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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 안에서 찾은 새로움,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

이 글을 쓰기 전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이야기 혹은 하소연. 나는 김기덕 감독을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밤 11시 반에 파라다이스호텔 맞은편에 있는 작은 클럽에서 한 영화사가 연 미드 나이트 파티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만났다. 아직 열세 번째 영화를 찍기 전의 일이다. 그때 그에게 다음 영화를 빨리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슬프게 말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걸 보여드리는 건 힘든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제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시키는 일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사를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내 영화를 개봉시키고 싶다면 이제는 그걸 수입하면 됩니다. 저는 개봉 여부에 전혀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 내 영화가 보고 싶다면 외국에 출시된 DVD를 주문해서 보시면 됩니다. 저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말을 빈정거리면 안 된다. 나는 지난해 그의 열두 번째 영화 <>을 김기덕의 ‘공식적인’ 요구대로 영화관에 가서 돈을 내고 보았다. 김기덕은 기자건 영화평론가이건 돈을 내고 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돈을 내고 본 자들만이 “내 영화에 대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될 권리”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나는 ‘아무 말’은 아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영화를 보러 갔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실천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이미 이 지면에 썼다. <씨네21> 제504호, “아버지,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시 태어나려는 김기덕의 다짐 <>”). 같이 본 사람은 (전영객잔의 필자들이신) 김소영씨와 허문영씨이다. 그날은 이 영화가 개봉한 첫 주말이었고, 전국에서 유일한 개봉관이었다. 우리는 좀 일찍 도착했고, 한회를 꼬박 기다렸다. 유감스럽게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어떤 기자도 혹은 동료도 만나지 못했다. 김기덕의 영화가 만들어지면 그렇게 말이 많던 기자들이나 동료들은 <>에 대해서 유난히 말이 없었다 (그런 다음 지난해 내내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자나 동료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어서 만날 때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는데 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로 “시사회를 하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좀 놀라운 일이다). 김기덕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에게는 <>에 대해 말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당연하지! 보지 않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런 다음 그해 연말 결산에서 <>이 전국관객 1450명이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는 지금 서울관객을 잘못 쓴 것이 아니다). 김기덕의 영화는 줄기차게 버림받거나 모욕당하고, 그리고 무시되었다. 슬픈 일이다.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고 다음 영화를 준비했다. 그런 다음 열세 번째 영화 <시간>을 찍는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그 말이 나오자 모두들 아마 벌써 영화가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영화를 빨리 만든다. 하지만 어디서도 이 영화를 보았다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시간의 흔적, 그 기호의 분열에 대한 경험

그러므로 급기야 내가 ‘할 수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실 남이 보지 않은 영화를 쓸 때에는 지나치게 친절해야 하기 때문에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김기덕의 <시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사방의 블로그에 글이 오르고, 팔방의 카페에서 토론되고, 싸이월드로 글이 퍼 날라지고, 마침내 장사꾼들을 부추겨서 이 영화가 영화관에서 개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발생한다는 간단한 원리. 물론 이런 지지는 김기덕과의 친분과 아무 상관이 없다(그리고 그렇게 친한 것 같지도 않다. 그가 나에게 이 영화를 ‘공식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니며, 나는 그의 배려없이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쓰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시간>을 보았고, 이 영화가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어떤 이유도 없다.

이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좀 낯선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김기덕은 제목을 지으면 정말 그걸 찍는다. 이를테면 <나쁜 남자>는 ‘나쁜 남자’를 찍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사계를 찍었고, <사마리아>는 ‘죽은(死) 마리아’를 따라가는 소녀를 찍었고, <빈 집>은 빈집을 찍었고, <>은 활을 찍었다. 이걸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간을 찍는 것이 가능할까? 김기덕은 자기 영화가 절반의 추상, 절반의 구상처럼 보이길 원하긴 하지만 관념적인 세계로 이끌리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다. 그 말은 여기서도 시간을 찍으려 한다기보다는 시간이 남기고 가는 그 흔적을 찍고 싶다는 뜻이다. 혹은 그 과정이 그의 관심(일 것)이다. 홍상수와 김기덕은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 적어도 지금, 그들은 같은 수정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영화의 시간 이미지 안에 들어와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쪽이 시간의 계열에 관한 질서를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동안 다른 한쪽은 시간의 흔적이 만들어내는 기호의 분열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방점은 경험에 있다.

