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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키 17>은 원작에서 무엇을 가져왔나, 원작 소설 <미키 7>과 영화 <미키 17>의 차이점은

소설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하드코어 SF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취향과 관점으로 세밀하게 각색되었다. 평소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을 “작가이자 감독”이라고 일컫는 만큼 그는 원재료가 무엇이든 자기만의 색깔로 새로운 세계관을 축조해낸다. 그렇다면 이번 <미키 17>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SF 문학과 영화를 가로지르는 즐거움을 위해 압축되거나 덧붙여진 부분들을 소개한다. 영화를 보기 전이나 후, 원작 소설을 한번 읽어보는 것 또한 색다른 여정이 될 것이다. 베르토에서 티모, 조금 납작하게 다뤄진 이유는?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친구 티모(스티븐 연)는 원작 소설 <미키 7>의 베르토를 변형한 캐릭터다. 티모와 비교하면 베르토는 훨씬 더 미키와 상호적이다. 개척지를 탐사하는 도중 크레바스(빙하 균열)에 빠진 미키 7은 자신을 제대로 구하지 않고 돌아가버린 베르토에 대한 서운함을 품는다. 구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친구에 대한 원망이랄까. 베르토가 미키 7의 죽음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신고해버리는 바람에 미키 8이 탄생해버렸지만 멀티플 사실을 들키면 안된다는 것은 영화와 같아서 친구에게 제대로 화조차 내지 못한다. 대신 떠보기를 한다. “내가 어떻게 죽었어? 빠져 죽었어, 아니면 크리퍼에게 먹혀 죽었어?” 자신의 사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쑤시면서 괜히 베르토를 곤란하게 한다(심지어 마셜에게 둘이 함께 불려갔을 때 자기도 왜 크레바스에서 죽은 줄 모른다고 이르기까지 한다). 이토록 미키 7이 감정적으로 폭주한 이유는 베르토가 이번에만 거짓말을 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한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건 아는데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그 일이 다시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기억이 안 나. 그걸 기억할 방법은 너희를 믿을 수밖에 없다고.”(<미키 7> 중에서) 소설 속 미키 7이 베르토와 유기적인 연결고리를 이어나간다면 영화 속 미키 17은 티모로부터 감정적인 영향을 받는 정도로 그친다. 국내 기자회견에서 “<미키 17>은 미키의 성장과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세우고 싶었다”고 밝힌 봉준호 감독의 말을 증거 삼아, 주변부보다 미키 성정 그 자체에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독재자 부부 케네스(마크 러팔로)와 일파(토니 콜레트)는 왜 이렇게 소스를 좋아하는 걸까? 세계사 속 필리핀과 루마니아의 독재자 부부에게서 연상했다는 이 커플은 모든 말씨와 행동이 무척 크고 유난스럽다. 특히 원작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영화를 위해 창조된 일파 마셜은 유독 소스에 집착한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를 두고 봉준호 감독은 캐릭터의 인간적인 특징을 끌어올렸음을 부각했다. “영화에는 ‘소스가 문명의 리트머스다’라는 말도 나온다. 위험한 표현이지만 독재자 부부가 귀엽다. 매력적이거나 웃기게 보이는 독재자랄까. 위험한 표현이다. 이들은 소스에 집착할 때 특히 귀엽다. 소스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인 사람들이다. 이 설정은 정치적인 알레고리로만 보기보다는 진짜 소스를 사랑하는 취향을 가진 인물로 보면 좋겠다.” 이에 소스가 무척 중요한 한국 음식에서 비롯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 이어지자 봉 감독은 “소스가 한국 식문화에서 핵심적인 요소이긴 하다”고 응했다. “한국 음식은 대부분 메인 메뉴에 여러 소스 중 하나를 고르는 형식이 아니라, 음식당 소스가 매칭돼 있는 경우가 많다. 둘을 분리할 수 없다. 음식과 소스가 하나다”라고 말했다. 망한 자영업자, 봉준호 감독은 이 컨셉을 좋아하는 걸까? 원작 소설 <미키 7> 속 미키 역시 빚을 져서 외계 행성으로 도망간다. 이유는 스포츠 도박. 미키의 친구 베르토는 뭐든지 단번에 잘하는 편이었다. 15살 생일날 어머니로부터 포그볼(작중 가상 스포츠) 라켓을 선물받은 베르토는 배운 적도 없는 운동으로 학교팀 선수로 합류하고, 프로 아마추어 합동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해 동일 연령대 2위, 그다음해에는 아마추어 부문 1등을 달성한다. 한동안 그만둔 포그볼을 9년 뒤 다시 시작했을 때 우승을 자신만만해하는 베르토가 얄미워서 미키는 모든 돈을 그의 패배에 몽땅 걸어버린다. 그렇게 빚더미를 떠안는다(나중엔 미키가 이 사실을 두고 베르토에게 네 탓도 있다며 자신이 니플하임에 갈 수 있는 방안을 같이 찾자고 뻔뻔하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조금 다르게 펼쳐진다. 친구 티모와 함께 동업을 했던 마카롱 자영업이 실패를 맛본 것. 봉준호 감독의 전작 <기생충>의 대형 카스테라 가게 운영을 떠올리게 되는 이 말은 온전히 노동자 계층에 관심도가 높은 봉 감독의 선택과 관점 때문이다. 국내 기자회견에서 봉 감독은 “<미키 17>은 SF영화이지만 땀냄새 나는 SF”라고 표현했다. 극한 처지의 노동자 이야기를 통해 이 세대의 젊은 층과 중첩되는 부분,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내고 싶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2054년, 생각보다 멀지 않은 미래를 설정한 이유는? 원작 소설에서는 연도가 정확히 나타나지 않지만 이미 지구가 멸망한 후 미르가르드 행성에서 지내고 있는 상황이며 그다음에 대안 행성을 찾은 게 바로 니플하임이다. 두 번째 대안 행성을 찾은 시점이라는 뜻. 하지만 영화는 지구에서 바로 니플하임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그린다. 시간적 배경도 지금으로부터 29년 뒤인 2054년. 왜 이렇게 현재로부터 가까운 시간대를 설정한 것일까? 국내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은 이에 대한 설명을 남겼다. “근미래다. 다시 말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일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현실감 있고 피부에 와닿는 SF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 또한 <듄> 시리즈 같은, 아주 먼 우주 저편의 이야기를 펼치는 SF 작품도 좋아한다. 하지만 <미키 17>은 인간적인 면을 높이기 위해 시간을 더 끌어당겼다. 불과 10년 전인 2015년에는 챗지피티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인공지능과 중얼중얼 이야기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묘미를 높인 작품이다.”

