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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베테랑2>까지, 제작사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 외유내강의 시작은 <짝패>였다. 당시만 해도 류승완 감독은 루키였고, 나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후 도의적인 차원에서 몸담았던 좋은영화사를 떠난 시점이었다. 후다닥 만들어진 프로젝트라 <짝패> 다음의 외유내강은 개점과 동시에 폐업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짝패>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됐고, 한국영화에 대한 해외시장의 니즈가 크지 않던 시절 해외 세일즈사의 주목을 받았다. 회사 경영에 대한 비전은 오히려 <짝패> 다음의 영화들을 통해 구체화했다. - 여러 차례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이후 <부당거래>와 <해결사>를 제작한 순간을 외유내강의 주요 분기점으로 꼽았는데. 다시 생각해도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더 밀어붙였어야 했다. 극장에서 다수의 관객과 만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과감해야 하는 여러 시도를 스스로 검열했는데, 이 작품만이 보일 수 있는 재미를 극대화했다면 덜 아쉬웠을 것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흥행 결과가 처참했다. 회사의 미래를 고민하던 중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의 원안을 받았고 나는 류승완 감독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해결사>를 제작했다. 류승완 감독과 따로 또 같이 작품을 만들며 회사의 행보를 본격화했다. 외유내강의 두 번째 분기점은 <군함도>라고 할 수 있다. 제작자와 감독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든 시기다. - <군함도>가 여러 의혹과 논란을 낳았던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나. 제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배웠다. 여론의 질타와 오해 혹은 여론에 의해 작품이 호도될 때 제작자가 자신의 작품, 배우와 스태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지금이라면 좀더 명민하게 대응했을 텐데, 당시만 해도 <베테랑>으로 외유내강이 많은 칭찬을 받은 직후라 당황한 채 사태에 놀라기만 하다 영화를 극장에서 내렸다. 아직 <군함도>를 선뜻 꺼내기 어렵다. 외유내강의 구성원 모두가 무의식 속에 서로를 향한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군함도>의 역사관을 포함해 작품의 공과(功過) 모두를 재조명할 시간이 오길 바란다. 신인감독이 영화를 계속할 토양 - 외유내강이 제작한 신인감독의 영화가 언제나 화제를 모은다. 지난 20년간 권혁재, 이상근, 필감성, 김성식 감독의 데뷔작과 김태용, 장재현, 최정열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을 제작했다. 이들 중엔 기존에 외유내강과 협업한 경험이 있는 감독도 있고, 외유내강과 처음 만나 작업한 감독들도 있다. 신인감독과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어떤 치열한 시간을 거치나. 외유내강엔 류승완이라는 대장 감독이 있다. 류승완이라는 기준점이 외유내강 작품의 퀄리티를 이끌어내는 장점인 동시에 모두가 힘겹게 넘어야 할 허들이다. 그리고 그 지점이 외유내강의 가장 큰 자부심인 퀄리티 컨트롤을 이끈다. 관객과 영화는 결국 드라마로 소통한다. 말도 안되는 영화는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로부터 온다고 믿고,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는 외유내강에서 기획할 수 없다.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신인감독들에게 늘 강조하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모든 장면이 명장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영화 하면 생각나는 시그니처 신이 하나만 있어도 성공이다. 결국 외유내강의 치열한 시나리오 개발 과정은 무얼 더할지가 아닌, 얼마나 덜어낼지를 고심하는 시간이다. 제작 과정에서 예상할 수 있는 어려움이 보인대도 프로덕션에 들어간 순간 일단 감독을 무조건 믿는다. 지금까지 연출가의 준비 상황이나 현장의 여건으로 인해 예상치를 끌어내지 못한 경우는 있지만 외유내강의 작품 중엔 최소 하한선 밑으로 떨어지는 작품은 없다고 확신한다. - 치열한 고투 끝에 세상에 영화를 내놓았을 때, 신인감독만큼 큰 희열을 느낄 것 같은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겐 각자의 취향과 고집이 분명하다.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감독이 디렉터스 체어에 앉기 전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할 때의 행복이 크다. 제작 단계에서 느끼는 희열의 단계는 몇 계단 더 있다. 감독이 원하는 캐스팅을 성사했을 때, 캐스팅과 시나리오의 조합으로 투자자를 설득할 때 등등. 현시점이 신인감독이 입봉할 수 있는 환경인지를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바꿔 말해 현재 업계 전반이 기성 제작사가 신인감독의 입봉을 책임질 수 있는 구조인지, 나 역시 또 다른 신인감독의 탄생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다. 간혹 영화인들로부터 ‘넥스트 000’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데, 답하기 어렵다. 일단 신인감독이 영화판 이외의 환경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시리즈를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혼재한 와중에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제작자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인지 걱정이 크다. - ‘한국영화의 위기’라는 헤드라인 아래 매번 영화인들이 분투했지만 그 속에서 지난 20년간 외유내강이 보여준 가시적인 성과가 크다. 2020년대만 놓고 이야기해도 <모가디슈>와 <인질>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 시점에 연이어 개봉해 흥행에 성공했다. <밀수> 역시 엔데믹 이후 급변한 여름 시장에서 많은 관객의 지지를 받았다. 악재 속에서도 외유내강은 ‘극장을 지키는 제작사’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었고. 본의 아니게 이렇게 흘러왔다. 회사 내부에서 의사 결정을 책임지는 나, 류승완 감독, 조성민 부사장이 지닌 극장 영화를 향한 순정이 크다. 영화는 콘텐츠일까. 만약 콘텐츠가 아니라면 나는 영화를 무엇이라 정의할까. 소비자가 영화를 정의하는 방식에 만족하는 작품을 만들려면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제작자로서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한 주제다. 지난 20년간 운도 좋았지만 어느 누구도 만들지 않았던 영화를 완성하려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아까 류승완 감독이 외유내강의 허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류승완 감독은 물 안으로도 가봤고 아프리카 내전 한가운데로도 들어가봤다. <탑건> 시리즈처럼 공중전만 남았다. (웃음) 프로덕션 차원에서도 완성도를 기한 도전이 많았기 때문에 눈높이가 높아졌고, 이를 제작 지원하는 경험이 누적되며 자사의 영화에 대한 기대 역시 자연히 높아졌다. 개인적으로 <밀수>는 더 잘되길 바랐던 영화다. 여성 제작자로서 여자들이 주인공인 멋진 영화를 만들어 흥행까지 만들어보겠다는 포부가 컸다. 재평가받을 구석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악마가 이사왔다>와 <휴민트> 미리 보기 - <악마가 이사왔다>가 올해 8월 공개될 예정이다. 극장 출구 조사, 인지도와 같은 소위 숫자로 귀결되는 데이터로 시장을 파악하던 지난 관례가 헝클어진 상황이다. 요 몇년 대형 투자배급사들과 개봉 전 논의한 전략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지금 분석할 수 있는 소비 동향은 관객이 기존 예측보다 훨씬 기민하고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 정도다. 한마디로 유행이 급속도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다행히 외유내강은 투자배급사에 손해를 끼친 적은 없다. 최소 본전이었다. 이 기조를 이어가려 한다. <악마가 이사왔다>는 여태껏 만든 영화 중 단연 마케팅이 까다로운 영화다. 그래도 단언하자면 작품의 엔딩을 포함해 꼭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다. 크랭크업은 2022년에 마쳤는데 이 작품을 극장에서 제대로 선보일 시기를 엄선하다 보니 2025년에 이르렀다. 이제 와 말하지만 지난해 6월에 공개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인사이드 아웃2> 예고편을 보니 어쩐지 싸하더라. 그때 극장에 안 걸어 천만다행이다. (웃음) 내년엔 <휴민트>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 지난해 외유내강 최초의 속편인 <베테랑2>가 개봉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처럼 세계관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외유내강의 작품을 연결해가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적 있던데. 현재 <베테랑3>(가제)의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이다. 카피도 나왔다. “나 이번에 제대로 돌아왔다.” <베테랑2>가 공개됐을 때 <베테랑>과 비교하던 긍정적, 부정적 반응 모두가 우리에게 귀한 자산이 됐다. 뻔하지 않은 작품을 만드느라 애썼다고 바라보던 쪽도, 나의 서도철은 이렇지 않다고 비난하던 쪽 모두 감사하다. 갈리는 반응을 접하니 <베테랑>이 다시 한번 초심의 통쾌함, 즐거움을 선사해야 맞지 않나 싶더라. 3편까지 이른바 ‘<베테랑> 페이즈1’을 마무리한 이후엔 외유내강의 세계관 안에서 별개의 작품끼리 교직하는 이야기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해치를 가지고 스핀오프를 만들어볼 수도 있겠고. 류승완 감독이 자신의 세계를 탐구할 동안 나도 외유내강의 신인감독들을 책임지며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려 한다. - 매해 영화계 상황이 요동한다. 매번 개봉작을 공개하는 과정은 달리 말해 영화의 의미를 달리 세우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을 보며 속으로 “톰 오빠 안녕”을 외쳤다. 한 인간이 영화산업에 일생을 갈아넣은 삶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으니까. 1편부터 30년 넘게 관객으로서 에단 헌트와 함께해온 모든 순간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젊은 친구들은 우선 러닝타임이 긴 것이 불만이더라. 이 반응을 접한 순간 소비자와 공급자간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면 나는 한없는 약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화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논의하기 전에 필름 메이커와 관객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영화는 일정 부분 문화적 허영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상영관에서 어깨를 맞대고 함께 웃고 울며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와중에 내 마음에 남는 무언가를 흔쾌히 즐긴 시간을 전시나 공연처럼 관람한 경험을 ‘인증’하는 현상으로 자리하면 좋겠다. 바라건대 그 영화가 한국영화였으면, 아주 솔직히는 외유내강의 작품이었으면 좋겠고. (웃음) 그래서 영화를 잘 만들어야 한다. 정신 차려야지. 외유내강 출신 감독들이 말하는 ‘외유내강’ 이상근 - <엑시트> 연출. <악마가 이사왔다> 개봉예정.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류승완 감독님과 연이 닿은 후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연출부로 합류했다. 이후 외유내강을 나와 몇몇 단편영화를 만들다 2015년에 시스템이 갖춰진 제작사에서 장편을 만들고 싶어 재입사했다. 그리고 <엑시트>가 탄생했다. 투자부터 캐스팅까지 외유내강이 가진 에너지가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과정이 모두 수월하게 풀렸다. 매 작업 모든 구성원이 합이 뛰어나 함께 시너지를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필감성 - <인질> 연출. <좀비딸> 개봉예정. “외유내강은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치열한 회의를 거친다. 반면 프리프로덕션에 들어가면 연출자가 자신의 의도를 최대한 구현할 수 있게 지지해주는, 고마운 제작사다. 좌고우면하지 않는 제작사 덕분에 온전히 연출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다. 창작 이외의 지점까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여러 제반 요소를 조율해주는 제작사다. 덕분에 배움의 순간이 많았고 감독으로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최정열 - <시동> <비질란테> 등 연출. 차기작 집필 중. “<시동>을 만들 당시 거의 1년간 매일 외유내강 사무실에 출근해 작업했다. 갈 때마다 류승완 감독님도 신인감독 못지않은 열정으로 창작에 열중하고 계셔서 큰 감동을 받았다. <시동>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십편의 영화를 만든 베테랑이 한데 모인 회사임에도 구성원 각자의 작은 아이디어 하나도 모두 경청하고 이를 영화로 발전시킬 여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촬영 기간 내내 제작사가 나를 한 작품의 연출자로서 신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국내뉴스] 새정부 추경안에 포함된 영화 할인쿠폰, 극장에 새바람 불어올까?

