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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방한한 <내 곁에 있어줘> 에릭 쿠 감독

한국 관객에게 싱가포르 영화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심어준 <내 곁에 있어줘>(4월27일 개봉)의 에릭 쿠(41) 감독은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지닌 인물이다. 첫 장편 연출작인 <면로>(1995)부터 <12층>(1997), <내 곁에 있어줘>(2005)까지 장편 전작이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한국인 아내를 둔 덕에 한국 영화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여느 외국 감독보다 풍성하다. 조용히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내 곁에 있어줘>의 무대 인사를 하기 위해 서울에 온 에릭 쿠 감독을 만났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보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서편제> 이후 영화산업과 도시가 엄청나게 빨리 변화하는 걸 보고 놀랐죠. 싱가포르도 압축성장이라는 점에서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한국과 한국 영화에서는 훨씬 더 큰 에너지가 느껴져서 흥미롭습니다.” 한해 제작 편수가 4~5편에 불과한 싱가포르 영화를 세계적으로 알린 첫번째 감독인 에릭 쿠는 영화광인 어머니를 통해 영화에 눈을 떴다. 여덟살 때 어머니가 사준 비디오카메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하면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았다. 귀국 뒤 텔레비전 광고 등을 찍다가 영화로 전업한 그는 2000년대 초 <내 곁에 있어줘>의 주요 등장인물인 테레사 첸을 우연히 어느 결혼식장 피로연에서 만나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자신의 존재도 모르는 한 소녀에게 푹 빠진 열세살짜리 조카를 보면서 처음 이 영화를 구상했어요. 그렇게 10대와 청년, 노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가다가 난관에 빠졌을 때 테레사 첸을 만난 거죠. 그는 식사 테이블에서 제가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하자 대뜸 희망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어요.” 테레사 첸의 개인사와 역경을 딛고 삶에 대한 긍정을 체득한 첸의 태도에 감동받은 그는 영화의 방향을 180도 바꾸게 됐다. “테레사는 이중의 장애를 안고 살지만 그의 삶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롭습니다. 관객에게 테레사가 주는 삶의 영감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서 그가 직접 쓴 자서전을 영화에 자막으로 넣은 것이죠.” 그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그가 알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했다. 노년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그에게 영어를 가르쳤던 전직 공무원이고, 외로운 경비원 역은 부동산 중개업자가 연기했다. 그는 비전문 배우인 주변의 지인들을 배우로 쓰는 이유가 “그들로부터 창작의 영감을 얻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출연배우들의 삶도 바꾸어놓아 소극적 영화광이었던 아버지 역의 치우 성 칭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경비원역의 싯 켕 유는 전업배우로 나섰다. 앞으로도 이처럼 계속 비전문 배우들과 영화를 만들 예정이라는 그는 인도에서 찍게 되는 차기작의 다음 작품으로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랑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감독 이만희를 다시 보자 [1]

이만희 감독을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 ‘천재감독’, ‘다양한 장르 안에 깊이있는 주제와 철학을 담은 감독’, ‘검열과 삭제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에 5∼6편의 완성도있는 영화를 찍은 감독’, ‘곤궁한 시대의 무드를 다양한 영화적 장르와 모드로 바꿔낸 감독’ 등등. 하지만 그러한 평가에 비해 이만희의 영화는 거의 보여진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5월12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고전영화관에서 열리는 이만희 ‘전작전’은 한국 영화사의 거장을 새삼 발견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해병>과 <삼포가는 길>로부터 지난해 기적적으로 발굴된 <휴일>에 이르기까지 작품 22편이 상영된다. 프린트 소재를 파악할 길이 없는 <만추> 등을 제외하면 상영할 수 있는 이만희 감독의 모든 작품을 선보인다는 의미에서 이번 ‘전작전’은 더욱 뜻깊다. 이만희 감독의 생애와 작품세계, 그리고 영화평론가 김소영, 허문영씨의 이만희 감독에 대한 단상을 전한다. 오는 5월12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은 “영화천재 이만희”라는 제명 아래 그의 전작전을 개최한다. “천재”란 무엇인가 지식인에게 물어보았다. 천재란 “보통 사람의 능력 이상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이며 중요 특징으로 “창조성과 생산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만희는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소재를 다룬 감독이라는 점에서 “창조성”을 과시하고,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생산성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천재성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천재성은 깊이있는 주제와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보통의 언어로 풀어내며 대중적인 외형 속에 존재했다. 그가 한국 영화사 속의 어떤 감독보다도 많은 장르영화를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만희의 작가성을 그의 전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몇몇 제한된 작품에 국한하여 발견했던 이유이며, 그에 대한 변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까지 그의 전작을 본다는 것은 몇몇에게 주어진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작전은 영상자료원의 소개에서처럼 그의 작품세계를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이알 112를 돌려라> _ 페르소나 문정숙을 만나다 이만희 감독은 1931년 10월6일 서울의 하왕십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1956년 안종화 감독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영화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안종화 감독에 이어 박구, 김명제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받은 그는 임원직 감독의 <인력거>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김승호의 추천으로 19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하게 된다. 그는 같은 해 <불효자>를 연이어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폈으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정교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보여주는 젊은 감독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이런 연출력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이 작품으로 이만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 작품은 당시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를 가져와 당시 제작사들이 그리 반겨하지 않았던 밤장면으로 점철된 범죄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만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고,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 작품이 이만희에게 제공한 기회는 우연히도 25편이라는 똑같은 편수를 함께 작업한 배우 문정숙과 촬영감독인 서정민과의 만남이었다. 감독 이만희와 배우 문정숙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만희가 사랑한 것은 여자로서의 문정숙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문정숙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이만희의 정신세계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만희는 문정숙을 통해 세상을 보았고, 문정숙은 그가 만들어낸 세상의 히로인이었다. 그는 전쟁 이후 변화하는 사회규범과 새롭게 정립된 가치질서의 혼란스러운 물결에 적응하며 순응하고 때로는 처절하게 저항하는 인물로 문정숙을 선택한 것이다. 둘이 만났을 때 이미 서른을 넘어선 문정숙은 젊은 배우에게서 찾기 힘든 완숙함과 도도함, 고상함과 우아함 그리고 세파를 초월한 듯한 우울함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1962년에서 1967년까지 총 25편의 영화에서 서정민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열린 공간보다는 닫힌 공간, 여백보다는 채워짐의 미학을 추구했던 이만희의 영화적인 비전은 서정민이 가진 정교한 카메라의 눈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만희는 그 어느 시기보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서로 다른 영화적 형식을 실험하였고, 서정민은 그 서로 다른 다양함을 하나로 관통하는 이미지의 힘을 실어주었다. <7인의 여포로> _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하지만 이만희로 하여금 이렇듯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이었다. 당시 최대 규모의 제작비를 들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해병대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우여곡절 끝에 공개되고, 전쟁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이만희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 감독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연출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기쁨도 잠시, 1964년 12월,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필름이 압수되고 이만희에게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각계에서는 이만희 감독을 옹호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정부에 진정서가 제출되었지만 정부의 태도는 강경했다. 오랜 법정 시비 끝에 1965년 9월 영화는 혹독한 검열을 당한 뒤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개봉되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게다가 영화 개봉 뒤, 감독을 구속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이만희 감독은 결국 수감되었다. 약 3개월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만희 감독은 그러나 잠시 쉬고 나왔다는 듯 영화계로 복귀하였다. “반공영화”를 만들고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만희는 고집스럽게 다시 전쟁영화와 이른바 “반공영화”로 되돌아온다. 1966년 <군번없는 용사>와 1967년 <싸리골의 신화>는 이러한 이만희의 고집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추> _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 웬만한 사람이라면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시련을 겪고 난 1966년, 이만희는 생애 최고의 해를 창초해낸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모두 시도해보는 해”로 삼겠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했고, 그는 보란 듯이 다양한 장르를 누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잊을 수 없는 여인>과 나도향의 원작을 영화화한 문예영화 <물레방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전쟁영화 <군번없는 용사>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만추>가 모두 이해에 탄생했다. 그의 기세는 1967년까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양하면서도 완성도를 잃지 않는 탁월한 연출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자그마치 11편의 영화를 쏟아놓았다. <만추>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대표작 <귀로>와 <방콕의 하리마오> 같은 대중적인 작품을 섞어놓으며 이만희 전성시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만추>에 대한 평단의 관심은 대단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대적인 영화언어는 “새로운 한국영화의 지평을 여는 획기적인 수확”으로 평가되기도 하였고, 동시에 “서구의 모더니즘 영화언어의 답습”이라는 유보적인 평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평가와 상관없이 <만추>는 분명히 이만희의 영화세계에서 전환점이 되고 있다. <만추> 이전의 작품들이 좀더 대중적인 기호에 따르고 있다면 이후의 작품들은 같은 장르영화라 할지라도 좀더 실험적이고 개인적인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이만희에게 고통스러운 시기를 예고한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변덕스럽고 억압적인 영화정책과 제작구조의 기형화, 텔레비전의 등장 등으로 영화산업 전체가 쇠퇴기로 접어들기도 하였지만 대중과의 교감 지점을 잃어버린 이만희의 영화들은 상업적으로 실패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이 실패는 결국 이만희에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줄어들게 하였고, 영화 만들기가 삶의 전부였던 이만희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휴일> _ 우울과 절망의 시기 이 시기 이만희의 영화들은 우울함과 절망의 깊이를 더해간다. <휴일>은 이 절망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이 영화는 휴일마다 만나는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다. 지연은 애인인 허욱에게 임신사실을 알리고 자신들의 환경에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설득한다.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지연의 건강상태로 인해 중절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휴일>은 태어날 수 없었던 아이처럼 세상과 만나지 못했다.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로 인해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관은 이만희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7인의 여포로> 사건 이후 제작에 들어간 <천국의 사랑> 역시 촬영이 50%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제작정지 처분을 받았고, <포대령>이라는 영화는 제작허가조차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완성되고 여러 차례 검열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봉에 실패한 <휴일>은 이만희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음이 분명하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영화 만들기를 목숨처럼 여기던 이만희 감독이 1969년에 영화계를 떠나버린 데는 이러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쇠사슬을 끊어라> _ 구원과 용서의 메아리 그리고 2년 뒤, 이만희는 <쇠사슬을 끊어라>로 돌아온다.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영화 <쇠사슬을 끊어라>는 영화에 대해 변화된 그의 태도를 반영하듯 좀더 유희적이며, 냉소적인 유머감각을 선보인다. 이만희 영화 중 예외적으로 주인공들 모두가 살아남아 유유히 석양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 영화에서 그들이 가는 곳이 희망찬 내일이 아님이 분명할지라도 그들의 질주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70년대 이만희 영화의 예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사물인 <0시>(1972)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을 잡아넣은 형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납치한 유괴범은 타고난 순수함으로 아들과 친구가 되고, 처벌을 면하게 된 뒤, 둘이 함께 서울역 광장을 놀이터 삼아 함께 놀며 끝난다. 이 영화는 분명히 범법자이지만 순수한 유괴범은 악법으로 인해 범죄자의 너울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던 당시 사회에 대한 항변이며, 구원과 용서를 통해 우울한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이만희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구원과 용서”는 이만희 후기 영화의 대주제이다. <청녀>와 <태양을 닮은 소녀>, 그리고 유작인 <삼포가는 길>까지 이것은 세상과 병마에 지친 이만희의 역설적인 외침처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1975년 4월3일, <삼포가는 길>의 편집을 하던 중 이만희는 갑자기 쓰러진다. 이미 암으로 발전된 심각한 상태의 간경화도 문제였지만 급성 위출혈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늘 건장한 모습으로 작업현장을 지배했기에 그의 입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누구도 그의 죽음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지 열흘 만인 4월13일, 이만희는 4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서양의 영화천재이며 서스펜스스릴러의 대가였던 앨프리드 히치콕은 죽기 전 프랑수아 트뤼포와 긴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화세계를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고,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누누이 스스로에게 다짐시키지만 아무래도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천재의 영역이 있는 법인가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버린 이만희 감독의 부재가 두고두고 아쉽다.

