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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씨네21>이 기록한 한국영화 2000년~2003년

민규동과 김태용(왼쪽부터). 기념비적인 투숏이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내놓은 한국영화아카데미 13기 동기생이자 스물아홉, 서른 언저리의 두 감독이 자신들의 영화를 정리한 언어는 눈밭만큼 새하얀 미소로 웃는 얼굴들처럼 지금까지도 명료하다. “여성영화, 그리고 퀴어영화로 봐줬으면!” 2000년 1월. 조선희 편집장은 에디토리얼 ‘즐거운 밀레니엄 소동’ 글에서 최초의 국소적 ‘디지털화’를 준비 중인 매체의 운명을 앞두고 이렇게 썼다. “기자가 된 뒤엔 한때 ‘전자신문이 등장하면 장차 종이신문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므로 실직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90년대 들어 PC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모든 직장이 곧 재택근무 체제로 이행할 것처럼 이야기할 때, 출퇴근을 즐기는 편인 나는 벌써부터 서운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이미 나올 만큼 나온 이야기. 그런데 25년 뒤인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하고, 대체로 ‘현상 유지’ 중이다. 한국 최초, 유일한 대안영화제의 기치를 내건 전주국제영화제에 2000년 영화계의 온 관심이 쏠렸다. 개막식은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팀이 이끌었으며, ‘영화의 거리’가 출범한 완산구 고사동은 과감한 배색을 내세운 영화제 깃발들로 나부꼈다. 이른바 릴레이무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두 번째 에피소드인 <악몽> 촬영이 옛 서대문구치소 인근에서 이뤄졌다. “저예산 제작 방식에 입각한 싸구려 장르영화”를 내세웠던 류승완 감독의 선포는 그 자체로 2000년 한국영화의 혈기와 야심을 닮아 있다. 제작비 6천만원의 극장영화를 제작하려다보니 모니터링에 열중인 감독 너머로 소품팀은 <여고괴담> 때 쓰고 남은 인조 피를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꺼내오고 있더라는 후문. 2002년 “우리는 그들이 잘해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또 다른 7년 뒤엔 절대 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백은하 기자(현 배우연구소 소장)의 편집자주는 예언이 됐다. ‘라이징 스타’는 <씨네21>이 연례행사로 기획하는 정통의 신인배우 발굴 프로젝트다. <씨네21> 기자들의 감식안이 유독 빛을 발한 두해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창간 7주년 특대호인 350호의 표지를 장식한 일곱 배우다. 조승우, 신민아, 권상우, 임은경, 류승범, 공효진, 박해일. 영화 시상식 라인업을 방붙게 하는 배우들이 “병아리처럼 보이려고 옷도 다 노랑으로 맞추고”(신민아)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았다. 2002년을 뜨겁게 달군 영화. 작가감독인 장선우가 제작비 100억여원을 들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만들었지만 영화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외면을 받으며 흥행에서 참패를 맛보았다. 제작 단계부터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았고, 전국 관객 15만명(서울 관객 7만700명)을 불러모으는 데 그치며 충무로 투자 자본의 썰물 현상까지 이끌어낸 ‘큰 실패작’이었던 것. <씨네21>은 영상 전문지로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모든 순간에 동행했다. 시작은 관객에게 쉽게 영화를 소개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영화의 ‘CF 현장’ 취재였다. 개봉 이후 찬반 비평, 네티즌 찬반 토론회 취재, 흥행 실패 진단 등 다양한 기사를 지면에 실었다. “요즘 세대는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진다. 그들에게 예전에는 이렇게 순수한 사랑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목포 북교동에서 이루어진 <클래식> 촬영 현장. 곽재용 감독이 <씨네21>에 전한 연출론이다. 2003년 “밥은 먹고 다니냐.” <씨네21>도 그곳에 있었다. 한겨울 경남 사천의 어느 철길 앞, 인공강우에 흠뻑 젖은 배우 송강호, 박해일, 김상경 사이를 가로지른 봉준호 감독은 미끄러운 바닥에 곧잘 휘청거리면서도 직접 연기 시범을 보일 정도로 열정적으로 디렉팅했다. 적수는 영하 10도의 추위와 오후 5시면 컴컴해지는 짧은 일조 시간. 배우들의 안전을 위해 자꾸만 얼어붙는 바닥을 일일이 토치로 녹이는 스태프들의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져만 갔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클라이맥스 신 중 하나가 완성된 순간이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자신의 차를 직접 운전했으며, 장관에게 90도로 절하는 관료문화를 ‘조폭문화’와 유사하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 감독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이 된 지 약 3주차에 장관실에서 이창동 감독을 만났다. 1990년대 이후 지속된 한국영화의 발전사가 다시 물음표에 직면한 시점. 청년문화가 영화보다 뜨거운 현실 정치에 다시 눈 돌릴 때 이창동 장관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현실이 아무리 누추해도 결국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에 장준환이라는 이름의 돈키호테가 나타났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영상원 조교를 거쳐 류승완 감독의 단편 <변질헤드>를 촬영하고, 봉준호 감독과 함께 <모텔 선인장> 연출부로 활동하기까지…. 영화감독 데뷔를 향한 장준환 감독의 초기 모험을 개괄한 기사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바람의 한복판에 엉뚱한 돌을 던진 괴작 <지구를 지켜라!>의 출현에 분명 적잖이 흥분한 모양새다. “갑갑한 것일까. 한석규는 물을 마셔댔고, 박중훈은 얼굴을 연신 쓸어내렸다.” 극장에서 1년에 146일은 한국영화를 틀어야 한다. 즉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제) 이야기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40%를 넘어선 이때,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추진하려는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결정적인 걸림돌로 바라봤다. 이에 2003년 6월12일, 한국영화 스크린쿼터 수호를 위한 영화인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임권택·임순례 감독, 배우 안성기·송강호·이병헌·한석규·장나라·박중훈·방은진·장동건, 제작자 차승재·심재명·고 이춘연 등이 모여 결사반대의 뜻을 전했다. 관객의 기호의 자유, 영화인 생존권의 문제, 국가 차원의 산업 보전 및 장려 정책에 대한 뜨거운 토론이 이뤄졌다. 전남 보성의 <장화, 홍련> 세트장에서 수미와 수연 자매가 나란히 섰다. 뒤편엔 실내 장면이 영화의 90%인 하우스 호러영화답게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목조건물 세트가 아름다운 실내외를 자랑하고 있다. “선배님은 정말 가슴이 넓은 남자예요.” <올드보이> 하면 온통 복수와 대결의 핏빛 구도로 점철된 투숏이 연상되지만 그 시절, 잠시 이런 분위기도 있었다. 당대에 <거울속으로> <내츄럴시티> 등 스타덤에 분주히 호응하던 스케줄과 <올드보이> 촬영을 병행한 유지태에겐 영화 홍보에 으레 나눌 법한 상찬 이상으로 최민식의 존재가 “믿을 구석”이었다. 후배의 애정 공세를 받아낸 최민식이 복수의 우아한 엘레지를 완성한 결정적 캐릭터를 추켜세운다. “<올드보이>는 사실 이우진, 유지태의 영화예요.”

