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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그리워하는 모든 이에게

오랜만이야 언니. 생일 때 찾아오려고 했는데 지금에서야 오게 됐어. 미안해. 어떻게 지냈어? 요즘은 해가 쨍쨍한데도 비가 오고 벌건 날씨는 푸르러질 생각을 안 해. 그래서 때때로 시원한 맥주로 낮술을 마시면서 벌겋게 익기도 해. 유난히 더운 올여름, 언니는 무슨 과일이었을까? 여름과 참 잘 어울리는데. / 하늘을 자주 올려다봐.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색이 참 맑고 이쁘더라. 나한테 하늘은 유정이야. 오늘 지는 노을을 보고 (어느 색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파스텔의 유정을 떠올릴게. 내 바람일 수도. / 지나간 ‘색’을 모으면 아주 두꺼운 책이 될 것 같아. 그것이 유정을 향한 내 사랑과 그리움의 아우성일 거야. 2023년 8월1일, 민하가. 나의 유정. 나는 미국에 2주 정도 머물다가 왔어. 여러 사람들도 만나고, 즐거운 시간도 보냈어. 왠지 모르게 외국에 나가면 언니 생각이 더 진하게 나. 밴쿠버로 떠날 때 언니를 놓고 왔다는 생각이 아직 깊이 남아서일까. 이제 격리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해가 뜨면 언니를 보러 갈 거야. 우리 또 많은 이야기 나누자. 언니가 줬던 I ♡ NY 인형이 아직 있어. 그래서 뉴욕에 있을 때 언니가 더 더 많이 생각났나? 히히. 유정의 향기가 깊은 가을이다. 차갑지만 따뜻하고 이슬이 한 가득 맺힌 것이, 유정을 보는 듯해. 매일 사랑하고 보고 싶다고 외치지만, 오늘은 더 특별히 소리치고 싶다. 사랑해, 유정. 태어나줘서 고마워. 2021년 11월20일, 민하가. 언니! 나는 캐나다 무사히 잘 다녀왔고, 격리 끝나자마자 언니를 보러 가. 정말이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한국에 오니 언니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져. 사실, 더 안 믿겨지는 요즘이야. 안 믿겨지면 안 믿겨지는 대로 온전히 느끼는 중이야. 그만큼 언니가 내 가슴에서 더 열렬히 숨 쉬고 있다고 믿으면서. 슬픔이 크고 그리움이 사무치지만. 살아갈 ‘력’이라고 생각할게. 아직도 사랑한다며, 술이 취해서는 내 볼에 뽀뽀해줄 것 같은 유정 언니. 살갗과 온기가 느껴져, 보고 싶다. 사랑해 언니. 언제나. 지금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겠지? 어떻게 된 게 언니를 보러 가는 날이면 비가 오네. 진심으로 가득 찬 언니의 맑은 눈동자 같아. 2021년 4월28일, 민하가. 유정에게 쓴 수많은 편지들 중 3장을 가져왔다. 지금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유정은, 내 마음속에 있는 가장 아름답고 영롱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어찌 그녀를 뽐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계절의 바람에서 자유롭게 흐르고 있을 그녀를. 유정은 타고난 분위기 메이커였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나. 구성원 한명 한명의 상태를 확인하고, 상황에 맞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주도하기도 하는 탁월한 진행자. 아무리 칼 같은 말을 해도 고유의 사랑스러움이 그 날카로움을 감싸안아 뭉툭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그런 존재다. 그녀에게 사랑스러움은 그녀의 능력이었다. 눈치도 빨라서 가끔 술에 취해 친구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목소리가 높아질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불씨를 꺼버리는 것도 늘 유정의 몫이었다. 우리에겐 유정이 있어야만 했다. 이쁘기는 또 얼마나 이쁜지, 유정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남성들도 꽤 많았다. 생기가 그득한 눈, 오뚝한 코, 활짝 웃는 미소와 또 그와 살짝 상반된 너털웃음은 모두를 매료시켰다.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유정의 웃음소리가 녹아 있는 동영상은 언제 봐도 꽃밭 같다.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마법 같은 그녀의 목소리와 미소. 인기가 없으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의리도 아주 높게 생각해서, 입도 무겁고, 친구들의 고민을 진중하게 들어주었다. 그래서 유정에게 은밀한 고민 상담을 하는 친구들도 갈수록 늘어났다. 아마 그녀는 우리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모두에게 선물 꾸러미 같은, 어디서나 빛나는 존재였다. 나의 편지에서도 느껴겠지만, 유정은 어느 계절에나 잘 어울렸다. 좀 더우니까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실까? 찬바람 솔솔 부니 국물에 소주 한잔할까? 하며 시시콜콜한 핑계를 대며 자주 만났다. 또 하나의 계절을 보내며, 쓸쓸히 부는 바람을 마주하는 것이 유정이 찾아왔나보네, 하며 고마운 마음에 발걸음을 늦추며 느린 귀가를 하는 밤이 잦아진 요즘이다. 유정을 떠나보낸 지 3년이 넘었다. 그리움이란 그녀를 살리지 못한 대가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유정은 우리에게 아주 큰 사랑과 목숨을 하나씩 더 주었다는 것. 모든 진실된 마음을 닿을 수 있게끔 해주는 소중함과 간절함을 일깨워줄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그렇기에 내게서, 특별하고 고귀한 사랑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가끔은 펑펑 울어도 결국엔 안도감일 것임을 그녀는 계속해서 알려주고 있다. 이번 글을 편지로 시작한 이유는, 어떠한 설명보다는 마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과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편지를 (많이 쑥스럽고 개인적이고 용기가 필요했지만) 보여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당신의 그리움, 향수, 사무침, 미련, 모든 것들은 찬란하게도 용감하다. 그러니, 끊임없이 보고 싶어 하는 당신은 참 멋지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반짝반짝 천방지축 유정 언니는 지금 어디에선가 다시 태어나고 있겠지? 다시 만나자 우리. 2021년 3월29일 민하가.

작별하지 않는다 ,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매혹적인 이유에 관하여

운명은 죄가 없다. 삶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 때 우리는 이 묵직한 울림의 단어에 너무 많은 책임을 미루곤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놓을 때 그 무기력한 낙담조차 정해진 운명인 걸까.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1992년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연출한 뒤 네 번째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31년의 세월이 걸린 건 이미 정해진, 필요한 일이었던 걸까.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예상외로 단호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어떤 길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닦여 있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오직 눈을 떠 바라보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이 있으니, 그게 바로 영화의 운명이라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유명 배우를 추적하는 어느 영화감독의 걸음에 동행하는 영화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는 한 TV프로그램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22년 전 실종된 배우 훌리오(호세 코로나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미겔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배우 훌리오는 당시 미겔이 준비 중이던 두 번째 장편영화 <작별의 눈빛>을 찍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와 함께 미겔의 영화도 중단됐고 미겔에게 남은 건 변변치 않은 경력뿐이다. 본인의 아픈 상처이기도 한 영화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미겔은 내내 과거로부터 도망쳐 다녔지만 결국 훌리오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훌리오의 흔적을 찾아 미완의 영화를 다시 바라보는 길 위로 예정된 불안과 기이한 환희의 빛이 쏟아진다. 운명과 자유의지 운명이란 단어를 사용할 땐 앞뒤 행간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사 세상의 일들이 모두 결정되어 있고 바꿀 수 없다는 게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떤 결정의 이유로 삼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미겔은 왜 22년이 지난 뒤에야 훌리오를 찾기로 결심한 걸까. TV프로그램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 아니면 훌리오에게 이유라도 듣고 싶어서? 이제 와서 훌리오를 찾는다 해도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미겔이 새삼 훌리오를 찾기로 결심한 게 실패한 과거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어떤 심경으로 이미 정해진 (쇠락의) 운명과 닮은, 실패한 영화의 잿더미를 헤집는가.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문을 열 열쇠는 의외로 이 질문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가 제시하는 건 답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차라리 열쇠의 형태를 감상하는 시간에 가깝다. 빅토르 에리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행동의 이유는 그다지 중요치 않고 설명되지도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추적의 플롯을 취하고 있지만 훌리오의 사연은 그저 미겔을 길 위에 데려다놓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대신 영화는 미겔의 행동들, 그 궤적이 품고 있는 신비와 가능성에 집중한다. 과거의 궤적을 복기하는 미겔의 여정을 통해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결국 사라진 것들의 흔적이다. 미술관, 필름 보관소, 영사실을 경유하는 미겔의 행보가 기억 속에서 지웠던 것들 혹은 세월에 지워졌던 것들을 생생하게 우리 앞에 복원시킨다. 이미 찍혔지만 제대로 응시된 적 없는, 아직 관객을 만나지 못한 영화의 파편들은 미겔의 여정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난다. 마치 이미 결정되었지만 현실이 되기 전엔 알 수 없는 운명(이란 이름의 미래)을 상상하는 영화처럼. 과거의 잿더미는 목격자, 그러니까 미겔(과 그의 동행자인 우리)을 만날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 역시나 영화처럼. 영화는 현재를 포착함으로써 존재를 기록한다. 아니 이건 지나치게 방만한 표현 같다. 범주를 좁혀보자. 필름(영화)은 빛으로 사실을 찍어내고 현재를 붙잡는다. 20세기 영화, 좁혀서 1950년 이후 거론되는 이른바 ‘모던 시네마’는 이러한 ‘사실의 포착’과 ‘해석의 가능성’에 기반한 채 진실을 탐구해왔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빛의 판화, 진실의 프리즘이라 해도 좋겠다. 진실은 하나인가. 그럴 리가. 그리하여 미겔의 미완성 영화 <작별의 눈빛> 역시 배우가 사라지는 바람에 ‘종료’당했지만 22년 만에 다른 형태로 깨어날 기회를 얻는다.<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며 새삼 영화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다. 적어도 빅토르 에리세 감독에게 운명이란 질문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정해져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알 길이 없고, 실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어차피 우리는, 개인은, 한 사람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이야기 혹은 사건은 사고 같은 것이다. 이유 없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과격하고 적어도 인간의 능력으론 이유를 특정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때 우리가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건 일어난 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뿐이다. 리액션의 선택만이 우리를 증명하고 자유롭게 한다. <해리 포터> 속 덤블도어 교수의 지혜를 빌리자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다. 미겔(아니 빅토르 에리세) 또한 선택했다. 필름을 소생시켜 영사기의 빛과 소음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목격자가 되어주기로. 존재를 되새기는 과정의 기적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의 존재를 탐문하는 자기 반영적인 결과물이다. 영화 속 영화 <작별의 눈빛>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큰 틀에서 미겔이, 아니 빅토르 에리세가 믿는 ‘영화가 무엇인지’ 윤곽이 드러난다. 물론 이걸 빅토르 에리세=미겔, <작별의 눈빛>=<상하이의 약속>(제작이 취소된 빅토르 에리세의 미완성 영화)처럼 단순한 등치와 상징으로 읽어낸다면 그보다 더 평면적일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진정한 예술에 대한 고뇌나 불변하는 영화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강변 따윈 없다. 그저 쇠락하는 운명, 예정된 결과가 빅토르 에리세라는 한 창작자의 궤적 위에 자연스럽게 겹칠 따름이다. 미겔이 찍어놓은 필름, 미처 영화로 완성되지 못한 <작별의 눈빛>은 이미 결정된 과거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작별의 눈빛>은 정해져 있되 안개 속에 가려진 운명과도 같다. 아직 인지되지 않은 과거, 목격을 통해 확정되지 않은 정보는 닥치지 않은 미래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작별의 눈빛>을 미완의 운명이라 불러도 좋겠다. 완전히 결정되어 있어 수정이 불가능한 형태. 역설적이지만 그렇기에 관객(미겔)과 동행 중인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자유롭게 읽어낼 여지를 확보한다. (결정된) 운명을 대하는 (자유)의지의 발현. 오직 상영되어 관객을 만날 때마다 거듭 새로 태어나는 의미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결정되었지만 여전히 잠재된 모든 가능성에 대한 꿈이다. 그걸 우리는 다른 말로 (20세기의) 시네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는 앞에 하나가 생략되어 있다. 이 명제의 온전한 문장은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시 말해 존재는 오직 의심,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주어진 쇠락에 순응하는 대신 저항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빅토르 에리세는 여전히 의심하고 저항한다. 아마도 30년의 세월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빅토르 에리세는 지금도 영화의 존재를 의심한다. 고로 우리는 목격한다. 거기에 영화가 존재한다.