광기 혹은 미쳐가는 과정

이야기는 시계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아마도 괘종시계의 소리일 것이다. 아주 무겁고 느리게 뚜벅뚜벅 뒤로 다가오는 듯한 소리. 그런 다음 무시무시하게 클로즈업된 성형수술 장면이 이어진다. 눈을 찢는 장면이 보이면, 그 다음은 가슴을 열고 실리콘을 넣는 장면이다.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커다란 마스크를 한 채 큰 액자를 들고 병원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때 급하게 지나가던 세희가 그만 그녀와 부딪치면서 액자를 떨어뜨리고 만다. 세희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깨진 액자를 들고 다시 끼워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면서 들고 간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쓴 여자는 세희의 뒷모습을 본 다음 그냥 뒤돌아서서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부터 이 액자는 일종의 윤무를 시작한다. 혹은 하나의 순환처럼 세희에게 운명을 넘겨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세희가 그걸 들고 간 곳은 작은 카페이다. 거기서 지우(<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병장으로 나온 하정우. 그런데 이 영화에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 출연한 배우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를테면 지우의 친구로 뚱보 병장이 나온다)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세희가 지우에게 액자를 보여주면서 어때, 예쁘지, 라고 하자 지우는 야, 무슨 미친 여자 같다, 고 대답한다. 그런데 지우의 차와 가벼운 접촉 사고를 일으킨 다음 두 여자가 지우와 명함을 주고받자 그걸 본 세희가 다가가 도대체 왜 처음 보는 남자에게 명함을 주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자 한 여자가 세희에게 말한다. 뭐, 이런 미친년이 있어. 말하자면 여기에는 광기 혹은 미쳐가는 과정이 있다. 혹은 미친, 좀더 정확하게 미쳐가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

세희는 여자들이 지우에게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자꾸만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침대에서 지우에게 말한다. “나 미친 거 같지, 나는 어떤 여자가 지우씨에게 눈길을 주면 그 눈을 파버리고 싶어.” 그러더니 그녀는 지우에게 “아까 그 차 박은 여자 생각하면서 (섹스)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는 그걸 확인하고 세희는 또 괴로워한다. 세희는 몇 차례고 반복해서 묻는다. 이제 내가 지겹지, 만날 본 얼굴 또 보니까 지겹지, 라고 묻고 또 묻는다. 지우와 세희는 항상 그렇게 싸운 다음 헤어진다. 그런 다음날 전화를 한 지우는 세희의 휴대폰이 취소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집에 찾아가보니 이미 이사하고 사라진 다음이다. 텅 빈 집. 우연히 만난 세희의 친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유령처럼 사라진 세희. 지우는 망연자실하게 그녀와 늘 함께 가던 카페에 앉아서 유리창 밖을 볼 뿐이다. 막연한 기다림. 그러는 동안 세희는 새로운 집에서 잡지의 여러 사진에서 눈과 입과 코를 오려내어서 사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진을 들고 성형외과를 찾는다. 의사도 수술을 말리지만 그녀는 얼굴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녀는 지우와 찍은 옛 사진들을 태워버리고 수술대 위에 눕는다. 그러는 동안 (대사에 따르면 “나, 여자친구랑 헤어진 지 한달 됐거든”) 지우는 괴로워서 친구들과 술자리에 어울리고 거기서 다른 여자와 모텔에 간다. 하지만 우연인지 세희인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가 그 방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린다. 혹은 사진하는 여자 후배의 사진전에 갔다가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오늘 우리 같이 있자”는 제안에 받지만, 그러나 그녀가 화장실에서 누군가를 만난 다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냥 가라고 한다. 심지어 “우리 다시 못 볼 것 같아”라고 말한다.

