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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중국서 3국 합작영화 <중천> 찍는 정우성·김태희

“판타지와 액션과 멜로가 결합된 독특한 영화”(김태희) “성공한 판타지 영화가 없었다고? 〈중천〉이 성공할 것”(정우성) 중국 저장성 헝뎬 영시성(영화·텔레비전 촬영소)에서 영화 〈중천〉(조동오 감독)을 촬영중인 정우성, 김태희가 27일 오후 촬영지 근처 숙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순제작비만 110억원에 이르는 〈중천〉은 한국 자본과 인력을 바탕으로, 일본과 중국 스태프들이 참여하고 중국 올로케이션으로 이뤄진 범아시아 프로젝트다. 제목 〈중천〉은 죽은 영혼들이 7일씩 7단계를 거쳐 이승의 기억을 정리하고 환생을 준비하는 판타지 공간 ‘중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퇴마무사 ‘이곽’ 역을 맡은 정우성은 “기존의 한국 판타지 영화들이 판타지라는 장르를 개척하기 위해 기술력과 비주얼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면, 〈중천〉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러브스토리에 중점을 두고 기술력과 비주얼은 그 얘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며 그동안 관객들에게 외면당했던 국내 판타지 영화들과의 차별점을 강조했다. 또 인간 ‘연화’였다가 죽어서 천인 ‘소화’가 되는 김태희도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천녀유혼〉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사실 전혀 다른 영화”라며 “단순하고 어린애 같은 소화만 봐도 〈천녀유혼〉의 섹시한 귀신과는 전혀 다르다”며 홍콩 판타지 영화와의 차이를 설명했다. 지난해 10월말부터 5개월 가까이 중국에 머물며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두 사람은 중국 현지 촬영에 대해 각별한 감회를 드러내기도 했다. 정우성은 “물이나 기타 기반시설은 부족하지만 헝뎬이라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세트장이어서 참 부럽다”고 했다. 처음 영화에 출연하는 김태희는 “한국에 있었다면 촬영이 없을 때 친구들을 만나거나 식구들과 함께 보내며 ‘김태희’로 돌아가곤 했겠지만, 중국에 떨어져 있으니 오히려 ‘소화’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천에서 다시 만난 이곽과 소화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소화를 위협하는 이곽의 이승 동료 반추(허준호)와 이곽의 대결이 영화 속에 담겼다. 〈무사〉의 조민환 프로듀서와 김성수 감독이 제작을 맡았으며, 당시 조감독이던 조동오 감독이 첫 메가폰을 잡았다. 〈중천〉의 국내 개봉은 올해 말로 예정돼 있다.

장률 vs 정성일 대담 [1]

장률 감독은 한국과 중국, 두개의 국가에 속한 동포감독이고, 소설에서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긴 과거를 지니고 있다. 경계에 선 존재는 아무래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씨네21>은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 <당시>가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2년 전, 아시아 동포감독 중 한명으로 그를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1년 뒤 한국에서 개봉한 <당시>는 실로 참담한 관객 수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뒤늦게 시작한 그의 영화인생은 그때부터 본격화된다. 비슷한 시기 장률 감독은 <망종>을 들고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을 찾았고, 그해 <망종>을 상영한 부산영화제는 뉴커런츠상을 안김과 동시에 그의 세 번째 장편 <두만강>을 부산프로모션플랜(PPP)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오는 3월24일 개봉을 앞둔 <망종>은 장률 감독이 첫 번째 단편부터 일관된 철학과 스타일을 우직하게 밀어붙인 흔적이 역력한 영화다. 그의 두 번째 영화가 좀더 많은 관객과 한결 수월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정성일 영화평론가와 장률 감독의 긴 만남을 준비했다.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된 애정어린 질문과 성실한 대답은 아직은 낯선 감독의 영화를 맞이할 이들에게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장률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된 순간에 대한 회고부터 앞으로도 계속될 그의 필모그래피를 향한 기대로 이어지는 정성일의 글을 함께 싣는다. 평론가 정성일이 <당시> <망종>의 감독 장률을 만나고 싶어진 이유 영화란 무엇인가 그때 내가 장률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아무 준비가 안 된 상태였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으며, <당시>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많은 영화를 심사하는 자리였고, 그때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김동원 선배가 12년간 준비한 다큐멘터리 <송환>이었다. 영진위에서 매년 하는 디지털영화 프린트 지원 사업심사에서였다. 이런 자리는 부주의해지기 쉽다. 나는 심사에 대해서 동료들에게 일종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영화들이 내게 말을 걸고, 나는 거기서 진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속는 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놓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매번 영화를 향한 내 눈과 귀를 열기 위해 이리저리 다시 몸을 틀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테마, 서로 다른 화법, 서로 다른 교양을 갖고 세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은 결국 세상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한다. 그 무례함, 그것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질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어반복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대신 그 영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고 믿는다. 혹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고 싶다. <당시>는 보자마자 그 질문을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21세기 영화의 마술사 리스트에 장률을 넣자 내 경험적으로 좋은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무언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술 같은 것을 부린다. 마치 마술사가 그의 손짓을 움직이자마자 즉각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그 손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아니, 차라리 그 손짓이 시선을 훔쳐낸 다음 자기 멋대로 부린다는 말이 옳다. 그래서 거기 없는 것을 정말 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데사 계단에 선 어머니가 놓친 유모차에 멈추어선 혁명,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폼페이 화산의 미라가 된 연인의 숭고, 남의 호주머니를 훔치는 텅 빈 손 안의 증발해버린 영혼, 과년한 딸을 시집보낸 다음 텅 빈 집에 와서 쳐다보는 부엌 저편을 찾아온 죽음. 그 영화들은 무엇으로 나를 환대하는가? 영화 안에 무언가를, 지혜를, 깨달음을, 역사를, 눈물을 혹은 웃음을, 사유를 훔치러 온 일개 영화평론가인 나를 기꺼이 환대하면서, 하지만 내가 절대로 훔쳐갈 수 없는 배움을, 오직 배울 수만 있는 깨달음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펼쳐놓고 보여주는 영화들. 지난 세기가 거의 끝나갈 때 영화도 끝났다고 세르주 다네는 유언처럼 말했다. 물론 위대한 영화들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들이 나왔다. 