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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장윤미의 인서트 숏] 마지막 원고

매주 카메라를 들고 집회에 간다. 서울의 성북구청 앞에는 목요일마다 집과 일자리를 잃고 막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동안 내가 이 지면에서 종종 언급했던, 재개발이 진행 중이라던 미아리 성매매 집결지에 살던 이들이다. 한곳에서 수십년을 일했던 사람들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냥 쫓겨나야 한다. 나이 들고 아프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은 여기서 나가면 ‘벼랑 끝’일 가능성이 높다.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이 동네에서 버티던 두 여성은 잠옷 바람으로 반려동물만 껴안고 강제퇴거를 당했다. 재개발은 사회적으로 취약한 존재들을 더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만다. 애초에 재개발의 목적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이 당연할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면 내가 카메라를 들 일도 없었겠지. 이들의 절실함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저 개인 탓만 하기 쉬운 사회에서 당당하게 “우리 몫”을 내놓으라 항의하는 목소리로부터 내가 받는 위로도 있다. 또 내가 얻고 싶은 배움이라는 것도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이쪽에서 발생하고. 2025년 5월, 집회는 어느새 30회 차가 되었다. 20회 차까지만 해도 외부인은 카메라를 든 나뿐이었는데 조금씩 연대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열심히 참가하던 몇몇이 그곳에서의 열기와 함께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고민을 안고 철거민이자 성 노동자 집회가 열리는 이곳에 연대하기 위해 합류하더니 이제는 매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 수는 점점 늘고 있다. 당사자와 연대자들이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는 현장에 있는 건 나로서는 처음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관찰자’ 정도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깊이 연루되는 것에는 주저했다. 카메라를 든 나도 일종의 연대인일까? 연대라는 말만 떠들었지 연대인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어쨌든 현장에 있다 보면 내가 있는 자리에만 계속 버티고 서 있을 수는 없는 법. 이 과정을 잘 지켜보고 겪어보자고 다짐한다. 배움의 현장이다. “하물며 여기 앞에 있는 가로수조차 이곳으로 이주를 해올 때는 그곳에 함께 뿌리내리고 있던 흙도 같이 가져왔을 테고 여기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흙과 양분을 듬뿍 주었을 것입니다. 한 생명이 한곳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살다가 갑자기 뿌리를 뽑혀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주대책을 보장하라. 이 말은 강제로 내쫓으면 그것은 살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 법과 정치는 생명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만든 약속일 뿐입니다. 말뿐인 약속은 집어치우고 모든 생명이 자기 생명답게 살 수 있도록 정치와 법이 잘 듣고 대책을 강구해주면 좋겠습니다.” 연대자인 (준)동물교회의 보리님 이야기를 듣고 눈앞의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살고 싶다”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매달려 있다. 반년 동안 이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고 다시 나는 걸 알았지만 들여다본 적은 없다. 나무 가까이에 붙어 투박한 껍질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자세히 보면 오히려 낯설어진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느끼게끔 하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 하지 않았는가. 지금 집회에 울려 퍼지는 구호도 시민들 귀에 낯설게 들리게끔 하고 싶다. 다시 듣도록, 더 들어보고 싶도록. 잠시 발길을 멈추는 시민들에게 한 연대자가 미아리의 상황을 전하는 전단지를 나눠준다. 가로수를 보고 있자니 미아리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오동나무들이 떠오른다. 커다란 잎이 붉은 천막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사이로 고양이들의 작은 발자국이 지나가던 모습이 선연하다. 철거가 시작되면 그 나무들도 잘려나갈 것이다. 혹시 어딘가로 옮겨질 수도 있을까? 양분을 충분히 받고 잘 적응해서, 그래도 좀더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재개발 현장에서 뿌리 뽑힌 큰 나무들이 트럭에 실려 이동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이 떠오르자 이내 고속도로에서 돼지를 실은 트럭을 본 날이 떠오른다. 몇년 전 외주 제작사에 들어가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일해야 했던 때다. 그에 앞서 방송국에서 비정규직으로 노동하던 시절이 떠올라 내가 또 이 굴레에 들어온 건가 싶었지만 돈을 벌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창작도 할 수가 없다. 그날은 새벽부터 지방 출장을 가고 있었다. 차가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긴장이 풀리며 나른해질 즈음, 우리 차를 앞지르는 커다란 트럭이 내 눈을 가득 채웠다. 빽빽하게 실린 돼지들.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눈앞에 드러나니 너무 낯설었다. 몹시 피로할 때 오히려 감각이 더 깨어나듯, 살아 움직이는 돼지들의 모습이 마치 흐린 렌즈를 막 닦은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때 뒷발 하나로 쇠창살을 딛고 올라 트럭 바깥쪽으로 얼굴을 내밀던 한 돼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장면 때문에 더욱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바람을 맞으려고 일어섰다고밖에 할 수 없던 돼지의 자세. 내 기억 속에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는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보인다. 왜 그때 눈물이 나려고 했을까. 그 시절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더는 이런 속도로 살지 못하겠다는 자각 때문이다.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상사의 말에 피곤한 채로 따라나섰던 어느 날, 강한 햇살과 피로함에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직장인들을 피해 휘청거리며 걷다가 아스팔트 바닥 위에 누운 비둘기가 보였다. 차바퀴에 여러 번 뭉개져 있던 몸. 그 순간, 다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잇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하는 물음. 닥치는 일을 허겁지겁 해치우며 살고 싶지 않다, 비둘기를 죽이는 속도로 살고 싶지는 않다, 끼니마다 식당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일상도 싫다. 또다시 내 안에서 무언가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씨네21>에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건 꼭 하고 싶던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영화를 만들 때도 글을 쓸 때도 강한 목적을 갖는 건 경계하는 편이지만, 이 연재 글에서는 유독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전해졌다면 좋겠다. 물론 쓰는 과정은 끊임없는 의심과 회의의 연속이었지만. 어떤 확신 안에서도 미세하게 계속 흔들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자장들이 언젠가 나를 또 새로운 현장으로 이끌 테니까. 하나의 현장에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영화로 담을 수 없는 게 훨씬 많다. 이 사실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좋은 다큐멘터리란, 무언가를 보여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게 더 많다는 여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는 여전히 나도 찾아가는 중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빛과 실>

