지 않는다. <희생>이란 최후의 성전에서 타르콥스키는 영화의 순교자라든지 성인이라든지 불멸의 시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되고자 한다. 그는 그저 개인적인 바람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희생>의 마지막 자막이 밝히듯 이 영화는 순전히 그의 아들 앤드류사에게 바치는 아버지의 고백이자 연서이자 반성문이며, 이 거대한 예술가마저 결국 아들의 발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가장 보수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인간애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 아버지의 깊은 부끄러움과 한 예술가의 깊은 회한에 다름 아니다. 영화감독이란 지칭, 그간 쌓아왔던 예술의 정원과 집을 희생하면서까지 평범한 한명의 아버지가 되고자 한 고고한 예술가의 부끄럽고 낯 뜨거운 은퇴기에 가깝다. <희생>을 상찬하되 <희생>에 얽힌 신화를 마냥 비장하게만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이유다. <희생>은 타르콥스키의 가장 위대한 영화인 동시에 가장 작고 개인적인, 별것 아닌 포부의 영화다.

가능성이 0에 가깝더라도, 변호사의 눈으로 본 영화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는 역사물인 한편 꽤 진지한 법정물이며, 역사와 법에 관한 여러 논점을 제시한다. 위 논점에 하나씩 답해보며 위 영화가 다루는 역사와 법에 대해 살펴본다. 정치재판과 인권변호사의 역사 한국에 근대적 재판제도가 도입된 이래 정치재판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판에서부터, 독립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의한 정치재판 및 판결로 ①여순사건 민간인 사형 판결(1948년)(2019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 ②진보당 조봉암 사형 판결(1959년)(2011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 ③인민혁명당 사건 사형 판결(제1차 1964년, 제2차 1975년)(2005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영화 <행복의 나라>는 그중 10·26 사건의 박흥주 대령에 대한 재판 및 사형 판결(1979년)을 다룬다. 한국 정치재판의 역사와 함께 인권변호사의 역사도 유구하다. 이들은 법률가로서 취할 수 있던 부와 권력을 마다하고, 그 반대편에서 주로 약자들을 위해 변호했다. 일제시대 3대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김병로, 이인, 허헌 변호사에서 그 전통이 시작되며, 야만적 정치재판이 있을 때마다 이들이 달려와 변호를 맡았다. 10·26 사건 재판에서도 28명에 달하는 변호사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변호인단을 구성했으며, 이들 중 유명한 이들만 꼽아도 한승헌, 이돈명, 강신옥, 홍성우, 황인철, 안동일, 태윤기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재판 도중 보안사에 끌려가 협박을 당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영화상에서 박태주(이선균)를 변호한 정인후 변호사(조정석)의 모델은 위 중 태윤기다. 태윤기는 일제시대에는 광복군으로 참전한 독립운동가였으며, 독립 후에는 가장 험난한 시국 사건을 도맡아 변호한 한국 역사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다. 영화에서 정인후는 인권에는 관심 없고 사기나 치며 살아온 변호사로 묘사되는데, 이는 속물 변호사가 인권재판을 통해 개심한다는, 법정영화 특유의 클리셰를 위해 각색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법정의 서면변론이 미국 법정의 구두변론으로 각색 이 영화가 법정영화의 클리셰를 따른 부분은 또 있다. 영화에서 정인후는 법정을 휘젓고 다니면서 열변을 토하며 모든 변론을 구두로 진술한다. 이는 실제 한국 법정과 다르다. 최근 한국에서도 구두변론이 확대되는 추세지만, 아직도 한국 법정의 변론은 변호사가 재판 전 미리 법원에 제출한 서면에 의해 주로 이뤄지며, 구두변론은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법정영화 자체가 미국에서 꽃피운 장르다 보니, 많은 법정영화에서 (주로 미국 법정의 모습에 따라) 변호사가 청중을 향해 멋진 연설을 펼치고 이에 대역전이 이뤄진다는 클리셰가 형성되었으며, 한국 법정영화도 대부분 이를 차용한다. 그러나 위 클리셰는 미국의 재판이 비법률가인 배심원단이 판결하고 이를 위해 변론도 (배심원단에 호소하기 위해) 주로 구두로 이뤄진다는 특수한 재판 환경에서 성립된 것으로, 이를 배심재판과 구두변론이 중심이 아닌 한국의 법정영화에 그대로 도입하는 것은 왜곡이다. 한국도 2009년부터 형사재판 중 일부에 배심재판(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한국 법정은 판사의 판결과 서면변론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변호인단 리더 이만식 변호사(우현)와 정인후가 재판 도중에야 비로소 서로의 변론 방향이 다름을 확인하고 충돌하는 장면도 실제 한국 법정에서는 일어나기 힘들다. 실제로는 변호인단이 변론 내용을 미리 상호 협의해 이를 기재한 서면을 재판 전에 법원에 제출하고, 변론도 그에 따라 진행하기 때문이다. 비상계엄하 군사재판 단심제(헌법 제110조 제4항)의위헌성 이 영화는 (위 구두변론 외에는) 그래도 당시의 재판을 꽤 충실히 재현하는 편인데, 예를 들어 정인후가 비상계엄하 군사재판 단심제(1심제)는 위헌이라며 위헌제청신청을 하는 장면이 그렇다. 당시 재판에서도 태윤기가 실제 위헌 주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신헌법 제111조 제4항이 규정하던 비상계엄하 군사재판 단심제는 당시부터 위헌성이 지적되어왔지만 현행 헌법 제110조 제4항에 여전히 남아 있다. 