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기획] 세계와 만나는 방법: <와일드 투어>와 영화를 (다시) 만든다는 것

<와일드 투어>는 야마구치 미디어 예술센터(YCAM)에서 주관하는 영화 제작 워크숍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미야케 쇼는 워크숍의 구성원들을 모집했고, 소수의 참가자들과 영화를 만드는 기초적인 방법을 공유하며 단편영화 제작 실습을 진행했다. 이 임시적인 공동체는 고스란히 <와일드 투어>의 공모자들이 되었다. 미야케는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을 배우로 삼고 YCAM의 아마추어 스태프들과 협업하며 야마구치 시에서 실제로 진행했던 DNA 도감 워크숍을 소재로 장편영화를 구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1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엔 워크숍이 진행되는 자율적인 과정과 식물을 채집하는 다큐멘터리의 흔적이 뒤얽혀 있다. 그 위로 워크숍에 참여한 두 명의 중학생 남자아이 타케와 슌, 그들의 조력자인 대학생 우메가 나누는 감정적 교환의 픽션이 생겨난다. 영화가 시작되면 일상의 평범한 모습을 관찰한 장면들이 나온다. 날아가는 새, 얼어붙은 땅, 강물 위의 오리 떼,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벽에 걸린 풀잎이 연달아 제시된다. 뒤이어 곧바로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촬영하는 우메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일상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영화의 시작점에 주어지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광경과 그것을 바라보고 촬영하는 행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DNA 도감 제작 워크숍 참여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현장으로 향한다. 담당자는 사람들에게 조력자들을 소개하고 워크숍의 목적과 규칙을 설명한다. 참여자들은 마을에 있는 식물과 미생물을 수집해 DNA를 조사하고 도감을 만들어야 한다. 대상을 관찰하고, 채집하고, 기록하고, 의미를 교정하는 것. <와일드 투어>는 바로 이 약속된 규칙을 매개로 카메라에 새겨지는 이미지를 다시 바라본다. 워크숍이 제공하는 규칙은 현장에 모인 참여자들, 그리고 그곳에 입회한 영화에게 두 가지 충동을 일으킨다. 하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발산하는 것이다. 미야케 쇼는 <와일드 투어>를 촬영하는 과정에 “일상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재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말한다. 워크숍의 일원들은 주어진 규칙 아래서 서로의 이름과 관심사를 확인하고 식물을 찾아다니는 기록을 스마트폰 영상으로 남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지켜본 풀잎과 워크숍 현장에서 관측한 식물은 서로 다른 위상으로 프레임에 적힌다. 무작위적으로 수집되는 일상의 이미지와 달리 워크숍의 규칙은 선별적 관찰자의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규칙을 수행한 이들의 현실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데,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각은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변형하기 때문이다. 타케와 슌은 촬영된 이미지의 매혹에 사로잡히면서, 여정에 동행한 우메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호기심에서 촉발된 여정은 그들에게 현실과 영상의 두 영역에서 이중의 열병을 겪게 한다. 다른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규칙을 위반하는 충동이다. 워크숍은 거기 모인 일원들이 받아들이는 규칙을 형성한다. 그런데 그 임의적인 규칙은 일상에서 공유되는 규칙과 충돌하곤 한다. 타케와 슌과 우메가 식물을 채집하기 위해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구역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일상 속의 워크숍은 기존의 규칙과 새로운 규칙이 대립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미야케 쇼의 인물들은 워크숍의 규칙을 빌미로 현실의 규범을 은밀하게 위반하고 회피한다. 그들은 관계에 속해 있으면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한 가지 규칙을 따르면서 또 다른 규칙을 어긴다. 이것이 현실을 관측하는 영화와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원리와 질감의 현실을 창조하려는 워크숍이 맺는 중층적인 긴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워크숍의 실천은 뜻밖의 효과를 가져온다. <와일드 투어>는 픽션과 다큐멘터리가 뒤얽히는 영화의 현대적 속성을 노출하면서 동시에 영화사의 복잡한 기억들을 환기한다. 그 기억은 SF, 서부극, 그리고 영화사 초기 기록필름의 단면에서 온다. 식물 채집을 위해 마을 곳곳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영화 역사에 누적된 세 가지 기억으로 흩어진다. 그들은 실제로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이자 비전문 배우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연의 DNA를 조사하는 SF영화의 탐험가들이고, 출입금지 구역에 진입해 지리적 경계를 탐색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규칙을 실천하는 서부극의 개척자들이며(미야케 쇼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식물의 DNA를 채집하는 소재가 SF영화의 설정 같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고 말하는가 하면 제작에 참고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본 작품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언급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초기영화의 민족지적 열망으로 낯설고 생경한 대상과 체험을 카메라에 기록하는 촬영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렇게 표면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영화사의 기억들을 아마추어 워크숍의 환경 안으로 끌어들여 재생한다. 식물 채집 워크숍의 또 다른 조력자인 야마자키가 학생들을 데리고 숲속과 산맥을 탐사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대목에서 소박하고 어색한 학생들의 연기와 과도하리만큼 웅장한 자연 풍경은 이질적으로 한 장면에 공존한다. 미야케 쇼는 마치 일상적 다큐멘터리의 진실성과 서부극의 신화적인 위엄을 하나의 현장 속에 나란히 배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학생들은 산길을 걸으며 원주민을 따라 인류의 수수께끼를 찾겠다는 농담을 내뱉고, 도중에 포기하려는 친구를 설득해 서로 가방을 던지며 함께 올라간다. 지극히 웨스턴적인 말과 제스처를 거쳐 도착한 곳엔 사방이 트인 수평선과 암벽으로 채워진 위압적인 풍광이 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관찰하고 기록한다. 영화가 잃어버린 것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한 D.W 그리피스의 주장을 돌아본다면, <와일드 투어>는 워크숍의 규칙으로 영화 이미지의 지워진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지 탐색하는 유희적 시도로 다가온다. 