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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걷다, <하얼빈> 우민호 감독

- 지금 시국과 어울리는 영화라는 반응이 많더라. <남산의 부장들> 때는 개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터졌는데 <하얼빈>은 비상계엄 이후에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 <남산의 부장들>의 시대 배경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비상계엄을 겪은 뒤 살면서 다시 경험하지 못할 줄 알았다. 우리가 역사를 잊는 순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비극의 역사일수록 되짚어봐야 한다. 그래야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2월14일 탄핵소추안 제안 설명에서 “1980년 5월 광주는 2024년 12월의 우리를 이끌었다. (중략)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큰 빚을 졌다”고 했다. <하얼빈>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이 대사 역시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한다더라. 안중근 장군이 실제 했던 말이다. <안중근 자서전>을 읽으며 묵직한 감정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도 삶을 반추하게 하고 큰 위로를 받았다. 관객 역시 나처럼 힘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영화를 무게감 있게 찍고 싶었다.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에서 나라를 잃은 독립군의 정신을 오락영화로 소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만들면 안됐다. - 초고는 케이퍼 무비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됐다고. 내가 다 뜯어고쳤다. 잃어버린 조국에 가족을 두고 동토의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하얼빈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는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건 동지뿐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의심이 싹튼다. 실제로도 그랬다. 때문에 첩보 드라마 스타일이 <하얼빈>과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프렌치 누아르를 참고한 <남산의 부장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웅장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스펙터클한 자연 속에서 조국을 빼앗긴 독립군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초라하고 쓸쓸하고 고독한 거대한 자연 속에서 스스로의 육체가 하찮게 느껴지지만 하얼빈에서의 거사를 위해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숭고하게 그려보고 싶었다. 물리적으로 열세인 싸움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총도 칼도 폭탄도 아닌 강인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고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실제 결과물도 <토지>와 닮았나. <토지>를 읽었을 때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한민족의 모진 생명력을 느꼈다. 그래서 한이 있는 거다. 대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는 민초들의 생명력을 <하얼빈>의 곳곳에 넣어보았다. <하얼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 초반부 함경북도 신아산의 전투 시퀀스는 독립군이 크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육의 참혹함과 죽음의 공포를 리얼하게 담아낸다. <하얼빈>이 어떤 길을 가는 영화인지 알려준다. 광주의 한 목장에서 찍었다. 당시 광주에 40, 50년 만에 50cm가량의 폭설이 내렸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눈이 없었는데 우리가 가는 곳마다 눈이 내렸다. - 마치 겨울 개봉을 예상한 듯이. (웃음) 원래 광복절 개봉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웃음) 촬영 때 계속 눈이 내리니까 하늘이 우리에게 눈을 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주어진 것을 이용해서 찍자고 하게 됐다. 제설 작업을 해서 전투 신을 찍었는데 우리나라 국토가 너무 아름다웠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은 국권, 주권, 자유뿐만 아니라 땅덩어리를 빼앗긴 것이다. 그 땅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나무도 꽃도 곤충도 동물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유린당했다고 상상하니 통쾌하게 찍어서는 안되겠더라. 처음으로 독립군이 이기는 전투였는데도 처절하게 비극적으로 찍었다. - 몽골과 라트비아에서 촬영했다. 영화를 찍기에 어떤 장점이 있는 곳인가. 원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하얼빈을 배경으로 찍어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가까워서 수백년된 러시아 양식의 건축물이나 도로가 그대로 있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두만강은 몽골 최북쪽의 홉스골에서 찍었다. 그곳의 강의 갈라짐이 우리의 분단된 조국 같았다. - 얼어붙은 두만강부터 눈 덮인 신아산까지 일관된 맥락으로 이어지는 로케이션이었다. 수미상관으로 이어진다. 오프닝의 안중근 장군(현빈)의 뒷모습은 자신 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희생됐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가 갈 길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거사를 성공한 뒤 앞모습은 성공에 심취한 승리의 얼굴이 아닌 그 이후를 걱정하는 표정을 보여준다. 안중근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죽인다고 바로 독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폭력과 폭압은 더욱 거세진다는 것을 예견했다. 때문에 <하얼빈>의 엔딩은 통쾌해서는 안됐다. 그거야말로 역사 왜곡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속 저항하고 싸워야 한다. 하얼빈 의거 이후 36년 뒤에 독립했지만, 물론 미국과 연합군의 승리가 한몫했지만, 100년이 걸리더라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저항하고 싸워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승리의 역사다. - 영화를 끝까지 보니 안중근 장군이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인 포로 모리 다쓰오(박훈)를 풀어줬지만 이 때문에 역습을 당했던 에피소드가 극에서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 같더라. 실제 역사이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다. <안중근 자서전>을 보고 처음 알게 된 얘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우쳤다. 실패한 장군이었고, 온몸으로 지탄받았고, 하얼빈으로 향하는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뇌했을까. 그런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첩보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은 항상 고뇌한다. 그분이 느꼈을 번민과 번뇌와 두려움에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지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국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동지뿐인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하지만 <하얼빈>의 밀정은 <암살>의 염석진(이정재)과 다르다. 염석진이 욕망을 향해 치달아갔다면 <하얼빈>의 밀정은 나약하다. - 안중근, 우덕순(박정민), 최재형(유재명)은 실존인물이지만 허구의 캐릭터도 등장한다. 안중근 장군은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거사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고 싶었고,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가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님은 안중근과 함께 독립군에게 버팀목이 돼주는 역할이었으면 했다. 실제 별명이 페치카(러시아식 벽난로)였을 정도로 따뜻했던 분이라고 한다. 우덕순은 하얼빈 의거 이후 밀정이 됐다, 아니다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지만 아직 팩트로 드러난 부분은 없다. 우직한 산사나이 같은 면모에 초점을 맞추며 극을 살짝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공부인(전여빈)은 강단 있지만 동시에 우아하고 품격 있는 여성 독립군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당시 하얼빈 의거에 여성 독립운동가가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안중근 장군이 총을 쏘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공부인 캐릭터를 통해 크게 조명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장군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는 순간을 부감으로 찍었다. 하얼빈 의거를 다룬 작품을 보면 하얼빈역에서 총을 쏘는 안중근의 얼굴, “코레아 후라!”(에스페란토어로 ‘대한국 만세’란 의미)를 외치는 얼굴, 쓰러져서 피 흘리는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 보통 이렇게 찍는다. 근데 <하얼빈>은 그렇게 찍고 싶지 않았다. 첫발을 쏜 뒤 부감으로 이 신을 찍은 것은 이 순간을 고대했던, 먼저 떠난 동지들의 시점으로 담고 싶어서다. 그래서 현빈 배우에게도 하늘을 향해 동지들이 들을 수 있게끔 크게 외치라고 했다. 안중근 장군이 첫발을 쐈을 때 주변에서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데, 실제로도 그랬다더라. 예상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사람들은 늦게 반응한다. - <내부자들>이나 <남산의 부장들>이 단독 숏이나 대화 신을 많이 찍었다면 이번 작품은 그룹 숏이 많다. 스타 배우의 아우라를 의도적으로 지우면서 촬영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어떤 영웅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서로 의지해나가는 동지에 대한 영화다. 그로부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단독 클로즈업을 가급적 배제하면서 이들이 군상처럼 느껴지게 찍었다. 당시 독립군 사진을 보면 먹을 것도 제대로 된 옷도 없지만 눈빛만은 형형하다. 그런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 그룹 숏을 잘 찍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 같던가. 이것저것 맞춰야 할 게 많다. 요즘엔 컷이 빠르게 바뀌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한컷 안에, 그리고 관객의 집중도가 흐트러지지 않게 담아내야 해서 그런 점이 어려웠다. 앵글을 바꾸고 다른 컷을 찍는 게 불가능하다 보니 엔지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했다. -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뀐 이후엔 가능한 한 다양한 컷을 찍은 후 편집실에서 잘 이어 붙이자는 식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지금 대세가 그렇다. 하지만 <하얼빈>은 지금 찍지 않는 방식으로 클래식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독립운동가들의 군상이 하나의 명화처럼 보이게 찍히길 바랐다. 요즘엔 카메라를 3대씩 돌리는데 우리는 폭파 신을 제외하면 모두 아리 알렉사 65 한대로만 찍었다. 원래 컷을 빠르게 붙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관객이 견디고 버티면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빠른 컷 전환으로 보여주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관객들, 특히 컷 전환이 빠르고 쇼츠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 릴리 프랭키가 이토 히로부미 역 캐스팅에 응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다. 일본 배우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하나도 개의치 않고 응했다.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시나리오를 줬는데 선뜻 하겠다고 하더라. <내부자들> <마약왕> <남산의 부장들>을 재미있게 봤단다. 보통 일본에서 소시민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일본 감독도 아닌 한국 감독이 자신에게 이토 히로부미 역을 제안하니 호기심도 생겼던 것 같다. 배우를 직접 만나보면 소년 같은 느낌이 있다. 뉴진스는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하며 묻더라. 잘 모른다고 말했다. (웃음) 원래 블랙핑크 지수의 ‘빅팬’이라고도 하고 귀여운 면이 있으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에게 근현대사를 이끈 인물 중 하나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일본인만큼 잘 알 수는 없다. 이토 히로부미 캐릭터는 상당 부분 릴리 프랭키에게 맡겼다. - 안중근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가 캐스팅과 조합이 신선했다. <내부자들> 때 함께한 조우진을 제외하면 그동안 같이 작업한 적 없는 배우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걱정 아닌 걱정도 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새로운 배우들과 함께하는 게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안중근의 나이가 만 30살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은 20, 30대가 주축이 돼 이끌었다. - 안중근은 지금 1994년생과 동갑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그런 거사를 치르셨다니 참 놀랍고 고맙고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보니 요즘 20, 30대도 엄청나더라. 계엄 해제가 됐는데도 밤새 국회를 지키며 계엄군을 온몸으로 막아낸 청년들이 있었다. 영화의 힘을 느낀다. <서울의 봄>을 젊은 사람들이 많이 봤다던데 그래서 비상계엄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다시 반복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젊은 세대에게 고맙고 또 미안하다.