다만 그것이 현행 헌법으로 개정되면서 “사형을 선고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는 단서가 달리기는 했지만, 위 단서는 이후 헌법이 사형제를 전제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고 있어 사형제 존폐 논쟁에서도 가장 중요한 헌법 조항으로 언급되며, 위 점들 때문에 지금도 위 조항은 총 130개조의 헌법 조항 중 가장 논쟁적 조항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정진후(실제 모델 정승화)에 대한 증인 신청 영화에서 정인후가 정진후 계엄사령관(이원종)을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퀀스는 꽤 잘 쓰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에 대해서는 그러잖아도 김재규와의 관계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고, 12·12 쿠데타에서 그가 체포된 명목도 그가 김재규의 내란에 가담했다는 점인 만큼, 그가 10·26 사건 재판의 피고인들을 위해 증언을 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실제 재판에서는 애초에 (정승화 관련 사항뿐 아니라) 변호인단의 모든 증인 신청이 기각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당시 태윤기가 실제로 정승화에 대한 증인 신청을 위해 영화에서처럼 온갖 난리를 피웠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피고인을 구하려는 마음이 간절한 변호사라면 그 가능성이 0에 가깝더라도 정진후에 대한 증인 신청은 포기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 시퀀스는 정인후가 총력을 다해 박태주를 구하고자 하는 지극히 간절한 성심성의를 잘 표현해낸 (법정물적으로) 좋은 각색이라고 생각한다. 박흥주의 내란목적살인 유죄 여부 김재규 유족의 재심 신청 가. 신군부의 외압에 의한 불법 재판 당시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피고인들의 행위가 내란목적살인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당시 박흥주는 제1심에서 내란목적살인죄 등이 확정된 후 3개월 만에 총살되었으며, 나머지 피고인 5인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위 행위가 내란목적에 해당한다는 대법관 8인과 단순 살인에 불과하다는 대법관 6인의 의견이 대립했고, 다수결에 의해 내란목적살인 유죄 등이 선고되어 위 피고인들은 위 판결 후 3일 만에 사형당했다. 재판에는 당시 이미 외압의 정황이 완연했다. 피고인들의 행위가 단순 살인이라는 위 소수의견은 당시 보도가 금지되었고, 위 소수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은 판결 후 약 3개월 만에 모두 보안사의 강요로 대법관을 그만두어야 했다. 영화에서도 표현된 것처럼, 당시 신군부는 위 피고인들을 반역자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당시 독재자이던 박정희를 살해한 위 피고인들을 영웅시하는 여론이 대두하고 있었고,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 목적을 위해 위 피고인들을 조속히 역사에서 지워버릴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원의 법 해석에 따를 때, 내란 성립에는 국헌 문란의 목적 및 국토의 참절ㆍ폭동이 필요하다. 국헌 문란은 국가의 통치기구를 폭력으로 파괴ㆍ전복하는 것이고, 참절ㆍ폭동은 다수 군중을 동원한 국토 점거 및 국가 주권 행사 배제 행위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위 피고인들의 행위는 내란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보이며, 당시 내란 행위를 한 이들은 따로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7년에 대법원에서 내란죄 유죄가 확정되고,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적반하장으로 법원을 겁박해 위 피고인들을 내란죄로 사형시킨 것이다. 나. 재판 녹음테이프 공개와 재심 신청 2020년에 김재규의 유족은 법원에 위 재판에 대한 재심을 신청했다. 취지는 김재규에게 내란목적이 없었음을 밝힌다는 것이다. 재심 개시를 위해서는 무죄 입증의 신규 증거가 제출되어야 하는데, 당시 보안사가 재판 전체를 녹음한 53개 분량의 테이프가 2020년에 비로소 유출되어 법원에 제출되었으므로, 재심 개시는 유력해 보인다. 위 녹음테이프를 통해 보안사가 당시 재판정의 바로 옆방에서 재판을 감시하고 지시 쪽지를 법관들에게 보내는 등 불법 재판을 진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법원은 올해 7월 재심 개시 결정을 위한 심리를 마쳤고 재심 개시 결정을 앞두고 있다. 재심이 개시된다면 전술한 대로 내란목적살인은 무죄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 박흥주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데 박흥주의 유족이 재심을 신청한다면, 영화에서 언급한 대로, 상관의 강요된 명령에 대한 복종 의무에 의해 박흥주가 무죄가 될 가능성이 있을까? 그러나 ①위법한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 판례이며 당시 박흥주의 행위는 실정법 위반이었다는 점 ②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나, 김재규가 제시한 민주주의를 위한 행위라는 대의에 박흥주도 일정 부분 공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강요된 행위라고 보기 힘들다는 점 등을 볼 때, 강요된 명령에 의한 행위로 무죄를 받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만 전술한 대로 재심시 박흥주의 내란목적살인 부분 자체는 무죄가 되고 단순 살인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재심을 신청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만약 당시 재판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면 박흥주는 사형을 당하지 않고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더 많은 사람을 살해한 전두환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박흥주 대령에게 합당한 명예 복권이 이뤄지길 바라본다. 정치재판을 꽤 성공적으로 고증한 법정물 이 영화는 다양한 재판제도와 법적 쟁점들을 영화에서 자연스럽게 다루면서 (위 구두변론 중심을 제외하고는) 고증 오류로 거슬리는 부분도 거의 없는, 법정물로서 꽤 성공적으로 쓰이고 연출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역사물로서 10·26와 12·12를 잇는 가교가 되고 싶어 한 것처럼, 향후 이를 계기로 나올 또 다른 진지하고 성공적인 법정물을 위한 가교가 되기를 바란다.