다가오는 7~8월에는 북적이는 여름 극장의 풍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지난 6월20일, 기획재정부는 ‘새정부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제2차 추경안을 편성했고 5대 분야의 소비 활성화를 위한 할인쿠폰 제공 사업에 778억원을 배정했다고 밝혔다. 5대 분야에는 영화 관람, 공연 예술, 미술 전시, 숙박, 스포츠 시설이 포함된 다. 해당 분야에 공급되는 할인쿠폰은 총 780만장으로 이중 영화 관람권에는 총 271억원, 450만장이 배정됐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 박스 등 멀티플렉스를 포함한 모든 영화관과 관련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해당 쿠폰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인당 최대 4번까지 할인받을 수 있다. 예산이 소진되면 혜택이 종료되는 방식으로, 현재 8월로 거론되는 영화 관람권 할인 쿠폰 지급일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쿠폰의 사용 기한 동안 정해지지 않았다. 영화계에선 영화 관람권 할인쿠폰 지급과 관련해 환영과 우려의 목소리가 오갔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관객이 영화를 관람할 때 사람들과의 교류가 동반되기 때문에 시장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면서도 “극장이 관객을 맞이할 준비가 잘되어 있는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다양한 작품이 걸려 있어야 관객들이 반복해 영화관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전처럼 대작 영화만 선보이기보다 관객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확보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다. 서지명 CJ CGV 홍보팀 팀장 또한 “전반적인 소비가 위축되면서 그동안 소비자의 영화 관람 또한 위축된 면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 쿠폰 제공 사업이 업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7월부터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슈퍼맨> <전지적 독자 시점> <좀비딸>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등이 개봉하고 이후 하반기에도 <주토피아 2> <위키 드: 포 굿> <아바타: 불과 재> 등 굵직한 작품의 개봉이 준비 중”인 상황을 전했다. 이어 영화 쿠폰 제공 사업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로선 준비 단계이지만 “언급한 작품들 외에도 관객들이 볼만한 콘텐츠들을 발굴하려는 작업을 계속 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커버] ‘뉴 쥬라기 시대’ 공룡들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 디지털부터 손끝까지,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 제작 비하인드 공개

고전적 장소, 진화된 기술, 다시 태어난 공룡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시리즈의 DNA를 품으면서도 한층 고도화된 방식으로 완성됐다. 실물 세트와 디지털효과, 고생물학과 상상력이 긴밀히 협업해 탄생한 ‘뉴 쥬라기 시대’의 제작 비하인드를 정리했다. 공룡들의 터전, 생 위베르 섬 생 위베르 섬은 팀 조라 베넷이 공룡의 DNA를 채취하기 위해 찾는 목적지다. 데이비드 켑이 쓴 각본에서 이곳은 “암석 지대와 해안 동굴, 초원과 폭포, 가파른 석회암 절벽이 어우러진 열대의 섬”으로 묘사된다. 상상 속 공간을 현실로 구현하라는 특명을 받은 로케이션팀은 전세계를 탐색한 끝에 코스타리카를 가장 유력한 후보로 선정했다. 그러나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의 후보지가 막판 변수로 떠올랐다. 그가 자신의 전작 SF영화 <크리에이터>를 촬영한 태국을 추천한 것. 태국의 원시적인 자연환경을 담은 사진을 확인한 제작자 패트릭 크롤리는 자체 조사를 진행했고 감독의 제안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작 총괄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다. 태국 현지 사진을 받아본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끝났네, 바로 여기야.” 움직이는 세트의 정점, 에섹스호 던컨(마허셜라 알리)의 선박 ‘에섹스’는 망망대해에서 팀원들의 집이 되어준 공간이다. 몰타 필름 스튜디오의 야외 수조에 설치된 실제 세트로, 영국의 특수장비 제작 전문업체 BGI 서플라이즈와 협업하고 <글래디에이터> 시리즈와 <그래비티> 등에 참여한 베테랑 특수효과 슈퍼바이저 닐 코볼드가 설계를 맡았다. 참고용 선박은 일본 도코하마 요트사에서 1980년대 제작한 고속 순찰정이었다. 고도의 기술이 동원된 이 세트는 실제 배가 다양한 해양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정밀하게 재현해낼 수 있었다. 선체를 좌우 45도까지 기울일 수 있었고, 태양 방향에 따라 회전도 가능했다. 그만큼 배우들도 몰입해서 촬영할 수 있었다. “움직이는 장치 위에서 연기하는 동안 바람 기계와 물대포에 끊임없이 맞아야 했지만 정말로 바다 위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마허셜라 알리) 다만 물은 후반작업에서 디지털로 추가되었다. 실제 바다를 담고자 제작진은 영국의 모션 컨트롤 전문 스튜디오 MOCO FX에 SOS를 요청했다. 지중해의 파도와 해류에 대한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하고, 바다의 역동성과 미묘함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공룡의 숨은 주역들 <쥬라기>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은 언제나 공룡들이었다. 이들의 위용을 새롭게 되살리기 위해 제작진에 주어진 시간은 단 6주.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를 현실로 만든 건 수천명의 유능한 VFX 아티스트들이었다. 여기에 <스타워즈> 시리즈와 <해리 포터> 시리즈 전편의 시각효과를 전담한 스튜디오 인더스트리얼 라이트 & 매직(ILM)의 전통 애니메이터들이 힘을 보태면서 본격적인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실사 촬영 현장에서는 실제 모형 제작의 명가, 존 놀런 스튜디오가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섬세하게 만들어진 공룡의 머리, 사지, 발톱 등이 조명과 배우의 시선 처리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일부 공룡은 모션캡처 퍼포머가 직접 연기를 맡기도 했다.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에서 벨로시랩터 블루를 연기했던 수석 퍼페티어 톰 윌턴이 이번에도 참여해 생동감 넘치는 동작을 구현해냈다. 모사사우루스부터 아퀼로스까지 화려한 공룡 라인업 <쥬라기 월드> 시리즈에서 첫선을 보인 백악기 후기의 ‘조스’ 모사사우루스가 이번 편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외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공룡 자문을 맡은 스티브 브루사트 에든버러대학교 고생물학 교수에 따르면 “고래 같기도 악어 같기도 한데, 사실은 그 무엇과도 다른 독특한 존재”다. “압도적인 크기, 속도, 힘을 강조한 새로운 모사사우루스는 피부와 근육 묘사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고 물과의 상호작용”도 매끄러워졌다. 이번 디자인은 타이거 샤크(범상어)에서 모티프를 따왔으며 초록빛이 감도는 회색 피부 위에 표범 무늬를 연상케 하는 패턴이 특징이다.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익룡 케찰코아툴루스도 변주되어 등장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거대한 비행 생물 중 하나이고. 날카로운 부리를 가졌다는 정보만 있어 상상력을 더해 완성한 캐릭터다.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은 디자인팀에 “현실성과 공포감을 동시에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쥬라기> 시리즈의 상징인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도 빠지지 않는다. 데이비드 비커리 VFX 슈퍼바이저는 이번 티렉스가 “훨씬 건강하고, 더 무겁고, 더 근육질이며, 황소처럼 강인하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무서운 공룡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트리케라톱스의 조상 격이자 작고 뿔 달린 초식공룡 아퀼롭스가 이번 편의 마스코트로 활약할 예정이다. 액션 스타 스칼릿 조핸슨의 도전 폭포는 인도에서 소수의 촬영팀이 담아온 실제 폭포 영상을 기반으로 VFX로 구현됐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통해 웬만한 액션 기술은 모두 섭렵했을 것 같은 스칼릿 조핸슨이 이번 작품을 위해 새로 배운 기술이 있다. 바로 레펠(암벽 하강)이다. 그간 무기와 군사 훈련을 포함한 다양한 액션 트레이닝을 받아온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고. 반면 헨리 루미스 박사 역의 조너선 베일리는 레펠 장면을 찍을 때 고소공포증을 숨기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절벽 속 신전의 비밀 원래 고대 신전은 데이비드 켑의 시나리오에 없었다.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이 <인디아나 존스: 마궁의 사원>을 오마주하고 싶어 그와 논의 끝에 포함한 공간이다. 하지만 이를 구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태국의 한 국립공원에서 제격인 장소를 발견했으나 해당 지역 규정상 내부 촬영 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 이 난제를 해결한 건 미술감독 앨릭스 캐러먼이었다. 그는 신전 전체 세트를 외부에서 제작한 뒤 부품별로 분해해 현장에 운반하는 방식을 택했고 덕분에 감독의 비전은 결국 스크린 위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에섹스호에서의 잊지 못할 3분 ‘스필버그 키즈’ 조너선 베일리는 에섹스호에서 헨리가 물에 빠지려는 조라(스칼릿 조핸슨)를 끌어올리는 장면을 촬영할 때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한다. “물대포가 얼굴을 강타하고 주위는 마구 흔들렸지만 내 안의 아이 같은 자아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스필버그스러운’ 3분이었을 거다.”