이를테면 21세기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를 만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왕빙, 소피아 코폴라, 안드레이 즈비야긴셰프, 무랄리 나이르, 에릭 쿠(아마도 나는 많은 이름을 놓쳤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장률을 포함시키고 싶다. <당시>는 시작하자마자 자기가 만들어낸 세상에 스스로 버티어 선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원래 그런 영화가 있었던 것처럼. 작은 아파트 안에 세상의 모든 사건을 품은 <당시> 솔직하게 심사에서 처음 <당시>를 만났을 때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왜 대한민국 영진위 돈으로 중국영화를 지원 사업 명단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이 영화는 중국어로 진행되고, 중국 배우들과 중국 스탭들과 중국에서 찍었고, 중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심사 서류를 보니 한국에서 촬영을 하는 최두영씨가 제작했고(이 사람은 김응수의 <달려라 장미>를 찍었고,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 마지막 대목에 사채업자로 등장한다), 게다가 감독이 조선족 옌볜동포라는 설명이 있었다. DV로 찍은 <당시>는 장률의 첫 번째 영화이다. 이제는 손목을 못 쓰는 중년 남자 소매치기와 그를 스승으로 여기는 젊은 여자 소매치기는 일종의 뚜쟁이와 창녀 사이와 비슷하다. 남자는 여자를 뜯어먹으면서 지내고, 여자는 그에게 상납을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남자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넘지 않으려고 한다. 감정과 배움, 여자와 남자, 제자와 스승. 영화는 시종일관 그 작은 아파트 방 안에서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말하자면 이 방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환유이다. 여자의 작은 동작,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린 제스처,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 안에서 무언가 읽어달라고 간절하게 하소연하는 눈짓,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아주 가끔씩 건네는 대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모던한 조명. 멈추어선 카메라. 띄엄띄엄 검은 자막 위에 떠오르는 당시(唐詩)의 사무치는 시 구절. 막 이사를 왔거나 금방이라도 떠나버릴 것처럼 텅 빈 이 방 안에서 두 사람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된다. 장률이 하려는 이야기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이 방은 동시에 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일부이다. 그런 다음 마지막 10분 동안 갑자기 마술이 벌어진다. 아, 이제까지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당시>는 두 번째 볼 때 전혀 다른 자리, 전혀 다른 이야기, 전혀 다른 이야기의 구도, 힘의 방점의 이동, 배치의 재설정, 변경에 앉아서 자기의 자리를 중심으로 오해한 비극 안의 익살, 연약한 믿음의 부서짐, 심각하게 걱정했던 관심의 소스라치도록 갑작스러운 사소함. 그 안에서 주인의 자리로부터 사실상 보잘것없는 이웃에로 물러나는 초라함이 거기에 있다. 그런 다음 나는 이 사람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졌다. 그는 인터뷰 어디에선가 <당시>가 <송사>(宋詞), <원곡>(元曲)으로 이어지는 3부작 중 첫 번째 영화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그렇다면 그 다음은 <명소설>(明小說), <청극>(淸劇)까지 아예 5부작을 찍으시지, 라고 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영화 제목이 어마어마해지면 좀 웃긴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혹은 거기에 허영이 있다고 지레짐작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중국과 북한 사이를 흐르는 두만강을 두고 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두만강>을 만들겠다는 기사도 읽었다. 그 사이에 <당시>가 개봉하였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이 영화는 ‘전국에서’ 268명이 보았다. 이런 게 ‘문화의 다양성’을 말하는 현실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번째 영화 <망종>을 보게 되었다. 소포모어 징크스와의 피할 수 없는 대결. 그런데 장률은 그걸 그냥 간단하게 뛰어넘었다. 그 어떤 삶의 흔적도 없는 쓸쓸한 무대 <망종>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실 분은 영화를 보고나서 읽으십시오.) 이야기는 좀더 복잡해지고, 인물들은 내내 바깥을 돌아다닌다. 거리에서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여자 최순희는 아들 창호와 함께 거의 무너질 듯한 집에서 하루 팔아서 하루 먹고산다. 최순희는 미모를 가졌고, 남자들은 남편없는 그녀에게 관심이 많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공장노동자 조선족 김씨는 그녀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그녀의 몸이다. 자꾸만 친절을 베푸는 공안원 왕씨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최순희를 시간 날 때마다 찾아온다. 아들이 찬 공이 유리창을 깬 집의 주인인 음식점 남자는 그녀에게 자기 식당에 김치 납품을 제안하면서 대신 자기에게는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불륜 현장을 목격당하자 아내에게 저 여자는 매춘부라고 거짓말을 한 조선족 김씨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간 그녀를 공안원 왕씨는 동료들이 술 마시러 간 사이에 문을 닫고 겁탈한다. 집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아들 창호의 죽음이다. 다시 거리에서 김치를 파는 최순희에게 공안원 왕씨의 약혼녀는 그녀의 결혼식에 쓸 김치를 부탁한다. 최순희는 정성을 다해서, 그 결혼식에 가져갈 김치에 쥐약을 잔뜩 맛나게 버무려서 배달한 다음 천천히 집에 돌아온다.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고, 그녀는 역으로 홀린 듯이 걸어간다. 지금은 보리를 거두고 벼를 막 심어야 하는 계절, 망종이다.(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주의보를 해제합니다.) 장률 영화에서 모든 사람들은 더이상 침묵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을 때에만 말한다. 대사는 간결하고, 인물들은 대부분 등을 돌리고 서 있거나 거의 멈추어서 있다. 그러나 더 특별한 것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이 걸어다니는 속도이다. 너무 삶이 힘에 겨운 듯이 슬로모션처럼 가까스로 걸어다니는 인물들 속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것은 텔레비전이고,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선풍기뿐이다. 거리는 텅 비어 있고, 공간들은 마치 세트장에 온 것처럼 황량하다. 거기에는 어떤 삶의 흔적도 묻어나지 않는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혹은 사뮈엘 베케트의 무대와도 같은 쓸쓸한 그 동네에서 32살의 조선족 여자 최순희는 11살 난 아들 창호를 키우기 위해 그래도 매일 김치를 팔기 위해 거리에 나가야 한다. 세상 밖으로 나간 장률, 그를 알고 싶다 여기서는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하나는 방 안에서 거리로 나간 장률의 이동이다. 시종일관 화창한 늦봄 날씨의 거리에서 더 많은 인물들과 만나고, 그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여전히 조용하고, 잔인하며, 쓸쓸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장률이 만들어내는 미학적, 정치적, 윤리적 선택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산문적으로 설명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한다. 물론 그것은 내가 보고 또 본 다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질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 최순희는 <(<당시>의) 손을 못 쓰는 소매치기보다 더 말이 없다. 절망의 끝에까지 밀려난 32살 조선족 여자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 ‘여자’라는 세 겹의 매듭이 있다. 그 매듭은 우리에게 문화적 번역을 요구한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경계 사이에 비스듬히 서서 우리를 돌아보면서 중국에 발딛고 서 있는 삶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앎이란 거기에 산다는 문제와 만날 때 얼마나 빈곤해지는가? 나는 장률이 만나고 싶어졌다.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환대는 그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것뿐이다. 그 대답 안에 스며든 삶의 육신. 그것을 이해하고 껴안으려고 맹렬하게 노력하는 것. 장률과의 대담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배종옥