[Masters’ Talk] <트위스터스> 정이삭 감독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 엄태화 감독이 묻다, 정이삭 x 엄태화

<트위스터스>의 주인공들에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은 조금 다른 의미로 들릴 것이다. 그들은 재해로부터 도망칠 수 없어 순응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그 불가피한 속성 자체에 매료된다. 토네이도가 새긴 트라우마에 반문하듯, 끝내 돌풍을 길들여보겠다는 패기로 무장한다. 재난물로서 <트위스터스>가 딛고 선 지대는 이렇게 정서적으로 풍요로워진다. 자연을 향한 경외가 드라마를 추동할 뿐 아니라 스펙터클을 지탱하는 감각으로서도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이 특별함에 반응해 정이삭 감독에게 대화를 청한 이가 있다. 지난해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한국 재난영화의 새 챕터를 연 엄태화 감독이다. 마침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재밌게 봤다는 정이삭 감독이 내한 일정 중 엄태화 감독과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유사한 소재를 채택했음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쌓아올린 서로에 대한 지지를 바탕으로 질문을 주고받았다. 지진과 토네이도, 대립과 협업, 안티히어로와 히어로. 비슷한 고민을 통과해 색다른 결과를 낳은 이들의 만남에 LG OLED TV가 함께했다. 감독의 의도를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는 LG OLED TV로 각 영화의 장면들을 확인하며 대화를 나눈 덕분에 ‘마스터스 토크’도 한결 생생해졌다. 엄태화 <트위스터스>를 얼른 극장에서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밌게 봤습니다. 기존의 재난영화들보다 인간이 좀더 보이는 재난영화였어요. 그 점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정이삭 저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어요. 영화관에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작은 화면으로 봐도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무척 영리한 영화인 동시에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어요. 저는 이병헌 배우를 정말 좋아하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의 퍼포먼스가 그가 보여준 최고의 연기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배우들의 연기력을 이끌어낸 감독님도 대단하세요. 무엇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라서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두 사람 다 전작은 아주 개인적인 영화였고, 근작은 더 블록버스터 타입의 영화라 할 수 있죠. 어떻게 보면 평행 이론처럼 비슷한 행보예요. (웃음) 독립영화를 해오다 이제는 큰 스튜디오와 작업을 하니까요. 엄태화 감독님의 경험도 궁금하네요.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같은 대규모 영화작업은 어떠셨나요? 엄태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작업이 전작과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작품의 규모가 커지고, 유명한 배우들이 나온다는 변화는 있었지만 본질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있었으니까요. 오히려 프로페셔널한 스태프가 많아진 덕에 현장이 빠르게 돌아가서 제가 할 일이 좀 줄어든 것 같았어요. 정이삭 저 또한 <트위스터스>가 <미나리>와 근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느꼈어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작업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스태프가 많아지면서 모두의 이름을 외우기 어려웠다는 아쉬움은 있어요. 예전에는 소규모로 촬영해서 모두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우리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처럼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죠. 엄태화 사실 <미나리>를 만든 감독님이 이렇게 큰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처음에는 변화가 되게 크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트위스터스>를 보고 나서는 이 영화도 결국은 전작과 같은 선상에 있는 영화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정이삭 감독님이 그런 유사성을 발견해줘서 기뻐요. 요즘 인터뷰를 할 때마다 첫 번째로 받는 질문이 어떻게 <미나리>에서 <트위스터스>로 넘어왔냐는 거예요. 프로듀서들과 스튜디오는 제 스타일대로 <트위스터스>를 찍어달라고 했어요. 그렇게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제안을 수락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님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찍으면서 그런 자유를 느끼셨나요? 아니면 좀 다른 종류의 부담을 느끼셨나요? 엄태화 저도 운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전형성에서 벗어난 이야기임에도 같이 작업하는 분들이 제 의도를 이해해줘서 꽤나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큰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인 데다 여름에 개봉하는 텐트폴 영화라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관객들은 결국 좋은 영화를 알아본다는 믿음을 갖고 작업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이삭 한국 극장가의 여름, 가을 관객 성향은 다른 편인가요? 엄태화 예전에는, 특히 팬데믹 이전에는 여름 시장의 파이가 훨씬 컸어요. 가장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영화들이 그때 많이 개봉했고, 파이가 크다 보니 관객이 나뉘어도 큰 숫자였는데 코로나19를 겪고 나서는 관객 성향이 바뀐 것 같아요. 단순히 유명 배우가 나온대서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를 찾아보면서 자신이 재밌게 볼 영화인지 아닌지 미리 판단한 다음에 극장에 가는 듯해요. 그래서 여름에 개봉한다고 관객수가 더 많은 것 같지도 않고, 비수기에 개봉하더라도 입소문이 나면 관객이 많아지죠. 정이삭 한국 관객들은 굉장히 세련됐네요. 물론 미국에서도 모두가 좋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만 여름 시장은 그래도 좀 특별해요. 방학 시즌이라 가족들이 함께 극장을 찾는 문화가 있거든요. 저는 이 영화가 여름에 개봉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좀더 재미에 초점을 맞춘 오락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어요. 제가 어렸을 적 여름에 극장을 찾아 감상했던 그런 블록버스터영화처럼요. 어떻게 보면 <미나리>와는 다른 관객을 염두에 뒀던 것 같아요. 그런 ‘여름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제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어요. 