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현실이고, 현실은 환상이다. 이렇게 말하면 동의할 사람은 잘 없다. 지어내어서 거짓이고, 따라 해서 모방이며, 있지 않아서 허상인 영화가 현실일 리가. 그래서 때때로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어떤 영화를 두고 걸작의 칭호를 부여하는지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영화는 환상에 가까운데 현실과 환상 사이의 낙차로 울림을 준다. 마치 물웅덩이에 물체를 떨어뜨릴 때 더 높은 곳에서 낙하시킬수록 물웅덩이에서 벌어지는 파탄의 정도가 다른 것처럼. 아니 그건 파탄일까. 물웅덩이 주변으로 흐트러지고 난잡한 사태는 누군가에겐 축복이다. 또 낙차가 크면 클수록 축복의 크기도 커진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이 낙차의 크기를 최대치로 가져가는 영화다. 최대한 현실에 천착하고, 있는 힘껏 환상을 키운다. 그 끝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영화는 먼저 현실에 밀착하는 방안으로 몸을 택한다. 재키(케이티 M. 오브라이언)가 등장할 때 관객 다수는 그의 신체에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여성임에도 탄탄한 근육질 몸을 소유한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기란 힘들다. 물론 이런 시선의 근원은 선입견과 편협함이다. 성별 고정관념을 이용해서라도 영화는 관객이 몸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그가 기구를 들거나 루(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몸을 섞고,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할 때 카메라는 그의 몸을 탐닉하듯 접근한다. 왜 몸일까. 우리는 모두 몸을 지닌다. 몸에서 벌어지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안다. 환언하면 우리는 몸을 보면서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재키가 루와 만났고 보디빌딩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운동하는 장소인 체육관에는 몸에 관한 격언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요지는 하나로 수렴한다. 고통을 받아들이라는 것. 고통은 현실을 감각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재키의 다부진 몸은 고통의 산물이다. 또 남편 JJ(데이브 프랭코)에게 폭행을 당한 루의 언니 베서니(제나 멀론) 얼굴의 흉측한 상처나 재키에게 두들겨 맞아 죽은 JJ의 날아간 턱도 관객에게 고통을 상기하는 이미지다. 초반 배설물로 꽉 막힌 변기를 굳이 보여주는 장면은 어떤가. 몸에서 벌어진 일로 나온 것들, 그 냄새. 관객은 즉각 몸의 작용을 되새기며 현실을 감지한다. 요컨대 영화는 몸을 이용해 현실로 가닿을 수 있는 최저점, 아니면 최고점의 자리를 만들어두고, 관객은 환상으로 뛰어오르거나 낙하할 채비를 갖춘다.
이제 환상의 자리를 만들어야 할 영화가 활용하는 건 공교롭게도 또 몸이다. 스테로이드가 시작이다. 재키의 심장과 근육을 키워주는 약물 스테로이드는 관객의 시선을 비현실적으로 울퉁불퉁 요동치는 재키의 힘줄과 근육으로 이끈다. 베서니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병원에서 분노하는 루의 모습을 본 재키는 그길로 남편 JJ에게 달려간다. 그의 머리를 탁자에 짓이기는 재키의 몸집이 좀 커 보이는 것 같다는 느낌은 좀더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재키의 분노에 감정적으로 동조해 벌어진 착각으로 받아들였다. 루의 만류에도 기어이 라스베이거스 보디빌딩 대회에 참한 재키는 약물부작용으로 환상을 본다. 여기서 재키는 다른 것도 아닌 루의 몸을 토해낸다. 그러고는 영화의 결정적 장면, 거인이 된 재키가 소인의 처지가 된 루의 친부 랭스턴(에드 해리스)을 제압한다. 영화에선 현실에 가속이 붙으면 환상이 되는 걸까. 현실 감각을 위해 몸을 강조하던 기조는 임계점을 넘어버리자 환상으로 급선회한다. 영화의 장르도 로맨스와 여성 연대의 정극에서 범죄수사물과 B급 괴수물, 그리고 SF로까지 나아간다. 