영화라는 근육 기억, 오진우 평론가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한 남자가 기억을 잃었다. 그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을 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던 도중 한곳에 시선을 빼앗긴다. 그곳엔 용접공들이 있었다. 그는 자신도 용접을 해보겠다고 말한다. 그의 실력에 사람들은 감탄한다. 사장은 일을 하려면 통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통장을 만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2002)의 인상적인 대목이다. 노동자의 삶을 그렸던 카우리스마키답게 일시적으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에게서 지울 수 없었던 단 하나는 노동의 흔적이다. 몸에 새겨진 기억들. 이른바 ‘근육 기억’(Muscle Memory)은 “반복을 통해 특정한 움직임의 수행력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의미한다. 과거를 잃어버린 남자, 훌리오(호세 코로나도)도 예외는 아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기억과 존재에 관한 영화적 탐구의 여정을 그린다. 그것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정이다. 이 두 영역은 ‘영화’처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데트>(1955)에서의 기적은 물질과 정신이 하나라고 분석한 카렌 O. 카스톤의 지적처럼 빅토르 에리세는 영화에서 언급되는 ‘드레이어의 기적’이 지금의 이 시대에도 가능한지를 관객에게 묻는, 그러기를 바라는 기적의 영화다. 훌리오가 눈을 감으며 디졸브되며 소멸하는 영화. 에리세가 바라는 기적은 아마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영화가 다시 점화하는 것일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포함해 빅토르 에리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시제는 ‘과거’다. 영화감독 미겔(마놀로 솔로)과 편집자인 친구 막스가 필름 보관 창고에서 나눈 대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일종의 “고고학”이다. 기억이 흩어지는 와중에 훌리오가 간직한 물건들과 그의 신체에 남겨진 기억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단서들로 영화에 제시된다. 여기서 후자의 기억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영화가 신체에 각인될 수 있는 기억으로 보는 관점은 에리세의 영화의 원체험과 관련이 깊다. 에세이영화 <라 모르테 루즈>(2006)에서 에리세는 어린 시절 처음 봤던 영화 <주홍빛 발톱>이 선사한 공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어린 시절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어린 에리세는 서슬 퍼런 프랑코 독재 시절과 영화 속 연쇄살인마이자 친절한 우체부인 ‘포츠’의 모습을 겹쳐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트라우마적인 체험은 이후 그의 첫 장편영화인 <벌집의 정령>(1973)의 아나(아나 토렌트)를 통해 재현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도 에리세의 영화적 체험의 관점은 유지된다. 훌리오에게 영화란 무엇일까? 그것은 관객으로서 우리가 스크린을 바라보며 갖는 영화적 체험과는 무관하며 배우로서 갖는 육체적 활동에 가깝다. 그렇게 보는 것은 아마도 미겔의 관점이겠다. 훌리오는 감정과 몸짓을 통해 하나의 인물을 창조해온 배우다. 미겔은 영화를 통해 훌리오의 신체에 남아 있는 영화의 흔적들을 발굴하려고 한다. 먼저 훌리오가 남긴 물건들을 살펴보자. 이 물건들은 의미를 상실한 채 ‘훌리오’라는 정체성으로 접속하기 위한 기호로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다. 미겔은 그러한 기호를 통합해 현재 ‘가르델’이라 불리는 한 남자의 영혼, 즉 훌리오를 깨우려고 한다. 미겔은 우선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인 목소리와 얼굴을 활용한다. 하지만 헛수고로 돌아간다. 미겔은 훌리오와 함께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고, 해군에서 익혔던 매듭법을 알려주었지만, 훌리오는 여전히 가르델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미겔이 택한 최종 수단은 바로 영화다. 훌리오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 중에 영화 소품이 있었다. 훌리오가 사라지는 바람에 제작이 중단됐던 <작별의 눈빛>에 쓰인 사진과 체스 말이 그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작별의 눈빛>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훌리오가 맡은 역할은 ‘프랑크’다. 그는 한 남성이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수락한다. 중간이 텅 빈 <작별의 눈빛>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 프랑크는 딸을 찾아오고 의뢰인과 대면시킨다.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훌리오에게 스크린은 거울일까? <작별의 눈빛>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일련의 과정 역시 육체적이다. 아버지 앞에서 딸은 부채를 꺼내 ‘상하이 제스처’를 보여주며 사진 속 모습을 재연한다. 얼굴과 몸짓과 목소리를 통해 부녀는 서로를 확인한다. 마지막엔 아버지는 딸의 눈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보려 한다. 현실에서 미겔은 훌리오와 그가 맡았던 프랑크를 대면시킨다. 정확하게는 <작별의 눈빛>에서의 프랑크와 그가 찾은 소녀의 투숏과 훌리오와 미겔을 몽타주한다. 왜 훌리오와 프랑크를 1:1로 몽타주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영화는 단순해졌을 것이다. 이 영화는 훌리오의 실존만을 다룬 영화가 아니다. 미겔 역시 훌리오를 찾으러 다니면서 마주한 것은 자신의 실존이다. 중단됐던 자신의 영화 <작별의 눈빛>의 미완성된 부분을 현실에서 몸소 체험하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해 스크린은 단순히 훌리오의 정체성 복원을 위한 발굴 현장이 아니라 현실과 픽션이 뒤섞여 불가분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현장이 된다. 이 4명의 얼굴이 하나의 스크린 위에서 뒤섞이며 복잡미묘한 감정의 덩어리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눈물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감정적 호소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며 하나의 이미지가 다시 등장한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했던 조각상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조각상은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며 영화 전체를 곱씹게 만든다. 에리세는 시작부터 이 영화의 전부를 보여준 셈이다. 하나의 몸을 두고 두개의 얼굴이 붙어 있는 조각상.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이 두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의 끝에서 우리가 느꼈을 여러 감정들은 이 조각상에 들러붙어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른 형상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훌리오 혹은 미겔일 수도 있다. 아니면 빅토르 에리세가 찾고자 하는, 현재는 소멸되고 있는 ‘영화’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로 떠밀려가는, 이병현 평론가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도입부 20분은 올해 나온 다른 모든 영화보다 낫다”(제이콥 올러)라는 식의 평을 듣고 영화관에 들어간 이라면 누구나 다 영화를 보며 당황할 것이다. 호들갑스러운 상찬에 비해 눈앞에 펼쳐진 첫 장면이 너무나 평이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칸영화제 프리미어 당시에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 도입부에 나오는 ‘영화 속 영화’인 <작별의 눈빛>이 실제 빅토르 에리세의 미완성 작품이란 얘기가 돌았다는데, 눈이 삐지 않고서야 <벌집의 정령>과 <남쪽>을 찍던 감독이 그런 장면을 진지하게 자기 장편영화의 도입부로 찍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문제의 도입부는 당연히 ‘영화 속 영화’일 수밖에 없을 수준으로 전화번호부처럼 기능적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숏이 야누스상이라는 것부터가 영화에 대한 도식화를 강요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중국에 간 딸을 찾아달라는 이야기나 수상쩍을 정도로 풍겨대는 구식 오리엔탈리즘 분위기조차 별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나 배경은 아니다. 즉 이 영화는 배우가 실종되는 바람에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 영화가 완성되었어도 ‘걸작’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특이한 영화다. 지난해 <거미집>을 보고 나서 문제의 ‘플랑 세캉스’ 장면에 정작 롱테이크의 쾌감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이것이 의도된 것일까 아니면 역량 부족일까를 한참 고민했던 것과 같이, 나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는 나머지 시간 동안 도입부 셀룰로이드 필름에 담긴 회색빛 밋밋함과 과포화된 상징들이 의도인지 실책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잔뜩 복선을 깔아둔 채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는 <작별의 눈빛> 결말은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듯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밋밋하고 상징으로 가득 찼으며 허무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이 스크린보다는 훌리오의 표정을 살피는 데 더 열심이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문제는 이런 밋밋함이 극중극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남달리 촬영된 부분은 오직 훌리오가 절벽 위에서 자발적 실종을 결심하는 장면 하나뿐인데, 이것이 늙은 감독의 상상 속 장면이라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실제 영화와 영화 속 영화 전부를 통틀어 아름답지 않다. 