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인터뷰] 반듯한 얼굴로 극한을 향할 때, <84제곱미터> 배우 강하늘

금리는 치솟고 집값은 떨어져 고통받는 직장인 우성(강하늘). 빚 갚는 것만도 괴로운데 정체불명의 층간소음에 시달리자 신경쇠약까지 뒤따른다. 배우 강하늘은 무너져가는 인물의 위태로운 감정선을 사실적인 터치와 기이한 만화적 감수성을 오가는 연기로 구현해냈다. 의심 없이 요약하고 싶다. <84제곱미터>에서 강하늘의 연기는,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있다고. 올해 영화 <야당> <스트리밍>, 드라마 <당신의 맛>,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3까지 상반기 내내 신작으로 연이어 인사했고 개봉예정 영화 <퍼스트 라이드>까지 앞두고 있는 상황. 부지런한 그에겐 요즘 ‘월간 강하늘’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84제곱미터>는 그 가운데 강하늘의 끓는점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아는 이 배우는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집을 가리킨다. “아무도 들이지 않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잠깐이나마 온전히 집을 누리는 시간을 갖겠다. 오늘은 소파, 내일은 침대, 그다음날은 텔레비전 앞에서.” - 주인공을 미화하지 않는 극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배우가 망가져줘야 하고 풍자적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본이 재미있으면 내가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다. 연기자의 역할은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대본을 사람들한테 재미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성이 얼마나 망가지든 얼마나 예쁘게 나오든 전혀 상관없었다. - 동세대로서 이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안타까웠다. 내가 연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이었다고 해도 우성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돈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승부사도 아니고 독한 향상심도 부족하다. 말하자면 주어진 대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성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짠한 마음도 들었는데, 매사 절박해서 어리석은 짓까지 마다 않는 이 청년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공감해줄 것도 같았다. - 한정된 실내극의 조건 속에서 고조되는 감정선을 단계적으로 표현하는 데 고심한 지점이 있다면. 기술적으로 접근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매우 뚜렷한데 감정의 높낮이는 계속 선명하게 바뀌어야 했다. 기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오직 감정의 진실성에만 기대어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럴 때 나는 영화 속 우성을 바라볼 관객을 상정하고 그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연기한다. 결국 관객에게 ‘보여야’ 한다. 조금씩 극한으로 향해가는 우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감정과 순간들, 그리고 평소 관찰한 것들을 활용했다. - 우성은 거실 맨바닥에 엎어져 자고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늘 구부정하게 앉아 있어 자세로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관객일 때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세부는 잊더라도 인물의 형태만큼은 사진처럼 기억한다. 갑자기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벤치에 앉아 있는 특유의 자세가 떠오른다. 머릿속에 새우밖에 없는 버바와 바닥 청소를 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취한 몸의 ‘태’ 같은 것도 좋아한다. 몸의 자세로 전달되는 감정과 기 억을 표현하고 싶다. - 같은 맥락에서 억울하게 경찰서에 잡혀간 우성이 그 와중에 코인 매도 타이밍을 잡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을 언급할 수 있겠다. 희비극 사이의 균형감각이 돋보였다. 감독님과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고심했던 장면이다. 마냥 웃기면 안된다. 웃긴 장면이 아니다. 우성 입장에선 전 재산이 걸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절박하게 표현하면 관객들이 달아날 것 같더라. 가족이 죽기 직전이라든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든가 하는 비극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나. 인물이 혼자 웃거나 혼자 처절할 때 관객은 오히려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뒤로 빠지게 된다. - 외향은 어떻게 만들어갔나. 철저한 맨얼굴에 평소보다 체중도 불린 것처럼 보인다. 일체의 메이크업 없이 현장 가서 옷 갈아입고 바로 촬영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감독님은 예민함이 극도에 달한 우성의 모습을 위해 체중 감량을 원했다. 그런데 내가 체중이 불어나는 게 맞겠다고 고집했다. 컴퓨터 앞에서 컵라면 같은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 소위 ‘개판 5분 전’으로 사는 남자다. 그런데 깡마른 몸을 연출하면 영화적으로 스타일리시한 캐릭터처럼 보일 것 같더라. 과자 부스러기, 소주병, 족발 뼈다귀와 함께 뒹구는 남자다운 리얼리티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 <84제곱미터>는 그야말로 난장의 미장센을 보여준다. 우성과 달리 실제 강하늘은 청소에 능한 깔끔한 성향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맞다. 청소 이야기를 하니 추천할 아이템이 생각난다. 걸어다니기만 해도 먼지나 머리카락이 싹 모이는 청소용 슬리퍼다. 하루 종일 신고다니다가 자기 전에 슬리퍼 뒷면만 깔끔히 정리해주면 된다. 요새 그 낙으로 산다. 그렇다고 각 맞추고 배열이 중요한 타입은 아니다. 물리적 깨끗함보다는 화학적 깨끗함을 추구하는 쪽인 것 같다. - 10대 시절에 일찍이 부산에서 서울로 배우 생활을 위해 이주했다. 강하늘에게 보금자리가 갖는 의미는. 10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완전 집돌이다. 내성적인 탓도 있겠다. MBTI 검사를 하면 극단적인 I가 나온다. 집에 있을 때만이 휴식이고 집에 있어야만 편안하다. 집은 나만의 동굴이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실제로 촬영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동굴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잠시 연락이 안될 거라는 전언이기도 하다. 크고 좋은 공간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없는 철저한 쉼터다. - 단시간에 응축된 에너지를 밖에서 발산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이후의 배우는 어떤 모습인가. 내가 일을 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전제부터가 조금 다르다. 연기할 때 매 순간 완전한 메소드로 몰입해 나 자신을 다 소진할 정도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은 지양한다. 대본의 의도를 충실히 전하기 위한 표현법을 고민하는 편에 가깝다. - 처음부터 그랬나. 아니면 어느 시점에 정립한 직업인으로서의 태도일까. 연기를 처음 배울 땐 나의 모든 영혼과 감성, 감정, 정서를 다 쏟아넣어서 한마디 한마디를 해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필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내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행복하지가 않더라. 내 일을 내가 즐기면서, 동시에 부끄럽지 않은 책임감을 갖고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연기를 위대한 예술로 놓고 큰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스스로 너무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게 나의 ‘일’이 되면 재미를 누릴 수 있다. 기자님이 주간 마감하듯이 나도 이 일을 계속 잘하고 싶다.