이상한 삼각관계, 위험한 내기의 속임수

허전해진 지우는 멀리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배에서 선글라스와 큰 마스크를 쓴 여자를 만난다. 그 배가 데려간 곳은 커다란 조각들이 서 있는 섬이다. 커다란 코, 어딘가를 가리키는 커다란 손가락, 얼굴의 부조들 혹은 뒤엉킨 몸. 그녀의 사진을 찍은 지우는 컴퓨터 모니터에 사진을 올려보면서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만 누군지 알지 못한다.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지우는 오랜만에 예전에 세희와 만나던 카페에 간다. 거기서 새로운 종업원이 온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부터 성현아가 출현한다) 그녀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지우는 두 번째로 섬에 간다. 그런데 그 배에서 카페에서 일하는 그녀를 만난다. 사진을 찍은 그녀는 지우에게 묻는다. “여자친구 있어요?” 지우가 대답한다. “6개월 전에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어요.” 지우는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그녀에게 키스한다.

다시 찾은 카페에서 그녀는 지우에게 어떤 여자 분이 남긴 메모라면서 종이 한장을 건네준다. 그 메모지에는 어떤 문장을 쓰고 그 위에 또 쓴 글 아래 세희라는 서명이 남겨져 있다. 사랑해요, 라는 말 위에 쓰여진 수백번의 사랑해요. 그 메모지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 지우가 그녀에게 “참, 이름을 묻지 않았네요”라고 하자 그녀는 그 메모지에 쓰여진 세희의 서명 위에 새희라는 자기 이름을 쓴다. 지우가 “아니, 6개월 만에 받은 여자친구 메모지 위에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라고 묻자 그녀는 “그렇게 못 잊으면 왜 나한테 키스했어요?”라고 반문한다. 지우 앞에서 카페를 그만둔 그녀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 다음 어느 날 갑자기 달려가는 지우의 차를 가로막고 그 앞에 나타난다. 행방불명과 출현의 반복. 그렇게 다가온 새희는 지우의 집을 방문한 다음 자기 집에 초대한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두 사람은 처음 (다시?) 섹스를 갖는다. 끝나자 새희가 묻는다. “어땠어요?” 지우는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한다. “새로웠어요,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아요.” 그러자 새희가 대답한다. “고마워요.” 사실 이 문답은 바깥에서 볼 때 매우 기괴한 질문과 대답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희가 세희의 일인이역이며, 이 숨바꼭질을 아직 지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이상한 삼각관계의 문답이 지닌 위험한 내기의 속임수를 잘 알고 있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은 매일 만난다. 하지만 새희는 섹스를 하다가 갑자기 발작적으로 묻는다. “갑자기 세희가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지우가 대답한다.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자 새희가 반문한다. “돌아오면?” 지우는 대답하지 않고 섹스에 몰두한다.

이제 게임은 점점 위험해진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지우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희라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는 그녀는(여기서는 이제 그녀를 도대체 누구라고 불러야 할까?) 지우의 차에 이제 돌아오고 싶다, 는 세희의 서명을 넣은 편지를 남긴다. 그 다음날. 다시 그 카페. 마치 영겁회귀처럼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그 카페. 지우는 새희에게 세희가 돌아올 테니 헤어지자고 말한다. 새희는 헤어질 수 없다고 소리치고 화를 내지만 지우는 어쩔 수 없다고 그녀를 두고 떠나간다. 이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 것일까?

