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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첫 노동, 첫사랑만큼 고생스러웠던 - <3학년 2학기> 이란희 감독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대학가요제를 향한 열망으로 요동쳤다.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학교가 어딘지도 알아뒀다. 기어코 그곳에 입학해 록 그룹 보컬 오디션에 합격했는데, 며칠 전 친해진 연극부 선배들이 눈에 밟힐 줄이야. 가창력을 평가받던 순간보다 편안한 분위기에 홀린 새내기는 마이크 없이 맨몸으로 무대에 서길 택했다. 학생 신분으로 시작한 연기에 빠져 배우이자 기획자로서 극단 한강을 거친 다음 <웰컴 투 동막골> 현장까지 경험했다. 카메라 곁에서 집중이 더 잘된다는 걸 통감한 나날이었다. 그러다 “동네 공원에서 재미난 걸 하고 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밴드가 공연 중이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어설피 연주하는 사내들은 “마치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주인공들 같았다”. 그들에게 반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만든 데뷔작 <휴가>에 이어 특성화고 학생들의 첫 사회생활을 그린 신작 <3학년 2학기> 개봉을 앞둔 이란희 감독이 툭 터놓았다. “처음부터 켄 로치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 - 공장 현장 실습생 창우(유이하)는 주어진 일에 열심이지만 잘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3학년 2학기>의 주인공이 창우여야 했던 이유는. <3학년 2학기>에는 성민(김성국)처럼 용기 있는 인물도 있다. 반면 창우는 별거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인공으로 세웠다. 직업계 고등학교 교사들에 따르면 학생들이 처음 입학할 때만 해도 공기업에 입사할 수 있다거나 특성화고 전형으로 수도권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다더라. 그러다가 2학년 2학기 때부터 소위 ‘현타’를 느끼고, 3학년 때는 완전히 눈높이가 낮아진다고 한다. 꼭 좋은 직장에 가야 인생이 활짝 피는 건 아니지만 학생들에게는 그게 기준이기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이 쪼그라든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긍지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게 창우다. - 어머니가 홀로 키우는 삼형제의 장남이라는 점도 창우의 큰 특징이다. 의외로 많은 관객이 창우가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던데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창우에게는 노래하고 싶어 하던 고등학생 때의 나처럼 특별한 재능도, 취업에 유리한 스펙도, 좋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집안도 없다. 선택지가 적은 것이다. “이거 아니면 뭐 할 건데?”라는 질문이 창우의 핵심적인 대사다. “뭐라도 하겠지”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공장을 택한 건데, 창우에게는 그 선택에 대한 명분이 필요했을 테다. 공장에 가면 엄마와 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명분. 그건 희생과는 다르다고 본다. - 이 영화 속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존재이기를 바랐나. 어른들이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다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각자의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용접사 한 주임은 창우에게 친절하지만 창우가 다친 채로 일해야 할 때 수고하라는 인사와 함께 지나친다. 호의는 베풀 수 있지만 아이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싸워주는 사람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특정 캐릭터를 빌런으로 몰아가 이 영화의 여러 맥락을 축소하고 싶지는 않았다. - 그래서 극 중반 펼쳐지는 한 인물의 장례식에서도 한명의 악인이 아닌 그가 처한 환경 자체가 그를 좀먹고 있었다는 암시만 전했나. 죽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뤄야 영화적이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사고의 순간을 재현하는 것은 실제로 비슷한 사건으로 유가족이 된 분들이 관객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분들에게 예를 갖추고자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데 더 집중했다. 또래들과 밥 먹고, 수다 떨고, 실습 일지를 한줄만 썼다가 여러 줄 썼다가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슬픔의 자리가 얼마나 익숙하지 않은지도. - 창우가 기타로 연주하는 <울게 하소서>가 정중한 진혼곡으로 들렸다. 주인공이 비극을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가 한 인물의 죽음에 너무 함몰되지 않되 그 죽음에 예의를 지켜야만 했다. 창우의 연주가 그 역할을 해줬다. 장례식 시퀀스가 끝난 다음 등장하는 그 장면이 꼭 창우의 뒷모습이어야 한다고 직감했다. - <휴가>에 이어 <3학년 2학기>에서도 무언가 차려 먹고 나눠 먹는 행위를 자주 보여준다. 창우가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맥모닝’, 첫 월급 턱으로 사는 ‘허니콤보’ 치킨은 어떻게 골랐나. 