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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가지 키워드로 보는 디즈니 신작 라인업 - 디즈니 산하 글로벌 스튜디오부터 한국 디즈니+까지

오리지널의 힘을 이어갈 속편 <주토피아>가 2편으로 돌아온다. 재러드 부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CCO는 “내년은 뱀의 해다. 그에 따라 새로운 파충류 캐릭터를 소개한다”며 동양 코드의 인물을 선보였다. <아바타> 시리즈는 2025년 12월 <아바타: 불과 재>를 공개할 예정이다. 바람을 타고 무역 노선을 떠돌아다니는 윈드 트레이더스 부족과 화산 폭발 이후 모든 것을 잃은 재의 부족이 궁금증을 높인다. 오랜 기간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토이 스토리>는 다섯 번째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번에는 장난감들이 전자기기와 맞선다고. 이외에도 마블 스튜디오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픽사의 <인크레더블3> 등이 공개될 예정이다. 새로운 시도, 새로운 이야기 창의적인 오리지널 작품도 관객을 기다린다. 이번 쇼케이스에서 가장 많은 신작 라인업을 공개한 건 픽사다. 우주공간에 빨려들어간 평범한 소년 엘리오를 그린 <엘리오>는 엘리오가 외계인에게 지구의 지도자로 오해받으며 엉뚱한 사건에 빠져든다. 첨단기술을 활용하여 인간의 정신을 로봇 비버에 이식한다는 색다른 로그라인의 <호퍼스> 또한 호기심을 높인다. 픽사는 디즈니+에서 오리지널 롱폼 콘텐츠라는 첫 시도를 이룬다. 바로 <모두의 리그: 이기거나 지거나>다. 소프트볼팀 피클스의 선수들과 코치, 그들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미묘한 감정을 포착한다. 마블은 다소 파격적인 예고를 전했다.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 대표가 앞으로의 마블 작품에서 <엑스맨> 시리즈의 인물을 적극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밝힌 것. “<엑스맨>은 오랜 시간 동안 마블 팬들이 기다려온 꿈이다. <데드풀과 울버린>을 통해 본격적으로 <엑스맨> 캐릭터들이 등장했고, 앞으로도 몇편에 걸쳐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또 다른 우주의 너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클래식인 <백설공주>가 실사화되어 돌아온다. 배우 레이철 지글러 버전으로 재해석된 백설공주가 현대적 가치에 발맞춰 새 세대를 반길 예정이다. <무파사: 라이온 킹> 또한 실사화 영화로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의 전설을 돌아보며 원작의 폭을 넓힌다. 디즈니+에서 공개될 픽사 최초 오리지널 시리즈 <드림 프로덕션>은 <인사이드 아웃>과 <인사이드 아웃2> 사이의 빈틈을 귀여운 상상으로 채운다. 라일리가 잠든 매일 밤 그를 위해 꿈 제작소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여준다. <드림 프로덕션>은 12월11일 공개 예정이다. 디즈니+와 강풀 세계관 “작가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가장 많이 생각한다. 이야기를 구상하고 만들 때에는 그 중심에 사람을 둔다.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에 중점을 두면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하는지 자연스레 상상할 수 있다.”(강풀 작가) 디즈니 콘텐츠 쇼케이스 APAC 2024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기대작은 <조명가게>다. <무빙>의 흥행 이후, 또 다른 강풀 세계관이 디즈니+에서 펼쳐진다. 신작 라인업 중 유일하게 단독 섹션으로 진행된 <조명가게> 기자회견에서는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등 다양한 국가의 매체로부터 질문이 이어졌다. 디즈니+가 강풀을 계속 선택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 질문에 김희원 감독은 디즈니와 강풀, 두 세계관이 지닌 교집합을 짚어냈다. “전세계 어린이들은 디즈니의 만화나 영화를 보고 자란다. 그러면서 많이 울고 웃는다. 디즈니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강풀 작가의 작품 또한 그렇다. 인간의 정서를 건드리고 그것을 이야기에 녹여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둘이 함께하는 게 아닐까.” 동명의 웹툰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강풀 작가는 만화가 소화하기 어려운 장면, 그러니까 영상 포맷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들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13년 전 만화를 그렸다. 원작에서 풀지 못한 이야기와 장면이 분명 있다. 이번 드라마에서는 만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내용을 담으려 했고 김희원 감독과 배우들이 그것을 무척 입체적으로 구현해줬다. 그 덕에 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과 스펙터클에 깊이가 생겼다.” 한편 쇼케이스에서는 <무빙2> 제작 확정 소식이 발표되었다. 스릴러 공포 휴먼 히어로 서사와 초능력에 기반한 <무빙>과 달리 <조명가게>는 공포심을 자극하며 시작한다. 또 다른 장르물을 세공한 강풀 작가는 작품이 지닌 어려움과 설렘을 함께 전했다. “<무빙>은 초능력을 다루는 장르물이라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그래서 관심을 더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조명가게>도 같은 장르물이지만 한국에서 호러, 스릴러 장르가 긴 호흡의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아 이게 대중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하지만 워낙 스토리가 재미있다. 자신 있다.” 옴니버스처럼 많은 배우가 출연해 개별 서사를 펼치는 <조명가게>는 배우간의 색다른 조합과 화학작용을 기대할 수 있다. 배우 박보영은 “주지훈 배우가 조명가게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바라본다면 나는 일터인 병원에서 그 경계의 지킴이 역할을 한다”고 관계성을 설명했다. 탄탄한 케미스트리가 일어날 수 있던 이유로 배우 주지훈은 프리프로덕션의 힘을 꼽았다. “김희원 감독은 배우이기도 해서 촬영 현장에서 3인칭 시선을 가지고 있어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는 프리프로덕션이 무척 안정적이더라. 망설임 없이 작품에 합류한 이유이기도 하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환경 덕에 모든 배우들이 조화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 배우들의 새로운 얼굴 마지막으로 디즈니+ 한국 시리즈 신작 라인업이 공개되었다. 이중에는 배우들이 그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기를 선보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먼저 박은빈, 설경구의 <하이퍼나이프>는 그간 본 적 없었던 박은빈의 서늘한 얼굴을 조명한다. 뛰어난 천재 의사 세옥(박은빈)은 불법 수술을 하며 섀도 닥터로 살아가던 중, 과거 자신을 절망에 빠트렸던 스승 덕희(설경구)를 만난다. 배우 박은빈은 “<하이퍼나이프>는 디즈니+ 최초 메디컬 스릴러 장르다. 캐릭터의 설정도 특이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감각을 선사하는 드라마가 될 것 같다”며 기대감을 높였다. 이어 김혜수, 정성일, 주종혁 주연의 <트리거>는 검경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유쾌한 톤으로 추적해나가는 탐사보도국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단계 경쾌하고 코믹해진 배우 정성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배우 김혜수는 “<트리거>는 무겁지 않지만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이다. 사회문제와 범죄사건을 다루지만 특유의 재치를 유지한다. 위트와 진정성 사이에서 수위를 조절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김수현, 조보아가 출연한 <넉오프>는 IMF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뀐 한 남자가 평범한 회사원에서 세계적인 짝퉁 시장의 제왕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번 작품을 통해 거친 면모를 보인 배우 김수현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처음 짝퉁 거래를 성공시킨 장면을 꼽았다. “내가 맡은 김성준이 처음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신이 있다. 미숙하지만 어떻게든 손님을 구슬렸던 과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넉오프>에는 저마다 다른 생존 방식을 지닌 캐릭터들이 있다. 여러 가지 위기를 마주하는 동안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성장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디즈니+의 선명한 색깔, 범죄 스릴러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는 디즈니+가 전문 영역처럼 파이를 키워온 장르다. 이번 쇼케이스에서 발표된 신작 라인업에도 역시나 기대감을 높이는 다양한 스릴러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먼저 손석구와 김다미가 출연한 <나인 퍼즐>은 10년 전 미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현직 프로파일러인 이나(김다미)와 그를 용의자로 의심하는 형사 한샘(손석구)이 협력해나가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배우 손석구는 “한샘은 지금까지 미디어에 나온 일반적인 형사들과 비주얼적으로 다르다. 작품도 그렇다.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독특한 내용과 고유한 비주얼이 매력”이라고 소개했다. 류승룡, 임수정 주연의 <파인: 촌뜨기들>은 신안 앞바다의 보물선을 둘러싼 고군분투기를 그린 범죄드라마다. 배우 임수정은 “윤태호 작가의 원작만큼 각색된 대본이 너무 좋아서 빠져들었다”고 합류 이유를 덧붙였다. 이외에도 강동원과 전지현의 만남으로 화제가 된 <북극성>은 특수요원과 외교관이 국제적 음모와 그 속의 진실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물로 궁금증을 자아내고, 현빈과 정우성이 주연을 맡은 <메이드 인 코리아>는 1970년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검사 이야기를 다룬다.