[인터뷰] 놀이기구를 탈 때 느낄 법한 공포와 긴장감을, <전지적 독자 시점> 김병우 감독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 지난 7월23일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싱숑 작가가 쓴 원작 웹소설의 팬들부터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까지 오랜 관심을 받아온 대작답게 영화는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감상의 초점은 대개 원작과의 비교에 맞춰져 있다. 각색 프로젝트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하지만 <더 테러 라이브> 에 이은 신작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좀더 세상 밖으로 나온 느낌”을 받고 있다는 김병우 감독에게는 그 이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시각화라는 과제 앞에 그가 내린 선택들에 대해 <씨네21>이 귀를 기울였다. - 언론배급 시사회 직전까지 후반작업을 했다. VFX 숏들을 다시 보고 사운드 믹싱도 한번 수정했다. 시간을 들일수록 좋아지는 부분이니까. - 2020년에 <전지적 독자 시점> 연출을 제안받고 마음을 정하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다.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가 2019년에 판권을 산 것으로 안다. 단행본과 웹툰이 나오기 전이었고, 웹소설도 완결되기 전이었다. 보통 제작사에서 감독에게 연출 제안을 할 때는 대략적인 시나리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작사에서 <전지적 독자 시점> 원작 소설을 출력해서 택배로 보내줬다. 첫 페이지를 본 순간 빠져들어서 일주일 사이에 모든 분량을 다 읽어버렸다. 이야기는 너무 재밌는데 내가 알고 있는 영상문법으로 풀기가 너무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방법을 나름대로 연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홍수> 작업으로 인해 바쁜 시기이기도 했다. - 원작을 아는 사람들은 여러 편의 에피소드로 된 드라마나 OTT 시리즈가 아닌 한편의 장편영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구현한다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영상화를 처음 논의할 시점에는 OTT 시리즈라는 옵션이 지금처럼 보편적이지 않았다. 영화 만드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던 시기였다. 게다가 회당 제작비 상한선이라는 게 있어서 에피소드 형식으로 가면 한편의 장편영화보다 퀄리티가 낮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감했다. “영화에서는 독자의 노력과 의지가 좀더 보였으면 했다” - 원작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영화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을 텐데. 한편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이야기의 볼륨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감이 있으니 어디까지 영화화할지 정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금호역에서 끊어버리면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만 느낌이고, 충무로역에서 대단원을 맺어야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담을 수 있다고 봤다. 영화 한편이 가져야 하는 시퀀스의 수, 공간의 수라는 게 규범화되어 있으니 그걸 헤아려보더라도 금호역은 모자라고 충무로역에서 더 가면 넘친다. 내게 더 어려운 문제는 이 영화에 실제 사람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 실사화로 인한 이질감을 말하는 건가. 단적인 예로 소설 속 대사를 배우가 말할 때 느껴질 법한 간극이 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문어체 대사를 최대한 배제하지 않나. 영화에서는 활자가 아닌 목소리로 대사가 전달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인데, 실제 사람이 말했을 때 이질적이지 않은 대사를 쓰는 것이 관건이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현대 판타지 액션 장르로 분류되지만 사실 장르는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어주는 겉표지에 가깝다. 도깨비가 나타나 인간에게 시련을 주니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면밀히 다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판타지’이기 때문에 자칫 이야기의 본질이 가려지거나 유치해 보일 수 있겠다는 고민이, 각본 작업을 할 때부터 사운드 믹싱을 할 때까지 이어졌다. 얼마나 현실적이어야 하나, 얼마나 판타지스러워야 하나. 이 두 가지 질문이 카메라를 잡을 때도, 음악을 넣을 때도 따라다녔다. - 고민을 타개하기 위한 묘안이 있었나. 인물들에게 조금 더 현실적이고 깊이 있는 지점을 만들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인공 김독자(안효섭) 외에 이현성(신승호), 정희원(나나) 등의 과거도 지나가는 내레이션을 통해 살뜰히 챙기고 싶었다. 조심스럽지만 원작에서 조금 아쉬웠던 지점이 있다. 독자가 소위 말하는 먼치킨물에서처럼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전개를 연재물에서 볼 때는 재밌고 통쾌하지만,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 남발한다면 이야기가 진행되기 힘들 것 같았다. 영화에서는 개인간의 갈등을 극복해 곡절을 뛰어넘으려는 독자의 노력과 의지가 좀더 보였으면 했다. - 그래서 초입부터 여러 설정상의 변화를 준 건가. 일례로 원작에서와 달리 영화에서는 독자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을 쓴 작가 tls123에게 ‘이 소설은 최악’이라는 평을 남긴다. 그러자 tls123이 독자에게 결말을 다시 써보라고 한다. 작품 전체의 방향성이 달리 읽힐 수 있는 과감한 각색이다. 원작에서는 tls123이 독자에게 <멸살법>의 텍스트 파일을 전달하는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많은 문자를 시각적으로 노출시키기가 어렵다. 극장에서 스크린을 보고 있는 관객에게 긴 글을 읽으라고 할 수는 없다. 소설에서는 가능한 설정이지만 영화에서 구현하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설정이다. 그리고 독자가 <멸살법>을 이미 수차례 읽었다면 텍스트 파일 없이도 많은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또한 tls123의 tls를 한글로 타이핑하면 ‘신’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해당 시점에서는 이 작가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도입부의 변화는 신이 내게 해줄 법한 말을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 원작의 주요 인물인 한수영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영화가 원작에 한수영이 등장하기 이전 시점의 줄거리를 다루기 때문인데, 이를 두고도 개봉 전부터 여러 추측이 있었다. 사실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해 받는 질문의 근간이 모두 원작과의 차이점에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각본을 쓰던 시기보다 원작이 더 많이 유명해지는 바람에 부담이 커졌다. 지금까지는 내가 직접 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원작이 있는 가운데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 거기에서 오는 이점도 있지만 감독으로서 한편의 영화를 만들 때의 입장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의 초점이 각색에만 맞춰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쉽다. 게임보다 자주 떠올린 놀이공원의 이미지 - 전혜진 촬영감독은 <헤어질 결심> <거미집> 촬영팀을 거쳐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촬영감독 데뷔를 한 새 얼굴이다. 어떻게 만났나. 미술, 무술, VFX는 경력이 많은 분들이 맡더라도 이를 찍는 촬영감독은 새로운 시선을 가진 젊은 분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촬영감독으로도 오래 활동해온 <감시자들> <백두산>의 김병서 감독에게 몇분을 소개받았고, 전혜진 촬영감독이 그중 한명이었다. - 그에게 촬영을 맡기기로 결심한 과정도 궁금하다. <전지적 독자 시점>에 대한 이해와 통찰,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그분 나름의 계획을 확인하고자 한 가지 질문을 드렸다. ‘만약 이 영화를 하나의 렌즈로 찍어야 한다면 몇 밀리미터(mm) 렌즈로 찍을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이 내 생각과 거의 같았다. 실제로도 영화의 7, 8할을 그 렌즈로 찍었다. - 답이 무엇이었나. 21mm 와이드 앵글 렌즈. 가급적이면 렌즈의 개수를 줄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드린 질문이었다. 영화에 CG를 포함한 시각적 요소가 다양하기 때문에 카메라라도 단순화해야 화면이 통제될 것 같았다. - 게임 화면처럼 보이는 숏들이 굉장히 많다. 전작 는 FPS 게임 같은 연출로 회자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RPG를 연상시키는 1인칭 숏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원작의 설정을 따른 결과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들에게는 이런 화면이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많이 덜어냈다. 게임보다 자주 떠올린 건 놀이공원의 이미지다. <전지적 독자 시점> 콘티 작업을 하는 동안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생긴 롯데월드에 가본 기억을 떠올리며 롯데월드 테마송을 들었다. 다른 놀이동산과 다르게 롯데월드는 지하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처음으로 입구에 올라섰을 때 눈이 돌아갔다. (웃음) 이 놀이기구도 타보고 싶고, 저 놀이기구도 타보고 싶고…. 그때의 흥분이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영화에 표현되기를 바랐다. 놀이기구를 탈 때 느낄 법한 공포와 긴장감도 마찬가지다. 위험해 보이지만 안전장치가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재미가 있지 않나. 이렇게 현실과 판타지가 공존하는 재미를 관객에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 지하철 역사를 맵으로 조망하는 듯한 부감도 인상적이었다. 앞서 판타지와 현실의 균형을 고려했다고 했는데, 그런 숏이 끼어드는 순간 양쪽을 오가는 쾌감이 일었다. 따지고 보면 그 순간은 모든 인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장면이 초반에 길영(권은성)이 들고 나왔던 개미집과 겹쳐 보이길 바랐다. 독자가 개미를 보는 시선과 성좌가 인간을 보는 시선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VFX로 구현할 수 있는 어룡의 뱃속도 일일이 세트로 만든 이유를 듣고 싶다. 금호역에 가본 사람은 많지만 어룡의 위장 속에 들어가본 사람은 없다. 배우에게 설명하기에도 한계가 있으니 배우가 걷다가 발이라도 빠질 수 있도록, 바깥에서 불빛이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원통으로 된 공간을 최소한으로라도 구현하고 싶었다. 땅강아쥐 제사장 시퀀스도 어려웠다. 모든 면에 중력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우니 스케이트보드장처럼 U자에 가까운 둥근 공간을 만들어 뒤집고 돌려가며 찍었다. - 어룡, 화룡, 땅강아쥐 등이 홀로그램처럼 매끈하게 빛나는 표면을 가졌다. 크리처 디자인에 있어 일관된 컨셉이 있었나.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기 때문에 ‘괴물’이라고 느껴질 법한 모양새를 갖춰야 했다. 자연계에 존재할 수 없는 비비드한 컬러감을 활용하고 싶었다. 영화에서 화룡은 두 가지 버전으로 나오는데, 처음에는 전형적으로 보였으면 했고, 그게 변신한 버전은 공격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하게 보였으며 했다. 팔과 머리가 없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에서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 <전지적 독자 시점>은 <더 테러 라이브>에서 보여준 좁은 공간에서의 박진감, 에서 보여준 게임과 같은 몰입감을 큰 규모로 배가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김병우의 필모그래피에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 그동안 스릴러 밖의 장르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판타지를 다룰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이렇게 등장인물이 많은 영화도 처음이었기에 배우들을 믿으면서 작업하는 법도 배웠다. 그렇게 도전하면서 얻은 재미가 확실히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연출자로서 나름의 확장을 거쳤고, 쓸데없는 고집을 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좀더 세상 밖으로 나온 느낌이다.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우먼후드 <발코니의 여자들>

