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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는 질문은 응답받았는가, 중견감독들의 성적표 - 몇몇 대작 SF영화를 돌아보며

결과만 나열하자면 이렇다. 2부작으로 제작된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은 다 합쳐서 약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올해 드디어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원더랜드>는 62만 관객에 그쳤다. 기대를 모았던, 검증된 중견감독들의 SF 장르 도전은 결과적으로 아쉬운 성적표로 마감됐다. 시야를 지난해까지로 넓히면 김용화 감독의 <더 문>도 눈에 들어온다. 28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51만 관객의 선택을 받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이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중견감독들은 (굳이) 왜 (대작) SF에 도전하고, 어떤 이유로 실패하는 거냐고. 중견감독들이 SF에 매혹되었던 이유 질문의 순서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다채로워진다. ‘대작 SF에 도전했지만 실패’하는 것과 ‘대작 SF를 만들었기에 실패’하는 건 완전 다른 차원의 문제다. 중견감독들이 SF 제작에 매혹되는 것과 그것이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분리해서 다뤄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익명을 희망한 한 영화평론가의 지적처럼 “개별 작품들의 실패는 그저 개별의 완성도 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를 구태여 묶어서 어떤 경향으로 파악하는 건 단지 읽어내고 싶은 사람의 욕망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를 철저히 파편적인 개별 작품들의 실패로 보기에는 한국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받은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최근 아쉬운 결과들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요컨대 물길이 바뀌는 징후가 감지된다. 우선 중견감독들이 SF에 눈길을 돌리는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SF 장르 자체에 대한 꾸준한 애정이 있는 감독도 있고, 규모를 키우다 보니 필연적으로 SF, 사극, 판타지 장르로 좁혀지는 경향도 있다.”(영화 제작자 A) 두 가지는 다른 사안처럼 보이지만 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SF는 한국 관객들이 사랑하는 장르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불모지에 가깝다. SF가 메이저 장르처럼 보이는 건 단지 일정 이상의 규모가 필요한 ‘볼거리’에 기인한 유사성 탓이다. “최근 중견감독들의 SF는 할리우드 예산으로 보면 중저예산이다. 그럼에도 할리우드 SF, 판타지, 슈퍼히어로영화와 같은 눈높이로 평가가 이루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엄격해졌다”(영화 제작자 B)는 의견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다. “200억~300억원은 우리 시장 규모로는 블록버스터지만 할리우드와 비교하면 중저예산”이란 지적은 사태의 핵심을 꿰뚫는다. 근래 중견감독들의 대형 SF영화들은 SF 장르에 대한 이해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결과물이 아니라 규모에 근거한 볼거리로서의 무대 정도로 SF를 활용한 사례에 가깝다. 이렇게 접근하면 장르는 SF, 판타지, 디스토피아, 심지어 사극이라도 상관없다. 중견감독들이 애초에 SF 대작을 염두에 두고 도전하는 것이라기보단 규모를 키웠을 때 가능한 옵션 중에 SF적인 요소가 포함된 것이라 보는 편이 타당하다. 올해 목격하는 것은 대작 SF의 황혼이지만 사실 일련의 흐름은 훨씬 전부터 쌓여왔다. 중견감독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 (2021), 연상호 감독의 <반도>(2020)와 <정이>(2023),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도 유사한 경향 아래 놓여 있다. 물론 이들이 각각 SF적인 요소에 도달한 경위는 다르다. 축약하자면 ‘현실과 다른, 여기가 아닌 어딘가’라는 느슨한 연대로서 규모의 확장이 허용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이중 중견감독들의 대작 SF행은 차라리 해외 중견감독들이 특정 시기부터 자전적 영화에 도전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을 수 있다. 핵심은 경험과 역량을 쌓은 감독이 펼쳐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고, 그 바람을 시장이 받아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는 거다. 그게 (해외시장에서는 중저예산이지만) 한국영화에서는 블록버스터급에 해당하는 SF영화였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렇게 완성된 영화는 SF라는 장르적인 맥락에서는 아쉬운 완성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영화평론가이자 SF작가인 듀나는 <외계+인> 2부에 대한 <씨네21> 비평에서 “장르 기반 없이 ‘한국식 SF’를 만들려는 많은 시도가 그렇듯.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는 한 이 모든 건 그냥 장식이고, 장식은 그 밑의 무언가가 지탱해주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건 비단 <외계+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SF를 겉옷처럼 입은 대부분의 영화들이 이 문제를 피해가지 못했다. 블록버스터를 위한 SF는 없다 올해는 텐트폴이 없었다. 정확히는 몇해째 지속된 실패로 얇았던 텐트가 걷히고 있다. 애초에 한국 시장에 텐트폴이란 개념은 ‘다른 영화의 손실을 막아줄 만큼의 큰 흥행’이란 긍정보다, ‘실패하면 스튜디오의 명운이 휘청이는’ 부정의 의미가 더 밀접하게 다가온다. 올여름 가장 큰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였지만 여름 시장을 겨냥했다기보다는 개봉 시기가 밀리면서 여름에 안착한 케이스에 가깝다. 중견감독들의 도전이 아쉬운 결과로 이어진 건 각각의 사정이 있는 개별의 결과다. 다만 그 대부분이 규모 있는 SF였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련의 결과가 수렴하는 공통 신호는 하나다. 어느덧 한국영화 시장의 대작 선호주의는 기반을 잃어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CJ ENM,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NEW,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등 5대 영화 투자배급사가 신작 투자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적어도 당분간은 규모에 기댄 프로젝트가 나오기는 희박한 상황이다. 다만 구분해야 할 것은 이들의 실패가 한국영화의 허리를 담당할 중견감독의 실패 혹은 세대교체의 신호로 곧장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범주화만큼 선명하고, 편리하고, 위험한 작업도 드물다. 개별 영화는 각각의 사정이 있고 진실은 언제나 디테일에 깃드는 법이다. 중견감독들이 SF를 택했기 때문에 실패한 게 아니다. 중견감독들의 현재를 한두 차례의 실패로 재단하는 것도 곤란하다. 기성감독의 부진을 말하기엔 <서울의 봄>의 김성수 감독 사례가 있고, 반대로 신진감독의 상업적 도약을 말하기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가 방해가 된다. 예견된 상업적 실패를 감수하고도 자신의 길을 고수한 <리볼버> 오승욱 감독의 뚝심이 보여준 길은 어떤가. <파묘>의 장재현 감독이 확장한 대중적인 화법도 이야기해볼 지점이다. 아직까진 기성감독들이 ‘대작 SF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것인지 ‘대작 SF를 만들었기에 실패’한 것인지 단언하기 어렵다. 어떤 목적으로 카테고리를 묶을 것인지에 따라 결과는 바뀔 수 있다. 확실한 건 SF가, 아니 SF를 비롯한 ‘여기가 아닌 어딘가의 영화들’이 단지 규모의 논리로 선택될 일은 당분간 없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대기 중인 원신연 감독의 <왕을 찾아서>와 나홍진 감독의 <호프>가 이 모든 섣부른 예측을 다 뒤집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럼에도 제약과 한계를 통해 예술적인 시도가 도약해왔던 사례를 비춰볼 때 이것이 SF 장르, 나아가 한국영화 전반에 득이 되길 바랄 뿐이다.