[who are you] 정채연 <조립식 가족>

아빠 둘과 오빠 둘. 이중 혈연관계는 두 아빠 중 한 아빠뿐. 드라마 <조립식 가족>의 주원(정채연)은 누군가 자기 가족에 대해 수군대면 참지 않고 화를 내는 당찬 여고생이다. 국숫집을 하는 아빠 정재(최원영), 윗집 경찰 아저씨 대욱(최무성)과 아저씨의 아들 산하(황인엽), 집에 잠깐 맡겨졌다가 같이 살게 된 해준(배현성)까지 다섯이서 함께 사는 평화가 깨지는 일 없도록 가정의 화목함을 수호하는 막내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 먹는 신이 유달리 많아서일까. 정채연은 읽는 내내 식탁의 온기가 자신을 훅 덮쳐오는 <조립식 가족>의 대본이 좋았다. “사랑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주원이 특히 마음에 쏙 들었다.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편인데, 주원은 그 감정을 넘어서게 하는 친구였다. 소속사에 전화해 이 드라마를 꼭 하고 싶다는 의사를 먼저 밝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러나 있던 두려움은 출연 결정 뒤에 나타났다. “하이 텐션이 기본 상태인 역할을 그렇지 않은 내가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몰려왔지만 질 수 없었다. ‘주원’ 하면 떠오르는 <벼랑 위의 포뇨> 캐릭터에 ‘그냥 하자’라는 문구를 박은 이미지를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바꿔놓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찍은 일상 브이로그를 참고해보라고 한 김승호 감독의 조언도 잊지 않고 챙겼다. “영상에 나의 밝은 모습이 많이 담겼더라. 그 순간의 내 표정과 제스처를 유심히 관찰해서 주원에 녹여냈다.” 해본 적 없는 경험을 상상하는 걸 즐기는 정채연은 <조립식 가족>을 찍는 동안 그 재미를 크게 누렸다. 실제로는 언니만 있고 오빠를 갖고 싶었던 만큼 “현실 남매의 티키타카란 무엇일지” 상상하며 남매 장면을 준비했다.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오빠들이 떠났다가 10년 만에 돌아왔을 때 주원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마냥 즐거울 수가 없었다. “주원이 가슴 한편에 그리움의 방을 만들어놓고 오빠들을 기다렸을까? 아니면 너무 큰 상처라 아예 잊으려고 했을까?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재회한 오빠들 앞에서 주원이 느끼는 감정 역시 그랬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혼란스러움 자체가 주원의 심경일 수 있겠더라. 그렇게 정리하니 어려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결국 상상력을 믿고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이번 작품을 하면서 했다.” 유년 시절 갖고 싶은 직업을 쓰다 보면 종이가 모자랐던 정채연은 다양한 삶을 살아볼 수 있는 배우를 자연스레 꿈꿨다. 2016년 <혼술남녀>로 데뷔한 뒤 공무원 시험 준비생(<혼술남녀>), 안드로이드 로봇(<아이엠>) 등 현실적인 인물에서부터 미래적인 캐릭터까지 두루 맡아 연기했다. 매사 조심스럽지만 도전을 은근히 즐기는 성격과 잘 맞아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오래 할 수 있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었을 때는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확신이 든 건 사극 <연모>를 만나면서부터다. “중전 하경 역을 맡는 동안 원래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을 했다. 거기서 오는 희열이 컸다. 시대극인 만큼 신경 쓸 게 많아 힘들었는데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는 게 아니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났다.” 분기점을 돈 지금은 필모그래피를 신선하게 채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상업적인 질감이 빠진 작품에 도전하고 싶다. 그리고 코미디. <조립식 가족>을 하면서 여러 코믹한 시도를 해봤는데 내가 코미디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하는 것도 좋아하더라. 감독님이 자제시키면 서운하고 그랬다. (웃음) <너의 결혼식> 같은, 언제 꺼내봐도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게 하는 로맨스영화를 필모그래피에 남기고 싶은 바람도 있다.” 앞으로 정채연은 기분이 별로인 날 자신에게 달콤한 케이크를 선물하던 주원처럼 자신을 보호하고 다독이며 배우로서 멀리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인터뷰하는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엔 내리는 눈을 보면서 밀크티를 마셔줘야 한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은 것들을 일하는 사이사이에 끼워넣으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기쁨을 더 알아갈 것이다.” filmography 영화 2018 <라라> 드라마 2024 <조립식 가족> 2022 <금수저> 2021 <연모> 2019 <첫사랑은 처음이라서> 2018 <투 제니(TO. JENNY)> 2017 <아이엠> <다시 만난 세계> <109 별일 다 있네> 2016 <혼술남녀>