[cine scope] 역사로 영원히 새겨지는 순간, ‘<씨네21> 디지털 매거진 기증식’, 1995년 창간호부터 1998년 145호까지 한국영상자료원으로

지난 2월25일, ‘<씨네21> 디지털 매거진 기증식’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됐다. 영화 전문 매체 <씨네21>이 1995년 5월 발행한 창간호부터 1998년 4월 발행한 145호까지의 디지털 매거진을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번 기증은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콘텐츠 디지털화 지원 사업’을 통해 <씨네21>이 구축한 디지털 아카이브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씨네21> 디지털 매거진은 PDF 파일 형태로 제공되며 향후 연구자 및 대중이 접근 가능하도록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관리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장영엽 <씨네21> 대표이사는 “한국영화계의 대표 공공기관인 한국영상자료원과 함께 <씨네21>의 사료를 대중에게 개방하는 공공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어 뜻깊다. 이후 디지털화된 <씨네21> 잡지 역시 영상자료원에 기증할 계획이니 앞으로도 잘 활용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소회를 전했다.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은 “한국영상자료원은 자료의 수집·보존뿐만 아니라 연구자부터 일반인까지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씨네21>의 디지털 매거진 기증은 영상자료원이 활용할 소스가 늘어났다는 측면에서 무척 바람직하다. 이를 단순히 보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수집팀과 논의할 것이다. 또한 <씨네21> 디지털 매거진의 텍스트를 보유하는 것 외에도 취재 과정에서 축적된 자료들, 구술사 연구의 대상으로서도 언젠가 영상자료원 안에 <씨네21>의 독립된 컬렉션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고 답했다. <씨네21>과 한국영상자료원은 이번 기증을 계기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협력하고 디지털 매거진의 활용 방안을 지속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다.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예측 불가능한 자연현상을 그리는 세계 디지털 시각효과를 활용한 세계-만들기(2편)

오랜 시간 동안 영화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는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성영화 시절의 미국영화는 드넓은 평원과 사막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개척 신화를 그렸다. 비슷한 시기 독일 영화감독들은 대자연 앞에서 초라하게 서 있는 인간의 모습에서 모종의 불안을 감지했고, 소비에트 영화감독들은 만물의 생사를 관장하는 자연을 예찬했다. 이후에 등장한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자연은 인류에 멸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위협적인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영화사의 흐름 속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대체로 자연은 인간의 운명으로 다루어졌다. 인간은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았고,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멀리 어딘가에 배경처럼 우뚝 서 있었다. 이제 영화 속 세계에서 자연의 존재 양식은 유동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디지털 시각효과 기술은 자연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 결과 자연은 단순히 바라보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로 다루어졌다. 스크린 속 세계에서 자연은 인간의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면서 고유의 위치, 속도, 크기, 움직임을 갖는다. 이처럼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특정 자연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입자 효과라는 기법이 주요하게 쓰였다. 입자 시스템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법을 활용하면 분수, 연기, 모래바람, 물보라, 군중 등 미세한 입자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어떤 대상이 중력이나 바람의 영향을 받아서 움직이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그것은 물, 불, 먼지와 관련된 재난영화의 제작에 필수적으로 쓰였으며, <겨울왕국>(2014)의 눈보라 장면, <인터스텔라>(2014)에서 블랙홀 주변의 입자를 묘사한 장면,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서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인류의 절반이 가루화되는 장면에서도 쓰였다. 스티븐 프린스는 입자 효과의 주요 특징이 유동적인 것과 확률적인 것에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입자 시스템은 새로운 입자가 태어나고 오래된 입자가 죽어간다는 점에서 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객체의 형태와 행위를 지배하는 법칙들은 고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연을 포함하는 확률적인 것이다.” 이 원리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2004)에서 인간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자연현상을 그릴 때 적용되었다.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하는 상황을 다루는 이 작품은 기후위기에 대해 경고하는 기후학자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세계 각국 정상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두 부류의 인간 모두 자연의 움직임을 시의적절하게 예측하거나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 채 대자연의 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은 이성의 패배, 즉 자연을 길들이고 우연을 통제하려고 했던 인류의 기획이 실패했음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자연의 예측 불가능성이 초래하는 위험은 도쿄에 우박이 총알처럼 쏟아지는 장면, 뉴욕이 거대한 쓰나미에 침수되는 장면, 로스앤젤레스에 거대한 토네이도가 발생해 고층 빌딩의 외벽이 부서지는 장면 등을 통해서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 자연현상들은 실제 물과 눈의 움직임을 토대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물이다. 물과 바람의 움직임의 역동성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세부의 물질성을 표현하기 위해 후디니나 마야와 같은 소프트웨어에서 객체를 생성한 다음에 입자, 유체, 시뮬레이션을 적용하여 하나의 결합체로서의 자연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작업의 성취는 거대 규모의 자연현상을 시뮬레이션했다는 점,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자연현상에 대한 세부적 묘사를 시도했다는 점,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구현했다는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던 경계를 지우고, 자연이 인간을 포위하는 상황을 그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연이 문명의 흔적을 집어삼킨 세계를 절망적으로 그린 영화들이 있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로 분류되는 그 작품들에서 자연은 더이상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으며, 인간은 기껏해야 자기의 죽음이 잠시 지연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살아간다.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의 탄생을 부정하는 그런 척박한 환경은 모래, 먼지, 재와 같은 작은 입자들과 각각의 입자들이 결합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자연현상을 통해 시각화된다. 종말 이후를 살아가는 인류는 세균, 바이러스, 미세먼지, 재, 연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유독성 물질과 그것을 이루는 작은 입자들이 위협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깨달음은 모래폭풍, 눈보라, 토네이도, 쓰레기 더미와 같은 자연환경이 본모습을 드러낸 직후, 즉 종말이 초읽기에 들어간 이후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에서 디지털로 구현된 자연환경은 인간의 지각 범위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괴물과 같은 대상으로 그려진다. 