현장 실습생들은 공장 주변에 마땅히 놀거나 쉴 곳이 없는 걸 힘들어하더라. PC방도, 프랜차이즈 카페도, 패스트푸드점도 없어 점심시간을 마땅히 즐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게 마음에 남아 창우가 공장에 들르겠다는 학교 선생님에게 맥도날드에서 아침 메뉴를 사다 달라고 하는 설정을 넣었다. 비싼 치킨은 씨리얼의 유튜브 채널(@creal.official)에서 ‘용돈 없는 청소년’이라는 콘텐츠를 보고 따왔다. 엄마가 사오는 옛날 통닭만 먹다가 친구 집에 놀러가 브랜드 치킨을 먹고 놀란 학생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동생과 그 치킨을 사먹었다는 일화가 기억에 남았다. 창우도 월급을 타면 동생을 위한 음식을 챙겼을 것 같고, 연출부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브랜드 치킨을 말해줘 반영했다. 원래는 내 취향의 치킨을 시나리오에 넣었는데 그건 요즘 취향이 아니라고 하더라. (웃음) - 공장 사장실 신에는 사과가 나온다. 사장이 직원이 내온 새 사과를 두고 갈변된 사과를 먹는 까닭은. 취재하다가 실제로 목격한 장면이다. 그 대표님은 자기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큰 분이었는데, 제작진을 위해 새 사과를 내주고는 본인은 갈변된 사과를 드시더라. 그게 내게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절약하는 게 몸에 밴 분인가 싶으면서 영화 속 사장을 묘사함에 있어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했다. - 개봉 전 마지막 관객과의 대화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진행했다. 그날 “처음부터 켄 로치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고 고백했는데,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자전적인 경험을 녹인 단편을 만들다가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밴드에 꽂혀 <휴가>를 구상하고, 현장 실습생들의 사고 소식을 잊지 못해 <3학년 2학기>를 찍는 바람에 노동영화 전문 감독으로 불리고 있다. (웃음) 그렇지만 관객이 우리 영화를 어렵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이야기로 봐주길 바란다. 누구에게나 첫 노동은 첫사랑만큼 고생스러운 일이지 않나.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듯 시선이 자꾸 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

[인터뷰] 평론가의 눈, 행정가의 손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화려한 게스트 목록과 새로 신설된 경쟁부문까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확연한 변화는 정한석 신임 집행위원장의 집요한 행정 아래 굴러간다. 한국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 6년간 뚝심 있는 선정을 이어온 그는 올해 한국영화 프로그래밍 실무까지 겸업하며 사실상 최장수 한국영화 프로그래머에서 집행위원장으로 거듭났다. 30년 조직의 관성을 깨고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영화제 전반에 스민 가운데, 정 집행위원장은 관객과 축제를 위한 실용주의적 선택, 그리고 아시아 창작자들을 위한 대형 플랫폼으로서의 도약을 역설했다. - 여느 때보다 풍성한 게스트 명단과 상영·행사 소식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 마지막이 아니냐는 SNS 반응이 퍼질 정도였다. 내부에선 어떻게 감지하고 있나. 감사한 일이다. 영화제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없다. 프로그래머로 6년 일하다 집행위원장이 되면서 많은 것을 바꾸려 노력했다. 프로그래머들의 업무 체계, 태도와 철학의 문제까지 강도 높게 수정과 보완을 요청했다. 사소하게는 회의 방식부터 섭외 일정까지 전부 달라졌다. 그 과정은 껄끄럽고 힘들었지만, 덕분에 목표한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이번에 보내주신 반응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관객들의 바람이 높다는 것도 더욱 실감했다. 앞으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현상 유지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영화제란 조금씩 나빠질 수밖에 없다. 올해가 30회라서 반짝한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수준을 내년, 내후년에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사무국 워크숍에서 영화제 스태프들에게 “내년에도 올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하겠다”고 말했다. 다들 기함했지만. (웃음) - 2023년부터 2년간 집행위원장 공석으로 영화제를 치렀다. 30회에 맞춰 대규모 행사를 준비해야 할 올해 신임 집행위원장이 된 개인적인 소회를 들려준다면. 위원장 선임 공모가 세 차례나 무산됐을 때도 내가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러다 네 번째 공모에 이르러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결정했다. 더 이상 관망하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영화제 일은 밖에서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복잡한 논리가 얽혀 있다. 외부 인사가 오면 최소 6개월은 익혀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해야 했고, 자신도 있었다. 6년 동안 집행위원장이 되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막상 지원한 이후로는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말하자면 나는 집행위원장이 되고 싶어서 지원한 게 아니라 집행위원장의 ‘일’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다. - 올해는 한국영화 프로그래밍을 겸업했지만 내년부터 새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채용 계획은 어떻게 되나. 