[장윤미의 인서트 숏] 오동나무와 쓰레기봉투

쓰레기봉투의 모양을 보는 게 좋다. 빈틈없이 내용물로 꽉 채워져 야무지게 묶인 봉투의 모양, 대충 묶여 있어 오가는 사람마다 이 쓰레기 저 쓰레기 집어넣어 흐트러진 봉투의 모양, 밑단이 툭 터지며 액체 섞인 음식물을 울컥 뱉어낸 음식물 쓰레기봉투의 모양…. 특히 전봇대에 기댄 쓰레기봉투 곁으로 줄줄이 다른 봉투들이 기대고 선 모양을 좋아한다. 온몸의 체중을 상대에게 실은 봉투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지도 않고 모양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쩐지 위로를 받는다. 내 외장하드에 담긴 오래된 사진 폴더 중 하나는 ‘쓰레기봉투와 목장갑’이다. 상경하고 흥청망청 놀다 보니 새벽에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도로변이나 인적 없는 골목에는 낮에는 없던 쓰레기봉투들이 많았고, 나는 반사적으로 마음에 드는 쓰레기봉투의 모양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목장갑에 대한 애정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생 때였나, 어느 날 등교하는 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바닥에 떨어진 목장갑 하나를 보았다. 엄지손가락이 접혀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은 엄지와 검지가 접혀 있는 게 아닌가. 그다음 날에는 중지가, 놀랍게도 그다음 날은 약지까지 접혀 있었다. 어린 마음에 우연과 운명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나는 매일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는 목장갑의 모양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주위 인간들의 행동이나 표정뿐 아니라, 그들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사물의 매력에도 빠져들었다. 여전히 그런 것들, 사물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냥 뭉뚱그려 인간 외 무엇들에 내 감각은 쉽게 홀린다. 작업 현장에서도 그렇다. 인간의 표정만큼 그가 서 있는 배경에, 인간의 행동만큼 그가 쥐고 있는 물건에 끌린다. 요즘 기록 중인 성매매 집결지에 오가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재개발 때문이다. 창문에 까만 시트를 붙여두어서 거주 중인 사람들마저 실내로 들어가면 안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그나마 인적을 드러내는 게 쓰레기봉투다. 특히 주말이 지나고 난 월요일이면 여기저기 쓰레기봉투들이 나와 있다. 업소마다 쓰레기봉투의 모양이 다르고 그걸 보는 재미가 있다. 최근에는 그 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몇년 전부터 드나드는 이 골목에서 나는 곧바로 카메라를 들 수가 없었다. 사회의 편견과 낙인으로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성매매 관련 종사자들은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피한다. 너무 많이 찍혀서 질려하기도 한다. 그리고 몰래 찍히는 이미지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예리하게 간파한다. 당사자들이 그런 불만을 말하기도 전에 나는 직감과 학습으로 조심하고 있다. 이런 조심스러움과 인간 외의 것들에 대한 내 관심이 합쳐져서 내 기록물의 대부분은 휴대폰으로 찍은 인간 아닌 무엇들의 모양이다. 인간들 눈길을 피해, 그러니까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빠르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찍었다. 기동성이 좋은 휴대폰이 가장 좋았다. 인간의 몸짓과 표정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한번도 보수한 적이 없는 듯한 조각조각 균열난 바닥으로도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한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동네에서 내 시선을 끈 것들의 목록을. 물티슈나 헛개차라 적힌 택배물들, ‘○○○ 아가씨’라 쓰인 빈 상자, 이 빠진 빗자루, 업소의 이름이 쓰인 음식물 쓰레기통, 빗물이 하수관으로 흘러내려가는 바닥의 구멍들, 고양이 밥그릇, 빨간 천막 위를 걸어 다니는 고양이의 검은 발자국, 그 위로 떨어진 오동나무의 커다란 잎들, 낡은 건물의 틈 사이로 자란 풀들, 업소를 개시할 시간이면 나와 있는 막걸리 한잔, 다 타버린 쑥, 보이지 않는 나쁜 기운, 멀리서 들리는 웃음소리, 작은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밥 짓는 냄새, 열어둔 문 사이로 보이는 신문지 위의 고구마, 덜 씻긴 토 자국, 비둘기의 똥, 가장 많은 글귀는 ‘소변 금지’, 굴러다니는 하얀 양말 한짝, 20년 전의 나이트클럽 포스터, 터진 채 굴러다니는 방울토마토, 빨대 꽂힌 빈 요구르트병, ‘발기부전’이라 적힌 담뱃갑, 대출을 권하는 명함, ‘천국 가는 법’이 적힌 전단지…. “오동나무가 물에 약해요. 물이 없으면 못 자라고, 너무 많아도 죽어요. 그래서 오동나무는 사람 사는 인가 근처에 많대요. 내리는 비와 땅 밑에서 흐르는 물이 있는 곳이요. 오동나무 저 나무는 제가 되게 좋아하거든요.” 이 동네에서 좋아하는 걸 하나 꼽아달라는 말에 누군가는 오동나무라고 했다. 성매매 집결지와 바깥 세계를 나누는 담벼락을 따라 자라는 나무다. 오동나무는 이곳 사람들과 같은 환경에서 지내며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가려주고, 햇볕도 막아준다. 같은 편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동네로 들어오는 입구에 서 있던 가장 큰 오동나무는 인간에 의해 잘린 적이 있다. 큰 나무가 있으면 기운이 안 좋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게 잘렸다가 귀퉁이에서 줄기 하나가 또 자랐단다. 이 얘기를 들으며 지긋지긋한데 쉽사리 떨치기 어려운 관계를, 욕설과 주먹으로 싸우다가도 다음날이면 그래도 같은 바닥에 있는 너밖에 없다 싶은 마음과 관계들을 떠올렸다. 차에 밟힐 때마다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며 점점 횡단보도에 눌러붙던 어릴 적 그 목장갑처럼. 하지만 이제 저 오동나무도 완전히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저녁이다. 늦가을로 넘어가는 요즘은 오동나무 큰 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다. 폐업한 포장마차의 문 사이로 작은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나를 쳐다보던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나오더니 빠르게 오동나무 잎들 사이를 지나간다. 또 하나의 커다란 잎이 공중에서 좌우로 흔들리며 하강하다 어느 순간 툭 떨어진다. 문득 고유한 풍경 하나가 완전히 사라질 거라는 예감이 든다.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마음 가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닌 지난 몇년, 내가 이 골목에 정이 참 많이 들었나 보다.