과학적으로 정확하면서 오락적으로 훌륭하게 정이삭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촬영 기간은 어느 정도였나요? 엄태화 4개월 반 정도, 80회차 촬영했던 것 같아요. 정이삭 저희는 60일간 촬영했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에선 촬영 기간이 더 짧은 편이죠. 한국은 촬영 기간이 길어져도 스태프들이 열심히 한다고 들었어요. 세트는 직접 지었나요? 로케이션 촬영은 어느 정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엄태화 올 세트 촬영이었고요, 3층까지만 아파트를 지어놓고, 그 위쪽은 CG로 연장했어요. <트위스터스>는 어땠나요? 마지막에 나오는 마을 같은 경우는 세트였나요? 정이삭 그 마을은 실제로 존재하는 마을이에요. 저희는 대부분 로케이션 촬영을 했어요. 영화관이나 헛간의 경우 세트가 필요하긴 했지만 운전 장면을 포함한 대다수의 장면을 야외의 실제 장소에서 찍었죠. 솔직히 촬영 중에 배우들에게 토네이도에 대해 설명하기가 까다로웠어요. 그냥 토네이도가 엄청 클 거라고만 말했는데 배우들 입장에서는 토네이도가 어떻게 구현될지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저는 배우들에게 토네이도가 무척 공포스러울 테니 큰 동작으로 과장해도 좋다고, 저를 믿고 연기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결국에는 배우들도 결과물에 만족한 것 같아요. 파란 하늘 아래서 완벽한 날씨를 만끽하며 촬영했음에도 토네이도에 겁먹은 표정을 제대로 연기해냈으니까요. 엄태화 아, 그렇죠. 그때가 되게 어려운 것 같아요. 최종적인 그림은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데 그걸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설명하고 설득시켜야 한다는 게 어렵죠. 정이삭 맞아요. 어려운 동시에 아주 재밌는 작업이죠. 어떻게 보면 감독은 대의를 알고 있잖아요. 모두가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지 아는 거죠. 그래도 <트위스터스>에 참여한 많은 아티스트들은 이 영화에 대해 훨씬 더 큰 꿈과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VFX 전문가들이나 배우들이 의견을 냈을 때 제작진이 그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순간들이 참 좋았습니다. 저 혼자 우리 영화의 비전을 설파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제안할 수 있는 것이요. 엄태화 오클라호마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도 현실적이었어요. <미나리>에도 나오지만 감독님도 예전에 토네이도를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정이삭 <미나리>에서는 한 가족이 농장으로 이사를 가잖아요. 그리고 한밤중 토네이도가 들이닥칩니다. 이사 간 지 2주 후일 거예요.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일이죠. 어렸을 적의 개인적인 경험을 영화에 그대로 투영했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4살 정도 됐을 때인데 부모님이 저와 누나를 차에 태우고 토네이도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운전해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이 제법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제가 자라는 동안 토네이도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였던 거죠. <트위스터스>의 배경인 아칸소, 오클라호마의 풍경과 그곳의 사람들, 음악, 농장의 일거리들이 다 제 기억의 일부예요. 그래서 <트위스터스>에도 그것들이 그대로 반영됐어요. 엄태화 그곳 사람들의 무드, 공기 냄새까지 전해져서 토네이도가 더 무섭게 느껴졌어요. 정이삭 실제 토네이도를 보면 그야말로 장엄하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어떤 사람들은 옛날 중세 유럽에서 토네이도를 본 사람들이 토네이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고안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해요. 미국에는 이런 토네이도를 추격하는 마니아들의 문화가 있는데 용처럼 특이한 존재를 쫓아가보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겠죠. 저도 꽤 흥미를 느꼈습니다. 토네이도에 관한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꼈고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었죠. 한때 토네이도 영상을 너무 많이 봤답니다. 보기에 놀라워서 그랬을 뿐 아니라 매우 영화적으로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저는 <트위스터스>를 이런 영화적인 장면들로 채울 뿐 아니라 관객들이 가능한 폭풍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자연에 경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요. 영화에 등장하는 ‘폭풍을 쫓는 자들’(stormchaser)이나 토네이도와 관련한 문화도 최대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실제로 폭풍을 찾아다니는 분들을 섭외해 영화에 출연시켰죠. 과학자들의 자문도 받았고요. 실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토네이도를 따라다니고 연구하며 느낄 법한 흥분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 감정을 묘사하는 것에 충실하면서도 액션영화로서 관객에게 롤러코스터 타는 듯한 재미를 주려 노력했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자료조사를 했죠. 과학적으로 정확한 동시에 오락적으로 훌륭한 영화여야 했으니까요. 엄태화 그래서 <트위스터스>의 토네이도에서 다른 재난영화에서 봤던 토네이도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나봅니다. 그 지역을 정말 잘 알고 묘사했기 때문에 토네이도를 다른 방식으로 체감할 수 있었어요. 정이삭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일상이 흘러가는 와중에 토네이도와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우리의 실제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지 않나 싶어요. 이런 종류의 인간사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고 우리 삶에는 그런 예시들이 많다고 생각해요. <트위스터스>로 한국에 온 제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한국에서 보는 풍경은 모두 특별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자주 본 풍경이겠죠? 저는 영화가 이런 일상 속 특별함을 더 많이 조명했으면 좋겠어요. <트위스터스>를 통해 제가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 그런 시선을 내포한 영화를 만들 수 있어 정말 좋았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찍을 때도 지진이나 재난이 발생할 때 인물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연구할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엄태화 한국은 사실 재난이 이렇게까지 큰 규모로 일어나는 나라는 아니다보니 지진이나 토네이도 같은 소재가 판타지로 읽히는 경향이 있어요. 저도 애초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만들 때 자연재해보다는 사람들이 만든 재난에 좀더 초점을 맞추려 했고, 지진 자체는 인물들을 더 극단적으로 몰아가기 위한 환경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했죠. 