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인터뷰] ‘자연은 인간의 감각과 문화 형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해왔다’, MMCA ‘올해의 작가상 2024’ 참여 작가로 선정된 제인 진 카이젠 인터뷰

- <이어도(바다 너머 섬)>(이하 <이어도>)는 7편의 단편영화(스크린)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를 하나의 서사로 봤을 때, 개별적인 영화들이 연결되는 순서가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무엇인가. 공간적·시간적 장치이자 은유로서 나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해류도 나선형이고, 해녀들이 물질로 채취하는 소라도 나선형이다. 각 작품의 내러티브는 선형보다는 원형에 가깝고, 시간과 공간은 지극히 지역적이고 장소적인 것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확장되며,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더 넓은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스크린과 관객의 좌석을 나선형으로 배치하여, 작품들이 서로 연결되고 상호 연관되도록 전시 공간을 조성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로 연결되는 인과적 연속의 고정된 내러티브가 아닌, 물결과 공명의 느낌을 작품에 반영했다. 하나의 시작과 끝이 아니라 관객이 작품을 서로 연결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방식을 기반으로 구성했다. - <잔해>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미군이 제작한 선전영상의 푸티지를 사용했는데, 해당 장면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나는 오랫동안 이 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2011년 제주 4·3사건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영화를 작업할 때, 현지의 역사학자이자 작가를 통해 처음 이 영상을 접했다. 내가 알기로는 일본 패전 후 미군이 제주에서 촬영한 최초의 영상이다. 그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일본군의 무기를 모두 수거하고 파괴하는 일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기를 바다에 버리는 행위는 그것들이 서서히 녹슬어 바다를 오염시키도록 방치했다는 점에서 매우 폭력적인 행위이다. 나는 이 영상이 훗날 일어난 제주 대학살의 전조이자, 전쟁의 지속적 충격과 잔해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잔해>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를 고려할 때 나에게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 영상에 내가 수년간 기록해온 제주 학살의 생존자이자 전작 <이별의 공동체>에 참여했던 고 고순안 심방(무당)의 목소리를 병치했다. 나에게 샤머니즘적 애도는 제국주의가 기록한 폭력에 대항하는 힘이다. - <이어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각기 다른 속도를 가진 여러 시간들이 있다는 점이다. 유속, 호흡, 노랫소리 등 다양한 속도가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고 이는 특별한 리듬감을 형성한다. <이어도>에는 말 그대로 다양한 프레임의 속도와 더불어 편집 방식에 의한 속도가 존재하는데, 리듬에 관한 관심은 작품의 주요 전제 중 하나였다. 그리고 호흡, 성가, 노래, 파도, 드럼이 만드는 시간과 리듬이 있다. 생각해보면 용암 바위처럼 가장 단단한 것들을 포함한 모든 것이 움직이고 변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품에서 인간의 규모와 수명은 자연현상과 연관되어 보이는데, 바람의 힘, 바다, 화산 토양 등 인간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이 현상에 대한 겸손함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 <어귀>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숏들이 등장한다. 인간의 내장 기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장면들은 제주도의 역사와 신화를 실재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전시장의 중간에 배치한 이유도 그 때문인가. 전시장의 중간에 유일하게 인간이 등장하지 않고 자연을 가까이에서 기록한 작품인 <어귀>와 <심>을 배치했다. 세계의 창조자이면서 세계이기도 한 설문대할망의 창조신화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제주가 그녀의 몸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즉 존재와 창조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두 작품 <어귀>와 <심>은 다른 작품들과 다소 차이가 있다. 나는 자연이 그 자체로 창조적이고 변화하는 힘이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의 감각과 문화 형성에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왔다. 인간은 종종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있고 다른 생명체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연과 자연환경은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 - 당신의 작업에서도 나타나듯, 역사가 외면해온 과거의 폭력은 여성들에 의해 기록되고 치유된다. 이는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역사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는 소외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샤머니즘과 이전 작품인 <이별의 공동체>에서 다룬 바리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샤머니즘이 역사적으로 여성이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사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나는 가부장적 이해에서 신화를 떼어내면서, 신화를 재구성하는 개념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이에 더해 제주 무속신화 속 모성애적 정서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 역시 치유되었다고 생각한다. - 당신의 작업들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됐다. 영화관과 미술관의 차이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으로써 영화관과 미술관 둘 다 좋아하지만, 관람 환경은 매우 다르다. 영화관은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보는 집단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나는 그런 관객의 집중력과 상영 후 관객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미술관에서는 관객이 자신의 속도에 맞춰 스스로 작품을 접하기 때문에 집중력과 서사에 대한 기대치가 다르다. 나는 이런 상황도 무척 좋아하는데, 작품의 현상학적 만남과 몰입의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는 여러 개의 스크린으로 작업함으로써 이를 강조하고 관객이 공간에서 작품을 대면하는 방식과 작품들이 서로 대화하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관객이 서사 구성에 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점과 자기 인식과 자아 성찰을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비평] 청춘 로맨스물의 리메이크 열풍 비평 과거의 감성에 대한 향수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설> <먼 훗날 우리>까지. 관객의 기억에 각인된 멜로 작품이 연이어 리메이크되는 가운데, 문득 궁금해진다. 최근 부는 이 바람의 근원지는 어디일까. 동아시아 청춘 로맨스물이 거듭 생명을 얻어 우리에게 돌아오는 진짜 이유 말이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 영화계의 현주소가 놓여 있다. 그곳에 닿기 전, 우선 최근 리메이크되는 작품이 공유하는 특별한 점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국내에서 리메이크된 작품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장르물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청춘물에 로맨스, 판타지의 요소까지 공유한다. 우연히 다가온 첫사랑, 사랑에 서툰 남자, 해사하며 속이 깊은 여자, 투닥거리며 깊어지는 사랑, 갑자기 다가온 위기, 서로의 진심을 깨닫는 마무리까지. 관습화된 코스가 있고, 이를 얼마나 맛깔스럽게 운행하는지가 흥행을 좌우한다. 이 장르 팬덤의 기대를 만족시키면서도, 너무 지루하지 않도록 적당한 변형을 주어야 한다. 로맨스만 하더라도 장르적 색채가 짙은데, 이 작품들은 ‘장르 속 장르’라 할 정도로 특성이 강하다. 주연배우들도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청춘스타들이 주로 캐스팅되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여자 주연배우의 경우 선호되는 비주얼이 있다. 계륜미(<말할 수 없는 비밀> 대만판)를 필두로 주동우(<먼 훗날 우리> 중국판), 진의함·노윤서(<청설> 대만판·한국판), 원진아(<말할 수 없는 비밀> 한국판)까지. 깨끗하고 청초한 이미지의 배우가 자주 발탁된다. 대만 청춘물 여자주인공상이라 할까. 영화는 아니지만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 <그 해 우리는>의 김다미도 이런 페이스에 속한다. 또 아이돌 출신 배우가 자주 기용되는 경향도 보인다. 도경수(<말할 수 없는 비밀> 한국판), 진영·다현(<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한국판) 등이 그 예다. 장르적 색채가 진해서 상대적으로 연기 부담이 덜한 대신, 청춘을 대변하는 이미지의 중요성은 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마지막으로 리메이크 원작 중에는 2000년대 작품이 많다. 이것이 가장 재미있는 지점이다. 원작 기준으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2007년, <청설>이 2009년,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2004년에 각각 개봉했다. <먼 훗날 우리>는 2018년 개봉했지만 2007년이 배경이다. 이 영화 속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약 20년의 터울이 존재한다. 지금의 리메이크 바람을 거칠게 요약한다면, 20년 전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 제작된 로맨스 판타지 영화가 약간의 메이크업을 마친 뒤 한국을 다시 찾은 형국이다. 궁금해진다. 어째서 최근 것도 아닌, 20여년 전 작품들이 자꾸만 한국에 소환되는가? 여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안정적인 관객 확보에 대한 기대일 것이다. 이미 호평받았고 팬덤도 확보한 원작이 흥행을 이끌어줄 것이라는 기대. 이것은 <신과 함께> <내부자들> <조명가게> 등 인기 웹툰이 자주 영상화되는 트렌드와 맥을 같이한다. ‘이미 아는 그 맛’을 다시 맛보려는 관객과 검증된 레시피를 손에 쥔 제작사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존재감 강한 원작은 독이 든 성배다. 관객이 원하는 바는 확고하기 때문에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비판과 피드백을 감내해야 한다. 원작의 범위를 많이 벗어나는 작품에 대한 거부감도 존재하므로 창작자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제약된다. 원작이 일군 토대는 비옥한 동시에 비싸다. 2000년대 작품이 자주 리메이크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과거의 감성에 대한 향수’다.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2025년으로부터 너무 멀지 않은, 그러나 지금과 다른 결의 순수와 낭만이 살아 있는(것으로 인식되는) 시기. 얼핏 가까운 듯 보이는 2000년대와 지금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감성의 강이 있다. 특히 스마트폰과 SNS 콤보는 젊은 층의 감성에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변곡점이 2010년 무렵이라 생각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서로에게 닿을 수 있고, 모든 정보가 발빠르게 전달되는 지금 우리는 그 시절의 감성을 상정하기 어렵다. 리메이크 원작에서 주인공이 활보하는 학교 혹은 동네는 ‘작고 아늑하며 닫힌 세계’로서 존재한다. 