방향을 바꾼 게임, 영화의 또다른 시작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부터 진짜 시작이다. 다시 그 카페에서 지우가 세희를 만난다. 그런데 거기서 그녀는 종이로 만든 세희의 가면을 쓰고 지우를 기다린다. 그런 다음 지우에게 “가면을 벗기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줘”라고 하소연한다. “너 정말 무서운 여자다”라고 비명처럼 외친 지우는 그 자리를 떠난다. 그 만남은 참담하게 끝난다. 지우는 떠나고 세희 혹은 새희는 그 종이가면을 쓴 채 거리를 가로질러 자기 얼굴을 고친 성형외과를 찾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종이가면을 찢어버린 다음 떠난다. 그 의사 앞에 이번에는 지우가 찾아온다. 그리고 의사에게 묻는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에게 좀 알려 주세요.” 의사는 그에게도 수술을 해준다.

이제 게임은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우가 사라지고, 세희 혹은 새희가 지우를 찾아다닌다. 아무리 찾아 다녀도 찾을 수 없자 세희 혹은 새희는 지우가 그 병원에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성형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희 혹은 새희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글라스를 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사진기를 든 남자를 찾아 강변까지 쫓아간다. 혹은 전에 함께 갔던 섬의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는 그 해변가를 찾아가 지우와 함께 앉았던 손가락 위에 앉는다. 항상 만나던 그 카페에 가서 무작정 기다리기도 한다. 거기 혼자 온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손 한번 잡아보아도 되느냐고 말한다. 어느 날 자기 집 초인종을 두번 잘못 누른 남자에게 집에 들어오라고 한 다음 커피를 대접하고 손을 잡아보고 그냥 가라고 말한다. 그 다음 언제나 가던 그 카페의 그 자리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자 다른 자리에 앉아서 마냥 바라본다. 그러자 그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곁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그와 함께 그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간다. 하지만 남자가 샤워하는 동안 그의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고 (지우가 아니라는 것을 안 다음) 황급히 그 집을 떠난다. 그때 그녀는 자기 주변에 때로는 감시하듯이 혹은 수호천사처럼 맴도는 그 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 사진기를 든 남자를 다시 만나서 그의 집에까지 가지만 그는 자기 이름이 지우가 아니라 정우라고 말한다. 점점 집착이 지나쳐서 이제는 비슷한 대상만 보아도 자석처럼 이끌리는 그녀는 지우와 같은 차를 보고서 그 차를 멈춰 세우기 위해 뛰어든다. 하지만 그녀가 듣는 말은 비수와 같다. “빨리 안 비켜, 저년이 미쳤나?” 세희 혹은 새희는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지우를 찾아서 사방을 돌아보고 쫓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쫓아간 한 남자가 황급히 도망치듯이 뛰어가다가 차에 치어 죽은 시체 앞에 서게 된다. 그녀는 먼 길을 돌아 다시 성형외과를 찾아간다. 그녀는 의사 앞에서 그냥 웃을 뿐이다. 혹은 우는 것일까? 의사는 말한다. “이제 아무도 몰라보게 해드릴까요?” 그리고 다시 수술이 시작된다.

수술이 끝난 그녀는 검은 선글라스와 큰 마스크를 쓰고 예전 얼굴 그림을 들고 병원을 나선다. 그때 누가 와서 그녀와 부딪친다. 세희와 닮은 그녀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다시 끼워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라고 하며 그 액자를 그때처럼 들고 간다. 세희 혹은 새희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그냥 그 자리를 떠난다. 거리의 수많은 여자들,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이미지. 바다 위에 떠 있는 손가락. 그런데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절망적인 좌절

