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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3호 [인터뷰] ‘순도 높은 기쁨과 슬픔’, <이별, 그 뒤에도> 배우 아리무라 가스미, 사카구치 겐타로

봄날의 홋카이도의 풍광, 집과 직장을 오가는 열차의 경적, 차분히 내린 커피의 향. 감각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난연한 화원 위에서 사랑을 잃은 여자와 심장을 얻은 남자가 만난다. 일본 멜로의 대표 주자 아리무라 가스미와 사카구치 겐타로의 조합은 환상의 설정을 품은 연애담인 <이별, 그 뒤에도> 에 당장이라도 만져질 듯 구체적인 정서의 밀도를 더한다. 푸른 바다가 일렁이는 창가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모든 답변에 앞서 서로의 의향을 살피며 한 마디 한 마디 신중을 기했다. 그 모든 눈길과 말결에 사랑이라는 불공평한 운명의 장난을 성실히 마주하는 두 주인공의 순수한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 <나라타주> <그리고, 살아간다> 등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연기의 측면에서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부분이 있을까. 아리무라 가스미 동료 배우로서 파장이 맞는 느낌이다. 함께 있을 때도 자연스럽고, 함께 여러 작품을 겪어낸 전우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웃음) 사카구치 겐타로 <나라타주>에는 무겁고 힘든 신도 꽤 있었지만 아리무라 가스미 배우와 함께 촬영할 때만큼은 연기에서 어떤 불필요한 마찰이 작용하는 듯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이 좋은 연기로 이어지는 것 같다. - 작품의 배경인 홋카이도와 하와이는 온도감도 풍경도 정반대다. 로케이션에 따라 연기의 호흡도 달랐을 것 같다. 아리무라 가스미 홋카이도에서 4개월간 촬영을 진행했다. 긴 체류 기간 덕분에 마치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1개월 정도 체류한 하와이는 햇빛과 색감 등 일본과 전혀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 오감을 자극했다. 로케이션이 주는 힘을 실감했다. 사카구치 겐타로 햇살이나 바람의 사소한 차이도 대사의 에너지와 연기 방식의 큰 변화를 낳는다. 추운 곳에서는 몸에 힘이 들어간다거나, 따뜻한 지역에서는 몸이 풀리며 자연스레 목소리가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로케이션의 도움을 받아 연기했다는 생각이 든다. - 나루세는 이식받은 심장에 의해 사에코에게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을 느낀다. 자발적으로 투신하는 사랑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카구치 겐타로 나루세가 자기 몸에 들어있는 유스케의 심장을 느끼는 미묘한 감각을 연기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배역 중 가장 정답이 없는 연기를 마주한 느낌이 든다. 나루세가 내리는 선택이 실은 유스케의 선택일지도 모르고, 분명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선택이 정답이면서 동시에 오답인 모순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과 촬영감독 등 나루세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스태프와 대화하며 다각도에서 인물을 구축해 나갔다. - 사에코는 삶의 목표가 “일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라 말한다. 한편으로는 감정을 솔직하고 풍부하게 표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에코를 이루는 성실함과 솔직함이라는 두 축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했는지 궁금하다. 아리무라 가스미 사에코를 연기하며 언제나 자신에게 솔직한 여성상을 목표로 삼았다. 기쁨과 슬픔,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순도 높게 정제해 내려 했다. 일을 대할 때에도 사에코는 순수한 즐거움에서 태어나는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 커피와 일에 대한 사랑이 그녀의 여러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클라이언트와 대화하며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일하는 사에코에게서 힘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 두 인물 모두 밝은 천성의 소유자이지만 그간 겪은 일들로 인한 슬픔이 얼굴에 문득 어른거리곤 한다. 비감 속에 순식간에 들어갔다 빠져나오는 연기가 까다로웠을 것 같다. 아리무라 가스미 사에코가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에 가 닿으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대본을 읽으며 정리한 후 수많은 연습을 거쳤다. 무엇보다 여러 감정을 표현하고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사에코 본래의 모습을 마음 깊이 새긴 채 연기했다. 결코 흔들리지도 부러지지도 않는 마음속의 심지가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사카구치 겐타로 투병 당시의 나루세는 언제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회복 후의 그에게는 오히려 그 이전의 불안한 나날들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사에코도 동료들에게는 멀쩡한 척하지만 혼자 남았을 때는 “유스케가 없으면 재미없어”라고 외치지 않나.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솔직하고 값진 순간들이다. 그 지점을 정직하게 마주하다 보면 섬세한 표정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을 느낀다. - 새 생명을 얻은 나루세는 출퇴근길이나 구내식당 등 일상의 가장 사소한 풍경에서 기쁨을 느낀다. 두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일상의 순간은 무엇인가. 아리무라 가스미 작품이 끝난 후 기존의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 아침에 즐기는 여유로운 커피 한 잔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이 행복하다. 사카구치 겐타로 내게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워낙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함께 모여 북적북적하게 밥을 먹을 때가 즐겁다.