대학 1년, 생애 첫 미팅에서 만난 K와 끝내 연인이 되지 못하고 멀어졌다. 미완성이 부른 집착이었을까.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던 찢어진 내 작은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아니, 쟤가 왜 광고에 다 나오지? 언제 연예인이 된 거야.’ 착시의 대상이 배종옥이었다는 걸 드라마 <왕룽일가>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하여튼 그 때 내 눈에는 ‘두 사람이 무척 닮았다’. 헛것을 좇을 정도로 간절했던 K에 대한 허기를 <왕룽일가>의 배종옥을 보며 달랬고, 인기 급상승의 ‘쿠웨이트 박’에 비해 배종옥의 얼굴을 짧게 내보내는 연출자를 매회 저주했다. 급기야, 역시 배종옥이 출연했던 드라마 <도시인>을 볼 때는 드라마 프로듀서를 해야할까 보다,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그래서였는지 알 수 없으나 졸업 무렵, 한 방송사의 방송아카데미에다 아르바이트 수개월치를 갖다 바치고 연출 과정을 마쳤다). 이쯤 되니 배우 배종옥 자체의 매력에 점점 빠질밖에. 그녀의 온전한 첫 영화 주연작 <걸어서 하늘까지>가 극장에 걸리던 날, 달려갔다. 그것도 첫 미팅의 K를 데리고. 현실 속의 K와 재회한 터에 스크린 속의 연인까지 어둠 속에서 함께 하니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그 후 K와 첫 연애에 빠져들었으니 ‘오우~ 스크린 속 나의 여신이여, 땡큐’였다. 1년 뒤에 나온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의 주제가는 음치를 증명해주는 나의 오랜 애창곡이 됐다. 신문기자가 됐다. 배종옥과의 첫 대면은 케이비에스 분장실에서 이뤄졌다. 긴장과 설렘에 살떨리던 인터뷰 순간은 허무하게 끝났다. 여신의 응답 방식은 대단히 경제적이었고, 교감의 수위는 기사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헤어진 K는 누군가의 아내가 됐고, 여신은 구름 궁전에 머물 뿐인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질투는 나의 힘> 개봉 파티에서 여신을 다시 만났고, 여전히 경제적인 대화를 나눴다. 다시 시간이 흘러 <러브 토크> 마지막 촬영날, 여신이 내 앞에 툭 앉으며 아는 체를 했다. “<안녕, 형아> 때 인터뷰를 3주 동안 계속 하니까 너무 힘들더라. 근데 기자들도 공부 좀 하고 와야하는 거 아니니? 어이 없는 질문 할 때면 없는 기운이 더 빠져. 그렇지 않니? <씨네21>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보자마자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툭 반말을 던져주시는 그녀, 감동의 물결이었다. <러브 토크> 개봉 파티날, 누군가 눈 흘기며 면박을 줬다. “어째, 자리에 없다 싶으면 종옥 언니가 노래 부르고 있고, 그 뒤에서 열심히 백댄서하대. 번번이. 그렇게 좋아?” K는 바다 건너 머나먼 땅에서 새 삶을 시작했고, 그녀와의 기억은 구름 저 너머로 사라져간다. 반면,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 출연중인 배종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여신 독재의 시대를 마무리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구름 너머에서 이따금 내 코앞으로 하강해 그 또한 나처럼 생사고락의 인격이라는 걸 알려주니 참으로 정겨운 여신이요, 인간미있는 여신이다. 스크린과 텔레비전에서 똑부러지는 그의 눈빛과 어투는 여전하지만 외부를 포옹하는 기운은 나의 눈을 따뜻하게 해준다. 현실과 스크린 사이에 벌어지는 교차의 묘미는 삶을 진정시켜주곤 한다. 영원한 건 없다는 새삼스러움으로.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그늘진 이면, <스위트룸>

<스위트룸>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함께 캐나다의 대표적인 감독인 아톰 에고이얀의 작품이다. 에고이얀이 자신의 두 번째 작품인 <패밀리 뷰잉>을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선보였을 때, 그 영화를 본 빔 벤더스는 자신에게 주어질 상금을 양보하려 했을 만큼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스피킹 파츠> <엑조티카> <달콤한 내세> 등으로 이어지는 에고이얀의 영화는 빔 벤더스의 감식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아라라트>에서 동시대를 배경으로 하던 영화적 경향에서 벗어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영화 속 영화’의 형태로 재현하며 과거로 시선을 돌렸던 에고이얀은 다시 한번 과거의 시간을 배경으로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그늘진 이면을 들춰내고자 한다. <스위트룸>은 1950년대 최고의 코미디언 콤비였던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가 소아마비 환자들의 치료 기금을 모금하는 텔레톤 공연의 무대에 오르기 전 서로를 마주 보는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치 결별하기 이전의 제리 루이스(Jerry Lewis)와 딘 마틴(Dean Matin) 콤비처럼, 로큰롤 분위기의 악동인 래니와 클래식에 어울리는 위트있는 신사인 빈스는 상보적으로 완벽한 콤비를 이루면서 1950년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최고 스타로 군림했다. 이 도입장면에서 에고이얀 영화의 음악을 도맡다시피 하는 마이클 대너의 영화음악이 분위기를 마술적으로 전환시키면(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클래식과 팝, 펑크록과 재즈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영화음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텔레톤 공연 장면을 담던 카메라는 한 호텔의 스위트룸 욕조에 죽어 있는 한 여인을 향해 다가간다. TV를 통해 보여지는 화려한 쇼와 그 등가물인 듯한 스위트룸, 하지만 그 욕조에 발가벗은 채로 싸늘히 식어 있는 모린(레이첼 블랜차드)이라는 젊은 여성. <스위트룸>은 이 대조적인 도입부를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생산한 스타의 겉으로 드러나는 삶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적나라한 실체 사이의 간극을 암시하는 것이다. <스위트룸>의 원제가 <진실이 있는 곳에>(Where the truth lies)임을 감안한다면, 에고이얀이 보여주려는 치명적인 진실은 표면과 이면의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 둘이 조화에 실패함으로써 벌려놓은 그 간극에 놓여 있는 셈이다. 래니와 결별한 뒤 내리막길을 걷던 빈스는 자신의 전기를 출간하기로 결정하고, 그 저술 작업은 그들의 마지막 텔레톤 쇼에 출연했던 소녀이자 이제는 야심만만한 젊은 작가로 성장한 카렌(앨리스 로먼)에게 돌아간다. 카렌은 빈스와 래니의 삶에 놓여진 수수께끼인 모린의 죽음을 캐내려 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영화 말미에 저널리스트를 꿈꾸지만 진실을 수단화하려 했던 모린의 얼굴이 카렌과 겹쳐지는 장면이 암시하듯이, 그녀에게 그 사건은 야심찬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미끼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카렌은 <달콤한 내세>의 변호사와 유사하다. 