그럼에도 지진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가짜처럼 보이면 안됐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많이 조사했어요.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일본에서 개봉할 때쯤 일본에 실제로 지진이 일어난 상황이었어요. 일본 관객에게는 이 영화가 다르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지점이 있었죠. 감독님도 <트위스터스>를 찍으면서 실제로 토네이도를 겪은 분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정이삭 네, 그 부분을 굉장히 많이 고민했어요. 영화는 2024년에 개봉하기로 했는데 그때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잖아요. 촬영은 2023년에 했는데, 상대적으로 토네이도가 많이 발생한 해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내년이나 향후 몇년은 토네이도가 잦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영화에 접근했습니다. 특히 토네이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이 겪는 여러 감정적인 문제들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존중하는 자세로 임했죠. 저희가 그런 부분을 영화의 재미를 위해 이용하는 게 아니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듬는 태도로 영화를 찍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확실히 올해는 토네이도로 인해 많은 사람이 힘들었어요. 전세계적으로 올해가 재난으로 인한 재산 피해가 가장 심각하다는 뉴스가 있을 정도로 많은 피해가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엄태화 그런데 <트위스터스>의 주인공들은 기존 재난물의 주인공들과 다르게 다가오는 재난을 피하는 게 아니라 쫓아가잖아요? 그런 태도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걸 평생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라는 대사로도 표현되는데, 토네이도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게 좋은 소재로 쓰이지 않았나 싶어요. 살다 보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이해하기 힘든 고통을 인간의 입장에서 영화 속에 담으려고 한 게 느껴졌어요. 정이삭 말씀하신 것처럼 미국은 재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고 그게 제가 <트위스터스>를 작업해보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해요. 이 영화는 두려움이라는 문제를 흥미로운 시각으로, 젊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 봤거든요.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트라우마와 불안감과 공포를 겪고 있어요. 알다시피 재난영화는 우리 사회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하나의 흥미로운 방법이에요. 물론 감독님께서 한국은 재난이 많지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재난영화가 한국에서 인기가 는 이유는 관객들이 영화 속 재난이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말 그대로의 재난이 일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재난이 일어날 수 있잖아요.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표현력이 좋았어요. 힘없는 사람들의 시각에 집중하면서 힘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방식이 특히 좋았어요. 마지막에는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보여주며 누군가가 주인공에게 음식을 주고, 살아 있으면 살아가도 된다고 말하잖아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어요. 우리는 감독으로서 영화를 찍을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영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죠. 그 장면들이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게 우리가 스토리텔러로서 가진 아름다운 재능 아닐까요? 그래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엔딩이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양면성에 이끌리다 엄태화 이번에 1996년작 <트위스터>를 다시 찾아봤는데, 물론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장르적인 표현이 더 메인이 된 영화 같더라고요. 그런데 <트위스터스>에는 장르를 뚫고 나오는 무언가가 있어요. 주인공 케이트(데이지 에드거존스)는 남자 친구를 앗아간 토네이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토네이도에 접근하다 나중에는 토네이도를 자신의 삶에서 함께 가야 할 존재로, 보듬어야 할 존재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렇게 인물이 한발 더 나아간다는 지점이 좋았어요. 정이삭 물론 저도 장르물로 즐길 수 있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예를 들어 <트위스터스>도 모험영화이자 재난영화고 관객의 시선에 따라 일종의 괴수물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인간의 내면을 깊게 건드리는 영화도 좋아해요.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말하고자 영화를 찍은 게 아니라 제가 느끼는 인간성을 영화로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 또한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지점이 있더라고요. 사람들과 그들이 겪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강렬하잖아요. 제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런 거였어요. <미나리>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보여준 것처럼 <트위스터스>도 재난물이라는 맥락에서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원리로 인간을 보여주려 했어요. 엄태화 <트위스터스>는 재난 자체의 스펙터클 또한 리얼해서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장르적인 매력이 있는 영화죠. 정이삭 고민이 많았어요. 첫 시퀀스만 해도 시나리오상에 설명이 이렇게만 적혀 있었어요. ‘토네이도가 보인다.’ (웃음)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영화가 시작할 때는 토네이도를 보여주지 않아야 더 임팩트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엄 감독님이 얘기한 것처럼 VFX는 항상 예산의 압박을 받죠. 그런데 이런 제약은 창의력을 돋우는 긍정적인 한계라고 느낍니다. 예를 들어 <트위스터스>의 프로듀서로서 함께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죠스>(1975) 촬영 당시의 이야기를 곁들여 <트위스터스>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는데 <죠스>를 위해 제작한 상어 모형이 갑자기 작동을 안 하더래요. 