폭염경보가 내린 마르세유의 여름을 배경으로 한 <발코니의 여자들>은 한집에 머무는 세 여자친구들의 이야기다. 촬영장에서 탈출한 배우 엘리즈(노에미 메를랑)가 친구 니콜(산다 코드레아누)의 거실에 들이닥쳐 격렬하게 숨을 몰아쉴 때부터 전조는 심상찮다. 이 영화는 공황에 빠질 참이다. 첫 소설을 쓰며 고전 중인 니콜은 욕구불만에 시달리고, 성생활에 개방적인 캠걸 루비(수헤일라 야쿠브)는 야유에 익숙하며, 마릴린 먼로 분장을 하고 나타난 엘리즈는 남편을 포함한 모든 남성의 성적 대상이 되는 상황을 더이상 용인하기 힘들다. 첫인상에서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메를랑의 데뷔작엔 양식미를 향한 스타일리스트의 완벽주의보다 참다못해 터져나온 비명의 열기가 한참 앞선다. 발코니를 드나드는 빌라 거주자들을 모조리 훑는 크레인숏이 <발코니의 여자들>의 오프닝 시퀀스다. 사뭇 교과서적일 정도로 제3의 물결 페미니즘을 향한 직접적 응답인 노에미 메를랑의 감독 데뷔작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과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영화의 제왕이든 캔슬 컬처를 대표하는 성범죄자든 간에 여전히 시네마의 명예로 거론되곤 하는 남성감독의 자취- 를 인용하고 다분히 의식하면서 새출발하려 한다. 공동생활의 전경을 유유히 장악한 카메라가 도착한 곳은 가정폭력으로 곳곳에 피멍이 든 여자의 얼굴이다. 곧이어 등장한 남편이 발코니에 누운 여자를 발로 차며 깨우자 죽은 듯 미동이 없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죽음을 가장하기도 한다지만 우리가 보는 건 어떤 방어도 할 수 없어서 죽은 척하기로 한 사람, 한명의 여자다. 곧이어 여자가 결심한 듯 삽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찍어내릴 때 메를랑의 영화는 즉시 주제와 톤을 설정한다. 중요한 것은 살인사건이 아니라 그 세부다. 죽이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보다 더 호들갑을 떨고, 목을 조르지 못해 얼굴을 엉덩이로 깔아 뭉개는가 하면, 완벽 범죄와는 하등 거리가 먼 피투성이 난장이 펼쳐진다. 이웃집의 소요는 금세 세 여자친구에게도 옮겨 붙는다. 맞은편에 사는 잘생긴 이웃 마냐니(뤼카 브라보)가 루비를 강간하려 하면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세 친구는 곧 학대자의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난제에 놓인다. 당신이 만약 <나를 찾아줘>나 <프라미싱 영 우먼>을 좋아한다면 <발코니의 여자들>과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친절과 호감을 가장한 성적 폭력에 넌덜머리난 여자들이 살인마로 돌변하는 일군의 영화가 스릴러와 호러는 물론, 반드시 일말의 코미디와 결합하는 양상이 특징적이다. 얼기설기 터지고 불완전한 모양새의 해방을 겨우 거머쥔 여자들이 웃을 수밖에 없는 해학이 여기 있다. 이들 영화에서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되고 몸이 전시되는 성별도 그와 같다. 여성의 고통을 그리기 위해 여성의 몸을 그래픽하게 보여주는 <리벤지> <서브스턴스>의 코랄리 파르자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한편 <발코니의 여자들>이 유독 표출한 지점은 따로 있는데, 어째서 더 많이 언급되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다. 노에미 메를랑은 감독의 지위를 자발적 신체 노출에 동원했다. 산부인과를 찾은 엘리즈가 진료대에 앉았을 때 카메라에 정면으로 보이는 성기나 남편의 요구에 지쳐 거리로 달아난 순간 원피스 밖으로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가슴을 통해 노골화되는 신체성은 결국 하나의 경구로 수렴한다. 몸은 몸이다. 몸을 몸으로 봐주지 않아 과민해진 엘리즈의 대장은 매일 원치 않는 순간에 방귀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망가져 있다. 역시 몸은 몸이다. “여자의 신비는 선택이 아니라 처벌”이기도 하다고 <발코니의 여자들>은 바꾸어 말한다. 여기서 잠시, 소설가 데뷔를 앞둔 작가 니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기본에 충실하고 감정과 주제를 찾으라는 중년 남성 멘토에게 니콜은 반항한다. 니콜이 바라는 것은 구조적 새로움이다. 싸우고, 구하고, 구원하는 일방향적 전개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인데 용기와 안목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갈피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영화의 시공간도 화자의 바람을 따라 슬며시 해체된다. 한여름 태양이 3차원의 벽 일부를 무너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코니의 여자들>은 이에서 저곳으로 갑자기 숏이 튀고, 혼자 있다 같이 있게 되는 요상한 전환들에 능하다. 현실과 환상, 개별과 집단, 실내와 발코니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지면서 세 여자의 의식은 하나의 거대하고 끈적한 원한이 되어 뒤엉킨다. 마냐니의 죽음 이후 니콜은 그의 유령과 소통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동네 여자들이 죽인 온갖 남자들의 유령에 시달린다. 제각기 다른 폭력의 이력을 소유한 남성 유령들이 집단적 억울함을 호소할 무렵에 <발코니의 여자들>이 지닌 산만함도 극에 달한다. 실실 웃기면서도 유령들의 필요를 의심할 때쯤, 니콜은 유령 마냐니에게 기어이 자백을 받아낸다. 자신은 강간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던 남자가 끝내 “나는 여자를 강간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도록.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를 중심으로 스크린에 음습함을 불러내고 다른 세계로의 당혹스러운 초대를 알렸던 아날로그적 유령들이 메를랑 영화에서는 오직 증언을 위해 쓰인다. 아우라를 잃고 완전히 납작해진다. 이 영화가 별도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도 전에 스스로 죽은 남자들도 메를랑이 집요하게 추궁하고자 한 유령들의 일원일 것이다. <발코니의 여자들>이 걸어가는 구불구불한 행로에서 비집고 나온 초현실성은 극도로 역겨운 현실성을 가리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때만 진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 이 흘러넘치고 정신 사나운 영화가 남긴 메아리는 소동의 뒷맛도 복수극의 쾌감도 아니다. 여자친구들이 모인 첫날 밤, 엘리즈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확한 쓸모를 직감한다. <발코니의 여자들>은 궁극적으로 세 주인공을 결속시키고 인생이 그들에게 던지는 무감한 폭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우먼후드, 여성들의 우정에 바치는 찬사다. 그러므로 시체를 빠트린 바다에서 돌아와 다시 향할 곳은 제목 그대로 그들의 발코니여야 한다. 세상의 위협을 감수하는 동시에 서로를 지켜볼 수 있는 경계의 공간. 그곳에서 충동과 혼란을 나누고 서로에게 해방감을 선사한 뒤 다시 거리로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진실만큼은 <발코니의 여자들>이 끝까지 지켜낸 달콤한 약속이다.

[리뷰] 재개봉 영화 <남색대문>

이 더위는 언제쯤 끝날까. 여름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산뜻한 바람을 맞이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계절로서 짓궂게 서 있을 뿐이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 비로소 미풍을 껴안게 된 청춘들의 이야기인 <남색대문>이 7월 마지막 주에 다시 열린다. 2002년 대만 개봉 이후 한국에서는 영화제와 기획전을 통해서만 소개되다가 2021년 8월 국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 지 4년 만이다. 대만 청춘영화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 작품의 재개봉을 맞아 주연배우 계륜미도 12년 만에 내한 소식을 알렸다. 그는 8월8일과 9일 무대인사와 GV 행사에 참여해 자신의 데뷔작에 얽힌 추억을 관객과 나눌 예정이다. <남색대문>에 출연한 경험을 두고 “인간 본성에 대해 더 다양하고 관용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고,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밝힌 계륜미의 고백은, 그가 연기한 주인공 커로우의 성장을 지켜본 관객이 새겼을 법한 감상과 맞닿아 있다. 17살 커로우는 동성 친구 위에전(양우림)을 친구 이상으로 바라보게 됐지만 위에전의 시선은 남학생 장시하오(진백림)를 향해 있다. 커로우는 수줍은 위에전을 대신해 장시하오에게 다가가고, 장시하오는 그런 커로우가 궁금해진다. 두 소녀와 한 소년이 그린 삼각형은 제법 익숙한 모양새다. 시대를 불문하고 하이틴 로맨스의 단골 소재로 쓰였으니까. 다만 이 영화는 짝을 짓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 선으로 연결됨으로써 선명해지는 꼭짓점 하나하나를 보듬는다. 마음이 엇갈리는 동안 풍경은 애틋해진다. 스크린을 채운 타이베이의 여름 안에서, 너를 통해 나를 알아가던 시절의 낙서를 재발견하시기를.

