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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송환’ 김동원 “90살 장기수, 더 늦기 전에 고향 보내드려야”
한겨레제휴기사 2022-09-26

[한겨레] 29일 개봉 다큐 ‘2차 송환’ 김동원 감독 인터뷰, 비전향 장기수 다룬 ‘송환’ 이후 18년 만의 속편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 <송환>의 속편 격인 <2차 송환>을 연출한 김동원 감독이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2000년 6월, 남북 정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났다. 두 정상은 6·15 남북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3번 조항엔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해 9월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돌아갔다. 간첩으로 내려왔다 붙잡혀 수십년간 옥살이를 한 노인들이었다. 이런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연출 김동원)이 2004년 개봉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 상’을 받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면의 또 다른 이야기를 잘 모른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전향’했다는 이유로 송환 명단에서 제외된 이들의 얘기다. 고문 때문에 강제로 전향당했다는 30여명은 2001년 ‘폭력에 의한 전향 무효 선언’을 하고 ‘2차 송환’ 운동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그들 얘기를 담은 다큐 영화가 나왔다. 29일 개봉하는 <2차 송환>이다. 18년 만의 속편인 셈인데, 이번에도 독립 다큐 공동체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이 연출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요. 몇년 안에 2차 송환도 이뤄질 줄 알았죠.” 22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 감독이 말했다. 그는 영화 개봉을 앞둔 상황에서도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화 <2차 송환> 속 김영식 할아버지 모습. 시네마달 제공

<2차 송환>의 출발은 30년 전인 199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 감독이 자신이 살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으로 이사 온 비전향 장기수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 때다. 이때부터 기록한 영상은 나중에 <송환>이 됐는데, 여기엔 김영식 할아버지도 등장한다. 1933년생으로, 1962년 남파선 선원으로 왔다가 붙잡혀 24년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고문을 못 견디고 전향서를 쓴 그는 출소 후에도 미안해서 비전향 장기수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2000년 송환 당시 아내와 아들딸이 있는 고향으로 가지 못한 건 물론이다.

김 할아버지는 2001년 전향 무효 선언을 하고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으로 이사했다. 전에 살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가면서 비워둔 곳이었다. 김 감독은 <송환>의 조연출을 맡았던 공은주 감독에게 김 할아버지를 촬영하도록 했다. 그 자신은 <송환> 막바지 작업 등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다큐 <송환>의 속편 격인 <2차 송환>을 연출한 김동원 감독이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당시 저는 북한 촬영 준비도 하고 있었어요. 북으로 돌아간 장기수 선생님들도 만나고, 부모님 고향인 평안북도 강계에도 가보고 싶었거든요.” 강계의 지주 집안 출신인 아버지는 공산당에 땅을 몰수당한 뒤 월남했다. 남에서 같은 고향 출신인 아내를 만나 낳은 아들이 김 감독이다. “반공주의자인 아버지는 티브이(TV)에서 간첩을 보면 ‘저 빨갱이들’ 하면서 제게 ‘너, 남한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냐’고 하셨죠. 그러면서도 2002년 돌아가실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하셨어요.” 김 감독은 북한에 거의 갈 뻔했지만, 막판에 좌절되고 말았다.

2006년 공 감독이 개인 사정으로 촬영을 중단했다. 더군다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관계가 급속히 경색됐다. 김 감독은 작업을 포기했다. 작업을 재개한 건 2013년께다. <송환>을 감명 깊게 본 한국계 노르웨이인 메리 케이 올슨이 김 감독을 찾아와 후속 작업에 투자하고 북한 촬영 방도도 찾아보겠다고 했다. 김 감독은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북한 촬영이 좌절됐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고 화합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2차 송환과 북한 촬영에 대한 희망을 가졌지만, 2019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가 결렬되면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영화 <2차 송환> 속 김영식 할아버지 모습. 시네마달 제공

그래도 희망을 거둘 수 없어 혹시나 하고 계속 촬영하던 김 감독은 2020년 9월 ‘송환 20주년 기념식 겸 2차 송환 촉구대회’를 보며 낙담했다. “장기수 선생님들이 너무 연로하시고, 송환추진위원회도 힘이 빠진 듯 보였어요. 2차 송환을 원했던 46명 중 생존자는 이제 9명 남았고요, 평균 나이 91살입니다.” 송환 21주년인 지난해 9월에는 김 할아버지가 청와대 앞에서 2차 송환 촉구 1인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기념식을 갈음했다. “그걸 보면서 너무 가슴 아팠어요. 이젠 희망을 접고 영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편집을 시작했어요. 김 할아버지도 이제 아흔살입니다.” 그 1인시위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됐다.

영화 <2차 송환> 속 김영식 할아버지 모습. 시네마달 제공

<2차 송환>은 올봄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에서 관객과 먼저 만났다. 22일 개막한 디엠제트(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도 상영 중이다. “영화제 상영 때 보면 관객도 적고 관심도 떨어진 듯 보였어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통일에 무관심하고 송환이라는 말 자체도 낯설어하는 것 같아요. 그럴수록 이 영화를 더 많은 이들이 보고 송환과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념을 떠나 인도적 차원에서 더 늦기 전에 김 할아버지를 비롯한 장기수 선생님들을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드려야 합니다.”

한겨레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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