[인터뷰] 재미를 위한 최대치의 현실감, 제리 브룩하이머 제작자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 제작의 중심에 있었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가 이번에는 속 레이싱 서킷으로 손을 내밀었다. <탑건: 매버릭>의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연출을 맡고 브래드 피트가 직접 운전대를 잡은 는 단순한 속도감의 레이싱영화가 아니다. 제리 브룩하이머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그는 어떻게 서킷 위 레이싱을 실제 현장의 질감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려 했는지에 대해 풀어놓았다. - 는 아이맥스 영화를 긍정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어떤 계기로 포뮬러원(이하 F1)을 소재로 한 아이맥스 영화 제작을 결심했나. 시속 320km로 달리다가 80km까지 급감속하는 것만큼 짜릿한 건 없다. 여기에 엔진 소리, 음악이 어우러진 압도적인 사운드와 함께 거대한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구현하면 대단한 몰입감을 준다. 브래드 피트와 댐슨 이드리스는 영화에서 레이싱카를 직접 운전한다. 우리는 드라이버가 실제로 어떻게 운전하는지를 보여주려 했고 관객이 실제 F1의 세계로 들어간 듯한 경험을 하길 바랐다. 서킷에서의 장면은 그린스크린 앞에서 촬영된 것도 아니고 조작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두 실제다. - F1 레이싱을 영화화하는 데 제작 과정에서의 가장 큰 도전은. 어려웠던 점 중 하나라면 레이싱카 한대에 카메라 15대를 어떻게 장착하느냐는 문제였다. 배터리는 어디에 넣을 것이며 무게와 크기는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이번에 사용된 카메라는 <탑건: 매버릭>에서 사용된 카메라보다 3분의 1 정도 더 작았다. 제작팀은 차량 설계에 참여했는데 카메라 본체와 배터리를 분리해 장착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냈다. 그리고 원격 카메라 시스템으로 배우의 얼굴에서 다른 차량이 옆을 지나가는 것까지 부드럽게 패닝하는 장면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 레이싱 장면의 준비와 촬영 과정은 어떻게 설계되었나. 레이싱카를 운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넉달간 전세계 여러 서킷을 돌며 배우들을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일반 도로용 차량으로 시작해서 그다음 F4 차량, F3 차량으로 단계를 올려가다가 최종적으로 작품에 등장한 실제 레이스카에 탑승하게 했다. 점진적으로 더 빠른 차량을 운전하면서 속도의 차이를 체험할 수 있게 한 거다. 차량 주변에는 카메라가 최대 15대까지 설치되어 있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4면에 카메라가 붙어 있기도 했고 배우의 얼굴 바로 앞에도 카메라가 있었다. 당연히 운전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애플은 아이폰 카메라를 개조해 레이스마다 두대의 차량에 장착했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차량 내부에서 찍은 시점숏의 상당 부분이 실제 레이스 중에 촬영되었다. - 진짜 드라이버가 되기 위한 배우들의 트레이닝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 사람들은 잘 모를 테지만 F1 드라이버들의 체력 훈련은 올림픽 선수들과 비슷하다. 차량이 주는 물리적 충격이 워낙 크기 때문에 엄청난 체력이 필요하다. 브래드와 댐슨은 신체적으로 단련된 배우들이지만 이번 준비 과정에는 그 어떤 훈련과도 차원이 다른 혹독함이 요구됐다. F1 드라이버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 중 하나는 목이다. 배우들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차 안에서 수백 바퀴를 돌았는데 이 훈련의 핵심은 목 근육을 강화하는 데 있다. 동시에 상체와 코어 근육도 중요하다. 코너를 돌 때마다 차량에 가해지는 5G의 강한 중력을 온몸으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 두 주연배우의 균형감이 중요해 보인다. F1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은 제작뿐 아니라 캐릭터 구축에도 도움이 됐다고. 브래드를 섭외할 당시에 출연 조건으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를 하게 된다면 차에 앉아 바람 기계 앞에서 있는 식으론 안된다. 실제로 운전을 해야 이 영화가 진짜가 된다.” 댐슨은 시리즈물에서 호연을 보여준 바 있고 레이싱카에 탑승해 운전할 수 있을 만큼의 신체적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루이스 해밀턴은 두 배우와 운전 장면을 함께 지켜보면서 서킷 위에서의 장면을 최대한 현실감 있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 메르세데스와 F1 조직까지 긴밀한 협업이 이뤄졌는데. <탑건: 매버릭> 촬영 당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루이스를 알게 되었는데 이번 영화에 프로듀서로 참여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루이스는 당시 메르세데스팀 소속이어서 우리를 메르세데스와 연결해줬고 메르세데스가 영화에 나오는 차량을 제작해주었다. 디자인은 메르세데스 디자이너들과 조셉 코신스키가 공동으로 참여해 완성했다. 실제 레이스 현장 안에 깊숙이 들어가 우리만의 피트 개러지 세트를 설계하고 직접 제작해 총 9개의 서킷에 이동 설치했다. 레이싱카도 실제 F1 경기가 열리는 사이사이에 주행할 수 있도록 했다. 연습 세션과 예선, 또는 경기 직전 시간대를 활용해 촬영용 차량을 투입했다. 이 때문에 F1 조직, 국제자동차연맹(FIA)과 긴밀하게 협조했고 실제 F1 직원 한명이 제작팀에 상주하며 모든 절차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관리했다. 그 덕분에 필요한 트랙 접근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다. - 촬영감독인 클라우디오 미란다와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다시 협업했다. 클라우디오 미란다는 이번에 <탑건: 매버릭> 때는 없었던 새로운 카메라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앞서 말했던 원격 패닝이 가능한 카메라인데 이전에는 이런 카메라가 없었다. 트랙마다 안테나를 설치해서 카메라를 원격 조종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기술을 큰 폭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클라우디오 미란다와 조셉 코신스키 감독 덕이다. - 한스 짐머 특유의 낮은 음정으로 이룬 음악이 화면 구성과 절묘히 맞아떨어진다. 음악이 영화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리길 바랐나. 한스와 작업할 때는 먼저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그 후에 촬영된 장면을 공유한다. 그러면 알아서 만들어낸다. 정말 천재다. 사운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정의 기반까지 함께 구축한다. 드라이버만 조명하는 게 아니라 레이싱을 위해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는 게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다. 케리 콘돈과 하비에르 바르뎀까지 모든 배우를 한데 모아 감정의 서사를 만들고, 진짜 레이스 현장에서 진짜 레이싱카에 태웠다. 이건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진짜 감정이 살아 있는, 재미있고 현실적인 극장 체험이다.

[비평] 환상은 이토록, 홍수정 평론가의 <퀴어>

“자꾸 나랑 자려고 하잖아. 하여간 이래서 퀴어들이 싫어. 그냥 친구로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니까.” 영화의 초반, 리(대니얼 크레이그)와 함께 놀던 남자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뒷담화를 한다. 폭력적인 말을 뒤로한 채 리는 걷는다(이때 스산하던 사운드가 너바나의 로 이어지는 순간의 쾌감이 상당하다). 중절모를 눌러쓴 채 흰색 슈트를 입고 휘적휘적 거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 이 걸음의 끝, 그는 유진(드루 스타키)과 마주친다. 첫 만남. 영혼처럼 흐릿하던 리는 그 순간 생생한 인간으로 돌아와 숨을 몰아쉬고 눈을 번뜩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기. 그것은 ‘퀴어’라는 멸칭에 눌려 주변부를 떠돌던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사랑과 마주하며 인생의 중심부로 복귀할 때 튀어 오르는 스파크다. 그런데 여기서 첫 만남의 짜릿함만큼이나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건 이 순간에 드러나는 두 가지 대비되는 영역. 바로 ‘환상’과 ‘현실’이다. 거리를 유령처럼 떠돌던 리(환상)는 생동감 넘치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현실). 거칠게 말하자면, <퀴어>는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리를 따라가는 영화다. 그의 걸음을 쫓을 때 우리는 <퀴어>, 그리고 루카 구아다니노가 진정 닿고자 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퀴어>를 읽고, 이어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결말을 통해 <퀴어>의 마지막을 다시 들여다볼 것이다. 현실과 환각 사이에서 일상에서 리는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일순간 변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리가 ‘퀴어’를 향한 세상의 벽을 마주하는 때다. 친구 기드리(제이슨 슈워츠먼)는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에서) “너무 퀴어”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리는 몸이 굳는다. TV의 치지직대는 소음(리의 머릿속을 표현하는 듯하다)을 배경으로 그는 점점 흐릿해지고 투명해진다. 위에서 처음 설명한 장면에서도 리는 퀴어에 관한 혐오를 받고 나서 유령처럼 배회한다. 퀴어를 세상 밖으로 배격하며 내쫓는 말들. 그 말을 피해 리는 흐릿하고도 환상적인 세계에 들어선다. 이런 연출은 리의 사랑이 장벽에 부딪힐 때도 등장한다. 유진과 데이트할 때, 리의 흐릿한 손이 그의 얼굴을 만진다. 이 손은 리의 육체가 아니다. 유진을 쓰다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리의 마음이 이중 노출로 연출된 것이다. 리가 감춘 마음은 일상 위에 포개어진 옅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드러난다. 그가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문득 자각할 때, 그러나 현실 안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없을 때, 영화는 환상 같은 이미지로 그것을 이루어낸다. 남미의 환상문학처럼 일순간 현실을 틈입하는 환상은 리의 서글픈 도피처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 퀴어의 정체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마법이다.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환상을 향한 상태. 이것이 퀴어로서 고백하는 “몸과 정신이 분리된” 상태일 것이다. 한편 리와 달리 유진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팩트를 다루는 기자다. 또한 그는 공적인 장소에서 여자 친구와 있는 등 헤테로섹슈얼의 규범이 지배하는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남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잘해낸다. 반대로 리는 마약중독자다. 이는 자꾸만 현실 저 너머로 도피하고픈 리의 열망이 파괴적인 지경에 이르렀음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유진이 처음 리와 함께하며 퀴어 정체성을 표출한 순간, 그는 술에 취해 있다. 유진이 토할 정도로 취한 이후에야 그들의 첫 입맞춤은 이뤄진다. 유진에게 리와 함께하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 환각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일종의 배설(구토)과도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리에게 이것은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환상 안에서만 그를 쓰다듬던 리의 손은 이 순간 스크린 위에서 육감적으로 체화된다. 리의 사랑은 유진의 환각 안에서 성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 뒤에 곧바로 리는 ‘야헤’를 찾는다. 그것이 환각을 주입하는 동시에, (텔레파시를 통해)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전달해줄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우연히 만난 남자는 야헤가 새로운 문이 아니라 ‘거울’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거울은 ‘가상의 상’을 만들어내지만 그 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의 우리일 뿐이다. 이것은 환상을 찾는 리의 시도가 결국 현실로의 귀환으로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야헤를 접하고 환각 안에서 서로를 탐닉하지만, 유진은 더 나아가길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 찾은 물질은 그 사랑을 끝내고야 만다. 그의 마지막(장면)에 대하여 이제 <퀴어>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할 차례다. 리는 아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꿈 안에서 그는 조그만 창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본다. 리가 들어선 방에는 자기 꼬리를 문 뱀이 있다. 리는 자기 꿈에서, 자신을 보고, 뱀은 꼬리를 문다. 몇겹에 거쳐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수렴하는 이런 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내면에 꼭꼭 갇힌 채 돌고 도는 운동을 연상하게 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 이런 운동은 처음이 아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비밀스러운 연인은 상대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지 못한 채, 자기 이름을 속삭일 뿐이다. 여기에는 서글픈 회귀 운동이 있다. <본즈 앤 올>(2022)의 마지막은 희귀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연인 사이에 벌어진 비극을 다룬다. 그토록 찾았던 연인은 함께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수렴하고 만다.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에서 사랑은 자주 밖을 향해 뻗어가지 못하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내면에서 팽이처럼 돌고 돈다. <퀴어>는 이러한 운동이 한 인간의 내면을 파괴하는 사례이며, 이것이 루카 구아다니노가 생각하는 퀴어에게 강요된 사랑의 형태다. 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방에서 빠져나온다.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연상하게 하는 배경에서 리는 노쇠한 탓인지, 유진에 대한 금단증상 때문인지 몸을 떨다 마지막을 맞는다. 그가 그토록 추구하던 ‘환상’은 결국 리의 요람이 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운동은 모두 아픈 현실을 피하기 위하여 이뤄진다. 그 목적지가 환상이든, 자기 내면이든, 일종의 도피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낯선 듯하나 실은 익숙한 이야기다. 밖에 꺼내놓지 못하고 안에 가둬두어 숙성 혹은 부패하고야 마는 그 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보통 이것은 지나가는 바람이지만, 이 안에서 일평생 살아가는 남자가 <퀴어>에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의 마지막은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