이곳은 사랑이 우연히 나타나고, 한번 놓쳐버리면 찾기 힘든 공간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랑은 운명적으로 존재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과 <청설>의 주인공은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매고,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소년은 첫사랑과 통화하기 위해 밥값을 모두 써버린다. 그런데 이런 제약이 그 시절 특유의 아련하고 애타는 정서를 스크린에 새긴다. 지금 한국에서 불붙은 리메이크 열풍이 좇는 것도 결국 이러한 정서다. 반면 지금 2025년 한국에서 이런 감성을 그대로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에게 반한다면(<말할 수 없는 비밀>) SNS부터 찾을 것이고, 알 수 없는 소녀의 언어는(<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하나의 콘텐츠가 되어 연애 예능에서 소비된다. 아무것도 개입하지 않는, 그래서 여리고 불안정한 관계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2000년대 청춘 로맨스물을 개작하겠다는 결정은 그것이 안전하다는 판단과 더불어, 그 시절 감성을 오늘날 찾기 어렵다는 인식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말할 수 없는 비밀> 한국판에서 20년의 시간을 건너 유준(도경수)을 만나러 온 정아(원진아)는 요새 친구답지 않으며 신비롭다. 지금 한국영화계는 자기만의 정아를 찾아 나섰다. 그래서 최근의 리메이크 바람은 지금 시대에 2000년대 감성을 수입해오려는 시도로 보인다. 한국영화계는 20년 전 대만영화계에 ‘청춘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 대한 외주를 맡긴 상태다. 이것은 최근 국내에서 굵직한 멜로 작품이 잘 안 나오는 경향과도 맞물린다. <클래식>(2003), <건축학개론>(2012) 등 첫사랑 영화의 계보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이 장르 팬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줄 화제작이 없는 가운데, 리메이크 작품들은 일종의 대체재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은 최근 <이터널 선샤인>(2004), <노트북>(2004), <밀레니엄 맘보>(2001), <색, 계>(2007), <러브레터>(1995) 등 2000년대 로맨스 명작이 줄줄이 재개봉하는 경향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리메이크 자체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잊힐 수 있는 감성을 되살리며 새로운 색을 입힌다. 또 개작 과정에서 재창조가 일어나는데,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경우에도 대만판은 원작답게 심플하고 굵직하다면 일본판은 단출한 감성이 돋보이고 한국판은 디테일과 감정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리메이크가 느는 경향이 곧바로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개작은 늘고 창작은 부족한 지금의 상황이, 이 장르에 대한 포기 선언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명작을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째서 2025년만의 순수를 담은 오리지널 청춘 멜로가 등장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20년 전 청춘이 품었던 열정은 2025년엔 어떤 얼굴로 바뀌었을까. 첫사랑을 향한 아련한 그 마음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숨 쉬고 있을까. 동시대의 감성을 ‘2000년대 대만 청춘 멜로’의 양식 안에 새긴 후에 자기 색을 입히는 작품은 없을까. 그런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때 이 장르의 이름을 새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리메이크 열풍이 이런 변화로 이어질지, 잠시 불었던 바람에 그칠지 궁금해진다.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역사의 무대 위에 선 사람들, 디지털 시각효과를 활용한 세계-만들기(1편)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이미지의 조작과 생성이 편리해지자 영화가 세계-만들기(world-building)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던 영화인들의 목소리에 다시금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일찍이 V. F. 퍼킨스는 “영화의 이미지가 현실로부터 파생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영화의 세계와 흥미롭게 연결되는 방식”이 중요하다면서 리얼리즘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퍼킨스의 상속자를 자처하는 일부 영화이론가들은 관객이 이미지와 서사를 매개로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세계가 구축된다고 본다. 여기서 이미지는 제작 과정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것과 후반작업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것을 포함한다. 세계-만들기의 효과적 수단으로서의 디지털 시각효과의 쓰임새는 단순히 리얼리즘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리얼리즘과 환영주의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영상 소프트웨어에 의해 처리된 공간이 하나의 풍경처럼 제시되는 동시에 극의 무대로 쓰이는 경우를 상상해보라. 이를 위해 그린스크린 또는 블루스크린 앞에서 배우의 연기를 촬영한 후 배경을 합성하는 디지털 매트페인팅이 자주 쓰인다. 이 기법은 가상의 배경이 그려진 유리판을 카메라 렌즈 앞에 놓고 촬영하던 방식을 디지털로 전환한 것이다. 화가의 붓질과 유리판은 각각 컴퓨터그래픽과 블루스크린으로 대체되었고, 가상의 배경에 쓰이는 이미지는 극사실주의적인 수준에 다다랐다. 또한, 가상의 배경과 실사를 합성한 흔적은 관객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매끄러워졌다. 그 결과 디지털 매트페인팅은 비현실적인 배경만이 아니라 역사나 일상과 관련된 현실적인 배경도 다루게 되었다. 영화의 세계가 컴퓨터그래픽과 디지털합성을 활용하여 사실성, 역사성, 일상성을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1994)는 관객의 집단적 기억 속에 남아 있으나 지금은 물리적으로 사라지거나 달라진 세계를 디지털 시각효과를 이용해 되살려낸다. 1960~70년대 미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주요 역사적 사건을 무대화하는 이 작품에서 디지털 시각효과는 주로 사물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역사적 배경을 사실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사용된다. 먼저, 하나의 사물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바람에 휘날리다 주인공의 신발 앞으로 떨어지는 깃털, 드넓은 옥수수밭 위로 유유히 날아가는 한 무리의 새 떼, 주인공과 악수하는 케네디 대통령의 모습 등이 그러하다. 다음으로, 역사적 배경과 실사 촬영분을 합성하여 과거를 시각적으로 복원하는 경우가 있다. 주인공이 베트남 전쟁터를 수색하거나 포탄이 터지는 현장을 극적으로 탈출하는 장면, 링컨 기념관 앞의 호수를 가득 메운 반전 시위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는 장면, 여러 아카이브 푸티지에 기록된 실제 역사적 현장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미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을 압축적으로 그려낸 이 장면들은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특정 역사적 시간을 통과하면서 그 속에 거주하고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만들어낸다. 영화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활용된 역사적 배경에 주인공이 거주하고 있다는 인상은 실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런 작품들에서 역사는 대상, 인물, 사건 등을 아우르는 하나의 환경과 같은 것으로 존재한다.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이라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처럼 역사적 인물, 사건, 배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작품 속 세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을 다룬 <조디악>(2007)은 ‘실제 수사에 기초하였음’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1969년 독립기념일을 맞아 불야성을 이룬 캘리포니아 북동부 도심의 밤 풍경과 그로부터 4주가 지난 후 샌프란시스코 항만의 선착장 건물 주변의 풍경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기능적으로 시각적 볼거리로 제시된 두 풍경 모두 역사적 사료를 활용하여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는 컴퓨터로 만든 3차원 환경을 단순 볼거리가 아닌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위한 무대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워싱턴&체리 교차로에서 일어난 조디악의 범행 현장을 수사하는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면이 대표적이다. 실제 조디악의 범행이 벌어졌던 사건 현장에 블루스크린을 설치해 찍은 이 장면은 후반작업 과정에서 블루스크린이 있던 자리를 과거의 가옥과 거리 풍경을 재현한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로 대체해서 완성한 것이다. 역사적 고증을 거쳐 정교하게 구현된 그 역사적 공간은 작품 속에서 시각적 스펙터클인 동시에 서사적 공간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역사적 이미지와 이야기는 영화의 이미지와 이야기와 겹친다. 그런 점에서, <조디악>은 영화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가 상호 침투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경우로 볼 수 있다. 영화의 세계-만들기는 연출자의 의도나 관객의 해석에 따라 특정 이념과 의미를 도출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실화 기반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고, 그 작품들에 안정, 평화, 법, 질서, 안보와 같은 보수적인 가치를 반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2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연쇄 소년 납치 사건을 다룬 <체인질링>(2008)은 디지털 시각효과로 만들어진 대도시의 거리의 풍경을 통해 당시 대도시의 삶이 여성에게는 성차별적이고 어린아이에게는 폭력적이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도시의 거리는 여성과 어린아이가 안심하고 활보하기 힘든 무법천지와 같다. 한편 FBI의 창설자 J. 에드거 후버의 이야기를 다룬 <제이. 에드가>(2011)는 역사적 풍경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에 권력과 질서에 대한 욕망을 담는다. 이 영화는 총 두번에 걸쳐 대통령의 취임식 기념행사를 바라보는 주인공 에드거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드거의 시선으로 펜실베이니아 대로를 둘러싼 인파와 행렬을 묘사한 그 두개의 장면은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식 행사와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취임식에 관한 것이다. 각각 역사적 고증을 거쳐 대로의 포장, 건축물의 외관, 자동차의 디자인 등 세부 사항을 컴퓨터로 정교하게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에드거는 닉슨 대통령의 취임식을 보면서 “모든 시민에게는 자신의 가정과 아이들에 대한 위협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읊조린다. 그 말 속에는 시민, 가족, 안정, 질서라는 너무나 단순해서 거부하기 힘든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가치가 담겨 있으며, 바로 그런 것들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관객과 공유하고 싶은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세계와 그것을 지탱하는 세계관을 만드는 일과 같을 것이다.

