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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불쾌와 공포를 구분할 수 있다면, <에이리언: 로물루스>

알람 방송이 요란하게 울리고 ‘잭슨의 별’의 지옥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레인(케일리 스페이니)은 ‘웨이랜드 유타니’ 회사에 점령당한 이곳에 징용된 하급 농부다.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그녀가 의지할 데라곤 아버지가 남겨놓은 인조인간 앤디(데이비드 존슨)뿐이다. 간신히 할당 시간을 채운 기쁨도 잠시, 회사는 자유를 꿈꾸던 그녀에게 할당량이 추가로 배정됐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한다. 억울해하던 그녀는 또 다른 피지배층 타일러(아치 르노)의 연락을 받는다. 우주에 표류 중인 퇴역 함선을 발견했으니 함께 고향 ‘이바가’로 돌아가자는 은밀하고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기약 없는 이동 허가를 기다리다 지친 여섯 청춘들은 끝내 버려진 함선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고향에 도달하기 위해 9년 동안 동면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근처 냉각실에서 부족한 연료를 찾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난폭한 고지능 생명체를 깨우고 만다. 이어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탈출을 꿈꾸는 레인과 크루원들은 인조인간 과학 장교 룩(대니얼 베츠)에게 감춰왔던 함선의 비밀을 듣게 된다.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인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한 첫 번째 <에이리언>과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작품 사이 시간대를 다룬다. 광활한 우주의 이미지로 막을 올린 영화는 웅장하고 영험한 음악을 가로질러 ‘완벽한 유기체’의 새로운 희생양이 될 인물들에 도달한다. <맨 인 더 다크>를 연출한 페드 알바레스 감독은 오랜 시리즈의 팬임을 증명하듯 방대한 세계관의 작은 요소 하나하나까지 충실히 계승한다. 인류는 과학이 그들 자신과 망가진 지구를 구원해주리라는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매 시리즈가 그러했듯, 기술 발전을 맹신하는 과욕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진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손쉽게 딜레마를 헤쳐나가는 인조인간에 비해 인간은 “합리적인 선택조차 많은 감정을 거쳐야 하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는 비교적 평탄한 연출로 안전한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독의 주특기인 숨 막히는 정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우주공간과 폐쇄된 우주선 내부에 긴장감을 조성한 것이 인상적이다. 다만 감독의 전작 <맨 인 더 다크>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울 정도의 불쾌감이 이번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알을 깨듯 숙주의 배를 가르고 깨어나는 괴수의 형상은 영화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복통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잉태’의 공포에 사로잡혀 온몸을 파르르 떠는 여성 피해자와 그녀 앞에서 흉측한 미소를 보이며 포효하는 포식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정말 마음 편히 보고 즐길 수 있는 바람직한 엔터테인먼트의 모습이 맞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불쾌감을 공포의 일종으로 받아들인다면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분명 팬들이 고대했던 시리즈의 다음 발자국에 걸맞은 작품임이 틀림없다. 불쾌감과 공포를 구분할 수 있다면, 생존 욕구가 가져다주는 박진감보다 왜곡된 욕구의 분출에 가까운 감독의 악취미가 반영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주인공 크루가 도착한 함선에는 주기적으로 중력을 생성하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중력과 무중력 상태를 넘나드는 공간 설정은 언뜻 가벼운 슬랩스틱을 위한 재료로만 여겨질 수 있다. 우주 SF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장치의 진가는 고요함과 생존 본능이 교차될 때부터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 가장 창의적인 장면 중 하나에도 비중 있게 등장하니 눈여겨보는 편이 좋다. check this movie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감독 스탠리 큐브릭, 1968년 우주공간을 담은 영화 대부분은 스탠리 큐브릭에게 일정 부분 빚지고 있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체험의 미학, 생사를 오가는 사투와 생존에 반하는 목표를 우선시하는 인공지능까지. <에이리언>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두 영화에서 극단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나타나는 인간상을 비교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인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우주 차원의 진리를 그리는 방식도 함께.

[인터뷰] 이미 우린 SF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듀나 인터뷰

- 데뷔 30주년 축하드립니다. 데뷔 30주년 기념 포럼 ‘시간을 거슬러 온 듀나’가 열렸는데요, 그에 앞서 몇달간 콜로키엄도 진행되었습니다. 행사들을 어느 정도 팔로업했나요. = 포럼에 온라인으로 참여했고 콜로키엄 자료 PDF를 받아서 봤어요. - 창작자이자 평론가로 긴 시간 활동해오셨는데요. 지난 30년을 돌아보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들을 떠올린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글쎄요. 전 제 과거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지난 30년 동안 자연인인 저에겐 정말 특별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듀나에겐 자잘한 마감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거 같고요. 그게 전부입니다. 그동안 엄청난 도약이나 변화를 겪은 거 같지는 않아요. - 90년대의 창작 환경에 대해서 포럼에서 다각도로 다루어졌는데요. 처음 글을 쓰던 때가 기억나는지요. = 하이텔과 같은 통신망 시절의 분위기가 기억이 납니다. 아마 저의 대부분이 그 시절에 만들어졌을 거예요. 단지 언제부터 그 세계에서 멀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 그 시기 과학소설 동호회에서는 해외 걸작들에 대한 소개나 감상이 주를 이루었는데요. = 작은 그룹이었고 작은 그룹의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번역되지 않은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가 위계에 큰 영향을 차지했죠. 그래도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소개하려는 시도도 꽤 있었습니다. 코니 윌리스가 그때 꽤 많이 번역됐었어요. 그게 자연스럽게 창작으로 연결되었는데 피드백도 딱 그런 모임에서 나올 법한 것이었어요. 그 결과 제가 있긴 했으니까 저에겐 중요한 시기였죠. 저 자신은 다른 창작물에 대한 피드백이 활발한 편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전 백 단위 이상 조회수가 올라가면 만족했습니다. 피드백도 좋았지만 발동이 걸려서 계속 쓸 수 있었다는 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 꾸준히 창작하는 원동력이 있다면요. = 폐인이 되지 않겠다는 처절한 욕구요? 일단 글을 쓰면서 저만의 세계를 만들었으니 거기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 처음 SF 소설을 써보고 싶다, 혹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 아무래도 과학소설 동호회에 가입한 게 결정적인 동기겠지요. 그전에도 안 썼던 것은 아닌데, 그것들을 완성해서 남에게 읽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독자이긴 했는데… 모르겠어요, 전 당시 이것저것 쑤셔보는 중이었습니다. 과학소설 동호회에 가입한 것도 어느 정도 우연이었던 것 같아요. - 데뷔 30주년을 맞은 올해 중요한 소설집들이 연달아 출간되었습니다.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 단편집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와 듀나 작가 데뷔 30주년 기념 리뉴얼판 <너네 아빠 어딨니?>(구판 <용의 이>), 신작 단편을 모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이 그 책들입니다. 초기 단편과 신작 단편을 다시 검토할 때 만족하거나 아쉬운 부분들에 차이가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 다들 다양한 이유로 아쉽지요. 거기에 대해 너무 신경은 쓰지 않으려 합니다. 과거의 작품들이 아쉽다면 당시의 저와 지금의 제가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인데, 당시의 저는 이미 죽었고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미래에 집중해야죠. - 예전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 아주 많이 바뀌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초창기 글들을 읽어보면 소위 ‘정상적인 어른’을 그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 게 보입니다. 기혼자이고 아이도 있고 어른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죠. 그런 사람들을 그리는 게 어른 작가로서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요샌 그런 거 안 합니다. - 성장기에 영화를 접한 방식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OTT를 통해,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영화를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른 시대였는데요. = 아무래도 텔레비전 영화들이 저에겐 가장 중요했지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 그리고 AFKN을 통해 자막 없이 본 영화들. 정영일 평론가가 소개했던 레너드 말틴의 별점도요. 전 레너드 말틴의 영화 가이드를 한권 갖고 있었는데, 너무 자주 읽어서 분해되어버렸습니다. 전 이 책에 소개된, 제가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영화들을 사랑했어요. 그것들은 종종 제 꿈의 일부가 됐고 결국 소설 속에 슬며시 녹아들었습니다. 그 뒤에 비디오와 DVD 시대가 왔고 제 갈증은 많이 사라졌지요. 지금은 정말 영화 보기가 쉬운 시대인데, 궁금한 영화에 대한 갈망이 주는 쾌락은 많이 사라진 거 같습니다. 한 영화를 느긋하게 사랑하기엔 보는 작품이 너무 많기도 하고요. - 미국영화, 드라마의 어떤 부분이 작가님을 매혹시켰을까요. = 아무래도 도피처였지요. 저는 20세기 후반 남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있다면 일단 찌르고 봤습니다. 서구의 영화와 드라마는 제가 겪어야 할 현실에 대한 비교적 좋은 대안이었습니다. 전 30, 40년대 할리우드영화들을 더 좋아했는데, 제 부모 세대 영화광들의 ‘추억의 영화’ 느낌이 덜 났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제가 ‘추억의 영화‘들을 싫어한 건 아니지만요. 장르물이 많다는 것도 장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만족스러운 장르 경험을 하기는 어려웠으니까요. - 읽고 본 작품이 늘어날수록 새로움을 느끼고 매혹되기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본 작품들에만 매여 있어도 안된다는 강박 또한 존재하고요. = 이전 작품에만 머물 수는 없죠. 가끔 온라인에선 옛날 SF가 좋았다는 향수 섞인 글이 올라오는데, 아니, 지금 SF가 존재하는 건 그걸 쓴 사람들이 옛날 SF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과거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옛 작가들이 하지 않은 걸 해야죠. 전 과거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과거가 없는 척은 더더욱 못하겠고. - 리뷰, 나아가 평론을 쓰기 시작한 방식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 하이텔에 일기처럼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 <씨네21>에서 작은 자리를 마련해주었지요. 그리고 제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전 그냥 떠밀려갔던 거 같아요. 사이트를 만든 건 <씨네21>의 칼럼 연재가 끝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계속 말하지만, 전 폐인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뭔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 아끼는 장르들을 처음 접한 시기와 주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제 세대 사람들은 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축약본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동서추리문고가 나타났습니다. 동네 문방구에서 몇 백원씩 주고 사면서 제 라이브러리를 넓혀갔지요. 아무래도 SF의 비중이 낮았기 때문에 더듬더듬 원서를 읽어야 했고요. 그렇게 해서 읽은 책들은 다들 비슷했습니다. 제 리스트엔 페미니스트 작가들 비중이 조금 높았는데 그게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최근 듀나 작가님의 소설 영어판이 잇달아 출간되었습니다. <평형추>의 영어판 (2023)에 이어 이번에는 단편집 (2024)도 출간되었어요. 이번에 소개된 작품은 단편선집인데요. 어떤 작품을 실을지에 대해 작가님과 논의가 있었나요. 한편 <평형추>의 리뷰는 <뉴욕타임스>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 아뇨. 전혀 논의가 없었습니다. 단편들은 모두 역자 선택이에요. 원래는 <아직은 신이 아니야>의 몇몇 챕터도 발췌해 실을 계획이었는데, 그 책은 나중에 따로 전체가 번역될 예정입니다. <와이어드>의 평자가 제 책을 토머스 핀천의 소설과 비교했습니다. 머리 맞고 골방에 갇혀 10년 동안 한국 드라마만 본 핀천이 쓴 소설 같다나요. 많이 웃었는데, 핀천은 정말 옛날 저에게 영향을 많이 준 작가입니다. - SF영화에 대해서는 비평문을 여러 차례 게재했습니다만, 한국 SF 소설에 대해서는 많은 글을 읽을 수 없습니다. = SF에 대한 글을 꽤 썼습니다. 제 책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에서도 SF의 비중은 커요. 단지 동시대 한국 SF에 대한 글을 쓰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런 글을 쓰기엔 몇몇 작가들은 저와 너무 가까워요. 제가 과연 충분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요? - 동시대에 활동하는 한국 SF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작가님의 의견도 듣고 싶었습니다. = 지난해과 지지난해엔 요새 한국 작가들의 SF를 서구 SF보다 더 많이 읽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연말에 계산해 보니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신기했어요.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영향을 받느냐.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 동시대 한국 작가들과 공통된 대기를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겠죠. - <씨네21> 1464호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찮기 그지없다”라고 썼습니다. 