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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의 오늘은 SF]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이경희(SF 작가) 2023-03-02

SF 작가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로, 과학자가 주인공인 SF는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 낫다는 말이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고, 아마 다들 조금씩 다른 이유를 생각하고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문제는 SF 세계에서 과학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풍족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환경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만약 주인공이 풀어야 할 과학적 난제가 중대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천재라면 더더욱 문제가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아주 강력한 권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위기도 긴장도 생기기가 어렵다. 이와 비슷한 직업으로 대통령, 정치인, 국왕, 교장 선생님 등이 있다. 이런 부류의 캐릭터는 처신을 조금만 잘못하거나 내면묘사를 약간만 실수해도 입으로만 일하며 남들을 불필요한 고통으로 밀어넣는 방관자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과학자와 연구소는 SF의 뿌리 깊은 클리셰지만 의외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일단 과학 연구라는 게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매번 군인이나 도둑, 탐정 같은 직업에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뒤에서 해답지 노릇이나 하는 조연으로 전락하곤 했다.

이쯤 이야기하면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별의 계승자>가 있지 않냐고. 맞다. <별의 계승자>는 과학자 주인공들이 연구만 하는데도 아주 재미있는, 매우 드문 사례다. 하지만 당신이 제임스 P. 호건 정도로 굉장한 작가일 가능성은 드물고, 당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별의 계승자> 정도로 재미있을 가능성은 더욱 낮다. 1977년에 나온 소설이 아직도 언급되는 이유가 뭐겠는가. 게다가 <별의 계승자>는 꽤 두툼한 장편이란 말이다. 어휴, 그런 짓. 나는 못해.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전히 가장 좋은 방법은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주인공 역할에 어울리는 더 많은 직업들이 있다. 부랑아, 배달부, 몰락 귀족, 금고털이, 혁명가, 남자의 성기만 공격하는 살인 로봇 같은.

당신의 이야기 주인공이 꼭 과학자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트릭을 추천해봄직하다. 첫째로는 명목상 과학자이지만 실제로는 과학자가 아닌 다른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정이>를 보자. 이 이야기의 주인공 서현은 자신이 맡은 연구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는 엄마 윤정이의 복제 뇌를 지키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서현의 실제 역할은 과학자가 아닌 첩보원에 가깝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현실의 과학자가 실제로 겪을 법한 일상의 위기를 만들어 리얼리티의 굴레 속에 지독할 정도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정리해고, 실연, 100억원짜리 실험 기계에 커피 쏟음, 콘퍼런스 발표 도중 찾아온 다급한 배변 욕구 같은 문제 앞에서 우리의 과학자 주인공은 자신의 과학적 난제보다 수백배 다급하고 애처로운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한국에서 이 기법을 가장 잘 구사하는 작가로는 단연 곽재식을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웹브라우저에 액티브엑스(ActiveX)를 설치하느냐 마느냐로 둠스데이 스위치를 눈앞에 둔 군인보다 더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다.

아, 외계인이 나와도 이야기가 대체로 재미있어진다. 왜냐하면 외계인은 재밌으니까. 과학자가 연구하는 SF 소설의 최대 성취로 손꼽히는 <별의 계승자>와 <네 인생의 이야기> 두 작품 모두 외계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이 얘긴 너무 진지하게 믿진 마시고.

위의 방법들은 모두 편법이다. 어쨌든 과학자가 연구하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묻겠다. 여기서 예스를 선택한다면 당신은 이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가시밭길을 걷는 고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내가 그때 왜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골랐지?’ 같은 말을 수백번 되뇌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굳이 과학자가 연구하는 이야기를 해야겠는가? 굳이 해야겠다면 하나 마나 한 팁을 드리겠다. 당신의 과학자 주인공을 사랑하게 만들어라. 사랑스러운 사연과 걱정스러운 위기를 부여하라.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곤 하지만 과학자 주인공에게도 연구소 밖에서의 삶이 있다. 과거가 있고, 상처가 있으며, 가끔 악몽을 꾼다. 대단한 천재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민들을 안고 산다. 하루 24시간 입자의 운동이니 차원이니 하는 생각만 하며 살진 않는다.

우리의 주인공에게 소중하고 공감되는 삶을 부여했다면, 이제 그걸 부러뜨릴 차례다. 그를 엄청난 위기 속에 밀어넣는 것이다. 다만 그의 삶과 연구 양쪽을 동시에. 철저하게. 걱정하지 말자. 가능한 한 예쁘게 뚝 부러뜨려야 튼튼하게 아무니까. 중요한 것은 그가 연구하는 주제와 그의 삶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계속 연구를 할 테니 말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주인공은 온갖 방해를 딛고 연구로 삶을 완성한다. 결과적으로 연구는 실패해도 된다. 삶이 완성된다면. 반대의 경우는 글쎄, 좀 어렵지 않을까?

당신이 천재라면 분명 다른 방법을 찾겠지만 내 부족한 머리로는 이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시시한 소리다. 이야기를 만드는 데 뭐 딱히 대단한 팁이 있을까.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을 깊고 더러운 진흙탕에 빠뜨려 함께 뒹굴다 처절하게 기어 올라오는 것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