[비평] 영화가 재난을 응시할 때, 김병규 평론가의 기후의 영화들 - <트위스터스>와 <태풍클럽>

재난이 영화를 중단한다. 정이삭의 <트위스터스> 후반부에선 거대한 토네이도가 도시를 강타하는 상황이 묘사된다. 위협적인 폭풍의 경로를 따라간 카메라가 도착하는 장소는, 뜻밖에도 영화관이다. 토네이도는 극장을 위협한다. 영화를 보던 관객들을 대피시키고, 오래된 흑백영화가 상영되던 스크린을 파괴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극장에 남은 사람들은 스크린이 있던 자리에 뚫린 구멍을 통해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잔해를 지켜본다. 재난이 남긴 광경은 영사기의 빛을 받아 스크린 속의 이미지로 남는다. <트위스터스>는 극장이라는 장소를 빌려, 이미지로서의 재난을 응시한다. 광폭한 태풍을 길들이는 첨단 과학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의 결말에 나타난 오래된 극장은 마치 20세기에 봉인된 시대착오적인 장소처럼 다가온다. 이 친밀하지만 이질적인 장소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영화는 끊임없이 재난을 불러오는가? 그리고 영화가 불러온 재난은 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관측되는가? 영화, 기후적 세계의 시스템 영화는 기후를 형성하고 그것과 대면하는 장치다. “대기만큼 문화적인 것은 없고 날씨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한 롤랑 바르트의 견해를 따르자면, 영화 매체의 표면은 이 명제를 가장 촉각적인 물질로 구체화하는 장소일 것이다. 존 포드의 웨스턴이 미국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가 공동체 재현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서부극의 영웅과 그가 속한 집단이 선보이는 아름답고 강렬한 행위를 학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의 기반이 되는 대지와 하늘의 형상을 모두가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은 미국인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지평선을 화면 상단이나 하단에 두라고 조언했듯이, 포드의 영화는 위와 아래로 분할된다. 상단에는 구름과 암석과 위대한 영웅이, 하단에는 모래바람과 강물과 소박한 사람들이 있다. 그 중간에 이따금 고개를 들어 무정형의 구름을 바라보고 지면에서 부는 바람에 옷깃이 휘날리는 수많은 인간이 위치한다. 포드가 창조한 프레임의 기후적 규칙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들을 통해 국가의 형상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내가 죽은 뒤,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나란히 서서 새벽하늘의 고요한 날씨를 지켜보는 <동경 이야기>의 히라야마처럼 영화 속의 인간은 기후를 매개로 타인과 같은 대기의 조건 아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내밀한 감정을 공유한다. 기후는 숏보다 미세한 층위에서 서로 다른 개체를 공통의 기반에 붙잡아둔다. “영상의 기본적인 기능은 관객에게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영화평론가 V. F. 퍼킨스 말처럼 영화를 행동하는 인간들의 몸짓에 관한 유희라고 가정한다면, 화면 속의 행동을 유발하는 가장 직관적인 기제는 이야기나 주제가 아니라 기후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이는 논리적인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남자가 여자의 무릎에 손을 대는 신체적 사건(<클레르의 무릎>)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토대로 둔 영화는 한때 기후를 조정하는 거대한 규약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전기 할리우드 시스템은 인위적인 대형 강풍기와 살수차를 동원해 현실의 질감을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 버스터 키턴의 <스팀보트 빌 주니어>와 빅토르 셰스트룀의 <바람>이 일으키는 압도적인 바람, 존 포드의 <허리케인>이 빚어내는 폭풍과 해일의 물질성은 숏의 고정된 장소를 뒤흔들고 행동하는 인물의 신체를 집어삼켰다. 고전기 영화가 생산하는 재난의 이미지는 서사가 설정하는 규모를 초과하는 추상적인 형상으로 화면에 적힌다. 바람과 폭풍우가 들이닥치면서 집이 무너지고 버스터 키턴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간신히 빠져나온다. 창문을 침범해 들어오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릴리언 기시의 눈동자는 과도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전영화는 이 넘쳐나는 형상을 서사의 맥락에서 애써 수습하곤 하지만,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 깊이 새겨지는 것은 순식간에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재난의 파괴적인 형상이다. 재난의 이미지는 스튜디오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을 붕괴하는 불안정성의 흔적으로 남는다. 변화무쌍한 기후는 영화를 뜻밖의 한계점으로 이끄는 망상이다. 프레임 내부를 완벽한 가상의 기후적 세계로 형성하려는 것은 할리우드만의 꿈은 아니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선착장 시퀀스에서 새벽 바다의 안개 낀 풍경을 순차적으로 비춘다. 자욱한 안개로 가득한 항구의 풍경이 나타나고 사라진 뒤, 동이 트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죽은 선원의 시신 앞에서 슬픔을 표하고 분노를 드러낸다. 선원의 죽음이 집단의 감정과 행동으로 전이되는 과정에 새벽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한 휴지 구간이 삽입되어 있다. 미세하게 변하는 항구의 기후는, 에이젠슈테인의 표현을 따르면 ‘무관심하지 않은 자연’으로 영화에 주어진다. 혁명의 몸짓을 일으키는 공동체의 감정은 내밀하게 움직이는 날씨와 무관하지 않다. 숏에 새겨진 기후의 어스름한 형체는 인간적 정념을 일으키고, 그렇게 공유된 감정이 집단의 행동으로 번진다. 그러므로 변모하는 기후를 묘사하는 영화의 실천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잇는 동반자를 구성하는 일이고, 다수의 인간이 이루는 통합된 세계를 생성하는 작업이 된다. 태풍의 인력 하지만 인물 내면의 의식과 발생하는 행위가 인과적으로 접속하지 않는 모던시네마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기후를 매개로 인간 공동체를 포획하는 고전영화의 믿음은 무너지고 만다. 소마이 신지의 걸작 <태풍클럽>은 영화의 믿음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태풍의 또 다른 역량을 실행하는 사례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마이는 불운한 시기에 도착한 연출자다. 1980년에 첫 번째 극장용 장편 극영화를 연출한 그는 영화사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영화감독이 됐다. 70년대 초반에 닛카쓰 영화사에 입사해 스튜디오의 장인적 규범에 매혹됐던 소마이가 영화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 일본영화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시대에 파산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80년대 일본영화계는 구로사와 아키라에게도 충분한 자본이 허락되지 않았고, 로망포르노나 자주적 아방가르드 같은 우회적 실천도 지속할 수 없던 시기였다. 투명한 계승도 격렬한 저항도 가능하지 않았다. 소마이와 더불어 80년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연출자인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표현을 빌리면 “필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였다. 고전기 영화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토네이도처럼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반이었다면(앞서 언급한 포드와 셰스트룀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영화산업에 흡수된 연출자들이다), 소마이는 반대로 분해돼버린 영화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임시적 인력으로 태풍을 활용했다. 태풍은 흩어진 사람들을 한 장소에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동등한 날씨의 경험을 제공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태풍클럽>은 벌거벗은 신체에 관한 기록이다. 태풍에 노출된 신체는 고립된 학교 안에서 비일상적이고 충동적인 움직임을 발명하고, 닫혀 있던 몸짓을 폭발시킨다. 비에 젖어 헐벗은 학생들의 몸은 그들의 보호자인 수학 선생 우메미야가 잔뜩 술에 취해 마주하는 약혼자 삼촌의 벌거벗은 상반신과 대비된다. 문신으로 뒤덮인 야쿠자 장르영화의 신체가 십대들의 신체를 다루는 영화에 불쑥 침범한다. 우메미야는 전자의 벗은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후자의 벗은 몸에 굴복해야 한다. 한쪽은 자유롭고 순수하며, 한쪽은 억압적이고 추레하다. 하지만 두 종류의 몸은 모두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다. 미카미에게 “15년 뒤엔 너도 나처럼 될 거야”라고 말하는 수학 선생의 예언처럼, 벌거벗은 어른들의 억압과 추함은 아이 같은 자유로움과 순수함에서 온 것이고, 벌거벗은 아이들의 자유와 순수는 언제든지 억압으로 채워질 수 있다. 수학 선생과 미카미가 창문을 바라보며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몸짓을 공유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개체가 종을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던 미카미는 어른이라는 종족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창밖으로 뛰어내리지만, 그 순간 우메미야와 같은 행위를 공유하며 경멸스러운 종족성에 가까워진다. 닫힌 세계는 외부의 침입에 잠재적으로 열려 있다. 소마이가 실천하는 영화의 의무는 주어진 모순을 간직한 채로 답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직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리고 결코 반복할 수 없는 저항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교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태풍클럽>의 롱테이크는 저항의 형식을 증명하는 숏이다. 영화를 지탱하던 기존의 질서가 유효하지 않을 때 소마이는 프레임 안으로 태풍을 침투시킨다. 통제 불가능한 태풍의 물질적 감각이 영화 내부의 질서 정연한 세계를 내파할지도 모르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들은 비바람이 불어닥치는 날씨에 노출됨으로써 외부로 열린 다른 세계와 대면한다. 대면의 과정에서 신체는 변형된다. 소마이는 그것이 기후 장치인 영화를 갱신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형식과 몸짓의 대립, 비극이자 코미디인 것 소마이의 태풍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 조건을 하나의 시공간에 가둔다.닫혀버린 공간의 형식과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몸짓, 무방비하게 젖은 학생들의 몸과 술에 취한 어른들의 몸, 집으로 되돌아오는 리에의 궤적과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는 미카미의 선택, 변화를 지나친 삶과 종결된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험을 한 자리에서 마주보게 하는 일회적 시간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은, 소마이가 형성한 서로 다른 유형의 감각이 분리불가능하게 혼재되어 있다. <태풍클럽>은 세계의 재난과 인간적 규범이 혼란스럽게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비극이자 코미디이다. 이 영화에서 비극과 코미디는 대비되는 구조로, 그러나 같은 모양으로 평등하게 펼쳐지고 있다. <태풍클럽>에 새겨진 이와 같은 모순은 당대의 영화문화를 둘러싸고 있는 소마이의 투쟁을 가시화한다. 도쿄에서 기차를 놓친 리에는 폭우를 맞으며 갈팡질팡하는 몸짓으로 같은 거리를 오간다. 돌아가야 할까?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까? 소마이에게 주어져 있던 영화(‘스튜디오의 영화’)는 너무 일찍 끝났고, 그가 추구하던 영화(‘자주적 실천의 영화’)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붕괴 전야에 놓인 영화라는 종족의 시간 앞에 개체의 열망은 무기력하다. 이 장면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사이의 격차가 발생시킨 투쟁이 소마이의 필름에 무의식적으로 새겨지는 순간이다. 태풍과 폭우라는 물질에 접촉한 인간의 몸짓은 이처럼 불확실한 것이 된다. 그리고 화면의 외형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흐트러트리는 이 장면이 지나가면, 영화는 무언가 달라지고 만다. 소마이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절대 회피할 수도 없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의 시간을 다룬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태풍클럽>의 학생들은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프레임 안팎을 오가지만 역설적으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닫힌 공간에 가둬진 소마이적 아이들은 미래로 향할 수 없다. 끊임없이 창문의 경계 사이를 오가며 프레임에서 탈출하려던 몸짓의 행렬을,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미카미의 자살이 끝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소마이에게 성장은 개체의 성숙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변화도, 미성숙한 인간이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는 선형적인 전진도 아니다. 우메미야의 불길한 예언처럼 성장은 단지 프레임을 벗어나는 일탈적 몸짓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태풍클럽>의 마지막 장면은 학교로 걸어가는 두 친구의 뒷모습을 비좁은 틀 안에 가두고 정지시키는 효과로 끝난다. 그러므로 학교/창문/프레임이라는 통제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일으키는 학생들의 몸짓도 발견할 수 없다. 태풍을 유효한 사건으로 가시화하는 공간적인 구획도 관측되지 않는다. 영화는 억압된 프레임과 자유로운 신체적 활동이 대립하는 장소에서만이 태풍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아침, <태풍클럽>의 결말이 도착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태풍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태풍이 사라진 것은 학교에 갇혀 있던 미카미의 자살이나 도쿄에서 무사히 돌아온 리에의 귀환과는 상관없는 사건이다. 소마이의 영화는 무심하게 앞으로 이행하는 시간을 따른다. 태풍은 그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을 통과한다. 학교 주변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겨 있고, 리에는 등굣길에 만난 아키라에게 키가 자란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태풍클럽>은 태풍이 치는 동안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두 학생을 전과 달라져버린 세계로 불시착시킨다. 태풍이 사라지면 개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소마이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허구적인 일회성의 모험에 동참하는 일이고, 그 경험을 몸에 새긴 채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살아가는 일이다. 소마이는 텔레비전과 영화의 속성을 비교하면서 텔레비전이 갖는 오락성은 인간 내면에 경험을 축적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영화는 그것을 공유한 인간 신체에 특정한 흔적을 남긴다. 허구를 매개로 생겨난 그 흔적은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재난의 리얼리즘 영화 속의 태풍은 세계의 질서를 정지하는 무정형의 견고한 형식이다. <태풍클럽>의 태풍은 일상의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고 고립시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고립된 장소에서 인간은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던 다른 인간과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서 태풍이 가하는 힘은 실로 가혹한 것이어서 바로 직전까지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위치하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느새 같은 무대 위에서 나란히 옷을 벗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 가혹함이란 영화 장치의 비인간적인 실행과 닮아 있는 것으로, 결말에서 미카미는 자살을 앞두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장면이 바뀌면 갑작스럽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의 편집은 인물의 심리 변화가 설명되는 시간보다 빠르다. 기후는 그렇게 어긋나 있는 영화와 인간의 시간을 조정한다. 태풍이 도착하면 서사의 그럴듯한 논리는 뭉개진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지는 서사를 초과하는 변형의 신호로 독립적인 감정을 구현한다. <태풍클럽>은 현실에 귀속되지 않는 허구적 재난의 물질성을 발명함으로써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을 매개로 출현하는 하나의 진실이며 태풍이 부는 시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재난의 리얼리티다. 앞서 말했듯이, <트위스터스>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영화관의 부서진 벽을 통해 토네이도가 남긴 잔해를 지켜본다. 그들과 비슷한 자리에 앉아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재난의 물질성은 영화관의 프레임 없이는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영화 속의 인간은 재난이 발생시키는 기후와 대기의 변형이 아니라면 변화의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 여기서 극장의 스크린에 떠오르는 재난의 이미지는 하나의 리얼리즘이 된다. 영화가 재현하는 재난의 이미지가 변모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레임에 담긴 재난은 현실을 분해하고, 분해된 현실을 매개로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인간이라는 피사체가 직면하는 변화의 시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파괴될지 모른다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는 재난의 이미지를 외면할 수 없다. 혹은 같은 의미에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세계의 외형을 갱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영화는 몇번이고 다시 재난을 응시할 것이다.