[인터뷰] ‘총천연색이 난무하도록’, <세기말의 사랑>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제4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 촬영상의 주인은 <세기말의 사랑>의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이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미디어아트의 영역까지 종횡무진하는 팔방미인이자 길 위에서 끝없는 배움을 찾는 여행자이며 심지어 여행 산문 두권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더 값진 경험을 위한 여행의 기술을 슬그머니 묻자 그는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구분 짓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질적인 영상 장르의 문법도, 여행자와 촬영감독의 삶도 그는 구획이 아닌 통섭의 관계로 인식한다. 세계를 갈라놓는 것만 같던 <세기말의 사랑>의 흑백과 컬러, 그 경계를 자신으로서 유유히 횡단하던 영미(이유영)의 모습처럼. - <세기말의 사랑>으로 제44회 영평상 촬영상을 받았다. 평소 주변 영화인들에게 아쉬운 결과에 너무 슬퍼하지도, 그렇다고 수상에 너무 크게 기뻐하지도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이번 상을 받았을 때 침착하려고 노력했지만 사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웃음) - ‘로드리고’라는 미들 네임은 수평적인 소통을 위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국어 호칭 중에 위계를 포함하지 않는 단어가 하나도 없더라. 그런 언어가 만드는 사유 체계 안에 함몰되어 있으니 수직적 질서가 자리 잡는 것 같았다. 영화는 공동 작업이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한국어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외국어 이름을 가져다 썼다. 로드리고는 남미에서 ‘철수’쯤 되는 흔한 이름이다. - 촬영감독이 되고자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 고등학생 때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을 즐겼다. <초록물고기>와 <8월의 크리스마스>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몇번이고 다시 보다 보니 왜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는지 문득 느껴지는 지점이 생기더라. 처음으로 스크린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느낀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꿈이 화가이기도 해서 촬영이 관계되는 시각적 요소에 더욱 끌렸던 것 같다. - 드라마 <아다마스>, 여러 다큐멘터리와 미디어아트 등 다방면의 영상 예술에 능하다. 최근에는 해양 다큐멘터리 작업을 마무리했다고. 그린피스와 협업한 작품으로 세계 곳곳의 바다를 지키는 사람들을 담았다. 장르마다 요구되는 작업 방식이 무척 다른 것은 사실이다. 분명 어렵지만 여러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삶의 모토인 만큼 큰 기쁨으로도 다가온다. 다큐멘터리는 팀의 규모가 작아야 하기에 대부분 홀로 카메라를 운용하게 된다. 스스로 렌즈를 갈아 끼우고 초점을 맞추고 녹화 버튼을 누르는 일련의 과정이 카메라와 온전히 독대하는 순수하고 정직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미디어아트는 그간 내가 갖고 있던 촬영에 대한 상식이나 신념을 완전히 리셋한 채로 접근해야 한다. 나를 비워낼 수 있는 좋은 계기다. - <세기말의 사랑>은 <69세>에 이은 임선애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이다. 미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임선애 감독과는 비주얼적인 감수성이 정말 잘 통한다. 영화 외의 교양이 무척 풍부하다. 둘이 영화를 준비할 때는 영상으로 된 레퍼런스가 거의 없고 주로 각자 가져온 사진으로 대화한다. - 주로 어떤 종류의 사진인가. 구체적인 레퍼런스인가, 인상을 자극하는 추상적인 이미지인가.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용도가 대부분이다.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가 출발했던 사진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 도달하기도 한다. 사진은 각자의 머릿속에 심는 씨앗이고 대화는 함께 물을 주는 과정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다. 즉물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는 다른 작업도 좋지만, 임선애 감독은 더 추상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들을 동원한 풍부한 대화를 나누며 이미지의 나무를 가꾸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파트너다. - <세기말의 사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시각적 요소는 흑백으로 진행되는 1막과 영미의 출소와 함께 컬러로 펼쳐지는 이후의 대비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둘 다 꼭 1막을 흑백으로 해야 할지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흑백으로 해야만 한다는 확신이 서로의 마음속에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심지어 임선애 감독은 그때의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흑백의 선택에 대한 짧은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 1막에서는 비교적 정적이었던 카메라가 2막에 들어서자 빠른 줌과 아크 등의 다양한 움직임을 자유로이 구사한다. 마치 촬영의 변속기를 당긴 듯한 느낌이다. 카메라워크의 변화는 명백하게 인물의 심경 변화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1막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영미를 마찬가지의 거리감을 둔 채 바라보고자 했다. 코너에 몰린 듯한 상황을 시각화하기 위해 영미는 언제나 프레임의 귀퉁이에 걸려 있고 도영(노재원)의 오버더숄더숏에서도 화면 중간에 자리하지 못한다. 이후부터는 카메라가 인물과 더 가까이에서 밀착하며 그들의 모습을 주관적인 시선에서 담고자 했다. 결국 이 영화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세상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물이라도 영미의 삶에서는 영미가, 유진(임선우)의 삶에서는 유진이 온전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 영화 중반부 영미가 사촌오빠의 노래방으로 찾아가는 장면의 촬영이 궁금하다. 인물들의 얼굴에 형형색색의 간판 불빛이 일렁인다. 총천연색이 난무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었다. 로케이션부터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조금은 촌스러운 거리였다. 그 광원의 색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조명팀에서 색채를 조절하는 젤라틴 필터를 수십개씩 갖다 붙였다. 카메라도 통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색온도로 설정했다. - <69세>와 촬영의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69세>는 전경의 인물부터 후경의 거리 모습까지 또렷이 잡히는 롱숏이 많다. 반면 <세기말의 사랑>은 대부분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클로즈업 위주이고 후경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69세>는 주인공이 겪은 참혹한 일이 구경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스펙터클을 거부하고자 했고 촬영의 주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장식적이지 않은 화면을 구사하기 위해 광각렌즈를 끼우고 조리개를 더 조여서 심도를 깊게 가져갔다. <세기말의 사랑>은 2000년경의 풍경을 재현해야 한다는 프로덕션상의 제약으로 롱숏을 자제한 측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의 선택에도 변화를 줬다. <69세>는 슈퍼35mm 센서의 카메라를 썼고 <세기말의 사랑>은 더 얕은 심도를 구현할 수 있는 풀프레임 센서 카메라를 선택해 배경을 흐리게 잡았다. - 로드리고를 정의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여행자’다. 여로 위의 사진 찍기와 영화 현장의 영상 찍기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나. 영화와 드라마는 공동 작업이고 여행 사진은 개인 작업이다. 수십명이 함께하는 공동 작업은 아무리 서로 배려하더라도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다. 여행은 그간의 피로를 정화하며 다음 공동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채우는 시간이다. 작고 가벼운 사진용 카메라를 다루며 기계에 대한 또 다른 이해와 감각이 활성화되기도 한다. 드라마 촬영에도 사진용 렌즈를 적극적으로 도입해보는 편이다. - 여행을 통해 세상의 불균형과 사회에 대한 부채감을 확인한다고. 최근 개인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으로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에 다녀왔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알려진 직후였다. 한 난민 친구가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더라. 여자 친구가 대전까지 가서 몇 안 남은 영어판을 구해 보내줬다. 이 친구들이 맘껏 읽을 수 있도록 책도 수천권 사주고 싶고, 지난봄에 다녀온 시리아 지역에는 언젠가 학교도 짓고 싶다. 촬영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꼭 그렇게 하고 싶다. (웃음)

예상외의 한컷 - 촬영감독들이 뽑은 계획 밖의 좋은 장면들

모든 촬영이 계획대로 되진 않는다. 하지만 그 계획 밖의 상황들이 때로는 감흥 넘치는 우연의 순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다섯명의 촬영감독에게 각자의 현장에서 겪었던 그 감흥의 순간을 물었다. <청설> 강민우 촬영감독 “영화의 시나리오상 수영장에서 촬영된 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배우가 물속에 옷을 입고 들어가는 장면도 찍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가 배우와 함께 고스란히 그 장면 안에 머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래서 직접 아크릴로 큰 박스를 만들고 그 안에 카메라를 넣은 후, 부력으로 물 위에 둥둥 뜬 박스를 손으로 들고 찍었다. 배우들과 같이 걷고 수영하면서. 테스트를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배우들과 수영장에서 같이 논다는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찍었는데 잘 담긴 것 같다. 사전에 동선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찍은 장면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있었지만, 카메라가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상태를 원했는데 잘 구현됐다.” <미망> 김진형 촬영감독 “3부에서 택시를 타고 세 인물이 쭉 대화하는 신은 원래 컷이 더 잘게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처음 와이드한 스리 숏을 잡고 촬영을 해보니 원 테이크로 갔을 때의 감정이 너무 좋더라. 사실 촬영감독 입장에선 원 테이크가 좋다고 해도 편집 단계를 대비해서 컷을 더 확보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먼저 감독님께 이거 그냥 따로 찍지 말고 한 번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웃음) 콘티 짤 땐 컷을 나눠야 한다고 말하던 애가 갑자기 그대로 가자는데도 태양 감독님은 웃으면서 동의해줬다.” <세기말의 사랑>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목욕 봉사자들이 다녀간 후 거실 창 앞에서 영미가 유진의 머리를 말려주고 로션을 발라주며 투닥거린다.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게 되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다. 이때 분위기를 더욱 절절하게 끌어올려줄 투숏이 필요했는데, 우리의 선택은 두 사람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길이 2m의 미니 돌리로 아주 천천히 트랙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컷의 백미는 산들바람이 닿아 움직일 듯 말 듯 일렁이는 커튼이다. 연출팀이 발코니에 숨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바람이다. 임선애 감독이 컷을 외치는 소리에 이미 감격이 배어 있었고, 배우와 스태프가 함께 모니터링할 때는 작은 축제 분위기였다. 넉넉지 않은 프로덕션에도 스태프들의 지혜가 모여 공동 작업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던, <세기말의 사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컷이다.” <딸에 대하여> 김지룡 촬영감독 “엄마가 레인과 함께 집에서 팬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자연광과 인공광을 혼합하여 촬영했다. 유독 날씨가 맑았고, 햇빛이 무척 셌다. 강한 햇빛이 하필이면 오민애 배우 앞에 놓인 팬케이크 접시에 떨어졌다. 그 순간 접시에서 오는 금속 난반사가 오민애 배우의 얼굴과 뒤편의 벽에 비쳤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보통 영화를 찍을 때 그런 장면은 버리는 컷이다. 하지만 카메라로 그 광경을 보자마자 꼭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당연히 조명감독님은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남기면 안된다고 극구 반대하셨지만, 내게 이 장면은 관객이 그 방 안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실재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간절히 매달린 끝에 다행히 영화에 해당 장면이 담겼다. 다른 관객들은 발견하지 못할 수 있는 사소한 우연이지만 내게는 소중한 장면이었다.” <시민덕희> 이형빈 촬영감독 “영화의 후반부, 덕희가 보이스피싱의 총책과 마주한 후 공항 화장실에서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로케이션의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고, 주변 여건상 굉장히 어수선한 촬영 현장이었는데 라미란 선배께서 올곧이 영화의 감정을 지켜주시니 모든 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감정을 유지해준 선배님의 얼굴이 유독 짙게 생각난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서울의 밤과 해프닝