그가 스쿨버스 사고로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마을을 조사하고 그 사건에 얽힌 진실을 밝히려 하지만, 이는 변호사로서의 의무감이나 정의감이 아닌 마약에 찌든 딸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카렌은 모린의 죽음에 얽힌 사건의 실체를 조금씩 확인해가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래니와 빈스에게 품었던 환상이 그 이면의 마약과 사물화된 섹스에 잠식당한 추악한 삶과 충돌하며 발생하는 혼란 속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스위트룸>은 미스터리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진실의 폭로 지점을 향해 숨가쁘게 질주하는 일반적인 장르의 공식보다는 현재(1972년)와 과거(1957년)를 오가면서 그 사건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표면과 이면의 삶을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것이 일반적인 스릴러영화에 비해 속도감이 더딘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시공간을 다층적으로 구성하여 파편화된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나 다소 느린 듯한 속도감의 사건 전개는 에고이얀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스위트룸>이 영화제에서나 간간이 만날 수 있는 에고이얀 영화의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스위트룸>은 진실을 대하는 에고이얀의 태도를 다시금 확인시켜준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달콤한 내세>와 <아라라트> 등에서 드러난 바 있듯이, 에고이얀은 어떠한 진실이 영화와 각종 미디어 그리고 심지어는 사법 제도와 만났을 때, 그 자체로 소통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던지곤 한다. <스위트룸>에서도 진실을 상업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출판시장(혹은 저널리스트의 욕망)을 향해 곳곳에서 비판적 시선을 던지는 에고이얀은 진실이 매력적인 교환의 대상인 이상 그만큼 변질되기도 쉽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다. 이러한 에고이얀의 진실에 대한 입장이 <스위트룸>의 엔딩에서는 진실이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라면 폭로보다는 유예(<달콤한 내세>는 은닉에 가깝다)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에고이얀은 약이지만 또한 독(질병)이기도 한 파르마콘과 같은 이중적 성격의 진실에 대해 약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독의 위험을 피해 움츠려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그것이 <스위트룸>을 보면서 그의 최고작인 <달콤한 내세>를 떠올렸던 이유일 것이다.

[로마] 난니 모레티, 21년 만에 TV에 출연한 사연

5년 전 <아들의 방>을 마지막으로 돌연 정치계에 뛰어들었던 이탈리아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가 새 영화 <일 카이마노>로 이탈리아 관객과 만났다. 지난 2월24일 개봉한 영화 <일 카이마노>는 현 이탈리아 총리를 비유한다라는 말이 떠돌며 개봉 이전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개봉시기를 문제 삼았던 중도좌파 야당은 이 영화가 4월9일 있을 총선에서 중도우파 여당에 더 많은 표를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관객이 중도우파 여당의 당수인 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관한 영화에 거부감을 품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민감한 시기를 보내고 나서 영화를 개봉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중도좌파 야당의 주장에 난니 모레티는 “1년 전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결정한 영화 개봉 시기를 총선 때문에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거절했다. 한 나라의 총리를 영화화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2000년부터 5년 동안 총리를 맡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4월9일 총선을 앞두고 언론으로부터 애초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총선을 앞둔 이탈리아 언론들은 현 총리와 그의 여당이 공약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난니 모레티는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어떻게 총리가 되었는가? 3개의 방송사를 운영하고, 출판과 신문을 장악하고 있는 그가 가진 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난니 모레티는 자질구레한 설명을 접어두고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돈뭉치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가 돈이 많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사람들 이름을 빌려 스위스 은행에 돈을 분산, 저금했는데 이 돈들은 하늘에서 쏟아진 것만은 아닐 거야. 마피아의 돈이다”라고 답을 내리고 있다. 영화는 이혼의 고통과 이탈리아영화에 대한 사랑도 말하고 있다. 두 아들을 둔 영화 속의 영화제작자는 이혼을 경험하며 뼈아픈 상실의 시대를 체험하고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난니 모레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이탈리아의 현실을 영화를 통해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모레티는 텔레비전 인터뷰에 거의 응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영화 개봉과 함께 21년 만에 <케 템포 파>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 카이마노>는 코미디도 아니고 정치영화도 아니고 단지 영화일 뿐”이라고 답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정치인들이 좋아하든 말든 그것은 영화를 보는 시각에 따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나 다름없다”고도 했다. 4년 전 영화를 뒤로하고 ‘지로톤도’라는 대열에 앞장서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 한다”, “방송 독점을 반대한다”를 외치던 그가 지금 다시 감독으로 돌아온 것에 이탈리아 관객은 연일 전 좌석 매진이라는 관심으로 응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이르면 칸영화제에서 세계 언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양적으로 확장된 불치병 영화, <연리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불치병을 다룬 영화? 아니다. 그렇다면 황우석 박사 같은 이가 주인공이 돼야 한다. 이건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다. 최근 몇년 사이에 그런 영화들이 끊이지 않고 만들어진다. <연리지>는 그걸 조금 더 확장한다. 정확히 말해 양적으로 늘린다. 이 영화에선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이 둘이다. 민수(조한선)는 게임 개발 회사의 CEO이다. 돈 잘 벌고, 잘생긴 바람둥이다. 가벼운 교통사고로 병원에 가던 길에 혜원(최지우)을 만나게 된다. 어떻게? 비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혜원 옆을, 민수가 탄 승용차가 지나가면서 길바닥의 물을 혜원에게 잔뜩 퍼붓게 된 게 인연이다. 혜원을 차에 태워줬더니 혜원 역시 목적지가 병원이다. 민수는 혜원에게 사심을 품지만, 혜원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내려버린다. 그런데 다시 만난다. 어디서? 민수가 검사차 입원한 병실에서. 혜원은 민수의 맞은편 병실에 입원해 있던 환자였다. 이런 식의 우연이 겹치면서 둘은 사귀게 되고, 민수는 혜원의 불치병 사실을 알게 되고…. 영화는 공식을 따라가면서 옆길에 간간이 민수의 회사 선배(최성국)와 혜원 친구(서영희)의 로맨스를 코믹한 의도로 배치한다. 대체로 에피소드가 밋밋하고 평이하며, 화면은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단조롭다. 민수의 바람둥이 기질이, 혜원에 대한 절실한 사랑으로 바뀌는 것 역시 시간문제일 뿐이다. <연리지>는 높이 사줄 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영화다. 단 하나, 눈에 띄는 건 불치병 환자가 한명 더 등장한다는 점이다. 불치병 환자가 주인공이라면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그 힘든 과정에 대한 묘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연리지> 역시 최근의 비슷한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들처럼 막상 주인공은 죽음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주인공의 죽음은 의미를 상실하고 그 주인공을 사랑한, 산 사람의 이별만이 문제가 된다. 이타적인 척하면서 실은 이기적인 텍스트라는 걸 새삼 이 영화를 두고 문제삼는 건 생뚱맞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래도 불치병 환자가 둘이면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 것도 생뚱맞은 일일 듯하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진 시먼스