[인터뷰] “신인 창작자만큼이나 제작자에게도 도움”, PGK 창의인재동반사업 안은미 수행책임

PGK는 올해로 5회 연속 콘텐츠 창의인재동반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2월 PGK 부대표로 선출된 안은미 수행책임은 과거 멘토로서 멘토링 프로그램에 임했던 경험을 들려주며 PGK 창의인재동반사업의 중요성을 짚었다. “매달 창작지원금 150만원이 지원되기 때문에 이 기간만큼은 멘티들이 자신의 작업에만 집중할 환경이 갖춰진다. 신인 창작자들은 기성 인력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쉽지 않은데 멘토링 프로그램 기간 동안에는 멘토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기회도 주어진다.” 안은미 수행책임은 “좋은 아이템을 발견해 상업화하고, 시장을 설득하는 것이 프로듀서의 역할”임을 강조하며 “실무 경험이 적은 신인들이 공력이 쌓인 프로듀서들을 만나 작품에 관해 함께 고민하고 발전시키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PGK 창의인재동반사업이 갖는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올해는 3년 내에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 있는 프로듀서들로 멘토진을 꾸렸다. “콘텐츠 업계의 변화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멘토진 구성에도 신중을 기했다. 이번 PGK 창의인재동반사업의 과제명에 언급된 ‘창작자 내비게이팅’이라는 말처럼, 멘티가 가져온 아이템의 발전 가능성을 함께 논하며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안내를 잘해주고 싶은 바람이 크다. 멘토들 또한 본인들의 조언으로 신인 창작자들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PGK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문지원 작가, 넷플릭스 시리즈 <고요의 바다>의 최항용 감독, 드라마 <인사이더>의 문만세 작가 등 여러 인재를 꾸준히 배출해왔다. 멘토링 프로그램 후반부에 개최되는 PGK 비즈매칭 행사는 국내 주요 투자배급사 및 제작사가 참여하는 업계 최대 규모의 행사다. “실상 제작사들도 공모전이 아니면 신인 창작자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루트가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신인 창작자만큼이나 제작자에게도 PGK 창의인재동반사업이 주는 의미가 크다.” 안은미 수행책임은 신인 창작자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전에 없던 소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주제여도 전달하는 방식과 관점이 다르면 새로울 수 있다. <쉰들러 리스트> 이후로 홀로코스트가 <사울의 아들> <존 오브 인터레스트> 등 다른 시선에서 다뤄져온 것처럼 말이다. 잘 만든 작품은 시장에서 외면받지 않고, 좋은 대본은 오랜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만들어진다. 그러니 너무 겁내지 않고 계속 같이 도전해봤으면 좋겠다.”

왜 할리우드는 민주당을 지지할까?