어둠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얼빈> 홍경표 촬영감독의 포토 코멘터리

민족의 억압과 핍박, 부자유로 점철된 1908년, 일제강점기. 사계절 내내 겨울 같았던 엄혹한 시절을 생생히 담기 위해 홍경표 촬영감독은 카메라 아리 알렉사 65(ARRI ALEXA 65)를 들어올렸다. 광활한 아이맥스 스크린에 펼쳐지는 독립운동은 음울하고 서글픈 시대상과 결연한 독립투사의 전의가 뒤섞여 처연하게 그려진다. 꽁꽁 얼다 못해 부서질 것만 같은 두만강 오프닝 시퀀스부터 역사가 기억하는 절규 섞인 처단의 장면까지 홍경표 촬영감독이 목격하고 기록한 이미지를 함께 나누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장면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수한 인파 속에서 안중근의 활약을 따라가는 동시에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등 다른 인물까지 한꺼번에 잡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 장면을 위해 홍경표 촬영감독은 한대의 카메라만 쓸 것을 선택했다. “한칸 한칸 앞으로 나아가면서 촬영했다. 패닝 기법을 쓰면서 카메라 자체는 많이 안 움직였다. 다소 옛날에 사용하던 촬영 방식이다. 물론 인물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찍어봤다. 그런데 <하얼빈>의 분위기와 착 붙지 않더라. 이 작품은 스타일리시한 액션보다 분골쇄신하는 백병전을 그려내는 게 중요했다. 새벽 촬영이라 땅이 엄청 얼어서 하나하나 녹여 진흙 위에서 촬영했다. 차가운 진흙탕물에 몸을 다 적신 조우진 배우의 열연을 잊지 못한다.” “꽁꽁 언 두만강을 홀로 건너는 안중근(현빈)의 모습을 촬영한 곳은 몽골의 홉스골 호수다. 핏줄처럼 얼음 줄기가 곳곳으로 뻗은 이 장면에는 시각효과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시나리오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눈 덮인 산속을 방황하는 장면이었는데, 촬영 답사를 한 스태프가 호수를 찍어온 것을 보고 놀라 우민호 감독과 함께 장면을 수정했다. 호수 위로 발자국이 찍히면 안되니까 오직 배우만이 그 안에 들어가 두 시간여를 걸어다녔다. 현빈씨가 정말 고생이 많았다. 이 호수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촬영감독으로서 오랜만에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호수의 아름다운 빛깔, 바람이 일어날 때 드러나는 안중근의 외로움, 대자연 속에서 점처럼 보이는 인간. 이것들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일제의 눈을 피한 어둡고 음습한 공간들. 독립운동을 모의한 논의의 장은 전반적으로 조도가 낮다. 이때 우민호 감독과 홍경표 촬영감독이 떠올린 건 바로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겐 세상 자체가 어두웠을 것이다.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상을 공간으로 구현하기 위해 빛이 저 멀리 있되 작은 틈으로 빛이 넘어오는 방식으로 촬영해보았다. 너무 밝게 찍는 건 영화의 중심 메시지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영화적으로 중요한 단서와 진실이 밝혀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기차 세트가 실제 기차처럼 넘실거리며 움직이길 바랐다. “이 장면은 내가 <설국열차>를 찍지 않았다면 촬영하기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기차와 관련된 모든 것을 <설국열차>로 경험해봤다. (웃음) 강원도에 가면 있는 3~4량짜리 기차로 먼저 테스트를 해봤다. 여기서 미술팀의 힘이 빛을 발했다. 사람들이 기차를 수동으로 굴려서 기차가 꺾일 때의 굴곡과 흔들림이 진짜처럼 보일 정도로 디테일에 신경을 썼다. 살짝 삐끗삐끗하게. 기차를 손으로 직접 굴린 건 손으로 해야만 타이밍을 맞출 수가 있어서다.” 아이맥스 스크린의 최정점을 보여주는 아리 알렉사 65. 이전에 <기생충>으로 해당 카메라를 경험한 홍경표 촬영감독은 <하얼빈>의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이 카메라를 먼저 떠올렸다. “영화 시작 전부터 우민호 감독과 카메라에 대한 논의는 일찌감치 끝냈다. 아리 알렉사가 아니면 안 하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웃음) 아리 알렉사 65는 6.5K로 현존하는 디지털카메라 중 포메이션이 가장 커서 화질이 정말 선명하게 나온다. 사막에서 멀리서 찍은 장면을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보아도 누가 누구의 실루엣인지 알아볼 정도다. 어두운 장면에서도 자신을 숨기는 독립투사들의 미묘한 표정과 감정을 잡아내기에 적합했다.” 몽골 북쪽의 홉스골 호수가 있다면 남쪽에는 고비사막이 있다. 폭탄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넘은 네명의 운동가는 아름다운 일몰을 배경 삼아 거친 여정을 선보인다. “일제강점기의 문학작품을 보면 ‘광야를 달린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독립투사들이 광야를 달리는 이미지를 구현해보고 싶었다. 특히 여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허망함, 허탈함 그러나 다음 희망을 놓칠 수 없는 끈기 같은 게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표현했다. 해질녘 장면을 촬영하는 동안 해가 까무륵 져버릴 수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을 잘 활용하도록 정말 리허설을 많이 했다. 이때 갑자기 바람이 크게 불어 사람들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촬영에 들어가니 바람이 멎었다. 말을 끌고 산을 넘고 사막을 지나가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안중근 의사의 결단과 절규.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코레아 후라”를 외치는 장면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으로 촬영되었다. 왜 <하얼빈>은 이야기의 끄트머리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은 걸까. “우민호 감독과 정말 깊은 고심을 나누었다. 그때 우민호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부감으로 찍어보자고. 이미 많은 작품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격을 여러 번 구현했으니 우리만의 시각으로 완성해보자고 했다. 과감한 선택이었다. 결국엔 “코레아 후라”라는 안중근 의사의 말이 어떻게 물리적으로 퍼져나가는지 상황으로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기획] 윤리, 분열, 그리고 전쟁, <시빌 워: 분열의 시대>로 읽는 앨릭스 갈런드 작가론