알고리즘이 큐레이션을 제공하는 시대, SNS든 OTT든 “우리의 욕망만으로 이루어진” 타임라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시대에, ‘새로고침’이 의미 있게 하기 위한 작가님의 방법이 있을까요. = 전 지난해부터 이전에 읽었던 고전들을 한달에 한권씩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취향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읽었던 책들에 대한 제 생각을 다시 확인하고 그걸 통해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는 가지들이랄까 그런 걸 찾고 있는 중이에요. 세계문학전집의 고전 리스트는 옛날보다 지금이 더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그 무개성과 강압성 때문에 제 취향에서 벗어난 독서가 가능하거든요. - ‘무개성과 강압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 모든 고전 리스트는 무개성과 강압성을 추구합니다. 과거의 수많은 책에서 정선된 것이고 그 때문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이죠. 물론 정말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계문학전집 리스트만 해도 꽤 빨리 변해요. 당연히 고전이라고 생각했던 책들 역시 잊히고요. 지금의 세계문학전집과 이전 것을 보면 리스트가 완전히 다릅니다. 여성과 비서구 작가들이 늘어나고 장르적으로도 더 다양하지요. 하지만 그런 리스트들이 추구하는 무개성과 강압성은 지금처럼 자신의 취향 안에 갇힐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출구도 있겠죠. - SF 미스터리, 고전적 미스터리에 비해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미스터리는 거의 창작하지 않는 편입니다. = 정통 미스터리 단편집을 한권 냈으니 거의 안 쓴 건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전 무대가 되는 세계를 통제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SF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지요. 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다보면 세계를 고칠 수 없다는 게 종종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일단 쓰기 시작했다면 그 세계의 현실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죠. 아무리 벌어지는 사건이 비현실적이라도요. 동시대 배경의 추리소설을 쓰면서 느낀 건데, 전 ‘막연한 현재’를 갖고 추리소설을 못 쓰는 거 같습니다. 시공간의 정확성이 중요하더라고요. - 저는 <민트의 세계>는 성장물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왔는데요. 로맨스나 성장물에는 관심이 없거나 쓸 생각이 없다고 반복해서 얘기하셨어요. = <민트의 세계>에서 민트는 전혀 성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 캐릭터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고 제법 영리하지만 철저하게 얄팍하지요. 단지 이 애에겐 장점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그렇다는 걸 잘 알고 자신의 힘을 의미 있게 쓰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민트는 자기보다 고민이 많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서 목표를 멋대로 빼앗아옵니다. 전 이게 꽤 재미있는 동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민트는 힘을 쓰는 것 자체가 가장 재미있습니다. 뭘 하고 놀아도 좋은데, 그래도 목표에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본격적인 성장물을 쓰려면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더 커야 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조금 더 긴 소설들을 써야겠죠. 전 얼마 전에 신일숙의 <1999년생>의 속편인 <2023년생>을 썼습니다. <1999년생>은 모범적인 성장물입니다. 하지만 전 이 소설을 쓸 때 제 캐릭터의 성장보다는 신일숙이 만든 세계를 제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지요. 전 신일숙이 만든 캐릭터 몇명을 등장시켰습니다. 중년을 넘겨 다들 좀 꼰대가 됐는데, 이것도 성장일까요. 로맨스를 안 쓰지는 않습니다. <첼로> <태평양 횡단특급> <추억충>은 로맨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체질상 로맨스 작가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로맨스를 써야 할 때 전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최단 거리를 찾습니다. 로맨스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은 정반대로 가죠. 전 로맨스를 쓸 때 주로 프랑스 고전 작가들을 모델로 삼습니다. 라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부인>이나 뱅자맹 콩스탕의 <아돌프의 사랑> 같은 책 말이죠. 제가 좀 덜 민망해하며 작업할 수 있는 스타일을 그 소설들이 제공해주는 거 같아요. -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님은 현시대를 사는 어른들에 냉정하다는(혹은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청소년 주인공들이 많은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힐 때가 있고요. = 제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년물을 써달라고 의뢰를 받기 때문입니다. (제 최근 단편인 <자코메티>도 청소년 단편 앤솔러지인 <녹아내리기 일보직전>에 실렸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아마 제가 어린 시절 읽었던 청소년이나 어린이 주인공 소설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제가 청소년 주인공을 쓰는 걸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동시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사실주의 소설은 절대로 못 쓸 거 같아요. 쓸 생각도 없고. 전 제가 청소년이었던 시절을 좋아 적도 없습니다. 근데 그와 별도로 전 동시대 한국 어른들의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전 한국 어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의 상당 부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른 주인공을 내세우더라도 이 사람들이 아주 어른처럼 행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그 때문에 제 주인공들의 청소년 비중이 실제보다 높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작가님의 작업 루틴에 대해 들려주세요. 소설의 경우 청탁을 받고 시작하는 작업이 많을지, 청탁과 별개로 떠올리는 이야기들이 있을지도 궁금했습니다. = 일단 늘 굴리는 이야기들이 몇개 있긴 합니다. 어떤 것들은 몇십년째 머릿속에서 구르고 있지요. 이번에 쓴 단편 <자코메티>의 아이디어는 20세기에 나온 것입니다. 그 옛 아이디어가 새 환경에 떨어지니까 이야기가 완성이 되더라고요. 보통은 청탁을 받은 뒤 이야기를 짜는 편입니다. 전 대부분 내용을 모른 채 이야기를 시작해요. 중반을 넘어서면 지금까지 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게 되고 그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끝난 뒤에도 그걸 느낄 수 없다면 큰일 난 거죠. 제가 얼마 전에 끝낸 단편이 바로 그런 꼴이라 전 지금 난처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할 텐데요. - 많은 창작자들이 X와 같은 SNS에 빠져 지내는 시간 때문에 창작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곤 합니다. = 맞습니다. 전 트위터를 이렇게 많이 해서는 안돼요. - <씨네21>에 싣는 글들을 포함해, 예정된 장기 마감에 끼어드는 급한 마감들을 조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합니다. 지난 몇달 동안 전 계속 소설 마감에 실패하고 있어요. 단행본 마감이어서 그런 것이긴 한데, 조금 미칠 거 같습니다. 그래도 잡지 마감 같은 건 최대한 성실하게 맞추려고 합니다. SNS를 안 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요. - 글을 쓸 때 돌아다니면서 모바일 기기로 쓴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는지, 특별히 잘 써지는 장소나 이동방식이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 Byword라는 앱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며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지금과 같은 날씨에는 쇼핑몰 같은 곳밖엔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없죠. 날씨가 좋으면 가끔 하천으로 나가긴 하는데요. 하여간 책상에서 글을 쓴 건 거의 10년 전이 마지막입니다. 바람의 화원 방영되었을 무렵에 넷북을 샀는데 그 뒤로 데스크을 거의 안 썼어요. 이게 저에게 좀 나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집중력 같은 데에.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해나가야죠. - 소설과 평론 모두 마찬가지인가요. = 네, 마찬가지입니다. 전 처음부터 쓰는 편입니다. 앞 문장이 없으면 다음 문장으로 나아가지 못해요. 그래서 글이 막히면 난처해집니다. 그냥 그 자리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 포럼 때 소설가 곽재식 작가님의 발제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처음 듀나 작가님이 데뷔했던 때에는 한국적인 문제의식에 관심이 없는 탈한국적 작가 취급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한국 배경 SF를 정착 작가로 평가받게 되었다고요. 흔히 한국 소설에서는 리얼리즘이 중요시된다고 하고, 그런 사고방식은 장르(소설)에 대한 비평을 협소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장르소설은 원래 탈국가적인 장르적 비현실성을 공유하는 거 같습니다. 채만식이나 김내성의 추리소설을 보면 30년대 조선의 풍속 묘사도 볼 수 있지만 그걸 넘어서는 장르적 비현실성이 있고 그건 서구 추리소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요. 양쪽을 다 봐야 하는데. 근데 그건 옛날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지금 리얼리즘과 한국적인 면에만 집착하면 비평 자체가 불가능하죠. - ‘다시 읽기’ ‘다시 보기’도 많이 하나요. = 보르헤스, 도일, 웰스, 맨스필드, 콘래드… . 지금은 이 사람들이 떠오르네요. 전자책이 발명돼 좋아하는 단편 작가들의 작품을 어디에나 가져갈 수 있게 되었는데 정말 좋아요. 시간이 남을 때 아무 셜록 홈스 소설을 꺼내 읽을 수 있는 사치는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죠. 영화로는 버스터 키턴과 자크 타티의 코미디, 진저와 프레드의 뮤지컬, 히치콕의 스릴러영화들이 떠오릅니다. 전 종종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볼 영화를 고르는데 요새는 <사랑은 비를 타고>와 <유령과 뮤어 부인> 사이를 오갑니다. - 독자가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에 개입하지 않고 싶어 한다는 인상을 받곤 하는데요. = 아뇨, 전 개입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건 허망하지요. - 나이를 먹고 관점이 변한 경우 중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던 경우도 있었을까요. = 발자크의 소설들은 지금이 더 재미있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 소설의 깊이 때문이었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나이 들면서 불완전성과 결함을 더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콘래드 장편에는 은근슬쩍 구성이 불완전한 면이 있는데 전 그 영향을 꽤 받는 거 같습니다. 다른 작가라면 공들여 묘사했을 결정적인 사건의 묘사를 회상으로 얼렁뚱땅 넘긴다거나. - 반복해 되돌아가는 작가군이 있다는 것이 작가님의 창작, 정신 활동에 있어 긍정적인 역할을 하나요. = 긍정적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저가 되게는 하지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저이니 저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해야죠. - 최근 재미있게 읽은 비문학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 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전 그 책을 문학으로 읽었던 거 같아요. 문학 맞죠. 과학 문학. - 데뷔 30주년 기념 포럼 때, 듀나 작가님의 소설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을 여쭤봤었는데요. 편애하지는 않으려 한다고 얘기하셨지만 최근 작 중 <구부전> <추억충>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을 언급했습니다. 이유로는 “독자들을 비교적 잘 통제한 것 같아요”라는 짧은 코멘트가 있었고요. 이 코멘트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 지금 저의 소설들을 시작하고 싶다면 거기서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긴 해요. 물론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제 새 단편집에 실렸으니 그 책을 홍보하는 건 중요합니다. 통제에 대해 말한다면 쓰면서 했던 계산들이 제대로 반영됐고 그게 독자들에게 전달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의도와 전혀 다르게 읽어도 재미있긴 할 텐데. -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에 수록된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에서는 작가님 소설에서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스토리텔러의 이야기입니다. 필멸자가 죽음의 불안을 이겨내는 방식으로서의 창작과 독서를 생각하게 만들어요.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종교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역시 창작에 대한 메타픽션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왜 창작하는가”라는 질문이 작가님에게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요. = 최근 들어 유달리 그래졌습니다. 이미 우린 SF의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조금은 사이버펑크물이기도 하고 조금은 밀리터리 SF이기도 하고 조금은 재난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SF라는 장르의 글을 쓰는 행위가 무엇인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다음 예정인 작업은 무엇인가요. = 앞에서 말했듯, 신일숙의 고전 <1999년생>의 속편인 <2023년생>을 썼습니다. 팬들이 저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연작 단편집 두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퀼라의 그림자>에서 이어지는 시리즈입니다. 쓰면서 좀 애를 먹었어요. 마지막 단편을 쓰기 시작할 때 제 허구의 세계에서 현실이 개입하는 것 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 최근 재미있게 읽은 소설 혹은 비소설. = 이지은 작가의 <츠츠츠츠>. - 소설을 쓰되 읽을 순 없음 vs 소설을 읽되 쓸 순 없음 = 쓸 순 없음. (소설 말고 다른 걸 쓰죠.) - 소설을 쓰다가 전개가 막히면 나는 그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다 vs 딴짓을 시작한다 = 전 책상에서 소설을 안 씁니다. 돌아다니면서 모바일 기기로 써요. 그러니까 전 언제나 딴짓을 하면서 글을 씁니다. -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 내가 즐겨하는 딴짓은. = 트위터. 아아. - 나에게 셰익스피어란. = 굳이 형식적 완벽함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 위대함에 도달했던 거장. - 나의 묘비명을 쓴다면. = 전 묘지가 없었으면 합니다. 시체는 해부용으로 기부하고 싶어요.

