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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왜 극장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상영 중이었을까, <트위스터스>

<트위스터스>가 <트위스터>(1996)로부터 빌려온 건 인물의 성격과 갈등 구도만이 아니다. 익히 알려진 영화를 영화 속에 인용하는 방식도 둘의 공통점이다. 주인공이 만든 토네이도 실험기구의 이름이 ‘도로시’라는 데서부터 인용은 이미 시작된다. 도로시는 주디 갈런드가 연기한 <오즈의 마법사>(1939)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다. 비록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수단으로 쓰였다 해도, 이 영화가 일종의 토네이도 영화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토네이도가 재난과 파괴로 등치되는 현실 속에서, 토네이도를 다른 세계를 여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식한 기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함을 넘어 놀라움을 안긴다. <트위스터>와 <트위스터스>는 토네이도가 주는 매혹과 두려움을 취사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재난영화의 명랑한 기원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 속 영화

<트위스터스>

영화관의 관객들이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는다는 것도 두 영화의 공유점이다. <트위스터>는 스탠리 큐브릭의 1980년작 <샤이닝>을 영화 속 영화의 방식으로 인용한다. 토네이토가 쌍으로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영화 속 쌍둥이 소녀가 자전거를 탄 대니 앞에 등장하는 장면이 인용된다. 태풍의 위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에서는 잭 니콜슨이 연기한 주인공이 도끼로 문을 마구 때려 부수고, 문 뒤에는 셸리 듀발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시퀀스가 펼쳐진다. 영화가 <샤이닝>을 인용하는 방식은 직접적이고 단순해, 오히려 심각한 장면을 가볍게 처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트위스터스>가 영화를 인용하는 방식은 보다 야심차다. 토네이도가 영화관을 습격하는 장면에서 극장에서 상영 중인 작품은 제임스 웨일의 1931년작 <프랑켄슈타인>이다. 사람들이 토네이도를 피해 극장 안에 도착했을 때, 스크린에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폭풍의 도움으로 마침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실험에 성공한 직후의 모습이 영사되는 중이다. 정이삭 감독은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한 이유에 관해 토네이도를 일종의 괴물이라고 생각했다며, <프랑켄슈타인>에서 토네이도가 생성되는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고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이 여러 명의 죽은 사람의 신체를 이식해 재조합된 하나의 존재임을 염두에 둔다면, 맹렬한 토네이도의 기세는 그것이 앗아간 사람과 사물들의 사납고 거대한 드러냄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다.

감독은 편의적으로 영화를 인용하는 것을 넘어 상영 환경 자체를 공들여 묘사한다.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이 피신한 극장 근처에는 노면전차가 운영 중인데, 태풍에 의해 노면전차가 빠른 속도로 주인공을 덮치는 장면은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5)과 비슷한 구도로 찍혔다.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안긴 초기 영화는, 토네이도에 관한 영화의 유보적 인식의 다른 기원을 암시하며, 영화관 내부로 관객을 안내한다. 태풍은 영화관 전체를 날려버릴 정도로 강렬한 위용을 뽐낸다. 나사가 반쯤 풀려 곧 날아가려는 의자 밑을 간신히 잡고 버티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사라질 위기에 놓인 영화(관)를 어떻게든 붙잡고 버티는 것처럼 보인다. 극장의 위기를 이처럼 표면화한 시도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영화관 시퀀스는 토네이도가 절묘하게 스크린 뒤쪽 벽을 강타하면서 절정을 이룬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그것은 살아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토네이도가 마침내 벽을 부수면서 영사 중인 스크린이 통째로 토네이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로써 괴물의 탄생은 토네이도의 출연이라는 영화 속 현실로 말끔히 대체된다. 스크린이 사라지고 남은 커다란 구멍 속 풍경은 마치 상영되던 영화의 일부처럼 보인다. 흑백의 필름영화는 흙모래의 운집체인 토네이도의 빛깔과 구분할 수 없게 뒤섞여 장면의 전환을 마치 마술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흑백의 필름영화가 필요했던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영화와 영화관이 파괴되더라도 영화는 여전히 남는다. 스크린 없이 벽이 일종의 스크린 역할을 하던 시기와 지역의 영화 경험을 상상하게 하는 동시에, 재난의 현장이 스펙터클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한 인식은 단지 영화 속 재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팔로워와 추적자