못다 한 고백, 데이비드 린치를 향한 추모들

데이비드 린치가 세상을 떠난 날. 자택에서 데이비드 린치 추모의 밤을 보낸 이경미 감독이 <씨네21> 앞으로 추도사를 보내왔다. 이경미 감독의 애통한 마음을 최대한 필자의 문체를 살려 싣는다. 린치와 협업한 영화인들이 남긴 메시지도 짧게 전한다. 이경미 감독(영화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연출)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데이비드 핀처도 있지만 내 인생의 첫 데이비드는 만리장성을 통과하고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만든 환상의 마술사 데이비드 코퍼필드다. 마술사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그전에 숟가락을 구부렸던 유리겔라도 있지만 오늘만큼은 데이비드 이야기만 하고 싶다. 나는 코퍼필드의 충격적인 마술을 접한 뒤로부터 한참이 지나 남들보다 늦게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3인의 데이비드가 연출한 작품을 한꺼번에 접할 수밖에 없는, 대혼돈을 겪고 말았다. 참고로 나는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놀랍도록 기억하지 못한다. 핀처는 비교적 식별하기 쉬웠지만 솔직히 어렸을 땐 린치와 크로넌버그는 조금 헷갈렸다. 그래서 나는 린치를 구별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으로 환상의 마술사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좀 이용했다. 그러니까 바로 ‘마술사’ . <로스트 하이웨이>를 처음 봤던 때를 기억한다. 금지된 환각제에 취한 것 같은, 굉장히 이상하고 달콤한 기분에 휩싸여서 이런 내 마음을 누가 이해해줄까 싶었고 그 뒤로 <트윈 픽스>와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몇번이나 다시 봤는지 모르겠다. 지난해에는 린치가 구멍난 바지를 수선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특별한 기술도 아닌 방법을 ‘짜잔’ 하며 되뇌는 친절한 모습을 보며 부디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주기를 빌었다. 그의 부고를 접한 날, 나는 남편과 함께 <엘리펀트 맨>을 다시 봤다. 영화를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엘리펀트 맨>이 슬픈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 정도로 슬펐던가 싶을 정도로 많이 울었다. <엘리펀트 맨>의 마지막 대사다. “Nothing will die. The stream flows, the wind blows, the cloud fleets, the heart beats. Nothing will die.”(아무것도 죽지 않으리. 시내는 흐르고,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가고, 심장은 뛴다. 아무것도 죽지 않으리) 참 이상하게도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죽었지만 영원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금쯤 드디어, 마침내, 바로 거기에. 분명히 도착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함께 작업한 이들이 추억하는 데이비드 린치 배우 카일 매클라클런(<블루 벨벳> <트윈 픽스> 등 출연) “신비롭고 직관적인 사람에게서 창의의 바다가용솟음쳤다. 그는 정답이 아닌 질문만이 우리를우리답게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걸 이해하는아티스트다. 세계는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지만, 나는 나의 미래를 꿈꾸어주고 스스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를 여행하게 만들어준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배우 나오미 와츠(<멀홀랜드 드라이브> <트윈 픽스> 출연) “10년이 넘도록 오디션에 낙방해 배우를 그만두려 할 때데이비드를 만났다. 스스로를 잃어가 세상으로부터나를 숨겼던 그때, 데이비드는 어떻게 나를 발견한것일까? 그는 정말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사람이었다.그가 만든 특별한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어행운이었다. 잘 가요, 내 친구 데이비드.당신의 모든 것에 감사해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파벨만스>) “세상은 독창적이고 유일무이한 그의 목소리를 그리워할 것이다. 린치의 영화는 이미 시간의 시험을견뎌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터뷰] 동맹과 의심, <더 리크루트> 시즌2 배우 노아 센티네오, 유태오

미국중앙정보국(CIA)은 할리우드 첩보물의 배경으로 익숙하다. 국가안보를 둘러싼 거대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곳에서, 신출내기 변호사 오언 헨드릭스(노아 센티네오)가 속한 법무과는 영화적 스포트라이트 바깥에 있는 작은 조직이다. 현장에서 목숨을 건 첩보활동이 벌어지는 동안, 법무과 직원들은 주로 책상에 앉아 민형사소송을 준비하며 음지에서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파민 중독자’ 오언에게는 무채색의 사무실보다 피 튀기는 바깥세상이 훨씬 잘 어울린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생활했다는 전사가 드러나는 <더 리크루트>의 두 번째 시즌에서 오언은 미국과 한국이라는 두 동맹국의 교차로에서 새로운 임무를 수행한다. 동맹이라는 이름 아래 흐르는 긴장과 의심, 그리고 끝없이 서로를 염탐하는 양국 정보기관의 복잡한 관계를 대표하는 두 인물, 오언 헨드릭스 역의 노아 센티네오와 장균 역의 유태오를 만났다. - 새 시즌의 주무대는 한국이다. 지난 시즌에서 베이루트, 빈, 몬트리올 등을 방문했던 오언이 이번에는 서울에 도착해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선보인다. 한국에서 촬영하면서 새로운 영감을 받았나. 노아 센티네오 한국 문화는 정말 생동감이 넘친다. 갤러리, 박물관 등 로컬 아트 신에 뛰어들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태오가 레스토랑, 시장, 탐험할 만한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에게 추천받은 모든 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유태오 노아는 이번 작품의 제작 총괄로 항상 바빴다. 동료 배우이자 현장의 리더였고, 혼자서 많은 신을 소화해야 했다. 상대역으로서 그의 작업 방식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로웠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일본, 러시아까지 뻗어나가는 알렉시 홀리의 대본도 재미있었다. - 인터뷰, 소셜미디어를 통해 두 사람은 미술, 영화, 연기에 대한 열정을 공통으로 드러내왔다. 시리즈의 파트너로서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있다면. 노아 센티네오 팀원들과 브런치를 함께했던 날이다. 태오가 그 공간에 들어왔을 때 생각했다. 나처럼 펑퍼짐한 옷을 좋아하는 듯 보이는데, 정말 편안하고 멋진 느낌이라고. 새로운 시즌에 완전히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는 훌륭한 파트너이자 인간상이다. 태오의 에너지는 타인을 향한 친절함에서 온다. 누군가와 하루 종일 함께해야 한다면 그건 아마 태오 같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유태오 오디션 과정 중 케미스트리 리딩을 하는 단계에서부터 우리 사이에 흐르는 비슷한 파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작업 전엔 친밀하게 지낼 기회가 없었는데도 서로에게 끌리는 에너지를 느꼈다. - <씨네21>과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아시아 남성 묘사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건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더 리크루트>의 새로운 캐릭터 ‘장균’이 자신에게 적합한 역할이라 확신하게 된 계기는. 유태오 장균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기에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캐릭터다. 그의 이야기는 사랑과 믿음에 관한 것이다. 배우로서 항상 역할을 선택할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캐릭터를 만난 것은 운이 좋았다. ‘나의 캐릭터가 이러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에 온 우주가 대답해 주었달까. (웃음) 특정 성별과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스토리텔링은 우리에게 그것에 도전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한다. 문화적 경계를 초월하는 인간적 동기를 가진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좋은 스토리텔링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더 리크루트>의 모든 캐릭터엔 뚜렷한 동기와 욕망이 있으며, 이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새로운 사건이 추동되는 구성이다. 권태로운 일상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더 큰 무언가를 갈망하는 오언의 핵심 욕망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특히 이번 시즌 들어 그의 핵심 욕망이 진화했다고 생각하나. 노아 센티네오 물론이다. 시즌1에서 오언의 목표는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 그리고 변호사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었다. 시즌2에서 그의 욕망은 앞서 실패한 사건이 불러온 혼돈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바뀐다. 그는 CIA를 떠나고 싶은 욕망과 살아남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러한 상황에 장균이 등장하면서 오언은 일시적으로 그의 사랑 이야기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 - 오언의 생존 욕구는 육체적 생존과 직업적 생존 중 어느 쪽에 더 가깝나. 