BIFF #4호 [뉴스] 송대찬 프로듀서의 비프의 추억 外

부산국제영화제에 온 지 이십 년이 넘었다. 코로나19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안 빠지고 온 것 같다. 영화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왔다. 하루에 두세 편씩 영화를 보면서 관객과의 대화(GV)도 많이 봤다. 2007년 <남과 여>를 만든 클로드 를루슈 감독이 <역의 로망>으로 내한했다. 당시 70살의 나이에 멋진 가죽 잠바를 입고 오셨다. 그에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남과 여>가 평생 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익명으로 칸영화제에 <역의 로망>을 출품했는데 그게 칸영화제 초청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웃음) 밤 11시가 넘어서 GV가 시작됐다. 50대 아저씨들이 “당신이 만든 <남과 여>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라거나 “나는 당신의 <남과 여>를 아직도 꿈꾸고 있다. 영광”이라고 고백하고, 엄청난 열기 속에 관객들의 질문이 쏟아지는 바람에 자정이 넘어갔다. 그런데도 감독은 “부산영화제 관객 최고”라면서 계속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나도 약속이고 뭐고 포기하고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부산영화제에는 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 오는 영화과 학생들이 있지 않나. 젊은 학생 하나가 질문했다.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요?” 분위기 깬다며 야유가 쏟아졌다. 그러자 클로드 를루슈 감독은 관객에게 야유하지 말라며 “이렇게 기초적인 질문이 중요하다”고 운을 뗀 뒤 너무 멋진 대답을 들려줬다. 영화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 당장 밖에 나가서 영화를 찍으라고 클로드 를루슈 감독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사준 8mm 카메라로 찍었던 영화와 기억과 추억이 아직까지 작품을 만들때 영감이 되고 있다고. 내생애 최고의 GV였다. 내돈내산 맛집 pick - 이태동 감독의 주력발전소 부산을 대표하는 MZ’라는 타이틀로 맛집을 추천하는 게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지만, 부산에서 대학까지 나왔으니…. 대학생 때 다녔던 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영화제에 와서 돼지국밥과 각종 회 그리 대구탕을 먹다가 3~4일쯤 지나 자극적인 시뻘건 안주들이 땡길 때 해운대 구청 뒷골목에 있는 ‘주력발전소’를 가보시라. 옆에 있는 ‘사북칼국수’ 도 로컬에서 유명한 식당이지만 저녁에는 그 옆에 있는 주력발전소도 현지인들이 꽤 많이 찾는 맛집이다. 오히려 술안주보다는 식사하기에 좋다. 대표 메뉴 이름부터 ‘돼지가 고추장에 빠진 날’ , ‘오징어가 고추 장에 빠진 날’ 처럼 영화스럽고 다른 사이드 메뉴 또한 술을 부른다. 새벽 3시까지 하니 느지막하게 가도 좋다. 대표 메뉴를 시킬 땐 우동 사리 추가 필수! 가는 길 해운대역 1번 출구에서 도보 5분

BIFF #4호 [스코프] 토요일 토요일은 BIFF다

하루 4회차 가득 채워 영화를 즐기시느라 바쁘시죠? 가끔은 밖으로 나와 바람도 쐬고 하세요. 이토록 아름다운 배우들과 감독들이 영화의전당 BIFF 야외무대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든 평일을 버텨낸 보람이 있는 꿈같은 부국제의 토요일. <좋거나 나쁜 동재> 한국 첫 스핀오프 드라마 <좋거나 나쁜 동재>의 박성웅, 이준혁 배우, 이수연 크리에이터, 박건호 감독(왼쪽부터)! 수줍은 볼하트와 함께 팬서비스의 정석을 선보인 이준혁 배우와 선글라스가 수상하게 잘 어울리는 박성웅 배우. 검사님, 이런 동재라면 무조건 좋습니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공명 씨, 들리나요? 내 마음이 당신과 공명하는 소리….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의 김혜영 감독, 공명, 김민하, 정건주 배우(왼쪽부터)가 BIFF 야외무대를 산뜻한 미소로 가득 채웠다. 부국제 끝나기 일주일 전, 최고의 선택. <더 킬러스> “배우 심은경은 가히 올해의 발견이라 할만큼…” 어제부터 계속 <씨네21>의 <더 킬러스> 평을 읽고 있는 장항준 감독. 이대로 심은경 배우를 칭찬 감옥에 영영 가둘 셈인가요? 이런 감옥은 오예입니다. 야외무대 인사에 나선 <더 킬러스> 팀의 감독 김종관, 노덕, 장항준, 배우 심은경, 지우(왼쪽부터).

BIFF #4호 [인터뷰] 기다리고, 걱정하고, 애달파하는, <청설> 홍경

“첫사랑이라는 건 찰나일 수 있지만 그만큼 잔향이 깊게 남는다. 첫사랑의 의미에 관해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언젠가 하고 싶었고 그게 영화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청설>에서 배우 홍경이 연기한 용준은 도시락 배달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다. “나 혼자라면 알 수 없을 감정을 여름이를 사랑하면서 경험하고, 그런 용준이를 보며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홍경은 용준을 두고 거듭 “용감한 친구”라고 설명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을 마주할 때 겁을 먹거나 움츠러들 수 있는데 용준은 끝까지 마음 가는대로 움직였다.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사랑하는 모습, 여름이가 자신의 감정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방법을 이리저리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번 감탄했다.” 용준이 여름과 소통하는 데에 수화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3개월이란 시간을 들여 수화를 익혔지만 홍경은 단순히 수화를 능숙하게 해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육성을 활용하면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도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수어를 하면 상대와 눈을 맞추며 상대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온 신경을 집중하고 마음을 쏟아야 한다. <청설>은 결국 시간을 들여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려 노력하는 이야기이다. 진심을 어떻게 전할 것이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수어를 배운 뒤에는 상대 배우에게 더 집중하려고 했다.” 여름이의 상태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어느 날, 용준은 자신을 밀어내는 여름에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다. “누군가를 그렇게 기다리고, 걱정하고, 애달파하는 감정을 용준이는 겁내지 않고 전면으로 받아들이더라. 나라면 그 감정을 인정하는 게 정말 무서웠을 텐데 말이다. 그 장면에서 용준이가 어떤 캐릭터인지 제대로 느꼈고 다시 한번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홍경은 영화 <청설>이 배우로서의 자신에게 지닌 의미 또한 들려주었다. “요즘 20대 배우들이 영화를 통해 자기 세대의 이야기를 할 경로가 많지 않다. 하지만 <청설>은 나와 노윤서 배우, 김민주 배우가 우리 나이대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청설>에 참여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던 것이 내겐 큰 의미다. 시간을 쏟은 만큼 나의 마음도 작품에 잘 담긴 것 같아 몽글몽글하다.”