<트위스터스>

영화관과 함께 로데오 경기장이 토네이도의 위력을 보여주는 다른 무대로 등장한다. 이처럼 토네이도가 출몰하는 장소는 도시 외곽 지역 주민의 여가 활동과 관련이 있다. 도심을 배경으로 한 재난영화의 경우 실제 도시의 랜드마크를 반영한 쇼핑센터나 도시 시설물을 주무대로 설정하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소비자나 거리의 행인, 회사원이나 노동자로 설정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과장하자면, 영화는 토네이도로 인해 발생하는 생계의 위기만큼이나 취미 생활의 위기를 강조한다. 토네이도의 이동 경로 관측을 통해 근처 마을이 습격당했음을 감지한 케이트(데이지 에드거존스)가 마을로 이동해 복구를 돕는 장면은 그가 한 주민에게 오래된 사진첩을 건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는 재난을 보다 개인의 차원에서 인식하려는 영화의 태도를 반영한다.

태풍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을 팔로워가 아닌 추적자(체이서)로 정의한다. 추적자는 토네이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예측하고 이해하며 길들이는 사람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의 초반, 케이트와 함께 길을 나선 친구들이 허망하게 죽는 장면은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다가 사망한 무모한 젊은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반영한다. 반면 방송을 위한 수단으로 토네이도 추적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던 타일러(글렌 파월)와 동료들이 피해 지역을 찾아가 구호 활동에 나서는 모습을 통해 케이트의 친구들을 대신해 일반의 인식에 반전을 꾀한다.

인플루언서 타일러와 그의 동료들은 카메라를 켜고 개인 방송을 하며 자신들의 활동을 홍보한다. 종종 이들의 캠은 실시간 방송 송출 화면으로 드러나는데, 이들에 대한 팔로워들의 반응은 화면 위에 드러나지 않는다. 왜 그들은 현장 바깥에 위치하는 관객의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이들의 관객은 흔히 생각하듯 영화 안에 존재하는 제삼자가 아니라 지금 영화를 보는 관객일 수 있다. 혹은 송출 중인 타일러의 방송을 모니터로 확인하며 즐기는 다른 팀원을 보여주는 장면을 근거로 나아가보자면 이들은 방송을 제작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자기 방송을 즐기는 구독자다. 영상을 구독하는 팔로워의 존재를 모호하게 처리하면서 이들이 만든 영상은 자기 기록용 비디오 영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게 된다. 이를 통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자신을 위한 증명이 어떠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한다.

과거 케이트와 하비(앤서니 라모스)는 토네이도를 길들이는 실험의 타이밍을 맞추는 것과 실험에 관한 물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 사이의 우선순위를 놓고 잠시 논쟁을 벌였다. 과거 근거 확보를 우선시했던 하비는 케이트를 다시 끌어들인 뒤에는 3D 스캔을 통해 한층 강화된 데이터 인식, 저장 시스템을 소개한다. 그러나 5년이 지난 현재 케이트에게 남은 건 애써 부정해온 자기 증명에 대한 욕구뿐이다. 케이트는 친구들 대신 살아남은 이유를 찾으려는 듯, 낡은 트럭과 도로시를 이끌고 토네이도를 향해 간다. 이는 영화가 기반을 둔 원작 <트위스터>를 향한 존중이기도 하다. 재난을 다루는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기존 작품을 리메이크할 때, 전보다 나아진 기술력을 과시하기 마련이며 그것이 리메이크의 이유라고 풀이된다. <트위스터스>는 케이트가 실패한 과거를 딛고 다시 도전하는 장면을 통해 낡고 거친 방식을 향한 존중을 표한다.

<미나리>에서 <프랑켄슈타인>까지

<프랑켄슈타인>(1931)

이와 같은 존중은 <트위스터스>와 정이삭의 전작인 <미나리>와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두 작품은 프로덕션 규모와 스토리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을 잇는 연결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나리>에는 짧지만, 토네이도가 발생한 상황이 벌어진다. 컨테이너를 이어 붙인 부실한 집은 토네이도가 발생하면 무력하게 날아갈 위험에 처한다. 온 가족이 뭉쳐 위기를 타파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진짜 토네이도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토네이도로 인해 TV 송출이 중단된 위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집 안에서 소리 높여 다투기 시작한다. 이층에 있던 앤과 데이빗 남매는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한치의 망설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종이비행기를 접어 ‘싸우지 마세요’라는 메시지를 갈겨 쓴 뒤 날리기 시작한다. 방향과 기술력만 다를 뿐, 토네이도를 길들이기 위해 특수 제작한 기구를 올려보내는 행위와 비슷하다. 종이비행기 때문일까. 아래편에서 쌍으로 일어난 토네이도는 제이콥의 고함으로 정점을 찍은 뒤 잦아든다.