노아 센티네오 처음에는 확실히 육체적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존을 쫓으며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조직으로부터 버려져 감옥에 가거나 모든 경력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적 순간이 찾아온다면, 결국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유태오 장균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육체적, 직업적 생존에 실패하더라도 사랑에 투신하려는 것이 그의 핵심 욕망이라는 점에서 오언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 CIA 변호사와 국정원 요원이라는 직업적 상황에 의해 두 캐릭터는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며, 이는 생사의 갈림길로도 연결된다. 세계 제일의 정보력을 지닌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두 사람의 처지에 몰입하는 데 가장 주요하게 작동했던 대사가 있다면. 노아 센티네오 시즌 후반에 두 인물이 생생하고 감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이들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내고,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깊은 굴곡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유태오 “내가 주도권을 잡겠다”라는 오언의 대사가 있다. 정치적, 인간적 불확실함에 끌려다니던 젊은 변호사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는 중요한 대사다. 관객 또한 이 순간 진심으로 그의 직업적 성공과 육체적 생존을 바랄 것이다.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나의 최초의 꿈

새해가 밝았다. 워낙 목표, 계획을 뚜렷하게 세우는 편은 아니라서 1월1일의 아침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맞이했다. 늦은 오전,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할머니! 곧 찾아뵐게요! 힘들게 아무 요리도 하지 마시고 계셔요!”라고 하면 할머니는 바로 “무슨 음식이 제일 먹고 싶니?” 하신다. 대화가 한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지만, 또 그렇게 사랑을 가득 느끼고 전화를 끊는다. 전화 통화에서 스쳐 지나가듯 계란찜을 먹고 싶다고 하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새벽부터 계란찜을 만들고 기다리고 계셨다(계란찜뿐만 아니라 온갖 반찬에 국, 막 새로 한 밥까지). 할머니댁 대문을 열자마자 코끝에 퍼지는 따뜻한 냄새들. 아니다, 향기라고 해야겠다. “아이고, 할머니!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니까, 못 말려!”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아, 이성을 잃은 채 식사를 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차린 게 없어서 어떡해. 미안해, 우리 손녀”라고 하신다. 후식으로 직접 담그신 식혜를 주시면서도 계속 더 챙길 것이 없는지 바쁘게 움직이셨다. 할머니의 음식 안에는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는 느낌이다.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의 설렘, 손녀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혼자 흘리시던 외로웠던 시간, 백색소음만이 가득한 적막의 공간,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퍼지는 함박웃음. 나는 할머니 품에 꼬옥 안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의 새해 다짐이었다. 할머니는 7남매의 어머니이시다. 외삼촌, 외숙모, 이모부, 이모들의 생일은 물론이거니와 손자, 손녀들의 생일까지 다 기억하신다. 매번 잊지 않고 전화를 주시는데, 끝인사는 항상 “할머니가 우리 민하 하늘만큼 땅만큼 무지무지 사랑해”이다. “사랑하는 우리 민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예쁜 나의 손녀 항상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민하 진심으로 사랑한다. 민하야 네가 하고 싶은 일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기 바란다. 이 외할머니는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항상 사람 앞에 서면 준욱이 든단다. 우리 민하는 모든 것이 다 예쁘고 공부 많이 하고 어듸서나 당당하지. 사랑하는 민하 할머니 친구들한테 자랑한단다. 앞으로 너의 소원 잘 이루엇으면 좋켓다. 삼공주 내가 제일 사랑한단다. 할머니 글씨 읽기 힘들을 것이다. 고쳐가며 읽어다오. 사랑한다 요놈 세 새끼. 이만 그친다. 민하야 잘 있거라. 이지수 외할머니 보바나가 씀(보바나 거꾸로 읽어보거라) 하하 우수어라. 민하야.” 대학 졸업 당시 할머니가 써주셨던 편지다. 나는 이 편지에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귀여움이 한도 초과인 이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은 기억만이 있다. 몇년이 지났지만 그녀의 손을 잡으며 이야기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할 줄 아는 것이 너무나도 많은 사람, 누구보다 열정이 넘치고 한지같이 고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우리 할머니라고 확신하며 살아왔다고.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나의 최초의 꿈은 할머니였다고. 조금 더 늦기 전에 할머니의 진심에 내 음성으로 회신하리라. 또 다른 새해 계획이 생겼다.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사람은 마음이 고와야 한다고 말이다. 어긋나지 않는 마음이 가장 큰 무기라고 말씀하셨다. 명절날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강인하게 내뱉으신 그 문장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내가 안고 살아온 가치관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이 고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뒤틀린 순간에도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본연의 마음, 순수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정신, 마음이 닿는 한의 이해심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잃을 것 같다는 순간들이 올 때가 많다. 여러 경험을 통해 발전할 때도 많지만 가끔은 지쳐서 판단이 잘 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갑자기 수수께끼 같을 때, 자신이 너무 싫어 앞이 뿌예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 놓고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니의 세월과 목소리를. 그래서 나는 그녀가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을 줄 수 있었는지를 상상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이 또 어디론가 흩어져버릴까봐 또다시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런 위대한 진심을 생각한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면 용기가 생기는 날이 많다. 그래, 나는 ‘어듸서나 당당한’ 김민하야, 하면서 말이다.우리 할머니는 1929년생이시다. 지난해 태어난 나의 첫 조카는 2024년생이다. 거의 1세기 차이가 나는 이 두 여성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참으로 벅찬 순간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채이에게도 흐르길. 채이의 온도가 할머니를 따뜻하게 감싸주길 혼자 소망하며 둘이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날 이었다. 2월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2025년이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시작한 새해이지만 생각해보면 항상 이렇게 느낀 점과 다짐들이 모여 새로운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새해를 맞이한 여러분의 느낌도 궁금하다. 듣고 싶다. 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겨울을 작별하듯 비추는 햇살이 심상치가 않다. 봄이 올 것만 같다. 겨울의 끝자락을 모두 각자의 이야기로 채워나가시길 바라며, 독감이 유행하는 요즘, 건강에 유의하시기를 당부드린다. 다음 글에는 벚꽃라떼를 마시며 만날 수 있길 바라며….

이민자 서사와 건축적 구조로 읽는 <브루탈리스트>, 대칭과 반복으로 설계한 미국의 부조리

“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 구겐하임미술관 등을 건축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남긴 말이다. <브루탈리스트> 속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헝가리에서 위대한 건축을 남겼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그는 아내 에르제벳(펄리시티 존스)과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와 미국에서의 새 삶을 꿈꾸며 그들보다 먼저 미국으로 향한다. 라즐로는 도시 재건을 위한 공공건축의 잡역부로 일하지만 사촌이 운영하는 가구점의 쪽방과 노숙인 보호시설을 전전하며 곤궁을 면치 못한다. 그런 라즐로 앞에 몇년 전 그를 매몰차게 내쫓은 부호 해리슨 밴 뷰런(가이 피어스)이 나타난다.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저택에서 먹이고 재우며 그에게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딴 지역 문화센터의 건축을 의뢰한다. 라즐로는 타향살이 중에 입지전적으로 살아남아 미국에서도 위대한 건축을 남긴다. 하지만 라즐로는 라이트의 격언과 달리, 위대한 인간은 되지 못한다. 그의 삶은 연일 잔혹해 존엄 따위를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이민자의 수난으로 세운 미국 수많은 소설, 영화가 지금까지도 재현하듯 미국은 이민자가 세우고 빚은 나라다. <브루탈리스트> 역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간 이민자가 자신의 바람이 어떤 허상에 불과했는지 통감하는 이야기다. 