자연의 보복이 시작된 것일까? 인간과의 공생을 거부하는 저 사나운 자연환경은 관객인 우리에게 다양한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동시대 영화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시각적, 서사적, 촉각적, 정보적인 차원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를 예로 들어보자. 이 영화의 주인공 맥스는 퓨리오사 일행과 함께 독재자 임모탄 일행의 추격을 피해 거대한 모래폭풍을 뚫고 지나간다. 이 장면은 겹겹이 쌓인 모래폭풍을 하나의 장관으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후 추격 장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모래 입자들이 흩날리면서 자동차의 표면과 인간의 피부를 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래폭풍의 규모와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 3D애니메이션, 입자 시스템, 매트페인팅 등의 기법이 쓰였고, 약 5억개의 모래 입자를 생성한 다음 그것을 시뮬레이션 알고리듬으로 처리하여 모래폭풍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괴적인 자연환경은 시각적으로 대상화되는 것, 비극과 종말의 서사를 상징하는 것, 촉각적인 수준에서 자연의 비밀스러운 정체가 감지되는 것, 데이터와 알고리듬에 의해 파국적 상황이 시뮬레이션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의 지각을 넘어 컴퓨터의 지각으로 생성되는 자연환경과 그것이 그리는 파국의 세계. 관객은 그런 영화를 매개로 흡사 자연의 파괴력을 무한정 시뮬레이션하는 게임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인 우리는 파괴와 죽음의 무한반복 속에서 세계가 리셋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 유토피아! 김소미 기자의 제75회 베를리날레 에세이

첫날부터 두번을 넘어졌다. 도착 직전, 프레스 메일에는 “2월 베를린의 불친절한 날씨를 주의하세요”라는 알림이 있었고 퍽 친절한 말투로 들렸으나 현실은 냉정했다. 영화제를 다년간 찾은 다수의 베테랑 기자들이 ‘역대 베를리날레 중 가장 춥고 가장 눈이 많이 온 해’라고 한 말은 폐막쯤 이르러서야 기정사실로 판별됐다. 얼어붙고 위험천만한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영화제 폐막일에 총선을 앞둔 베를린은 극우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의 돌풍을 지켜보며 깊은 우려에 잠겨 있었다. 차선책인 보수 기독민주당(기민련, CDU·CSU 연합)에서 차기 총리로 유력한 메르츠조차 트럼프 닮은꼴로 불리며 반이민자법으로 극우층에 손짓하는 형국이니 사태를 알 만했다. 영화제 셋째 날 즈음에는 <스크린 데일리>가 외면받고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인쇄된 독일 일간지들이 더 많은 영화기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눈보라를 뚫고 프레스 오피스 로비에서 만난 통신원의 말이 사뭇 달리 들렸다.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죠? <설국열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울과 염세도 베를리날레라는 이름으로 마련된 안전한 영화의 독립국에서만큼은 참을 만한 무엇이었다. 때로 휑한 거리에 의아해하면서 상영관에 들어서면 언제나 믿기지 않을 만큼 인파가 북적댔고, 기자 상영과 일반 관객 상영 할 것 없이 웃음과 박수에 후한 유럽 관객은 신랄한 정치적 메시지에 적극적 지지를 표명했다. 하루 평균 세편의 영화를 보는 동안 유일하게 상영 중 커다란 박수가 터져나온 순간도 있었는데, <미키 17>에서 독재자 커플 마셜 부부를 향해 시원한 욕설을 퍼붓는 나오미 애키에게 쏟아진 통쾌한 응원의 박수였다. 정확한 창작은 시차를 공교롭게 한다 영화제의 열기가 가장 뜨거운 첫 주말. 두편의 영화에서 공교로운 공통점을 발견했다. 초반 화제작은 단연 비경쟁부문인 스페셜 갈라로 초청된 <미키 17>로 북미 기자들을 중심으로 독재자 캐릭터 마셜의 실제 레퍼런스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단연코 기사 헤드라인을 자극하는 이슈였음은 분명하다. 기자회견을 앞둔 날 아침에 <씨네21>과 일대일로 만난 봉준호 감독은 미키 18의 총이 마셜의 볼을 스치는 장면을 본 미국 기자들이 실제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을 반영한 것은 아닌지 자꾸만 질문하는 바람에 난감한 눈치였다(영화의 시나리오는 2021년에 쓰여졌다). 한편 개막 첫날 프레스 상영을 통해 공개돼 일찌감치 경쟁부문 강자로 떠오른 <드림스>의 미셸 프랑코 감독도 비슷한 처지였다. 멕시코인 발레리노가 자선 재단을 물려받은 미국인 여성 사업가와의 사랑을 위해 국경을 횡단하는 설정에서 문을 여는 <드림스>를 두고 라운드 테이블에 앉은 두명의 기자는 강경해진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에 관해 집요히 질문했다. 물론 프랑코의 답도 봉 감독과 비슷했다. 이들의 사례는 창작자의 통찰이 본질에 가닿을수록 제작 시점과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시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 되어준다. 독재자, 파시즘, 폭력과 차별의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며 인간 본질을 세공하는 창작자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특정한 실제 사건을 반영하려는 목표와 별개로 세상에 톱니바퀴를 맞춘다. 봉준호와 미셸 프랑코 모두 반드시 ‘그’를 재현하려고 한 것은 아니나, 동시에 자신들의 영화가 오늘날 우리를 염려하게 하는 특정 인물과 정치적 맥락에 부착되어 해석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두 감독을 연달아 만난 날 밤에 시네맥스 앞에 있는 복합 쇼핑몰에서 늦은 저녁으로 핫도그 하나를 쑤셔넣었다. 옆에서 병맥주를 손에 들고 <미키 17> 관람기를 나누는 멕시코 영화인들이 봉준호 감독의 트럼프 풍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글쎄, 한국에 더 비슷한 사례가 있다고 열띠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슬프게도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베를리날레를 위해 지하철 종일권은 필수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포츠다머 플라츠는 베를린장벽이 최초로 철거된 지역으로 곳곳에 장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과거 베를리날레는 이곳에 위치한 ‘베를린 팔라스트’ 대극장을 상징적 중심지 삼아 중앙화를 추구해왔다. 소니 센터 내 약 8개 상영관으로 이뤄진 시네스타(독일의 대형 멀티플렉스)가 포럼과 파노라마 부문 등 많은 상영을 담당해왔는데, 2019년부터 경영난으로 영업을 종료하면서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베를린 TV타워가 보이는 알렉산더 플라츠의 시네스타 큐빅스가 대안으로 떠올랐고, 코로나19 팬데믹 중 베를린 전역에서 야외 상영을 실시하는 실험을 거친 후 전반적인 상영지구의 다핵화가 현재의 기조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기자가 찾은 올해 베를리날레는 팔라스트 바로 옆에 위치한 시네맥스 극장조차 리모델링을 통해 좌석수를 절반가량 줄인 탓에 프레스 상영 위주로만 운영됐다. 티르가르텐 지역의 예술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 ADK), 샤를로텐부르크의 유서 깊은 극장 주 팔라스트, 개보수 후 문을 연 소규모의 예술영화관 델피 필름팔라스트, 가수 아이유가 티켓이 3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콘서트를 진행한 것으로도 유명한 2천석 규모의 아레나(우버 이츠가 스폰싱해 우버 이츠 뮤직홀로 이름이 바뀌었다) 등이 곳곳에서 관객을 분산 수용했다. 탈중앙화라는 측면에서 영화제와 만나는 베를린 시민들의 접근성이 증가했지만, 밀집된 축제의 분위기가 주는 감흥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멀티플렉스가 폐업하거나 좌석수를 줄이는 흐름 또한 오랫동안 베를리날레를 찾은 산업 관계자들에겐 위기의 신호다. 한편 베를린 초심자는 상영관간 거리를 정확히 가늠하지 못해 지하철에서 심장을 졸이기 일쑤였다. 한번은 베를린에서 가장 비싸다는 호텔 아들른 켐핀스키 옆에 자리한 ADK로 헐레벌떡 뛰어들어갔으나 간발의 차이로 늦는 바람에 입장을 거부당하기도 했다(클로드 란츠만 감독이 <쇼아>를 제작한 과정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 <올 아이 해드 워즈 나싱니스>를 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같은 처지의 대만 기자가 계단에 쭈그려 앉으면서 “난 여기서 잠시 다음 계획을 생각해봐야겠어”라고 너무 처량하게 말한 나머지, 나도 나란히 앉아서 다음 영화를 찾았다. 역시나 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만 하는 거리였다. 차비가 아까워질 무렵에 옆자리 전우가 눈을 반짝이며 알려준다. “BVG 앱에서 종일권을 끊거나 일주일치를 미리 사두면 훨씬 싸.” 프레스 오피스에선 알려주지 않은 팁이었다. 아픈 사람들. 특히 엄마들 영화제 5일차. 다이어리에는 빼곡히 아픈 사람들의 기록이 열거돼 있다. 카메라가 병원과 심리 클리닉의 복도를 드나드는 일도 허다했다. 에릭 로메르의 그림자를 밟는 듯한 프랑스영화 <아리>(경쟁부문)는 직업과 관계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기 힘들어하는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인 젊은 남성 아리를 따라간다. 