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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언어와 사유의 인덱스에서 여백의 감각으로 -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와 호나스 트루에바의 세계

어떤 영화가 이론과 담론의 언어를 전면에 내세울 때 감상과 해석에도 해당 언어를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호나스 트루에바 감독의 영화는 사유의 이론적 표식을 언어로 전달하더라도 그 지표만을 따르는 시도는 오히려 그의 영화 세계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이는 영화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감각이 바깥을 향해 열릴 때 그 여백에서 트루에바의 세계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는 만드는 이의 축적된 경험과 통찰, 영감과 직관으로 짜여진 영화다. 영화적 우연을 허용하는 트루에바의 일상성은 그의 영화가 상기시키는 다른 영화들과도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트루에바의 영화는 일상과 우연이 기억의 풍경을 직조해낸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의미의 수집과 해체 후 다시 조립하는 방식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호나스 트루에바의 영화를 제한된 화면에서 벗어나 그 화면 바깥의 궤적 사이를 떠돌다보면 어느새 여백에서 구성된 사유를 마주하게 된다. 한 영화에서 다른 영화로 건너가며 이어지는 그 영화의 흐름은 기억 속 지금의 풍경을 더듬어 탐색하다(<어거스트 버진>), 세계로 다가가 감각을 열고(<와서 직접 봐봐>), 마침내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서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는 보편 기억의 흔적을 환기한다. 호나스 트루에바 영화의 본질은 세계와 기억을 향해 감각을 열어젖히는 접근에 있다. 세계와 기억을 어루만지며 산책하는 사람들 지난 일을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은 호나스 트루에바가 고정된 화면 안에 붙들어놓은 기억을 떠올리는 공통의 얼굴이다. <어거스트 버진> 의 에바는 피서를 떠난 사람들로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마드리드에 남는다. 짧은 여행을 제외하곤 마드리드를 떠난 적 없는 그는 이 도시를 처음 탐색하듯 산책한다. 물질세계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거리를 걷는 산책처럼 에바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스치듯이 옮겨간다. 에바의 산책은 목적 없이 떠돌다 도심이 남긴 흔적들을 되짚는 느긋한 여로처럼 그려진다. 여기서 시간은 성실하게 날짜를 기록한다. 낮에서 다음날 낮으로의 이동은 크게 점프하더라도 밤에 깨어 있는 에바의 자정은 반드시 가름된다. 낮보다 밤의 시간이 인식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의 정처 없는 발길에 어떤 이를 향한 그리움이 있어서일 테다. 우연히 전 연인과 영화관에서 마주친 이후 에바는 그날을 일기에 기록하고 음성으로 그것을 읽는다. 피아노곡을 감상하는 엘레나의 얼굴로 시작하는 <와서 직접 봐봐>는 연인 사이인 엘레나와 다니엘의 얼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에바와 엘레나 역을 맡은 잇사소 아라나가 트루에바의 영화에 잇따라 연인이자 주인공의 자리에 출연하며 연결성을 지니기 때문에 엘레나의 표정과 얼굴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들의 전사가 이미 완결되었다는 인식을 전한다. 피로한 과거를 곱씹고 있을 거라는 인상을 환기하는 이는 다니엘 역으로 등장하는 비토 산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 배경이 코로나19 팬데믹이었기에 <와서 직접 봐봐>의 대화 테이블에서는 관계의 미묘한 단절이 탐지된다. 신경 쓰이는 대화 사이의 짧은 침묵들은 엘레나와 다니엘이 친구 커플인 수사나와 기예르모와 함께 숲으로 산책하러 가며 전환을 맞는다. 도시에서 시골, 시골에서 자연으로의 산책은 팬데믹 시대에 고립된 개인의 세상에서 빠져나와 마침내 경험으로 체화할 수 있는 세계로의 이동을 이뤄낸다. 푸르름이 절정에 달한 나무 사이로 이들 넷은 대지를 쓰다듬듯 천천히 세계와의 연결을 향해 조용히 열린다. 세계를 향해 열린 물리적, 감각적 연결의 의미는 트루에바의 현재의 영화적 지형도와도 연결될 수 있다. 누군가에는 에릭 로메르를, 우디 앨런을, 홍상수를 떠올리게 하는 텍스트와 감각의 지형은 비물질적 세계로의 경계마저 열어젖힌다. 디지털 시대에 트루에바의 영화에 재등장한 산책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수기를 쓰고, 필름 카메라로 기억을 남긴다. 다시 <와서 직접 봐봐>의 끝에 엘레나의 얼굴이 카메라 가까이 포착된다. 풀숲에 비밀스럽게 쪼그려 앉은 엘레나의 얼굴은 현재 그가 느끼는 행복감이나 과거의 기억, 혹은 이후 드러나는 영화 촬영의 엔지 장면의 하나로 보이게 된다. 트루에바의 영화가 말을 멈추고 사유의 언어를 직접 지시하지 않을 때 화면을 초월한 어떤 감각은 우리가 보거나 보지 않은 보편의 경험과 기억을 불러내 데자뷔 현상과도 유사해진다. 헤어진 연인과 아버지가 없는 아이(<어거스트 버진>), 유산된 아기(<와서 직접 봐봐>)는 모두 과거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을 향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파편적 예시다.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롱테이크숏은 가만히 지켜보다 의미가 떠오르기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떠올리고 환기하며 지속되는 시간이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얼굴 너머를 지켜보는 트루에바의 롱테이크는 <어거스트 버진>에서 얼굴만 있는 조각상의 불완전성이 가진 완전성을 공유한다. 틀린 예감의 영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어거스트 버진>과 <와서 직접 봐봐>에 비해 실험 정신이 크게 도약하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이것이 영화임을 일깨우려는 방편을 드러낸다. 카메라의 대담한 전환과 점진적인 클로즈업 구도가 그것이다. 오래된 커플 알레(잇사소 아라나)와 알렉스(비토 산스)는 이별을 결심한다. 서재에 합쳐둔 책을 나누던 알렉스는 알레에게 연기 영상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창가에 마주 보고 앉은 알레는 헤어질 연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러 번 테이크를 시도하던 알레가 화면 밖에서 말한다. “빛이 계속 달라져서 좀 어렵네.” 알레의 이 대사 이후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변하던 빛의 밝기가 갑자기 큰 폭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알렉스의 얼굴에 들이치는 창밖의 빛은 이제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이 장면은 <와서 직접 봐봐> 엔딩의 엘레나의 얼굴과 유사하게 화면에 드러난 알렉스의 얼굴과 대사 이상의 것을 포착할 가능성을 여는 지점이다. 이 숏은 알렉스의 대사와 표정에서 드러나는 정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화면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빛의 조도 변화를 머릿속에 그려보게끔 한다. 이를테면 오후의 해가 구름에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바람 잦은 날이나 헤어지기로 한 오랜 연인 앞에서 작별의 대사를 연기하는 알렉스는 무엇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고정된 프레임은 화면의 다른 층위에서 내적 풍경이 환원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트루에바의 영화는, 잇사소 아라나와 비토 산스의 얼굴은, 화면 밖의 상상적 층위에서 지금 영화의 화면이 가지지 못한 것을 관객이 환기하여 그려낼 수 있느냐를 실험 중이다. 이런 실험이 가능한 이유는 호나스 트루에바가 다루는 세계가 보편적 경험인 연인 관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까지 세편의 영화가 공유하는 지점은 사적이지만 친밀한 보편적 경험의 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레와 알렉스 커플이 이별을 선언할 때마다 친구들은 개성적 개별 인간인 알레와 알렉스의 고유한 서사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연애사를 떠올리는 것이다. 영화의 화면 안에서 말과 이미지의 물질적 흔적으로 고정될 수 없는 이별과 재회로의 기억은 그것이 보편적 세계이기에 가능함을 다시 강조한다. 지인 중에서 가장 처음 이별제에 초대받은 밴드의 드러머 마누는 휴대폰 저편에서 알레와 알렉스에게 말한다. “이런 일은 끝이 늘 같아. (중략) 너희는 다시 합치게 될 거야.” 트루에바가 언어의 인덱스로 ‘반복’ 개념을 영화에서 강조할 때, 그 지표를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반복과 유사한 개념인 ‘축적’이 떠오른다. 영화는 이별의 선언과 파티 초대를 거듭하는 알레와 알렉스의 말을 쌓아올리고, 그들의 헤어짐이 무산될 거라는 주위의 기대를 쌓아올리다 결국에 그 반복(축적)의 감각을 어그러뜨린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전반에 걸쳐 구성된 감각의 지도는 그들의 이별제(離別祭)가 열리고 나서야 영화가 이미지의 반복과 축적이 아니라 어긋난 예감을 쌓아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순환적 시간과 선형적 시간을 지시하며 시간의 혼란한 감각을 안기려 한 트루에바의 영화는 마지막까지 이 이별제를 결혼식이라 칭하는 거대한 농담을 선언한다. 이 결말은 절대로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농담이고 누군가에는 진실일 이 결말은 관객의 기억과 사유가 있는 자리마다 낯설고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해서 열릴 것이다. 나의 의식(儀式), 우리의 축제(祝祭) ‘우리’와 ‘나’는 호나스 트루에바의 세계를 이루는 거대한 두축이다. 연인이거나 친구, 가족이 되기도 하는 우리는 어느 하나가 사라져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내가 사라진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어거스트 버진>의 에바는 헤어진 연인을 마주친 영화관에서 만월 의식을 행한다는 두명의 마리아를 만난다. 8월 성모제가 한창인 마드리드에서 에바는 자신만의 조용한 의식을 거행한다. 연인과 헤어져 혼자 박물관을 거닐던 에바의 친구 루이스는 마드리드로 여행 온 관광객과 함께 밤의 유성우를 보러 간다. 우리의 축제는 여름밤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렇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나 즐겁고 평온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교류가 끊겨 어색해진 친구 수사나 커플을 만나고 난 뒤에 지친 엘레나는 집으로 돌아와 천천히 양말을 신으며 일상의 의식을 치른다. 오래 함께 공유한 책장에서 서로의 책을 꺼내어 나누는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의 알레와 알렉스도 기억을 확인하며 신성하고 슬픈 나의 의식을 거친다. 트루에바의 영화에서 ‘나의 의식’과 ‘우리의 축제’는 서로를 침범하거나 흡수하지 않는다. 그 둘은 각자 흔들리는 감정을 동등하게 떠올리며 고요히 공존한다.