에리세는 마치 멋진 장면을 찍는 행위란 이제 오직 상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듯이 영화를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였다. 원래 빅토르 에리세가 숏 하나하나 공들여 찍는 데 골몰하는 감독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왜 이번에는 자신의 다른 영화와 배치되는 스타일을 추구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가 캐물어야 하는 것은 과연 이토록 밋밋한 장면으로 점철된 영화(속 영화)가 기적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기적’을 상상할 때 우리는 황홀하고 숭고한 장면을 상상하지, 그 반대를 떠올리진 않는다. 피할 수 없는 노화 하나의 가정: 마지막에 훌리오는 기억을 되찾았다. 이때 이 기적이란 정작 당사자에겐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내내 노화를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혐오하는 것처럼 묘사된 훌리오는 이제 자신의 노화를,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됐다. “과거가 예전처럼 나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 세계에서 훌리오는 “아쉽게도 결국… 커버린 것이다”.(<남쪽>) 훌리오는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떠났던 촬영장에 돌아갈 수도 없고, 다 커버린 딸과 갑작스레 애틋한 부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20년간 어른의 책임을 회피한 채 살다 몸만 더 늙어버린 노인이라는 차디찬 현실만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잔혹한 각성이 <작별의 눈빛> 같은 평범한 작품을 보며 찾아오는 건 전혀 아이러니가 아니다. 실은 여기서 펼쳐지는 것은 ‘필름은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라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기적이 가능하다는 시대착오적 이야기다. 영화는 기적을 이루기 위해 걸작이 될 필요가 없다고. 단순히 필름이라는 물질적 조건만 충족해도 기적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라고. 영화에서 내내 이어진 단조로운 화면은 영화가 환상 못지않게 현실을 새기는 매체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서 당신은 즉각 필름에 대한 순진한 물신주의를 지적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항상 제작 시점보다 30여년 전을 배경 삼아 픽션을 찍던 빅토르 에리세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10여년 전인 2012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12년은 필름영화가 디지털영화보다 더 많이 만들어진 마지막 해이다. 눈을 감은 훌리오의 얼굴이 페이드아웃되며 필름 감기는 소리가 뚝 그치는 장면은 결국 죽은 필름영화의 눈을 조용히 감겨주는 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이 반대의 가정, 훌리오가 끝내 기억을 찾지 못했다는 가정은 성립될 수 없다. 이 영화의 결말은 필름에 대한 애도이며,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애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폐허를 바라보며 미래로 떠밀려가는 역사의 천사처럼, 훌리오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며 예정된 미래로 떠밀려간다. 관객 또한 옛 영화를 바라보며 필름의 죽음이란 예정된 미래로 떠밀려가게 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엔딩은 영화가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죽음, 그리고 상실을 상기시키는 매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영화의 죽음’을 한탄하는 흔해 빠진 염세주의가 아니다. 에리세의 데뷔작이 칼 드레이어가 죽은 후 나왔다는 점을 기억하라. 에리세에게 영화란 필름영화 시절에도 언제나 기적을 바랄 수 없는 장소였다. 이 영화를 소박한 도피주의에 가까운 <파벨만스>나 공허한 회고담에 그치는 <바빌론> 같은 영화와 헷갈려서도 안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란 태어날 때부터 미래가 없는 매체였다는 뤼미에르의 케케묵은 말을 되새긴다. 그러나 불멸이란 본래 불가능한 꿈이 아니던가? 훌리오는 기억을 되찾은 채 눈을 뜰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 보아야만 한다. 육체는 늙고 이름은 바뀌어도 영혼은 이어질지니.

[인터뷰] 길 위에서 나눴던 우리의 대화를 기억하나요?, 배우 이명하, 하성국, 박봉준, 백승진, 정수지

3막으로 이뤄진 <미망>은 두 남녀를 중심으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성을 비춘다. 우연히 길을 잃은 종로에서 옛 연인을 만난 1막 ‘달팽이’ , 폐관을 앞둔 서울극장에 모더레이터로 간 여자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2막 ‘서울극장’,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오랜 친구들을 재회하는 3막 ‘소우’까지 <미망>은 현대사회에 귀해진 인연과 만남을 근간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작품 속에 정확한 이름은 없지만 주변 가까운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다섯명의 등장인물은 이명하, 하성국, 박봉준, 백승진, 정수지 배우를 만나 각자의 색깔로 아름답게 채색되었다. <미망>의 도시가 어쩐지 서글프고 애처롭고 그러나 다정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모두 배우들의 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길 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눈다. 대낮부터 평일 밤, 새벽녘까지 온종일 걸어온 이들은 어떤 속마음을 간직하고 있을까. 4년의 제작 기간에 걸친 비하인드 스토리를 진솔하게 고백해보기로 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웃음소리만이 하루를 메웠다. - 커버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무척 남다르다. 촬영 내내 하하호호 화기애애하다. <미망>에 대한 배우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작품에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나. 각자가 맡은 인물과 함께 소개해달라. 하성국 <미망>이 기획부터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달팽이’라는 1막이 단편으로 나왔다가 추후 장편으로 제작됐다. 장편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글이 정말 좋았다. 서울에서 우연히 전 연인을 만나 자기만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남자’ 역을 맡았다. 김태양 감독과는 대학 동문이라서 20대부터 오랫동안 영화 이야기를 나눠온 사이다. 그래서 <미망>을 함께한 것도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명하 언젠가 김태양 감독을 우연히 길에서 만난 적 있다. 그때 반가운 마음으로 근황을 나누다가 “또 같이 영화 해야지” 하고 헤어졌는데 얼마 뒤 시나리오가 왔다. 우리가 만났던 그 순간이 단편영화 <달팽이>로 만들어진 것이다. 너무 신기했다. 내 이야기가 시나리오가 되다니. 그래서 영화 속 ‘여자’를 가상 인물이 아닌, 나로 바라보고 접근하게 됐다. 박봉준 나는 하성국 배우와 고등학교 친구 사이다. 언젠가 영화작업을 하는 주변 친구를 소개해줘서 김태양 감독과도 가까워졌다. <미망>의 2막 ‘서울극장’에서 여자에게 고백하는 팀장 역할을 맡았다. 그때 김태양 감독이 1막에서 나왔던 남자와 닮아 보이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와 같은 우산을 손에 들고, 본래 남자가 하던 것처럼 손동작을 크게 취했다. 여자에게 사려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향으로 캐릭터를 구축했다. 백승진 나는 1막을 영화로 먼저 보았다. 이후 <미망> 프로듀서와 고등학교 친구라는 인연으로 2막 ‘서울극장’의 제작실장을 도맡았다. 스태프 역할을 한 거다. 그때 김태양 감독은 “배우는 배우로 만나야지” 하고 거절했지만 그냥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다 3막 ‘소우’ 시나리오를 보는데 그 안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고, 그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이름이 왜 나오지?’였다. 게다가 김태양 감독은 나의 기존의 연기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배역이 나의 도움에 대한 보답인가 싶어서 처음엔 거절했다. 괜히 나를 챙기다가 다른 좋은 배우를 놓칠지도 모르니까. 그러자 김태양 감독이 말하더라. “나, 영화 그렇게 안 해, 승진아” 하고. 그렇게 3막에 합류했다. 몇년 만에 다시 만난 남자와 여자의 오랜 친구다. 정수지 나는 1막에서 하성국 배우의 당시 연인으로 등장한다. 2019년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그 안에 담긴 어휘와 표현이 정말 남달랐다. 그때 김태양 감독 고유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내 역할이 다소 단편적임에도 불구하고 김태양 감독은 이 인물에 담긴 의미와 바람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줬다. 담담하고 의연한 성격, 외유내강의 태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정말 흥미로웠다. 