아버지는 그를 “언제나 그만두고 망치고 낭비하는” 인간이라고 치부하지만 영화는 포용력 있는 시선으로 사회적 규범에 복속될 수 없는 운명도 있음을 포착해낸다. 신음하는 또다른 청년으로는 데뷔작을 위해 신설된 퍼스펙티브 부문의 오스트리아영화 <하우 투 비 노멀 앤드 오드니스 오브 디 아더 월드>도 있었다. 한결 발랄한 품성의 자비에 돌란을 연상시키는 플로리안 포흘라트코 감독은 평생 자해와 도피성 행동, 충동장애에 시달려온 젊은 여성이 외계 조직과의 만남을 망상하는 방황담을 장르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하필이면 초반에 몰아본 영화들이 우울, 무기력, 트라우마와 강박, 편집증으로 점철된 경향 속에서 동시대의 징후를 읽어내야 하는 것인지 곱씹으면서 밤 10시에 또다시 극장에 들어섰다. 마음을 다독이는 영화 한편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영화 <이프 아이 해드 레그스 아이드 킥 유>(로즈 번에게 주연배우상(은곰상)을 안긴 영화)가 시작한 지 약 10분 만에 이마를 짚으며 “이번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고 중얼거릴 수 밖에 없었다. A24 아니랄까봐 비슷한 선상의 영화들과 나란히 두어도 괴롭기로는 1등이었다. 이혼 후 아픈 딸을 홀로 키우는 심리상담사(이자 알코올중독자)의 집 천장에 어느 날 거대한 구멍이 뚫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천장의 구멍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로즈 번의 망상이 컬트적으로 펼쳐진다. 할리우드 주류 스튜디오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방식의 점프스케어를 선사하는 영화 덕분에 늦은 밤 졸기 시작한 기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곤 했다. 로즈 번을 시작으로 미치지 않고서야 살기 힘들다는 여성들의 증언이 속출했다. 경쟁부문에서 주목해서 볼만한 또 다른 작품으로는 <마더스 베이비>가 떠오른다. 만약 로즈 번 다음으로 주연상 후보 상위권에 올랐을 이름을 점쳐본다면 단연 남성배우로는 <블루 문>의 에단 호크를, 여성 후보로는 <마더스 베이비>의 주인공 마리 로이엔베르거를 꼽을 만하다. 난임 끝에 의문의 클리닉을 방문 후 임신·출산에 성공한 주인공이 자신의 신생아가 어딘가 비정상적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오스트리아 버전의 <로즈메리의 아기>가 펼쳐진다. 짐짓 점잖은 드라마의 표면을 띤 이 영화가 심화하는 컨셉은 심리 호러 그 이상의 괴이한 상상력이다. 바야흐로 정신질환의 시대에 동시대 영화들은 장르적 허용을 동반해 내상의 실체를 시각화하는 중이었다. 비슷한 계열의 영화들로 평자들이 자주 회자한 비경쟁부문 영화 중에는 <허니 번치>도 있다. 1970년대 공포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캐나다 영화 <허니 번치>는 환각을 오가면서 결혼 생활의 위기를 스릴러로 승화시킨다. 레베카 렌키비츠의 소설을 영화화한 <핫밀크>와 마리옹 코티야르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아이스 타워> 역시 모녀 관계에 기반한 갈등과 정체성의 혼란을 독특한 뉘앙스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신임 집행위원장 트리샤 터틀의 취임과 함께 올해 경쟁부문의 절반을 여성감독의 영화가 차지해, 역대 베를리날레 중 다양성 지표로는 가장 우수한 단면을 내보였다고 평가받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테마적 경향으로도 보인다. 거울로서의 자연, 마술 하는 스크린 영화제 중심지의 한 호프집에서 <봄밤>으로 포럼 부문에 초대된 강미자 감독과 시네마달팀을 만났다. 강미자 감독은 저예산영화에 어렵게 촬영 허가를 내준 제주도 저지리 인근의 요양병원 수녀 원장님으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내친김에 물어보니 영화의 결정적 장면을 견인한 주변 로케이션이 모두 수녀님의 소개로 조금씩 영역을 넓혀간 곳들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지나고 새파란 새벽을 내어주는 제주의 들판에서 찍은 영화이기에, 지난밤 상영에선 스크린이 너무 밝게 송출돼 아쉬웠다는 전언도 뒤따랐다. 서로를 향해 부르짖을 몸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연인이 그 몸마저 잃어가는 가슴 아픈 사랑의 기록인 <봄밤>에서 ‘봄의 밤’은 배우의 얼굴과 몸짓을 제외하고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속상함이 십분 이해가 됐다. 한편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젊은 시인은 여자 친구를 따라 그의 아버지가 지은 교외 주택에서 하루를 보낸다. 가족의 성에서 이방인으로 탐문받게 된 남자는 본의 아니게 종종 곤경에 처한다. 오래된 차, 명망 있는 아버지, 시인이라는 직업, 자족하는 삶에 대한 소신이 주고받는 술잔 속에서 점점 격양될 무렵 남자는 정신을 잃는다. 깨어난 그를 받아주는 곳은 별과 달이 아름답다는 산중턱뿐이고, 우여곡절 끝에 홀로 다시 떠나는 아침, 그의 차는 덜컥 멈춰 서서 남자를 길 위에 내버려둔다. 올해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대상과 심사위원상을 나란히 받은 두 남미 영화 <블루 트레일>과 <더 메시지> 역시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제 기간 내내 만장일치의 호평을 받은 가브리엘 마스카로 감독의 <블루 트레일>은 근미래의 디스토피아가 노년층을 배제하자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생존기다. 아마존의 품을 닮아 제법 유쾌하게 진행되는 이 풍자극은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과하며 연령 차별, 그리고 억압적 전체주의의 미래를 경고한다. <더 메시지>엔 보호자들로부터 동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이용당하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대개 침묵에 잠겨 있는 이 아르헨티나 드라마는 소녀와 동물들을 아울러 물질 세계가 경시하는 영혼의 고통이 있음을 발견해내는 성장담이다. 라브 디아즈와 협업했고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제자로도 알려진 리릭 델라 크루즈 감독의 데뷔작 <웨어 더 나이트 스탠스 스틸>(퍼스펙티브 부문)도 정원의 풍경 속에 정지한 매우 적은 수의 숏으로 영화를 구성했다. 이탈리아의 저택을 물려받아 타국에서 재회하게 된 필리핀 노동자 가족에게 정원은 명상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상처와 식민 지배의 유령, 종교적 뿌리를 비추는 캔버스이기도 하다. 베를린에서 만난 몇몇 인상적인 영화들에서 자연은 체제 밖에서의 인간적 가능성을 상상하게 돕는 생태적 심상인 동시에 개인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내면적 겸손의 장소이자 역사의 거울이었다. 그 많은 죽음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전례 없는 파격은 없었다. 지난해 황금곰상을 마티 디옵의 하이브리드 다큐멘터리 <다호메이>가 가져간 것에 비하면 우아하고 지적인 10대 성장담인 다그 요한 하우거루드의 <드림스(섹스 러브)>에 최고상을 안긴 선택도- 반발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다소 부드러운 결말이다. 예산과 규모 면에서 영화제의 약세를 우려하는 시선 앞에 전반적인 라인업의 견고함과 일관성은 분명히 증명한 한해였다. 경쟁부문에서 제75회 베를리날레의 단 한편으로 기억할 상징적 작품을 고르라면 라두 주데의 <콘티넨탈 ’ 25>(각본상)을 호명하고 싶다.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창인 루마니아의 도시 클루지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뒷받침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도시 청소에 한창이다. 산과 들을 헤매며 쓰레기를 줍는 노숙인이 시설 입소를 앞두고 맞이하는 너무나 가슴 아픈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그 죽음의 방조자이자 일부는 가해자이고 또 목격자인 공무 집행관 여성의 트라우마 치유기를 코미디로 풀어낸다. 주인공 오르솔야가 가족, 상담사, 직장 동료, 신부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놓고 구원받기 위해 애쓰는 광경을 목도하는 동안 스크린 뒤편엔 연민과 냉소의 그림자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엎치락뒤치락했다. 대극장에서 초연된 라두 주데의 ‘아이폰영화’는 단순하고 직설적이지만 실상은 이보다 더 복잡할 수 없는 사회적 함의를 품고 있었다. 갈라 상영을 앞두고 주요 감독, 배우들이 자신의 초상화 위에 사인하는 행사에서 라두 주데는 트럼프와 푸틴을 향한 욕설을 적었고, 초연 직후 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각에도 육중한 체구에 반하는 가뿐함을 자랑하며 무대 위에 올라 마지막 소임까지 다했다. 2021년에 <배드 럭 뱅잉>으로 한 차례 황금곰상을 수상했지만 마치 처음 온 사람처럼 “이렇게 작은 영화를 불러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뒤 그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대개 간소한 코멘트와 인사로 갈무리하는 여느 감독들과 달리 그는 명랑하게 모든 스태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무대 위로 불러내 아주 공평하고 나란하게 세워두웠다.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는 그림이었다. 홍상수 감독과 함께 올해 베를린에서 가장 저화질의 영화를 자랑했으나 누구보다도 무대를 가득 채운 감독과의 밤이 영화제 후반을 든든하게 수놓았다.