BIFF #4호 [인터뷰] 완전히 파멸적인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다, <클라우드> <뱀의 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올해 구로사와 기요시는 <클라우드>와 <뱀의 길>, 두 편의 영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의 주인공으로 호명된 그가 직접 참석하는 관객과의 대화 회차는 빠른 속도로 표가 동났다. 스다 마사키가 온라인 리셀러로 분해 집단 광기의 보복에 휘말리는 <클라우드>, 죽은 어린 딸의 복수를 하는 1998년 원작의 스토리라인은 그대로이지만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뀐 <뱀의 길> 두 편 모두 감독이 천착해 온 테마, 실체화되지 않는 폭력과 공포를 기요시 특유의 필치로 그려낸다. “질문 수준이 무척 높고 내용이 날카로운” 한국 관객을 만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영화제 기간에 만났다. - <클라우드>는 액션 스릴러 영화이지만 조금 이상한 액션 스릴러다. <큐어> <회로>가 기존의 호러 연출 문법을 따르지 않은 것처럼 이 영화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게 만드는 방식 역시 전형적이지 않다. 무엇을 보여주고 생략할 것인지 결정할 때 어떤 고민이 있었나. 계획을 세워서 촬영 현장에 가도 다양한 상황이나 변수가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할지 결정한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계산하기보다 직관적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영화를 찍을 때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내용이 있다. 장소가 있고 배우가 있을 때 흘러가는 상황을 가능한 한 빈틈없이 새지 않게 엄밀하고 균일하고 평등하게 담는 것이다. 흔히 클로즈업할 것이라고 생각한 대목에서 그냥 클로즈업을 하면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서 찍으면 배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평균을 찾아야 한다. - 지금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스다 마사키와의 작업은 어땠나. 스다 마사키와의 작업은 처음이었다. 매우매우 훌륭한 배우였다. 나도 그가 출연한 영화와 TV 드라마를 여러 편 봤다. 유약한 캐릭터도 악역도 잘 소화하고 주연을 할 때도 조연을 할 때도 있다. 자신의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며 어떤 역할이든 두려움 없이 도전한다. 멋진 영웅이 아닌 탁한 캐릭터를 제안했는데 흔쾌히 승낙해줘서 기뻤다. <클라우드>의 주인공은 좋은 인간도 나쁜 인간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 인물이 일본 장르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경우는 무척 희박하다. 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스다 마사키처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모습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반드시 필요했다. 스다 마사키는 감독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줬다. - <뱀의 길>은 1998년 직접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프랑스에서 리메이크한 영화다. 1998년 영화가 <링>의 각본가이기도 한 다카하시 히로시의 색깔이 강했다. 셀프 리메이크는 무척 특수한 상황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프랑스 회사에서 먼저 제안을 줘서 성사됐다. 때문에 이런 방식이 옳은 건지 틀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 ‘프랑스는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작업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꿔보자는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에겐 남편이 있고 남편에겐 아내가 있다는 부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 일본과 프랑스 영화 제작 환경에 차이가 있던가. 프랑스에서 영화를 찍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런데 실제 로케이션 촬영, 현장 녹음 등 일본과 영화 만드는 방식이 거의 비슷하다. 다만 이런 차이는 있다. 요즘은 디지털로 작업하다 보니 영상이든 소리든 자유자재로 더하거나 빼는 가공이 가능하다. 그래서 흐린 날을 맑은 날로 바꿔보자는 식의 제안이 들어온다. 일본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작업이다. 있는 그대로 두고 현장 분위기를 가능한 한 살리고 싶었다. 내가 필름 시대 감독이라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 한국영화의 가장 특별한 지점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는 이들이 훌륭한 장르영화 감독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봉준호와 박찬욱이 그렇다. 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당신이 오랫동안 봉준호와 교류한 이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정말 기쁘다. 명예롭다. 나와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는 영화감독이 일본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에는 아직 존재한다. 장르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현실에서 시작해 장르가 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봉준호와 박찬욱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똑같이 영화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늘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참 잘하고 있어서 부럽기도 하다. -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기자회견에서 “영화이기에, 영화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는 표현을 썼다. <클라우드>와 <뱀의 길>을 만들면서 찾은 ‘영화적인 것’은 무엇이었나. 