무엇보다 먼저 손은 행위를 나타낸다. 손은 계약서에 사인해 결정을 완료하고 도시를 건설하며 손가락 한 번의 클릭 실수로 한 국가의 경제나 국방 시스템이 마비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 처음 나누는 육체적 접촉도 상대의 손을 잡는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몽정을 경험했다. 못먹고 못살던 시대의 1965년산 제품으로선 너무 빠른 신체적 조숙이었다. 그러다보니 피도 안마른 어린 초딩 녀석이 벌써부터 밝힘증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호통재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4학년 바로 그 즈음에 담임선생으로 온 분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처음 초등학교 선생 일을 시작하는 23살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외람되지만 수업시간 내내 담임선생이 칠판의 좌우를 오갈 때마다 따라 파동치는 가슴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밤마다 담임선생에 대한 환상으로 몽정을 하는 횟수가 더욱 잦아진 반면, 성적은 육중한 물체가 낙하하듯 빠르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만 갔다. 이렇게 나의 초딩 4년 시절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야릇하고 은밀한 쾌감, 그러면서도 왠지 불결하고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감정의 혼돈 상태에서 유쾌하지 못하게 끝났다. 5학년 무렵, 주말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던 외화프로그램을 보다가 우연히 진 시몬즈라는 배우를 알게 되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60년 작 <스팔타커스>였다. 당시 흑백 화면에서 그녀를 처음 보고 나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뻗는 내 손을 발견하게 되었다. 경이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온몸으로 진동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행위였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 여선생에 대한 성적인 호기심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듯한 그런 순수함이 가슴 쏙에 “쏴~”하고 퍼지는 듯했다. 진 시몬즈는 어린 나에게 성적 매력을 초월한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스크린 속의 내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한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절인 만큼 이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렬해져만 갔다. 고교시절까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빅 컨트리>(1958), 리차드 버튼 주연의 <성의>(1953), 버트 랭카스터와 함께 전도사 샤론 역으로 나왔던 <엘마 갠트리>(1960), 그리고 전혀 의외의 캐릭터로 등장했던 <검은 수선화>(1947) 등등 여러 작품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봤다. 진 시몬즈가 나오는 영화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고1때였다. 등교길이면 언제나 같은 버스에서 마주치던 여고생이 있었는데, 옆모습이 진 시몬즈와 흡사했다. 무언가 멋진 프로포즈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 고민하고 또 했다. 당시 문화방송 장학퀴즈에 출연해 장원을 하고 소감을 밝히는 과정에서 공개적인 사랑 고백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결국 장학퀴즈 445회에 출연(당시 차인태, 조일수 진행)했지만 공개홀의 수많은 조명과 방청객들을 보자 너무 떨고 긴장한 나머지 작전은 100%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며 이성에 대한 취향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진 시몬즈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신부와 소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가시나무 새>에서도 열연했고, 근래에는 저 유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늙은 소피의 영어 목소리를 맡기도 했다. 비록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목소리만 들려주는 것이었음에도 그리고 그것이 70대의 할머니가 된 진 시몬즈였음에도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게 만드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여준 진 시몬즈는 내겐 영원한 스크린 속의 첫사랑인 것이다.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3]

세상의 시선 따윈 상관없어! 헤이, 맨∼! 무엇보다 인생에는 록 스피릿이 필요하다고. 응? 알아? 음악, 음악 말야. 그리고! 남들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건 하는 정신이지. 우리가 이상한 영화를 좋아한다고? 보고 싶은 건 보는 거야. 식충이, 게으름뱅이, 미친놈, 괴짜, 변태…. 저놈들이 뭐라 해도 신경쓰지마. 그런 소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려. 우리는 속박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냐. 즐기고 놀려고 태어난 거라곳! 어둠 속의 심장박동 Heart, Beating in the Dark 나가사키 슌이치/ 일본/ 2005년/ 104분 두근거리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세 커플의 기이한 고백록. 한때 연인이었던 링고와 이나코는 23년 만에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다. 잊고 살았다지만, 두 사람에겐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악몽이 있다. 그리고 젊은 부부 토루와 유키. 두 사람 또한 과거의 링고와 이나코가 그러했듯이, 똑같은 이유로 경찰의 수배를 피해 도주 중이다. 갑자기 치밀어오른 두려움과 좀처럼 떼내지 못하는 불안에 떨며 섹스를 거듭하는 두 커플은 결국 바닷가를 찾게 되고, 그곳에서 조우한다. 마지막 커플은 23년 전 링고와 이나코. 나가사키 슌이치가 1982년에 만든 동명영화의 리메이크작이고 후속작이기도 한 <어둠 속의 심장박동>은 과거 오리지널 필름을 여러 차례 삽입해 두 커플이 억누르고 싶어하는 죄의식의 근원을 젊은 날의 링고와 이나코를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인생의 어떤 것을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또 다른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붙잡으려고 할 것이다”라는 말로 리메이크를 받아들인 감독처럼, 배우들 또한 만회의 기회를 쥐고자 애쓴다(메이킹 다큐멘터리의 형식도 취한다. 원작의 링고와 이나코를 연기했던 두 배우가 실제 중년 커플로 나온다). 극중에서 링고가 과거의 자신이기도 한 토루를 만나면 실컷 패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이토. 하지만 결국 그는 주먹을 날리지 못한다.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과거, 그것은 떠안고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광기 Lunacy 얀 슈반크마이에르/ 체코/ 2005년/ 118분/ 불면의 밤 세상에는 많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그중 어떤 선은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는 말로 세상을 양분한다. 얀 슈반크마이에르의 <광기>는 그 선의 어느 쪽 너머가 진짜 광기인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일이 가능한지 묻는 영화다. 장이라는 남자는 가끔 환상을 본다. 두 괴한이 나타나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려는 환상이다. 