<엑스 마키나> <서던 리치: 소멸의 땅> <멘> 등 독특한 비주얼과 공상과학적 상상력으로 만드는 작품마다 평단의 주목을 받은 앨릭스 갈런드가 잠정적인 감독 은퇴를 선언했다. 다시 각본가로 돌아가 다른 감독이 자신의 텍스트를 시각화할 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본래 <28일후…> <선샤인> 등 영화의 각본을 써 이름을 날린 갈런드는 자신이 쓰고 연출한 모든 영화에서 일관된 인장을 새겨왔다. 그의 신작 <시빌 워: 분열의 시대> 또한 흔한 전쟁영화가 아니다. 갈런드만이 건넬 수 있는 질문과 사유가 영화 곳곳에서 산탄하는 갈런드식 전쟁물이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의 개봉을 맞아 앨릭스 갈런드의 세계를 돌아보았다. “제목에 ‘워’ (War)가 들어가는 바람에 기대했단 말이야. 이럴 거였으면 ‘프레스’(Press)라고 제목을 짓든가.” 한 관객이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의 관객 시사회가 끝난 후 상영관을 나서며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아주 틀린 지적은 아니다. 전쟁영화의 들끓는 스펙터클을 기대한 관객에게 영화가 찬물을 끼얹기 때문이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엔 전쟁영화가 으레 제공하는 한쪽 진영에 선 채 주인공의 생환을 간절히 바랄 기회나 전쟁의 배후에 도사린 거대 세력의 음모가 제공되지 않는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전장을 누비는 종군기자의 포토저널리즘을 다루는 전쟁영화다. 종군 사진기자인 리(커스틴 던스트)와 조엘(와그너 모라)은 내전으로 황폐화된 뉴욕을 뒤로하고 백악관이 위치한 워싱턴 DC로 향한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공습으로 내전을 일으킨 대통령(닉 오퍼먼)의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진행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도로 향하는 길은 어딜 가나 폐허다. 워싱턴에 가면 기자는 모두 처형된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지만 이들은 각자가 수호하는 저널리즘을 실현하기 위해 픽업트럭에 몸을 싣고 우회로를 달린다. 두 기자의 여정에는 <뉴욕타임스> 출신의 전설적 기자인 새미(스티븐 매킨리 헨더슨), 그리고 종군 사진기자 지망생이자 리를 역할모델로 생각하는 제시(케일리 스페이니)가 합류한다. 윤리적 화두와 낯설게 하기 영화는 자연히 카메라를 든 사람이 지녀야 할 윤리를 고민하게 한다. 리는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난 곳에서도, 무고한 시민이 총살당하거나 고문당하는 곳에서도, 심지어 동료 기자가 포로로 붙잡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와중에도 ‘프레스’라 적힌 방탄조끼를 입은 채 필름에 참상을 담는다. 리와 동료들의 피사체는 바로 눈앞에서 피 흘리는 전쟁 피해자들이고, 이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자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본 후 바로 건질 만한 사진으로 기록함으로써 궁극의 한 컷을 완성한다. 예컨대 리는 제시에게 “전쟁과 폭력의 의미에 관해 자문하는 순간 끝없는 수렁에 빠질 것”이라며 “오직 기록만이 기자의 일”이라고 강변한다. 제시는 선배 기자들과 함께 숱한 죽음을 목격하고 그 자신마저 죽음 직전까지 다녀온 후 “평생 이토록 두려운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고 느낀 적 또한 없었다”며 약간은 환희에 찬 어조로 고백한다. 비극을 직시하지만 그 의미는 외면하는 자들. 비극의 지척에서 무감하고 초연해야 비로소 직업적으로 성장했다고 평가받는 자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 네명의 종군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건넬 수밖에 없다. 비극의 순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일은 도덕적으로 온당한가. 타인의 비극을 목적화하고 수단화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올바른가.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지 않고 쓸 만한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을 솎아내는 일에만 가치판단을 내리는 일은 언론 윤리에 부합하는가. 폭력을 매체화하는 개인은 직업적 소명과 별개로 불구화된 인간성을 지닌 사람인가.앨릭스 갈런드는 지금껏 윤리적 딜레마를 내러티브에 수반한 장르영화를 만들어왔다. 갈런드의 연출 데뷔작 <엑스 마키나>는 인간 칼렙(도널 글리슨)과 인공지능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의 튜링 테스트를 경유해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인간다움을 대체할 수 있는지 질문했고, 인간적 정체성과 인공지능 정체성의 경계를 탐구했다. 또 인공지능 시대의 주요한 이슈인 정보·기술의 권력화 문제와 여기서 파생하는 공정성, 개인정보 침해 등의 당면 과제를 점검했다. 정보 윤리에 관한 갈런드의 질문은 결정론과 양자역학의 논리하에 개인정보의 조합이 과거 그리고 미래의 시뮬레이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브스> 속 팀 데브스의 핵심 연구로 이어졌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은 인간이 자연에 무분별하게 교배, 변형을 시도하며 환경을 착취하듯 자연 역시 생태계를 교란해 인간을 위협하고 끝내 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호러영화의 문법으로 구현해냈다. 절멸을 앞둔 인간 탐구는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이전에 갈런드가 각본가로서 대니 보일과 함께 작업한 좀비 아포칼립스물 <28일후…>, 우주 재난물 <선샤인>으로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네버 렛 미 고>에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 그대로 생명공학과 생명윤리 사이에 첨예하게 상충하는 논리를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위해 제작된 세 복제인간의 사랑과 우정으로 풀어냈다. 정작 앨릭스 갈런드는 자신이 던지는 화두 앞에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영화의 태도가 모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진의 퀄리티를 제외하고 유혈사태에는 질적 판단을 가하지 않으려는 리의 태도처럼, 갈런드의 영화는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되 이를 체화하는 주인공의 심리에 이입할 여지를 원천 차단하며 메시지와 스토리 사이에 한뼘의 거리를 둔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청각 자극을 맥락과 무관하게 활용한다. 경찰이 폭력을 동원해 시위 현장을 진압할 때 영화는 난데없는 로큰롤 사운드트랙을 깔고 기자들이 트럭에 올라 참사 현장을 취재할 땐 디스코 리듬의 힙합 음악을 재생하며 요상한 박진감까지 만들어낸다. 총격과 산불이 이어져 자연이 훼손되는 장면엔 목가적인 컨트리음악이 흐른다. 이토록 소리로 충만한 영화는 믿음직한 동료가 참변을 당해 기자들이 오열하며 비명을 지르자 대사를 포함해 사운드 전체를 음소거한다. 시각과 청각 사이에 이격을 둠으로써 장면 전체를 낯설게 만드는 갈런드 특유의 데페이즈망(이상한 환경에 인물이나 사물을 배치해 충격을 주는 초현실주의 기법.-편집자)식 연출은 그의 다른 작품에도서 드러난다. <데브스>의 기업 사옥 한가운데 뜬금없이 서 있는 거대한 소녀상이나 <멘> 속 로리 키니어가 한적한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비주얼로 수없이 탈바꿈하며 선보이는 보디 호러가 한축에 있고, <멘> 속 굴다리를 지나 기괴한 음향으로 반영돼 돌아오는 하퍼(제시 버클리)의 노래, <서던 리치: 소멸의 땅>에서 죽은 자의 목소리로 사람을 유인해 위해를 가하는 괴수, <엑스 마키나>의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이 즐기는 디스코음악이 다른 축에 있다. 갈런드는 윤리적 화두의 충돌과 낯선 요소의 중첩이 관객에게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올해 초 내셔널 퍼블릭 라디오의 인기 방송 <모닝 에디션>에 출연한 갈런드는 “영화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 바는 언제나 있지만 그 주장을 관객들이 관심없어 하거나 수용하고 싶지 않아 한다면 그래도 된다고 믿는 편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아도 좋다”는 연출론을 밝혔다.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보다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정리하며 <시빌 워: 분열의 시대>를 둘러싼 정파적 논쟁을 일축했다. 훼손과 분열의 비주얼리스트 앞서 언급한 대로 앨릭스 갈런드는 독창적인 비주얼리스트다. 몇해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소설가와 각본가를 거쳐 영화감독이 된 만큼 특별한 비주얼을 중요시한다”고 고백한 만큼 갈런드의 영화를 보고 나면 미장센 하나는 어떻게든 관객 마음속에 남기 마련이다. 갈런드는 특히 신체 훼손으로 시각적 충격을 전달하는 데 능하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참혹한 내전의 실상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보니 당연히 무기와 피를 동반한 테러 묘사가 서슴없이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갈런드의 예술적 참신성이다. 팝아트풍 그라피티나 크리스마스 마켓의 풍경 아래 벌어지는 고문과 살상, 피카소의 <시체 구덩이>를 연상시키는 구덩이 속 시체들이 뒤엉켜 있는 숏 등은 폭력이 일상화된 삶에서 얼마나 잔혹한 일이 대수롭지 않게 자행될 수 있는지를 응시한다. 갈런드는 거의 악취미적으로 잔인하고 기괴한 미장센을 영화마다 개발해내고 이왕 만든 김에 자신이 창조한 숏을 별거 아니라는 듯 뉴스 화면처럼 골똘히 응시하는 악취미가 있다. 살점을 도려내는 장면을 찍는 데엔 데뷔 초부터 도가 텄다. <엑스 마키나>에서 인공지능들이 마치 식빵을 소분하듯 피부를 떼어내는 숏이나 <서던 리치: 소멸의 땅> 속 뱃가죽을 절개한 후 우글거리는 내장을 가만히 쳐다보는 숏, <멘>의 나체의 남성이 또 다른 남성을 줄줄이 출산하는 장면 등은 종래에 여성 캐릭터들에게 모종의 해방감을 선사하기까지 한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와 쿠엔틴 타란티노에 이어 물밀듯 쏟아지는 폭력의 묘사가 어떻게 정화의 미학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논의해봄직하다. 앨릭스 갈런드가 여러 작품을 통해 줄곧 그리고 쓰는 형상은 분열이다. 이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참고로 작품의 영어 원제에는 부제에 붙은 ‘분열’이 없다)에 드러나는 미국 정치와 언론을 위시한 세계의 극단적 양극화, <멘> 속 보통의 남성성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신체적, 사회적 공포, <엑스 마키나>에서 칼렙과 네이든 사이에 서서히 금을 긋는 인공지능 에이바의 심리적 조종 등으로 종합할 수 있다. 반면 분열은 글자 그대로 갈런드의 이야기에 생물학적 영감을 주기도 한다. <네버 렛 미 고>의 복제인간, 세포의 분열과 증식으로 새로운 삶과 죽음이 탄생한다는 리처드 도킨스식 개념을 전제로 이야기를 써내려간 <서던 리치: 소멸의 땅>, 분자의 분열이 다중우주를 낳고 이를 통해 양자적 미래를 잉태할 수 있다는 <데브스>의 세계관이 그러하다. 리 밀러와 커스틴 던스트의 눈빛 작중 대사에도 드러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그> 소속의 종군기자로 활동한 리 밀러와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속 리 스미스의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이 아니다. 직접 히틀러의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는 리 밀러의 유명한 사진을 오마주한 리 스미스의 숏 역시 영화 초반에 제시된다. 한편 앨릭스 갈런드 영화의 시그니처인 고뇌하는 인간의 눈 클로즈업숏 또한 <시빌 워: 분열의 시대>에 등장한다. 그간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의 내털리 포트먼, <멘>의 제시 버클리, 심지어 갈런드가 각본으로만 참여한 <선샤인> 속 킬리언 머피도 무방비의 공포 앞에 흔들리는 인간의 눈빛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전적이 있다.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속 커스틴 던스트는 조금 다르다. 그가 연기한 리 스미스는 눈으로 동요하는 법이 없다. 산적한 시체를 뒤적일 때도 리는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 직장인처럼 무심하게 시선을 내리꽂는다. 약간의 권태와 무기력마저 스치는 커스틴 던스트의 눈빛은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에서 케이트 윈슬럿이 보여준 투박한 표정을 떠올리게 하는데, 마침 케이트 윈슬럿은 올해 공개된 리 밀러의 전기영화 <리>에서 주연과 제작을 맡았다.