모든 일상이 멈췄다. 태어나서 처음 이 상황을 맞닥뜨린 이들부터 한국사의 계엄령을 모두 경험했다는 어르신까지, 45년 만의 계엄령 선포는 국민 모두에게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단 6시간 동안의 악몽으로 마무리됐지만 중요한 건 시간의 양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더이상 2024년 12월4일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정의나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담론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게 변하는 중이다. 크고 작은 행사를 비롯하여 당장 12월에 예정된 많은 일정들이 변경됐다. 사소하게는 지금 여기 쓰는 편집장의 말조차 원래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준비 중이었지만 국가수반이 국회와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민낯이 드러난 마당에 다른 이야기를 할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2024년 겨울, 한국 사회는 여유와 신뢰를 강탈당했다. 거창한 담론, 시끄러운 정치, 남의 이야기로 치부했던 것들이 계엄과 탄핵 국면을 맞아 모두 공론의 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의도에 살건 부산에 살건, 그날 밤에 잠을 잤건 뉴스를 보며 밤을 새웠건, 사건으로부터의 거리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당사자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이 순간이 역사의 일부라는 진실을 새삼 실감 중이다. 문득 유년기 기억을 빌려 역사를 조망했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가 떠오른다. 오늘의 우리를 만든 건 어떤 아픔들인가. 1972년과 79년을 기억하는 이에게 계엄령이란 공권력에 의해 초법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공포였다. 유시민 작가는 “갑자기 누가 집에 와서 자신을 잡아가고요, 한강다리가 막혀 거기 검문소가 설치되고요, 광화문 앞에 탱크가 와서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신문, 방송은 다 검열이 되고요, 전화도 다 도청되고, 몇 사람 이상이 모여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다 금지되고요”라고 회고한다. 2024년 12월로 처음 계엄을 겪은 이들에게 계엄은 뜬금없고 어설프고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액면 그대로 믿어준다고 하더라고 그걸 실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최소한 무능이 증명됐다. 덕분에 계엄이 실패한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가 여전히 많은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을 두려워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해프닝>에선 갑자기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왜 그런 현상이 생겼고, 왜 갑자기 해결됐는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현상만 있고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때 때로 사람들은 그걸 ‘해프닝’으로 치부한다. 어떤 이들은 12월3일의 국가 내란 상황을 '해프닝'으로 축소하고 싶은 것 같다. 하지만 결국엔 지나갈 상황이란 가벼운 뉘앙스 이면에는 예측 불가능한 혼돈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압력이나 물리적인 폭력과는 또 다른 공포, 미지에 대한 불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2월4일의 계엄을 굳이 해프닝이라고 지칭하고 싶다면 이건 다시 없을 무시무시한 해프닝이었다. 이 해프닝의 본질은 한 마디로 '그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데 있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힘과 권력, 칼이 쥐어졌을 땐 이야기가 다르다. 국가 최고 권력자가 맥락도 의도도 효과도 짐작할 수 없는 뜬금없는 일을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어설프게) 벌였다가 실패했고, 계엄이 국민을 향한 호소였다는 변명과 함께 여전히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 황망하고 짧았던 밤은 끝났지만 이제 길고 지난한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뎌야 한다. 해프닝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게, 바야흐로 어둠을 살라 먹을 불씨를 퍼트릴 바람이 불어온다.

[OTT 리뷰] ‘트렁크’ ‘가족계획’ ‘조명가게’

트렁크 넷플릭스 / 8부작 / 연출 박보람 / 출연 서현진, 공유, 정윤하, 김동원 / 공개 11월29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결혼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시대, 상처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정원(공유). 그는 상처받은 아내 서연(정윤하)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기이한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요구는 정원이 계약 결혼 서비스를 통해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원의 기간제 아내로 배정된 인지(서현진).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약혼남에게 복수하기 위해 비밀스러운 결혼 업계에 발을 들인다. 사적인 감정을 차단하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이번에도 능숙하게 맡은 일을 처리해나간다. 하지만 인지는 점점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지닌 정원에게 연민 어린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한편 서연은 전남편을 바라보는 인지의 눈빛에 질투를 느끼고 또다시 지저분한 소유욕에 사로잡힌다. <트렁크>는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8부작 드라마로 각색한 작품이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도의 중심에는 작품의 핵심 소재인 기간제 결혼 서비스가 자리 잡는다. AI나 로봇이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을 대체하는 기존 디스토피아 작품들과 달리 <트렁크>는 결혼 자체가 직업이 된 인간 여성을 등장시킨다. 공간을 분해하고 빠르게 재조립하는 연출과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돋보이는 감각적인 O.S.T가 사이버펑크의 톤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극단적인 정서에 있다. <트렁크>는 악몽과 환각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관객에게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시키려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가정폭력과 편집증이 과할 정도로 버무려진 캐릭터에 온전히 이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결혼이 죄악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가짜 결혼’을 경유하여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되묻는 시도만큼은 참신하게 느껴진다. /김현승 객원기자 <가족계획> 쿠팡플레이 / 6부작 / 연출 김선, 김곡 / 출연 이수현, 로몬, 류승범, 배두나, 백윤식/ 공개 11월29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기괴하고 어설프지만, 그래도 가족입니다 우리를 진정 가족이라 말할 수 있을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며, 수상하게도 계속 존재를 감추려는 자신의 가족을 보며 지우(이수현)는 의문을 품는다. <가족계획>은 <슈츠> <허쉬>를 집필한 김정민 작가가 크리에이터이자 각본가로서 참여했으며 김곡, 김선 감독이 연출을 맡은 쿠팡플레이 시리즈다. 타인의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브레인 해킹’ 능력을 지닌 엄마 영수(배우나)를 중심으로 수의사 철희(류승범), 가족의 화합을 중시하는 할아버지 강성(백윤식), 천재 해커 지훈(로몬), 강렬한 액션을 선보이는 지우로 구성된 이들은 새 도시로 이주한다. 조용히 정착하고자 했던 바람과 달리 첫날부터 주민들, 학교 친구들과 묘하게 어긋난다. 불량 학생을 처단하는 통쾌한 학원물, 능력을 발휘하는 히어로물, 블랙코미디 장르의 특징을 적절히 섞어 완성된 독특한 시리즈물이다. 11월29일 1, 2화가 공개됐으며 이후 매주 금요일 1화씩 공개된다. /조현나 <조명가게> 디즈니+/ 8부작/ 연출 김희원 / 출연 주지훈, 박보영, 김설현, 엄태구/ 공개 12월4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클래식한 공포감 조성, 현대적인 인간사 해석 능력 강풀의 또 다른 세계관이 디즈니+에서 펼쳐진다. 동명의 원작 웹툰을 기반으로 한 <조명가게>는 삶과 죽음, 그 경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조명가게를 운영하는 원영(주지훈)은 화려한 조명을 뽐내기 위해 매일 심야 영업을 감행하며 손님을 반긴다. 어두운 골목 끝에 자리한 가게로 사람들이 드물게 찾아오지만 그중에도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이들이 있다. 어딘가 이상한 지점이 있는 사람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려운 낯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정체를 한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원영은 본능적으로 그들이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감지한다. 한편 병원 중환자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사 영지(박보영)도 원영과 비슷한 나날을 겪으며 생사의 중심을 들여다본다. 공포라는 장르가 강풀 작가 특유의 휴머니즘을 만나 화학작용을 낸다. 12월4일 4화까지 공개한 이후 매주 2화씩 공개될 예정. /이자연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영원한 그림자는 없기를