[WHO ARE YOU] 사랑스럽지만 사납게, <좀비딸> 최유리

시퍼렇게 질린 얼굴과 초점 없는 동공으로 ‘으어어’대는 울음소리만 내며 사람을 물려 달려드는 저 존재가 내 딸이라니. 하루아침에 좀비가 된 딸 수아(최유리)를 보며 정환(조정석)이 착잡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귀엽고 순수했던 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까닭에 정환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금쪽같은 좀비 딸’을 거두기로 결심한다. 이윤창 작가의 웹툰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이 영화화될 때부터 영화의 성패는 좀비가 된 딸 수아 역에 달려 있었다. 일찌감치 <원더풀 고스트>에서 마동석과 티격태격 애드리브를 주고받으며 부녀 케미를 선보였던 아역배우 최유리라면 “무섭지만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만 무서운 좀비”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를 구현할 적격자였다. 무엇보다 “원작이 지닌 개그 코드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웹툰 연재 시절부터 열렬한 애독자였던” 만큼 운명처럼 좀비 수아를 만나게 됐다. 일상에 적응하려는 좀비를 표현하기란 배우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였다. 프리프로덕션 때부터 전영 영화 안무가와 “좀비 특유의 무서운 분위기는 유지하되 설명하기 어려운 귀여운 면모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며 트레이닝에 임했다. 특히 “좀비가 된 상태에서 감정을 드러내거나 정환과의 훈련을 통해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고. 최유리는 “동물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며” 해답을 얻었다. “사나운 강아지나 사람 손을 잘 타지 않는 길고양이처럼 공격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귀여워 보이는 동물을 많이 참고했다.” 좀비가 된 수아의 감정 표현이나 울음소리를 묘사하는 데는 반려견 ‘강만두’의 공이 컸다. 수아는 할머니 밤순(이정은)의 효자손을 두려워하거나 연화(조여정)의 살기를 느낄 때마다 몸이 움츠러든다. “보통 표정에 감정이 드러나는데 좀비가 된 수아는 그럴 수 없어서 문제였다. 우리 집 강아지 만두는 항상 뭔가를 잘못하면 내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돌려 한껏 움츠러들더라. 그 모습에서 몸짓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터득했다.” 타고난 사육사 아버지 정환의 노력으로 수아는 점차 달라지기 시작한다. “처음엔 정환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저건 내 먹이다’, 혹은 ‘나를 해치려는 상대다’라는 단순한 감정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 존재임을 인지하고, 점차 ‘보호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훈련이 진행될수록 이 사람은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수아가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 극적인 변화는 훈련의 결실만큼이나 두 부녀의 단단한 관계 덕이었다. 두 사람에게 서로의 존재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비록 대부분의 시간을 좀비 상태로 보냈지만 극의 후반부에 “정환이 필사적으로 수아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장면”은 연기를 넘어 진심으로 마음이 동한 순간이었다. “그 처절함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됐다. 얼마나 소중하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가족의 의미를 곱씹게 됐다.”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는 K팝을 좋아하고 보아의 에 맞춰 춤을 추던 사춘기 수아처럼 촬영 당시 최유리도 학교생활을 소화한 영락없는 15살 소녀였다. 차이가 있다면 “K팝도 좋아하지만 가사 없는 재즈나 클래식을 더 많이 듣는” 음악 취향 정도. 요즘에는 가수 안예은의 노래에 빠져 무한 반복 중이라고. 최근에는 새에게 푹 빠져 “집에서 조류 도감을 읽는 게 취미”가 됐다. “어느 날 부엉이 사진을 보게 됐는데 그날 이후 새의 귀여움에 푹 빠져 그만 ‘부’며 들고 말았다. (웃음)” 초롱초롱한 눈으로 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아직도 순수함이 묻어나지만 어느새 데뷔 11년차를 맞았다. <외계+인>의 김태리, <소풍>의 나문희처럼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던 시절을 지나 <좀비딸>을 통해 어엿한 주연배우로 성장했다. 앞으로 어떤 장르, 어떤 캐릭터를 만나도 “관객의 마음에 닿는 배우”가 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한번 나왔을 때 여운을 주는 배우, 오래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 filmography 영화 2025 <좀비딸> 2024 <검은 수녀들> <소풍> 2023 <외계+인> 2부 2022 <외계+인> 1부 2018 <원더풀 고스트> 2015 <비밀> 드라마 2020 <이태원 클라쓰> 2019 <첫사랑은 처음이라서> <미스터 기간제> <힙합왕 – 나스나길> <하자있는 인간들> 2018 <마더> <시크릿 마더> <#좋맛탱>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복수가 돌아왔다> 2017 <행복을 주는 사람> <피고인> <다시 만난 세계> <밥상 차리는 남자> <로봇이 아니야> 2016 <아이가 다섯> <원티드> <리얼터>

[비평] 앎과 모름 사이에서, 유선아 평론가의 <미세리코르디아> <여름이 지나가면>

알랭 기로디 감독의 <미세리코르디아>가 제빵사의 장례식에서 이어진 그 아들의 실종-살인 사건과 이방인 제레미를 둘러싼 치정을 여러 인물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면,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먼저 세상을 조금 더 알아버린 한 소년이 그 여름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다른 소년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보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앎과 모름 사이에서 파생되는 신경증적 긴장과 아연함이며, 떠남을 지켜보는 어린 두 형제에게 남은 아릿한 슬픔이다. 앎과 모름은 무지의 단순한 경계 안팎이 아니라 자기 삶을 등에 업고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파편적 실체, 아무래도 저편에서 바라볼 수 없는 진실의 비가역성을 드러낸다. 시학에서 비극의 요소는 공포와 애련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앎의 격차는 삶에서도, 서사에서도 비극을 야기한다. 신은 영웅의 운명을 알지만 영웅은 그 앞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당신은 아는 이야기를 나는 여전히 모른다. 잘려나간 진실의 단면만을 보는 이는 그보다 더 알고 있는 이를 때로 애태우고 목마르게 한다. 제레미는 떠나온 마을을 다시 찾는다. 오래전 사랑했었고 한번도 잊은 적 없던 마을 제빵사 장피에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제빵사의 아들 뱅상은 제레미가 자기 어머니 마르틴과 자고 싶어 한다는 추잡한 망상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린다. 제빵사의 죽음과 제레미의 등장에 침묵을 지키던 마을 사람들은 뱅상의 실종 이후 마르틴의 식탁에 모여 각자 하고픈 말을 쏟아낸다. 뱅상의 아내 아니는 사라진 남편이 평소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또 남편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어땠는지 불평하고, 마르틴은 아들의 행방을 궁금해하면서도 제레미가 지난밤을 어디서 누구와 보냈는지에 더 관심을 보인다. 말을 하면 할수록 실종-살인이라는 사안의 실체에 이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가 드러날 뿐이다.그중 왈테르의 입지는 눈에 띈다. 그는 주로 과거를 회상하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견주어 확인해본다. 어린 시절 친구인 제레미를 내치지 않으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제레미가 거짓 증언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다닐 때 적극적으로 추궁하는 이는 왈테르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그를 사안의 실체에 다가서고자 하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왈테르는 제레미가 어떤 연유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한 건지, 왜 사람들에게 뱅상과 자신이 서로를 질투한다고 말하고 다니는지 따위에 집착한다. 진실, 말하자면 사안의 실체에 다가설 수 없도록 막아서는 것은 ‘욕망을 일으켜라, 사랑이 죄를 데려올지라도’(<씨네21> 1515호, 남다은의 리코더 ‘욕망을 일으켜라, 사랑이 죄를 데려올지라도’ )에서 말해진 바와 유사하게 욕망, 성애에의 애욕이다. 애욕에의 집착은 시체의 발견을 막아선다. 한편 제레미는 그 이름도 신성한 어머니(마르틴)와 사제(필리프)의 사랑과 비호 아래에 있다. 그가 둘 모두를 원한 적 없는 이유는 ‘친구의 어머니를, 종교에 귀속한 자를 욕망하지 않는다’는 인간 보편 금기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제레미의 경우, 도덕 위에 세워진 금기로 인해 두 사람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수사를 진행하는 경찰 역시 진실을 수호하는 자가 아닌 의심을 신봉하는 자에 가깝다. 모두의 시선 아래에 하나의 진실로 귀결되지 못하는 사건을 지켜보자니 우리 또한 그들의 처지에 놓이는 순간이 온다. 마르틴은 정말로 경찰에게 열쇠를 건넸을까? 마르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영화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제레미의 의심에서 뿌리내린 진실의 파편을 마주하게 된다. <미세리코르디아>는 금기와 욕망이 가로막을 때 인간 본성은 과연 진실을 보려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숲을 뒤흔드는 돌풍처럼 이 마을에는 성애에 눈먼 애욕의 바람이 분다. 알랭 기로디는 다시 한번 살인과 성애를 같은 장소에 놓는다. 두 욕망 사이를 오가는 제레미는 필리프와의 마지막을 묘지에서, 마르틴과의 마지막을 침실에서 장식한다. 마르틴과 굳게 잡은 두손은 금기의 욕망을 마침내 깨닫고 이용하기로 한 자의 손길이다. 도덕 위에 금기가, 금기 위에는 욕망이, 욕망 위에 기만이 놓인다. 그리고 저 아래 가장 깊은 곳에는 시체가 파묻혀 있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진실을 파편화하는 것이 욕망이라면 <여름이 지나가면>에서 진실을 깨닫는 순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구조화된 배타와 낙인의 시선이다. 그간 앎과 모름의 격차는 어쩌면 서사 속 인물과 관객만큼, 신과 인간만큼 멀어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여름이 지나가면>이 남기는 씁쓸함과 잔잔한 충격은 사회구조를 향한 단편적 인지의 차이를 또래 소년에게 대입함에서 온다. 기준(이재준)은 지역에 새로 이사 온 전학생이다. 같은 반 영준(최우록)과 그의 형 영문(최현진)은 이상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지만 부모가 없는 형제의 분방한 생활과 태도에 기준은 금세 이끌린다. 영문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말투를 남몰래 따라 하고 위계 놀이에 가담하는 기준의 마음을 영문은 내심 알고 있다. 그는 기준의 엄마(고서희)가 아들과 어울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에 앞서 정확하게 상대가 듣고자 하는 말과 아닌 말을 번갈아 내던질 수도 있는, 타의에 의해 조숙해질 수밖에 없던 소년이기 때문이다. 영문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을 복제해 자신을 만들어나간 아이와 같다. 기준의 엄마가 형제를 보는 시선은 다소 복합적이다. 사연을 모를 땐 이해하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다가 측은하게 여기기도 하고 기준을 망치는 주범으로 영문을 몰아세우기도 한다. 영준의 담임 선생님은 지역 토박이 어른들이 형제를 향해 보이는 태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형제를 향한 배타성은 내내 무심함으로 가장되었다가 체육대회 날 반장 석호와의 대화에서 형제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구분 짓는다(“어쩌겠어? 온다는 거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기준의 엄마와 선생님이 복구한 폐쇄회로 영상을 함께 확인할 때 이들이 보아야 하는 온전한 사건의 진실은 화면에 없다. 거기에는 미처 복구하지 못해 불완전한 형체만이 있을 뿐이다. 흐릿하게 움직이는 세 아이들 중에서 마치 조실부모, 결손가정이라는 인식표가 붙어 있기라도 한 양 선생님은 영준을 지목하고 기준의 엄마는 그 답을 확신한다. <여름이 지나가면>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기준과 형제는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다. 신호등 없는 도로에서 잠시 차를 멈춰 세운 건 기준의 엄마지만 기준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린다. 두 소년은 기준의 모습이 여름의 무더운 공기 아래 드러나길 기다렸다 미약한 실망을 내비친다. 이전에 영문은 알았고 기준은 몰랐던 사실, 즉 어른들이 수용하던 진실(“너희는 달라”)의 격차가 좁혀지는 순간이다. 세상의 일을 먼저 깨달았던 비련의 소년이 뒤돌아본다. 이번엔 소년에게 보이지 않는 진실이 우리에게 보인다. 영문은 그때 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나중에라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밀한 복기로 자기를 위로하는 대신 소년은 욕설을 내뱉고 아무 곳에나 발길질할 것이다. 그는 모르고 우리는 알고 있다.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년의 슬픔은 지켜보는 우리 몫이다.