내년에도 똑같은 방식을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영화제 정관이 요구하는 프로그래머 채용 방식과 시기의 문제 등이 맞물려 올해는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채용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한국은 물론 기타 해외 권역도 채용을 진행할 수도 있다. - 올해 영화제의 변화 중 단연 역점은 경쟁부문의 신설이다. 14편 라인업 선정의 방향성에 대해 들려달라. 경쟁 작품 14편을 뽑을 때는 제반 조건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당 작품이 아시아영화의 수작으로서 충분한 면모를 지녔는지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4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월드프리미어로 가져오게 됐다. 칸, 베니스, 로카르노 등의 영화제에서 출품 및 수상한 영화들이 있는데, 그 영화제에 갔기 때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안목으로 앞선 시기에 열리는 영화제들이 먼저 가져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경쟁 섹션의 영화들은 부산의 발굴과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 후발 주자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은 패기다. 아시아영화의 미학을 보여줄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으면 한다. 용기와 패기만 앞세우면 투박해질 수 있으니 예리한 안목으로 선정작을 초청하겠다. - 경쟁부문 신설의 필요를 실감한 배경은. 나는 경쟁 영화제로의 ‘전환’이라는 표현보다 ‘신설’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기본 구조상 전면적인 경쟁 영화제를 지향할 수도 없고 바라는 바도 아니다. 이번 신설을 통해 도모하고자 하는 특정한 역할이 있다. 영화제가 30년간 대표 섹션으로 여겨온 뉴커런츠(신인감독 데뷔 섹션)와 지석(중견 감독의 신작 섹션)의 분리 운영이 실효성을 놓고 많은 고민을 낳았다. 신인과 기성·거장 감독을 분리하기보다는 이들 작품의 상호작용을 도모하는 대형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시절의 경험들이 바탕이 됐다. 예를 들어 2022년 뉴커런츠 수상작인 이정홍 감독의 <괴인>은 국내 평자들과 주요 매체의 일관된 지지를 받았지만 해외 영화제의 주목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과 같이 경쟁 섹션의 영향력이 더해졌다면 같은 작품이 해외에서 더 많은 이목을 끌었으리라 생각해보게 하는 여러 사례들이 <괴인> 외에도 있다. 즉 경쟁 섹션은 기존의 뉴커런츠가 수행하고자 했던 신인 발굴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체계가 될 수 있다. 아시아 및 국내에서 공인된 감독들이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통해 보다 확장된 가치를 얻는다면, 역으로 해외 각국의 많은 감독들이 부산을 더 궁금해하고 찾는 기회도 늘어날 거라고 본다. - 나홍진·코고나다·마르지예 메쉬키니 감독, 배우 양가휘·난디타 다스·한효주, 프로듀서인 율리아 에비나 바하라까지 경쟁 심사위원단의 구성이 다채롭다. 섭외 과정에서 공들인 부분이 있다면. 마음에 드는 심사위원 라인업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절대 발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좋다’고 느껴질 때까지 한분 한분 초청했다. 출신 국가, 전문 분야, 작품의 패기와 용기를 알아볼 안목 등 여러 면모를 셈하고 고려해서 결정한 것이다. 과거 뉴커런츠 섹션 시절에 심사위원은 5명이었다. 영화제 운영 면에선 심사위원이 2명 늘어나는 것이 큰 차이다. 그럼에도 사무국의 고생을 감수하면서 더 넓고 새로운 논의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이 프로그램은 놓치지 말 것! -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5개(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 /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 / 줄리엣 비노쉬, 움직이는 감정 / 우리들의 작은 역사, 미래를 부탁해! / 까르뜨 블랑슈), 마스터 클래스가 5개(자파르 파나히 / 마이클 만 / 세르게이 로즈니차 / 마르코 벨로키오 / 줄리엣 비노쉬)로 확연히 수가 늘어난 점도 눈에 띈다.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보통 3개였는데, 전체 편수의 밸런스를 보며 배치를 새롭게 했다. 그 과정에서 편수는 조금 줄이더라도 프로그램 개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5개를 만들었고, 각각 다른 성격을 보여주도록 기획했다. 마스터 클래스는 게스트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폭이 넓어졌다. 지난해에는 3개, 지지난해에는 1개였는데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지금 정도의 특별기획 프로그램과 마스터 클래스는 최대한 유지하고 싶다. -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은 특히 올해 30주년의 의미와 어울리는 기획이다. 아시아영화의 흐름을 재조명하고 그 영화사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아시아영화 100’의 세 번째 국면(2015년 최고의 아시아영화, 2021년 최고의 아시아여성영화)이다.