그의 죽음 뒤 시작된 ‘마지막 날들’, <라스트 데이즈> [2]

벌레는 블레이크에게만 달라붙는다 블레이크는 집에 들어가는 대신 온실에 들어가서 삽을 가지고 나온다. 그리고 집 바깥 언덕길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진다. 이 장면이 시종일관 반복되는 이 언덕길이 나오는 첫 번째 숏이다. 이 장면은 같은 구도, 같은 위치에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잘 기억할 것. 이 언덕이 나올 때마다 시간은 기묘해진다. 말하자면 시간의 언덕. 그 언덕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기. 이 장면까지 앰비언트 사운드가 단 한번도 빠진 숏이 없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것은 다음 장면에서 아시아와 스캇이 서로 껴안고 자고 있는 이층 방(그런데 이층이 맞을까? 혹시 삼층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영화에는 계단의 트릭이 있다)을 보여줄 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이 10번째 숏은 이 영화에서 첫 번째 현실적인 디제시스의 장면이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화면과 사운드가 일치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그 이층 방에 누워 있는 그들 옆에는 소리를 ‘죽인’ 텔레비전이 켜 있고 그 화면에 태권도를 가르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때 창문 저 너머에서는 블레이크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다. 땅을 파는 것은 거기에 무엇을 숨기거나 찾기 위해서이다. 둘은 동시에 진행된다. 태권도와 땅을 파는 행위. 그 두개의 행위. 말하자면 둘 사이의 연관성, 혹은 유사성. 몸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으로 가는 길. 거기서 무언가를 찾아낸 블레이크는 그 상자를 들고 간다. 그 상자는 톰 무어 박스이다. 하지만 거기서 꺼낸 것은 와인이 아니다. 부엌에서 시리얼을 꺼내들고 우유를 타던 블레이크는 냉장고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마치 블레이크를 기다린 것 같은 메시지가 있다. “총은 침실 벽장에 있다” 블레이크는 그걸 떼면서 “고마워”라고 대답한다. 누가 그것을 붙여놓은 것일까? 블레이크는 그것이 어떻게 자기에게 보내진 메시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까?(이 집에는 여러 개의 침실 방이 있다). 총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왜 고마울까? 편지는 목적지에 항상 도착한다고 말해야 할까? 이 말의 핵심은 모든 편지는 상징적 네트워크 안에서 억압된 메시지의 자문자답이라는 것이다. 블레이크는 자기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자기가 찾아낸다, 라고 그 장면은 보여진다. 하지만 자기가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자기가 찾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붙여놓은 블레이크와 그것을 찾아낸 블레이크는 반복이 아니라 보낸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전도이다. 그때 블레이크는 벌레가 와서 물었는지 갑자기 자기 목을 찰싹 때린다. 숲속의 집에서 벌레를 쫓는 행위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행위를 영화 내내 블레이크만 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 집에 머무는 스캇과 루카스, 니콜, 아시아 중에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혹은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 영업을 위해 이 집을 찾아온 테디우스 토마스와 대화할 때에도 블레이크만 벌레를 쫓는다. 왜 벌레는 블레이크에게만 달려드는 것일까? 그가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에게만 달려드는 것일까? 다시 좀더 앞으로. 블레이크는 침실이 있는 방에 와서 벽장을 뒤진다. 그런 다음 여자 슬립으로 갈아입은 블레이크는 총을 들고 다른 방에서 (숏 8에서 텔레비전이 보이고 창문 저편으로 땅을 파던 블레이크가 보이던 바로 그 방) 자고 있는 스캇과 아시아의 방에 와서 총을 겨눈다. 영화 내내 블레이크는 옷을 갈아입고 또 갈아입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변신하듯이 갈아입는다. 그런데 완전하게 다른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흰 티셔츠와 빨간 추리닝 바지, 여성 슬립, 갈색 재킷, 방한모가 달린 점퍼, 붉은 줄무늬 스웨터, 노란색 줄무늬 카디건, 청바지, 그리고 선글라스를 더하거나 뺀다. 그런데 이 옷은 연속성이 없다. 숏이 바뀌면 앞의 숏에서 없던 옷을 걸치거나 같은 숏으로 되돌아왔을 때 다른 옷을 걸치기도 한다. 거기 어떤 규칙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의도적으로 어떤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 여기서 핵심이다. 그는 무언가를 계속 벗거나 입는다. 그는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한다. 변신이라기보다는 무거운 육신의 겉옷. 옷을 갈아입고 총을 든 블레이크가 아시아와 스캇, 루카스와 니콜이 자고 있는 방을 거닐 때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린다. 물론 그 방에 물이 고여 있을 리가 없다. 그는 아직도 여기 도착하지 못했거나, 그 폭포가 내리는 물가가 그를 부르고 있거나, 혹은 블레이크가 먼저 도착하고 그 소리가 아직 여기에 오지 못했다. 소리로부터 떨어져 나온 블레이크. 그런데 블레이크가 방을 나가자 아시아는 누군가 이 방을 다녀간 것을 느끼고 깨어난다. 블레이크가 계단을 내려오자 벨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벨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사라진다. 바깥에 나가 문을 열어보니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를 위해 테디우스 토마스라는 사내가 방문했다. 그는 블레이크와 함께 거실에서 고객 만족도 조사를 하면서 계속 광고를 하자고 긴 설득을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블레이크가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상한 상황. 이를테면 커트 코베인을 만나서 광고 영업을 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이미 지적한 사실의 환기. 이때 블레이크는 계속 벌레를 쫓는다. 하지만 토마스에게는 단 한 마리의 벌레도 달려들지 않는다. 블레이크에게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지 않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혹은 벌레에게 무언가 유혹적인 것이 있다. 토마스가 떠난 다음 오랫동안 정신을 잃은 블레이크는 가까스로 일어나 다른 방으로 간다. 그리고 그 방문을 닫는다. 일인이역 퍼즐의 힌트 여기까지 블레이크를 쫓아오던 영화가 갑자기 이번에는 아시아와 스캇의 방으로 간다. 그녀는 일어나서 계단을 따라 내려온 다음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보이즈 투 맨의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방문을 여니 기대어 있던 블레이크가 쓰러진다(숏 34). 이제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영화는 다시 현관 앞이다. 이번에는 단정하게 옷을 입은 두 청년이 방문한다. 아시아는 스캇을 깨우고, 스캇은 계단을 내려간다. 그때 복도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블레이크의 반복이다. 다만 블레이크 대신 스캇이 그 행위를 반복하고, 도착한 사람은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를 하는 테디우스 토마스가 아니라 자신들을 엘더 프리버그라는 동명이인의 쌍둥이이며, 자신들은 말일선교회의 모르몬교이며 선교를 하기 위해 왔다고 소개하는 두 청년이다. 그런데 와인을 권하자 거절하면서 자신들은 와인 대신 물을 마신다는 두 쌍둥이에게 정말 기도하면 예수님을 만나냐고 묻자 한명의 엘더가 “14살 소년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자 머리 위에 두 형상이 나타나 한 형상이 말하길 이쪽이 내 아들 예수이다”라고 복음을 전한다. 이 숏 42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는 블레이크의 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블레이크가 텔레비전을 켜자 보이즈 투 맨의 <(당신께) 무릎을 꿇고>(On bended knee)가 시작된다. 마치 이 장면은 엘더 프리버그의 대사와 노래의 가사를 이어붙인 것처럼 이어진다. 그런데 이 노래는 스캇을 깨우기 전, 그러니까 벨이 울리기 전, 그러므로 두명의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가 도착하기 전, 아시아가 계단을 따라 내려왔을 때 이미 노래의 중간이 어디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더 프리버그는 가겠다고 말하고, 다시 방문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숏 45) 블레이크는 노래를 들으면서 기어가다가 문에 기댄다. (숏 46) 그때 문이 열리고 아시아가 들어온다. (숏트 34의 반복) 아시아는 블레이크를 일으켜 세우고 문을 닫고 나간다. (숏 49) 이것은 단지 시간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편집을 성립시키는 시간의 근거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 두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블레이크가 토마스를 만난 다음 방에 가서 음악을 듣다가 쓰러진다. 그것을 아시아가 발견한다. 다른 하나는 아시아가 깨운 스캇(과 루카스)이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를 만난다. 그때 이 두개의 신을 연결하는 것은 아시아지만, 아시아의 행위는 시간적으로 어긋나 있다. 우선 오해할 수 있는 오류의 지적. 이 숏은 진행되었다가 다시 뒤로 돌아와서 같은 시간을 다른 장소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보이즈 투 맨의 노래는 설명이 안 된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셋 중 하나이다. 하나는 둘 중 하나는 허구이거나 환상이다. 