극 안에서 내가 하성국 배우에게 존댓말을 쓰는데 그 지점이 김태양 감독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근데 하성국 배우가 정말 싫어했다. 난 이런 극적 설정은 거부할 수 없는 거라고만 생각해왔는데 거부하는 사람이 여기 있더라. (웃음) 우리의 인연은 아주 잠시 지나가는 것이겠지만 - 1막 ‘달팽이’에서 재회한 두 남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3막 ‘소우’에서 다시 만난다.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둘은 1막과 3막 사이에 놓인 시간의 흐름 만큼이나 변해 있다. 이 변화를 어떻게 드러내려 했나. 이명하 내가 맡은 여자는 <미망>에서 1, 2, 3막에 다 나오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각 인물을 만나 관계를 맺어가고 그 관계에 변화가 생겨날 때 반응이 모두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를 만날 때, 팀장과 대화할 때,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 등등. 촬영 기간이 길었던 만큼 이런 부분을 자연스럽게 체화할 수 있었고 실제로 어떤 시점에서는 여자의 시간의 흐름이 보였다. 그렇게 각 관계성에 따라 말투와 표정이 저절로 다르게 드러났다. 하성국 실제로 4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점이 그 변화를 보여주는 데 유리한 면이 있었다. 3막을 촬영할 즈음에는 내가 1막에 나왔던 사람이라는 생각을 안 했다. 물론 내면에는 연결점이 있지만 별개의 이야기처럼, 별개의 인물처럼 바라보려 했다. <미망>은 물리적으로 흐른 시간이 영화를 완성하기 때문에 작품의 구조와 실제 지나간 시간이 함께 표현되는 것 같다. 1막에서 남자는 설레고 밝은 면이 있지만 3막에서는 다소 침착하고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그건 내가 연기한 게 아니다. 진짜로 그 사이에 내가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웃음) 그냥 그런 내가 되어 있었다. 정수지 1막을 하성국 배우와 촬영하고 나중에 전체 내용을 보았는데 나와 촬영했을 때와 다른 모습이 인상 깊었다. 뭐랄까, 중후해지고 차분해졌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던 연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는 느낌이었다. (웃음) - 세개의 막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지나가는 대사나 인물들의 태도에서 그사이에 누적된 시간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2막부터는 이 미묘한 지점을 드러내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박봉준 나는 영화의 첫 등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2막에서 나는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그 뒤에 포커스아웃되어 서 있다. 카메라가 나를 정면으로 담지 않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분위기, 애정이 잘 표현되길 바랐다. 평소에도 남들은 잘 모르는, 나만 아는 디테일한 부분들을 신경 쓴다. 예를 들어서 걸음걸이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화하는 여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는 장면이나 여자와 함께 밤 골목을 헤매는 장면에서 걸음걸이를 신경 썼다. 하지만 전사를 많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직관적으로 쉽게 드러내면 보는 사람들에게 그 의미와 해석을 맡길 수 있다. 대사를 잘 쓰는 연기보다 상황에 놓인 인물의 비언어적인 반응을 유연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백승진 3막에서 ‘친구’로 등장하는 나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여자와 남자를 만난다. 둘의 과거도 관계성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세 친구는 어릴 적부터 자주 봐왔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주 못 본 것 같다. 나는 두 남녀 사이에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어색함 없이 편하게 이야기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예전 같지 않은, 묘하게 달라진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 않나. 서로가 다른 시간을 보내왔다는 느낌. 그것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 인물에게 연결고리로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긴 고민을 했다. - 장례식장에서 세 친구가 모였을 때 백승진 배우는 여자를 발견하고 무척 밝은 얼굴과 손짓으로 반긴다. 상황과 장소에 맞지 않는 반응이지만 그 자체가 친구의 모습과 성향을 매우 잘 보여준 것 같다. 그를 통해 세 친구가 함께 서울에 돌아갈 수 있었고. 하성국 아, 그 신에 비하인드가 있다. (웃음) 본래 시나리오에서 졸업 이후 처음 만나는 여자를 반가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기도 했지만 백승진 배우가 너~무 반색하니까 김태양 감독이 “그건 좀 아니다” 하면서 말렸다. 박봉준 그러니까 택시에서 혼나지…. 백승진 장례식장의 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으로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길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음) 장례식이라는 게 정말 슬픈 일이자 공간이지만 그로써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 만나기도 하지 않나. 그런 자리와 기회를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라 충분히 반기고 싶었다. 하성국 그 장면에서 나는 눈감고 있었는데 푸드덕거리는 소리만 들리다 돌연 엔지가 되어서 너무 웃겼다. - <미망>은 인물들이 담담하게 일상적 대화를 나누면서 서정적이고 의미심장한 대사들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모든 인물이 길 위에서 이 미션을 수행해야 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하성국 1막을 찍을 때 정말 쉽지 않았다. 을지로와 종로 거리를 지나야 하는데 사람도 차도 정말 많았다. 3막은 밤거리니까 충분히 통제 가능한 상황이어서 집중도가 달랐다. 하지만 1막은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의 반응을 신경 쓰면서 상대 연기자와 호흡을 맞추려다보니 명확하게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정수지 나는 심지어 비 오는 날 촬영했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비가 내리는데 이게 될까?’였다. (웃음) 차가 지나갈 때 멈추거나 우리 앞에 먼저 서는 차를 향해 인사하면서 길을 걸었다. 이명하 진짜 길 위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라이브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살렸다. 그런데 나는 이게 아주 어렵진 않았다. 물론 평소 연기 방식과 많이 다르긴 하다. 카메라를 저 멀리에 숨겨놓고 롱테이크로 찍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게 참 좋았다. 나는 연극원을 나와 무대 중심의 수업을 받았는데, 연극은 공연 중에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촬영을 하면서 그게 가끔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잘게 쪼개놓고 같은 장면을 반복하는 게. 결과물로 볼 때는 만족스럽지만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적응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1막을 찍을 때 무대에 서서 연극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우리가 길의 일부가 된 것 같고, 제약이 없고. 카메라앵글과 시선이 나를 묶어두지 않았다. <미망>이 잊지 않고 잃지 않은 것 - 워낙 변수가 많은 게 야외촬영의 묘미라면 묘미인데. 예기치 못한 상황을 위한 고민을 더했겠다. 박봉준 나는 길을 걸으면서 대사를 외는데 대사 내용이 조금 어려운 편이어서 그게 걱정됐다. 왜냐하면 팀장의 말투는 평소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투와 거리가 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사 자체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팀장이 하는 말들은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 그냥 여자와 걷고 싶어서 계속 말을 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서라도 이 여자와 같이 있고 싶은 것. 대사는 수단일 뿐이다. 다만 이때에도 나만 아는 아주 작은 디테일을 더했다. 여자가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고 고백하면서 “어떻게 생각해요?”라고 묻자 팀장이 아주 짧게 인상을 찌푸린다. 지금까지는 여자에게만 온 신경이 가 있다가 현실적인 질문이 나왔을 때 번뜩 달라지는 것이다. 나만 아는 한끗을 두는 데서 강렬한 재미를 느낀다. 정수지 그런데 정말 김태양 감독의 글이 신기하다. 처음엔 시간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대사가 뭐랄까, 시적이다. 그래서 2막과 3막으로 흘러갈수록 <미망>이 얼마나 좋은 대사로 구성되고 설계돼 있는지 잘 보였다. 백승진 나는 서울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여자와 긴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레커 위에서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운전하는 척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설정부터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대사도 너무 많았다. 말이 왜 이렇게 많지? (웃음) 돌이켜보면 대중교통은 특수한 공간이다. 운전자는 고정돼 있는데 사람들은 계속 이동하면서 바뀐다. 