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꿈을 꾼 것 같다. 지난 4년간 다큐멘터리 13편을 취재·연출했다. 이들 중에는 세상에 내놓을 정도는 된다고 여기는 것도 있고 그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경우도 있다. 칸영화제 취재기처럼 한달 만에 급조한 것도 있고 오랜 기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인류의 위기를 걱정한 특집 다큐멘터리도 있다. 모두 초저예산 독립영화 수준의 제작비와 가차 없는 제작 기간 속에 낳은 자식 같은 아이들이다. 산고는 대개 화면엔 드러나지 않는다. 난관의 시작은 카메라 앞에 등장인물을 모시는 과정부터다.
주제에 맞는 인물을 찾더라도 대중 앞에 나서겠다는 이는 몹시 드물다.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분을 찾아내더라도, 제작 기간 내 서로 일정이 맞지 않기 일쑤다. 세상 모든 영상 제작자에게 코로나19는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제약을 가져왔다. 무슨 수를 쓰든 그분을 만나야 해. 어떻게든 만나서 그 말 한마디를 받아야 한다. 가까스로 카메라 앞에 세웠는데, 전화로 나눴던 말씀을 촬영 중에는 왜 안 하는 것인가. 만나야 할 사람이 비판 대상이라면 잘해야 문전박대, 심하면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마약이 횡행하는 샌프란시스코 우범지대를 촬영하던 중 칼 든 노숙인이 달려든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취재 지역 주민이 격하게 호응하며 감정 표현을 해주신 적도 있다. 주제와 맞아떨어진다. 순식간이었다. 이때 연출자는 거미집을 쳐놓고 먹이를 기다려온 거미와 같은 심정이라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다급하게 촬영자에게 확인한다. “촬영 됐지? 다 잘 찍힌 거지?” 촬영자의 손 빠른 대응이 손 떨릴 만큼 고맙다.
연출자의 마음을 아는 연출자의 마음
현장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음 고비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 장면 뒤에 매끈하게 붙는 영상이 분명히 있을 줄 알았다. 어디로 사라졌지. 이 장면에 맞는 효과음이 데이터베이스에 있을 줄 알았다. 왜 없지. 재촬영을 나가야 하나. 원하는 장면 몇컷만 더 있으면 훨씬 좋아질 수 있어. 다시 찍어야 해. 제작진의 원성이 들리는 듯하다. 재촬영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아쉬움은 끊이지 않는다. 한컷의 디테일이 작품을 망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편집 리듬에 맞게 배경음악을 작곡할 여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넷플릭스 다큐에서 봤던 CG를 흉내만이라도 낼 제작비가 있다면….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다.
연출자는 한정된 자원과 시간 내에 필요한 걸 만들어 내놔야 한다. 초저예산 작업에 걸맞게도 사전 취재와 자료 학습, 기획과 섭외, 행정문서 기안, 비용 집행과 영수증 처리, 콘티와 원고, 현장 취재, 그래픽 설계와 내레이션 더빙까지를 도맡곤 한다. 촬영, 편집, CG, 음악·음향, 사운드 믹싱까지 각 분야 감독님들과 함께 지난한 선택의 순간들을 거쳐야만 한다. AD들의 헌신적인 도움은 그저 눈물겨울 따름이다. 이 세상에 단 한번뿐인 현장 앞에서 연출자는 촬영자와 함께 매 순간 애가 탄다. 주제 의식은 물론 숏 하나하나에 대한 인식까지 연출자와 편집자가 동기화돼야 편집본에 설득력이 붙는다. 2시간 동안 눈물과 함께 털어놓은 한 인물의 고백을 2분 분량으로 편집해야 할 때도 있었다. 모니터 앞에서 그분의 한마디라도 더 집어넣으려다 눈물만 쏟아낸 새벽들이 잊히지 않는다. 코로나19가 끝날 즈음, 감당 못할 번아웃 증상을 겪은 나는 결국 전문의를 찾아야 했다.