영화를 보고 나면 즉각적으로 얼굴에 관한 영화의 계보가 떠오른다. 이를테면 조르주 프랑주의 <얼굴 없는 눈> 혹은 아베 고보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데시가하라 히로시의 <타인의 얼굴>. 물론 <시간>과 이 영화들은 얼굴을 다루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다. 혹은 얼굴에 관한 성찰을 떠올리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다루고 있는 타인의 얼굴 혹은 다음과 같은 문장. “얼굴을 통해서 존재는 더이상 그것의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우리 자신 앞에 나타난다.” 그런 다음 질 들뢰즈가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천개의 고원>의 일곱 번째 장 ‘얼굴성’의 일부. “얼굴은 표면이다. 특징들, 선들, 주름들, 길거나 각지거나 세모난 얼굴. 입체 위에 붙여져 있고 감겨 있더라도, 그리고 단지 구멍으로 존재하는 공동을 둘러싸고 이것들과 인접해 있더라도 얼굴은 하나의 지도이다.” 만일 자크 오몽이라면 <시간>을 그의 책 <영화 속의 얼굴>의 여섯 번째 장 ‘얼굴의 상실에 대하여’에 포함시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는 얼굴 위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의 기록과 이행을 가장 표층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적 수단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문장을 떼어다가 <시간>의 평으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 영화를 우리가 함께 본 다음 다루어야 할 토픽이다.

나는 <>을 본 다음 이 영화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소망, 혹은 다시 시작하고 싶은 다짐을 보았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새로운 사람이 되기. 부정과 긍정 사이의 무시무시한 놀이. 그 안에서의 인정투쟁. 그러나 김기덕은 그 뒤를 이어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시작하는 것의 절망적인 좌절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세번 다시 시작한다. 한번은 물론 영화가 시작할 때이다. 그때 이미 지우와 세희는 그들의 사랑의 절반에 도착해 있다. 그런 다음 세희는 일단 이 관계를, 이야기를, 진행을 중단시키고 새희로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작은 실패로 끝난다. 그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절반을 지난 다음 다시 시작하면서 동시에 남은 절반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개의 시간이 함께 진행된다. 그때 김기덕은 이 영화를 변주하기 시작한다. 그는 앞에서 보여준 공간들을 다시 반복한다. 이 영화는 절반이 넘으면, 좀더 정확하게 세희가 새희가 된 다음 다시 세희로 나타난 다음에는 (두번의 ‘다음’) 이미 다녀간 같은 공간과 다녀간 적이 없는 낯선 남의 집 사이의 변주이다. 그래서 영화는 지우와 관계된, 이미 만난, 그래서 경험한, 서로가 알고 있는, 이전에 다녀간 적이 있는 같은 장소, 같은 공간, 같은 신과 지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남의 집 사이를 반복적으로 오갈 뿐이다. 그때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공간들은 과거의 흔적을 안고 다시 되돌아와서 그 장소에서 되풀이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아홉개 혹은 열개의 신이 나온 다음 그 신을 계속 반복시키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카페는 마치 고정점처럼, 정박지처럼, 그들이 떠날 수 없는 장소인 것처럼,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 그때 이 카페는 감정의 감옥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공간들은 뒷걸음질쳐서 다시 되돌아와서 그 장소에서 반복한다. 그때 이 둘 사이를 매듭짓는 것은 시간 속의 기억과 그것 사이의 경험이다. 이 반복 안에 차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 되돌아오는 반복 안에서 처음에는 지우가, 그런 다음에는 세희 혹은 새희가 마주치는 것은 원래 그 안에 머물러 있던 극단적인 모습들의 일부일 뿐이다. 말하자면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실재와 도착적으로 만나는 중이다. 그 안에서 반복의 시간은 근거의 와해라는 내기를 통해서 분산되기 시작한다. 그때 이 분산은 마지막에 도착증과 강박증 그 사이 어딘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게 된다. 지우는 사라지고, 그녀는 세희와 새희 그 사이 어딘가에 선다. 그때 이 반복에는 비극적이지만 어딘가 희극적인 측면이 있다. 다 알고 있는 새희, 그런 다음 이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는 세희. 다 갖고 있었던 지우, 그런 다음 이제 자기가 갖고 있었던 것을 잃어버리는 지우. 세 사람의 숨바꼭질. 말하자면 김기덕의 경기장 안으로의 초대.

