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보 같다는 게 나만의 고유함이 아닐까”
-<슬리피 할로우>의 시나리오에 끌렸던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좋아서인가, 아니면 비주얼의 가능성 때문인가.
=둘 다다. 디즈니의 58년작 만화 <슬리피 할로우의 전설>을 봐서 그런지 이 이야기가 낯익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기 전까지는 워싱톤 어빙의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이 그렇다. 그렇지만 목없는 호스맨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안다. 시나리오가 해머프로덕션의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는 것도 맘에 들었다. 난 동화나 상징성을 띤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시나리오에는 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의 감동이 있었다. 이 카보드 크레인이란 사내는 자기 머리 속에서만 살지만 호스맨은 머리가 없다는, 대조적인 설정이 특히 좋았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을 것 같은데.
=맞다. 물론, 비주얼로만 영화에 접근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캐스팅이나 세트 제작 등 고려할 게 많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3] - 팀 버튼 인터뷰
-
임무 완수하는 영웅, 팀 버튼답지 않은 캐릭터
한편 <슬리피 할로우>는 외골수 팀 버튼의 영화로서는 놀랄 만큼 개방적이다. 미스테리의 얼개를 입은 앤드루 케빈 워커의 각본은 그의 어떤 전작보다 강한 스토리에 대한 집착을 영화에 심어놓았다. 썩어 부푼 시체, 잘린 머리를 채운 자루, 구더기 끓는 주검 같은 역한 이미지들도 <쎄븐>의 작가였던 그의 취향이다. 품위있는 위트가 살짝 발라진 대사에서는 각본을 가다듬은 톰 스토파드(<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지문이 묻어난다. 크레인 역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팀 버튼 영화의 히어로다. 크레인은 팀 버튼이 붙잡고늘어져 온, 정상성의 세계에 몸을 밀어넣으려다 거절당하는 아웃사이더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누구 못잖은 정신적 외상도 있고 컴플렉스도 깊은 인간이긴 하지만, 걸핏하면 졸도하고 큰 소리라도 날라치면 방금 구출한 여자 뒤에 숨는 심약한 남자지만, 어찌됐건 크레인은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치는 일 없이 기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2]
-
우리 마음 속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
“난 꿈은 잘 꾸지 않는다. 그저 낮 동안에도 넋이 몸을 스르륵 빠져나가 남들이 내게 하는 말이 들리지 않고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팀 버튼(42)은 그렇게 본인의 몸 안에도 다소곳이 갇혀 있지 못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런 그가 영악한 두뇌들이 연산을 거듭해 내놓는 영화들의 각축장인 할리우드에서 <피위의 대모험>(1985)과 <유령수업>(88)으로 관객 동원력을 인정받고, 급기야 블록버스터 <배트맨>(9?)으로 흥행 감독의 왕관까지 쓴 것은 확실히 통쾌하고도 아리송한 일이었다. 더구나, 버튼의 영화에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굳이 구부리고 꺾은 자국도 거의 없다. 그의 초기 단편 <빈센트>나 <프랑켄위니>에 담긴 극히 사적인 내용과 병적인 상상력은, 상업 영화에서 도리어 더 큰 화폭과 풍성한 팔레트를 만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팀 버튼의
이상한 동화나라의 팀 버튼 [1]
-
냉소의 계보1 - <비비스 앤 버트헤드>
이런 무정부주의적 냉소도 다 계보가 있다. 93년부터 97년 사이 기분나쁜 웃음으로 MTV를 장악했던 <비비스 앤 버트헤드>의 얼간이 듀오가 이 꼬마들의 선배격이다. 결국 레지스탕스가 되고마는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꼬마들에 비해서는 백해무익한 건달들이긴 하지만. 미국 서부 교외 하이랜드의 허름한 집에서 사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배운 것 없고, 할 일 없고, 돈도 없는 10대 고등학생. 낡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죽이고, 특히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품평하는 게 낙이다. 세상만사를 ‘짱’(cool) 아니면 ‘꽝’(suck)으로 이분하는 이들에게 교양있는 취향이나 판단, 합리성, 윤리적 혹은 정치적 가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변두리에서 잘 교육받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그닥 잘되리란 희망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바라는 게 있다면 섹스나 한번 해봤으면, 그리고 파괴본능에 몰두하는 것 정도. 그래서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2]
-
-
불경한 카타르시스의 태풍, “오 마이 갓!”