<거미집>을 보며 이입하다 못해 가슴 한가운데가 아려오는 순간이 있었다. “다 찍혔지? 전부 다, 다 잘 찍혔지?” 감독 김열(송강호)이 촬영기사를 붙들고 다그친다.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극 종반 극중극의 하이라이트를 촬영한 롱테이크에서 오케이 콜을 외친 직후다. 테이크는 5분을 넘겼다. 필름에 제대로 담겼는지가, 사람들이 불길에 휩싸인 사태만큼이나 시급하다. 만에 하나 저 장면이 기술적인 문제로 촬영되지 않았다면 내 심장도 내려앉았으리라. 김열이 소동 끝에 촬영을 마친 뒤 감독 김지운은 이후 상황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열의 롱테이크에 어깨라도 두드리듯. 세트장을 나선 배우들과 제작진이 각자 갈 곳으로 해산하는 장면을 끊지 않고 촬영한다. 동선에 맞춰 재빨리 카메라 방향을 돌리고 인물의 몸으로 화면을 가리면서 테이크를 이어간다. 영락없이 1950년대 후반 이후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앞다퉈 활용한 당대 최신 테크닉이다(거친 구분이지만 당시 미국의 영화 선구자들은 주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방편으로써 롱테이크를, 프랑스 누벨바그 기수들은 주로 이미지들의 조합 또는 충돌을 운동성으로 대체·재구성해 낯선 사유를 이끌어내자는 뜻으로 플랑 세캉스(Plan Sequence)를 사용했다. 김열은 “플랑 세캉스”를 말하면서 히치콕식 서스펜스를 좇는 듯 보인다). 이 테이크의 마지막 피사체는 감독 의자에 앉은 김열이다. 그가 갈 곳은 다름 아닌 촬영 현장이라는 듯. 코로나19를 어렵게 지내온 감독은, 그렇게 극 중 감독의 마음을 살펴 보여준다. 연출자의 마음을 아는 마음이라면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극 중 극 중 극중극
그런 심정으로 시도한 김지운의 선택이 영화 속 영화다. 히치콕의 뉘앙스와 김기영 감독의 장면들을 극중극에 집어넣은 다음, 자신이 창조한 50년 전 한국영화 감독에게 응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올해 한국영화가 기록할 만한 복층 구조다. 여기 우리가 보는 <거미집>이 있고 그 안에 김열이 촬영 중인 ‘거미집’이 있으며 그 안에 <하녀>(1960)가 있고 <화녀>(1971)도 있다. 극중극의 도입부에 나오는 방직공장이나 성당 합창 장면 같은 것들은 <하녀>에서, 종반부 오컬트 호러풍의 장면들은 <화녀>에서 주로 가져온 것들이다. 그런데 김기영은, 당대 정서 등을 고려해 <하녀>의 파격적인 이야기가 인물의 상상이었다는 듯 액자 구성을 취하곤 했다. 그러니까 김지운 영화 속 김열 영화 속 김기영 영화 속의 극중극이, 2023년 우리에게 다가온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미집>에는 영화 속의 영화 속의 영화 속 영화가 있다. 영화가 꿈이라면 <거미집>은 4중의 꿈이다.
이게 말장난이 아닌 이유를 좀더 얘기해보자. <거미집>의 시작은 김열의 꿈이다. 깨어보니 자신의 작업실이 있는 한옥식 주택이다. 디귿자형 건물의 품 안에 오랜 세월 다져진 흙마당이 정갈하다. 이곳은 1998년 김기영 감독이 부인과 함께 의문의 화재로 숨진 명륜동 자택을 본뜬 것이다. 유튜브에서 ‘KBS 김기영 다큐’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김기영은 유서를 남긴 채 알 수 없는 죽음을 택했다. <거미집>에서 김열의 스승인 신상호 감독(정우성)은 불길 속 죽음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스러져갔다. 김열은 이 장면을 자신의 영화에 고스란히 재현한다. 이를 촬영하는 <거미집> 세트 역시 불길에 휩싸인다. 극의 전환점은 김열의 판타지다. 신 감독이 되살아나 가르침을 전한다. 극중극의 주택에서 2층은 음모와 배신, 반전의 무대이며 극 중 촬영 세트장의 2층은 전략과 감금, 비밀을 품은 공간이다. 한국 표현주의 영화를 선도한 김기영을, 한국 장르영화의 한획이라 할 수 있는 김지운은 이렇게 오마주했다. 꿈과 환상과 현실이 서로를 투영하고 이것이 영화는 물론 영화 속 영화에 중첩된다.