한강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5박6일 일정으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오는 짐을 싸면서 한강의 <빛과 실>을 넣었다. 150여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는 데 5박6일은 너무 짧았다. <빛과 실>은 머릿속에 있는 한강의 모든 소설과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년, 길게는 칠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 작업은 한강의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한강은 쓴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의 아름다움. 질문들을 견디며 그 안에 산다는 일. (대답을 찾아내서가 아니라) 질문들의 끝에 이르러서야,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 소설을 시작하던 때와 같은 사람일 수 없는 누군가가 되기. 질문을 포개고, 책을 쌓아가기. <빛과 실>에는 그러한 소설 쓰기에 대한 경험이 차례로 언급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안에 있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질문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희랍어 시간>으로는 “우리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빛과 따스함의 세계로 나아가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그때, 그런 소설을 쓸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5월 광주에 대한 기록사진을 본 일이 기억에 틈입한 것이다. “오래전에 이미 나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껴안을 수 있겠는가?” <소년이 온다>를 읽은 독자라면 이 질문에서 이미 마음이 무너지는, 쓰러지는, 산산조각 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을 믿을 수 있음을, 그 깨달음이 주는 깊은 슬픔에 목 안에 울음이 맺힐 것이다. <빛과 실>의 서두에 실린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의 내용이다. “울면서 쓴다.” 그럼에도 “어떤 트랜스 상태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매 순간 분명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고통을 명료한 정신으로 견디면서, 조금도 미치지 않은 상태로 책상 앞에 앉는다. 정원의 여린 이파리들을 돌보고 매일 다르게 봉오리 가 맺고 피어나는 불두화의 상황을 일기에 기록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한강은, 글쓰기를 빼면 재미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며, <빛과 실>을 읽어간다.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58쪽

씨네21 추천도서 - <불새>

신종원 글 한규현 그림 소전서가 펴냄 신종원의 장편소설 <불새>를 읽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하고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예정되어 있던 시기였다. 공교롭다고 말한 까닭은 이 소설이 젊은 사제 바오로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양을 찾아 떠나지만, 드물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양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또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빚어질 때 이미 목자로 명명되어 일생 양들을 이끈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 신부가 등장한다. 그는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다니냐는 옆자리 사람의 말에 그는 “네, 그런데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라는 비밀을 누설한다. 비행기에 탄 이유는 곧 밝혀진다. 성직을 내려놓겠다는 바오로 신부에게 아버지 신부인 베드로는 “네 눈으로 직접 성배를 보고 돌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일의 발단은 이렇다. 성가대원이었던 헬레나의 임신 고민을 들은 바오로 신부가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대로 조언한 일이 헬레나가 죽음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바오로의 믿음을 뒤흔들었다. 최후의 만찬에 쓰였던 성배를 보고 오는 일은 무엇을 바꿀까? 최후의 만찬에 쓰인 성배는 수많은 창작물의 영감이 되었다. ‘성배’의 정체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스릴러로 풀어낸 소설(과 영화) <다빈치 코드>가 있었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마궁의 사원>이 있었다. 신종원의 <불새>는 상징으로서의 ‘성배’와 실재하는 성물로서의 ‘성배’의 이야기가 긴 시간을 오가며 진행된다. 유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힘과 권력은 믿음과 어떻게 상관관계를 맺는가. 제목 ‘불새’는 어떤 존재인가. 질문을 빚고 그에 답하며 <불새>는 바오로의 발걸음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종교사를 근간에 두고 지금 여기의 구원에 대해 질문하는 집요함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한다. <불새>는 소전문화재단이 젊은 작가들의 장편소설 집필을 후원하는 ‘문학과 친구들’ 프로그램의 결과로 출간된 ‘내일의 고전’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책을 읽은 독자에게 즐거움이 될 작가 인터뷰와 평론가 3인(이소, 김다솔, 양순모)의 서평이 실린 <불새: 인터뷰와 서평들>이라는 소책자가 함께 제공된다. 신종원은 말한다. “근래에는 소설 쓰기가 일종의 기도와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봉쇄 수도원에서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신앙과 믿음에 관한 책을 쓰는 수도사들처럼. ” 오직 싸우고 쓰면서 은총을 느끼는 것만이 길이라고 믿는 신종원의 <불새>는 4원소(물, 불, 바람, 흙)를 테마로 하는 ‘4원소 테마’의 두 번째 책으로 첫 번째 물을 다룬 장편소설 <습지 장례법>과 함께 읽어도 좋겠다. 동트기 직전의 밤이 언제나 창백한 푸른빛을 띠는 까닭은 두려움에 있다. 머지않아 어둠을 가로지르며 나타날 불새 한 마리를 일찌감치 상상하고 겁에 질리는 것이다. 343쪽 *책을 읽은 독자에게 즐거움이 될 작가 인터뷰와 평론가 3인(이소, 김다솔, 양순모)의 서평이 실린 <불새: 인터뷰와 서평들>이라는 소책자가 함께 제공된다.

[인터뷰] 새롭게 날아볼까, 더 먼 곳으로, <드래곤 길들이기> 딘 데블로이스 감독