여행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낯섦’이다. 낯선 이, 초행길, 그리고 그 속에서 낯선 모습의 나. 무엇이든 쉽게 예측할 수 없고, 계속해서 퍼즐을 맞춰가는 길이 지겹지가 않다. 또 어떨 때는 모르기 때문에 더욱 용기가 생긴다. 이는 자아가 흐릿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행자의 신분으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고 될 수 있는 사람도 많다. ‘나’는 꼭 ‘나’일 필요가 없어진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더 추구하는 이유는, 뭐든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라든지, 모르는 사람과 몇 시간이건 수다를 떠는 일들이 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남은 생에서도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을 할 때면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빨리 흘러간다. 그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내 멋대로 만든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높은 하이힐을 신고 뛰다가 지하철을 놓쳐버렸다. 그녀는 평상시 잘 신지도 않는 구두를 신고 나왔다. 하늘이 유독 맑아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마른하늘에 비바람이 들이닥쳤다(실제로 그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나 역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위기. 우산을 사기엔 시간이 없다. 냅다 달렸지만, 이미 맞지 않는 신발에 퉁퉁 부어버린 발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는 느려져만 갔고, 지하철은 가까워져 온다. 자신과의 사투. 마음은 육상선수지만 따라주지 않는 다리는 하찮게 느껴질 뿐이다. 결국 간발의 차로 지하철 문은 닫혔고, 그녀는 아르바이트에 늦게 되었다. 오늘도 한 소리 들을 생각에, 괜한 날씨 탓을 하며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외국어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깊은 욕. 음성을 듣고 난 후에야 알았다. 나의 관찰 대상자, 그 짧은 신의 주인공은 그녀가 아닌 ‘그’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그를 하이힐을 신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깊게 관찰하지 않고 성별을 확정지어버린 내가 아쉬웠다. 나의 과몰입과 상상은 재미있었지만, 그에 치우쳐 더 유심히 바라보지 못했던 점을 반성했다. 실제로 2022년 9월 파리에서 적었던 나의 상상일지다. 그렇게 낯선 이들에게 나의 상상을 투영하며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샌가 해는 뉘엿뉘엿 지고, 처음 가보는 바에 들어가서 잔뜩 경계를 하며 술을 마시다가도 혼자라는 사실에 잔뜩 풀어져보기도 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내 눈에 담은 낯선 이들의 이야기는 무진해진다. 매번 혼자이진 않다. 2019년 7월 벨기에에서의 일이다. 노상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내 기억상, 그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줄곧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노부부가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었다. (그들은 내게 영어로 물었다. 우연히도 나는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있었고, 그들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벨기에 거주인이었다.) 나는 <해리 포터>를 읽고 있다고 답했고, 노부부는 웃으며 그들의 고향이 영국이라고 말했다. 그 대답을 시작으로 우리는 3시간 넘게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 대화에서, 철저히 자신을 새로 만들어나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었다. 이름, 나이, 직업, 이 나라에 온 이유, 그외 모든 것. 나는 그저 <해리 포터>를 너무 사랑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해리 포터> 시리즈를 낭독하는 여행가이고 이번엔 벨기에로 오는 차례라고 했다. 사실 나는 대학생이었고, 계절학기를 들으러 프랑스에 갔다가 학점을 모두 이수한 후 벨기에로 여행을 간 터였다. 아무런 판단도 편견도 없었던 그 3시간이 넘는 대화는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았다. 그들의 벨기에 이주 여정, 러브 스토리, 자신들이 개발한 영국식 벨기에 음식 등등 너무나도 흥미로웠던 이야기들과 함께 취했던 밤. 귀가하는 길에 문득 그들도 나처럼 신분을 위장했을까 하는 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또 시작된 ‘만약 위장한 것이 사실이라면?’의 상상. 현실에 존재했던 상상으로 만든 나와 허구 속 또 다른 허구로 가득 채워진 하루였다. 그렇기에 여행은 흡사 꿈꾸는 것과 같다. 모르는 일이 가득 펼쳐진다. 마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처럼 말이다. 평범할 수 있는 낯섦을 마주했을 때, 무지함에서 탄생할 수 있는 용기들이 여행에서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한다. 또 내가 낯가리는 새로운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되는 굴레. 그 굴레가 돌고 돌아 결국엔 이 세상도 동그랗다는 내 상상 속 철학도 초행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두에게 영원한 그림자는 없길 바라는 소망과 함께 말이다. 기억 속 낯설었던 것들을 되짚어보면서, 올해 마지막 달을 마주한다. 새로운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푸근했던 경험, 매번 하던 일이지만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경험 모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당신은 당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곰곰이 생각한 후,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떠요”라고 대답했다. 어떠한 일은 대단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숨을 쉬는 것, 그리고 아침을 마주하는 것에서부터인 것이다. 매일 그것을 실행하는 여러분에게 정말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잘 부탁드린다. 잊지 말자. 모든 이들은 영롱하다. 2024년 11월17일의 일기.