그래서 영화에서 상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덕분에 영화를 더 재밌고 무섭게 하는 창의적인 장면들이 탄생한 거죠. 엄태화 저도 스필버그의 조언을 받아보고 싶네요. (웃음) 각색 이야기도 여쭤보고 싶었어요. 원작 <트위스터>에서는 선악 구도가 분명했는데, <트위스터스>는 이걸 조금 흐릿하게 표현하면서 재난과 인간의 관계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 것 같아요. 어떻게 작업했나요. 정이삭 모든 게 자연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봤어요. 토네이도조차 완벽히 나쁘다고만 할 수 없죠. <트위스터스>의 테릴린 슈롭샤이어 편집감독이 말해준 아프리카 속담이 있어요. ‘물에게는 적이 없다.’ 물이 인간에게 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도움을 주기도 한다는 뜻이죠. 자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 속 토네이도 또한 인간이 사랑하고 경외할 수 있는 존재예요. 동시에 파괴력 있는 공포스러운 존재이기도 하죠. 그 양면성에 끌려서 <트위스터스>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이 영화 속 인물들이 태풍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흑백으로 나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구든 위험할 수도 있지만, 선할 수도 있고, 세상에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보여준 인간성의 반전이 마음에 들었어요. 예를 들어 이병헌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는 안티히어로에 가깝지만 감독님이 여러모로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 영화에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엄태화 그 점을 가장 신경 쓰면서 만들었던 것 같아요. 또 하나 무척 궁금했던 부분인데, 원작에서는 클라이맥스에 영화 속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작품이 <샤이닝>(1980)이죠. 잭 니컬슨이 막 도끼질을 하는 장면에서 컷이 넘어가잖아요? 이번에는 영화 속 영화를 <프랑켄슈타인>(1931)으로 바뀌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였을까요? 정이삭 영화 속 마지막 토네이도가 마치 괴물 같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형체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괴수물처럼 느꼈고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오마주를 하고 싶어서 선택했어요. 재밌게도 <프랑켄슈타인> 속 사운드와 대사를 <트위스터스>에서도 실시간으로 사용했어요. <프랑켄슈타인>과 저희 영화를 동시에 재생하면 소리가 일치하는 장면이 생기는 거죠. 조금 다듬기는 했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사운드를 <트위스터스>에서도 최대한 비슷하게 유지하려고 했어요. 엄태화 어떻게 보면 <프랑켄슈타인>도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이야기잖아요. 그게 토네이도에 도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하고 겹쳐서 흥미로웠습니다. 정이삭 <트위스터스>는 인간의 오만함 또한 다루고 있어요. 토네이도를 파괴하려는 캐릭터들의 오만뿐 아니라 토네이도가 생겨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는 인간의 오만을 포함하죠. 전세계의 기상이변은 여러모로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잖아요. 엄태화 그리고 <트위스터스>에서 원작에서 나온 분과 비슷한 캐릭터 한명을 제가 발견했어요. 모자와 헤드폰을 끼고 앤서니 라모스 배우 옆에 있던 캐릭터요.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은 배역처럼 보였는데 깨알같은 재미를 주더라고요. 정이삭 스콧 역의 데이비드 코런스 배우예요. 데이비드는 <트위스터스> 촬영 기간에 차기 슈퍼맨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어요. 제임스 건 감독이 연출하는 다음 <슈퍼맨>의 주인공이죠. 그런데 우리 영화에서는 악역에 가까운 연기를 했어요. 시나리오상에서 스콧은 아주 작은 배역이었지만 데이비드가 여러 아이디어를 내면서 연기한 덕분에 역할이 점점 커졌어요. 그가 보여준 것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죠. 그는 <트위스터스>를 촬영하는 동시에 <슈퍼맨> 오디션도 봤는데 그 또한 아주 재밌었어요. 그가 마침내 슈퍼맨으로 캐스팅되었을 때 모든 배우들이 신났답니다. 다 같이 환호하며 그 순간을 영상으로 남겼고 정말 즐거웠어요. 엄태화 배우들 얘기를 더 여쭤보고 싶어요. 타일러 역의 글렌 파월은 <탑건: 매버릭>에, 케이트 역의 데이지 에드거존스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출연하면서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약간 생소한 배우들이기도 하거든요.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지, 캐스팅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요. 정이삭 우리 배우들은 지금 미국에서 굉장히 잘 알려진 배우들이에요. 저희가 캐스팅을 하던 지난해까지만 해도 엄청 유명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배우로서는 굉장히 인정받고 있었죠. 앤서니 라모스는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 개봉을 앞두고 있었고, 글렌 파월은 <탑건: 매버릭>으로 이름을 알렸어요. 그의 다른 출연작인 <페이크 러브>나 <히트맨>은 공개되기 전이었죠. 우리가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앤서니가 주연한 <트랜스포머: 비스트의 서막>이 개봉했는데 앤서니가 큰 영화에서 활약하는 걸 봤고 글렌의 작품도 공개 후에 굉장히 잘됐어요. 그러면서 그의 인지도와 인기가 많이 올라갔고요. 데이지 에드거존스는 TV시리즈로 잘 알려졌고 몇편의 좋은 영화에도 출연했어요. 그래서 <트위스터스>가 아직 슈퍼스타로 호명되지 못한 스타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어요. ‘아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슈퍼스타가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진짜 멋진 점은 스튜디오도 할리우드의 미래가 될 엄청난 재능을 가진 이 배우들에게 진정으로 투자하고 싶어 했다는 거예요. <트위스터스>는 그들이 얼마나 놀라운 배우인지 증명하는 장이었어요. 이 영화를 통해 미국 관객에게 이들이 할리우드의 미래 스타라는 인식이 확고해졌으면 좋겠어요. 이들이 보여줄 미래가 몹시 기대돼요. 엄태화 덕분에 장르적인 재미뿐 아니라 사람이 보이는 영화로 완성된 것 같아요. 관객들도 극장에서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영화입니다. 오늘 감독님과 대화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정이삭 저도 엄태화 감독님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트위스터스>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엄태화 감독님은 재능이 무척 많으니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인간적인 영화들을 통해 한국은 물론 전세계 영화계를 위해 많은 역할을 해주리라 기대합니다. 감독님과 재난과 인간성에 대해 대화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감독님의 행운을 빕니다!!