어떤 이야기는 차원을 뒤바꾼 뒤에 새로운 챕터가 열린다. 실사화로 또 다른 모험을 떠나는 <드래곤 길들이기>는 애니메이션 3부작을 이끌어간 딘 데블로이스 감독과 함께 여정을 이어간다. 사람들 틈에 잘 섞이지 못하는 히컵(메이슨 템스)과 혼자이고 싶어 하는 드래건 투슬리스. 완전히 다른 듯 비슷한 둘은 오랜 엇박자 끝에 서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끝내 용해시키는 이 마법은 보다 현실적이고 생생한 움직임과 눈앞에 그려지는 실질적 이미지를 통해 현대인의 공허함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딱 한 발짝만큼의 용기를 낸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든 뭉클함으로 살아남는다. - 애니메이션 버전과 실사화 버전의 연출을 모두 맡았다. 실사화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은 무엇인가. 한 가지는 명확했다. 나는 대체작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창작자로서 <드래곤 길들이기> 애니메이션 3부작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 여정을 함께한 팀원들과 팬들을 존중하고 싶었다. 또 우리 작품이 가진 고유한 리듬감을 보여주면서도 깊은 애정을 바탕에 둔 변화를 모색하고자 했다. 단순히 버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더해내야만 했다. 제작 초반부터 고민이 깊었다. 기존 애니메이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백하자면 나 또한 고전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를 열렬히 좋아하는 관객은 아니다. (웃음) 그래서 더더욱 내가 그동안 아쉬워했던 지점이 무엇인지 돌이켜보았다. 작품의 울림을 주는 영혼이 작아진 것 같고 핵심 주제와 의도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사화를 하면서도 이 세계가 여전히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신중하게 작업했다. - 실사화로 표현된 투슬리스는 여전히 귀엽고 애교가 많다. 하지만 원작보다 그 크기가 훨씬 커졌다고. 히컵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나. 정확하다. 히컵의 현실적인 체격과 균형을 맞추려면 투슬리스의 사이즈를 더 크게 표현해야 했다. 애니메이션이 실제 동물의 특징을 부각한 캐리커처에 가깝다면 실사화는 그로부터 거꾸로 작업돼야만 했다. 투슬리스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개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특히 관객들이 사랑하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파악한 뒤 그것이 현실 세계에 존재할 때 어떻게 보일지 판단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번 영화의 투슬리스는 새롭게 번역된 것이다. 그중에도 투슬리스의 큰 눈과 활짝 웃는 귀여운 모습, 부드러운 곡선형 몸체와 고양이 같은 행동. 이런 특징을 잃지 않도록 신경 썼다. -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자면 나는 모든 동물 중 용을 가장 좋아한다. 용은 하늘을 날고 불도 내뿜는 위용을 자랑하지 않나. 이렇게 멋진 용을 구현하는 데 기술적으로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어디인가. 나와 같은 드래건 퍼슨이다. (웃음) 사실 실사화는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적다. 동물과 인간이 같은 환경에 있다고 믿게 하려면 현실 세계의 자연물을 참조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론클은 바다코끼리를 참고했고, 몬스트러스 나이트메어는 악어를, 데들리 네더는 열대우림에 서식하는 앵무새 계열을 참고했다. 투슬리스는 표범 같은 거대한 고양잇과 동물에서 따왔다. 이렇게 동물을 연구하면서 실제 속성을 캐릭터디자인에 흡수되도록 반영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바로 현실감. 빛이 비늘에 닿는 방식, 피부 아래에서 움직이는 지방과 근육의 모양, 골격의 변형이나 미묘한 움직임들. 이런 것들을 진짜 생물체처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반복을 거듭했다. 정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다. 너무 멀리 가면 만화처럼 느껴지고, 멀리 가지 않으면 환상의 동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였다. 드래건을 집에 데려가 직접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것. 혹은 집에 있는 자신의 강아지나 고양이랑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다. 렌더링을 할 때마다 그 생각을 되새겼다. - 촬영 대부분이 아일랜드에서 진행되었다고. 아일랜드 내의 촬영은 어떤 장점을 지녔나. 아일랜드 북부에 위치한 벨파스트에서 촬영했다. 이 지역은 <왕좌의 게임> 시리즈와 영화 <던전 앤 드래곤>이 제작된 곳이기 때문에 이미 드래건 크리어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유명하고 숙련된 디자이너와 의상 제작자, 3D 프린팅 업체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또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영화를 제작하면 영화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혜택도 있다. 재능 넘치는 영화인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 서로 다른 종(種)이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영화의 중심 메시지로서 우정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타인에게 냉소적인 요즘, <드래곤 길들이기>는 사람들간에 어떤 이음새가 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두 가지 메시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첫 번째, 가르침 받은 것을 기계적으로 따르기보다 자기만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결국 모든 적군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사실. 두 번째, 외형으로 평가하지 않고 한 꺼풀 벗겨 바라보면 모든 이들에게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 히컵은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 중 단연 으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세상이 변하길 바란다. 우리 또한 관객으로서 알고 있다. 히컵이 사람들 사이에 끼기 어렵다는 것을. 어쩌면 히컵보다 현실 속 관객이 더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히컵의 모험에 함께하게 된다. 정확히는 함께하고 싶어진다.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견디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진실이라 믿는 캐릭터를 왜 사람들은 응원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히컵이 바라던 세상을 똑같이 기다리는 희망이 조용히 숨어 있기 때문이다. 히컵과 같은 인물이 사람들 곁에 수용되기를 기다리면서. 이처럼 사랑스러운 바람이 영화를 보며 같은 공간에서 펼쳐지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드래곤 길들이기>를 딱 세 단어로 표현해본다면. 숨이 턱 막히는(breathtaking), 눈부신(dazzling), 연결되고 싶은 마음(wish of bonding).

[기획] 지금 한국 학원물에 필요한 질문들

지금 학원물에 필요한 질문들 물론 오늘날 학원물이 그리는 절박한 생존 이야기를 아예 근거 없는 과장이나 환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극 중 학생들이 겪는 과열된 입시경쟁, 불평등한 출발선에서 비롯한 심리적 박탈감,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지금 시대의 10대들이 처한 현실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 실제로 청소년 정신 건강은 위험 신호를 보이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아동·청소년 우울 및 불안장애 현황’(2024년 4월)에 따르면 2023년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아동·청소년은 5년 전인 2018년 대비 75.8% 증가했고, 불안장애의 경우 93.1% 늘었다. 최신 청소년 자살 통계도 비관적이다. 교육부와 전국 시도교육청이 집계한 2023년 초중고 학생 자살자 수는 214명으로, 종전 최고치였던 2009년의202명을 넘어 역대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했다. 자살의 주요 요인으로는 정신건강 문제, 가정 문제, 대인관계, 학업·진로 문제 순으로 복합적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학원물이 10대들을 둘러싼 사회적 압박과 정신적 고립이 징후적으로 포착하고 있을 뿐, 실제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섬세하게 다루진 못하고 있다는 거다. 환상이 크고 자극적일수록 관심이 모일 수는 있지만 실제 현실 속 크고 작은 문제들은 도리어 비현실적인 것, 혹은 별 것 아닌 것 취급을 받으며 잊혀질 우려가 있다. 때문에 패턴이 읽히는 학원물이 연달아 나오는 지금이야말로 중간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5년 한국 학원물은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동력으로 폭력과 자극을 필수적으로 활용 중이다. 