그런데 택시는 또 그것과 다른 시공간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공통된 공간이 주어진다. 이 장면의 친구들도 택시 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미망>은 시제의 공존이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 시공간이 뒤섞이는 장면을 만들고자 했다. 나의 역할도 그것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하성국 나는 택시 안에서 내내 잠들어 있었는데. (여유로운 미소) 근데 이것도 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잠든 척을 해야 하지만 진짜 잠들면 안된다. - 김태양 감독은 “모든 인물의 일부에 내 모습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 자신이 맡은 배역의 어떤 면에서 김태양 감독이 느껴지나. 박봉준 VIP 시사회를 한 뒤에 한 관객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김태양 감독이랑 그렇게 똑같이 연기하실 수가 있어요?” 그때 알았다. 사람들이 잘 안 쓰는 팀장의 말투가 김태양 감독의 것이었구나…. (일동 폭소) 모든 인물 중 팀장이 김태양 감독과 가장 가까워 보인다. 예의 있게 고백하고 싶었다고 한 말이나 지하철역에서 헤어질 때 굳이 계단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고 또 굳이 뒤돌아서 공손하게 인사하는 모습들. 그런 것들이 비슷해 보인다. 정수지 <미망>은 작품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들이 유난히 사랑스럽다. 다른 작품이나 세계관에 별로 없는, 그런데 어딘가 존재하긴 하는 인물들이다. 상대방의 상태를 계속 살피고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꼬인 데 없이 경청하는 모습이 김태양 감독의 원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성국 감독님이 오케이를 쉽게 주지 않는 테이크들이 있다. 그럴 땐 해결책이 있다. “나는 지금 김태양이다~” 하고 연기하면 갑자기 오케이가 난다. (웃음) 나는 이 작품 전면에 김태양이 흩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지켜봐온 그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다. <미망>은 작고 사소한 일에 집중하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과 후에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하는 작품인데 그런 데서 김태양 감독의 결이 느껴진다. 이명하 남자의 대사 중에서 유독 김태양 감독이 겹쳐 보이는 게 있다. “내가 잘 기억을 못해도 괜찮아요?” 이거, 진짜 김태양 감독 같다. 이번 VIP 시사회 때에는 그 장면에서 많이들 웃었다고 하더라. 내가 남자에게 노래시키고선 나가버릴 때. (웃음) 근데 정말 끝까지 완곡을 하는 모습들. 백승진 김태양 감독이 무척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처음엔 그게 낯설었다. 모든 걸 좋게만 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미망>의 3막 끝에 다다랐을 때 깨달았다. 이 사람은 모든 걸 좋게만 보는 게 아니라 바르게 보는 사람이란 걸 . 낙천적인 것과 바르게 직면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1막이 우연에 의해 시작되고 2막이 의도로 연결된다면 3막은 처음으로 죽음과 장례라는 큰 사건이 등장한다. 망자와 남은 사람의 따뜻한 관계성을 볼 때 그 시선과 태도가 김태양 감독으로부터 왔다는 게 느껴진다. 아, 너무 좋은 얘기만 해주는 거 아니야? (웃음)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쓰는 사람의 자리

유령인가? 동거인의 죽음을 예감한 잉그리드(줄리앤 무어)가 선베드에 쓰러져 흐느낄 때, 유리창 너머로 다가오는 흐릿한 마사(틸다 스윈턴)의 형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마침 객석의 몇몇이 숨을 훅 들이켠 것도 같다. 아직 배우 틸다 스윈턴이 퇴장하기엔 이른 타이밍임을 고려하는 훈련된 관객들에겐 어렵지 않게 오해의 해프닝을 유추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것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다… 그러니 약속된 자살의 사인(닫힌 문) 이후 등장한 저 태연한 존재를 유령이라 생각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귀향>의 어머니가 그랬듯 말이다.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의 형벌로 항암 치료를 견뎠으나 결국 암세포가 온몸에 전이된 자궁경부암 3기 환자. 다크웹에서 구한 안락사 약으로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시한부의 전직 종군기자. <룸 넥스트 도어>의 마사가 항시 지나치게 깨끗하고 스타일리시하게 묘사된다는 사실도 인물을 차라리 하나의 유령 또는 기호로 바라보게 한다. (투병하는 몸의 처절함을 소거한 알모도바르의 영화엔 말기 암환자의 영화임에도 단 한번의 구토가 등장할 뿐인데, 그마저도 마사의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패닉에 빠진 잉그리드의 몫이다.) 나이와 성별, 출생 연대 미상이라고 수식할 만한 배우 틸다 스윈턴이 내뿜는 불멸의 기운을 소멸하는 사람에게 입힌 알모도바르의 심미안도 이런 인상에 기여한다. 연두색 선베드 위에서 노란 슈트를 입고 눈감은 마사의 이미지 또한 풍경의 디졸브와 함께 깨끗이 사라져버린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잊힌다. 예정된 잊힘 앞에서 <룸 넥스트 도어>가 추구하는 과제는 단순하지만 긴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서사에 도착한 한 사람의 성실한 작가가,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되 두려움에 물러서지도 않으면서 흩어지는 존재의 비밀을 부여잡는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잉그리드가 마사를 관찰하고 재해석할 동안 영화는 그들에게 최상의 색채와 구상적 감각을 부여하면서 기다려준다. 마주한 작가와 대상의 소실점이 맞아떨어져, 마침내 이 질문이 튀어나올 때까지. “네 얘기 써도 돼?” <룸 넥스트 도어>에서 주목할 점은, 극 중 인물들을 사로잡은 중대한 설정 두 가지가 모두 기대와 어긋난다는 것이다. 하나, 잉그리드는 마사의 바로 옆방이 아닌 아랫방에 자리 잡는다. 여기엔 어떤 갈등이나 위기가 없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들은 적절한 거리를 설정한다. 둘, 몇번의 실패 끝에 어렵사리 죽음의 동거인을 구해놓고도 마사는 잉그리드가 외출한 한낮에 홀로 약을 삼킨다. 죽음에의 동반과 목격이 <룸 넥스트 도어>의 최종 심급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바람 때문에 닫혀버린 마사의 방문을 보고 착각한 잉그리드가 그의 진짜 죽음 이전에 실질적인 슬픔과 충격을 선행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대신 죽음 이후 두 여자의 캔버스에는 눈물의 장례식이 아니라 글 쓰는 작가의 책상이 담긴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계획대로 착실히 완수하려는 과업은 존엄한 죽음의 완성이라기보다 ‘서사의 완성’이다. 경찰 심문실에서는 미리 설계해둔 공고한 각본이, 엄마를 원망해온 딸에게는 그동안 말 못했던 전기(傳記)가, 편지 한장을 남기고 떠난 친구를 향해서는 내밀한 응답의 서신이 쓰여진다. 작가는 비밀을 삼키고 글을 쓴다. 그리고 반드시 무언가를 재생시킨다. 요컨대 <룸 넥스트 도어>는 <페인 앤 글로리>와 <패러렐 마더스>가 지닌 죽음의 모티프를 이어받되 당사자가 아닌 기록자로 시점을 전환하고 그 역할에 몰두한 영화이기도 하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마사의 딸이 모습을 처음 드러낼 때 우리는 다시 유령의 귀환을 의심하게 된다. 젊은 모습으로 분장한 틸다 스윈턴의 재등장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는 죽은 줄 알았던 마사가 발코니 유리창 너머로 잉그리드에게 걸어오는 일전의 이미지와 정확히 같은 구도로 딸의 모습을 재현한다. 그리고 배우 틸다 스윈턴을 다시 한번 연두색 선베드에, 잉그리드의 옆에, 눈 내리는 하늘 아래 눕힌다. 유령적 존재는 알모도바르 영화의 스타일로 그치지 않고 오인의 모티프와 1인2역의 장치를 통과하면서 소생의 숨결로 나부낀다. <룸 넥스트 도어>에서 기화되듯 사라진 마사의 육신은 <패러렐 마더스>에서 학살로 공동 매장된 유골들이 되살아나는 디졸브와 순환하고, 틸다 스윈턴은 그 순환 속에서 실로 불멸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 마사의 되살아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억하고 기록하는 작가-잉그리드의 역량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 비밀과 재생의 순환을 저지하는 현실의 세태에 상처받은 입장도 취한다. 법적 소송을 피하기 위해 회원의 몸에 절대 손댈 수 없도록 한 헬스장에서, 근육질의 트레이너는 슬픈 잉그리드를 위로해주고 싶어도 안아줄 수 없어 괴로워한다. 그의 뉘앙스에 따르면, 마찬가지로 마사의 죽음 이후 남겨진 잉그리드 역시 비슷한 혐의에 처할지 모른다. 친구의 죽음을 방조하거나 오히려 조장했다는 오해, 나아가 타인의 죽음을 작가로서 소재화해 착취했다는 비판. 달리 말해 알모도바르가 지향한 연극적 어투와 극도로 심미적인 미장센의 세계는 <룸 넥스트 도어>에서 픽션이라 가능한 어떤 안전함의 결속처럼 느껴진다. 연루자의 관점에서 비로소 서술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복잡성은 <룸 넥스트 도어>의 두 친구 바깥에도 있다. 전쟁터에서 섹스함으로써 두려움을 떨치는 가톨릭 수사들,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남편을 막지 못한 아내, 기후 위기 앞에서 아들 부부의 임신 소식에 경멸하거나 강연에서 독자의 질의응답을 거부하는 늙은 염세주의자가 그들이다. ‘룸 넥스트 도어’에 있지 않는 타인이 그들을 제대로 말하긴 역부족이다. 그러나 작가는? 부지런히 짐을 싸서 그들의 옆방 혹은 아랫방으로 향할 것이다. 그곳이 쓰는 사람의 자리다. 잉그리드가 마사에게 물려받은 완벽한 책상을 부러워하면서 나는 이제 <룸 넥스트 도어>의 다음 문이 열릴 곳도 가늠해본다. 첫 번째 경유지는 뉴욕에 남겨진 마사의 작은 서랍 안, 잉그리드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종군 수첩의 몇 페이지다. 보스니아 내전을 누빈 기자에게 샘솟았던 은밀한 아드레날린, 남자보다 강해지고 싶었던 욕구, 딸을 외면한 죄책감, 전쟁 중의 황홀한 사랑, 그리고 언젠가 픽션을 더해 썼으나 차마 발행하지 못한 기사가 모두 거기에 있다.

