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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권위 없는 권위자 연기’의 1인자, ‘닥터 차정숙’ 배우 김병철
임수연 사진 오계옥 2023-06-01

- <닥터 차정숙>이 최고 시청률 18.5%를 기록했다. 시청자 반응을 검색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기억에 남는 글이 있나.

=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반응을 찾아볼 때가 있다. 이를테면 정숙이 인호와 승희의 뒤를 쫓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자괴감을 느끼고는 “그냥 세워달라”고 하는데, 택시 기사가 “끝을 봐야 시작도 할 수 있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기존 드라마 클리셰를 깼다고들 하시더라. 실제로 택시 기사 분들은 앞차를 쫓아가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심지어 일행이니까 따라가 달라고만 해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다. (웃음) 내가 대본에서 재밌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시청자들도 똑같이 느낀다는 것을 확인했다. 작업의 방향성도 함께 생각하게 되고. 작가님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를 비트는데, 그런 의도가 잘 어필되고 있다는 인을 받았다.

- 인호는 정숙과 10년째 각방을 쓰고 혼외 자식까지 둔 승희와 오랫동안 외도하면서도 정작 이혼은 하지 않는다. 애초에 승희와 사귀고 있던 중 덜컥 임신을 한 정숙과 결혼을 하게 된 이유도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흔한 유형의 인물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다. 인호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정숙에게 낙태를 권했을 수도 있지만 억지로 강요하진 않았을 것이다. 90년대 후반 낙태와 혼외 자식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다 보니 정숙과 결혼까지 하게 된 게 아닐까. 좋아하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돼버린 사람인 거다. 승희와 미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좋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는 게 스릴 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진짜 불륜을 원해서라기보다 상황을 따라가다 보니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다가도 멈추지 못한다. 이혼을 하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 인호가 승희나 정숙에게 진심이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나.

= 당연히 있다. 그런 사람들도 어떤 행동을 할 땐 무척 진심을 담아서 한다. 이를테면 출국 직전 아픈 정숙에게 가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자 마음이 불편해진 승희에게 팔찌를 채워주는 장면. 그 순간에는 충실했을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정숙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진심이었을 것이고, 결혼 직후에도 진심을 담은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인간 김병철로서는 과연 그런 행동이 책임을 지는 것이라 볼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한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 다양한 배경과 개성을 가진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다. 엄정화, 명세빈, 민우혁 등 동료들과는 어떻게 연기를 맞춰나갔나.

= 정화 누나가 편하게 서로 반말하면서 대화했으면 좋겠다고 처음부터 의견을 줬다. 그래서 “누나, 밥 먹었어?”라고 편하게 말하면서 시간을 보낸 덕분에 필요 없는 긴장을 없앨 수 있었다. 워낙 사람에 대한 공감의 폭이 넓은 연기자이기 때문에 정화 누나의 연기를 보면서 나 역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가 승희라고 생각한다. 승희와 인호의 장면은 웃음 외에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서 준비했다. 로이킴 역의 민우혁 배우는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다. 체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겼다. 그냥 그를 보다 보면 상대적으로 인호는 매력이 ‘1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웃음) 그런데 로이킴은 정말 훌륭하지만 동시에 닫혀 있는 사람이다. 여자와의 관계도 피상적으로 맺는다. 그러다 정숙을 만나면서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좀더 가까워진다. 가끔 인호와 투닥대다가 동화되는 순간이 있을 만큼 인간적으로 변해가는 캐릭터다.

-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한 의사처럼 보이는 동시에 권위가 무너질 때 생기는 코미디도 살려야 한다. “서인호는 매력이 없다”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만 극 중 두 여자와 엮일 만큼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하는 역할이기도 하다.