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가 아시아영화의 역사적 성과를 기록해보자는 뜻에서 시작했다. 이번에는 1996년 이후 작품 중 10편을 택했는데, 관객이 영화인과 만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데 방점을 두고 게스트 참석 여부에 실용적으로 주목했다. 감독이나 배우가 참석 가능한 작품을 우선적으로 선정해 이창동, 두기봉, 지아장커 감독 등이 찾는다. - 게스트 초청에 상당한 예산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재원 확보는 어떻게 했나. 재원 확보는 전적으로 박광수 이사장이 지휘하고 있다. 또한 모든 업무 면에서도 이사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초청은, 박광수 이사장이 특별히 마련한 초청 펀드에도 크게 힘입었고, 30회를 기념한 부산시의 지원도 좋았다. 최근 몇년의 기록을 톺아볼 때 올해가 협찬도 가장 풍성하다. 그렇다고 빅 게스트 초청이 재정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예산이 훨씬 여유롭지만 우리만큼 게스트를 부르지 못하는 영화제도 많다. 중요한 것은 영화제가 쌓아온 신뢰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싱어롱은 화제와 함께 의외라는 반응도 많았다. 어떤 필요나 트렌드를 느꼈는지. 넷플릭스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 집행위원장으로서 OTT가 가진 긍정적인 흐름을 외면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올해 게스트 중 한명인 기예르모 델 토로도 넷플릭스 작품 <프랑켄슈타인>으로 온다. 영화제가 OTT를 외면한다고 극장 영화가 살아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국내외 OTT와 긴장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객에게 극장에서 즐기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다만, 영화제의 수용과 OTT가 영화계와 충돌하는 정책적·제도적 문제는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영화계 간담회를 연 적 있다. 지금 한국 영화제의 역량이 크게 두 가지라는 제안을 했다. 첫 번째로 정부가 바라는 K컬처 육성에 있어 영화제만큼 효과적인 문화사업은 많지 않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 가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끌어안아달라는 것이다. 국비 문제와 연관이 깊은데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중 국비가 채 5%가 되지 않는다. 주요 대륙의 이른바 메이저 영화제들과는 굉장히 격차가 크다. 두 번째는 한국영화 위기론이 만연한 가운데 극장으로 관객을 불러모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도 영화제의 역할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편 한편의 개별 영화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영화제 차원에서 대중에게 긍정적인 극장 경험을 남기는 것. 현시점에서 영화제의 중요한 역할이다. - 영화 애호가들을 위해 보다 집중한 프로그램이 있다면. 알렉산드레 코베리제 감독이 동생이자 음악가인 조르지 코베리제와 클래스를 연다. 축제의 화려함 속에서도 영화 애호가들이 듣고 싶어 하는 강연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직접 기획한 것이 씨네 클래스다. 작은 규모의 마스터 클래스라고 봐주시면 좋겠다. 코베리제 형제를 비롯해 총 4개의 씨네 클래스가 열린다. 대중의 축제이자 애호가들이 취향의 특권을 최대한 누리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양극단의 성질이 영화제에 공존하길 바란다. - 영화제 시기가 9월 중순으로 이례적으로 앞당겨졌다. 이후로도 개최 일자 변경 가능성이 있는지. 올해는 전국체육대회와 추석 연휴로 일정을 조정했는데 휴일이 없다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상영작과 초청 게스트에 대한 반응이 좋아 평일에도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내년에는 10월 초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 종합하자면, 예술성과 대중성, 그리고 지역축제를 위한 힘의 안배에 있어 올해 영화제가 어떤 밑그림을 보여주기를 바라나. 먼저 지역 축제로서의 기능에 대해 말하자면, ‘동네방네 비프’를 지난해 9개소에서 올해 15개소로 늘렸다. 부산 시민들이 곳곳에서 영화제 분위기를 느끼고 게스트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부산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의 민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어 더 많이 만나고 있기도 하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다채로운 게스트를 기다린다. 이 부분은 이미 발표된 올해의 라인업으로 결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시네필들을 위해서는 아이콘 섹션을 대폭 확대했다. 지난해 17편에서 33편으로 두배 가까이 늘렸다. 이 섹션은 월드프리미어 여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 아시아의 시네필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빨리 찾아보고 싶어 할 만한 영화를 가능한 한 풍성하게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이는 경쟁부문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시네필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많이 와서 경쟁부문을 봐주시고, 장단점을 논평해주시면 그것이 곧 이 영화제의 거름이자 성장이 될 것이라고.

