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엔딩 장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에세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읽은 한 문장이 떠올랐다. 그는 <하나>의 각본 초고에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두 소년이 활짝 웃으며 내달리는 모습이 ‘풍성한 삶’ 그 자체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 소년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벅차오를 수 있다니, 참 신기한 경험 아닌가. 두 소년은 어떻게 이 풍성한 삶 속으로 풍덩 하고 빠져들 수 있었을까? 그 수많은 괴물들을 물리치고 말이다.
괴물이라는 재난, 재난이라는 괴물
화재와 함께 시작하는 <괴물>은 불타는 건물 위로 ‘괴물’이라는 영화 타이틀을 새긴다.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동일한 사건이 각 인물의 시점으로 되돌아왔음을 알리는 하나의 지표다. 그리고 각 인물의 관점에서 진행된 동일한 사건의 끝을 알리는 태풍이라는 재난이 또 하나의 지표로 자리한다. 그러니까 <괴물>은 재난으로 이야기의 문을 여닫는다. <괴물>은 화재 장면으로 되돌아올 때마다 그 현장에 점점 가까이 다가서는데, 이는 <괴물>이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를 드러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미나토의 마음에 닥쳐온 재난에 접근하는 영화가 바로 <괴물>이다. 즉, 관객은 두 소년이 자신의 삶이 화재로 연소될 위기(또는 우리의 삶을 재난으로 이끄는 그 ‘무엇’)를 이겨내고, 그 풍성함 속으로 풍덩 하고 빠져드는 과정을 목격한다. 우리는 영화의 타이틀 장면을 그 자체로 읽어야 한다, ‘괴물’은 바로 이 ‘마음의 재난’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재난을 가져온 것일까?
만약 두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전부였다면, <괴물>은 3부에 해당하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늘리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괴물>은 동일한 타임라인의 사건을 사오리, 호리, 그리고 미나토의 시선을 연이어 경유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히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더도 덜도 말고 사오리를 보라. 사오리는 (세상을 떠난 아이의 아빠처럼) 미나토에게 어떤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미나토가 난간에 매달리자 조심하라고 가볍게 주의를 주는 사오리의 첫 모습은 다음날 미나토에게 하얀 선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미나토가 머리를 자른 날에는 아들을 괴롭히는 범인으로 다짜고짜 ‘가마타’를 지목한다. 차에서 뛰어내린 미나토와 병원에 다녀오던 밤에도 아이들이 밥을 늦게 먹는다고 놀리는 거냐며 다시 한번 가마타의 이름을 끄집어낸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상담실에 있다던 미나토가 혹시나 건물에서 뛰어내리지 않았을까 하며 불안에 휩싸인 장면이다. 미나토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오리는 털썩 주저앉으며 혼잣말로 속삭인다. “그만 좀 해”라고. 사오리에겐 아이의 아빠처럼 미나토가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된다. 그녀의 과잉된 분노, 그러니까 미나토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과 선생들에게 인간이 아니라고 소리치고, 교장 선생의 상처를 헤집는 모습은 이러한 불안의 결과다. 결국, 그녀의 불안이 호리 선생을 괴물로 몰아간다.