[이연숙(리타)의 장르의 감정] 완벽한 적의 발명, 자기파괴라는 도플갱어 장르의 운명과 그 대안

SF 코미디 고어 애니메이션 시리즈 <릭 앤드 모티>는 기본적으로 <백 투 더 퓨처>와 같은 고전 SF의 가장 저질스러운 평행우주처럼 보인다. 에피소드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릭은 은하적 규모의 끔찍한 사고를 치고 어리바리한 모티를 비롯한 서머, 제리, 베스와 같은 가족들은 사고에 휩쓸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된다. 대부분의 시트콤이 그러하듯 <릭 앤드 모티>에서도-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결말에 이르러 위기는 해소되고 세계는 정상화된다. 2013년부터 방영을 시작해 현재 시즌7까지 제작된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에는 주옥같은 에피소드가 많지만 나는 시즌6의 4화 <나이트 패밀리>를 가장 자주 떠올린다. 전형적인 <릭 앤드 모티> 에피소드라 할 <나이트 패밀리>는 릭이 구해온 ‘솜냄뷸레이터’라는 기계를 통해 가족들이 잠든 자기 자신에게 맨정신으로는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서 생기는 일련의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노동과 여가를 완벽히 분리할 수 있다는 이 에피소드의 아이디어는 호평받는 Apple TV+ 오리지널 드라마 <세브란스: 단절>에 나오는 기억 분리 수술과 유사하다. <세브란스: 단절>의 주인공 마크가 자기 일에 그러하듯 <나이트 패밀리>에서도 ‘야간인’이라 불리는 잠든 상태의 가족들은 장대비 같은 땀을 흘리며 식스 팩을 만들고, 억지로 스페인어와 트럼펫을 배우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와 설거지를 해치우라는 ‘본체’, 즉 ‘주간인’의 명령을 어지간하면 순순히 따른다. 하지만 ‘주간인’ 릭에게 ‘야간인’ 서머가 식사 후 접시를 한번 헹궈준다면 설거지가 편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뒤로 상황은 급변한다. ‘주간인’ 릭이 완강히 거부하며 ‘야간인’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탓이다. 협조 거부에 분노한 ‘야간인’ 노동자 연대는 잠든 릭을 깨워 아주 구체적으로 이렇게 요구한다. “왜 접시를 헹구지 않는 거죠?” “2초면 되는데.” “안 헹구면 찌꺼기가 말라붙어서 설거지가 더 힘들어진다고요.” 릭이 끝까지 고작 2초짜리 설거지 전 처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상황은 필연적으로 ‘주간인’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야간인’의 집단 봉기로 치닫게 된다. 에피소드의 결말에 가까워지며 ‘야간인’은 얼마간 그 목적을 달성하나 오래가진 못한다. 나는 “안 헹구면 찌꺼기가 말라붙어서 설거지가 더 힘들어진다고요”라는 대사가 나온 장면을 프린트해 싱크대 앞에 붙여놓았다. 반쯤 농담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싱크대에 접시를 던져넣을 ‘나’로부터 설거지할 ‘나’를 배려하기 위해서다. 그 ‘나’는 나도 아직 잘 모르는 ‘나’다. 릭은 ‘주간인’이 하기 싫은 일을 시키기 위해 ‘야간인’이라는 얼터 자아가 존재하는 거라고 주장하지만 밤새 설거지를 해 퉁퉁 불은 서머의 손은 ‘주간인’, ‘야간인’으로 깨끗이 분리되지 않는다. 그야 서머의 손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탈취해 ‘본체’로 승격한 ‘야간인’ 가족, 즉 ‘나이트 패밀리’가 무서운 속도로 소진한 통장 잔고 또한 마찬가지다. ‘주간인’에 의한 ‘야간인’의 노동력 착취가 곧 ‘야간인’에 의한 ‘주간인’의 재산 탕진으로 이어지는 보기에 딱한 악순환은 결론적으로는 그냥 자기파괴다. 애당초 도플갱어 장르라는 게 그렇다. 오늘날 문화 영역 전반에서 그 영향력이 되살아나고 있는 도플갱어는 “살아 있는 사람의 분신 또는 유령”을 뜻하는 말로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이나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보듯이 19~20세기 유럽 문학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서구 문명의 근본원리인 이원론적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은유하는 도플갱어는 고대사회의 쌍둥이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문학에서는 인간 육신을 초월하는 불멸의 영혼으로 그려지는 한편- 더 흔하게는- 주인공과 정반대의 성격을 갖춘 절대적 적대자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사악한 쌍둥이로서 이 적대자는 서구 문명이 억압 또는 부인해온 인간의 사악하고 추잡스러운 다른 면을 상징하며 그 자체로 위기에 처한 사회를 비추는 반성적 거울 이미지로서 기능한다. 이원론적 전통 속에서 도플갱어와의 대결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다. 오늘날 도플갱어 장르가 범람하는 이유는 <도플갱어>를 쓴 나오미 클라인의 말처럼 우리가 전에 없이 “분절, 분열되고 분할된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도 반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반자본주의 운동가이자 작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한때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했다 현재 우파 음모론자로 전향한 나오미 울프의 활동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두 나오미는 이름이 같고 공통점도 많아 SNS 사용자들은 물론 AI까지 헷갈려 한다. 하지만 ‘착한’ 나오미가 ‘나쁜’ 나오미에게 억울할 일만은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는 두 나오미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를 맘놓고 먹어치우며 몸집을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악을 가르는 이분법은 이득이 된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건 “인종, 민족, 젠더가 위험한 분신을 만들어내는” “더 불길한 더블링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현실에 반응하듯 지난 10년간 분신 이미지를 다루는 많은 영화, 드라마가 등장했다. 분신을 주제로 한 소설 원작의 <더블>(2013)과 <에너미>(2013), (백인)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 쓰고 버려진 (흑인) 복제인간의 지하 세계를 다루는 <어스>(2019), ‘더 나은 버전의 나’의 출현과 그에 따르는 분열과 적대라는 전통적 문제를 다루는 <어 디프런트 맨>(2024)과 <서브스턴스>(2024)가 대표적이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분신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종국에는 자기파괴적 결말로 치닫게 될 주인공을 제시한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주인공을 통해 자기 자신과의 화해가 중요하다는 구태의연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분신이란 나와 내 적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발명된 환상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혐오스럽고 불쾌한 도플갱어가 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투사(projection)다. 대안이라고 제시하긴 뭣하지만 재인쇄가 가능한 일회용 노동자를 주인공 삼는 <미키 17>(2025)의 분신‘들’이 기억에 남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복수의 미키‘들’을 언젠가 통합될 자아의 작은 조각으로 환원하지 않는 영화의 관점은 결말에 이르러 자신이 프린터를 폭파하는 바람에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키‘들’의 삶 가능성이 차단된 건 아닐지 염려하는 미키 17로 최종 수렴한다. 이 영화에서 분신‘들’은 미키의 ‘나쁜’ 적대자도 경쟁자도 아닌 또 다른 미키일 뿐이다. 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믿을 만큼 대책 없이 낙관적이다. 또한 그는 높은 확률로 자기가 해야 할 설거지를 다른 미키에게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창문을 열어두겠어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 에피소드3 <아주 오랫동안>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 에피소드3 <아주 오랫동안> 어느 자살자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침실로 오지 마. 집에 냄새가 안 나게 창문을 열어뒀어.” 유서의 주인공 빌(닉 오퍼먼)은 자신이 직접 설계한 마을의 방어벽을 조엘(페드로 파스칼) 외엔 누구도 살아서 넘지 못하리라고 믿은 듯싶다. 생존주의자의 자부심을 구태여 활자화한 웃음소리 ‘하하하하하하’로 보건대 주인의 심장박동이 멈춘 이후에도 유머의 기운은 불멸이다. 그의 바람대로 편지는 정확한 수신자에게 가닿는다. 조엘의 새 동행자 엘리(벨라 램지)가 대독하는 편지 말미엔 퉁명스런 어조를 무마하는 고백이 뒤따른다. “나의 모든 무기와 장비를 너에게 줄게.” 그로부터 20년 전인 2003년, 미국 소도시. 동충하초 곰팡이가 인간에 기생하는 전염병이 퍼지자 마을 주민들은 모조리 격리 구역으로 이송되고 숨어 있던 빌만 남는다. 정교한 CCTV 시스템, 각종 총기와 탄약을 비롯한 무기류, 황산, 가스 마스크, 식량을 완비한 지하실에 숨어 있던 그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세상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된다. 요컨대 편집증과 실행력을 고루 갖춘 종말론적 대비자(서바이벌리스트)의 승리다. 이어지는 몽타주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을 통틀어 가장 활기찬 시퀀스라 할 만하다. 지옥으로부터 절묘히 고립된 남자는 자급자족을 위한 농작과 사육을 시작하고 전기 발전소를 개인화하며, 중요한 일과로서 고급 와인을 쟁여두는 일도 잊지 않는다. 