그래서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느 쪽이 허구라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다. 두 번째, 만일 이것이 서로 다른 두개의 시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두신이 있다. 둘은 서로 다른 날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하나의 신을 진행한 다음 이미 선행된 다음 신으로 돌아와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이 계속 진행되는 중 다른 시간의 신이 들어가서 앞의 신의 숏이 다른 신의 숏의 진행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구스 반 산트는 필요 이상으로 블레이크가 토마스와 대화하는 장면을 카메라를 멈춰 세우고 길게 보여준다. 그들의 대화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다. 그때 구스 반 산트는 공간을 지각하라고 긴 시간 동안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눈여겨본 다음 블레이크가 토마스와 이야기를 나눌 때와 스캇과 루카스가 두명의 엘더 프리버그와 대화할 때 방의 문이 하나는 열려 있고, 다른 하나는 닫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보이즈 투 맨의 음악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왜 엘더 프리버그와 이야기할 때 열린 문으로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가? 두신은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이다. 환기할 만한 지적. 이 영화의 사운드의 제목, ‘지각의 문들’. 그런데 두 번째 생각에 기대어 세 번째 설명이 추가되어야 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만일 블레이크가 두명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두개의 시간, 블레이크가 보이즈 투 맨을 듣는 시간과 스캇이 엘더 프리버그와 이야기하는 시간 모두에 각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을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아시아가 나간 다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블레이크는 총을 들고 일어난다. 그런데 다음 장면은 숲에서 온실을 향해 걸어가는 블레이크를 보여준다. 그때 현관에서 스캇과 두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숏 54) 그러니까 숏 45(이제 가야겠다고 말하는 엘더 프리버그)와 숏 55(문 앞에서 인사하는 스캇과 두명의 엘더 프리버그)는 서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런데 두 숏 사이에 문에 기대어 쓰러진 블레이크의 장면이 숏 34에서 보여진 다음 숏 47에서 똑같은 구도로 동일한 내용의 행위로 반복된다. 그 사이에 보이즈 투 맨의 노래가 있다. 블레이크는 온실에 들어가서 두 쌍둥이가 가는 것을 본다. 이때 한명의 블레이크는 소리와 행위가 장소와 육신으로부터 서로 떨어져 있지만 다른 한명의 블레이크는 소리와 행위(와 장소)의 일치를 듣게 된다. 수없는 일인이역의 흔적. 혹은 일인이역의 퍼즐의 힌트. 기이한 공집합의 시간 속 블레이크 그런 다음 세 번째 방문객이 이 집을 찾아온다. 그들은 도노반과 사립탐정(으로 스캇이 추정하는 뚱보)이다. 사립탐정은 진짜 중국인 마술사 칭링푸를 흉내낸 영국인 가짜 마술사 청링수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이빨로 쏜 총알을 잡는 쇼가 어쩌면 아내의 배신일지도 모르는 죽음으로 끝난다. 코트니 러브에 대한 은유? 하지만 동시에 그보다는 가짜와 진짜 혹은 일인이역의 이야기의 반복이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 안의 이야기.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현관 앞에서 문을 두드리자 스캇이 나와서 블레이크는 없으니 다음에 오라고 말한다. 이제 여기서 네 번째 가설이 필요해진다. 도노반과 사립탐정은 블레이크가 여자친구인 비키와 페이지의 집에 있을지도 모르니 가보자고 말한다(그런데 영화에는 비키와 페이지는 나오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온실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다. 이때 카메라는 작은 온실 안에서 메모하고 있는 블레이크를 360도 회전한다(이런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다). 그러자 온실 저 너머에서 하얀 차를 타고 떠나는 스캇과 루카스, 니콜, 아시아가 보인다. 차가 떠난 다음 블레이크가 온실에서 나온다(숏 64).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탄 차와 스캇과 루카스, 니콜, 아시아가 탄 차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간다. 이 장면은 블레이크의 집, 스캇과 그의 일행이 가는 집,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찾아가는 비키 혹은 페이지의 집이 있을 때 성립된다. 그런데 숏 67은 우리가 반복해서 본 그 계단, 블레이크가 올라왔던 그 계단, 아시아가 내려왔던 그 계단, 스캇이 내려간 계단, 카메라가 서서 바라보는 정면에 화병이 놓인 그 계단, 그 계단을 따라 도노반이 올라오면서 블레이크를 부르는 장면이다. 설명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는 비키 혹은 페이지의 집에 가던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다시 돌아와서 블레이크를 찾으며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른 날 다시 찾아왔거나 혹은 그 이전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숏 88에서 반복해서 도노반이 블레이크를 부르며 올라오는 장면으로 반복된다. 차이는 이때 도노반은 사립탐정과 함께 계단을 올라온다는 것이다. 숏 67과 숏 88은 둘 중 하나이다. 같은 장면을 반복한 것이거나, 아니면 도노반과 사립탐정은 두번 찾아온 것이다. 만일 반복한 것이라면 숏 68에서 숏 87까지는 무효가 된다. 두번 찾아온 것이라면 이 두번의 방문은 한번 찾아온 다음 돌아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이 하나이고(그러므로 연속된 한번의 방문),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두번 방문한 것이다(불연속적인 두번의 방문). 그때 두번 방문했다는 말은 두번이 다른 날이라는 뜻이다.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는 스캇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듣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함이 이상한 것은 스캇이 노래를 듣는 시퀀스가 도노반이 계단을 올라오는 두번의 반복 숏 사이에 들어가 있거나 그 역이 아니라 그 둘이 일종의 공집합을 가진 상태로 서로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공집합 안에서 블레이크는 양쪽에 다르게 걸쳐 서 있다. 두 시간의 공존 속 두명의 블레이크 이걸 그냥 뫼비우스의 띠라고 말하면 결국 아무것도 설명이 안 된다. 혹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으려는 포기이다. 이 이상한 공집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선을 생각하는 것은 두개의 숏 사이를 매개하는 유클리드적 시간으로부터 리만적 시간 안으로 굴곡을 그리는 두개의 세계 사이의 이해이다. 하나는 시간을 세계의 표현으로 다루는 현실태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세계의 표현된 것이 되는 잠재태이다. 그런데 하나가 다른 하나 사이로 들어가고, 다른 하나가 그 안에서 다시 나온다. 그때 둘 사이의 공집합의 충족이유를 설명할 때 이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이 순서를 순환이 아니라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컷 아웃으로서의 계열의 이동의 방법으로 따라올 것. 스캇과 루카스, 아시아, 니콜이 집을 떠난 것은 숏 63이다. (낮) 그런 다음 그들은 숏 77에서 돌아온다. (밤) 그 사이에 도노반이 계단을 올라온 장면이 있다. (숏 67) 하지만 이 장면은 블레이크가 집 바깥으로 도망친 다음 호수에 앉아 있는 장면으로 끝난다. 도노반은 숏 93에서 다시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노반이 집에 들어온 다음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캇은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벨벳 언드그라운드의 음반을 꺼내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튼다. 그리고 앉아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숏 77) 이 숏은 계속 진행되지만 스캇은 음악을 듣다가 일어나서 부엌에 간다. 그런데 부엌에 블레이크가 있다. 그걸 루카스가 본다. 스캇은 부엌에 갔다가 돌아와 다시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면서 앉아 있는 스캇을 보여주는) 숏 79에서 (음악이 끝났는데도 그대로 앉아 있는 스캇을 보여주는) 숏 80은 카메라는 그 위치에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점프 컷으로 연결하였다. 이게 점프 컷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세는 그대로인데 음악이 편집으로 잘려나가서 그냥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스캇이 고개를 돌려 부엌을 보니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같은 위치의 시선인데 한번은 스캇과 블레이크가 이야기하는 것을 루카스가 보고(숏 78), 다음번에는 스캇이 같은 장소를 보니 아무도 없다. (숏 81) 그런데 한참 더 진행된 다음 숏 101에서 스캇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같은 자세로, 같은 노래를, 같은 부분을 따라 부른다.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방법. 숏 77에서 숏 101까지는 모두 스캇이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따라 부르면서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 설명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 그러면 스캇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도노반이 계단을 오른 장면이(숏 67) 반복되는 숏(숏 88)를 왜 스캇은 생각하는가? 