[김신록의 정화의 순간들] Endless

연출가가 ‘관객이 무대를 그냥 구경하는 게 아니라, 관객을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우가 아니라 인물이 무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1인극은 기본적으로 배우가 여러 배역을 오가게 되어 있어서 ‘저는 이런저런 배역을 수행하는 한명의 배우입니다’가 강력한 전제로 작동하는데 이런 전제 속에서 왜, 어떻게 내가 인물이 될 수 있지? 그리고 내가 인물이 되면 그게 관객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나? 오히려 인물이라는 테두리, 이야기라는 테두리가 확고할수록 관객은 마치 제4의 벽을 대하듯 안전한 거리에서 무대를 구경하게 되는 것 아닌가? 관객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생각은 무엇일까? 생각은 어떻게 생겨나고 흘러가는가? 삶에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질문이 생길 때면, 바로 예술 작품 앞으로! 이훤 작가의 사진전 <공중 뿌리>를 보고 왔다. 나를 사로잡은 사진. 벽 아래쪽에 붙은 사진: 포근하고 주름진 이불 아래로 나온 두개의 맨발 그 벽에 면한 바닥 가장자리에 붙은 사진: 무성한 여름 나무들이 울창한 숲 저 침대 위 맨발의 주인이 꿈속에서 울창한 숲을 헤매고 다닐 것 같은 상상. 나도 저런 숲을 헤매고 싶어. 맞아. 혼자 훌쩍 떠나서 제주도 무슨무슨 왈, 무슨무슨 오름, 그런 곳을 헤매고 싶어. 난 사실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그런데 난 운전을 못해서 차를 렌트하지 못할 텐데? 정신 차리자, 신록아, 귀엽고 겁 많은 기계치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사실 하루하루 차근차근 더듬더듬 배워나가는 걸 싫어해서 운전을 못하는 거야. ‘매일매일 꾸준히, 더디더라도 조금씩’ 같은 배움의 자질이 네 몸에 없는 거야. 어린 시절 한때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하는 바람에 더듬더듬 배우는 법은 훈련하지 못한 거야, 나도 네가 뭐든 잘 배울 줄 알았지. 근데 대충 휘리릭 한방을 노리지 차근차근은 정말 돌아버리는 거야. 나도 이런 내가 아주 돌아버려. 그래, 어제 만난 ◦◦ 언니는 유튜브 보면서 매일매일 눈 주위 아홉개 근육을 단련한다잖아, 처지는 눈꺼풀과 나빠지는 시력을 개선하려고. 그래, 매일매일, 요새 유튜브만 봐도 얼마나 강의들이 잘돼 있니, 골반 교정 명의를 찾아가네 마네 하지 말고 아…허리 아파… 요새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그래. 어? 나 방금 생각했네? 난 지금 사진을 보는 것인가 내 생각을 한 것인가. 사진이 일종의 포털을 열어주면 나는 나의 상념의 세계로 날아간다. 이훤의 사진들 혹은 사진들의 배치는 온통 이런 식이었다. 작품과 배치는 일종의 포털이고 관찰자는 그 열린 포털을 통과해 나와 세계에 대한 상념의 세계로 날아가는 것. 내가 좋아하는 예술은 바로 이런 것인가보다. 마치 해리 포터의 9와 4분의 3 승강장 같달까? 혹은 마법의 플루 가루 같달까? 이 사진들과 배치와 사진이 배치된 벽과 바닥과 창문과 천장과, 그 창문 너머 성수동의 풍경과, 그리고 그 안의 나와, 나의 상념 속에 펼쳐지는 풍경까지, 끝이 없고, 그러므로 끝없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ndless. d/p 갤러리에서 열린 최상아 작가의 개인전 을 볼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공간을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큰 종이에 듬성듬성 뚫어놓은 둥근 구멍들, 그 구멍을 통해 멀리서 가까이서 위에서 아래서 좌에서 우에서 볼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들, 한장이자 여러 장이 덧대어 접합된 단면들, 종이의 일부에 금을 긋고 그 금을 따라 종이의 각을 세워 평면 안에 입체를 숨겨놓은 부분들, 뒷면에는 앞면의 작업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새로운 터치들. 나와 그림이 서로 넘나들면서 내가 그림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그림이 나의 상념으로 뻗쳐 들어오기도 한다. 종이이자 종이가 아니고 평면이자 입체고 회화이자 설치이고 개별 작품이자 그룹 작품인,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 작품의 연장선으로 포섭하고 그럼으로써 나도 그림의 일부이기도 한, 어? 나 생각하고 있네? 생각은 온통 덮쳐온다. 생각은 감응으로 온몸을 감싼다. 생각은 감각을 동반한다. 생각은, 생각과는 달리, 직선적이지 않고 꿈처럼 휘어지고 끼어들고 찢어지고 횡단한다. 여기는 전시장이므로 애쓰지 않아도 내 눈엔 다시 그림이 스치고 그 그림이 열어주는 포털을 통해 나는 다시 덮쳐오는 감각을, 감응을, 생각을, 그리고 그 찢어지고 휘어지는 생각 속에서 다시 감각을, 감응을, 생각을 만난다. 아, 영원히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 하지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나는 전시장 문 닫기 1시간 전에 도착했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버린다. 다시 한번, 연극은 어떻게 관객을 생각하게 만들까? 생각은 혹은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배치가 포털을 열어줄까, 어디에 어떻게 구멍을 뚫어야 관객이 위아래좌우앞뒤로 연극을 뜯어볼까, 연극이 어떻게 구불구불 펼쳐져야 관객도 세계도 연결될까. 사실 좀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는데 다 와서 건물 안에서 길을 잃었다. 다행히 전시장 관계자 번호를 알고 있어서 어찌저찌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이 전시장을 찾아오지 못하는 나에 대해 이제는 정말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사실 이 전시장 바로 옆 작은 사무실에서 나는 거의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달에 한번씩, 시각예술가, 큐레이터, 공학자, 사업가 등이 모인 NFA 스터디에 참여했었다. 이 전시장 관계자도 그때 그 스터디 멤버였는데, 전화를 받고 나를 구해주러 복도까지 나와서는, 스터디며 전시며 숱하게 들락거린 이곳을 어떻게 못 찾을 수가 있냐고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그 사무실을 우연히 발견했었다. 엄청난 길치인 것도 사실이지만, 으레 나는 길치라는 생각에 항상 넋 빼고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지나가는 옆 사람을 보고 ‘왠지 힙해 보이는데 이 사람 갤러리 가나?’ 하며 뒤를 밟는 식으로, 혹은 운 좋게 다른 스터디 멤버를 건물 앞에서 만나서 그 사람 따라, 혹은 화장실 가려고 나온 다른 멤버를 복도에서 만나 운 좋게 등등. 나는 1년 가까운 시간, 거의 열번에 가까운 기회를 매번 ‘이번 한번만 때우자’는 심정으로 소진한 것이다. 신록아, 정신 차리자, 네가 길치인 건 작심하고 길을 알아보고 찾고 외우려는 노력이 없어서야. 너처럼 길 안 보고 다니는데 길을 아는 사람은 없어. 넌 거의 눈 감고 다니잖니. 전시장 구석에서는 d/p 갤러리가 운영하는 작은 출판사 소환사의 책들을 소소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맹지영 큐레이터가 쓴 <그림의 시간>이라는 책을 샀다. 큐레이터가 하나의 그림을 하루 4시간씩 5일 동안, 그러니까 일주일간 총 20시간씩 한 작품만 들여다보면서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무엇까지 볼 수 있는지’를 적어 내린 책이다. 책에는 총 5개의 작품에 대한 위와 같은 방식의 보기의 기록이 실려 있고, 거기에는 최상아 작가의 작품에 대한 기록도 있다고 해서 냉큼 구매했다. 나도 정말이지, 주 5일 하루 4시간씩 한 작품만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뭔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힘을 기르면, 운전도 할 수 있게 되고 10번쯤 가본 곳은 지도 없이도 찾아갈 수 있게 되겠지? 제발 어느 날엔가 이 지면에다, 내가 운전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승전보를 전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연극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연극에서 관객은 무엇을 보는 걸까, 그리고 그 이전에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가, 라는, 어쩌면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질문이 또다시 떠오른다. 책상 위에 펼쳐진 1인극 대본은 1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총 90페이지다. 나는 조금 전까지 7장, 35페이지를 읽다가 이 모든 상념에 빠져든 것이다. 이제 생각은 그만하도록 눈앞에 펼쳐진 35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어야겠다. 연극이 텍스트와 내 몸과 소리와 무대와 조명과 의상과 분장과 대도구와 소품과 객석과 극장 건물의 배치로 이뤄진 거대한 포털이 되고, 관객과 만나는 순간 그 포털이 열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자기와 세계의 상념을 헤매고 나오고 헤매고 나오는 구불구불한 시간을 만들 수 있도록, 일단 대본을 외우자. 이 글을 읽는 <씨네21> 독자 여러분, 공연 보러 오세요! <프리마 파시>는 충무아트센터 중극장블랙에서 8월27일부터 11월2일까지 공연합니다. ‘프리마 파시’는 라틴어로 ‘일견’이라는 뜻이라는데요, 공교롭게도 제목 자체가 ‘보기의 방식’ 중 하나라는 게 흥미롭네요. ‘반증이 없는 한 유효하다고 여겨지는 사실이나 증거’라는 뜻의 법률 용어이기도 하답니다. 이제 정말 대본을 보겠습니다. 식당 반대쪽 끝에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몇명 있어. 우린 고개를 낮추고 키득거려.