[씨네스코프] <한국이 싫어서> 촬영 현장, 한국은 그대로라서

건물 안 계단으로 들어서자 거리에선 들리지 않던 드럼 소리가 들린다. 발을 아래로 옮길수록 소리는 점점 커진다. 몸이 둥둥 울릴 정도다. 계단을 통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이곳은 홍대 일대에 자리한 ‘라이브클럽 빵’, 인디 신에선 이미 유서 깊은 곳이다. 꼬박 2년 전인 2022년 8월23일, 이곳이 영화를 위한 장소로 변신했다. <회오리 바람>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연출한 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의 82신을 위해서다. 오후 4시쯤 현장을 찾았는데, 한여름 햇빛이 쏟아지는 바깥과 대조적으로 어두운 지하 클럽은 스모그로 가득했다. 색색의 조명만이 무대를 비췄다. “조명을 화려하고 세게 써도 좋아요!” 장건재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촬영분은 뉴질랜드에서 잠시 귀국한 계나(고아성)가 동생 미나(김뜻돌)와 함께 동생의 남자 친구 홍원(이현송)의 공연을 관람하는 장면이다. 미나는 신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계나는 그런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생각에 잠긴 채로 말이다. 이 장면을 두고 장건재 감독은 “오랫 동안 해외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계나가 한국의 상황은 그대로라는 걸 목격하는 신”이라고 기자에게 넌지시 말했다. “같이 따라 불러주세요!” 인디록밴드 불고기디스코이자 <한국이 싫어서>의 홍원 역으로 처음 연기에 도전한 배우 이현송이 활기차게 말한다. 발을 구르며 열정적으로 노래하던 이 신인배우는 감독의 컷 소리에 관람객을 연기하는 보조출연자들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여유까지 보인다. “실제로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아 정말 좋네요. 이렇게 해요, 우리. 눈도 맞추면서.” 이어 들려오는 이현송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한여름에 펜을 든 기자도 상쾌하게 만들었다. 감독도 흥이 올랐는지 모니터 뒤에 앉아 박자에 맞춰 샌들을 까딱이다 ‘오케이’를 외친다. 이현송이 부르는 는 뮤지션이자 동료 배우 김뜻돌의 곡인데, 현장에 막 나타난 김뜻돌은 자신의 노래가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불리는 광경을 보고는 다소 들떠 보였다. “제가 부른 걸 다른 사람이 부르니까 다른 사람 노래 같아요. 정말 감동적이네요. 제 노래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는데 영화에 어떻게 담길지 기대돼요!”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피서객처럼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 김뜻돌에게서 들뜬 마음과 젊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현송처럼 그 역시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연기에 도전했는데, 이날이 두 사람의 첫 촬영날이었다. 영화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두 신인배우가 생기 있게 움직이는 동안 20년차 배우 고아성은 병맥주를 손에 쥔 채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몸을 살랑이고 있다. 두 사람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와 몸짓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음악을 느끼려 하나 씁쓸한 눈빛만은 감출 수 없다. 먼 타국에서 집으로 돌아와 여동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도중에도 그의 큰 두눈은 슬퍼 보인다. 어쩌면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그의 두눈으로 기억될 것 같다. 텅 빈 듯한 고아성의 눈동자는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변주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맹추위에 오들오들 떨다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피로한 눈꺼풀을 깜빡일 때, 가족들이 살아갈 집의 재건축 문제로 눈에 눈물이 맺힐 때, 그에겐 이곳이 아닌 다른 나라가 절실해 보인다. 나고 자란 나라를 떠난다는 건, 가족과 연인을 설득하는 시간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영화로 치자면 비슷하게 관객을 설득하는 숏과 신이 필요하다는 뜻일 텐데, 고아성은 대사가 아닌 눈동자로 관객을 납득시킨다. 그 눈동자를 시끌벅적한 클럽에서 보았다.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주제 없는 사랑

사랑을 할 때 나의 모습을 좋아한다. 호기심을 잔뜩 안고 시작해, 푹 빠져들어 정신없이 헤엄을 치고, 아파하기도 많이 아파하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부분들을 포착하게 되는, 이 ‘연애’라는 여정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고 풍만해지는 이 시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랑 외의 다른 것들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땐 무턱대고 아팠던 일들이 지금은 참 이쁘다고 느껴진다. 정말 웃기다. 기억나는 약속들이 몇 가지가 있다. 대부분 바보 같은 약속들. 가령, “태풍이 강타한 날 여기서 꼭 입맞춤을 하자!” 혹은 “화이트와인을 한번에 세 모금 이상 마실 땐 꼭 눈을 질끈 감자!”와 같은. 그런 약속들을 한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냥 웃기 위해 했던 것 같다. 대부분 지켰다. 유치하고 뜬금없다고 키득대다가도 폭풍우 속 키스를 하는 와중에는 누구보다도 진지했고, 화이트와인을 들이켤 때에도 필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장마 때였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져내렸고, 그때 당시 연인과 비 오는 밤거리를 무작정 뛰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손을 꼭 잡고 뛰고 걸으며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그리고 ‘너’를 더 깊이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서로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하고, 흠뻑 젖은 서로의 모습이 웃겨 자지러지다가도 금세 이뻐 죽겠어서 안아주기도 했다. 잠시 멈춰 음악을 고르고 들으면서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 내 녹음기에 간직되어 있는 이날 밤은, 내가 가진 추억 가운데 녹슬지 않았으면 하는 것 중 하나다(소리를 녹음하는 습관이 있다. 예전에는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곤 했는데 요즘엔 핸드폰 음성메모장에 저장한다). 가끔 비 오는 거리를 혼자 거닐다가 그날들의 냄새가 불현듯 스칠 때가 있다. 찰나이지만 코끝을 휭하고 스칠 때가 정말 신기하게도 존재한다. 그리움이 형상화될 때가 있다고 혼자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게 믿게끔 하는 순간들 중 하나다. 향으로 찾아올 때. 단순히 당시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그때의 계절, 바람과 나무의 향, 나의 영원함에 대한 동경과 마법에 걸린 듯한 순수함에 대한 그리움을 말한다. 나의 여름을 정의시켜줄 수 있는 향. 그것이 감각으로 찾아와줄 때마다, 정말 반가워 웃음이 새어나온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 아는 그리움의 향이지만 또 언젠가 맡을 날이 오겠지 하며 남은 거리를 마저 걷는다. 아름답지 않을 때도 넘쳐난다. 온갖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찬 시간들도 많았다. 너무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니 사실 수많은 이유들이 사랑이라는 것 하나로 통합되어버렸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싸움은, 금방 언성이 높아지며 꽤 무거워졌고, 삽시간에 나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사람들이 넘쳐나는 강남역 한복판에서 나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마치 짐승이 울부짖듯 오열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처음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나의 목소리, 멈추고 싶어도 멈춰지지 않는 몸의 떨림, 그리고 결국엔 자기 혐오와 증오까지 이어졌던 며칠. 나 자신을 탓하던 그 시간들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어설픈 이유를 원인이라고 생각하며 한동안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었고, 그래서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다. 한동안 그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세월이 흘러, 다행히도 주변의 많은 도움과 절대 찾아올 것 같지 않던 사랑으로 많이 회복했고, 나를 보호하는 법도 확실히 깨우쳤다. 그런 형태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더라면, 나의 어둠을 겪어보지 못했더라면, 지금처럼 단단하기도, 동시에 말랑말랑하기도 한 사랑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나 위대한 것이다. 견딜 수 없이 아름답기도 하고, 처참하게 만들기도 하는 이 힘은 그러나 멈출 수가 없다. 난 그렇다. 사랑할 때 열리는 숨구멍이 좋다. 들숨과 날숨에 각기 다른 온도를 느낄 수 있는 그 예민함은 정말 특별하다. 이 날것의 감각들은 연기하는 나에게도 많은 도움을 준다. 메아리처럼 들리는 웃음소리, 연인과 나누는 온도, 서로를 안아줄 때의 감촉과 향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배역을 맡았을 때, 내 기관들이 기억하는 것들에 반응하며 진심을 쌓는다.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대입하기보다는 이 오감들을 투영한다. 그 감각들이 일치했을 때, 배역과 같이 숨을 쉬며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 나에게는 효과적이었다. 그 순간에만 집중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전파될 수 있는 온갖 형상들을 다 겪고 결국에는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려내는 작업은 정말 복잡하고 단번에 정의내릴 수 없지만, 그만큼 무궁무진하며 또 그래서 소중하다. 앞으로 내가 가질 사랑의 형태가 궁금하다. 어떨까. 얼마나 예쁠까. 어떤 새로움을 또 마주하게 될까. 여러분의 사랑의 형태도 궁금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들이 가진 특유의 목소리와 눈빛을 좋아한다. 적당한 자랑과 수줍음, 누군가를 위해서 마음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찬란하다. 어떨 땐 같이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모습 또한 귀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으면 한다. (나 포함) 칼바람이 부는 폭풍우가 찾아와도 ‘곧 키스할 날이 머지않았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마법에 여러분이 걸렸으면 하는 소망을 가득 담는다. 그 소망과 함께 나는 이번 여름과 작별 인사할 준비를 한다. 이 주제 없는 사랑이 무작정 다시 나타나길 바라며.