워크숍 현장과 결부된 영화가 이처럼 장르영화의 고전적 규범과 초기영화적인 열망을 환기하는 것은 언급한 세 종류의 픽션이 모두 공동체의 시작점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사 초기의 민족지적 기록필름, 고전기 서부극, 서부극의 전통을 이어받은 SF는 언제나 이질적인 공동체 집단의 충돌과 예측 불가능한 타자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룬다. 그들은 세계의 낯선 얼굴과 만나고, 예기치 못한 만남은 공동체의 테두리에 교정된 질서를 요구한다. <와일드 투어>에서 워크숍 담당자는 식물을 채집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새로운 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워크숍에 참여하는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들과 마주할 수 있다는 호기심, 그리고 그 만남이 실현되었을 때 직면하게 될 관계의 시작점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워크숍이 동시대 영화의 주요한 실천적 현장으로 떠오른 것은 더욱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게 된다. 그 현장은 이중으로 열린 장소이기 때문이다. 워크숍은 고전영화의 서사처럼 명확한 규칙으로 인물의 행위를 강제하는 허구의 무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서사의 도착지가 부재하거나 중간에 사라져버리는 모던시네마의 여정처럼 인물이 별다른 목적 없이 배회하는 장소도 아니다. 워크숍은 서사가 요구한 목적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고, 예정된 목적지 없이 그저 배회하는 것도 아닌 비결정의 영화적 상태를 산출하는 기반이다. 워크숍 현장은 일시적으로 촉발되고 사라지는 시선과 몸짓과 화면을 영화에 도입한다. 워크숍에서 생겨나는 장면은 연출자가 조율하는 허구적 질서와 피사체 고유의 자율성을 간직하는 다큐멘터리적 질서 가운데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는다. 혹은 고전영화의 견고한 미장센과 모던시네마의 불투명한 화면 가운데서 위계 없는 범용함으로 그것들의 외양을 혼란스럽게 뒤섞고 교란한다. 이것은 언제나 현재형인 시작점에서 출발하는 불확실한 모험이면서, 지나간 영화사의 흔적을 삽입하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결과를 향해 움직이는 영화 매체의 새로운 장난감이다. 서로 다른 시제로 향하는 충동은 진행 중인 워크숍의 표면에 무심코 뒤엉켜 있다. 미야케 쇼와 하마구치 류스케, 그리고 기욤 브락, 호나스 트루에바, 마티아스 피녜이로와 같은 연출자들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유사한 감각을 공유한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태생인 그들은 워크숍 현장을 장난감처럼 활용하는 대표적인 감독들이며 그곳에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윤곽을 흐트러트리고, 장면이 바뀔 때마다 출현하는 존재론적인 변형과 마모의 가능성에 영화를 노출시킨다. <와일드 투어>의 한 장면에서 우메는 선물 받은 광물을 현미경으로 관측한다. 그녀는 돌의 질감을 들여다보며 관찰되는 부분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반짝거리는 돌은 경이로우면서도 징그럽고. 타버린 떡처럼 보이는 단면과 코끼리를 닮은 단면이 같이 존재한다. <와일드 투어>에서 포착된 현실은 한 가지로 고정된 의미와 형상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끊임없이 뒤바뀌는 시청각적 자극에 동참하는 일이다. 워크숍을 매개로 삼아 통일된 영화 문법을 거부하는 연출자들은 이따금 고전영화의 아름다움과 모던시네마의 유산과 장르영화의 흥분을 위계 없이 습득하고 흡수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미야케 쇼를 예로 들면 그는 장 르누아르와 존 포드에 매혹된 시네필이면서 존 카사베츠의 영화와 작업방식에 깊은 친밀감을 느끼는 동시에 미국 장르영화의 상상력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는 연출자다. 앞서 말했듯 그는 식물을 조사하는 행위로부터 SF영화의 흔적을 발견하고 “새로운 SF영화를 만드는 것”이 <와일드 투어>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와일드 투어>는 나도 모르게 “고열과 같은 강력한 감정”(미야케 쇼)에 사로잡히는 카사베츠적인 정념에 충실한 영화이기도 하면서 그 감정을 웨스턴스러운 제스처와 풍경에 녹여낸 작업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워크숍은 영화의 수많은 기호와 속성을 한 가지 평면에 늘어놓고 탄력적인 경우의 수로 조합하는 재배치의 장소가 된다. 우메에게 마음을 고백하려 했지만, 그녀가 이미 미국으로 떠난 것을 확인한 슌은 우메에게서 문자로 받은 영상을 재생한다. 건네받은 영상엔 플랫폼에 들어오는 열차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장면은 어설프지만 분명하게 뤼미에르의 구도를 흉내 내고 있다. 기차가 스마트폰 영상으로 재생되는 순간 <와일드 투어>가 자극하는 영화사의 또 다른 기억이 도래한다. 그것은 매체의 시작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는 열차의 도착을 매체의 신화적 기원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도착과 끝은 언제나 시작되는 순간과 겹쳐 있다. 미야케 쇼는 한 편의 작은 영화가 끝나는 자리에서 과거의 거대한 시작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도록 설정한다. 그는 스마트폰 화면에 도착한 기차의 표상으로 영화사의 시작점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결국 ‘둘’의 관계를 조직하는 행위다. 영화는 카메라에 채집된 현실의 이미지에 픽션의 의미를 더하고, 한 장면을 다른 장면과 붙이며, 과거에 촬영된 영상을 현재에 투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시작된다. <와일드 투어>의 세 인물도 둘이 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겨울이 봄으로, 세 남녀가 두 친구로, 거절의 경험이 우정의 기록으로 뒤바뀌는 또 다른 ‘둘’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둘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워크숍이 시작하고 끝나는 시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워크숍은 영화를 일으키는 물리적 기반이자 불투명한 통로이고 마침내 영화적 실천을 종결짓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워크숍은 영화의 근본적인 원리와 위상을 재확인하는 현장으로 스쳐 지나간다. 영화학자 토마스 샤츠가 주장한 대로 20세기 영화의 위대함이 “스튜디오 시스템의 천재성”에 있었다면, 그 역량이 소실되어버린 21세기 영화의 돌파구는 스튜디오 바깥의 스튜디오, 다시 말해 임시적인 규칙을 내세워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이탈하는 위반까지도 포착할 수 있는 ‘워크숍 현장의 천재성’에서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와일드 투어>는 호기심 어린 눈빛과 금기를 넘어서는 몸짓으로 눈앞에 있던 세계를 다시 만난다. 이것은 영화를 (다시) 만든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려주는 아름다운 영화다.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로의 모습을 촬영하던 세 사람의 영상이 서로 다른 모니터 화면에서 빛난다. 미야케 쇼는 영화에 여전히 친밀함과 놀라움이 간직되어 있다는 증거를 그 화면에 남겨둔다.