분명히 무언가를 찾아낸 것 같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웃음)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이 장르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모습은 문학에서 표현하기 어렵다. 영화는 관객이 스크린을 보고 몰입할 수 있는 영화적인 작용을 가능케 한다. <뱀의 길>에서 일본인 여성 시바사키 코우가 파리의 변방에 있는 공장에서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걸어가는 모습은 영화이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영화적인 무언 가가 작용하는 순간이다. - <큐어> <회로>가 버블경제 붕괴 이후 만든 공포영화였다면 <클라우드> <뱀의 길>은 2023년의 일본이 투영돼 있다. 특히 두 편의 <뱀의 길>에는 1990 년대와 2020년대의 일본 사회가 각기 영향을 끼친다. <큐어> <회로> 그리고 <뱀의 길>(1998)을 만들 때는 20세기가 끝나갈 때였다. 버블경제가 붕괴됐다고 하지만 곧 다가올 21세기는 훨씬 밝고 진보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20세기의 끝에는 좀더 비극적이고 파멸적인 영화를 만들고 즐겨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막상 21세기가 되어 보니 더 행복하고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시대는 오지 않았다. 세기말에 만들었던 비극적 주인공, 사회 밖으로 완전히 튕겨 나가는 망상을 픽션으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뱀의 길>이나 <클라우드>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연출을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지만 과거의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밀어 붙이지 못했다. 결국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장르영화다. 처음부터 판타지를 설정하면 전혀 상관없지만 현실을 시작점에 두면 더 멀리 가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을 때와 없을 때가 달라졌다. - 앞으로 호러 영화를 다시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도쿄 소나타> <해안가로서의 여행> <산책하는 침략자> 등 멜로드라마적 색깔이 강한 작품을 찍었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기자회견에서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이제 다음 영화는 어떻게 찍지?’라고 고민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다음 작품은 어떻게 찍을 것인가. (웃음) 다시는 안 찍는다고 한 적은 없다. 당분간 안 찍는다고 한 거다. (웃음) 그러니 다시 호러 영화를 찍을 수도 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는, 죄송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영화는 내가 하고 싶다고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프로듀서부터 배우까지 많은 사람들의 만남에서 태어나는 것이 영화이기에 어떻게 만들고 싶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앞으로 현실적인 것, 영화적인 것, 장르적인 것이 서로 부딪혀가며 완성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BIFF #6호 [프리뷰] 봄밤 Spring Night

강미자 / 한국 / 2024년 / 67분 /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10.09 L3 20:30 남자와 여자는 지인의 재혼식 뒤풀이에서 처음 만났다. 모두가 죽은 듯쓰러진 술자리에서 남자는 취한 여자를 등에 업고 귀갓길을 걸었다. 제몸도 가누지 못하는 여자는 실의에 빠져 알코올 의존증에 걸린 영경이고 힘겹게 영경을 업고 밤거리를 지나는 남자는 류머티즘을 오래 앓은 수환이다. 쇠락한 육체를 지닌 두 남녀는 몇 번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음주와 업힘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두 번째 장편 영화로 돌아온 강미자 감독의 <봄밤>은 죽음을 앞에 두고도 말없이 서로를 보듬은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룬다. 권여선 작가의 단편 「봄밤」을 영화화한 작품이지만 김수영의 시처럼 아릿한 운율감이 먼저 읽힌다. 수환과 영경이 등장하는 모든 순간은 느릿한 삶의 박동을 풀어낸 시어가 되고,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칠흑 같은 암막은 시간과 인과를 압축하는 행간이 된다. 짙게 깔린 어둠 위로 담담하게 생동하는 한예리와 김설진의 꾸밈 없는 육체가 감정의 깊이를 더한다. 무엇보다 <봄밤>은 영화만이 구현할 수 있는 아픔의 몽타주를 발굴해 낸 작품이다. 봄 바람에 옅게 흔들리는 한송이의 목련에도 오래 아프고 오래 사랑했던 두 남녀의 응축된 시간과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비평] 지붕이 된 어두운 방에서, 함께와 혼자, <새벽의 모든>