[인터뷰]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이 싫어서> 배우 고아성

4인 가족의 장녀이자 20대 직장인 계나(고아성)가 바라는 건 단 하나다. 춥지 않은 것. 그러나 겨우내 패딩을 입고 지내야 하는 냉골 집,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드는 애인(김우겸)의 중산층 가족, 의견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회사는 줄곧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게끔 한다. 이렇게 살다가는 결국 얼어서 부서질까봐 그는 홀로 뉴질랜드 이민행을 택하지만 한국을 떠난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순탄한 길로 들어설 리 없다. 낯선 땅에서 따뜻한 햇볕과 살랑이는 바람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아득한 미래가 주는 불안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여전히 몸을 옹송그린다. 배우 고아성은 종착점을 지정하지 않고 과정에 표류하기를 자처한 영화에서 중심을 잡되 의도에 맞는 연기로 작품과 관객을 연결해냈다. 인터뷰로 만난 그는 계나처럼 양팔로 몸을 감싼 채 말하는 모습이 언뜻 추워 보였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가 지금 얼마나 열의에 차 있는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 영화계 대표 애서가로서 <한국이 싫어서>를 원작 소설로 먼저 접했을 것 같다. =그렇진 않았다. 외출 중에 장강명 작가님의 <한국이 싫어서>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마침 서점 근처라 곧장 서점에서 소설을 샀고 바로 읽었다. 한자리에서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하루 만에 다 끝냈다. 그리고 다음날 시나리오를 읽었다. ‘소설의 이 부분은 살았구나. 이 대목은 영화적으로 더해졌구나’ 하면서 조금 색다르게 접근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재미있는 이틀이었다. 외적으로는 시나리오 표지에 적힌 ‘35고’가 준 임팩트가 컸다. 얼마나 인상적이었냐면 장건재 감독님과의 첫 미팅 때 “35번 수정하시면서 정말 힘드셨겠다”라는 말씀을 먼저 드렸을 정도다. 그러자 감독님이 “재밌었어요”라고 한마디 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시는 모습이 믿음이 갔다. 그때 출연을 마음먹었던 것 같다. - <한국이 싫어서>는 인물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유보적인 주인공인 계나의 톤 앤드 매너를 잡는 게 어렵진 않았나. =처음에 세운 기준 같은 게 있다면 한국을 탈출해야 한다는 계나의 주장을 관객에게 100% 납득시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타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더 힘들 거라는 주장과 팽팽하게 갈리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애초 설득의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계나가 맞부딪히는 상황과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계나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남녀노소 누가 봐도 지금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캐릭터여야 한다”라는 감독님의 말씀을 부표로 삼기도 했다. - 그럼에도 뉴질랜드 이민이 계나가 말하듯 “외국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는 걸 초반에 분명히 짚어준다. 계나가 한국을 뜰 결심을 토로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내레이션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데 녹음 당시 어떤 감정을 담고자 했나. =소설을 읽었을 때부터 핵심이라고 생각한 건 계나가 마냥 착한 여자주인공도 경쟁적인 한국 사회의 피해자 역할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잡은 계나의 상(像)이 자신의 필요와 판단하에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자였다. 그만큼 계나의 주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신경 쓰며 녹음했던 기억이 난다. - 한국에서의 계나와 뉴질랜드의 계나의 외형적, 감정적 차이를 크게 두지 않은 건 어떠한 판단에서였나. =계나가 서서히 변화해 나가는 게 또 다른 핵심이라고 봤다. 그럴 수 있도록 연출팀에서 세심히 신경 써주셨다. 한국에서의 시간-뉴질랜드 도착 한두달차-정착 3년 후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기간별로 정리해주셔서 거기에 맞춰 계나의 영혼과 육체를 잘게 쪼개서 준비했다. - 후반부 롯데리아 신이 극 중 가장 독특한 계나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계나는 어쩌면 유령인 동기 경윤(박승현)을 보고 처음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계나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신을 풀어나가려 했는지 궁금하다. =그 신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가장 끌리고 찍고 싶었던 신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너무너무 복잡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런 채로 현장에 갔는데 신기하게도 승현 배우와 호흡이 잘 맞았고 우리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원활하게 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 순간을 믿고 느끼는 대로 움직였다. 영화를 오래 하면서 언어화할 순 없지만 인물의 감정을 정확하게 느낀 순간을 정말 많이 만났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8호실에서 나 혼자만 정면을 바라보는 신을 찍을 때도 그랬다. 그러한 알 수 없음, 복잡함을 관객 분들이 항상 풀어주셨다.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에서 그분들의 해석을 경청하고 있다 보면 행복하고 영화하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 등장인물이 돌아가며 행복을 정의한다. 성공, 춥지 않은 날씨. 미세먼지 없는 대기, 가족의 건강, 과대평가된 개념까지 실로 다양한데 고아성 배우의 행복론을 들려준다면. =편집된 장면 중에 행복을 돈에 비유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행복에는 성취했다는 한때 기억에서 행복이 계속 흘러나오는 ‘자산성 행복’과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순간순간 행복을 창출해야 하는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다”는 소설 속 대목이다. 계나도 나도 후자가 맞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 어느 날의 영광에서 느끼는 행복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져서 매일 내가 보고 싶은 사람과 연락하고 읽고 싶은 책을 찾고 좋아하는 것들을 주변에 두어야 한다. 최근에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는 동안 확실한 행복을 느꼈다. - ‘연기가 싫어서’라고 느낀 적이 있나. =싫다기보다는 힘든 순간이 매번 있다. 뜻대로 안돼서 속상한 때도 너무 많고. 