[특집] <씨네21>이 기록한 한국영화 2020년~2024년

2020년 2020년. 유례없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원년이었다. 바이러스의 마수 앞에 촬영 현장은 기약 없이 중단됐고, 영화관은 문을 닫았다. <씨네21> 또한 짧게 휘청이고 금세 자구책을 도모한 한국영화계의 곁에 서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영화계의 흐름을 치열하게 진단하고 조명”(장영엽 전 <씨네21> 편집장)했다. 장기화된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영화산업의 여러 구성원과 정부와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를 한자리에 모아 대담을 진행했다. 또한 언택트가 ‘뉴노멀’이 된 시대에 극장과 관객의 관계, 나아가 영화적 체험의 의미를 재정립하는 기사 등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1년 내내 가늠했다. 창간 25주년을 맞아 <씨네21>은 연출, 연기, 촬영, 미술, 의상, 편집, 투자·배급 등 산업 모든 분야의 1990년대생 영화인들을 만났다. 이 기획은 여러모로 ‘젊어진’ 한국영화계의 세대교체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표준근로계약의 정착 등 노동시간과 환경을 선배들보다 중시하게 된 세대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자 만들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배우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는 윤단비 감독의 바람, “영화, 드라마,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을 아울러 작업하고 싶다. 전쟁영화도 해보고 싶다”는 이종경 썬번 대표의 꿈은 5년이 지난 지금 얼마나 실현됐을까. 다시 한번 그때 그 목소리를 찾아 나설 때다. 2021년 2021년 4월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 부문에서 <미나리>의 “여정 윤”(Yuh-Jung Youn)이 호명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윤여정 스페셜 에디션을 구성했다. 기자와 감독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 대표, 스타일리스트까지 윤여정과 협업했던 많은 이들의 말과 글을 한데 모아 대배우가 한국영화 역사에 남긴 족적을 돌아봤다. <씨네21>의 염원이 LA까지 전해졌던 걸까. 윤여정은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공이 됐다. 2022년 2022년 대선후보 등록을 마치고 22일간의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한 유력 대선후보 3인을 지면에 초대했다. 당시 기호 순대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심상정 정의당 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다. 경제, 외교·안보, 복지 분야 등에 비해 중요도가 덜 부각된 영화 및 문화예술 정책을 중심으로 각 후보들의 철학을 살폈다. 2023년 2003년 11월21일 국내 개봉해 20주년을 맞이한 <올드보이>가 관객들과 해후했다. 시리즈 <동조자>의 촬영을 마치고 귀국한 박찬욱 감독과 “오랜만에 본 것 같지도 않은 데다 모인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지겹다”고 농담하는 최민식, 그 옆에서 감격한 유지태의 만남이었다.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는 설원 장면의 소품에 얽힌 비밀, 펜트하우스 수로에 얽힌 제작비 고충 등 흥미진진한 스크린 너머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2024년 여름영화의 주역들이 바뀌었다. 2024년의 여름 텐트폴 영화로 낙점된 이종필 감독의 <탈주>는 이제훈과 구교환이 맞붙는 액션 활극이자, 오묘하게 멜로드라마적인 남북 ‘청년’ 첩보물. 촬영 전부터 시상식에서 서로를 러브콜했던 배우들답게 스크린 속에서는 물론이고 <씨네21> 화보 촬영 현장에서의 화학 작용도 남달랐다. 덕분에 <탈주> 표지는 이례적으로 무려 3종 표지로 특별 제작, 배포됐다.

[기획] 한국영화가 이탈리아에서 축제가 되었으면 - 정한석 영화평론가의 제23회 피렌체한국영화제 참관기

피렌체한국영화제. 작고 소박할 것이 틀림없는 영화제다. 그런데 최근 이 영화제를 찾는 주요 한국 영화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이창동, 봉준호, 김지운, 임상수, 나홍진,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이정재, 박해일, 황정민 등이 최근 몇년간 이곳을 찾았다. 이곳은 어떤 사람들이 만드는 곳일까. 어떤 매력을 갖춘 곳일까. 영화제 기간 동안 현지에 머물며 각종 행사를 지켜보고 참관기를 전한다. 개인적으로 피렌체한국영화제를 알게 된 것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맡게 되면서부터다. 당연한 일이다. 그 이전에는 알 만한 계기가 없었다. 피렌체한국영화제의 집행위원장 리카르도 젤리는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그는 언제나 열정적이었고 많은 것을 궁금해했고 더 좋은 작품을 초청하고 싶어 했다. 종종 너무 열정적인 나머지 카페에서 목소리가 높아지면 동석한 장은영 피렌체한국영화제 부위원장에게 “목소리가 너무 크다, 조용히 말하라”고 어김없이 지적받기도 하지만, 그의 열정을 말릴 방법은 별로 없어 보였다. “뒷일 생각하지 않고 먼저 저지르고, 끈기와 집요함으로 달려들고, 머릿속에 든 생각은 어떻게든 해야 하는 사람. 그래서 매일이 마찰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영화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장은영 부위원장의 설명이다. 그런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내가 업무로 정신이 없어 그와 마주치지 못하기라도 하면 그는 잊지 않고 반드시 어딘가에 있는 나를 찾아냈고, 그가 원하는 작품의 정보들을 기어코 수집해갔다. 한 개인에 관한 특별한 인상이 피렌체한국영화제를 궁금하게 만든 전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돌이켜보니 모든 일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이번 피렌체행에 복잡한 사연이 없진 않았다. 대략 2년 전부터 어드바이저를 제안받아 오던 중 올해는 한번 같이해보자며 의기투합하였으나 공교롭게도 피렌체 출장 중 나의 보직이 한국영화 프로그래머에서 집행위원장으로 변경될 예정이어서 영화제가 가까워 올수록 참석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하지만 이미 예정된 현지에서의 업무들이 있었던 터라, 약속은 약속이라는 마음으로 피렌체행 비행기에 올랐다. 피렌체로 향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왜 그토록 중요한 한국 영화인들이 이곳을 이렇게나 많이 찾는 것일까. 예컨대 최근 몇년간만 해도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송강호, 황정민, 이병헌, 이정재, 박해일 등이 이곳을 다녀갔다. 피렌체한국영화제와 유사한 규모의 전세계 어떤 영화제 혹은 타 대륙의 ‘한국’영화제들 중 이 정도의 화려한 한국 영화인 초청 라인업을 자랑할 만한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피렌체라는 유서 깊은 도시의 특수성이 큰 몫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제는 게스트들의 ‘후기’를 먹고 자란다. 그러니까 그들이 피렌체라는 도시의 매혹에 끌려 방문했다 해도, 영화제가 엉터리면 안 좋은 소문은 금방 퍼지게 되어 있다. 중요한 손님은 집으로 돌아가며 불평을 늘어놓을 테고, 그다음 사람들은 방문하기를 꺼리게 된다. 피렌체한국영화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중요한 한국 영화인들이 이곳의 손님이 되고 싶어 한다. 일단 매년 양질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자 시도하는 노력이 엿보인다. 올해 개막작은 이종필 감독의 <탈주>, 폐막작은 전선영 감독의 <폭로: 눈을 감은 아이>다. 전자는 국내시장과 평단에서 이미 의미 있는 결과를 끌어냈고, 후자는 아직 국내 개봉하지 않은 기대작이다. 올해의 특별전으로는 ‘황정민 특별전’과 ‘나홍진 특별전’을 마련했다. 말 그대로 설명이 필요 없는 동시대 한국영화 거장들에 관한 프로그램이다. 개막식에 맞춰 도착한 황정민 배우는 현지 관객에게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마스터클래스를 여는 한편 <베테랑2>의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동안 많은 이들의 박수와 질문이 쏟아졌다. 그가 배우로서 걸어온 경력, 연극인과 영화인으로서의 관점, 함께 일한 감독들과의 에피소드, 좋아하는 이탈리아영화 등등 질문은 다채로웠다. 장은영 부위원장은 “올해 이 두개의 특별전을 취재하기 위해 주변 유럽 국가에서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와서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 취재를 위해 런던에서 온 기자도 있다”고 전해주었다. 이종필 감독의 개막작 <탈주>가 상영되던 날도 객석은 완벽한 만석이었다. 관객은 숨을 죽여가며 먼 타국의 슬픈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탈주극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밖에도 <행복의 나라>의 추창민 감독이 관객을 만났고, 모그 음악감독은 현지의 플로렌스 팝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특별한 협연도 펼쳐 보였다. 한편 남동협 감독의 <핸섬가이즈>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올해 피렌체한국영화제의 목표는 “영화의 본질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영화 그 자체로 대표되는 황정민, 나홍진 같은 게스트를 대표적으로 초청하고자 했다”고 리카르도 젤리 위원장과 장은영 부위원장은 밝힌다. 올해로 23회째를 맞은 피렌체한국영화제의 시작은 한국영화를 향한 정말 단순한 바람에서 출발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지속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알리려 노력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리고자 했고, 전통무용, 한복 전시, 조각 전시와 함께 영화 10편을 상영한 것이 첫 시작이었다”는 게 피렌체한국영화제측의 설명이다. 23년이 지난 지금 피렌체한국영화제는 그 규모와 무관하게 많은 한국 영화인들에게 ‘가보고 싶은 좋은 영화제’로 손꼽힌다. 영화제를 이끄는 리카르도 젤리 위원장과 장은영 부위원장은 원대한 소망 대신 이런 말을 전한다. “지금도 사실 큰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매년 열심히 하는 것뿐.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약간의 바람이 있다면, 영화제가 훨씬 더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 바통을 넘겨받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다.” 하지만 후임에 대한 걱정은 당분간 넣어두어도 될 것 같다. 열정적인 운영진도, 소박한 현지의 관객도, 환대받는 한국 영화인도 모두가 서로를 좋아하고 즐거워했다. 피렌체한국영화제라는 이 축제의 현장은 여전히 오래 갈 것 같다.