나는 질문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노반의 계단이 중간에 들어가 있는 까닭은 숏 77에서 숏 101까지를 보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혹은 그것을 스캇의 회상이라는 방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숏이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말하는 절대적으로 금지의 숏(plan interdit). 여기서 스캇을 중심에 놓고 시퀀스를 나눌지 블레이크를 중심에 놓고 시퀀스를 나눌지에 의해서 의미가 변한다. 물론 둘 다 성립한다. 내 생각에 이 영화가 쇼크를 주는 것은 구스 반 산트가 둘 다 성립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선형 진행되는 영화에서 현행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둘 사이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도록 금지의 숏을 설정한 다음 그 둘의 공존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하나는 여전히 진행 중인데 다른 하나는 동시에 현재를 경유하여 과거로 들어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때 시간은 규정 가능하지만 끝내 규정되지는 않는다. 규정되지 않는 규정 가능한 시간. 그럼으로써 두개의 시간의 공존. 두개의 시간의 공존 속의 두명의 블레이크. 의상의 연결 우선 스캇을 중심으로 놓고 진행하는 이야기의 선. 스캇은 음악을 듣다가 음악연습실에서 음악적 고민을 말하는 루카스를 불러내서 이층에 올라간다. 그때 아래층에서 블레이크의 언플러그드 기타소리가 들린다. 스캇은 루카스에게 데모 테이프로 블레이크를 괴롭히지 말라고 이야기한 다음 침대에서 껴안고 키스를 한다. (숏 85) 여기서 이 이야기는 일단 중단된다. 왜냐하면 다음 장면은 한밤중에 걸어가는 블레이크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입은 옷은 음악 연습실에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앞, 계단을 올라오며 블레이크를 부르는 도노반을 피해서 집 바깥으로 나와 호수에 혼자 앉아 있을 때 입고 있었던 옷이다. 그런 다음 블레이크는 자기 방에서 방한모가 있는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때 도노반이 사립탐정과 함께 블레이크를 부르면서 계단을 올라온다. (숏 88) 블레이크는 달아나고, 도노반과 사립탐정은 아시아와 스캇이 있던 방에서 대화를 나눈다. 말하자면 지금 집에 스캇과 아시아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스캇과 아시아, 루카스, 니콜이 집에 돌아오기 전이다. 즉, 스캇이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듣기 전이라는 뜻이다. 블레이크는 달아나고, 카메라는 블레이크가 화면 바깥으로 나간 다음에도 한참을 그냥 바람에 흔들리는 숲을 보여준다. (숏 93) 도노반과 사립탐정이 차를 타고 떠나고, 그 다음 스캇과 루카스, 아시아, 니콜이 돌아온다(이미 거실에 들어와서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튼 숏 74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숏 99). 이번에는 이 이야기가 블레이크쪽에서 진행된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블레이크에게 <모피를 두른 비너스>의 음악소리가 들린다. 블레이크는 음식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 스캇이 다가와서 유타에 다녀와야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숏 78에서 부엌을 바라보는 루카스의 시선으로 보였던 장면을 부엌 안에서 진행한 숏일 것이다. 그 말을 한 다음 스캇은 나가서 <모피를 두른 비너스>를 들으면서 따라 부른다. 음악 연습실에 온 블레이크에게 루카스가 와서 옆의 의자에 앉으면서 도쿄 공연 중에 섹스를 나누었던 일본인 소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 다음 그녀를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 데모 테이프를 건네준다. 그때 스캇이 들어와서 귓속말을 하고 루카스와 함께 나간다. 혼자 남은 블레이크는 <죽음에서 탄생까지>(Death to birth)를 혼자서 언플러그드로 부른다. 이 노래는 스캇과 루카스가 침대에서 키스를 하며 껴안을 때(숏 85) 아래층에서 들리던 음악이다. 그러므로 숏 85와 숏 102는 동일 시간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숲길을 걸어가는 블레이크의 장면은(숏 103) 앞의 숏의 연속이 아니라 도노반이 부르며 계단을 올라오자 옷을 입고 달아나던 블레이크의 장면(숏 91)의 연속이다. 큰 방한모가 달린 점퍼를 입은 블레이크의 모습, 즉 의상의 연결. 블레이크의 기억의 시간 그러므로 이 장면은 스캇이 아니라 블레이크를 놓고 다시 시간을 따라가면 블레이크가 스캇과 루카스와 함께 보낸 마지막 밤을 기억하는 장면으로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블레이크의 기억의 시간 안으로 들어간 것일까?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본 다음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말하는 음악 연습실에서 블레이크 혼자 데모 테이프를 틀고 거기에 맞추어서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들기는 걸 느리게 돌리 트랙 백을 하면서 보여주는 롱테이크 장면. (숏 71) 디스토션을 걸어서 피드백을 일으키는 사운드의 무아지경 속에서(말 그대로 ‘너바나’!) 카메라는 무심하게 점점 뒤로 물러나고, 햇살은 오후 늦게 정원의 풀 위로 떨어지고, 바람은 창문 곁의 나무를 조심스럽게 흔들고 지나간다. 말하자면 영화 사상 음악을 연주하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그러나 이 장면은 영화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이상하게 진행된다. 하나는 카메라가 뒤로 계속 물러나고 있는데 소리의 물리적 변화가 전혀 없다. 이 소리는 이제까지와 달리 음원을 화면 안에 구체적으로 기입한 사운드이다. 나는 처음에 거의 줌에 가깝게 보이는 이 달리 트랙이 음악으로부터 자연의 소리로 이행하는 카메라의 이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자연의 움직임은 나무를 흔드는 바람을 통해서 보이지만 여전히 화면에서 들리는 건 방 안의 사운드이다. 사운드의 크기가 동일하다는 것은 이 장면이 지닌 비실재를 보증하는 것이다. 혹은 물리적 거리의 위치가 아니라 이 장면의 고정점이 심리적이라는 것을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이 장면이 뜬금없다는 것이다. 그냥 갑자기 등장해서 느닷없이 시작한다. 내기 보기에 이 장면의 시작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다. 이 숏은 블레이크가 도노반으로부터 달아나서 집 바깥으로 나간 다음 호수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를 바라본 다음(숏 70) 바로 뒤이어 붙어 있다. 그때 두 장면을 연결하는 매듭은 음악 연습실에서 블레이크가 데모 테이프를 틀어놓고 하는 연주가 호수에 앉아 있는 블레이크가 떠올리는 잃어버린 시간, 이미 있었던 사건, 시간의 흐름 안의 기억일 수밖에 없다. 아니, 기억이라기보다는 말하자면 추억. 그러므로 갖게 되는 상실의 감정. 그때 기억 저편으로 점점 잊혀져가는 이 순간은 카메라가 그 광경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나가면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때 영원한 것은 내일도, 모래도, 그 자리를 비출 햇살과 바람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블레이크의 연주는 데모 테이프에 덧붙여진 것이다. 루카스는 혼자 있는 블레이크에게 데모 테이프의 사연과 함께 건네준 다음 스캇과 함께 이층에 올라가 섹스를 한다. 루카스의 말에 의하면 그 연주에는 가사 말이 없다. 그래서 그걸 좀 도와달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카메라가 방 안에 머문다. 블레이크는 <죽음에서 탄생까지>를 부른다. 그런데 이 노래 부르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로 찍었다. 두번의 롱테이크. 두번의 라이브. 연주만 있는 장면과 가사만 있는 언플러그드. 두명의 블레이크. 두 가지 기억. 혹은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하지만 어느 쪽이? 영화 밖에서 온 네 번째 방문객 이제 네 번째 방문객을 말할 차례이다. 이 방문객이 이제까지와 다른 이유는 문을 두들긴 다음 집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집 안에 들어와 있고, 그런 다음 문을 열고 나가는 장면은 있지만 집 바깥으로 떠나는 장면이 없다. 자막에는 레코드회사에서 온 사람으로 되어 있지만 블레이크와의 대화를 보면 그녀의 직업을 알 수 없다. 마치 블레이크의 어머니처럼 그를 근심하면서 말하는 대사. 이 영화에서 블레이크의 딸을 유일하게 걱정하는 사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사람. 그러므로 영화의 그림자없이 그 사람 자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 구태여 그 자리에 (그룹 소닉 유스의) 킴 고든이 블레이크에게 꼭 그러해야했느냐고 묻는다. 커트 코베인이 자신들의 정신적 음악적 부모라고 말한 그룹 소닉 유스(<라스트 데이즈>의 사운드디자인 자문을 맡은 것은 소닉 유스의 서스틴 무어이다). 말하자면 킴 고든의 방문은 영화 바깥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와 막지 못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슬픔을 말한 다음 다시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블레이크가 마지막으로 집 바깥으로 떠나서 작은 도시의 라이브 클럽을 방문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유일한 인물인 하모니 코린이라는 문화적 아이콘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과 겹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뉴욕 거리에서 자라나서 19살에 래리 클라크의 <키즈>의 시나리오를 쓴 다음 21살에 <검모>로 이른바 ‘퍽 유’(F@#$ You) 시네마에 합류한 미국영화의 얼터너티브 그런지 세대의 주인공. 하모니 코린은 블레이크에게 목요일에 다시 만나자고 말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블레이크는 집으로 힘겹게 새벽에 걸어 올라온다. 