[비평] 포스트 포르노 시대의 새로운 쇼, <미래의 범죄들>

표층적 차원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더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못하는 미래가 바로 <미래의 범죄들>이 그리는 시대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보디 호러 장르의 <비디오드롬>에서 <엑시스텐즈>에 이르기까지 신체와 기계라는 물질과 그를 통해 보는 환각과 꿈이라는 비물질을 탐구해왔다. 비물질인 환각 이미지마저도 신경전달물질의 이상 체계로 인해 망막에 맺히는 영상이라고 본 크로넌버그에게 있어 정신은 내부와 외부로 나눌 수 없기에 그의 세계에서 내면은 인체의 내부, 장기가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또 <미래의 범죄들>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해부와 그 행위자는 <네이키드 런치>의 괴물 형상을 한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쓰는 작가 윌리엄과 문학적 행위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네이키드 런치> 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 윌리엄은 아넥시아의 경계에 이르러 작가임을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품 안에서 펜을 꺼내 보여주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든 써보라는 말에 윌리엄은 자동차 뒷좌석에서 잠자던 조앤을 깨워 총으로 쏘아죽이며 작가의 전능함을 눈앞에 공연하듯 보여준 뒤에야 아넥시아로 가는 길을 허락받는다. 예술 행위자의 전능함이 쓰기가 아닌 보여주기로 환대받았던 그 이후는 <미래의 범죄들>에서 조금 다른 양상으로 펼쳐진다.환경적 재앙이 덮친 인류의 미래에서는 과거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외면받는다. 피부에 새겨지곤 했던 타투는 체내로까지 침입하며, 폭력과 살인의 스너프와 포르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신체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던 장르는 자취를 감추었거나 관람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미래 인류에 도착한 새로운 쇼는 이전에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신체의 내부를 활짝 열어 자라난 장기를 적출하는 해부 퍼포먼스다. 이 진화의 훗날은 SF적 미래 서사가 아니라 현재의 쇼를 비추는 블랙유머와도 가깝다. 이를테면 힘겹게 음식을 삼키고 소화가 어려워 보기에도 괴로운 식사 장면이 그렇다. 소화를 돕겠다고 괴상하게 움직이는 뼈 모양의 의자에 앉아 미식도, 풍미도, 음미하는 사람의 쾌락도 사라진 식사 장면은 보는 이의 식욕을 돋우던 현재의 푸드 포르노를 반박한다. 이러한 면에서 <미래의 범죄들>은 크로넌버그의 보디 호러 장르의 연장이자 쇼비즈니스 산업의 이면을 다루었던 <맵 투 더 스타>의 연장이기도 하다. 영화와 TV쇼, 클립과 쇼츠가 홍수처럼 범람했다 쓸려가 아예 자취를 감추어버린 시대. 그래서 <미래의 범죄들>은 이제 차라리 눈과 입을 꿰매어 보거나 말하지 않기를 절실한 몸짓으로 갈구한다. 크로넌버그는 이 영화를 명상이라 부르지만 나는 이것이 현대에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이미지와 영상을 향한 우수에 젖은 근심으로 보인다. <미래의 범죄들>은 유성영화 이후 손상된 채로 등장한 적이 거의 없던 음성과 얼굴을 훼손한다. 사울(비고 모텐슨)과 팀린(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말할 때마다 목소리에서 바람이 새며 쇳소리가 나기 일쑤다. 카프리스(레아 세두)는 친구인 오딜이 얼굴의 표면을 새롭게 조형하는 수술 퍼포먼스를 지켜보다 고개를 돌리고 만다. 오딜이 이마와 두뺨을 도려내어 생선의 아가미처럼 속살이 바깥으로 훤히 내보이도록 커다란 상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켜보던 자의 외면에는 훼손된 얼굴을 향한 참담함이 있을 거라 짐작하게 하지만 카프리스는 이후 자신의 이마에 상현과 하현달이 뜨고 지는 모양을 양각으로 새겨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무명 시절에도 독보적 존재감을 드러내던 레아 세두라는 당대 배우의 얼굴이기에 이 얼굴의 훼손은 영화 속에서 역할에 주어진 분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부드러운 피부 또한 음성과 얼굴만큼은 아니어도 훼손된 채로 영화에 드러날 경우에 특수하게 여겨진다. 크로넌버그는 이미 <맵 투 더 스타>에서 애거서(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두팔과 한쪽 얼굴에 화상의 흔적을 남긴 적이 있다. 세상에 없는 나비족의 모공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매끈한 살결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스크린에 구현해낼 수 있었던 <아바타>(2009) 이후 크로넌버그의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여기에 팀린으로 분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도 부조화를 더한다. 시종 로봇처럼 삐걱대고 쭈뼛대는 팀린의 몸짓은 수상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독특한 표현 방법일 테지만 목소리와 얼굴이라는 영화의 성역이 훼손된 뒤에는 이 또한 기존의 연기 양식을 파괴하려는 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레아 세두의 얼굴처럼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목소리에도 개성은 뚜렷하다.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당히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남기는 기분 좋은 잔상은 지워지고 캑캑대며 말하는 팀린의 발성을 카프리스의 얼굴과 함께 견주어보면 어느 현상이 감지된다. AI 음성 합성 기술은 <탑건: 매버릭>에서 후두암으로 목소리를 잃은 배우 발 킬머의 목소리를 새로 태어나게 했다. 한 회사가 생성한 음성 모델에 배우의 말하기 방식을 학습시켜 영화에서 마치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것처럼 발 킬머의 목소리를 구현해낸다. 망가진 것을 복원하는 기술이 아닌 온전해야 할 것을 망쳐버린 뒤에 보정할 수 없는 상태로 여기게 하는 크로넌버그의 역(逆)기술적 시도는 ‘테세우스의 배’를 연상시킨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귀환할 때 탄 배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보수됐다. 이 사고 실험은 수리에 수리를 거치다 원래 배에 있던 부분이 모두 교체되고 나면 그 배는 최초의 것과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살결, 음성, 얼굴, 나아가 인간의 언어와 행동을 매끄럽게 다듬어 발전시킨 연기 양식을 포함하면 이는 모두 영화에서 아직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불가침 성역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은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몸은 현실이다’(Body Is Reality)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또 다른 문장이 뒤이어져 샴쌍둥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짝을 이루기를 상상해본다. 오직 실재하는 것은 몸이다. 지금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를 이루던 구성 요소가 모두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할 때, 그때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영화라 부를 수 있을까. ‘내면’이 마음과 정신을 뜻하지 않고 인체 내부를 가리킬 때, ‘아름다운 내면’ 콘테스트가 곧 아름답게 배치된 장기를 의미하게 될 때, 이곳은 또한 영혼이 사라져버린 구슬픈 세계다. 사울의 동료, 카프리스와 팀린이 반복해 외쳐 부르는 그 이름은 영혼(soul)의 어긋난 발음으로 들린다. 사울이 성대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팀린, 그 이마에 영원히 남을 상처를 새긴 카프리스와 행하는 두 차례의 입맞춤은 AI 기술로 생성하고 보정할 수 없는 구시대의 진정한 신체, 즉 지난 세기의 영화를 향한 크로넌버그식 낭만주의를 나타내는 순간이다. 손상된 목소리를 음성 모델에게 학습시켜 복원할 수 있을 때도 팀린의 목소리는 모종의 이유로 손상되었고, 세상에 없는 이의 신체를 만들어 운동하게 할 수도 있었으나 카프리스의 얼굴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었다. 테크놀로지의 메스가 닿지 않은 신체의 특권은 성역이 짓밟히지 않을 영화의 특권으로 비약한다. 합성 플라스틱 바를 씹어 삼키고 마침내 자신도 진화의 흐름에 대항하지 않을 신인류임을 확인한 사울의 얼굴은 다가올 미래에 어떤 이미지로의 구원과 해방을 약속하고 있을지 모른다. 영화사에서 수십, 수백번은 반복되었을 흑백의 클로즈업에서, 오로지 지금만큼은 사울의 얼굴과 그 굴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실재한다.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영화의 끝없는 표류, 디지털 롱테이크가 부른 대항해의 시대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연출 방식 중 하나였던 롱테이크의 지위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디지털카메라의 기록 능력이 향상되면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아피찻풍 위라세타꾼, 페드로 코스타처럼 이미지의 정적인 흐름을 통해 관객의 관조적 관람을 유발하는 작품, 즉 슬로 시네마(slow cinema)에서 롱테이크가 자주 나타난 바 있다. 그 작품들은 기록의 사실성이 허구적 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몽타주를 금지하자고 했던 앙드레 바쟁의 요청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디지털 합성과 CGI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액션영화, 전쟁영화, 공포영화, SF영화처럼 시각적 볼거리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강화하는 작품에서도 롱테이크 기법이 적용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프레임 내부에 공존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거나 하나의 숏이 다른 숏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음매 없이 결합하여 관객이 롱테이크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도록 연출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영화에서 롱테이크는 리얼리티의 포착과 조작이라는 이중의 전략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연출자의 성향과 제작 여건에 따라서 두 방식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작품 전체를 원테이크로 촬영한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2002)나 미국의 전원적인 풍경 또는 산업화의 풍경을 고집스럽게 기록하는 제임스 베닝의 여러 작품 또한 영화적 지속을 연장하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를 미시적으로 조작한 경우이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오류, 실패, 결점을 후반작업에서 수정하는 이러한 방식은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순간을 기록하고자 했던 고전적 리얼리즘의 불문율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디지털영화에서는 후반작업을 통한 개입과 조작이 롱테이크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이라는 점이다. 디지털영화의 롱테이크는 일종의 문턱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지속, 이미지의 분절, 이미지의 합성을 동시에 수행하여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디지털 롱테이크의 경계 없음이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이 있다. 전 인류가 불임으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처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그린 이 작품은 오프닝 시퀀스의 폭탄 테러 장면, 중반부의 자동차 추격 장면, 후반부의 총격 장면 등을 롱테이크를 활용해 박진감 있게 그린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현장감과 사실감을 극대화하고, 여기에 특수효과와 시각효과를 통해 장점을 극대화하거나 반대로 단점을 최소화한다. 중반부 롱테이크의 숨은 비결은 특수 고안된 자동차에 거치대를 설치해 카메라가 자동차 내외부를 유영하듯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이 장면은 주행 중인 자동차의 내부에서 찍은 숏과 자동차가 멈춘 직후부터 외부에서 찍은 숏을 비가시적인 편집으로 결합했다. 이런 제작 과정을 놓고 보면 롱테이크에 기초한 이 영화 특유의 리얼리즘에 대한 평가는 여러 영화적 장치와 테크닉에 대한 설명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술적 성취만 놓고 이 작품의 롱테이크가 기존의 관습을 벗어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칠드런 오브 맨>이 과거의 롱테이크와 차별화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오프닝에 50초 정도 지속되는 한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퀀스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10~20초 정도 지속되는 세개의 숏과 50초 정도 지속되는 하나의 숏이다. 먼저 전 인류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한 남성의 사망 사건을 전달하는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서 화면이 바뀌면 어느 카페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쳐다보는 사람들과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두개의 숏을 통해 묘사된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카페 밖으로 나가서 커피 잔에 술을 따르는 사이 카페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아비규환이 된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숏이 약 50초 동안 계속된다. 오프닝 시퀀스 중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롱테이크 장면은 불안정한 주인공의 모습과 무질서한 거리의 풍경을 통해 작품 속 근미래의 세계가 붕괴 직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 롱테이크 장면에도 몇 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그 장면은 이틀에 걸쳐서 촬영한 두개의 숏의 결합물이다. 