[OTT 리뷰] <일렉트릭 스테이트> <폭싹 속았수다> <데어데블: 본 어게인>

<일렉트릭 스테이트> 넷플릭스 / 연출 앤서니 루소, 조 루소 / 출연 크리스 프랫, 밀리 보비 브라운, 키 호이 콴, 우디 노먼 / 공개 3월14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아이의 눈높이에서 쉽게 풀어낸 차가운 기술 시대의 인간애 1990년대 초, 사람들에게 봉사하던 로봇들이 자유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 기계의 압도적인 전력 앞에 패색이 짙어가던 중, 의식을 로봇에 연결해 조종할 수 있는 뉴로캐스터 기술이 개발되면서 전쟁은 로봇의 패배로 끝난다. 이후 모든 로봇은 ‘일렉트릭 스테이트’라 불리는 추방 구역으로 쫓겨난다. 그 후 1994년, 가족을 모두 잃고 위탁가정을 전전하던 미셸(밀리 보비 브라운)에게 노란색 둥근 얼굴의 코즈모 로봇이 찾아온다. 남동생 크리스토퍼(우디 노먼)가 좋아하던 코즈모 로봇이 자신을 해치려 하지 않는 것을 본 미셸은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로봇을 조종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수상한 밀수업자 키츠(크리스 프랫)와 그의 기계 조수 허먼(앤서니 매키)의 트럭에 몰래 숨어들었던 미셸과 코즈모 로봇은 그들과 동행하며 동생을 둘러싼 비밀에 조금씩 다가선다. 앤서니 루소와 조 루소 형제의 신작 <일렉트릭 스테이트>는 1990년대 대체 역사적 배경을 가진 SF다. 시몬 스톨렌하그가 쓴 동명의 그래픽노블에서 미묘하게 전달되었던 디스토피아적 스산함이 사라진 대신 기계화 시대의 인간애와 가족애가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어드벤처물로 다시 태어난다. 9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가 선사한 정겨운 SF 가족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원작의 심오한 설정을 밋밋하게 변형해 전부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클 수도 있다. <기묘한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밀리 보비 브라운이 고아 소녀 미셸 역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쥬라기 월드>의 크리스 프랫이 키츠 역으로 주연을 맡았다. 키츠와 로봇 조수 허먼 사이의 애드리브 연기가 영화를 보는 내내 작은 재미를 더한다. /유선아 영화평론가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 16부작 / 연출 김원석 / 출연 아이유, 박보검, 문소리, 박해준 / 공개 3월7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제주 바람 아래에서 우리 다 풍운아였다 1960년대 제주. 해녀 광례(염혜란)의 딸 애순(아이유/문소리)은 시 쓰기를 좋아하는 또릿또릿한 소녀다. 생선가게 아들 관식(박보검/박해준)은 가난과 차별의 시대가 애순을 저밀 때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엄마의 이른 죽음을 딛고 성장기 내내 서로의 곁을 지켜온 두 사람에게 어느덧 사랑의 감정이 스며든다. 파란만장한 70년 부부 연대기가 그렇게 시작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인생의 네 계절을 네 파트에 거쳐 전개해나갈 <폭싹 속았수다>는 근현대 제주를 온몸으로 살아낸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곳이 부두든, 시장이든, 유채꽃밭이든, 시대의 숨결이 깃든 공간을 미장센으로 빼곡하게 채워낸 화면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십년에 걸친 대서사시의 정서와 결을 단번에 구축하는 염혜란의 연기가 빛을 발한다. <파친코>에 이어 풍운의 뜻을 품은 여성 서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남지우 객원기자 <데어데블: 본 어게인> 디즈니+ / 9부작 / 연출 저스틴 벤슨, 애런 무어헤드 외 / 출연 찰리 콕스, 빈센트 도노프리오 / 공개 3월5일 플레이지수 ▶▶▶▶ | 20자평 – 최상급 아닌 요소가 없는 가운데 앞으로의 전개가 관건 시각장애인 변호사 맷 머독(찰리 콕스)은 뉴욕 치안계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절친한 친구인 포기를 잃는다. 1년 후, 히어로 정체성을 멀리한 채 일에만 몰두하던 그는 암흑가의 거물 윌슨 피스크(빈센트 도노프리오), 일명 킹핀이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직접적인 응징이 아닌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는 신념을 수년간 위협해온 최상급 악인의 재등장에 데어데블은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넷플릭스에서 세 시즌이 방영되었던 <마블 데어데블>이 7년 만에 디즈니+에서 부활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스트롱맨’형 정치인이 각광받는 세계적 현상과 공명하는 이번 시즌은 앞서 <로키> 시즌2와 <문나이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연출자 듀오가 메가폰을 잡았다. 맷 머독을 경유한 장애 경험과 초능력이 창의적인 영상 언어로 전개되는 동안 시청자는 이 다크 히어로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그저 몸을 맡기게 된다. /남지우 객원기자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비밀의 햇볕, <콘클라베>

빈자리는 채워져야 한다. 교황 선종 이후 콘클라베가 시작되자 시스티나성당 안은 오직 선거의 중력만이 팽배하게 작동하는 닫힌 우주가 된다. 이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기도의 어려움을 겪으며 자신은 결코 교황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주인공까지도 어느새 욕망하게 한다. 추기경의 내면도 중력 법칙에서 예외는 아닌 것이다. 전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들은 본능적으로 언어, 인종, 문화적 배경의 적절한 공모점을 식탁으로 삼고 선거의 판세를 읽는 명민한 몇몇 주도자들에 의해 양강 구도를 형성하려는 분위기는 점차 팽팽해진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조성된 콘클라베의 비밀성은 이렇게 외려 밀봉된 권력투쟁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영화 <콘클라베>의 역량도 여기에 있다. 현실의 정치적 의제를 벼려내 사유하는 작품이기보다 콘클라베를 무대 삼아 집단적 믿음의 역학을 시험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이 집단이 지구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올바르다는 대내외적 자부심을 공유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점도 역설을 더한다. 추기경을 넘어 관객조차 감화시키는 로렌스(레이프 파인스)의 강변에 빗대어보면, 지나친 자기 확신은 멈춘 나침반과 같다. 결코 길을 잃지 않지만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멈춰선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성벽을 쌓는다. 그렇다면 혼란은? 언제나 거기서 틈을 찾는 일이다. 노쇠한 교황의 판단, 알코올중독자인 추기경의 증언, 낯선 인물의 등장, 평소보다 좀더 긴 식전 기도, 지하로 향하는 수녀들의 가능성을 살피는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전반부에 이미 정답을 설파한 주인공의 실질적 행로다. 아데예미가 득세하자, 테데스코 대 벨리니 구도로 투표 권력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한 가운데 로렌스는 뜻밖에도 중도표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갈등하고 의심하는 자로서의 주인공이 이를 반길 리 없고 그는 여전히 주요 후보자들의 정당성을 조사하는 데 몰두한다.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며 벨리니가 로렌스를 질책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벨리니의 위기의식에 보다 선명하게 초점을 둔다. 이쯤에서 <콘클라베>의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어느새 확신은 벨리니나 테데스코의 것만이 아니라 로렌스의 것이기도 하다. 닫힌 집단의 역학이 그로 하여금 투표용지에 자기 이름을 적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믿게 한다. 어느 시점에, 그는 그저 잠시, 그렇게 된다(물론 그 유려한 연기력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신과 교황 앞에서 이보다 더 궁핍하고 나약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이프 파인스의 재능도 이 미묘한 전개에 한몫한다). 그러니 <콘클라베>가 관객의 심리를 조율하는 측면은 관객조차 어느새 로렌스의 편에 서서 그가 교황이 되어도 좋겠다고 바라는 데까지 교묘히 이끄는 데 있다. 언뜻 자연스럽게 우리를 끌어당겨 매몰되게 하는 힘이 닫힌 성당을 넘어 영화 <콘클라베> 안팎으로도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렌스가 자기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린 <최후의 심판>을 올려다볼 때 별안간 폭탄이 터진다. 시스티나성당의 창문이 깨어지고 파편들이 날아 꽂혀 살갗에 피를 낸다. 하늘에서 날아와 확신의 성벽을 부수는 폭탄. 말 그대로 천벌이다. 테러를 직감한 추기경들이 공포에 떨고 이후 긴급회의가 이어질 때 베니테스가 처음으로 공적 발언에 나선다. 영화의 예기치 못한 분기점인 폭탄 테러 장면 이후 성당 내부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뜻밖의 기회에 베니테스가 표심을 사로잡았다는 표면적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평온이 종전의 긴장을 대체하는 것이다. 출현한 것은 그저 구멍. 그러나 그 사이로 햇볕과 그림자, 바람과 새소리가 영향을 끼쳐온다. 시몬 베유가 <중력과 은총>을 통해 남긴 말을 접붙이자면 이러하다. 추기경에게도 예외 없이 “영혼의 모든 자연적 움직임은 물질계의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된다. 은총만이 예외이다”. 비신앙인의 관점에서 은총의 주체를 특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은총의 통로는- 로렌스의 우려를 뒤로하고- 확실해 보인다. 거대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영화가 진정 채워지는 순간은 메꿀 수 없는 틈을 마주했을 때다. 그러자 문득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올랐다.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를 각색해 기독교적 모티프를 다분히 품은 이 영화에서 신애(전도연)는 그나마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살인범의 딸을 미용실에서 만난다. 그녀를 살리는 힘은 단단히 손맞잡은 교인들의 기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가 어질러진 정원 구석의 햇볕 한 조각에 있다. <콘클라베>의 신은 로렌스가 신념과 권력을 착각할 때에 비로소 나타나며, 교조주의와 실용주의의 개념적 대립이 아니라 학살과 테러로 뒤엉킨 생의 현장을 보라고 가리킨다. 피 흘리며 쓰러진 로렌스와 분노하고 까무러치는 신애처럼 인간은 그 뜻 앞에서 당혹해하기 마련이지만 고역 끝에 두 영화가 안착한 지점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바라본다. <콘클라베>는 닫힌 문으로 시작해 열리는 창문으로 끝나고, <밀양>은 자동차 앞 유리에서 올려보게 되는 높은 하늘로 시작해 작은 마당 안뜰의 구석에서 끝난다. 미풍의 존재를 느끼면서 흰 종이에 새 이름을 적어내려가는 추기경들에게 작용하는 힘은 중력일까, 은총일까. 종찬(송강호)에게 거울을 들려 놓고 반쯤 잘린 머리를 다듬는 신애는 구원받는가 아니면 스스로 구원하는가. 끈적한 권력과 내면의 고립에서 벗어나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으로 초연해진 얼굴을 보여주는 이들 영화에서 나는 적어도 스크린의 은총만큼은 확실히 감지한다. <콘클라베>의 마지막 장면. 문이 열리고 여성들이 햇볕으로 나오고 웃음소리가 스며 나온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열림이다. 이 엔딩이 감탄스러웠는데 그간 숨쉴 틈 없이 꽉 짜인 스릴러적 연출을 지속한 영화가 택한 묘사치고는 사뭇 은은한 제스처였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열린 창문 앞에 선 주인공의 상태처럼 이 순간 영화의 스타일 역시 완전한 겸손의 자리로 내려간다. 이것은 굳건한 겸손이다. 영화에 단 7분51초 등장하며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그네스 수녀가 교회의 가부장제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냈듯이, 비로소 한발 물러난 카메라에 담긴 가만한 평화에는 <콘클라베> 속 어떤 정치적 투구보다도 확실한 빛이 숨 쉬고 있다.