[기획] 강인하게 또박또박 나아가는, <대가족> 배우 강한나를 만나다

배우 강한나는 불일치의 여자들을 주로 연기해왔다. <순수의 시대>에선 복수를 품은 채 무인에게 접근하는 기녀 가희를 맡아 이름을 알렸고 <붉은 단심>에선 가슴속에 큰 뜻을 숨긴 채 궁궐 안으로 걸어 들어간 조선의 여인 유정으로 분해 궁중 로맨스 마니아층의 마음을 흔들었다. <간 떨어지는 동거>의 혜선은 격차가 실로 컸다. 실제로는 747살의 구미호지만 22살 여대생이 되어 험난하고 달콤한 인간세계를 겪었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정유진 팀장과 <스타트업>의 원인재 대표에겐 이런 수식이 앞에 붙는다. 미모, 실력, 재력을 갖춰 완벽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 사랑이 없어서, 더 높은 자리를 원해서 늘 부족함을 느끼는 여자. 올해 주연작 드라마 <비밀은 없어>에서는 늘 오케이를 외치지만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은 예능 작가 온우주 역을 맡아 한 인물의 명암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10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대가족>의 가연 역시 인상은 차가워도 속은 뜨끈한 의사로, 스님이 된 전 남친 문석(이승기)과 그의 가족들이 처한 위기 상황에 손을 보탠다. 이 여자들의 계보는 강한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다. “한면만 강한 인물에 매력을 잘 못 느낀다. 티 없이 밝은데 상처가 있다든지, 빈틈없을 것 같은데 귀여운 구석이 있다든지 하는, 다채로운 이면을 가진 인물에 항상 끌린다.” 장편 시리즈와 영화를 한편씩 내놓아 풍성한 한해를 보내고 있는 강한나를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났다. 맡아온 캐릭터들에 관해 물을 때마다 그는 작별이 아쉬운 사람의 눈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내 인물의 뒷모습과 심연을 관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햇수로 10년 전, <순수의 시대>의 신인배우로 <씨네21>를 찾았었다. 그때 생각과 조언으로 빼곡한 작업일지를 공개해주었는데 요즘도 기록을 남기나. 당시 어느 부분을 펼쳐서 보여줘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신인 때는 선배님, 감독님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현장에 적응하는 게 급선무였다. 현장에서 함께 조율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알아갈 연차쯤 일지 쓰는 일이 줄었고 요새는 안 쓴다. 여전히 대본에 뭘 많이 적긴 하는데 의지하진 않는다. - <대가족>은 개봉연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10년 만의 장편영화다. 영화를 만드는 구성원 중 하나로 있던 시간은 어떻게 남아 있나. 대본 리딩을 하고 의상을 피팅하는데 그 모든 게 처음 해보는 작업처럼 생경했다. 분장을 받을 때가 특히 남달랐다. 배경이 되는 2000년이란 시대, 맡은 인물의 성격과 내가 확 밀착되는 것 같았달까. 줄곧 해온 드라마도 물론 캐릭터에 맞게 스타일링을 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는 게 기저에 깔려 있다 보니 차이를 크게 느낀 것 같다.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 같아서, 그냥 그 인물로 살아 숨 쉬도록 양우석 감독님이 디렉팅을 주셔서 좋았다. 초원에서 뛰어노는 한 마리의 당나귀처럼 오랜만에 현장을 자유로이 누볐다. (웃음) - <변호인>과 <강철비> 시리즈를 만든 양우석 감독과는 예상 밖의 조합이다. 감독님의 시나리오가 내게 왔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놀랐고 신기했다. 감독님과의 첫 미팅날이 떠오른다. 시나리오에서 가연이 시크하고 도도한 의사처럼 느껴져 힘을 빼고 가야 하나 싶었는데 감독님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오히려 과하게 해도 한나씨가 하면 가연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일 거라면서 나를 끌어주셨다. 여기에 더해 가연이는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는데 명확한 비전이 느껴져 믿음이 갔다. 의지가 되니 나도 내 의견을 마음껏 드릴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가연은 초기 구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완성되었다. 더 많이 화내고 더 많이 좋아하고 더 거침없는 여성이 되었다. - 문석과 의대생 커플이던 과거에서도 이젠 전 남친이 된 문석의 자식을 찾아주러 다니는 현재에서도 둘 사이의 주도권은 언제나 가연에게 있다는 점이 재밌다. 여러모로 가연은 대범하고 화끈한 여성인데 여기에 배우의 캐릭터 해석을 더한다면. 순수하고 정 많은 친구. 감독님과 캐릭터와 관련한 얘기를 나누면서 가연이의 그런 면모를 캐치했다. 같은 유치원의 남자애가 자길 안 좋아해서 마음이 상한 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엄마 가연이의 살가운 면이 드러난다. 현재 곤경에 처한 문석을 끝까지, 그것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하는 점도 그렇다. 과거에 어떻게 헤어졌든 현재 관계가 어떻든 간에 그간 쌓인 미운 정 고운 정을 결코 무시하지 못하는 성정이다. - 앞선 여름에는 고경표 배우와 찍은 <비밀은 없어>가 공개됐다. 늘 괜찮다고만 말하는 사람에게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된다는 용기를 주는 드라마였다. 처음부터 “괜찮아”라는 우주의 대사들에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그 말로 우주는 실은 괜찮지 않은 자신을 다독이며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친구였다. 그러다가 기백(고경표)을 만나면서 달라진다. 내게 <비밀은 없어>는 마음이 고장 난 사람들이 가면을 벗어도 되는 상대를 통해 비로소 솔직해지는 따뜻한 이야기였다. - 상심한 기백에게 우주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지키는 ‘호심술’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다. 대본으로 접했을 때도 공감을 많이 했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모진 바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마음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얘, 너 괜찮니? 정말 괜찮은 거 맞니?”라고 물으면서, 그렇게 자기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면서 살아가야 탈이 없다. - 호심술의 대가 같은 답변이다. 나는 내가 붕괴될 때까지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분이 안 좋다 싶으면 왜 기분이 안 좋은지를 생각하고 넘어간다. 이런 덕분인지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다. 보통 어떻게 해결할지 정리하는 과정에서 진정되고 일단 자고 일어나면 회복하는 편이다. 혼자 감당하지 못할 큰일이 닥쳤다 싶을 때는 초기에 도와달라고 말한다. 체감상 그런 큰일은 3년에 1번 정도 찾아오는 것 같은데 뭐 어떤가.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시간을 한바탕 겪고 나면 개운하다. 다시 파이팅해보자고 인생에 기합도 넣게 되니 정말로 괜찮다! - <비밀은 없어>는 우주가 “하나도 괜찮지 않아요”라고 내뱉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라고도 요약할 수 있겠다. 9화의 이 중요한 장면을 찍을 당시에 어땠나. 특별한 날이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경력이 쌓여도 감정신은 여전히 심리적 부담이 있어서 찍는 당일에는 걱정 상태가 되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길 버렸던 엄마와 재회하고, 하던 프로그램에서 빠지면서 우주가 느꼈을 ‘하나도 괜찮지 않은 마음’이 애쓰지 않아도 올라왔다. 풀숏으로 찍든 백숏으로 찍든 같은 지점에서 울컥하고 눈물이 고였다. 중요한 날에 내가 괜찮도록 그 신이 내게 어떤 힘을 준 게 아닌가 싶다. - 궁중 로맨스 <붉은 단심>에서 유정은 왕(이준)의 사랑만을 기다리는 조선의 여인이 아니다. 준비한 계획을 추진력 있게 실현해나가는 조직의 수장이다. 그만큼 중요한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로 남을 만하다. 그런 유정이야말로 성군이 될 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도 했다. 지금 좀 신기한 흐름인 게 <붉은 단심>에서도 인물의 마음을 알겠는 순간이 있었다. 극 초반에 유정이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하는 신이 있었다. 그 신을 찍을 때 감독님이 유정의 감정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고 말씀해주셨다. 처음에는 집중이 안됐는데 혹독한 추위에 먹지도 못하고 있을 내 사람들에 집중하다 보니 결국엔 그렇게 되더라. 이후에는 특별히 그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이 아파 눈물이 쏟아졌다. 리더라는 하나의 중심축이 초장에 잡히니까 전반적으로 촬영도 잘 풀렸다. - <스타트업>에선 맡은 역할(원인재)이 스타트업 대표라 프레젠테이션 신이 많았다. 이 신들은 강한나 배우의 강점인 단단한 음색과 정확한 딕션이 두드러지면서 대중의 호평도 컸다. 단순히 발음이 좋다는 걸 넘어 캐릭터의 특질을 목소리에 띄울 줄 아는 배우라는 인상인데, 혹시 맡은 인물의 말투에서부터 캐릭터라이징을 시작하나. 목소리 톤이나 말투에 신경 쓰기 시작한 건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에서 원화공주 역을 맡았을 때부터다. 대본 리딩 자리에서 감독님과 작가님이 원화공주는 정확하게 솔 음역대였으면 좋겠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셔서 톤을 올려봤는데 원화공주의 묘하게 밉상인 점과 공주의 느낌이 잘 살아서 놀랐다. 무엇보다 재밌었다. 목소리에서부터 캐릭터 구축을 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재는 저음에 또록또록한 느낌으로, 혜선이(<간 떨어지는 동거>)는 우아한 허당이라는 이미지에 맞춰 곡선의 느낌이 들도록 목소리를 디자인했다. - 2020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진행한 <강한나의 볼륨을 높여요>도 커리어에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을 것 같다. 당시 실시간으로 들으면서 ‘한디’(DJ 강한나의 애칭)는 사소한 사연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살뜰한 DJ라고 생각했다. 라면 물도, 찌개 물도 못 맞춰서 고민이라는 청취자에게 자신은 대학 시절에 선배들의 커피믹스 물을 못 맞춰 고생깨나 했다는 경험을 고백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물을 조금 덜 넣어보면 어떨까요?”라고 해결책까지 제시하더라. 세상에, 그렇게 얘기했던 게 기억난다. (웃음)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데뷔해서 그런지 내가 배우고 연예인이라는 자의식이 덜하다. 그래서 DJ를 할 때도 항상 청취자의 입장이었다. 고민에 대한 사연이 소개됐는데 DJ가 대충 “힘드시죠~” 하고 넘어가면 얼마나 서운하겠나. 그 마음을 알기에 사연 하나하나에 내 모든 정성을 다하고자 했다. - 라디오라는 매체가 아무리 자신을 포장하려고 해도 결국 자기 자신이 드러나는데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DJ라는 처음 해보는 역할에 대한 두려움만 있었지 ‘강한나’로서 일하는 건 편하고 즐겁다. 배우로서 한 인물을 잘 빚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는 거니까. - <런닝맨> 최다 출연 게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웃음) 최근에 팬덤 플랫폼 버블을 시작한 것도. 22번인가 출연했다. 주변의 연기자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능에 나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던데 나는 정반대다. 그냥 나로서 충실하게 즐기다 오면 된다. 버블은 팬들과의 소통 창 구가 필요해서 용기를 냈다. 대단한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늘 소소한 이야기만 띄우고 있다. 그런데도 다들 좋아해주신다. DJ 시절의 기쁨을 요즘 다시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

