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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

<너와 나>에 관한 호평은 대부분 이 영화가 수행하는 애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4·16 세월호 참사를 다루면서 착취적 묘사를 배제하고 섬세하고 시적인 터치로 두 인물의 되돌릴 수 없는 하루를 그려냈다는 견해가 자주 보인다. <너와 나>를 환대하는 이런 평가의 언어는 영화의 연출자인 조현철이 반복해서 언급한 “참사를 영화적 스펙터클로 이용하는 데 윤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는 말과 맞물리며 영화가 선택한 은유적이고 우회적인 구조를 정당화한다. 나는 조현철이 꺼내든 그 말의 진심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이 무엇도 설명하지 않는 공허한 진술이며, 다소 과격하게 반문하자면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정작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그는 ‘영화적 스펙터클’이 무엇인지도, ‘윤리적 거부감’이 무엇인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 관한 적잖은 비평은 이와 같은 연출자의 ‘의도’를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영화가 성취했다고 가장한 것과 영화가 실제로 담아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 영화가 시도하는 애도의 방식에 크고 작은 오류가 존재한다는 윤리적 접근에는 관심이 없다. 이를테면 <너와 나>에 묘사되는 사회적 재난의 기록이 오직 여고생들의 순수한 사랑과 슬픔으로만 한정되어 있다는 식의 비판은 이 글이 말하려는 바가 아니다. 이 영화가 4·16 참사와 희생자를 다루는 방식이, 그 자체로 영화적 성취를 담보하지 않듯이 그 자체로 금기시되어야 하는 것 또한 아니다. 한편의 영화는 희생자와 생존자를 어떤 모습으로든 묘사할 수 있다. 문제는 윤리적 관점이 아니다. 이 영화는 미적으로 파산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라는 미적 파산

<너와 나>

<너와 나>는 넘칠 만큼 치장되어 있다. 영화를 둘러싸고 언급되던 예리한 윤리적 의제들이 무색할 만큼, 이 영화의 화면은 연출자가 가하는 과도한 치장으로 인해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첫 장면을 되짚어본다. 카메라는 학교 운동장을 비추다 교실 안으로 시선을 옮긴다. 천천히 움직이던 카메라는 교실에 걸린 거울을 비추고 잠에서 깨어난 세미(박혜수)의 뒷모습이 뒤늦게 거울 속에 나타난다. 이 장면은 연출이 초래한 영화의 상태를 낱낱이 드러낸다. 움직임의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화면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해진 위치에 어설프게 박제된 피사체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달리 말할 수 없다. 이 장면은 정교하게 조직되지 않았고, 아름답지도 않다. 추하다. 그런데 한 가지 착시를 준다. 마치 무언가 다른 의미가 숨어 있으며 그것이 영화의 다른 부분에서 밝혀질 거라는 착각을 건넨다. <너와 나>를 보는 경험은 계속해서 이런 착각에 사로잡히는 기분과 닮았다.

첫 장면에 드러난 대로, <너와 나>에서 조현철은 영화의 모든 순간마다 이 거울이, 저 꼬마 아이들이, 여기 버려진 장난감과 저기 나타난 강아지가 의미심장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과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다(그것이 어떤 의미를 발산하는지 해석하려 드는 건 비평의 몫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섬세’하다고 전제하는 모든 감상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지는데, 조현철이 서사를 전개하는 상황과 상관없는 비유와 상징의 사물을 대단히 폭력적으로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위태롭게 식탁에 걸쳐 있는 물컵, 한입 베어 문 사과, 정해진 시점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동물, 멈춰진 시계와 같은 화면 안의 요소들은 상황의 자연스러움을 훼손하는 의식적인 ‘의도’로 늘어서 있으며 그것들이 심오한 비밀을 간직하기라도 한 것처럼 화면에 돌출되어 있다. 이를 이미지라고도, 숏이라고도, 영화적 연출이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이야기로부터 동떨어져 사물의 물질성을 추상화하고 오직 의미의 생산을 위한 손쉬운 유혹에 붙잡힌 화면은 영화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하다.