[trans x cross] 소중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 <해변의 스토브> 오시로 고가니 작가

일본 만화를 고를 때 반드시 참고하는 리스트가 있다. 종합출판사 다카라지마사가 매해 발표하는 ‘이 만화가 대단하다!’다. 그해 가장 사랑받은 작품들의 랭킹으로 여성편과 남성편으로 나누어 선정한다. 2005년부터 시작해 일본 만화의 트렌드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자리매김했다. 2024년 ‘이 만화가 대단하다!’ 여성편 1위작인 <해변의 스토브>가 지난 2월26일 국내에서 출간됐다. <해변의 스토브>는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상실(<해변의 스토브> <눈 내린 마을>)과 공허(<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박탈감(<눈을 껴안다>)과 소외감(<설녀의 여름>)을 함께 나눠줄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 살고 싶어지는 몰입(<바다 밑바닥에서>)과 발견(<소중한 일>)의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걸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읽다 보면 용기가 저절로 부푸는 이야기를 데뷔작으로 펴낸 만화가 오시로 고가니는 어떤 작가일까. 호기심에 못 이겨 출판사(문학동네)를 통해 그에게 서면 인터뷰를 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긴 답변이 도착했다. - <해변의 스토브>에는 연인과의 이별로 눈물이 마를 날 없는 인간 스미오에게 말을 거는 난로가 등장한다. 영혼이 있는 난로는 어떻게 구상했나. 스미오의 난로와 같은 형태의 난로를 애용하고 있는데 그가 항상 가까이에서 내 생활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난로는 내 삶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관점에서 깊이 생각하는 과정에서 캐릭터가 탄생했다. 다카노 후미코의 단편 만화 <오쿠무라 씨의 가지>(奥村さんのお茄子)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 시니컬한 난로는 스미오와 같이 본 영화에 ‘68점’을 준다. 점수를 훌쩍 높여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이 90점 이상을 준 영화는 무엇인가. 하나를 고르기는 어렵다. <엔딩 노트> <이터널 선샤인> <결혼이야기> <바튼 아카데미> <천국은 아직 멀어> <벌새>. 이 작품들은 여러 번 다시 볼 만큼 좋아한다. -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는 불의의 사고로 투명인간이 된 남편 모리조와 그의 아내의 이야기다. 아내가 욕실의 쏟아지는 물줄기를 통해 모리조의 몸을 실감하는 컷이 압도적이다.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할 때 처음 떠오른 이미지다. 언젠가 가족이 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드러난 몸의 선이 아름답다고 느꼈고 이 느낌을 그림에 담아보고 싶었다. 이 아름다움을 독자에게 어떻게 고스란히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컸는데 결국 독자 각자가 자신만의 감상을 가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눈을 껴안다>에는 인상적인 목욕탕 장면이 있다. 여기서 여성들의 나체는 마른 몸으로 통일되지 않으며 어떠한 간섭도 없이 유유히 움직인다. 거기서 오는 편안함이 있다. 여성의 몸을 성적인 기호로 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캐릭터를 한명의 사람으로 여기면 그녀들을 성적으로 묘사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보통 목욕탕에 가면 다양한 몸을 가진 여성들이 사바나의 동물들처럼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걸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고 기쁘다. 목욕탕의 그러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 <바다 밑바닥에서>의 후카야는 글쓰기에 열망이 있는 여성이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책을 읽던 도중 글이 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쥔다. 당신도 후카야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다. 집에서 만화를 그리는 일이 많다. 예열을 위해 설거지를 하거나 커피를 내리거나 빨래를 널거나 하는 일이 루틴이다.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면 내 안의 재료들이 다 빠져나간 느낌이 들어 책과 영화를 보면서 창작을 위한 연료를 채운다. 이런 행위를 반복할 때 겨우 조금씩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만들고 읽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하나의 기관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그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 이젠 없는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눈 내린 마을>은 애도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스즈키를 떠나보낸 마치다와 모리타. 남겨진 두 친구에겐 당신의 어떤 생각이 반영됐나. 이 작품을 그릴 당시만 해도 아직 어렸고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없는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기릴지, 반대로 죽은 나를 친구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해주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그렸다. 그리고 좀더 어른이 된 지금, 장례는 남겨진 사람에게 필요한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소중한 일>에서 무언가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던 시미즈는 ‘석양이 비치지 않는 사무실에 빛을 닿게 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빌딩에 반사되는 빛을 보며 “이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런 감격을 느껴본 적 있나. 친한 친구나 가족과 대화할 때나 취재할 때, 그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우주 같은 걸 느끼며 감동의 순간을 종종 맞이한다. 그 순간들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때때로 독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맛있 는 음식을 먹을 때, ‘이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라고 생각한다. - 유독 눈 내리는 겨울이 배경인 작품이 많은데 눈과 겨울은 당신에게 어떤 인상인가. 눈에 대한 동경이 크다. 눈이 내리지 않는 오키나와 출신이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날을 떠올려보자. 소리가 흡수되어 조용하다. 쌓인 눈으로 인해 시각적 정보는 줄어들고 여백은 많아진다. 그 와중에 바람의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데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 <바다 밑바닥에서>의 난로와 <눈 내린 마을>의 눈사람이 <해변의 스토브>의 난로처럼 영혼이 있는 존재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눈사람에겐 영혼이 있을지도. 나중에 만화가 야마모토 미키 선생님이 “두 친구가 눈사람을 만든다는 건 여기 없는 스짱(스즈키)을 존재하게 하려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신 적 있다. 눈이 내리니 으레 눈사람을 만드는 걸로 한 거라 놀랐다. <바다 밑바닥에서>의 난로는 단순히 배경으로 그린 거지만 후카야가 그를 계속 소중하게 사용한다면 영혼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오시로 고가니의 요즘 빠져 있는 것들 5가지 1. 올해 초 ‘나무 찜통(세이로)’을 사서 여러 가지를 쪄먹고 있다. 2. TBS 라디오 <모리모토 다케로 스탠바이>로 뉴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매주 꼭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생활은 춤춘다>의 상담 코너, <아즈미 신이치로의 일요일 천국> 등, 최근 좋아하는 팟캐스트는 <모모야마 상사>, 도미나가 교코의 <일과 일 사이> 등이 있다. 3. 유튜브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스케치북 영상 보는 걸 좋아한다. 4. 오리사카 유타의 앨범 《주문》을 2024년에 가장 많이 들었다. 5. 집안일할 때는 넷플릭스 시리즈 리얼리티쇼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를 자주 본다.