앞선 두 에피소드에서 좀비보다 끔찍한 인간 자치 공동체의 폭력을 마주한 시청자들은 이 ‘유능한 혼자됨’에 차라리 안도한다. 이후 무려 4년. 평화가 이어진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모든 종류의 침범은 필연이다. 시즌1의 가장 훌륭한 에피소드라고 주저 없이 칭하고 싶은 3화에서 침입자는 사랑의 형태로 찾아온다. 빌의 경우를 빌리자면 사랑은, 구덩이에 묻어버릴 수도 있는데 기어코 사다리를 내려 건져올린 무엇이다. 사랑은 갑자기 내 요새 안으로 쳐들어온 낯선 사람. 뻔뻔하게 밥을 얻어먹고, 따뜻한 물을 마구 쓰고(“5분만 더 샤워해도 되나요?”), 먼지 쌓인 피아노를 함부로 열어젖혀 구닥다리 멜로디를 연주하는 사람이다. 첫눈에 서로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것.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을 살려주는 것. 며칠만 두고 보기로 하고는 오랫동안 함께하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랫동안. 원작 게임에선 조엘과 라디오 주파수로 통신하며 물자를 교환하는 캐릭터였던 빌-프랭크 커플에 주목한 시리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 살아남은 게이 연인의 사랑 위에 생존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결합이라는 흥미로운 층위를 더했다. 오래 살아남기 위한 구호로써 철저한 자원 관리를 중시하는 빌과 달리, 그의 연인 프랭크(머레이 바틀릿)는 오직 둘만 살아가는 마을의 건물 외벽 페인트를 보수하고 정원의 잔디를 깎으려는 남자다. 한편 빌과 프랭크의 과거 서사가 소개되기 직전인 시리즈의 현재 시점에서 조엘은 연인 테스를 잃었다. 조엘의 애도를 표층에서 섣불리 장면화하는 대신 이 시리즈는 빌의 염려를 무릅쓰고 외부인과 교류하기 시작한 프랭크가 조엘과 테스라는 외부자를 최초로 집에 초대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빌은 총구 끝을 조엘에게 겨냥한 채 식사할 정도로 타인을 경계하지만, 이내 조엘과 테스의 관계에서 자신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쪽이 조엘이란 사실도 알아차린다. 두 보호자들이 서로의 신원을 파악하는 험상궂은 대화를 이어갈 동안 테스는 프랭크에게 한줌 씨앗을 건넨다. 정원에 영근 딸기를 베어물고 환희에 찬 두 남자를 보여주는 다음 신에서 나는 테스가 조엘에게 선사했을 기쁨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본다. 철조망을 치는 손과 그 아래 열매를 가꾸는 손이 맞잡고, 한쌍의 손이 두쌍이 되어 유대하는 방식으로 인간은 종말 ‘이후’의 삶을 짓는다. 오늘날 각광받는 시리즈물들이 선호하는 한 경향 중에는 다중시점의 내러티브를 꼽아볼 만하다. 조엘과 엘리를 두고 빌-프랭크 커플에 주목하는 3화의 기술은 그러므로 새로워서가 아니라 절묘하기에 훌륭하다. 테스의 죽음으로 별안간 둘만 남겨진 조엘과 엘리는 아직 서로에게 의심스러운 상대다. 이들의 긴 여정을 앞두고 3화는 약 20년에 걸친 어느 관계의 시간을 대범히 돌아본다. 세월이 흘러 빌과 프랭크의 동화는 좀비나 폭도의 습격이 아니라 투병 중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자 하는 프랭크의 의지로 중단된다. 빌도 기꺼이 그 죽음에 동반하기로 한다. 조엘과 엘리가 그들의 거실에 도착했을 때, 연인은 2층 침실의 방문을 단단히 잠가두었고 마지막 만찬의 흔적만이 테이블 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어쩌면 빌에게는 프랭크와 함께 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결정이 아니었을까?). “난 예전에 세상이 싫었고 사람들이 전부 죽었을 때 기뻤어. 하지만 내가 틀렸어. 구할 가치가 있는 한 사람이 있었어.” 빌은 이제 조엘에게서 총구를 거두고 아직 지킬 것이 남은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 이것은 프랭크가 빌에게 남긴 것에 다름 아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열리면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에도 유능해진다고, 생존의 본능보다 사랑의 본능을 중시하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낭만주의자 작가들은 믿는다. 20년 전에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조엘과 엘리가 곳곳에 헌신이 깃든 아름다운 집 안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잠시 쉬어간다. 연인을 잃고 동생을 구해야 하는 와중에, 인류 유일의 바이러스 면역 보유자로 알려진 소녀와의 동행이 버거운 조엘이 처음으로 임무를 인정하는 것만 같다. 3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인 카메라의 시선은 린다 론스테트의 컨트리송 (아주 오랫동안)을 배경 삼아 떠나는 조엘과 엘리로부터 서서히 물러난다. 카메라의 자리는 어느새 이층집의 열린 창문 안쪽이다. 닫혀 있던 문 너머의 침실. 그러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연인의 바람대로 시신으로부터 완전히 등진 채로 그저 창밖을 바라본다. 나는 1시간15분에 달하는 에피소드의 중턱까지도 행여 낯선 손님이 돌변해 1인분의 안전을 망칠까 졸아붙었던 마음에 바람이 드나들게 내버려두기로 한다. 유유히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드높은 담장의 문을 열어젖히고 석양 속으로 나아가는 두 사람이 보인다. 어떤 이야기는 기어코 창을 열기 위해 긴 시간 벽을 쌓기도 하는 것이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인과 연, 잇는 카메라

요즘 부쩍 ‘인연’이란 단어를 입에 자주 올린다.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사람끼리의 관계를 일컫는 사전적 의미 너머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안과 밖의 연결로서의 인(因)과 연(緣)을 생각한다. 영화에도 인연이 있다. 어떤 영화인지 설명하는 내적분석만큼 중요한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그 영화를 접했는지, 바깥으로부터의 연결 과정이다. 어떤 이유로 그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고, 어떤 상영관에서 언제 관람을 하고, 보고 나와서 피어난 생각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는 맥락들. 얽혀서 다다르는 경로가 결국 영화와 나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지난 4월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셨다는 뉴스를 접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콘클라베>가 떠올랐다. 곧이어 <씨네21> 1497호에 구본석 신부님이 써주신 <콘클라베>에 관한 글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가 생각이 났다. 신부님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글을 통해 또 다른 영화 <요한 23세>(2002)의 존재를 알았다. 덕분에 ‘착한 교황’으로 불렸던 요한 23세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요한 23세>를 뒤늦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는 두 성인의 행적이 시간을 건너뛰어 마치 필연인 양 인과 연으로 맺어져 있다고 느낀다. 그 연의 실오라기 한 가닥이 내게도 닿았다. <콘클라베> 덕분에, 그리고 구본석 신부님의 글 덕분에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 진실의 조각들이 발맞춰 왔다. 문을 열어주었다. <요한 23세>는 그저 성실한 다큐멘터리다. 카메라는 과장과 미화를 걷어내고 ‘요한 23세’의 행적을 차근차근 정리하려 애쓴다. 카메라는 무엇을 찍고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문득 각자의 관점으로 그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을 전하려 했던 대가들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장뤼크 고다르 감독은 “세상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고 했다. 그리하여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영화는 무엇이 프레임 안에 있고, 무엇이 프레임 밖에 있는지의 문제”라 했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도 문득 떠오른다. 프레임 안과 바깥,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선택과 배제의 이분법이 아니다. 안을 찍음으로써 바깥의 존재가 인지되고, 보이는 것을 찍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카메라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이 이어진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상과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좋겠다. 때론 카메라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 몫을 다한다. 이번주 <씨네21>에서는 지난 계엄과 탄핵 정국의 혼란 속에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기어이 길을 만들어낸 카메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탄핵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들은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다양한 목소리와 시선들이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도 여러 다큐멘터리스트,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엄중한 역사의 진실들이 쉽게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고군분투 중이다. 그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 우리는 그들을 기록하려 한다. (한강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빛과 실로. 카메라와 글로.