그의 어머니는 정신병자였고, 장이 보는 환상은 자신도 어머니처럼 감금될지 모른다는 데 대한 강박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가는 길에 장은 정체불명의 후작을 만난다. 그는 분명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장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행동과 장광설에 알게 모르게 설득당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가운데 장은 한쪽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광기의 실체를 보여준다. 스톱모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감독답게, 슈반크마이에르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혀, 고깃덩어리, 눈알이 등장하는 수십편의 스톱모션신을 영화에 삽입했다. 이 영상은 처음엔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지만 반복해서 보고 있자면 꽤나 사랑스럽게 보인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광기>의 스토리 역시 곧 현실에 대한 우화로 다가온다. 하바나 블루스 Habana Blues 베니토 잠브라노/ 스페인, 쿠바, 프랑스/ 2005년/ 110분/ 영화궁전 음악이 곧 생활인 쿠바에는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넘치지만 산업으로서의 음악은 없다. 12년간 쿠바에 살았던 스페인 감독은, 성공하기 위해 유럽시장에 진출해야만 하는 쿠바 뮤지션들의 상황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밴드의 리더인 루이와 티토는 오랜 지기다. 꿈꾸던 유럽 진출을 앞두게 되지만 무명인 그들에게 제시된 계약 조건은 열악하다. 루이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돌아서고, 쿠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티토는 계약이 깨졌음에 불같이 화를 낸다. 밴드를 떠나 혼자 스페인행을 결심하는 티토. 티토 없는 콘서트를 준비하는 루이. 또 다른 한편에선 아내와의 이별이 루이를 기다리고 있다. 쿠바의 색감으로 칠해진 여러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은 <하바나 블루스>가 선사하는 가장 큰 기쁨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에 머물지 않는다. 쿠바의 젊고 펄떡이는 음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현실이다. 사랑하고 아끼던 이들에게도 헤어짐의 순간은 온다. 각자가 선택한 이별 앞에서, 이들은 아린 마음을 여미며 서로의 앞날을 응원한다. 따로 걷는 걸음이 쓸쓸해 보이지만 빛나는 과거는 그들에게 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쿠바인들의 건강한 생명력은 보는 이의 가슴에도 힘을 불어넣는다. 홈커밍 Homecoming 조 단테/ 미국/ 2005년/ 60분/ 시네마스케이프 조 단테가 지옥의 사자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공화당원으로 추정되는 정치고문이 TV에서 “전사자들이 돌아와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를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죽은 군인들이 무덤을 뚫고 지상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문제는 돌아온 사자들이 원하는 것이 공화당 정치고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 썩은 살을 흘리며 나타난 시체들은 그들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투표권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홈커밍>은 원래 다리오 아르젠토, 토브 후퍼, 존 카펜터 등 13명의 공포영화 거장들이 모여서 만든 미국 쇼타임 채널의 프로젝트 <마스터즈 오브 호러>의 한 에피소드로 기획됐다. 물론 조 단테가 순수한 의미로서의 공포영화 감독이 아닌 만큼 <홈커밍>도 정공법적인 공포영화로서의 흥미는 덜하다. 사실 조 단테(<그렘린> <하울링>)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좀비영화 장르의 관습을 빌려 현실정치를 꼬집을 수 있는 풍자코미디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홈커밍>은 노골적으로 부시 정부를 놀려먹는 반공화당-좀비영화이며, 오랜만에 메가폰을 쥔 조 단테의 반골정신 또한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까뮈 따윈 몰라 Who’s Camus Anyway? 야나기마치 미쓰오/ 일본/ 2005년/ 115분/ 시네마스케이프 고다르와 베르톨루치 그리고 카뮈. 영화 워크숍 작품을 준비하는 문학부 학생들은 쉴새없이 서양 영화감독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범위도 대중이 없어서 트뤼포와 타란티노를 오갈 정도다. 야나기마치 미쓰오 감독은 서양의 영화와 문학을 무의식적으로 흡수하는 일본의 현재 젊은이들에게서 불안을 잡아낸다. 극중 영화감독 마츠카와 어시스턴트인 히사다, 주연배우 이케다 등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문제가 있다. 마츠카는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히사다는 남자친구가 멀리 떠난 사이 다른 두 남자와 키스를 하게 되면서 고민에 빠진다. 여자 같은 복장을 즐겨입는 이케다는 연기에 대한 감독과의 의견차로 힘들어하고 문학부 교수 나카조는 남몰래 여학생을 훔쳐본다.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영화 속 내용처럼 점점 미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고, 영화는 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는 <불의 축제> 이후 야나기마치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다. 지진 속의 피아노 조율사 The Piano Tuner of Earthquakes 퀘이 형제/ 영국, 독일/ 2005년/ 99분/ 시네마스케이프 몽환적인 작품들로 유명한 퀘이 형제의 신작. 그들의 첫 장편인 <밴야민타 학원> 이후 10년 만의 작품으로, 아돌포 비요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을 모티브 삼았다. 오페라 가수 말비나에게 드로즈 박사라는 인물이 보낸 백합이 배달된다. “신이 우리의 두 영혼은 단단히 묶을 것”이라는 기분 나쁜 쪽지와 함께다. 약혼자 아돌포와의 결혼을 앞둔 말비나는 노래를 하다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둔다. 어디선가 나타난 드로즈 박사가 절규하는 아돌포의 눈앞에서 시신을 거두어간다. 그는 자신의 세상에다 그녀를 되살린다. 그러나 말비나는 인형처럼 멍하게 앉아만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드로즈 박사는 피아노 조율사를 성으로 불러 이상한 기계 7개를 조율해달라고 한다. 아돌포와 똑 닮은 피아노 조율사는 말비나와 마주치자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영화는 퀘이 형제가 대세인 디지털을 따르면서 어떻게 자신들 고유의 색감과 질감을 살릴 것인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쌍둥이 형제는 매킨토시 컴퓨터를 샀고 파이널 컷 프로를 설치했다. 스토리는 다소 지루하지만, ‘바로크 판타지’라고 일컬어지는 환상적 영상은 작업 방식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름답다. 3일간 불면의 밤을 위하여 컬트, 음악, 광기의 밤이 기다린다 올해 전주는 마니아 취향의 심야상영 3회를 준비했다. 각회의 키워드는 컬트, 음악, 광기 정도가 된다. 심야상영 첫날인 4월28일 밤에는 컬트의 제왕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초기작들이 기다린다. 장편 데뷔작인 <스테레오>를 비롯,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호러·고어영화에 경도되기 시작한 당시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텔레파시, 정신병, 성애 등의 소재를 마구 뒤섞어놓은 이 영화들은 이후 <비디오드롬> <플라이> 등의 모태가 되었다. 29일 밤에는 3편의 음악영화가 관객을 부른다. 샴쌍둥이로 결성된 록그룹에 대한 가짜 다큐멘터리 <브라더스 오브 더 헤드>, ‘물건’을 제거하고 여자가 되려는 성전환자의 이야기 <20센티미터>, 그리고 앞서 소개한 <하바나 블루스>다. <하바나 블루스>와 <20센티미터>는 성장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있어 음악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즐겁게 볼 수 있다. 마지막 밤엔 광기와 망상이 힘을 떨친다.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거장 얀 슈반크마이에르의 <광기>와 그에게 영감을 받아왔다는 퀘이 형제의 신작이 함께 상영된다. <람포 지옥>은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 에도가와 람포의 단편 4편을 영화화한 것. 네명의 일본 감독이 각자의 방식으로 람포의 공포를 풀어놓는다.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 가이드 [7]