<미나리>에서 정이삭 감독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그린다. 좋은 일 뒤에는 불운이 드리우고, 불운 뒤에는 좋은 일도 따른다. 제이콥의 일이 잘 풀리고, 데이빗의 심장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들은 찰나, 부부의 갈등으로 가족은 붕괴할 위험에 처한다. 병든 순자(윤여정)가 실수로 일으킨 화재로 제이콥의 농작물을 보관한 창고가 타들어가지만 이같은 위기는 부부를 다시 묶는 계기가 된다. 토네이도를 보는 영화의 시각 역시 비슷하다. 토네이도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실종되어 사라지거나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는 <미나리> 속 순자의 말을 힌트 삼자면, 눈에 보이는 토네이도는 보이지 않는 다른 무언가에 비해 덜 위험한 것일 수 있다.

한편 <트위스터스>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적잖이 개인적인 이유에서 절묘한 우연처럼 느껴졌다. <프랑켄슈타인>은 <미나리> 개봉 이후 영화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부풀리던 중 도달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사소한 연결이었다. 영화 속에서 데이빗은 ‘이슬 물’을 가져오라는 할머니를 골탕 먹일 요량으로 ‘마운틴듀’ 대신 자기 소변을 컵에 담아 순자에게 건넨다. 순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를 받아 든다. 이미 도망갈 채비까지 마친 데이빗은 순자의 호통이 떨어지자마자 현관문 밖으로 달아난다.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성격을 지닌 영화를 보며 나 역시 개인적인 상념에 빠져들었는데 그것은 빈곤하다 할 최초의 영화 경험과 관련된다. 내가 데이빗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 나는 극장이 없는 마을에서 살았고, 천막 같은 임시극장에서 상영한 <영구와 땡칠이>(1989)가 내 첫 영화 경험을 무참히 앗아갔다. 영화에서 영구가 누군가가 컵에 받아놓은 소변을 오렌지주스인 줄 알고 마셨던 장면이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남기남 감독의 <영구와 땡칠이>는 2020년 한국영상자료원 온라인 사이트 KMDb에서 주관한 VOD 기획전, “풍문으로 들었소: ‘컬트적’인 한국영화”라는 주제로 묶여 상영되었다. 영화 줄거리가 영구와 친구들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서양 귀신들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미나리>와 <영구와 땡칠이>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으로 이어지는 영화 의식의 흐름은 나를 아이들이 극장에서 <프랑켄슈타인>을 관람하는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1973)으로 데려갔다.

1940년 스페인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벌집의 정령>은 마을회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시퀀스로 시작된다. 필름 릴을 운반하는 차가 마을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영화다! 영화가 오고 있다’라고 외치며 자동차 주위를 에워싼다. 상영시간은 뿔피리 소리와 함께 육성으로 안내된다. 아이들은 제 손으로 의자를 가져다가 스크린을 향해 앉는다. 아나와 언니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눈을 빛내며 스크린을 바라본다. 영화에서 인용된 장면은 해설자가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와 괴물이 호숫가에서 혼자 놀던 어린아이와 함께 꽃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다. 소녀로부터 꽃을 물 위에 던지면 뜨는 부력을 습득한 괴물은 그만 소녀를 물에 던지고 만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아나는 영화 속 괴물을 연상시키는 어른을 만난다. 이를 통해 허구의 이야기로부터, 상상의 출발점에 있었을 법한 실제의 이야기로 향해간다.

비현실적인 설정의 괴수영화 <프랑켄슈타인>이 영화 바깥의 현실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영화 속 영화로 인용되곤 한다는 사실은 기이하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토네이도는 새로운 세계를 가능케 했으며, 새로운 세계는 흑백에서 컬러 세계로의 이동으로 표현된다. 도로시는 흑백의 현실로 복귀하지만, 컬러로 표현된 상상계의 위력은 삭제될 수 없기에 온전히 현실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트위스터스>는 흑백영화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하면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표시하는 화려한 색채의 세계에 흑백을 돌려준다. 다른 세계로 이동한 후에도 흑백의 세계를 잊지 않았음을 새기는 영화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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