[인터뷰] 경쾌하게 처절하게 소년들은 닮아간다, <약한영웅 Class 2> 유수민 감독, 한준희 크리에이터

*해당 글은 지면에 담지 못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약한영웅 Class 1>(이하 )의 친구들은 각기 다른 결말을 맞았다. 수호(최현욱)는 의식불명 상태가 됐고, 범석(홍경)은 한국을 떠났으며 시은(박지훈)은 홀로 남았다. 넷플릭스에서 4월25일 공개된 <약한영웅 Class 2>(이하 )는 시은이 강제 전학 간 은장고등학교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곳에서 시은은 완벽한 고립을 원하지만 전 학교에서처럼 또다시 사람들은 이 외로운 소년 곁에 몰린다. 최효만(유수빈), 나백진(배나라) 금성제(이준영) 등 적대적인 뉴페이스들이 그를 더 힘들게 할지라도 그에겐 지키고 싶은 새 친구 후민(려운), 준태(최민영), 현탁(이민재)이 있다. 에 이르러 소년들의 우정은 어떻게 뻗어나갈까. 새 시즌에 관한 호기심과 기대를 가득 안고 유수민 감독과 한준희 크리에이터를 만났다. - 의 상징 문구는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호밀밭의 파수꾼>)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힘겹게 싸운다’(<데미안>)라는 전 시즌 문구와 흥미롭게 대조된다. 여기에 시은의 첫 내레이션,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까지 더해지면, 이번 시즌에서 시은의 영웅적인 활약을 기대하게 된다. 유수민 는 시은이 수호에게 받았던 걸 타인을 위해 쓰려고 하는 이야기다. 시은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다. 친구들을 통해 겨우 알게 된 ‘함께하는 행복’을 너무나 빨리 잃었으니까. 수호가 체육관에서 다쳤을 때부터 시은이의 시간은 멈춘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서 시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데, 그 흐름 속에서 시은이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고민하며 대본을 작업했다. - 1화에서 시은이 준태를 때리는 효만을 제지하면서 “선 넘지 말라고” 할 때 찌릿했다. 이 말은 수호의 대사가 아닌가. 전 시즌 1화에서 수호가 시은에게 “선 넘지 마시고”라고 비슷하게 말한 적 있다. 시작부터 시은이가 수호의 말을 쓰고, 수호의 역할을 한다는 게 울컥한 지점이 있다. 유수민 1화의 마지막은 수호의 말을 하는 시은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구상할 때부터 했다. 시은이가 수호가 되고 준태는 범석이가 되고 이렇게 인물들의 캐릭터성과 관계성을 초반에 뒤엉키게 해놓고 후반부에 잘 풀어가보고 싶었다. 한준희 이 나이대에는 말투도 행동도 서로 금방 닮는 것 같다. 대본을 봤을 때 이 이야기는 수호가 그랬듯 시은이도 원치 않게 파수꾼이 되는 구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비겁하지 않을 법을 묻는 준태에게 시은이가 “작용이 없으면 반작용도 없는 거야”라고, ‘뉴턴 제3법칙’에 대해 말한다. 이 말은 계속 밀어내기만 하는 지신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호도 처음엔 밀어내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걸 다 걸고 나서는 순간에 이르고 그런 때를 시은도 맞이한다. - 새 인물들 모두에게 인상적인 첫 등장을 선사했다. 1부에서 등교한 준태는 빵과 우유를 학생들의 취향에 맞게 ’강제 배달‘하는데 이 과정이 힙합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짜였다. 유수민 이 시퀀스를 길고 중요하게 다룬 이유는 후반부의 변화 때문이다. 시은에게 비겁하지 않을 용기를 배운 준태는 같은 배달 방식으로, 효만의 지시로 모았던 학생들의 핸드폰을 되돌려준다. 그 낙차를 재밌게 보여주고 싶어서 앵글도 비슷하게 찍었다. 한준희 유 감독이 박민선 편집감독, 프라이머리 음악감독과 고심한 걸로 알고 있다. 이 몽타주가 특히 중요했던 건 시은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준태로 옮겨가야 이야기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수민 이어지는 얘기지만 톤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음악으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에서 안 썼던 음악들을 썼다. 그리고 준태는 우리끼리 “진짜 약한 영웅은 서준태야”라고 얘기하곤 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처럼 가장 약하지만 가장 강한 자에게 용감히 대항하는 친구다. 한준희 사실 멘털이 최고로 강한 건 준태가 아닐까? 갈수록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감정이 폭발하는 방식이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어 매력적인 인물이다. 나는 후반부에서 준태가 트리거가 돼 달려간다고 봤다. - 후민, 일명 바쿠의 첫 등장도 강렬하다. <슬램덩크> 강백호의 빨간 머리를 한 후민은 “일동 정지!”를 외치며 시선을 끌더니 <너에게로 가는 길>을 직접 틀어 등장의 순간을 스스로 연출한다. 마지막 덩크슛 장면은 캐릭터에게도 배우에게도 인상적인 한컷이다. 유수민 <슬램덩크> 주제가인 <너에게로 가는 길>을 트는 건 한준희 감독이 먼저 제안했다. 처음에는 좀 유치할 것 같아 거절했는데, 들으면서 바쿠 신들을 만들다 보니 오히려 괜찮겠다 싶었다. 계속 무겁게만 흘러가던 이야기에 쉬어가는 구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바쿠의 독특함을 확실히 보여주는 자리가 됐다. 한준희 “안 내키면 하지 마~”라고 슬쩍 말하면서 제안했다. 려운 배우와 논의할 때 바쿠는 꼭 맨발에 조리를 신어야 한다고, 나이키 에어포스는 후민스럽지 않다고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 <슬램덩크>가 작품 전반에 녹아 있다는 인상이다. 바쿠 사진을 효만이 담뱃불로 지진다든지. 바쿠가 시은이의 뒤통수를 눌러 제대로 사과하게 하는 장면들은 <슬램덩크>를 연상하게 한다. 바쿠와 현탁, 일명 고탁(이하 고탁)의 농구부원실에는 7번 송태섭과 14번 정대만의 유니폼, 갖가지 피규어 등 <슬램덩크>의 디테일이 숨겨져 있다. 유수민 이 만화를 워낙 좋아한다. 최근에도 다시 봤다. 바쿠가 10번 강백호니까 넘버2인 고탁은 7번 송태섭. 이렇게 인물 세팅을 하기도 했다. 한준희 창작자가 과거에 봤던 작품들은 의식했든 안 했든 자기 작품에 녹아들 수밖에 없다. <슬램덩크>의 오마주들이 만의 경쾌한 면을 살려줬다고 생각한다. 유수민 <슬램덩크> 얘기를 좀더 하자면(웃음), 내가 이 만화에서 좋아하는 지점은 팀원들이 강한 적들과 싸워나가면서 이기든 지든 서로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시은, 바쿠, 고탁, 준태. 이 천방지축 4인방도 위기를 함께 겪으면서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 - 연합 수장 나백진은 최효만 무리와의 일대다 대결 시퀀스로 눈도장을 찍는다. “너클 하나, 쇠파이프 둘, 시끄러운 새끼는 마지막에“라며 먼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데, 우등생답게 문제를 풀 전략부터 세운다. 깔끔한 액션에서 인물의 성격이 보이기도 했다. 유수민 나백진의 브레인 액션은 시은의 액션과 함께 놓고 볼 수 있는데, 대본 작업을 할 때부터 둘은 동전의 양면 같은 사이라고 생각했다. 닮은 듯 다른 관계성은 결말까지도 이어진다. 