우리 모두의 기억이 되어, <러브레터>에 부치는 4가지 답신

<러브레터>의 대중문화사적 의미 1990년대 일본 멜로드라마, 추억 속의 사랑 이야기, 이와이 슌지 스타일, 오타루를 꿈꾸게 하는 영화. 어떤 의미로든 <러브레터>는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상징적으로 통용되는 <러브레터>에 관해 구전되는 전설은 이러하다. 극장에 개봉하거나 정식 비디오로 출시도 안된 영화를 모두가 알고, 봤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러브레터>를 모르는 이들에게조차 명대사 “오겡키데스카?”만큼은 남게 되었다는 것. <러브레터>의 감수성이 전파되는 과정은 일반적인 외화의 흥행 양상과 다른 지점이 많다. 1995년 제작된 <러브레터>는 1999년 11월 한국에 정식 개봉했다. 1998년 CGV강변, 2000년 코엑스 메가박스가 막 문을 열면서 국내에 멀티플렉스 극장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무렵이다. 2003년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도입 이전에 대형 극장 위주로 서울 관객만을 겨우 집계하던 때, <러브레터>는 약 115만명의 서울 관객을 기록했다. 1998년 2월 개봉한 <타이타닉>이 197만명 관객을 기록했으니 그 화력을 짐작해보게 되는 지점이다. 게다가 <러브레터>는 1998년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 약 30만개로 추산되는 불법 비디오들이 유통되며 대학가를 중심으로 릴레이 상영회가 이어지는 등 정식 개봉 전에 이미 ‘볼 만큼 봤다’는 업계의 평가 속에서 공개된 경우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1995년 당시 일본 흥행에 성공하고 <키네마준보>를 비롯한 평단이 이와이 슌지의 도약에 호평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러브레터>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욱 아이코닉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엔 금기시된 일본영화에서 당대의 정서를 발견한 X세대의 결집과 IMF 외환위기 전후의 사회 분위기, 영화가 대중문화의 최전선에서 대체 불가능한 역량을 차지하던 시대의 특정한 조건들이 얽혀 있다. 오늘날 <러브레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한편의 흥행작이라기보다 특정한 시기의 문화적 현상을 응축한 기억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다. 관성적 재개봉을 벗어난다는 것 굳건한 지지에 힘입어 <러브레터>는 2013년 밸런타인데이를 시작으로 지금껏 8차례나 재개봉했다. 2016년 리마스터링 재개봉에선 전국 관객 약 7만5천명을 기록해, 2017년 정재은 감독의 <나비잠>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감사 인사를 전할 정도였다. 달리 말하면 재개봉의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다. 왜, 또다시? 워터홀컴퍼니는 그동안 <위플래쉬> <가을의 전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소셜 네트워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의 영화를 재개봉으로 수입 또는 배급한 이력을 지닌 회사다. 탄생 30주년을 앞두고 새롭게 판권을 가져온 수입사 왓챠가 워터홀컴퍼니에 배급을 제안하고 메가박스가 개봉 파트너로 합류하면서 협력이 성사됐다. 지난해부터 더욱 부각된 재개봉 트렌드 속에서 워터홀컴퍼니의 주현 대표는 “이번 <러브레터> 30주년 에디션 극장 상영본(DCP)이 지금까지의 상영본과 다른 버전”임을 강조한다. 우선 세로 자막을 복원했다. “관람의 형태부터 처음 영화가 관객들에게 도착했던 그 시기와 가까운 느낌을 전한다”는 취지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초래할 것을 알았지만 이 형태의 시도가 우리에게는 중요한 목표였다. 왜 다시 이 영화를 개봉하는지, 아직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로 두었던 부분이다.” ‘30주년 에디션’으로 재명명해 영상물등급심의를 다시 받고, 이츠키가 조난사한 설산을 향해 소리치는 히로코의 뒷모습을 담은 이미지로 디자인된 리더필름(상영 전 배급사 마크와 함께 송출된다)도 제작했다. 어려운 시장 환경 속에서 재개봉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만 주현 대표는 “관성적 재개봉이 아니라, 산업의 변곡점에서 차별성과 생산성을 담아 작품을 선보이는 배급사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랐다”고 밝혔다. 달라진 자막과 각자의 해석 미망에서 깨어나 사랑과 대면하는 모든 서사는 아름답다. <러브레터>의 마지막 장면은 불어오는 바람까지도 완벽히 조응해 뒤늦은 첫사랑의 자각을 한 장면의 이미지로 남겨둔다.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카드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이때, 사실상 그동안 영화를 견인하던 두 여성의 서신 교환은 이미 종결된 상태다. 그러나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보이스오버의 영화적 확장력을 적소에 도입한 이와이 슌지는 이츠키의 목소리로 실은 그가 한장의 편지를 더 쓰고 있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이츠키가 도서카드를 숨겨보려고 주머니 없는 옷의 이곳저곳을 눈물 차오른 얼굴로 헤집는 순간에 결정적 대사가 흘러나온다.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다수의 국내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대로, 외화 번역의 유명한 오역 사례 중 하나다. 30주년 에디션 이전까지는 여러 차례의 재개봉 과정에서 꾸준히 “가슴이 아파서”로 번역되었지만 이번에는 “역시 부끄러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로 바뀌었다. 원문에 충실한 내용으로 자막을 보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다. 그러나 기존의 번역본으로 이입한 관객이 많았던 탓에 워터홀컴퍼니는 “기존의 자막이 오히려 더 주인공의 감정이 느껴진다거나 가슴 아픈 멜로의 결말로 느껴진다는 상당수의 반응을”(주현) 고려해야 했다. “조금 가슴이 덜 아픈 번역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의 관점에서 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는 부분이기에 결과적으로 번역을 수정했다.” 하나의 원본에 다른 번역과 여러 해석이 중첩되는 과정 또한 영화 관객에게 허락된 또 하나의 문화임을 <러브레터>는 잘 알려준다. 기존의 오역이 엇갈린 시간의 애수와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상실감, 나아가 와타나베 히로코를 배려하는 후지이 이츠키의 감정을 비춘다면, 바로잡은 번역은 긴 시간을 통과하고도 여전한 모습으로도 당도한 첫사랑의 설렘과 환희를 엿보게 한다. 나카야마 미호, 기억의 설원에 잠들다 홋카이도의 설원, 레메디오스의 음악, 그리고 나카야마 미호. <러브레터>를 각인시키는 힘 한가운데 25살의 나카야마 미호가 있었다. 그가 지난해 12월6일, 54살로 기억의 공간에 영원히 잠들었다. 1985년 아이돌로 먼저 데뷔한 후 드라마에서 활약했던 나카야마 미호에게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깨고 연기 스펙트럼을 인정받게 해준 작품이다. 밴드 완즈(WANDS)와 함께 부른 노래 <세상 누구보다 분명>(世界中の誰よりきっと, 국내에서는 <사랑의 바보>로 리메이크됐다)이 180만장의 판매고와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가수로서는 최정상급에 올랐지만 배우로서는 이렇다 할 대표작을 만들지 못한 시점이었다. <후지TV> 단막극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1993)로 좋은 평가를 받은 후 영화감독으로서 초석을 다질 필요성을 느낀 쪽은 이와이 슌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이와이 슌지 감독이 만들고 싶어 했던 작품은, 지금봐도 꽤나 컬트적인 대작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였고 제작이 쉽지 않은 건 당연했다. <러브레터>는 투자자와 방송국에 우선 연출적 역량을 선보이는 관문을 거쳐야 했던 이와이 슌지가 당대 최고의 스타인 나카야마 미호의 엄호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기회였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결합은 성공적이었다. 상실의 아픔을 간직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도시 여성 와타나베 히로코와 다소 엉뚱하고 명랑한 오타루 지역 도서관의 사서 후지이 이츠키. 비슷한 생김새에 헤어스타일까지 같지만 전혀 다른 성격과 인생을 살아온 두 여성을 소화한 것은 배우, 아이돌, 그리고 곧 아이콘이었던 나카야마 미호의 페르소나적 역량이다. 다수의 우려를 샀던 1인2역 컨셉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증명으로서, <러브레터>에서 손꼽히는 두개의 명장면을 히로코-이츠키가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있음을 짚을 필요가 있다. 순백의 설원에서 “잘 지내시나요?”를 거듭 외치다 자신의 상실과 대면하고 마는 히로코의 처연한 슬픔은, 감기가 끝날 무렵에 그제야 첫사랑을 깨닫고 슬며시 미소 짓는 이츠키의 애달픔으로 화답받는다. 두 편지의 송신인은 모두 나카야마 미호. 세기말에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향한 거대한 그리움의 송가를 띄웠던 일본 문화의 정점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배우이다. 대중문화사에서 회자되는 어떤 명장면들은 때로 그 순간만으로 충분하다. 한 장면에 각인된 얼굴과 정서 위로 관객은 자신의 기억을 편집해 다음 순간을 이어간다. 청춘의 정점에서 자신의 대표작을 갈망했던 나카야마 미호의 바람은 매우 선명히 성취되었고, <러브레터>는 이제 그의 부재에 띄우는 모두의 편지가 된다.

[인터뷰] “미니멀한 연기 통해 공포 살렸다”, <하얼빈> 배우 박훈

2024년 3월 배우 박훈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다. 홍콩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필름어워즈(AFA)에서 <서울의 봄>의 문일평 역으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것이다. 첫 연기상 트로피를 어디에 두었냐고 묻자 박훈은 “전시할 성격이 못 된다며 어디 안 보이는 곳에 잘 보관했다”라고 말했다. 이 일화가 증명하듯 박훈은 2015년 <오 나의 귀신님>으로 매체 데뷔 뒤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바라지 않고 내 기준에 맞춰 충실하게 연기”해왔다. 배우 자신도 인정한 선 굵은 마스크와 오랜 연극과 뮤지컬 생활로 다져진 또렷한 목소리를 가져 선역이든 악역이든 신념 있는 역할에 주로 소환되었다. 지난해 12월24일 개봉한 <하얼빈>에선 이견 없는 악당, 일본군 모리 다쓰오로 분했다. 2025년으로 건너가기 직전, 박훈을 직접 만나 다쓰오가 등장한 장면 하나하나에 관해 물었다. 진지하게 답을 내놓는 그의 눈빛은 <하얼빈> 속 동지들처럼 뜨겁게 빛났다. - 실물이 궁금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아무도 모른다>, 영화 <공조2: 인터내셔날> <서울의 봄> 등 대표 출연작들을 쭉 놓고 보는데 헤어스타일과 체격이 모두 달라서 실제 모습을 잘 모르겠더라. 외형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배우라고 짐작했다. 알아주시니 기분 좋고 고맙다. 고착된 이미지가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역할마다 변주를 준다. 그래서 매번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렀다가 잘랐다가, 살을 찌웠다가 뺐다가 한다. 캐릭터가 입는 의상도 스타일리스트와 충분히 상의한다. “박훈이다!” 하고 즉각 알아보는 대중이 없어도 좋다. 배우는 자신이 아닌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여주는 사람이니까. 체중 조절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힘든데 주어진 시간까지 얼마 없으면 정말 고되다. 그렇다고 타협할라치면 스트레스받는다. 원래 뭐든 잘 인정하고 완벽주의자는 더더욱 아닌데 일할 때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 <하얼빈>에서는 삭발한 게 주목을 받았다. 삭발했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칭찬을 받고 있는데 창피하다. 그건 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가 맡은 역할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삭발은 다쓰오가 제국주의에 심취한 인물이라는 걸 시각적으로 증명할 일종의 도구였다. 갈수록 더 집착하게 됐다는 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중반 이후 촬영 때 밀었다. 전체적으로 다쓰오는 전형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이야기에서 일본 군인이 어떻게 전형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배우들은 어떤 역할이든 그 안의 입체성을 발견하려고 하는데 다쓰오는 그런 유형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냥 악당이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고 전쟁광인 거다. 그런 식의 접근이 우민호 감독님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 우민호 감독이 직접 전화해 콕 집어 모리 다쓰오 역을 제안했다고. 통편집됐지만 <남산의 부장들>로 감독님과 연을 맺었다. 그 뒤로 3~4년 뒤 <서울의 봄>을 찍고 있을 때 전화를 주셨다. 작품과 캐릭터 설명을 잠시 듣고 나중에 대본을 읽는데 다쓰오가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인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해석으로 <하얼빈>의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는 일본의 정신이고 다쓰오는 그걸 실제 행하는 어떤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합친 게 바로 당시의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이런 생각을 전제로 연기했다. - 다쓰오가 첫 등장하는 신아산 전투 신의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눈과 진흙을 뒤집어쓴 상황에서 배우들의 추위로 새빨개진 귀와 하얀 입김이 눈에 들어오더라. 얼마나 혹독한 현장이었나. 실내 세트 촬영이었던 <노량: 죽음의 바다> <서울의 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다. 스태프, 배우 할 것 없이 정말 고됐지만 어떻게 보면 참 행운이 따른 현장이었다. 그날 광주에 몇십년 만에 폭설이 내려서 리얼한 촬영이 가능했으니까. 눈 때문에 세트가 무너졌는데 그게 그대로 너무 현실감이 넘쳤다. 전투 시작 전 안중근과 동지들이 언덕 밑에서 얘기를 할 때 확 불던 눈바람도 강풍기를 쓴 게 아니라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무척 추워서 모두가 대사를 힘겹게 잇고 사방이 흙탕인지라 액션도 탁탁탁 맞춰서 못했는데 그게 전쟁의 실감을 만들어냈다. 원래 신아산 신은 밤 신이었는데 그 펄밭 같은 난장을 살리기 위해 낮 신으로 바뀌었다. - 거사 3일 전, 러시아 대동공보사에서 다쓰오 일당은 안중근과 동지들을 습격한다. 혼자 총을 든 채 공부인과 안중근이 탄 마차를 쫓던 다쓰오의 모습이 영화에 인상적으로 담겼다. 라트비아에서 이 신을 찍을 땐 어땠나. 라트비아의 시가지를 막아놓고 찍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던 기억이 난다. 달리다가 도중에 자빠져야 해서 아대를 찼어야 했는데 내가 그냥 가자고 했다. 그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한번밖에 없는 기회에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넘어졌을 때 아프지도 않았다. - 여기서 다쓰오는 이창섭(이동욱)을 잡는 데 성공한다. 이창섭에게서 “안중근은 네 놈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고결한 인간”이라고 비교당하고 “바보 새끼”란 말까지 듣고 나서야 마지막에 방아쇠를 당기는 결정을 내린다. 우선 이 신을 찍을 때 이동욱씨의 새로운 얼굴을 보고 놀란 나머지 엔지를 냈다. (웃음) 상대가 말을 하는 와중에 총을 쏴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기 방식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상업적인 접근을 철저히 배제하고 싶었다. 이 신에서는 이창섭의 말을 대충 들으려고 했다. 조선말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서 다쓰오가 조선인을 하등하게 보는 태도가 드러나니까. 대신 이창섭의 호흡에 집중했다. 숨소리를 통해서도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창섭의 말을 듣는 동안 다쓰오는 그가 고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거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끝을 본 거고. - 김상현(조우진)과의 일대일 식사 신에선 모멸감을 느꼈다. 마치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이 김상현의 접시에 스테이크를 올려놓더라. 그가 조선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장면에서 내가 미니멀한 연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정적인 공포가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스테이크를 썰 때, 그리고 그걸 내던질 때 움직임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했다. 방독면을 쓴 채 김상현을 고문하는 앞선 장면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김상현과 손이 살짝 닿는데 호들갑 떠는 기색 없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싹 뺐다. - 채가구역에서 우덕순(박정민)을 쏘고 김상현을 구타하는 신은 좁은 공간에서 찍어서인지 압박감이 상당했다. 실제로 공간이 굉장히 좁아서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 좁은 데서도 가능한 각을 만들어내는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신은 우덕순과 김상현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로 형성된 따뜻한 분위기가 다쓰오의 등장으로 긴장감 있게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임했다. 여기서 박정민 배우를 칭찬하고 싶다. 박정민 배우는 좋은 변수 같은 친구다. 컷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가도 괜찮으세요?”라고 물을 때마다 “너무 좋지, 정민아!”라고 응수했다. 그의 달라지는 연기에 따라 나도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 - 하얼빈역에서 다쓰오가 공부인의 칼에 찔려 죽은 줄 알았다. 내가 너무 세게 맞았나. (웃음) 이 신을 찍을 때 내가 (전)여빈이에게 이 신은 공부인이 다쓰오를 공격하는 장면이 아닌 막아서는 장면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부인, 이창섭, 우덕순으로 대표되는 동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막아선 덕분에 안중근이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게 보였으면 했다. 그랬을 때 <하얼빈>이 감독님이 말한 안중근과 그 동지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 다쓰오의 마지막 신을 찍을 땐 어땠나. 그 신 역시 김상현이 결자해지하는 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그 신을 찍을 때 다쓰오의 죽음보다 김상현의 행동, 그의 다음 스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한 가지 에피소드라면 여기서 다쓰오가 “김구는 어디 있나?”라고 묻는데, 예전에 <녹두꽃>이라는 드라마에서 김구 역할을 했던 게 떠올라 재밌었다. - 배우 박훈에 관해 질문하고 싶다. 배우가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탄광촌에서 TV를 보던 어릴 적 이야기가 꼭 나오더라. 극장이 없는 시골에서 자랐다. 그때 유행하던 할리우드영화, 홍콩영화를 비디오로 주야장천 봤다. 20살이 넘어서야 극장에 처음 갔고 그때 본 영화가 <쉬리>였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놀랐지만 압도적으로 큰 화면과 너도나도 “끝내주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우르르 나오는 관객들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저 화면에 나와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사실 영화배우에 대한 꿈은 10대 때부터 있었다. 다만 방법을 몰랐고 재수는 하지 말라는 부모님의 뜻에 맞춰 뮤지컬학과를 갔다. 그 뒤로 다른 배우들처럼 대학로 연극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드라마 출연 제안이 들어올 때면 감사한 마음으로 응했다. 그런데 드라마 스케줄이 많아지니 정작 영화를 못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이러다가는 평생 영화를 제대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악물고 4~5년은 영화에만 전념하자고 결심하고 계속하다 보니 <서울의 봄> 같은 메가 히트작도 만나고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보아도 근사할 <하얼빈> 같은 작품에도 출연했다. 언젠가는 영화배우가 될 때가 올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때가 온 것이다. -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던 “낙관주의자가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마지막 답변이다. 희망이 없으면 어떻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내세울 게 전혀 없는 내겐 그거라도 있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낙관주의는 내게 위로였다. 잘될 거고 좋아질 거라고 자신에게 말해주면서 나를 보호해왔다. 연극할 때부터 그랬다. 무대를 나가는 마지막 커튼을 열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주문을 걸곤 했다. 이제 나를 보호하는 또 다른 방법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고 그다음엔 나를 놔주는 거다. 작품의 성패가 곧 나의 성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배우로서 오래갈 수 있다. “안중근은 어디 있나?” “<하얼빈>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관객들이 이 말을 계속 들으면서 실수하고 실패하면서도 대의를 향해 걸어갔던 안중근에 대해 생각해주길 바랐다. 좀더 나아가서는 이 질문이 잊고 살았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가진 안중근의 정신, 그러니까 작은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를 끄집어내는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대사도 ‘안중근은 어디 있나?’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었다.”