[인터뷰] 연기를 중심으로, 아주 먼 곳까지, 진호은

“항상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많은 분들이 지금의 내 나이가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때라고 말하지만 나는 30대, 40대가 되어서도 늘 청춘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각각의 나이대에 할 수 있는 역할을 놓치고 싶지 않다.” 진호은은 연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유독 단호해졌다.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 해사한 인상의 중심에 이렇게나 단단한 배우로서의 심지가 깃들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의 양궁부 민재, <3인칭 복수>의 중경, <백일장 키드의 사랑>의 형도 등 진호은은 주로 교복 입은 앳된 학생으로서 시청자들과 마주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청춘물을 하고 싶다”고 밝혀온 그의 바람과 맞닿은 궤적이기도 하다. 지난해 공개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도 청춘물의 테두리 안에서 논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규호를 통해 진호은이 보여준 간절한 사랑의 언어는 남달랐다. 극 중 규호는 고영(남윤수)의 애인이었으나 결국 이별을 맞이한다. “캐릭터의 서사에 깊게 파고드는 편인데 규호에게는 유독 연민이 생겼다. 그 마음이 내가 규호를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 정도로 큰 타이틀롤을 맡은 것도, 연기적으로 깊게 빠져든 작품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헤맸지만 전에 없이 인물에 크게 동화됐다.” 진호은은 “올바른 선택을 할 때마다 조금씩 운이 쌓이고, 언젠가 그 운이 삶을 빛나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런 신념이 규호와 잘 맞닿은 덕에 스스로 자신의 강점으로 꼽은 눈을 통한 감정 연기도 한층 잘 소화해낼 수 있었다. 같은 청춘물을 하더라도 진호은은 “겹치지 않는 인물을 연기하려고 노력해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20대 중반에 이른 지금, 그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차분히 준비 중이다. “실제로 있을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선호한다. 하지만 경험해본 적 없는 가상의 세계에도 발을 들여보고 싶다. 이를테면 종말이 닥친 아포칼립스물 같은 것들 말이다. <심연의 하늘>이란 포스트 아포칼립스 웹툰을 좋아하는데 언젠가 이 작품이 영상화한다면 반드시 출연하고 싶다. <지금 우리 학교는>과 같이 진창을 구르며 몸을 쓰는 액션 연기도 환영이다.” 그 밖에 음악, 영상 작업에도 도전하며 “백현진 선배님과 같은 엔터테이너”로도 활동하고 싶다는 꿈이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연기가 있다.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가장 절실하게 임해온 것이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 언제나 현장이 가장 즐겁다는 진호은의 차기작은 드라마 <언프렌드>다. “고교 야구선수인 준수를 연기했다. 다소 마초적이면서도 와일드한 성정을 지닌 캐릭터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선 양궁을, <마에스트라>를 찍을 땐 오보에를 배웠고 <언프렌드>를 준비하면서는 야구를 배웠다. 손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했고 그동안 보여드리지 않았던 모습을 선보일 수 있을 듯해 설렌다.” 곧 또 다른 차기작 준비에 들어간다는 진호은은 큰 목표를 바라기보다 “지금처럼 무탈하고 건강히 지내”고 싶다. “내가 바란다고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잘 준비하다 보면 또 좋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그 기회는 배우 진호은을 어디로 데려다놓을까. 그가 도달할 다음 도착지를 기대해본다. filmography 드라마 2025 <언프렌드>(공개 예정) 2024 <대도시의 사랑법> 2023 <마에스트라> 2022 <백일장 키드의 사랑>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3인칭 복수> <별똥별> <지금 우리 학교는> 2020 <트웬티 트웬티> 2019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인터뷰] 상실과 회복의 누아르, <파과> 민규동 감독

136번째 수정고에 이르러서야 <파과>는 마침내 빛으로 나아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마주한 60대 여성 킬러 서사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원작을 출발지 삼아 긴 창작의 여정을 거쳐야만 했다. 인고 끝에 완성된 이 영화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준 첫인상은 중층의 누아르로서 지닌 매력이었다. 원작보다 액션이 강조된 장르적 완성도에 더해, 기억으로 침잠하는 인물의 멜랑콜리가 편집의 기조와 절묘히 만났다. 독일의 영웅 서사 <니벨룽의 노래>가 묘사하는 ‘인간적 약점’을 조각(이혜영)의 그것에 대입한 민규동 감독은 냉철한 표정을 지닌 킬러의 손톱 밑에서 아프게 까끌거리는 삶의 가시가 <파과>의 진면모라고 바라본다. - 액션과 감정을 모두 심도 있게 소화할 60대 여성 페르소나가 필요한 작업이다. 캐스팅 과정도 만만치 않았겠다. 이혜영 배우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틸다 스윈턴이 떠올랐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님에게 소설을 보내면서 시나리오를 전달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감독님도 가능하다고 했는데 회사(수필름)에 얘기했다가 야단맞았다. “한국영화부터 제대로 해라”라고. (웃음) 틸다가 했다면 근미래를 배경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활약하는 킬러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도 있었겠지. 이혜영 선배를 만난 건 촬영 7~8개월 전쯤이었다. 그를 만나는 순간 ‘다른 사람은 불가능하겠구나’ 하는, 불가역적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조각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배우, 이 이야기가 가진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 조각의 클로즈업이 액션과 대조를 이루며 영화의 기둥을 세운다. 이혜영은 은막의 아우라를 지닌 동시대의 몇 안되는 배우인데 감독으로서 어떤 점에 주목했나. 그가 가만히 서서 걸어가는 뒷모습만으로도 하나의 룩이 완성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에서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남부군>(감독 정지영, 1990) 속 빨치산의 그 차가운 느낌도 떠올랐다. 이혜영 배우가 지닌 고전적 아우라를 극장에서 보는 경험만으로 또 다른 발견의 재미를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특히 인물이 외롭고 심오한 순간에 이혜영 배우의 표정이 상당히 몰입감을 높인다. 그에겐 떨림이 있다. 연기에서 일부러 ‘떨림’을 연출하려면 인위적으로 보이기 쉬운데, 이혜영 배우는 특별히 연출하지 않고도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인물의 흔들림을 발현하곤 했다. - 영화 촬영장에서 흔히 다루기 어려운 요소로 여겨지는 3대 캐릭터가 모두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노인, 아이, 그리고 개다. 안 그래도 스태프들에게 “이거 내가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을까?”라고 한 적이 있다. (웃음) <파과>에서 강아지는 조각과 완전히 연결된 존재다. 조각은 45년 동안 삶의 어떠한 달콤함도 욕망하지 않고 살아왔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단절하고 오직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개가 삶에 침투하면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다. 처음에 그는 반려동물을 전혀 친절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결국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임을 은연중 깨닫는다. 이것이 킬러에게 아주 치명적인 요소일 수도 있고 동시에 구원이 될 수도 있다. - 음지의 자경단인 ‘신성방역’에서 조각을 둘러싸고 류(김무열), 투우(김성철)가 정념의 삼각축을 형성한다. 추억과 연민이라는 인간적 자질이 노년의 킬러를 위태롭게 하지만, 결국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는 서사로도 읽혔다. <니벨룽의 노래>(중세 독일의 영웅 서사시.-편집자)에서도 그렇지 않나. 지크프리트가 불사의 육체를 얻는 과정에서 우연히 등에 보리수 나뭇잎이 붙어 있는 바람에 그 부분만 약점으로 남는데, 결국 그 작은 약점으로 인해 파멸에 처한다. 조각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철저하게 단련된 존재처럼 보이기에 이 캐릭터의 아킬레스건은 무엇일까를 더 생각하게 했다. 독일 문학처럼 하나의 운명 또는 필연으로서 몰락하고, 이를 통해 회복하는 구조가 이 이야기에도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 베를리날레 초청작으로서 적합한 비유다. (웃음) 대학 첫 전공이 독어독문학이었고 고등학생 때도 외국어를 독일어로 선택할 정도로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읽었던 독일 문학이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이번에 베를린으로 날아올 때도 독일 작가의 책 딱 한권만 챙겼다. 베를린 출신 작가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다. - 킬러 이야기가 동반하는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 감독의 관심은 상실과 삶의 무게로 향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상실이 한국 사회의 일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때로는 감춰진 슬픔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로부터 생긴 멜랑콜리함이 곧 이 세계의 정서가 아닌가 싶다. 동시에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작은 달콤함을 찾아서 살아가려고 애쓴다. <파과>도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 한 인물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노년의 조각이 자신의 기억 속을 걷는다거나, 과거의 대사를 현재의 인물들이 읊는 식으로 몽환적인 내러티브를 펼치는 구간들이 돋보인다. 