[인터뷰] 서로에게 닿기를, <비밀일 수밖에> 배우 장영남, 류경수

미술 교사 정하(장영남)에게 아들 진우(류경수)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찾아온다. 정하는 유방암으로 휴직을 신청했고, 동성 연인 지선(옥지영)은 하루 일찍 집에 돌아온 참이다. 진우 역시 비밀이 있다. 다만 캐나다에서 다닌 어학원을 그만두고 요리 유튜버를 하겠다고, 함께 온 연인 제니(스테파니 리)와는 결혼하겠다고 재빨리 고백하면서 가족의 비밀은 얽히고설킨다. <비밀일 수밖에>가 그려내는 가족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배경인 춘천의 독특한 템포에 실려, 호젓하면서도 서늘한 정서를 빚어낸다. 배우 장영남과 류경수가 그 중심에 있다. 올해 공개된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 함께 출연했으나 마주하는 장면이 없었던 두 배우는 간만의 만남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상상극장과 호기심 천국, 고민상담소를 오가는 이들의 대화는 강물처럼 흘러갔다. - 춘천에서 한달간 찍었다고. 지금 떠오르는 도시의 풍경은. 류경수 그때 선배님이 무척 바쁘셨다. 장영남 맞다. 일정이 겹쳐서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억나는 건 어느 날 차를 타고 춘천으로 들어가다가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는 걸 체감하고 놀란 순간이 있었다. 친근하게 느껴지던 도시인데 물리적으로는 꽤 멀구나 싶었다. 멀리서 레고랜드를 보며 여기 생긴 이유를 짐작해보기도 하고. 류경수 대학 시절 워크숍에서 연출했던 연극 <춘천, 거기>에 대한 애정이 워낙 깊어서 촬영도 기대가 컸다. 실제로도 즐거웠다. 가을 촬영이라 은행나무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고, 생일날 사진을 찍으며 추억도 많이 쌓았다. -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장영남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다가도 허를 찌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발견할 때마다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흔치 않은 퀴어 엄마 캐릭터라는 점이 강렬했다. ‘이 여자는 언제 처음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았을까? 아주 어릴 때는 아니었겠지’ 같은 상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정하의 삶 안으로 들어갔고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류경수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도 되는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 주로 맡아온 캐릭터들이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 뒤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진우는 달랐다. 가치관이 다른 원가족과 새로운 가족 사이에서 중재하는 인물이라 배우가 아기자기하게 연기로 살려볼 게 많을 것 같았다. - 진우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성인 진우는 관객이 처음 본 분노에 찬 10대가 아니다. 능글맞기까지 한데, 류경수 배우의 해석이 더해진 것일까. 류경수 진우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어린 진우는 입시 스트레스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던 극단적인 순간에 놓여 있었으니까. 원래 예민한 성격이라도 캐나다에서의 해방적인 삶이 진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줬을 거라 봤다. 특별한 경험을 겪지 않아도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 같다. 나만 돌아봐도 사춘기 때의 나와 30대인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장영남 애써 더 밝은 척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진우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안고 사는데 그걸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정하도 같은 죄책감을 안고 있기에 정하 모자에게는 서로만이 정확히 이해하는 고통이 있다. - 두 배우가 처음 함께 스크린에 등장하는 장면은 정하가 짐 싸는 교무실에 진우가 깜짝 방문하는 신이다. 진우가 일부러 목소리도 낮추고 얼굴도 가리는 바람에 정하가 아들을 못 알아보면서 진우의 서프라이즈는 성공한다. 장영남 진우 입장에선 애교의 힘이 필요했을 거다. 연락도 없이 한국에 와, 일도 그만둬, 결혼까지 한다고 하니까. 류경수 허락받아야 할 일이 산더미다. (웃음) 그런데 선배님, 실제 아드님이 유학 중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장영남 너무 속상하지. 하지만 뭐 어쩌겠어.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애들은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별개의 인격체인걸. 한컷도 허투루 지나가는 법 없이 - 별안간 춘천을 찾은 제니 가족과 정하 모자가 처음 대면하는 호텔 앞 신은 실제로도 촬영 초반에 찍었나. 장영남 그렇다. 완전체가 다 모이면 어떤 그림일지를 상상해왔기에 이 신에 대한 기대가 컸다. 박지아 배우(하영 역)의 활약 덕분에 카메라 바깥에서 많이 웃었다. 재밌었던 게 극 중 우리 모자가 옥신각신하는 제니네 집을 조용히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보통 센 역할을 맡아온 나로서는 지금 내 연기가 너무 심심한 게 아닌가 싶더라. 