후쿠시마 료타는 헤이세이 30년간(1989~2019) 일본 문학의 내러티브를 논하며 재난의 자장에 있는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인 정서를 발견한다. 가령 그는 다이쇼 시대(1912~26)에 활발히 생산되던 ‘유토피아’가 1923년 간토대지진과 부딪히면서, (연역적인 진단이지만) 그러한 묘사가 마침 찰나의 “현상”으로 그려지던 게 흥미롭다고 간주한다. 그는 이같은 양상이 헤이세이에서 대두되는 ‘덧없음’의 감각으로 이어졌으리라 짐작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재와 연관되지만 진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신·아와지를 지나 동일본대지진까지 일본인들은 파국을 목격했지만, 어째서 세계는 아직 말소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모순적으로 외부의 강력함과 내부의 무상함을 동시에 감각하는 분열의 세대에게 시공간은 고정되지 못한 채 다만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시선을 옮기면 동시대의 대표적인 예시로 하마구치 류스케가 떠오른다.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내파된 지진과 그 ‘이후’는 인물들에게 거의 선험적으로 각인된 상실(감)이고, 이로써 마침내 극복해야 할 심급이다. 그것이 내 발밑을 지탱하는지 흐르는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로, 그러나 일단 있다는 걸 전제해야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셈이다. (한편 김혜리 기자는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일본 연호에 따르면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두편이긴 하나) <에반게리온>의 “세상이 다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와 <스즈메의 문단속>의 “어떻게든 폐허 위에서 이어나가려고 하는” 한 세대 사이 감각의 낙차를 언급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아사코>에서 지진은 극장에서 일어난다. 공연을 앞두고 암전된 극장에서 갑자기 진동이 인다. 간신히 불이 켜지지만 샹들리에는 무대로 떨어져 산산조각 난다. 그러니까 진동은 픽션이 마땅히 존재해야 할 극장에서 허구의 진입로를 차단한다. 사람들은 바깥-현실로 나가, 역설적으로 그 흔들리는 땅을 밟아야 한다. <새벽의 모든>에서도 지진이 발생한다. 이때 인물들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중이다(나는 무엇보다 영화 속 두 청년이 성실하건 게으르건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주지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편에서 지진은 꽤 강한 진동을 일으킴에도 어쩐지 ‘이후’와 연루되는 기제로 쓰이지는 않는 듯하다. 이 점이 의외다. 정전이 일어나는데도 인물들은 이 진동을, 조금 포장하자면, ‘느끼는’ 듯 보인다. 집단적 반응이나 조직적 대처가 없는 대신 모두가 불이 꺼진 일터에서 그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위만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다음 장면에서 두 주인공은 밖에서 함께 걷고 있는데, 이는 불안에 잠긴 시민의 발걸음이 아니라 직장인의 노곤한 퇴근길을 담는 데 가깝다. 게다가 야마조에는 지진이 별로 무섭지 않다며, 발작을 처음 경험한 것은 몇년 전 평소처럼 라면을 먹다가였다고 털어놓는다. 재난이 남긴 것들에 주목하는 정동이 근래 더 보편적이었다면, 이제 지진과 거의 무관해지려는 듯한 의지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개인적 증상과 사회적 징후를 분리하려는 이 제스처가 <새벽의 모든>에서 특히 인상적인 지점이었다(물론 그 둘이 이제 이미 너무 밀착된 바람에 아예 구별 불능의 상태가 된 것일 수도 있겠다고,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여하간 <새벽의 모든>에서는 강박적이리만치 인물과 세계는 물론, 인물과 인물도 서로에게 명확한 거리를 약속한다. 심지어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졌음에도 그들은 결코 공적인 거리를 흩뜨리지 않는다(단적인 예로, 야마조에의 병원에 동행하고 매번 그의 집을 찾아오며 연락의 대리인까지 되어주는 오오시마와의 사이는 어떻게 규정하면 좋을까?). 그 점과 연관해 나는 미야케 쇼 영화의 아름다운 지점 중 하나였던 ‘접촉’의 친밀함이 <새벽의 모든>에 들어서며 도리어 ‘전달’의 거리감으로 변모한 게 흥미롭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그는 땀으로 범벅된 복서의 신체, 타자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주먹, 거기에 음성을 대신하는 수어의 (소리치는) 손으로 근육의 역량을 선보였다. 유운성 평론가는 <와일드 투어> 후반부에서 타케의 고백을 정중히 거절한 우메가 그의 팔을 잠깐 잡았다가 떠나는 장면을 두고 존 포드의 <친구 사이>(Just Pals)의 영향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렇듯 잠깐이지만 신체가 서로 만나는 순간의 긴장감을 때로는 비애로, 때로는 관능으로 담아내던 미야케 쇼는 이번 영화에 이르러 인물간 접촉을 경계한다(혹은 접촉에 비근한 행위로 후지사와가 야마조에의 머리를 잘라줄 때조차 미야케 쇼는 어떠한 종류의 ‘로맨틱함’도 개입할 여지가 없도록 고정된 롱숏으로 담아낸다). 대신에 여기서 반복되는 행위는 바로 무언가를 전해주는 몸짓이다. 후지사와의 엄마가 장갑 크기를 짐작하기 위해 손을 잡아보듯이 모녀 관계에서 서로 맞붙는 행위는 무리 없이 가능하지만 다른 인물들에게 이와 같은 터치는 쉬이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한 움큼의 거리를 확보한 채로 무언가를 건네주고 또 건네받는 장면들의 근사함이 따로 있다. 이를테면 모두가 퇴근한 밤 다시 회사를 찾은 야마조에가 사장의 맥주를 자신이 따르겠다며 유리병을 건네받(고 따른 후 건네줄)을 때나, 이직이 확정된 후지사와가 사장에게 사직서를 내밀 때(그녀를 격려하던 사장은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자 사직서를 주머니에 조용히 넣는다). 또는 야마조에가 츠지모토에게 ‘쿠리타 과학’에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전하자 츠지모토는 눈물을 흘리는데, 이를 본 그의 어린 아들이 “이거 써”라며 손수건을 전달하는 장면도 그러하다. 후지사와는 처음 보는 오오시마에게까지 새해 부적을 나눠주지 않던가. 거리(감)는 궁극적으로 관객과 관객의 사이로 수렴한다. 후반부에 이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데, 그곳은 곧 극장이다. 쿠리타 과학의 사람들이 기획하는 돔 형태의 플라네타륨은 오늘날 우리가 유실 중인 극장이라는 장소를 환기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인가? 