[인터뷰] ‘온갖 삶이 사회복지관에서 만난다’, <부모 바보> 이종수 감독

영화 <인서트>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에서 크리틱b상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새로운시선상을 수상한 이종수 감독은 부산영화제가 2023년부터 주목해온 신인이다. 장편 데뷔작 <부모 바보>로 처음 부산영화제를 찾은 그의 손엔 당시 KB 뉴 커런츠 관객상이 쥐어졌다. 부산에서 연이어 조명된 이종수 감독의 특징은 독특한 형식적 실험을 취하는 창작자라는 것이다. <부모 바보>에서는 사회복무요원 영진(안은수)과 그를 관리하는 사회복지사 진현(윤혁진), 자식과 불화를 겪는 순례(나호숙)을 중심으로 그러한 연출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세 인물은 복지관에서 자주 마주치면서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를 형성해간다. 쌓여가는 시간의 굴레를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각도로 포착하며 영화는 전에 없던 감흥과 인상을 축적한다. 반복과 변주 속에서 익숙한 서사는 새로운 인상을 입고, 그렇게 <부모 바보>는 자신만의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 자전적 경험을 반영해 <부모 바보>를 완성했다. 실제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고 살면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느낀 인상들이 이야기로 쌓였다. 이전에는 음악,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그 이야기들을 풀어냈는데 확실한 배출구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영화를 찍게 됐다. - 영화를 찍고 나니 이야기가 더 잘 표출이 됐다고 느끼나. 그렇다. 영화를 통해서 직면한 문제에 관해선 더이상 징징대지 않게 된달까. 확실히 풀리는 기분이 든다. - 그런데 영화에선 인물이나 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취한다. 사람들이 우연히 포착된 느낌이길 바랐다. CCTV처럼 고정된 카메라에 해당 인물들의 행위가 그저 잡힌 것일 뿐 어떤 컷에서 어떤 크기로 보여줘야 하는지를 너무 신경 쓰지 않는 선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 같은 장소를 비슷한 각도에서 반복해 보여주는 것도 같은 의도에서인가. 그렇다. 그리고 영화를 배울 때 하지 말라는 것들을 오히려 하고 싶었다. 플래시백을 쓰는 건 촌스러운 것이고 인물의 감정을 카메라가 잘 담아내야 한다는 시나리오 작법들 같은 것 말이다. <부모 바보>에는 불행한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사연을 가까이서 면밀하게 담아내는 건 너무 그들을 이용하는 느낌이라 어느 것에도 깊게 관여하지 않는 태도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멀리 두고 최대한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에 관해 아는 척하지 말자고 촬영감독과 의견을 나눴다. - 비디오 작업 때의 태도가 반영된 부분도 있나. 내가 하던 비디오 작업들도 카메라를 한대 고정시켜두고 상대의 퍼포먼스를 관찰하는 형식이었다. 실제로 이 방식이 <부모 바보>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인물을 조금씩 다른 각도, 다른 크기로 찍으면 그때부터 상황이 설명되고 그게 영화가 되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었다. 변주가 생기더라도 우연히 포착된, 의도되지 않은 느낌은 최대한 가져가고 싶었다. - 영진, 진현, 순례에 관해서도 묻고 싶다. 이들은 부모에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거나, 부모에게 속았다고 느끼거나,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자식에게 외면받는 이들이다. 영화의 제목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보이는데 그런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가 있다면. 지금 와서 보면 유치한 면도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아침드라마식의 키치한 포맷을 좋아한다. 사회복무요원 시절에 복지관에서 근무했는데 동료들 중에 영진처럼 상황이 어려운 친구도 있었고, 순례같이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어머니들도 계셨다. 어머니들은 지나치게 거리감을 좁혀 다가오는 경향이 있고 사회복지사들은 내적으론 친밀함을 느껴도 업무적으론 서로 일정 거리를 둬야 했다. 그들 사이에 있으니 관계에 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됐다. 어릴 땐 친해지면 마냥 좋지만 어른이 되고 잃을 게 생기면서 타인과의 거리가 잘 좁혀지지 않는다. 가까워지더라도 정말 친밀해진 건지 단순히 시간을 많이 보내서 그런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진현과 영진 사이에도 그런 게 존재할 거라 생각했다. 사회복지관이 그런 사연들이 만나는 곳이더라. - 영진은 언제 출근할지 예측이 불가한 캐릭터지만 캠코더에 기록된 일상 영상을 보며 꽤나 성실한 면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군대에 가면 사회에서 일상처럼 해오던 일을 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생긴다. 그래서 오히려 뭘 더 많이 하게 되는데, 나도 사회복무요원 시절에 음악 작업을 많이 하고 글도 많이 썼다. 영진이도 현대미술을 전공한 친구고 아카이빙한 영상에서 맥락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는 친구라는 설정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에서 영진이가 직접 캠코더로 촬영하는 장면은 없다. 나도 영화에 드러난 푸티지가 전부 영진이가 찍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 영진이가 등장하는 시점이 재밌다. 가령 굴다리나 복지관 부엌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걸 보면서 로케이션에 맞춰 즉흥적으로 위치가 정해진 게 아닐까 추측했다. 영진이 등장하는 장면은 의도하긴 했다. 음습한 굴다리를 뜬금없이 비춰 사람이 기어 나오는 이미지도 생각했지만 이 영화의 톤과 안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촬영감독과 로케이션에서 콘티를 보고 새롭게 만들어나갔다. - 그 밖에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든 부분도 있나. 윤혁진 배우의 대사가 그렇다. 윤혁진 배우가 외운 것처럼 대사를 읊는 것이 싫다며, 자기 말투로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다고 했다. 윤혁진 배우는 프리롤로 뒀을 때 더 빛나는 게 있어서 빠지면 안될 중요한 대사만 서로 협의하고 그외엔 시나리오대로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테이크도 많이 가지 않았다. 예전에 조희영 감독님 인터뷰에서 읽었는데 테이크를 여러 번 가면 상황과 물건이 조금씩 낡기 때문에 테이크를 적게 간다더라. 그 말이 굉장히 공감이 됐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갈수록 배우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고, 감정과 현장의 공기도 달라진다.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라는 미신적인 믿음을 갖고 있어 최대한 적은 테이크로 가려 했다. - 그래서 롱테이크 신도 많았나. 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롱테이크를 사용했다. 또 사건이 벌어진 후에 현장에 잔존하는 에너지가 있다고 믿어서 그걸 담고 싶었다. - <부모 바보>라는 제목이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제목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었나. 제목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아직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부모 바보’라는 텍스트에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제목을 부모 바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논리적인 근거 없이 떠올랐다. <부모 바보>라는 제목은 이 영화를 설명하기보다는 낙서와 같은 의미에 가깝다. <부모 바보>라는 제목은 부모에 대한 욕인 건 맞지만 이 영화를 설명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상형문자로서 낙서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이 제목에 관객들이 너무 몰입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계획된 차기작이 있나. <부모 바보>와 <인서트>를 찍기 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 것이 있다. 폐목재로 집을 짓고 사는 자연인, 탈북민들의 마을이 있는데 당시에 완성을 하지 못했었다. 오는 2월에 다시 촬영을 재개할 계획이다. 요즘 형식에 관한 고민이 많은 때라 다큐멘터리가 될지, 극영화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자유 형식의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 서로의 진심에 ‘트리거’가 된다는 것, <트리거>의 팀원들 - 김혜수, 정성일, 주종혁의 대화

