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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도전자의 아우라, <위키드> 배우 양자경
남선우 2024-11-28

<위키드>는 배우 양자경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트로피를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사이 거친 또 하나의 우주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오스카 레이스와 첫 뮤지컬영화 촬영을 병행한 그는 수상 소감에 배어 있던 자신의 기품을 순조롭게 이식한 듯한 새 캐릭터를 매만지고 있었던 셈이다.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건너온 마담 모리블의 자태는 과연 고상했다. 더 가까이서 마주볼 수 있게 된 그 눈은 재주를 과시하지 않고, 제자를 인정할 줄 안다. 모리블이 통치자의 신임을 받는 마법사이자 엘파바와 글린다가 우러러본 교수로서 무게감 있는 행보를 걸을 때 진즉 마음을 뺏겨서일까. 그가 미심쩍은 브레이크를 걸 때조차 이면을 해독하고 싶어진다. 그 주문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에 양자경은 거듭 동료들을 호명하며 연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마련해준 데 고마움을 표했다. <위키드>의 감수성을 체화한 지 오래인 이 베테랑은 자신이 쉬즈 대학교의 학생들과 같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관객에게 응원을 보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 마담 모리블 역할을 처음 제안받았을 때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수락하기까지 고민한 점이 있다면.

존 추 감독이 내게 어떤 역할을 맡기든 ‘예스’라고 답했을 것이다. 나는 존 추 감독의 엄청난 팬이고, 우리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영광을 함께 누린 사이니까. 하지만 마담 모리블 역을 제안받은 후에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존, 이건 뮤지컬이잖아. 나 노래 못해!” (웃음) 그런데 존 추 감독은 확신에 차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서. 이미 글린다, 엘파바 역에 캐스팅된 배우 아리아나 그란데와 신시아 이리보까지 내가 <위키드>에 꼭 필요하다고 연락해왔다. 그렇게 인생 처음으로 뮤지컬영화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다.

- 2003년 초연 이후 20년간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뮤지컬 <위키드>가 공연됐다. 이 작품의 힘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봤나.

사실 이 역할을 맡기 전까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위키드>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 <위키드> 출연을 결심하자마자 뉴욕과 런던에서 공연을 봤다. 뮤지컬 <위키드>가 어떻게 20년 넘도록 전세계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더라. 이 이야기는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괴롭힘 당해도 끝내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면서 타인을 사랑하는 법까지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모든 여정을 지나는 동안 함께하는 누군가와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 오랜 기간 여러 장소에서 공연이 이뤄졌다는 건 수많은 버전의 마담 모리블이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자경 배우만의 접근법을 듣고 싶다.

마담 모리블은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다. 이 오리지널 캐릭터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캐릭터에 더 많은 레이어를 부여하기 위해 존 추 감독, 마크 플랫 프로듀서와 긴밀히 상의했다. 이 작품은 뮤지컬과 달리 영화적 경험을 선사해야 했기에 캐릭터를 좀더 깊이 있게 보여줘야 했다. 배우의 눈빛이나 뉘앙스처럼 무대 위에서는 자세히 보여주기 어려운 다양한 지점들을 카메라가 담아내기 때문이다. 마담 모리블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다. 그의 꿈은 무엇인지, 야망은 무엇인지, 왜 극 중의 일들을 벌였는지 탐구했다. 게다가 그는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사람이자 쉬즈 대학교 총장이기까지 하다. 그가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고 학생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는지도 고려해야 했다. 쉬즈 대학교 학생이라면 누구든 그를 따른다. 마담 모리블이 처음부터 비열하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면 누가 그를 스승으로 인정하고 싶겠나. 이런 입체성을 고려하면서 마담 모리블이라는 캐릭터에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일이 정말 흥미로웠다.

- 배우가 캐릭터에 입힌 레이어 중 하나를 들춰보고 싶다. 마담 모리블은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쉬즈 대학교 학생들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다. 그때 학생들의 눈빛은 당신을 동경하는 아시안 여성들의 표정과도 닮아 있더라. 마담 모리블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새겨진 말투와 자세는 어떻게 연구했나.