[비평] 닫힌 문 뒤에서 반복되는 것, <콘클라베>

*<콘클라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벌거벗은 내 모습을 보여주었어. 그러자 남자들은 벌벌 떨었어. 내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지. -마누엘 푸이그, <천사의 음부> 중에서 그들은 내 성기에 깊은 경외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보통의 성기와는 달랐으니 더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 -키라 트리아, <파워, 오르가슴, 그리고 심리호르몬 연구실> 중에서 <콘클라베>는 이전에 교황 선거에 대해 다룬 영화(<두 교황>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등)가 교황 선거 자체를 주요 제재로 그리기보다는 몇몇 주요 등장인물의 심리를 그리기 위한 배경으로 다룬 것과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영화는 세계 최대 종교 종파의 수장을 뽑는 비밀 행사를 엿보는 듯한 호사가적 즐거움을 정면으로 제공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일반 대중은 교황 선거 기간에 굳게 잠긴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없다. 이때 카메라는 깨진 창문으로 들이치는 바람처럼 홀연히 문 안으로 들어가 고풍스러운 절차와 장소, 등장인물을 보여주며 관객을 유혹한다.동시에 영화는 오프닝부터 등장인물과 관객이 원하는 것을 순순히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는 교황의 시체가 실려나가는 과정과 교황의 숙소가 봉인되는 과정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저 닫힌 문 너머에 있던 것이 실은 아무런 신비로움도 없는, 덜컥거리며 환자운반차에 실리는 차갑게 식은 물체에 불과하다는 은밀한 암시다. 격무에 시달리다 사망한 노인의 시체는 차에 실려 사라졌고 방은 이미 텅 비었다. 멋들어진 리본과 밀랍으로 봉인된 문을 열고 들어가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혹은 추악한 진실로 가득한 보고서가 있거나. 타이틀롤이 뜬 직후 펼쳐지는 장면은 흡사 마피아물을 방불케 한다.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남성들은 단체로 모여 담배를 나눠 피우고 편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처럼 제법 대담한 시작에 고조된 흥분은 영화가 진행되며 점차 사그라든다. <콘클라베>가 막상 정치 스릴러로서는 미심쩍은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기본적으로 영화 속 선거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 속에서 벌어진다. 진보파 후보 벨리니는 영화 초반부터 보수파 유력 후보 테데스코를 절대 당선되어서는 안되는 자로 단정짓는데, 영화가 테데스코에 대한 특별한 추가 정보를 주지 않기에 관객으로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상당히 양심적으로 보이는 주인공조차 이러한 단정에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테데스코가 반감이 드는 언행을 반복하는지라 일단은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영화는 뜻밖에도 이런 양강 구도를 넘어 제3지대 후보인 아프리카 출신 흑인 후보 아데예미가 득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데예미의 혼외자 스캔들이 불거지고, 투표가 다시 양강 구도로 재편되면서 진보파는 보수파 후보 당선을 막기 위해 비리 의혹이 있는 트랑블레를 차악의 후보로 내세운다. 이제 사건은 반복되기 시작한다. 트랑블레 역시 주인공의 결단에 따라 비리 스캔들이 폭로되고, 얼떨결에 주인공만 진보파의 마지막 후보로 남는다. 일련의 과정은 주인공이 비밀을 알게 되고 고뇌한 후 결단하는 패턴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약간의 변주는 있지만 계속해서 같은 일이 반복되므로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옅어지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보수파 유력 후보는 가만히 있는 와중에 그 상대편에 있는 후보끼리 합종연횡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작 악으로 규정된 보수파 후보는 이야기의 중심 줄기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문제는 이것이 보수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과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에 근거한 전개로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상 보수파를 대표하는 테데스코 추기경은 ‘폭탄 테러’와 관련해 ‘종교전쟁’을 설파하는 대목에서 노회한 추기경이라기보다는 너무나도 뻔하게 관객이 규탄할 만한 위험분자로 비친다. 같은 편조차 옷깃을 잡으며 말리는 ‘자폭 선언’을 할 정도로 테데스코는 바보였단 말인가? 왜 이런 바보를 막기 위해 영화 내내 그토록 치열한 정치 암투극을 벌여야 했는가? 그가 차기 교황으로 부적격인 이유를 대사 몇줄로 설명하려다 보니 영화는 모든 등장인물을 반장 선거에나 적합한 정치력을 가진 존재로 격하시킨다.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절멸하려 드는 극우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영화 스스로 보수를 하나의 정치적 선택지로 인정하지 않고 손쉽게 배제하려 드는 자가당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남은 진보파 후보로 여겨진 주인공 대신 철저한 외부인에 가까운 베니테스 카불대교구장 추기경이 교황에 당선되는 반전으로 해소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썩은 정치와 무관한 비정치인, 권력욕이 없는 영웅’에 대한 열광이야말로 일종의 메시아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투영한 것으로, 현실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탄생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 아직 반전은 끝나지 않았다. 곧 영화는 마지막 펀치를 날릴 준비를 하며 득의양양하게 결말로 향한다. 알고 보니 교황이 된 인물은… ‘간성’이었던 것이다! 이 반전의 순간 영화는 재구성된다. 영화의 마지막 숏이 안뜰에서 웃고 있는 세명의 수녀라는 점을 기억하자. 수녀와 관련된 서브텍스트(아데예미와 트랑블레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수녀와 베니테스의 수녀에게 바치는 기도 등)가 메인 텍스트로 떠오르며 영화는 리버럴 가톨릭 판타지로서 온건하게 끝을 맺는 대신 관객이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게 만든다. 세명의 수녀가 왼쪽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고, 그들을 안뜰로 내보낸 문은 조용히 닫힌다. 이처럼 영화는 열리고 닫히는 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삽입해 관객에게 계속해서 오프닝 장면을 상기시킨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밖에 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추기경들은 깨진 창문 사이로 계시처럼 들이닥친 빛과 바람을 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판타지 속에서 간성은 가톨릭 교황이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 간성 영아는 여전히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비동의 수술을 받고 있다. 베니테스의 자궁절제술을 둘러싼 고뇌는 이 이야기를 진보와 보수 구도를 넘어서 구도 자체에 대한 해킹 시도로 이끈다. 메시아적 열망이 투영된 존재가 실은 (가톨릭적 관점에서) ‘부적격 인사’였다는 반전 앞에서 관객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의 전개가 이 마지막 반전마저 값싼 반전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후의 펀치가 ‘간성 의료 개입’이라는 시의적절한 부위를 타격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마땅하겠다.