오전부터 열린 제작보고회 일정을 시작으로 종일 홍보 활동에 박차를 가한 세 사람이 오후 5시 무렵 너무도 정다운 모습으로 성큼성큼 인터뷰룸에 걸어들어왔다. 나란히 앉은 김혜수, 정성일, 주종혁은 약속이나 한 듯 눈앞의 마들렌과 컵케이크를 나눠 먹으면서 맞은편 기자에게도 접시를 내민다. “같이 먹어요!” 탐사 PD들의 활극인 <트리거> 현장에서도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틈틈이 삼삼오오 모여 먹기 바빴다는 트리오 중 정성일의 고백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시리즈 후반부에 보면 살이 쪄서 화면에서도 티가 나요. (웃음)” 오피스물의 매력은 관계성에서 결정된다. 팀장과 팀원의 역학, 때로는 직급과 나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끈끈하게 뒤섞이는 현장 동료의 호흡. 작품 바깥에서도 이를 이어가기로 한 듯한 세 사람은 각자의 대답이 아니라 상대의 심경에 주의를 기울이며 총총한 안광을 빛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잘할 수 있도록 서로를 이끌어줄 때, 비로소 작품도 잘되는 시너지효과를 점점 더 절감한다”는 김혜수가 이 관계를 이끄는 중심이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풍경일 것이다. “서로를 독려하는 ‘트리거’가 되어”(김혜수) 움직인 성실한 3인의 팀워크를 소개한다. - “힘들 때 달려오라고 있는 사람이 팀장”이라는 대사가 팀원을 대하는 오소룡(김혜수)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시그널>의 차수현도 좋은 리더였는데, 열혈 PD이자 팀장으로서 <트리거>의 오소룡은 어떤 유형의 연장자로 보이길 바랐는지 궁금하다. 김혜수 리더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정말 제대로 일하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분야는 직업윤리와 소명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직업군 중 하나다. 다만 인물의 그런 면모가 비장한 톤으로 과시되기보다는 자신이 당면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길 바랐다. 실제로 일선에 계신 베테랑들을 살펴보면 인간적으로는 실수할 때도 많고 허술할 때도 있지만 자기 일 앞에서는 놀랍도록 명확한 관점과 확고한 태도를 고수한다. 이 팩트를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실질적인 표현으로 전하는 게 관건이었다. 내가 염두에 둬도 대본이 그렇지 않다면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트리거>는 기본적으로 이런 지점이 잘 내재된 대본이었다. - 워커홀릭 드라마의 매력 중엔 이처럼 일에 몰입하고 헌신하는 주인공의 사적 영역이 궁금하다는 것이다. 어떤 결핍이나 트리거가 있기에 이토록 일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김혜수 후반부로 갈수록 바로 그 지점이 서사적으로 접목된 각자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소룡에게 중요한 대사가 있는데 “내가 일을 하는 건 착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대사다. 주종혁 기호(주종혁)가 정규직이 되려고 애쓰는 이유 중엔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더 떳떳해지고 싶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서러운 순간이 많았다. (웃음) 김혜수 극 중 대사 가운데 “아무도 기호를 못 따라간다”는 대사가 있을 정도로 기호는 실력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만연한 학벌주의와 그로 인한 차별 때문에 울분이 아주 많이 쌓인 캐릭터다. 정성일 한도(정성일)는 오히려 자기 일에 의심을 품는다는 점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월급쟁이면서 대체 다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는 식이다. 그 지점에서 출발해 조금씩 열어볼까, 열어보자 하면서 숨겨진 내면의 요소들도 드러난다. - 마치 하나의 직업 선상에서 한 사람이 생애주기를 따라 겪는 세 가지 다른 시절을 보여주는 캐릭터 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년생 시절엔 더 좋은 기회를 얻고 싶어서 조급해지고(기호), 일하는 가운데 상처받고 회의하는 시간도 있고(한도), 시간이 쌓인 만큼 차차 원숙해지고 때론 무게감을 덜어내 가벼워진다(소룡). 김혜수 정말 그렇다. 오소룡은 이제 ‘그냥’ 하는 상태다. 아주 비장하지도, 대단히 구구절절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지만 소룡의 일 안에 이미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일을 하다보면 때로 스스로 명분을 내세워서 자신을 위로하거나 무언가 회피하는 순간도 있기 마련이잖나. 다행인 것은 오소룡처럼 버티고 나면 그동안 내가 일을 해온 시간, 쌓여 있는 그 시간 자체가 나 자신을 증명하고 지탱해주게 된다. 겉보기엔 짐짓 무성의해 보이는 순간에도 당면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에 대한 판단, 주변에 대한 신뢰, 동료와 팀에 대한 믿음을 담아서 행동한다. 정말이지 그냥, 그렇게 하게 되는 것이다. 탐사보도 PD, 배우뿐 아니라 자기 일을 오래 해온 누구에게나 관통되는 상징적인 상태라고 봤다. 정성일 탐사프로 PD들이 눈앞의 현상에 대해 자꾸만 ‘왜?’라고 질문하는 직업이라는 게 좋았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걸리는 부분, 궁금한 부분에 대해 계속 의문의 의문을 거듭하며 파고들어간다. 주종혁 기호가 느끼는 감정 중에 열심히 했는데 전혀 인정받지 못할 때 오는 착잡함이나 서러움에 공감한 순간도 있었다. 굉장히 현실적인 감정 아닌가. - 소룡이 한도와 기호를 각기 다른 이유로 아끼고 보듬는 관계성이 인상적이다. 낙하산 PD에다 말은 듣지 않고 엇나가는 한도에게 “나는 너 마음에 든다”고 꿰뚫어보듯 이해해주고, 기호에 대해선 그가 지닌 일을 향한 야심을 최대한 지원해주려 한다. 김혜수 아마 이런 포인트도 실제 일선에서 나타나는 관계성 아닐까? 숙련자와 초심자, 혹은 선후배 관계에서 발생되는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역학일 것 같다. 일단 소룡 입장에서 기호는 나만 바라보고 있는 후배다. 앞뒤 안 가리고 열심히 하고 정말 혹사할 만큼 열심히 하는데 실력도 있는. 그러니 얘가 잘됐으면 좋겠는데 학벌이라는 벽에 막혀 있으니 티 안 나게 어떻게든 챙겨주고 싶은 거다. 다만 스스로 굳건하게 설 만큼 때론 매운 소리도 마다 않으면서 강하게 키우려고 한다. 한도는 사실 팀장으로서 보기엔 오해할 여지도 있고 의심할 만한 정황도 다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앞서서 오래 해온 사람으로서 알아보는 게 아닐까. 네가 귀를 닫고 살건, 낙하산이건, ‘닥터 트리거’건, 어쨌든 천생 PD라는 걸. 내가 가진 불꽃을 너도 가졌구나, 하고 알아볼 때의 끈끈함 같은 게 작동하는 거겠지. - 지난해 김혜수 배우가 진행 실력만큼 영화제의 상징과도 같은 드레스 문화를 정착시켰던 청룡영화제 MC 자리에서 내려왔다. 화려한 패셔니스타의 이미지도 있는 배우인데 <트리거>는 지금껏 수수하게 나온 작품들 중에서도 손꼽을 만큼 가장 후줄근하고 리얼한 현장 사람의 자태를 재현한 듯싶다. 김혜수 초반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사이비 교단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심인 1화는 컨셉적인 측면이 강하다. 종교집단 묘사만 그러한 게 아니라 패러글라이딩을 해서 적진에 진입하는 등 보는 분들에 따라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컨셉을 설득력 있게 끌고 가야 했다. 김혜수가 신선한 배우도 아니고 오래 봤던 배우인데, 정말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탐사프로그램 PD라는 게 일단 수긍이 가야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을 거란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다. ‘PD인 척’ 하고 나온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실패일 거라고 말이다. 취재하면서 힌트를 얻은 건 여성 PD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는 거였다. 왜, 보통 헤어스타일에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다니는 여성 PD들이라면 쇼트커트를 많이 할 것 같지 않은가. 실상은 오히려 쇼트커트 PD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거다. 머리 자를 시간도 없고, 애초에 머리에 신경을 안 쓰니까 적당히 기른 머리를 그냥 대충 묶거나 위로 틀어 올린다는 거지. 명품은 절대 안 입을 것 같다는 것 역시 편견이다. 따뜻한 패딩, 편안한 운동화, 수납력 좋은 배낭은 그들에게 전투복이기 때문에 검소한 사람도 투자하는 영역이다. 안 그러면 버티지를 못하니까. 실제로 의상을 고르는 과정에서 명품이 실제로 화면에 보여지는 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서 배제한 부분이 있다. 어찌 됐든 초반의 장르적 컨셉이 셀수록 캐릭터는 더욱 핍진한 모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단히 주의 깊게 접근했다. - 정성일 배우는 <더 글로리>의 슈트, <전,란>의 왜군 장수 코스튬을 벗어나 한결 편안한 옷을 입게 됐다. 주종혁 배우의 기호는 <파묘>의 MZ 무당처럼 트리거팀의 MZ PD인 셈인데. 정성일 평소에 정말로 ‘추리닝’만 입는다. 아주 캐주얼한 스타일이다. 그동안 일하면서 공연 무대, 매체에서의 스타일링이 유독 잘 갖춰진 옷들, 정장이나 슈트 위주로 입게 됐다. 말하자면 <트리거>의 한도를 통해 평소 내가 편하게 입는 스타일을 원 없이 펼친 것 같다. 의상은 캐릭터성을 표현하는 좋은 장치인 동시에 배우의 연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가만히 서 있는 자세부터 달라진다. 걷는 것, 앉는 법 등 의상으로부터 몸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번엔 그동안 옷에 갇혀 있던 어떤 면을 완전히 열어젖혀서 내가 움직이고 싶은 반경만큼 시원하고 편안하게 쓸 수 있는 작업이었다. 또 한도가 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인물에 대해 많은 걸 말해주는 설정이다. 한도는 자신을 숨기려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시야를 가려서 남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에 가깝다는 디테일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주종혁 기호는 사무실이 시끄러울 때면 헤드폰으로 힙합을 듣는 Z세대다. 촬영 때 다 쓰지는 않았지만 헤드폰도 10개 가까이 준비하고 실제로도 현장에서 내가 듣고 싶은 힙합 음악을 연결해서 들었다. (웃음) 서로에게 기대면서 - 앞서 <경이로운 소문>을 성공시킨 바 있는 유선동 감독 신작이다. 활력 있는 전문가의 드라마라는 첫인상이 강한데, 각자 대본을 받고 합류를 결심하게 만든 요소가 어떤 것이었는지 묻고 싶다. 