[기획] 2025년 하반기, 주목할 영화산업 · 정책 키워드는?

말 그대로 폭풍 전야다. 지난 6월 출범한 새 정부의 국정기획위원회가 정부 조직개편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고, 오는 8월 중순 그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영화 관련 조직의 변화 역시 논외는 아니다. 조직개편에 따른 관련 인사 교체, 정책 변화 역시 이뤄질 계획이다. 또한 서울영화센터가 11월에 개소하고, 극장 할인쿠폰 사업으로 긴급 수혈한 극장가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등에도 관심이 모이고 있다. 다가오는 8월부터 주목해야 할 영화산업·정책의 내용이 무엇일지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Keyword ① - ‘미디어콘텐츠부’ 신설되나? 아직은 국정기획위원회의 공식적인 발표가 없는 상황이지만, 영상 관련 부처에 대대적인 재편이 이뤄질 것이란 소식이 정계와 영화계에 퍼지고 있다. 영상·영화와 방송·미디어·콘텐츠 정책 등을 총괄하는 행정부처 ‘미디어콘텐츠부’(가칭)가 신설된다는 것이다. OTT 플랫폼 시장이 본격적으로 몸집을 키움에 따라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 개정과 관련 부처의 개편 필요성은 이전 정부부터 꾸준히 대두됐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23년에 공개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전면 개정 방안 연구’ 보고서는 “현재 영상산업의 법적 규율 체계가 영상산업 환경의 급변을 따라가지 못하여 영상산업 및 영화산업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 요소”이며 “콘텐츠 중심의 영화-영상물 통합 진흥 법제를 통해 영상매체 융합 환경 대응 및 산업 활성화 방향성”을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OTT 콘텐츠에 대한 정부 정책은 한국콘텐츠진흥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산재되어 있다. OTT에 공개되는 ‘영화’ 콘텐츠에 대해 영화진흥위원회가 정책적으로 개입할 수도 없다. 이에 현재 국정기획위원회 사회 2분과에선 부처 신설 및 개편을 통한 미디어·콘텐츠 정책 일원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영화·영상·방송뿐 아니라 다른 문화예술계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를테면 게임 정책에 대해서도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게임물관리위원회의 기능을 재편한 ‘게임·e스포츠 산업진흥원’ 신설 등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다. Keyword ② - 영화진흥위원회의 향방은? 미디어콘텐츠부 등 미디어·콘텐츠 관련 부처가 신설되고 관련 기구가 통폐합된다면 영화진흥위원회 거버넌스가 어떻게 변할지는 미지수다. 현재는 독립적인 민간 거버넌스 기구로 운영되고 있으나, 영화·영상산업의 헤게모니가 미디어콘텐츠부로 편입될 경우 영화진흥위원회의 존립이나 운영 방향성에 큰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등 기존의 영상·영화 관련 기구 역시 미디어콘텐츠부에 편입될 것인지, 편입되지 않는다면 각 조직의 기능이 어디까지 유지될 것인지, 영화발전기금의 운용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등 한국 영화정책에 대한 커다란 변모가 이뤄질 것이다. 영화·영상 관련 부처와 기구의 재편에 따라 관련 인사의 교체 사안 역시 주목받고 있다. 12·3 계엄 등 혼란스러운 정국을 거치며 한동안 유보되었던 한국영상자료원 신임 원장 공모 등 관련 인사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으로 보인다. <씨네21>은 이번 ‘2025 한국 영화산업과 정책’ 연속기획을 통해 새 정부의 조직개편과 영화진흥위원회의 체제 변화 등을 꾸준히 살필 계획이다. Keyword ③ - 서울영화센터 개소는? 서울시는 오는 11월 서울영화센터를 개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서울시 시네마테크 건립은 2006년부터 추진되어 2015년에 서울시가 본격적으로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공식 발표 이후 10년이 흐른 뒤 서울영화센터라는 이름으로 문을 여는 것이다. 2024년 서울 시네마테크란 이름이 서울영화센터로 변경되고 운영 주체가 서울경제진흥원으로 이관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해당 사업에 관여했던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등 영화계 인사들은 반발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또한 개소를 코앞에 둔 서울영화센터의 운영 대행사와 구체적인 운영 방식 등이 공개되지 않고, 서울영화센터 건립에 따라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 운영이 종료되는 사실 등에 의문의 목소리가 잇따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씨네21>이 취재한 결과, 지난 6월부터 서울영화센터는 영화 제작자, 독립영화계, 영화관 관계자, 영화평론계, 영화학계 등의 단체·인사를 초청한 운영위원회를 꾸려 영화계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있다. 또한 이번주(8월7일 기준) 내로 서울경제진흥원은 서울영화센터의 상영관 용역 공모를 시작할 예정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블라인드 제안서 평가 방식을 채택하고 관련 산업, 학계 등 각 분야의 평가위원을 분야별로 초빙해 최대한 공정한 공모를 진행”하겠다고 전했다. 당장 오는 9월부터 시범 운영에 돌입할 서울영화센터의 운영 현황과 방향성에 대해서도 <씨네21>의 ‘2025 한국 영화산업과 정책’ 연속기획에서 논의할 예정이다. Keyword ④ - 극장의 미래는? 극장 할인쿠폰 사업을 통해 단기간 관객수 증가를 이끌긴 했으나, 극장가의 사정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만성 적자를 이기지 못한 메가박스중앙-롯데컬처웍스가 지난 5월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극장가의 어려운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더하여 영화푯값, 홀드백, 객단가, 영비법 개정, 스크린독과점 등 영화산업의 해묵은 구조적 문제들도 여전하다. 새 정부의 영화·영상 관련 부처 개편이 실행된다면 영비법 개정 등을 통한 영화산업의 체질 전환이 이뤄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를 위해 영화계 관계자들은 날마다 국회와 정부에 출입하며 영화정책 진흥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다. 영화산업의 근간인 극장산업이 올해 어떤 분수령을 맞을지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특집] 걸작이 걸어온 40년의 시간, <스탑 메이킹 센스>를 향한 네 가지 질문