[커버] 벼랑 끝에 섰던 그 소년의 표정은, <약한영웅 Class 2> 박지훈

교실 내 알력 다툼과 정글 같은 서열 싸움, 암묵적인 복종과 불굴이 선명했던 <약한영웅 Class 1>은 회색빛으로 무감해진 연시은(박지훈)을 은장고로 전학 보내며 교내 혈투를 이어간다. 친구를 잃은 슬픔에 젖어들 새도 없이 시은은 이젠 너무나 질려버린, 그러나 학교 뒤편에서 오랫동안 숨어온 또 다른 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다만 학교폭력이 만들어낸 그림자 옆에는 어둠뿐만 아니라 빛도 함께 공존한다. 밝고 명랑하고 엉뚱한 친구들. 모난 것 없이, 음침한 구석도 없이 시은에게 모여들고 달라붙는 친구들이 <약한영웅 Class 2>를 시끄럽게 채운다. 박후라는 별명의 비폭력주의자 박후민(려운), 싸움을 망설이는 법 없는 고현탁(이민재), 시은을 따라 굽히지 않는 법을 배운 서준태(최민영). 외로웠던 소년은 새로운 관계를 통해 마침내 자기만의 정원을 넓힌다.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시은의 바람을 생생하게 그려낸 박지훈은 새 시즌을 통해 보다 다층적인 방식으로 주인공을 체화한다.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잠근 시점부터 경계선을 침범하는 친구들을 받아들인 순간까지. 교실을 벗어나 지역으로 확장된 학교폭력 문제부터 그 중심에 선 아웃캐스트의 피로한 마음까지. 시은에게 삶의 단층을 여러 겹으로 덧씌운 박지훈은 약한 영웅의 시기를 이제 막 통과해온 묘연한 소년의 얼굴을 짓고 있었다. *이어지는 글에서 배우 박지훈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인터뷰] 무용영화의 생태계 지속을 위해 - 정의숙 서울무용영화제 집행위원장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무용학 전공 교수로 학계에 몸을 담았던 정의숙 서울무용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퇴임 후의 삶을 영화제에 바치고 있다. 평생을 다뤄오던 무용의 가치와 영역을 영화 매체와 접합시켜 넓히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개인적인 소망은 무용영화가 우리 사회의 예술과 창작 생태계에 긍정적인 영향이 되길 바라는 사회적인 바람과도 연결된다. 8회까지 영화제를 견인해온 정의숙 집행위원장의 소감과 비전을 들어봤다. - 7회까지 서울무용영화제를 이끌어온 소감은. 처음부터 영화제의 목표는 무용영화를 상영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무용영화라는 장르의 생태계를 독립적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무용영화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국내에선 특정 페스티벌이나 영화제의 부분적인 규모로만 다뤄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무용영화의 창작자들이 활동하는 플랫폼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꾸리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무용영화라는 형식을 문화적으로 아카이브하는 토대를 만들고 유지하는 게 우리 영화제의 과업이고 보람이다. - 문화적 아카이브의 범주에서 올해 처음 선보이는 ‘SeDaFF 셀렉션’이 눈에 띈다. 그간 영화제와 꾸준히 만나온 창작자들을 관객과 연결한다. 안무가이면서 스크린댄스 작품을 계속하여 선보인 정철인 안무가, 임정은 감독과 <신의 딸은 춤을 춘다> <공작새> 등으로 극영화에 무용의 성질을 결합했던 변성빈 감독을 초청해서 그들의 창작 과정과 의미를 관객과 나누려 한다. 변성빈 감독의 작품에 출연해온 해준 안무가도 함께한다. 영화제가 8회째를 맞는 시점에서 무용영화가 본격적으로 뚜렷한 예술 장르로 자리 잡고 있고, 우리 영화제가 어떻게 기여해왔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영화제가 아카이브의 매개와 플랫폼 역할을 하려면 지속성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우리 영화제는 지자체나 큰 기업에서 지원금과 후원금을 받지 않는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제 개최 지원금을 몇년 동안 받긴 했지만, 올해엔 지원사업의 요건 변경으로 인해 신청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비를 충원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알음알음 후원금을 받기도 하면서 영화제를 꾸려가고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내가 자녀가 없다. 다른 분들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데 난 그러질 않고 있으니 이런 방식으로라도 일종의 책임을 지고 싶은 마음이다. 없는 살림이지만 상금도 계속 늘리려 한다. 1회에는 공모전 상영작을 7편 뽑았는데 올해에 14편까지 늘린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주요 스태프와 박일규 조직위원장, 전행진 프로듀서 등 핵심 멤버들이 8년간 함께 달려와준 것도 크게 감사할 점이다. - 무용영화의 확장이 사회적으로 또 어떤 영향력을 펼칠 수 있을까. 최근 영화나 콘텐츠를 보면 사람의 몸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평생 무용에 몸담아온 사람으로서는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힘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러니 무용영화를 통해 우리의 몸이 발현하는 가능성과 긍정성을 펼치고, 이런 관점이 소수의 예술에 국한하지 않고 대중영화나 큰 상업영화에도 영향을 끼치길 바라고 있다.