전대미문의 시청각적 융합물 인도영화의 대표적인 거장으로 손꼽히는 샤티야지트 레이는 리트윅 가탁이 생전에 남긴 글과 인터뷰를 모은 소책자 <영화와 나>의 서문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존경어린 찬사를 바친 바 있다. “리트윅 가탁은 이 나라가 배출한 소수의 진정 독창적인 재능의 소유자 가운데 하나였다… 서사시적 스타일 속에서 그가 창조해낸 강력한 이미지들은 사실상 인도영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로 작고한 지 꼭 30주년이 되는 인도 영화감독 리트윅 가탁은 우리에겐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심지어 영화광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그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의 정치학과 시학을 동시에 고민한 위대한 작가들- 예컨대 로베르토 로셀리니,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글라우버 로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오시마 나기사 등-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화사의 거목이 이런 식으로 잊혀져가고 있다는 건 진정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로 출발해 인도민중극회(IPTA) 배우이자 연출가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옮겨갔던 그의 행보는 좀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였다. 심지어 그는 (로셀리니와 유사한 태도로) 기꺼이 영화를 버리고 텔레비전으로 옮겨갈 것이라 말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진정한 관심은 영화에 놓여 있지 않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그런데 정작 가탁이 만들어낸 영화들은 민속적인 형식과 브레히트적 장치간의 기이한 결합, 다큐멘터리적 터치와 놀랄 만큼 표현적인 촬영의 교차, 거의 당혹스러울 정도로 이례적인 사운드 편집 등이 불가사의하게 어우러진 시청각적 융합물,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영화들이었다(후일 가탁의 초기 걸작 가운데 하나이자 그의 유일한 ‘코미디’인 <감상적 오류>(1957)가 파리에서 상영되었을 때, <카이에 뒤 시네마>는 그의 독특한 사운드와 이미지 병치 방식을 장 마리 스트라우브, 자크 타티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그것과 비교하기도 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비타협적인 예술가였으며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던 이 괴벽의 시네아스트를 평생토록 사로잡았던 주제는 1947년의 벵골분할(과 그 귀결)이었다. 그 자신 동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출신이었던 가탁에게 이 강요된 분할은 돌이킬 수 없는 문화적 단절을 초래한 참을 수 없는 비극이자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별, 그리고 더욱 큰 비극을 초래할 뿐인 재회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심장한 알레고리가 된다. 특히 1960년대 초반에 그가 내놓은 일련의 작품들- <구름에 가린 별>(1960), <사랑스러운 간다르>(1961) 그리고 <강>(1962)으로 이어지는 ‘콜카타 3부작’- 은 이상 언급했던 가탁 영화의 스타일과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들로 손꼽힌다. 가탁의 영화 가운데 생전에 비교적 따뜻한 반응을 얻은 작품은 <구름에 가린 별> 정도였다. <사랑스러운 간다르>와 <강>의 연이은 실패는 가탁을 오랜 기간 침묵하게끔 만들었다. <강> 이후 1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탁은 당시 신생국가였던 방글라데시 영화계의 자본으로 <티타시라는 이름의 강>(1973)을 만들 수 있게 된다. 가히 가탁 영화세계의 총결산이라 할 이 작품은 그가 얼마만큼의 예술적 야심과 깊이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가늠케 하는 현대의 위대한 서사시이다. 동벵골 티타시 강가 말로(Malo) 공동체의 몰락의 과정을 유장한 리듬에 실어 보여주면서 가탁은 자신의 유년기를 사로잡았던 40여년 전의 과거에 대한 숭고한 기념비를 완성했다. 그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 지식인으로 출연하는 <추론, 토론 그리고 이야기>(1974)는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고 이는 그가 죽은 지 일년이 지난 1977년에야 개봉되었다. 씁쓸한 후일담 한 토막. <추론…>이 개봉되기 열흘 전, 가탁의 데뷔작 <시민>(1952)이 콜카타의 한 극장에서 ‘비로소’ 개봉되었다. 샤티야지트 레이는 만일 이 영화가 제때 빛을 보았더라면 자신의 <길의 노래>(1955)가 차지했던 ‘최초의 대안적 벵골영화’ 자리는 <시민>의 몫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의례적인 겸손의 발언이 아니라 진정 정당한 평가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노희경과 <굿바이 솔로> [1]

“거기 떡볶이 집이 아직 있으려나?” <굿바이 솔로>의 대본을 마치고 <씨네21>이 있는 마포로 노희경 작가를 불러냈을 때만 해도 우리의 발걸음이 공덕시장 어딘가를 어슬렁거리게 될지는 몰랐다. “예전에 이 동네에 배가 들어왔거든요.” <내가 사는 이유>의 배경이 되었던 마포의 선술집 언덕, 선원들을 상대했다는 ‘삐어홀’(맥주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던 그 공간엔 이제 고층 아파트들만이 빽빽하게 서 있다. “지독하게도 바람을 피웠던 아버지”와 “너무 순해서 가슴이 아팠던 엄마”의 품을 떠나지 않고 응석을 부렸던 마포 토박이 소녀는 “오랜만에 왔더니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며 옛 동네를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짧은 머리에 마냥 소년 같은 모습이지만 그러고보니 노희경 작가도 이제 마흔이다. 그녀가 마흔 나이에 써내려간 <굿바이 솔로>는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같은 따로 액자를 해놓아도 좋을 선언적인 대사는 줄었지만, 극 안에서 오가는 생기있는 대사의 호흡은 그 어느 작품보다 찰지다. 다중인물을 내세우고 추리 형식을 더한 <굿바이 솔로>는 기존 노희경의 팬에게나 보통의 시청자에게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다. 봄이 오는 마포, 연기 자욱하게 깔린 시장통 생선구이집에서 낡은 호텔 커피숍으로 이어졌던 <굿바이 솔로>에 대한 혹은 작가 노희경에 관한 이야기. “외국드라마에 충격받고 눈 부릅뜨고 공부했다” -KBS 특집극 <유행가가 되리>를 선보이긴 했지만 미니시리즈로 치자면 <꽃보다 아름다워> 이후 2년이 흘렀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된 동력은 어디서 왔나. =‘심한 좌절’이 동력이었다. (웃음) 나는 외국드라마를 거의 안 보던 사람이다. 예전에 <섹스&시티>를 잠시 보고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섹스만 하나,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러다 쉬는 동안 와 <섹스&시티> 등 외국드라마를 챙겨보면서 솔직히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연애를 하면서도 수사를 하면서도, 무인도에 떨어져서도 철학을 하고 있었다.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진지했다. 물론 드라마에 투자되는 자본의 규모가 다르지만 그 짧은 시간에 단지 상황이 아니라 이야기와 삶의 본질을 기막히게 비벼내더라. 저 작가에 저 감독에 저 배우에 저 시청자라니! 문화적 충격을 넘어 드라마가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멸감에 빠졌다. 부들부들 떨면서 봤다. -어떻게 그 충격에서 벗어났나. =그러다가 눈을 부릅뜨게 됐다. 언제까지 탓만 할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심리학책, 철학책을 파기 시작했다. 