씨네21 추천도서 - <느리게 가는 마음>

윤성희 지음 창비 펴냄 원래 속도에는 ‘물체의 빠르기’라는 의미만 있지 그 자체가 빠르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느린 것 역시 속도인데 지금 세상에서 속도란 그저 빠른 것만을 표현하는 것 같다. 효율, 유용성과 경제성만이 바람직함의 척도와 같은 세상에서 윤성희의 소설을 읽는 일은 일상의 체감 속도를 느리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유튜브에는 영상을 꾸욱 누르면 2배속으로 빨라지는 기능이 있다. 2시간짜리 영화를 10분으로 축약해놓은 영상조차 2배속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빠름의 경쟁 속에서 <느리게 가는 마음>의 인물들은 하릴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고, 동네를 쏘다니며 금속탐지기로 땅 밑에 누군가 묻어두었을 타임캡슐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싶은 무용한 인물들의 여행에 동행하다보면 어느새 그 일원이 된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 느리디느린 세계에 함께 머물고 싶어진다. <타임캡슐>의 진형의 유튜브 채널명은 ‘어설픈 코난’이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별 쓸데없는 사건을 파헤치는 이 귀여운 코난의 첫 영상 조회수는 13건이다. 겨우 13명이 본 이 영상은 동네에서 불거진 원조 쫄면집 논란에 어느 쫄면집이 진짜 원조집인지를 파헤치는 영상이다. 친구의 집 마당에서 아기 인형이 담긴 작은 관이 발굴되자 진형은 ‘상자가 묻혔던 구멍을 찍고 싶다’며 찾아온다. 이처럼 동네 곳곳에 묻혀 있을 상자를 찾아, 아이들은 땅을 파헤치고 다니는데 거기서는 주로 레모나 깡통(타임캡슐)이 출토된다. 어떤 소원을 적었는지 흔적도 남지 않은 축축한 종이들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20년이 지나 발견된 타임캡슐은 느리게 도착한 바람들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우리 좋은 어른이 되자, 서로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을 빛나는 낙관. 8편의 단편에는 여러 차례 생일이 등장한다. 거짓말로 생일을 맞이한 아이도 있고, 부모가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 화가 나 가출을 감행하는 아이, 생일에는 절대 혼내지 않겠다는 가족의 약속을 받아내는 아이도 있다. 1년에 단 하루, 그날만큼은 다른 누구보다 행복하길 다짐하는 날.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소설 속 인물들은 가짜 생일에조차 소소한 행운을 서로에게 선물한다. 누군가의 생일에 느리게 가는 소설을 선물하자.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생일에 읽어야겠다. 그게 이 세상을 똑똑하게 사는 방법이 아닐지라도. “나중에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게. 그러면 엄마는 또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되어줘.” 그렇게 속삭였더니 할머니는 사라지고 내가 할머니가 되었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누운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 <자장가>, 134쪽

[인터뷰] 공감으로부터, <침범> 배우 곽선영

2006년 뮤지컬 <달고나>로 데뷔, 그동안 출연한 연극과 뮤지컬, 드라마를 다 합하면 30편이 넘는 배우 곽선영의 스크린 데뷔작은 뜻밖에도 3월12일 개봉한 <침범>이다. “주변에서 하도 얘기해 이제는 모두가 <침범>이 내 첫 영화라는 걸 안다”라며 수줍게 웃다가 이내 영화 후기를 묻는 골똘한 표정에선 초심자의 긴장이 엇비쳤다. 곽선영은 쉽지 않은 첫길을 선택했다. <침범>에서 그가 분한 수영 강사 영은은 또래와 다른 행동을 일삼는 7살 딸 소현(기소유)의 엄마다. 아이가 사고를 쳤다는 전화를 언제 또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 지 오래된 듯 보이는 영은의 첫 얼굴에서부터 곽선영의 공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첫 영화 현장이 어떻게 남아 있나. 특유의 무드가 있는 것 같다. 드라마를 시작한 지 10년이 채 안됐으나 경험상 드라마 현장은 굉장히 바쁘고 빠르게 돌아간다면 영화 현장은 호흡이 길다고 느꼈다. 비교적 극에 대해서 오래 생각할 시간이 있고 전체 대본이 나와 있으니까 좀더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영화를 끝마친 뒤에 든 생각이고 하는 동안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어떤 매체든 배우로서 맡은 인물을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작업을 한다는 건 동일하니까. - <구경이> 때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인물이 살아온 세월과 역사를 파악하는 걸 우선시한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이 작업 방식을 <침범>에서는 어떻게 적용했나. 엄마가 된 영은에서부터 시작했다. 소현이가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육아가 처음인 영은이 ‘아이라면 저럴 수도 있는 건가?’ 하고 궁금해했던 순간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원래로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절박하게 노력했던 시기, 그렇지만 결국 바뀌는 건 없어 체념한 현재까지. 그러니까 <침범>은 영은이 이 모든 시간을 거친 뒤 매우 지친 상태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 영은은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곽선영 배우의 곡진한 연기로 드러난 영은의 그 마음이 영화가 슬프도록 무섭게 느껴진 이유였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증오. 그 밖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모든 감정을 다 합친 말이 모성애일 테다. 그건 느껴본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이 아이를 놓아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분명 느끼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 인물이라는 사전 합의가 있었다. 김여정, 이정찬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소현을 어떻게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들겠다는 목표가 분명한 엄마로 영은을 그리자는 데로 의견이 모였다. -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는 수영장이 메인 장소라 영화가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배우에게도 수영장이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렇네. 돌이켜보니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안전하게 촬영했지만 내겐 수영장이 깊은 편이었고 체온도 내려가니 현장에 있는 동안 평소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가 지금의 영은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수영장은 물속에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도 살아야 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엄마 영은의 책임감을 잘 드러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 물과의 접촉이 전제된 수영 강사 역할이었다. 물에 대한 공포가 있지 않았나. 원래 물을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 <침범>은 내게 도전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물속이 편했다. 물과 친해지는 연습을 충분히 거친 뒤 촬영에 들어가긴 했으나 신기할 정도였다. 한번은 잠수한 뒤 얼마 안돼 누가 날 끌어올리길래 ‘왜 벌써?’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물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랬다고 하는 거다. 확인해보니 40초 넘게 숨을 참았다! 중요한 건 이렇게 극복한 경험이 하나 생기고 나니까 어떤 작품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 그래서 내게 <침범>은 노력한다면 더 많고 다양한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기도 하다. - 지난해에 첫 예능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로맨틱 이탈리아>를 찍었다. 여행을 통해 여전히 모르겠는 나를 알아보고 싶었다고 출연 이유를 밝혔는데, 성공했는지 궁금하다. 그 프로그램을 하기 전 즈음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하는 고민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가서는 적응하고 즐기느라 생각을 잘 못했는데, 방송 모니터를 하면서 하나 알게 된 게 있다. 누가 울면 따라 우는 사람인 곽선영은 타인의 감정에 잘 전염된다는 걸 말이다. 얼마 전 <침범> 무대인사 때 우는 소유를 보자마자 울고 말았다. 관객들에게 우리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지금 이 자리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는 아이의 말에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 기소유 배우와 거의 모든 장면을 함께 촬영하며 쉽지 않은 작품을 헤쳐나갔다. 성인과 아역 배우로 나눌 수 없는 동지적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프로페셔널한 배우이자 최고의 파트너였다. 난 우리가 비슷해서 참 좋았다. 둘 다 장면에 확 집중했다가 오케이가 나면 잘 빠져나온다. 대기하는 동안 소품 인형을 가지고 열심히 놀다가 슛 들어간다고 하면 인형들을 고스란히 돌려놓았다. 그리고 같이 손잡고 힘든 신을 연기하러 갔다. (웃음) 그래서 누가 “영은이로 사는 동안 정말 힘들었겠다”라고 말하면 즉각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소유 덕분에 즐거웠어.” 공통질문 1. 아무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종일 집에만 있을 거다. 밀린 책도 읽고 햇빛과 바람도 느끼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집순이 라이프를 즐기고 싶다.” 2. 곽선영이 직접 추천하는 곽선영의 출연작 “첫째로는 <친애하는 판사님께>. 첫 드라마 출연작이다. 아직은 매체 연기가 낯선, 그래서 풋풋한 배우 곽선영의 모습이 궁금한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두 번째는 . 캐릭터 자체가 재밌고, 단막극을 정말 해보고 싶었는데 이 작품으로 소원 풀었다.”