[기획] <씨네21> 베스트 기사30 ➃

충무로 팔팔세대 50 2010년 750호 <씨네21> 창간 15주년 특집은 80년대 이후 출생한 이른바 ‘88세대’ 영화인을 소개하는 기사로 꾸려졌다. 88세대의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 그럼에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보고 영화인의 꿈을 꾼 이들의 활력은 한국영화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다양한 분야의 현장 스태프(스크립터, 회계, 무술, 스틸 작가, 포스터 디자인 등)와 매니지먼트, 수입·배급·홍보·마케팅사, 영화제, 비평 분야까지 너르게 시선을 넓혔다. 이어 799호의 ‘팔팔세대가 말하는 한국영화계의 지난 1년’ 특집기사에서는 그들을 다시 만나 각자의 변화를 물었다. 영화계를 떠나 인터뷰에 불참한 몇몇은 “영화가 하고 싶었지만, 의지만으로 생활을 해결할 수 없었다”라며 한국영화계의 불공정한 구조를 토로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떨까. 표준근로계약서와 주 40시간 근무제가 정착돼 변화의 바람이 분 이후, 다시금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봐도 좋겠다. 부산국제영화제 검열의 광풍이 몰아친다 2015년 993호 겨우 10년 전인 2015년엔 영화계 검열의 광풍이 불었다. 서병수 전 부산시장의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사퇴 종용,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 폐지 등 정부의 가시적인 “영화계 길들이기” 작업이 두드러졌다. <씨네21>은 한국영화계 검열의 역사를 정리하는 동시에 티에리 프레모 당시 칸영화제 예술감독, 봉준호·이준익 감독 등 국내외 영화인 10명에게 영화와 영화제의 자유에 대한 지지의 전언을 받았다. 이후 밝혀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와 윤석열 정부의 영화 정책 등을 볼 때 이때의 광풍은 언제든 다시 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의 극장 정치 2017년 1087호 박근혜 전 대통령의 거대한 국정농단 사태 안에서 영화계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체와 영화계 검열이란 곤혹스러운 사태에 직면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씨네21>은 <연평해전> <인천상륙작전> 등 군사, 안보에 관한 콘텐츠에 대해 정부와 군의 투자 압력과 로비가 횡행했다는 증거를 입수하기 시작했다. 영화인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을 비롯한 영화인 8개 단체 인사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 블랙리스트 주도한 문화 부역자 물러나라!”라는 문구와 함께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산 횡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벨> 상영 사찰에 대한 문제 등을 제기했다. 영화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한 박근혜 정부의 암행은 계속하여 그 속내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애국과 국뽕, 그리고 사전검열 2017년 1090호 터질 것이 터졌다. 박근혜 정부가 정부의 입맛에 맞는 특정 작품에 대해 외압을 자행했으며, CJ 그룹을 압박해 ‘창조경제를 응원합니다’처럼 이른바 ‘국뽕 광고’ 제작을 종용했음이 밝혀졌다. 이어 2017년 10월엔 법정에서는 박근혜 정권이 영화 모태펀드를 운영하는 한국벤처투자 임원 교체 방안에 개입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입증됐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정부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배제”하라는 등의 정책을 운용했고, 문화체육관광부가 ‘건전애국영화’를 지원하기 위한 추가예산을 확보한 사실들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씨네21>이 쏘아올린 신호탄이 영화계의 분노와 단합을 이끌었다. 우리 시대의 시네필을 말하다 2020년 1252호 <씨네21> 창간 25주년의 마지막 특집기사는 ‘우리 시대의 시네필을 말하다’ 기획이었다. 2020년대 국내 시네필의 현주소를 비롯해 그간의 역사, 56여명의 시네필에게 건넨 설문 등을 정리했다. 밀레니얼 시네필 5인을 모아 대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시네필의 정의를 고루하게 재단하기보다는 어떤 실천으로 자기만의 리액션을 펼칠 수 있는지 논의했다. “단어(시네필)가 많이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누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가 얼마나 잘 아는지 그걸 구분 짓고 평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중략)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영화를 보러 다니는 사람, 그게 본래 시네필의 의미일 것이다. 그저 영화를 사랑하는 걸로 족하다.”(한동균 편집장) 마이크로시네마의 가이드 2025년 1494호 밀레니얼세대 시네필의 실천적인 활동은 2025년 무렵 마이크로시네마로 통칭되는 움직임을 통해 적극적으로 감지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극장 경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영화 매체의 범주가 점차 넓어지면서 좀더 넓은 차원의 활동을 존속할 수 있는 특정 ‘공간’이나 ‘매개’가 시네필 문화를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시각예술 전반에 대한 상영, 워크숍, 강연 등을 실행하고 있는 커뮤니티 ‘소리그림’이나 고전영화와 일군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토그래프, 대전 지역에서 청년들의 영화 문화 중심이 되고 있는 INK 등이 그 사례로 소개됐다. 수도권 외 지역에서 활동하는 각종 마이크로시네마와 커뮤니티시네마의 동향은 지금 시대에 ‘시네필’과 영화 문화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되묻게 하는 요소였다.