쉴새없는 대화, 사실은 자문자답

이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김기덕은 다시 자신의 영화 안의 인물들의 언어를 회복한다. 아니, 회복이라기보다는 말의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김기덕은 <나쁜 남자> 이후 급속하게 자기 영화에서 언어를 잃어갔다. 이를테면 목소리를 잃어버린 한기. 그런 다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거의 대사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사마리아>의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버지와 딸의 여행에서 둘은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 <빈 집>에서 집을 나온 아내와 소년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의 할아버지와 소녀는 (들으려는 우리를 제쳐놓고) 그들끼리만 귓속말을 한다. 하지만 <시간>은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끊임없이 말하고, 쉴새없이 호소하고, 하소연하고 또 하고, 몇 차례이고 비명을 지르고, 반복해서 설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은 대부분 일종의 자문자답에 가깝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김기덕은 일곱 번째 시나리오로 <시간>을 연출한 것 같다. 이 영화의 최종고는 ‘ver.7’이라고 되어 있다. 촬영은 성종우, 조명은 남한호, 음악은 노형우로 되어 있다. 기이한 조각들로 가득 찬 해변이 펼쳐진 섬은 모도에서 촬영되었다. 편집은 김기덕 그 자신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상영시간은 (타이틀 자막과 엔딩 타이틀 포함해서) 1시간36분이며, 1.85 비율로 찍었다. 이 시나리오의 앞에는 김기덕 자신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이 글의 줄 나누기와 바꾸기, 쉼표, 마침표, 칸 들여쓰기, 말줄임표는 모두 김기덕이 한 것이다). 아마도 <시간>에 대한 그 자신의 소개이자, 다짐이자, 결론일 이 글의 전문을 소개한다. 김기덕은 그의 시나리오 앞에 쓴 글을 종종 영화 마지막에 일종의 화두처럼 쓰곤 했다. 그러나 <시간>은 그냥 아무 자막없이 끝난다. 그래서 이 글을 여기에 옮긴다. 이 글은 <시간>이 촬영을 시작하기 전인 2006년 1월1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본능이다. 시간을 견디는 것은 인간이다. 반복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이 사랑이다. .....시간 안에서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이다.

여기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오랜 만남으로 사랑이 식는 것이 아니라 설렘이 식었고, 몸이 식었고, 열정이 식었고, 그리움이 식었다. 나는 이 연인에게 한 가지 문제를 던진다. 말도 안 되는......

김기덕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를 본 다음 그냥 인상적으로 떠오른 몇 가지 개인적인 첨언. 내 생각에 김기덕의 <시간>이 그의 가장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빈 집>이 더 좋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의 영화 중에서 가장 멜랑콜리하다. 특히 후반부. 여기서는 김기덕이 감정의 폭탄을 내게 던진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가 잊어버린 줄 알았던 <악어>와 <파란 대문> 그리고 <나쁜 남자>를 연상시키는 숏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혹은 <빈 집>에서의 유령연습의 되풀이(지우는 계속 <빈 집>의 화면을 컴퓨터 모니터에 올려놓고 포토숍 작업을 하고 있다). 사실 중반까지는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왜냐하면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뻔한데도 영화는 중언부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희가 세희의 종이가면을 쓰고 나온 다음부터 영화는 갑자기 거의 괴담에 가깝게 무시무시하게 진행된다. 대낮에 카페에 앉은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종이가면을 쓴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그러나 여기서 거의 숨이 멎을 만큼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런 다음 지우가 사라지고 그 뒤에 차례로 나타나는 남자들은 마치 지우의 사지를 이리저리 잘라놓은 다음 여기저기 그 일부가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는 여전히 보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보는 내내 감각을 긴장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위험할 정도로 자기 영화를 한쪽의 경계까지 몰고 간 다음 재빨리 그걸 반대 방향으로 끌고 와서 그 한계까지 밀고 간다. 그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혹시나 <빈 집>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던 <>의 매너리즘을 간단하게 바다에 던져버린 다음 여기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김기덕의 열네 번째 영화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다. 정말, 정말 이 사람은 점점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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