[연속기획 6] 부산영상위원회 아카이브 총서 <부산의 장면들> #1, ‘드라마’, <쌈, 마이웨이> 부산 제작기

<쌈, 마이웨이> 청춘물은 부산의 낭만을 타고 2017년 5월부터 7월까지 방영한 KBS 월화 드라마 <쌈, 마이웨이>는 대표적인 2010년대 청춘드라마다. 김지원, 박서준 배우의 로맨틱코미디 연기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방영 당시 동 시간대 1위를 꾸준히 지켰다. <동백꽃 필 무렵>을 쓰고 <폭싹 속았수다>의 공개를 앞둔 임상춘 작가가 이름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쌈, 마이웨이>는 한 빌라의 이웃 사이인 20대 죽마고우 4인방의 인생 적응기다. 백화점 안내데스크 직원 애라(김지원)와 격투기 선수 동만(박서준)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혼을 생각 중인 6년차 커플 주만(안재홍)과 설희(송하윤)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고단해도 절대 쓰려지지 않는 청춘들의 삶을 담아내고 응원하기 위해 제작진은 낭만과 열정의 도시 부산을 찾았다. 당시 로케이션을 책임졌던 이주호 제작 PD는 수많은 드라마 스틸 중 부산 촬영 사진들을 척척 골라내며 추억을 나눠 주었다. 과거, 현재, 미래의 공간. 옥상의 남일바 백화점 사내 방송의 기회를 얻어 아나운서란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뻐하는 애라, 그런 애라를 보면서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던 시절을 떠올리는 동만. 사진은 두 사람이 옛 추억에 잠기는 3화 옥상 신이다. 애라와 동만이 누워 있는 곳은 <쌈, 마이웨이>를 대표하는 장소인 ‘남일바’로 주만과 설희까지 합세해 밤마다 웃음과 한탄이 울려 퍼지던 아지트다. ‘남일바’ 신은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 내 일반 주택 옥상에서 촬영했다. “장소를 섭외하던 어느 날 저녁에 계단을 올라가 옥상에 도착했는데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탁 트였고 무엇보다 거기서 보는 야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퇴근한 주인공들이 술 한잔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이주호 PD) 한성주택에서 부산의 환대를 확인하다 청춘 4인방의 거주지이자 <쌈, 마이웨이>의 메인 장소라 할 수 있는 남일빌라에서 촬영을 준비 중이다. 이주호 PD는 “주인공들이 사는 집을 어디로 하면 좋을지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한성주택이 있는 동네를 발견했다.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 한적한 편이었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친숙하게 다가와 드라마 분위기와도 잘 맞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건물과 그 주변이 신기해 극에 재미를 줄 거라 기대했다”며 처음 이곳에서 받았던 느낌을 생생히 전해주었다. 이주호 PD의 말처럼 한성주택은 구조적으로 독특하다. 1981년 산비탈에 세워진 계단식 공동주택으로 2동과 3동 사이에 길고 가파른 180계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찔한 계단식 구조가 사회에 자리 잡지 못해 위태로운 주인공들의 마음과 상황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이주호 PD에게 한성주택에서의 촬영 후기를 묻자 그는 주민들에 대한 감사로 입을 뗐다. “동네 분들이 협조를 정말 잘해주셨다. 촬영할 동안 어쩔 수 없이 어수선했는데도 다 이해해주시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며 물도 떠다주셨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가 잘되고 다정한 느낌이 살았던 건 친절한 부산 시민들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호천마을, 명소가 되다 한동안 남일바는 개인 건물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팬들의 접근이 어렵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러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부산시와 부산진구는 인근 호천문화플랫폼에 실제 소품을 옮겨 남일바를 그대로 재현한 공간을 마련했다. 호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호천마을은 본래 주목받던 동네가 아니었으나 <쌈, 마이웨이>를 시작으로 여러 촬영지로 쓰이면서 인기를 얻게 됐다. 호천마을의 관광 코스를 소개하는 지도가 세워졌을 정도다. 호천마을을 구경하다 보면 호랑이 조형물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과거 이곳의 하천 주변으로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호랑이 호(虎)에 내 천(川)을 써 ‘호천’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관광 지도에 적힌 대로 ‘남일바’에 들른 뒤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벽화마을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면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바람, 바다, 조명이 완성한 사랑 “아니, 왜 이유 없이 남의 손을 잡아….”(애라) “원래 이유 없이 잡는 거여.”(동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애라와 동만이 서로에게 서서히 다가가는 11화 옥상 신이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가 되면서 한밤의 남일바는 한층 로맨틱하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수십개의 가로등이 골목마다 잔뜩 켜진 마을 전경을 담은 풀숏이 낭만적인 무드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장면만큼이나 근사한, 두 남녀의 첫 키스 장면도 부산에서 촬영했다. 기장군 일광면에 위치한 유명 카페 ‘에스페랑스’로 따뜻한 조명 인테리어와 바로 앞의 바다가 결정적 순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애라가 사회를 본 대천 가리비 축제는 일광해수욕장을 무대로 했다. 동만까지 합세해 해변에서 펼쳐진 뒤풀이 신은 바닷바람이 주인공들의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흔들면서 후련함과 흥취가 제대로 산 장면이다. “밤이 되면 하나둘씩 켜지는 가게 전구들과 뒷배경으로 잡히는 해변 풍경의 도움을 받았다. <쌈, 마이웨이>가 여전히 사랑받는 청춘드라마로 꼽히는 건 부산만의 낭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주호 PD) 젊음과 활기의 길 위에서 “너, 이 백이 마음에 드나 보다. 잘 들고 다니네. 어떻게 오빠가 신상 나오면 하나 또 사줘?”(동만) “오빠가 애라한테 가방을 또, 또 사줄 거예요?”(애라) 조용한 마을에 웃음꽃이 크게 피었던 순간을 포착했다. 김지원 배우의 애교 연기로도 유명한 <쌈, 마이웨이>에서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은 2화 거리 신이다. 자신이 사준 에코백을 출근 가방으로 삼은 애라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 동만이 부자 애인인 척 상황극을 시작하자 애라가 아양을 부리는 콧소리로 맞받아쳐 귀여운 명장면이 탄생했다. 사진 속 박서준 배우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이유는 애라의 애교를 참지 못한 동만이 애라의 뒤에서 조르기 기술을 걸었다가 명치를 가격당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보던 이주호 PD는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배우들 덕분에 현장도 에너지가 넘쳤다”라며 당시 촬영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비평] 남아 있는 마음, 덕분에, <미망>

버스에서 내려 잠시 길을 헤매던 남자가 말한다. “여기가 이렇게 연결되네요”라고. <미망>에 참 어울리는 대사다. 김태양 감독은 단편영화 <달팽이>(2000)와 <서울극장>(2002)의 중편 길이의 에피소드를 ‘여기’에 ‘이렇게 연결’하며 트릴로지 형식의 장편영화로 탄생시킨다. <달팽이>가 <미망>에 도착하는 데까지 걸린 4년여의 시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지만, 김태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똬리를 틀고 머무는 것들을 바라보려 한다. 변해버린 것들을 힐난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사라진 것들을 상실과 체념으로 끌고 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미화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각 에피소드는 이어지면서도 단절되고, 동일한 곳으로 회귀하면서도 이전보다 한뼘 더 크게 원을 그린다. <미망>은 그렇게 작품 속에 나이테를 새긴다. 감정의 잔여물, 갈피 잃은 마음참 알 수 없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지, 왜 변하고 왜 변하지 않는지. 그러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맬 수밖에. <미망>은 이 ‘알 수 없음’ 앞에 남자(하성국)와 여자(이명하)를 마주 세운다. 두 사람은 어긋나기 일쑤다. 여자는 좀 달라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자신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핸드폰 번호를 바꿔 관계를 정리하기도 하고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몇년이 흘러도 여전히 모더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남자는 자신이 향하는 목적지조차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사람이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며 변하는 게 뭐 있겠냐던 그는 몇년 뒤 전시회를 여는 화가가 되어 여자 앞에 나타난다. 남자는 그렇게 변한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렇게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남아 있는 감정의 잔여물을 마주할 때, 남자와 여자는 당혹스러워하고, 멈칫거린다. 너무 빠른 작별 인사처럼. <미망>은 남자와 여자가 과거에 어떠한 관계였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남자와 여자가 애써 들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슬쩍 드러날 때마다 <미망>은 더 애잔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작품이 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자신의 목적지인 서울극장에 가까워지자 횡단보도 앞에서 남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붉은색 신호등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너무 빠른 인사가 두 사람을 어색하게 만든다.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그렇게 끝맺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마음에 비해 너무 빠르게 찾아온 결별. 이별 선언과 함께 감정도 다 말라버리는 것이라면 참 좋겠지만, 아프지 않을 만큼 잘 숨겨놓았다고 생각했던 주머니 속 바늘 하나가 내 몸을 따끔하게 찔러댄다. 남자와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와 행동으로 남아 있는 마음을 감추려 하지만, 재채기만큼이나 사랑하는 마음도 감출 수 없다고 믿는 (듯한) 김태양은 영화 곳곳에서 여전한 감정의 잔여물을 화면 위로 슬쩍 건져 올린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전화를 받는다. 통화 상대가 여자에게 저녁에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본 모양이다. 이때 여자는 머뭇거리며 남자의 반응을 짧게 살핀다. 김태양은, 그리고 이명하는 이 짧은 리액션에 여자의 마음을 담아낸다. 이 장면은 세 번째 에피소드의 한 장면과 공명한다. 카페 소우에서 남자가 기타 연주를 곁들여 장기하의 <별거 아니라고>를 부르는 장면에서, 여자는 다시 한번 전화를 받기 위해 카페 바깥으로 향한다. 열린 문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리고, 전화를 끊은 여자는 그 노랫소리에 귀 기울인다. 카메라는 여자의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본다. 그 순간, 여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여자는 몇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자신의 마음을 보고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를 만나 흔들리는 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여자와 헤어진 남자는 끊었다던 담배를 꺼내 문다. 이제는 희미해진 줄 알았던 감정이 선명하게 번져오는 순간의 담배 한 모금. 그렇게 남아 있는 마음은 남자와 여자를 흔든다. 김태양은 ‘이제 아는 길이라고, 맨날 다니는 길’이라고 자신하던 남자가 잠시 갈피를 잃고 담배 한 모금을 찾게 되는 첫 번째 에피소드의 소제목을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라는 의미의 ‘미망’(迷妄)이라 부른다. ‘덕분에’, 사라진(질) 자리를 채우는 이야기들 카페 소우에서 남자가 앉던 자리에 여자가 잠시 머물고, 여자가 바깥으로 나간 후에는 뒤늦게 도착한 후배가 그 자리를 채운다. 비워진 자리는 그렇게 계속 채워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좀더 흥미롭다. 남자가 버스에서 내린다. 하지만 (남자와 함께 버스 바깥으로 이동할 것이라 생각했던) 카메라는 남자를 따라가지 않고 텅 빈 버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영화를 끝맺는다. 