<거미집>의 끝은 김열의 얼굴이다. <하녀>의 마지막 장면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주인공 동식(김진규)의 얼굴이었다. <하녀>가 그랬던 것처럼 <거미집>도 모든 게 감독의 상상인 건 아닐까. 걸작을 완성해 동료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감독의 꿈. 이것이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 송강호의 묘한 표정에 담긴다. 그저 김열만의 꿈일까. 김열은 성공적인 데뷔작 이후 삼류 감독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신경증에 시달려왔다. 김기영은 <충녀>(1972) 이후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다 90년대 후반 일각의 재발견과 더불어 또 다른 불안에 휩싸였을 터였다. 그가 사망한 해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김지운은 20년 뒤 <인랑>으로 외면받았고 영화계의 암흑기인 코로나19를 지냈다. 자, <거미집>은 누구의 꿈인가. 김기영의 현실 바깥을 김열의 처지가 둘러싸고, 그 바깥을 김지운이 감싸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개봉 중인 <거미집>은 현실 밖의 현실 밖 현실이다.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지점이 있다. <거미집>은 그 복층의 계단을 흐리는 방식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영화의 관객은 얼핏 극중극을 촬영하는 과정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실은 영화가 착각을 유도하고 있다. 극 중 흑백 장면의 한 시퀀스가 끝나면 김열이 “컷, 오케이”를 외치고 컬러 화면으로 바뀐다. 이내 스탭과 촬영 세트도 보인다. 아하, 영화를 촬영하던 거였군.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촬영 중의 그것이 아닌 완벽하게 편집된 화면이다. 다양한 각도에 놓였을 카메라, 촬영 장소가 바뀌며 이동하는 숏과 숏 사이 준비 작업들이 말끔히 제거돼 있다. 깨끗한 후시녹음, 70년대 정서를 살리면서도 낡은 느낌 없는 음악과 음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는 건 솜씨 좋게 후반작업한 이후의 편집본이다. 즉 이 영화의 흑백 화면들은 촬영 장면이 아니라 영화 장면이다. 일부 숲속 시퀀스처럼 촬영 중이라는 정보가 중요한 대목에선 컬러 화면을 그대로 써 정확하게 이를 알리고 있다. 애초에 촬영 과정만을 보여줄 것이었다면 흑백과 컬러로 나눌 이유도 없었다. <거미집>의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 ‘흑백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물감 없이 영화 속 영화에 진입하게 해주는 한편 그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덕분에 관객은 평소 관람 습관대로 호세(오정세)와 민자(임수정), 유림(정수정)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김열의 촬영장과 김열의 영화, 어느 쪽이 이 영화의 실체인가. 이제 모사와 가정으로서 영화의 본질을 말할 차례다.
영화라는 가정법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 내가 만약이 되어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 (중략) 그럴듯함과/ 그러지 못함과/ 그럴 수밖에 없음에 대하여.(김소연, <2층 관객 라운지> 중)
본질적으로 모든 픽션은 가정(假定)에서 출발한다. 일단 가짜로 정하고 보자는 얘기다. 한 남자가 외도를 벌인다고 치자. 외도 상대가 집에 들어와 아이를 갖고 주인 행세를 한다면? 남자의 아내는 버려지듯 집을 떠날까, 치밀한 복수극을 꾸밀까. 감독은 수많은 가정들 속에 허우적대고 또 길을 찾는다. 미정인 가짜와 결정한 가짜들 틈에서 인생사에 숨겨진 진짜를 찾아 헤맨다. 거친 발췌지만 김소연의 시는 마치 상상과 촬영장 사이를 오가는 김열의 심정처럼 보인다. 이 영화의 엔딩을 보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생각이 돼버린 감독. 그에게 진짜란 어디에 있을까. <거미집>은 거짓을 품은 데뷔 이후 가정과 모사를 전제로 하는 영화에서 진짜를 건지려는 김열의 욕망을 따라간다. 그 경로에 수시로 고개를 드는 것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오가는 영화인들의 본질적 고민이다.
