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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같은 웃음이 제공하는 즐거움,<불어라 봄바람>
■ Story

돈 좀 아끼겠다고 별 치사한 짓 다하는 좀팽이 소설가 선국(김승우)의 집에 다방레지 화정(김정은)이 세들어온다. 방만하고 시끄러운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은 원고 독촉에 시달리는 선국의 화만 돋울 뿐이다. 그러던 중 선국은 문하생(김경범)이 정리한 화정의 이야기를 자기 소설에 도용하기 시작한다. 이를 숨기려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선국은 조금씩 화정의 순수함에 마음을 열게 되고 화정도 선국에게 끌린다. 하지만 사실을 알게 된 화정이 결국 떠나자, 선국은 뒤늦게 사랑을 깨닫는다.

■ Review

배우들의 개인기와 시트콤적 문법에 기댄 코미디가 최근 한국 주류 영화판을 접수했다면, <불어라 봄바람>도 대표적인 사례로 꼽힐 수 있겠다. 장항준 감독의 <라이터를 켜라>에서 ‘어리버리’의 진가를 보여준 김승우는 감독과의 호흡을 연장하여 ‘좀팽이’로 확실하게 거듭난다. 전자는 어리석고 후자는 약았지만, 김승우의 탁월한 만화적 표정과 제스처 덕에 두 캐릭터는 장항준표 코믹 페르소나의 동일성을 획득한다. <가문의 영광>에서 내숭과 엽기를 오가던 김정은은 이번엔 사투리 대신 비속어를 ‘열라’ 남발하며 ‘졸라’ 단순발랄한 삼류인생을 여전히 사랑스럽게 연기해낸다. 그녀의 하이톤 억양은 순식간에 글썽대는 눈물만큼 과장되어 있지만, 바로 그 오버가 영화를 살린 건 그녀가 김정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요즘 영화의 감초로 자리한 황혼의 TV스타들과 개성적인 조연들이 저마다 장기자랑을 한다. 관객은 그저 인물군을 순회하며 시트콤처럼 제조된 웃음을 관람하면 된다.

영감이 고갈된 소설가가 자신과 정반대의 동거인에게서 아이디어를 훔치는 설정은 <스위밍 풀>과도 닮았지만, 당연히 창작의 딜레마 따위엔 관심없는 <불어라 봄바람>은 철저하게 로맨틱코미디의 아기자기한 디테일과 스토리에 집중한다. “어차피 사랑은 픽션”이라 냉소하던, 겨울을 내복으로 버티던 짠돌이 연애소설 작가가, 경멸해 마지않던 스쿠터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36도로까지 보일러를 틀어놓는 식이다. 경제적 지출과 심리적 유출이 동반 상승하는 그 훈기에 따라, 봉투 사기 아까워 쓰레기를 무단 투척해대는 오프닝의 겨울 골목은 한없이 화사하게 봄바람 부는 엔딩의 유채꽃밭으로 변전한다. 짝짓기를 보여주는 <동물의 왕국>은 결혼식 몽타주로 우화적 변주를 거치며, 소녀가장 돕기는 화정과 선국을 매개한다. 화정의 동물원 트라우마는 선국의 즉흥시로 어루만져진다.

이런 수미상응식 반복과 더불어 코믹멜로 특유의 만화적이고 동화적인 장치들이 현실에서 한발 붕 뜬 판타지를 영화적으로 창출한다. 손바닥을 펴고 질주하는 선국이나 한껏 전형화된 화정, 게이인 문하생과 바람둥이 친구의 모습은 그 과장된 상투성 자체로부터 영화를 시작하겠다는 감독의 전략과 다름없다. 인물간의 ‘삐리리’ 순간마다 울려퍼지는 <Crazy love>나 선국의 허둥댐에 실린 <헝가리무곡>, 멕시코 배경의 <베사메무초> 등은 코믹 MTV풍 막간극을 심심할 때마다 상연해댄다. <라이터를 켜라>에서 선보인, 실은 비극인데도 희극적으로 재현된 짧은 플래시백들 역시 한국영화에 고질적인 과거의 어둠을 적정 수준에서 걷어낸다. 현실과 영화 사이의 이런 계산된 스텝은 서민적인 현지 로케와 뽀시시한 세트 촬영 사이에서 소시민의 판타지를 따뜻하게 전하려는 감독의 마음씨와 닮아 있다.