[인터뷰] ‘배우 입장에서, 무엇보다 감독의 눈으로’, <조명가게> 김희원 감독

배우로 데뷔한 지 36년, 김희원은 언젠가 자신의 생각을 담은 작품을 연출하고 싶다는 꿈을 늘 품고 있었다. 창작 뮤지컬 <빨래>의 제작자로도 잘 알려진 그가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조명가게> 연출자로 낙찰됐을 때, 주변에서는 “언젠가 감독이 될 줄 알았다”고 반응했단다. “내가 연출을 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냐며 전화가 많이 와야 하는데 전화도 별로 안 왔다. (웃음)” 그리고 <조명가게>는 그에 대한 믿음을 직접 작품으로 증명한, ‘배우 출신’이라는 전제를 떼어놓고 봐도 꽤 준수한 신인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 <조명가게> 영상화 소식은 십수년 전부터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떻게 연출을 제안받았나. <무빙>이 끝날 때쯤 <귀>라는 단편영화로 감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풀 작가님이 내 소식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먼저 연출 제안을 했다. 고민이 많았다. 시리즈 연출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큰 작품을 왜 나한테 맡기려고 하는 걸까. 작가님이 <무빙> 때 배우들과 연기 이야기를 하면서 배우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 <조명가게>가 워낙 정서가 센 드라마다 보니 배우 출신 감독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단다. - 첫 작품으로 하기에는 큰 프로젝트였는데 결과적으로 수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감독을 하고 싶다고 막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 돈 갖고 하는 일인데 결과물이 좋지 않아서 사람들을 실망시키면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사람들이 많이 봐줄 텐데 내가 할 수 있을까? 촬영과 조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무섭거나 웃기거나 슬픈 장면의 미장센이 신마다 떠오르는 능력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 의심을 많이 했다. 나중에는 일단 하다 보면 될 거라고, 흘러가는 대로 놔두자고 생각했다. (웃음) -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한 회차에서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는다. 4회 마지막까지 가야 우리가 지금까지 본 내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점프 스케어 같은 장치 없이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상당히 난이도 높은 작업이었을 텐데. 뭔가 기분이 나쁘지만 그 정도가 심해서 감상을 포기할 정도는 아닌 선을 잡아나가야 했다. 1화는 스릴러물로, 2화는 <슈퍼 내추럴> 같은 호러물로, 3화는 스펙터클하게 끝내고 4화 마지막에 비밀을 밝히는 흐름으로 구성을 짰다. 1화부터 4화가 1막, 5화와 6화가 브리지, 7화와 8화가 2막에 해당한다. 연극을 오래해서 그런지 이런 구조를 취하게 됐다 - 조명가게, 학교 등 특정 공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의 미술이 곧 작품의 무드를 완성한다. 이들 공간 자체에도 반전이 담겨 있다. 조명가게부터 학교까지 모두 같은 동네에 있는 것처럼 보여야 나중에 병원에서의 반전이 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진짜 사람들이 사는 공간처럼 평범하게, 하지만 너무 평범하지는 않게 수위를 계속 조절했다. - 빛이 있는 곳과 어둠이 있는 곳의 대비가 중요하다. 조명을 쓰는 방식을 눈여겨보게 되던데. 항상 동서남북을 생각했다. 전체 동네의 그림을 생각하며 조명가게가 있는 방향에서 빛이 오게끔 조명을 설치했다. 배우들이 걸어갈 때 그림자도 전부 그렇게 설정된 것이다. 음영의 구분이 확실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멋진 그림도 꽤 많았다. -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 큰 화면으로 집중해서 봐야 하는 작품 같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보면 어떤 호러영화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또 이런 장르는 소리가 중요하다. 그래서 사운드 믹싱에 신경을 많이 썼다. 집에서 TV로만 봐도, 머리를 말리거나 청소기를 돌리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것이다. (웃음) - 동료 배우들에게 직접 연기 디렉팅을 해보니 어떠하던가. 다들 친한 선후배들인데 평상시와 일할 때 모습은 참 달랐다. 그동안 난 어떤 모습으로 비쳐 졌을까? 이 생각도 많이 하게 되더라. 촬영 끝나고 집에 갈 때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고생이 많았다”며 격려했다. 그런데 아까 제작발표회에서 (주)지훈이가 자기한테는 연락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자식, 분명히 했는데! (웃음) 촬영 첫날에는 모든 배우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이는 “형, 낯간지럽게 뭐 이런 일로 전화해~”라고 하는 스타일이고, 내 기준에 (박)보영이나 (김)민하는 마음이 좀 여리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연락을 더 자주 했다. 현장에 있으면 배우가 하고 싶은 연기가 있는데 잘 안 나오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때가 있다. 내가 그 역할이 됐다고 이입하면 지금 연기가 잘 안 나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배우가 편하게 연기를 끌어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 다른 작품에서 모두 단독 주연을 할 수 있는 배우들이 한 작품에 모였다. 작품이 좋고 캐릭터가 임팩트 있다면, 모든 배우가 혼자 많이 나오는 것을 꼭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분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별로 없다. 이 또한 내가 원래 배우이기때문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조명가게>는 배우들의 촬영 회차가 거의 똑같다. 다 같이 작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찍었다. - 원작 웹툰과 맞는 이미지도 캐스팅 당시 고려 대상이었나. 웹툰을 그대로 재현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1순위였다. 만화는 컷과 컷이 나뉘어져 있고 우리는 그 사이를 상상력으로 메꾼다. 영상은 그 중간을 찍어야 한다. - 4화 마지막 시퀀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흘러나온다. 원작에는 없던 신이다. 1막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대목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줘야 했다. 내 나름대로 심은 반전을 어떻게 보여줘야 사람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맞춰 디자인된 카메라워킹을 떠올리게 됐다. 원작 웹툰에도 등장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마치 이 곡 때문에 <조명가게>를 쓴 것처럼 가사가 잘 맞아떨어진다. 노래를 틀어놓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콘티를 만들고 CG로 제작한 뒤 그대로 찍었다. 배우들은 누워만 있으면 되는 신이라 배우들 없이 카메라워킹 연습만 이틀을 했다. 실제 촬영은 다섯 테이크 정도 갔다. 배우들은 마지막 날 와서 한 시간 동안 푹 자고 퇴근했다. (웃음) - 역시 같은 배우라서 배우들의 마음을 잘 알아준 거네. (웃음) 카메라워킹만 미리 시간 들여 연습하면 되는데 굳이 리허설 때 배우들을 불러 고생시킬 이유가 없다. 그래서 배우들이 참 좋아했다. (웃음) 영하 14도 날씨에 비 맞는 연기를 계속하면 배우가 죽어나간다. 몸이 힘들면 연기도 잘 안 나온다. 카메라를 몇번 바꿔야 원하는 컷을 빨리 찍고 끝낼 수 있을까? 이 신의 감정은 대사를 하다 고개를 돌리는 게 맞고 그렇다면 카메라 방향을 바꿔야 하고 한 세번 바꾸면 이 장면을 모두 찍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배우 입장에서 생각하면 촬영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연기를 하면서 카메라 감독과 콘티 작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