그때 다시 물소리가 들리고, 마치 처음으로 돌아온 것처럼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온실에 도착하자 맞은편 집에서 이 집을 떠나는 스캇과 루카스, 그리고 니콜이 보인다. 그들이 떠나면서 도대체 아시아는 어디로 간 거냐고 묻는다. 두 가지 생각. 그런데 정말 아시아가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다른 하나. 아시아가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아시아는 중간에 가버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아시아가 나오는 장면은 과거에 속하는 장면이며,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장면에는 스캇과 루카스, 니콜만이 있다면? 한 가지 더. 구태여 아시아가 블레이크를 만진(touch) 유일한 등장인물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떠나면서 루카스는 온실을 바라보고 거기서 블레이크가 어른거린다. 결국 모두 온실에서 끝난다.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를 보는 블레이크는 온실에 있다. (숏 55) 사립탐정이 이 집을 떠나면서 저기 있는 건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도노반은 온실이라고 대답한다. (숏 77) 루카스와 스캇, 니콜이 이 집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루카스가 보는 것은 온실이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숏 112) 결국 영화는 블레이크가 온실에 도착한 다음 이 집을 떠나는 사람들이 온실을 보는 것으로 끝난다. 어떻게 시작해도 결국 온실로 돌아온다. 그런 다음 이튿날 아침 온실에서 한 남자가 죽은 블레이크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죽은 블레이크에게서 그의 영혼이 힘겹게 일어나 계단을 타고 오르는 것이 보여진다. ‘마지막 날들’의 의미 구스 반 산트가 다룬 ‘마지막 날들’은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기 직전의 마지막 나날들이 아니다. 잘 알려진 사실. 커트 코베인은 자살을 했고, 그런 다음 며칠 뒤에 발견되었다. 구스 반 산트가 다룬 ‘마지막 날들’은 자살한 다음 그의 죽음이 발견되기까지의 ‘마지막 날들’이다. 말하자면 실재적인 죽음과 상징적 죽음의 불일치. 그 사이의 틈. 모든 미스터리의 시간. 그런데 이 시간에 없는 것은 오직 커트 코베인의 시간뿐이다. 구스 반 산트는 이 시간을 온전하게 커트 코베인을 위해서 바친다. 말하자면 애도의 시간. 블레이크는 영화가 시작했을 때 이미 죽은 다음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의 육신을 찾으러 돌아온다. 블레이크는 22개의 폭포와 숲으로 이루어진 망자의 강, 삶의 저 편, 말하자면 요단강, 그중 하나를 건너가려다가 되돌아서 다시 돌아온다. 그때 그가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을 통해서 돌아오는 것뿐이다. 시종일관 영화는 물소리가 들리고 첨벙거리는 사운드가 더해진다. 블레이크는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같은 말이지만 다른 표현. 그는 삶의 이편에서 죽음의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떠나려다가 돌아온 블레이크와 이제 결심을 하려는 블레이크. 이미 벌이진 사건과 이제 해야 할 결심. 드러난 사건과 잠재적인 심리적 동요. 그러므로 여기에 두명의 블레이크가 있다. 하나는 이미 죽은 블레이크가 자기를 기억하면서 되돌아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자신이 죽은지 모르는 시간 안의 블레이크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시간은 자꾸만 뒤로 돌아가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두개의 시간. 하나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 온다. 그때 소리는 블레이크보다 먼저 도착하거나 나중에 도착한다. 다른 하나는 시간 안에서만 활동한다. 하지만 이미 죽은 블레이크는 썩어가고 있고, 벌레들은 그에게만 자꾸 달려든다. 이미 죽은 블레이크는 죽음의 과정을 반복하고, 기억 안의 블레이크는 자기의 운명을 결심한다. 경험과 예정 사이의 차이와 그 안에서 누가 누구를 뒤따르는지 그 순서를 알 수 없는 숨바꼭질. 그때 블레이크가 싸우는 전쟁은 자기의 죽음과의 싸움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다. 구스 반 산트는 바로 여기에 개입한다. 블레이크가 자살한 다음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그가 이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영화적 방법이다. 혹은 윤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죽음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의 선은 결국 온실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말 그대로 영원회귀. 그런데 죽은 다음 다시 돌아와서 자기의 죽음을 알리고 떠나간 죽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말하자면 2천년 만의 반복. 예수의 죽음과 부활. 교회 종소리는 그를 부르고, 그가 하느님을 부르자 교회 종소리가 응답한다. 블레이크와 예수. 두 개의 죽음. 쌍둥이 엘더 프리버그가 말하는 14살 소년의 이야기와 보이즈 투 맨의 노래의 몽타주. 죽어서 사람들 사이에 살아남은 두 개의 이미지. 블레이크에 대한 기억. 커트 코베인에 대한 추모. 구스 반 산트는 그가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한 간청이 있겠는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나는 구스 반 산트가 <라스트 데이즈>에서 그렇게 멀리 나아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전인미답의 경지. 그가 가장 멀리 나아간 영화는 <게리>이다. 혹은 구스 반 산트는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보다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혹은 허우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에 미치지 못한다. 오히려 <라스트 데이즈>는 최근 하나의 유행이 된 이야기 패턴 안에서 사고하는 시간의 덫에 관한 사후의 왜상 앞에서 고정점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다. 사실상 구스 반 산트의 <라스트 데이즈>는 M. 나이트 샤말란의 <식스 센스>,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브라이언 유즈너의 <유주얼 서스펙트>,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디 아더즈>로 이어지는 일련의 ‘보이지 않는 사람’의 구조를 지닌 영화이다. 그러나 구스 반 산트가 그들과 다른 점은 그는 게임을 하는 대신 시간의 구조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법을 놓고 윤리의 기회를 질문한다는 것이다. 블레이크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 이 시간의 사슬 안에서 블레이크는 질문한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은 편이 더 나았을까?(커트 코베인의 유서. “잊혀지느니 차라리 불타버리겠다”) 이 질문을 죽기 전에 한 것과 죽은 다음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그때 만일 살아 있는 쪽을 택했다면 잊혀지는 것을 죽은 내가 지켜보아야 한다. 옐로페이퍼 전화번호부 광고를 하러 온 토마스는 이미 블레이크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라스트 데이즈>는 두번의 기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블레이크는 두번 죽는다. 한번은 선택하고, 다음 한번은 그 선택을 알고 그 행위를 한다. 구스 반 산트는 그 두 개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선택이 행위를 바라보고, 행위가 선택을 쳐다보는 시간의 만곡 안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죽음이라는 실재. 어떻게 해서도 윤리적 질문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건. 혹은 윤리의 잉여. <라스트 데이즈>는 어떻게 말해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비극이라는 이야기의 선. 그러므로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긴 질문은 이것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의 방점, 차라리. 추신 첫 번째. 나는 지난 4월6일 커트 코베인을 추모하면서 영화아카데미 학생들과 함께 세미나 수업시간에 <라스트 데이즈>를 본 다음 토론하고 생각해보았다. 그 중 몇몇 아이디어는 매우 예민하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 중 일부는 내 생각을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들과 함께 쓴 것이다. 추신 두 번째. 구스 반 산트는 <라스트 데이즈>를 두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다.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화면 프레임의 사이즈가 다르다. 하나는 4:3이고, 다른 하나는 16:9이다. 그리고 구스 반 산트는 영화관 상영버전을 4:3으로 명시하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네코아에서는 16:9 버전으로 상영하고 있었다. 그 결과 4:3에서 무작위로 ‘오려낸’ 16:9 사이즈는 양 옆이 더 있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상단부가 모두 잘려나갔다. 그 결과는 매우 끔찍하다. 이를테면 아시아와 스캇이 자고 있을 때 옆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로 태권도 시범을 방영하는 동안 창문 바깥 프레임 상단에서 땅을 파고 있는 그 아름다운 장면에서 블레이크는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다. 또한 블레이크가 옐로페이지 전화번호부 광고를 위해 찾아온 테디우스 토마스와 기나긴 이야기를 할 때 역시 그들 사이 저편 벽에 걸려 있는 사냥하는 그림은 모두 잘려나가고 하단 일부 하단만 화면에 남아 있었다. 내가 이 글에서 참고한 것은 구스 반 산트가 영화관 버전이라고 명시한 4:3 사이즈이다. 만일 당신이 ‘사지절단’된 16:9 사이즈로 보았다면 원래의 그 아름다운 구도를 꼭 다시 보시기 바란다.