사시사철 봉우리에 눈을 얹은 로키산맥을 끼고 미국 콜로라도주 한켠에 자리잡은 가상의 마을 사우스 파크. 이 마을은 미국 애니메이션이 가닿은 표현의 신천지다. 내용의 새로움이라기보다 그 표현의 수위와 강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사우스 파크>는 동글동글한 2등신 꼬마 4명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백인 깡촌 마을에서 살아가는 스탠, 카트먼, 카일, 케니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동갑내기들. 하지만 아동용이라고 방심해선 안된다. 집, 가족, 학교, 선생님, 친구 등에 둘러싸인 평범한 일상은 곧 모순과 폭력의 지뢰밭이 된다. 아이들은 입만 열면 욕설이 튀어나오고, 엄마와 선생님과 정부와 의사 등 그 모든 기성의 권위는 발밑에 까뭉개지고, 흑인과 동성애자와 그 모든 소수자들이 놀림감이 되는 성인 만화? 그런것을 미국 TV와 극장은 어떻게 허용한 거지?
하지만 흥미진진한 것은, 기성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보이는 이 애니메이
<사우스 파크>와 쓰레기 문화 [1]
-
보이지 않는 손들의 전쟁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흥수’를 가지고 있다.’ 무슨 말일까? ‘제일제당이 <춘향뎐>의 배급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배급(권)을 ‘흥수(興手)’라 불렀다. 배급이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손이라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 유통구조에서 배급은 흥행을 판가름하는 관건이다. 노점에서도 물건 진열을 잘해야 하나라도 더 팔 수 있듯, 영화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상영관 확보가 절대적인 조건인 것이다.
한국영화의 새해맞이는 극장을 둘러싼 ‘배급전쟁’으로 유쾌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거짓말> <행복한 장의사>가 1주일 터울로 개봉하면서 극장 다툼을 벌였고, 잘나가던 <해피엔드>가 중도하차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의 횡포나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어서 모두 말을 아끼면서 어벌쩡 봉합되긴 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소지는 상당히 크다. 결과적으
영화 배급전쟁 2000
-
위기에 빠진 세계의 운명은 오직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초반부터 한바탕 실력을 보여준 그는 이제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러 갈 것이다. 아름답고도 이국적이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혼자 가긴 외로울 테니 어딜 가든 파트너가 따라붙는다. 이왕이면 비키니를 입은(완전 누드여선 ‘품위’가 없으니 곤란하다) 팔등신의 미인이면 더 좋겠지. 그렇다고 새로 개발된 무기를 챙겨가지 않는다면 프로가 아닌 법. 그의 앞에는 세계를 집어삼킬 야욕으로 불타는 다분히 천재적인 악당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결국 승리는 그의 차지. 하늘을 찌르는 폭발을 뒤로하고 그는 새 파트너와 함께 유유히 악당의 숨겨진 요새를 벗어나온다.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파트너와의 파티타임. 그런데 이 소중한 시간에 ‘M’이란 작자는 눈치도 없이 웬 전화질이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건 퀴즈 축에도 못 든다. 영화나 소설을 봤건 안 봤건, 또는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든 아니든, 어쨌든 제임스 본
그는 세계의 운명을 지고 있다,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
끔찍한 일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니. 거창하게 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 목록을 따로 간직하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서 곤혹스런 일이다. 사실 나는 각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거나 나름의 시선에 따라 특정 영화에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다. 남들 4년 다니는 대학(연극영화과)을 무려 ‘10년’이나 다녔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영화일을 시작한 지 8년 가까이 됐지만 가슴 속에 따로 고이 담아둔 영화 몇편이 없다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제작소 청년이나 예술실험영화전용관을 운영했던 동숭아트센터에서 일했던 이력 때문에 종종 예술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는다. 하지만 나는 잘 만든 상업 영화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사랑 영화를 좋아하며, 사랑 영화 중에서도 ‘촌스럽게도’ 슬픈 사랑 영화를 제일로 꼽는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슬픈 사랑 영화를 고르면 남들이 말하는 내 인생의 영화에 해당하는 셈이다.