<거미집>을 본 이라면 다음 대사들에서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집에 철창도 갖다놨”다는 형사 전문 배우의 “메소드 연기” 연습을 보며 “이상하잖아”라고 핀잔하는 김열이지만, 전쟁 영웅 역할을 달라는 배우에게 “군대도 안 갔다온 놈이 무슨 전쟁 영웅”이냐며 연기와 실제의 접점이 없다고 타박한다. “가짜 총”을 든 배우는 “진짜 수염”을 길렀는데, 김열은 그의 대역 연기에 빠져들어 가짜 수염을 붙인 채 이렇게 외친다.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시나리오가 너무 가혹”하다는 배우의 하소연에 감독은 “(허구일 뿐인) 시나리오가 가혹한 게 어딨어”라며 의아해하지만, 유림이 임신한 사실과 허구 속 설정 사이를 오가는 관객으로선 웃음을 참기 어렵다. “놀란 표정 너무 좋아, 진짜 같았어”-“나 진짜 놀란 거라고요!”-“진짜 거미를 쓰면 어떡해!”와 같은 말들로 이어지는 코미디는, 호세와 유림의 극 중 관계와 극중극 속 설정을 중첩시키며 연기와 현실의 경계를 허문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의 앙상블이 중요하고 주효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짜 같은 리허설과 진짜를 욕망하는 대역 미도(전여빈)의 연기, 그리고 막장으로 치닫는 극중극의 비밀과 그 직후 밝혀지는 백 회장(장영남)과 김열의 진실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문다. 이렇게 <거미집>은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근본적인 질문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김열의 대사처럼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욕하고 비판”하는 평론가들의 선입견과 달리, 촬영 현장에서 ‘진짜’가 나오는 건 예기치 않은 결과인 경우가 허다하다. 직관적으로 살짝 올려서 한결 설득력 있어진 배우의 입꼬리, 때마침 프레임 한편으로부터 찾아든 아스라한 바람, 이 정조를 몇 곱절로 살려준 음향감독의 감각…. 뭇 기자들은 이런 것들에 무의식적으로 매료돼놓고는 형식의 힘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배경지식을 작품 내용에다 풀칠해 이어붙인 다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품”이라는 등의 평을 내놓곤 한다. <거미집> 초반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평론가들의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거야”라는 대사는, 이처럼 창작자가 자주 겪는 평자들의 접착제 사용 관습에 조소를 전하는 듯 보인다. 후반부 롱테이크를 놓고 “빨갱이들 불에 타는 걸 길게 보여주자는 거지”라는 문공부 국장의 말은 이같은 가짜 해몽의 연장이다.
코로나19 이후 드물었던 위안
요컨대 한편의 영화에서 진짜란, 계획과 우연이 운 좋게 이어지는 가운데 감독과 제작진의 진심 어린 표류가 우리 삶에 가닿을 때가 아니겠냐고 김열은 전하고 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예술가 김열이 때론 타협하고 종종 맞서면서 우당탕탕 끌고 가는 영화 현장이 그 자체로 진짜일 수 있다고, 5년 만에 복귀한 김지운은 체온을 높여 말하고 있다. 거미가 제아무리 탄탄한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아도 먹이가 날아들지 않으면 건질 것은 없다.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유례없는 성취를 거둔 와중에도 영화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 밖과 안을 냉정하게 보게 됐다. 제작비 200억~300억원씩을 가져다 쓰면서도 낯선 시도를 하는 데는 게을러진 여러 중견감독들과 지역·독립영화 지원 예산을 반토막낸 정부를 목도하게 된 2023년. 영화 자체에서 진심을 찾는 상업영화가 아직은 남아 있다는 사실에 영화 팬은 드물게 위안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