[비평] 실패의 서사, 소멸의 이미지, 조현나 기자의 <퀴어>

“너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말없이. 널 만지고 싶어.” 유진(드루 스타키)에게 첫눈에 반한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꾸준히 구애한다. 특히 그와 접촉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고 곁을 배회한다. 후반부에서 리는 바라던 대로 유진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전까지 반복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투명하게 현신한 리가 곁에 앉은 유진에게 계속해서 손을 뻗는 모습이다. 리의 상상에 기반해 구현됐을 가상의 신체는 그렇게라도 상대와 접촉하고 싶은 리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일 테다. 투명한 신체가 리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전제는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갑작스레 전복된다. 텔레파시를 가능케 하는 ‘야헤’를 마시고 교감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돌연 리의 눈앞에 있던 유진의 몸이 투명해지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뒤로 현실은 물론 리의 상상 속에서마저도 유진은 자취를 감춘다. 정사를 넘어선 ‘말없는 대화’가 마침내 가능해졌을 때 리가 그토록 갈구해온 유진의 육체, 유진이란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질문해볼 수 있겠다. <퀴어>가 묘사하는 신체의 소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리는 왜 자신의 바람을 투영할 때조차 본인을 지우고 종국엔 사랑하는 유진까지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욕망을 인간의 오감을 통해 드러내길 즐기는 창작자다. 대상이 금기시된 존재일 경우 욕망과 신체적 반응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진다.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 등을 거쳐 <퀴어>에 이르러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탐하는 자와 대상간의 신체접촉을 더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그만큼 신체의 부재를 더 자주 드러낸다. 끊임없이 장소를 바꿔가며 현실에 상상을 대입하는 리의 실험을 통해서 말이다. 취할 수 없기에 갈구하는 사랑의 대상 “너 퀴어 아니지?” 술집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 리가 묻는다. “쟤 퀴어일까?” 첫눈에 반한 유진을 바라보며 리가 넌지시 동료에게 말한다. 1950년대, 동성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이 질문은 화자와 청자를 바꿔가며 되풀이된다. 성적 지향에 관해 리와 유진은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표면적으로 리는 퀴어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오픈리 퀴어라고 해서 스스로를 오롯이 받아들인 건 아니다. 본인이 동성애자인 건 “저주”이며 “섹스 괴물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는 게 낫겠다”고 여겼던 과거를 리는 유진에게 자조하듯 고백한다. 비슷한 상황이 그의 꿈에서도 이어진다. 자신이 숱하게 건넸던 ‘당신은 퀴어인가’라는 질문이 되돌아왔을 때 리는 부정한다. 그리고 답한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야.” 그 뒤로도 리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자주 거론하면서 동성에 대한 이끌림을 전부 육체의 욕구로 치환하고 그것을 본인과 유리시킨다. 자기혐오가 옅게 깔려 있을지언정 이러한 리의 입장에선 몸을 통해 다른 퀴어와 교감하는 것이 가장 명확한 소통 방식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한편 유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태여 밝히지 않는다. 리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내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며 그를 외면하려 한다. 그 거리감이 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내내 모호한 입장을 취하던 유진이 처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고백한 건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다. 야헤를 마신 그는 “저 퀴어 아니에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죠”라고 말하고, 그렇게 리의 환각 속에서 두 사람은 점점 사라져간다. 이를 토대로 보면 유진과 리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받아들인다는 점은 같지만,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관해선 확연히 갈린다. 육신을 통해 동류를 감지하고 접촉하길 바라는 리와 달리 유진은 자신이 퀴어임을 자각게 하는 신체 교감이 반복될수록 도망치고 싶어 한다. 육체가 정체성을 드러낼 유일한 언어라 여기며 이를 기반으로 사랑을 표현하려는 자와 끝내 그 언어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자. 둘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퀴어> 의 “인물들이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타임>)에 관해 다루고 싶었다던 루카 구아다니노의 의도는 이러한 두 인물의 간극으로 구현됐다. <퀴어>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전술했던 신체의 소멸, 그리고 방황을 동반한 자기 탐구다. 특히 후자의 경우 루카 구아다니노가 다뤄온 인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다. 사랑을 경유해 자기해방을 이룬 <아이 엠 러브>의 엠마(틸다 스윈턴)와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표류하던 <위 아 후 위 아>의 프레이저(잭 딜런 그레이저)와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사먼), 첫사랑의 열병으로 정체성을 깨달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티모테 샬라메), 식인이란 본성을 쉽게 시인하지 못하던 <본즈 앤 올>의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테 샬라메). 이중 <퀴어>와의 연결고리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본즈 앤 올>이다. <퀴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은 각자의 방식으로 분리와 분열의 구조를 체화한다. 엘리오의 첫사랑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건 오래전 떠난 올리버(아미 해머)가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이며, 서로가 유일한 안식처였던 매런과 리의 동행은 사건 은폐를 위해 매런이 죽은 리의 육신을 섭취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들에게 사랑은 퀴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성립될 수 없거나 반대로 기피하고 싶던 카니발리즘의 본성을 가장 극한의 방식으로 체화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비약하면 이들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이유로 욕망하는 대상을 끝내 곁에 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퀴어>에서 그려지는 리의 사랑 또한 필연적으로 실패에 다다른다. 이를 은유하는 시퀀스가 있다. 리와 유진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 표면적으로 둘의 시선은 나란히 스크린을 향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리는 유진에게 손을 뻗는 상상을 한다. 그런 둘을 지켜보던 카메라는 이들을 지나쳐 맞은편의 스크린으로 향한다. 스크린에선 장 콕토 감독의 <오르페>(1950) 중 오르페(장 마레)가 사망한 아내를 되찾기 위해 거울을 통과해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장면이 상영되고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살짝 비튼 이 영화에서 오르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여왕에게 반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산 자에게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존재다. 죽음의 여왕의 신하가 거울 앞에 선 오르페에게 말한다. “거울은 거울일 뿐이고 그 안에는 불행한 남자가 있어요”라고. 아직 죽음의 세계에 발도 들이지 않은 오르페를 두고 그는 왜 불행한 남자라고 칭했을까. 죽음을 갈구하는 이승의 존재에게 일찍이 이별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스크린에서 극장으로 시야를 넓혀보자. 불행한 남자로 칭해짐에도 결국 거울 안으로, 죽음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오르페와 거울처럼 마주 선 이는 누구인가. 제 것이 아닌 이에게 무력화된 신체로나마 닿아보려는 리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퀴어>에서 육체의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 전시한 장면은 야헤를 마신 리가 유진과 춤을 추는 순간일 것이다. 둘은 서로 동화되다 못해 피부를 투과해 합치된다. 엠비언스 사운드까지 제거된 이 시퀀스가 어쩌면 리가 바라던 말없는 대화가 궁극적으로 실현된 때인지 모른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처럼 전개된 이 신 이후의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리와 교감을 나눈 유진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리를 외면하고 결국 도망친다. 정글 속으로 사라진 유진을 좇던 리가 잠시 뒤를 봤다 시선을 돌렸을 때 유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곧이어 리는 빨려 올라가듯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그가 처음 유진을 만났던 장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다. 2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리는 여전히 그곳을 배회하면서 떠난 유진을 그리워한다. <퀴어>엔 나오지 않았으나 <오르페>에도 유사한 장면이 있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세계에서 금기를 깨고 뒤를 돌아본 오르페는 곧바로 생의 세계로 복귀한다. 그럼에도 오르페는 여전히 죽음의 여왕을 떠올린다. 리와 오르페,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의 소멸과 부재는, 그로 인한 사랑의 실패는 도리어 상대를 끝없이 갈구하는 발단이 된다. 닿을 수 없어서 꾸는 꿈 리가 복귀한 멕시코시티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멕시코시티에 오게 된 연유에 관해 리는 동성애에 관한 차별로부터 도망쳐왔다고 넌지시 운을 띄운다. 그러나 이 도피처에서도 리가 퀴어라는 이유로 편협한 시선을 던지기란 매한가지고 결국 리는 유진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둘의 관계에 본격적인 진척이 이루어진 건 이때부터다. 본거지 밖으로 유랑하고 그곳에서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는 이들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엠마는 밀라노를 떠나 산레모에서 안토니오(에도아르도 가브리엘리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엘리오와 올리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프랑스의 휴가지에서다. 매런 역시 엄마를 찾아가던 중 리를 만났으며 정체를 숨기기 위해 둘은 주기적으로 외부로 떠돌거나 타지로 이동해야만 한다. 이중 드물게도 리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자신이 등장한 장소로 회귀한 인물이다. 10대 때부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하길 원했다고 밝혔다. <데이즈드>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당시 자신이 쓴 <퀴어> 각색본의 첫 페이지에 ‘모든 것은 무대에서 촬영되어야 한다’고 적었고 이번 영화에서 그 계획을 실현했다. 리가 유진을 만난 멕시코시티는 실제 로케이션에 적을 둔 것이 아닌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구현된 세트다. 멕시코시티에서 유진의 흔적조차 부재함을 알고 나서야 리는 비로소 유진과 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가상의 신체를 구현해내더라도 유진과 닿을 수 없음을 절감한다. 호텔로 돌아온 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 리는 거대한 건물 형태의 세트장을 구성한 뒤 전지적 시점으로 내부를 들여다본다. 그곳에서 자신이 유진에게 총을 겨누고 쓰러진 유진이 사라진 뒤, 결국 자신마저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가상의 무대 위에 펼쳐진 한편의 영화를 관람하 듯이. 정체성, 방황, 자기 탐구, 욕망, 사랑. 주요 키워드로 <퀴어>를 요약한다면 전작들과의 여집합이 쉽게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요소들을 긴밀히 엮고 다시 분리시킨다. 유진과의 사랑은 리가 자기부정을 행할 때만이 성립 가능한 일이었고 이는 치정, 불륜과는 결을 달리하는 또 다른 금기다. 정신과 분열된 신체의 언어는 결국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신체의 언어로 기록된 한 기억이 리로 하여금 반복해 유진의 빈자리를 되새기게 한다. 정글로 여행을 떠났을 때 크게 앓은 리는 옆에 누운 유진에게 덜덜 떨며 다가가 발을 겹친다. 이 기억은 노년이 된 리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마지막으로 가상의 신체를 불러와 그와 나눈 온기를 더듬는 방식으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미 충분히 해석된 감독일까. 연출자로서 오랫동안 품어온 작품인 만큼 <퀴어>는 그의 연출론을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남긴다. 실패의 서사와 소멸의 이미지로 가득한 <퀴어>는 그만큼 서글프고, 매혹적이다.