하나는 주인공이 카페를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카페를 나선 이후에 폭발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의 제작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촬영 단계에서는 배우, 엑스트라, 카메라의 동선을 맞추거나 주인공이 카페를 나설 때 버스가 지나가도록 하여 편집 지점을 계산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 편집 단계에서는 현장 촬영으로 얻은 두개의 숏을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마야로 불러들여 공간적 좌표를 맞추는 작업을 한 다음에 다시 각각의 이미지를 디지털 합성 프로그램에서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있었다. 이 제작 공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 속에서 영화의 최소 단위로서의 숏이나 이미지의 경계로서의 프레임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장면은 컴퓨터의 계산값에 따라 주인공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구축한 것이며, 관객은 카메라와 스크린을 매개로 그 장면 속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 장면이 구축한 세계는 관객인 우리에게 이미지로 지각되기 이전에 데이터를 코드화한 결과물로 존재한다. 실제로 이 작품의 오프닝은 작품 속 세계가 데이터와 정보가 상품처럼 교환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장면의 경우 거리, 행인, 버스 등 전경의 실사 촬영분에 해당하는 부분과 버스와 건물의 광고판에 출력되는 광고 영상처럼 후경의 CG로 처리된 배경 부분은 합성물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제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작품 속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데이터, 정보, 이미지의 흐름의 지배 속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주인공과 그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히 물질적 공간을 배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물질적인 세계를 항해하는(navigating) 것에 가깝다. 과거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오직 영화만이 물질적인 “삶의 흐름”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오늘날의 영화는 비물질적 삶의 흐름과 그렇게 구축된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계에서 끝없이 표류하는 누군가의 항해일지와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상실에서 벗어나는 로드무비, <문경> 신동일 감독

신동일 감독은 정말 꿋꿋하게 걷고 있다. 2006년 <방문자>를 시작으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반두비>로 독립영화계에 자신만의 뚜렷한 스타일을 각인시켰고 이후에도 <컴, 투게더> <청산, 유수> 등을 공개하며 단단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자신만의 길을 택한 신동일 감독이 로드무비의 형식에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신작 <문경>은 도시 생활에 지친 문경(류아벨)이 문경에서 만난 비구니 가은(조재경)과 겪는 로드무비다. 각자의 상처를 지닌 이들은 유랑 할매(최수민) 집에 머무르면서 자신들만큼 혹은 더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 소녀 유랑(김주아)을 만나서 치유의 길에 이른다. 번뇌에서 벗어난다. 전작들보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과 풍경으로 관객을 찾은 신동일 감독은 멈추지 않고 더 멀리 가는 다양한 로드무비를 구상하고 있었다. - <컴, 투게더> 개봉 때 만나고 훌쩍 7년이 지났다. <문경>을 구상한 과정은 어땠나. = 차기작을 구상하면서 그간 만든 영화를 복기하니까 대부분 남자와 남자의 관계를 그렸더라. <방문자>가 그랬고, 아니면 <반두비>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를 그리기도 했고. 물론 <컴, 투게더>에 엄마와 딸의 서브 스토리가 있긴 했지만 여자와 여자 사이의 깊은 드라마는 다뤄보질 못했다. 자연스럽게 여자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선택지가 좁혀졌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등장인물이 거의 다 여성인 드라마로까지 넓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문경과 초월(채서안)의 라이벌인 하원(차서현)도 남자였는데 의식적으로 다 여성으로 바꿨다. 그렇게 설정한 뒤 실제로 직장생활 경험이 있는 이애리 각본가의 작업을 거치니 인물간의 감정이 훨씬 현실적이고 풍부해졌다는 느낌이 들더라. - 문경이란 특정 공간을 다룬 이유는. = 오래전부터 문경이 고향인 아버지께서 문경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란 말씀을 하셨다. 난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다. (웃음) 그러다가 2020년쯤 후배랑 문경에 놀러가서 처음 차박이란 걸 하는데 저녁 준비할 때쯤 소나기가 확 내리더라. 그 빗물 젖은 밥을 먹으면서 ‘이야, 이거 영화적이네’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문경과 가은의 스토리로 사용한 부분이다. 다음날 선유동계곡을 유람할 땐 그 자연 앞에서 내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느껴졌다. 이미 여성 둘의 로드무비 형태는 생각해 뒀던 터라 이 영감들을 잘 조합하게 됐다. - 전작들보다 한결 편안해졌단 인상이 든다. = 예전 영화들보다 조금은 더 대중적이면 좋겠단 바람이 있었다. 이애리 작가가 아무래도 대중적인 시선을 잘 알고 가는 친구여서 영화의 화법이나 인물들의 심리도 훨씬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영상적인 접근에서도 예전에 롱테이크나 관조적 시점이 있었다면 이번엔 통상적인 숏-리버스숏 구도도 많이 썼고, 몽타주 신들이 꽤 있다 보니 음악도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 인물간의 관계도 더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전작에선 서로 싸우고 헐뜯으면서도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나왔는데, <문경>의 인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각자의 갈 길을 가기도 한다. = 가은은 진리를 좇아 어디론가 계속 가야 할 구도자이기에 문경이나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뒤로해야 하는 인물이다. 문경 역시 잠시 내려온 여행자일 뿐 일단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서울에 가서 퇴사하든지 다른 삶의 형태를 택할 순 있겠지만 각자의 영역으로 귀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같다. 인연이라는 게 막 억지로 되는 건 아니더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면 만나고 아니면 아니고. 불교 공부를 조금 하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 탐진치라고 하는 세 가지 번뇌에서 좀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귀결된 것 같다. 나 역시 전작 <청산, 유수>의 개봉 과정이 험난해서 자괴감과 열패감을 느꼈는데 <문경>에 매진하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문경이 사망한 동생을 추모하며 노래하고 마음의 정리를 해가듯이, 또한 유랑이가 나쁜 기억에서 조금 해방되듯이 어떤 상실감에서 벗어나면 삶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 어떻게 보면 도시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자연을 예찬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 굳이 도시와 자연을 구분하려던 것은 아니다. 문경과 가은이 각자에게 익숙한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어디에서 살든 어떤 태도로 살 것인지의 문제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을 찬양하거나 격하하려고 하진 않았다. - 도시와 자연의 공간을 화면에 담는 촬영 방식은 확실히 달라 보인다. = 맞다. 촬영감독과 논의해서 초월과 문경의 직장생활이 그려진 도시 시퀀스에선 야외 컷을 딱 하나만 썼다. 의도적으로 내부 공간을 답답하게 찍었고, 숏-리버스숏을 주로 사용해서 대화의 템포를 올렸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는 순간 자동차가 넓은 도로를 주행할 때부터 시야가 트이도록 만들었다. 문경이나 시골에선 굳이 인위적인 숏을 잡지 않아도 자연 공간에서 오는 시각적 해방감이 있었다. 컷을 최대한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찍고 싶었다. 그래서 유랑 할매 집에서 문경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면은 현장에서 논의해 8분40초짜리 롱테이크로 찍었다. 콘티의 컷 3개를 합쳤다. - 죽음을 다루는 방식도 전작의 연장이자 변주로 보인다. 가은에겐 사회적 죽음의 전사가 엮여 있다. = 시나리오 막바지 작업할 때쯤, 내 생일인 10월29일경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충격과 슬픔, 그것보다 큰 분노가 찾아왔다. 그래도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일 같아서 영화에 녹이게 됐다. 다만 아직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기엔 이르고 너무 소재주의적으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999년 인천 인현동 참사를 모티프로 삼게 됐다. - 차기작 계획은. = <청산, 유수>로 충청도에, <문경>으로 경상도에 갔으니 다음은 전라도를 노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젊은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다음엔 나와 가까운 세대가 자식 세대와 겪는 갈등과 화해 가능성을 그려보고 싶단 마음이 있다. 더 나아가면 함경도나 평안도, 해외까지 나아가는 로드무비도 찍어보고 싶다.

[인터뷰] 참을 수 없이 좋으니까!, <한국이 싫어서> 제작사 모쿠슈라 장건재 감독, 김우리 대표, 윤희영 PD

김우리 대표와 장건재 감독이 영화제작사 ‘모쿠슈라’로 박자를 함께 맞춰나가기 시작한 건 2009년부터다. 고등학생의 흔들리는 첫사랑을 그린 <회오리 바람>을 제작하며 극장 배급을 위해 직접 영화시장에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누군가 작품과 관객을 연결해주길 마냥 기다리기보다 직접 마침표를 찍어나가는 모험가가 되기를 선택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잠 못 드는 밤>의 영문 번역을 맡은 윤희영 PD와 인연을 맺고 2016년부터 <한국이 싫어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최초의 기억> 등 소재와 주제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쿠슈라는 장강명 원작 소설을 빌려 살아 있는 계나(고아성)를 완성했다. <한국이 싫어서>의 힘을 그려낸 장건재 감독, 현실적인 지반을 다진 김우리 대표, 뉴질랜드 생활을 한 경험으로 로케이션을 통솔한 윤희영 PD까지 셋은 유연한 화학작용을 만들었다. 긴장이 몰려오는 시사회 전날, 세 사람과 함께 느슨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는 작업실에서 <한국이 싫어서>와 모쿠슈라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독립영화의 전방향 신호를 읽어보고자 했다. - 영화제작사 모쿠슈라는 영화감독 장건재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된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나. 장건재 작은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이나 프로듀서는 필요에 의해 제작사를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극장 배급에 프로덕션 사업자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모쿠슈라도 그렇게 시작됐다. <회오리 바람>을 시작한 이후 <잠 못 드는 밤> <한여름의 판타지아>까지 이어나가면서 조금씩 독립영화 제작사로서 정체성이 생겨났다. 2011년 <잠 못 드는 밤>의 영문 번역으로 만난 윤희영 PD는 <한국이 싫어서>의 준비와 함께 2016년 정식으로 합류했다. 윤희영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가 내가 모쿠슈라에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출발점이다. 그 결실이 이제 개봉한다. (웃음) 모쿠슈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직장을 다니다가 다른 사업을 해왔다. 더 오래전 박기용 감독님의 <낙타(들)> 연출부 생활을 한 적 있다. 모쿠슈라 사람들과 워낙 결이 잘 맞아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다시금 이 일을 하고 싶었다. 오직 영화만을 위해서, 오직 극장으로 향하는 - 장건재 감독의 이력이 화려하다. 조연(<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은 물론 촬영(<누구를 위하여 총을 울리나> <히치하이킹>)을 수행하고 감독-각본-제작-편집(<회오리 바람>)까지 올라운드플레이어가 된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는 총괄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는데. 1인다역은 모쿠슈라의 조직적 성격과 연결된 결과인가. 장건재 나만 그런 건 아니고 남은 두 사람도 1인다역을 하고 있다. 셋의 역할 분담이 조금씩 다르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와 <최초의 기억>을 예로 들면 두 작품 모두 내가 촬영했고 김우리 대표가 데이터 작업(DIT)과 동시녹음, 윤희영 PD가 현장 진행, 조명 등을 맡아했다. 가끔은 협업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 <양양> <퀴어 마이 프렌즈> <경아의 딸> 등을 작업한 이연정 편집기사와 <한국이 싫어서>를 작업하기도 했다. 분업과 협업이 중요한 조직이다. 김우리 코로나19 이후 영화·드라마 산업의 인건비가 치솟으면서 우리 같은 중소 제작사는 인력을 대체하기 위해 스스로 기술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처음부터 모든 걸 잘했던 건 아니다. 오늘 이만큼 공부해서 내일 이만큼 적용해보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경험과 역량이 우리에게 당장 중요하고 필요했다. 장건재 <달이 지는 밤>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는 소규모로 만들어진 영화다. 