김혜수 한동안 무거운 이야기들 중심으로 대본이 들어왔다. 최근작 <슈룹>이 어두운 작품은 아니지만 어쨌든 9개월 이상 끌고가야 하는 호흡이어서 약간의 번아웃이 왔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글이 잘 안 읽히더라. 좋은 작품인 줄 머리로는 알겠는데 엄두가 안 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트리거>는 말 그대로 잘 읽혔고 해보고 싶었다. 작품이 가진 장점과 배우로서 내가 통과하고 있는 시기가 잘 맞물려서 운명처럼 조우한 셈이다. 캐릭터를 위트 있게 바라보는 각본 속에서 배우로서 좀더 자유롭게 운신하면서 숨 쉴 수 있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그건 한도, 기호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바라볼 때 이슈 자체에 관심이 있거나 메시지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등 반응하는 이유는 제각각인데, <트리거>는 무엇보다 캐릭터 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이 내게 가장 유효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정석과 비전형 사이에서의 변주가 가능하겠다는 기대랄까. 정성일 아까 기자회견에선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작품을 선택했던 이유는 당연히 대본이 재미있고 캐릭터성도 흥미로운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고수해온 작품 선택의 기준에서 탈피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기서 더 넓혀가지 않으면 한 자리에 묶일 수밖에 없겠다고. 그러던 중 <트리거>거 왔다. 매체에서는 주로 각 잡고 바로 서 있는 사람을 맡아왔지만 사실 과거에 무대에서 공연할 때 연기했던 인물들 중엔 약간 허술하게 풀어지는 쪽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트리거>가 우선 반갑더라. 결정적으로는 김혜수 배우가 이미 하기로 정해져 있다고 하니 무조건 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누나와 붙어서 연기해야 하는 장면에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이 정말 크긴 했지만. 김혜수 회사에 대본이 들어오면 직접 다 보고 회신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그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회사에서도 내가 좀더 좋아할 것 같은 작품으로 점치는 게 있을 텐데, 사실 <트리거>는 예상 밖의 작품이었다고 하더라. 내가 먼저 “<트리거>는 어때요?” 물으니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하기로 한 이후에도 사실 불안감이 많이 밀려왔다. 초반에 가능한 한 틈새를 많이 메워둬야 현장에서 누수가 적거든. 이런저런 걱정으로 버거워지려는 순간에 한도 역에 정성일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인상은 글로 생각한 한도와 이미지가 완전히 다르다는 거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렇다면 안 할 이유가 없겠다는 확신이 섰다. 촬영 중간에도 그의 도움이 컸다. 4, 5화를 촬영할 무렵에 1, 2화를 확인했고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이 유독 크게 다가왔다. <트리거>는 도입부인 1화에 장르적인 컨셉과 설정이 두드러지는데, 그 속에서 내가 균형을 잘 잡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있었다. 아무리 오래 연기한 배우여도 시작점에서 항상 떨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의 기준에 절대 다다르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과 실제 내 몸, 내 연기가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도 있다. 그걸 들키지 않고, 또 간극을 메우고, 불편함과 어색함을 줄여가면서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시작하는 게 제일 좋지만 늘 마음처럼 되지는 않더라. 그 가운데 성일씨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 명확하게 자기 힘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가는구나, 그게 너무 고마웠고 덕분에 용기를 냈다. 정성일 나는 반대다. 오히려 누나가 버티고 있어주니까 내가 할 것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준비한 것에 심플하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트리거> 현장이 김혜수 배우가 있음으로 인해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다. 누나가 현장에서 지금과 같은 1, 2화에 대한 피드백을 내게 전해주었는데, 단순히 칭찬을 들어 기쁜 마음보다도 훨씬 더 감격스러운 마음이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느낀 바가 컸다. 이 정도의 베테랑이 후배에게 스스럼없이 자기 고민과 흔들림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나아가 상대에게 고마워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같이 일하면서 김혜수 선배는 정말로 앞과 뒤가 꾸밈없이 한결같은 분이란 생각이 든다. - 두 사람의 대화가 작중의 팀워크를 화면 밖에서도 이어가는 말들처럼 들린다. 막내는 막내만의 부담이 있을 텐데. 주종혁 (김혜수, 정성일 바라보며) 그래서 처음엔 못하겠다고 했다. 김혜수 이걸 내가 처음에는 몰랐어. 그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주종혁 처음 <트리거> 대본 보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막내로서 일종의 활력소를 담당할 수 있을까? 유머러스하고 에너제틱하고, 별 노력 안 하고 한마디만 해도 이미 웃긴 사람. 나는 그런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아서 감독님과 첫 만남 때 자신이 없다고 했다. 어쩌면 이미 캐스팅된 선배들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용기가 안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주로 또래와 호흡을 주고받는 경험이 대다수였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고. 첫 촬영날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던 기억이 강렬하다. (웃음) 그러면서도 이 역할을 잘해보고 싶었던 건 실제 내 성격과 닿아 있는 부분도 있어서다. 현장이 힘들고 모두가 피곤한 상황일수록 주변 분위기를 밝게, 기분 좋게 만들고 싶다. 모두가 즐겁고 편안하게 촬영해야 서로 더 힘이 나고, 나는 그런 환경 속에서 배우로서도 비로소 더 집중해서 연기할 수 있다는 주의다. 김혜수 힘듦이 전혀 티가 안 났어! 긴장한 와중에도 주변을 잘 살피는 게 느껴졌거든. 주종혁 제가 긴장 안 한 척을 잘하는 것 같아요. 여유 있는 척. (웃음) 김혜수 종혁은 선하고 순수하다. 연기는 너무 잘하고. 게다가 정성일, 주종혁 이 두 사람은 여고생들처럼 관계가 좋다. 서로 예뻐하는 모습이 남다르게 결이 곱다. 영화, 드라마 현장에서 남자배우들이 친목을 다지는 과거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낄 정도다. <트리거> 현장의 배우들은 CP 역의 이해영 배우까지 포함해서, 대본을 분석하고 집중해서 연기할 때는 대단히 치열하고 진중하면서도 관계를 만들어나갈 땐 무게감 잡지 않고 약간 샤이할 정도로 부드럽고 다감한 사람들이다. 작품하면서 남자배우들과 이렇게 친해진 경우는 또 처음이다. 정성일 이 말 들을 때마다 기분이 너무 좋다. (웃음) 김혜수 이 모든 이야기의 전제는 서로 연기적으로 리스펙트한다는 것이다. 저 배우 좋다, 함께하고 싶다 하며 꿈꿔도 막상 실제로 만나서 호흡해보면 알게 된다. 이 사람이 진짜인지 아닌지. 혼자 잘하려는 사람인지 함께 가려는 사람인지. 두분에게는 배우로서 먼저 빠진 다음 사람으로서도 사랑하게 된 경우다. - 사회적 메시지를 코미디 직업물이자 오피스물의 표면으로 재치 있게 감싼 작품이다. 김혜수 배우의 영화(<이층의 악당> <굿바이 싱글>), 드라마(<직장의 신> <하이에나> <슈룹>) 필모그래피를 보면 위트가 돋보이는 코미디 장르에도 편견 없이 눈길을 준다는 인상이다. 희비극의 뉘앙스, 유머에 열려 있달까. 김혜수 그건 정말 취향이다. 오로지 웃기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건 또 취향이 아니다. 오직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영화도 그다지… (웃음) 별도의 메인이 있고 그 속에 로맨스가 살짝 건드려지는 건 아주 좋다. 역시 비슷하게 <트리거>는 코미디를 하려는 작품이 아니고 하고자 하는 묵직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위에 위트를 가미해서 간다. 호러 장르도 비슷하다. 전통적인 공포영화는 싫은데 심리적인 서스펜스는 즐기는 식이다. 레이어가 쌓여서 밀도감이 생길 때 재밌는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내 취향이 이렇다고 해서 배우로서 늘 그런 작품을 선택한다는 건 아니다. 엄두가 안 나고 나와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서 오히려 도전하게 되는,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해 하게 되는 작품들도 있다. - 공적 정의가 무참히 무너지는 사회에 대한 피로와 회의가 오고가는 시기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발로 뛰는 탐사보도 PD들의 드라마, 어떻게 소구될 수 있을까. 영화, 드라마를 찾아보는 일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사람들도 많을 텐데 예비 시청자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들려달라. 김혜수 <트리거>의 사건들은 실제 우리가 경험하거나 간접적으로 기사에서 봤던 어떤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건 희망이다. 극 중에서 거친 언어지만 오소룡을 ‘꽃대가리 팀장’이라고 한다. 근데 머리가 꽃밭이라는 건, 정말로 이 힘든 세상에서 끝까지 향기로운 꿈을 꾸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산물일 수도 있다. 거기서 어떤 낙관을 봤다. 우리를 살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건 결국 희망이고 그 희망은 절대 판타지가 아니라는. 정성일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어느새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작품이 <트리거>가 아닐까 싶다. 주종혁 소재 자체는 진중하고 때로 무겁지만, 지친 일상 속에서 기분 좋게 보실 수 있는 시리즈일 것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그 부분이 기대된다.

