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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극장가다] 모든 게 나라 책임이야, <해피엔드>
최보은 1999-12-28

육아문제와 실업문제의 심각성을 새삼 일깨운 <해피엔드>

옛날 옛적, 아줌마 애기 낳던 시절. 시댁 어른들은 직장 다니는 남편이 밤에 잠을 푹 자야 한다며 딴방을 쓰게 했다. 그뒤 1년 반 동안, 아줌마는 ‘애기’라는 이름의 불면과, 남편은 자유와 함께 살았다. 그때 밤에 잠 안 자고 칭얼대는 아기를 단 한번도 대신 봐주지 않았던 남편에게 아줌마는 왜 칼침을 놔주지 못했던가. 애기를 팽개치고 지 한몸 편하자고 드르렁 쿨쿨 잘살았던 남편에게 왜 살의를 느끼지 않았던가. 아이를 팽개치고 자기 삶을 챙기는 배우자에겐 살의를 느껴 마땅하고, 좋아하던 연애소설말고 새삼스럽게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어서 그 살의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영화 <해피엔드>의 주장에 전폭적으로 공감하는 아줌마는, 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울 뿐이다.

아줌마가 보건대, 이 영화의 주제는 최보라의 ‘외도’가 아니다. 육아문제다. 아이를 팽개치고 술 마시거나 아이를 팽개치고 친구 만나거나 아이를 팽개치고 회사 일에 매달리거나 간에, ‘아이를 팽개치는’ 건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범죄다. 서민기가 아내 최보라를 칼타작하는 이유도 아이를 팽개쳐서였지, 바람 좀 피웠다고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다. 남자들도 바람 피울 때 애 들춰업고 가지는 않던데. 여편네들이 다 봐준다고? 그렇다면, 남편님 바람 잘 피우시라고 집에서 애나 본 아줌마들은 다 바람교사범이네. 그때 아줌마들이 집에서 아기 봐주지 않고 카센터에 차 고치러 갔더라면, 남자들은 바람 피우는 걸 포기했거나, 아니면 우유통에 수면제 탔다가 아줌마들의 칼침에 수세미가 됐을 건데. 그러면 남편 연쇄살인사건이 전국을 진동시켰을 거고, 국가는 그제서야 남자들의 숨통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육아문제를 발벗고 해결해야 한다는 대오각성 아래, 전국의 장미여관이나 넝쿨장이나 몸부림장 주인들에게 ‘유부’ 손님들을 위해 탁아방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라고 윽박질러댔을 건데.

안타깝다, 최보라. 그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미래를 보지 못하고 죽다니. 그런데 더 안타깝다, 서민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다니. 살려뒀으면 돈도 다달이 벌어다주고, 화대도 안 받고 일범이한테 하는 만큼 잠자리 서비스도 해주고, 가끔 일범이가 미쳐서 전화질해댈 때 빼곤 밤에 애도 잘 봤을 건데. 사는 데 아무 불편이 없었을 건데. 이제부턴 사발면이나 먹고, 애나 보게 생겼다. 그래, 한번 직접 당해봐야 해. 차라리 바람 피우는 아내 견디는 편이 낫다 싶을 때까지. 최보라, 꽁초 귀신처럼 아파트 난간에서 담배 푹푹 피워대고 그럴 필요 없어. 복수는 이미 시작된 거니까.

이쯤해서 결론을 내면 좋은데, 아줌마의 큰 탈 중 하나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는 거다. 곰곰 더 생각해보니까, 아닌가봐 싶은 거다. 이거, 육아문제는 보조주제고 사실은 실업문제에 대한 영화인가봐. 은행원 대학살 사태가 불과 얼마 전에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서민기들이 애보개나 하다가 급기야는 이혼당했나. 이건 서민기들의 괴담이야. 실직만 안 당했더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느라고 무지 바빠서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지 우유통에 수면제를 타는지 천지분간을 못하고 살았을 텐데.(마누라 어떻게 사는지 손톱만큼도 관심없는 남자들이 쌔고 쌘 거 맞죠? 여보, 당신도 동의하죠?) 그리고 실직만 안 당했더라면, 마누라 대신 애 보고 쓰레기 분리수거하고 마누라 차 청소해주면서 요상한 증거물 발견하고 급기야 으드득 살의를 불태울 시간도 없었을 텐데.(직장 다니면서 이런 일 하는 한국남자 진짜 드물다는 거, 역시 맞죠?)

결국 이것도 국가 책임이네.

그러니까 결론은, 국가가 이런 영화가 나오기에 앞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아 실업문제나 육아문제를 제때 해결했더라면, <해피엔드>라는 언해피한 영화 대신 현실의 해피엔드를 봤을 거다, 이거다.

마지막으로, 절대로 ‘가부장적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감독님께. 그럼 왜 발가벗고 재미보는 최보라의 모습과 애 보고 쓰레기 분류하면서 열심히 사는 서민기의 모습을 그렇게 속보이게 교차편집하셨죠? 그런 편집이 순수하다고요? 장면이 엇갈릴 때마다 객석에서는 아주 솔직하게, 감독님이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그런 반응, 저런 몹쓸 년, 저런 불쌍한 사람, 이런 반응을 탄식으로 보여주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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