어떤 의도가 있었나. 조각은 과거를 단순히 떠올리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회상 장면을 따로 연출하기보다는 현실 속에서 과거가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드보일드 액션으로서 장르적인 재미도 대단히 신경 쓴 작품이다. 하지만 핵심은 상실과 회복, 즉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시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래서 조각이라는 인물을 보며 ‘저 사람을 응원하고 싶다’ 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길 바란다. - <허스토리>에 이어 장노년층 여성 인물이 중심축인 서사를 한국 영화시장에 잇따라 내놓은 드문 감독이 됐다. 그러게, 일부러 어려운 길을 가려는 건 아닌데. (웃음) SF소설의 대가 아서 C. 클라크가 한 말을 좋아한다. 그가 좋은 이야기가 통과하는 세 단계의 반응에 관해 말한 적 있다. 첫 번째는 “이거 절대 안돼” , 두 번째는 “역시 별거 아니잖아”인데 마지막 세 번째가 “거 봐, 내가 좋을 거라고 했잖아!”이다. <파과>는 처음에 말도 안되는 기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중간에는 도대체 이걸 왜 하냐는 반응도 있었다. 이제 세 번째 단계로 갈 차례다. 결과를 장담할 순 없지만 한국 개봉 후 적어도 관객들에게 ‘봐, 이런 영화도 가능하잖아’라는 응답을 듣고 싶다.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1년이란 세월은 까마득히 길게 느껴지다가도 하룻밤 꿈처럼 휘리릭 지나가버리기도 한다. 지난해 2월, 처음으로 <씨네21> 칼럼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떨림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이 연재를 시작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관찰하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어떻게 하면 소중히, 진심으로 독자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혹여나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적진 않을까 등등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쿵쾅대는 마음을 안고 시작했고, 많은 분들과 사계절을 보냈다. 그사이 개인적으로는 성장도 많이 했고, 배우기도 참 많이 배웠고, 무엇보다 여러분들의 생각과 계절들마다의 이야기가 참 궁금했다. 가끔 마주치는 분들이 칼럼 잘 보고 있다고 말씀해주실 때마다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특히나 글을 읽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실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꼈다. 새로 느껴보는 창작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론, 매우 만족이다. 어릴 때부터 숨어서만 쓰던 글을 용기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생각을 나누다 보니 어느샌가 나의 시야가 꽤 넓어져 있었다. 말이란 날카롭기도 해서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는 첫 연재 글에 점점 더 책임감이 쌓여갔다. 이제 뭔가 좀 알아가는 듯싶었는데 이번 달이 마지막 호라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벌써 1년이 지났다고? 벌써 봄이라고? 그럼 마지막 인사로는 어떤 말을 전해야 하지? 등등 처음 칼럼을 시작했을 때처럼 수많은 생각을 했고 또다시 긴장감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진짜다. 원래도 땀이 많은 편이지만 긴장할 때 나는 땀은 닦아도 닦아도 마르지 않는 싸늘한 땀이다.) 후회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남김없이 차곡차곡 적어 내려갔다. 우리 가족은 한달에 한번 나의 칼럼을 읽는 것이 낙이라고도 말해줬고, 지인들도 글에서 내 성격이 묻어나오는 것 같아 재미있다고 해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피드백이 정말 흥미로웠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쓴 글을 읽고 자신들의 엄마, 아빠, 할머니, 반려동물, 친구, 애인을 떠올렸다고 하면서 자연스레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수다를 떤 적도 많다. 그리고 결국 사랑에 대해서. 내가 너무 사랑 타령만 한 것 같아서 그게 조금 쑥스럽기도 하지만 나도 새삼 나에 대해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 나에게서 사랑이란 정말 큰 부분이구나 하며 말이다.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씨네21>, 그리고 그 기회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게 해주신 모든 독자들에게 감사하다. 나는 어디에서든 항상, 어떠한 음량으로도 이야기를 지속해 나갈 테니, 그 주파수가 맞는다면 우리 모두 어느 지점에서나 맞닿길 바란다. 모든 생명체는 소멸했다가도 어디에선가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물리적으로, 혹은 에너지적으로, 무슨 형태이건. 그 멋진 자생력이 모이고 모여 세월이 되고,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의 숨결은 마땅하기에 앞으로의 1년도 수북하시길 바란다. 지난 편에서 이번 글은 벚꽃라떼를 마시며 만날 수 있길 소망했지만, 아쉽게도 아직 핫코코아를 끊지 못했다. 겨울이 미련이 남았는지 눈이 오는 바람에 옷은 다시 두꺼워졌지만, 머지않아 꽃향기는 진해질 것이다.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김민하의 타인의 우주’를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의 모든 순간이 찬란하길.

[장윤미의 인서트 숏] 불탄 벽지

“곧 철거하나 봐요.” 캣맘의 문자에 다음날 바로 현장에 갔다. 성매매 집결지인 이 동네의 일부에 펜스가 생긴 지 한달, 펜스 안 건물들에 대한 철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캣맘은 빈 업소를 은신처 삼던 고양이 순이와 회색이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공사 관계자와 구청에 요구하여 펜스에 구멍을 뚫어두었다. 예상보다 빨리 철거일이 다가오자 우리는 말 그대로 발을 동동 구르며 공사 관계자에게 철거 전 건물을 꼼꼼히 수색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는 이런 일은 한두번 겪는 게 아니라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마냥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순이와 회색이가 살던 건물에 포클레인이 내리꽂혔다. 콘크리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펜스 앞을 지키던 공사 관계자에게 달려가니 구멍으로 알록달록한 고양이가 먼저 나오고 시간이 좀 지나 거무튀튀한 고양이도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정말이라고, 믿으라고 했다. 수색해서 나온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어쨌든 너무 다행스러워서 눈물이 조금 났다. 그리고 펜스에 구멍을 뚫어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겪으며 절실히 깨달았다. 나야 캣맘을 조력하는 위치에 있을 뿐이지만 앞으로 계속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니, 서글펐다. 고양이들은 오죽할까. 하루 만에 집이 사라진 그들을 생각하니 내 힘든 감정은 하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양이들이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제는 내 일을 해야 했다. 유서 깊은 이 성매매 집결지의 건물이 무너지는 걸 촬영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펜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 했다. 이 동네 대부분의 건물이 2층 높이로 옥상조차 없는 곳이 많아서 올라간다고 해도 촬영을 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보자 싶어서 평소 봐둔 빈 업소의 깨진 유리문을 통해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하지만 거의 삭고 일부만 남아서 한발을 딛고 오르기도 불안했다. 얼마나 오래 방치된 건물인지 계단 옆에는 바닥을 뚫고 자란 나무들이 있었다. 나는 한 나무를 지지대 삼아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메고 낑낑대며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천장이 없었다. 잘게 쪼개진 방, 화장실, 한때 홀이었을 공간도 있는데 머리 위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천장이 무너진 건가? 지붕이 날아간 건가? 언젠가 이 건물에서 화재가 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불에 그을린 벽지가 보였다. 기괴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이 풍경 속에 잠시 서 있는데 마치 이국의 유적지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힘들게 2층으로 올라오긴 했는데 철거 현장이 잘 보이는 곳까지 가려면 아직 위로 더 올라가야 했다. 이 동네는 건물들이 거의 맞붙어 있다시피 해서 폴짝 뛰기만 하면 옆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아마 경찰의 단속을 피해 이동하기도 쉬웠으리라. 옆 건물로 뛰어넘어가는 찰나 길 건너 지붕에서 쉬던 고양이들이 놀라 도망갔다. 미안…. 이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물탱크가 있는 작은 옥상이 보여서 그곳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주위에 계단이나 사다리는 없었지만 옥상 주위로 쓰레기들이 산처럼 형성돼 있었다. 선풍기, 프린터, 세제 통 등등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많은 쓰레기들. 옥상까지 딛고 올라가기에는 높이가 부족해서 마지막에는 옥상 바닥에 매달린 채로 점프해 올라가야 했다. 장비를 먼저 위로 올리고는 온 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철거 현장이 잘 보였다. 지금은 죽고 없는 고양이 돼지, 그리고 순이와 회색이가 살던 집은 그사이 반 이상이 무너지고 없었다. 