[현지보고]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환생> 오사카 기자회견

<환생>의 주요 스탭과 배우를 지난 5월6일 일본 오사카 스위소호텔 난카이에서 만났다. <주온> <그루지> 등의 공포영화 감독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시미즈 다카시, 현재 일본 호러영화 붐을 주도하고 있는 프로듀서 이치세 다카시게를 차례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뒤에 열린 공동 기자회견장에는 여주인공 유카도 참석했다. 시미즈 다카시는 이토 준지의 공포만화 <토미에>를 바탕으로 한 <토미에 리버스>로 장편 데뷔하여 주목받은 뒤, <주온>과 <주온>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그루지>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감독이다. 프로듀서인 이치세 다카시게는 <링> 시리즈와 <주온> 등을 제작해온 프로듀서다. 2004년에 ‘제이 호러 시어터’라는 프로젝트를 발표, 시미즈 다카시를 비롯하여 나카다 히데오, 쓰루다 노리오, 마사유키 오키아이, 다카야시 히로시, 구로사와 기요시 등 6명의 감독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시미즈 다카시의 이번 영화 <환생>은 제이 호러 시어터가 2005년에 완성한 세 번째 작품이다. 일본적 공포에 할리우드적 성향을 융합 2000년에 제작된 <주온>은 일본 개봉 당시 열렬한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2003년 한국 개봉 때는 일본 관객의 두배쯤 되는 100만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외국 공포영화로는 보기 드문 성공사례였다. 게다가 할리우드의 샘 레이미와 손잡고 만든 <그루지>(2004)는 미국 내 개봉하여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2주간 차지했다. 지금 일본의 공포영화는 할리우드가 가장 눈독들이고 있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아시아의 근접 국가에서도 통하고,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통한 일본 호러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도 공포감이란 한국이나 일본이나 아시아라면 비슷할 거다. 미국의 괴물영화가 공격적이라면, 아시아의 귀신은 정념을 통해 무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아시아 호러영화의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그런 요소를 많이 넣었다.” 시미즈 다카시는 일본 공포영화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덧붙여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나의 경우 나카다 히데오나 구로사와 기요시 등 윗세대들이 보여주지 않은 걸 하려고 노력 중이다. <링>도 이미 고전이 되었으므로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나는 80년대 일본 호러 붐 속에서 성장한 세대다. 그런 점에서 일본적인 공포를 유지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관객이 웃을 수 있을 만큼 모든 걸 다 보여주는 (할리우드적) 성향을 융합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만든 게 <주온>이다. 그 조화가 잘 이뤄져 한국과 미국 등에서 모두 이슈가 된 것 아닌가 싶다”며 자체 평가했다. 그 점을 지금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 <환생>이다. 게다가 <환생>의 여주인공을 맡은 유카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쇼 프로그램 사회자로 유명한 연예인”인데, “그런 연예인이 공포영화에 나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일본 관객이라면 기존의 반대 이미지에 놀라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있음을 밝혔다. <환생>의 내용은 이렇다. 배우 지망생 스기우라 나기사(유카)는 <기억>이라는 영화의 오디션에 참가한다. 이 영화의 감독 마츠무라(시이나 깃페이)는 한눈에 스기우라를 여주인공으로 점찍는다. 마츠무라가 만들 영화는 35년 전 오사카의 한 호텔에서 가장이 가족과 호텔 직원 11명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어간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감독은 배우들을 데리고 35년 전 호텔을 방문하여 현장을 경험한다. 그때부터 영화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 영화를 찍고 있는 스기우라를 오가고, 귀신들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시미즈 다카시는 공포영화 속 공포영화라는 이중틀을 놓고, 관객을 공포의 호텔 안으로 초대한다. “초기에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어떤 광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설정할까 했었다. 그런데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아 바꿨다. 하지만 사실 일본에는 설득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그러니 그 생각도 아주 설득력이 없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웃음)”며 영화 구상 과정을 들려줬다. ‘제이 호러 시어터’, 할리우드와 교류 활발 제이 호러 시어터 프로젝트는 현재 제작과 개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치세 다카시게는 “시미즈 다카시의 <그루지2>의 촬영을 지난주에 마쳤다. 다음주부터는 미국에서 후반작업을 할 계획이다. 그리고 6월에는 나카다 히데오의 <실체>도 일본 내 개봉을 준비 중이고, 구로사와 기요시 <더 크라이>의 촬영도 곧 준비 중이다. 미국에서 만들 영화들도 있다”고 밝혔다. 이치세 다카시게의 행보만 보더라도, 일본 공포영화에 대한 할리우드의 애착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제이 호러 시어터가 만든 두개의 전작 역시 뉴라인시네마에서 리메이크하기로 결정된 상태다. 나카다 히데오가 이제 막 끝낸 <실체>(2006) 역시 폭스서치라이트에서 리메이크할 예정이다. <환생>도 리메이크가 추진 중이지만, 시미즈 다카시가 연출을 맡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왠지 내가 리메이크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감독이 리메이크하는 건 상관없다”는 것이 시미즈 다카시의 태도다. 그러나 시미즈 다카시는 <그루지> 후속작들을 연출하는 것과 동시에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공포영화를 파라마운트에서 만들 예정이다. 그 필두에 서 있는 <환생>은 한국에서 6월8일 개봉예정이다. “<주온>보다 큰 공간을 활용하고 싶었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 인터뷰 -왜 ‘환생’을 영화의 소재로 선택했나. =처음에는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아이가 귀신을 만나 유괴당하는 이야기였는데 쓰다보니 너무 판타지처럼 되어버렸다. 물론 나는 판타지 양식을 좋아하지만, 프로듀서의 의견도 있고 해서 다른 이야기를 찾다가 아예 환생이라는 소재로 바꾸게 된 것이다. 예전부터 언젠가는 한번 꼭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다. -<환생>을 보면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생각난다. =우선은 <샤이닝>보다 <주온>을 무의식적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주온>이 작고 평범한 집이었으니, 이번에는 그보다 더 큰 공간을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본 특유의 료칸(일본식 여관)을 떠올렸는데, 그보다는 호텔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배경상 <샤이닝>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 것 같다. 이 영화 속의 호텔은 주인공이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되풀이하고, 헤매다니는 혼란스런 심리상태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샤이닝>은 내게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공포영화다. 그래서 <환생>의 배우 중에 <샤이닝>을 안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꼭 한번 보라고 추천도 했다. -영화 속에는 뭔가를 ‘촬영’한다는 게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다. =살인장면을 8mm 카메라에 담는 범인을 떠올린 건 한 가지 실화에서 시작됐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한 가족이 합의하에 아빠의 손에 죽어간 사건이 있었다. 가족을 몰살한 아빠도 결국 목을 매 죽는데, 그 때 자기가 죽어가는 걸 녹음하여 남겼다. 게다가 녹음된 그 테이프 안에는 이상한 잡음까지 들어 있었다는 괴담이 돌았다. 그게 머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녹음 테이프 대신 영화에서는 카메라를 사용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가족의 탄생>의 문소리, 공효진, 정유미

일착은 막내 정유미였다. 화사하게 틀어올린 앞머리에 금색 핀을 꽂은 그가 미간을 약간 찡그리며 종달새처럼 조잘거린다. 어두웠던 스튜디오가 오월의 정원처럼 밝아진다. 순서대로 오기로 약속한 걸까. 두 번째로 늘씬한 공효진이 성큼성큼 들어선다. 얼굴이 CD만한 그는 소주잔을 호쾌하게 털어넣듯 툭툭 말을 건넨다. 드디어 문소리가 왔다. “컨셉이 이게 뭐야? 우리가 안 예쁘다는 거야”라고 볼멘소리로 농담하는 큰언니 앞에 사람들이 움찔한다. 그는 불만을 표시할 때도 솔직하지만, 진행도 시원시원하다. “소풍이니까 앉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문소리의 제안에 <가족의 탄생> 버전 ‘풀밭 위의 점심’이 탄생한다. “영화 찍기 전에는 언니가 진짜 무서운 줄 알았다.” 공효진의 한마디. “야, 그거 봉태규가 퍼트린 헛소문이야.” 문소리의 대답. 소품으로 쓰인 와인을 열면서 세 여자의 입담도 열렸다. “아, 맛있는 안주 가져올게.” 휑하고 사라진 문소리가 도시락통을 들고 돌아왔다. 깨가 곱게 입혀진 김 부각. 세 사람이 오물거리며 수다를 떤다. “태규씨가 문소리 언니가 제일 좋은 여배우래요.” 정유미의 한마디. “지금은 네가 제일 좋대, 나는 2번으로 밀렸다.” 문소리의 대답. “진짜 감격스러웠는데. <씨네21> 처음 표지할 때”라고 문소리가 말하자, “난 여러 명이 같이 찍어서 더 기억에 남는다”라고 공효진이 거든다. “촬영 뒤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서운했다”는 정유미의 말에 두 언니는 손사래를 치며 놀리듯 “너는 두편째라 그래”라며 키득거린다. <가족의 탄생>에서 그들은 단 한번 마주친다. 그나마 공효진은 그것도 텔레비전 화면으로. 하지만, “설악산으로 같이 놀러가요. 제주도에 무대인사하러 갈까요?”라는 정유미의 해맑은 응석이나 “얘도 친구가 좀 없나봐. 우리 과야”라는 문소리의 놀림을 보노라면 그들은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딸들 같다. “옷가게 주인이기도 했던 공효진의 패션감각은 나와 하늘과 땅 차이지만, 밝고 씩씩한 외연에 어둡고 깊은 내면이 있을 듯한 점은 닮았다”는 문소리의 전언이나 “언니는 만족할 때까지 집요하게 연기하는 게 나와 다르다. 배우로서 추구하는 점이 비슷하고 궁극적으로는 언니 같은 유형의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공효진의 화답을 듣노라면 그런 심증은 굳어진다. “누가 됐어?”라며 서로의 출연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감독의 원래 구상대로 캐스팅된 배우들의 향연, <가족의 탄생>을 탄생시킨 세 여인이 오월의 풀밭 위를 거닐며 나눈 한때를 그림에 담았다. 즐거운 기다림을 위하여 문소리의 소풍 문소리는 “감독에게도 누차 말했던” 영화에 대한 “단 하나의 불만”부터 꺼냈다. “철없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만은 맘에 들지 않는다. 철들도록 노력하고, 아니면 벌받든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하지만 영화를 봤다는 기자에게 “영화가 편하진 않죠? 반복적인 것 같으면서도 달라지는데, 예민하게 봐야 볼 수 있는데…”라고 되묻거나, “김태용 감독이 내가 말을 안 할 때 제일 섹시하다고 해서 미라를 실어증으로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고백하는 모습에는 영화에 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남동생 엄태웅과 연인 같은 코드가 훨씬 많았는데 감독이 상업과 타협하는 바람에 빠졌다”고 후일담을 전하는 그가 <가족의 탄생>에 합류하게 된 것은 그의 “명확하면서도 거절 못하는 성격”의 영향이 컸다. 