박지훈, 배나라 배우에게도 둘은 닮았으나 최후가 다르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시은은 혼자 시작해서 많은 친구가 생기고, 나백진은 친구가 많았지만 결국 혼자가 된다고. 그런 차이는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한준희 나백진은 원작(웹툰 <약한영웅>)에서도 에서도 외로움을 본인 방식으로 돌파하는 인물이다. 인물들의 액션 스타일을 구축할 때 장르적인 외피에 신경을 많이 썼고 각자에게 뚜렷한 개성을 주고자 했다. 특히 고탁. 태권도 베이스인 액션을 하는데 진짜 화려하다. 이민재 배우가 놀라울 만큼 훌륭하게 해냈는데 아마 한국에서 그런 식의 발차기를 직접 소화하는 배우는 민재 배우밖에 없을 거다. 유수민 바쿠는 ‘원펀맨’, 나백진은 살인 무술, 금성재는 더티 복싱. 이렇게 하나씩 다르게 줬는데 부터 느꼈지만 장르가 다른 액션들이 맞붙을 때의 시각적 재미가 크다. 한준희 이중 유수민 감독의 최애는 이종격투기가 아닐까. 유수민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취미로 매주 하고 있다. (웃음) - 4화 옥상 시퀀스에 가서야 시은의 액션이 제대로 펼쳐진다. 전매특허 볼펜 액션을 포함, 성제에게 화분을 던져 흙먼지로 시야를 가린 뒤 안경을 빼앗고, 부러뜨린 안경다리로 발가락을 찌르는 스텝과 타이밍이 탁월하다. 에서 시은이 강우영(차우민)의 발을 아령으로 가격하던 장면도 떠올랐다. 유수민 이 시퀀스 회차가 적지 않았는데, 첫날 눈이 오고 마지막 날 비가 와서 정말 힘들었다. 안경 액션은 허명행 무술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잘 부러질 만한 안경테를 고르고, 신발도 잘 뚫리는 재질로 고르고 하는 과정이 재밌었다. 한준희 박지훈, 이준영 배우가 아주 가깝지 않았으면 이렇게 끝장까지 가는 액션이 잘 나오지 못했을 거다. 현장에서 두 배우가 정말 밀착된 감정을 주고받았고 마치 안무하듯이 합을 맞춰나갔다. 둘 다 댄서였기에 가능했다. 유수민 원래 시은이라면 브레인 액션이 앞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건 의 특징이기도 한데, 전편에서 시은이 전술을 발현해 폭력에 대항했다면 이번에는 머리보다 마음이 우선해 더 바로, 더 처절하게 싸운다. - 문뜩 궁금하다. 혹시 시은이 선호하는 특정 문구 브랜드가 있는 건가. 여기 제품을 써야 공부가 잘된다거나 하는. (웃음) 유수민 두편에서 시은이가 쓰는 펜이 다르긴 하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두꺼운 볼펜을 쓰는 타입이고, 시은이의 필통에는 이것저것 다 들어 있다. (웃음) - 이 액션 시퀀스를 매듭짓는 건 시은의 ‘3단 박치기’다. 성제의 다친 발을 이마로 내려찍은 뒤 일어나면서 한번 더 치고, 마지막에 성제의 멱살을 잡고 가격하는 동작의 합이 압도적이었다. 유수민 이것 역시 허명행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박치기가 상대가 근접했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액션이라고 하시더라. 처음엔 시은이가 이런 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는 애니 어울릴까 싶었는데, 감독님의 시연을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시은이의 마음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한준희 시은이가 금성제의 발에 이마를 갖다 댈 때의 박지훈 배우의 표정은 지금 떠올려도 어마어마하다. 박치기 신을 보면서 이게 에서의 연시은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퀀스를 찍는 동안 두 배우가 매일 녹초가 돼 퇴근했는데도 늘 만족스러워했다. 리액션을 잘 주고받았다는 걸 몸을 섞으면서 체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 시은이의 웃는 얼굴은 3화에서야 볼 수 있다. 봉사활동을 나온 4인방이 나란히 앉아 시끄럽게 점심을 먹는데 그런 한가로운 일상 안에 시은이가 있다는 것이 애틋하게 다가왔다. 에서 시은이가 수호, 범석과 고깃집에서 웃던 장면도 떠오르고. 카메라가 한동안 지켜보는 네 친구의 뒷모습이 주는 여운도 컸다. 유수민 꼭 그 나란한 뒷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바 테이블을 설치했고 넷이 한곳을 바라보는 느낌으로 찍었다. 한준희 이 장면이 그동안 유수민 감독이 찍었던 컷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톱3 안에 든다. 앞서 4인방이 서울역사박물관으로 봉사를 나가는 바람에 시은이가 곤룡포를 입는다. 연시은이 곤룡포라니. (웃음) 그런 의외의 순간들이 에 있다는 게 좋다. 작품 전체의 톤 앤드 매너든, 서사의 깊이든 2학년이 된 시은의 세계는 조금씩 넓어진다. 유수민 작품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친구들이 옛날 복장을 입으면서 투덜투덜하고 서로 놀리고 사진 찍고 하지 않았을까. 별것 아닌 그런 순간에 서로 훅 가까워진다고 느낀다. - <약한영웅> 시리즈는 소년들의 우정을 그리는 방식에서 여타 소년물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보여준다. 거친 모습 안에서 예민하고 복잡한 면을 볼 줄 알고, 이들 관계는 단순한 끈끈함과 의리를 넘어 서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전제됐다. 싸움이 가장 격렬해질 때 등장해 친구를 구해내는 액션 시퀀스 구조는 물론, 바쿠가 시은에게 “집에 잘 들어갔냐”고, 준태가 시은에게 “학원 잘 갔냐”고 에둘러 묻는 장면에서도 그 진심이 드러난다. 소년들의 우정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유수민 나를 탐구하는 시간과 이야기가 같이 가는 것 같다. <약한영웅> 시리즈를 하는 동안 10대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가 무엇일까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분명 다른데 그게 뭔지를 정확히 모르겠어서 남고를 같이 나온 친구들을 불러내 일부러 옛날 얘기를 더하기도 했다. 그 시절을 요약하면 대략 이런 것 같다. 뭔가를 제대로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이 부족해서 서툴지만 원초적이고 순수했던 시기. 그때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작업을 계속하지 않을까 싶다. 한준희 유수민 감독과 달리 나는 남고 시절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눈만 마주쳐도 뭔 일이 날 것 같은 동물의 왕국에서의 3년. (웃음) 그래서 그런지 은장고의 풍경이 내게는 익숙하다. 서로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란 곧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그걸 에둘러 표현하는 말들이나 감정이 무엇인지를 거듭 생각하게 된다. <약한영웅> 액션이 여타 학원 액션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싸우고 싶어 하는 인물이 한명도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설득하는 게 중요할 텐데 각자의 이유를 유 감독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고 나는 거기에 힘을 좀 보탠 정도다. - 그렇다면 두 분은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지. 유수민 고등학생 때는 아니고 20대 초반쯤? 한준희 그럼 회귀물이 나오는 거 아니야. (웃음) 나는 간다면 학생은 아니고 선생님으로….