한때는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을, 하지만 지금은 비워진 자리들, 내일이면 그 자리를 채울 누군가를 태우고 같은 곳을 맴돌 버스. <미망>은 이 비워진 버스가 우리의 삶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여러분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가길 바라겠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곧 사라질 서울극장에서 <미망인>에 대한 해설을 마무리 짓던 여자의 말이다. 김태양은 여자의 입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전한다. 실제로 <미망>은 을지로, 종로, 광화문 일대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사라진(질) 것은 서울극장만이 아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남자와 여자가 걷는 곳곳에는 새로운 빌딩을 짓는 공사 현장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두 차례 등장하는 누군가의 죽음 역시 사라지는 이미지와 연결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여자 엄마의 죽음이 간단히 언급되고,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친구의 죽음이 남자와 여자를 재회하도록 한다. 여자는 죽은 친구의 자리를 그에 대한 기억으로 대신하자고 한다. 사라진 것들을 당신이 기억하는 한, 그것은 당신의 기억으로 자리를 옮겨 여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김태양 감독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들을 ‘멀리서, 그리고 넓게’ 바라보려 한다. 지리학자 이푸투안은 <공간과 장소>에서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이다.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장소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모두가 유사하게 공유하는 개념에 가까운 것이 공간이라면, 나만의 경험과 사연이 스며들 때 공간은 장소가 된다. 그렇기에 추억의 대상은 장소이지 공간이 아니다. 결국 자신에게 장소가 많다는 것은 내면에 사유재산이 가득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망>은 을지로, 청계천, 종로, 광화문 일대를 공간이 아닌 장소로서 바라보려 한다. 그곳에서 인물들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공간을 장소화한다. 이순신 동상의 칼자루가 그렇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지체 높은 양반과 마주치는 것을 피해 걸으며 형성된 ‘피맛골’이 그렇다. 그들은 그곳이 어떤 사연이 새겨진 장소로 자신에게 기억될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곳은 사랑이 시작된 장소이자, 애잔하면서도 미련스러운 미련이 묻은 장소이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고백이 묻힌 장소이며, 남아 있는 마음을 외면한 뒤 뒤돌아 걷던 장소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그곳을 다시 지날 때 그 기억이 마음에서 불현듯 솟아오른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된다면(이푸투안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동 중 정지”의 순간), 그때 그곳은 각자의 이야기가 담긴 장소가 된다. 짧은 한숨과 함께 남자의 노래를 듣던 여자에게, 그리고 입구를 서성이던 여자를 슬쩍 살피던 남자에게 소우가 어떤 의미의 장소로 기억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짧은 시간 덕분에 소우는 영원의 장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설령 언젠가 그곳이 사라지더라도, 그들에게 그날의 소우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날의 소우는 불멸의 장소다. 김태양은 현재를 기록하지만, 아주 먼 언젠가의 그곳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그날의 그곳을 바라보려 한다. 애잔함도 추억으로 남았을 그 언젠가의 그곳에서 말이다. <미망>이 사라지는 것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긍정의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그리고 3막의 소제목이 ‘멀리 넓게 바라보다’라는 의미의 ‘미망’(彌望)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상상 그 이상을 구현한다, 원작과의 차이점부터 의상, 노래까지 - 영화 <위키드>의 모든 것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소설 <위키드: 사악한 서쪽 마녀의 삶과 시간들>이 마침내 영화 <위키드>로 재탄생했다. 소설을 읽은 독자도, 원작 뮤지컬 팬도 영화를 더 다채롭게 즐길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정리했다. 마법의 세계, 영화만이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영화 <위키드>의 제작자 마크 플랫은 뮤지컬 <위키드>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뮤지컬 팬들이 선호하는 요소들을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스크린을 통해 <위키드>의 장점을 강화하고 본래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첫째로 마크 플랫이 강조한 것은 “무대에서 불가능했던 원작의 수많은 요소들을 구현해내는 것”이었다. 가령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가 비눗방울로 형상화된 기구를 타고 이동하거나 엘파바(신시아 이리보)가 빗자루를 타고 날개를 얻은 원숭이들과 함께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것, 더불어 오즈를 가로지르는 장면 등 영화에서만 연출 가능한 장면들이 실제로 더욱 강화되었다. 캐릭터 측면에서는 영화 <위키드>가 엘파바의 마법 능력을 더 전면에 내세운다. 뮤지컬에서는 엘파바가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생 네사로제(마리사 보드)를 돌보기 위해 쉬즈 대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엘파바는 네사로제가 학교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만 쉬즈 대학교에 머무르기로 한다. 그러나 교장 마담 모리블(양자경) 앞에서 우연히 마법의 재능을 드러내 보인 후, 마담 모리블은 그를 제자로 키우고 싶어 대학에 입학시킨다. 엘파바가 미래를 예지하는 모습이 추가된 것도 엘파바가 지닌 능력을 강화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캐릭터들의 관계성 측면에선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각색되었다. 원수와 다름없던 엘파바와 글린다는 가까워진 이후, 서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바꿔나가는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결과적으로 글린다와 엘파바는 자신들이 세상에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0년의 준비기간, 3시간의 오디션 감독으로 참여한 존 추와 배우 아리아나 그란데, 신시아 이르보는 <위키드>에 엄청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존 추는 어릴 때 <오즈의 마법사>를 바탕으로 ‘아메리칸드림’에 관한 세 단편영화를 만들었으며 <위키드> 뮤지컬을 여러 차례 관람할 정도로 엄청난 팬이었다. 존 추 감독은 캐스팅에 공을 들였다. 먼저 엘파바는 녹색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소수자 캐릭터이며 상처를 감내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글린다는 남들이 부러워할 모든 걸 가졌지만 정작 간절히 원하는 마법의 힘만큼은 소유하지 못한 인물이다. 엘파바와 글린다 모두 내외면의 간극을 잘 드러내면서도 뮤지컬 넘버를 훌륭히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신시아 이리보와 아리아나 그란데가 두 인물에 적절한 배우였다. 신시아 이리보는 오디션만 3시간을 치렀으며 아리아나 그란데는 근 10년간 제작자 마크 플랫에게 ‘언제 <위키드>가 영화로 만들어지며, 오디션은 언제 치를지’에 관해 자주 질문해왔다. 그리고 <위키드> 넘버를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도록 더 클래식하고 오페라스럽게 노래할 수 있는 발성과 창법을 따로 훈련해왔다. 오디션 과정에선 존 추 감독에게 자신과 글린다가 어떤 공통점이 있으며 얼마나 영화 <위키드>에 진심인지 적은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원작 소설가 그레고리 매과이어의 최종 승인 이후 엘파바 역에 신시아 이리보, 글린다 역에 아리아나 그란데의 캐스팅이 완료되었다. 생기 넘치는 마을, 고풍스러운 학교 <위키드>의 공간은 한곳도 허투루 지어진 곳이 없다. 가령 동쪽 나라의 주민들이 살아가는 먼치킨랜드에는 900만 송이의 튤립을 심어 평화로운 분위기의 공간을 구성하고자 했다. 엘파바와 글린다가 입학하는 쉬즈 대학교는 고풍스러운 외관을 자랑한다. 반면 의 군무 시퀀스가 치러지는 도서관은 보다 현대적인 분위기로 연출됐다. 영화 <로열 웨딩>에서 영감을 받아 촬영된 이 장면에선 거대한 회전 책장 3개가 중첩된 공간이 등장한다. <닥터 스트레인지>에 참여했던 폴 코볼드 특수효과 감독이 제작한 세트로, 돌아가는 세개의 휠 사이를 배우들이 넘나들며 노래하는 스턴트 장면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환상의 도시 ‘에메랄드시티’ 엘파바와 글린다가 마법사의 초대를 받아 에메랄드시티로 이동하고, 얼굴 형태의 거대한 기계가 위치한 왕좌실로 들어서는 장면은 극의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두 사람이 쉬즈 대학교에서 에메랄드시티로 가기 위해 타는 기차는 원작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증기기관차가 아닌 정밀한 시계 태엽장치 형태를 지닌 기차를 디자인해냈다. 에메랄드시티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초록색을 주요 컬러로 하고 있으며 화려하고 웅장하게 연출된 것이 특징이다. 제작진은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영감을 받아 아치형 구조를 다양하게 적용했으며, 섬세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바탕으로 실제 세트와 CG를 종합해 에메랄드시티를 완성했다. 또한 네사로제를 연기한 마리사 보드가 실제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배우임을 고려해 장애인 코디네이터를 따로 고용해 아티스트 트레일러, 휴대용 화장실, 녹음 스튜디오 등을 포함해 모든 세트를 휠체어로 접근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거대한 ‘얼굴’과 마주할 때 마법사(제프 골드블럼)의 왕좌실은 위압적 분위기는 유지하되 현대적인 공간으로 재설계됐다. 조종사가 조종하는 약 4.5m의 거대한 기계가 왕좌실의 주요 요소였다. 전문 퍼펫 조종사이자 SFX 기술자인 크리스 클라크팀은 우선 12배로 축소된 모형을 제작한 뒤 눈을 깜빡이고 얼굴을 움직이는 형식을 실제 크기로 확장된 버전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완성해냈다. 엘파바에겐 블랙을, 글린다에게는 핑크를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존 추 감독의 <인 더 하이츠> 작업에 참여한 폴 태즈웰 의상디자이너가 <위키드>의 의상을 담당했다. 폴 태즈웰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성격과 차후 변화까지 반영된 의상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엘파바는 어둠, 글린다는 빛을 주제로 잡아 두 인물의 의상 텍스처와 장교함에 대비를 주었다. 엘파바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복잡하고 유기적인 텍스처와 패턴을 사용한 블랙 계열의 옷을 주로 착용한다. 엘파바의 모자는 글린다의 할머니가 만든 것으로 엘파바가 자아를 실현하고 강한 힘을 얻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반면 글린다의 의상은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글린다가 착용한 핑크 톤의 드레스와 왕관에서 영감을 얻었다. 상황에 따라 의상은 달라지지만 핑크, 라벤더 톤의 의상을 즐겨 입으며 커스텀 자수가 더해졌다는 특징이 있다. 마담 모리블의 신비함을 드러내며 마담 모리블은 신비감은 유지하되 과도한 악역처럼 보이는 것은 삼가야 했다. 결과적으로 마담 모리블의 의상은 소용돌이치는 구름, 바람과 같은 역동적인 날씨를 모티브로 제작됐으며 마찬가지로 수를 놓거나 구슬 패턴을 더하는 식으로 표현되었다. 현장감을 살린 음악과 노래 배우들에게는 옆모습을 촬영해도 잡히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크기의 IDM 이어폰이 제공됐다. 사전에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퍼포먼스를 자유자재로 이어나가기 위함이었다. 춤과 노래를 병행해야 하는 만큼 뮤지컬영화에선 라이브로 노래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위키드>의 몇몇 장면에서는 실제로 배우들이 라이브로 노래를 불렀다. 또한 신시아 이리보, 아리아나 그란데가 감정에 맞춰 템포를 늦추거나 올릴지라도 제작진은 이를 존중하며 그에 맞춰 피아니스트 연주가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위키드>의 중요한 넘버 중 하나인 를 엘파바가 부르기 전, 존 추 감독과 신시아 이리보, 아리아나 그란데는 합의하에 엘파바와 글린다가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면을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해당 장면을 촬영하기 하루 전에 결정된 것으로, 짧은 장면이지만 원작 팬들에겐 색다른 재미를 안길 요소다.