<스탑 메이킹 센스>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1979년 여름. 조너선 드미는 뉴욕에서 토킹 헤즈의 콘서트를 관람한 후 이들의 팬이 된다. 1983년 여름. 드미는 다시 한번 로스앤젤레스에서 토킹 헤즈의 라이브를 접하고 이들에게 공연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건넸다. 토킹 헤즈는 영화에 대한 창작자로서의 권리와 소유권을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음반사로부터 선지급금을 받아 영화 제작비를 자체 조달했다. 그해 12월 조너선 드미와 토킹 헤즈는 할리우드의 판타지스 극장에서 총 나흘간의 촬영에 돌입한다. 나흘의 공연 중 베스트컷을 이어붙여 한편의 영화를 만든 것이다. 한 프레임에 동원되는 카메라의 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매 공연은 한쪽 앵글에서만 촬영됐다. 1일차는 공연장 오른쪽에, 2일차는 공연장 왼쪽에 카메라를 고정하는 식이었다. 조너선 드미는 카메라에 보이는 쇼의 모습이 실제 관객의 육안과 동일하길 바랐다. “훌륭한 순간 하나를 오래 잡아두는 데서 더 큰 힘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야 불필요한 컷으로 흐름을 방해하지 않은 채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다. 과잉의 컷은 대개 연주자나 음악에 대한 편집자의 확신 부족을 드러낼 뿐이다.” 데이비드 번과 조너선 드미는 후반작업 중 “관객을 비추는 숏을 줄일수록, 영화는 관객을 위한 특별한 작품으로 자리한다”는 믿음으로 영화에 관객의 리액션숏이나 멤버들의 인터뷰 푸티지를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스탑 메이킹 센스>의 4K 리마스터링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A24는 <스탑 메이킹 센스>의 개봉 40주년을 맞아 원본 필름의 4K 리마스터링에 들어간다. 당초 이들이 확보했다고 생각한 필름은 조너선 드미가 영화의 개봉 15주년을 맞아 만든 인터포지티브(오리지널 네거티브로부터 프린트된 포지티브필름)였다. 복원 담당자인 제임스 모코스키는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두달여간 수소문하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모코스키는 끝내 <스탑 메이킹 센스>와 하등 상관없는 MGM 필름 라이브러리에 문의 전화를 건다. 이윽고 캔자스에 있는 MGM 보관소에서 유실된 줄 알았던 <스탑 메이킹 센스>의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미개봉 상태로 발견된다. 모코스키는 오리지널 35mm 프린트의 모든 프레임을 4K로 스캔했다. 복원팀은 촬영감독 조던 크로넌웨스가 만들어낸 색 균형과 밝기를 해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고 그의 아들인 제프 크로넌웨스를 4K 스캔 작업의 자문위원으로 참여시켰다. 한편 <스탑 메이킹 센스>는 1984년 당시 디지털 오디오로 사운드를 녹음했다. 당시로선 최신 기술을 사용한 셈인데, 이로 인해 리마스터링 과정에서 고음질의 복원과 전면 재믹싱이 수월했다고 한다. 누가 <스탑 메이킹 센스>를 좋아하나 연출작마다 사운드트랙 리스트를 수급하게 만드는 감독 에드거 라이트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00편’의 리스트에 <스탑 메이킹 센스>를 올렸다. 펑크의 템포와 리듬을 꼭 닮은 편집 신공의 소유자 사프디 형제 또한 <스탑 메이킹 센스>를 애착 영화로 꼽았다. 누구보다 <스탑 메이킹 센스>를 사랑하는 필름메이커는 폴 토머스 앤더슨일 것이다. 인도로 간 조니 그린우드의 앨범 작업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주눈>을 연출할 당시, 앤더슨은 “예술로서의 영화가 지닌 가장 숭고한 목적은 움직이는 음악을 포착하는 것” 이라는 조너선 드미의 연출론을 깊이 절감했다고 밝혔다. “조너선은 <스탑 메이킹 센스>에서 평소라면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을 부분, 이를테면 무대 전체나 연주 장면이 아닌 퍼포머의 얼굴 클로즈업을 아주 오래 담는다. 숨이 멎을 만큼 강렬하다.” 앤더슨은 <주눈>에서 <스탑 메이킹 센스>를 직접적으로 인용한 카메라워킹을 선보인다. 그는 <주눈>의 공개 이후 인터뷰마다 “나는 절대 조너선의 성취를 능가할 수 없다”라며 경의를 표했다. 데이비드 번의 오버사이즈 슈트는 어떻게 탄생했나 <스탑 메이킹 센스>를 떠올리면, 아니 데이비드 번을 떠올리면 누구든 그가 오버사이즈 슈트 차림으로 무대를 누비는 영상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될 것이다. 티나 웨이머스와 크리스 프란츠의 무대가 끝나자, 데이비드 번은 몸집의 두배에 달하는 스톤 그레이 컬러의 슈트를 입고 무대에 오른다. 이토록 아이코닉한 패션은 데이비드 번의 친구인 디자이너 게일 블래커로부터 탄생했다. 번은 블래커에게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더 크게 보여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전해 들었고, 이 아이디어를 자신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의상에도 구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걸출한 공연 연출자이기도 한 데이비드 번의 목표는 오버사이즈 슈트를 통해 “자신의 머리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드는” 것. 이는 ‘토킹 헤즈’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룩이기도 하다. “음악은 굉장히 신체적인 것이고, 종종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이해한다”는 그의 신념을 그대로 체화했다. <가디언>의 음악 칼럼니스트 이언 기틴스에 따르면 데이비드 번은 종종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질 거야. ‘왜 그렇게 큰 슈트를 입었어?’” 한편 데이비드 번은 촬영 당시 토킹 헤즈 멤버들에게 “원하는 의상을 입되 미디엄 그레이의 톤은 맞출” 것을 요청했다. “의상으로 일관성을 맞추면 무대연출이 더욱 매끄럽게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러머 크리스 프란츠는 첫 공연 이후 세탁소에 맡긴 무대의상이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계획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면 무채색의 향연 속에 크리스 프란츠만 유일하게 터키석 색상의 폴로 셔츠를 입고 있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혼자서 전진하는 아이에게 <이사> <여름정원>