[인터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 <킹 오브 킹스> 장성호 감독, 김우형 촬영감독

- 예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 긴 일대기를 임팩트 있게 정리했다. <킹 오브 킹스>의 초반 기획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장성호 맨 처음에 나는 제작만 맡고 각본가와 감독은 다른 분에게 맡기려 했다. 하지만 중간에 많은 문제를 겪으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게 나와 김우형 촬영감독이다. (웃음) 그렇게 자연스레 제작을 맡았고 내가 각본·연출을, 김우형 촬영감독이 촬영을 진행했다. <킹 오브 킹스>는 다분히 사업적 전략으로 시작했다. 우리 기술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정 예산이 필요한데 영유아물에 특화된 국내 시장 규모로는 이를 현실화하기 어려웠다. 10년 전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은 예산이 대부분 50억~60억원에 그쳤고 그 안에서 중국에 외주를 보내거나 해외 세일즈로 BP 포인트를 넘기는 게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다르게 접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할리우드 진출을 떠올렸다. 메인 시장으로 바로 가자, 그게 내 전략이었다. 하지만 방탄소년단도,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도 없던 시절에 K콘텐츠의 위력을 바로 납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할리우드 진출에 맞춘 각본 기획이 무척 중요했겠다. 장성호 이런 상황이라면 오리지널 IP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존경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북미 박스오피스가 900만달러에 달한다.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더빙하고 월트디즈니 컴퍼니에서 배급까지 맡았지만 북미 시장에서는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스튜디오 지브리마저 고초를 겪었는데 내가 어떻게 오리지널 IP로 승부를 볼 수 있겠나. (웃음) 그래서 이 시장 안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미국 관객에게 익숙한 소재, 특히 원작 베이스로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열심히 리서치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찰스 디킨스의 <우리 주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라는 책을 발견했다. 미국은 청교도가 세운 국가인 만큼 문화 전반에 기독교적 관점이 깔려 있다. 이를 하나의 장르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분위기가 있어 보편성을 충분히 획득할 만했다.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시장 조사를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미국에서는 기독교 콘텐츠 실패 사례가 없었다. 적어도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그 사실이 내겐 너무나 중요한 정보였다.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실패는 허용될 수 없다. 내겐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을 돌려줘야 할 막중한 책임도 있다. 그때부터 수치로 증빙되는 자료를 모아 투자 유치를 위한 절실한 노력을 했다. - <고지전> <암살> <더 킹> <1987> <하이재킹> 등 역동적인 촬영 기술을 쌓아온 김우형 촬영감독이 <킹 오브 킹스>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첫 애니메이션 작업이다. 김우형 지금까지 실사영화를 찍어왔지만 나 또한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이 선호를 어떻게 업무로 이어갈지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때 우연히 장성호 대표로부터 <킹 오브 킹스>의 초기 기획에 대해 들었고, 함께할 방법만 있다면 함께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특히 이번 작업은 버추얼 환경에서 직접 찍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었다. 마치 영화 촬영 현장에서 진짜 카메라를 들고 찍는 것처럼 일했다. 장성호 실제로 엑스박스 컨트롤러를 붙여서 외부에서 화면을 보며 촬영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게 실제 카메라는 아니지만 카메라처럼 작동했다. 감독이 원하는 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컨트롤러에 기능을 모두 더했다. 3D 게임과 흡사한 형태다. 김우형 실사영화의 경우 이 시스템을 활용해 프리비즈(촬영 전 구상 이미지를 컴퓨터상에서 구현해보는 과정. 실제 제작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다.-편집자)를 진행한다. 배우들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지, 조명이 어디까지 올 것인지 등 현장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촬영 전날 느끼는 압박감이 훨씬 줄어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이 자리에서 찍는 모든 것이 파이널 버전이라 더 생생하고 즐거웠다. 무엇보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시행착오를 언제나 무제한으로 허용하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화장실도 안 가고, 잠도 안 자고, 수십번 재촬영해도 똑같은 에너지로 연기해주는 배우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웃음) 무엇보다 A컷의 여성과 B컷의 남성을 섞을 수 있는 효율성도 좋았다. 실사영화라면 살신성인으로 조절해야 하는 것들이 이 안에서는 간단했다. - 촬영 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김우형 바닷가로 배를 타고 나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 뒤로 해가 지는 순간. 일몰을 찍는다는 건 촬영감독에게 꿈같은 일이랄까. (웃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무리 계획을 잘해도 구름 때문에 내일로 미루거나 빛의 방향 때문에 다음날로 미루거나 해야 한다. 이렇게 날씨를 제어할 수 있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장성호 베드로가 배신하고 도망가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두건을 쓴다. 그때 이 두건이 화면을 확 덮치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예수의 뒷모습이 드러나는 컷이 있다. 콘티 그릴 때부터 무척 뭉클했는데 그 장면이 구현되니 정말 미묘했다. 내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김우형 촬영감독이 한끗을 알고 기가 막히게 포착해냈다. 연출자의 의도를 200% 이해하는 능력 덕이다. -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막내아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이다. 앞서 찰스 디킨스의 <우리 주님의 생애>로부터 출발했다고. 장성호 그 소설이 영화의 완전한 원작이라 하긴 어렵고, 느슨하게 영감을 받았다. 왜냐하면 예수에 대한 해석에서 찰스 디킨스와 나의 관점이 많이 달랐다. 디킨스는 도덕주의적 관점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신성이나 구원이 부족한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면모는 일부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여 원작을 완전히 탈피했다. 내가 집중했던 것은 찰스 디킨스 그 자체다. 그가 영국에서 국민적 사랑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글을 못 읽는 대중을 위해 자신의 작품의 낭독회를 열정적으로 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다음 작품이 뭐가 나올지 설레하고 기대한 이유기도 하다. 처음엔 혼자 낭독했지만 이에 대한 열의가 커지면서 무려 배우를 고용해 무대에 올렸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아이들 앞에서 <우리 주님의 생애>를 낭독했다. 이건 아이들을 위해 쓴 것이니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손자가 그만…. (웃음) 예수 이야기를 대중에게 전달했다는 그 설정.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예수의 이야기를 알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사랑을 찰스 디킨스에게 투영시켰다. 고양이 윌라도 실제로 디킨스 가족이 키웠던 고양이다. 김우형 종교는 잘 몰라서 각본과 해석은 온전히 장성호 감독에게 맡겼다. (웃음) 장성호 그렇기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중간에 시나리오를 크게 두번 수정했다. 한번은 김우형 감독의 말 때문이었다. “기왕에 캐서린 디킨스가 등장하는데 좀더 의미 있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역할이 너무 작은 거 같아.” 그때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캐서린이 등장해서 더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혜로운 캐릭터로 발전시켰다. - 시나리오가 크게 수정된 나머지 한번은. 장성호 함께 기획한 제이미 토마슨이 월트디즈니 컴퍼니 소속 작가들에게 모니터링을 부탁한 적 있다. 마블, <스타워즈> 시리즈 등 시나리오를 모니터링하는 분들이었기에 이 기회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고 혜택이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지적했다. 꼬마 월터가 제자들이 아닌, 예수하고만 상호작용하도록 해라. 정말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며칠 내내 끙끙 앓았더니 김우형 촬영감독이 심플하게 말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과감하게 나아갔다. 월터가 오직 예수와 교감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꾸었다. - 예수의 일대기라 하면 놀라운 기적을 목격할 것을 기대하지만 <킹 오브 킹스>는 오히려 그런 지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장성호 예수의 이야기에 기적이 일어난 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과시하듯, 전시하듯 묘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가 기적인 것처럼 접근하고 싶었다. 돼지들을 휘감았던 악령도 사실은 아주 작은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작은 바람 그 이상의 과한 묘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과장될수록 관객들이 오히려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우형 촬영에도 그러한 관점이 반영됐다. 콘솔 카메라로 하면 모든 앵글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다. 날아다닐 수 있고, 바다를 가를 수 있고. 하지만 그렇게 판타지스러운 것보다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동작을 구현하고자 했다. 카메라가 실제 땅을 딛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인데도 시네마틱한 반응을 느낄 수 있다. - 올해 4월에 수익 5400만달러를 달성하며 <기생충>을 넘어 한국영화 사상 북미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 기록을 세웠다. 개봉 17일 만이었다. 김우형 잘될 것 같다는 예측이 있었지만 그 직전까지도 정말 조마조마했다. 워낙 여러 영화가 동시에 개봉했다. 바로 앞에 대박난 <마인크래프트 무비>가 나오기도 했고. 장성호 눈에 보이지 않은 많은 숨은 노력들이 있었다. 할리우드영화에서 파주라고 나오는데 동남아 정글처럼 나오고, 한국 식당인데 본 적 없는 서체로 간판이 쓰인 그런 실수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 시대 비주얼은 모두 고고학 박사에게 확인받고, 모든 대사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각본가인 롭 에드워드에게 대사 윤색을 받았다. LA에서 만나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햄버거, 피자만 배달해 먹으면서 대사를 하나하나 수정했다. 자연스러움과 현지다움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액팅이 나올 수 있었다.