류경수 나도 같은 걱정에 이것저것 디테일을 더했다. 장인어른(박지일)이 인사를 건넸을 때 단순히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넘어지거나 삐끗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 진우가 장인, 장모가 있는 방에 처음 들어가 있는 장면도 신경 쓴 티가 났다. 내내 무릎을 꿇고 얘기하다가 방에서 나올 때는 조용히 문을 닫으려고 애쓴다. 류경수 처음에 장인에게서 무섭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 게다가 자길 사윗감으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도 알았을 테니 공손한 태도로나마 신뢰를 얻고 싶었을 거다. 문을 닫을 때 숨을 참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찍소리라도 냈다간 안에서 장인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상상했다. - 제니에게 선물받은 속옷 세트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 정하는 지선을 발견하자마자 완전히 풀어진다. 장영남 배우의 사랑에 빠진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쾌감이 있었다. 장영남 그 뒤에 정하가 속옷을 이리저리 대보며 지선과 장난치는 장면은 현장에서 만들었다. 옥지영 배우랑 즉흥적으로 해보고 좋아서 감독님에게 말씀드린 건데 오케이는 물론, 영화에도 들어가 기뻤다. 정하와 지선 사이의 격 없는 친밀함, 여자 친구끼리의 알콩달콩함을 놀이 같은 행위들로 표현하고 싶었다. - 지선과의 관계가 드러나자 정하는 패닉에 빠진다. 은행 밖을 뛰쳐나와 걷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을 가까이서 포착한다. 장영남 패닉이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더는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을 거다. 진우에게 직접 털어놓겠다는 계획도 어그러질 수 있고. 은행 밖을 휘청이며 걸으면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나도 정하도 힘들었던 장면이다. - 그렇지만 정하는 결국 아들에게 정확하게 고백할 기회를 얻는다. 정하가 진우만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지선을 소개할 때의 감흥이 컸다. 류경수 원래는 좀더 발표하는 톤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대사였는데 선배님이 멋지게 바꾸셨다. 장영남 맞다. 모두를 향해 절절하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준비하면서 다른 사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아들과 손잡은 연인에게만 정하의 진심이 전해지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 짧은 대사 안에 진심을 늦게 털어놓는 미안함과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았다. 류경수 그런데 진우는 방금 엄마의 암 사실을 알게 돼 충격이 큰 상태에서 커밍아웃 이야기까지 들으니 완전히 넋이 나간다. 그 와중에도 장인어른이 엄마를 이상하다며 욕하자 바로 맞받아친다. 그동안 잘 보이려고 참았던 진우가 차마 거기까지는 참지 못한 거다. 진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엄마니까. 우리의 고개는 빛을 향하여 - 두분은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는 쪽인가, 속으로 삭이는 쪽인가. 장영남 가족한테는 속얘기를 잘 못한다. 특히 엄마. 류경수 마찬가지다. 무조건 내 편이라는 걸 아는데 그래서 더 말 꺼내기 힘든 부분이 있다. - 정하의 마지막 장면은 배우도, 감독도 희망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었나. 장영남 쉽지 않았다. 원래 정하가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노래에는 자신이 좀 없어서…. (웃음) 이 장면에서 정하의 태도는 명확했다. 숨지 않겠다. 그 다짐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하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건 진우 덕분이다. 아들이 적어도 70% 이상은 자신을 받아들여줬다고 믿으니까. 앞으로도 정하는 그 힘으로 나아갈 것이다. - 그렇다면 진우의 미래는 어떨까. 류경수 어찌 됐든 요리는 계속할 것 같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엄마, 나 어학원 다시 갈래”라고 할까! 무엇보다 이제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아내가 곁에 있으니, 이번엔 끝까지 갈 거다. - 남은 하반기 계획과 차기작은. 장영남 내년에 공개될 드라마 한편을 얼마 전에 마쳤고, 지금은 새 작품에 들어갔다. 류경수 연극 <디 이펙트>가 이번 주말이면 막을 내린다. 이제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장영남 경수가 뭐가 걱정이야. 공연 오래 했으니 그동안 일 열심히 했고, 연기도 얼마나 몰입감 있게 잘해. 류경수 (장영남 배우쪽으로 몸을 틀며) 선배님,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있어요. 제가 중고등학생 때 연기하고 싶어서 공부 시작했을 당시 장진 감독님 영화를 정말 많이 봤거든요.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같은 작품에서 선배님의 연기를 볼 때마다 감탄했어요. 그래서 이번 작업이 영광이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장영남 경수가 시크한데 또 이렇게 귀엽다니까.