영화에서 리얼리즘을 부르짖던 누군가가 들으면 헛웃음을 지을 일이다. 어쩌면 그는 알았는지 모른다. 영화가 현실에 집중하면 되레 환상이 된다는 것을. 아니 환상으로 번지는 걸 알기에 짐짓 리얼리즘에 힘을 실었는지도. 현실의 불합리를 반복해 재현하면 그 현실은 신화와 이야기로 변질되는 경우를 알지 않은가. 용은 늘 공주만 잡아가고 공주는 왕자의 키스에 의해서만 눈을 뜨는 이야기는 어떤 부조리한 현실의 이야기이자 신화인가. 그렇다면 마치 알라딘 같은 거인이 된 재키의 모습은 어떤 현실의 신화화인가. 중요한 건 작품에서 드러난 현실과 환상 사이 낙차의 크기다. 그리고 작품이 이 차이를 크게 가져간 이유는 작품 속 SF 장르의 성격을 빌려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협곡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이다. 이때 흐르는 불협화의 전자음은 우주를 다룬 여타 SF영화에서 우주인이나 외계인이 등장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관습적 면모를 띤다. 우주공간 같은 밤하늘의 정경은 여러 차례 나타난다. JJ의 시체를 유기하러 찾아간 협곡과 그때의 밤하늘은 마치 어느 행성의 표면 같다. 루 대신 랭스턴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석으로 풀려나 다시 루의 진영으로 돌아갈 때도 재키의 눈에 비친 하늘은 우주를 떠올리지 않기 힘들다. 그러고 보면 라스베이스에 가기 위해 재키가 얻어 탄 히피족의 차량에는 토성과 목성 같은 천체가 그려져 있었다. 몇몇 사소한 단서들과, 편견과 선입견에 근거할 때 평범하지 않은 재키의 외양을 근거로 그를 외계 존재로 단정한다면 얄팍한 해석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재키가 거대한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데서 보듯 이미 환상으로 갈 데까지 가버린 터인 영화 후반부는 그를 외계 존재로 상정하면 개연성 없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찾은 건 같은 외계 존재 루다. 1989년 미국 남서부 사막 앨버커키의 정서에서 레즈비언 또한 이계에 속한다. 돌아보면 그 둘만 마치 현대의 인물 같다. 영화는 재키와 루의 독보적 관계를 극단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둘을 외계 존재처럼 비치게 하는 방법으로 현실과 환상 사이의 낙차를 가능한 한 크게 벌려놓았을 것이다. 왜, 잘 알려진 일본 밴드 키린지의 노래 <エイリアンズ>(에일리언즈)가 이 점을 잘 표현하지 않았던가. “마치 우리는 에일리언 같아요, 금단의 열매를 가득 머금고는, 달의 뒷면을 꿈꾸며, 그대가 좋아요 에일리언.” 약물과 살인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잔뜩 입에 물고 안식처라 할 만한 캘리포니아 어딘가인 달의 뒷면을 향해 재키와 루는 나아간다. 마지막 장애물 데이지(애나 바리시니코프)까지 처치하는 걸 잊지 않고서. 톺아보면 현실이 가득한 극 중에서 환상을 목격한 건 관객을 제외하곤 재키뿐이다. 재키가 거인이 되었을 때 이제 루도 꿈이 아닌 실제에서도 환상을 보는 눈을 지닌다. 이때 둘은 서로가 에일리언즈라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한다. 급기야 별빛 하늘 아래에서 구름 높이를 넘어선 크기의 모습으로 변한 재키와 루는 지구 위를 뛰어간다.
그렇게 보면 현실을 강조하는 일로 환상에 다다른 영화가 결국 우리에게 선사한 건 타자에게 배타적인 둘만의 낭만적 사랑이다. 재키와 루는 서로 사랑(love)하니, 진심을 질투로 뒤틀거나 살인을 저지른 뒤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lies), 그 대가로 얻어맞거나 총에 맞아 출혈(bleeding)을 일으킨다. 이만큼 18세기 유럽이 발명한 낭만의 개념으로 귀환한, 지극히 전통적인 서사의 재판이자 확정인 현실도 없다. 그 시절 그곳을 간접 체험했을 뿐인 영국 태생의 감독이 그린 성난 <델마와 루이스> 버전의 작품은 하나의 가상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이 보여주는 건 지고지순의 형용이 어울리는, 가까운 현재까지 보편으로 받아들인 현실이자 신화가 된 사랑이다. 이쯤 되면 확언할 수 있을까. 이건 현실일까, 환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