여느 이민자 영화처럼 증기선을 타고 엘리스섬에 도착한 라즐로가 처음 마주한 미국의 단상은 뉴욕의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이다. 대개 자유의 여신상은 영화 속에서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자 인물 앞에 놓인 거대한 운명의 메타포다. 따라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배 아래 이민자를 노려보는 듯한 숏으로 찍힌다. 반면 <브루탈리스트>는 영화의 포스터에도 드러나는 것처럼 카메라를 라즐로 아래에 두고 자유의 여신상을 뒤집어 찍었다. 라즐로 눈에 비친 미국의 이상은 두 다리 대신 위태롭게 머리로 지탱해 서 있고, 정의의 횃불은 허드슨강 하구에 처박혀 있다. 이는 라즐로가 꾸는 꿈이 얼마나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지 드러내는 일종의 선포다. 최근 <페어웰> <미나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 A24가 제작, 배급한 현대 미국 배경의 이민자 영화는(<브루탈리스트>도 A24의 배급작이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 정체성 탐구가 내러티브의 중요한 축을 이루었다.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삶을 통해 고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핍박받는 이민자의 삶을 다루지만 그렇다 하여 유대인의 정체성 확립을 화두로 삼진 않는다. 오히려 <브루탈리스트>엔 고전적 흥취가 가득하다. 영화는 공개 당시 아메리칸드림을 품은 이민자가 엄혹한 1950년대의 미국에서 살아남는 서사라는 점에서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1955)과 짝지어졌고, 유대계 이민자 남성의 일대기를 긴 대서사시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에 비견됐다. 러닝타임 내내 중독과 향락에 취해 허우적대지만 예술가로서의 비전은 놓칠 수 없는 라즐로와 고등교육을 마쳤지만 미국에서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에르제벳을 좌절시키는 존재는 미국 그 자체를 육화한 캐릭터 해리슨이다. 해리슨의 건축 의뢰와 일방적인 후원은 미국의 재건을 위해 쇠망한 유럽의 잔재를 무작정 자본으로 편입하려 했던 전후 미국의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재정과 권력에서 모두 우위를 점하는 해리슨은 라즐로를 정신적으로 유린하고 성적으로 학대한다. 거듭된 착취 속에 라즐로는 건축 사조 브루탈리즘의 어근인 ‘브루탈’(brutal)의 의미처럼 잔혹해지고, 이내 미국의 폭력을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이때 접미사 ‘-ist’가 ‘어떤 것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제목 ‘The Brutalist’는 건축물인 동시에 잔혹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리하여 브루탈리스트는 잔혹의 주체인 해리슨(혹은 미국)일 수도, 똑같게 잔혹하게 살아남는 라즐로일 수도 있다. 영화 속 미국은 낙관이 가득하고 예술은 불멸한다. 반면 그 낙관에 동원한 인간은 비루하고 예술가는 필멸할 뿐이다. 대칭과 반복으로 세운 영화 스스로 건축물이 되고 싶었던 걸까. 프롤로그와 1부, 2부와 에필로그 그리고 그 사이의 인터미션으로 이루어진 <브루탈리스트>의 구조는 실로 건축적이다. <브루탈리스트>는 대칭과 반복을 작품의 조형 원리로 사용한다. 전체 뼈대에 국한한 설명이 아니다. 영화의 세부 장면 역시 대칭과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조피아의 얼굴이 프롤로그를 열고 에필로그를 닫으며 수미상응한다. 프롤로그의 시작과 1막의 끝은 에르제벳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채운다. 1막 초반의 라즐로는 매춘부와, 2막 초반의 라즐로는 에르제벳과 유사 성행위를 나눈다. 프롤로그에서 뉴욕행 여객선의 계단을 오르는 라즐로와 2막에서 뉴욕 마천루 사무실의 계단을 오르는 마이클(피터 폴리카푸)은 핸드헬드로 찍은 트래킹숏에 담긴다. 프롤로그 끝의 휘프 패닝으로 찍은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은 1막의 45도씩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공사 현장의 판금, 2막 끝의 뒤집힌 십자가 숏과 조응한다. <브루탈리스트>의 구조적 특징은 왜 필요했을까. 몇 가지의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먼저 브래디 코베 감독은 전기영화나 역사물이 인물의 일대기를 선형적으로 묘사하거나 명확한 인과관계로 플롯을 구축하는 것, 혹은 연표로 항목화하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대신 그가 생각하는 역사의 미학은 반복에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말하는 것과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며 현재의 우리에게 어지럽고 기묘한 영향을 끼친다”(<르 시네마 클럽>)라고 역설하는 코베의 사관(史觀)이 중첩되고 변주되지만 서로에게 인과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장면의 배치와 닮았다. 한편 이같은 반복과 대칭은 작품의 내적 요소와 이격을 이룬다. 작품의 형식과 달리 브루탈리즘 건축은 비대칭과 불균형을 추구한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지난 베니스국제영화제의 기자회견에서 라즐로의 궤적을 “파시즘으로부터 도망친 남자가 자본주의를 맞닥뜨리는 이야기”라 정리한 바 있다. 여기서 잠깐. 파시즘 건축이나 레니 리펜슈탈 등 나치즘에 동조했던 예술가들은 규격과 통제, 좌우대칭과 동형반복을 미의식의 요체로 삼았다. 달리 말해 이 영화는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을 그가 미국으로 도망치기 이전 그를 괴롭게 한 세상이 추구하던 미학에 가둔다고 볼 수 있다. 압도적인 서사를 지닌 세 캐릭터가 종적이 묘연한 퇴장을 헐겁게 맞이한다는 점도 치밀하게 짜인 작품의 구조와 대립한다. 에필로그 직전 해리슨은 실종된다. 에필로그 속 에르제벳은 이미 고인이며 라즐로는 무슨 일인지 언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각 캐릭터를 독 안에 든 쥐처럼 몰아가던 스토리의 논리가 무색하게 결말에 이르면 작품의 구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요소가 전조 없이 일시에 증발해버린다. 비평가들은 <브루탈리스트>에 상찬을 보내다가도 대뜸 영화의 장력을 무력화하는 에필로그가 이야기 끝에 맞붙어야 할 당위에 의문을 표했다. 이 결말은 해리슨이 라즐로에게 “왜 건축을 하나요?”라고 묻자 라즐로가 “어떠한 격변이 있어도 오래 살아남는 것을 만들기 위해 건축을 합니다”라고 답하는 문장과 통한다. 영화는 라즐로와 에르제벳, 해리슨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산화한다. 하지만 그 구조만은 엔딩크레딧까지 버리지 않는다. 끝까지 살아남는 집요한 대칭과 반복. <브루탈리스트>가 건축물의 위용을 뽐내도록 만드는 콘크리트다.

죄와 무구 사이…오컬트적 세계를 복합적으로 그려내다, <퇴마록> 김동철 감독 , 이우혁 크리에이터

한국형 오컬트 장르의 효시로 각인된 0세대 웹소설 <퇴마록>은 1993년 PC통신 하이텔에 연재된 이래 다양하게 리메이크되었다. 첫 연재 시점 이후 32년 만에 로커스 스튜디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원작이 가진 힘을 살린 리메이크작을 바라는 오랜 팬들의 기다림과 애니메이션으로 그 방대한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될 새로운 관객의 기대를 사로잡아야 하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2월 개봉을 앞두고 <퇴마록>의 김동철 감독과 원작자 이우혁 작가를 만나 애니메이션 제작 비화를 즐겁게 청해 들었다. - 이번에는 애니메이션이다. <퇴마록>을 리메이크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과 목표가 있었나. 이우혁 애니메이션 제작은 개인적으로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이 작품에 환상적인 요소가 많으니 애니메이션이 가장 현실적인 수단 같았다. 실사영화라면 세트 제작도, 특수효과도 제작비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나. 중요한 건 애니메이션이기에 캐릭터의 이미지가 고착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부분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애니메이션은 <퇴마록>을 리메이크하기에 가장 적합한 포맷이었다. 제작사인 로커스 스튜디오에서 제안이 왔을 때 내가 조금 까다롭게 굴기는 했어도 흔쾌히 응했다. 김동철 제작사에서 <퇴마록> 리메이크안이 나오고 이우혁 작가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을 때 내부에서 굉장히 흥분했었다. 국내 애니메이션은 주로 아동 관객을 타깃으로 한 작품에 편중돼있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우리의 목표와 포부는 성인 관객도 즐길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의 스펙트럼을 넓혀보자는 데 있었다. - 김동철 감독은 <퇴마록>의 연출자로, 이우혁 작가는 각본이 아닌 크리에이터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협업은 어땠나. 이우혁 원작자여도 내 머릿속에는 이미지가 없다.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집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여백을 활용하며 쓰는 편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처럼 어떤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드는 작업이 어렵다는 것도 잘 안다. 룩이 나오려면 고증과 설정을 짚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역할은 <퇴마록> 이 원작의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바운더리를 정하는 것이었다. 김동철 기획 기간이 길었다. 방향이 바뀌면서 시나리오가 나왔다 엎어지고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무래도 2차 창작물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다 보니 기획 단계에서 디자인이 나오면 먼저 작가에게 자문을 구하듯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여기에 이런 부분이 보강되면 좋겠다’는 식으로 코멘트를 받았다. 