[인터뷰] 욕심껏 과감하게, <침범> 배우 권유리

<침범>의 2부를 책임지는 김민(권유리)은 걸어가는 그를 돌려세워 우리가 아는 그 권유리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을 만큼 낯설다. 배우 특유의 건강하고 밝은 에너지는 온데간데없고 음울한 아우라를 풍긴다. 늘 고여 있던 웃음기도 싹 빠졌다.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막막함,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은 그 자신을 좁은 방에 웅크리게 했다. 그런 민에게 경계 없이 치고 들고 들어오는 해영(이설)은 위협적인 존재다. 해영과 부딪치면서 민의 적막한 인생에 소음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 파도치는 인물의 내면이 선명히 떠오른 권유리의 얼굴은 놀라움을 안기며 앞으로의 그에게 신선한 기대를 품게 한다. - 직전 영화 <돌핀>의 나영에 이어 <침범>의 민도 대중적으로 익숙한 ‘유쾌한 권유리’와는 거리가 있다.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번 작품을 선택한 이유였나. 김민이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컸다. 사연도 많고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걸 떠벌리는 성격이 아니다. 차라리 혼자 차갑게 얼어버린 쪽을 택한 친구다. 그동안 내가 맡아왔던 캐릭터들과 확실히 달라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픔이 깊고 진한 인물에 갈수록 더 끌린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다. 앞서 <침범>의 첫 느낌이 정말 좋았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직감을 믿는 편인데 평소 즐겨 읽는 추리·SF 소설을 읽을 때처럼 술술 읽혔고 흥미진진했다. - 20년 뒤 현재인 2부에서 관객은 추리 게임을 시작한다. 1부에서 만났던 기이한 소녀 소현(기소유)가 민인지 해영인지를 찾아야 한다. 모호하게 설정된 캐릭터라 할지라도 연기하는 배우는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했을 텐데, 그 과정은 어땠나. 그런 이유로 민이는 시나리오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다른 인물들의 대사, 이를테면 엄마는 우울증으로 돌아가시고, 아빠는 없다는 주변인들의 몇 마디 말들을 통해 그의 삶을 짐작해야 했다. 그래서 김여정, 이정찬 감독님과 만나 두분이 구상한 민이에 대해 듣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감독님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다. 민이 부모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작품에 등장하는 전 애인과는 왜 만났을지 혼자 계속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물의 디테일이 늘어날수록 연기의 밀도가 높아지는 게 체감되어서 더욱 그런 작업에 몰두했다. - 시각 정보로 인물을 표현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민의 스타일링에 어떤 의견을 냈는지 궁금하다. 추리 게임을 하는 관객을 염두에 두고 민이의 모습을 만들어봤다.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없고 소녀시대 유리와도 매칭되지 않는 모호한 이미지일 때 관객이 긴장감을 끝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표정이 잘 읽히지 않도록 앞머리를 눈썹까지 내려오는 무거운 뱅 스타일로 잘랐다. 의상은 회색 인간처럼,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보이도록 무채색 계열로만 준비했다. 외적인 부분이 미니멀해지면서 눈빛이 중요해졌는데 그만큼 눈빛으로 표현하는 연기란 무엇인지 공부할 수 있어서 <침범>을 한 뒤 부쩍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 이설 배우와 서로 다른 에너지로 맞부딪히며 내는 마찰이 2부의 스릴을 만들어낸다. 긴밀한 소통이 오갔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조화로운 공연이었다. 민과 해영의 대립 구도가 팽팽하게 느껴졌다면 그건 이설 배우의 공이 크다. 현장에서 설이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냈다. 이전에 나오지 않았던 참신한 해석이라 자극을 많이 받았다. 설이의 의견을 반영해 준비해온 것들을 바꿔보기도 하면서 유연해지는 법을 배웠다. 여배우들이 잔뜩 나와 극을 이끌어가고 함께 현장에서 머리를 맞대고 한신 한신 만들어가는 작업을 오랫동안 바라왔다. 그 바람이 <침범>을 통해 이루어져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 - 여성배우가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마리끌레르 젠더프리’에 올해 참여했다. 보면서 또 다른 캐릭터로 변신한 권유리 배우를 상상했는데, 최근 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었다면. 기본적으로 모든 작품을 ‘저 인물을 내가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본다. 최근에는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지금 당장 엘리자베스 역할이 맡겨진다면 데미 무어처럼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연륜과 경력이 더 쌓인 뒤라면 그런 도전적인 캐릭터를 꼭 한번 해보고 싶다. - <돌핀>과 <침범>. 시리즈 <보쌈-운명을 훔치다> <굿잡>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까지 최근작들의 장르가 스릴러, 사극, 액션 등 겹치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한데 묶을 수 없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 도전 정신이 강하게 느껴지는 필모그래피에서 폭넓게 성장하고 싶은 열망이 느껴진다. 배우로서 스펙트럼을 넓히는 작업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다양한 도전을 하기에 충분한 나이이니까. 평소 생각만 하거나, 실패할까봐 두려워하다가 결국 못하게 되는 상황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런 시기를 지나쳐 지금은 한두 가지 확신만 있으면 일단 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소녀시대 유리가 내게 가져다준 대중 친화적인 이미지에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배우로서는 그에 반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내가 보아도 익숙하지 않은 내 얼굴이 담긴 <침범>이 터닝 포인트가 될 거라고 믿는다. 공통질문 1. 아무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흥미진진한 깜짝 이벤트를 연다든지 해서 누군가의 하루에 기분 좋게 침범하고 싶다! 그리고 스태프의 작업실에도 슬쩍 가보고 싶다. 특히 미술팀. 영화를 볼 때 미장센에 우선으로 눈이 가는 편이고 세트에 들어섰을 때 공간이 주는 무드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방문하면 정말 신날 것 같다.” 2. 권유리가 직접 추천하는 권유리의 출연작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드라마 <이별유예, 일주일>을 꼽고 싶다. 남은 시간이 일주일밖에 없는 한 여자가 그 시간을 연인과 전력을 다해 사랑하는 데 쏟는 절절한 러브 스토리다. 예민한 감정을 다루는 역할이라 하면서 많이 배웠고 쉽게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누구나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특집] 영화 관람료에 얽힌 6가지 논점 ··· 객단가 이슈, 이동통신사 할인, 부금과 부율 등 ①