[특집] 변화한 광장의 풍경, 카메라의 여러 갈래 길 - 탄핵 정국 마주한 다큐멘터리스트들의 활동과 실천들 ➁

느슨한 연대, 새로운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진입 이러한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 진영의 실천적 답변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느슨한 연 대의 차원이다. SNS와 온라인을 통해 각종 집회, 촬영 정보가 공유되긴 했으나 집회의 규모와 형태가 급속도로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의 개인 작업에도 제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그들의 작업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 지난해 12월 말경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차한비 사무국장과 박소현 감독 등은 현장에 나서는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텔레그램 방을 개설했다. 처음엔 6~7명이 함께했지만 “현장에서 마주치는 감독들이 텔레그램 방의 존재를 공유” (허철녕)했다. 알음알음 모인 30명가량의 감독이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며 현장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촘촘하고 조직적이라기보단 다소 느슨하지만 각자의 아카이브를 공유할 수 있는 장”(박소현)이 마련된 것이다. 과거 기성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주축이 됐던 비상행동 미디어팀 역시 차근차근 새로운 형태를 갖춰갔다. 2월경부터 김영욱 팀장을 중심으로 꾸려진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에는 다양한 성질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민미디어팀을 모집하자 20대 대학생부터, 여러 노조를 통해 활동하던 50~60대 활동가”까지 10여명이 모여 팀을 결성했다. 3월 초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석방되기 이전 정기적으로 열렸던 토요 집회와 다양한 시민 프로그램 현장을 기록했고, 석방 이후 산발적인 집회가 늘어났을 때도 구성원들은 자율적으로 많은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갔다. 1500여 단체가 모여 각종 시민행동과 집회를 주최했던 ‘윤석열 즉각 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기조 영상을 만들고 현장의 각종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기도 했다. 미디어팀 소속이자 <오류시장> 등을 연출한 최종호 감독은 “카메라의 존재가 많을수록 카메라의 오용 역시 늘어나는 시대이다 보니 시민들 역시 자신이 촬영되는 일에 민감한 경우”가 있었지만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이라는 소속 덕분에 더 친밀하게 집회 참여자들의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라는 소감을 들려줬다.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의 빈자리를 채우며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 신진 다큐멘터리스트들 역시 나타났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보지 않았던 영상방송학과 전공자 박채한 감독은 SNS를 통해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에 참가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온라인의 반응을 보면 과거 민주화 운동권 세대와 달리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작아졌다는 말이 보이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이 정세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떻게 대학생들의 결집을 막고 극우 세력의 여론이 대학생들의 활동을 억제하는지”(박채한) 알릴 필요를 느낀 것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개인적으로 이어오던 최호영 감독은 “2016~17년 촛불 집회 당시엔 모인 사람이 많았으나 그 결과물이나 후속 조치가 아쉬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미디어팀 활동으로 여러 현장을 다니며 세상에 이토록 많은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기록에 대한 욕망”을 다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더 많고 다양한 카메라로 최호영 감독의 말처럼 12·3 계엄 이후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의 고심인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가능성이자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진영의 두 번째 실천적 답변은 바로 ‘다양한 카메라의 가능성’이었다. 민중의 수많은 카메라 속 다큐멘터리영화에 대한 효용을 묻자 홍다예 감독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카메라가 현장을 기록하면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카메라는 외려 현장의 증거와 증언을 기록한다는 일종의 책무에서 벗어나 더 새로운 실험과 모험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교육제도란 공적문제에 지극히 사적인 서사를 엮었던 그의 전작 <잠자리 구하기>처럼 “윤석열이 쫓겨난다고 해서 모든 사회적 의제가 해결되지 않는 형국인 만큼 탄핵을 축으로 모인 갖가지 문제에 연출자 각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엮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에 참여했고 12·3 계엄의 현장을 찍기도 했던 박명훈 감독도 군복무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와 성소수자로서의 고민을 엮은 자전적 다큐멘터리 <클린>을 제작하던 중, “사회운동의 현장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다큐멘터리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치유의 힘”을 느꼈다는 소회를 전해왔다. 요컨대 광장에 모인 카메라의 수는 더한 가능성이되 한계로 작동하진 않는다. 허철녕 감독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퇴진을 목표로 했던 촛불 집회 이후 8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에 꿈꿨던 부당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등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과제”라며 다큐멘터리영화가 단일한 목적의 수단이 아닌 여러 사안의 지속적인 창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그래서 이번엔 윤석열 퇴진뿐 아니라 성폭력 사안을 공론화했다가 부당 해임된 교사, 거제·통영·고성에 있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권리 등 더 다양하고 세밀한 사회적 의제들이 발현되고 있는 현장을 기록하며 새로운 다큐멘터리적 체험”(허철녕)을 겪었다고도 덧붙였다. 다큐멘터리스트들의 형식적인 시도도 이어졌다. <옵티그래프> <오색의 린> 등 주로 필름영화를 작업한 이원우 감독은 ‘인스타360 ONE RS 1인치’ 카메라를 백팩에 부착하고 광장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세밀한 사건들을 채록했다. “여의도광장에선 지상파방송의 드론 카메라 등 워낙 화려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촬영되고 송출됐으니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영화를 통해선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도입을 고민” (이원우)한 결과였다. 상술했던 다큐멘터리영화의 위기는 반복돼왔고 언제나 새로운 답을 찾고 있었다. <미국의 바람과 불> <돌들이 말할 때까지> 등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김경만 감독은 “과거에 보도 언론과 주류 언론사가 다루지 않았던 영역을 독립다큐멘터리가 다양한 미학적 시도를 통해 책임졌던 것”처럼 “현장성과 신속성과 같은 부분은 원래 독립다큐멘터리영화의 몫이 아니었던 듯하다”라고 말했다. 박소현 감독도 “미디어, 영화 생태계가 변하긴 했으나 막상 현장에 나선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마음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라며 “각자의 일상에서 이어지는 활동과 연구 차원에서 더 다양한 사람의 손으로 더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 등장할 수 있게 됐다”라며 지금 다큐멘터리 생태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지금도 여전히 사회에서 덜 조명되는 곳, 사회에 덜 알려진 광장의 사람들이 있다. 그것들을 밝히는 일”(최종호)은 다큐멘터리영화의 변치 않은 존재 이유다. 이 수많은 다큐멘터리스트와 카메라의 움직임이 “나는 새로운 상상의 나라를 보고 있다”(<내가 꿈꾸는 나라>)라는 희망의 발로로 곧 관객을 찾길 바란다. <비상123>(가제) - 상행동 시민미디어팀 비상행동 시민미디어팀은 오는 7~8월경 이번 탄핵 정국의 다양한 현장을 채록한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비상123>(가제)을 공개할 계획이다. 김영욱 시민미디어팀 팀장을 비롯한 박채한, 이명훈, 이현호, 장병철, 최종호, 최호영, 홍다예, 허철녕 감독이 작품 기획과 연출에 참여한다. “사실상 계엄을 ‘당한’ 비상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직접 시민들과 호흡한 결과물”이자 “시의성을 강점으로 두고 있되 금방 휘발되어버리는 SNS, 유튜브 콘텐츠와 달리 지난 5개월을 차근차근 복기하는 차원의 작품” (김영욱)이 될 예정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다큐멘터리이되 이번 탄핵 정국을 통해 새로 독립다큐멘터리 신에 진입한 여러 신진감독의 다양한 시선을 종합하는 영화다. <고양이 돌봐드립니다> - 박소현 감독 박소현 감독이 2022년부터 제작해온 <고양이 돌봐드립니다>는 원래 빈집에 홀로 남게 되어 돌봄이 필요한 고양이들, 그리고 나이도 많고 아픈 자신의 고양이들을 함께 돌봐야 하는 연출자의 일상이 전개되는 영화였다. 그 와중에 박소현 감독은 갑작스러운 탄핵 정국을 맞이하게 되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광장에 나갔을 때 발견한 ‘집에 돌봐야 할 고양이가 있는 사람들의 모임’ 깃발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는 개인이 일상에서 겪던 돌봄에 대한 감각이 광장으로까지 확장되는 감각을 주었으며, 전작인 <야근 대신 뜨개질>과 같이 개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광장의 목소리가 들어가는 경험을 반복하게 해주었다. 박소현 감독은 “다시 한번 일상과 정치는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다. 즉 수많은 사회정치적 의제의 발현이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미시적이고 내밀한 사적 경험으로 환원되는 작금의 현상을 포착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신비로운 이미지, 도취할 수 없는 풍경