자유로운, 그런데 제약 또한 많은 - 무협 요소가 있는 오컬트, 판타지 장르이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을 것 같은데. 김동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도 시작할 땐 겁이 없었다. 그런데 작가와 만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들여선 안되는 곳에 발을 들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퇴마록>의 세계는 방대했다. 팬으로서의 입장은 접어두고 원작자가 제시하는 비전에 어떻게 맞춰야 할지에 포커스를 두고 하나둘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우혁 장르와 원작의 세계관 접근이 먼저였다. 감독을 만나 던진 첫 질문은 “오컬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단순히 공포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컬트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인 종교는 죽음을 향한 인간의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장르로 접근하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과 불안에 대항하는 것이 오컬트다. 그래서 오컬트에서는 마치 개인이 원시로 돌아간 듯 각자가 맞서 싸우는 것이다. 죄와 무구 사이에서 죽음을 피해가거나 피해갈 수 없도록 만드는 운, 인간 내면의 불안, 이 모든 게 내 소설에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김동철 원래의 기획이 24부작 시리즈였기 때문에 전체 스토리라인에 ‘하늘이 불타던 날’뿐 아니라 원작의 뒷부분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로지 시리즈만을 위한 자투리 에피소드도 작가에게 여럿 받았다. 소설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와 <퇴마록> 세계관을 작가에게 직접 들으며 보다 깊이 접근할 수 있었다. 이우혁 작가가 강조한 키워드에 동의했고 어떻게든 작품으로 녹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주인공 4인의 캐릭터 디벨롭먼트 과정도 궁금하다. 김동철 러닝타임이 짧아졌으니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비주얼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에 액션 애니메이션으로 접근하다 보니 착오도 있었지만 결국 캐릭터가 가진 히스토리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향했다. 박 신부는 종래의 사제 이미지에서 죄의식이 더 강조되었으면 해서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이우혁 작가도 수용해주었다. 이우혁 박윤규 신부 캐릭터는 대대적으로 바뀌었다. 원작의 박 신부에게는 수염이 없다. 파문당했으니 수염이 있는 모습이 인물 접근이나 시각적으로도 더 낫다는 게 감독의 입장이었고 나중엔 나도 그게 괜찮아 보였다. 또 이전 버전에서는 몸집이 왜소했다가 이번엔 커졌는데 원작의 묘사에 가까워져서 아주 만족스럽다. 준후는 미형 캐릭터여야 한다고 처음부터 말했다. 시대를 타는 룩을 가진 캐릭터는 승희인데 여성의 의상트렌드가 어떤지 몰라서 전적으로 맡겼다. 현암은 소설에서 애매하게 묘사돼 있어 왜 미남으로 만들었냐는 말이 분명 나올텐데 내가 보기에 현암은 미남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김동철 맞다. 현암은 체조선수 같은 체형에 군중 속에 있으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라고 되어 있다. 다만 작화로 그릴 때 정말 평범하면 주인공으로 보이지 않기에 어느 정도 신경 썼지만 현암의 얼굴을 가장 비대칭으로 그려서 잘생겨 보이게 하지 않았다. 승희는 기획 당시 제일 진취적이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방향을 잡았다. 디자인하고 모델링해서 제작 들어갔을 때만 해도 파격적이었는데 시간이 오래 흘러서 그런지 파격적으로 보이지 않는 듯해 아쉽다. - 애니메이션 비주얼라이제이션이 원작 <퇴마록>을 표현하는데 더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을까. 이우혁 전반적으로 더 자유로운 것이 맞다. 문제는 제약 요소도 많다는 것이다. 고증과 구체화, 대중성이라는 면에서 분명히 제약이 있다. 각자가 상상하도록 글을 쓰는 게 정말 자유롭지. 그런데 그마저도 다 다른 것을 상상한다. 모두를 만족시킬 디자인을 뽑아내기란 불가능 하다. 그러니 이미지를 정하는 작업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김동철 <퇴마록> 룩이 공개된 후 <아케인>과 비교하는 반응이 있었다. 카툰 렌더링이 비슷하다는 의미 같은데 <퇴마록>의 기획도 못지않게 오래되었다. 공개 시기가 계획보다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퇴마록>도 오랜 연구 기간을 거쳐 많은 인원이 함께 열심히 했다. (웃음) - 소설은 1993년 하이텔에 연재될 당시가 배경이다. 각색에 주고 싶었던 변화는. 이우혁 <퇴마록>의 시작은 1990년대이지만 뒷부분은 2000년대 이후다. 그 첫 부분을 가져 왔으니 손 볼 데가 있더라도 소설은 근본적으로 어떤 시대에든 통용될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디테일이 바뀌어도 결국 인간이 지닌 본질을 다룬다면 시대 배경의 다름은 크게 중요치 않다. ‘하늘이 불타던 날’은 그런 면에서 리메이크하기 수월했고 큰 맥락에서 주고 싶은 변화는 없었다. 김동철 시대상의 변화는 당연히 따라잡으려 노력한 부분이고 각색의 중점을 드라마를 살리는 데 두었다. 앞서 말했듯 24화 시리즈에서 극장판으로 기획이 바뀌면서 시리즈 1화에서 4화 까지의 에피소드를 압축한 게 지금의 <퇴마록> 이다. 소설에서 ‘하늘이 불타던 날’은 인물이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장인데 뒤에 일어날 사건을 염두에 둔 캐릭터의 빌드업을 얼마나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에 있던 부분을 제작 도중에 바꾼 것도 꽤 되는데 이우혁 작가가 놀랐을 수도 있다. 이우혁 놀랐다. 시나리오에 없으면 나는 알 방법이 없거든. 과거 장면 같은 것을 보니 애 많이 썼겠더라. 나중에 진심으로 칭찬했다. 모든 것을 정석대로 - 원작이 방대한 자료조사로 이름이 나 있다면 애니메이션 <퇴마록>은 작화의 세밀함과 디테일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 같다. 김동철 로케이션 헌팅으로 많이 돌아다녔다. 편의점 장면도 전부 허가받고 그렸다. 이 이야 기가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서사라는 점을 배경으로 말하고 싶었다. 이우혁 작가도 작품을 처음 본 뒤 했던 말이 산 풍경이 굉장히 한국적이라는 코멘트였다. 대웅전 탱화도 모두 수작업이다. 작가의 설명을 따라 해동감결과 기존 시리즈 기획의 뒷부분에 담겼던 내용, 해동밀교의 탄생 비화, 이렇게 세 점이고 작품 안에서 소개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원작의 세부 설정을 끌어안으려는 노력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이우혁 완성본을 보고 감탄했다. 특히나 숲과 산을 보고. 정말 한국적인 경치 그 모습 그대로다. 김동철 이 프로젝트의 존재 이유는 기술과 능력은 갖추었되 국내에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 거의 없다는 문제인식에 있었다. 싱크를 맞추는 작업도 굉장히 노력한 부분이다. 애니메이션의 기본 제작 방식은 성우 녹음을 먼저 하고 애니메이터들이 그걸 보며 작업한다. 녹음을 세번이나 해서 성우들도 고생이 많았다. 무엇이든 정석대로 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공을 들였다. - 목소리 캐스팅에서부터 완성까지 진행 과정은 어땠나. 김동철 작가가 대사를 전부 리딩해줬다. 그 리딩 분석을 거쳐 가장 어울릴 목소리를 찾는 데 주력했다. 연기 톤과 목소리가 주는 연령대의 느낌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숙고한 부분이다. 중성적인 느낌으로 연기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기 때문에 아이 역할을 맡은 성우들은 아주 어려웠을 거다. 이우혁 녹음할 때 보려고 했는데 안 보여주더라. 그래서 감독이 생각하는 뭔가가 있나 보다 했다. 나중에 군소리 좀 보탰다. 김동철 많이 숨겼다. 서로 이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작에 돌입하면 더이상 바꿀 수 없는 상황을 이우혁 작가도 이해해주었다. 완성까지 숨겼다가 보이고 한번에 크게 수정하자는 마음으로 경주마처럼 임한 시기였다. 그러면서 걱정도 됐다. 누가 ‘어, 이거 원작이랑 다른 것 같은데’ 하면 ‘작가님은 이해해주실 거야’ 했다. (일동 웃음) 다른 누구보다 내가 이우혁 작가의 생각이 뭔지 잘 알 것 같았다. 이우혁 설정의 본질만 남아 있다면 나머지는 바꿀 수 있다. 나보다 잘할 수 있다면 더 좋고. 내 작품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또 만인에게 다 맞출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최대 다수가 만족할 수 있다면 약간의 변화는 오히려 좋다. - 애니메이션 <퇴마록>에 품은 기대를 말한다면. 김동철 편집으로 들어낸 컷 분량이 꽤 길다. 기대를 넘어 바람이 있다면 이번 <퇴마록>이 잘돼서 시리즈로 처음부터 다 보여줄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이우혁 시리즈로 만들지 못한 아쉬움은 나 역시 크다. 과정이 길었고 녹록지 않았다는 것만 알아달라. 뭐, 어른들의 사정이 있는 거지. (웃음) 이렇게 말해도 <퇴마록> 팬들은 이제 다 이해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인터뷰] 스며드는 사이, <써니데이> 배우 최다니엘, 정혜인