[특집]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부활한 ‘전국시대’

2020년 일본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하 <무한열차편>)은 코로나19로 인해 할리우드 대작이 사라진 한국 극장가를 강타했다. 5년 뒤인 2025년에 공개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하 <무한성편>)은 일본에서 개봉 8일 만에 100억엔을 돌파하고, 한국 극장가에서도 개봉 1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이런 흐름이 단발적인 현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를 이뤄낸 것은 도쿄의 대형 제작사가 아닌, 지방 도시 도쿠시마를 거점으로 한 중형 스튜디오 유포테이블이었다. 변방이었기에 가능했던 ‘자립’ 이를 계기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것이 도쿄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애니메이션 제작 체제와는 선을 그은, 지방에 거점을 둔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다. 교토부 우지시에 설립된 교토 애니메이션은 본래 인근의 주부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태생부터 수익성보다는 직원 복지를 우선하던 이 회사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창작 역량을 키운 결과, <스즈미야 하루히> <케이온> 등을 히트시키며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넷플릭스를 통해 글로벌로 확장될 수 있었다. 도야마현 난토시에서 설립된 피에이웍스(P.A.Works)는 자신들의 거점인 도야마현을 배경으로 한 <꽃이 피는 첫걸음>을 히트시켜 애니메이션 팬들의 성지순례 붐을 만들고, 이어 <트루 티어즈> <글로스립> 등 도야마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연속으로 히트시켜 지역 제작사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또한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시로바코>를 히트시켜 ‘도야마현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지금은 <귀멸의 칼날>로 일본 굴지의 제작사로 등극한 유포테이블은 본래는 도쿄에서 시작했지만 2009년에는 도쿠시마에 스튜디오를 개설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애니메이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게 하려는 배려였다. 수익이 그다지 좋지 않은 애니메이터들에게 도쿄의 거주 환경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기에 어차피 애니메이션 작업에 전념한다면 생활비가 저렴하고 주거 환경도 더 좋은 지방이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방으로 이전한 스튜디오가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과제는, 본래의 애니메이션 제작 중심지인 도쿄와 물리적인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애니메이션 제작의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포테이블과 교토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의 작화, 원화, 동화, 배경, CG 작업 등 거의 모든 제작 과정의 자체적 수직계열화에 성공했으며, 이는 작품의 퀄리티 컨트롤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유포테이블은 이에 더해 도쿠시마에 캐릭터 카페와 극장을 운영하며 캐릭터 굿즈도 직접 생산, 판매하고 있으며 한국 홍대에도 직영 캐릭터 카페를 두고 있다. 교토 애니메이션은 일찍부터 교토 지역에서 애니메이션 굿즈 사업을 운영했으며, 자체 소설 브랜드를 론칭해 이를 직접 애니메이션화하는 판권 수익 극대화 모델을 만들었다. 피에이웍스는 이들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지역 고용 활성화 및 지역 관광 사업과의 제휴로 지역 친화적인 사업모델 구축에 성공했다. 이러한 모델의 공통점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직접 사업을 운영하며 팬들과 접촉한다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제작위원회’ 시스템에 묶인 중소형 제작사들이 수익 사업의 대부분을 스폰서들에게 내주고 자신들은 애니메이션 제작비만 겨우 챙기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과는 상당히 다르다. 코로나19와 OTT 시대가 가져온 ‘기회’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19의 광풍은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을 거의 멈추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을 외주나 분업으로 진행하던 도쿄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협력 업체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기존의 제작위원회를 이끌던 스폰서들은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이 오자 투자를 망설이게 되면서 애니메이션 업계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도시에 비해 코로나의 피해가 비교적 적고, 이미 내부적으로 수직계열화가 어느 정도 이뤄져 있던 지방 제작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비교적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또한 코로나로 대부분의 즐길 거리를 잃은 사람들이 OTT로 몰려들면서 애니메이션의 수요는 오히려 이전보다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공개된 TV시리즈 <귀멸의 칼날>은 다른 제작사들의 신작 발표가 연기되는 틈을 타 단기간에 화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며 최고의 타이밍에 OTT 시장을 장악했다. 