난간이 없는 옥상의 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촬영을 시작했다. 건물 위에 임시로 세운 허약한 재질의 가건물이 포클레인에 쉽게 뜯겨져 나오는 게 보였다.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보다 무너지면서 드러나는 내부, 그러니까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업소의 내부, 그리고 포클레인에 끌려 나오는 온갖 잡동사니들에 눈이 갔다. 그게 무엇인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쪽이 아련히 슬펐다. 물탱크가 있는 이곳은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인간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다. 결국 공사 관계자의 눈에 띄었고 그는 멀리서 손으로 엑스 표를 해보였다. 나는 못 알아듣는 척하며 인사하듯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이고는 점심 식사를 하러 노동자들이 다 떠난 뒤에도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아까는 지나쳤던 옥상에 있는 한 가건물로 들어갔다. 매트리스가 깔린 빈방들이 있었다. 사진을 찍으며 계속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헷갈렸다. 괜찮아, 이 동네는 어느 문이든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몇번의 경험으로 익힌 내 감을 믿고 가고 싶은 곳으로 계속 이동했다. 계단이 보이면 내려가고 문이 보이면 열어보고 문에서 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탐험하듯 계속 통과해나갔다. 어두운 복도에 한 줄기 햇빛과 함께 보이는 뽀얀 먼지들, 바닥에 오래된 브라운관 텔레비전 하나, 방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인테리어, 금고, 신발, 달력 같은 것들, 뜯긴 벽지 뒤로 보이는 또 다른 벽지, 그런 것들. 수많은 사람들과 돈,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갈등, 온기 같은 것들이 한때 넘쳤을 공간. 그러다 좁은 복도의 끝까지 걸어갔는데 잠긴 문틈으로 내가 늘 걸어다니던 익숙한 골목이 보였다. 난 갇힌 걸까 혹은 저 골목과 연결되지 않은 아예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걸까. 열리지 않을 문을 한두번 흔들어보고는 돌아 나왔다. 다시 여러 방을 거쳐 계단을 오르내리길 몇번 반복했을 때 미로의 끝에는 내가 처음 들어왔던 깨진 유리문이 보였다. 깨진 유리문으로 나가려는데 주위에 붙은 스티커들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서에서 붙인 여성피해신고 안내, “화재는 예방이 최선이다. 지하층에서는 잠을 자지 말라”는 소방서장의 안내, 명랑해 보이는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 스티커. 사진을 찍고는 다시 익숙한 골목으로 나왔다. 아쉽고, 안심되는 마음이었다. 멀리서 다시 콘크리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며칠 뒤, 여전히 그날의 감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불탄 그 건물 안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

영광 혹은 아쉬움, 21세기 아카데미 시상식 화제의 순간 ❶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카사블랑카> <대부> <대부2>….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아카데미를 휩쓴 20세기가 오스카 최후의 화양연화 같지만 21세기의 아카데미도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2001년부터 2025년까지 아카데미에서 역사를 쓴 수상자/작을 정리해보았다. 2001 마샤 게이 하든 ‘아카데미의 이변’ 목록에 늘 오르는 수상 결과. 마샤 게이 하든은 <폴락>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당시 하든과 경쟁한 배우는 주디 덴치, 줄리 월터스, 프랜시스 맥도먼드, 케이트 허드슨. 네 배우가 각각 미국배우조합상(SAG), 영국아카데미상(BAFTA), 크리틱스 초이스, 골든글로브를 나눠 수상했고 하든은 오스카를 제외한 어떤 시상식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예측 5순위였던 그의 이름이 불리자 하든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무대에 올라 외쳤다. “짜릿하네요!”(What a thrill!) /정재현 2002 핼리 베리 97회에 달하는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비백인 여우주연상은 단 두명. 그 벽을 처음 넘어선 배우가 <몬스터 볼>의 핼리 베리다. 핼리 베리는 오열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소감을 남겼다. “이 순간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앞선 도로시 댄드리지, 리나 혼, 다이앤 캐럴을 위한 것이자 내 옆에 선 제이다 핀켓 스미스, 앤절라 배싯, 비비카 A. 폭스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모든 비백인 여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해의 남우주연상은 <트레이닝 데이>의 덴절 워싱턴에게 돌아갔다. 시드니 포이티어가 흑인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지 38년 만의 일이었다. /정재현 2003 오스카의 파격적인 수상 결과에 늘 이름을 올리는 목록. 전세계를 뒤흔든 에미넴 최고의 히트곡이자 <8마일>의 삽입곡인 가 주제가상의 영예를 안았다. 힙합 최초의 오스카 수상이었다. 시상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고 시상식에 불참한 에미넴 대신 루이스 레스토가 무대에 올라 소감을 남겼다. 이날 이루어지지 않은 의 라이브 공연은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야 이루어졌다. /정재현 2004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작품의 부제가 상을 예견한 걸까. <반지의 제왕> 3부작의 마지막인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11개 부문 모두를 석권하는 쾌거를 누렸다. 이는 <벤허>(1959), <타이타닉>(1997)과 함께 아직도 깨지지 않은 아카데미 최다 수상 기록이다. 하지만 후보 지명을 받은 전 부문에서 수상에 성공한 영화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유일하다. /정재현 2005 클린트 이스트우드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마틴 스코세이지의 <에비에이터>의 격돌이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이날 <에비에이터>는 5개의 트로피를,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4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하지만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까지 대중의 주목도가 높은 상은 모두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차지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이 제작, 연출한 <용서받지 못한 자>(1992)와 마찬가지로 두개의 오스카를 받고 돌아갔다. /정재현 2006 리안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자.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2회 수상한 자. 모두 리안 감독이 보유한 타이틀이다. <와호장룡>으로 처음 아카데미 감독상 지명을 받은 리안은 2006년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생애 첫 오스카를 거머쥐었다. 영어와 중국어 모두로 소감을 전한 리안은 훗날 <라이프 오브 파이>로 한번 더 트로피를 손에 안는다. 한편 감독상과 작품상이 대개 한 작품에 돌아가는 오스카의 경향과 달리 <브로크백 마운틴>과 <라이프 오브 파이>는 모두 작품상을 놓쳤다.정재현 2007 마틴 스코세이지 전설 마틴 스코세이지는 수십년간 오스카의 이슈메이커다. <택시 드라이버> <코미디의 왕> 등의 걸작은 감독상 지명조차 받지 못했고, <분노의 주먹> <좋은 친구들>은 감독상과 작품상 수상에 실패했다. 스코세이지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범작 축에 속하는 <디파티드>로 생애 첫 오스카 감독상과 작품상을 가져갔다. 이후에도 다수의 작품으로 후보에 올랐지만 현재로선 <디파티드>가 그의 유일한 수상작이다. /정재현 2008 하비에르 바르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안톤 쉬거’로 기억되는 하비에르 바르뎀. 일생일대의 배역과 헤어스타일을 남기며 오스카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스페인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자다. 바르뎀 이후로는 지금까지 단 한명의 스페인 배우가 오스카를 탔다. 그의 파트너이자 스페인 최고의 배우 중 하나인 페넬로페 크루스가 이듬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정재현 2009 히스 레저 많은 외신이 2009년 시상식 이후 아카데미가 작품상 후보작을 5개에서 최대 10개로 늘린 현상을 ‘다크 나이트 룰’이라고 칭한다. 흥행과 비평 모두를 사로잡은 히어로 블록버스터인 <다크 나이트>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않자 아카데미가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포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던 것이다. 이해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는 모든 시상식의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그의 가족이 대리 수상자로 나섰다. /정재현 2010 캐스린 비글로 거대한 유리천장이 2010년에서야 깨졌다. <허트 로커>를 연출한 캐스린 비글로가 여성 최초로 오스카 감독상을 받았다. 비글로는 리나 베르트뮐러, 제인 캠피언에 이어 세 번째로 감독상 후보에 오른 여성이다. <허트 로커>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작품상을 받은 여성감독의 연출작이며, 비글로는 이 작품의 제작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트로피를 모두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됐다. 이 기록은 11년 후 <노매드랜드>의 클로이 자오가 이어받는다. /정재현 2011 제임스 프랭코와 앤 해서웨이 영예의 순간을 돌아봤으니 망측한 순간도 되짚어보자. 