또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제작과 배급을 모두들 도맡으면서 우리도 모르게 포스트프로덕션, 프로덕션, 유통, 배급까지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도 많이 배웠다. - 세명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계획을 짜고 실행하는 과정이 현장 실무를 판단하는 감독 역할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장건재 나는 연출자로서 기술 운용에 서툴러지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그래서 계속 배우고 싶다. 모든 영역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고 싶다. 모쿠슈라는 규모의 미학을 첫 번째로 생각한다.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작업인지, 그 규모 안에서 우리가 잘 만들 수 있는 영화인지 먼저 판단한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되짚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 가용범위를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윤희영 모쿠슈라는 다른 조직과 성격이 다르다.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고 변모한다. 각자의 책임이 분산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만든다. 밤 12시가 넘어서 전화가 오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일 이야기 5분 하고 다른 이야기를 1시간 한다. 그러고선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이어서 하자~”로 마무리한다. (웃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편하고 자유롭게 공유하는 분위기가 신뢰를 만드는 듯하다. - 이번에 개봉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했다. 원작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받은 만큼 영화로 바꾸는 과정에 고민이 깊었을 듯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점을 가장 잘 살리고 싶었나. 장건재 처음 책을 읽었을 때 계나의 고민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내게도 공명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개인의 이야기를 경유하면 한국 사회를 진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원작은 영화보다 더 발랄하고 한톤 높여 용기 있는 인물의 여정을 그려내지만 내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민자, 이민 준비자, 유학생은 삶의 터전을 바꾸는 시도를 하면서 소설과는 또 다른 온도를 보였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다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다른 것을 찾아나서고 싶어 했다. 확실히 여성이 많기도 했고. 다시 말해 색다른 방식의 21세기 디아스포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의 난민자들이랄까. 자신의 토대와 환경을 주도적으로 바꿔나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윤희영 나도 뉴질랜드에서 오래 살았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와 내가 이국을 경험한 시기는 다르지만 주요 고민은 비슷해 보였다. 나 또한 ‘한국을 떠나고 싶다’라는 생각이 한창이던 시절이 있었다. 논리적인 고민이라기보다 그런 생각과 감각이 밀려드는 시기에 가까웠다. <한국이 싫어서> 시나리오 개발 당시 계나가 뉴질랜드로 향하는 과정의 개연성이 떨어지면 안된다는 논의를 한 적 있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이 심정적으로 ‘떠나고 싶은 상태’에 있다는 거다. 막연해 보이더라도 그 자체가 현실적이다. - <씨네21>과 인터뷰에서 고아성 배우는 ‘35고’라고 적힌 대본을 받았다고 말했다. 35고의 과정을 어떻게 기억하나. 장건재 오히려 초고는 빨리 나왔다. 2016년에 완성했다. 그 뒤 3명의 각색 작가와 함께했다. <안녕 내일 또 만나>의 백승빈 감독, <경아의 딸>의 김정은 감독, <타짜: 원 아이드 잭>을쓴 정철 작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큰 변화가 3번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원래 아주 작은 영화로 출발했지만 해외 로케이션 등 규모가 있다 보니 새로운 방식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런데 2022년까지 모든 펀드와 투자가 계속 떨어지는 거다. 김우리 <한국이 싫어서> 시나리오를 보면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아마도 제작 지원과 투자를 판단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우리 프로젝트가 어중간해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 상황에 맞춰 부지런히 시나리오를 바꿨다. 조언도 많이 받았지만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사실상 포기하는 마음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 지원했는데 우리가 선택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희소식이었다. 거기에 힘을 얻어 투자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장건재 35고는 돌이켜보면 <한국이 싫어서>를 제작하기 위한 35가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2022년에 나는 포기한다고 선언도 했다. 인적 자원이 생각보다 너무 오래 들어가니까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김우리 대표와 윤희영 PD에게 심술도 많이 부렸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때 고아성 배우가 마침 함께하고 싶다는 회신을 주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감사한 일이다.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방향을 찾는다 - 뉴질랜드에 간 계나는 이전과 다른 국면의 어려움을 맞이하지만 어쨌든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어둡고 추운 한국과 따뜻하고 형형색색의 뉴질랜드는 촬영 방식이 달라 보인다. 장건재 처음부터 계절적 차이를 드러내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겨울인 한국에서 녹록지 않은 현실을 보여줄 때 같은 기간의 뉴질랜드는 온화하고 따뜻한 여름을 맞이한다. 그 계절차 때문에 만들어지는 콘트라스트(명암 차)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계나가 워낙 추운 걸 싫어하기 때문에 따뜻한 곳으로 향해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싶기도 했다. 무채색인 한국과 달리 뉴질랜드는 컬러풀하기도 하고. 하지만 뉴질랜드가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처럼 비쳐지길 바라지는 않았다. 한국도 아름다운 사계절을 간직하고 있지 않나. 계나의 이동과 삶의 과정에 집중하려 했지 뉴질랜드가 완전한 해결책처럼 보여지거나 ‘어딜 가도 다 똑같이 힘들다’라는 식으로 단조롭게 귀결되지 않길 바랐다. - 외지 생활에 약한 연하 남자 친구를 보며 ‘얘들은 엄마가 필요하구나’ 하던 계나는 “영주권 따고 싶으면 키위 하나 잡아서 결혼해도 되고”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제도권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싶던 계나는 다시금 제도권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장건재 뉴질랜드에서 계나는 다양한 관계와 기회를 만나지만 그들이 목적지향적인 맥락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큰 고민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한국이 싫어서>는 해외 취업과 이민을 목표로 한 영화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더 안정적인 선택권으로. 오히려 계나는 주변 환경을 계속 바꿔나가면서 자기 삶에 새로운 시도를 주는, 모험 과정에 자신을 놓는 인물이다. 그 과도기와 과정을 담는 게 중요했다. - 올해로 모쿠슈라가 15주년을 맞이했다. 지금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본다면. 장건재 김우리 대표는 공해를 만들지 않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이동 거리를 짧게 해서 탄소발자국을 줄이고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하는 영화 현장을 지향한다. 김우리 낭비를 만들지 않는 것만큼 촬영장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으려 한다. <한국이 싫어서>의 뉴질랜드 촬영에서도 그곳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래서 야외 촬영 때에는 메인 촬영 스태프만 빼고는 멀리 숨어 있었다. - 2022년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저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을 출판하기도 했다. 모쿠슈라는 영화 이외에 출판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장건재 <달이 지는 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책이다. 아는 통번역 작가에게 이 책을 읽고 들려달라고 했는데 그분이 너무 바빠서 1년 동안 읽지 못했더라. 그래서 출판해버렸다. (웃음) 모쿠슈라의 첫 번째 책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작업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4년 정도. 근데 그사이에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김우리 어떻게 이런 호재가! (웃음) 생각도 못했던 띠지가 생겨났다. - 현재 노하라 구로 원작 만화 <너의 뒤에서>의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이 싫어서>부터 원작 IP 작품을 시도하는 중으로 보인다. 윤희영 <너의 뒤에서>는 출판사 6699프레스에서 발간한 단편집 중 하나다. 그 뒤에 장편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선보인 뒤에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일본, 대만, 프랑스 등으로 뻗어나갔다. 아직은 시나리오 기획·개발 단계에 있다. 원작 배경을 꼭 한국화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판단해서 제작과 연출은 모쿠슈라가 하지만 일본 배우들과 현지에서 촬영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모쿠슈라와 함께하고 싶다면 김우리 -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김주령 배우와 주말마다 촬영했던 작품.그래서 제작 기간도 길었다.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러모았던 순간이다. 마음의 위로를 주는 영화.” 윤희영 - <달이 지는 밤> “PD로 임했던 첫 번째 작품이다. 무주산골영화제의 지원을 받아무주에서 지역 사람들과 함께했던 영화로모든 풍경에 무주가 담겨 있다. 영화의 모든 매무새마다 나의 애착이 묻어난다.” 장건재 - <최초의 기억> “처음으로 공동 연출을 시도한 영화다.공동 연출이란 게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협업을 지향하는 모쿠슈라의 목표에잘 도달한 작품이었다. 우리다움이 잘 담겨 있다.”

[인터뷰] 감정이 옮아가는 서스펜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모완일 연출, 손호영 작가

각기 다른 시간대에 사는 두 남자 전영하(김윤석), 구상준(윤계상)의 삶에 살인사건이 무심코 내던져진다. 사건의 주변부에 있던 두 남자는 살인사건이 남긴 파장에 우연히 빨려 들어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비극을 마주한다. <미스티> <부부의 세계> 등을 흥행시킨 모완일 드라마 PD는 2021년 ‘JTBC X SLL 신인작가 극본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대본을 읽고 “재밌으나 시리즈로 만들기엔 위험한 작품”이라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이 작품에 매료된 자신을 발견했다. 작품을 쓴 신인 손호영 작가 또한 모완일 PD와의 첫 미팅 자리에서 “영상화가 용이하지 않은 대본이라 제작은 어려울 것 같다”라고 답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영상매체로 구현하기 까다로운 작품이라 단정했던 두 창작자는, 어느새 의기투합해 올해 가장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미스터리 스릴러를 함께 지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도식적 구조의 작품이다. 두 시간대에 사는 두 남자(전영하, 구상준), 두 시간대 모두에 걸친 한 여자(윤보민) 그리고 두 남자의 삶을 각각 뒤흔드는 두명의 살인범(유성아, 지향철)이 있다. 작품의 얼개는 어떻게 세웠나. 손호영 시작은 영하의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펜션을 운영하는 한 남자에게 우연히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에 간접적으로 얽힌 남자의 선택이 삶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휘말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쓰며 다른 캐릭터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수많은 삶의 선택지에서 영하와 다른 길을 걸은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때 상준의 이야기를 더했다. 유사한 사건을 겪고 두 갈래 길을 걸은 두 남자의 이야기를 병렬한 것이다. - 두 시점에 놓인 이야기가 모두 흡인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 이야기의 함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서사의 밀도를 고려하며 작품을 쓰고 연출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모완일 영하와 상준 사이엔 20년의 시차가 있지만 영하와 상준이 동시에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둔 채 작품을 만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영하의 이야기를 상준의 감정이 받아주고, 상준의 이야기를 영하의 감정이 받아내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편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가 다른 쪽으로 옮아갈 때 컷 전환이 느껴지지 않도록 공을 많이 들였다. 