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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오늘은 SF] 결국 사랑이
이경희(SF 작가) 2022-11-03

<인터스텔라>

어쩌다보니 곽재식 작가님과 한달 내내 ‘오늘은 SF’ 연재에 스필버그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는 것 같다. 모쪼록 이해해주시길. 영화 연출의 천재가 SF에도 능하니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몇날 며칠을 떠들어도 재미있는 영화들이다. 한국에서 스필버그 못지않게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으면서 SF에도 능한 연출자를 꼽자면 크리스토퍼 놀란을 1순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기준으로는 리들리 스콧이나 제임스 카메론보다도 더 사랑받는 감독 아닐까? <다크 나이트>를 비롯한 <배트맨> 3부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하게 사랑받은 작품인 <인셉션> 역시 각본의 교과서라 생각될 만큼 정교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특히 <인셉션>의 이야기 구조는 장르 서사의 정석을 훌륭하게 따르고 있어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가르칠 때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테넷>은 음… 잘 모르겠다. 분명 좋은 작품이긴 한데. 규칙 놀이에 너무 심취한 것 같기도 하고. 유니크한 SF임에는 틀림없다. 이 정도 지극정성이면 ‘007 시리즈’ 감독 한번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지.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한국에서 놀란의 최고 히트작은 <인터스텔라>다. 무려 천만 관객을 넘겼으니 말 다했지. 우주영화 불모지 한국에서 이 잔잔하고 느릿한 우주 뮤직비디오를 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한편 <스타워즈>를 한국에서 몇명이 보았느냐면… 아, 아니다. 장르 작가 입장에서 <인터스텔라>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이 참 흥미로운데, 이 영화의 ‘과학’을 둘러싸고 양쪽에서 정반대의 이유로 오해를 사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영화의 과학적 면모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다른 한쪽에선 완전 엉터리 아니냐고 말한다. 한쪽 부류는 <인터스텔라>의 과학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들이다. 대개는 유튜버이거나 블로거이고,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첨단 천문물리학 지식에 통달해야 한다며 사람들을 겁주고 있다. 궁금하면 아무 검색 사이트에서 ‘인터스텔라 제대로 이해’라고 두드려보시길. 상대성이론이니 양자역학이니 고차원의 막이니 끈 이론이니 갖다붙일 수 있는 온갖 과학 이론은 다 끌어다 이 영화를 설명하는 사람들을 지겹도록 만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도 그 사람들만큼은 모를 거 같다. 킵 손 같은 저명한 과학자가 영화의 자문역으로 붙은 탓에 이런 편견이 한층 공고해졌다. 킵 손이 직접 저술한 <인터스텔라의 과학>을 읽어보면 영화 속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첨단물리학의 온갖 이론적 가정들이 복잡하게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영화의 말이 안되는 부분을 말이 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뇌를 쥐어짜고 또 쥐어짰는지 절절히 느껴져 안쓰러울 정도다. 킵 손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영화가 과학적으로 엉터리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욕먹는 건 자신일 테니까. 어차피 감독은 ‘킵손이 맞다 그랬어요’라는 핑계를 대고 슬쩍 빠지면 그만이란 말이다. 불쌍한 킵 손.

한편 정반대편에 서 있는 부류의 사람들은 이 영화의 과학이 엉터리라고 말한다. SF인 줄 알았더니 판타지더라며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는 이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주인공 쿠퍼가 블랙홀 내부로 돌입한 이후의 장면을 두고 하드 SF였던 영화가 갑자기 신비주의로 빠지고 말았다며 블랙홀이 방출하는 제트마냥 탄식한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나요. 원래 이쪽 장르가 대충 그런 식인걸. <유년기의 끝>도 그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도 그랬다고요. 소위 테서랙트 장면이라 불리는 이 클라이맥스 장면을 둘러싸고 서로를 논박하는 양 진영의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옥의 투기장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전혀 다르니까. 내가 보기에 전자의 사람들은 ‘어떻게’ 가능한지에만 관심이 있고, 후자의 사람들은 ‘어째서’에만 집중하는 듯하다.

테서랙트 장면에서 주인공 쿠퍼는 블랙홀 속에 인위적으로 구현된 고차원 구조물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구조물은 100억 광년 떨어진 지구와 연결되어 있다. 어떻게 쿠퍼는 단숨에 100억 광년의 거리를 빛보다 빠르게 뛰어넘어 지구의 딸과 마주할 수 있었을까? 잘은 모르지만 이리저리 공부해본 바에 따르면 ‘어떻게’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테서랙트 장면은 이론적으로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무리한 가정을 여러 겹 세워야만 겨우 성립하는 모양이다.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고차원적 존재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어째서’ 주의자들의 주장도 일견 일리가 있다. 굳이 초월적 존재를 설정해가면서까지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해줄 필요가 있었느냐는 거다. 하지만 그 장면은 꼭 필요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니까.

고백하자면 나는 테서랙트 장면을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느냐면 그 장면을 마주한 순간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펑펑 울고는 스탭롤이 나올 때 또 펑펑 울었을 정도다. 영화 속 대사가 암시하듯 쿠퍼를 돕는 고차원적 존재가 미래의 인류라면, 인류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마저 뛰어넘는 위대한 존재로 성장했다는 의미가 된다. 게다가 그들은 여전히 사랑을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쿠퍼의 행동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도울 방법을 알지도 못했을 테니까. <인터스텔라>의 우주에서 인류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끝끝내 보존했기에 과거에 개입해 스스로를 구원한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끝끝내 미래로 전달했기에 또 한번 생존할 기회를 얻는다. 이들의 우주에서 사랑은, 단지 예쁜 감정이 아니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고차원적이고 실체적인 힘이다. 아득한 시간과 공간을 빛보다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는 유일한 힘. 이토록 굉장한 경외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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