[인터뷰] 견고하고 고집 있는, <누룩> 감독 장동윤

- <누룩>의 각본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하다. 처음에 구상했던 아이디어는 코미디에 가까웠다. 시골 가면 할머니들이 막걸리를 많이 드시지 않나. 근데 할머니들이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약이야 약. 몸에 좋아”라고 하신다. 한 양조장에서 코로나19를 종식시킬 수 있는 만병통치 막걸리가 개발되면서 벌어지는 블랙코미디였다. 작업 여건상 스케일을 크게 갈 수가 없어서 지금 방향으로 바꾸었다. 예전에 시를 써서 그런지 상징적으로 글 쓰는 습성이 지금 영화에 좀 반영된 것 같다. 누룩을 소재로 이야기를 발전시키다 보니 한 사람의 상징적인 신념, 주변에서 믿어주지 않아도 끝까지 관철하는 그런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 단편 <내 귀가 되어줘>를 연출할 때에는 출연도 했다. 이번에는 출연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나. 단편 찍을 때 느낀 고충 때문에 출연을 안 하게 됐다. 직접 출연하면서 연출을 하면 모니터링이 안되니 같은 과정을 두번 거쳐야 하더라. 온전하게 모든 장면을 다 연출하고 싶었는데, 출연까지 하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독립영화다 보니 여러 부분에서 힘들었는데, (박)명훈이 형이 선뜻 출연해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 배경이 시골인데, 서로 집안 사정을 다 아는 지역색 강한 느낌을 잘 살렸더라. 로케이션도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단 시골집과 고등학교를 섭외해야 했는데, 아버지가 경북 영덕쪽에서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셨었다. 영화에 나오는 학교 중 하나가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곳이다. 그리고 아버지 동료분이 포항에 사시는데 거기서 촬영감독님과 편집기사님의 숙식을 도움받고. 그 선생님이 본인 아버님 집을 빌려주셔서 거기서 촬영도 했다. - 현장에서 장동윤은 어떤 감독인가. 배우들에게 명확하게 요구하는 편인 것 같다. 현장에서 배우로서 경험했던 게 많은 도움이 됐다. 감독 입장에서 배우를 바라볼 때 조금 더 배려도 할 수 있고, 또 더 가혹해지는 부분도 있더라. 현장에서 배우가 수행해야 하는 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배우들에게도 명확하게 디렉팅하는 편이었다. 배우들도 ‘감독님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할 틈을 안 준다’고 하더라. 예를 들어서, 사람이 화를 낼 때 ‘내가 화를 내야지!’라고 결심하고 화를 내는 건 아니잖나. 내 감정이 아니라 상황에 집중해서 화가 나는 거니까. 그래서 배우들에게 상황에 더 집중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 각본을 쓰고 감독에 도전하는 것이 배우로선 용감한 선택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시사적인 부분을 다루는 영화도 아니었고, 개인의 추상적인 신념을 다루는 영화였기 때문에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켄 로치 감독처럼 사회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감독을 굉장히 좋아한다. 얼마 전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봤는데, 완전히 사로잡혀서 봤다. 기회가 되면 그런 영화도 하고 싶다. 언젠가 휴머니즘이 담긴 사회적 이슈도 영화로 다루고 싶다. - 어릴 때부터 시인, 영화감독이 꿈이었다고. 그럼 꿈을 이룬 거겠다. 와, 그러네. 맞다. 꿈을 이룬 거네.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 <누룩>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장동윤이 생각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영화에서 누룩이 진짜냐 아니냐는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이 영화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믿음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가가 의미 있다. 믿음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은 거고 내가 그 믿음을 어떻게 지켜나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 어떤 기준으로 출연작을 고르나. 작품에 들어가기 전, 사실 여러 상황이 있지 않나. 촬영 시기도 중요하고 내가 하고 싶다고 전부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타협을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때도 있었다. 요즘은 콘텐츠가 워낙 다양하고 OTT라는 선택도 있고, 어떤 작품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지 알기 어렵다. 지금은 기준을 ‘사람들이 좋아할까?’에 두고 싶다. 물론 내가 연기했을 때 정말 잘 어울리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에 했던 <모래꽃>이 내겐 그런 작품이었다. 대본이 정말 좋았고, 끝까지 사랑한 작품이었다. 그동안 낯선 도전도 했었는데, 지금 바람은 많은 분들이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 오죽하면 <찰스엔터>에서 찰스님이 “이제 장르 그만! 제발 로코 좀 해달라”고 하지 않나. 로맨스를 하긴 했지만 <롱디> 같은 작품에선 남녀 주인공이 영상통화만 할 정도로 특이한 선택을 해왔다. 하하, <모래꽃>도 장르는 로맨스였다. 많이들 씨름으로 기억하시는 것 같다. 특이하지 않은 정통 로코를 하기 원하시는 걸까? - 찰스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아마도 장동윤 배우의 멋짐을 더 많이 알리고픈 팬심 때문일 거다. ‘이렇게 멋진데 나만 알다니 아까워!’ 하는 마음. 물론 그렇게 전형적으로 멋있는 로맨스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어떤 특이점이 없는 노멀한 로맨스는 내가 했을 때 매력을 발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포인트가 있어야 내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흔한 재벌집 대표님 이런 걸 하면 글쎄, 나와 잘 맞아서 매력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워낙 친숙한 생활 연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특징이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 씨름을 한다거나, 여자들 사이에서 댄스스포츠를 한다거나(<땐뽀걸즈>), 사극에서 여장을 한다거나(<녹두전>) 하는. 대기업 이사님이 막 무게 잡고 여자주인공을 리드하는 그런 건… 글쎄. 아무튼 이제 나도 대중들이 원하는 걸 하려고 하기 때문에 내 의견을 내세우진 않으려 하지만 앞으로 좋은 로코가 들어오면 꼭 하고 싶다. - <모래꽃>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다. 계속 실패하면서도 자기만의 속도로 늦게 피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였다. 드라마에서 마음에 품은 장면이 있나. 아빠한테 자기는 이제 씨름을 포기하려고 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백두의 형들도 다 장사고, 아빠도 장사 출신인데, “아빠, 내가 미안타, 나도 이렇게 못나게 끝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끝내게 돼서 아빠한테 창피하고 미안타”라고 한 그 장면이 뭉클했다. 보는 분들과 공감대가 있을 것 같았다. 가족에게 미안할 때가 다들 있지 않나. 내가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시간도 같이 보내고 더 챙겨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항상 미안하다. -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나 <모래꽃> <땐뽀걸즈> 등. 출연작에서 주로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핍이 있는 역할을 맡아왔다. 스스로도 결핍을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인물이 무탈하고 행복한 것보단 애환이 있고 마음 한쪽에 슬픔이 있는 것이 좋다. 작품에서 중요한 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촬영이 있는 날은 더 신경 쓴다. 감정이 들어가는 신은 완벽하게 동선과 대사와 눈빛까지 계산하려고 한다. 어디서 터트리고 어떻게 대사를 조율하는지 그런 계산을 해야 안심이 된다. - 출연작에서 사투리를 많이 썼다. 고향이 대구인데, <오아시스>에서는 전라도 사투리까지 했다. <뷰티풀 데이즈>에선 연변 사투리도 했고. 낯선 언어를 체화하는 걸 힘들어하지 않는 편인가. 우리나라의 방언이 정말 매력 있다고 생각한다. 사투리에는 표준어에 담을 수 없는 정서가 다 담긴다. 한국의 풍부한 언어 자원이 사투리인데, 언어적인 면에서 사투리를 표현하는 걸 재미있어 하는 편이다. 같은 경상도 사투리도 대구, 부산 사투리가 다르다. 그 지역 방언을 연기할 일이 있으면 평소에도 그 말을 쓰고 다녔다. - 워낙 특별한 데뷔 스토리를 갖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를 하게 됐는데, 아카데믹하게 배우지 않은 것에 대한 갈급함은 없었나. 대학원을 연기로 가야 하나 고민도 했다.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장에 던져졌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부딪치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나에게 맞았던 것 같다. 요즘 복싱을 배우는데 복싱은 실전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스포츠다. 백날 혼자서 샌드백 치고 섀도 해봤자 실전을 안 하면 늘지 않는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부딪쳤을 때 현장에서 완성된다. 연기 고민을 많이 했지만, 쉴 틈 없이 링 위에 올라 규칙을 배웠다. 나 역시 부족하지만 후배가 조언을 구하면 실전 연기에 대해서 주로 말해준다. 아, 오디션 전에 팁을 물어본 후배가 붙었다고 연락이 왔더라. 정말 기뻤다. 연기보다 가르치는 걸 잘하는 것 같다. (웃음) - 도파민 중독이 싫어서 쇼츠도 안 보고, 금주도 하고, 평소 SNS도 잘 하지 않는다. 인터뷰에선 외모지상주의나 배금주의에 대한 경계심도 드러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다들 존재 자체로 아름답고 귀한데 천편일률적인 미를 찬양하는 게 별로 안 좋지 않을까. 그리고 SNS를 통해서 작품을 홍보하고 배우로서 해야 할 역할은 얼마든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 현실의 건강한 삶이 나에게 가장 소중해서 평소에는 잘 안 본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경치 좋은 곳에 가면 눈에 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런 게 좋다. 아, 요즘 사진을 공부하고 있어서 사진으로는 많이 찍는다. - 사진은 왜 배우나. 옛날부터 공부하고 싶었던 분야다. 연출을 하려면 사진도 잘해야 할 것 같았다. 박찬욱 감독님도 사진을 잘 찍으시지 않나. 사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스페인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처음에 나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영화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지금도 그렇게 아신다. (웃음) 선생님이 좋아하는 영화의 장면들을 뽑아오라고 하셔서 가져간 영화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었다. -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티저가 공개됐는데 살짝 귀띔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나. 근래 보기 힘든 파격적인 장르물이다. SBS에서 방영 예정인데 이런 장르물을 TV에서 접하는 게 참신하고 재미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고현정 선배님의 연기 변신을 정말 기대해주셔도 좋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이 내게는 감정적으로 힘든 작품이었다. 원래 캐릭터를 한번에 만들기보다 현장에서 겹겹이 쌓아가는 편인데, 엄마가 살인자라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모습이 있어서 마냥 어둡게 연기할 수 없었다. 명도를 조절하는 게 어려웠다. -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장동윤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결핍이 있고 아픔이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결핍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걸 표현하고 싶고 그 안에 인류애와 사랑이 있으면 좋겠다. 그게 가족간의 사랑일 수도 있고, 고양이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고, 남녀간의 사랑일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장동윤 감독이 영향받은 영화 베스트3 1.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의 영화는 전부 봤다. 최근작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사회의 어두운 곳, 빈 곳을 담는 그의 뿌리가 이 영화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싶어서 더 집중해서 봤다. 2. <액트 오브 킬링> 감독님들은 결국 진짜 같은 것을 담고 싶어서 영화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을 담아내는 게 바로 다큐이고. 이 영화를 보고 그런 충격을 받았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영화였고 언젠가 다큐멘터리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3.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사랑한다. 감히 21세기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저런 장면을 찍을 수 있을까. 설명도 말도 없이 어떻게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근데 꼭 세편만 얘기해야 하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과 에릭 로메르 감독님의 영화들도 넣어달라.