[인터뷰] 성장하지 않아도 절망하지 않는 주인공, <스터디그룹> 이장훈 감독

연초에 벌써 올해의 짠한 캐릭터가 탄생했다. 고등학생 윤가민(황민현)은 진실로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하는 친구다. 선생님 말씀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필기하고 공부할 체력을 기르다 보니 무림 고수까지 됐으나 그의 등수는 애석하게도 280등 중 279등이다.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들이 모인 유성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 등수 향상을 기대하지만 여기서도 꼴등 언저리에 머물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싸움에 휘말려 퇴학 위기에 처했을 때 가민을 구해준 건 스스로 결성한 스터디그룹이다. 새로 부임한 이한경 선생님(한지은)이 폭력적인 교내 분위기를 가민의 스터디그룹으로 개선하겠다고 선언한 것. 이후 가민은 팀원 모집에 열을 올리며 스터디그룹 운영에 열과 성을 다하나 본인만 모르게 ‘싸움 짱’으로 소문나는 바람에 스터디그룹엔 일진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만다. 인기리에 연재 중인 웹툰 <스터디그룹>이 1월23일, 10부작 시리즈로 공개된다. 연출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기적>을 쓰고 만든 이장훈 감독이 맡았다. “원작의 팬들이 실망하지 않을 만큼 원작을 살린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던 감독을 만나 이 이야기의 매력에 관해 물었다. - 첫 시리즈 연출작이다. 어떻게 <스터디그룹>의 감독을 맡게 됐나. 2021년에 개봉한 영화 <기적>의 업계 반응이 좋았던 덕분에 연출 제안을 많이 받았다. 심플하게 재밌고 액션이 주가 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와중에 <스터디그룹> 연출 제안이 들어왔다. 대본을 보기 전에 원작을 먼저 읽었는데 이거다 싶더라.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명쾌함과 유쾌함이 있었고 바라던 액션이 가득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갈 필요 없다. 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이 엄청나니 이걸로 승부를 보자’ 하며 연출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 제작사에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원작을 살리는 방향으로 영상화 작업에 돌입했다. - 주인공 윤가민 캐릭터가 어떤 점에서 그토록 매력적이었나. 보통 주인공은 성장하기 마련인데 가민이는 그렇지 않았다. 대신 자기도 모르게 주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응원하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일종의 포레스트 검프 같은 친구랄까. 강력한 그 매력을 시리즈에서도 살리고 싶었다. - 이소룡과 주성치의 영화, 일본 학원만화 같은 키워드가 떠오른다. 그 작품들이 <스터디그룹>의 톤 앤드 매너를 잡는 데 영향을 미쳤을까. 물론 그랬는데 전 스태프와 공유한 핵심 레퍼런스는 미국영화 <킥 애스> 시리즈였다. 톤 앤드 매너뿐만 아니라 화면의 색감, 미술, 액션 스타일까지 <킥 애스>를 닮았으면 했다. 최대한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었으면 하는 이유에서였다. - <킥 액스> 하니 거침없는 액션이 예상된다. 잔인하지 않되 세게 가고 싶었다. 과장되고 비현실적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이왕이면 마블쪽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궁극에는 가민이가 초능력자에 가까운 액션을 선보인다. 액션 시퀀스가 많기도 하고 가민이의 액션 베이스인 절권도가 반복될 경우 지루해질까봐 시퀀스마다 컨셉을 달리 잡았다. - 주인공이 초능력자와 같은 전투력을 가졌다면 누구와 붙어도 이길 텐데 액션의 쾌감이 덜할 거라는 걱정은 없었나. 그럼에도 절대 지지 않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 애는 무조건 이기니까’ 하고 안심하며 지켜보는 재미도 있으니까. - <범죄도시> 시리즈가 주는 재미와 결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정확히 그런 쪽이다. - 공간과 음악에 있어서는 무엇에 주안점을 두었나. 주공간인 유성공업고등학교의 첫인상은 무법지대였고, 음악은 힙합을 주로 썼다. 우선 공간 역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안심하면서 볼 수 있게끔 판타지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그래서 미술팀에 처음부터 요청한 게 색을 과감하게 써달라는 것이었다. 붉은색, 청록색 등 보통 학교에서 잘 안 쓰는 색이 많이 들어갔다. 인테리어도 일반적인 고등학교 양식이 아닌 미국 학교 스타일이면 좋겠다고 의견을 냈다. 음악에는 내 사심이 많이 섞여 있다. 오래전부터 오프닝과 엔딩크레딧에 힙합이 흐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풀었다. (웃음) - 윤가민 역의 황민현뿐만 아니라 김세현, 차우민, 이종현, 홍민기 등 젊은 신예 남성배우들이 잔뜩 포진해 있어 캐스팅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황민현 배우는 사진상에서부터 눈빛이 좋아서 만남을 요청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요샛말로 ‘맑은 눈의 광인’이었다. (웃음) 실제 말투와 태도가 신기할 정도로 가민이스러워서 배우 본연의 모습을 살리는 쪽으로 가면 되겠다 싶었다. 전체적으로는 공개 오디션을 열었다. 1500명 넘는 배우들의 프로필 사진과 영상을 보고 추렸고 100명 정도 남았을 때부터는 대면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배우들을 포함해 40명 정도를 뽑았다. 연기력과 원작과의 싱크로율도 물론 중요했지만 핵심적으로 본 건 노력으로 채울 수 없는 본연의 매력이었다. 그만큼 작품이 공개되면 출연배우 모두가 주목받을 거라고 확신한다. - 가민이의 뜻대로 스터디그룹은 결성될 수 있을까. 가민이가 한명 한명 열심히 모아서 결국 팀은 결성된다. 그렇지만 유성공고 서열 1위인 피한울(차우민) 무리의 방해를 받아 여러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스터디그룹>은 가민이가 공부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공부할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공부하기 위해 싸운다는 본질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스터디그룹> 이장훈 감독이 말하는 관전 포인트 “시작부터 원했던 건 단 하나였다. 현실에서 잠시 쉬어가는 역할을 해줄 위로가 되는 이야기, 통쾌한 오락물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기에 시청자에게 바라는 것도 크지 않다. <스터디그룹>을 보는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마음을 편히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가민의 매력을 따라가기만 해도 즐거운 1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제작 와이랩플렉스, 스튜디오 드래곤 연출 이장훈, 유범상 극본 엄선호, 오보현 출연 황민현, 한지은, 차우민, 이종현, 신수현, 윤상정, 공도유 채널 티빙 공개 1월23일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완벽한 영화, 완벽한 연휴

언젠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토크쇼에서 완벽한 영화에 대한 견해를 밝힌 적 있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로 출발하는, ‘취향 고백이구나’ 싶은 리스트였지만 최소한의 조건을 전제했다. “완벽한 영화라는 건 모든 미학적 요소를 어느 정도 아우르는 작품입니다. 취향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걸 깎아내릴 만한 단점을 찾기 어려운 영화들이죠.” 이후 타란티노는 <죠스>(1975), <엑소시스트>(1973), <애니홀>(1977), <영 프랑켄슈타인>(1974) 등을 언급하다가 마지막에 이걸 빼먹을 순 없다는 듯 다급하게 외친다. “<빽 투 더 퓨쳐>(1985)! 정말 완벽한 영화죠.” 타란티노의 단언과 달리 이 영화들의 단점을 꼽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동시에 굳이 그러고 싶지 않은 목록이다. ‘단점을 찾기 어렵다’는 의미가 단점이 없는 게 아니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거라면 결과적으로 타란티노가 옳았다. 이건 완벽히 타란티노의 영화, 그러니까 타란티노에게 완벽한 영화들이다. 흥미로운 건 그가 꼽은 영화들이 70년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목록이 영화사 전체를 아우를 완벽한 선택이라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쿠엔틴 타란티노가 가장 사랑했고 생기 넘쳤던 시기가 언제인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완벽과는 거리가 먼 리스트를 보며 새삼 ‘완벽’에 대한 생각에 잠긴다. 누구나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시기가 있다. 스펀지처럼 자극을 흡수하여 성장하는 시기. 취향과 세계관을 만들어나가는 시기. 대부분 10, 20대에는 주변을 유연하게 받아들인 후 천천히 자기만의 방을 굳혀나간다. 그렇게 완성된 완벽한 장소와 아름다운 시절은 마치 고향 같아서, 되돌아갈 때마다 휑하게 비어 있던 마음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든다. 가령 90년대 노래들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새삼 그 시절이 나의 완벽에 속해 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요즘 부쩍, 그 완벽했던 시절이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 예능프로 게스트로 나온 종교인은 인생의 의미가 무언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없는 의미를 찾을 게 아니라 “스스로 그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로 결심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10대, 20대라서 찬란한 게 아니다. 딱딱하게 굳은 세계를 조금 부드럽게 한 뒤 새로움을 받아들인다면 언제든 ‘지금’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어 있는 퍼즐 조각을 찾는 것 말고도 완벽해질 방법이 있다. 주어진 퍼즐 조각의 형태에 맞춰 자신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빚어나갈 때, 이윽고 빈틈없는 행복을 마주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방을 넓히고 취향을 확장해나가는 기쁨. (물론 피곤한 일이다.) 내 기억 속 <빽 투 더 퓨쳐>는 연말연시 혹은 명절 연휴 다시 보기에 완벽한 영화였다. 한마디로 편안한 마음으로 보기 좋은 추억의 영화들. 이번 설에는 익숙한 명작보다 낯설고 새로운 작품들을 좀더 찾아보려 한다. 아직 세상의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적어도 올해 설날은 행복해지기로 했다. 완벽한 연휴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독자 여러분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기 2025년 개봉을 앞둔 한국영화 신작들을 소개한다. 언젠가, 누군가의 완벽이 될 이 영화들을 기억해주시길.

[기획] 보고 또 보고 – 연휴에 챙겨볼 만한 시리즈 <아수라처럼>과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를 소개합니다

설 연휴에는 늘 볼거리로 넘쳐난다. 극장가뿐 아니라 OTT에서도 흥미로운 콘텐츠들이 긴 연휴를 풍성하게 채워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다양한 작품들의 리스트를 정리해보는 게 이 무렵의 정석이겠지만 때론 꼭 집어 한편만 골라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을 것이다. <씨네21>에서는 이번 설 연휴에 꼭 챙겨봐도 좋을 시리즈와 애니메이션을 각각 한편씩 꼽아보았다. 기준은 하나다. 이 작품이 지금 왜 다시 만들어졌을까. 첫 번째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을 맡은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 <아수라처럼>이다. 1979년 에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무코다 구니코의 동명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을 위해 미야자와 리에, 오노 마치코, 아오이 유우, 히로세 스즈 등 일본의 대표적인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엇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번째 넷플릭스 드라마 연출작이라는 점에서 국내 팬들의 주목을 모으는 중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던 네 자매는 노년의 아버지가 가족을 속이고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행복의 얼굴 밑에 가려졌던 감정들이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1979년 도쿄를 배경으로 한 이 서늘한 이야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꾸준히 천착해온 질문, 가족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얼핏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제일 거리가 멀 것 같은 통속물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연출자의 본질을 선명히 드러내는, 흥미로운 질문 같은 결과물이다. 이에 대해 김세인 감독이 비판적인 시선으로 작품의 결을 해부해보았다. ‘고레에다가 왜?’라는 질문을 가진 이들에게 재미있는 답변이 될 것이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전설 <월레스와 그로밋>도 돌아왔다. 귀여운 캐릭터디자인과 그렇지 못한 행동으로 인기를 끌었던 문제적 빌런, 페더스 맥그로우라는 이름의 펭귄은 1993년 첫 등장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월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으로 돌아온 이번 속편은 거의 묵시록적인 동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반가운 작품의 깊이와 의미를 조목조목 분석한 나호원 애니메이션 연구가의 글을 통해 31년 만에 돌아와야 했던 이유와 가치를 확인하길 바란다. 여기 가벼우면서도 진지하게, 통속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게 설 연휴를 꽉 채워줄 두 작품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설 연휴맞이 OTT 추천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