[인터뷰] 절대 휴대폰을 보지 못하게, <야당> 황병국 감독

- 14년 만에 신작 <야당>과 함께 돌아왔다. 준비하던 작품이 있었는데 연이어 세편이 엎어지니 10년이 금방 가더라. 연출에 대한 바람은 늘 품고 있었다. 오랜만에 작품을 세상에 내놓고 나니 영화에 대한 열정과 연출에 대한 소중함이 더 깊게 와닿는다. -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김원국 대표가 마약사범에 관한 기사를 보내준 게 시작점이 됐다고. 이후 상당히 살을 많이 붙인 듯한데 어떤 자료조사 과정을 거쳤나. 2021년 1월21일 즈음 김원국 대표님으로부터 기사를 건네받았다. 당시 마약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마약 수사대 형사들을 만나고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도 방문했다. 검찰에 관한 수사도 필요해 검사 출신 변호사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그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상황이 실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다. -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고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나 방향성은 취재 단계에서 정리된 것일까. 그렇다. 마약 수사 기관의 형사들을 만난 뒤 정말 큰일이다 싶었다. 2021년 시나리오를 쓸 당시만 하더라도 마약사범 검거율이 1만6천명이었는데 지난해엔 2만8천명으로 늘었다. 걸리지 않은 이들까지 고려하면 훨씬 더 많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마약에 한번 손대면 벗어나기 쉽지 않아서 정부 차원에서도 단순히 마약 거래나 마약 사범을 잡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투약자들의 치료를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 그런 점들을 두루 짚고 싶었다. - 강수(강하늘)는 마약사범과 검사, 경찰의 중간다리 역할인 ‘야당’으로 활동한다. 합법과 범법의 경계에 선 캐릭터인데 묘사할 때 고민한 지점은.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러 사건 해결에 일조한 인물이고, 결과적으로 내 의도에 가깝게 표현됐다. 캐릭터 개인으로서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0대 청년이고, 특정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초반에는 20대의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하늘 배우에게 이야기했다. - 검사인 관희(유해진)와 마약 수사대 형사 상재(박해준)는 같은 마약사범을 쫓느라 종종 부딪힌다. 상재의 경우 롤모델이 된 형사가 두분 있다. 그중 한분이 뇌물을 받았 다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이것을 상재에게 반영했다. 관희는 업무에 찌든 직장인이자 동네의 친한 형 같은 인물이다. 다만 초반부터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 다. 그래서 인물들의 욕망이 드러나는 초반에는 빛에 컬러를 넣고 후 반부로 갈수록 컬러는 빼는 식으로 컨셉을 잡았다. - 인물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공들여 보여주기보다 속도감 있게 사건을 해 결하는 데 초점을 뒀다. 요즘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도 휴대폰을 보더라. <야당>을 관람할 때는 절대 휴대폰을 보지 않게 하려고 배우들에게 대사를 빠르게 말해달라고 했다. 현장에 갈 때 촬영감독, 조명감독과 같이 움직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리듬감이 좋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촬영장에 도착해선 그 리듬으로 촬영했다. 일반적으로 한신이 펼쳐질 때 시작하고 끝을 맺는 기본 형식이 있지 않나. 해당 부분에서 잠시라도 늘어지면 관객들이 어김없이 핸드폰을 보더라. 그래서 편집 단계에서 전부 들어냈다.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극을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 마약사범을 검거하는 장면들도 빠른 속도감으로 촬영했다. 작품을 준비할 때 마약사범을 검거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며 실제 현장에서 있을 법한 현장감을 포착하고자 했고, 이를 반영해 이모개 촬영감독과 콘티를 완성했다. 마약사범을 검거하는 것도 실제 사건에서 가져온 것들이 많다. 강수가 야당으로서 활약하는 걸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는 2008년 강남에서 벌어진 체포 장면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고 극중 마약 수사대 형사와 검사가 동일한 범인을 뒤쫓은 사건도 취재 과정에서 들은 이야기다. 실제 사건이 바탕이 된 만큼 액션도 너무 합이 잘 맞는 게 아니라 흔히 볼 수 있는 싸움처럼 구성해 달라고 무술감독님에게 부탁드렸고 잘 표현해주셨다. - 마약 파티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마약중독자의 실태를 보여주겠다는 의도와 더불어 수위에 대한 고민도 뒤따랐을 텐데. 형사들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현실이 더하다. 영화에서 보여준 건 1/10도 채 되지 않는다. 마약을 하면 제일 먼저 도덕성이 무너진다. 처음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괴로워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약에 손을 대고 또 댄다. 마약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마약범죄의 피해나 이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고민 끝에 정공법을 택했다. 마약에 취한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독일의 현대무용 연출가인 채을 선생님을 섭외했다. 무술감독이 액션신을 연출하듯 채을 선생님이 무브먼트 디렉터로서 나의 의도를 반영해 배우들과 함께 마약 파티 신을 만들고 여러 차례 리허설도 가졌다. - 출연배우들에게 형사 등 실제 인물을 만나게 해줬다고. 감독 본인이 오랜 경력의 배우이기도 한 만큼 본인의 연기 철학이 반영된 제안이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 감독과 배우는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속에서 연기를 펼치는 이들이지만, 그 가상 속에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표현에 더 힘이 생긴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납득 가능해지니까. 그래서 연기나 연출을 할 때 개인적으로 자료조사와 실존 인물 취재를 상세히 하는 편이다. 배우들에게도 디테일하게 디렉션을 줬다. 특정 장면의 연기를 위해 배우들은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나는 배우로서 그걸 고민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그래서 ‘메가박스에서 만나자’는 공동의 목표가 있을 때 ‘9호선 봉은사역 7번 출구로 나와라’라고 배우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럼 배우들은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고민할 필요 없이 내가 제안한 방법 안에서 집중력 있게 신을 준비해 올 수 있다. 배우들의 에너지 누수를 최대한 줄여주고 싶었다. - 마약 수사만큼이나 검찰의 비리도 비중 있게 다뤘다. 검사 부속실 내부를 상당히 디테일하게 구성했는데. 마약 관련 취재보다도 검찰에 관한 정보를 조사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검사 부속실은 실제보다 영화에서 더 크게 만들었고, 자세히 보면 내부에 ‘소훼난파’(巢毁卵破)라는 액자를 걸었다. ‘둥지가 부서지면 그 안의 알도 깨진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둥지는 법 테두리를, 알은 국민들을 의미한다. 법을 잘 수호하면 국민들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고위급 검사들 중 ‘소훼난파’ 액자를 걸어놓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영화를 다 보면 이 액자를 걸어둔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 “챗GPT야, 이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꿔줘” 놀이는 왜 논쟁적인가

때때로 기술은 우리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로 데려간다. 오픈AI가 GPT-4o를 업데이트하면서 세상이 온통 지브리 스타일로 도배 중이다. 원하는 이미지를 맞춤형으로 그려주는 기술 자체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중립적인 결과물이다. 예측할 수 없었던 건 왜 많고 많은 화풍 중 유독 ‘지브리’ 화풍이 (특히 한국에서) 대유행일까 하는, 사용 방식이다. (<데스노트>의 사신 류크의 대사를 빌린다면) “역시 인간은 재미있다”. 이 카오틱한 존재의 행보를 AI 따위가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몇 가지 짐작 가능한 이유는 있다. 우선 ‘지브리’ 스타일은 아날로그의 끝자락에 있다. <바람이 분다>의 4초짜리 군중 장면을 만들기 위해 1년 3개월을 투자하는 비효율의 극치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은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도구를 활용하여 그것으로부터 제일 먼 결과물에 당도했다. 그 거리가 멀수록 신기하고 매력적이므로. 여기엔 아날로그적인 수작업의 결과물 중 제일 유명한 것이 ‘지브리’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AI나 디지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것과 가장 대중적인 속성의 교집합이 낳은 기묘한 현상인 셈이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사람들은 그걸 다양한 방식으로 가지고 논다. GPT-4o의 이미지 생성은 대중에게 새로 던져진 재미난 장난감이다. 120년 전 뤼미에르 형제의 카메라, 시네마토그래프가 그러했듯 지브리 스타일의 유행도 금방 사그라질 것이다. 동시에 뤼미에르 형제의 단순한 시도가 의도를 넘어 ‘시네마’의 기원이 되었듯, 지브리 스타일이 또 다른 어떤 미래로 이어질지 누구도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다. 지금 시점에서 가능한 건 다양한 논의와 상상력이다. 때마침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가 지브리풍 챗GPT 이미지 생성 열풍의 이면을 진단하는 글을 보내왔다. 유희 너머 가려진 우리의 무의식을 진단해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이어 김형준 변리사에게 저작권과 법적 문제에 대해 물었다. 인공지능과 이미지에 대한 사유는 이제 시작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지브리풍 챗GPT 이미지 생성 열풍에 대한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와 김형준 변리사의 답변이 계속됩니다.