하지만 훈훈한 영화라고 좋은 영화인 건 아니다. 정치인과 깡패, 시민들이 뒤엉킨 열차 안에서 소심한 예비군의 무구한 자아찾기를 통해 권력과 폭력을 재치있게 풍자한 <라이터를 켜라>에 비하면 같은 명령형 제목의 <불어라 봄바람>이 표방한 ‘대국민 선동성’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기반한 로맨틱코미디의 계층화합을 동화적으로 답습할 뿐이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폭소가 터지는 상황 대신 웃음을 재촉하는 억지 설정이 난무한다. 더 강화된 건 라이터 켜기가 상징하는 남성성 회복이 봄을 좋아했다는 선국 아버지의 바람기와도 연결되는 요상한 이데올로기다. 선국 모친은 저승에서 남편이 외도해도 따르겠다며 감상에 젖는데, 대관령 할머니 역시 비슷하다. 작가적 양심상 ‘무식하고 천박한’ 화정에 비해 하등 나을 바 없는 선국 또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준 비녀를 화정에게 대물림하는 것으로 쉽게 용서받는다. <불어라 봄바람>의 순풍은 고로 <바람난 가족>의 삭풍이 뒤집어놓은 가족주의를 가부장제에 대한 고민없이 되돌려놓는 복고풍에 가깝다.

웃기면 그만이라면 할 수 없지만, 뽀시시한 세트 없이도 로맨틱했던 <싱글즈> 같은 코미디가 상업영화를 한발씩 진보시키는 판에, <불어라 봄바람>은 결국 아들 몰래 전셋값을 챙긴 아버지가 그 돈과 더불어 여자를 아들에게 선물했다는 식의 ‘아버지의 사랑’(선국의 책 제목인)을 전하는 데 그친다. 하늘 같은 그 아버지는 우디 앨런의 <뉴욕 스토리>에서 하늘에 나타난 어머니와 달리, 아들과 토론하는 대신 그저 웃으며 가족을 내려다볼 뿐이다. 추석 특집 가족코미디가 될진 몰라도 <불어라 봄바람>의 봄바람이 시절착오적인 건 어쩔 수 없다.

:: 장항준 감독 인터뷰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영화가 실질적인 데뷔작이다.” 초여름 크랭크업을 앞두고 촬영현장에서 만난 장항준 감독은 거리낌없이 말했다. <라이터를 켜라>로 지난해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적지 않은 찬사를 얻어냈던 장 감독은 자신의 개성을 과잉에 가까울 만치 내세우고 있다. “철저한 캐릭터코미디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장 감독과의 일문일답.

전작과 달리 캐릭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라이터를 켜라>는 소동극이다.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긴박한 사건 안에서 가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이번엔 다양한 사랑의 유형을 통해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 죽은 아버지를 그리는 어머니의 사랑, 시골 노부부의 티격태격한 사랑, 노작가와 홍마담의 뒤늦은 사랑, 말하지 못하는 문하생의 동성애까지. 편집과정에서 잘랐는데 성지루씨가 연기한 신부 또한 신과 교감하고 있다. 우린 지금 사랑을 하고 있나, 자문하게 하는 영화였으면 한다.

처음 구상은 옴니버스영화였다고 들었다.

처제를 좋아한 형부 이야기, 학교에 부임한 선생이 날라리 여학생을 좋아하는 이야기, 남편의 불륜 증거를 잡아달라는 고용인과 사랑에 빠지는 심부름 센터 직원 이야기. 이렇게 세 이야기를 묶어서 가려고 했는데 펀딩도 어렵고, 캐스팅도 어려웠다.

선국이 감독을 너무 빼닮았다고 하지 않나. 꼭 인물이 아니더라도 영화에는 감독의 성향이 배어나온다. 김상진 감독 영화에서 진지한 인물은 좀 찾기 어렵지 않나.

인물들의 과장된 행위들이 좀 아쉬운 것도 있는데. 매듭 또한 엉성하고. 두 사람의 로맨틱코미디만을 보여줘선 이 영화를 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그건 나보다 더 잘할 사람들이 많다. 두 사람만 놓고 보면 이건 되게 후진 이야기다. 소설가와 다방레지의 로맨스라. 영락없는 80년대 신파영화다. 올드하지 않나. 집에서 우연히 동거하게 된다는 설정도 흔하고. 하지만, 그 위에 다양한 캐릭터를 더하고 판타지를 강조한다면 좀 색다르지 않나 싶었다. 그게 내가 잘할 수 있는 서비스다.

배우들에게 일부러 한톤 높은 과장 연기를 원했던 건가.

배우들이 오버한 게 아니라 애초 캐릭터가 좀 그렇다. 현장에서 오히려 톤을 죽였다. 애드리브 잘하기로 유명한 김정은씨도 이번엔 거의 안 했을 정도다. 머리 감다 말고 달려나가는 선국이 지나치게 희화화됐다고 할 수 있지만, 난 재밌으면서도 그 자체의 리얼한 감정이 묻어나길 바랐다. 물론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 내 깜냥이 부족한 건 알지만.

이영진 ant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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