<너와 나>의 미적 장치들은 희생자와 남겨진 생존자를 위무하는 윤리적 형식이 아니라 4·16 참사와 애도의 절차라는 소재가 부여한 부담감에 짓눌린 왜소한 표현이자 경직된 의도의 산물이다. 영화 후반부에 잃어버린 강아지가 끝내 운동장에 다시 모습을 보일 때, 영화에 출현하는 수많은 요소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에 멈춰 서는 이 영화의 방법론은 오직 의미의 통제를 향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너와 나>에서 화면의 동작과 몸짓은 이야기의 구간마다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대신 피사체를 나열하는 수준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그 활력의 결여를 감추기 위해 철저히 상징적으로 읽히도록 유도되어 있다. 여기서 영화로서의 활동 또한 멈춘다.

‘리얼’한 연기의 부작용

<리댁티드>

좀 이상한 말이지만, <너와 나>의 또 다른 실패는 연기를 운영하는 역량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두 인물의 연기를 빌려 구축되는 관계 그리기에 있다. 제목에서 일러주듯이 이 영화는 ‘너와 나’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 4·16 참사를 지나친 ‘우리’라는 단위로 나아가게 하는 기획이다. 하지만 여고생들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면모를 과장해서 재현해낸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연기는 타인에게로 향하는 관계의 한 방식을 그리는 대신, 그들만이 공유하고 소통하는 자족적인 리얼함으로 비칠 뿐이다.

최근 번역된 매혹적인 영화 강연집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적 리얼함에 관한 독특한 주장을 내비친다. 그는 캠코더와 CCTV 화면을 활용해 현실감을 강조한 브라이언 드 팔마의 <리댁티드>의 장면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리댁티드>는 그저 ‘리얼’하게 하는 데만 그치고 말았지요. 이 노골적인 리얼함 탓에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심히 객관성을 결여하게 된 거죠.” 이라크 전쟁의 군인들을 다룬 영화와 4·16 참사 전날의 여고생들을 담아낸 영화 사이의 거리감은 무시하고, 노골적인 리얼함으로 인해 영화가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됐다는 진술을 빌려와보자. 현실에서 곧바로 채집해서 재현한 연기의 형태는 그 노골적인 리얼함으로 인해 사실적인 성취를 획득한다기보다 영화를 지루하고 허술한 주관성의 세계에 머물게 한다. 세미의 내레이션 위로, 수많은 고등학생을 이어 붙이는 몽타주가 사용됐음에도 이 영화가 세미와 하은(김시은)이라는 두 사람 바깥으로 향하는 것을 어색해하는 영화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 속 여고생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똘이아범’(박정민)의 연기는, 이 영화가 바깥과 교통할 수 없는 허술한 주관성의 연기 양식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다.

<너와 나>는 오늘날 한국 독립영화의 경향 아래서 생산될 수 있는 추한 조합의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구체성이 사라진 흐릿한 화면에 피사체를 가두고 느슨한 상징의 도구로 삼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물컵이, 사과가, 주인 잃은 동물이 화면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지각한다. 그리고 곧장 그것이 왜 화면에 있는지 캐묻는다. 관객은 영화를 바라보는 대신 자꾸만 나타나는 화면의 효과와 의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는 조현철의 다짐과 무관하게 하나의 스펙터클을, 영화적 경험의 감각성을 지적 계산과 의미 작용에 내맡겨버리는 추한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기제가 된다. 그 추한 화면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영화가 시도하는 위로와 애도에 조응하는 형식이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다시 반복하지만 비평의 몫이 아니다.

