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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얼굴 없는 눈, 몸 없는 영화 2024 - 상반기에 주목했어야 할 독립영화들, <이어지는 땅> <벗어날 탈 脫> <서바이벌 택틱스>

<벗어날 탈 脫

“그는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진은 아름답고 이 청년도 아름답다. 그것이 스투디움이다. 그러나 푼크툼은 그가 곧 죽으리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진에서 그의 죽음이 실현될 것이고, 또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읽는다.”(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중)

영화가 둘로 나뉜다. 느슨한 단서만을 남겨두고 하나의 세계에서 이질적인 다른 세계로 급격하게 전환되는 형식은 동시대 영화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영화는 처음과 끝이 결정된 정합적 세계를 구성하는 대신 이유 없는 소멸과 중단으로 구멍난 세계의 흔적을 비춘다. 그러므로 고전적 질서에서 이탈한 영화의 아름다움은 파열된 세계를 하나의 평면에 배열하는 모순을 파고드는 데서 나온다. 상반기에 개봉한 세편의 한국영화를 나란히 보면서 동시대 영화의 곤경과 돌파구를 증언하는 이 형식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둘로 나뉜다. 그러나 인물과 이야기의 시간을 자르는 실험적 유희가 아니라, 불가피하고 고통스러운 신체의 증상으로 찢어진다. 조희영의 <이어지는 땅>, 박근영의 <서바이벌 택틱스>, 서보형의 <벗어날 탈 脫>에서 흐릿한 유사성과 차이점을 안고 반복되는 치명적인 현상은 바로 이것이다.

흥미롭게도 세 영화는 남겨진 물건을 매개로 사라진 사람에게 접근하는 일종의 탐정 이야기를 공유한다. 탐정에게 필요한 것은 단서가 될 만한 구체적인 흔적과 몽타주, 달리 말해 사물과 인물의 선명한 얼굴이다. 하지만 이 영화들에서 사물과 인물은 지극히 불투명하고 모호한 얼굴로 스크린에 떠오른다.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뭉개져 있거나 둘 이상의 정체성이 겹쳐 있어 어느 한쪽을 확신하기 어렵다. 뚜렷한 근거를 잃어버린 탐정은 그 앞에서 어느 방향을 주시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각각의 영화에 남겨진 카메라, 사진, 편지를 실마리 삼아 희미하거나 사라진 얼굴(들) 사이를 배회한다.

카메라, 사진, 편지

<벗어날 탈 脫

화면 전경에 보이는 지면 위로 식물과 동물이 있다. 저 멀리서부터 한 사람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화면에 펼쳐진 공간의 환경과 인물이 어떤 관계를 맺을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땅>의 첫 장면은 이렇게 주어진다. 알 수 없는 공간에 알 수 없는 인물이 침입해, 여러 면으로 구성된 프레임 어느 방향에서 인물이 나타나고 사라질지 모르는 영화의 속성을 예고한다. 누군가가 화면에 들어오고 나가는 단순한 움직임으로 특별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첫 장면처럼, 이 영화에 접속하는 출입구 또한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다.

특별한 이야기랄 것은 없다. 헤어진 연인 동환을 만나기 위해 런던을 찾은 호림(정회린)은 동환과 그의 현재 여자 친구인 경서를 만나고, 두 사람의 친구인 이원(공민정)까지 합류하게 된다. 그들의 모호한 하루가 지나고 나면, 밀라노에 머무는 이원의 하루가 이어진다. 이원은 밀라노를 찾은 화진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 시간을 보내지만, 한밤중에 서로 길이 엇갈려 다시 만나지 못한다. 1부와 2부로 나뉜 이 영화의 앞부분을 호림의 이야기로, 2부를 이원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쉽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야기 자체보다 흥미로운 것은 호림과 이원이 각자의 이야기에서 완전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이다. 웨스턴의 주인공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아무런 연고도 없이 런던에 도착하는 호림은 버려진 캠코더를 발견하고 그 안에 기록된 이원의 내밀한 영상을 본다. 동환과 경서의 공간에서도, 카메라에 남겨진 이원의 영상에도 깊숙이 접근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겨지던 호림은 1부의 마지막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호림은 화면 중심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그 자리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조건에 노출된다. 하지만 호림의 흔적은 비가시적인 형태로 2부에 잠재한다. 이원은 호림처럼 낯선 곳에서 이성을 만나고, 호림이 이야기해준 플라밍고를 봤다는 꿈을 자기도 꾼다. <이어지는 땅>의 1부와 2부는 공유할 수 없는 내밀한 경험의 형식(독백과 꿈)을 주고받으려는 충동으로 겹쳐 있다. 런던에서의 하루는 호림의 이야기지만, 이원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마찬가지로 밀라노에서의 시간은 이원의 이야기지만, 현실과 꿈을 가로지르는 호림의 시간을 닮았다. 화면의 표면적 정보와 무관하게 1부는 이원의 열망처럼 느껴지고, 2부는 호림의 꿈처럼 보인다. 그들은 서로의 단서를 붙잡고 있는 실패한 탐정이다. 조희영은 카메라 앞에 존재하는 인물의 신체가 오히려 화면을 주재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지는 듯한 영화적 체험을 건넨다.

두개의 눈

<서바이벌 택틱스>

카메라를 매개로 사라져버린 대상에 접속하려는 충동은 <벗어날 탈 脫>에서도 강력하게 솟아오른다. 이 영화에서 사진작가 지우는 전시에 제출하기 위한 예전에 포기했던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과거에 찍었던 ‘해변의 사나이’ 사진을 떠올린다. 해변에 있던 동양인 남자가 파도에 빠져 죽기 직전에 지우의 카메라에 포착된 사진이다. 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하는 이 영화에서 사진은 과거시제의 기록과 현재형의 영화, 정지된 시간과 움직이는 시간, 파도에 휩쓸리기 직전에 촬영된 남자와 사진을 불태우는 여자가 마주 보는 임시적 픽션의 장소다.