각자의 자리에 앉고는, 잠깐을 꼭 함께하는 이상한 합의의 장소. 동시에 불이 꺼지면 극도로 혼자가 되는 고립의 장소. <새벽의 모든>은 천체 관람이라는 행위를 주요 테마로 끌어옴으로써 우리의 이 약속이 어둠에서 시작했음을 일러주면서 다시금 ‘어두운 방’(camera obscura)의 모습을 체현한다(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밝은 방이라고 일컬을 만한 공간도 있는데, 바로 탕비실이다. 이 회사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 탕비실이 사무실 중앙에 마치 커다란 박스처럼 우뚝 자리하도록 설계된 건축 구조다). 사람들은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머리 위의 별들을 응시한다. 스탠리 카벨이 “스크린의 한계는 그것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담는 하나의 용기(container) 혹은 수용력(capacity)의 형태로 나타난다”라고 말하듯 영화는 무형임에도 역설적으로 물리적이라, 둘레를 그리기보다 부피를 채워야 지속 가능하다. <새벽의 모든>은 무한 갱신되는 우주라는 공간을 빌려 주형(mold)과 다름없는 스크린을 경계 없는 지붕으로 소생시킨다. 물론 이 찰나의 공간에서 관객은 함께인 동시에 혼자이다. 장엄한 경험 뒤에 그들은 다시 흩어질 테니까. 거리를 두고서, 이렇게. “너와 나는 혼자 나올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눈 깜빡이며. 그때 너와 나는 텅 빈 극장의 내부를 보게 된다.”(송승언,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김수민의 클로징] 게임 체인저

내 기억 속 첫 번째 미국 대선은 1992년이다. TV 뉴스에 민주당 후보군이 소개되었을 때 후반부에 나온 한 젊은 후보를 보고 “대통령처럼 생겼네”라고 중얼거렸다. 이 비과학적 예언은 적중했다. 4년 뒤 맞이한 미국 대선은 ‘인생 선거’였다. 공화당 밥 돌 후보의 작은 정부론과 감세안이 복지국가의 원칙을 거스른다고 판단했고 이는 내 정책 체계의 1층에 자리 잡았다. 역대 미국 대선에서 줄곧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미국 민주당은 유럽의 좌파 정당에 비하면 보수적이지만 적어도 조세와 노동, 성평등과 소수자 권리를 ‘나중에’ 논하자며 뒷걸음질치는 정당은 아니다. 2020년 한국에는 자신이 진보라면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혐오 정치의 세계화에 무딜 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식견도 좁다. 트럼프의 모험이 북미 관계의 미래를 미리 보여준 측면은 있으나 거기서 끝이었다. 체계적이지 못한 이벤트식 접근 때문에 북미 대화가 중단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어차피 미국이 도발과 대화를 오가는 북한의 시간표를 바꾸기는 매우 힘들지만, 기회가 오면 치밀하게 협상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당에는 그나마 웬디 셔먼과 같은 대북 협상 전문가들이 있다. 과거 오바마 정부도 북한의 널뜀과 날뜀을 견디며 2·29 합의를 빚어낸 적이 있다. 다만 나는 바이든의 임기 역시 4년으로 끝나야 한다고 여겼다. 다수 대중은 86살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올해 민주당 전당대회가 바이든 추대식으로 점철되면서 당혹스러웠다. 바이든이 자리를 지키는 바람에 트럼프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트럼프는 바이든보다 젊고 힘차다”와 “사법리스크와 거짓 선동의 트럼프를 상대하려면 그래도 바이든이다”의 맥놀이판에서 후보를 바꾸는 쪽이 이길 것이라 내다봤지만 두 당 모두 바꾸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이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공화당이 후보를 바꿀 수 없는 상태에서 바이든만 빠져나간다면? 물론 바이든의 TV토론 참패와 트럼프 피격 사건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바이든의 뇌리에서 사퇴 시나리오가 처음 피어난 것이 정말 그 이후일까? 그가 과연 자신의 건강 상태를 걱정한 적이 없었을까? 그는 1970년부터 내내 공직에 있었고 그랜드슬램을 하듯 상원의원과 부통령, 대통령을 거쳤다. 민폐를 무릅쓴 재선 도전보다 ‘막판에 큰 거 한방’이 더 끌리지 않았을까? (그의 머릿속이야 알 길이 없고 내 추정이 맞다 해도 그는 부인하겠지만) 어쨌든 결국 그는 해냈다. 여전히 승패 예측은 어렵지만, 트럼프의 가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이 민주당 후보 교체임은 틀림없다. 이스라엘 문제를 포함해 미국 민주당을 곱게 볼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음에도 일단 대선에서는 승리하길 빈다. 카멀라 해리스의 당선이 윤석열 정권에 미칠 영향도 기대된다. 해리스에게 성평등에 관한 지적을 받았던 윤 대통령이, “해리스의 참모들은 생소하다. 제가 가르쳐야 한다”(9월3일 세종연구소 강연)라고 시건방을 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선거 직후 어떤 심정이 될지 궁금하다. 대통령측은 뒷담화 습관부터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들키고 나서 “대통령은 ‘해리스’가 아니라 ‘헬스’라고 말했습니다” 우기지 말고.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부산 밤바다, 그 날씨에 담긴 BIFF의 추억. 그리고 새로운 기억

