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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그대 나에게만 잘해줘요
복길(칼럼니스트) 2023-08-10

나는 지금 카페베네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대학생이던 무렵, 카페베네는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곳을 ‘바퀴베네’라고 불렀고, ‘베네’가 이탈리아어로 ‘좋아’라는 의미인 것을 상기하며 괴로운 웃음을 지었다. 친하게 지냈던 선배 중 한명은 그곳을 그냥 ‘바퀴’라고 불렀는데, 늘 내가 좋아하던 딸기빙수를 사주는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바퀴로 와”라고 하면 나는 속으로 ‘베네’ 하며 고민도 없이 달려나갔다.

유적지에 오니 역시 이곳에 얽힌 추억들을 팔게 되는구나…. 하지만 추억할 것은 이름뿐, 이 공간은 내 기억 속 베네와 한 군데도 닮지 않았다. 커다란 벽시계도, 붙박이 화단에 심긴 가짜 식물도, 온갖 목재 무늬가 섞인 각진 가구도, 천장에 투박하게 설치된 레일 조명도 없다. 지독하게 오랫동안 유행한 인테리어였는데 지금은 아무리 외진 곳에 가더라도 이 양식을 보기가 힘들다. 나는 벽에 그려진 카페베네의 새 로고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모든 것이 바뀌었고, 내 추억들 또한 ‘EST. 2008’이라는 글자에 작게 가려져 있다. 로고 옆에 그려진 턱을 괸 고양이 그림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제부턴가 나타난 이 고양이는 간판, 창문, 벽, 파티션 등 가게의 중요한 위치마다 의미심장한 크기로 그려져 있었다. 너무 궁금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니 그 고양이의 이름은 ‘베네캣’. 성수동에 산다고 적혀 있다. 좋아하는 것은 산책이고 싫어하는 것은 산책을 못하는 것. (장난하나.)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카페가 리브랜딩을 하면서 로고에 고양이를 그려넣게 된 복잡한 사연인데, 대뜸 “저는 3살이고요” 하며 혀 짧은 소리를 하는 고양이의 등장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브랜드에 관련된 기사나 마케터 인터뷰 같은 것을 찾아볼까 생각했지만 관뒀다.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카페 구석에 앉아 지난주에 구입한 책을 펴서 읽으며, 내 글에 달린 ‘지적 사유가 부족하다’라는 리플을 떠올리고 있다. 하. 어떻게 하면 이 책처럼 넓은 지식과 깊은 통찰 그리고 담백한 글쓰기 기술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한번도 보지 못한 표현으로 인류 보편의 철학을 인용해 특별한 관점에 도달하는 이 수많은 문장을 보시라…. 책을 덮었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하면 타인의 글과 말을 나의 글 속에서 멋지게 인용할 수 있을까!”

나는 내 글에 얕은 허세라도 부리기 위해 탁월한 구절들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어렴풋이 떠올릴 때마다 멜로디가 생기고 만다. 전부 노래 가사인 것이다. 지겹기만 한 내 고민에 등을 지고, 하하하하 다신 날 비웃지 못하도록 내 말을 단단히 묶어줄 강력하고도 서정적인 인용구가 내 머릿속엔 없는 것이다….멋진 말을 생각하는 동안 계속 떠오르는 문장들은 왠지 모두 2NE1의 노래였다. 유 갓 더 파이어, 나의 가슴을 쿵. 쿵. 쿵 하면 공민지의 팡팡 뛰던 춤이 내 몸으로 전해지는 듯했고, 건드리면 감당 못해 암 핫, 핫, 핫, 핫 파이어, 하면 CL이 내 영혼을 건드려 그 중독적인 발음과 특유의 리듬감을 재현해냈다. 롤리, 롤리, 롤리팝, 달콤하게 다가와 하며 산다라 박의 높이 묶은 야자수 머리가 오아시스처럼 눈앞에 아른거리기 일쑤였다. 박봄의 솔로곡 <YOU & I>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 노래의 모든 구절을 수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녕이란 말은 네버, 내게 이 세상은 오직 너 하나기에’라는 대목을 힘주어 부르는 박봄을 떠올리면 정말 죽을 것 같을 때도 반짝 힘을 낼 수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 있는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 역시도 그들의 곡 <I Love You>였다.

2NE1은 무엇을 말하든 이미 슬픔을 이해하는 듯한 태도로 노래한다. <I Love You>도 세련된 비트와 독특한 구성보다 노래 전반에 깔린 묘한 쓸쓸함에 먼저 마음이 가닿는다.

‘그뎨 나예계망 잘혜줘용.’ <I Love You>의 가사는 외계어 블로거 ‘롑흔리나’체를 써야 원곡에 가깝게 부를 수 있다. 발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노래 자체가 미지의 외계 행성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CL이 내레이션으로 나지막한 경고를 외치고 나면, 가느다란 멜로디에 나긋나긋한 공민지의 보컬이 유혹하듯 감긴다. 간드러지지만 묘하게 엇박자를 타는 도입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면, 산다라 박이 갑자기 무거운 비트를 쿵, 쿵, 내리찧으며 다가와 침입자를 혼낸다. 힘차게 달려 박봄이 자신만의 언어로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는 깊은 계곡을 지난다. 그렇게 다다른 클라이맥스는 전부 가성으로만 이루어진 고요하고 완만한 산맥이다.

나는 2NE1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이건 사랑과 그리움을 대충 뭉뚱그려낸 응원의 표현이나 순진한 바람이 아니다. 정말로 나는 2NE1이 영원할 줄 알았다. 아이돌 그룹 안과 밖에 맞물린 수많은 이해관계를 생각하면 ‘영원’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부질없는 개념인가 싶지만, 적어도 2NE1에게는 그게 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래 속에서 신이자 마녀이자 전사가 되는 불멸의 존재였고, 그래서 어떤 마음을 노래해도 모두 신화로 보존되리라 생각했다. “박봄의 신비로운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겁이 많은 전사 산다라가 모험에 나서고, 인류의 ‘미래’인 소녀 공민지가 힘을 보태면 마침내 이 세계의 왕인 CL을 깨운다”와 같은 어디서 들어봤을 법한 전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스스로 깨우치게 된 최초의 ‘K팝 세계관’이었다.

벽시계가 없는 카페베네에 앉아서 하염없이 2NE1 생각을 했다. ‘멋진 널 위해 에브리 데이 사랑 노래를 불러’준다던 박봄의 목소리를. 영원할 거라 여겼던 두 세계는 이제 흔적만 남은 옛터가 되었다. 누군가는 지나간 과거를 붙잡는 것은 추한 일이며, 사용한 흔적이 없는 새것의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할 테다. 그러나 나는 덤덤할 수 없다. 과거를 소환하는 노래 한 소절에도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프면 왠지 엄마 생각이 난다. 나는 바뀐 카페베네 로고 하나를 보고도 이렇게 세계가 무너진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는데 자신의 강산이 수십번 갈아엎어진 엄마는, 할머니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셨던 건지. 아, 오늘도 깊어지는 것은 사유가 아닌 효심뿐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