1부의 영목이 얼굴 없는 귀신에게서 도망친다면, 2부의 지우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해변의 사나이’의 흔적을 찾는다. 영목의 신체가 액체성의 형상들로 채워진다면(반복해서 마시는 물, 수행하는 과정에서 흐르는 땀, 바닷가의 파도) 지우는 불타고 남은 흔적에 둘러싸여 있다. 지우는 담뱃불로 사진을 불태우고, 타고 남은 잿가루 같은 질감의 작품을 만들고 있으며, 아파트 화재 사고에서 살아남은 그림자 같은 형상의 남자를 쫓아다닌다(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그녀는 ‘번아웃’에 시달린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지우는 이미지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불타고 사라진 것들을 추적하는 탐정이 된다. 탐색의 과정은 개인의 정체성을 불안정하게 흔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진 존재와 유령으로 되돌아온 표상을 느슨하게 교차시킨다.

지우는 움직이는 세계를 정지된 단면에 새기는 사진작가에서, 정지 그림에 움직임을 부여하는 애니메이션 창작자로 정체성을 바꾼다. 그것은 이야기를 소멸하고 종결짓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 달리 말해 불타는 잿더미의 세계에서 액체성의 세계로 흡수되는 것이다. 물리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끌어안는 마지막 장면에서 컵에 담긴 물이 흔들리는 것은 지우가 탐색과 추적을 끝내고 액체의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작은 신호다. 이처럼 <벗어날 탈 脫>은 흡수와 잠식의 영화다. 이는 슬로모션과 스톱모션을 동시에 활용한 기묘한 장면처럼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 죽음과 운동성, 불타버린 잿더미와 액체의 흔들림을 한 화면에 관측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나타난다.

공존할 수 없는 이중적 형상을 같은 표면에 배열하는 이미지의 역설과 파열은 박근영의 <서바이벌 택틱스>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한다. 안경을 맞추기 위해 시력검사를 받는 주인공 성령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이런 대사를 들려준다. “사물이 두개로 보이면 얘기해주세요.” 둘로 나뉜 시각을 받아들이라는 안경점 사장의 말에서부터 영화는 분리된 형상들을 스크린에 채우기 시작한다. 1부와 2부에 각자 다른 외형으로 나타나는 인물들의 모습, 실종된 채로 죽은 쌍둥이 언니 성희와 남겨진 동생 성령의 추적, 두발로 걷던 우호의 잘려나간 다리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력의 두눈은 모호하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존재들을 분별없이 비출 것이다. 이는 앞뒤 시제와 인과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지만, 명백히 눈앞에 나타나 버린 세계다.

성희에게 남겨진 편지는 몇번씩 거론되고 읽히지만 정작 누가 작성한 것인지, 몇 차례 주어지는 낭독이 성령이 읽는 것인지, 성희가 읽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이 의심을 받아치기라도 하듯 편지에는 “당신은 자신의 목소리로 이 편지를 읽고 있겠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요?”라고 쓰여 있다. 덧붙여 이 목소리가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환자의 것인지 판단할 수 없고, 사람이 아니라 개의 것일 수도 있다고 적는다. 흔적으로 남은 지표적 대상은 그 정체를 분간할 수 없다. 영화는 이 편지를 읽고 나온 성령과 우호가 자동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포착하면서, 그들은 신체를 화면에서 삭제하고 목소리만 남겨둔다. 그들은 계속 말하고 있지만, 신체가 없는 목소리는 그 음성의 주인을 찾을 수 없는 상태로 흐트러진다. 현재와 과거의 서로 다른 표상이 두 눈에 동시에 비치면서 영화의 몸을 이루는 물리적 기반은 해체돼버린다.

신체 없는 영화

<서바이벌 택틱스>

세계가 여러 층위로 갈라지고, 시간과 공간이 통합적 체계를 유지하지 못한 채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것은 영화가 수많은 간극과 분열로 구성된 비현실의 집합이라는 명제를 드러낸 모던 시네마 이후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균열이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영화 매체의 가능한 형식적 실험에 몰두하기보다 그 안에서 어디에도 거주하지 못한 채 찢어지고 소실되는 신체에 주목한다. 이 글에서 언급한 영화들의 시도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들의 작업이 영화적 세계와 사건을 맞닥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단위인 인물의 신체를 희미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몸(홍상수), 고통을 느끼는 몸(이창동), 미끄러지며 ‘삑사리’를 내는 몸(봉준호), 제대로 보거나 듣지 못하는 고장난 몸(박찬욱)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독립영화의 실천은 ‘나’의 신체라는 물리적 기반이 무너진 영화를 직시하고 있다. 동시대 영화의 형식에 부합하는 영화적 신체의 모델을 찾지 못한 한국영화는 실체적 세계를 대면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손상된 신체를 묘사하고 있다. 비유컨대, <이어지는 땅>과 <벗어날 탈 脫>과 <서바이벌 택틱스>는 몸이 없는 영화다. 영화가 구축한 화면에 얼굴과 신체 부위가 완벽하게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는 사례들이다. 이를 형식적 실험의 미로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길을 잃은 한국영화의 파열적 증상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불가피하고 간절한 하나의 생존전략(Survival tactics)이라고 말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테지만, 이미 기록된 영화의 증상을 목격했다면 우리는 거기에 응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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