시나리오를 초고부터 봐온 그에게 김 감독은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미라가 관객과 함께 마음을 열고 정리하는 역할이라서 굉장히 좋은 배역 같은데, 써놓고 보니 개성도 없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절 못하는 문소리는 미라가 되겠노라 했다. 2006년 두편의 연극에 출연한 그는 “하도 밥을 챙겨먹고, 술을 챙겨먹어 살이 쪘”지만 “순발력과 뻔뻔함을 얻었다”고 전했다. 차기작으로 올 하반기 방송될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고른 문소리는 광개토대왕을 사랑하지만 운명적으로 대립하는 서기하가 돼 브라운관을 두드릴 예정이다. <가족의 탄생> 모든 것에 긍정적인 영화. 사람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여는 법을 아는 착한 여자들의 이야기. 첫 번째 에피소드에 제목을 붙인다면? <즐거운 기다림> <허밍>. 떡볶이집에선 아이들이 수업 끝나고 오길 기다리고, 집에선 동생이 돌아오길 기다리니. 또 고두심씨가 불렀던 노래를 잘 따라부르기도 하고, 혼자서 잘 중얼거리기도 하니까. 인간관계 혹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포기하지 않는 것.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별로 시작된 성장을 위하여 공효진의 소풍 김태용 감독은 “선경은 처음부터 너를 생각하고 만든 캐릭터야”라고 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무슨 섭외를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답한 공효진. 속으로는 선경이 “모나고 뾰족하면서 고민스러운 캐릭터라 좋다”고 생각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자신을 데뷔시킨 김태용 감독과의 재회도 무척 반가웠다. 매번 “언제 집에 가요?”라고 물으며 잠들기 일쑤였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시절과는 달리 고통 속에 성장하는 <가족의 탄생>의 선경처럼 공효진도 7년차의 성숙한 배우로 변모했다. “다른 감독님이면 못할 이야기도 깊이있게 할 수 있었다”는 <가족의 탄생>에서 공효진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성격이 가미된” 1, 3부에 비해 내면적인 감정이 강조되는 모노드라마 2부를 거의 혼자서 이끌어간다. “사랑도 전쟁이다. 대적할 만한 인간을 만나서 싸워나가는 것. 그래서 오랫동안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적수를 만나야 한다”는 도전적인 가치관을 가진 공효진이 보여주는 차분하고 성숙한 내면 연기를 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가족의 탄생>은 근사한 대답이다. <가족의 탄생> 남녀에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유화하지 않고 날것으로 보여주는 영화.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주고 피흘리며 싸우는 이야기. 두 번째 에피소드에 제목을 붙인다면? <이별>, 엄마를 보내기 위해 이별을 준비하는 딸의 내면과 일상을 그렸으니까. 인간관계 혹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믿음. 인간관계는 믿음을 방패삼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알 것이라고 가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내일이 될 작은 오늘을 위하여 정유미의 소풍 <사랑니>로 주목받은 정유미는 영화 찍는 일이 마냥 즐겁다. 촬영을 마치면 한순간 삶이 무료해지고, 재미없어진단다. 그래서 촬영이 끝난 뒤에도 후반작업에 한창인 작업실을 거의 매일 찾았다. “작업실에 가면 뒤에 앉아만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인터뷰하는 오늘도 계속 기다렸다.” 그가 영화 촬영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것은 몇달을 함께 보낸 “순수하고 열정적인 ‘동료’들” 때문이다. “처음에는 떨려서 인사도 못”했던 고두심·문소리와 친해지고, 상대역 봉태규와 실제로도 서먹서먹 멀어졌다 화해하는 과정을 겪는 사이 그는 자신이 “조금 변했다”고 전했다. “다른 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배우는 게 정말 많았다.” <가족의 탄생>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못해 애인을 외롭게 놔두는 채현을 연기한 정유미는 이미 차기작을 결정한 상태지만 “(작업이 끝난 게) 실감이 안 난다”며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이미 출발 신호가 떨어졌음을 잘 안다. 또 자신의 “도착지가 아직 멀리 있음”도 안다. 이것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작품에 모든 것을 거는 이유다. 그는 작은 오늘들이 모여 큰 내일이 된다는 세상의 작은 진리를 믿는 쪽이니까. <가족의 탄생>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영화. 세 번째 에피소드에 제목을 붙인다면? <나는 너 창피해 많이많이, 나는 너 사랑해 많이많이>, 시나리오에는 그냥 ‘채현·경석의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이 대사도 어울릴 것 같다. 3편은 사랑 이야기니까. 인간관계 혹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처음엔 사랑에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는 줄 알았다. 한데 <사랑니>와 이번 영화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에 영원한 사랑도 없고, 변치 않는 마음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니 사는 게 무의미해지기까지 했다.

미 인기드라마 ‘로스트’에 김수진 스토리작가 합류

편견 경계 객관묘사에 신경 김윤진씨 “아직은 분투중” 미국 <에이비씨> 텔레비전의 최고 인기 시리즈 <로스트>(K2 토 낮 12시50분) 시즌2가 한국 배우 김윤진에 이어 한국인 작가 김수진(미국명 크리스티나 김)을 발탁했다. 미국 안 소수 인종인 한국계가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과 주요 작가로 뽑힌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해변에서 시즌2 마지막 촬영을 하고 있는 김윤진, 시즌3 극본을 준비하는 김수진을 전자우편으로 인터뷰했다. “로스트의 제작진들은 드라마에서 한국적인 특질과 구성이 가장 정확하게 묘사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작가로서 한국 등장인물과 특별한 관계를 느낍니다.” 김수진 작가는 미국 대형 드라마에서 한국을 고스란히 전한다는 데 큰 자부심을 보였다. 조지타운대 영문학과,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원 영화학과를 졸업한 김 작가는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다.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에서 4년을 살았던 경험으로 한국 관련 부분을 적극 조언하고 있다고 한다. <로스트> 시즌1 초반에서는 한국 출신의 부부, 선(김윤진)과 진(대니얼 데 김)이 폐쇄적이고 가부장적인 인물로 묘사되면서 인종적인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김 작가는 2005년 6월부터 로스트 팀에 합류하면서 한국인 등장 부분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방대하고 정교한 줄거리를 이어나가기 위해 <로스트>는 10명의 작가를 두고 있다. 그는 “올해는 스태프 작가로서 프로듀서이자 작가인 엘리자베스 사노프와 ‘헌팅파티’ ‘전체적 진실’ 등 세 가지 에피소드를 집필했다”며 “내년에는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고 밝혔다. 배우 김윤진은 미국 브라운관에서 한국어로 30분 이상 연기하는 전례를 남기고, 30억원의 출연료로 시즌3을 계약했지만 차분함을 잃지 않고 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은 지금은 오디션보다는 회의자리가 더 많아졌다는 정도에요. 아직은 분투하는 시기입니다.” <로스트>는 배우에게는 잔인한 드라마다. 극중 인물들 중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출연 기간은 계약하지 않는다. 김윤진은 묵묵히 그늘 같은 역할을 감내하며 이중적인 내면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내 미국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로스트> 시즌2에서는 납치당하고 임신하는 에피소드로 김윤진의 캐릭터에 미스터리적 요소가 더해진다. “<로스트>로 배우로서 두 번째 전환점을 맞고 있다”는 그는 “국적보다는 그 배우만이 가진 정체성으로 주목받고 싶다”고 말했다. “소수 인종 배우로서 자리잡기 위해 저만의 캐릭터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역이든 잘 소화해서 공감을 주는 사람이 배우이지, 여배우, 동양인 배우 이런 건 없다고 생각해요.” <로스트> 시즌2는 미국에서는 5월 말, 한국에서는 9월 말까지 방영될 예정이다.

축구 좋아하는 영화광들 “클릭만 하세요”

월드컵 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요즘, 붉은색 천지의 텔레비전 화면이 단조롭다고 느끼는 축구팬 관객들이 찾아갈 만한 영화제가 있다. 집에서 인터넷만 켜면 바로 초대받을 수 있는 온라인영화축제 서울넷페스티벌(www.senef.net)의 ‘축구만세’ 섹션이다. 갓난아이 때 엄마가 흔들어준 미니어처 축구공 모빌을 보며 자란 아이는 어린 시절 마라도나의 발기술에 열광하고 밤낮없이 축구공을 차며 거리와 학교를 누빈다. 이런 꼬마를 구박하던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나란히 앉아 “밋지, 밋지”를 열광할 때 통쾌하게 골을 넣는 텔레비전 속 아이는 장성한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마이클 오언이다. 영국 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엄마로 열연한 7분짜리 짧은 드라마 〈풋볼〉(왼쪽)에는 축구에 대한 어린 아이의 꿈과 관객들의 열광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인 〈잔인한 경기〉(가운데)는 축구장에서 열광하는 관객들과 축구선수들의 잔인할 만큼 치열한 경쟁을 절묘하고 위트있게 보여준다. 월드컵 후원사인 아디다스가 청소년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선수와 함께 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광고 캠페인 〈+10〉(오른쪽)은 김남일과 이호가 10대 아이들을 만나고 그중에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강한 아이들을 뽑아 함께 뛰는 영상을 역동적인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이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축구에 대한 재미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단편 10편을 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15일 개막한 제7회 서울넷페스티벌은 주로 영상전문가들의 관심을 모으던 영화제의 문턱을 올해부터 대폭 낮춰 일반 관객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축구만세’ 섹션뿐 아니라 온 가족이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감상할 수 있는 ‘가족극장’도 열린다. 귀엽고 재기발랄한 단편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13편이 관객의 클릭을 기다리고 있다. 또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크게 호응을 얻었던 심야섹션을 도입해 ‘애들은 재우고’ 밤새 감상할 수 있는 온라인 장편영화도 상영중이다. 한단계 난이도 높은 온라인 영상을 원하는 기존의 관객들을 유혹하는 건 지난해까지 오프라인에서 상영해온 피터 그리너웨이의 연작 영화 〈털스 루퍼의 가방〉을 인터랙티브 게임으로 만든 ‘털스 루퍼의 여행’이다. 인터랙티브한 광고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한국과 미국, 영국의 대표적 광고 그룹들의 최신작들을 소개하는 ‘인터랙티브 광고 특별전’도 시선을 끈다. 이밖에 국제와 국내 부문으로 나뉘어 새로운 시각적 실험을 시도하는 경쟁작들이 상영중이며 ‘서울영화제’로 영화제명을 바꿔 진행되는 오프라인 영화제는 9월8일 개막한다.