오스카는 화제성을 견인하고자 당시 가장 전도유망한 배우였던 제임스 프랭코와 앤 해서웨이를 쇼의 호스트로 발탁했다. 하지만 <할리우드 리포터>가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오스카 생중계”라고 맹비난했을 정도로 이들의 진행은 쇼에 녹아들지 못했다. 해서웨이는 성실했지만 진행에 재능이 없었고, 프랭코는 해서웨이의 전력투구에 줄곧 무반응하는 등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정재현 2012 메릴 스트리프 메릴 스트리프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다 노미네이션 기록(21번)을 보유한 전설이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로 여우조연상을, <소피의 선택>(1982)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내리 후보에만 오른 스트리프는 <철의 여인> 속 마거릿 대처 연기로 생애 3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갔다. 수많은 동료의 기립박수 속에 연단에 선 스트리프의 첫마디. “수많은 미국인이 ‘또 저 여자야?’라며 불평하겠죠. 뭐… 별수 있나?” 대배우는 너스레도 남다르다. /정재현 2013 제니퍼 로런스 올해 마이키 매디슨이 여우주연상을 받기 전까지 제니퍼 로런스는 지난 12년간 유일한 1990년대생 오스카 주연상 수상자였다. 22살 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제니퍼 로런스는 아카데미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다. 이날 로런스는 시상대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드레스 자락을 밟아 넘어진 사진으로도 수많은 이슈를 낳았다. /정재현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신부의 눈으로 보는 <콘클라베>

콘클라베(교황을 뽑는 전세계 추기경들의 모임)를 통해 선출된 신임 교황은 눈물의 방으로 명명된 제의(祭衣)실로 이동해 교황을 상징하는 복장인 흰색 수단을 갖추어 입는다. <콘클라베>에서 콘클라베를 앞두고 로렌스 추기경(레이프 파인스)과 벨리니 추기경(스탠리 투치)이 새로운 교황이 입게 될 수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눈물의 방이다. 철제 옷걸이에 크기별로 걸려 있는 교황의 흰 수단을 두고 로렌스는 벨리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 23세는 덩치가 너무 커서 제일 큰 수단도 안 맞았어요. 결국 등쪽 솔기를 뜯어야 했지.” 이 대사가 <콘클라베>가 품은 주제 의식을 관통한다. 우선 대사를 통해 언급되는 교황 요한 23세에게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제261대 교황인 요한 23세는 재위 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비롯해 20세기 후반의 가톨릭교회가 개방적, 탈권위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황 중 한명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은 그가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의 나이는 77살. 추기경단은 전임 교황 비오 12세가 20년간 강력한 통치를 해왔기 때문에 후임자는 그와 반대되는 인물이길 원했다. 이 콘클라베를 그린 영화 <요한 23세>(2002)에선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비이탈리아권 추기경들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다툼과 그 속에서 추기경단이 일부러 나이가 많고 영향력이 적은 교황을 선출한 것으로 그린 바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로한 교황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단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방향이 설정될 때까지 잠시 시간을 버는 과도기적 인물로 바라봤다. 이 맥락에서 극 중 로렌스 추기경이 교황의 흰 수단에 얽힌 요한 23세 교황의 일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더라도 마주하게 되는 예외를 대변한다. 누가 선출되더라도 새 교황에게 딱 맞는 수단이 제공될 수 있도록 다양한 크기의 흰 수단이 미리 준비되지만, 교황 요한 23세는 그 모든 준비와 대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수단의 사이즈뿐만이 아니다. 요한 23세는 재임 기간 동안 자신을 향한 세간의 일방적인 평가를 벗어나는 행보를 보였다. 요한 23세에 대한 로렌스의 대사는 앞으로 펼쳐질 콘클라베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에 대한 예고와 다름없다. (참고로 영화의 로렌스 추기경과 원작 소설의 로멜리 추기경 모두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요한 24세라는 교황명을 생각해두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교황 요한 23세의 경우처럼 모든 경우의 수를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나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두고 섭리라고 부른다. 물론 단박에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두고 쉽게 설명되는 가치처럼 보이기 위해 섭리라는 표현을 남발하거나, 예정론적인 관점에서 정해진 운명을 운운하듯 섭리를 언급하는 잘못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표현을 빌려 신의 뜻은 인간의 의지로 재단하거나 이성으로 예측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요한복음 3장 8절)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오묘한 것으로 생각해 그 신비로운 성격과 신의 심오한 성격을 비교하곤 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ורּח(, 그리스어로는 프네우마(πνεύμα)라는 낱말이 바람과 영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에 그러한 비교가 더욱 쉬웠다.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람은 섭리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극 중 추기경단의 단장인 로렌스를 중심으로 콘클라베는 철두철미하게 준비된다. 외부의 도청을 차단하기 위해 첨단 장비가 설치되고 교황 투표권을 지닌 추기경들의 명부가 세밀하게 관리된다. 그들이 콘클라베 동안 머물 숙소와 끼니마다 먹게 될 음식도 철저히 준비된다. 이렇듯 엄격하게 준비되는 콘클라베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만한 틈, 곧 불고 싶은 데로 불어야 할 바람이 통할 만한 공간이 전혀 없어 보인다. 특히 같은 맥락에서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하기 위해 숙소의 창문을 막아둔 것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추기경들은 그저 새 교황이 어떤 국가 출신이어야 하는지, 어떤 신념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 등에만 관심을 쏟을 뿐이다. 매 투표엔 주요 후보자들의 득표수가 엎치락뒤치락하듯 달라진다. 이때 추기경들은 ‘주님의 뜻’을 운운하면서도 각자의 의지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을 보인다.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일들이 잔뜩 펼쳐진다. 그러다 투표장을 뒤흔드는 사건이 터진다. 이에 관해 추기경들의 의견이 분분해지고 상황은 급박해지지만 오히려 콘클라베의 분위기는 차분해진다. 이후 영화는 콘클라베의 마지막 투표로 귀결되는 투표 장면을 보여준다. 이때 로렌스를 비롯한 추기경들은 한 줄기 햇살을 머금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투표용지에 이름을 적는다. 그렇게 영화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이 콘클라베의 최종 결과를 이끌어주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로렌스 추기경은 새로이 선출된 교황과 눈물의 방에서 마주한다. 이 장면에서 로렌스는 신임 교황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신의 섭리를 뼈저리게 느낀다. 로렌스 추기경에게 새 교황 선출 과정이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는 섭리로 받아들여졌다면, 그가 신임 교황과 마주한 시간은 인간의 의지를 거스르는 섭리처럼 다가올 것이다.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조금은 뜬금없이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에필로그를 곱씹어본다. 주인공 라즐로(에이드리언 브로디)가 자신의 조카 조피아(아리안 라베드)와 함께 제1회 건축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조피아는 거동이 불편한 라즐로를 대신해서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라는 메시지가 담긴 소감을 전한다. <콘클라베>가 그리는 선거에서도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다. 추기경들이 보인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벌인 온갖 계획이 무색해질 만큼 영화가 표현한 콘클라베의 최종 목적지엔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우리는 욕망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녹록지 않을 때마다 과정을 들먹이며 자기합리화를 하곤 한다. 이때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아닌 욕망 그 자체에 집중해보면, 사실은 과정 안에 담긴 온갖 의지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 영화와 원작 소설은 제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까지를 전임 교황으로 그린다. 이는 곧 영화 속에서 선종한 교황이 현임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속 교황이 개혁 교황이라 불리는 점도 그간 파격 행보를 보여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모저모를 떠오르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건강이 우려되고 있는 지금, 벌써 세상은 다음 교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러모로 의지를 거스른, 섭리를 위한 자리가 절실해 보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