미국 선거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정치 마니아’들에게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는 흥미진진한 이벤트로 가득한, 설레는 시간이다. 지난 7월 공화당, 8월 민주당이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공화당 전당대회는 도널드 트럼프의 막강한 팬덤을 십분 활용한 트럼프의, 트럼프를 위한 거대한 쇼였다. 반면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선후보를 카멀라 해리스로 급히 바꾼 초유의 사태 탓도 있겠지만) 당의 단합은 물론 트럼프는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한데 모으기 위해 정교하게 연출된 무대의 연속이었다. 많은 사람이 최고의 연사로 미셸 오바마를 꼽았다.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Do Something!”처럼 입에 착 감기는 구호는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법이다. 사랑하는 가족, 이웃과 함께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뭐라도 하자!’는, 아드레날린이 솟아나는 외침이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다양성을 강조한) 책은 위험하니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면서 반자동소총은 얼마든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게 자유라고 믿는 이들의 모순을 꼬집었다. 민주당이 2024년에 자유를 부르짖는다는 점은 생각해보면 꽤 참신하다. 원래 특히 정부의 간섭을 극도로 싫어하고, ‘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날 건드리지 마!’라며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한 쪽은 공화당이 아니던가? 민주당이 내세운 자유는 좀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을 누구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포용하는 사회, 또 누구나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공정한 기회가 보장되도록 모두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한, 적극적인 자유였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2024년 대선은 전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사건들이 잇달아 터지는 바람에 예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간의 관심도 초여름부터 뜨거웠다. 시발점은 지난 6월27일 진행된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TV토론이었다. 원래 TV토론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후보를 정식으로 추대한 다음 9월 혹은 10월에 여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나 두 후보가 관례를 깨고 6월에 한번 맞붙기로 합의해 애틀랜타에서 이 주관하는 토론이 열렸다. 토론 내내 바이든은 도저히 두둔하기 어려운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몇번 했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의 말실수가 이어졌고 제대로 끝을 맺은 문장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4년 전 토론 때는 계속 말을 자르고 끼어들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트럼프가 바이든 혼자 말을 더듬고 중언부언하다 무너지도록 가만 내버려뒀을까? 민주당은 초비상이 걸렸다. 이미 올해 초부터 50개 주를 돌며 후보를 추대하는 예비선거를 거의 다 치른 이후였다. 그렇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바이든이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새어나왔다. 주지사나 상·하원의원 등 기성 정치인들은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재선에 나서는 현직 대통령에게는 당내에서 도전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어겼다가는 자칫 정치 인생이 끝날 수도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대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이들이 바로 민주당에 정치자금을 내는 후원자들, 소위 ‘큰손‘들이었다. 그중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연예인들도 있었다. 조지 클루니는 아예 <뉴욕타임스>에 “나는 조 바이든을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후보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바이든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아니, 연예인이 정치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관여한다고? 클루니가 왜 여기서 나오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나락 퀴즈쇼>의 단골 소재인 한국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민주당에 많은 돈을 후원해온 큰손들은 너도나도 바이든의 재선 도전에 우려를 표명했고, 클루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도 그 대열에 동참했을 뿐이다. 다소 식상한 표현이지만 미국 선거는 쩐의 전쟁이다. 요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열면 온통 정치 광고뿐이다. 공식 선거기간이 따로 없는 미국은 선거 이튿날부터 다음번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TV와 인터넷에 써야 하는 광고비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땅덩이는 좀 큰 나란가. 핵심 경합주 7곳의 인구만 6100만명이며, GDP는 독일과 맞먹는다. 여기에 전국에 지역 사무소 열고, 집집이 문 두드리며 유세하고 전화 돌릴 선거운동원, 자원봉사자를 모으는 것도 다 돈이다. 선거 열기가 고조되면 여론조사 지지율만큼이나 누가 더 후원금을 많이 모았느냐가 뉴스가 된다. 돈이 많다고 선거에서 반드시 이기는 건 아니지만 돈이 떨어지면 웬만해선 선거를 완주하기 어렵다. 그래서 후보들이 언론 인터뷰나 현장 유세보다도 더 신경 쓰는 행사가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후원 행사인데, 여기서 조지 클루니 같은 유명 연예인이 또 등장한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은 주요 후보에게 직접 후원도 하지만 본인이 마당발인 경우 기업인을 포함한 ‘부자 친구’들과 유력 정치인들을 이어주기도 한다. 왜 할리우드는 민주당을 지지하나? 조지 클루니가 정치에 유독 관심이 많은, 특이한 셀러브리티는 아니다. 오히려 배우나 가수, 심지어 스포츠 스타에 이르기까지 미국 연예인들은 대개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밝히고 선거에서도 특정 이슈나 후보를 지지한다. 민주당 전당대회에도 존 레전드, 줄리아 루이스 드레퓌스, 민디 케일링, 케리 워싱턴 등이 축하 공연을 하거나 연설을 하거나 행사를 진행했다. 비욘세는 아예 바이든이 대선후보 자리를 해리스에게 물려준 이튿날, 자신의 노래 을 해리스 캠프가 테마곡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어 같은 곡을 소셜미디어 광고에 무단으로 입힌 트럼프 캠프에는 당장 멈추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트럼프 캠프는 곧바로 해당 광고를 삭제했다. 트럼프 캠프는 영화 <타이타닉>의 삽입곡 을 도용했다가 셀린 디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거절당한 데 이어 밴드 푸 파이터스의 노래 를 유세 현장 배경음악으로 썼다가 또 거절당했다. 푸 파이터스는 트럼프 캠프에서 저작권료를 받으면 그 돈을 모두 해리스 캠프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연예인 중에는 유색인종이나 여성이 많은데, 그렇다면 연예계의 백인 남성들은 어떨까? 물론 트럼프를 지지하는 연예인도 있겠지만 수나 기부금을 놓고 봤을 때 할리우드에서는 민주당 지지세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말 그대로 아저씨(Dude) 역을 맡았던 제프 브리지스를 포함해 유명 백인 남성배우들은 아예 ‘해리스를 지지하는 백인 아저씨 모임’(White Dudes for Harris)을 출범시켰다. 이들은 줌으로 진행한 콘퍼런스 콜에서 “아저씨들이여, 솔직하게 나서서 해리스를 지지하자”라고 독려했고, 그 자리에서 수백만달러를 모금했다. 할리우드가 민주당을 선호한다는 건 선거자금 데이터에서도 드러난다. 애덤 보니카 스탠퍼드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의 논문 ‘시장의 정치 이념 분포’에 따르면(아래 사진 참조), 미국 기업들이 민주당과 공화당 중 어디를 지지하느냐, 어디에 후원금을 더 많이 내느냐는 산업군에 따라 갈린다. 할리우드가 속한 엔터 업계는 학계, 언론계, IT 업계와 함께 왼쪽(민주당)으로 쏠리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반대로 농업, 부동산, 건설업, 에너지 분야 기업들은 공화당을 더 많이 후원해 그래프의 오른쪽이 삐죽 솟아 있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뒤로도 이런 추세는 대체로 그대로다. 그렇다면 왜 할리우드에선 민주당 지지세가 강할까? 변호사들이나 금융업처럼 동종 업계 안에서 두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고루 나뉘지 않은 걸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거를 바라보는 배우와 연예인들이 한 말을 토대로 추측해보거나 영화라는 예술과 작업의 본질을 떠올리면 몇 가지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트럼프 지지자를 찾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다양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카메라로 담아낸 극이라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성은 핵심 가치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양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부터 속에 있는 생각까지 아우른다. 인종, 성별, 출신 국가는 물론이고, 누구를 사랑하는지(성적 지향), 무엇을 믿거나 믿지 않는지(종교), 가치관, 습관, 기호까지 다 포함된다. 예술은 인간의 복잡한 면면을 포착해 담아내는 작업이다. 영화도 예술의 한 장르이므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인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런 믿음을 자연스럽게 체화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할리우드다. 그런데 트럼프가 주장한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운동은 다양성과 거리가 먼 구호로 가득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억압하는 세력을 대변하는 트럼프는 사실상 백인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으로 보일 만한 구호를 매일 외친다. 할리우드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이 절반이 안되는 ‘다양성의 세대’인 Z세대에서 트럼프가 특히 인기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지난해 할리우드 작가들로 구성된 미국 작가조합은 주요 할리우드 제작사를 상대로 벌인 파업에서 귀중한 승리를 거뒀다. 인공지능이 영화나 드라마 제작에 미칠 영향을 빠르게 파악해 협상을 주도한 작가조합의 전략도 물론 주효했지만 배우들이 연대 파업에 나선 것도 제작사들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 한편을 만드는 데 수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 노동이 든다. 이 자명한 사실을 매일 몸소 체험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또한 할리우드다. 해리스의 민주당과 트럼프의 공화당은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도 정반대다. 트럼프는 얼마 전 일론 머스크와 인터뷰 중에 “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속 시원하게 다 잘라버렸다”라며 머스크를 극찬했다. 2024 대선 캠페인을 영화로 만든다면 해리스는 바이든이 그동안 모은 선거자금을 그대로 물려받아 선거를 치르고 있다. 선거자금에서는 트럼프의 공화당보다 늘 앞섰다. 선거자금은 물론 중요하지만 돈은 표가 없다. 미국 선거제도도 다른 민주주의국가와 마찬가지로 1원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원칙이 적용된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나면 한동안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후보와 정당 지지율이 오르는 컨벤션 효과가 나타난다. 컨벤션 효과가 어느 정도 걷힌 9월1일 현재, 해리스와 트럼프의 지지율 여론조사는 매우 근소한 차이를 보이며 초박빙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2016년 (힐러리 클린턴보다) 선거자금을 덜 모으고 훨씬 덜 쓰고도 짜릿한 승리를 거둔 기억이 있다. 사회의 주류와 엘리트들에게 ‘무시당한’ 이들의 절망과 오랜 세월 쌓인 분노를 공략해 만들어낸 극적인 승리였다. 특히 중서부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백인 남성 노동자들의 지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때 제조업을 기반으로 잘나가던 곳에 살던 노동자들은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졌고, 여기에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 위기’까지 겹치면서 절망의 죽음에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전락했다.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트럼프가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뽑은 오하이오주 상원의원 J. D. 밴스도 바로 그런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다. 밴스의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는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됐고,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돼 호평을 받았다. 올해 해리스와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을 다큐멘터리로 만든다면 어떤 결말이 나올까? 선거란 냉정한 승부의 세계이기도 해서 ‘졌잘싸’의 메시지를 담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같은 영화는 만들기 쉽지 않다. ‘영화 같다’라는 표현으로 부족한, ‘에이, 영화도 이렇게 쓰면 욕먹지!’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이번 미국 대선에선 정말 쉴 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해리스와 트럼프 캠프 중 어느 쪽에서 열심히 모아둔 필름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버려질지는 앞으로 남은 두달여의 시간에 달렸다.

[인터뷰] 김삼순의 일과 사랑, 성장 서사를 중심으로 새 편집을 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 김윤철 감독