[팝콘&콜라] 작은 영화의 새로운 살길 보여준 <버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연출한 저예산 스릴러 영화 〈버블〉은 지난 1월27일 미국 전역의 32개 스크린에서 개봉됐다. 또 같은 날 유료 케이블인 에이치디넷에서도 방영을 시작했고, 나흘 뒤인 1월31일에는 디브이디로 출시됐다. 극장 개봉 수개월 뒤 디브이디를 출시하고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하는 홀드백 시스템의 ‘순서와 규칙’을 깬 배급 실험이었다. 미국의 극장주와 배급업자는 물론 ‘영화는 극장에서 먼저 봐야 한다’고 믿는 미국의 많은 영화관계자들이 반발했고, 〈버블〉의 흥행성적을 예의주시했다. 총제작비가 160만달러인 〈버블〉은 미국에서 개봉 첫주 금·토·일 3일 동안 7만2천달러의 극장 수입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디브이디 선주문 10만장 등을 포함해 모두 5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3일 만에 제작비의 3배가 넘는 수입을 거둬들인 것이다. 〈버블〉은 지난 11일 한국에서도 비슷하지만 더 파격적인 방식으로 배급되기 시작했다. 극장 개봉과 동시에 케이블 텔레비전(씨제이미디어, 씨지브이초이스), 디브이디(케이디미디어), 브이오디(케이티에이치), 모바일(에스케이티준, 케이티에프핌, 케이티에프멀티팩) 등 ‘전 윈도를 통한 동시 개봉’ 방식으로 관객들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시도된 이 배급 실험의 개봉 첫주 흥행 실적이 일부 공개됐다. 극장에서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단독 개봉했는데, 11일 39명을 비롯해 12일 71명, 13일 118명, 14일 86명 등 4일 동안 314명의 관객이 들었다. 다른 윈도들에 앞서 극장 개봉부터 시작하는 일반적인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들과 비슷한 수치다. 극장 이외에 다른 윈도들의 경우 정확한 통계가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흥행성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략적인 수치만 먼저 공개됐다. 〈버블〉은 유료케이블인 씨지브이 초이스에서 상영 중인 12편의 영화 가운데 10위를 차지했다. ‘꼴찌에서 세번째’이기도 하지만, 함께 방영하는 다른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한 대작 상업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방’한 셈이다. 또 브이오디의 경우도, 〈버블〉 개봉 전 1주일 동안 사이트 방문자가 1만2천명이었지만, 〈버블〉 개봉 뒤 4일 동안엔 2만8천명의 네티즌이 다녀간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변수가 없는 상태에서 늘어난 ‘1만6천명’을 〈버블〉 관객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디브이디는 1천장 정도를 찍었는데, 일반적인 예술영화들의 경우 200~500장 정도 판매되는 열악한 디브이디 시장을 감안하면 꽤 많은 수치다. 이 영화를 수입한 유레카픽처스의 강재규 팀장은 이런 결과에 대해 “기대 이상의 성과는 아니지만, ‘작은 영화’들의 살 길을 보여준 의미있는 실험이었다”는 자체평가를 내렸다. “‘작은 영화’는 홀드백 시스템에 따라 순차적으로 개봉할 경우, 그때마다 들어가는 마케팅 비용을 감당하는 것이 벅차기 때문에, ‘전 윈도 동시 개봉’으로 마케팅 비용을 한 번만 지출하고도 비슷한 홍보효과를 노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외신기자클럽] 일상 속의 고대극 (+불어원문)

언론에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출산을 앞두고 있고, 몇주 전부터- 언론을 피하기 위해- 파리 15구에 둥지를 틀었다. 피트와 졸리의 로맨스가 전세계를 매혹시키는 것은 고대극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우리네 서글픈 인간의 조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브래드 피트는 올림포스 산에서 떨어져나온, <델마와 루이스>에서 잘 그을린 벌거벗은 상체의 아름다움을 뽐내 보였던 캘리포니아의 아도니스(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은 아름다운 청년-역자)이다. 그 앞에서 패트릭 스웨이지는 빛을 잃었고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톰 크루즈는 겨우 피신하여 서둘러 헬스클럽에 가 몸을 만드는 데 열중할 시간이 있었다. 그리스 조각 같은 이 사내의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선 특별한 여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프렌즈>가 전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피트는 제니퍼 애니스턴을 선택했다. 그녀는 텔레비전의 작은 여배우였다.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기가 시작되고도 눈에 띄지 않는 이웃 소녀였지만, 수학시간의 방정식처럼 그녀의 부드러운 시선이 우연히 우리를 사로잡았다. 수줍은 미소나 자기 얼굴을 발갛게 상기시키는 서투름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이 젊은 아가씨는 세븐 일레븐에서 시리얼 상자 중 어느 걸 고를까 머뭇거리는 사람형이다. 첫눈에 반한 이 사랑은 기적이었다. 니콜 키드먼과 톰 크루즈와는 반대로 피트와 애니스턴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하나의 희망의 빛이었다. 신들은 인간의 단순한 매력에도 호감을 갖는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개성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의혹 어린 생각이 사실이 된 것이다. 잡지에 나온 애니스턴의 행복해하는 눈빛은 각자가 저 높은 운명의 고지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줬다. 그러더니 졸리가 나타났다. ‘아름다움의 천사’로 풀이되는 안젤리나 졸리의 이름이 의미하듯, 그녀는 평범한 틀을 벗어났다. 배우 존 보이트를 아버지로 둔 그녀는 별들 사이에서 태어난 셈이다. 자연은 그녀에게 풍요로운 봄과 같은 풍만한 가슴과 도톰한 입술을 선사했다. 안젤리나 졸리, 그녀는 최첨단의 가터 벨트를 한 사이버 비너스인 육감적인 여전사 라라 크로프트였다. 그렇지만 그 꿈같은 육체를 바보 같이 수영장 옆에서 선탠이나 시키려고 수백만달러를 벌어들인 게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졸리는 자기 혼자서 지구촌 반대편의 아이들을 입양하고, 인류애의 커다란 대의를 적극 옹호한다. 졸리는 육체·정신적인 면에서 우수함을 갖추게 해주는 채식주의 에어로빅 챔피언이고, 피아노를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동시에 맹인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기까지 한다. 그녀에 맞서 애니스턴은 극복할 수 없는 상대 앞에서 말 못하는 임권택 감독 영화의 가련한 아다다일 수밖에 없었다. 애니스턴은 즉각적으로 그녀의 미래는 브래드 피트와 함께 엮어져 있음을 이해했다. 누구나 직업적인 만남이나 정서적인 관계에서 안젤리나 졸리와 같은 사람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애니스턴이 무기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한다. 브래드 피트를 미워하지도 못한다. 그는 단지 자기와 같은 종족의 여자를 만난 것이다. 운명은 얼마나 잔인하며, 졸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을 머금고 애니스턴은 사이렌들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올림포스 산을 다시금 오르는 신 같은 남편을 바라볼 뿐이다. 베벌리힐스의 텅 빈 집에서, 그녀는 켈로그 ‘올 브랜’ 시리얼을 담은 그릇을 바라다본다. 그곳은 몇시일까? 파리에선 조금 있으면 피트가 졸리의 품에서 둥근 배에 손을 얹고 잠들 것이다. 애니스턴은 한숨을 쉬고 다음번에는 콘프레이크를 택해야지, 하고 혼자 말을 할 것이다. Drame antique du quotidien. Ma premiere chronique people. La presse est au courant. Depuis plusieurs semaines Brad et Angelina attendent un enfant et se sont installes a Paris, dans le quinzieme arrondissement… pour echapper a la presse. La romance de Brad et Angelina fascine le monde entier car elle renvoie a la fois aux drames antiques et a notre triste condition humaine. Recapitulons : Brad Pitt est un Adonis californien tombe de l'Olympe, apparu d'on ne sait ou, beau, bronze et torse nu dans Thelma et Louise. A sa vue, Patrick Swayze fut aussitot irradie et reduit en cendres. Tom Cruise eut juste le temps de se mettre a l'abri et de s'abonner fissa a un club de fitness. Pour conquerir le cœur d'une statue grecque, il fallait une femme hors du commun. Or, alors que Friends triomphait a travers le monde, Brad jeta son devolu sur… Jennifer Anniston. Jennifer etait une petite actrice tele. C'etait ma voisine, la fille qu'on n'a pas remarquee le jour de la rentree, mais dont le doux regard vous frappe au hasard d'une equation pendant le cours de math. C'etait cette jeune femme qui hesite entre deux boites de cereales au 7 Eleven, qui vous charme d'un sourire timide ou d'une maladresse qui la fait rougir. Ce coup de foudre etait un miracle. Contrairement a Nicole et Tom, Brad et Jennifer representaient une lueur d'espoir pour les gens comme vous et moi. La demonstration etait faite : les dieux sont sensibles aux charmes simples de l'humanite ! Les conseils douteux de nos amis devenaient vrais : la personnalite l'emportait bien sur le physique ! En une des magasines, le regard radieux de Jennifer prouvait qu'il etait possible pour chacun d'acceder aux hautes destinees. Et puis surgit Angelina. Angelina Jolie qui signe d'un nom qui sort de l'ordinaire : ange de la beaute. Par son pere, l'acteur Jon Voight, elle est nee parmi les etoiles. La nature lui a offert des levres et des seins gorges comme un printemps genereux. Angelina c'est Lara Croft la tueuse sexy : une Cyber-Venus en porte-jarretelles high-tech. Cependant, elle ne gagne pas des millions de dollars pour laisser dorer betement ce corps de reve au bord d'une piscine. Non, Angelina adopte seule des enfants du bout du monde, Angelina defend de grandes causes humanitaires. Angelina est une championne d'aerobic vegetarienne qui se permet d'etre premiere en physique-chimie, de jouer divinement du piano, tout en donnant des cours d'alphabetisation aux aveugles. Face a Angelina, Jennifer devient la pauvre Adada, muette devant son invincible rivale dans le film de Im Kwon-taek ! Elle devine instantanement qu'il en est fait de son avenir avec Brad. Nous avons tous croise dans notre vie sentimentale ou professionnelle, une Angelina Jolie. Nous savons donc que Jennifer restera impuissante. On n'en veut meme pas a Brad : il a juste croise une fille de sa race. Que le destin est cruel et qu'Angelina est belle ! Les larmes aux yeux, Jennifer ne peut que regarder son divin mari remonter vers l'Olympe, happe par le chant des siens. Dans la maison vide de Beverley Hills, elle observe son bol de Kellog's All Bran. Et la-bas quelle heure est-il ? A Paris, Brad dormira bientot dans les bras d'Angelina, la main posee sur ce ventre qui s'arrondit. Jennifer soupire et se dit que la prochaine fois, elle prendra peut-etre des Corn Flak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