어쩌면 <괴물>이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맥거핀이 아닐까? <괴물>이라는 제목은 영화 속 괴물을 찾는 일이 영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문처럼 느껴지도록 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괴물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괴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우리를 마음의 재난으로 몰아가는가, 라는 질문.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괴물(또는 가해자)로 지목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괴물>은 피해자가 어느덧 가해자가 되는 순간, 그리고 가해자인 줄 알았던 이들이 또 다른 피해자로 드러나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교차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괴물>이 3부만의 영화가 아닌 1부와 2부를 경유해야 했던 이유다. 사오리나 호리와 함께 누가 괴물인지 찾아 서사 곳곳을 헤매는 것은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이자연 기자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저 빠르고 간단하게 선악 관계만 살피려는 관객의 조급함은 영화가 의도한 관객의 실수이다. 그리고 관객은 자신의 실수를 기점으로 <괴물>에 각기 다른 시점의 3부 구성이 필요했던 이유를 알게 된다.”(<씨네21> 1433호, ‘다른 이의 시선을 빌려야 했던 이유는’, <괴물> 리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가 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형상’으로 나타났던 괴물은 우리의 시야에서 반복적으로 미끄러지고, 그렇게 숨바꼭질하는 괴물 앞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결국 오해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혼잣말, 어긋난 마음의 징표
터널 속 미나토가 “괴물이 누구게”라고 흥얼거릴 때, 그 자리에 사오리가 나타난다. 그리고 화장실에 갇힌 요리의 “괴물이 누구게”라는 흥얼거림에 응답하는 것은 호리 선생이다. 우리는 미나토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3부에서야 미나토가 기다리던 것은 요리였고, 요리는 미나토를 기다렸음을 알게 된다. 사오리와 호리 모두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선의의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지만, 그들이 서 있는 자리는 ‘괴물’의 자리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되어야 한다. <괴물>에서는 이러한 엇갈림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러한 엇갈림의 결과가 ‘마음의 재난’이다. 실제로 미나토와 요리가 풍성한 삶 속으로 도약하는 엔딩을 제외한다면, <괴물>의 인물들은 늘 어긋나는 쪽에 가깝다. 친밀해 보이던 사오리와 미나토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사오리는 미나토가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아빠처럼 될까봐 불안하고 미나토는 아빠처럼 되지 못할까봐 불안하다. 어긋나는 마음. 그래서 미나토는 늘 ‘혼잣말’처럼 진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는 차에서 뛰어내리기 전 엄마가 들을 수 없는 말로 “난 아빠처럼 살 수 없어”라고 속삭이고, 아빠의 사진을 보며 “왜 나를 낳았어?”라고 조용히 묻는다. 그리고 그것이 미나토의 방에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걸려야 하는 이유다. <괴물>에서 혼잣말은 어긋나는 관계, 또는 어긋나는 마음의 징표다.
<괴물>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폐전차에서의 한 장면이다. 전학 갈지도 모른다는 요리에게 미나토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다. 미나토가 요리에게 떠나지 말라며 그의 어깨를 붙잡는 순간, 미나토는 또 다른 마음이 솟구치며 요리를 향한 마음을 배신한다. 그래서 미나토는 요리를 밀치고 폐전차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하고, 미술 시간에 요리를 괴롭히고 다퉈야 한다. 마음이 어긋날 때, 요리를 향한 미나토의 마음은 아무도 들어서는 안되는, 그리고 절대로 들켜서는 안되는 ‘혼잣말’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요리에게는 이러한 마음의 충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리는 미나토가 혼란스러워할 때조차도 자기에게도 그럴 때가 있다며 미나토를 다독일 정도다. 그것은 요리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이미 괴물이라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괴물은 누구게’ 카드 게임에서 두 소년은 각자 자신의 이마에 그림을 올려놓는다. 서로는 자신의 이마 위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볼 수 없고, 상대방이 설명하는 힌트를 통해 그림의 정체를 맞혀나가는 게임. 요리가 미나토 이마의 나무늘보 그림을 보고 "적에게 공격당했을 때 온몸의 힘을 뺀 채 다 포기해버리고 아무것도 안 느끼려 한다"고 설명하자 ‘호시카와 요리’라는 이름이 미나토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미나토의 답은 틀린 것이었지만, 왜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보는지 따지지 않고 입을 닫는, 마치 체념한 듯한 요리의 표정은 본의 아니게 미나토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 순간까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풍이 오던 날 호리 선생이 편지에 담긴 비밀을 발견하기 전까지, <괴물>에서 누군가에 대한 답이 틀리지 않는 것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괴물은 누구게’ 게임은 내 이마 위의 그림이 타인의 입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타인에 의해 규정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남자는…”이라는 규정적 표현이 미나토의 마음을 어긋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을 규정하는 말들 앞에서 미나토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짓말과 혼잣말뿐이다.
과자 도둑을 피하지 않는 삶
영화의 구성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3부에만 화재 이전의 상황이 덧붙여 있다는 점이다. 교장 선생의 면회 에피소드. 하나의 사건을 세 사람의 시점으로 따라가는 <괴물>에서 오직 그의 시점으로만 진행되는 이 사건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미나토와 요리의 이야기인 3부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장 선생과 두 사람의 이야기에 어떤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실제로 교장 선생이 들려주는 ‘과자 도둑’ 이야기는 그 후 펼쳐질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니까 교장 선생의 이야기가 바로 ‘그 자리’에 삽입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가 두 소년과 가장 많은 공통분모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 아닐까?