영화와 드라마를 1.5배속으로 시청하며 원작보다 유튜브 요약본을 선호하는 시청 방식은 현 세대에게 굳어진 지 오래다. ‘서사 몰아보기’를 추구하는 시청자들의 니즈에 맞춰 웨이브가 ‘뉴클래식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2000년대 초반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를 원작자의 손을 거쳐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로, 첫 타자는 김윤철 감독의 <내 이름은 김삼순>(이하 <김삼순>)이다. 파티시에 삼순(김선아)과 그를 고용한 레스토랑 주인 진헌(현빈), 진헌의 옛 연인 희진(정려원), 희진의 주치의 헨리(대니얼 헤니)의 일과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2005년 방영 당시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다.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의 행보, 클리셰를 비켜간 연출은 19년이 지난 지금도 매력을 잃지 않는다. 9월6일 <내 이름은 김삼순> 감독판 공개를 앞두고 만난 김윤철 감독은 “편집을 위해 작품을 다시 보며 많은 것들을 새롭게 느꼈다”며 답변을 이어갔다. - 영화가 아닌 드라마가 감독판으로 재편집돼 나오는 건 전에 없던 시도다. 웨이브의 ‘뉴클래식 프로젝트’를 제안받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 무척 놀랐다. SNS를 하질 않아 유튜브에서 <김삼순> 편집본이 회자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처음 감독판을 제안받았을 때도 “왜요?”라고 반문했다. 8부작으로 줄이는 게 도리어 원작을 훼손시키는 건 아닌지, 정말로 아직도 다들 <김삼순>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매번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물어봤더니 모두가 이 프로젝트를 하자고 하더라. 자기 후배, 친구들도 아직도 가끔씩 본다면서 말이다. 그때부터 추천받은 <김삼순> 유튜브 요약본 몇개와 원작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김삼순>을 다시 본 건 19년 만이다. 세번 정도 보고 나니 편집의 밑그림이 그려져서 하겠다고 했다. - 어떤 밑그림이 그려지던가. = 작품을 다시 보며 느낀 건 클리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용인됐지만 현재로선 문제가 될 행동들이 있었다. 가령 희진이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밝혔을 때 진헌이가 폭력적으로 대응한 것이 그에 해당한다. 물론 이건 19년 전에도 작가와 논의했던 부분이긴 하다. 그런 것을 들어내고자 했고, 8회차로 줄이기 위해선 김삼순의 일과 사랑, 성장 서사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삼순이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소구되는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순과 진헌, 희진과 헨리 네 사람을 중심으로 이들의 관계성과 로맨스에 관해 다룬다면 클리셰는 덜어내고 훨씬 속도감 있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편집의 터닝 포인트가 된 건 삼순이의 한라산 등반 장면이었다. 원작에서는 이 장면이 16부 중 12부의 엔딩이지만 감독판에서는 8부 중 7부의 엔딩이 됐다. 원작의 13~16화가 한 화로 압축된 것이다. 사실 삼순과 진헌이 재회한 이후의 이야기는 드라마의 에필로그나 다름없다. 그래서 후반부를 대폭 압축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다. 이런 그림이 그려졌기에 감독판 편집 제안도 수락할 수 있었다. -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많이 덜어내야 했을 텐데 아쉽진 않았나. =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특히 희진과 헨리의 관계가 그랬다. 처음엔 환자와 주치의의 관계로 소개됐다 갈수록 친구이자 연인이 되어가는 디테일한 감정 변화를 많이 덜어냈다. 방영 당시 인기가 많았던 이영(이아현)과 현무(권해효)의 로맨스, 잠시 쉬어갈 틈이 되어준 일상의 풍경, 극의 톤을 밝혀줬던 영자(김현정)의 코미디 연기 같은 신을 눈물을 머금고 뺐다. 그럼에도 너무 달려나가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쉬어가는 신들을 적절히 배치하려 했고 화질과 음질도 많이 개선시켰다. - 드라마 회차가 8~12부작으로 줄고 유튜브 요약본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이 늘었다. 이러한 콘텐츠 형식과 시청 방식의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 1991년에 MBC에 입사했는데 그때 기준으로 미니시리즈의 회당 방영시간은 50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다 드라마 시장이 치열해지면서 방영시간이 60분까지 늘어났다. 미국, 일본의 드라마는 10~12부작이 많고 방영시간이 회당 45분 안팎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 측면에서도 대하사극이 아닌 이상 16부작을 채우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서 서사를 다루는 방식이나 시청자의 집중 시간을 고려할 때 회차와 상영시간이 줄어드는 건 오히려 적절해 보인다. - 19년 전 <김삼순>의 준비 과정부터 물어보고 싶다. 각본을 쓴 김도우 작가에게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고. = 미니시리즈를 제작하기 위해 주변을 수소문하다 드라마 <눈사람>을 쓴 김도우 작가를 추천받았다. 정주행해보니 너무 잘 쓴 작품이었다. 형부와 처제의 연애를 다루기 쉽지 않았을 텐데 섬세하게 표현한 걸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어떻게든 같이 해야겠다’ 싶었다. <김삼순>은 인터넷 소설이 원작이다. 삼순이가 건강하고 강한 사람이라는 점, 직업이 파티시에란 점에 매력을 느꼈다. 소설을 바탕으로 김도우 작가가 시나리오 1~2부를 완성해 보냈는데 정말 재밌었다. 드라마타이즈가 워낙 잘돼 그때부터 급물살을 탔다. - 삼순이는 흔한 유형의 여자주인공이 아닐뿐더러 첫 등장 신조차 평범하지 않다. 그런 삼순이에게 호감을 느끼고 삼순과 진헌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1~2화 연출에 힘을 쏟았다. = 삼순이의 선자리를 훼방놓은 진헌이 남산으로 향하는 삼순이를 계속 따라가는 장면이 있다. 그때부터 삼순과 진헌, 희진이 케이블카를 타고 스쳐 지나가기까지의 시퀀스가 1~2화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다. 특히 남산 신은 삼순과 진헌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촌스러우니까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도록 했다. BGM으로 쓴 니나 시몬의 는 진헌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반어적인 인용이다. 이런 식으로 아는 사람만 짚어낼 수 있을 요소들을 배치했다. 현장에서 삼순과 진헌이 투닥거리며 걷는데 둘의 케미스트리가 모니터를 통해 그대로 전달됐다. 그 시퀀스를 찍고 생각했다. ‘망하진 않겠구나.’ (웃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신이기도 하다. - 그 밖에 자주 회자되는 신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희진이 진헌의 변화를 감지하고 주차장으로 걸어나와 우는 신이다. 이 장편을 포함해 롱테이크를 자주 활용했는데, 인물의 감정선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만큼 현장에서의 자유도가 높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 기본적으로는 대본을 존중하되 해석의 기준은 감독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그렇지만 배우들에겐 최대한 열어놓는다. 리허설은 반드시 하지만 배우의 애드리브나 의견이 좋을 경우 받아들이는 식이다. 물론 내 마음이 동해야 하지만 말이다. (웃음) 콘티를 짜고 숏을 설계할 때도 철저하게 배우의 연기와 호흡을 중심에 둔다. 배우가 걷다가 감정이 달라지거나 움직임이 생길 때 컷을 할 수 있고 때론 그게 필요하겠지만, 자칫하면 감정과 호흡이 죽어버린다. 끊고 다시 촬영하면 비슷한 감정은 나올 수 있지만 결코 같은 감정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롱테이크가 많아졌다. 롱테이크로 촬영한 또 다른 신 중 노래방 신을 좋아한다. 이번에 다시 편집하면서 김자옥 선생님을 뵈니 마음이 슬펐는데…. 당시에 대본 보자마자 가수인 남편 오승근씨에게 어떤 곡을 선곡할지 물어보셨다고 하더라. 그 과정을 거쳐 <울릉도 트위스트>와 <찰랑찰랑>을 고르신 거다. 감독판에는 한곡만 담겼지만 정말 에너지가 좋았던 신이다. - 삼순이의 경우 다양한 각도의 클로즈업숏이 유독 많았다. = 당시 드라마에서 자주 쓰던 바스트숏이 적긴 하다. 클로즈업은 일부러 과감하게 썼다. 장르가 코미디이기 때문에 왜곡되더라도 카메라를 인물 가까이에 붙이려고 애를 썼다. 보통 촬영감독들은 배우들이 밉게 나오니까 금기시하는데 다행히 배우가 흔쾌히 응해줬다. - 그런 다양한 시도들이 <김삼순>의 긴 생명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 TV드라마에서 잘 쓰지 않는 문법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긴 했다. 기법적으로는 앞서 말한 롱테이크 촬영이나 당시 오퍼레이터조차 많지 않았던 스테디캠을 자주 활용한 것도 포함한다. 마스터숏을 남용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연출에서의 클리셰도 많이 버리려고 했는데 예를 들면 여자배우들이 샤워하고 나왔는데도 메이크업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런 신들은 다 노메이크업으로 가자고 했다. 삼순이가 울 때 마스카라가 새까맣게 번지던 연출도 같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제 삶이 그러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이 드라마는 다른데, 이 드라마는 진짜 같은데’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20년 전엔 파티시에라는 직업조차 익숙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삼순이의 작업 공간, 작업 공정, 결과물을 디테일하게 보여줬고 드라마 방영 이후 디저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졌다. = 고백하면 그땐 나도 잘 몰랐다. 당시엔 디저트 문화가 지금처럼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취재도 하고 관련 공부를 많이 했다.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 거란 확신은 있었다. 예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건 어쨌든 유쾌한 일이니까. 디저트가 맛있어 보이도록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무척 공을 들였다. - 김선아 배우와 <김삼순>에 이어 <품위있는 그녀>에서도 합을 맞췄다. 연출자로서 그가 어떤 힘을 지닌 배우라고 보나. =김선아 배우와의 인연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아씨가 신인이던 시절, 단막극 <베스트극장-그녀의 화분 NO.1>을 같이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무척 좋았다. 그러다 한동안 김선아 배우가 등 영화 작업만 했는데, 그걸 보고 다시 같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정말 철저하게 준비하더라. 살을 찌웠다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캐릭터에 아주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간 내공을 탄탄히 쌓았다는 게 느껴졌다. 선아씨는 자신의 본능과 직관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다. 물론 수많은 준비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배우를 좋은 연기자라고 여기는데 그 대표적인 배우가 선아씨라고 느낀다. <품위있는 그녀>의 복자는 삼순과는 다른 유형의 캐릭터지만 직관적인 연기가 필요하다고 여겨 같이하게 됐다. - 김선아 배우 외에는 전부 신인으로 주연을 기용했다. 현빈 배우는 어떤 부분이 눈에 띄었나. =당시 현빈 배우가 <아일랜드>에 출연했는데, 크게 주목받지 않았음에도 정말 잘생긴 루키가 있다는 소문이 방송가에 돌았다. 이후 미팅을 가진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지만 예의 바르고 반듯하게 잘 자랐다는 인상이 강했다. 아무리 나쁘게 행동해도 사람들이 착한 이미지로 받아들이겠구나 싶은 느낌이랄까. 진헌 또한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곧바로 캐스팅했고 결과적으로 정말 잘해줬다. - 배우 정려원과 대니얼 헤니 역시 신선한 캐스팅이었다. =려원 배우에게도 했던 이야기지만 당시엔 그가 가수였다는 걸 정말 몰랐다. 려원씨를 본 건 시트콤 <프란체스카>에서였는데, 상투적이지 않은 연기가 눈에 들어왔고 미팅했을 때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미팅 끝나자마자 바로 같이하자고 했다. 대니얼 헤니씨가 제일 사연이 많다. 정말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김선아 배우의 매니저가 다른 배우의 광고 촬영장에서 헤니씨를 보고 내가 찾는 배우라는 직감이 왔다더라. 너무 잘생기고 영어도 잘했다고. 그래서 만나봤더니 정말 잘생겼었다. (웃음) 경험은 없지만 연기 욕심이 있어 브로드웨이에서 연기 워크숍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미국에 가야 한다길래 연기 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자기가 어떻게 자랐는지부터 쭉 들려줬는데, 어릴 때 농구 선수를 꿈꾸다 그만뒀다고 했다. 그래서 후반부에 농구 장면이 들어간 거다. 확실한 개런티가 있어야 한국에 올 수 있다길래 과감히 캐스팅을 했고, 그렇게 처음 촬영한 신이 희진의 집 앞에서 기다리다 희진을 안아준 신이다. 예전엔 내가 배우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지만 일을 하다 보니 결국 배우는 발견하는 거였다. 젊을 땐 상대적으로 눈이 밝았고, MBC가 믿고 맡겨줬기에 좋은 배우들을 운좋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지금은 다수의 드라마가 사전 제작되지만 20여년 전엔 실시간으로 촬영해 방영하는 것이 당연했다. 작품의 인기를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을 텐데. = 딱 한번 있었다. 항상 촬영과 편집의 반복이라 집에 들어갈 새가 없었는데 우연히 <김삼순> 12화의 한라산 장면을 집에서 보게 됐다. 한라산 정상에 현빈이 등장하자마자 아파트 창문을 통해 비명이 들렸다. 월드컵 때처럼 말이다. (웃음) 그게 개인적으로 시청자들의 피드백을 체감한 유일한 순간이다. - 드라마가 종영한 이유 삼순과 진헌의 결혼 여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삼순은 차라리 맞선남과 연애를 했어야 한다는 바람도 언급되곤 했는데, 삼순과 진헌의 미래를 생각해본 적 있나. = 헤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의 결말까지 고려할 때 이런 경우 대체로 헤어지지 않나라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삼순이가 맞선남을 만나진 않았을 것 같다. 아예 다른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결국 결혼은 안 했을 것 같다. - <김삼순>을 보고 자라지 않은 세대에게도 여전히 작품이 소구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삼순이 주체적이고 강렬한 자아를 갖고 있기 때문 아닐까. 그런 자아를 가진 캐릭터는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원한다. 그리고 삼순, 이영과 같이 여자주인공들이 각자의 성적 욕망에 관해 지상파 드라마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는 건 무척 파격적이었다. 그런 인물의 솔직함 또한 19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삼순>이 유효한 이유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녀 관계에서 변하지 않고 유지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김삼순>이 나의 첫 미니시리즈였다. 19년간 안 보던 작품을 보니 고향집에 돌아와 세간살이를 실펴보는 느낌이 들었다. 대단히 잘 지은 집도 아니고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튼튼하게 지었구나 싶다. 내게 이런 생각을 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다. 그래서 <김삼순> 감독판을 시청자들이 어떻게 봐주실지도 무척 궁금하다.