캐릭터는 결벽적인 상위 1%, 불우한 전학생, 무능한 어른 등 단선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그치고, 서사구조 역시 조폭영화의 세계관이나 신분제 사회 축소판을 반복하고 평범한 학교생활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학원물의 서사적 다양성을 저해하고 시청자의 상상력은 제한된다. 결국 이렇게 비슷한 내용의 재생산과 반복은 현실과의 괴리를 벌리는 지렛대로 작동할 공산이 크다. 청소년 대부분은 드라마처럼 극단적인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 사회 뉴스에서 다뤄지는 학교 배경의 폭력 사건을 드라마의 주내용으로 다룬다면 도파민 자극 외에 시청자에게 어떠한 공감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미디어가 계속해서 자극적인 세계만을 재현한다면 청소년 시청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평범한 학교생활은 재미없고 무의미한 걸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리적 힘이나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서사가 주는 영향, 우정이나 감정적 관계보다는 계급과 자본이 우선시되는 세계관, 구체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한 폭력 장면들이 실제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질 위험 역시 제작진은 고려해야 한다. 지금처럼 뉴스와 SNS에서 화제가 되는 학교 문제를 고민 없이 가져와 에피소드화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면 학교에 한 인식을 더욱 왜곡할 수 있다. 실제로 대만 온라인 커뮤니티에 <선의의 경쟁>을 본 대만 시청자가 “한국 고등학교는 정말 돈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시스템인가?” “가난한 학생은 재능만으로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든가?”라는 질문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사례가 있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해외시장동향). K학원물이 글로벌 플랫폼으로 유통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인식이 더는 국내에서만 퍼지지 않기에 더욱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다. 교실이 기다리는 다음 이야기 경쟁적이고 양극화된 사회와 고립된 개인 그리고 도파민을 충족하는 이야기. 시대적 분위기와 영상업계의 요구에 맞물려 지금의 학원물 시리즈는 동화적 성장기에서 디스토피아적 생존기가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학교를 다루면서 학교를 지워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예전 학원물이 더 낫다는 식의 회귀적인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과거 TV 학원물은 “새로운 내용이나 형식 시도에 소극적이며 교육적 의미나 효과에 치중”하는 한계가 있었다(문선영, ‘웹으로의 이동과 확장, 최근 학원물 드라마의 경향’, <한국극예술연구> 제62집, 2018). 그럼에도 옛 학원물이 섬세히 그리던 교실에서의 보통의 하루를 되새길 필요는 있다. 결국 다양한 학교의 모습과 청소년의 경험이 골고루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단막극으로 등단한 신인 드라마작가 C씨의 바람이 곧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더 스릴 있는 교실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만 사실 내가 쓰고 싶은 건 내 학창 시절을 녹여낸 소소한 이야기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지어냈던 황당무계한 스토리, 짝사랑하던 도서부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교내 도서관에 들락날락했던 일 같은 것 말이다.” 폭력 없이도 용기를 낼 수 있고, 극단적 경쟁 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 이야기. 그것만이 주는 드라마틱함이 있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온 세상이 도니까 덩달아 나도 돌아, <돌아>

나는 ‘지하철 광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있다. 연민이 아니라 동질감에 가까운 감정인데, 나 또한 지하철만 타면 ‘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이란 정말 초현실적인 무대이지 않은가? 지하의 어둠과 지상의 풍경이 빠르게 교차하면서 쉴 새 없이 밤과 낮을 만들고, 역이 바뀔 때마다 새로 유입되는 승객들이 즉흥적으로 공연의 관객이 되며, 지하철에서 내릴 때마다 상실감이 생긴다. 오디션 없이 무대에 오를 유일한 기회를 놓친 것만 같아서다. 양쪽 좌석이 중앙을 바라보는 객실 구조는 분명 모두를 위해 만들어진 런웨이가 틀림없는데 거기서 워킹 한번 못해보고 내려야 한다니. 이 많은 승객이 역과 역 사이에 갇혀, 내 관객이 되어줄 텐데 독백 한번 못해보고 내려야 한다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하철 광인은 내가 놓친 기회를 잡은 비범한 존재이다. 설령 그가 “예수 믿으라!”를 불쾌하게 반복하는 천국 전도사일지라도, 특정 정치인에게 투표할 것을 강요하며 막말을 일삼는 태극기 할아버지일지라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하철 광인을 ‘악당파’와 ‘개성파’로 분류할 수 있다면, 내가 애착을 가지는 쪽은 단연 개성파로 불리는 이들일 것이다. 금빛 갑옷을 입고 말없이 승객들을 노려보는 ‘자르반 4세 할아버지’나 2PM 노래를 부르며 “쳇바퀴 돌 듯이” 텀블링하는 ‘4호선 2PM남’ 같은 유명한 무명인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이 개성파 광인들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진 않지만, 기이한 행색과 행위로 공공의 질서를 해친다는 합의로 탄생하고, 무단 촬영물을 통해 알려진다. 그러니까 이들은 냄새나고 더러운 폐지로 겉옷을 만들어 입어서, 남자인데 여자처럼 꾸미고 다녀서, 알 수 없는 문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큰소리로 읊다가 ‘광인’이라 불린다. 이것은 무척 부당하나, 지하철이라는 무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다!’를 선언하는 이 비범한 존재들을 달리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뭘 모르는 자들을 딱하게 여기며 광인이란 말에 애착을 느낄 뿐. 가수 미나는 2002년 한국에 등장한 또 하나의 광인이었다. 그 당시 한국에서 미치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힘들었겠지만, 내 눈에 미나가 그 수많은 광인 중 가장 광인처럼 보였던이유는 그의 정체성이 ‘월드컵 미녀’였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란 개념이 없던 그 시절, 중학생이던 내 눈에 그는 마치 땅속 벙커에서 한일 월드컵만을 기다렸다가 등장한 선전용 무기 같았다. 탱크톱으로 리폼한 붉은악마 티셔츠와 하체를 감싸듯 두른 태극기 스커트는 그 로봇에 치밀하게 고안된 디자인이나 다름없었다. 저 사람은 뭘까? 어른이면 다 번듯한 직함을 갖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그의 존재 방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 역시 열광하면서 트집을 잡았다. ‘어떻게 신성한 국기로 옷을 만들 수 있냐’, ‘숭고한 월드컵 정신을 훼손하지 마라’…. 하지만 미나는 다른 광인들의 말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그저 열심히 응원하다 ‘월드컵 가수’ 미나로 변신했다. 미나의 1집 타이틀곡 <전화받어>는 여성 발라드 그룹 키스가 부른 동명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편곡을 통해 미나의 섹시한 이미지를 담아냈다. 강렬한 신시사이저가 이끄는 노래는 다이얼 누르는 소리와 통화 연결음과 같은 효과음이 곳곳에 악센트로 배치되어, ‘니가 먼저 만나자고 내 옆구리 쿡 찔렀지, 내가 먼저 만나자고 니 옆구리 쿡 찔렀니’ 같은 다소 노골적인 구어체 가사와 만나 바람 피운 연인과의 통화라는 테마를 풍부하게 구현했다. 미나의 이름 앞에 붙은 ‘월드컵’이라는 수식을 뗄 수 있을 만큼 실로 성공적인 데뷔곡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광인에게서 광기 이외의 것을 잘 보려 하지 않는다. 한때 월드컵 미녀였던 그는 ‘가수’가 아닌 ‘섹시 가수’로 불렸다. 