기억은 종이에 쓴 기록처럼 ‘정보’의 속성을 지닌 반면 추억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새겨진 가 아닐까 싶다. 이제 10월 초의 부산은 예전만큼 쌀쌀하지 않흔적을 더듬는 ‘감각’에 가깝다. 내 경우엔 가을바람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조건반사처럼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가 생각난다.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으론 부족하다. 얇은 겉옷 사이로 바람이 뚫고 들어와, ‘겨울옷을 꺼내야 하나?’ 살짝 고민이 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부산영화제와 관련해 잊히지 않는 경험, 몸에 새겨진 기억 중 하나는 대형 스크린이 마련된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덜덜 떨어가며 봤던 야외 상영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봐야 하나 싶었지만 막상 영화가 끝난 후, 더할 나위 없는 충만감으로 가득했던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제목을 밝히기 곤란한) 그때 그 영화를 얼마 전 우연히 다시 보았는데 너무 엉망이고 재미가 없어 깜짝 놀랐다. 그 시절의 나는 무엇에 그렇게 취하고 반했던 걸까. 영화는 인연이다. 영화제에서 종종 GV 진행을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 멘트를 서두에 꺼낸다. 엉망진창이었던 그때 그 야외 상영작은 영화를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나만의) 추억이다. (제목을 말할 수 없는) 그 영화를 두고 누군가에게 좋은 영화라 추천할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내겐 언제까지나 기분 좋은 만남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날의 날씨, 관객들의 분위기, 나의 기분이 마치 한장의 사진처럼 찍혀 유일한 추억이 되는 과정. 나중에 개봉하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보러, 구태여 시간과 돈을 들여 영화제까지 가는 건 어쩌면 그 유일무이한 만남의 두근거림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이제 10월 초의 부산은 예전만큼 쌀쌀하지 않다. 바닷가 옆에 붙은 요트경기장이 아니라 멋들어진 영화의전당 야외무대 덕분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29주년을 맞이한 부산영화제를 둘러보며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 중이다.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다시 영화의전당으로 주무대를 옮겨가는 사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이젠 극장을 벗어나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부산 밤바다를 볼 일이 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 옛날 사람인 나는 달라진 모습들을 보며 조건반사처럼 추억을 곱씹는다. 물론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아쉽다’는 단순 비교를 하려는 건 아니다. 만약 올해 처음 부산영화제를 방문한 이가 있다면 그분에게는 올해의 경험이 유일무이한 부산의 기억으로 뿌리내릴 테니까. 넷플릭스 영화 <전,란>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올해 부산영화제의 선택을 두고 변화를 우려하는 기사들이 적지 않게 쏟아졌다. 몇해 전부터 새로운 콘텐츠 발표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부산영화제인 만큼 OTT 작품과 비중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OTT로의 쏠림이라기보단 시대에 맞춘 확장이라 불러 마땅하다. 한국 독립영화의 발굴, 지지부터 난해한 예술영화의 과감한 소개까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들여다보면 여전히 부산영화제만이 줄 수 있는 경험들을 제공하고 있음을 금방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정을 가지고) 직접 겪어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직 숨겨진, 여전히 빛나는, 유일무이한 추억의 씨앗들은 올해도 영화제 곳곳에는 당신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그럴 것이다.

나의 그날로 돌아가는 마법 - 김해인 편집자의 <룩백> 에세이

“만화는 그냥 읽기만 하는 게 나아. 직접 그릴 게 못돼.” “그럼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참으로 성가시고 어렵다. 왜 하냐고? 왜 하겠어… 하고 입을 떼면 오직 한 가지 이유가 떠오르다가도, 또 너무 많은 이유들이 입에 고인다. 왜 만화에 관련된 일(만화편집자)을 하게 되었냐는 물음을 종종 들을 때마다 그런 심정이다. 좋아서… 하고 답하기엔 너무 순수해 보이니까, ‘때 좀 묻은 답을 해야 하나?’ ‘아니 근데 정말로 나 이 일을 왜 하지….’ 하다 보니 떠오르는 어떤 날. 12살의 나는 동네 서점에서 장안의 화제라는 일본 만화 신간 1권을 산다. 얼마나 재밌는지 한번 봐주겠다는 마음으로 두근두근 래핑된 비닐을 뜯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집에 걸어오는 동안 읽는다. 신호등을 건너며 읽는다. 몇몇 사람들이 쳐다본다.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책을 들고 읽으며 집으로 걸어간다. 개천을 지나고 헉헉대며 언덕을 오르고…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하니 어느덧 만화책도 마지막 장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현관문을 여는 대신 뒤를 돈다. 그길로 다시 언덕을 내려가서, 개천을 지나서, 헉헉거리며 서점에 도착한다. 서점에 가는 동안 스스로를 나무라며. 2권은 왜 안 사온 거야, 너 바보야?!!! 집에 걸어가는 동안 만화책을 읽고 그 만화가 너무 재밌어서 코앞까지 도착한 집 앞 현관에서 다시 서점으로 달려갔던 그날의 기억이, ‘왜?’냐는 질문을 파고 파고 파다 보니 떠올랐다. 고작 이런 날이 왜라는 근원적이고도 초거대한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진 모르겠다마는…. 여기 한 아이가 있다. 오타쿠의 시민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춘기가 다가오고, 만화 같은 건 접겠다고 선언한 이 아이는 자신의 만화를 너무 좋아한다고, 당신의 팬이라고 말하는 어떤 아이를 만난다. 방금까지 만화를 그만둔다고 말한 아이는 돌연 거짓말을 한다. 사실 만화 공모전을 위한 신작을 그리고 있었다고. 뻔뻔히 큰 소리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세찬 비가 내린다. 우산도 없이, 아마 있었어도 펼칠 생각도 못했을 아이는 팔을 점점 크게 흔들더니, 물웅덩이를 손으로 내려쳐 물보라를 일으켜본다. 발장구를 크게 친 걸음은 깡총거리는 투스텝이 되어 춤을 추는 듯하다. 