[인터뷰] 도전자의 아우라, <위키드> 배우 양자경

<위키드>는 배우 양자경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사이 거친 또 하나의 우주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오스카 레이스와 첫 뮤지컬영화 촬영을 병행한 그는 수상 소감에 배어 있던 자신의 기품을 순조롭게 이식한 듯한 새 캐릭터를 매만지고 있었던 셈이다.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건너온 마담 모리블의 자태는 과연 고상했다. 더 가까이서 마주볼 수 있게 된 그 눈은 재주를 과시하지 않고, 제자를 인정할 줄 안다. 모리블이 통치자의 신임을 받는 마법사이자 엘파바와 글린다가 우러러본 교수로서 무게감 있는 행보를 걸을 때 진즉 마음을 뺏겨서일까. 그가 미심쩍은 브레이크를 걸 때조차 이면을 해독하고 싶어진다. 그 주문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에 양자경은 거듭 동료들을 호명하며 연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마련해준 데 고마움을 표했다. <위키드>의 감수성을 체화한 지 오래인 이 베테랑은 자신이 쉬즈 대학교의 학생들과 같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관객에게 응원을 보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 마담 모리블 역할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수락하기까지 고민한 점이 있다면. 존 추 감독이 내게 어떤 역할을 맡기든 ‘예스’라고 답했을 것이다. 나는 존 추 감독의 엄청난 팬이고, 우리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영광을 함께 누린 사이니까. 하지만 마담 모리블 역을 제안받은 후에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존, 이건 뮤지컬이잖아. 나 노래 못해!” (웃음) 그런데 존 추 감독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 이미 글린다, 엘파바 역에 캐스팅된 배우 아리아나 그란데와 신시아 이리보까지 내가 <위키드>에 꼭 필요하다고 연락해왔다. 그렇게 인생 처음으로 뮤지컬영화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 2003년 초연 이후 20년간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뮤지컬 <위키드>가 공연됐다. 이 작품의 힘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봤나. 사실 이 역할을 맡기 전까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위키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 <위키드> 출연을 결심하자마자 뉴욕과 런던에서 공연을 봤다. 뮤지컬 <위키드>가 어떻게 20년 넘도록 전세계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더라. 이 이야기는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괴롭힘 당해도 끝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면서 타인을 사랑하는 법까지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여정을 지나는 동안 함께하는 누군가와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 오랜 기간 여러 장소에서 공연이 이뤄졌다는 건 수많은 버전의 마담 모리블이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자경 배우만의 접근법을 듣고 싶다. 마담 모리블은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다. 이 오리지널 캐릭터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캐릭터에 더 많은 레이어를 부여하기 위해 존 추 감독, 마크 플랫 프로듀서와 긴밀히 상의했다. 이 작품은 뮤지컬과 달리 영화적 경험을 선사해야 했기에 캐릭터를 좀더 깊이 있게 보여줘야 했다. 배우의 눈빛이나 뉘앙스처럼 무대 위에서는 자세히 보여주기 어려운 다양한 지점들을 카메라가 담아내기 때문이다. 마담 모리블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의 꿈은 무엇인지, 야망은 무엇인지, 왜 극 중의 일들을 벌였는지 탐구했다. 게다가 그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사람이자 쉬즈 대학교 총장이기까지 하다. 그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고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고려해야 했다. 쉬즈 대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든 그를 따른다. 마담 모리블이 처음부터 비열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면 누가 그를 스승으로 인정하고 싶겠나. 이런 입체성을 고려하면서 마담 모리블이라는 캐릭터에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일이 정말 흥미로웠다. - 배우가 캐릭터에 입힌 레이어 중 하나를 들춰보고 싶다. 마담 모리블은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쉬즈 대학교 학생들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다. 그때 학생들의 눈빛은 당신을 동경하는 아시안 여성들의 표정과도 닮아 있더라. 마담 모리블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새겨진 말투와 자세는 어떻게 연구했나. 오래 연습한 덕분에 만들어진 말투와 자세다. 마담 모리블의 캐릭터디자인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됐는데, 바람이 휘감고 간 듯한 헤어스타일과 폴 태즈웰 디자이너가 제작한 멋진 의상 덕을 봤다. 마담 모리블이 긴 드레스를 입고 교정에 등장하면 마치 왕족이 학교에 온 듯한 느낌을 주지 않나. 누구든 그를 보면 한 발짝 물러서서 ‘이 사람에게 권위가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그 아우라가 마담 모리블을 설명한다. 그는 쉬즈 대학교의 여왕 같은 존재다. 배우가 강렬한 의상을 입으면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설 수밖에 없다. 헤매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다닐 수도 있다. 저절로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의상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트도 연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카메라가 마담 모리블을 단독으로 비출 때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블린이 마주하는 새로운 우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프로덕션디자이너 네이선 크롤리가 구현한 세트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경험은 어땠나. 영화의 룩은 모든 디자인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마담 모리블이 아무리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들 세트가 온통 초록빛이면 서로 전혀 어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의상, 가발, 메이크업 등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철저히 세트 디자인과 맞물리도록 기획됐다. 존 추 감독과 앨리스 브룩스 촬영감독의 카메라 덕에 그 디테일이 잘 드러났고, 그들의 작업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마스터클래스 같았다. 배우 또한 실제처럼 구현된 세트에서 연기할 때 배역을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마담 모리블이 쉬즈 대학교에 들어서거나 곤돌라를 타고 운하를 건널 때 전해지는 그 공간만의 웅장함이 연기자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배우가 공간을 상상해야 하는 그린스크린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곤 한다. ‘더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라고 투덜거리게 되는 거지. (웃음) 그만큼 실제 공간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에게 큰 선물이다. 그래서 프로덕션디자이너인 네이선 크롤리를 필두로 한 제작진에게 고마웠다. 그들은 900만 송이의 진짜 튤립을 들판에 심었다. CG가 넘치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카메라가 들판 위를 날아다니고, 아이들이 그 안에서 뛰어놀 때, 진짜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 향기가 나는 듯한 감각을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위키드>팀의 시도에는 바로 그런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 <위키드>는 두 여자의 깊은 우정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린다와 엘파바처럼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당신은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지도 궁금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다름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이 글린다와 엘파바를 하나로 묶어준 것 같다. 극 초반부에 두 사람은 경쟁하는 사이였고, 성격이 너무 다르다 보니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마치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표지만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가벼운 자세다. 그런 태도는 자신에게 손해이지 않나. 결국 나는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여성들간의 우정. 왜 사람들이 여자들끼리는 잘 지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고, 오히려 서로가 겪는 일들을 더 잘 알아줄 수 있지 않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으면 그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어진다. 다만 타인에게 솔직해지고, 그를 신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깊어졌다. 우린 때로 경솔하게 타인을 판단하지만 상대방의 상처받은 눈빛을 보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친절이란 슈퍼히어로의 초능력과 같다. 우리 모두에겐 그 힘이 있고. - 두 친구는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차별과 편견에 맞선다. 양자경 배우도 200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 활동해왔기에 이들의 여정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당신이 엘파바와 글린다의 나이였을 적엔 어떤 도전을 거쳐야 했나. 나는 운이 좋게도 다민족 사회인 말레이시아에서 성장했다. 인도인, 말레이시아인, 중국인, 백인 친구들과 함께 자라며 서로의 다름을 찬미해왔다. 디파발리(힌두교 축제), 하리라야 하지(이슬람 축제), 중국 춘절과 크리스마스 등 서로의 전통 명절을 축하하면서 그야말로 축제가 끊이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는데, 사실 우리끼리는 그 차이를 잘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다양한 언어를 듣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가도 아시안을 포함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자막이 있는 한국영화, 일본영화, 인도영화를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할리우드에 갔을 때 내가 마이너리티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충격받았다. 아시안이 어떻게 소수라는 거지? (웃음) 그만큼 내겐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이 큰 도전이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안 배우들을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에 사는 캐릭터처럼 고정된 역할로만 바라봤다. 여전히 그런 고정관념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이런 경계를 허물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 그리고 <위키드>를 관람할 많은 관객들 또한 엘파바와 글린다처럼 자신을 찾아가는 중일 테다. 먼저 그 길을 걸어본 당신에게 계속해서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묻고 싶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 이 직업은 단순히 재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즉 도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모두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는 이유를 찾길 바란다. 더불어 존 추 감독 같은 사람이 내 곁에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 축복받은 기분을 느낀다. 그런 인연들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