교장 선생은 미나토처럼 거짓으로 감추려 한다. 그는 사고로 손녀를 잃었다. 어쩌면 아들로부터 의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면회 장면에서 손녀의 묘를 알아서 따로 쓰려 한다고 교장 선생이 이야기하는 순간, 카메라는 갑자기 180도를 넘겨 그녀의 얼굴을 화면에 담는다. 교장 선생의 얼굴이 담긴 숏은 처연하면서도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준다(그녀의 거짓말에 분노한 아들이 의절을 선언한것이 아닐까). 마치 <걸어도 걸어도>에서 자신의 아들을 죽게 했던 이에게 적의를 내보이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줄 때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거짓말로 무언가를 계속 감추려 한다는 점이다. 마치 미나토가 거짓말로 호리 선생을 모함해 자신의 마음을 감추듯 말이다.
그런데 교장 선생에게는 그런 자신을 이미 포기한 듯한 모습이 감지된다. 진실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때나, 호전적인 사오리를 대하는 교장의 태도는 ‘적에게 공격당할 때 온몸의 힘을 뺀 채 다 포기해버리고 아무것도 안 느끼려 하는’ 요리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교장은 미나토와 요리가 갖는 잠재적 미래 중 하나다(이는 호리 선생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교장 선생이 손녀의 이야기라며 들려주는 과자 도둑 이야기는 미나토와 요리에 대한 이야기이자 <괴물>이 제시하는 괴물의 또 다른 메타포처럼 보인다. 잃을까 두려워 소중한 것을 갖기도 전에 그냥 포기해버리는 삶, 그 풍성한 삶을 재난으로 바꾸는 삶. 어쩌면 <괴물>이 이야기하는 괴물은, 손녀가 과자 도둑이 무서워 그렇게 포기해버렸듯이,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들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아이러니한 점은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교장 선생이 정작 자신은 그 재난의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가장 신비로운 순간, 마치 빅 크런치의 순간 같은 장면이 있다. 교장 선생은 좋아하는 애가 있다고, 남한테 말할 수 없어서 거짓말하는 거라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게 들통날까봐 그렇게 행동했다는 미나토에게 트롬본을 건넨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일이라면, 후 하고 악기를 불어보라며 말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악기 속에 자신의 진실을 담는다. 자신의 비밀을 앙코르와트에 봉인했던 <화양연화>의 한 장면처럼, 그들은 악기 속에 자신의 진실을 담아내고, 악기는 길들여지지 않을 것만 같은 짙고 긴 울음을 토해낸다. 이 ‘짙은 울음’이 마을을 뒤덮을 때, 미나토는 달리고, 또 달려서 요리의 집에 당도한다. 음악실과 요리의 집 사이에는 날을 달리하는 두개의 숏(자전거 타는 모습과 우비를 입고 달려가는 모습)이 삽입되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장면들은 음악실에서 요리의 집으로 곧장 내달린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그것이 소년들이 말한 ‘빅 크런치’, 그러니까 시계도 인간도 역회전해 소고기덮밥은 소로, 똥은 엉덩이로 되돌아간다는 빅 크런치 같은 순간인지도 모르겠다(이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은 먼 세계를 바라보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보인다).
욕조에서 정신을 잃었던 요리와 폐전차로 향한 미나토의 모습을 비춘 뒤, 영화는 ‘미나토의 시선을 벗어난’ 몇개의 인서트숏을 삽입한다. 그중 하나가 어느 교각에 서서 거센 물살을 바라보는 교장 선생이다. 우리는 이 교장 선생과 미나토를 대조해서 바라봐야 한다. 미나토에게 악기를 권한 것은 교장 선생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나토는 어긋나는 마음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게 된 반면에, 교장 선생은 여전히 재난 속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다. 교장만이 아니라 사오리, 호리, 요리의 아빠 모두가 여전히 재난 속에 있는 반면, 두 소년만이 그 재난에서 빠져나와 ‘환상의 빛’을 마주한다. 두 소년은 언젠가 자신들을 가로막았던 철창을 뚫고 내달린다. 그토록 부럽게 바라보았던 질주하는 열차처럼 내달린다. 풍성한 삶으로 도약한다. 더이상 미나토의 마음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미나토는 마음의 재난이라는 괴물로부터 요리를 구원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아름답다. 혹여나, 비록 그것이 환상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