오래 연습한 덕분에 만들어진 말투와 자세다. 마담 모리블의 캐릭터디자인이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됐는데, 바람이 휘감고 간 듯한 헤어스타일과 폴 태즈웰 디자이너가 제작한 멋진 의상 덕을 봤다. 마담 모리블이 긴 드레스를 입고 교정에 등장하면 마치 왕족이 학교에 온 듯한 느낌을 주지 않나. 누구든 그를 보면 한 발짝 물러서서 ‘이 사람에게 권위가 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그 아우라가 마담 모리블을 설명한다. 그는 쉬즈 대학교의 여왕 같은 존재다. 배우가 강렬한 의상을 입으면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설 수밖에 없다. 헤매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다닐 수도 있다. 저절로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의상만큼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트도 연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카메라가 마담 모리블을 단독으로 비출 때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블린이 마주하는 새로운 우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프로덕션디자이너 네이선 크롤리가 구현한 세트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경험은 어땠나.

영화의 룩은 모든 디자인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마담 모리블이 아무리 품위 있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들 세트가 온통 초록빛이면 서로 전혀 어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의상, 가발, 메이크업 등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철저히 세트 디자인과 맞물리도록 기획됐다. 존 추 감독과 앨리스 브룩스 촬영감독의 카메라 덕에 그 디테일이 잘 드러났고, 그들의 작업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마스터클래스 같았다. 배우 또한 실제처럼 구현된 세트에서 연기할 때 배역을 더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마담 모리블이 쉬즈 대학교에 들어서거나 곤돌라를 타고 운하를 건널 때 전해지는 그 공간만의 웅장함이 연기자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배우가 공간을 상상해야 하는 그린스크린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곤 한다. ‘더는 상상하고 싶지 않아!’라고 투덜거리게 되는 거지. (웃음) 그만큼 실제 공간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에게 큰 선물이다. 그래서 프로덕션디자이너인 네이선 크롤리를 필두로 한 제작진에게 고마웠다. 그들은 900만 송이의 진짜 튤립을 들판에 심었다. CG가 넘치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카메라가 들판 위를 날아다니고, 아이들이 그 안에서 뛰어놀 때, 진짜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 향기가 나는 듯한 감각을 관객에게 선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위키드>팀의 시도에는 바로 그런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 <위키드>는 두 여자의 깊은 우정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린다와 엘파바처럼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세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당신은 친구들에게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지도 궁금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다름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이 글린다와 엘파바를 하나로 묶어준 것 같다. 극 초반부에 두 사람은 경쟁하는 사이였고, 성격이 너무 다르다 보니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마치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표지만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가벼운 자세다. 그런 태도는 자신에게 손해이지 않나. 결국 나는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여성들간의 우정. 왜 사람들이 여자들끼리는 잘 지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도 서로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고, 오히려 서로가 겪는 일들을 더 잘 알아줄 수 있지 않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찾으면 그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어진다. 다만 타인에게 솔직해지고, 그를 신뢰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관계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깊어졌다. 우린 때로 경솔하게 타인을 판단하지만 상대방의 상처받은 눈빛을 보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친절이란 슈퍼히어로의 초능력과 같다. 우리 모두에겐 그 힘이 있고.

- 두 친구는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차별과 편견에 맞선다. 양자경 배우도 200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 활동해왔기에 이들의 여정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당신이 엘파바와 글린다의 나이였을 적엔 어떤 도전을 거쳐야 했나.

나는 운이 좋게도 다민족 사회인 말레이시아에서 성장했다. 인도인, 말레이시아인, 중국인, 백인 친구들과 함께 자라며 서로의 다름을 찬미해왔다. 디파발리(힌두교 축제), 하리라야 하지(이슬람 축제), 중국 춘절과 크리스마스 등 서로의 전통 명절을 축하하면서 그야말로 축제가 끊이지 않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는데, 사실 우리끼리는 그 차이를 잘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다양한 언어를 듣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가도 아시안을 포함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자막이 있는 한국영화, 일본영화, 인도영화를 통해 서로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란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할리우드에 갔을 때 내가 마이너리티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충격받았다. 아시안이 어떻게 소수라는 거지? (웃음) 그만큼 내겐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이 큰 도전이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아시안 배우들을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에 사는 캐릭터처럼 고정된 역할로만 바라봤다. 여전히 그런 고정관념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이런 경계를 허물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들 그리고 <위키드>를 관람할 많은 관객들 또한 엘파바와 글린다처럼 자신을 찾아가는 중일 테다. 먼저 그 길을 걸어본 당신에게 계속해서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묻고 싶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다. 이 직업은 단순히 재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즉 도전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모두들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는 이유를 찾길 바란다. 더불어 존 추 감독 같은 사람이 내 곁에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매일매일 축복받은 기분을 느낀다. 그런 인연들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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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유니버설 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