[trans x cross] 슬픔의 자리에 능청을 - 일곱 번째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을 펴낸 윤성희 소설가

윤성희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윤성희 동네’의 지도를 쉽게 그릴 수 있다. 오래된 친구들이 찌개에 소주잔을 부딪치는 이름 없는 한식당, 간이 테이블에서 가족들이 캔맥주를 나눠 먹는 편의점, 여고생들이 즉석 떡볶이를 기다리는 분식집, 노인들이 산책 중인 공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몸을 푸는 학교. 망한 세탁소와 슈퍼와 문방구. 도로에는 삼촌의 만물상 트럭이 씽씽, 길가에는 어린이들이 와다다다. 그리고 이젠 없는 소중한 존재와 꿈에서 만나기 위해 잠을 청하는 누군가와 그를 몰래 찾아와 재우려는 영혼이 사는 집까지. 윤성희 작가는 1999년 데뷔 이래 꾸준히 애틋하고 소박한 자기만의 동네를 만들어왔다. 애써서 살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을 오래 바라보며 그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올해 3월에 출간된 윤성희의 일곱 번째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의 테마는 생일이다. 생일 맞은 사람들로 가득한 단편들은 인물들에게 웃는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바람이 담겨 온기로 그득하다. 창간 기념일이 있는 4월 동안 생일 파티를 이어가고 있는 <씨네21>은 생일 책을 낸 윤성희 소설가에게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장을 보냈다. 기꺼이 응해준 그를 만나기 위해 그가 소설 창작을 가르치고 있는 서울예술대학교를 찾았다. 도착한 기자를 향해 한 사람이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환한 미소에서 그가 윤성희 동네의 주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쓴 단편 여덟편을 모았다.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날마다 만우절>이라는 소설집을 냈고, 내가 너무 시대를 읽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던 때였다. 이 당시 한창이던 코로나19 팬데믹도, 이전의 사회적 참사들도 소설에 담아내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했는데 결국 잘 안됐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냥 내가 잘하는 걸 하자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기질이 그런 것 같다. 일상을 산책하는 이야기, 자기만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소시민 이야기 안에서만 상상이 되고 잘 써진다. -그렇다면 윤성희 소설에 그 흔한 회사원도 잘 없고, 작가와 같은 중년 여성이나 교수가 보이지 않는 건 그들을 두고서는 상상이 잘 안되는 걸까. 노동하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서 인물들을 어디론가 늘 출근시키지만 그들의 일터를 상상했을 때 어떤 빌딩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전문직의 세계를 잘 몰라서 그런가. 흥미롭지 않다. 교수는 내 직업이니 불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호기심이 안 생긴다. 왜 나는 또래 여성을 그리지 못할까 하는 궁금증은 오래도록 품어왔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할머니나 어린아이, 40·50대 남성을 화자로 삼을 때가 편하고, 써봐야지 하는 것들이 생긴다. -진짜 생일인 사람(<타임캡슐>)과 생일인 척하는 사람(<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곧 생일이거나(<마법사들>), 생일인 사람을 챙기는 인물들(<자장가> <느리게 가는 마음> <웃는 돌> <보통의 속도>)까지. 모두가 생일을 거쳐 가는 <느리게 가는 마음>은 생일 테마집으로 부를 만하다. 작심하고 생일에 골몰한 결과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소설집 내 작품 중 시기상 처음인 <해피 버스데이>(2021)를 쓸 때 가짜 생일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었다. 그러면 앞으로의 인물들에게는 생일을 줘볼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는데 다음해 작품들(<마법사들> <느리게 가는 마음>)에 자연스레 반영된 것 같다. <타임캡슐>(2023), <웃는 돌>(2023), <자장가>(2024), <보통의 속도> (2024)까지 작품이 웬만큼 모여 묶을 시기가 왔을 때에야 생일이 공통으로 들어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쓴 <여름엔 참외>(2024)에만 의식하고 생일 관련 에피소드, 진짜 자기 생일을 알게 되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영화 내용을 넣어 전체 통일감을 살렸다. -나든 누구든 생일이라고 하면 너그러워져서 좋다. 그리고 매일매일은 누군가의 생일일 텐데, 미역국을 먹거나 초를 부는 당사자의 얼굴을 상상하면 어쩐지 따뜻해진다. 인물들의 삶에 생일을 끼워넣은 건 소설 안팎으로 즐거운 에너지를 주고 싶어서일까. 단편은 대단한 스토리를 요구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저 인물을 작가가 계속 갖고 놀면서 이것저것을 붙여보는 거다. 최근에 얘는 언제 울었을까 웃었을까, 끊임없이 상상하면서 말이다. 최근 몇년간 주인공들에게 생일 파티를 열어주면서 좋았다. 소설 안에 여유와 부드러움, 리듬감도 생긴 것 같고 쓰는 동안 행복도 컸다. 소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흐름이 끊길 수 있으니 넣지 말라고 할 텐데, 내 소설이지 않나. 그리고 내 연차에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웃음) 완결성이 좀 떨어진다 하더라도 웃고 기뻐하고 서로 기뻐해주는 순간을 보고 싶었다. -“괜찮아, 그런 날도 있지”(<웃는 돌>), “지금처럼 잘하자. 지금까지 잘해왔다”(<느리게 가는 마음>) 같은 응원의 메시지도 같은 맥락에서 썼을까. 일부러 넣었는데, 언젠가부터 소설에서는 더더욱 희망만 말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어쩌면 내 방식대로 이 사회에서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한다는 게 뭘까. 더 나은 세계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책을 편 독자들을 생각하면 이 안에 좋은 말들을 가득 넣어주고 싶다. 그래서 강의 시간에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무조건 나쁜 인간에게는 내 문장 한줄도 주기 싫어!” <마법사들>에도 나오는 “애쓴다”라는 말은 평소에도 좋아해서 넣었다. 우리 모두 힘겨운 삶을 애쓰면서 살고 있지 않나. 애쓰면서 사는 우리 모두에게 애쓰면서 계속 살자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 -평행봉 위에 있는 것처럼 걷기(<타임캡슐>), 엄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바람 불어보거나 예쁜 구름 사진 찍기(<보통의 속도>) 등 힘들 때 써먹으면 좋은 것들도 많이 담겼다. 그래서 읽고 나서 종종 따라 해보면 힘이 난다. 누구나 삶이 아무리 바빠도 자기만의 여유 찾기 노하우가 있지 않나. 그 노하우를 실현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 사람이 사랑스러워진다.