2024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그랜드 투어>(감독 미겔 고메스)와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감독 파얄 카파디아)은 공교롭게도 동시대 아시아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적 화면과 멜로를 탐색하는 픽션의 지대를 아우른다. 두 작품을 연이어 보는 동안, 영화가 현실을 풍경화하는 문제에 생각이 닿았고, 그 생각이 촉발한 질문들이 <그랜드 투어>의 모험적인 시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랜드 투어>의 활력에 감응하면서도 어쩐지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의 감정을 들여다볼 계기가 된 것 같다. 풍경 바깥에서 본 ‘풍경’ <그랜드 투어>가 미얀마,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일본, 중국 등지에서 찍은 장면들과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인도 뭄바이 거리 장면의 성질은 달라 보인다. 전자가 풍경 바깥에 자리한 시선으로 포착한 이미지라면, 후자는 적어도 여행자의 눈과는 다른 감각으로 바라본 산물이다. 전자가 외부인의 시선으로 풍경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무엇을 찍을지의 문제와 먼저 마주한다면, 후자는 내부인의 시선으로 일상을 다시 응시한다는 맥락에서 어떻게 찍을지의 문제에 좀더 시급하게 당면한다. 물론 이러한 규정은 도식적이고 식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찮게 지나칠 사실은 아니다. 더욱이 이 구분은 <그랜드 투어>의 형식을 되묻는 유효한 길목이 된다. 미겔 고메스는 인터뷰를 통해, “여행 중 찍은 이미지들로 아카이브를 구축한 뒤 거기에 픽션으로 반응”(<필로> 41호)하는 과정에 대해 “영화의 배경은 1918년이지만 개별 장소들이 현재 어떤 모습을 지니고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확인하고 그 이미지를 포착해 영화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씨네21> 1498호)고 밝힌다. 21세기 동아시아의 풍경에서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삼은 허구의 이야기가 지나간 흔적을 느껴보고자 했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허구와 현실, 과거와 현재의 파편들에 흐름을 불어넣는 인위적 힘이 영화의 독창적인 가능성으로 <그랜드 투어>를 지탱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다소 일차원적인 궁금증이 새삼 앞선다. 여행지의 수많은 풍경 중 어떤 면모가 고메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일까. 그의 말에서 추론해보자면, 그것은 미지의 지대가 사라진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난생처음 보는 무언가”의 느낌, 시청각적 “순수함”을 되찾게 하는 대상의 운동성이다. <그랜드 투어>가 다큐멘터리적 풍경에 허구의 세계를 결부한 방식은 이미지를 그것이 놓인 통념적 맥락에서 분리해 새로운 영토와 연결함으로써 대상 자체의 고유함을 발견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고메스는 이를 “사회적으로 확립된 어떤 것들을 비교적 원상태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만의 “전복적인 힘”이라고 강조한다(<필로> 41호). 그러한 믿음을 탐구하지 않는 영화를 우리는 신뢰하지 않는다. 고메스의 바람을 더없이 활기차게 실현한 영화 속 장면들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둘러싼 사정이 그리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감각에 “순수함”을 되돌려줄 “원상태”의 활동. <그랜드 투어>가 이국의 풍경에서 발견하고, 영화로 소망하는 궁극의 지평은 아마도 직감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작동할 것이다. ‘직감적인 경험’이라는 감상 태도 혹은 수용 방식은 그 모호함 때문에 종종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차원에서 경탄할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운동이란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를테면 영화사 초창기,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항구를 떠나는 배>(1895)라면 그 감흥의 당당한 사례로 불릴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감동은 그냥, 느껴지는 것이다. 파도가 친다. 그 파도와 함께 배가 항구를 출발한다. 배에 탄 남자들의 몸도 출렁인다. 배가 멀어진다. 여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다. 이 짧은 숏 하나가 ‘영화’로 불려 마땅한 이유는 카메라의 위치가 자연에서 발견해낸 피사체의 구도와 움직임의 방향성으로 더없이 평범하고 단순한 사실들만을 조응시켜 의미작용 없이 시각적 활동성의 경이, 완전한 표면의 활력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랜드 투어>의 도입부를 강렬하게 장식하는 미얀마의 관람차 장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경우에는 좀 다른 결이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장면이 발산하는 쾌감이 “순수함”과 “원상태”의 활동에 기인한다고 여긴다면, 이 느낌은 그 운동성에 대립하는 혹은 비교되는 항이 존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요컨대 미얀마의 관람차 장면에서 고메스와 우리를 홀린 희귀한 생동감의 정체가 기구의 활기찬 원형 움직임과 이를 온몸으로 수행하는 인간 육체의 직접성이라면, 이 감상의 무의식의 저변에는 우리에게 훨씬 익숙한 서구식 대관람차, 먼 곳을 조망하며 모터로 우아하게, 천천히 돌아가는 기계의 위용과 분위기가 전제될 것이다. 대상을, 이미지를, 풍경을 ‘순수하게’ 즐긴다는 것의 함의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21세기 여행자의 시선이 포착한 이국의 풍경에 관해서라면, 이미지가 그것이 놓이고 환기하는 맥락들을 포함하지 않은 투명한 상태로 수용되고 소비될 수 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랜드 투어>는 이미지를 향한 순수한 시각을 복원한 영화이기보다는, 이미지의 순수한 향유라는 ‘환상’을 현시한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인상은 감독의 의도와 무관할 확률이 높지만 이 영화는 편견 없는 여행자의 맨눈과 때를 벗은 대상 이미지의 만남이라는 환상 앞에서 우리를 종종 멈춰 서게 한다. 물론 고메스의 말대로 이미지를 상투로 고착화하지 않고 다른 세계로 변모하게 하려면, 그것을 기존의 토대에서 해방시키는 상상력이야말로 영화의 중대한 역량이라고 할 만하다. <그랜드 투어>에서 그 믿음을 구현한 장면들은 고메스의 희망처럼 쾌활하게 변화해간다. 이미 많은 이들이 언급한 일례로, 태국의 무도회에서 베트남의 오토바이 행렬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왈츠를 추며 무대를 뱅글뱅글 도는 허구 속 인물들의 모습은 작은 배 한척이 물 위를 떠가는 현실의 풍광으로 연결되고 이 장면에 등장하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베트남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경로를 알려준 뒤, 베트남 도심에서 로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들의 압도적인 광경이 느린 화면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허구와 현실, 과거와 현재의 거리, 세계의 불균질한 속성과 시간의 간극은 왈츠의 선율로 부드럽게 통과되고 감싸이고 엮인다. 베트남 거리에 쏟아져 나온 오토바이들의 움직임은 현실 안에서는 노동과 결부된 급박한 생활의 감각이지만, 화면에 느린 속도로 확장된 그 운동성은 앞선 허구의 춤 장면에 화답하는 매끄러운 동선처럼 시각화된다. 그러니까 <그랜드 투어>의 화법은 장면들을 가르는 물적 토대나 조건의 차이 대신, 각 세계에 잠재된 음악성과 리듬의 친연성을 적극적으로 깨우고 구축해서 잇는 식으로 화면내 움직임들을 유희의 운동으로 수평화하며 서로에게 반응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에 근거한 이미지의 연쇄는 감각의 전복을 유도하지만, 서로 다른 지대의 풍경들이 수평적으로 접속하는 황홀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 망각하거나 탈각된 것들 또한 생각하게 한다. 오토바이들로 가득 찬 거리의 소음, 매캐한 공기, 일터를 오가는 소란, 말하자면 그 풍경을 살아가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는 일상의 번잡함과 시끄러움은 우아하게 증발한다.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유연한 이동이란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 풍경이 생성하는 미감을 해치는 요소들, 쾌적하지 않은 물질들의 아우성을 정리한 결과이기도 하다. 리얼리티의 문제를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관습이나 현실 구조에서 구해내 낯설게 활동하게 하는 시도(의 욕망)와 한 장소의 풍경(의 역사와 일상)을 납작하게 다림질하는 일의 동시성을 상기해보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풍경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위치에서, 눈은 비로소 울퉁불퉁한 현실을 이미지로 단면화할 수 있다. 이국의 풍경을 담은 트래블링숏이 기이한 평온함을 생성하고 상상력을 추동한다면, 그건 카메라와 풍경 사이의 완고한 거리가 선사한 여유에 기인한다. 집을 나선 여행자의 눈, 그러나 이국의 풍경에 속하지 않은 채 거니는 눈은 시각적인 자유를 누린다. 물론 풍경 안팎 어느 한쪽에도 귀속되지 못하는 눈의 운동도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뭄바이 도심의 실제 새벽 장면으로 문을 연다. 카메라가 거리에 쭉 늘어선 시장과 사람들의 풍경을 응시하며 수평으로 이동하고 출근길 차들로 빽빽한 도로에 이르러 그 복잡한 행렬에 동행하는 동안, 익명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뭄바이에 산 지 오래됐으나 이곳이 아직도 집으로 느껴지지 않으며 언젠가는 다시 떠나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건조한 음성. 아마도 저 새벽의 풍경을 이루는 군중,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온 하층계급 노동자 무리 중 하나의 마음일 것이다. 그는 여행자는 아니지만, 풍경 안에 정주하지도, 바깥에서 산책하지도 못하는 외롭고 빈곤한 이방인이다. 