= 주변에서 계속 그런 얘기를 했다. 도대체 승희와 정숙이 왜 인호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웃음) 인호는 시청자들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아예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인호가 너무 비호감이 될 때쯤, 이를테면 오십견으로 힘들어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등장한다. 초반에 승희와 인호의 불륜을 보여주는 선정적인 장면이 배제된 것도 작가님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호가 어깨춤을 추면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코믹한 장면이 덜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인호 때문에 자칫 채널이 돌아가지 않도록 이미 대본에 완급 조절이 적절히 되어 있었고, 배우는 그 대본을 잘 구현하면 된다.

- ‘권위 없는 권위자 연기’의 1인자라는 평가가 있다. (웃음)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 인상적으로 봐준 분들이 계신 것 같다. 권력을 가진 사람의 권력이 없어지는 모습은 코미디 장르에서 필수적으로 나오는 양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미디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웃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드라마 <시지프스 : the myth>에서 권위가 계속 유지되는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인물도 인상적으로 연기해내고 싶다.

- <재밌는 티비 롤러코스터>에 출연했던 이유를 “코미디 연기에 욕심이 있어서”라고 밝힌 적이 있다. <쌉니다 천리마마트>에서 보여준 연기도 화제가 됐다. 코미디 장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 옛날부터 코미디영화나 시트콤을 좋아했다. <핑크 팬더> 시리즈나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출신 작가들의 작품들, 김병욱 PD의 시트콤들을 재밌게 봤다. <오피스>에서 레인 윌슨이 연기한 드와이트, ‘<거침없이 하이킥!> 시리즈’의 이순재 선생님, <서울의 달>에서 백윤식 선생님이 연기했던 미술 선생님 캐릭터를 좋아했고, 나도 저런 작품에 참여해 저런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개척한 나의 세계

- 처음에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무엇이었나.

= 어릴 때 TV에서 해주던 토요명화나 주말의 영화, <맥가이버> <엑스파일>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저런 세계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TV로 영화를 보는 것을 부모님이 그냥 두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갈망이 생겼던 것 같다. 얼핏 얼핏 봤던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의 어떤 장면과 음악이 뇌리에 박혔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도 좋아했다. <레이더스>와 <인디아나 존스: 마궁의 사원>은 시리즈인 줄도 모르고 봤다. 굉장히 비슷한데 둘 다 재밌다고 생각했다. (웃음) 고3 때까지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문제집 구석에 “자기의 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격언이 씌어 있는 것을 본 순간 연기를 전공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실기 준비를 위해 연기 학원을 알아봤고,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생각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결국 허락을 받았다.

- 학창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나. 보통 연기과는 끼 있는 학생들이 지원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 고3 때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연기과를 지망한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다른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내 뒤통수를 치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했다. 친구들도 내가 예체능쪽을 지망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연기과를 비하는 줄은 몰랐다. 그냥 장난으로 골프를 전공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반 아이들은 오히려 그 말을 믿었다. (웃음) 나중에 내가 배우가 될 줄 몰랐다고들 할 정도로 그다지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졸업 후 연극보다는 영상 매체 위주로 작업했다.

= 영화 학교에도 연기 전공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정원이 훨씬 적었다. 그리고 연기를 하려면 연극을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웃음) 대학에서 연극 작업을 시작했고 졸업 후에도 극단에서 운영하는 연기 학교에서 경험을 쌓기도 했다. 대학로 연극배우들을 보면 영상 작업과 병행하는 경우도 많았고 송강호 선배님 같은 케이스도 많아지던 시기였는데, 왠지 나는 연극과 영상을 같이하기 는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원래 관심 있던 영상 매체를 좀더 적극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단편영화 중심으로 작업했다.

- 초기작 중 <알 포인트>에서 귀신에 빙의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현장은 어땠나.

= 단편영화 작업을 같이했던 감독이 <알 포인트> 연출부로 들어가면서 오디션을 권유했다. 촬영이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우리는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시사회날까지도 “이게 무서울까?” 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웃음) 캄보디아 로케이션 촬영을 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무척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후에도 한국영화아카데미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작품들을 몇편 찍으면서 영화 연기를 경험했다. 연상호 감독의 초기 단편 <지옥: 두개의 삶>도 어떻게 인연이 닿아서 내레이션을 하게 됐는데, 나보다 연상호 감독이 원래 했던 내레이션이 훨씬 잘 어울리고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웃음)

- 그런 경험들이 배우로서 역량을 쌓고 태도를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준 것 같나.