그럼에도 여기서 탈출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현실에 잘 맞춰 어떻게든 해내는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 1990년대에 태어난 30대 한국 여성, 집에선 막내딸이자 밖에선 20년차 직업인인 고아성 배우에게 지금 한국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 =너무 덥다. (웃음) 이렇게 더운 날과 겨울의 그 추운 날을 한해에 겪어내는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심한 양극화는 비단 날씨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극과 극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 계나 그리고 이미례 인턴(<오피스>), 이자영 사원(<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서혜영 조사관(<트레이서>)이 한 회사에 다니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봤다. 차기작 <파반느>의 미정 역시 직장인인데 미정은 고아성의 그동안의 직장인과 어떻게 다를까. =백화점 직원 미정은 말하자면 미생물이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 미생물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거다. <파반느>를 찍는 동안 10kg 정도 찌웠다. 이종필 감독님의 요청은 아니었고 내가 그러고 싶었다. 그동안 스크린에서 숱하게 보인 모습과 카메라 앞에서의 마음가짐이 이번에는 좀 달랐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인터뷰] 이방인의 시간을 통과한 뒤에, <한국이 싫어서> 배우 주종혁

자신이 가장 잘할 만한 작품을 만날 기회가 배우에게 몇번이나 찾아올까. 배우 주종혁에게 <한국이 싫어서>는 그런 자신감이 들게 한 영화였다. 극 중에서 그가 분한 재인은 3년 전, 학벌 중심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20대 한국 청년이다. 정착한 뉴질랜드에서 이민 온 계나(고아성)를 만나 우정 어린 누나, 동생 사이가 된다. 한 사람을 외형으로 결론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의미심장한 역할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 뉴질랜드로 건너가 5~6년간 유학 생활을 한 주종혁은 머릿속으로 추억의 사진 앨범을 한장 한장 넘기며 시나리오를 읽었다. 그 시절에 보았던 풍경, 만났던 사람, 느꼈던 감정을 모두 끌어내 자기만의 재인을 만들어냈다. - 첫 등장에서 놀랐다. 빨간 머리에 돌려쓴 스냅백, 반바지에 조리샌들 차림이 <만분의 일초>의 진중한 검도 선수 재우와는 천양지차더라. 무엇보다 재우는 눈으로 말하는 캐릭터였는데 재인은 독특한 선글라스로 눈을 가려버려 더 다르게 느껴졌다. = 선글라스는 개인 소장품이었다. 힙한 브랜드에서 나온 재밌는 디자인의 제품이라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재인에게 딱 맞아 보여 구매했다. 캐릭터를 처음 소개하는 신에서 눈을 가린 채 등장하면 재인의 독특한 면이 확 살 것 같아 감독님에게 제안했는데 좋아하면서 오케이해주셨다. 헤어, 의상 등 재인의 외형은 뉴질랜드 유학 시절에 내가 본 친구들의 개성 강한 스타일을 반영했다. - 경험적, 성격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 재인을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릭터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기회에 자신을 재료로 활용하고자 했나,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경계했나. = 확실히 전자였다.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많이 한 생각이 ‘유학 시절에 나는 어땠지?’였다. 당시 내가 외국 친구들을 어떤 자세로 대했고 이방인으로서 어떤 불안감을 느꼈는지 계속 곱씹었다. 생각이 단순하지만 자기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나갈 줄 아는 재인이 나와 비슷해서 오버랩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 땐 영어 잘하는 체육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그쪽을 준비했고 좀더 나이 들어서는 내 이름을 건 호텔을 짓고 싶어 대학에서 호텔경영을 전공했다. 캐릭터라이징하면서 내 삶을 한번 돌아볼 수 있었다. 아마도 재인은 내 인생을 한번 정리해준 캐릭터로 남지 않을까 싶다. - 그만큼 시나리오 한줄 한줄이 쉬이 넘어갈 수 없었겠다. 가장 공감한 대목이 있다면. = 계나가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는데 버퍼링이 걸려 “괜찮아” “잘 지내” 같은 안부 인사가 끊겨 들리는 부분이 특히 슬펐다. 가족들이 보고 싶은 마음을 나도 잘 아니까. 기댈 곳 없이 혼자가 됐다는 외로움이 재인에게 자연스레 묻어나길 바랐다. - 촬영차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감흥은 주종혁 배우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언젠가 한번쯤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왠지 용기가 안 나서 주저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그동안 왜 그랬나 싶더라. 운명처럼 촬영지가 내가 다닌 대학이 있는 오클랜드였던 터라 쉴 때 대학을 방문해 추억 여행을 했다. 신호를 기다리다가 고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땐 정말 행복했다. 원작에서 호주였던 배경이 뉴질랜드로 바뀐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웃음) - 비하인드가 궁금한 장면이 있다. 생일 파티 뒤 계나와 담배를 나눠 피우는 담벼락 신은 감독이 배우에게 일임한 신이었나. 유달리 즉흥연기의 날것 같은 느낌이 났다. = 대본대로 했다. (웃음) 그런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알겠다. 그 신을 찍으려는데 마침 동네에 태풍이 와서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불었다. (고)아성이도 나도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몸을 제대로 가누느라 애먹었던 기억이 난다. 촬영도 어떻게든 주어진 시간 안에 해내느라 정신없었다. 촬영 후반에 찍은 신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달간 뉴질랜드에서 숙소 생활을 하면서 출연 배우들과 가족같이 지냈다. 휴차 때 여행도 하고 스티커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아무래도 우리가 돈독한 사이라는 게 스크린에서도 드러났나 보다. - 친한 배우 동료들과 연기 스터디를 시작한 지 1년쯤 된 걸로 알고 있다. 실전에서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고 있나. = 애초에 어떤 결과를 바라고 스터디를 꾸린 게 아니라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서로 바빠서 정기적으로 진행하지는 못하지만 일단 모이면 초빙한 선생님에게 여러 가지 연기 테크닉을 배우고 그걸 바로 적용해보는 훈련을 함께해나가고 있다. 연기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연기 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어서 친한 친구들과 진지하게 연기 연습을 하는 게 오글거릴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몰입도 잘되고 친구들의 새로운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앞으로도 이 스터디로 최고의 배우가 되겠다는 욕심 없이, 놀이하듯 즐겁게 해볼 생각이다. -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김혜수 배우와 함께 드라마 <트리거>를 촬영 중인가. = 얼마 전에 끝났는데 찍는 동안 그랬다. 쉬는 시간까지 행복했던 작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나 지금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았나…. (웃음) 새로운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일이 이렇게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