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클레어 큐빅(애슐리 저드)은 유능한 변호사. 남편 톰(짐 카비에젤)과 금실도 좋고, 아기를 가질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톰이 갑자기 FBI에 구속되면서 남부러울 것 없던 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알고보니 톰은 전직 해병대로 로널드 채프먼이 본명이며, 88년 엘 살바도르에서 비밀작전 수행 도중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군 재판에 회부된 톰은 결백을 호소하고, 클레어는 남편을 변호하기 위해 법정에 선다. 군 법무관 출신인 베테랑 찰리 그라임스(모건 프리먼)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재판이 진행될수록 진실은 점점 모호해진다.■ Review 이 여자, 좀처럼 쉽게 당하는 법이 없다. 연쇄살인마의 소굴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자신을 살인범으로 몰아 아들과 떼어놓은 전 남편에게 총구를 겨누며 운명을 개척해가는 히로인 애슐리 저드. 그리고 이 남자, 결코 서툰 법이 없다. 밑바닥 생활에서건 범죄 수사에서건 노련하고 믿음직스러운 베테랑 모건 프리먼. <하이 크라임>은 97년 <키스 더 걸> 이후 오랜만에 재회한 두 배우의 존재감과 캐릭터가 돋보이는 스릴러다. <키스 더 걸> <더블 크라임>의 연장선상에서 이지적이고 강인한 여주인공 클레어와 알코올 중독 기질에 현역에서 밀려난 낙오자의 분위기를 풍기나 현숙한 조언자 찰리. 저드와 프리먼이 쌓아온 이미지에 부합하며 생기를 얻은 두 캐릭터는, 탄탄한 버디 구도를 유지하면서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수수께끼의 실타래를 푸는 방식에서, <하이 크라임>은 기본기를 모르는 스릴러는 아니다. 안온한 일상을 뿌리째 뒤흔드는 과거의 진실, 로널드가 학살의 진범인지 아니면 이 사건을 무마하려는 군대의 정치적 희생양인지를 파헤치는 과정은 새롭진 않지만 끝이 궁금할 만큼은 흥미롭다. 클레어와 찰리가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며 사건 당시의 목격자 대부분이 의문사했다는 등등의 단서를 찾고 법정 공방을 벌이는 동안, 거대 시스템과의 싸움이란 복선은 그럴듯한 긴장을 자아낸다. 하지만 양파껍질처럼 하나둘 비밀을 벗겨나가던 영화는, 급작스런 반전을 맞아 그때까지 축적한 스릴을 무위로 돌린다. “당신이 믿었던 모든 것, 알았던 모든 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카피 문구처럼, 두뇌게임의 증거가 무효화되는 순간 스릴러로서의 설득력은 반감되는 것이다.
칼 프랭클린은 마약으로 한탕을 꿈꾸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세 남녀의 파국을 그린 <광란의 오후>,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는 흑인 탐정을 좇는 <블루 데블> 등 비정한 누아르풍 스릴러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감독. <하이 크라임>은 전작에는 못 미치지만, 두 배우의 조화로운 연기와 캐릭터의 힘으로 끝까지 보게 되는 영화다. 황혜림 blauex@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