[인터뷰] 뜨거운 나날을 맞이하며, <아름다운 우리 여름> 최하늘 작가, 정다형 감독

네 아이를 동시에 잉태하는 일은 100만분의 1의 확률로 여겨진다. 네 쌍둥이는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10대의 어느 날 헤어진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아름(유영재), 다운(손상연), 우리(김민기) 형제가 쌍둥이 나라(김소혜)를 잃고 첫 여름을 나는 이야기다. 상실과 이별, 이후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자기혐오라는 문제를 따뜻한 감성으로 만져낸 최하늘 작가와 정다형 감독. 두 신진 창작자는 “드라마가 삶에 주는 용기”를 믿는다고 말한다. - 어떤 과정을 거쳐 오펜(O’PEN) 당선작 <아름다운 우리 여름>이 영상화했나. 정다형 한해 30편 정도의 당선작 중 영상화는 10편 내외로 이루어진다. 스튜디오드래곤 소속 연출자는 대본 중 1~3순위를 지정하는데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내게 0순위였다. 인물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을 보내려면 아름답지 않은 시절도 견뎌야 한다는 역설적인 메시지가 제목부터 내용까지 관통하도록 쓴 건 작가님이 유일했다. 예산, 세일즈, 흥행 등 현실적인 조건으로 제작 여부가 결정되는데 이 각본은 기획 포인트 역시 뚜렷했다. 최하늘 결말이 포함된 8부작 기획안을 제출해 당선되었고 최종적으로 2부작 제작·방영이 결정되어 지난 6개월간의 다시 쓰기 과정이 있었다. 전년도 오프닝 작품이자 감독님 전작인 <복숭아 누르지 마시오>를 보니 왜 우리 두 사람을 매칭했는지 바로 알겠더라. 나도 한 감수성 한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의 감수성과 섬세함은 정말 독보적이다. (웃음) 감독님은 다섯 주인공 각각에 대한 질문지를 써주셨고 나는 내가 창조한 인물들이 되어 답해야 했다. ‘쌍둥이는 서로의 연애를 목격한 적 있을까요?’, ‘나라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어떤 노래가 있었을까요?’ 서로 문답을 주고받으며 인물들을 생각하니 이야기 속 아이들에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쌍둥이 여동생을 잃은 세 형제(아름, 다운, 우리)가 가정의 붕괴로 고통받는 소녀 여름(장규리)을 만나는 이야기다. 최하늘 가까웠던 지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의 마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고루 쓰다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별 후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옆집 사는 여름이 역시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자신이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아이다. 서로 다른 이유로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고 보았다. 정다형 그래서 고독에 대한 이해나 나름의 철학이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디션 과정에서 내면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고 그에 진솔하게 부딪혀오는 배우들에 끌렸다. 작가님에게도 비밀로 지키고 있지만 20대 초중반인 그들 또한 삶에서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있었다. 대본과 공명하는 개인사에 관해 묻고 찬찬히 대화를 나누며 캐스팅을 결정했다. - 늘 그렇듯 단막극은 이제 막 시작하는 신인급 배우들에게 소중한 기회다. 최하늘 개성이 다른 세 쌍둥이 남자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각본의 착상이었다.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대한, 민국, 만세처럼. (웃음) 학원물인 만큼 여학생들이 한번쯤 짝사랑해본 유형별 이상형의 남자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감독님은 어른스러운 모범생 첫째, 장난기 많고 스포티한 둘째, 아리송하고 비밀스러운 셋째 역에 꼭 맞는 배우들을 찾아와주셨다. 정다형 다섯 주연배우가 모두 내 새끼 같고 소중하다. (정 감독의 핸드폰 배경은 다섯 배우를 나란히 두고 찍은 사진이다.) 나라 역의 김소혜는 촬영 시작 전 혼자 로케이션을 돌아다니면서 나라의 마음을 상상하고 편지를 써서 주었다. “나라는 고개를 들어 빛을 마주할 것이다. 자연스럽고 싶던 것에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곳에서 뜨거운 나날을 뜨거운 마음으로 흠뻑 만끽할 것이다”라고. - 오는 9월14~15일 방영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관람 포인트를 소개한다면. 최하늘 세 쌍둥이 앞에서는 티 내본 적 없지만 나라와 이별하고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로 버티는 엄마 혜진(신은정)의 모습이 나온다. 2부 후반에 모종의 발견을 계기로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드는 그의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정다형 아름, 다운, 우리, 여름과 세상을 떠난 나라가 다 함께 모이는 장면이다. 물론 리얼리티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다. 그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조금도 드라마 같지 않고 현실의 가족처럼 느껴졌다. 구성원을 먼저 떠나보낸 적 있는 유가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감정,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가장 잘 보이는 이 장면이 시청자에게도 소중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작업 시 나의 필수템 최하늘 이어폰. 작품을 쓸 때 그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면 감정에 몰입한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많이 들었다. 정다형 연필과 노트.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현장에서 ‘오늘은 날씨가 어땠고 배우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게 귀여웠다’라고 적어놓으면 다음 회차에 슬쩍 비슷한 장면을 넣어본다. 나를 자극한 다른 작품 최하늘 2005년 드라마 <태릉선수촌>의 대사. 유도 후보 선수였던 민기가 양궁 금메달리스트 수아에게 “저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10점을 쏜 거냐” 물었을 때 수아가 대답한다. “그냥 판때기잖아”. 정말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데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프로필 문구로 삼았던 대사다. 정다형 “텔레비전은 재즈다”라는 문장. 방송 PD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읽었다. 영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한계들을 극복하며 즉흥적으로, 동시에 가장 진실되게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수경의 TVIEW] '손해 보기 싫어서'

‘꿀비교육’ 교육 1팀 과장 손해영(신민아)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을 ‘가정위탁’하느라 ‘엄마, 아빠, 나’ 셋이서만 살고 싶다는 소원을 외면한 부모에게 상처받아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능력은 있지만 단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축의금 손실, 승진 배제 등 회사에서 손해를 봐야 하는 게 싫었던 해영은 순전히 ‘손해 보기 싫어서’ 가짜 결혼식을 한다. 해영의 가짜 남편 김지욱(김영대)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탓에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 생각하며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려고 한다. tvN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는 ‘가짜’로 시작한 이들의 관계가 ‘진짜’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로맨틱코미디물이다. 물론 ‘로맨스’만 있는 건 아니다. 계산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해영은 사실 공감적이고 이타적인 인물이다. 자신의 부모와 사랑을 나눠 가진 위탁아동을 미워했지만 그들을 가족으로서 돌본다. 또한 ‘남편’인 지욱을 ‘편’이라 부르며 가족으로 여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모순적인 건 꿀비교육이다. 사교육 회사인 꿀비교육은 “우리의 진짜 적은 저출생”이라며 기혼·유자녀 직원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준다. 어쩌면 바람직해 보이는 이곳의 가족 중심 제도는 비혼·비출산 등 다양한 선택을 하려는 이들에게는 차별적이다. 게다가 ‘가족’을 강조하는 오너 일가는 회장의 잦은 외도로, 사실상 전통적 가족 기능을 상실한 가족이다. 드라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결혼의 의미, 결혼이 여성에게 미치는 (부정적)영향,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기업 문화, 직장 내 괴롭힘, ‘관심’으로 포장된 사생활 침해, ‘악플’의 해악 등 각종 사회적 편견과 통념을 유쾌하고도 단호하게 비판한다. 로맨스의 외피를 둘렀지만 알고 보면 ‘참교육’ 드라마. Check Point 위탁아동으로 해영과 만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해영과 함께 살고 있는 남자연(한지현)이 ‘연보라’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는 ‘19금’ 웹소설 <사장님의 식단표>는 오디오 드라마 계약도 성사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는 설정인데 현실 세계에서도 <손해 보기 싫어서>의 스핀오프 드라마로 제작되어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작은 빛 아래, ‘사람임을 잊지 않고서’