전 국민이 다 아는 배우 오선희(정혜인)는 요즘 그 사실이 원망스럽다. 떠들썩한 이혼소송으로 심신이 지쳐 도피하듯 고향 완도를 찾는다. 그동안 한번도 방문하지 않아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고향은 너른 품으로 그를 안아준다. 조건 없는 환대의 중심에는 첫사랑이자 동네 오빠였던 동필(최다니엘)이 있다. 전혀 다른 궤적을 살다가 재회한 둘은 서로의 생채기를 보듬으며 햇볕이 드는 자리로 움직인다. <써니데이>의 배우 최다니엘과 정혜인은 인사하자마자 칭찬과 농담을 쉼 없이 주고받으며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들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이어가는 공간에는 영화가 머금은 온기가 가득했다. - 따스함이 넘실대는 시나리오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떻게 읽었나. 최다니엘 공감이 많이 갔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는 동필의 삶을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의 기준에서 그리지 않더라. 꿈과 무관한 삶이 보통이고 현재의 그 삶을 충실히 살아가면 된다는 영화의 태도가 내 가치관과 맞아떨어졌다. 정혜인 센 역할, 액션영화를 주로 해왔지만 실은 감성적이고 내면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써니데이>는 그런 내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로맨스를 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크던 차에 <써니데이>가 들어와 더 끌리기도 했고. 선희는 일적으로는 성공했어도 사랑에는 허기를 느끼는 인물이다. 그가 부족함을 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끝점에서 새출발한다는 내용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 영화의 톤이 밝아서 그렇지 사실 두 인물 모두 어두운 터널 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선희는 타인의 시선을 피해 숨고 싶어 하고, 동필은 생전에 부모님을 잘 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부모님의 묘 옆에서 텐트 생활 중이다. 맡은 역할이 각자에게 어떻게 다가왔나. 정혜인 선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어본 적은 없으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이해됐다. 이룬 걸 다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선택과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에게 다시 마음을 여는 과정을 ‘나라도 그랬을 거야’라고 공감하며 따라갔다. 사랑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 닮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최다니엘 부모님 묘를 지키는 동필이 내게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동필의 선택은 부모님이 그만큼 엄청난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라는 의미일 텐데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묘를 돌보는 풍습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가 완도라는 고향을 포함한 옛것을 존중하는 캐릭터라는 해석을 더할 수도 있었다. 동필을 상상하면서 말없는 아버지의 등을 자주 떠올렸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어디 가서 풀지 않고 혼자 다 안고 가시지 않나. 그렇게 마음속에 많은 사연을 가진 묵묵한 인물로 동필을 표현하고 싶었다. 정혜인 흐린 날이 있어야 맑은 날이 더 빛나고 밤이 지나야 아침이 온다는 말이 있지 않나. 선희와 동필도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고통을 견뎌냈기 때문에 용기를 내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완도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진행했다고. 세트 촬영이 주인 작품을 촬영할 때와는 체감이 달랐을 것 같다. 최다니엘 서울 분량 조금 빼고는 완도에서 반, 거기서 배 타고 한 시간쯤 들어가면 있는 청산도에서 반을 찍었다. 촬영하는 한달 동안 섬에서 살았다. 정혜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바람이 강하게 불면 배가 뜰 수가 없어 들어올 방법이 없었다. (웃음) MBTI F형이라 날씨, 장소, 감정 하나하나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청산도로 가족여행을 간 적 있어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평화로운 절경 속에서 감정 연기가 얼마나 잘될까 하고 설레며 섬에 들어갔는데 현실은 달랐다. 바로 앞에 강풍기가 틀어져 있는 것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 휘청거릴 정도였고 눈은 건조해 자꾸 눈물이 났다. 최다니엘 그래서 혜인이의 감정 연기가 정말 좋았어. 눈만 뜨면 눈물이 나니까! (좌중 폭소) 나는 마침 다른 스케줄이 없는 시기이기도 했고 이참에 스태프들하고 추억도 쌓고 싶어서 완도 생활을 자처했다. 그곳 날씨가 변덕이 심했는데 눈과 비, 겨울과 밤, 흐린 날씨까지 야외가 주는 감각을 워낙 좋아해 힘든 줄 몰랐다. 그래도 화창하면 모두가 편하니까 촬영 잡힌 날은 날이 좋길 기원했다. - 재회한 두 남녀의 감정선을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이 컸을 것 같다. 너무 깊지도 가볍지도 않은 중간 지점의 미묘함을 살려야 했다. 최다니엘 동필스럽게 접근하면 둘 사이의 감정도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선희를 다시 만났을 때 동필은 선희에게 고향에 온 이유를 캐묻지 않는다. 선희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설사 끝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그와 같은 상대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동필다움이다. 부모님을 지키던 그 모습 그대로 선희 곁에 있으면서 동필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면모를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정혜인 그런 동필의 배려에 선희의 마음이 풀린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다니엘 배우와 비슷하게 접근했다. 사랑이 고픈 상태에서 첫사랑과 재회했지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건 적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당장의 감정보다는 어린 시절 동필과 함께하면서 느꼈던 순수한 행복에 집중하면서 한 발짝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차츰차츰 표현의 크기를 키우려고 했다. 최다니엘 우리 둘 다 스며드는 관계를 원한 게 아닐까? 어떤 불순물이나 조미료가 들어가 있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사이 말이다. 시간은 꽤 오래 걸리겠지만. 그런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선희에게 ‘커피 마시자, 밥 먹자!’ 이런 애드리브 한번을 안 넣었다. 정혜인 그랬으면 선희는 다시 서울로 갔을걸! (웃음) - 두 배우도 서로에게 스며든 것 같다. 호흡이 척척인데. 정혜인 선희가 동필을 만나면 기운을 차리곤 하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감정으로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처음이라 부담이 컸다. 어떻게 하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잔뜩 안고 오빠랑 얘기하다 보면 자연히 ‘그래, 할 수 있어!’ 상태가 되어서 신기했다. 상대 배우의 스타일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결이 잘 맞는 분을 만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써니데이>는 행운이었다. 연기도 현장도 물 흐르는 듯이 진행된다는 느낌이었고, 이 모든 게 다 최다니엘 배우 덕분이다. 최다니엘 내가 더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는걸. 정혜인 배우와는 드라마 <저글러스>에서 만난 적 있는데 그땐 붙는 신이 거의 없어서 인사만 하던 사이였다. 이번에 <써니데이>를 함께 찍으면서 진득하게 얘기하고 호흡도 맞춰보니 멋있고 터프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굉장히 사랑스러운 면이 있었다. 긴장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 특히 매력적인데 그게 선희 캐릭터가 가진 매력과 일치했다. 그래서 혜인이의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모습이 작품에서 최대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목표이기도 했다. 영화에 혜인이 팬들도 모르고 있을 혜인이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가득 담겼다. 정혜인 선희는 빙산의 일각이야…. 더 사랑스러운 캐릭터, 더 많은 로맨스 이야기를 하고 싶다! 최다니엘 워워, 흥분했어. 지금. (웃음) - 최다니엘 배우가 하고 싶은 작품이나 캐릭터는 무엇인지도 궁금한데. 최다니엘 나도 몇년 전부터 로맨스, 멜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야 상황을 다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이해의 폭도 조금 넓어져서 용기가 생겼다. -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동필과 선희의 마지막이 <헤어질 결심>의 엔딩처럼 바다에서 끝난다. 두 배우 모두 그런 어른들의 멜로라면 어떨까. 정혜인, 최다니엘 그렇다면 정말 좋겠다! - 당장 만날 수 있는 두 배우의 올해 계획은. 정혜인 뮤지컬 한편 올릴 것 같고, 예능 <골 때리는 그녀>는 올해도 계속 간다. 그동안은 내게 맞지 않는 캐릭터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에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써니데이>를 통해 편안하게 접근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제는 설령 악역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다니엘 여행 예능과 준비 중인 작품이 있다. 감사하게도 요새 예능에서 계속 불러주신다. 웃음과 기쁨이 절실한 시대에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써니데이>가 그랬듯 남녀노소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자주 찾아뵙겠다. 최다니엘, 정혜인이 말하는 ‘써니데이’ 만드는 법 정혜인 “확실한 방법은 역시 운동이다. 헬스 말고 바깥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운동이 내게 잘 맞고 효과도 좋다. 운동하는 동안은 나를 골치 아프게 했던 고민이 싹 사라진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 최다니엘 “정면 돌파. 스트레스는 그때그때 해소하려는 편이다. 그 편이 기복 없이 건강한 생활을 꾸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힘든 순간에서조차 재미 요소를 찾으려고 한다. 그걸 버팀목 삼아 나아간다.”