시청자들이 작품 속 시점(時點)이 무작위로 바뀌는 게 아니라 감정의 흐름에 따라 넘나든다는 걸 편하게 받아들이면, 작품 속 쏟아지는 정보량을 숙제라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손호영 현재 시점인 영하의 서사가 과거 시점인 상준의 이야기보다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준의 내러티브를 1화부터 3화까지 드라마틱하게 압축해 전하고, 과거와 현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결말로 흘러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맞춰갔다. - 양 시간대를 절묘하게 오가는 매치컷이 인상적이다. 이때 연결고리로 다양한 시·청각적 요소를 활용했다. 모완일 체감하는 만큼 매치컷을 자주 활용하진 않았지만 매치컷이 많다고 느끼게 연출하고 싶었다. 긴밀한 편집을 구상할 수 있는 요소가 대본에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었다. 고민의 흔적이 많은 대본이었다. 누구든 개구리가 될 수 있다 - 홈인베이전 장르의 맥락 아래 있는 작품이다. 그 장소가 가족 공동체가 거주하는 집이 아닌 두 남자가 자기 집처럼 여기며 자영업하는 숙박업소일 뿐이다. 손호영 숙박업소가 지닌 공간적 특성에 집중했다. 불특정 다수의 투숙객이 방문하는 공간이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면, 그 익명의 투숙객이 평화를 깨뜨리는 침입자라면 어떨지 상상했다. 영하와 상준이 마주한 사건은 두 남자와 큰 연관이 없는 일에서 출발한다. 주변인처럼 존재하는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는 이야기, 누구든 작품에서 언급하는 개구리가 될 수 있다는 착점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라는 속담이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개구리가 지칭하는 대상이 캐릭터에 따라 작품 내내 변주되기도 한다. 어떻게 이 속담을 이야기와 연결지었나. 손호영 처음엔 상준의 대사로 떠올렸던 속담이다. 큰 비극의 당사자가 되면 왜 내가 그랬을까, 왜 하필 나였을까 하며 자문할 수밖에 없다. 상준이 이 말을 누군가에게 건넬 땐 조언 내지 당부의 뉘앙스라면, 이 대사가 여러 인물 사이에 오갈 땐 위로의 정서가 그 안에서 순환하길 바랐다. - 작품의 제목과 관련이 깊은 내레이션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를 오프닝마다 반복 배치했다. 어떤 경위로 내레이션을 구상했나. 문어체로 쓰인 내레이션을 배우들이 녹음할 때 까다로워하진 않았나. 손호영 위 내레이션 다음에 이어지는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라는 문장이 철학적이라, 이를 범죄 사건에 빗대면 어떻게 해석될지 거듭 생각했다. 암수범죄를 의미할 수도 있고, 처음 범죄의 정황을 살피고도 외면하길 택했던 영하의 방관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맥락은 ‘만약 내가 범죄 피해의 당사자가 되어 나무처럼 쓰러진다면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까?’라는 질문을 건네는 일이었다. 피해자 입장에선 이 질문이 가장 유효하지 않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전부 돌에 맞은 개구리고, 어쩌면 각자의 텅 빈 숲속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들이라고 상정하며 골자를 세워갔다. 이들이 쓰러져갈 때 소리가 났을까? 모완일 크랭크업 이후 몇달이 지난 후 내레이션 녹음이 이루어졌는데도 배우들에게 디렉션을 건넬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배우들이 내레이션을 어떤 감정으로 읽을지 욕망하는 게 느껴졌다. 김윤석 배우도 윤계상 배우도 본인들이 오케이라 수긍할 때까지 내레이션을 녹음했다. 그렇게 각 배우가 수락한 오케이 버전이 깔렸다. -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여러 정보를 가타부타 설명하기보단 대뜸 미지의 정보를 던지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택한다. 이후 여러 정보의 조각을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조합하게끔 만드는 일이 작품의 고유성을 더한다. 심지어 상준이 사는 시대가 현재로부터 20년 전 과거라는 단서도 시청자가 알아서 발견해야 한다. 모완일 대본의 고유함이다. 이미 대본부터 다짜고짜 정보를 툭 던지는 스타일의 글이었다. 문제는 내가 소심한 편이라(웃음) 이런 불친절한 방식이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얻을지, 더 나아가 좋은 트릭이라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손호영 감독님과의 대화 후 강화된 점도 있지만, 그냥 애초에 그렇게 쓰게 됐다. 영상화 과정에서 극대화되는 미스터리함이 있다고 본다. 상준이 011로 시작하는 휴대폰 번호를 쓰고, 구권 1만원 지폐가 나오는 장면은 영상일 때 좀더 재밌어지니까. - 5화를 기점으로 작품이 반으로 접히는 인상이다. 작품의 전반부는 미스터리 장르가 이야기를 견인한다면 5화에선 블랙코미디적 소동극이 두드러진다. 그러다 6화에선 스파이 장르물 같은 액션이 두드러지고, 7화와 8화는 형사 보민(이정은)이 본격적으로 등판하는 수사물이 된다. 다양한 장르를 한데 섞을수록 작품의 일관성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손호영 영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장르적인 변곡점이 있어도 결국 하나의 종착점으로 귀결될 것 같았다. 모완일 후반부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반부도 에피소드별로 성격이 전혀 다르다. 어떤 에피소드는 대사가 극단적으로 없어서 하루 종일 대사 한마디만 녹화한 적도 있을 정도다. 매번 지향점을 달리 설정하는 일이 재밌었다. 전부 별도의 장르라 해도 이를 최선을 다해 밀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면, 시청자들은 장르가 봉합된 시침선을 인식하기 이전에 캐릭터의 내부로 이입할 수 있다. 일견 블랙코미디처럼 즐기다가도 그 속에 담긴 영하의 감정을 읽고, 액션을 따라가다가도 총으로 저격할 수밖에 없는 기호(박찬열)의 마음을 본다. - -미스터리 구조는 PD님의 주특기이기도 하다. <부부의 세계>의 1화에선 머리카락의 주인이 누군지, <미스티>에선 누가 케빈 리(고준)를 살해했는지를 찾는 게 작품의 서브플롯이었으니까. 이번 작품을 연출할 때 전작의 연출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부분이 있나. 모완일 나 스스로도 가장 흥미를 느끼는 구조다. 처음 작품을 접할 때부터 성아가 궁금했다. 육하원칙에 의거한 모든 질문을 성아에게 던지고 싶었다. 내가 성아에게 느끼는 궁금증의 크기를 시청자가 마지막 8화까지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일념이었다. 그리고 결말까지 함께 달리면 결국 캐릭터들이 저지른 행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감정이 남는다. 그 순간에 이르면 캐릭터의 동기를 추적하기보다는 캐릭터의 여생을 응원하는 경험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 배우들의 호연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유성아로 분한 고민시 배우의 경우 작품 안에서 전압 자체가 전과 다르다. 김윤석, 이정은 등 선배 배우와 대치하는 장면들에서도 동일한 카리스마로 맞붙다 못해 대사의 리듬이나 에너지의 완급을 능란하게 주도하는 여유도 보인다. 모완일 솔직한 심정으로 그간의 연출작에 대해 운이 좋다고 생각하기보단 내가 투입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런데 고민시 배우를 만난 건 정말 천운이다. 이 친구는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면 경쟁자들이 어떻게 쫓아오나 싶을 정도로, 번아웃이 오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성실하다. 연기뿐 아니라 매사에 근면하다. 초반엔 돌봐야 할 배우라 속단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이 친구로부터 오히려 보살핌을 받는다는 감각마저 들었다. 언제나 예상치를 벗어나는 연기를 선보여 고민시 배우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점점 늘었다. - 고민시 배우와는 작품 합류 전 두 차례 미팅을 했다고. 모완일 고민시 배우의 전작을 보고 내가 짐작한 이 친구의 캐파가 있었다. 그런데 고민시 배우에겐 그 캐파를 초과하는 매력이 있고 무엇보다 그 매력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나는 그런 배우들을 정말 사랑한다. 자기 안의 능력이 출중해도 그걸 끌어안고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 전소해내는 배우가 있다. 고민시 배우는 후자다. 나만 잘하면 지금 눈앞에서 보는 그의 매력을 잘 담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잘 담는다면 사람들도 정말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팅할 때만 해도 꽤 오래전이라 이 매력을 나만 봤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작품 공개 전 개봉한 영화나 <서진이네2> 등을 보니 그건 아니었더라. - 보민은 이전에 쉽게 볼 수 없었던 형사 캐릭터다. 본능적으로 범죄에 이끌리지만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전사가 있지만 그 전사가 본인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하지 않는다. 경력을 착실히 쌓아 지금에 이른 직업인으로서의 묘사도 무척 섬세하다. 사람 냄새 나는 형사가 아닌 진짜 ‘사람’ 같달까. 보민이 이렇게 육화된 데엔 2인1역을 연기한 두 배우(이정은, 하윤경)의 힘이 커 보인다. 손호영 감독님과 보민에 관해 많은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감독님이 보민에겐 생활감이 더해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고, 이 점이 이정은 배우를 만나 더욱 강화됐다. 작품 속에서 이정은 배우가 정복도 생활복도 입는데 어떤 옷을 입든 카리스마와 생활감이 동시에 느껴져 좋았다. 모완일 나의 최애 캐릭터다. 한데 나는 아직도 보민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보민을 좋아할 이유가 없는데도 작중 보민에겐 언제나 극단적인 호감과 신뢰가 샘솟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형사가 대개 도구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거나 정의의 사도로 그려진다. 그렇지만 클리셰를 한 꺼풀 걷어내고 보면 그 안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잘 그린 후에 형사의 설정을 얹으면 보다 살아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다. 보민이 자신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 많지 않다. 그래서 이정은 배우에게 계속 미안해하며 디렉션을 건넸다. “선배님, 이 장면에선 이런 정서를 표현해주세요. 선배님이 표현할 그 정서를 작품 내에서 따로 설명하진 않을 거예요. 선배님의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이 보민에게 의문을 품지 않게 만들어주세요.” 그러면 이정은 배우가 나를 참 대책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좌중 웃음) 이정은 배우와 즐겁게 고민하며 보민을 만들어갔다. 이야기가 비극 안에 멈춰 서지 않도록 - 성아의 직업이 화가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작품의 섬세한 프로덕션디자인이 눈을 사로잡는다. 심지어 영하가 들르는 세탁소마저 화려하다. 모완일 이 작품은 빌런에게 맞서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건의 주변부에서 피해를 본 이들이 소중한 자기만의 공간을 잃고 다시 회복하는 이야기다. 이걸 포인트로 잡은 후 영하의 펜션, 상준의 모텔 등을 구상해갔다. 상준이 모텔을 처음 운영할 때의 마음은 우리 모두 겪는 일 아닌가. 가령 내가 새 차를 뽑았다고 치자. 남들은 그저 “네 수준에 맞는 차를 샀구나”라고 넘길 테지만, 그 차를 산 나는 구매를 확정하기까지 천번을 고심한 후 행복에 겨운 시간을 보냈을 터다. 영하에겐 펜션이, 상준에겐 모텔이 새 차와 같은 공간이다. 그들이 모텔을 인수하고 펜션을 지은 지역조차 얼마나 고심해 골랐겠나. 이들이 느낄 법한 소중함을 미술로 표현하고 싶었다. 제3자의 시각에서 다큐멘터리처럼 공간을 그리는 시리즈가 아니라, 자기 돈으로 직접 지은 자신의 공간을 소유한 사람의 눈에 비친 공간을 그리길 바랐다. 세탁소도 공들인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멋들어진 공간에서 세탁도 하지만 사장님이 맛있는 커피도 한잔 공짜로 내려주고 동네 이웃들과 모여 농담도 나눌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이 있다면 다들 자신이 누리는 일상도 소중히 느끼지 않을까. 이런 점을 종합하며 미술감독님과 현실 세계를 어느 정도 가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종두(박지환)가 운영하는 슈퍼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 상준과 종두의 관계가 정말 막역한데, 사실 이 둘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는 아니었다. 그런데 살다보면 뒤늦게 알게 된 소중한 인연이 있지 않나. 그 관계의 소중함이 종두의 슈퍼에 표현되길 바랐다. 슈퍼에서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공간의 분위기를 통해 시청자가 무의식적으로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하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으면 한다. 손호영 펜션의 수영장의 경우 처음부터 대본에 적어둔 공간이다. 그게 정말 만들어질 줄은 몰랐다. 처음 대본을 쓸 때부터 물의 이미지는 가져가려 했다. 여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영상을 원했고, 여유로운 숲속 펜션에서 유유자적하며 수영하는 그림이 담기면 좋을 것 같았다. - 상준과 기호는 한평생 회한에 함몰돼 살아간다. 작품 초반엔 이렇게까지 일가족에게 혹독한 슬픔이 몰아칠 필요가 있을까 의구심도 든다. 하지만 이들의 비극이 시간이 지나 영하에게 가닿는다는 점에서, 영하로 인해 두 남자의 슬픔이 해소된다는 점에서는 꼭 필요한 설정이다. 상준과 기호가 겪는 고통의 당위성에 관해 어떤 논의를 거쳤나. 손호영 은경(류현경)의 결말을 포함해 상준의 가족 이야기가 과도한 비극이 아닐지 걱정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젊은 상준과 어린 기호, 은경이 살던 20세기 말 21세기 초를 떠올리면 트라우마라는 용어조차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던 시대였다. 결국 이들이 느낀 아픔은 뭇사람들의 통념보다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비극을 선택했다. 다만 현재 시점의 영하가 두 남자의 슬픔을 찾아내고 이에 따라 상준과 기호가 서로를 찾아냄으로써 이야기가 비극 안에 멈춰 서지 않도록 배치했다. 이 점이 작품 전체의 주제와도 맞는다. 모완일 상준 가족의 이야기를 찍는 내내 배우들은 물론 제작진도 현장에서 정말 많이 울었다. 연출자의 입장에선 이야기에 관한 신뢰를 견지하고 작업했다. ‘너무 심한 비극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구성이 무너질 수 있다. 