삼촌 시언(권해효)과 학교 건물에서 나오던 전임(김민희)은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전임이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안다. 영화 도입부에서 전임은 시언에게 촌극 연출을 부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들려준다. 원래 연출을 맡았던 이가 함께 연습하던 학생 일곱명 중 세명을 따로 만났고, 그 사실을 접한 세명이 그만뒀으며, 공연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지만 남은 학생들이라도 새로운 촌극에 출연시키고자 시언을 불렀다는 것이다. 전임과 시언은 이 이야기를 조금은 조심스럽게, 별 어처구니없는 일도 다 있다는 듯 가볍게 나누고서 여기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밤 장면에서 영화는 이 사연을 깊은 감정으로 다시 일깨운다. 시언, 교수 은열(조윤희)과 술자리를 가진 후 전임은 혼자 학교로 돌아와 건물 바깥에 담요를 깔고 조그마한 램프를 켜는데, 잠시 누웠다가 일어나서는 어딘가를 향해 손짓한다. 그의 부름에 여학생 세명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고 이제 네 사람이 램프를 중심으로 둘러앉는다. 이들은 앞서 전임이 시언에게 언급했던, 연출자의 행각 때문에 연극을 관둔 학생들이다. 전임이 이들을 더 가까이 모이게 한 후 묻는다. “마음이 편해졌어?” 학생들은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전임이 학생들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편해져라, 편해져라.” 마치 그 주문이 불러온 듯 이어지는 밤하늘 장면에는 꿈처럼 그믐달이 떠 있다. 어둠 속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한 채, 네 여자가 옹기종기 붙어 앉아 있다. 이 장면은 어쩐지 슬프다. 동시에 강하다. 그것은 옅은 빛을 겨우 붙잡고 깜깜한 세상을 버티는 연약한 존재들의 얼굴이지만, 그 암흑에 쉽게 잠식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다정한 유대감의 강력한 초상이기도 하다. 인위적인 조명 장치를 쓰지 않고 어둠을 꾸밈없이 받아들이면서도 그 심연에서 빛의 감각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가 이 순간을 빚어낸다. 이처럼 소박한 방식으로 이토록 절실한 이미지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앞선 전임의 말에서 소문 혹은 소동의 주인공들처럼 흘려 지나간 익명의 상처 입은 학생들은 이 장면이 최선을 다해 밝힌 아주 희미한 빛 안에서 온전하게 사랑받는다. 그러니 이 장면을 먼저 경험한 우리로서는, 지금 전임을 불쑥 찾아온 낯선 남자를, 그의 말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좋게 봐줄 수가 없다. 역시나 그는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다고 억울해하며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화를 내며 반문하기도 한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잘못입니까? 그런 일로 공적인 일을 중단하게 해도 되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이러는 건데요?” 화창한 가을빛에 드러난 그의 수치심 없는 얼굴과 목소리는 앞서 네 여자의 초상이 이룬 정직함을 모욕하는 것 같다. 전임은 그 초상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그냥 그렇게 하면 안되는 거였어요. 같이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여준원씨 본인이.” 김민희는 단 일초도 놓치지 않고 준원(하성국)의 변명, 호소, 분노에 모든 촉을 세워 눈빛, 표정, 제스처, 음성의 결로 변화를 일으켜 반응함으로써 이 남자를 향한 전임의 짜증과 경멸, 얼마간의 두려움과 천연덕스러움을 표현한다. 준원에게는 도무지 호감이 생기지 않지만, 그의 그런 면모를 전임이 되받아치는 이 장면의 흔들림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전임은 세 학생을 화면 안으로 따뜻하게 불러들이던 손짓을 여기서는 고집불통의 남자를 화면 밖으로 냉정하게 쫓아내는 데 사용한다. 전임의 명령대로 그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네 여자가 옹기종기 모인 이전 장면의 아름다움과 양립할 수 없는 준원의 추한 모습, 그리고 이를 묘하게 희화화하며 부각하는 김민희의 눈부신 연기에 의해 우리는 망설임 없이 판단하고 정리한다. 이 남자는 악당이다. 그는 여학생들을 농락하고, 학과에 큰 피해를 주고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는 뻔뻔한 바람둥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런 남성상이 크게 낯설지는 않지만, 중요한 차이는 그가 그저 여자에게 구애하는 남자의형상이 아니라 학과에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몰고 온 일종의 ‘사건’으로 다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생들을 다치게 하는 위험한 사태는 없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확신 앞에서 문득 걸리는 지점이 있다. 시언과 함께 건물을 나서던 전임이 준원을 발견하고 화면을 나간 뒤, 그 장면은 어떻게 끝났던가? 우리는 시언이 화면을 떠나지 않고 준원과 전임이 이야기를 나누게 될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계단에 앉는 모습을 보았다. 준원과 전임이 대화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관객 중에는 우리만이 아니라 시언도 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안될 것 같다. 시언은 누구인가. 전임과 은열이 시언에게 하는 말에 귀 기울이자면, 그는 훌륭한 배우이자 연출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사회에서 억울하게 매장되어 오랜 시간 심적으로 고통을 받고, 지금은 강릉에서 조용히 서점을 운영하는 ‘과거’의 예술가다. 그 역시 그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틈날 때마다 토로한다. 누구의 입을 통해서도 구체적인 사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그를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몇년째 일을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영화 후반, 그가 누나와 절연한 계기가 “너 빨갱이니?”라는 말이었다고 전임에게 밝히며 흥분을 참지 못하는 대목에서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와 관련해 그가 겪은 일들의 세부가 아니라 외부의 시선이 한 예술가를, 혹은 그의 세계를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시언은 그 폭력적인 시선의 희생자다. 그러니까 그런 이력의 소유자가 준원과 전임의 모습을 관람하는 중이다. 시언이 자신이 본 것을 따로 언급하는 장면은 이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금하다. 그는 이들의 장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렇게 잊힌 준원의 장면이 느닷없이 다시 영화에 침입하는 건 중반을 지나서다. 시언이 전임의 작업실에 처음 방문해서 작품을 구경하고 작품론을 들을 때, 앞서 ‘옹기종기 초상’을 이루던 두 학생이 작업실에 다급히 들어온다. 준원이 찾아와 나머지 학생과 나갔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이다. 전임과 시언, 그리고 두 학생이 교정을 헤매다가 남녀의 실루엣을 멀리서 발견한다. 다음 장면에서 준원과 여학생은 나무 한 그루 아래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이 장면의 어둠과 침묵은 딱히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 화면에 전임, 시언, 두 학생이 들어선다. 앞선 밤 장면에서 전임과 학생들을 비추던 작은 램프 같은 것은 여기 없다.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어색한 상황을 반영하듯 네 여자와 두 남자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그 절묘한 구도와 거기 일어난 움직임이 이 장면의 어둠에서 중층적인 ‘이야기’를 길어낸다. 이들 사이에 우두커니 놓인 나무의 자태 또한 그 ‘이야기’의 일부를 이룬다. 시언은 마치 숨어서 몰래 엿보는 것 같은 형상으로 나무 오른편에 홀로 서 있고 여자들과 함께 왼편에 있던 준원은 이틀 안에 연락을 달라는 말을 던지고 시언쪽으로 이동해 당혹스러운 순간에서 얼른 퇴장하려고 한다. 그런 준원을 시언이 붙잡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하더니, 둘은 이내 화면을 빠져나간다. 여학생은 준원이 청혼했고, 더러 진심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며, 자신이 이틀의 여지를 달라고 했다고 고백한다. 친구들은 어이없어하고, 전임은 비아냥이 살짝 묻어나는 말투로 말한다. “네가 쟤를 좋아했었구나.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다, 그지?” 그때 여학생이 내뱉는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좋아할 수도 있죠.” 이어지는 밤하늘 장면에서 달은 아까보다 커져 있다.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이 장면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 학교에서 쫓겨난 남자가 기어이 돌아와 이번에는 세 학생 중 한명을 골라 심지어 청혼한다. 그는 더 뻔뻔해졌다. 그런데 그런 요약에 담기지 않는, 혹은 반발하는 미묘한 뉘앙스와 생략 또한 이 장면에 모호하게 진동한다. 세 번째 학생의 머뭇거림은 무엇을 뜻할까. 준원을, 사랑을, 바람둥이를 규정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그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시언은 준원을 데리고 나가 어떤 말을 나누게 될까. 우리는 여기서 두 남자의 대화 내용은 모르지만, 나중에 시언이 공연을 마친 후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40년 전, 이 학교에 와서 촌극을 연출했고 서양화를 전공하는 첫사랑을 만났지만 큰 상처를 줬다는 기억 말이다. 출입 “통제가 심한” 여자대학교에 얼룩처럼 나타난 시언과 준원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네 여자의 ‘옹기종기 초상’과 준원이 전임을 찾아온 장면을 가르던 도덕적 경계선은 어둠 속, 여섯 사람의 시선이 불분명하게 오고 가는 이 대목에서 어느덧 희미해진다. 이 대목은 우리를 불투명한 지대로 불러들여 준원과 전임의 장면 앞에서 우리가 느낀 선명한 인상들을 새삼 다소 복잡한 심경을 안고 쳐다보게 만든다. 우리는 제대로 보고 느꼈던 것일까. 의심하지 않고 즐긴 그 선명함이 뒤늦게 이 장면에서 흐릿하게 여러 길로 갈라지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수유천>은 한줌의 빛만 있다면 다른 구도, 다른 각도에서 존재는 다른 리듬으로 달리 보인다는 진실을 여타의 기법을 동원하지 않고 화면 안에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만으로도 설득해낸다. 이 영화의 태도는 과감하고 정신은 검소하고 시선은 성숙하다. 전임에게 연극을 그만둔 마음 아픈 학생들이 있다면, 열흘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새 대본으로 촌극을 꾸리려 하는 대견한 학생들도 있다. 그간 홍상수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연극적’ 설계가 시언의 촌극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전쟁터에서 들릴 듯한 굉음이 무대에 내리치고 빛과 어둠은 과하게 대비되며, 무엇보다 인물들은 극적인 상황에 놓인다. 그들은 아직 종결되지 않은 사건 한가운데서, 혹은 사건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들처럼 보인다. 무대 불이 켜지자, 네 여자가 앉은뱅이 상에 둘러앉아 남은 식량과 물에 대해 언급하고, 불현듯 아빠와 오빠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그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고추장, 스팸, 라면을 연신 맛있다며 먹는 모습은 홍상수의 여느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며 ‘연극적’ 설정과는 동떨어진 것이지만, 무대가 다시 어두워지면 분위기는 돌변해 사건의 비극성을 전시한다. 그들 위로 그물인지 철창인지 알 수 없는 문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귀를 찢는 사운드가 이들을 덮친다. 이들은 죽음의 시간을 부유하는 유령들인가. 홍상수의 세계가 경계하는 설정들이 촌극에 압축되어 압도적인 물질들로 시청각화된다. 이 촌극 속 네 여자의 초상은 전임과 세 학생이 한밤 야외에서 더없이 자연적 상태로 되찾은 평온과 조화의 풍경을 완전히 인공적으로 변주해서 뾰족한 시선으로 다시 응시하게 만든다. 이 암울한 촌극은 환대받지 못한다. 전임은 총장 반응이 좋지 않다고 전하며 “연극이 정치적이라고 오해한 것 같아요. 아니면, 젠더의식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여대니까”라는 알쏭달쏭한 설명을 덧붙인다. 전임은 촌극에 대해 비평하지 않고, 학생들도 직접 연기한 이들로서의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총장이 은열과 전임을 불러 촌극이나 시언에 대해 묻는 장면을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촌극의 내용도, 이에 대한 평도 아니라 그 촌극을 경험한 이들이 도달한 하나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시언은 즉흥시처럼,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돌아가면서 말해보자고 제안한다. 홍상수의 카메라가 취기 오른 학생들의 얼굴 각각에 다가간다. 그는 배우들 사이에서 과하게 휘몰아치는 파토스를 제어하지 않고, 그 투명한 감정의 밀도로 이 장면을 채우기로 결심한 것 같다. 이들은 울음을 참지 못하며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명확한 모델이 아니라 가능태로 말한다. 이를테면 “저 같은 사람이 아닌 사람.” 그러나 그 말은 어떤 그럴듯한 정의보다 간절하고 구체적이다. “구석에서 작은 불이라도 켜고 죽을 때까지 지킬 겁니다. 저도 사람임을 잊지 않고서.” ‘사람’임을 잊지 않는 사람. 동어반복적인 이 말은 규정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 다짐은 영원히 질문으로만 살아남으므로 실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작은 빛 하나에 기대어 사건과 재난의 시간을 버텨내던 여자들의 광경으로 홍상수는 내내 그 다짐을 바라보고 있었다. 촌극이 끝나고 학생들이 눈물을 쏟아낸 그 밤, 마침내 보름달이 뜬다. 그믐달에서 보름달에 이르렀다. 공연 연습에 주어진 열흘이 지났다. <수유천>은 그 어느 때보다 한정된 시간을 상기하고 시간의 흐름을 제시한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 우리가 마주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며 걸어오는 전임을 불현듯 정지시킨 화면이다. 이 결말의 천진한 표정은 아름답지만 당혹스럽다. 실물을 보고 기억하면 무엇도 의심하지 않고 두렵지 않다고 말하던 전임이다. 그가 확신하던 실물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지나간 장면들로 돌아가 새롭게 씻은 눈으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수유천>은 전임이 만든 강물 연작의 흐름처럼 시간과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으로 세계의 다른 얼굴을 거듭 깨워 다시 보고 또 보려 한다. 이 영화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 힘을 믿고 꺼뜨리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한유주, 박소희, 장희원, 이지 지음 비채 펴냄 디저트를 언제 먹더라. 단것을 무지 좋아해 고속노화의 길을 향해 스피드를 올리고 있는 내 경우에는 단것을 혼자서도 찾아 먹지만, 대부분은 누군가와 식사 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음료와 함께 찾아 먹을 것이다. ‘디저트를 소재로 단편소설을 써주세요’라고 청탁을 받았을 5명의 작가를 상상해봤다. 원하는 디저트를 하나씩 결정하고, 이 디저트를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것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오한기, 한유주, 박소희, 장희원, 이지 작가가 디저트를 테마로 완성한 단편소설 앤솔러지 <녹을 때까지 기다려>는 그렇게 탄생한 소설집이다. 누구에게나 최애 디저트가 있을 것이고, 하나의 디저트로 소설을 써야 한다면 어떤 디저트를 선택할까. 오한기는 초콜릿을, 한유주는 이스파한을, 박소희는 젤리를, 장희원은 사탕을, 이지는 슈톨렌을 소재로 썼는데 각기 다른 디저트의 종류만으로도 작가의 개성이 보이는 듯하다. 이것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경계가 무뎌진 오한기의 <민트초코 브라우니>는 동네에서 글쓰기 수업을 하며 교습학원을 운영하는 원장과 신경전을 벌이는 소설가 오한기가 주인공이다. 출판사에서 디저트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먹는 족족 싸는 똥에서 초콜릿 맛이 나는 작가를 상상하는 소설가는 동네 글쓰기 수업이 너무 인기를 끄는 바람에 대형학원을 운영하는 장원장에게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오한기, <민트초코 브라우니>). 사망 후 인간의 의식을 젤리로 나눠 담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젤리가 된 사람에게서 이런 문자를 받는다면 어떨까. “젤리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주황색 젤리는 죽기 전 사과하고 싶었던 여성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박소희, <모든 당신의 젤리>). 자주 다투는 친구들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주던 연주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 절교한 친구들. 둘은 남을 배려하느라 자신을 챙기지 못했던 연주를 떠올리며 함께 사탕을 먹는다(장희원, <박하사탕>). 이처럼 작품마다 디저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가 되어 어색해 견딜 수 없는 시간들에게 당의정이 되어준다. 소설을 읽으면서 곰돌이 모양의 주황색 젤리를 다시 보니, 왠지 입에 넣기 어려워졌다. 몽블랑과 초콜릿무스케이크의 단맛이 서로 다르듯, 5편의 소설이 내는 이 달콤 쌉싸레함은 직접 읽어봐야만 음미할 수 있다. “녹기 전에 먹으렴.”그 말에 나는 허겁지겁 아이스크림부터 먹는다. 그걸 보며 어머니는 비웃는다. “디저트부터 먹어 치우는 멍청한 것.” 나는 어둡고 어머니는 이물스럽다. /이지, <라이프 피버>, 181쪽