푯값은 올랐는데 수익은 그대로인 이유 Q1. ‘객단가’ 이슈의 핵심과 경과는? 지난해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이하 영화인연대)가 출범하고, 한국 영화산업을 살리자는 기조 아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영화계에 대두된 이슈는 바로 ‘객단가’다. 원래 경제용어에서 객단가란 매출액을 관객수로 나눈 수치로, 시장 소비자 1인당 평균 매입액을 의미한다. 영화인연대는 기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사용해오던 ‘평균 관람 요금’ 대신 객단가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관객이 실제로 구매한 티켓 가격은 ‘상품단가’에 해당하고, 실제 고객이 결제한 금액의 평균 금액을 명시하기 위해서는 객단가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다는 이유에서다. 즉 영화표 객단가는 각종 상영 할인 및 통신사 마일리지 혜택 등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지불된 가격을 뜻한다. 이 객단가를 기준으로 영화 투자사와 제작사가 최종 수익을 회수하게 된다. 여기서 영화계의 핵심 주장은 “영화표 값은 올랐는데 객단가는 오르지 않아 영화 제작·투자 시장의 수익이 줄고 점차 위축된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한국 영화시장이 축소된 2022년부터 2024년까지 객단가는 감소하고 있다(표1 참고). 그렇다면 2018년 이후 네 차례 영화 관람료가 상승(표2 참고)했음에도 객단가는 낮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영화인연대 등 영화계의 주장은 팬데믹을 거치며 멀티플렉스 3사가 자사 모객을 위해 이동통신사들과 과도한 할인 입찰 경쟁에 들어섰고, 결과적으로 불리한 계약 조건과 할인권 남용을 실행해 배급사측에 불이익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통신사, 카드사 할인은 있었으나 원래 40% 수준이었던 객단가가 2021년 이후 30%까지 떨어졌다는 현장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1만원짜리 영화표로 4천원을 벌다가 3천원(배급사 부금 기준)밖에 벌지 못하는 상황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통신사 할인과 정산 이슈에 대한 사항은 6번 질문에서 이어가도록 하자. 반면에 극장업계는 객단가 하락을 이동통신사와의 계약 문제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먼저 최근 극장 관객수가 2019년 대비 60% 수준에 머물면서 극장 차원의 마케팅 비용이 상승할 수밖에 없었고 순수익이 줄어들게 됐다는 논지가 있다. 그리고 일반 관람료는 상승했으나 장애인, 경로 할인 등의 관람료는 이전과 같기에 전체 관객수 대비 객단가가 떨어지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위와 같은 과정이 진행되면서 최근엔 국회와 영진위 등 정책 차원의 단계에서도 객단가 이슈가 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2024년 10월 국정감사 현장에서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객단가 문제를 영진위 대상으로 질의했고, 영진위가 발행한 ‘2024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와 ‘2024년 영화 상영분야 공정환경 조성을 위한 영화인·관객 인식조사’ 등에서도 객단가에 대한 실태 조사 및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영화산업 주체들의 힘겨루기 Q2. 부금, 부율이란 무엇인가? 영화산업에 얽힌 영화 관람료의 기본 메커니즘은 부금과 부율이다. 부금은 극장영화가 상영하는 동안 거둔 총관람료를 뜻한다. 그리고 부율이란 이 부금에서 영화발전기금과 부가세 등을 차감한 수익을 극장과 배급사가 나누는 특정 비율을 뜻한다. 현재 한국영화에 대해서 극장과 배급사는 서울 기준 4.5:5.5, 그외 5:5 비율로 부금을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영화 관람료, 객단가 문제 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극장사와 영화 창작자(제작사, 배급사, 투자사 등) 사이에 적절한 부금 정산이 이뤄지고 있는지의 문제와 같다. 이에 대해 소비자 입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상세한 계산식은 이어지는 소비자 리포트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영화인연대는 최근 극장업계의 불공정한 할인 제도가 이뤄지면서 합의된 부금이 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련해서는 역시 극장의 이동통신사 할인 제도와 정산 방식이 쟁점이므로 6번 질문을 살피면 좋다. 영화계의 입장이 반영되는 경로 Q3. 영화인연대는 왜 생겼고 어떤 일을 하나? 지난해 4월 무렵 영진위의 예산 삭감과 거버넌스 붕괴에 반발하며 활동을 시작한 영화인연대는 지난해 7월 공식적으로 연대체 출범을 알렸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한국독립영화협회 등을 중심으로 영화계 단체 16곳이 모여 결성했다. 크게는 공정환경 특별위원회와 독립영화 특별위원회로 나뉘어 상업영화 기반의 영화산업과 독립영화 생태계에 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로써 2024년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개최한 ‘한국영화 생태계 복원을 위한 토론회’를 시작으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영화산업에 대한 포럼을 개최했고 국회에서도 ‘지속 가능한 영화 생태계를 위한 영화제 정책 토론회’ 등을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 또한 영화상영관 입장권 부과금 폐지에 대한 반발, 영진위 거버넌스 회복 등을 이야기하며 영화계의 스피커가 되고 있다. 영화인연대의 주요 역할은 국회와의 가교이기도 하다. 현재 영화산업의 탈출구로 여겨지는 유일한 곳은 국회다. 원래 해당 역할을 해내야 할 민관 협치 거버넌스인 영진위의 기능과 영향력이 줄어든 상황이다. 영진위는 2023년 9월 ‘한국 영화산업 위기 극복 정책 협의회’를 꾸렸다. 객단가, 홀드백, 투자 침체 등 영화산업 전반의 문제와 불공정 사안을 두고 ‘산업 내 자율 이행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영화산업 관계자(극장업계, 제작업계, 투자배급사, IPTV, OTT 등)를 한자리에 모았지만 결국 협약에 실패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영화 관련 정책과 예산을 삭감하는 기조를 보이자 지난해 5월 출범한 제22대 국회에서 영화 정책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화인연대는 국회 토론회를 비롯해 문화체육관광위 소속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여야 의원들과 면담을 이어가며 영화계 이슈를 알리고 있다. 한국영화 다양성과 티켓 가격의 상관관계 Q4. 부과금과 영화발전기금의 의미는? 영화표 값, 즉 전반적인 관람료 매출액의 저하는 영화상영관 입장권 부과금(이하 부과금)의 감소를 부르고 있다. 부과금이란 관객이 영화관 티켓을 구입할 때 3% 징수되는 세금이다. 2007년부터 거두기 시작한 부과금은 2007년부터 2018년까지 4804억원이 징수됐다. 이 금액은 고스란히 영진위의 사실상 유일한 자체 재원인 영화발전기금에 편입되어 사용됐고, 한국 영화산업의 근간이 되어왔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2020년엔 105억원, 2022년엔 179억원, 2023년엔 260억원을 거뒀으며 2024년엔 294억원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 즉 영화 관람료의 이슈는 단순히 극장과 영화 창작자의 수익뿐 아니라 상업영화, 독립영화, 영화산업 정책과 영진위의 존속에 연관되는 커다란 문제인 셈이다. 지난해 3월 정부는 갑작스럽게 부과금 폐지 정책을 발표했고, 12월 어지러운 탄핵 정국 속에서 폐지 법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올해 2월27일에 국회 본회의에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의 일부 개정법률안이 통과되며 부과금이 부활했다. 더하여 부과금 징수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에서 필수적으로 징수해야 하는 것으로 개정되며 영화계에 긍정적인 바람을 불렀다.