그러니 <너와 나>를 포함해 오늘날 적잖은 한국 독립영화들이 매몰되어 있는 몇 가지 습관에 깊은 의심이 든다. 왜 독립영화는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 같은 당연한 명제를 그럴듯한 주제인 것처럼 반복해서 설파할까? 왜 독립영화는 공감과 위안이라는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감정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걸까? 왜 독립영화는 주인공과 연대하거나 적대하는 것 외에 다른 관계의 양상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물론 인간은 복합적이며 한 가지 기준과 관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공감과 위안은 중요하다. 물론 연대와 적대만큼 강렬한 서사적 도구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이런 문제들을 말하면서 그에 수반하는 형식적 장치를 설정하지 못한 채 겉면을 피상적으로 반복하기만 한다면, 이는 관계의 복합적인 면모에 깊이 개입하는 성취로 향하는 대신 서로를 훼손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에 속하고 싶다는 수동적 의지의 표명이 된다.

세미가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에게 거듭해서 “사랑해”를 속삭이는 순간이란, 달리 말해 그런 원론적이고 피상적인 관계의 언어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영화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 영화적 대화가 기능을 멈춘 미적 파국이 그려져 있다. 많은 인물과 사물과 상황이 묘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엔 어떤 자극도 없다. 마치 영화라기보다는 ‘한국 독립영화’를 흉내낸 무엇을 본 것처럼.

<괴인>이라는 원심력

<괴인>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또 한편의 한국 독립영화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이정홍의 <괴인>은 <너와 나>의 반대 지점에 있는 영화일 것이다. 아니, 특정한 ‘지점’을 지시해서 말하는 습관은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 것이다. 목수 기홍(박기홍)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끊임없이 주인공의 시선과 인지와 감각의 바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앞서 기술한 한국 독립영화의 외형적 특징에 이골이 난 이들이라면 계속해서 주어진 자리를 이탈하고 모양을 일그러뜨리는 모험적 영화의 한 사례로 <괴인>을 기억할 만하다.

영화의 첫 장면, 리모델링 작업 중인 피아노 학원의 계단을 오르던 기홍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른다. 바로 다음 순간 그는 뒤따라오던 후배에게 장난임을 밝히고 크게 웃는다. 인물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주는 도입부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무척 기묘한 인상으로 남는다. 단순히 장면에 묘사된 상황과 행동이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껄껄거리며 웃는 이 장면 이후로 기홍은 한번도 놀라거나 웃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는 놀라워하거나 웃지 않는다. 놀라지도 웃을 수도 없다. 그의 눈앞에 분명히 공감할 수도, 적대할 수도, 놀랄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유형의 인간들이 침입하기 때문이다. 집주인 부부인 정환(안주민)과 현정(전길), 피아노 학원 창문으로 나오다 그의 차를 망가뜨린 하나(이기쁨)는 기홍과 어떤 관계를 맺는다고 분명히 기술할 수 없는 애매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기홍은 규정되지 않고 뻗어가는 회로에 갇힌다. <괴인>은 한 사람의 주인공을 기반으로 그의 주관적 세계에 주목하는 동시대 영화들과 반대로 움직인다. 한 사람의 주인공은 다른 곳에 침입하기 위한 매개이며 그곳에 머물던 타인들은 주인공과 매개하며 또 다른 자아의 면모를 드러낸다.

기홍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밤을 지나친다. 영화가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새벽에 방에 돌아온 기홍은 한번 더 계단을 오른다. 자신의 방에는 하나가 잠들어 있다. ‘분명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간 하나는 왜 내 방에 잠들어 있는 걸까?’ ‘왜 정환은 하나를 잡는 일에 집착하고 끝내 그녀를 이 집에까지 끌어들인 걸까?’ ‘왜 현정은 내가 머무는 이 방을 월세로 내놓은 걸까? 그리하여 나는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도입부의 갑작스러운 비명과 웃음처럼 그 사이를 연결하는 추론은 증발된다. 계단을 오르며 알 수 없는 자리에 도착한 기홍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남는 건 일반적인 의미와 관계 맺기의 방법으로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하고 두꺼운 현실의 한 표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의 반응을 지켜봤다. 그는 이미 소스라치게 놀라고 껄껄 웃었다. <괴인>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에서 던져진 감각의 충격을 보존하면서 어느 쪽으로도 결론지을 수 없는 긴장을 폭발시킨다. 이 고요한 폭발을 옹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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