이는 <귀멸의 칼날>을 단기간에 세계적인 히트작으로 만든 것은 물론, 이어지는 극장 공개를 대성공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극장가 역시 할리우드영화 등의 제작이 멈추며 콘텐츠 공백 상태가 이어졌는데 여기에 등장한 <무한열차편>은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던 극장가를 압도적인 퀄리티로 장악하면서 일본 박스오피스 역대 1위를 차지하며 국민 애니메이션의 자리에 등극한다. 이렇게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엔 유포테이블이라는 제작사가 지방을 거점으로 자립적인 제작 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교토 애니메이션 역시 <바이올렛 에버가든>을 통해 한발 먼저 넷플릭스에 진출했지만 테러 사건으로 인해 창작 역량이 크게 꺾이는 바람에 유포테이블처럼 커다란 기회를 움켜잡지 못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스트 <귀멸의 칼날> 이후의 싸움, 지방 콘텐츠 기업의 ‘과제’ 유포테이블은 현재 다른 프로젝트를 모두 동결해가며 회사의 모든 역량을 <귀멸의 칼날> 시리즈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3부작으로 기획된 <무한성편> 극장판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고, 그 후에는 현재 애니메이션 제작이 동결된 중국산 초대형 IP <원신>과 <공의 경계>를 통해 지금의 유포테이블을 만들어준 타입문(TYPEMOON)의 작품들이 대기하고 있다. 현재 유포테이블의 제작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무한성편>에 대부분의 역량을 쏟아낸 나머지 이후 작품의 동력마저 소진될 위험성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유포테이블에 있어 지금의 <귀멸의 칼날>도 중요하지만 <귀멸의 칼날> 이후를 위한 역량 역시 계속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교토 애니메이션은 테러의 여파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남아 있던 기존의 인재들이 독립해서 나가는 등 다시 한번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특히 유포테이블이 거둔 성공은 과거 교토 애니메이션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었던 전성시대를 떠올리게 하면서, 이들에게 다시 한번 자극을 주게 될 것이다. 피에이웍스는 이 둘과는 달리 아직 애니메이션 업계의 정점에 올라서 본 적도 없고, 제작 시스템의 수직계열화 등에 있어서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지방 제작사로서의 정체성을 정착시키는 데에는 이미 성공한 만큼 앞선 두 회사를 모델로 한 더 큰 성장이 기대되고 있다.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부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물론 수많은 인재와 자원이 모여드는 도쿄와 지방 사이의 격차 역시 엄연히 현실이기도 하다. 이들 지방 제작사들이 장기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아직까지는 한정적인 IP를 더욱 다각화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제작 시스템의 자립성을 보강하는 한편, 지방 회사이기에 가능했던 직원 복지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이후 이들을 본받아 다른 지방에서도 많은 중소 제작사들이 탄생하여 성공을 거둔다면 지금의 일본 애니메이션 붐은 더욱 오래, 그리고 탄탄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도 애니메이션만이 아닌, 다양한 콘텐츠 분야에서의 지방 제작사의 가능성을 돌아보게 할 계기가 될 것이다. 유포테이블 트리비아 도쿠시마 거점 유지 유포테이블은 본래 도쿄에서 설립되었지만 애니메이터들의 근무, 생활환경 개선과 지역 상생을 위해 2009년 도쿠시마에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후 지역 축제인 ‘아와오도리’의 포스터를 그리게 된 것을 계기로 전국의 애니메이션 팬들이 해당 축제에 몰려드는 등 대성공을 거둔다. <공의 경계> 7부작 실험 유포테이블을 본격적인 성공 가도에 올린 애니메이션 <공의 경계>는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되었으나 “원작자의 감정을 영상으로 담아야 한다”라는 지침에 따라 7부작 극장판으로 확장하는 강수를 두었다. 유포테이블은 이 작품을 계기로 신인감독을 육성하고 소규모 극장판 흥행의 수익모델을 확립하는 등 이후의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타입문과의 협업 강화 유포테이블은 타입문의 <공의 경계>로 성공 가도에 오른 이후에 게임 <페이트>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지속적으로 제작하며 창작 노하우를 축적, 액션 작화 브랜드를 확립했다. 자립 전략 지방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그 여건상 대부분의 제작 공정을 외주 등을 최소화하며 자사 내부에 소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포테이블은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 나간 경우로, 작화 관련 이외의 사운드, 3D, VFX, 합성까지 자체 인력을 활용하며 외주 의존도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또한 카페나 상영관 등 부가 사업까지도 직접 운영하면서 거의 완벽한 수직계열화를 달성했다. 리스크 관리 능력 부족 급속한 과정에서의 리스크 관리가 문제시되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세무 논란으로 회사가 조사를 받는 등 경영상의 리스크 관리가 문제가 되었으며, 현재 <무한성편> 제작에 스튜디오 전체가 올인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과도한 집중과 소모로 인한 리스크가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