[특집] 내 푯값은 어디로 가나요? - 할인 유무·할인 종류에 따른 영화 티켓값 경우의 수

극장에 가면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무심코 결제하는 티켓. 그렇다면 관객이 지불한 티켓 금액은 도대체 누가 가져가는 걸까? 문득 예매 창을 들여다보다 이런 호기심을 한번쯤 품어본 관객이 있을 것이다. 원래 이뤄져야 할 산업 구조에서 정가를 지불한 티켓값은 과연 얼마나 배급사와 제작사에 돌아가는지. 혹은 할인 프로모션을 적용한 티켓은 어떻게 산업 관계자들에게 수익이 분배되는지.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네 소비자의 사례를 통해 영화 티켓값에 대한 궁금증을 파헤쳐보자. A 정가에 영화를 보다. 한가로운 어느 주말 오후. 소비자 A씨는 마실을 나갈 겸 극장을 방문해 <미키 17>을 일반관에서 관람하기로 했다. 귀찮으니 따로 할인 이벤트를 찾아보지 않은 A씨는 1만5천원 정가를 주고 티켓 1장을 구매했다. B 통신사 할인을 받다. 평소 이동통신사 멤버십을 잘 활용하는 소비자 B씨. 주말 저녁에 극장에서 <하얼빈>을 보기 위해 3일 전부터 통신사 상시 할인으로 티켓을 예매했다. 덕분에 정가보다 4천원 싼 가격인 1만1천원에 영화를 볼 수 있었다. C 특별관에서 보다. 평소 개봉 기대작은 꼭 특별관에서 보는 걸 선호하는 소비자 C씨가 있다. <퇴마록>의 특별관 예매가 열리자마자 티케팅에 성공해서 결국 주말 오후 특별관 좌석표를 예매하게 되었다. 혹여나 실패할까봐 서두르는 바람에 할인쿠폰 적용을 잊은 C씨는 그냥 정가 1만8천원을 주고 영화를 보기로 했다. D 특별관 표를 통신사 할인으로 구입하다. 이동통신사 멤버십 페이지를 유심히 보던 소비자 D씨. 그는 자신의 통신사 멤버십이 멀티플렉스 특별관 티켓도 할인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상영관인 만큼 그는 <파묘>를 특별관에서 보기로 결심했다. 통신사 할인을 적용하여 4천원이 저렴해진 덕에 그는 1만4천원에 특별관 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 영화발전기금 3%을 제하고 난 금액의 10%를 부가세로 책정한다. (부과금 = 입장권 가액 ÷ 1.03 × 3%(단, 소수점 이하 반올림)) -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 제작/배급사와 극장이 수익을 나누는 비율인 부율은 통상적인 50:50으로 계산한다. *** 배급사는 극장으로부터 부금을 받은 뒤 배급 수수료를 챙기고 차액은 투자사와 제작사에게 전달한다. **** 부금에서 총제작비 및 비용을 제하고 난 순수익을 투자사:제작사가 6:4 비율로 배분한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어느 평범한 하루

봄비가 내린다. 가벼운 졸음이 눈꺼풀 위로 살짝 내린다. 포근하고 촉촉한 습기가 반가우면서도, 전국을 삼킨 산불을 진정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라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못내 야속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은 여전히 나올 줄 모르고 어수선한 정국 따라 마음도 번잡스러워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어본다). 따뜻하고, 나른하고, 심란하고, 마음이 고된 3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렇게 지나가는 중이다. 맥 빠지는 상황에 잠시 넋을 놓은 듯. 적어도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이 흘러간다. 이른 아침 출근길. 10년 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불현듯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침묵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그 시절 소소한 추억들을 꺼내며 낄낄거렸다. 신나고 재미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대부분 기억이 흐릿했다. 어색하고 아쉬운 통화를 마친 뒤 잠시 혼자 걷다가 문득 그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는지 이해가 됐다. 생일이나 MT, 축제 같은 구체적인 일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건만 언젠가 그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신 뒤 기숙사로 걸어갔던 새벽의 촉감이 또렷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뺨을 스쳐가는 착잡한 새벽 공기, 말 한마디 없이 한참을 걸으면서도 빈틈없이 꽉 찼던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그땐 잠시 ‘이 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비록 그 바람은 이뤄지진 않았지만 1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되살아난 감각을 마주하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감각이 또다시 기억 저편으로 가라앉기 전에 찬찬히 곱씹어본다. 소란스러운 이벤트가 너무 많아지고 당연해진 탓일까. 돌이켜보면 특별함을 기념하고 기록했던 순간들은 간직하려 애쓸수록 오히려 흐려지는 것 같다. 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겼던 평범한 날 뜻밖의 순간이 불쑥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반가운 봄비로 연결된 그날의 새벽처럼. 몇주 전부터 초조한 마음으로 준비했던 <씨네21> 1500호를 마감하며 자연스레 옛 기억들을 강제로 대면하는 중이다. 30년 세월 중 그래도 절반 가까이 직접 책을 만들었는데, 막상 돌이켜보니 불꽃 튀듯 빛나는 순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지난 몇주 동안 나를 괴롭힌 불안의 정체였나보다. 독자로 읽었던 지난 책 중에는 빛나는 기사들이 너무 많은데, 직접 만든 700여권을 뒤지면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기사나 글을 발견하지 못했다. 점점 초조해 졌다. 열등감으로 질척이던 불안이 봄비를 맞으며 오늘에야 씻겨 내려간다. 자랑할 만한 특별함을 찾으려니 보이지 않았던 거다. 특별한 순간 같은 건 없었다. 대신 평범해서 잘 기억되지 않을 모든 순간이 똑같은 빛깔로 반짝이고 있다. 돌이켜보면 매주가 이번주 같았다. 역량이 부족했을지언정 한순간도 진심으로 매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씨네21>에 발을 담근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였으리라. 그 한주 한주가 쌓여 어느덧 1500권이다. 30년 세월의 무게나 영광 같은 건 아직 잘 모르겠다. 너무 크고 멀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한주의 정성과 한권의 무게만큼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 감각을 믿고, 이번주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또 한권을 만든다. 1499권에 한권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