도입부의 카메라 움직임이 어쩐지 눈길 둘 데 없이 떠밀리는 시선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이 ‘집을 찾아 집을 떠났으나 집을 갖지 못한다는 자각’ 속에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고스란히 흡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이 첫 장면에 불러들인 뭄바이의 현실 풍경은 이미지의 활동성을 실험해보는 장이 아니라, 픽션에서조차 사랑을 나눌 안온한 보금자리 하나 갖지 못한 가난한 연인들이 거듭 내몰릴 길, 사방이 뚫린 위태로운 거처를 환기한다. 다큐멘터리적 풍경이 픽션의 막을 뚫어 영화 안으로 자꾸만 흘러들고 인물들은 둘 사이에서 헤맨다. 수평적 연결의 환영 <그랜드 투어>의 픽션도 일견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흔들림이나 균열 없는 구조 위에 서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풍경과 20세기 초를 기반으로 한 픽션은 주인공들의 행적을 최소한으로 단정하게 설명해주는 음성적 화자에 의해 연결된다. 그런 설정이 두 시공간을 통과하는 관객의 자발성을 의도한 설계라고 해도,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랜드 투어>가 자신의 명백한 토대로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애매하게 괄호 친 문제, 즉 식민주의라는 민감한 화두와 관련된다. 이 영화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그대로 취한다거나 서구가 아시아를 허구화하는 방식을 의식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비판적으로 겨냥한다는 주장 모두 미진하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그 둘을 별다른 부담 없이 가볍게 오간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태도와 행보는 <그랜드 투어>의 방법론이나 전략이기보다 픽션과 논픽션의 결합에서 영화의 지평을 개척해보려는 고메스의 시도, 그 작업의 경쾌한 자율성을 보존하려는 의지와 야심이 식민주의를 둘러싼 엄격하고 다층적인 문제 의식을 누른 결과로 보인다. <그랜드 투어>가 불러일으키는 궁금증은 재현방식 이전에 영화의 뼈대를 향한 것이다. 사실 그 물음은 전혀 복잡하지 않다. 1918년 식민지 미얀마에 부임한 영국인 남성과 그를 쫓는 여성의 이야기는 피식민지의 역사적 상흔이 여전히 잠재된 21세기 동아시아의 풍경 무엇에서 태생된 허구일까. 이 영화에서 허구의 행로를 여는 남녀의 이야기는 여느 여행객의 멜로가 아니라, 제국의 시대, 상류층 백인들이 자국의 식민지를 포함한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며 벌이는 나른한 사랑의 숨바꼭질 같은 것이다. 성찰과 반성을 시늉하는 섣부른 제스처보다 이국에 사로잡힌 여행자의 호기심, 탐색, 애정전선에 천진하게 몰두하는 면모가 이 영화의 저돌적인 활력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동시대 아시아의 풍경을 거듭 소환해 접촉을 시도할 때마다 다시금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랜드 투어>에서 식민지의 얼굴과 피식민지의 얼굴, 20세기 제국의 얼굴과 21세기 아시아의 얼굴, 허구의 얼굴과 역사의 얼굴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표층들로 공존하고 친밀하게 어울린다. 영화는 이 표면들을 충돌에 무감한 얼굴들로 다룬다. 고메스가 원하는 건 앞서도 언급했듯, 그 표면들의 수평적인 연결이다. 그가 영화의 급진적 역량으로 여길 ‘수평적인 연결의 감각’은 그러나, 그 얼굴들을 이루는 뾰족한 정치성의 층위를 평화롭게 조율하고 조정한 이미지의 단면들로 성취한 것이기도 하다. 그 연결의 감각이 내내 단절 없는 꿈결처럼 아련한 향수의 정취로 영화를 맴돈다. 극 중에서 에드워드는 결혼을 피해 도망치는 자로, 몰리는 그를 뒤쫓는 자로 그려지지만,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이국으로의 여행을 멈추지 않는 이들은 각자의 환영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자의 초상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미얀마의 현실 풍경에서 시작한 영화는 아시아의 현재로 돌아오는 대신, 죽은 몰리를 영화 안인지 바깥인지 불분명한 경계에서 조명 빛으로 부활시키며 끝난다. 이 결말에서 되살아난 것의 정체는, 포기되지 않는 연속의 열망은 무엇일까. 고메스가 마지막까지 바라보는 방향은 그들의 ‘그랜드 투어’가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자기 충족적인 세트, 상상 속의 이국인 것일까. 에드워드와 몰리를 끝내 이국의 땅에 머물게 한 허상의 그림자는 고메스가 <그랜드 투어>의 이미지들로 좇은 ‘수평적인 연결의 감각’이라는 환영이기도 할까. 그 허상과 환영은 신비롭고 유려하지만, 기꺼이, 선뜻, 향유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5월의 상태, 행복의 형태

5월이 되면, 괜히 심술이 난다. 스마트폰에 고개 박고 걷는 게 습관이 된 탓에 칙칙했던 뒷산이 어느새 옅은 초록 옷으로 갈아입은 걸 뒤늦게 깨닫곤,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미세먼지로 매일 희뿌옇던 하늘이 어느 날, 쪽빛 물감을 뿌려놓은 듯 파랗게 개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일주일 내내 흐리다가 단 하루, 햇살 묻은 바람에서 뽀송한 솜이불의 감촉이 느껴질 땐 (약간의 과장을 보태) 살아 있어 다행이란 생각마저 든다. 온몸으로 퍼지는 이 감각에 굳이 이름을 붙여보고 싶어, 얇디얇은 내 어휘사전을 뒤적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행복’이라고 쓴다. 그래서, 심술이 난다. 나는 파란 하늘 아래 초록 내음을 맡는 것만으로 이렇게 꽉 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데, 이놈의 세상이 나를 매일매일 강퍅한 인간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제 좀 살 만한가 싶어 방심하고 뉴스를 틀 때마다 환장할 소식에 속이 뒤집어진다. (오늘은 5월1일이다.) 행복을 표현할 기회와 방법이 매일매일 사라져간다. 요새 말문이 트인 인생 36개월차 딸아이는 내 표정이 굳어질 때마다 달려와 묻는다. “아빠, 기분이 안 좋아?” 그러곤 내 의견 따윈 궁금하지 않다는 듯 다그친다. “안돼애~, 행복해야지.” 이 조그맣고 사랑스럽고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생명체에게, 행복은 어떤 색과 모양을 하고 있을까. 내가 행복의 정의와 형태에 대해 고민하며 구두쇠처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아낄 때, 딸아이는 걸음을 걷듯 당연하게 내뱉는다. “아! 행복해!” 뭐가 그리 좋을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지, 참 좋을 때다… 라고 속으로 꿍얼거리다가 문득 깨닫는다. 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느샌가 내가 행복에 젖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행복’이 결과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 출발을 위한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의성어처럼 외쳤던 ‘행복’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닐 것이다. 어떤 의도나 지향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입 밖으로 해방된 행복은 손에 잡히는 실감으로 주변을 메아리친다. ‘일상 속 작은 것에 감사하며 행복을 발견하라’는 성인군자의 상투적인 교훈이 저 조그만 것의 팔딱임을 거쳐 기어이 내 것이 된다. 4월 한달 내내 <씨네21> 창간을 기념하여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다. 한다고 했지만 모자란 것투성이였고, 주변에서 크고 작은 지적과 섭섭한 토로를 들었다. 웬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아쉬움을 지적하는 의견 하나하나에 이토록 뼈아픈 건 그만큼 조언을 건네는 쪽과 받는 쪽 모두 진심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래 100개의 칭찬보다 1개의 비판이 더 묵직하게 오래 남는 법이다. 다소 의기소침한 한달을 보낸 끝에 마침내,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창간 기획에 다다랐다. 독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난 한달, 아니 1년, 아니 30년을 다시 되돌아본다. 더 나아질 거라고 다짐해보지만 여전히 확신은 들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코너로 뽑아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읽고 있자니, 새삼 벅찬 감회가 차오른다. 어쩌면, 감히, 행복하다. 5월엔 이 낯간지러운 단어를 좀더 자주 입에 올려보려 한다. 앞으로 1년. 또 1년. 다음을 향한 출발의 신호가 되길 꿈꾸며.

[기획] 독자설문 - 독자가 채운 30개의 잇다

<씨네21>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새로운 슬로건을 선보였습니다. ‘씨네21, _____ 잇다.’ 이 간결한 문장 안에는 1995년 4월14일, 1호가 나오던 날부터 영화와 영화인 그리고 관객을 연결하고자 했던 <씨네21>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로 한정하지 않고 더 다양한 매체, 더 낯선 이야기들과도 연결되겠다는 의지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곧 <씨네21>이 30년간 해온 일이자 앞으로도 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1505호를 만들며 <씨네21>은 독자 여러분께도 ‘잇다’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난 4월23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설문에서 총 238분이 저마다의 언어로 이 빈칸을 채워주셨고, 그중 30개의 문장을 골라 한 페이지에 모았습니다. <씨네21>에 대한 바람과 영화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문장들에서 <씨네21>의 역할과 방향성을 헤아립니다. 독자와 함께 써내려갈 또 다른 30년을 기대하며,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씨네21, _____ 잇다’ 사랑과 사람을 _ 김성은 스크린과 현실을 _ 강지원 이야기와 이야기를 _ 정보람 예술과 산업을 _ 성창환 시대별 시퀀스를 _ 이윤정 나와 너를 _ 한위서 영화의 가치를 _ 신재철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_ 김정우 우리의 지금을 _ 조아라 감각과 논리를 _ 이승민 추억과 감성을 _ 박문규 인생의 찰나를 _ 김태윤 예술과 일상을 _ 박지민 세상과 나를 _ 백인유 영화를 향한 첫걸음들을 _ 이병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_ 김민우 시네마의 기록을 _ 이나경 마음속 대지를 _ 양수빈 꿈을 스크린으로 _ 김형미 느낌과 해석을 _ 이윤지 필름메이커와 관객을 _ 임고은 한국영화의 계보를 _ 서혜선 영화와 사람을 _ 박상은 미디어간의 융합을 _ 양준용 스크린의 안팎을 _ 조영준 세대를, 시절을 _ 김성현 영화로 모두를 _ 윤영호 영화인과 관객의 꿈을 _ 이윤철 다시 극장을 _ 나혜진 영화잡지의 명맥을 _ 김능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