[특집] 한국을 겨냥하되 한국만을 겨냥하지는 않는

지난 6월,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티빙과 웨이브의 임원 겸임 방식 기업결합을 조건부 승인했다. 2024년 11월 CJ ENM과 SK스퀘어가 티빙과 웨이브의 단계적 통합을 위해 2500억원대의 전략적 투자를 실행한다고 밝힌 지 반년여 만이다. 공정위가 이번 사안을 심의하면서 중점적으로 검토한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구독료가 인상될 우려가 있나. 둘째, 티빙이 속한 CJ가 티빙 혹은 웨이브에만 콘텐츠를 공급해 경쟁 OTT가 콘텐츠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우려가 있나. 셋째, 웨이브가 속한 SK가 이동통신 및 IPTV 서비스에 OTT 서비스를 끼워 팔아 경쟁 OTT를 배제할 우려가 있나. 결과적으로 공정위는 수평결합에 따른 요금 인상만이 염려된다고 판단, 2026년 말까지 티빙 및 웨이브가 기존 요금제를 유지하거나 통합 서비스 출범 시 기존 가격대와 유사한 요금제를 출시하라는 시정조치를 부과했다. 이는 ‘기업결합 시정 방안 제출 제도’를 활용하여 행태적 조치를 부과한 첫 사례다. 공정위 발표 이후 양사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6월16일 티빙과 웨이븐느 최대 39% 할인된 가격대의 ‘더블이용권’을 내놓았다. 하나의 구독권으로 두 플랫폼의 콘텐츠를 모두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나아가 웨이브는 7월부터 9월까지 매주 목요일에 <라이프 온 마스> <타인은 지옥이다> 등 총 45편의 OCN 작품을 제공한다. 지난 3월부터 총 100편의 CJ ENM 영화를 공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24년 기준 넷플릭스에 이어 각각 국내 이용자 수 2위, 4위, 이용시간 순위 2위, 3위를 자랑하는 OTT 플랫폼인 티빙과 웨이브. 각자 C와 지상파 방송사 콘텐츠 라이브러리를 확보했다는 강점으로 구독자를 불러모았지만 효율과 가성비를 따지는 유저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둘이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바람에 응답하듯 2023년부터 합병 소식이 들려왔지만 티빙의 지분 13.5%를 보유한 2대 주주 KT스튜디오지니가 합병에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난관이 있었다. 하지만 공정위의 조건부 승인까지 떨어지면서 이제 합병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다수의 영상·콘텐츠 업계 리더들은 현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특히 제작자들은 유의미한 변화를 기대하기보다 침착하게 할 일을 모색하는 인상이다. “티빙은 기본적인 콘텐츠 플랜을 가동해왔지만 웨이브는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멈춘 지 몇년이 지났기에 가치가 하락했다.”(제작자 A) “웨이브가 업계에 영향력이 없다시피 했다. 솔직히 합병을 하거나 말거나 관심이 안 간다.”(제작자 B) 국내 OTT 시리즈와 영화 모두 제작한 경험이 있는 제작사 대표 A, B씨는 물론 한 드라마 제작사 PD도 동일한 의견을 내비쳤다. “시청자는 분명히 편해질 것이다. Apple TV+도 구독했지만 Apple TV+ 오리지널 작품이 티빙에 들어오니 티빙으로 보는 게 편하더라. 티빙, 웨이브에 있는 작품이 넷플릭스에도 있다면 넷플릭스에서 보지 않나. 그러니 나부터도 티빙이나 웨이브 하나만 구독하고 싶었다. 그런데 두 회사의 합병이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들은 애초에 웨이브의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1 더하기 1은 2가 아닌 1”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냥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제작 기회가 축소될 수 있어 걱정이라는 제작자들도 있었다. 여러 방송사 및 국내외 OTT와 영화·드라마를 공동 제작해온 제작사 대표 C씨가 그랬다. “1 더하기 1이 1이 되면 제작 기회가 오히려 줄어드는 모양새 아닌가. 제작비 규모 면에서도 국내 OTT가 글로벌 OTT와 경쟁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국내 OTT의 해외 스트리밍이라는 숙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배우들도 글로벌 OTT를 선택할 것이다.” 이는 제작자 A씨도 공감한 대목이다. “스타 배우들은 전부 넷플릭스로 가고 싶어 한다. 편성을 논의하다가 넷플릭스가 아닌 다른 플랫폼에 갈 수도 있다고 언급하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제작사들이 가운데서 고생이다.” 티빙-웨이브 합병에 관해 <씨네21>과 대화를 나눈 업계 종사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두 국내 OTT가 힘을 합쳐도 넷플릭스의 대항마가 될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만든 제작사 대표 D씨조차 아쉬움을 표했다. “그들만의 성격이 또렷한 OTT들이 꽤 있었다. 왓챠의 경우 취향이 확고한 유저들이 마니악한 작품을 볼 수 있는 창구다. 티빙은 프로야구 관련 콘텐츠를 독식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을 지켜보며 시너지효과가 예상된다기보다 코로나19 이후 OTT 업계에 끼었던 버블이 꺼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넷플릭스 1강 체제가 계속될 듯하다. 이렇게 되면 콘텐츠 시장이 보수화될 수 있다. 넷플릭스가 1인자로 굳어진 후에는 그들이 초반에 보여준 신선한 시도들을 찾아보기 힘들지 않나.” 더군다나 지난해 12월 넷플릭스는 SBS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SBS 신작 및 기존 프로그램을 국내 넷플릭스 회원들에게 제공하고, SBS 신작 드라마 중 일부를 전세계에 동시 공개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SBS는 넷플릭스, MBC와 KBS 콘텐츠는 티빙-웨이브로 양분되는 현실이 티빙-웨이브에 마이너스 요소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넷플릭스 독주가 장기화되리라는 전망에 이어 일각에서는 결국 합병의 최대 수혜자가 CJ라 보고 있다. “티빙은 원래부터 자신들이 투자한 콘텐츠를 집중 홍보해왔다. 그리고 그 콘텐츠 대부분이 tvN에서 방영한 것들이었다. 앞으로 tvN이나 지상파 방송사에서 방영되지 않은 콘텐츠들은 플랫폼에서의 노출, 홍보가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한 뉴미디어 업계 관계자의 예측이다. 제작자 B씨도 끄덕였다. “스튜디오드래곤, CJ 스튜디오스처럼 CJ ENM 산하에서 탄생하는 작품만 커버해도 티빙은 잘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국내 최대 플랫폼으로서 다양성을 유지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다양성이라는 화두 OTT 지형도가 교묘하게 재편되고 있는 가운데 업계인들은 어떤 대책을 강구 중일까. 올해에만 OTT 시리즈와 장편영화를 연달아 공개한 제작자 B씨는 앞으로도 “OTT 드라마, TV드라마, 영화, 숏폼 콘텐츠까지 네 가지 트랙”을 유지할 것이라 전했다. “한쪽에 편향된 제작 시스템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넷플릭스 시리즈를 제작했던 D씨는 제작 단가와 콘텐츠 색깔을 들어 계획을 말했다. 그는 넷플릭스가 한국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한 일본과 태국 시장에 집중한다는 소문이 무성한 데다 영국도 한국에 비해 훨씬 낮은 단가로 <베이비 레인디어> <소년의 시간> 같은 히트한 영어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있으니 넷플릭스의 시야에서 한국 콘텐츠의 효용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실정을 설명한 뒤 덧붙였다. “디즈니+의 <쇼군>이 에미상을 휩쓰는 등 반향을 일으켰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도 한국이 제작한 작품은 아니지만 글로벌화된 로컬 문화를 활용해 인기를 끌었다. 이제 억지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추려는 노력보다 한국적이면서도 해외에서 열광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나 또한 피자, 파스타가 아닌 잘 만든 된장찌개, 청국장 같은 콘텐츠를 세계에 내보일 수 있는 기획을 구상 중이다.” 뉴미디어 업계 관계자는 시각을 플랫폼 차원으로 확대했다. “한국은 인구 대비 광고 집행력이 떨어지는 나라다. 파라마운트+나 Apple TV+가 한국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해외 플랫폼이 들어올 가능성도 적다. 이제는 한국 시장을 레버리지 삼아 팬아시아(panAsia)를 염두에 둔 플랫폼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싶다. 한국에서만 무언가를 얻어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한편 티빙-웨이브 합병에 따른 갑론을박과 거리를 둔 채 자기 정체성을 수호하고 있는 군소 OTT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 1강, CJ 독과점이라는 키워드가 거론되고, 그로 인해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재차 화두에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캐치! 티니핑> 시리즈 제작사 에스에이엠지엔터테인먼트가 운영하는 키즈 전용 OTT 이모션캐슬시네마, 수입사 M&M 인터내셔널이 운영하는 아트하우스 OTT 콜렉티오나 각각 일본 애니메이션, BL 콘텐츠에 특화된 라프텔, 헤븐리 등이 그 예다. 타깃을 명확히 한 이들은 지난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작품을 보려면 VPN을 우회하는 방법 등을 쓸 수밖에 없었던 관객이 국내에서도 양질의 작품을 합법적으로 볼 플랫폼을 원했다”고 밝힌 이동영 M&M 인터내셔널 공동대표의 소망을 공유하는 셈이다. 국내 OTT 시장 활성화 초기부터 자리를 지킨 왓챠의 사례도 있다. 양치우 왓챠 마케팅 이사는 “이용자간의 소통과 연결을 강화하는 플랫폼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기존 OTT에서 볼 수 없던 기능과 재미 요소를 추가하고 이용자들의 경험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며 방향성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왓챠파티’는 단순히 실시간 채팅과 음성 코멘터리 등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콘텐츠를 즐기며 새로운 커뮤니티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과거 콘텐츠의 재조명, 팬덤 형성, 오프라인 상영회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르는 경험 확장을 실현하고 있다.” 플랫폼간 이합집산이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 콘텐츠 본연의 매력을 넘어 사용자 경험 자체를 고민하는 OTT만이 생존을 도모할 수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신록의 정화의 순간들] 맨살과 맨살을 맞대고