4K 디지털 복원판으로 개봉한 소마이 신지의 <이사>(1993)와 <여름정원>(1994)을 연이어 관람하면서, 원본의 저력에 다시금 감탄하고 말았다. 세상에 나온 지 30여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곳이 가장 싱싱한 원천이며, 그 사실이 쉽게 갱신되지 않으리라는 예감은 좋은 것일까. 감독들에게는 얼마간 좌절을 안길 일이겠지만, 적어도 평자에게는 그 원류로 부담 없이 돌아가 언제든 빠져 놀 수 있으니 즐거운 일이다. 그런 흥분을 새삼 안겨준 몇몇 장면들을 면밀하게 되짚어보고 싶다. 아빠와 어린 딸이 화면을 누비며 친밀하게 몸을 부딪쳐 놀고 있다. 오늘은 아빠가 집을 떠나는 날. 저 멀리 이삿짐이 실린 트럭이 보이자 잘 지내라는 말을 뒤로한 채 아빠가 화면 후경으로 멀어져 차에 오른다. 숏의 말미,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딸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에서 딸은 마치 도망가는 아빠의 숏을 붙잡으려 맨몸으로 그 숏에 뛰어든 사람처럼 트럭 꽁무니를 쫓아 맹렬히 달리는 중이다. 카메라는 이 가련하고 절박한 동작을 달리는 트럭 위에서 끊김 없이 주시하고, 아이가 뻗은 손이 트럭 뒤 칸에 탄 이의 손에 닿아 차에 오르는 데 성공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을 담아내기 이른다. 아이의 안도하는 표정과 함께 숏이 끝난다. 딸이 감행한 육체적 운동이 두숏 사이에 들어설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거리를 단숨에 당겨 부녀를 같은 동선, 한 프레임 안에 다시 위치시키는 것이다. 비록 앞좌석에 앉은 아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딸의 간절한 의지와 바람이 성립시킨 달리기 롱테이크가 이들을 분명 한 프레임 안에 속하게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딸은 아빠의 새집을 구경하다 옷장 앞에서 말한다. 아빠와 나의 옷장 내부를 잇는 통로가 있다면 좋겠어. <이사> 도입부에 펼쳐진 이 대목은 딸 렌이 희망하는 연결과 접합의 움직임으로 작동한다. 무심하게 떠나버린 아빠의 트럭에 결국 오르게 하는 렌의 힘찬 달리기, 결합을 향한 운동은 그러나, 이 세계가 아이에게 허락한 단 한번의 환상, 단 한번의 쾌감이었을까. 엄마와 둘이 살게 된 상황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렌이 엄마를 피해 작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글 때만 해도, 이 장면이 잠재한, 혹은 일으킬 거센 파동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익명의 소년들이 야구를 하는 나른한 오후의 풍경이 잠시 삽입된 후, 영화는 욕실 문 앞에 체념하듯 앉은 엄마 나즈야로 돌아와, 그가 사태를 해결하러 온 남편과 지인들에게 내뱉는 말로 이 상황이 2시간 넘게 지속됐음을 일러준다. 이내 욕실 앞 더없이 비좁은 복도는 서로를 탓하며 충돌하는 부부와 이들을 말리는 지인 둘로 험악하게 들썩이지만, 정작 욕실에서는 기척이 나지 않는다. 부모의 매서운 말들을 고스란히 듣고 있을 아이의 얼굴로 영화 또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어른들의 수치심 없는 다툼의 광경을 멈춰 세우는 건 욕실 안에서 불현듯 날카롭게 들려온 렌의 음성이다. “왜 낳았어?” 그 순간, 나즈야의 주먹이 욕실 문 유리를 깨부숴, 렌의 공간으로 불쑥 침투하고, 그제야 화면에는 겁에 질린 렌의 얼굴이 맺힌다. 소마이 신지의 세계에서 롱테이크는 주로 활동성의 측면에서 이야기되곤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 욕실 밖 어른들에게 집요하게 머무는 롱테이크는 이 영화가 함부로 넘어서지 않으려는 어떤 경계를 환기하고 감각하게 한다. 이는 상처 입은 아이의 내밀한 영역을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손쉬운 반응숏으로 만들지 않으며, 인위적으로 두 세계를 밀착해 통합하지 않겠다는 영화의 의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욕실 바깥의 격렬한 싸움을 주시하는 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욕실 안의 존재를 상기하는 동시에 둘 사이에 해소될 수 없는, 하지만 결국 수용해야만 하는 간극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물들의 거침없는 운동성으로 긴장감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 장면의 롱테이크는 그 움직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닿을 수 없는 경계 너머를 응시하고 있다. 그것은 부부의 싸움을 전면화하는 부모의 시간이지만, 문 안쪽에서 이를 침묵하며 견디는 아이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행태로 채워진 이 긴 숏은 그들 중 한명의 손이 처절한 상처를 무릅써야만 비로소 아이의 숏으로 건너갈 수 있다. 부드러운 편집술로 양자를 교차하는 방식은 아이가 혼자 버틴, 영화에 세세히 새겨질 수 없는 120분이 넘는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욕실 문을 깨뜨려 피를 뚝뚝 흘리는 나즈야의 손은 이 아이를 바라보며 숏을 구축한 소마이 신지의 손이기도 하다. 아이의 비밀스러운 영토로, 찢긴 마음으로 대가 없이 입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카메라는 욕실에서 나와 홀로 화장실로 걸어가는 렌의 행로를 천천히 따라가고, 변기에 앉아서야 감정을 표출하는 그의 얼굴로 가만히 다가간다. 이 장면은 온전히 렌에게 주어진다. 카메라가 오직 렌에게 몰두하는 이곳은 렌이 그토록 갈망하던 연결과 접합의 숏이 아니라, 그로부터 분리되어 부모와 뒤섞이지 않는 거리에서, 그 거리를 돌이킬 수 없다고 곱씹으며 고요히 내면을 찾는 숏이다. 모든 소란이 끝난 후, 아빠가 렌의 침실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도 계단과 침대 사이에 놓인 난간이 화면에 벽을 만들고 부녀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다. 계단에 앉아버려 프레임에서 사라진 아빠에게 렌이 난간 사이로 손을 넣어 낡은 기린 인형을 건넬 때, 아빠는 인형을 잡지 못한다. 영화는 무력하게 허공에 뜬 딸의 손과 아빠의 손 그리고 굴러떨어지는 인형을 어느새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이들이 빚어낸 움직임 세부를 느린 속도로 전시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는 부녀의 손, 이들이 놓쳐버린 매개체, 추락하는 어린 날의 추억이 슬로모션으로 담길 때, 영화는 실패와 흩어짐과 사라짐을 되돌릴 수 없는 운동으로 화면에 꾹 눌러 새긴다. 이 장면의 정념은 환상과 희망으로 더이상 덧칠할 수 없는 삶의 명백한 한 시점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냉정한 진실을, 몽환적인 리듬과 운동으로 활성화하는 기이한 방식에 기인한다. 이는 소마이 신지의 세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마법이기도 하다. 분리는 두렵고 외로운 것이지만, 도망이나 퇴행이 아니다. 그것은 모험으로 향하는 길일 수 있다. 렌이 계획한 여행이 시작하자마자 부부의 마음은 엇갈리고, 호텔 밖으로 뛰쳐나온 렌을 아빠는 쫓아온다. 강둑에서 부녀가 나누는 대화는 한 프레임 안에서 길게 이어지는데, 이 장면의 역동성은 아빠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고 위치를 옮겨가며 말을 지속하는 렌의 움직임과 아빠가 아닌 렌에게 반응하는 카메라의 운동으로 생성된다. 아이가 만들어낸 그 거리의 동력은 감내할 상태가 아니라, 어딘지 선제적 태도로 느껴진다. 내내 아빠에게 곁을 주지 않으며 대화하던 렌이 갑자기 달리며 화면 후경으로 점차 멀어지는 동안, 아빠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곧 시작될 분리의 모험은 렌의 힘으로 돌파해야 할 몫이라는 듯 카메라도 렌을 따라가지 않는다. 적어도 이 미지의 여정에서 분리에 초조해하는 존재는 더이상 렌이 아니다. 렌을 찾아 헤매던 엄마는 다리 아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서 딸을 겨우 발견하지만 렌은 그런 엄마에게 빨리 어른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숨어버린다. 엄마의 숏은 다리 위 인파 속에 붙박여 딸의 숏을 자신의 자리로 끌어오지도, 그곳으로 직접 건너가지도 못한다. 이어지는 아빠의 숏은 아예 모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동떨어진 채, 가만히 멈춘 오토바이와 함께 무기력하게 덩그러니 놓인다. 나막신을 신고 어두운 숲속과 인적 없는 계곡, 불길이 일렁이는 들판을 활보하는 렌의 행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친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아이의 초상은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자유롭다. 이 길은 부모에게 돌아갈 출구를 찾아 헤매는 아이의 불안한 걸음과 얼굴이 아니라, 귀환의 시간을 미루며 모험의 가능성에 몸을 맡겨버리는, 어딘지 본능적이고 저항적이고 해방적인 힘으로 나아간다. 앞서 욕실에 자신을 가두거나 좁은 화장실에 들어가 남몰래 눈물 흘리던 렌의 장면에 영화는 이 여정의 구속 없는 방향성으로 화답하고 보답한다. 이 여정은 해변에 출현한 부모의 환영이 마침내 바닷속으로 잠기고, “혼자 두지 마”라고 애처롭게 울던 ‘나’의 잔상이 사라지고, 이들의 이미지를 데려온 화려한 배가 활활 불타며 부서진 뒤에야, 그 소멸을 마주함으로써 끝날 수 있다. “혼자 두지 마”라고 말하는 ‘나’를 ‘나’는 혼자 바라보는 것이다. 모래사장으로 돌아온 렌은 모닥불을 피우다 자기 뒤로 나타난 엄마를 돌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다.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그 웃음은 혼자 시작한 모험은 혼자 매듭짓는다는 표식인 걸까. 여정이 모두 마무리된 후, 뮤지컬 장면처럼 설계된 에필로그에서 공원에는 렌의 친구들, 부모, 이웃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있고, 그들 중 누군가가 렌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미래로요.” 사람들에게 경쾌하게 호응하며 춤추듯 공원의 풍경을 가로지르던 렌이 커다란 나무를 지나 어느새 교복을 입은 10대의 모습으로 바뀌어 화면 전경을 향하는 순간, <이사>의 시간은 멈춘다. 이 에필로그는 렌의 성장을 가볍고 명랑한 기운으로 압축하는 한편으로, 밝음을 가장한 분위기 속에 한 가지 변하지 않을 진실을 묻어둔다. 미래로 향하는 렌은 (여전히) 혼자다. 공원에서 만난 누구도 렌과 동행하지 않는다. 렌의 여정과 결말에는 소마이 신지의 초기작인 <세일러복과 기관총>(1981)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주인공 이즈미의 아빠가 갑작스레 죽은 뒤, 학교로 야쿠자들이 찾아온다. 교문을 막고 늘어선 검은색 양복의 야쿠자들과 마침 하교하려던 학생들, 이들을 막아선 선생들이 거리를 두고 대치하는 중이다. 뒷문으로 나가라는 선생들의 말에 이즈미는 그럴 수 없다며, 겁먹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무리를 빠져나와 야쿠자들을 향해 작은 체구로 돌진한다. 카메라는 처음에는 야쿠자쪽으로 다가가는 이즈미의 담대한 정면을, 이후에는 고독한, 어쩌면 겁먹은 뒷모습을 담는다. 이 장면이 발산하는 울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무법의 세상 속으로 혼자서 전진하는 소녀의 얼굴과 움직임, 황량한 운동장에 마치 운명처럼 각인된 그 이미지에서 비롯된다. ‘혼자서 전진하는 아이.’ 그렇게 살아낸다. <이사>가 품고 귀 기울이고 키워낸 아이는 그런 아이다. 한 시절을 살아낸다는 건 그 시간과 이별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소마이 신지가 <이사> 다음해에 내놓은 <여름정원>은 <이사>보다 한결 온화한 세계지만, 결말에서 그 인상은 놀랍게 전복된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장례식이 지나간 뒤, 세 친구는 다시 그의 집 마당에 모인다. 이들이 여름내 최선을 다해 가꾼 집 마당에는 그 결실인 코스모스가 무성하게 폈고, 할아버지가 죽은 나비들을 던져두던 우물에서는 갑자기 나비들이 부활한 듯 빛을 퍼뜨리며 떼로 날아오른다. 아이들은 이 기적 같은 날갯짓이 할아버지의 영혼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라고 여긴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던 아이들이 이제는 울지 않고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우물 뚜껑을 덮고 꽃 한 송이를 올려둔다. 내내 가까이서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카메라는 세 친구가 서로에게 손을 흔들며 집을 떠나는 광경을 그들과의 동행을 이제는 마치겠다는 듯 아주 멀리서 찍는다. 다정한 애도의 결말을 예상하던 찰나, 갑자기 주인 잃은 집과 꽃밭만 남겨진 풍경 위로 이상한 사운드 파편들이 출몰해 부유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철거되며 내는 굉음,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나눴던 말들, 이들이 깔깔대던 소리가 뒤섞이는 동안, 이 장소에 덮친 시간을 흡수한 풍경이 쇠락한 이미지들로 나열된다. 불길하게 금이 간 우물에서는 물이 새어 나오고, 집은 먼지를 뿜으며 부서지고, 꽃은 시들어 마른다. 지붕에서 기와 한장이 툭 떨어지는 순간, 가을에는 꽃씨를 심자던 할아버지의 말, 이제는 아무런 가능성도 피우지 못할 박제된 소망의 음성이 흐른다. <여름정원>의 결말이 찬란함에서 아련함으로, 아련함에서 오싹함과 공허함으로 이행하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이 모든 감흥이 뒤엉킨 엔딩은 빛나던 현재를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과거로 만들어버린다. 아이들과 할아버지가 집을 수리하고 땅을 일구는 과정을 그토록 공들여 지켜보던 영화는 그 노동과 마음이 무색하게 이곳을 단숨에 폐허로, 유령들의 놀이터로 변모시킨다. 뜨거운 우정과 돌봄의 유토피아가 종결되었음을 정작 아이들은 알지 못한 채 여느 날과 같은 평범한 인사로 헤어지는데, 우리만이 가혹하게도 텅 빈 장소에 남아 그 사실을 속수무책으로 목도한다. 한 시절은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가차 없이, 주저 없이 떠나고 만다는 것일까. 혼자 꿋꿋이 전진하던 소마이 신지의 아이들은 뒤늦은 깨달음으로, 어느 날 문득, 이제는 무엇도 살지 않을 지나간 시간의 거처를 돌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