진화의 시대를 횡단하는 죽음의 난장, 봉준호의 영화 세계에서 <미키 17>을 말하기

<미키 17>에서 죽음은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인류의 진화와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되는 험한 일을 도맡고, 더러는 누군가를 대신해 죽는 ‘익스펜더블’이다. 업무를 자원한 건 거창한 포부 때문이 아니라 단지 가혹한 지구의 삶을 빨리 청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건 그의 큰 실수였다. 그의 기억이나 성격, 외형은 평범한 벽돌 모양의 특수 기기에 그대로 보존되어, 그가 죽으면 그와 똑같은 내면과 외면을 가진 사람을 반복해서 프린트하게 된다. 이름 뒤에 붙은 숫자 ‘17’은 그가 16번 죽었고, 17번째 삶을 사는 중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여러 번 죽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죽음이 미키의 특권이라도 되는 양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곤 한다.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놓고 볼 때, 죽음은 미키만의 것이 아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아파트에 사는 반려견들이 죽거나 실종되며, <괴물>에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마더>에는 한 여고생이, <설국열차>에는 생존 인류 대부분이 죽는다. <옥자>에는 유전자 변형으로 몸을 키운 슈퍼 돼지들이 도살당하고, <기생충>에서는 한낮의 대저택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영화에서 죽음을 다루는 경우는 흔하고, 자신의 영화에서 매번 누군가를 죽인 감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봉준호의 영화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무언가를 촉발하는 대상이다. 죽음의 위협은 소동과 다른 세계로의 모험, 적어도 이동을 불러온다. 퍽 우습고 서글프다가도 때때로 섬뜩한 감정의 동선은 봉준호 영화 세계를 위한 안내도에서 굵게 강조할 부분이다. 복제를 통해 반복되는 미키의 삶은 큰 틀에서는 <사랑의 블랙홀>식의 타임 루프물과 통한다. 다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서로 다르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필(빌 머리)은 매일의 삶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똑같은 하루를 ‘버전 업’의 기회로 삼는다. 반면 미키는 이전 미키가 가진 삶과 죽음의 경험치를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키는 여러 번 죽었지만, 각각의 미키에게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키는 매번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는 모습이 충분히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기본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미키의 존재 방식은 죽음(과 탄생)의 가치가 추락했음을 가리키는데, 미키의 반응은 그래도 죽음은 죽음임을 시사한다. 반영과 반성의 영화사 봉준호가 매번 전보다 나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전 작품에 대한 반영 혹은 반성으로 다음 작품을 만든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설국열차>는 <괴물>에 대한 반성이다. <괴물>에서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현서(고아성)는 <설국열차>의 세계에서 요나로 귀환해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괴물>에서 끝내 딸을 구하지 못했던 강두(송강호)는 남궁민수로 귀환해 자신을 버리고 딸을 지키는 꿈을 이룬다. <미키 17>은 봉준호의 영화가 동물 혹은 괴생명체를 다룬 방식을 복기하도록 이끈다. 전작에서 보인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후작에서 급격히 전환되거나 계승되곤 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에서 실종된 개들은 평범한 인간에 의해 살해되는 약자의 위치에 있다. 반대로 <괴물>에서 한낮의 한강에 출몰한 돌연변이 생명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공격적인 생물이다. 괴생명체의 공격성은 희생된 개들을 대신한 복수다. <옥자>에서 유전자 변형으로 탄생한 슈퍼 돼지는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 속 동물과 생명체의 특성을 재조합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옥자>의 돼지는 <플란다스의 개>의 개처럼 인간에게 도살당하는 인간 친화적 피해자의 위치에 있으나, 거대한 신체를 통해 <괴물>의 괴생명체만큼의 파급력을 내뿜는다. <미키 17>에서 니플하임 행성의 생명체, ‘크리퍼’의 외형은 어딘가 <괴물> 속 괴생명체를 상기시킨다. 다만 하나의 모체에 수천, 수만의 파생체로 이뤄진 점이 특징이다. 공격적인 외형과 달리 기본적으로 인간 친화적인 점에서 <옥자>를 연상시키는데, 인간과 동물의 원초적인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번역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진전된 관계를 그린다. 사라진 아이들 봉준호의 영화 세계에서 <미키 17>을 생각할 때, 떨칠 수 없는 지점은 아이들의 부재다. 특수한 행성을 배경으로 하며, 선발된 요원들만 탑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충분한 답이 되지 않는다. 개척선의 예외적 존재라 할 정치인 부부 케네스 마셜(마크 러펄로)과 일파 마셜(토니 콜레트)의 자녀 역시 부재하며, 이들은 젊은 대원들의 성행위와 출산을 통제하려는 야욕을 내비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아이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아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생명을 돌보거나 끝까지 생존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실종된 반려견을 찾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였다. <괴물>에서 괴생명체에 납치된 현서는 자신보다 어린 소년을 만나 그를 보살핀다. 소년은 현서를 대신해 살아남는다. <설국열차>에서 요나는 지하에 갇혀 기차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소비되던 어린 소년과 함께 생존한다. <옥자>에서 미자는 자신의 반려 돼지를 도살당할 위험에서 구출한다. 한편 개척선 내부에서 벗어나면 어린 생명체들의 기하급수적인 발생 양상을 마주하게 된다. 니플하임 행성에 먼저 존재했던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작고 어린 생명체들은 제한적 방식의 진화에 대응하는 자가복제형 과잉생산의 세계를 이룬다. 성행위가 사실상 금지된 인간의 규칙을 비틀어 말하자면, 생명체들은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수정체들의 외화로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퍼는 재생산 대신 바이오 프린트가 상용화될 세계의 앞선 결과물이자 이미 죽거나 폐기된 존재들의 귀환이다. 이들은 또한 봉준호의 영화에 부재한 아이들의 자리를 대신한다. 크리퍼들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행성을 가득 메운 광경은 영화 속에서 이름 없는 엑스트라 혹은 그래픽 이미지로 대체된 군중의 자리를 연상시킨다. 대규모 전투나 학살 장면 속 엑스트라는 의미 없이 죽거나 사라진다. 크리퍼의 존재 역시 이같은 대규모 학살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옥자>에서 슈퍼 돼지를 식품으로 소비했던 것과 유사하게 일파는 크리퍼의 꼬리에서 식용 소스의 잠재력을 발견해, 이들의 꼬리를 최대한 많이 잘라 올 것을 명령한다. 컴퓨터그래픽 이미지에 불과한 크리퍼의 죽음과 학살을 묘사하는 것은 인간화된 캐릭터를 처리하는 것보다 손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미키 17>에서 크리퍼의 죽음은 한정적으로 드물게 묘사된다. 케네스에 의해 죽을 위기에 놓인 크리퍼는 나샤(나오미 애키)의 도움으로 불구덩이에 빠질 위기에서 벗어난다. 손이 묶인 나샤가 입과 이를 이용해 끝까지 끈을 지탱해 크리퍼를 구하는 장면은 <옥자>에서 옥자가 굵은 노끈을 입으로 지탱해 미자(안서현)를 구하는 장면과 짝을 이룬다. 이제 구조해야 할 최우선 대상의 목록에는 아이와 동물에 더해 미지의 비인간 생명체가 추가된다. 1/n 존재의 딜레마 <괴물>에서 희봉(변희봉)은 강두가 총알의 개수를 혼동하는 바람에 죽음을 맞는다. 오류와 오판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반면 <미키 17>에서는 오류로 인해 삶이 증폭된다. 얼음 계곡 아래로 추락한 미키 17이 실종된 사이, 미키 18이 복제되어 그의 자리를 대체한다. 실종된 미키 17이 뒤늦게 돌아오면서 ‘멀티플’이 금지된 세계 속 두명의 미키는 생존을 놓고 서로 싸운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1인2역이나 쌍둥이 모티프가 전면화된 사례는 <옥자>에서 틸다 스윈턴의 1인2역에 의한 쌍둥이 자매 루시와 낸시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1인2역을 다중정체성으로 확장하면, <기생충>에서 기우/케빈(최우식), 기정/제시카(박소담) 등 가명과 조작을 통해 다른 존재를 연기한 사례에서 어렴풋하게 복수 존재의 흔적이 드러난다. 거슬러 가면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에서 범인의 자리에 적합한 몽타주를 두고 벌이는 오인과 혼동의 난장은 멀티플을 예고하는 잠재태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존재하게 된 두명의 미키는 죽이려는 자와 살아남으려는 자의 도망과 추격의 소동을 벌이며, 봉준호 영화의 인장과도 같은 난장 시퀀스로 향한다. 그러나 난장의 화력보다는 사소한 협상의 말들이 절묘하게 느껴진다. 미키 17은 미키 18과의 공존을 위해 배당된 식사와 급여와 업무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어 나누자고 협의한다. 이는 무엇이든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자신이 가진 몫까지 나눌 수 있는지에 관한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우리는 지출과 수입에 대한 감정을 공정하게 조정할 수 없으므로 n분의 1은 이기적인 사회의 온전한 해결책일 수 없다. 공존 불가능의 비애는 봉준호 영화의 오래된 주제였다. 공존의 대상은 동물이나 미지의 생명체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기생충>처럼 그 대상이 인간이 될 때 예상치 못한 화력을 불러왔다. 공존의 어려움과 파괴의 손쉬움은 버튼으로 환원된다. <기생충>에서 일가족의 실체를 까발릴 영상의 전송 버튼은 당사자에게는 (극 중 대사처럼) 미사일 발사 버튼에 준하는 위력을 지닌다. <미키 17>에서도 버튼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간단하고도 두려운 대상이다. 미키가 어린 시절 무심코 누른 버튼이 불러온 사고 트라우마는 17번째 삶을 사는 동안에도 끈질기게 프린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그가 마주한 버튼은 첫 번째 버튼의 변형으로 인류의 문제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함축한다. 여기에 빗대 말하자면 봉준호의 영화는 관객에게 두개의 버튼을 제공한다. 하나는 현실의 비관이고, 다른 하나는 판타지의 낙관이다. 이는 선택을 위해 마련된 보기가 아니나 비겁한 양비론도 아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다른 한쪽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자꾸만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