큰 나무가 쓰러질 때 그 소리를 주변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그렇지, 큰 나무가 쓰러진 이후 그 나무에 다가가 사연을 살피면 모두 상준과 같은 정도의 슬픔 안에서 삶을 이어간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또 듣고자 할 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는 상준의 서사와 하등 다르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 작품의 결말에 이르면 영하도 보민도 모든 비밀을 함구한 채 살아가길 선택하는데. 손호영 나의 이상이고 판타지 같은 결말이다. 두 사람이 각자가 서 있던 첫 자리를 그대로 지켰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내린 결정이다. 영하의 경우 작품 초반 선택한 침묵과 결말에 선택한 침묵의 양상이 다르다. 영하의 첫 침묵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면, 마지막 침묵은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을 위한 선택이다. 오히려 자신을 지킬 때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비밀을 안은 채 살아가는 사람의 결말이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 1. 다음 장면을 위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나는 손호영 모완일 감독님에게 전화를 건다. 모완일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까지 생각을 미룬다. 지옥 속에 살다 촬영 당일이 닥쳐 현장에 출근하면 오히려 현장에서 고민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날의 공기, 스태프들의 역량, 배우의 역량 등의 도움이 작용하거든. 하윤경 배우와 김종태 배우가 ‘술래’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찍기 전까지 나도 배우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촬영지인 진부쉼터의 풍경과 당일 내린 습한 눈이 묘한 분위기를 형성해주었다. 2. 차기작에서 다루고 싶은 소재 모완일 성숙한 20대가 나오는 이야기. 왜 우리나라 드라마는 어떤 나이든 실제 그 연령이 보이는 성숙함보다 어리게 캐릭터를 묘사할까. 특히 20대를 묘사하는 방식이 그렇다. 20대가 오히려 가장 성숙하다고 본다. 좀더 나이가 들면 현실을 알아 비겁한 선택을 내릴 때가 많은데 20대는 그렇지 않으니까. 가장 성숙한 결정을 짓고, 가장 멋진 인생을 사는 한철이다. 부모의 그늘이나 사회 시스템의 굴레가 아닌 자기 앞의 생을 사는 20대를 그리고 싶다. 말하고 보니 꼰대 같다. 손호영 있지만 차기작을 통해 공개하겠다. (웃음)

[비평] 잊혀진 공포의 그림자, <에이리언: 로물루스>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연대기적으로는 <에이리언> 오리지널 시리즈 1편과 2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이리언> 프리퀄 시리즈 이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번 작품은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을 하나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더이상 영화 속 ‘에일리언’이 기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공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프리퀄 시리즈에서 ‘제노모프’의 기원이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리퀄 시리즈가 인류의 기원과 함께 제노모프의 기원을 파고들기 시작하며 1979년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이 괴물의 신비함이 많이 희석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페데 알바레스 감독은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이 이미 성공을 거둔 바 있는 익숙한 공식을 극에 끌어들인다. 먼저 남루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누구도 그들을 도울 수 없는 고립된 공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청년 무리가 있다. 이들은 고립된 공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현실을 탈출할 수 있지만,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법에 어긋나는 일(절도)을 벌여야 한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이 고립 공간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 살육자가 지배하는 곳이었음이 밝혀진다. 청년 무리가 공간에 진입한 이후 살육자가 잠에서 깨어나고,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 살육자는 시각이 없는 대신 소리만으로 희생자를 추적할 수 있는데, 끔찍하게도 살육자의 최종 목표는 희생자를 ‘임신’시키는 것(!)이다. 어딘가 친숙한가? 이는 감독의 전작인 <맨 인 더 다크>를 요약한 내용으로, 위에 나열한 설명은 <에이리언: 로물루스>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요컨대 <에이리언: 로물루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맨 인 더 다크>다. 단지 여기에 <에이리언> 시리즈를 향한 애정 어린 윙크가 추가됐을 따름이다. 페이스허거에 시각이 없다는 설정이 (영상물 중에서는) 이번 작품에서 처음 언급됐다는 사실 자체가, 알바레스가 이 시리즈를 자신의 ‘홈그라운드’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방증이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알바레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훌륭한 호러 기술자로서의 면모를 뽐낸다. 특히 소리로 빚어낸 아이러니한 서스펜스, 즉 비명을 질러야 마땅하지만 질러서는 안되는 장면을 통해 (마치 게임 <에이리언: 아이솔레이션>에서처럼) 관객이 등장인물과 같이 숨을 참게 만드는 기법은 이번 작품에서도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주기적으로 중력과 무중력을 오가는 무대 설정은 산성피가 휘날리고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몇몇 기발한 세트피스를 성립시키는데, 이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독창적인 액션이기도 하다. 비록 몇몇 설명적인 대사가 장점을 희석하고는 있지만, 도입부에서 뜸을 들이며 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1편을 떠오르게 하는 좋은 시나리오다. 범인은 배 안에 있다 알바레스 감독은 성공적으로 이전 시리즈에 대한 향수를 불러오는 동시에 작품 말미에 굉장히 이상한 ‘반전’을 도입해 시리즈가 앞으로 더 확장될 가능성도 심어놓고 있다. 이번 영화 결말에서 우리는 인간이 낳은 아기인 동시에 외계의 피로 오염된 한 ‘두려운’ 존재와 마주치게 된다. 이 괴물은 우리가 이제껏 이 시리즈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다. 여기서 잠깐, <에이리언> 시리즈 팬이라면 내가 앞서 한 말에 즉각적으로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 괴물을 <에이리언4>에서 보지 않았나?’ 그러나 이는 우리가 로물루스에서 목격한 괴물이 담지한 공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반문이다. <에이리언4>의 정신적 후속작인 이 영화는 <에이리언4>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복제 리플리와 달리 케이(괴물을 낳은 모체)는 괴물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않으며, 괴물도 인간 여성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이번 영화는 <에이리언4>에서 어렴풋이 다뤄졌으나 흔해 빠진 모성애 테마로 빠지는 바람에 가능성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했던 어떤 원초적 콤플렉스, 즉 ‘살모(殺母)의 죄’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작가 바바라 크리드에 따르면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남자가 여자로부터 태어났느냐 아니냐’라는 질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신화는 <에이리언>에서도 핵심”이다. 오이디푸스는 언제나 살부(殺父)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 것으로 이해됐으나 실은 그가 ‘신화 속 어머니’인 스핑크스를 죽인 것은 살모의 죄를 보여준다고 크리드는 말한다. <에이리언: 로물루스>의 이종교배 괴물은 이런 은밀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보여주는 존재로서, 자신이 여자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괴물이다. 이 ‘괴물’이 애초에 케이와 비요른 사이에 생겨난 존재로서, 사촌끼리 ‘근친상간’한 결과물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영화는 언뜻 목숨까지 걸며 서로를 구하는 ‘남매’ 관계를 작중에서 내내 강조하며 정상 가족에 대한 강박관념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이러한 정상성을 위협하는 씨앗을 품은 채 시작됐다. 이는 케이의 자식을 <에이리언>의 제노모프나 ‘뉴본 에일리언’(<에이리언4>)과는 다른 종류의 공포를 전달하는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며, 시리즈에 새로운 종류의 공포를 도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리지널 에일리언이 역겨움과 무서움을 자극한다면 <에이리언: 로물루스>의 에일리언은 두려움을 자극한다. 전자가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충격적이라면 후자는 일반적인 출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난 존재라 더욱 두렵다. 뉴본 에일리언 역시 일종의 두려움을 품은 존재이지만, 이것이 인간 여성이 아닌 에일리언 퀸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 두려움을 반감시킨다(게다가 H. R. 기거가 지적한 대로 뉴본 에일리언의 디자인은 그리 미학적이지 않다). 흥미롭게도 이번 영화에서 괴물의 숙주가 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캐릭터는 비백인 여성인 나바로와 케이뿐이다(남자인 타일러는 충분히 숙주가 될 수 있는 조건에서도 곧장 살해당한다). 수잔 제퍼드 작가에 따르면 <에이리언>을 포함한 초기 공포영화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외계인의 점령을 당하거나 씨앗의 침범을 당할 가능성이 많았지만 새로운 변신은 거의 항상… 이성애 백인 남자들”에게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전통적 남성성의 부담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백인 남자… 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하드 바디> 216쪽) 그렇다면 할리우드영화는 이제 드디어 가장 고통받는 자가 백인 남성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일까?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안에 살모 의식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오직 여성들만이 씨앗의 침범을 당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 케이는 ‘외계인을 자연분만한다’라는 끔찍한 장면을 위해서 모체가 된 것에 불과하다. 두려움이란 익숙한 동시에 낯선 것을 볼 때 느껴지는 공포다. 케이가 낳은 괴물이 ‘가슴을 터뜨리고/배를 찢고’ 튀어나오는 대신 자연분만 과정을 거쳐 알로 나온 이유는, 그래야만 이 두려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왜 태아는 영화 속 변형된 쥐처럼 끔찍한 포유류 형태로 진화하는 대신 알 형태로 변했을까? 왜 케이는 에일리언에게 ‘모유’를 줄 정도로는 변형됐으나 쥐처럼 다시 살아나 괴물이 될 정도로는 변하지 않은 것일까? 이 충격적인 전개는 잘 생각해보면 그리 논리적이지 않다. 단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매개체로서만 여성의 자궁과 질이 필요했다는 방증이다. 고양이는 왜 흑인 남성이 되었는가? 이 영화의 한계 지점은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에 초점을 맞춰보면 더욱 좁아진다. 주인공 레인은 리플리의 한계를 뛰어넘었는가?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리플리는 이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양가적 캐릭터로서, 모두를 살리기 위해 문을 열지 않는 동시에 고양이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문을 여닫는 선택은 <에이리언>부터 <에이리언: 커버넌트>와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몇번이고 반복되는 <에이리언> 시리즈 특유의 모티브인데, 이번 영화에서는 각각 나바로와 앤디가 동료를 구하기 위해 문을 여는 선택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두 장면에서 레인은 나바로와 달리 문을 열었고, 앤디가 문 열기를 거부하자 뺨을 때렸다. 이는 마치 레인이 1편에서 리플리가 내렸던 선택, 리플리의 이성적 측면을 우회적으로 거부하며 리플리의 감성적 측면만을 물려받은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리플리는 <에이리언> 결말에 이르러 ‘강인한 생존자’에서 ‘여성적’인 모습으로 변해 동면에 빠지는데,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는 고양이 존스가 리플리의 이런 캐릭터 변화를 알리는 장치로 사용됐다고 지적한다. 이런 맥락에서 <에이리언>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병렬되는 외계인과 고양이 이미지는, 결국 리플리가 고양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칩이 바뀐 냉정한 앤디와 원래대로 돌아온 동생 앤디의 병치는, 레인이 후자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영화는 <에이리언>에 대한 우드의 다음과 같은 논평을 회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주인공을 영웅으로 묘사해 씌운 ‘팝 페미니즘’적 외관이 궁극적으로 영화의 반동적 성격을 숨기고 있다는 그 유명한 지적 말이다. 레인은 리플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맞이했던 눈부신 바람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영웅이지만, 그와 함께 리플리의 고양이와 아이에 대한 집착(만)을 물려받았다. 나는 어쩌면 40년 넘는 세월 동안 할리우드가 발전시킨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고양이를 흑인 합성인간 남성으로 대체한 수준에 불과한 것은 아닐지 되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