행복, 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이고, 행복이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happen)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라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행복의 요건은 두 가지인데, 먼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하고, 둘째로 그 일에 대해 긍정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도 어렵지만 사실 정말 어려운 것은 전자인데, 나는 주변에 누가누가 연애한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늘 그 그룹에서 가장 마지막에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항상 그랬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재미난 일은 어제 일어났고 나 빼고 다 거기 있었다. 다들 좋은 데 가고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거 볼 때 나는 항상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세상은 늘 나를 원 가장자리 혹은 원 밖에 세워둔 채 자기들끼리만 굴러가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는 이자람의 판소리 공연 <눈, 눈, 눈>을 보러 부산에 다녀왔다. 서울 초연 때는 역시나 티켓 오픈 날짜를 놓치고 땅만 쳤는데, 가을에 출연할 연극 연습을 눈앞에 두고 보니 공연 고수의 최신작을 보며 전의를 다져야겠다 싶어 무리해서 부산까지 가게 된 것이다. 객석에 앉아 행복과 주변시에 대한 생각을 더듬다 ‘나는 왜 항상 다른 곳에 있었나’ 하는 상념에 젖으려는데 공연이 시작한다.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이준형이 담백하고 단단하게 걸어 나온다. 그 순간 ‘그녀는 여기에 있다’는 문장이 마음을 스쳤다. 두 사람이 자리하고 소리꾼이 객석에 대고 뭐라고 인사 한마디 할 줄 알았더니 대뜸 소리를 시작한다. ‘인왕~~산~~’ 그 담백하고 에누리 없는 대면의 순간, 마음속에 ‘나도 여기 있다’는 문장이 새로이 스치더니 갑자기 두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나는 멍때리며 길을 걷다가 어느 쪽 횡단보도든 파란불이 켜지면 훈련된 경주마처럼 본능적으로 건너버린다. 건너고 나면 ‘어? 여기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어떨 때는 버스 정류장에서 몇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뭔가 아는 번호에 깨끗하고 빈 버스가 오면 순간적으로 조바심이 나서 타버린다. 나는 왠지 운이 좋아서 눈감고 주워 탄 버스도 나를 목적지 가까이에 내려줄 것만 같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어디 갈 건데?’, 앉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버스 벽면에 붙은 노선도를 보면 나는 먼 길을 돌아 더 덥고 더 먼 곳에 내려야 한다. 이렇게 정신이 팔려 나는 주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이지 특별히 마이너한 취향이 있다거나 반골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은 아니다. ‘인왕~~산~~~’으로 시작한 소리꾼이 어느샌가 ‘눈~~~~눈~~~~누우우운~~~’ 하며 얇고 높고 긴소리로 무대 위에 눈을 불러온다.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이 원작인 이자람의 <눈, 눈, 눈>은 눈이 휘몰아치는 명절 연휴에 숲을 사기 위해 길을 나서는 러시아 부자 상인 바실리의 하룻밤 생사에 관한 이야기다. 바실리는 하인 니키타와 함께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점심때쯤 무리해서 길을 나서는데, 눈길에서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빠르고 험한 길과 느리고 안전한 길 중 어느 길을 택할지, 우연히 들른 마을에서 하루 자고 갈지 해지는 것을 무릅쓰고 계속 갈지, 말고삐를 더 전문적인 니키타에게 맡길지 본인이 계속 쥐고 있을지, 지친 말을 쉬게 할지 무리하게 할지 등등. 바실리는 이윤 때문인지 자존심 때문인지 자신감 때문인지 기분 때문인지 뭔지, 정말이지 무엇 때문인지, 뭐에 씐 사람처럼 눈보라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결국 고립되어 얼어 죽고 만다. 세상에! 정말 죽다니! 소리꾼에 멱살 잡혀 바실리와 함께 눈속을 헤매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어느새 소리꾼은 ‘바실리의 모습이 꼭 나와 같다!’는 자기 고백의 아니리와 ‘이제 이자람도 힘들고 고수 관절도 아프고 관객 여러분 엉덩이도 아플 테니 그만하겠다’는 너스레로 담백한 작별을 고한다. 극장 밖은 여름 해가 제법 스러져 간다. 서울 갈 생각에 끼니도 거르고, 택시 타고 기차 타고 서울역에 내리니 부산에서부터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가 슬슬 쏟아지기 시작한다. 부산역 근처에서 사서 보냉백에 담아 온 어묵과 막걸리를 양손에 들고 등짐도 지고 ‘택시 타는 곳’에 줄을 섰는데, 예약 택시만 쏠쏠히 오고 일반 손님을 태우는 택시는 회전율이 예전만 못하다. ‘나도 예약할 걸 그랬나?’ 빗물에 번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을 찡그려 뜨고 앞을 보는데 ‘택시 내리는 곳’에 손님을 내려준 택시 등이 곧바로 ‘빈 차’로 바뀐다. 옳거니! 꾀가 난 나는 냉큼 길을 건너 택시 내리는 곳으로 간다. 손님을 내려주느라 잠깐 멈춘 빈 택시 문을 벌컥 열었더니, 기사님이 손을 휘휘 저으며 택시 타는 곳에서만 태울 수 있다고 돌아가라 한다. 아차, 뒤를 돌아보니 택시 승차줄은 순식간에 길어져 이제는 돌아갈 수도 안 돌아갈 수도 없다. 잠시 망연히 서 있다가, ‘그래, 이제라도 택시를 부르자!’ 핸드폰 액정을 적시는 빗물을 닦아가며 앱으로 택시를 부르니 가까운 택시가 금세 잡힌다. 옳거니! 슬며시 자신감이 올라 택시 오는 방향을 노려보는데 2분 거리에 있다던 택시는 좀처럼 오지를 않고 ‘택시 타는 곳’에 있던 손님들은 더디더라도 착실하게 착착 택시를 타고 떠난다. 입술을 깨무는데, 앗! 헤드폰이 내 머리 위에서 여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헤드폰과 어묵과 막걸리와 배낭을 양손으로 저글링하느라 용을 쓰는 그때, 예약한 택시 기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머리 어깨 무릎 발을 다 동원해 ‘여보세요!’ 그랬더니 대뜸, ‘오케이저축은행 보이시죠?’ ‘오케이저축은행이요?’ ‘오케이저축은행이요.’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리다 ‘네! 보여요!’ 나는 빗속을 달려 저 멀리 귀퉁이에 꼼수처럼 은신해 있는 택시에 오른다. 뒷좌석에 내동댕이치듯 짐을 부리는데 ‘내가 바로 눈보라 속을 헤매는 바실리다’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난다. 기진한 채 집에 들어서며 비에 젖은 어묵과 막걸리를 남편에게 건넨다. 밤 10시가 다 되도록 나 기다리느라 아직 식전이라던 남편이 만두라면을 끓여 내놓는다. 나 도착할 시간에 딱 맞추느라 끓는 물에 면을 담갔다 건졌다 했다더니 참깨라면이 너구리가 되어 있다. 국물 없는 라면이 왜 이리도 맛있나. 김신록바실리는 오늘 눈보라 속에서 얼어 죽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구나! 라면 한 젓가락을 후루룩 하면 그가 여기에 있다, 국물 한 숟가락을 쥐어짜 마시면 나도 여기에 있다, 오가는 젓가락질과 숟가락질 사이에 라면도 여기에 있다. 언제 고생했냐는 듯 ‘행복~행복~~’ 소리를 하며 침대에 누워 부른 배를 두드리다 아침에 함께 달리기로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몇몇 지인들이 모여 러닝하는 아침 모임에 오랜만에 함께하기로 했다가 오전에 부산 가는 일정이 부담스러워 안 가고 못 간 것인데, 전화기 너머 친구 말이 멤버 중 한명이 나 준다고 산딸기를 가져왔다가 도로 가져갔다고, 다음주까지 물러지지 않으면 다시 가지고 나온다고 했단다. 산딸기 주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과 그 싱싱하고 여린 산딸기가 한주 동안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미약하나마 심장이 죄어온다. 아! 나는 왜 거기 없었나, 부산행 기차가 오전 11시58분이었으니 아침 8시에 함께 뛰고 10시까지 집에 돌아와 씻고 나갔으면 딱이었을 텐데…. 이런 무리하다 눈 속에서 얼어 죽을 바실리 같은 생각을 하며 친구에게 <눈, 눈, 눈>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도 서울에서 그 공연 봤는데 사실 자기가 꼭 바실리와 같다고 고백한다. 세상에! 세상엔 바실리들만 사나? 오늘 만난 사람 중 벌써 네명이, 오리지널 바실리, 소리꾼 이자람, 나, 내 친구, 이렇게 네명이, 바실리다! 그럼 나도 뭐 그렇게 특별히 흉물스럽거나 추레한 인간은 아니라는 말씀인가? 부디 오리지널 바실리가 죽는 순간 알게 된 깨달음이 살아 있는 바실리들에게는 죽기 하루 전에라도 임하기를. 아멘. 사실 눈먼 채로 눈속을 헤매던 바실리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온몸을 바쳐 니키타를 구한다. 평생을 자기만 생각하며 살아온 바실리는 얼어 죽어가는 니키타를 발견하고는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눈 쌓인 니키타의 옷섶을 풀어헤치고 중무장한 자신의 옷섶도 열어젖히고 바로 눕힌 니키타의 배 위에 자신의 배를 갖다 대며 엎어진다. 둘은 맨살을 맞대고 한 덩어리로 눈보라 속에서 밤을 지새우다 결국 위에 있던 바실리는 죽고 아래 있던 니키타는 살아남는다. 바실리가 죽기 직전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그가 왜 갑자기 자기 대신 니키타를 살렸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그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둘의 맨살이 드러나고 맞닿는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망설이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이해나 변명을 구하지 않고, 눈보라나 바람 소리에 정신 팔리지 않고, 과감하고 신속하게 행해지던 그 행위의 순간이 기억난다. 그건 어쩌면 소리꾼이 ‘인왕~~산~~’ 할 때 내가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게 아닐까? 지금 어떠세요, 추우세요? 슬퍼요? 힘드세요? 묻는 대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옷섶을 열어젖히고 상대의 옷섶도 열어젖히고 맨살과 맨살을 맞대버리는, 둘을 한 덩어리로 묶어 여기 있게 만들어버리는 관통의 감각 말이다. 이부자리를 펼치고 양치질을 하며 생각한다. 별말 없이 마주 앉은 늦은 식탁의 불어 터진 라면이 왜 그렇게 맛있었나, 산딸기를 재차 싸들고 나올 그 정성 때문에라도 혹은 냉장고에서 산화되며 일주일을 버틸 그 산딸기 때문에라도 다음주에는 달리기 모임에 꼭 나가야지, 중무장한 내 옷섶부터 열어젖히는 연습을 해야지, 무엇보다 일단은, <씨네21>을 읽는 바실리들에게 이 순간을 적어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