사람들은 그에게 뮤직비디오에서의 노출 수위, 축구선수와의 연애 경험, 실제 나이 같은 것들을 궁금해했다. 위문 공연 도중 관객들에게 계획적인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밝혀도 ‘소속사가 자작극을 벌인 것 아니냐’며 그것이 바로 섹시 가수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말했다. 광인으로 불리는 이들은 모두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는 순간들을 거치며 진정한 광인으로 거듭난다. 2004년, 미나는 <돌아>라는 곡을 내며 세상에 원하는 것이 이것이냐고 묻듯 스스로 광인임을 자처한다. ‘온 세상이 도니까, 덩달아 나도 돈다’라는 내용의 노래는 ‘지구가 돈다고 말했던 사람 코페르니쿠스’라는 웃긴 가사로 유명하지만, 한줄 한줄 뜯어보면 세상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불리는 이들의 슬픔이 절절하게 담긴 에세이 같은 곡이다. <돌아> 에서 미나는 너무나 시끄러운 세상에 가슴이 답답한 나머지 어둠 속을 거닌다. 세상이 도니까 사랑도 돌고, 불빛도 돌고, 나처럼 외로운 사람들을 보니 눈물도 핑 돈다면서 열심히 어깨와 골반을 돌리며 춤을 춘다. 우리는 별난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들을 어떻게 구분할까? 아니, 그보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확신할까? 나는 이제 미친 것과 슬픈 것을 구분할 수 없고,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더는 공감할 수 없어 조용히 춤을 연습한다. 언젠가 나의 무대가 될 지하철 안에서 조금씩 골반을 움직이며.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그 자연이 연약한 불순물에게

여행지에 줄곧 머물던 홍상수의 세계에서 ‘집’은 어느덧 주요한 공간적 거점으로 자리해왔다. 근작들을 돌이켜봐도, 집은 불확정적인 길만큼이나 우연과 비밀, 뜻밖의 긴장감을 품거나 일으키며 중의적 활동을 자극하는 곳이다. 떠들썩한 방문객들이 모두 떠난 후, 혼자 남겨진 나이 든 시인이 옥상에 올라 양주를 마시던 집(<우리의 하루>), 엄마와 외국인 애인이 위태롭게 숨바꼭질하듯 드나드는 남자의 집(<여행자의 필요>), 2층으로 올라간 삼촌과 교수의 성적인 교류를 암시하던 집(<수유천>). 지극히 일상적인 터전은 그곳에 불쑥 등장한 존재의 궤적과 기운으로 미지의 구조를 열고 은밀하고 낯선 정념의 활기를 허용한다. 말하자면 그곳은 울타리가 완고하지 않은 집이다. 그러한 속성은 거주자가 대개 이런저런 사연을 안고 혼자 산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가장 이례적인 면모는 그 집이 ‘가족’의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또렷이 환기되는 어머니,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과 그의 아내, 그리고 이들의 딸들. 이 영화에서 집은 이들 삼대의 초상이자 아들이 뜨거운 효심으로 어머니를 위해 짓고 가꾼 곳으로, 어머니의 수목장을 치른, 거대한 어머니의 무덤이기도 하다. 둘째 딸 준희(강소이)가 이곳에 남자 친구 동화(하성국)를 데려온 날, 첫째 딸은 우울증에 걸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채 방 안에서 가야금만 튕기며, 시인이기도 한 엄마는 여느 날처럼 집을 나서 일터로 향한다. 도입부에서 동화는 집의 위용에 놀라 말한다. “집이 너무 크다. 집이 저런 건 줄 몰랐어. 좋은 집이구나.” 물론 홍상수는 차들이 소음을 내며 달리는 도로의 아슬아슬한 가장자리에서 준희와 동화가 화면 오른편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응시할 뿐, 그들이 주시하는 집의 규격화된 형상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이후에도 이 집의 총체적인 외관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화면을 빠르게 지나가는, 촬영 현장에서 통제했을 리 없는 차들의 실재성은 그 한가운데 놓인 두 인물이 화면 밖,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의 대상에 사로잡힌 상태와 조응하며 이 장면에 기묘함을 싣는다. 신기하게도 이 순간, 둘에게만 보이는 프레임 바깥의 집은 화면 속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의 위협적인 실재성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로부터 보호된 ‘안’처럼 감지된다. 그러니까 동화의 말은 단지 집의 크기에 대한 반응이기보다는 그 ‘안’의 견고한 평온함을 향한 감탄처럼 들리기도 한다. “집이 저런 건 줄 몰랐어”라는 알쏭달쏭한 대사로 “저런” 집을 가져본 적 없다는 속내를 털어놓은 동화는 이제, 연인을 따라 도로와 그 집을 가르는 선을 넘어가볼 것이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동화와 함께 그 ‘안’을, “저런” 집의 토대를 관찰하는 동시에 정체 불분명한 방문객,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변변한 직장 없이 시만 쓰는 남자를 ‘안’의 시점으로 탐색하게 된다. 계획 없이 동화와 마주친 아빠는 딸의 연인을 기꺼이 집 내부로 초대해 집을 둘러싼 자연 곳곳을 소개한다. 언니는 동생과 남자 친구의 여정에 별 저항 없이 동행한다. 일하러 간 엄마는 집에 돌아와 사위에게만 해준다는 닭백숙을 대접하기로 한다. 동화와 이들 사이에 종종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들의 공기는 극적으로 확대되지 않는다. 동화가 새로운 환경을 구경하는 동안, 이 가족은 대체로 동화를 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과정에서 동화에게 던져진 가족들의 질문과 그의 대답, 남자 친구의 성격과 태도에 대해 부연하는 준희의 말로 우리는 ‘하동화’라는 사람 자체보다는 그가 지향하는 인간형에 근접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는 눈이 좋지 않지만 “약간 흐릿한 것도 괜찮”게 여긴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는 이유에 대해 준희 아버지와 언니에게 사뭇 다른 뉘앙스로 답한다. 그는 변호사인 부유한 부친으로부터 독립해서 가끔 결혼식 동영상을 찍으며 “살 만큼만 벌며” 산다. 그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죽음이 있어서 삶이 덜 부담스럽다고 여긴다. 그는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느끼고 감사하면 된다는 믿음을 설파한다. 무엇보다 그는 시를 쓰며, 중고 자동차를 몬다. 동화가 발화하는 생각이나 표출하는 자의식을 보건대, 그는 그간 홍상수 세계에 등장해온 남자들의 계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그가 놓인 상황이다. 그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에게 구애하거나 홀로 사는 여인의 집에 방문한 것이 아니라, 3년이나 사귄 여자 친구의 (적어도 겉보기에는) 더없이 안정된 뿌리인 단단한 가족제도와 덜컥 마주한 상태다. 이 영화가 단출한 전개에도 우리를 종종 불안하게 한다면 세속에, ‘일반’에 저항하는 제스처를 소심하게 반복하는 한 남자가 예의 바른 미소로 튼튼한 화목을 자랑하는 가족의 형상 안에서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우리의 호기심을 조마조마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닭백숙과 다양한 술로 가득 채워진 ‘가족 식탁’을 둘러싸고 드디어 모두 모인 자리, 촘촘히 붙어 앉아 한 공기를 나눌 수밖에 없어진 다섯 사람을 카메라는 눈길을 피하거나 도망갈 틈을 마련하지 않는 프레임 구도에 가두고 지켜본다. 이 대목의 초입에는 숏 하나가 불쑥 끼어든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자, 요리를 마치고 동화 옆자리에 앉은 준희의 엄마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누가 왔나 짖고 그래?” 그러자 가족들의 장면은 갑자기 집 밖, 철창 속 개가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짖는 장면으로 이동한 뒤, 별다른 사건 없이 다시 집 안으로 돌아온다(우리는 이 개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 영화 초반, 준희의 아빠는 동화에게 산속 집에서 침입자를 감시하는 개의 필요성을 잠시 언급한 적 있다). 이 숏은 다소 농담처럼 삽입되어 금세 잊힐 수도 있겠지만, 뜬금없는 강렬함과 절묘한 위치에 의해 이 집과 그 토대인 자연을 달리 체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족 장면 사이에 삽입된 개 장면은 이 집의 단란함이란 실은 사나운 방어의 산물임을 새삼 일깨운다.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공언하는 집에서 어쩐 일인지 이 개는 자연의 일부로, 혹은 가족의 일부로 존재하는 대신, 철창에 갇혀 집을 지키는 일에 복무한다. 