드라마 공부를 다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질에 다가가려면 끊임없이 공부해야겠다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판이 그동안 가진 것 없는 노희경을 먹여살렸으니 계속 공부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의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아름다운 대사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고민의 끝에 뭐가 있었나. =지금껏 내가 써왔던 대사들을 보게 되었다. “날 잊어줘”, “이해해줘” 같은,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썼던 대사들까지 혼란스러웠다. 그게 내가 잊어달란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간 포장을 하느라 본질을 이야기할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노희경표 명대사’를 기대하는 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드라마를 써오고 그 대사들을 기억하는 팬들을 보면서, 나 역시 할 수 있는 대사, 아름다운 대사를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작가는 인상적인 대사를 쓰는 사람이라고 착각한 거지. 그런데 어느 날 TV를 보고 있으니 여기저기 드라마에서 온갖 아름다운 대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와, 나는 저렇게는 못 쓰겠다, 느낄 만큼 휼륭한 대사들이었다. 그런데 그 눈부신 대사를 듣는데 이상하게 쓸쓸하고 허전했다. 예전에 선배 PD들이 날 보고 “넌 오만방자해, 넌 테크니컬해, 넌 자아도취야, 너는 마스터베이션하고 있는 거야”라며 충고했을 때는 흥, 했던 말들이 희미하게 무엇인지 알겠더라.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러다보니 대사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요즘은 그냥 지나가는 대사가 좋아졌다. 대신 배우나 연출에 훨씬 많이 기대게 되고, 그런 여유가 더 좋은 연기나 연출을 끌어내는 것 같아 기쁘다. -정감가는 노희경표 캐릭터들은 눈에 익지만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도,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수희가 계속 받게 되는 정체 모를 문자메시지처럼 추리 요소도 긴장감을 주고, 영숙의 환영이나 과거의 플래시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앞서 말했지만 추리 요소는 <로스트>나 의 영향이 크다. 그렇다고 좋은 외국드라마 그대로 베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웃음) 내 색깔과 내 방식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추리’라는 사고 전개는 결국 무언가가 일어난 심연을 돌아보게 만든다. 내 경우를 볼 때 성격이 고집불통에 교만해진 이유에는 어린 시절 무시받았던 상처가 있었던 식으로. 그렇다면 나는 사건의 추리가 아니라 심리의 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멜로에 다중스토리로 얼개를 짜게 되었다. 물론 반응(시청률)을 보면서 여전히 멀었구나 했지만. (웃음) 대신 1년 공부해서 안 해본 거 해보려고 한 거니까, 앞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은 생겼다. “첫사랑은 처음이란 뜻밖에 없는 건데, 텔레비전 보면 온통 첫사랑 때문에 목매는 거 비현실적이라 싫었거든. 두번, 세번 사랑한 사람들은 헤퍼 보이게 하잖아. 성숙해질 뿐인데. 지금 이 순간 니가 내 전부이고, 지금 이 순간 너만을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 미치게 사랑한다고 해야지, 왜 건방지게 ‘영원히’를 앞에 붙여들.” - <굿바이 솔로> 영숙과 미리의 대화 중 총 16회로 이제 막 반환점을 돈 KBS 미니시리즈 <굿바이 솔로>는 주인공들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꽉 차는 드라마다. 설치미술가에 바텐더, 건설회사 직원에 밥집 아줌마까지 그들을 직업군으로 설명하는 것으로도 힘들고,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사랑한 청년과 하자투성이 ‘나쁜 놈’을 조건없이 사랑하게 된 아가씨와 젊은 날 준 마음을 되돌려받지 못한 채 시체처럼 살아가는 중년 여자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느낌이 든다. <굿바이 솔로>는 그보다 저마다 “죽어도 말 못할” 과거에, 저마다 하나씩의 거짓말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힘들게 시작한 고해성사 같은 드라마다. “모두 과거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지안(이한)도, 영숙(배종옥)도, 민호의 엄마(정애리)도, 대부분 <굿바이 솔로> 주인공들은 모두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겐 화해하지 않은 과거의 순간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영숙이는 길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먹고 도둑질을 하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짜 치유는 과거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과거를 잊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나는 정말 소문난 효녀였다.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3년간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살았다. 밥을 먹다가도 ‘내가 어떻게 밥을 먹어’라고 스스로를 괴롭혔다. 엄마보다 오래 살고 있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죽은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수술실에서 살아 나왔을 때 모든 가족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던 표정은 ‘아, 또 시작이구나’였다. 사실 나는 그 순간 엄마가 죽기를 바랐다. 내가 진짜 엄마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건 과거로 돌아가 그 순간의 나와 대면했을 때였다. 여전히 그 시절의 나는 부끄럽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주인공 모두 환자 같고 의사 같다. 서로의 치유에 기꺼이 동참하기도 하고. =모두 과거에 대해 변명하고 그것을 들을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것이 합리화가 될지라도. 우리는 가끔 지나간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현재의 나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 현재와 만날 수 없다.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말인데, 나는 어릴 적에 도둑질을 많이 했다. 학교 공중전화를 거꾸로 해서 동전을 빼는 식이었는데 이후 DDD전화기가 나오면서 장비가 필요하게 되어서 힘들었다. (웃음) 그런데 그때는 그게 죄인지 몰랐다. 나는 가난했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지했다. 하지만 지나간 나를 욕해도 그건 이미 과거다. 변명하고 싶으면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싶으면 합리화를 하라고 하고 싶다. 단 지금, 앞으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거다. “우린 남에게보다 늘 자신에게 더 가혹하다. 당연히 힘든 일인데 자신을 바보 같다고 미쳤다고 미워하고, 남들도 욕한 나를 내가 한번 더 욕하고, 그것도 모자라 누군가는 가슴에, 누군가는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면서 우리가 얻으려 하는 건 대체 뭘까? 사랑? 이해? 아니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 - <굿바이 솔로> 미리의 내레이션 노희경 작가의 캐릭터 사랑을 넘어선 배우에 대한 애정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시절, 주인공들의 사진을 집 벽에 붙여놓고 “잘 잤니? 재호야, 밥먹었어? 신영아” 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는 에피소드를 떠올려보면 자연스럽게 상상 가능할 것이다. ‘만학도’ 노희경의 단짝 학우인 나문희, 배종옥, 이재룡은 물론이고 천정명, 윤소이, 이한 등 제 몫 하는 어린 배우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김민희, 전혀 다른 모습을 선보인 윤유선까지 <굿바이 솔로> 역시 실로 배우들의 드라마라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