= 현장에서 쓸데없이 화내지 말자는 것을 배웠다. (웃음) 중요한 것은 소통이지 내 분풀이가 아니다. 그래야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영화는 함께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배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면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다.

- 대중에게 배우의 얼굴이 각인되기 시작한 분기점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다. 그 이전에 무명 생활이 꽤 긴 편이었는데 어떻게 그 시절을 버텼는지.

= 특별히 버티지 않았다. 그 사이사이에 연극이나 영화 작업에 집중했고, 작품이 없을 때는 그냥 다른 작품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딱히 걱정을 하지도 않았고, 걱정은 주변 사람들의 몫이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오랜 기간을 사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하다. (웃음) 만약 앞으로 10년을 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계속 연기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배우라는 직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수 있느냐고 했을 때, 그러기는 어려운 삶이다. 내가 너무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다면 금방 지쳤을 수도 있다. 나는 굉장히 평범하고 짜증도 잘 내는 성격인데, 그래서 일이 잘 안 풀려도 ‘어떡해~. 그냥 해야지 뭐’ 하고 지나갈 수 있던 게 아닐까 싶다.

- <도깨비>의 “파국이다”, <SKY 캐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 같은 대사는 지금까지 회자된다. 대중에게 각인되는 키워드를 남긴다는 건 그만큼 해당 신에서 연기를 인상적으로 했다는 의미다.

= 오랫동안 이야기되는 신을 만들어내겠다고 예상하며 작업하진 않는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고 난 후 인상적인 장면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대사의 임팩트는 대본과 연출의 영향을 많이 받고, 나도 그냥 대본에 충실하게 연기한다. <도깨비>에서 그 신을 찍을 때 한번은 “파멸이다”라고 잘못 말해서 다시 테이크를 갔던 기억이 난다. 이게 얼마나 한방이 있는 대사인지 특별히 의식하기보다는 다른 장면을 찍을 때처럼 임했고, 그래서 대사를 잠깐 헷갈리기도 한 것이다. 배우의 몫은 재미있게 조직된 대본이 잘 구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뿐이다.

-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서 레드 제플린, 엔리코 마샤스, 비틀스, 퀸 등의 LP를 가져왔던 모습이 기억난다. 올드 팝을 좋아하나.

= 우연히 선물받은 LP가 몇장 있었다. 턴테이블이 있으니 소장하고 있는 LP를 가져오면 음악을 틀 수 있다는 말에 가져간 것이다. 내가 중학생일 때 나온 80년대 팝음악을 좋아한다. 그 당시에 찾아 듣진 않았고 나중에 성인이 된 후 좋아하게 된 경우다.

- 기본적으로 80년대 영화나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특별한 취향을 갖고 굉장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남들처럼 뉴진스나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는다. (웃음) <탑건>도 <탑건: 매버릭>이 개봉했을 때 봤고, <스타워즈> 시리즈도 성인이 된 후에 감상했다. 다만 그런 기억은 난다. 10대 시절 같은 반 친구가 <스타워즈> 관련 피규어를 갖고 있었다. 나는 제목만 들었던 영화라 그 피규어가 무척 신비로운 물건처럼 보였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과 욕구가 나중에 내가 연기하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 이미 <닥터 차정숙> 촬영이 끝난 것으로 안다. 실제 결말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는 서인호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기를 바라나.

= 잘못했기 때문에 더이상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론은 아닌 것 같다. 승희와 정숙에게는 각각 자식이 있다. 그들과 인연을 아예 끊기보다는 잘못한 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닥터 차정숙>은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이 꽤 있는 드라마다. 이 작가라면 어떻게 이야기를 끝맺을지 상상해보고 실제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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