그 개가 가족들만의 식탁에 출현한 불청객을 감지한 것일까. 개 장면은 목청 높여 이처럼 화기애애한 가정의 폐쇄성을 환기하는 것일까. 닭백숙 만찬 장면의 희극성에는 가족 스릴러의 얼룩이 미약하게, 짓궂게 묻어난다. 둘째 딸의 남자, 이 연약한 불순물은 호의로 치장한 가족 식탁의 공고함을 버텨내지 못한다. 엄마는 동화의 분신과도 같은 중고차가 안전하지 않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 말은 물론, 동화의 차만이 아니라 동화에게 꽂힌다. 동화가 과장된 음성으로 암송하는 자작시나 고집스레 내세우는 소박함의 가치와 감성에 가족들은 환한 얼굴로 응하지만, 쉽게 수긍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최소의 물적 조건으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는 준희의 언니가 앞선 장면에서도 시종일관 내뱉었던 “아버지가 뒤에 있잖아요”라는 말에 또다시 가로막힌다. 아버지라는 경제적, 혈연적, 정서적 토대. 동화는 이 말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이고, 언니는 동화의 이상을 조롱하는 투로 사용하지만, 한때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나 지금은 실업자로 부모 집에 얹혀사는 언니나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을 자부하는 준희도 동화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가 뒤에 있다’라는 말은 인물들이 얽매인 숨 막히는 덫이자 언제든 돌아갈 안전장치로 이 세계가 떨쳐낼 수 없는 끈질긴 주술처럼 영화를 내내 맴돈다. 홍상수는 이 말이 상기하는 구속력과 안정성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채로, 그것이 고고하고 단란한 인간사의 표면에 일으킨 균열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며, 점잖은 표면이 잠재하던 경박하고도 일견 솔직한 힘의 흐름을 수면 위로 끌어낸다. 만취한 동화는 오랜 콤플렉스를 자인하듯 폭발하며 가족 장면에서 흉하게 퇴장한 후, 깜깜한 방에서 혼자 깨어난다. 닫힌 창밖에서는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어둠 속에서 계단을 내려와 두개의 문 앞에서 머뭇대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은 작은 컨테이너 내부에서 준희의 아빠와 엄마 단둘이 이어가는 술자리 장면으로 이행한다. 부부의 술자리 광경은 그러나, 그 속내가 편하지 않다. 이들은 앞선 닭백숙 장면에서 동화에게 보인 친절한 얼굴과 충돌하는 매몰찬 말들로 동화의 면모를 해부하는 중이다. 극단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뿐 삶의 치열함을 모르며, 무엇보다 시인으로서 재능이 없다는 이야기. 동화가 집 현관을 나오는 모습이 잠시 삽입된 후, 그에 대한 부부의 평가가 한층 신랄하게 계속된다. 그가 바람둥이 유형에 들어맞는다는 말은 근거 없는 악담에 가깝고, 변호사 아버지의 역량 중 무엇도 물려받지 못했다는 말에는 부부 자신의 허영과 욕망도 비친다. 그런데 이렇게도 자비 없고 편견에 찬 장면이 어쩌면 이토록 안온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딸의 연인을 잘근잘근 씹는 험담의 강도와 달리, 비좁은 공간에서 부부가 주고받는 말의 리듬과 작은 움직임들과 어떤 습관들은 오래된 관계에서만 나오는 느긋함과 친밀감으로 이 장면을 감싼다. 알코올과 담배 연기에 젖은 이 순간의 신기한 튼실함과 쉽사리 훼손되지 않을 느슨한 활기는 실제 부부인 권해효와 조윤희가 이들을 연기한다는 영화 밖 사실과도 연관될 것이다. 앞서, 준희의 아빠는 동화에게 이 컨테이너가 자기만의 아지트라며 남자들 공통의 로망을 넌지시 상기하지만, 이 공간이 딸의 못마땅한 연인, 동화를 허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집보다도 은근하고 모질게 타자를 소외시키는 가족의 동굴이다. 어두운 숲길을 걷던 동화는 컨테이너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기타 선율에 이끌리지만, 문을 열지 않고 불쌍한 몰골로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자리를 뜬다. 그 빛과 선율의 평온한 기운에 자신을 겨냥한 혹독한 판단의 말들이 녹아들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영화 초입에서 준희 할머니가 묻힌 나무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절하던 동화의 호기로움은 오간 데 없다.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녹음이 우거진 숲과 노을 지는 하늘은 아름답지만, ‘그 자연’이 세속을 초월한 풍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자연은 타인이 넘보거나 공유하기 어려운 한 가족의 끈끈한 유대와 문화, 이들의 경제적 여력을 증명하는 커다란 가족 정원이며, ‘자연’스럽게 기세를 뻗으며 확장된 ‘안’이기도 하다. 숲속을 헤매던 동화가 핸드폰 조명으로 초록빛 나무에 핀 꽃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대목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을 화면에 전파하고, 벤치에 누워 밤하늘로 향한 그의 얼굴에 과감하게 다가간 줌의 신묘함은 분명 촬영 현장에서 자연이 일으킨 감흥일 것이다. 다만 영화는 자연 자체보다 그 안에 자리한 사람들의 실루엣, 실은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옆모습과 뒷모습, 이들 관계의 거리와 각자가 놓인 심리적, 물리적 상태에 시선을 둔다. 그 자연은 인간사와 결속된 것이다. 요컨대, <수유천>에서 오롯이 빛나던 달의 자태는 복잡다단한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의연히 일깨우는 자연이며 인간과 분리된 장면으로 영험한 존재감을 발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 어딘가에서 나타난 전임(김민희)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지시하던 비가시적인 영역은 그에게만 열린 자연의 지속성을 신비롭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산행 말미, 자연이 동화에게 준 건 준희가 재차 말하던 달의 어여쁨도, 닭백숙 장면의 수치를 씻어낼 해방감도 아니라, 팔에 돋은 시뻘건 염증이다. 산길을 내려오던 동화가 프레임을 빠져나가자마자, 컴컴한 화면은 그가 넘어지며 내지른 고함으로 요동한다. 카메라는 이에 무심한 자연처럼, 혹은 이 사고를 모른 채 편히 잠들었을 준희의 가족처럼, 동화가 일으킨 소란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수유천>에서 우리가 볼 수 없던 프레임 너머의 자연이 전임에게 충만함을 안겨 그를 다시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면,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그곳은 동화를 밀어내 쉽게 아물지 않을 육체적 상처를 남긴다. 팔에 난 상흔이 밝은 빛 아래 선명하게 각인된 이른 아침, 동화는 ‘그 자연’으로부터, 강고한 가족성의 울타리로부터 도망친다. ‘그 자연’과 가족성을 함께 굴러가는 톱니바퀴로 바라보는 영화의 통찰력, 그 둘을 맞물려 인간과 제도를 다면적으로 꿰뚫는 영화의 시선은 유머러스한데, 판단을 배제하고 통렬함을 유지하는 그 눈의 감각은 무서운 것이기도 하다. 도망친 동화는 이제 어디로 향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가 준희의 집을 서둘러 떠나는 모습에 이어 우리가 마주하는 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중고차가 도로에 선 장면이다. 한 남자의 자의식을 대변하던 낡은 차가 사각의 프레임에 막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차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자가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중얼댄다. “이제 이 차는 좀 팔아야겠다.” 가족들의 의구심에 차의 의미와 가치를 떳떳이 주장하던 동화에게 이보다 처량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나름의 자부심으로 버티던 그의 기동력이 한순간 힘을 잃고 주저앉은 것만 같은 이 대목에서 카메라는 이미 좁아진 그의 지평을 더 축소하려는 것처럼, 앞좌석에 앉은 그를 향해 줌을 당겨 시간을 정지시킨다. 동화는 닭백숙 장면에서 언니의 비아냥에 맞서 화면을 휘젓던 운동성과 목소리를 잃고, 흐릿한 입자로 화면에 흩어진다. <수유천>의 결말에서 프리즈프레임된 전임의 환한 이미지는 그의 활동성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시도로 느껴지지만,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고장난 차 안에 덩그러니, 뿌옇게 붙박인 동화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애인의 가족에게도, ‘뒤에 있는 아버지’에게도 갈 수 없는 도로 위에 고립되어, 유약하고 희미한 존재감으로 움츠러든 개별자의 초상. 준희의 부모가 동화에 대해 자기 것이 아닌 생각을 마치 자신에게 나온 것인 양 떠든다고 평할 때, 그 힐난에 얼마간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연인의 집에서 동화가 지나온 성기고 고단한 행로를 정교한 밀도와 예리한 직관으로 따라온 영화는 그 끝에서 비로소 동화의 것일 수밖에 없는, 그가 홀로 곱씹을 삶의 곤궁함과 쓸쓸함을 길어내고 만다. 그 감정의 파고에 깊이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뷰] 카메라 앞에 서면 부담이 사라진다, <폭싹 속았수다> <약한영웅 Class 2> <멜로무비> <24시 헬스클럽> 배우 이준영