‘준비되지
[내 인생의 영화] 너무나 슬퍼서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다.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 이 정도 코미디 연기는 그의 이력에는 차고도 넘친다. 크리스 콜롬버스 감독? <나홀로 집에>나 <스텝 맘>을 만드는 재주와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은 살만하지만 끌리는 감독은 아니다. 원작자는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이라는 좀 딱딱하게 들리는 원칙을 세운 인물이다. 또한 자신이 세운 이 법칙을 바탕으로 ‘로봇’에 관한 소설들과 과학 이야기들을 펼쳐 보인 기념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SF소설가 정도로 알려진 아이작 아시모프는 1976년에 <바이센테니얼 맨>이라는 중편 하나를 썼다. 지면상 옮길 수는 없지만 아시모프는 마치 화두처럼 소설의 서두에 ‘로봇 공학의 세 가지 법칙’을 써놓았다. 원작은 이후 이 법칙을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간다. 앤드류는 이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 법정 투쟁을 불사하며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윤색과정에서 ‘로봇 공
로봇과 인간의 사랑, <바이센테니얼 맨>
-
<13번째 전사>는 피와 살점이 튀는 활극이지만, 서사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실존인물 아메드 이븐 파들란의 모험담을 토대로, 마이클 크라이튼이 펴낸 소설 <시체 먹는 사람들>이 영화의 원전. 따라서 이야기는 북구인의 삶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아랍 시인 아메드의 순진한 시점에서 전개된다. 북구의 오지를 삶의 터전으로 나눈 바이킹의 선조들과 식인 부족들의 대결 구도 사이에서 그가 전사의 용태를 갖춰가는 과정엔, 서로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이뤄지는 교환수업의 의미가 보태진다. 아랍인은 북구인에게 글의 쓰임새와 일신교의 의미를, 북구인은 아랍인에게 자기방어의 능력을 일깨워 준다. 우정과 의리는 민족의 담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해묵은 주제와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강렬한 요소는 역사적인 맥락이나 배경도, 신의를 강조하는 목소리도 아니다. 비장미와 역동감의 전투신이다. 안개 속에 펼쳐지는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장대한 숲과 벌판, 500여명의 기
전형적인 마초적 세계관, <13번째 전사>
-
에드 우드의 B급 SF 영화에 대한 기억에서 <에드 우드>와 <화성침공>을 끄집어낸 팀 버튼이 이번에 들고나온 발명품은 해머 공포 영화의 이미지로 채색한 <슬리피 할로우>다. 50∼60년대 영국 영화사 해머 프로덕션은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 미이라 등 30년대 미국 유니버설 공포 영화 캐릭터들을 소생시켜 인기를 누렸다. 팀 버튼은 그 시절 해머 영화의 특징인 기괴하면서도 로맨틱한 이미지를 머리없는 귀신 호스맨의 전설에서 찾아 환상적 세트 위에 펼쳐놓는다.
괴담을 구성하는 요소는 단순하다.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주인공이 있고, 댕강댕강 목을 치는 무서운 귀신 호스맨이 등장하며, 주인공을 매혹시키는 신비의 여인이 끼어든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 덤비는 해머 공포 영화와 달리 팀 버튼은 어깨에 힘을 빼고 조니 뎁을 코믹하게 만든다. 애당초 명탐정이 되기엔 겁이 너무 많은 주인공 크레인은 놀란 토끼눈을 한 채 꺼벙한 표정을 지으며 요란스런 모양에 비해 별
잔혹함과 순수함이 어우러진 팀 버튼의 마을, <슬리피 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