다수가 <룩백>의 명장면으로 꼽을 이 장면은 만화에서는 단 세 페이지에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 세 페이지, 특히 주체할 수 없이 신난 후지노가 빗속에서 투스텝을 밟는 장면은 양 페이지에 걸쳐 풀컷으로 그려져 있다. 원작자 후지모토 다쓰키는 <룩백>을 그리면서 만화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거두었다고 말했는데, 이 장면은 더더욱 그렇다. 이 세 페이지에는 대사도, 내레이션도, 말풍선도, 쏴아아아처럼 흔히 빗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조차 없다. 다만 출판만화가 할 수 있는 특별한 연출로 그려져 있다. 출판물은 제작 과정에서 반드시 잘려나가는 종이의 일정 영역이 있고, 만화는 특히나 그림이 잘리지 않도록 안전히 그릴 수 있는 다치키리(断ち切り, 재단선)에 맞추어 그려야 하는데, 풀컷은 다치키리 프레임, 재단을 넘어서 그려진 그림이다. 한 장면이 된 오른쪽, 왼쪽의 양 페이지를 꽉 채우고, 채우다 못해 종이를 넘어가는 그림. 지면을 넘어 이 세계로 넘어오겠다는 마음의 폭발. 후지노의 감정은 원작 만화 속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나는 이 장면에서 후지노의 주체할 수 없는 신남, 동료이자 팬 쿄모토를 만난 감격을 느꼈는데, 영화를 함께 본 만화가님은 강한 해방과 자유를 느꼈다고. 약 1분30초 길이로 그려진 영화 속 빗길 장면은 무엇 하나라고 말할 수 없는 아이의 감정을 보다 풍성하게 보여준다. 여전한 것은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후지노의 얼굴.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빗물을 닦지도 않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묻고 싶다.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만화를 그리면 신이 나서, 쿄모토가 있어서, 만화를 그려도 된다는 해방감을 찾아서…. 지금 이 순간 아이에겐 어떤 것도 만화를 그리는 이유가 될 지도. 시간은 흘러 아이는 쿄모토와 서로의 이름을 따 ‘후지노 쿄’라는 필명으로 함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쌔벼파서’ 완성한 단편의 제목은 <메탈 퍼레이드>. 둘은 눈을 뚫고 도착한 편의점에서 <메탈 퍼레이드>의 입선 결과가 실린 잡지를 떨리는 마음으로 펼친다. 처음 만화를 그려 번 돈으로 시내에 나간다. 하루 종일 써도 5천엔밖에 못 쓴 데이트를 한다. 그 모든 순간 쿄모토보다 앞서가고 있는 후지노의 등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다고 결심한 쿄모토가 다른 길을 찾아 떠나고, 후지노는 홀로 프로 만화가로 데뷔한다. 그리고 어느 날 하나뿐이었던 동료 쿄모토를 잃는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후지노는 쿄모토를 영영 만날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만화를 그리는 날은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된다. 혼자가 된 후지노는 죽은 쿄모토의 방 문을 연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만화 <샤크 킥> 11권을 읽는다. “이 몸이 나설 차례군!” 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 아래 적힌 것은 ‘12권에서 계속’. 돌아온 후지노는 연재를 중단했던 만화 <샤크 킥> 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12권이 될 원고를, 좁은 방에서 <샤크 킥>을 읽고 다음 권을 기다렸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다시 펜슬을 쥔 후지노가 있는 공간은 작은 유리창만 있었던 좁은 방에서 통유리창 밖으로 도시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방이 되어 있다. 사각사각 하는 연필 소리는 툭툭탁탁 하는 태블릿 펜슬의 기계음으로 바뀌어 있다. <나카요시> <주간 소년 점프> 등 동경하던 꿈의 연재 잡지가 차지했던 자리는 <샤크 킥> 단행본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단행본의 책등에 적힌 저자명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후지노 아유무’가 아니라 ‘후지노 쿄’다. 홀로 넓은 방 안에 등을 보이고 앉아 만화를 그리고 있는 후지노에게, 나는 또 묻는다. 후지노, 넌 왜 만화를 그려? 지금의 넌, 그때와 너무 달라진 너는 왜, 어떻게, 무엇으로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거냐고. 지금, 어떤 것도 만화를 그리는 이유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이 질문은 그만할게.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참으로 성가시고 어렵잖아. 오직 한 가지 이유가 떠오르다가도, 또 너무 많은 이유들이 입에 고이는 질문이잖아…. 다만 ‘왜 만화를’이라는 질문에 후지노가 어떤 날, 어쩌면 잊고 있었던 그날을 떠올리기를. 팬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마구 신이 나서, 만화를 그리고 싶은 맘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해방감과 자유에 젖은 채 거세지는 빗속을 달렸던 날을. 여기서부터는 두 사람에게 이런 평행 세계도 있었으면 하는 나의 망상. 그날을 떠올리던 후지노는 그날 따라 피로했는지(만화가는 늘 피곤하니까) 태블릿 PC에 고개를 박고 깜빡 잠에 든다. 잠든 후지노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4컷 만화 그림이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방 안에서 살짝 펄럭인다. 그 순간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는 후지노 뒤로 방문이 열리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떤 아이가 조심스레 들어온다. 신기한 듯 방 안을 가득 채운 만화책을 둘러보던 그 아이는, 잠든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속삭인다. “역시 후지노 선생님은 만화의 천재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