씨네21 추천도서 - <그레이트 서클1, 2>

매기 십스테드 지음 민승남 옮김 문학동네 펴냄 돌아보지 않는 법을 아는 캐릭터를 언제나 부러워해왔다. 현실에 주저앉지 않는 법, 실망하지 않는 법에 대해서라면 얼마든 자기 계발서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만으로 무력감만이 강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에 수렴하는 문제인 것만 같아서. <그레이트 서클>은 모든 것이 ‘나’에 수렴한다는 자기 인식으로 세상 끝까지 날아오르는 이야기다. 거침없고 대담하게.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거대하게 상상할 줄 알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 속 문장을 빌리면 당당한 선언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펼쳐지고 또 펼쳐지며, 언제나 끝이 없다. 하나의 선, 하나의 원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앞을 바라본다. 수평선이 있다. 뒤를 본다. 수평선. 지나간 것은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의 나는 미래에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그레이트 서클’은 구 위에서 그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원을 의미한다. 지구를 기준으로는 북극과 남극을 지나는 경도선과 적도를 뜻하는 표현이다. 해들리는 감독으로 일하는 삼촌과 산다. 부모님이 경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배우로 데뷔하고도 큰 성과가 없던 해들리는 <대천사>라는 작품으로 큰 인기를 얻지만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고, 그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듯 보인다. 해들리는 비행사 메리언 그레이브스의 생애를 영화화한 <페리그린> 의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면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어린 시절 읽은 메리언 그레이브스에 대한 책을 떠올린 해들리는, 이 영화가 자신의 배우 커리어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을 직감한다. <그레이트 서클>은 해들리의 삶과 메리언 그레이브스의 삶을 나란히 보여준다. 두 여성이 다른 시대를 살아가면서 얼마나 겹쳐 있는지, 누군가의 눈에는 고난으로 점철됐을 수 있는 삶이 실제로는 얼마나 모험으로 충만했는지를 담아낸다. 작가 매기 십스테드는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뉴질랜드까지 단독비행에 성공한 여자 조종사 진 배튼의 동상을 마주한 뒤 이 소설을 구상했다는데, 소설을 읽으면 메리언 그레이브스가 실존 인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메리언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고, 메리언을 탐구하는 해들리의 마음에 이입하게 된다. 세계대전 중에 비행사의 꿈을 꾸고 실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설을 읽으며 연신 벅차오르는 감각에 취하게 된다. “가끔은 바람에 몸을 숙여야 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 너무 많거든.” /3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