2025년 봄은 바야흐로 이준영의 봄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 공개된 <멜로무비>를 시작으로 <폭싹 속았수다>와 <약한영웅 Class 2>가 연달아 큰 호응을 얻었고, 각 작품 속 이준영의 호연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준영의 얼굴과 이름을 재확인하게 만들었다. 그는 <부암동 복수자들>의 수겸 학생이자 의 탈영병이었고, <마스크걸>의 데이트 폭력범인 동시에 <모럴센스>의 순박한 마조히스트였다. 새삼스럽지만 이준영은 보이 그룹 유키스로 데뷔했고, 배우 활동 중에도 얼마간 아이돌 생활을 병행했다. 그렇게 이준영이 지난 9년간 축적한 필모그래피는 배역에 완전히 동화돼 자신의 개성을 지울 줄 아는, 카메라 밖 자아를 작품 안으로 틈입시키지 않는 20대 남성배우의 탄생을 입증했다. 현재 KBS2 수목드라마 <24시 헬스클럽>을 통해 코미디 근육까지 과시 중인 이준영이 <씨네21>을 찾았다. 여름의 초입, 이준영이 회상하는 지난봄과 채비 중인 한여름의 계획을 전한다. - 지난 4개월간 연달아 네 작품이 공개됐고 각 작품이 흥행한 것은 물론 배우 이준영의 연기가 모두 화제를 모았다. 교만해지지 말자고 끊임없이 되뇐다. 이런 반응이 올 줄 예상치 못했고, 이런 반응을 경험해본 적도 드물다. 작품들이 공개되기 이전 이준영의 초심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금성제, 박영범 등 캐릭터의 이름을 시청자에게 각인했다는 점도 주요한 변화다. 내 얼굴을 다방면으로 활용해 사람들에게 혼란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직업의 장점 아닐까. “이 배우가 얘였어?”라는 반응을 어느 때보다 많이 접하고 있어 배우로서 뿌듯하다. - <폭싹 속았수다>와 <약한영웅 Class 2>,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를 동시에 촬영했다고. 주변에서 만류했을 법한 업무 강도인데 각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가 분명했나 보다. “준영씨만 괜찮다면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말씀해준 제작진의 양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스케줄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그들의 세상에서 쓰임이 확실하다면 몸이 고단한 건 나중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 당시에 연기도, 제안받은 작품들의 대본도 하나같이 재밌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흥미와 도전정신, 약간의 걱정을 안고 촬영을 마쳤다. - 복잡한 스케줄을 오가는 동안 혼란은 없었나. 캐릭터들이 시대도, 계급도, 나이도 전부 다르다 보니 이동할 때마다 상기하는 과정이 필수였다. 한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이동할 때 보통 서너 시간 정도 소요됐다. 차에 타자마자 대본을 점검하고 이전에 찍어둔 촬영본을 모니터링하며 감정선을 복기했다. 30분 정도 쪽잠을 자며 체력을 보충한 후 근처 사우나에서 급히 씻고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 기회에 스태프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맛집도 많이 다녔다. 힘들지만 전국을 여행하니 재충전이 되더라. - 이전에는 연기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배우 생활 초창기에 모니터링을 하던 중 연기가 아닌 카메라에 비친 얼굴을 신경 쓰는 나를 발견했다. 배역에 대한 존중이 없어지는 것 같아 이후엔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는다. 액션과 컷 사이에선 무얼 해도 합법이다 - <폭싹 속았수다> 속 금명(아이유)과 영범의 이별 신이 명장면으로 널리 회자됐다. 7년을 사랑했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정작 작품 내에서 두 사람이 연애하는 장면은 적다. 묘사되는 순간이 적을수록 장면마다 감정을 켜켜이 쌓아올리는 일이 배우에게 요구되는 몫일 터. 이별 신에 이르기까지 영범의 감정선을 어떻게 세분화하고 구체화했나. 서로 툴툴대거나, 떠나려는 금명을 영범이 붙잡는 식의 장면이 많다 보니 둘의 사랑을 상상으로 채워야 했다. 그래서 아이유 배우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자주 시간을 보내며 둘의 관계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가까운 사이만이 보일 수 있는 말투, 표정, 몸짓 등을 함께 연구했다. 영범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감정의 강도를 수치화하는 작업도 많은 도움이 됐다. 이를테면 이 신에선 10만큼, 다음 신에선 30만큼 영범이 감정을 표출하는 식으로 감정에 점수를 매기고 나니 나아갈 길이 보다 명확해졌다. 이별 신을 찍을 때 어쩐지 영범의 눈이 슬픔으로 퉁퉁 부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분장으로 만들 수 없는 눈이라 차 안에서 미리 10분쯤 엉엉 울고 카메라 앞에 섰다. - 완전한 선인도 악인도 없는 것이 임상춘 월드의 특징 아닌가. 이 점을 임상춘 작가가 주지하던가. 별다른 코멘트는 없었다. 다만 작가님이 “준영 씨가 잘해줄 거라 믿어요”라고 말씀해준 적은 있다. 작가님의 작품을 전부 재밌게 본 입장에서 이 응원이 약간 부담으로 다가왔다. 촬영 전엔 내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촬영 후엔 내가 만족할 만한 연기를 못한 것 같아 후회한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할 때만큼은 그 부담이 사라진다. - 오히려 연기하는 순간에는 상념이 준다는 점이 흥미롭다. ‘액션’과 ‘컷’ 사이에선 정해진 약속만 지키면 무얼 해도 합법이지 않나. 그래서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기려는 마음이다. 캐릭터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찰나의 자유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 영범을 연민하게도 되던가.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여자가 첫사랑이고, 그 여자와 자신의 생일날 헤어진다. 어쩌면 가장 비참한 결말에 놓인 인물이다. 늘 금명을 그리워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날을 반복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흘러 50대가 된 영범이 어머니에게 만족스럽냐며 원망을 퍼붓는 장면을 찍을 땐 실제로 몸 한구석이 얼마간 아팠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영범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동정할 만한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새로웠다. (웃음) - <약한영웅 Class 2> 속 ‘연금대전’이라 불리는 연시은(박지훈)과 금성제의 액션 시퀀스가 큰 화제였다. 5일 정도 나누어 촬영했다. 첫 사흘은 연속해 찍고, 마지막 이틀은 얼마간 간격을 두고 촬영했다. 오래 싸우다 보면 성제도 지칠 테니 기진한 듯한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대기시간마다 뜀뛰기를 하는 등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특히 시은과 싸울 때 성제가 느낄 법한 희열에 집중했다. 성제가 현탁(이민재)과 싸울 땐 표정 변화가 거의 없다. 현탁이 전투 불능 상태에 놓이자 최소한의 관심마저 거둔다. 그런데 시은과 싸울 땐 내내 웃는다. 성제 또한 이렇게까지 사력을 다해 싸울 기회를 고대했다는 태 도로 임했다. - 한준희 감독은 언제나 이준영의 댄서 경력이 액션에 도움을 준다고 평가하더라. 인터뷰마다 감독님이 그 말씀을 하시는데, 동의할 수 없다. (웃음) 실제 춤처럼 액션을 하면 오케이 안 하실 거다. 순서를 외우거나 리듬감을 요하는 동작이 비슷할 순 있겠다. 