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이가 가진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 인물들에게도 하나씩은 꼭 만들어주려고 한다. 등단하고 첫해부터 나를 한약방 서랍장이라고 상상해왔다. 산책하고 대중교통을 타는 동안 각종 노하우, 별명, 귀여운 단어, 각종 잡동사니가 떠오르는데 그걸 잽싸게 그 서랍장 안에 집어넣고 적절히 빼 쓰는 거다. -그러고 보니 윤성희 소설에는 악역도 거의 없다. 이번 소설집에서 굳이 찾자면 친구 정원의 돈 3천만원을 가지고 사라진 영수(<여름엔 참외>) 정도가 아닐까. 그런 영수조차 나중에 만기를 앞둔 통장을 정원에게 건넨다. 갈등도 딱히 없다. 그건 내가 불편한 상황을 못 견디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하고 싸우면 긴장감이 싫어서 무조건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쪽이었다. 그래서 갈등 천지인 회사 생활을 못 그리나. (웃음) 상실에 관한 얘기가 많은 것도 비슷한 맥락 같다. 죽으면 부딪힐 일이 없으니까. -상실은 윤성희 소설의 또 다른 테마다. 엄마(<웃는 돌>)와 동생(<해피 버스데이>)과 같은 혈연은 물론, 주인공 친구의 아내(<해피 버스데이>)나 작명소 할아버지(<보통의 속도>) 같은 주변 인물들, 심지어 자신(<자장가>)까지 곳곳에 죽은 사람이 등장한다. 중요한 건 남겨진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애쓰며’ 살아가는 모습이 주가 되면서 이야기가 명랑한 기운을 잃지 않는다는 데 있다. 슬픈 장면을 쓸 땐 나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그렇다고 막 힘들진 않다. ‘이건 이렇게 쓰면 안되지’ 싶은 문장을 고치는 데 더 정신이 쏠린다. 이중 <자장가>는 오열할 정도로 슬프게 읽었다는, 흔치 않은 독자 반응을 접해 내게 신기한 작품이다. 앤솔러지 <음악소설집>에서 청탁받은 거라 엄마의 꿈속에 들어간 죽은 딸아이가 엄마에게 아이유의 <무릎>을 불러주는 이야기로 만들었다. 여기서 아이는 ‘가까스로’ 꿈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러한 진입장벽은 내가 생각하는 소설론에 근거한 일종의 장치다. 결국은 주인공이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자장가>에서 아이가 부를 법한 노래를 찾다가 찾다가 K팝을 엄청 들었는데 그러다가 오마이걸의 팬이 됐다. ‘마냥 좋았던 그때 불꽃놀이’라는 가사도 소설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주 토요일에 오마이걸 콘서트에 간다! 인생 첫 아이돌 콘서트라 살짝 떨린다. (웃음) -일주일 내내 같은 꿈(<여름엔 참외>), 셋째 아이 태몽(<웃는 돌>), 콩 옮기기 대회에 나가는 꿈(<느리게 가는 마음>)까지 인물들이 별별 꿈도 참 많이 꾼다. 나는 꿈을 거의 안 꾸는 편인데 이상하게 내 인물들에게는 꿈을 꾸게 하고 싶다. 밥 먹고 걷고 술 먹고 꿈꾸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하나보다. -인물들이 기억력이 좋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에피소드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예컨대 <보통의 속도>의 주인공은 유튜브에 몸살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가 뭇국 끓이는 영상을 접하고 초등학생 때 매번 뭇국 맞춤법을 틀린 친구에 관한 일화를 들려준 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지금 독특한 특징이 됐지만 데뷔 초반에는 이런 서술 방식을 고민하진 않았나. 초창기 이후, 내 스타일을 찾을 시기에는 글이 너무 어수선한 것 같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작법으로 수없이 잘하고 망하면서 내겐 이런 식의 물 흐르듯 흘러가는 흐름이 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내 안에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어쩌고저쩌고, 시시콜콜 자기 얘기를 떠드는 모습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독자들에게도 좀더 부드럽게 읽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이런 작법의 백미는 <웃는 돌>에서 삼촌의 15년간 직업 변천사가 펼쳐지는 대목이다. 수산물 냉동창고에서 술집, 고깃집, 화훼 단지, 샌드위치 가게를 거쳐 현재 단체 티셔츠 맞춤 사업에 안착하는 과정이 마치 <기생충>의 ‘믿음의 벨트’ 대목처럼 휘몰아친다.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방법이다. 뭐냐하면 일단 빌드업의 마지막 문장을 뜻밖의 걸로 던져놓고 거기까지 한번 가보는 거다. <웃는 돌>의 그 대목은 ‘삼촌은 현재 티셔츠 가게를 한다’에서 시작했다. 이어나가는 과정이 재밌긴 했는데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 좀 고생했다. -유튜버가 등장(<타임캡슐> <웃는 돌>)하거나 유튜브를 활용하는 장면(<보통의 속도>)이 전보다 꽤 많아진 것 같아 눈에 띄기도 했다. 내가 요새 유튜브를 많이 본다. 댓글도 함께 보는데 그중 잔잔한 노래 영상들에 달린 이런 댓글들에 눈이 간다. 내 딸이 죽고 얼마 뒤에 이 노래를 들었는데 좀 괜찮아졌어요. 악플도 선플도 아닌 슬픈 고백들. 그런 말들을 왜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남겨둘까. 그 마음이 궁금했고 지금 구상 중인 작품도 이 유튜브 댓글에 관련한 내용이다. -과거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결국 미래를 향한다는 인상이다. “예순살이 될 때”까지(<자장가>), 관절 약을 서로 챙겨주면서(<여름엔 참외>) 살자고, 십년 뒤에 타임캡슐을 확인하러 오자고(<타입캡슐>), “한여름이 되면 아빠랑 엄마랑 똑같은 꽃무늬 잠옷 바지를 입고 수박을 먹”자고(<느리게 가는 마음>). 그렇게 오래오래 함께 살자는 굳건한 말들이 소설 곳곳에 심어져 있다.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한 독자라면 ‘주인공이 나중에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상상하지 않나. 나라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오늘 봄놀이를 가서 즐거웠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들이 내년에 봄놀이를 또 갔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쓴다. 주인공들에게 현재를 열심히 살게 해서 좋은 미래로 자연히 건너가게 하고 싶다. 애쓰는 사람들의 미래에 희망을 던져놓고 싶고 그게 내 소설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 소설을 쓰면서 나도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게 됐다. 쓰는 사람으로서 소설에게 고마운 일이다. 윤성희의 소설 쓰는 어느 하루 “마감을 앞두고서는 계획표를 따라 움직인다. 이를테면 오전 9시에 편안한 동네 카페에 가서 오후 1시까지 쓰고 나온다. 2시까지 점심을 먹고 2시 반까지 산책한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2~3시간 동안 식탁과 소파를 오가며 쓰다가 다시 카페에 나와 1시간 쓰고 그런다. 쥐어짜서 쓰진 않는다. 그런 시기는 지났다. 아무 첫 문장이나 놓고 이어서 쓴다. 누구누구가 어제 수학 20점을 맞았다. 그냥 그렇게 시작하는 거다. 그러다보면 ‘재밌겠는데?’ 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