춤과 달리 액션은 실제로 주먹이 오고 간다는 타격감이 있어야 하지 않나. 를 찍을 당시 내 주먹이 가짜처럼 보이는 게 아쉬워 이종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 “낭만 합격”은 어땠나. 대사만 봤을 땐 막막했을 것 같다. 쉽지 않았지만 그 대사를 누가 받는지를 생각하니 어렵지 않았다. “낭만 합격”은 준태(최민영)의 투지에 감화된 성제의 감정이다. 그래서 준태에게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 “낭만 합격”의 촬영도 준태의 혈투 시퀀스 이후에 이루어졌다. 현장에 머물며 앞 촬영을 함께 지켜봤다. 준태와 최민영 배우에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 배역으로서 인물을 응시할 때 어떤 점을 유의하나. 금성제를 예로 들면 나백진(배나라)을 바라볼 땐 눈에 초점이 없는 반면 연시은을 바라볼 땐 눈에 살기가 형형하다. 백진은 언제든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백진이 아무리 군림하려 들어도 성제는 백진 밑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연기하니 눈에 초점이 자연스레 없어졌다. 반면 시은은 성제에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차지하고 쟁취하고 싶은 상대다. 그런데 시은을 가질 수 없으니 성제가 얼마나 애가 탔겠나. (웃음) 눈이 돌 수밖에 없다. - <멜로무비>의 오충환 감독이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네 캐릭터의 감정 진척 속도가 전부 다른데, 그중 시준의 속도가 가장 느려 연출자로서 걱정했다고 한다. 배우 본인도 유사한 고민을 했을까. 이미 관계가 일단락된 상황에서 시작하는 멜로는 처음이라 쉽지 않았다. 시준이 쉽게 내보이지 않는 무뚝뚝한 감정이 작품 후반부에 해소되기 위해 내 연기가 어떤 설득력을 지녀야 할지 감독님은 물론 전소니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히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준을 바라보는 게 한결 편해졌다. - 시준과 주아(전소니)의 사랑에 집중한다면 <멜로무비>는 두 연인의 이별 방도에 관한 연애담이다. 시준과 영범은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은 지난 사랑을 털어내고 자기 삶을 살고 있는데, 이 남자는 과거에 매몰돼 현재의 삶마저 제대로 살지 못한다. 그 감각 때문에 또 한번 아팠다. 지금껏 연기한 배역 중에 시준이 가장 세심한 남자였다. 그 세심함을 사람들이 잘 몰라준다. 대사 중 “남들이 그만두라 하기 전에 내가 내 주제를 알고 그만둬야지”는 보자마자 과거의 내 맘 같아 대본을 읽을 때부터 눈물이 났다. 자존감이 바닥이라 그렇지 우리 시준이, 예쁜 구석이 있는 놈이다. - 현재 방영 중인 <24시 헬스클럽> 속 도현중을 통해 작심하고 코미디 연기를 보이는 중이다. 웅장한 저음과 잔뜩 기합이 들어간 말투를 구현했다. 실제 헬스트레이너인 친구의 특성을 역이용해 만든 캐릭터다. 가늘고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친구인데 그 목소리로 운동을 가르칠 때 재밌길래 이 모습을 반대로 가져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친구에게 저음으로도 말해보라고 한 후 그 톤으로부터 현중의 목소리를 만들어갔다. 현중이 워낙 개성이 넘치기 때문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잡아야 이 캐릭터를 우주로 날려보내지 않고 땅에 묶어둘 수 있었다. - <모럴센스> 때도 한 차례 증량한 바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몸을 한껏 키웠다. 나를 포함해 정은지, 이미도, 이승우 배우 모두 촬영 내내 운동 스케줄과 식단을 철저히 준수하는 훈련의 시간을 보냈다. 보통 촬영 중엔 맛집을 가거나 맛있는 음식을 싸오기도 하는데, 이번 촬영 땐 모두가 식단을 관리하는 바람에 다들 도시락에 닭가슴살밖에 없더라. 대기 중에도 실제 세트가 헬스장처럼 만들어졌으니 내내 운동만 하고. (웃음) 춤추고 그림 그리며 삶을 즐긴다 - 댄서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한창 쓰다가 중단한 것으로 안다.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이야기가 아쉽진 않나. 전혀. 시나리오를 쓰는 내내 아직 글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야기를 만들기엔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기도 하고. 기회가 된다면 시나리오 작법을 제대로 배워 이야기를 완성하고 싶다. - 댄스 중에도 프리스타일을 특히 선호한다고 들었다. 연기를 할 땐 대본과 디렉션 등 정해진 규칙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 춤을 출 때만큼은 제약이 덜한 프리스타일을 선호하는 건가. 처음 듣는 노래에 맞춰 프리스타일 추기를 즐긴다. 아이돌 활동 시절엔 짜인 군무를 추다 보니 내 만족과 내 멋에 따라 움직이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프리스타일이 좋다. 4분여의 시간을 온전히 내 몫으로 누릴 수 있으니까. 올해 초에도 프리스타일 힙합 배틀에 출전했다. 많이들 배틀이 댄서간 결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춤꾼 사이의 소통이자 교류라 보는 편이 정확하다. 상대가 선호하는 무브먼트, 동작에 따라 선호하는 음악을 어떻게든 눈에 담고 이를 연습실에서 내 방식대로 소화하는 과정이 즐겁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탈출구다. - 입대 전 앨범 발매를 준비 중이라고. 모처럼 가수 이준영도 볼 수 있는 건가. 회사 A&R팀과 함께 열심히 회의 중이다. 곡도 많이 받았다. 이준영의 라스트 댄스랄까, 이 앨범으로 마지막 불꽃을 불태워 후회 없이, 미련 없이 20대를 보내주려 한다. - 그렇다면 이번 여름엔 앨범 준비로 보낼 예정인가. 사실 곧 차기작을 확정할 예정이다. 열심히 작품을 촬영하며 나다운 날들을 보낼 계획이다. - 이준영다운 게 뭘까. 요즘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불편하지 않아요?”다. 정말 달라진 건 그 점 하나다. 내 얼굴을 알아보는 분들이 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의 일상을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지는 못한다. 여전히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춤추고 그림 그리며 삶을 즐기는 중이다.

[기획] 배우가 서점으로 간 까닭은? - 출판사 사장님 박정민 배우, 그리고 작가가 된 배우들

지난 5월 첫주, <씨네21>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독자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씨네21>을 향한 여러 바람을 실은 답변 중 흥미로운 순위가 나왔다. ‘독자들이 뽑은 만나고 싶은 필자 베스트 5인’ 설문 1위에 작가도 평론가도 아닌 배우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그 주인공은 신인 시절 에세이를 묶은 책 <쓸 만한 인간>을 내고, 직접 출판사를 차려 어느덧 세권의 도서를 선보인 배우 박정민이다. 배우라는 이름 아래 감출 수 없었던 담백하고도 유머러스한 글솜씨뿐 아니라 출판 기획자로서의 안목이 밴 문장을, <씨네21> 독자들은 그의 연기만큼이나 지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배우이기 때문에, 영화를 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아마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일에 얽힌 소회를 쓸 때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 밖의 삶에 관해서라면 배우도 관객만큼이나 지난한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이 짐작은 다른 배우들의 글을 읽어볼 때 더 선명해질 것이다. 마침 올해 상반기 출판계는 배우들의 책으로 북적이고 있다. 한국 배우들이 쓴 소설, 일기, 에세이부터 외국 배우들이 저자로 나선 번역서까지 다종다양한 서적이 서점 매대를 채웠다. <씨네21>도 김민하를 잇는 곧 배우-작가의 고정 칼럼을 독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지면을 통해 그 적임자를 확인할 날을 기대해주시기 바라며, 최근 우리를 찾아온 배우들의 책을 소개한다. 무제 출판사 대표 겸 배우 박정민 인터뷰, 또 다른 출판사 대표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들에게 보내는 러브콜까지 부록으로 동봉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배우들의 책 소개와 무제 출판사 대표 겸 배우 박정민 인터뷰, 출판사 대표들의 러브콜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